투명하게 사라져버린 새를 새라고 부를 수 있을까?- P7
모든 별은 태어나서 존재하다가 죽는다. 그것이 별의 생리이자 운명이다. 인간의 몸을 이루는 모든 물질은 별로부터 았다. 별들과 같은 생리와 운명을 배고 태어난 인간은 별들과 마찬가지로 존재하다가 죽는다. 다른 것은 생애의 길이뿐이다.- P17
나에게 중요한 건 그리는 순간이니까. 그게 전부니까.- P28
내 어머니의 손을 닮았던 삼촌의 손을 기억한다. 인주의 집에서 처음 삼촌을 만난 날, 저런 손을 가진 남자도 있구나, 생각하며 놀랐다. 먹이 묻은 손, 음식을 만드는 손, 뜻 없이 인주의 머리를 쓰다듬는 손, 살결이 거칠어 보이는 손, 푸릇한 멍들이 손등에 앉은 손, 무언가를 많이 참아본 사람의 손, 불현듯 내 손을 뻗어 크기와 온기를 재보고 싶던 그 손.- P49
난 말이지, 정회야, 사랑한다는 말을 들으면 이상한 기분이 들어.- P52
나를 사랑한다는 그 어떤 남자의 말은, 자신을 사랑해달라는 말일 수도 있고, 나를 오해하고 있다는 말일 수도 있고, 내가 그를 위해 많은 걸 버려주길 바란다는 말일 수도 있지. 단순히 나를 소유하고 싶거나, 심지어 나를 자기 몸에 맞게 구부려서, 그 변형된 형태를 갖고 싶다는 뜻일 수도 있고, 자신의 무서운 공허나 외로움을 틀어 막아달라는 말일수도 있어.- P52
그러니까. 누군가 나를 사랑한다고 말할 때, 내가 처음 느끼는 감정은 공포야.- P53
당신에 대한 기억은 어떻게도 단언할 수 없다. 모른다고밖에는, 모든 것이 덩어리로 다기왔다고 밖에는. 스며들고 빈저갔다고밖에는. 당신의 그림속에 떨고 있던 모세혈관들치럼.- P63
누군가의 죽음이 한번 뚫고 나간 삶의 구멍들은 어떤 노력으로도 되살아나지 않는다는 것을. 차라리 그 사라진 부분을 오랫동안 들여다보아 익숙해지는 편이 낫다는 것을 그때 나는 몰랐다. 헤아릴 수 없는 시간을 그것으로부터 떨어져나오기 위해 달아나고, 실제로 까마특히 떨어져서 평생을 살아간다 해도, 뚫고 나간 자리는 여전히 뚫려있으리란 것을, 다시는 감쪽같이 오므리들 수 없으리란 것을 몰랐다.- P64
이 상황의 모든 것이 이상한 비현실감을 띠고 물러서는 것을 나는 느낀다. 그가 체머리를 떨며 담배에 불을 붙이는 불과 몇 초의 시간동안 깨닫는다. 두렵지 않다는 것을. 내 삶이 얼마나 헐벗어 있었는지를. 잃거나 부서질 것을 겁낼 어떤 귀중한 것도 가지고 있지 않다는 사실을.- P117
확신할 수 있는 것 따윈 없어
확신할 수 있는 건 모두 죽었어. 썩어서 사라졌어.- P144
한번도 종교를 가져본 적 없지만, 알 수 없는 누군가에게 기도해본 적은 있습니다. 가장 많이, 간절하게 기도한 내용은 죽게 해달라는 것이었습니다. 기도를 들이주는 누군가가 정말 존재했다면 난 이미 여러번 죽었을 겁니다. 지금 내가 살아 있다는 건, 그때마다 내가 그만큼 더 강하게 살아 있길 택했다는 걸 뜻합니다. 이건 말장난이 아닙니다.- P146
내가 아픈 곳은 달의 뒷면 같은 데에요. 피 흘리는 곳도, 아무는 곳도, 짓무르고 덧나는 곳, 씩어가는 곳도 거기에요. 당신에게도, 누구에게도... 나 자신에게도 보이지 않아요.- P21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