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티고네는 길에 버려진 폴뤼네이케스의 시신을 흙으로 덮고 장사지내기 위해 목숨을 건다. 고대의 비극이나 서사시에서는 시신이 훼손되는 것을 막기 위해 희생을 치르고 찾아오는 것을 볼 수 있다. 프리아모스는 헥토르의 시신을 찾기 위해 아킬레우스에게 고개를 숙인다. 성경에는 먼 거리를 밤새도록 달려가 사울의 시신을 찾아왔다는 기브아 사람들 이야기도 있다. 그들은 왜 목숨을 걸고 시신을 구했을까? 인간의 육체와 죽음 그리고 사후(死後)에 대한 사람들의 믿음이 있기 때문일 것이다. 육체를 썩고 분해되어 기본적인 물질로 환원되는 것으로만 바라보지 않기 때문이다. 특별히 사후세계나 부활과 관련된 특별한 신앙이 없더라도, 생전에 함께 하고 사랑했던 존재의 틀(혹은 그릇)을 안타깝고 귀하게 여기기 때문일 것이다. 아끼던 물건이 그 기능을 상실했다고 쉽게 함부로 버리지 않는데, 하물며 사람의 육신이지 않은가.
평생을 기억상실인 채로 살았던 딩즈타오는 남편의 죽음 앞에서 “연매장은 안돼!”라고 외친다. 그리고 죽음을 앞두고도 “연매장되기 싫어!”라는 말을 반복한다. 연매장이란 시신을 관에 담거나 시신을 감싸는 어떤 것도 없이 매장하는 것을 의미한다. 여기에는 학살, 혹은 예를 갖출만한 여력이 없는 극단적 상황을 내포한다. 학살은 시체들을 묻고, 시간은 그들을 발굴한다.
1950년대 초 중국 공산당은 지주(地主) 계급의 토지를 무상 몰수하여 빈농에게 분배하는 대규모 토지 재분배 정책인 토지개혁을 한다. 이 과정에서 수백만 명의 지주가 학살되거나 숙청되었다. 딩즈타오는 이때 가족과 재산을 다 잃고 혼자 살아남아서 강에서 구조된 여성이다. 그녀의 아들 칭린은 아버지의 일기, 기억을 잃은 어머니의 분절된 말들, 직장상사인 류샤오찬의 아버지 류진위안의 기억을 통해 그들의 인연과 그들이 겪은 시대적 아픔을 알게 되고, 어머니가 상실한 기억의 진실과 고통의 근원 가까이에 다다른다. 그러나 아버지의 유언처럼 그 진실을 끝까지 파헤치지 않고 덮어두려 한다.
“칭린은 알기 싫은 일을 알려 하지 않는 것도 강함의 또 다른 방식이라고 생각했다. 긴 시간이 진실의 모든 것을 연매장 했다. 설령 안다고 해도, 그게 진실의 모든 것이라고 어떻게 알 수 있겠는가?(432p)”
그 진실을 추적해 쓰는 것은 칭린의 친구 룽중륭이 한다. 칭린은 진실을 알고 싶어하지 않지만, 룽중륭은 싼즈탕 지역과 그 장원과 사건을 추적해서 쓴다. 칭린은 어머니의 과거와 고통의 진실이 매장된 채로 모든 것이 풍화되기를 바랐지만, 룽중륭은 역사는 진실이 필요하다고 말한다. “누군가는 망각을 선택하고 누군가는 기록을 선택해. 우리는 각자의 선택에 따라 살아가면 되는 거야.(444p)”라고 말한다. 칭린은 냉소하며 생각한다. 진실이 어떻게 언어와 글로 표현될 수 있겠느냐고, 세상의 어떤 일도 진정한 진실을 가질 수 없다고….
작가가 이 시대 토지개혁과 관련된 개인적 경험을 듣고 ‘연매장’이라는 말에 사로잡혔다고 한다. 이 단어는 시대적 비참을 품고 있다. 우리의 역사에도 수많은 연매장이 있고, 진실이 묻혀 있는 평토장 무덤들이 있다. 이 땅에는 여전히 감자를 먹지 못하는 많은 순이 삼촌들이 있고, 멸치도 못 먹는 유가족들이 있다. 자신의 손으로 묻은 가족들과 죄의식을 기억의 심연에 매장한 딩쯔타오처럼 침묵으로 아픔을 묻고 침묵하도록 강요받았던 사람들이 있다.
칭린이 진실을 밝히길 거부한 이유는 무엇일까? 차라리 알려하지 않는 것이 강함의 표현이라는 것에 동의할 수 있나? 칭린과 룽중륭의 차이는 무엇일까? 사실, 칭린의 태도에 나는 조금 의아했다. 알지 않으려 하는 게 강함의 표현이라고? 자라면서 알고 있던 부모의 정체가 다르다는 사실은 그의 삶을 흔드는 것일 수 있다. 아버지와 어머니가 감춘 그들의 고통에 공감하고 아픔을 느끼지만 그는 현실을 충실히 살아가기로 결정한다. 중국인들이 문화혁명과 같은 부조리한 역사를 대하는 방식에서도 같은 태도를 본다. 과거의 역사를 대하는 그런 방식이 경직되어 있기 때문일 수도, 유물론적이고 실용적이 그들 나름의 태도 때문일 수도 있다는 생각을 했다. 칭린에게서는 진실을 완벽히 밝히는 데는 한계가 있다는 패배의식도 엿보인다. 그러나 진실에 연루되어 있는 칭린보다는 자유로운 룽중륭은 연구자와 작가로서 탐사를 계속한다. 작가는 칭린을 이해하는 듯 쓰고 있지만, 사실 그의 태도에 완전히 동의하지는 않을지도 모르겠다. 그러기에 룽중륭을 등장시키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아마도 비중이 적은 제3자로서의 룽중륭은 작가 자신이라고 짐작된다. 룽중륭의 등장은 기록자로서 무엇을 해야 할 지 작가 자신에게 확인시키는 지점이 아닐까 한다.
호메로스나 그리스 비극, 특히 헤로도토스의 『역사』를 읽다보면 사람들의 주검에 대한 예(禮)는 시대, 지역, 문화마다 조금씩 상이하나, 그것은 그 사회에서 가장 고귀하다고 생각되는 방식으로 이루어졌음을 깨닫게 된다. 불과 몇 십 년 전 우리사회에서 화장은 선호하는 장례방식은 아니었다는 것을 고려해보면, 시대의 변화와 문화에 따라 죽음을 처리하는 방식도 달라졌음을 알게 된다. 그럼에도 변하지 않는 사실은 훼손되고 함부로 매장된 육체는 경악을 일으킨다는 것이다. 우리는 여전히 경악하고 있지 않은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