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분히 성경비평적 관점에서 쓰인 요한복음 입문서다. 책은 크게 세 부분으로 나뉘는데, 첫 번째 부분은 요한복음의 특징과 저자, 저작 연대와 배경 등 개론을 다루고, 2부에서는 본문 자체를 살피면서 주요 주제들을 제시한다. 그리고 마지막 3부는 요한복음에 관한 현대 (자유주의) 신학자들의 연구 결과를 간략히 살피면서, 요한복음을 읽어나갈 때 집중해야 할 부분에 관해 짚어주는 내용을 담고 있다.
요한복음은 이른바 비슷한 관점을 지닌 나머지 세 복음서들(공관복음)과 사뭇 다른 느낌을 준다. 전체적인 얼개와 사건들은 유사해 보이지만, 자세히 읽다 보면 이질감이 많이 느껴진다. 무엇보다 요한복음의 그 인상적인 시작구부터가 우리의 기억에 오래 남는다. “태초에 말씀이 있었다.” 창세기의 첫 구절을 떠올리게 하는 이 구절은 요한복음이 예수님의 언행을 정리하는 것뿐 아니라 그 이상의 목적을 지니고 있었음을 짐작케 만든다.
덕분에 많은 학자들도 요한복음에 관심을 갖고 연구를 진행했고, 다양한 주장들을 해왔다. 특별히 계몽주의 시대 이후 이성만이 진리추구의 유일한 길이요 빛이라고 생각했던 이들은 전통적으로 이어져 온 견해들을 무시하고 깨뜨리는 것이 본인의 학문적 수준의 높음을 드러내는 증표인양 여기기 시작했다. 오늘날 신학은 사실상 이런 부류의 결과물들을 모아 놓은 것에 가깝다.

이 책이 가지고 있는 비평적 관점 또한 비슷하다. 물론 책의 2부나 3부 말미를 읽다 보면 저자의 관심사가 이른바 신앙적인 것에 닿아있다는 게 드러나긴 하지만, 기본적으로 요한복음을 하나의 문학적 창작물로 보고, 여기에 나오는 예수의 말 중 상당 부분을 실제로 한 말이 아닌 “자신의 신학 견해와 관심에 따라 제시한 글”(33)이라고 단언한다. 당연히 요한복음에 담겨 있는 예수의 행적을 “실제 사건과 거리가 먼”(161) 것으로 생각하거나, 요한복음의 서문조차 “역사적 사실을 기술”한 것이라기보다는 그저 “예수의 정체성과 존엄성을 표현”(168)한 것일 뿐이라고 본다.
애초에 요한복음의 저자부터가 누구인지에 관해서도 이 책의 저자는 다양한 의심만 뿌려둔다. 전통적으로 인정되어 오던 사도 요한이 아닐 가능성을 강하게 제기하면서, 그와 다른 “장로 요한” 설을 살짝 띄우다가, 결국 소위 특정한 신학적 견해를 가진 공동체가 자신들의 신학을 반영해 쓴 문서라는 식의 결론으로 기운다.
사실 이런 식의 접근은 딱히 새로울 것도 없고, 더 나아진 것도 없어 보인다. 특히 요한복음의 배경을 재구성하는 과정은 이런 접근의 한계를 여실히 보여주는데, 저자는 본문 속 다양한 “힌트”들을 모아 그 상황을 재구성하는데, 그렇게 재구성한 결과물로 다시 본문을 해석하는 순환논리로 아주 자연스럽게 미끄러져 들어간다. 문제는 그 “힌트”들이 전혀 다른 모습으로 재구성될 수도 있다는 점일 텐데 이에 대한 검토는 별로 없다.
저자는 “로고스 성육신 개념이 예수의 잉태나 탄생과 무관하며, 동정녀 탄생과도 아무런 관련이 없”(108)다고, 공관복음서의 예수의 출생 기사가 실제 일어난 일과는 상관없는 꾸며낸 이야기인 것처럼 설명하면서도, 그러면 정작 성육신이 어떻게 이루어졌는지에 대해서는 별 설명이 없다.
또, 조금은 의아한 건, 지금까지 언급한 이런 관점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예수를 따르던 이들 중 일부”를 포함한 “더 큰 집단까지 광범위하게 부활 체험을” 했고(159), 그것이 초기 기독교가 발생하고 성장하는 데 중요했을 것이라고 말한다는 부분이다. 동정년 마리아가 성령으로 잉태한 것은 믿을 수 없지만, 부활은 믿을 수 있다는 것일까? 아니면 “부활 체험”은 실제로 일어난 부활에 대한 목격이 아닌 다른 신학적 해석이 필요한 일을 가리키는 것일까?

근 1년 간 매일 성경을 읽는 모임을 운영 중이다. 참가자 중 한 명이 자주 아주 근본적이면서 강한 질문을 던지곤 하는데, 자신을 신앙을 발견하고 싶은 초심자라고 소개하는 그의 질문은 꽤나 묵직할 때가 있다. 신앙생활을 오래 하다보면, 그리고 신학이라는 “놀음”에 지나치게 깊이 빠져있다 보면 시야가 좁아지는 경우가 종종 있다.
만약 이 책의 논의를 따른다면, 그러니까 요한복음은 누가 쓴 책인지 확실치 않고, 그 안에 담겨 있는 내용은 실제 있었던 일과도 상관이 없다면, 이 책에 권위를 부여하는 것은 성령이라는 저자의 주장(78)은 어떤 의미가 있을까? 이 책이 성령을 따라 기록되었다는 건 누가, 어떻게 확인해 줄 수 있다는 말일까. 그저 책 속에 담긴 사상이 훌륭하기 때문에(그 훌륭하다는 것은 무슨 기준에 따라 그렇다는 것인지) 그렇게 느끼는 것은 아닌가? 결국 책의 신뢰성, 심지어 영감성까지도 그것을 읽는 “나” 중심으로 돌아가는 지극히 주체성에 대한 현대주의적 신봉은 아닌가 하는 의심이 든다.
책의 구성은 나름 알차다. 현대의 비평적 관점을 잘 정리해 냈고, 그 과정에서 기독교 신앙의 자리를 만들려는 노력도 보인다. 다만 그 논리 과정이 어떻게 일관성을 지닐 수 있는지는 잘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