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on Mueck

En Garde

Until 2 April 2025

Ely House, London


런던에서 론 뮤익(Ron Mueck)의 전시가 열리고 있다. 직접 다녀온 것은 아니지만, 오늘 받아본 타데우스 로팍(Thaddaeus Ropac) 갤러리의 소식지에서 언급되어 있어 가져와 봤다. 마침 한 달여 후 4월에 국립현대미술관에서도 론 뮤익 개인전이 열릴 예정이다.


론 뮤익

2025-04-11 ~ 2025-07-13

서울 지하1층, 5, 6전시실

국립현대미술관, 프랑스 까르띠에 현대미술재단

30여 점

서울 지하1층, 5, 6전시실


다음 달 열릴 MMCA 전시에 전시될 론 뮤익 작품은 30여 점이라고 한다. 국립현대미술관 내 5, 6전시실을 모두 활용한다는데, 작품 수 대비 상당한 공간을 할애하는 것이다. 같은 전시실에서 얼마 전 열린 <접속하는 몸: 아시아 여성 미술가들> 전시는 130여 점을 선보였으니, 새로 열릴 호주 조각가의 전시는 공간의 밀도를 낮추고, 거대한 조형물이 만들어낼 여백과 개방감을 극대화하려는 의도가 엿보인다. 작품 수가 이전 대비 4분의 일에도 미치지 않는 4월의 론 뮤익전은 단순히 작품 수에서만이 아니라 공간 활용 면에서도 대조적인 인상을 줄 것 같다.


공공성과 대중성을 동시에 지향하며 동시대 시각문화의 담론을 선도하는 국공립미술관과 자본주의 논리를 적극 수용해 작품의 투자가치를 강조하는 유력 갤러리에서 동시기에 전시를 여는 작가는 드물다. 이는 단순한 우연이 아니라, 작품이 지닌 미학사조적 의미가 실험성과 상업성을 동시에 설득했다는 방증이다. 컬렉터와 미술 기관, 나아가 미술사학계의 공통된 신뢰를 얻는 일은 결코 쉽지 않다. MMCA와 타데우스로팍에 동시에 전시할 수 있는 작가의 위치가 이미 하나의 유의미한 좌표로 확립되었다고 본다. 그 좌표를 의도적으로 우회해서 오늘날의 미술을 이해하려는 시도는 자연스럽지 않다.


그런데 이때 국공립의 공공성과 갤러리의 시장성은 물과 기름처럼 유화되기 힘들어 전시 시기나 홍보 방식이 기존의 관례에서 조금만 벗어나도 논란의 대상이 되는 경우가 많다. 갤러리는 작품 판매가 주목적이고, 국공립미술관은 예술 진흥과 교육을 목표로 하기에 그 목적 자체가 상이하기 때문이다. 


작년 프리즈, 키아프 즈음해서 읽었던 한겨레 기사에서는 비판적인 논조로 타데우스 로팍과 MMCA의 전시 시기에 대해 논한 적 있다. 주요 미술관과 유력 화랑이 특정 작가의 작품을 미리 홍보하고, 이를 통해 아트페어 시점에 맞춰 판촉 전략을 구사하는 방식이 문제라는 것이다. 다시 말해 국공립 미술관이 작품 판매의 대리 홍보를 해준 것이 아니냐는 뜻이다.


https://www.hani.co.kr/arti/culture/music/1157653.html


서구 유명 화랑 ‘들러리 노릇’ 여전한 한국 미술관

유력 작가들 작품 기획전 형식 미리 홍보

프리즈·키아프 ‘해외 자본 마케팅 전장’돼

노형석기자

수정 2024-09-09 18:42


(전반부 생략)


주식 시장의 ‘작전’이나 짜고 치는 ‘고스톱’과 어떻게 다른가.


지난 4~8일 서울 삼성동 코엑스에서 국내외 미술계의 관심을 받으며 나란히 열린 국제미술품장터(아트페어) 프리즈 서울과 키아프 행사 기간에 한국 미술관들은 서구 유력 화랑들의 전속작가를 대놓고 홍보하는 무대나 배경으로 들러리 노릇을 했다.


단적인 예로, 유럽 화랑인 타데우스 로팍은 프리즈 서울 개막 전날인 3일 중견 개념미술가 이강소씨의 전속작가 계약 사실을 담은 보도자료를 배포하면서, 국립현대미술관이 아직 공식 발표하지 않은 그의 11월 국립현대미술관 개인전과 2일부터 시작한 일부 출품작 팝업 전시 소식까지 알렸다.


국가미술관을 따돌리고 일방적으로 전시 사실을 자신들과 연관된 프로젝트처럼 포장한 것이다. 미술인들 사이에 뒷말이 일자 이 화랑은 다음날 정정 보도자료를 돌려, 국립현대미술관 전시는 자신들과 협업한 것이 아니라고 해명했고, 국립현대미술관 쪽은 사흘이 지난 6일에야 이 작가의 개인전과 출품작 팝업 전시 소식을 뒤늦게 알렸다.


서구 일류급 화랑인 하우저앤워스에서 최근 의욕적으로 마케팅 중인 스위스 40대 작가 니콜라스 파티가 지난달 29일 시작한 호암미술관 전시회도 개운치 않은 뒷맛을 남겼다.


(중략)


이런 식으로 미술관과 유력 화랑이 행사 수년 전부터 아트페어 시점을 예상하고 판촉하려는 유력 작가의 작품들을 기획전 형식으로 미리 홍보하는 것은 서구에서도 종종 있어왔다. 하지만 올해 프리즈·키아프는 유난히 정도가 심하다는 평이다. 이는 다른 말로 그만큼 한국 미술시장이 서구 자본의 본격적인 마케팅 전장으로 인지된다는 뜻이기도 하다.



이러한 비판적 시각이 있는 한편, 호의적 시각에서는 국공립미술관과 갤러리가 어렵게 회합해 공존을 도모했다고도 해석할 수 있다. 말라 죽어가는 홍콩 미술시장을 대체하려는 (작년 여름에 홍콩에 갔는데 opera gallery는 철수했다) 한국 미술시장의 생존 전략으로 해석할 수도 있다. 서구 자본이 어차피 개입할 것이라면 한국을 새로운 마케팅 전장으로 삼아 낙수효과를 바라는 것이다. 글래드 스톤의 아니카 이 작품이 리움에서도 대대적으로 전시되었고 이외에도 국공립미술관-갤러리에 동시에 전시되는 작가는 이강소 등 여럿이 있다. 이를 보아 단순한 일시적 현상이 아니라 구조적 변화로 자리 잡아가고 있는 듯하다.


이러한 흐름을 국내 시각에서 보면 논란의 여지가 많지만, 국제적 시각에서는 문제가 되지 않는 경우가 많다. 이는 대기업 경영자와 해당 기업노동자의 입장 차이와도 유사하다. 각자 입장에서 합리적인 논리가 있는데, 이 입장차가 어떤 예민한 사안에서는 충돌하는 것을 자주 본다. 예컨대, 삼성이나 현대와 같은 글로벌 기업들은 한국 시장을 넘어 세계적인 경영 전략을 구상하면서 자본과 브랜드의 국제적 입지를 고려할 수밖에 없다. 외국의 경쟁자들과 동일한 글로벌 시장에서 치열하게 경쟁하는 과정에서 국내 공장의 상품 생산을 확대하려 하다 보니 근로자의 과로 문제가 발생하기도 한다. 최근 반도체 업계에서 논의되는 52시간 근로제도 역시 이런 맥락에서 나온 이야기이다. 그러나 국내 노동자의 입장에서는 당장 인플레이션을 버텨낼 자신의 임금상승, 근로 환경, 워라밸, 복지 등의 현실적 문제가 우선시될 수밖에 없다. 


비슷한 맥락에서 미술 시장에서도 한국미술의 국제적 가치를 홍보해야하는 문제와, 국내 미술의 진흥과 공공성에 대한 문제가 반드시 충돌하게 된다. 나는 최근의 동시 전시를 통한 홍보 전략 맥시마이징 시도들은 국내 기관과 갤러리 관계자의 이해관계가 일시적으로 합치되어 상호 협력을 도모한 사례라고 읽었다. 사안의 전체를 고르게 보려면 논조가 선명한 여러 정보소스를 접할 필요가 있다. 그래야 한 논리에 함몰되지 않고 균형잡힌 시각을 볼 수 있다. 최악은 어떠한 논리와 시각도 없는 무색무취의 글이다. 그런 글만 섭취하다보면 지적 영양실조에 걸리기 십상이다. 


내가 가장 최고로 건강한 지적 인간은 아니라고 생각하지만, 그나마 지적 영양실조를 면하면서 사람답게 살기 위해 나름의 비법을 개발했다. 신문, 책, 전시, 영화다. 트렌드용 일회성 소모용 신문, 깊고 짙고 넓고 오랜 책, 가서 보고 읽는 전시, 가서 앉아 보는 영화. 나는 <조선일보>, <한국일보>, <한겨레>, The Korea Times, 그리고 JoongAng Daily+The New York Times(International)까지 총 다섯 종류의 신문을 구독한다. 이외에 유투브로 이런 저런 외신을 본다. 광고가 너무 많아 인터넷 기사는 잘 읽히지 않는다. 종이 신문이어야 몰입되고, 알고리즘을 타지 않고 다양한 정보를 접할 수 있다. 한 신문을 읽을 때도 그렇거니와, 신문의 종류에 있어서도 다양한 신문사의 접함으로써 폭넓은 시각과 편향되지 않은 정보를 통해 균형 잡힌 관점을 형성할 수 있다. 그래서 저런 신문 조합이 좌우 스펙트럼과 로컬-글로벌의 균형을 유지하는 데 최적이라 판단한다. 물론 그외에도 좋은 자원들은 많지만, 그 이상의 신문을 추가하기에는 나의 시간이 부족하다. 신문 외에도 하루에 책 한 권, 전시 몇 군데 , 영화 1-2편을 챙겨보는 것이 최대치다. 물론 전시 일정에 따라 하루에 10곳 이상을 몰아보기도 하고, 해외나 지방으로 이동해야 하는 경우엔 책이나 영화를 줄여 균형을 맞춘다. 그래서 정말 매일이라기 보다는 평균이라고 생각해도 되겠다. 그런데 신문만큼은 그날 읽지 않으면 쌓이게 마련, 쌓이면 안 읽고 버린게 된다. 다음 날은 또 다른 신문이 내일의 나를 기다리고 있기 때문. 일정이 밀려버리면 과거 신문은 과감히 포기하고, 다음 날의 신문을 읽는다. 매일 자정까지 데드라인이 있는 읽기 숙제인 셈이다. 


이동 중에는 가급적 대중교통을 이용하는데 신문을 읽기 위함이다. 책은 부피가 크고 무거워 이동하면서 읽기에는 불편하고 장시간의 몰입이 필요해서 이동 중에 집중도 잘 안된다. 주머니에 쏙 들어가는 문고본이라면 괜찮겠지만, 한국에서는 이와나미 쇼텐(岩波書店) 문고처럼 작고 가벼운 판형이 거의 없다. 한국출판시장의 구조상 소장용을 두고 만들어진 것 같다. 해리포터를 생각하면 쉽게 이해된다. 같은 책의 다른 나라 번역본 비해 크고 무겁고, 휴대용 문고판이 없다. 


이와나미 쇼텐 문고본을 번역한 한국 책조차 원래보다 크기가 크데, 이는 지나치게 작을 경우 판매가 저조하기 때문일 것이다. 지만지나 살림출판사 책도 있지만 장기불황 중인 요즘 출판시장에서는 잘 안 나오는 것 같다. 미국의 문고본이라고 하면 펭귄북스(Penguin Books)처럼 일상소비재로 리브랜딩해 비독서인구의 대중시장을 겨냥한 경우가 있는데, 무게는 가볍지만 일본 문고본처럼 주머니에 들어갈 수 있을만큼 크기가 작지 않다. 미국인들의 큰 체형과 손 크기를 생각하면 이해가 되는 부분이다. 그런데 펭귄은 종이 질이 신문과 비슷해 장기 보관하면 변색된다. 


문고본의 발달 여부는 교외 지역의 발달에 따른 대중교통망과 독서 대중의 절대적 규모와 관련이 깊다. 이동하면서도 줄 서서도 책을 읽을 사람들. 미국과 일본에는 있다. 한국에는 없다. 2009년 어느 날 지하철 10칸에서 책 읽는 사람을 세봤는데 10명이 안되었다. 그것은 객관적인 현실이고, 한탄하거나 비난의 대상이 아니다. 우리는 종이 대신 인터넷 스크린을 본다. 그러니 이와나미쇼텐, 카도카와 같은 문고본은 한국에서는 현재의 시장 구조상 활성화되기 어려운 형식으로 보인다. 


나는 문고본 대신 신문은 이동중 바로 읽고 내리는 정거장에서 버린다. 일종의 일회성 소모용 휴대용 책인 셈이다. 쓰레기통에도 도움된다. 보통 역사내 휴지통에는 흘러내리는 음료를 흡수하기 위해 신문을 아래 깔아두었다. 일본에 가면 일본신문을 사는데 로컬 광고가 상당히 많은 점과 이슈가 다양하지는 않지만 자세하고 깊이가 있다는 점이 특징이다. 이에 대한 생각의 실타래는 나중에 풀어보기로 하고..


다시 기사로 돌아와서, 론뮤익 타데우스 로팍-국립현대미술관 커넥션이 보이자 작년 한겨레 기사가 생각나서 가져와봤다가 이런 저런 잡소리를 했다. 커넥션에 대한 비판적 시각이 있는 반면, 나름 호의적인 평가를 해보자면 타데우스 로팍과 국립현대미술관이 동일한 시야를 공유한다고 볼 수도 있고, 현대미술에서 의미 있는 작가를 효과적으로 선별해낸다고 평가할 수도 있겠다. 결국 양측이 상호 홍보의 시너지를 얻는 구조라고 해석하는 것도 가능하다. 다양한 기사를 접하는 것이 사태의 여러 면모를 포착하는데 도움된다. 비판적 논조를 접했다고 해서 전시에 대한 기대가 줄어들거나 기관과 작가에 대한 호감이 감소하는 것은 아니다. 전시를 보는 것은 개별적인 경험이며, 특정한 해석이 감상의 절대적인 기준이 될 수 없기 때문이다. 


오히려 비판적 논조 일색이거나, 찬양 논조 일색인 한쪽으로 쏠린 시각이 더 부자연스러워서 경계심이 든다. 그리고 너무 가까이가도 안된다. 말하자면, 좌우전후 중간지점쯤에 있어야 대상이 잘 보인다. 비판-찬양 어느 한 측면으로 쏠려도 안되고, 너무 멀리가면 대상이 안 보여서 존재를 모르게 되고, 너무 가까이 가면 대상이 왜곡되고 불편해진다. 이게 무슨 말이냐?


업계 내부사정이나 작가의 개인사를 알면 방해가 된다는 뜻이다. 지나치게 가까이 들여다보면 불필요한 것들이 보이기 마련이다. 마치 연애 시절에는 상대의 장점만 보이다가, 결혼 후에는 단점이 부각되는 것처럼.


유명 창작자의 작품, 글을 좋아하다가도, 강연장에서 실제로 만나 그 인성에 실망한 경험이 여러 번 있었다. 이후 새로 나오는 작품마저도 매력을 잃어버리곤 했다. 누군지는 말하지 않는다. 그런 일련의 경험 이후 앞으로는 작가, 감독, 예술가, 교수 누구든 창작자와 개인적으로 알지 않고, 작품만 멀리서 감상하기로 마음을 먹었다. 그것이 창작물과 오래도록 관계를 유지하는 가장 현명한 방법이라고 믿는다. 특정 개인의 문제가 아니다. 熱은 멀리서 있어야 따뜻하고, 지나치게 가까이 다가가면 화상을 입는 이치와 같다. 적절한 거리의 미학은 창작자와 감상자 사이에서도 동일하게 적용된다. 유명인 역시 친분을 악용하는 사람들을 피하기 위해 점차 팬과의 대면활동을 줄여가기도 한다. 서로 서로 작품 자체에 집중하고 불필요한 관계 맺지 않는 중용의 도가 필요하다.


아무리 남편/아내를 사랑해도 모공까지 좋아할 수는 없다. 아무리 셀레브리티를 좋아해도 손톱 밑의 때를 좋아할 수는 없다. 그렇게 가까이서 보는 것은 아무런 도움되지 않는다. 그렇다고 너무 멀리 떨어져서 목소리도 들리지 않고 점처럼 보이면 무슨 소용인가. 지구 밖을 벗어난 우주선은 이제 지구의 자장과 주파수를 잃어버려 종국에는 존재마저 잊어버린다.


잡담을 끝내기전에 론 뮤익 타데우스 로팍 런던 전시 설명글 하나만 자세히 읽어보자. 좋은 화랑은 글을 잘 쓴다. 좋은 글이 작품의 부가가치를 더 올려주기 때문이다. 


https://ropac.net/online-exhibitions/190-ron-mueck-en-garde/

ⓒ Thaddaeus Ropac, Ron Mueck


A colossal trio of black dogs, standing almost three metres tall with ears pricked and hackles raised, reveals Ron Mueck’s latest sculptural developments. Conceived as a single edition for his third solo exhibition at the Fondation Cartier, Paris (2023), which then travelled to Triennale Milano and Museum Voorlinden, Wassenaar, Netherlands (2023-24), En Garde (2023) now makes its UK debut at Thaddaeus Ropac, London. The work marks a decisive shift in the internationally acclaimed artist's practice. Paring back meticulous surface detail in favour of pure sculptural form, poise and tension, Mueck confronts the viewer with an immediate and powerful encounter.


여기서 첫 문장과 마지막 문장만 뜯어보자. 한 문단 안에 시각적 분석-작가 소개-작품 의의를 매우 효과적으로 녹여냈다. 영작의 최고봉이라 배울 점이 많다. 구글 번역기로 번역을 돌려보면 이렇다. 일반적으로 번역할 때 이렇다를 보여주기 위해 번역기를 돌린다.


첫 문장 : 키가 거의 3m에 달하고 귀를 세우고 털을 세운 거대한 검은 개 3마리는 론 뮤크의 최신 조각적 발전을 보여줍니다.


마지막 : 순수한 조각적 형태, 균형과 긴장을 위해 세심한 표면 디테일을 줄인 뮤크는 시청자에게 즉각적이고 강력한 만남을 선사합니다.


일단, 설명없이 저 사진을 보고 나면 누구나 (1) 개 (2) 세 마리 (3) 검은색 (4) 크다를 떠올릴 것이다.


그리고 대부분 우리말로 써보라고 하면 "크고 검은 개 세 마리가 있다"라고 할 것이다. 너도나도, 남녀노소.


영어로 이 표현을 배합하면


colossal trio of black dogs

거대한 삼인조 of 검은 개들

짧고 압축적으로 명사화해서 주어로 넣었다. three black dogs가 아니라 트리오라고 표현해서 이 세 마리가 한 세트라는 것을 나타내고, big, grand 대신 콜로세움에서 유래한 colossal을 넣어서, 같은 표현이지만 다른 뉘앙스를 넣었다. 이런 단어선택은 이후 'powerful encounter' 강력한 접촉, 즉, 작품과 만날 때 느끼는 강력한 인상과 연결된다. big을 넣었으면 powerful까지 연결되지 않는다. 같은 의미를 담되, 내가 전하고자 하는 뉘앙스에 맞춰 동의어를 쓰는 영미권 작문 기법이다.



놀라운 점은 그 다음 표현이다. 명사 주어(개 세 마리) - 동사 술어(드러낸다) 사이에 ving 분사를 삽입해 작품에 대한 표현을 가미했다.


standing almost three metres tall with ears pricked and hackles raised, 

키가 거의 3m에 달하고 귀를 세우고 털을 세운


한국어로 이 부분을 번역할 때는 앞의 구글번역기가 한 것처럼 후치수식된 ving 분사구를 관형격처리해서 앞에 배치하는데 이럴 때 의미 전달 순서상 문제가 생긴다.


영어는 누가봐도 명사를 먼저 정박시키고, 그 다음 분사구로 추가적인 설명을 넣고, 그 다음에 술어로 뭐를 했다를 말하는 순서다.


그런데 한국어는 부수적인 설명이 먼저 나왔다가 주어가 나오니까 도대체 이게 뭘 말하는 것인지 핵심을 모르는 상태에서 부가적인 정보를 먼저 접한다. 그러니까 작품을 보고 검은 개 세 마리를 봤고 나서 설명을 읽었더니 "크고 검은 개 세 마리는"하고 바로 시작하는 것과 "키가 3m이고......어쩌구저쩌구 개 세마리" 주변 묘사를 다 듣고나서 대상이 무엇인지 파악하는데에는 큰 차이가 있다는 점이다. 언어는 선형적으로 구성되어 있어 앞에서 부터 읽어야하는데, 문단도 두괄식으로 써야 핵심을 전달하는데 유리하듯, 문장도 중요한 정보를 맨 앞에 배치하는 게 더 핵심적이다. 


그래서 구글번역기의 한글문장을 영어의 표현 순서대로 배치하고 우리말답게 다듬으면 이렇게 되겠다.


거대한 검은 개 3마리는 키가 거의 3m에 달하고 귀를 세우고 털을 세우고 있는데, 론 뮤크의 최신 조각적 발전을 보여줍니다.


다만 이렇게 출발어의 순서를 존중해줄 경우, ~데, ~며 같은 표현이 타령하듯 나오게 되는 점은 피할 수 없다.


구조와 단어도 살펴보자. 문장은 두 호흡으로 끊긴다.


standing almost three metres tall / with ears pricked and hackles raised, 

거의 3m에 달하고            /   귀를 세우고         털을 세운


 ving     부사 수사 양사 형용사 / with N  ved   and   N ved


구조가 명확하고 깔끔하여 읽기 편하다. 이때 with N ved는 과거분사를 전치해서 세워진 귀가 아니라, 귀가 세워졌고, 이렇게 해석한다. with ears (being) prickled = with ears, which have been prickled로 계속적 용법이기 때문이다. 


다음으로, 단어 선택이 매우 적절하고 현명하다.


귀를 세우다를 

(무서움· 화·흥분 등으로) (머리털이) 곤두서다[(몸이) 오싹하다]에 해당하는 prickle을 사용했고


털을 세우다를

hackle-raising 즉, 뒷머리가 쭈뼛이 서는, 무서운, 등골이 오싹한을 사용했다.


일단 라임도 prickle 프리클과 hackle 해클이 모음-ckl로 아주 리듬감 있고


그냥 세우다가 아니라 곤두서다, 오싹하다, 쭈뼛서다의 뉘앙스를 주어서 이 개 세 마리의 감정을 표현했다.


즉, 귀를 곤두세우고, 털이 쭈뼛세웠다, 라는 말이다. 그냥 '세웠다'에 비해 뉘앙스가 추가되어 더 풍부한 정보 및 감상자의 시각을 전달한다.


그러니 구글번역기의 표현을 다시 다듬어보면


첫 문장 : 거대한 검은 개 3마리는 키가 거의 3m에 귀를 곤두세우고 털을 쭈뼛세우고 있는데, 론 뮤크의 최근 조각적 발전을 보여줍니다.


가 되겠다.


그리고 다시 작품을 보면 조금 더 느껴지는 바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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