밤이었다. 여자는 친구들과 호프집에서 맥주를 한잔 마셨다. 그리고 일어나 집으로 향했다. 동네 입구에 도착했을 때, 누군가가 뒤에서 따라오는 걸 느꼈다. 남자였다. 여자는 걸음을 빨리했다. 남자의 걸음도 함께 빨라졌다. 열 걸음 너머에 그녀의 아파트가 보였다. 그녀는 뛰었다. 엘리베이터가 일층에 서 있었다. 그녀는 엘리베이터 열림 버튼을 누르고 안으로 들어간 뒤, 재빨리 닫힘 버튼을 눌렀다. 그때 남자가 엘리베이터 안으로 뛰어들어왔다. 그녀는 거의 소리를 지를 뻔했다. 핸드폰 키패드로 112를 눌렀다. 손이 떨렸다. 남자가 말했다.

"저기, 연락처 좀 알 수 있을까요?"

남자는 그녀가 너무 마음에 들어서 술집에서부터 따라왔다고 말했다. 중간에 말을 걸 틈이 없어서 여기까지 왔다고. 그녀는 고개를 저었다.

"안 돼요? 제가 마음에 안 드세요?"

남자가 말했다. 그녀의 집은 십오층이었고, 이제 겨우 오층이었다. 그녀는 숨이 막혔다. 남자는 키가 크지는 않았지만, 운동을 많이 한 사람처럼 팔뚝이 무척 굵었다. 단단해 보였다. 그녀는 더듬거리며 자신의 전화번호를 말했다. 남자가 씨익, 웃으며 들고 있던 핸드폰에 숫자를 입력했다. 그리고 통화 버튼을 눌렀다. 그녀의 핸드폰이 울렸다.

"지금 뜨는 번호가 제 번호예요."

남자가 말했다. 그녀는 아주 오랫동안 멍청한 여자들에 대해 들어왔다. 마음을 함부로 주는 여자들, 쉽게 승낙하는 여자들, 상황을 주도하지 못하고 끌려다니는 여자들. 그녀는 위험한 남자들보다 멍청한 여자들에 대한 경고를 더 많이 들어왔다. 쉽게 보이면 안 돼. 그건 네 값을 떨어뜨리는 일이야. 이제 십삼층이었다. 그녀는 남자에게 애써 미소를 지었다. 그래야 할 것 같았다. 남자가 말했다.

"정말 친절하시네요."

그리고 엘리베이터 문이 열렸다. 여자는 서둘러 내렸다. 남자는 따라 내리지 않았다. 마치 그게 굉장히 신사적인 태도라는 듯이. 예의를 아는 남자라는 걸 보여준다는 듯. 그녀에게 말했다. "조심히 들어가세요." 그리고 연락을 할 테니 꼭 받아달라고 했다. 그녀는 다시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숙였다. 남자는 엘리베이터 열림 버튼을 누르고 있었다. 그녀가 어디로 가는지 보려는 것 같았다. 그녀는 그에게서 최대한 시선을 떼지 않은 채, 그러니까 그가 거절당했다는 느낌을 받지 않도록 따뜻한 표정을 유지하면서 현관문 쪽으로 팔을 뻗었고, 초인종을 미친듯이 눌러댔다. 가족들이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밖에서는 소리가 나지 않았지만, 집안에는 띵동 하는 소리가 연이어 울려퍼졌다. 띵동 띵동 띵동 띵동 띵동 띵동 띵동 띵동 띵동 띵동 띵동 띵동.

-강화길 <호수 - 다른 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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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희네 어머니가 문득 멈춰 서더니 계곡에 내려가고 싶다고 말했다. 제희네 아버지가 동의했다. 물이 저기에 있으니 물 곁에 자리를 잡고 밥을 먹자는 것이었다.

말이 나오자마자 제희네 아버지가 계수나무 사이로 성큼 내려섰다. 첫번째로 발 닿는 곳에 낙차가 좀 있었다. 그는 노부인이 내려오기 편하도록 주변을 오가며 돌을 옮기고 굵은 나뭇가지를 모으고 꺾어서 발 디딜 곳을 만들기 시작했다.

나는 당황했다.

여기는…… 안 되지 않을까요? 이렇게 하면 안 되지 않을까요? 혼자 중얼거리듯이 물으며 안절부절 서 있었다. 저기 앉으면 된다고 하는데 내 눈엔 앉을 수 있을 만한 곳이 보이지 않았다. 젖은 흙이 달라붙은 채로 축 늘어진 나무들은 음산해 보였고 햇빛도 들지 않았다. 돌들 위로는 물에 휩쓸렸다가 쌓인 채로 썩어가는 잎들이 달라붙어 있었다.

나는 거기 내려가는 게 싫었다. 그렇게 행동해서는 안 되는 공공의 장소라는 검열도 작동했으나 무엇보다도 직관적으로 그 장소가 싫었다. 나는 그곳에서 분명히 뭔가가 비참하게 죽었을 거라고 생각했다. 그렇지 않으리란 법은 없었다. 수목원이지만 본래는 숲이니까. 눈물이 날 정도로 그리로 가고 싶지 않아서 다른 곳을 찾아보자고 나는 말렸다. 제희가 좀 거들어주기를 바라며 돌아보았으나 제희는 카트에 기대서서 체념한 듯 계곡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계곡 바닥은 습했고 부패중인 식물 냄새로 공기가 진했다.

제희가 축축하게 젖은 돌들 위로 돗자리 두 개를 펼치자 제희네 어머니가 도시락을 열었다.

(중락)

위쪽에 맹금류 축사가 있더라고 나는 말했다. 똥물이에요.

저 물이 다, 짐승들 똥물이라고요.

- 황정은 <상류엔 맹금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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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름 만에 그에게서 문자가 왔다.
작가가 돼보는 게 어때요.
다시 생각해달라는 내 물음에 대한 답은 없었다.
그 사람은 끝까지, 정말이지 끝까지 자기가 하고 싶은 말만 했고, 내게 뭔가를 가르치려 들었다. 무슨 말을 어떻게 해야 할까 고민하다 핸드폰을 내려놓았다.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나를 위한 선택을 하기로 마음 먹었다. 눈을 감고 그의 번호를 지웠다. 눈꺼풀에 인 두로 지져놓은 것처럼 그의 번호가 선명히 떠올랐지만 언젠가는 이것조차 기억에서 지워지리라 생각했먹
두다.
결국에 우리는 함께 따뜻한 파스타 한 접시조차 제대로 먹지 못했다.
대신에 나는 농약을 마셨다. 차가운 아메리카노에농약을 부으며, 이 커피조차도 그에게는 미제의 산물 이자(이름이 아메리카노이기까지 하니) 제3세계 노동 착취의 결과물로 보일 것이라는 생각을 했다. 그게 웃 겨서 한참을 웃다가 눈을 감았다. 눈물이 나지는 않았다.
엄보
다시 눈을 떴을 땐 중환자실이었다. 공교롭게도 엄 마가 입원해 있던 아산병원이었다. 위세척을 마친 뒤 혈액투석을 하고 있는데 발치에 엄마가 서 있는 게 보였다. 내가 바랐던 얼굴은 아니었다. 내가 아는 우리 엄마는 이런 상황에서 소리를 지르며 나를 때리거나 냅다 울어버리거나, 주님, 으로 시작하는 기도의 형식을 띤 한탄을 시작하거나 일단은 뭐가 됐든 아침 드라 마처럼 감정을 터뜨리고 보는 사람이었는데, 그날의 엄마는 그저 나를 가만히 바라보고 있었다. 그리고 말했다.

- 너무 애쓰지 마. 어차피 인간은 다 죽어.
그게 엄마가 할 말이냐고, 묻고 싶었다. 왜 이렇게됐는지 묻는 게 순서가 아니냐고, 사실은 내내 내게묻고 싶은 말이 있지 않았냐고, 물어봐야만 할 게 있지 않냐고, 묻고 싶었다. 당장이라도 묻고 따지고 싶었지만 목구멍으로 인공호흡기가 삽관이 돼 있어 아무 말도 할 수가 없었다.

- 박상영 <우럭 한 점 우주의 맛>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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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뒤로 상수는 혼자 쓸쓸히 거리를 걷거나 새벽 네다섯시에 깨어 우두커니 침대에 앉아 있을 때, 버스를 타고 가다가 옆좌석의 사람들이 크게 웃거나 자기들끼리 뭔가에 대해 열의있게 대화할 때그 가을의 오후가 떠올랐다. 자신을 그렇듯 풍성하게 하던 감정이어느 임시직의 계약종료와 함께 간편하게 사라져버린 데 대해. 그러면 늘 믿을 수 없다는 느낌이었다. 시작도 진행도 종료도 모두 마음의 일이었는데 그 마음을 흐르게 한 동력은 자가발전이 아니었다는 것, 황망한 가운데에서도 오직 그것만은 분명했다. 조교와 상수 사이에 있던 위계가 일종의 권력의 위치에너지를 생산해 감정을 만들어냈다는 것. 그런 상수의 분석은 스스로에게 여러모로 이로웠는데 상처를 덜 받을 수 있다는 점에서 특히 그랬다. 그렇게 생각하면 불특정한 상실감으로 너덜너덜해진 마음이 단번에 괜찮아지는 느낌이었다. 아주 말끔하게, 이를테면 고속도로 같은 것이 뻥!
뚫린 것처럼 시원했다. 그 길의 끝이 이제 막 도로를 포장한 콜타르의 냄새처럼 고약한 냉소와 허무 그리고 자기를 감싸는 모든 감정은 애초에 어떻게 생겨난 것이었나. 상수가 실감했던 그 숱한 감지드은 대체 무엇이었단 말인가. .
"수능시험 날 졸리면 안되니까 늦잠 버릇 이제부터 꼭 고치시고요. 단백질, 비타민 같은 거 챙겨 먹고요."
조교는 그런 조언과 시험 잘 보라는 격려를 마지막으로 상수의시야에서 멀어졌다. 오함마처럼 단단한 그 몸이 멀어질수록 상수의마음은 봉쇄되는 기분이었다. 가을을 맞은 운동장에는 바람이 불때마다 낙엽들이 축포처럼 떨어져 내리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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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생님, 늦었습니다."
이윽고 침묵을 이기지 못해 상수가 먼저 말을 걸었다. 조교는 그런 상수를 바라보다가 "우리 뭐 약속이 되어 있었어요?" 하고 물었다. 상수는 ‘다‘나 까로 끝나지 않는 그 생경한 어미의 문장을 마음 속으로 한번 되새겨보았다. 있었어요? 하는, 상수도 쓰고 상수의친구들과 강사들도 다 쓰지만 유독 이 오함마 같은 남자는 쓰지 않을 것 같았던 그 청량한 문장을.
"제가 지각을 했거든요."
그러자 조교는 상황 판단이 된다는 듯 고개를 끄덕끄덕했다. 그러면 여름을 보내는 동안 이 운동장에서 내내 열띠게 진행되었던그 작업에 착수해볼까 하면서 상수가 운동화 끈을 고쳐 매는 순간,
조교가 상수에게 "이제 안해요. 제가 계약이 끝났어요" 하고 말했다. 그러면서 조교는 왜 그런지 좀 말갛게 웃었는데 그때야 비로소순박하고 천진하고 어딘가 세상일에 좀 심드렁한, 깃털처럼 가벼운이십대의 미소가 그 얼굴에 떠올랐다가 사라졌다. 그런데 그 순간상수는 뭔가 당황스러운 느낌이었다.
"끝났다고요, 선생님?"
"수능 삼주 남기고 누가 얼차려를 받습니까. 저도 뭐 임시직이었고요."
상수는 믿을 수가 없었다. 그렇게 강렬한 강도로 자기를 다그치고 닦달했던 상태가 그냥 기숙학원과의 계약이 끝나면 사라지는것이었다니. 그렇다면 대체 자기를 그렇게 조련할 수 있는 권리는 애초에 어떻게 생겨난 것이었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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