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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춤출 때마다 홍학이란 걸 잊어요


묘사 – 좀더 자라서는 묘사하는 걸 즐기지 않게 됐다. 아무도 묘사를 좋아하지 않는다는 것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모두 바빠서 묘사에 귀기울일 시간이 없다는 것도. 게다가 묘사는 비경제적이다. 묘사는 감정적이라는 오해를 불러일으킨다. 묘사는 논리적이지 않다. 철학적이지 않다. 묘사는 피곤하다. 묘사는 피곤하다. 묘사를 하지 않으면 그럭저럭 살 만한 세상이다...홍학이 되기 시작한 이후에는 특별히 묘사를 의식하지 않는다. 106

이 글에서 내가 언급하는 작가들은 대부분 홍학이다. 홍학이 아니라도 홍학이 되는 중이거나 홍학에 가까운 상태다. 그들은 하나같이 자신을 숨기고 싶어한다. 110

저는 춤을 출 때마다 홍학이라는 것을 잊어요. 저는 배우예요. 저는 무대에 서요. 저는 인간들을 대상으로 공연을 해요. 저는 인간의 노래에 맞춰 춤을 춰요. 저는 타고나길 그랬어요. ....저는 역사. 저는 몸과 햇빛. 115-116

사육사는 나를 훑어보더니 툭툭 두드리고는 돌아간다. 나도 홍학들 틈으로 돌아간다. 홍학들은 그사이 모두 잠들어 있다. 나도 눈을 감는다. 해가 뜨면 아침이고 해가 지면 밤이다. 그 가운데는 새벽이다. 124

게으른 홍학을 처단하자. 사육사의 목소리를 흉내내며 몸을 긁기 시작한다. 곧 몸이 붉게 부풀어오른다. 인공 호수 위를 걷듯 사뿐사뿐 방안을 돌아다닌다. 네 춤을 떠올리며 비슷하게 몸을 놀린다. 네 울음소리를 따라 내본다. 128

그때 나는 논리의 결론은 항상 선이라고 생각했거든, 네 말대로 나는 순진한 사람이었어. 근데 살다보니까 생각이 변하더라. 선이 항상 이긴다는 건 착각일 수도 있다는 생각이 서서히 고개를 치켜들더라. 이 세상엔 논리적이지 않은 게 너무 많아. 142 로로. 내 사랑 로로. 내 친구 로로. 너는 갓 ㅌㅐ어난 강아지야. 흰 털 뽀송뽀송한 강아지. 나는 마흔다섯 살이 됐지만 너는 여전히 ㄱㅏㅇ아지야. 143

이 세상에서 사라져야지. 나와 ㄴㅓ, 너희들 모두. 그는 온몸으로 피의 시를 쓰고 있었다. 일하지 않고 사는 법에 대해 이야기했다. 햇빛이 닿으면 따뜻하고 그늘지면 춥고 당연한 건가. 153

나는 외로움을 느끼지만 그 외로움을 즐기기도 해. 저는 이곳에서 죽어가고 있습니다. 모닥불이, 모닥불이, 모닥불이 존재합니다. 외롭지만 외롭지 않아. 158



홍학아, 홍학아, 무슨 소리가 들리니? 암소의 눈물이 들려요. 165



볕뉘.

0. 건축이냐 혁명이냐? 금정연, 아날리얼리즘...이런 소설의 행간에 오한기가 자주 언급되어 궁금하던 차에 이리 접하게 되었다.

1. 작품이란 무엇일까? 사울의 아들과 그 영화를 비평한 어둠에 벗어나기. 그 영화는 많은 것을 보여주지 않는다. 시종 클로우즈업된 상태로 관객을 그 한가운데로 몰아넣는다. 이 작품은 끊임없이 불러들인다. 지금도 그렇다. 여백을 팔할 정도를 두는 작품. 이 또한 최정례의 시에서도 많이 느꼈다.

2. 이 작품은 중반부터 몰입을 하게 만들었다. 시인들이 자신만의 개념어를 써서 자신의 의도를 형상화하듯이 계속 궁금하게 만들다가 그 고비를 너머서니 긴박감을 느끼게 해버렸다. 홍학이 무엇이어도 좋을 것이다. 해설에서 문학으로 읽히던지 목없는자들의 삶으로 읽던지 또 다른 무엇으로 읽던지 여전히 궁금한 것 투성이인채로 물음을 발산한다. 그래서 물수리는 왠 시위. 원자력발전소의 둥지를 홍학의 숲으로 한 건 왜. 디럭스버거는 왜. DB는 왜. 왜. 왜.

3. 애틋함이 읽히고, 회자가 되는 한. 그것이 작가의 의도인지도 그리 중요하지 않을 것 같다. 다르게 읽고 나누어보는 것도 괜찮겠다 싶다. 작품으로 그리고 우리의 현실에 ㄷㅐ한 시적 형상화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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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자신은 자기 테크놀로지들의 상관물로 간주해야 하고, 이 문제는 자기를 석방하거나 ‘해방하는 것‘이 아니라 어떻게 하면 새로운 유형의, 새로운 종류의 자기 관계를 만들어낼 수 있는지 궁리하는 것이다. 123

1. 자기 배려가 일상적이지 않게된 이유

그리스도교 유형의 금욕주의에서 자기 배려(돌봄)는 어떤 희생의 형태를 취한다. 요컨대 자기 포기가 자기가 자기 자신에게 가해야 하는 작업의 주된 목표가 되었다. 두 번째 이유는, 자기 ㄱㅣ술들 대부분이 오늘날 우리 세계에서는 교육과 교습의 테크닉, 의료와 심리학적 테크닉에 통합되어 버렸다. 자기 기술들은 권위와 규율 체제에 통합되었거나 ㅇㅕ론, ㄷㅐ중매체, 여론 조사 기술에 통합되어 버렸다. 그 결과 오늘날 ㅈㅏ기 수양은 타자들에 의해 우리에게 강요되어 그 독자성을 상실하고 말았다 세 번째 이유는 인간과학들이 자기와 자기가 맺는 가장 중요하고 주요한 관계가 본질적으로 인식의 관계이고 또 인식의 관계여야 한다고 전제하기 때문이다. 마지막 이유는 대체적으로 사람들은 자신들이 해야 할 바가 ㅈㅏ기 자신의 숨겨진 현실의 베일을 벗기고 ㅎㅐ방시키고 발굴해야 한다고 생각하기 ㄸㅐ문이다. 122

2. 자기인식보다 자기배려의 역사

고대 그리스 철학에서 가장 중요하고 가장 특징적인 도덕의 원리가 무엇이었느냐고 묻는다면 “너 자신을 알라”가 아니었다. ‘자기 자신을 알아야 한다‘는 ㄱㅖ율은 ㅅㅏ실 고대문화에서 항상 ‘자기 배려(돌봄)’의 계율과 연관되어 있었고, 이는 자신을 돌보는 ㅎㅏ나의 수단으로 간주되었다. 그 바탕에는 “자기를 돌보기”가 전제되어 있는 것을 간좌하면 안된다. 105

인간은 자기 자신을 배려해야(돌보아야) 하는 지구상의 유일한 종이다. 에픽테토스 104

헤르모티무스는 스승 리키누스와 20년전부터 자주 만나왔고, 스승의 소중한 가르침에 ㄷㅐ해 지불한 비싼 수강료때문에 거의 파산지경에 이르렀지만, 교육을 마치려면 20년이 더 필요했다. 스승은 자신을 돌보는 방법에 대해 가르치고 있었다. ...고대의 사람들은 이들을 ‘철학자‘라 불렀다. 95

이전 많은 사상가들이 세계의 상황과 논쟁, 분쟁에 개입해 무엇인가 변화시키려고 저작을 했다면 이와 달리 칸트가 처음으로 자신이 속해있는 현실태의 분석으로 절학의 임무를 정당화하기 시작했고, 그 물음들로 ‘우리의 ㅎㅕㄴ실태는 무엇인가? 현실태에 ㅊㅏㅁ여하는 한에서 우리는 무엇인가? 그 한에서 철학적 행위의 목표는 무엇인가?‘하는 물음들을 두 세기동안 지속하게 했다고 할 수 있다. 97-99

우리 자신에 대한 모든 존재론적 역사는 일련의 세 관계들, 우리가 진리(진실)과 맺는 관계, 우리가 의무와 맺는 관계, 우리가 우리 자신 및 우리의 타자와 맺는 관계들을 분석해야 한다. 100

제가 광기, 정신의학, 범죄와 처벌에 관해 연구했을 때 우선 진리와 맺는 관계를 강조했고, 다음으로 우리가 의무와 맺는 관계를 강좌했다. 이후 성현상이 어떻게 구축되는가를 연구하며 ㅈㅏ기와 자기가 맺는 관계들 그리고 이 관계들을 만들어내는 기술들에 주목했다. ㅈㅏ기 기술들을 분석학 위해 고대 그리스 로마 문화에서 대단히 중요하다는 개념을 스케치하고자 한다. 102 epimeleia heautou/cura sui 자기돌봄 자기배려라는 삶의 기술의 중대한 규칙 가운데 하나였고 천 년 동안 지속되었다. 102

소크라테스 이후 8세기가 지나 동일한 자기 ㅂㅐ려 개념이 그리스도교 저자 니사의 그레고리우에게 다시 등장하지만, 니사의 개념은 완전히 ㄷㅏ른 의미를 갖는다. 결혼을 포기하고 육욕을 벗어나며 그것을 통해 마음과 정신에 내재된 순결성의 도움을 받아 잃어버렸던 불멸성을 되찾는 활동이다. 이것이 자기 포기를 내표하는 그리스도교 금욕주의로 변형되는 것이다. 103-105

알키비아데스는 자신이 얼마나 무지한지를 발견하고 절망한다. 하지만 그 상황에 개입해 소크라테스는 말한다. “네가 쉰 살이라면 상황이 심각하겠지. 그때는 ㄴㅓ무 늦을지도 몰라. 하지만 너는 ㅇㅏ주 젊다. 그러니 바로 ㅈㅣ금이 네가 너 자신을 돌볼 때다.” 110 여기에서 ㅈㅏ기 돌봄은 구ㅣ족 청년의 정치적 야심과 명백히 결부되어 있다. 요컨데 그가 타자들을 통치하고자 한다면 우선 자기 자신을 돌봐야 한다는 것이다...이는 젊은이와 스승 간 ㅇㅐ정 및 철학적 관계와 결부되어 있고 그것은 주로 영혼 ㅈㅏ체에 의한 영혼의 명상이라는 형태를 취한다. 111

3. 자기에로의 배려

자기 자신에 대한 자신의 태도를 변화시키기라는 지극히 중요한 관념, 요컨대 그 자체가 궁극적 목적인 것으로서의 ㅈㅏ기로 되돌아가는 생활 속에서의 활동이라는 관념이 바로 ㅇㅕ기에 기인한다.(자기로의 전향) 114-115

배운 것을 버리는 것은 자기의 발전에 중요한 과업이다. 115

자기 수양에서 글쓰기가 중요하다. 이는 근대의 발명이 아니라 서구에서 유구한 전통을 가지고 있다. 당시 사람들이 hupomnemata라 부르던 사적인 일지(수첩)를 활용했고, 그 들이 꾼 꿈과 매일 일과를 기록했다. 타자의 관계에서 편지쓰기를 자기 수양의 중요한 일부로 여겼다. 119

이 ㅅㅣ대의 자기 배려, 즉 고대 제정 시대의 자기 배려는 어떤 특수한 철학적 교의를 가지고 있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보편적인 계율인 동시에 진정한 ㅅㅣㄹ천이다. 그 체제, 규칙 방법, ㄱㅣ술, 수련을 갖춘 실천이다. 개인의 경험이지 집단적 경험이기도 했다. 121

볕뉘

0. 자기 수양편이 무척 궁금하여 책을 펼쳤다. 1983년 버클리캠퍼스의 강연 장면이다. 연구와 사유의 핵심을 전달하기 위해 애쓰는 모습이 읽힌다. 저작의 의도도 간결하게 잘 드러나있다.

1. 밑줄을 다듬어 본다. 질문을 변화시키려는 노력이 돋보인다. 추상적인 개인을 해방하거나 석방하려는 사유의 강박이 결국은 아무 것도 이룰 수 없다는 점. 그 관점을 돌려 새로운 종류와 새로운 유형의 자기 관계, 타인과 관계를 만들어 낼 수 있는지 궁리하라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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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galmA 2017-01-08 18:1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인간은 자기 자신을 배려하는(돌보아야) 하는 지구상의 유일한 종이다. 에픽테토스˝ 문장에서 ˝유일한˝이란 표현이 좀 걸리네요. 너무 인본주의적입니다. 대부분의 생물은 자기애를 가지고 있습니다. 이기적 유전자까지 가져 오면 더 동등해지거나 무화될 수도 있겠죠.
인간에 대한 고민이 많은 철학이 유념할 것들도 많아졌다고 생각합니다. 사유의 단정이 가장 위험한 순간이고요.

여울 2017-01-08 18:09   좋아요 1 | URL
네 그렇죠. 주제를 강조하다보니 문맥에 맞게 끌어왔어요. 이해해주시길. 두 손에 세가지 이상 쥐는 저글링은 쉽지 않아요~
 

그런데 이제는 그것으로 만족할 수 없게 되었다.

1.
“아빤 왠 늘 바빠? 회사에서 할 일이 많아서. 왜 일이 많은데? 아빠가 회사에서 꼭 필요한 사람이니까. 아빠가 안 필요한 사람이었으면 좋겠다. 왜? 그래야 나랑 놀 시간이 많을 거 아니야. 음 세상에는 꼭 필요한 사람과 필요 없는 사람이 있어. 필요한 사람은 다른 사른 사람에게 도움이 되는 사람이고, 필요없는 사람은 도움이 되질 않는 사람이지. 어떤 사람이 좋은 사람 같아? 남에게 도움 되는 사람요. 그래 그러니까 아빠도 필요한 사람이고, 도움이 되는 사람이지. 그래야 좋은 ㅅㅏ람? 응, 그러니까 너도 ㅋㅓ서 꼭 그런 사람이 되어야 해.”

2.
하지만 이제는 아내를 이해하고 있었다. 왜 그녀가 아이에게 그토록 열정적으로 ㅁㅐ달렸는지, 왜 그녀가 ㅇㅏ이의 삶에 모든 것을 투사했는지, 분명히 알고 있었다. 그것은 한때 이 부장이 느꼈던 것과 같은 공허함 때문이었다. 몸을 지니고 있는, 몸이 품고 있는 즐거움의 가능성을 경험해 보지 못했으므로, 결코 채워지지 못하는 ㅎㅓ기 같은 것이 그녀 안에서 불타오르고 있었다. 때문에 계속 무언가 집중할 대상이 필요했던 것이다. 97

3.
엄밀히 말해서 의무에 치여 사는 삶이 꼭 불행한 것만은 아니었다. 적어도 아무 생각하지 않고 지낼 수 있었으니까. 그리고 나름의 즐거움도 있었다. 어긋나지 않고 정리된 보도블록을 보거나, 틈 하나 없이 정리된 책꽂이를 볼 때 느껴지는 변태적이기까지 한 충만함을 이 부장은 분명히 즐겼다. 그런데 이제는 그것으로 만족할 수 없게 되었다. 101

4.
“근대란 말이야, 대단한 게 아니라 딱 두가지가 발전한거라고. 개인의 자유를 인정해 준 것과 개인의 욕망을 긍정해주는 거. 그게 전부야”...드라이 오르가슴을 느끼는 일은 근대사회에 부합하는 행위인 셈이었다. 근대의 관점에서 자신은 부도덕한 것도, 변태도 아니었다. 118-119

5.
오직 고통이 주는 아픔과 쾌락의 전율만이 그곳에 몸이 있다는 것을 인지할 수 있게 했다. 이 부장은 비로소 자신을 지배하던 허기와 상실감의 정체를 깨달았다. 그동안 열심히 살아가고 있었지만 정작 그 안에서는 자신이 부재했다. 오르가슴이, 전립선의 통증이, 자신이 살아 있다는 것을 비로소 절감하게 해 주었던 것이다. 이 부장은 무엇이 자신을 고양시켜 주었고, ㅈㅏ신이 하는 이 행위에 어떤 의미가 있는지 비로소 이해했다. 156

6.
그러나 결혼하고 나서야 깨달았다. 남편의 안정감이라는 것이 얼마나 위태한 노력 위에 서 있는지를. 그리고 남편이 얼마나 주눅 든 채로 살아가고 있는지를. 살ㅇㅏ갈수록 실망스러운 일들의 연속이었지만 남편을 미워할 수 없었다. 겉보기엔 멀쩡한 안정을 위해 남편이 얼마나 헌신하고 있는지 알고 있었으니까.


볕뉘.

0. 자기계발의 슬로건들이 굵은 고딕체로 쓰여있다. ‘자신의 삶을 주도하라‘ ‘끝을 생각하며 시작하라‘ ‘소중한 것을 먼저하라‘ ‘윈윈을 생각하라‘ ‘먼저 이해하고 다음에 이해시켜라‘‘시너지를 내라‘‘끊임없이 쇄신하라‘ 이런 경구에도 불구하고 짤릴 수 밖에 없다란 메세지를 주는 것일까. 곳곳의 부비트랩들과 장치들.

1. 굳이 마지막 장면을 그리 설정했을까. 그래도..그래도 그것이 맞다. 백일하에 드러나야 한다고..그래야 겨우 정신차린다고....전근대에서 한발자욱도 벗어나지 못했다고...우리의 삶이란 것은 있기보다는 생존해지는거라고...살아지지 않으려면 그래도 자신의 오르가슴을 하나씩 가지고 있어야 된다고..... 온통 외로움과 허기와 공허감에 넘치는 이들로 흥건하다고 . . .삶의 상상을 바꾸라고 ㆍㆍㆍ

2. 아직 [문근영은 위험해]가 도착하지 않았다. 멋지고 대단하다 싶다. 책갈피로 소개받은 회사 3부작이 더 궁금해진다.

3. 그래서, 이제부터는 이것으로도 만족할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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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의 모습을 늘 관찰해야 한다는 문제는 지성의 핵심적 활동이다.653

1. 반지성주의 극복

우리 자신의 정체가 문제되는 경우는 우리의 행동 때문에 큰 피해를 입을 것이 우려되는 경우이다. 이 피해란 물리적인 것은 말할 것도 없고 사회적 지위, 존엄성, 존재가 상처를 입는 것을 포함한다. 상대방에게 ‘누구세요?‘라고 정체를 묻는 경우보다 ‘나는 누구인가?‘라고 묻는 경우가 훨씬 추상적인 문제로서 더욱 포괄적인 생존, 즉 재산 문제뿐만 아니라 사회적 존재, 지위 등의 안전에 위기를 느끼는 경우이다. 648

‘우리‘의 정체성 문제에 대한 본격적 해결책은 1990년대에댜 제시되었다. 말하자면 우리의 모습을 늘 지속적으로 거울로 비추어보는 일이다. 문제는 물리적인 모습만 비추어보는 게 아니라 윤리적인 문제, 심리적 정신적 문제, 건강 문제 등까지 비추어보고, 판단해야 하는 것이다. ‘얼‘을 검토하고 영혼을 돌보아야 한다. (1960년대 이후 정체성 위기에 비명을 ㅈㅣ르고 문제를 제기했지만 해결책을 제시하지 못했다. 1980년대 역시 ‘나는 혁명가다‘, ‘나는 프롤레타리아다‘라는 답 역시 객관식 문제를 풀던 버릇에 다름 아닌 이념 권력에 굴복함을 선언하는 것이었다.) 649

자신의 학문을 갖고 있지 못하고 남의 나라에서 학문을 배워오기에 급급했다. 그리하여 제 3세계 나라는 스스로 자기 나라, 민족, 사회에 ㄷㅐ한 지적 관심이 깊지 ㅁㅗㅅ하고, 결과적으로 진정한 주체성을 결여하고 있는 게 현실이다. 우리 ㅈㅏ신을 늘 되돌아보는 행위가 ㅈㅔ도화되어야 하며 이를 위해서는 반지성주의가 극복되어야 한다.(미국이 초강대국이 된 이유는 남북전쟁이후 벌인 대학 개혁 운동으로 세계 일류의 대학으로 등장하고 순수 학문들이 높은 수준을 달성한 연유다.)..반지성주의를 극복하고 우리의 지성과 학문을 이루게 되면 그 때는 우리나라를 ‘선진국‘이라고 자부할 수 있을 것이다. 전문적 지성이란 적어도 인구가 몇 만이 넘는 집단에게는 필수의 구조인 것이다. 651-652

2. 정체성의 문제

혹자는 우리 현대사를 ‘난폭 운전‘에 비유하기도 했다. 수많은 사람들이 피를 흘렸고, 요행히 살아남은 사람들도 생명의 위협을 느낄 수밖에 없었던 ‘스릴 만점‘의 아슬아슬한 여정이었다.....무엇보다 근대의 출발점에서부터 우리 민족은 개인들 간에 너무나 많은 불신, 의혹, 증오, 질투, 위협, 다툼들로 가득 차 있었다. 다른 말로 ㅎㅏ면 민족 공동체가 완전히 개인으로 흩어져 ‘홉스적 자연상태‘에 처해 있었고, 이는 도저히 ㅅㅏ람이 정상적인 문명적 삶을 영위할 ㅅㅜ 없는 상황이었다......그런 ㅅㅏㅇ황에서는 각자 자신의 생존만을 위해서 사는 것 외에 다른 생활 ㅂㅏㅇ식이 ㅂㅜㄹ가능했다.....핸들이 고장난 자동차를 정상적으로 잘 운전할 수 있는 운전사를 구할 수 없었다...이 글을 쓰는 순간에도 자연상태는 지속되고 있다...OECD국가에서 노사관계와 금융부문에서 거의 꼴찌였다. 이 분야들은 서로에 ㄷㅐ한 ‘신뢰‘와 ‘신용‘없이는 발전이 불가능한 분야다. 좌우에 상관없이 모두가 가담하고 있는 사회적 불신, 의혹, 질투, 적대가 사회의 핵심문제이다. 우리의 갈등지수는 ㅅㅔ계 최고수준이다. 639-641

우리 현대사는 인간이 겪을 수 있는 거의 모든 종류의 시련을 두루 겪었다. 그렇다고 모든 시련을 섭렵했다고 안도할 수도 없고 자만할 수도 없을 것이다. 자랑스러운 역사라 하기에는 너무나 많은 피와 눈물이 흘렀고, 부끄러운 역사라 하기에는 너무나 영웅적인 투쟁의 연속이었다. 641

그간 많은 사람들은 우리는 혁명을 못 겪었다고 하지만 우리는 분명 ‘두 개의 혁명 419,516’이라는 독특한 형태로 혁명을 겪었다. ‘혁명‘을 한다는 명쾌한 의식은 갖지 못했고 과정과 형태 또한 기형적이었지만 두 혁명이 야기한 ㅅㅏ회적 변화의 규모는 엄청난 것이었다..문제는 혁명 의식이 불급한 것이 아니라 과했다는 데 있었다....그러한 성공 속에서 ㅈㅏ제를 잃어버렸고 내리막길에는 ㄱㅏ속도가 붙었다. 643

5공과 같은 시대를 돌파해서 민주화를 이루어 1990년대를 맞았다는 것은 우리 사회의 뛰어난 적응력과 끈질김을 확인해주는 증거라 하지 않을 수 없다. ㅇㅣ 극단의 ㅅㅣ대를 종결지은 것은 죽음의 공포를 넘어선 극단의 격렬한 투쟁이었다. 중산층 국민들은 젊은이들의 과격한 입장을 이해하고 투쟁에 고마워했지만 엄청난 의식의 혼란을 겪었다. 644

1990년대에 오면서 비로소 한국인들은 우리의 우여곡절의 과거를 돌아보기 시작했고, 그토록 거친 역사는 더 이상 반복할 수 없다는 것을 느꼈다......이 과정에서 늘 부딪쳐 온 첨예한 문제는 정체성의 문제였다. ‘내일은 어떻게 될지‘ ‘ㄴㅏ는 살아있는가‘ ‘나는 누구인가‘ ‘나는 과연 나인가‘ ‘우리는 누구인가‘ ‘우리로 남을 수 있을까‘ ‘우리민족은 누구인가‘ ‘나라란 ㅁㅜ엇인가‘‘대한민국이란 무엇인가‘는 늘 제기되어온 ㅈㅣㄹ문이었다. 645


3. 문학에 나 있는 사상의 길

민주주의의 문제는 ‘내용‘가 유리되어 정치 집단들 간의 투쟁이 되어버리고 합리적 토론의 자리는 맹목적 믿음으로서의 ‘이데올로기‘ 갈등으로 대체되었다. 민주주의보다 더욱 시급한 현실적, 민족적 문제가 있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은 악마로 묘사되기도 했다....민주주의 외에 자유주의, 보수주의, 급진주의 등의 주요 정치 이념들에 ㄷㅐ한 논의도 이런 수준을 넘지 못했다. 22

나아가서 이런 상황 즉 대부분의 제도, 사상, 학문, 철학 등을 서구에서 ㅊㅓ음부터 배워와서 우리나라에 도입하는 것이 우리 지식인들의 최대의 역사적 임무라는 생각은 반지성주의를 이루어 혼자서 다른 생각을 하거나 ‘골치 아픈‘문제들을 들추는 사람들을 억압하고, 생각 자체, ‘철학‘을 억압하고 기피하는 문화로 발전해왔다. 23

이렇게 사상이 발전하기 힘든 상황의 나라에서 어떻게 사상을 찾고 사상사를 연구할 수 있는가에 대해서는 별로 논의된 일이 없었다. 그저 어설픈 서양 학문 흉내 내기를 반복하며 관객들의 호응을 구걸해왔다. 24

우리 역사 연구가 실증주의적으로 경도된 것은 그간 늘 복수를 ㅎㅐ야 할 원수를 염두에 두고 이루어져왔기 때문일 것이다. 학문 제도 수준에서 아직 우리는 우리 자신을 깊이 들여다보는 단계에 와 있지 못한지도 모른다. 28

419518 ㅇl런 사건들은 분석의 대상이 아니라 예술 작품과 같은 해석의 대상이며, 그런 의미에서 우리의 역사는 그 자체로 사상 텍스트라 할 수 있다. 이런 사건들은 개개의 뚜렷한 정체를 갖고 있으며 그 가운데에는 심연과 미로, ‘블랙홀‘이 자리 잡고 있다. 그리고 그 심연과 미로를 탐사하는 일이 바로 우리에게 가장 중심적 사상 연구 과제이다. 29

우리에게 사상사 연구를 위한 통상적인 텍스트가 거의 존재하지 않는다면, 그것들을 대체할 다른 지적 창작물을 찾아야 한다. 가장 중요한 텍스트는 단연 그간 우리 사회에서 부단히 만들어져 온 예술작품들이다. ...무엇을 창조하는 일, 즉 새로운 인물이나 새로운 생각을 창조하는 일은 예술만이 할 수 있는 작업이다. ‘학문‘에서 하는 합리적 논리적 사고로는 아무 것도 창조할 수 없다. 그저 잘 쪼갤 따름이다. 30

볕뉘

0. [197s 박정희 모더니즘]은 현대사를 산업화와 민주화의 이분법으로 보지 않을 것을 주문한다. 그릭 진보라는 것이 서구 사상으로 비유하건데 개인적 자유에 연유한다고 서술하고 있다. 그렇게 보면 산업화-민주화 세력 공히 효율, 성공, 자기계발, 생존을 우선시한다. 그 틀로 호명하지 못하는 형평에서 기울거나, 말못하는 사회적 약자의 삶에 ㄷㅐ한 생각의 거처도 마련하지 못한다.

1. 저자는 서구의 사상과 지적 흐름은 우리에 맞지 않을 수밖에 없다고 한다. 그 연구작업의 일환으로 소설이란 ㅇㅖ술작품에 천착하여 우리의 지적흐름과 사상을 좇아 재사유화하고자 한다.

2. 무한히 정치적인, 외로움(한국사회 정동을 묻다)과 곁들여 보면 더 좋을 듯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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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galmA 2017-01-06 00:2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미국의 지성과 문화는 유럽에 대한 경쟁의식과 수용 사이에서의 긴장감에서 컸다고 생각합니다. 결정적인 수혜는 세계대전들과 유럽 대륙의 불안정이었다고 생각하고요. 그때 많은 지성들과 문화인들이 미국으로 많이 망명해 대학 강단, 연구 분야에 많이 유입되었지요.
한국 경우는 반대. 이런 시스템에서 클 수 없는 인재들이 해외로 많이 빠져 나간 것도 있지 않나 생각합니다.
미국도 여러 문제가 많지만 민주주의 시스템을 한국과 비교하면 한국은 여전히 후진적. 시민의식이 커져가는 요즘 한국을 보면 마냥 비통할 일도 아닌 거 같고요.

여울 2017-01-06 00:35   좋아요 0 | URL
네 두루 살펴볼 것들이 많은 것 같아요. 나아지는 것은 사실이지만, 예상하는 것보다는 작고, 시간은 훨씬 지체될 것 같아요. 이럴 때일수록 선악이 아니라 다양하고 다원적인 관점이 많아졌으면 좋겠어요. 그 사유들이 폭과 시간을 줄일수도 있지 않나 싶어요.
 

외롭다. 새로운 우정, 새로운 반려, 다른 삶의 관계를 촉발하는 무한히 정치적인, 외로움.

1. 책을 쓰게 된 배경

정념과 정동에 관한 이 책의 논의들은 필자의 연구 작업과 고민의 이행 그 자체와도 연결되어 있다. 맨 처음 정념에 대해 고민하게 된 것은 파시즘 연구를 시작한 연구자로서의 출발 지점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28
이 글은 먼저 새로운 파시즘의 징후가 세계화와 이에 따른 위기감의 만연, ㅎㅕㄴ존하는 ㄷㅐ안적 패러다임의 한계 및 이에 대한 반작용에서 생성된다는 점에 초점을 두고 논의를 전개하고자 한다. 또 이를 통해서 현재 한국 사회에서 파시즘적 징후를 사유하는 일이 사회적 약자의 해방의 사상과 실천을 다시금 탈환하는 일이라는 점을 제기하려고 한다. 258-259

처음에는 외로움과 환멸에 대해, 그리고는 ‘부적절한 정념‘에 대해 고민하게 되었다. 그리고 부적절한 정념에 대한 고민은 그 자체로 이행의 열쇠를 풀어보고자 하는 문제와 결부된다. 즉 무능력자, 부랑아, ‘문란녀‘와 미숙한 청소년들은 과연 역사적으로 어떻게 정치적 주체로 이행하게 되었을까? 그 열쇠 말을 얻기 위해 ‘부적절한 정념‘이라는 말 그대로 희미한 불빛을 좇아 몇 년을 방황했다. 그 ‘방황의 길‘에서 풍기문란에 대한 연구를 시작하게 되었고, 정념의 표지들을 하나하나 좇아가다가 정동 이론과 조우하게 되었다. 또 정동 이론 연구와 함께 정념을 정치적 차원에서 연구하는 흐름들은 정념의 바다에서 허우적거리다가 익사 직전에 발견한 불빛과 같았다. 28

부적절한 정념이라는 흐릿한 불빛을 붙잡고 방황하던 필자의 연구 작업에서 정동 이론과의 조우는 그 자체로 정념에서 정념-론으로의 이행의 계기가 되었다. 30

2. 파시즘 연구

한국 사회에 만연한 자살률 증가 현상과 출산 거부 현상은 인간을 재생산 기계로 몰아온 한국 사회의 고질적인 사회 구조의 ‘부정적 효과‘라는 점이 명백해진다....자살과 출산 거부는 단지 만성적인 ‘사회 문제‘가 아니라, 인간을 재생산 기계로 몰아온 한국 사회의 구조적 문제라는 인식이 필요한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문제가 한국 사회가 파시즘의 경험으로부터 벗어나지 못한 채 지속적으로 파시즘적 사회 구조를 강화해 온 과정에서 비롯되었다는 인식 또한 필요한 것이다. 282

파시즘은 인간을 사상, 문화, 정치를 통해 규정하는 것이 아니라, 생존이라는 신화를 통해서 재규정한다. 그런 의미에서 파시즘적 인간형은 생존의 노예이다. ...한국 사회에서 사회적 약자는 삶과 자신의 목소리를 통해 존재를 증명하는 것이 아니라, 죽음과 유언으로만 자신의 부재를 증명하고 있다. 그런 점에서 죽음의 정치는 한국 사회에서 너무 오래, 그러나 언제나 새로운 방식으로 작동하고 있는 것이다. 286-287

파시즘의 징후를 분석하는 일은 단지 특정 정당의 정책 변화나 집권 집단의 성향을 분석하는 일로 환원될 수 없다. 오히려 파시즘적 징후에 대한 분석은 사회 전체의 집단적인 심성 구조 변화의 결을 살펴보는 일이며, 특히 사회적 약자의 심성구조, 자기 인식의 준거와 그 변화 등을 읽어내는 일과 관련된다. 260

파시즘의 정체성 정치의 핵심은 그간 사회의 이면에서 호출되지 못했던 존재들을 사회의 전면으로 부상시킨다는 점이다. 역사적으로 보자면 식민지 조선에서 효과적으로 호출된 집단은 청년, 부인, 소국민이었다. 261

파시즘이 현존 하는 모든 것에 대한 안티테제로 자신을 정립할 수 있었던 것은, 사회주의와 자본주의, 페미니즘과 반페미니즘, 진보와 보수 등등 현존하는 이념에 대한 대중의 만연한 환멸과 피로감에 안티테제적 호소가 효과적으로 작용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한겨레도 조중동도 편파적이기는 매한가지라는 심성구조로 변화...페미니즘도 문화상품으로서도 매력을 잃은 지 오래고, 그렇다고 ㅎㅐ서 사람들이 반 페미니즘에 적극적으로 동의하지도 않는다. 다만 페미니즘이라는 말 자체가 ‘지겨울‘뿐이다.)262-263

최근 한국 사회에 만연한 파시즘의 징후도 ㅅㅏ회적약자의 ㅎㅐ방의 사상과 정치에 대한 기대감의 좌절과 깊은 관련이 있다.....게다가 초ㅣ근 대중에게 만연한 환멸과 피로감은 세계적인 경제 위기를 통해서 극점에 이르렀다…1차 세계대전의 역사적 판본이 ‘입신출세주의‘라면 현재적 판본은 ‘실용주의적 전환‘이라 할 것이다. 264

이명박 정부에 대한 유권자 과반수 이상의 지지를 ‘자영 自營‘에 대한 기대와 환상이라는 차원에서 검토할 필요가 있다.....기존의 집단적 주체성에 대한 피로감에 젖은 집단들에게...스스로 경영한다는 ‘자영‘의 이념은 집단적 주체성과 이와 결부된 개념들, 특히 노동, 신체, 노동을 통한 정치화 등과 다른 의미화 방식으로 정체성을 재규정한다. 특히 이는 만연한 경제 위기 속에서 세계 속에 맨몸으로 내던져져 있는 것과 같은 존재론적 불안감에 시달리는 사회 구성원들의 위기감에 호소하는 일이기도 하다. 265-266

국밥집 할매와 자갈치 아지메의 일은 가족을 위한 헌신적인 노동으로, 맨 몸으로 세계와 맞서서 가족을 지켜내는 것으로 의미화 된다. 이를 통해 노동은 갈등과 투쟁의 장이 아니라 가족의 생존을 위해 막막한 세계 앞에서 맨 몸으로 홀로 맞서 싸우는 일이 된다. 싸워야 할 대상은 저 위기로 ㄱㅏ득한 세계이고 ㅈㅣ켜야 할 것은 가족의 생존이다....그런 점에서 ‘민주화 시기‘의 노동과 삶의 관계를 규정하던 의미 맥락과 완전히 이질적인 세계이다. 269 이 정체성은 기존의 페미니즘적인 여성 주체성과도 상이하고 노동자라는 집단 정체성과도 상이하다는 점이다. 269 국밥집 할매와 자갈치 ㅇㅏ지메로 상징되는 이 정체성 정치의 준거는, 기존의 진보/보수, 페미니즘/반페미니즘적인 집단적 주체성의 정치 모두에 ㄷㅐ한 안티테제의 성격을 명확히 지니는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아ㄴ티테제가 수렴되는 것은 생존의 절대성, 모든 이념을 넘어선 ‘실용‘의 세계이다. 270 이러한 세계 속에 모든 존재는 홀로 서있다. 거기에는 어떠한 사회적 유대 관계도 존재하지 않는다. 존재하는 것은 고립된 존재의 생존을 우ㅣ한 투쟁, 그 막막한 세계를 신화로 만드는 이미지뿐이다. 이를 통ㅎㅐ서 생존은 기존의 모든 ㅇㅣ념을 ㄷㅐ체한 ‘대안‘이 도ㅣㄴ다. 270

파시즘의 가장 중요한 특징은 자발성이다. 271 전 ㅅㅏ회 내적으로 적대의 관계가 조밀하게 재구성되고, 사회 구성원들이 적대의식을 내면화함으로써 자발적으로 파시즘에 참여하게 되는 역학이다. 역사적 사례를 통해서 볼 때, 이러한 자발성을 효율적으로 작동시키는 것은 경쟁의 내면화, 혹은 생존 논리의 이념화이다.272

파시즘이 생존을 이념과 인간 존재의 진리의 차원으로까지 격상시키는 과정에는 사회 내적으로 만연한 위기감이 중요하게 작용한다. 273 경쟁이란 무엇인가? 그것은 내 옆에 존재하는 인간이 다름 아닌 나의 경쟁 상대, 즉 내가 이겨야 할 적이라는 인식을 내면화하는 것이다. 따라서 이러한 심성 구조 하에서 사회의 모든 인간은 적으로 간주되고, 적으로 간주된 존재를 절멸시키는 기획에 동참하는 일은 손쉽게 이루어진다. 274 경쟁 기계로서의 인간이란 사상이나 정치와 무관하게 자신의 성공에만 골몰하는 인간이다.

파시즘에서 살아남은 자들 이외의 나머지는, 항시적으로 반사회적 존재, 낙오자, 무능력자 등등의 이름으로 노예상태에 내몰렸다.(위안부 홀로코스트,호모사케르) 275

파시즘의 절멸의 기획이 말살, 성노예화, 비국민화와 관련이 깊고, 이것이 ‘합법적‘ 절차를 통해서 수행되었다는 점, 즉 인간에게 모든 권리와 특권을 완벽하게 박탈하는 일이 법의 이름으로 자행되었다는 것을 새삼 환기할 필요가 있다. 276-277

한국 사회에서 법적 판단의 기준은 일본 식민통치가 파시즘으로 전환되는 문턱에서 만들어졌는데, 대표적인 것이 풍기문란 통제와 사상 통제라는 두 가지 형식이었다. 특히 문화와 사상에 ㄷㅐ한 검열과 통제의 법적구조는 한국 사회에 여전히 남아있다. 278

파시즘이 상상하는 인간은 사상과 신념, 정치와 문화와는 거리가 먼, 재생산의 기능과 역할에만 충실한 존재이다...파시즘이 그토록 강박적으로 사상과 신념에 ㄷㅐ한 억압적 통제에 골몰하는 것은 ㅇㅣ 때문이다. 또 경쟁 기계로서의 인간이란 사상이나 정치와 무관하게 자신의 성공에만 골몰하는 인간이라는 점에서, 파시즘의 이상, 그 죽음의 상상력의 완벽한 실현이다. 281

파시즘의 절멸 기획은 말의 권리에 대한 합법적 박탈의 과정이며, 여기에는 사상 통제와 정보 통제 역시 포함된다. 이와 함께 중요한 것은 성노예화의 경우에 명백하게 나타나듯이 아예 어떤 존재를 말 이전의 세계로 전이시키는 것이다. 이는 파시즘적 통제가 사회를 불가지론의 구조로 재조직하는 것과도 관련된다....파시즘적인 사회 체제하에서 세계는 음모론적이고 불가지론적인 방식으로 구조화된다. 284-285

무엇보다 사회적 약자의 해방에 대한 기대와 희망이 충족되지 못하고, 노동, 주체성, 성 정치 등 삶에 대한 새로운 사상과 실천이 대안적으로 제시되지 못하는 상황이 대중들이 파시즘에 매혹되는 중요한 요인이다. 그러ㄴ 점에서 파시즘의 징후를 고찰하고 이를 통해 어떤 ㄷㅐ안을 제시하고자 한다면, 무엇보다도 사회적 약자의 삶의 새로운 조건들을 사유할 수 있는 ㅅㅏ상과 그 실천의 새로운 패러다임을 모색하는 일이 가장 중요할 것이다. 287

3. 프롤로그

정동이 말 그대로 힘-관계와 이에 따른 부대낌의 양태라고 할 때 이를 추적하는 것은 다양한 부대낌의 상태들을 통해서만 가능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 ‘부대낌의 상태‘란 아직 의미를 획득하지 못한 미정형의 ‘힘‘을 뜻하는 것이기도 하다. 그런 점에서 이 책은 바로 영혼의 동요로, 혹은 부대낌의 양태로 나타나는 그 ㅁㅣ정형의 힘에 초점을 두고 있는 것이다. 22

이 시대의 슬픔은 익숙한 공동체성을 촉발시키는 방향으로 이행되고 있다. 애도가 광장에서 극장으로 이동한 것과 이러한 이행은 밀접ㅎㅏ게 연관된다. 또한 이 시대의 슬픔이 익숙한 공동체성을 촉발하는 것은 재생산의 위기에 대한 감각과 밀접한 관련을 맺는다. 재생산의 위기라는 감각이 익숙한 공동체성을 촉발시키는 것은 논리적인 선후관계라기보다 서로 밀접하게 연동되어 있으며, 사회 여러 분야에 확산되어 있다. 또한 이 시대의 슬픔은 잃어버린 시대/세대에 대한 노스탤지어를 촉발하며, ㅇㅣ를 통한 익숙한 공동체성을 다시 불러들인다. 그러니 ‘우리‘의 슬픔은 극도로 정치적이며, 그 슬픔에는 어떤 ‘비판적 삶의 종말‘의 그림자가 짙게 드리워져 있다. 24

최근 20년간 한국 사회에 만연한 외로움은 한편으로는 위축되는 삶의 반경, 힘 관계에서의 수동적 지위에 ㄷㅐ한 불안감의 산물이기도 하다. 하지만 동시에 이는 끝없이 너를 부르는, 외로움이기도 하다. 그래서 이 외로움은 한편으로는 새로운 우정, 새로운 반려, 지금까지와는 다른 삶의 관계가 촉발될 수도 있는 다분히 정치적인 외로움인 것이다. 25

[소립자]가 68세대의 아이들 이야기이고, [1Q84]는 전공투 세대의 아이들의 이야기다. 혁명세서 사랑으로 라는 이행은 전공투, 68혁명, 1980년대로 상징되는 시대/세대의 ‘종말‘을 뒤로 ㅎㅏ면서, 새로운 시대/세대의 ‘윤리‘로서 사랑이 부상하는 방식을 공유하는 것은 아닐까 25-26
한국 사회에서 위기감이나 불안과 관련해서 중요하게 살펴볼 지점은 환멸이라는 이행의 방식이다. 환멸이란 환상이 깨어져나가는 것을 의미한다는 점에서 그 자체로 환상으로부터 다른 것으로 이행하는 표지이다. 26

“정동이 우리 안에 고도로 잘 투자되어서 더 나은 미래를 위해 무엇인가 마술적인 것을 제공해줄 것처럼 믿는” 것은 과도한 낙관이다. 또한 정동이 “이미 항상 진보적이거나 자유를 위한 정치학에 더 잘 봉합되어 있거나” 한 것도 아니다. 오히려 정동은 “아직 아님”의 지평에서 사유되어야 한다. “누구도 신체가 무엇을 할 수 있는가를 아직은 규정할 수 없다.” 27


볕뉘

0. 박근혜 정부가 들어서기 전, 2012년 여름 경에 출간된 책이다. 책을 보기전 제목 역시 무한히 정치적인 외로움이라고 해서 도통 무엇을 얘기하고 싶어하는지 가늠할 수 없었다. 시종 개념적인 언어도 전달하고자 하는 바와 달라 곤혹스러웠다. 스스로도 그러하지만 언어 선택과 전달에 신중과 노력을 기울여야 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사실 부제가 한국 사회의 정동을 묻다 이기에 골랐다. 그리고 될 수 있으면 출간 의도를 살피고자 하였다. 그러고보니 묻혀있는 책의 발견에 가깝다.

1. 밑줄다듬기에서 볼 수 있듯이 파시즘 연구의 확장의 방편으로 정동이론을 살펴보게 되었다고 한다. 박근혜정부가 끝까지 반면교사 역할을 해 줌으로써, 예상된 우려는 가시고 있지만 여전히 진행형이다. 새로움을 보려고 하지 않는 무지는 여전히 반복되고 있다. 대선주자들의 시선도 갇혀서 새로움이란 찾아보기 힘들다. 지금 우리 수준을 발견해내고, 보이지 않는 것들, 말없는 사람의 말을 찾지 않는다면, 정권만 바뀌어도 그리 나아질 것이 없다. 여전히 효율과 성과만을 고집할 것이기에 더 우려스렵다.

2. 자기계발, 자기경영의 신민들은 새로운 세상을 볼 수 없다. 나에게 갇혀 한 발자욱도 너에게 다가설 수 없다. 다른 삶과 ㄷㅏ른 일상, ㄷㅏ른 사유가 죽음으로만 자신의 존재를 증명하는 이들에게 스며들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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