뱀과 물 배수아 컬렉션
배수아 지음 / 문학동네 / 2017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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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머니는 어디에

뱀과 물, 배수아, 문학동네, 2017-11-10.


  난 좀 정치적인가. 소설 속 여왕과 득실거리는 쥐가 반복되어 나타날 때, 이것은 그런 이야기인가 싶었다. 아니 그런 쪽으로 생각이 나아가는 내가 있던가. 결국 처음부터 다시 읽은 책이 되었다. 그럼에도 제법 머리가 지끈거렸는데 한마디로 하자면 배수아의 책이란 말로 마지막 장을 덮었다. 어느 순간부터 작가의 이름 속으로 이야기가 종속된다.

  7편의 단편은 이어진 이야기처럼 동일한 장소와 사건, 인물을 등장시키고 있다. 이렇게 동일한 사람과 장소를 반복적으로 등장시킴으로써 작가는 무엇을 말하려고 하는 것인가. 충격의 떨림, 경악과 분노가 강렬한 이미지와 혼합된 『뱀과 물』을 읽어가는 것은 그렇기에 힘이 든다. 글을 이해하기도 전에 감정적으로 힘이 부친다.

  어린 왕자 속 보아구렁이가 코끼리를 삼킨 그림을 보면서 무섭고 징그럽다 생각한 적 없는데 밭일 하던 여성을 삼킨 비단뱀은 기사제목만 보고도 끔찍함에 몸이 떨린다. 동일한 뱀의 동일한 행위에 대한 내 반응이 다른 것이 실화에 대한 것이라면 단지 소설인 「뱀과 물」의 뱀에서 그려지는 이 자지러지는 끔찍함은 왜인가. 

  첫 단편 제목부터  「눈 속에서 불타기 전 아이는 어떤 꿈을 꾸었나」라니. 눈 속에서 불타는 아이의 모습을 기어코 상상하게 만드는 작가는 시종일관 충격적인 묘사를 서슴지 않음에도 톤이 한결같다. 화형대에 타버린 시신을 나무토막의 일부로 보는 것처럼 뭉툭하게 이야기를 날리고 있다. 

  단편들마다 소녀가 등장한다. 소녀라고 해야 할지 소년이라고 해야 할지 난감하니 그냥 아이라고 하는 것이 좋겠다. 이 아이들은 “일곱 살 생일까지는 남자애지만 이후에 여자애”가 된다. 생물학적인 변화는 아니다. 그저 여왕이 일곱 살 이전의 여자아이를 잡아가기 때문에 남자로 변장을 하며 살고 있을 뿐이다. 쫓아오는 여왕의 공포를 피해서 아이들은 부재하는 어머니를 찾아 낯선 곳을 향해 아버지와 함께 떠난다. 그 과정에서 부닥치는 고통의 현장들, 기억들이 존재하고 때로는 아버지의 부재를 경험하기도 한다. 이런 아이들이 살고 있는 터전은 두려움과 막막함이 가득한 세계, 그러니 아이들의 시절 또한 아름다울 리 없다.


“어린 시절은 망상이에요. 자신이 어린 시절을 가졌다는 믿음은 망상이에요. 우리는 이미 성인인 채로 언제나 바로 조금 전에 태어나 지금 이 순간을 살 뿐이니까요. 그러므로 모든 기억은 망상이에요. 모든 미래도 망상이 될 거예요. 어린아이들은 모두 우리의 망상 속에서 누런 개처럼 돌아다니는 유령입니다.”


  죽음과 시간이 반복되는 이야기의 줄거리를 쫓으려는 시도는 버렸다. 잡았다 생각하는 순간 사라지고 강렬한 이미지에 압도될 뿐이다. 마냥 쓸쓸하고 적막한 국경지대에 서 있는 느낌이랄까. 어디로 가야할 지 모르는 심정을 가득 안고서 기다리는 것이 희망인지 절망의 마감인지 모를 상태로 서 있는 기분이다.


   “저기 미친년이 간다.

 이 비밀스러운 결속이 나는 기쁘다.“


  여왕이 지배하는 나라에 어머니는 부재하며 아이들은 여성임을 감추고 살아야 한다. 그곳. 그곳은 마치 ‘여성’이라는 운명이 본질적으로 슬프게 아프게 흘러갈 것임을 예고하는 듯하다. 여성의 힘이 먹히지 않는 세상이라도 되듯이. 그곳에서 자라나야 하는 소녀들은 뱀과 물에 의해 폭력당하는 운명으로 귀결되어야 하는 것처럼. ‘뱀’과 ‘물’이라는 이름을 획득한 알몸에 황소 마스크를 쓴 두 남자. 학대와 윤간과 살해와 낙태를 감행하는  ‘뱀’과 ‘물’의 이야기에 소녀들이 일곱 살 이후에도 영원히 남장을 하고서 살아가기를 바라는 마음이 되고 만다. 잔인한 폭력의 경험으로 결속되는 이 슬픈 소녀들의 이야기가 소설 전반에 배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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며느라기 - 며느리의, 며느리에 의한, 며느리를 위한
수신지 지음 / 귤프레스 / 2018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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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거다. 

며느라기 - 며느리의, 며느리에 의한, 며느리를 위한, 수신지, 귤프레스, 2018-01-22.


  장례가 끝나고 난 뒤 수많은 감정 중에 ‘다행’이라는 안도감이 있었다. 세상에 다행이라니. 한 생명의 마지막 순간이 언제인지 명확히 알지도 못한 채 한밤중 닥친 소식에 망연하던 정신은 어디 가고 장례가 끝났다고 다행이라니. 슬프게도 다행이었다. 정말로 다행이었다.

  장례식 내내 슬퍼하기 이전에 전투적이 되었던 나. 돌아보면 장례 전까지 매일을 긴장 상태에 있었다. 두 명의 어머니가 병원에 계신 엄마에게 이입된 모양이다. 어머니와 시어머니 모두 병원에 계신 엄마는 매일을 시어머니를 방문했다. 물론 아버지와 번갈아 가시긴 했지만 미음을 끓이는 일은 엄마의 몫이고 할머니 상태를 묻는 시누이들의 잦은 전화에 답하고 나면 ‘우리 엄마한테도 가야 되는데’라는 말을 읊조리셨다.

  “할머니랑 외할머니랑 같은 날 돌아가시면 어떡해?”

  아버지는 할머니 장례에 엄마는 외할머니 장례에 가야한다는 생각을 가지고 한 말이었다. 그러나, 당연히 엄마는 시어머니 장례에 가야한다는 말이 돌아왔다. 이 말을 한 사람은 작은 어머니, 작은 며느리였다. 작은 며느리는 실제로 그런 집을 본 적이 있다며 그 집은 각자 자기 부모님 장례에 가기로 했다고 얘기했다. 그런데, 그런 집을 보았다는 얘기의 결말이 왜 우리 엄마는 자신의 엄마의 장례식이 아닌 할머니 장례식에 가야하는 것으로 귀결되나. 

  “큰며느리니까.”

  그 집은 다행히 ‘작은 며느리’라서 그렇게 하기로 했다고 작은 어머니는 말했다. 그 순간 또다시 더할 수 없는 경계를, 벽을 느끼고 말았다. 엄마는 아무말씀 하시지 않았지만 나중에 “그런 거다”라고 말했다. 커다란 돌덩이가 들어앉고 무수한 돌멩이가 날아오는 기분이 들진대 울엄마는 어땠을까. 그러니, 우습게도 난 장례식 순간순간 외할머니를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고 외할머니께서 돌아가시지 않은 것에 감사했다. 물론 슬퍼할 시간도 없었다. 한국의 가부장제 문화는 장례 기간에도 슬퍼할 시간을 주지 않았다. 그럴싸하게 경계짓는 아들과 며느리, 며느리와 시누이의 역할, 관계들.

  웹툰작 『며느라기』는 우리나라 거의 모든 가정의 모습을 그려놓았다. 적나라한 이 가족의 모습이 ‘내 가족’의 모습이 아니라고 ‘내’가 겪는 일이 아니라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이 누가 있을까. 『며느라기』에서도 느낀 것이지만 “며느리”들은 모두가 힘겨워하면서도 ‘함께’하지 않는다. 불편하고 찜찜한 무언가를 느끼면서도 결코 문제를 보려하지 않는 그림이 그려진다. 똑같은 문제를 인식하고 있지만 공감은 없이 나 혼자만 그 상황에서 벗어나려 안간힘 쓰고 있다. 왜 이렇게 문제를 느끼고 있으면서도 서로 힘겹다 말한마디, 연대할 말조차 잃어버리고 있는가. 가족이라면서.

  며느라기. 우리 엄마는 기꺼이 “며느라기”가 받겠다고 말했을까. 큰며느리는 이 가정에 들어와 자신의 목소리를 낼 수 있었던가. 의무와 책임이 크다면 큰며느리의 권리는 도대체, 무엇일까. 큰며느리는 이제 다가올 시아버지 제사를 준비하고 있다. 자신의 생일날 돌아가신 시아버지 덕분에, 생일날 제사음식을 준비해야 하는 나날이 오래되었다. 어떤 시누이는 그렇게 말했다. “생일이라고 사람들 다 모이라고 시아버지가 그날 돌아가신 거야.”

  좋게 들으라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마냥 곱게, 좋게 듣기엔 찜찜한 말들이 “며느리”들에게는 가해진다. 속상하자면 한도 끝도 없고 그렇다고 듣지 않았다고 하기엔 한으로 쌓일 말들을 며느리는 담고 있다. 나또한 ‘며느리’ 입장으로 고모들을 보면서 ‘시누이’라는 역할을 최대한 하지 않으려 하지만, 그건 또 모르는 일. 가부장제 문화에 길들여져 이제는 대꾸하기도 싫어져 그저 시간이 지나가기만, 일이 끝나기만을 바라는 것이 최선이 되어버린 날도 적지 않다. 그러니 또, 그렇게 누군가를 무언가를 비판하려 할 때면 못한 일이 생각나 움츠러들고 만다. 결혼 전 민사린이 똑부러지게 무구영에게 효도에 대해 일침하다가도 결혼 후 예쁨받는 며느리가 되기 위해 애쓰고 있는 것처럼 문화라는 것은 이렇게 사람을 만들어버리는 것인가. 모두가 힘겨워한지 오래되고 행복하지 않은 문화가, 지속되고야 마는 이유는 무언가.

  연애기간 처음 남자친구 집에 가면서 이것저것 준비하고 생각하는 김혜리에게 “가사도우미 면접 보느냐”는 물음이 이토록 명확한 물음으로 다가올 수가 없다. 명절이면 각자의 역할에 따라 입장이 명확히 바뀌는 모습이 문제를 해결하지 못하는 이유일 것이다. 일상의 모습이 드라마로 나타날 때 “세상에, 어떻게 저럴 수가”라며 흥분하면서도 “우리집은 안그래”, “나는 안그래”라고 한다는 얘기를 많이 들었다. 이제쯤은 변하겠거니 하면서도 아직은 먼 길. 수없이 이런 이야기들이 난무해도 늘, 내가 겪는 일은 아니라며 나는 아니라며 버티는 것일까.

  『며느라기』에서는 모두가 힘겨운 표정을 짓는 가운데 쇼파에 앉은 ‘아버지’만이 그대로다. 그 어떤 불편한 표정도 없다. 전혀 불편함을 느끼지 않는 존재, 그 존재로 인해 이 사회가 이렇게 유지되고 있다는 현실을 『며느라기』그림을 통해서 확인하게 된다. 불편하고 속상하고 부당함을 느끼는 모두가 밖으로 나간 상황에서도 쇼파에 드러누운, ‘아버지’라는 존재. 늘 고부갈등만이 부각되고 있지만 이런 문제의 중심은 ‘아버지’라는 존재임을 다시금 깨닫는다. 그럼에도 이 땅의 며느리들은 시어머니, 시누이, 남편, 며느리들 서로간의 감정적인 소모전으로만 치닫고 있다. 무어 그리 큰 권력이라고 떡 버틴 ‘그’로 인해 행복하지 않은 삶들이 이어져야 된단 말인가. 이제 세상이 바뀌었다고 딸에게 ‘그런 식으로 살지 말라’고 말해놓고 돌아서서 며느리에게는 ‘그렇게 살아야 하는 거야’라고 말하는 변화.

  “그런 거다”

  같은 며느리에게서 ‘며느리 역할론’이 나왔을 때 느껴야 했던 자조가 더 컸던 것은 내 편이 되어줄 사람이기에, 그 힘겨움을 가장 잘 알 사람이라고 생각했던, 기대했던 바가 있기 때문일 것이다. 오래도록 며느리의 힘겨움이 토로되면서도 변화가 없던 것이 그 상황에서 얼른 벗어나고픈 욕구가 강한 나머지 ‘나’에게만 집중해서일까. 각자가 살아남는 방법밖에 달리 없었기에. 같이 힘겨움을 나누고 방법을 고민하지만 그 전투력은 또한 실상에서 유용하게 활용되지 못하기도 하고. 그런 걸까. 정서적으로 육체적으로도 힘겨운 큰며느리의 삶을 사는 엄마를 보면서 수년을 같은 고민을 하고 있었다는 생각이 드니 슬프다.

  더 많은 가족이 모이면 모일수록 가족 내에서의 근본적인 변화 방법을 모색한다는 게 어려운 일이 되었다. 의지를 가지고 있다 한들 무너져 버리기도 하고. 가족들 스스로가 변화의 주체가 되어야 하는 것은 맞지만 가족만으로는 해결이 힘들다는 것을, 변화가 쉽지 않다는 것 또한 느낀다. 그런데 이 변화를 위해 가부장제의 확장된 틀인 사회의 역할을 생각하고 있으면 희망보다 자조가 먼저 치솟는다. 미투나 여성혐오에 대한 사회의 반응이 어떻게 흘러가는지를 보았기 때문이다.

  방법과 대안에 대한 얘기도 무수히 흘러왔겠지만 '하지마‘라는 것으로만 흘러왔는지도 모르겠다. 딱히 바꾼 일도 없는데 벌써부터 지치게 된다. 이런 얘기에는 감정이입도 많이 돼서 쉬이 지쳐버리게도 된다. 그래도 많은 이들이 감정이입이 되다 보면 쇼파에 누운 아버지도 언젠가는 쇼파에서 내려오는 일이 많은 가족들이 쇼파에서 멀어져 집 밖을 배회하는 일이 소멸되는 날이 오겠지. 그런 깨달음을 느끼도록 이런 책들이 나오는 것이고. 생각해보니 쇼퍼에서 책읽기만큼 편한 일이 어딨나 싶다. 더구나 그림책이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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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복지사가 말하는 사회복지사 - 22명의 사회복지사들이 솔직하게 털어놓은 사회복지사의 세계 부키 전문직 리포트 17
김세진 외 지음 / 부키 / 2013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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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복지사가 말하는 사회복지-

  22명의 사회복지사들이 솔직하게 털어놓은 사회복지사의 세계


  『사회복지사가 말하는 사회복지사』는 22명의 사회복지사들의 자신의 업무 이야기를 전한다. 그저 힘들고 어려운 사람을 돕는 일이 사회복지사라고 생각하겠지만 사회복지사라고 통칭되는 이들의 활동 영역은 무수히 많다. 그 대상자만 하더라도 노인, 청소년, 아동, 장애인, 청소년 등등으로 나뉘고 각각을 담당하는 복지관과 센터, 병원, 학교, 조합, 시민 단체 등등 활동기관은 무수하다. 사이버 시대이니만큼 사이버 공간에서도 복지 업무가 이뤄진다. 이 책에서는 실제 활동하는 영역에서의 일을 생생히 보여주고 있기에 사회복지사의 업무의 영역이 이렇게 천차만별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사회복지’는 사람에 대한 이해를 전제로 한다. 그리고 그 이해의 출발은 자신을 이해하는 것이다. 클라이언트의 갈등, 직원과의 갈등 속에는 항상 감추어진 내가 있다. 스스로에 대한 성찰 없이 사회복지의 길을 간다는 것이 ‘허망’하기까지 한 일이다.


  글쎄, 어떤 직업이든 직업을 선택할 땐 자신에 대해서 잘 알아야 한다. 갈등이란 어디에서나 발생할 수 있는 일이니까. 하지만 ‘사회복지’ 업무에서는 이런 염려 외에도 많은 염려가 붙는다. 단순히 업무와 관련된 ‘자격증’을 갖춘 것과는 별개로 어디서든 요구하는 직장인으로서의 자세, 마음가짐을 빼고서도 ‘사회복지’를 업무로 하는 사람에게 요구되는 것이 있다. 실제 사회복지사들은 사회복지의 이념과 사회복지사의 의무를 제정한 사회복지사 윤리강령이 있다. 이런 윤리강령을 성실히 지키고 모든 자세를 갖추고 업무에 임하는데도 사회복지사를 힘들게 하는 것은 뭘까.

  출근한지 2개월쯤 된 사회복지전담공무원의 투신 뉴스를 접한 지 열흘쯤 지났다. 근무환경에 대한 조사가 이뤄지고 투신과 업무 관련성에 대한 감사가 아직 진행 중인지 이후의 소식은 들려오지 않는다. 사망한 줄 알았는데 기사를 보니 중태인 모양이다. 쾌유를 빈다.

  많은 청춘들이 어려운 취업관문으로 힘들어 하고, 공무원 준비에 매달리고 있기도 하다. 공무원과 취업이라는 두 마리 토끼를 잡은 그는 다른 이들에겐 꿈을 이룬 성공한 사람이다. 이제 출근한지 두달, 힘들고 어렵기도 하겠지만 아직은 취업성공에 대한 기쁨이 더 크지 않을까 싶은데 직장생활에서의 힘겨움을 토로하며 투신한 소식에 많은 이들이 충격받았다. 이제 막 직장생활을 하면서 맞닥뜨리게 되는 당연한 업무와 인간관계의 어려움이 있을텐데 조금 더 참아볼 것이지 하는 안타까움도 들리기도 한다. 하지만 그가 남긴 메모에 대다수의 사회복지사가 수긍하고 있다는 얘기가 그냥 지나쳐지지 않는다.

  '지옥 같은 출근길' '사람마다 속도의 차이는 있는데 냉정한 사회는 받아들여주질 않는다' 그리고 ‘사회복지사의 인권보장이 시급하다'는 메모. 이로 인해 ’사회복지사‘의 업무가 또다시 이슈가 되었다. 사회복지사의 열악한 업무환경에 대해선 오래도록 지속되어 온 이야기다. 열악한 노동환경에 비해 사회복지사들을 힘들게 하는 것은 사회복지사에게 부과하는 ’이미지‘다. 어떤 경우라도 남을 돕는 일을 하는 사람이라면 그런 것쯤은 감수해야 한다는 인식이 팽배하다. 대단한 일을 하는 사람이라는 인식도 마찬가지다. 사회복지사라는 직업에 대한 선하고 착한 일을 하는 훌륭한 사람이라는 이미지가 고착되어 힘들고 어려운 일을 참고 견디는 것이 당연하다는 은근한 강요가 있다. 그것이 사회복지사들을 힘들게 하는 요인이다.

  사회복지전담공무원은 민간 사회복지사에 비해서 처우가 높기에 사회복지공무원 선발이 있을 때면 민간에서의 대규모 이직이 발생하곤 했다. 하지만 사회복지공무원의 자살 소식은 끊이지 않았다. 처우가 좋다는 사회복지공무원이 과중한 업무와 이로 인한 스트레스가 자살할 정도라면 다른 분야에서 활동하고 있는 사회복지사들은 상황은 어떠하단 말인가. 어느 직업에선들 인권이 중요한 문제가 아니겠냐만은 유독 사회복지사라는 직업에 ‘인권’이라는 말이 계속 붙어 있음은 의미심장하다. 그만큼 잘 되고 있지 않다는 것을 말하고 있지 않을까. 사회복지대상자들의 인권을 보장하는 업무를 맡고 있는 사회복지사들 자체의 인권이 침해받고 있다면 건강하게 그들이 보호하고 보장해야 할 대상자들의 인권을 챙길 수 있을까.

  책에서 사회복지사들은 지금의 업무를 맡기까지 어려움과 스트레스가 있었음을 얘기한다. 자신에게 맞는 활동영역을 찾고서도 업무에서의 힘겨움은 줄지 않는다. 사람을 상대로 하는 일이다보니 그와 얽힌 갈등관계도 담겨 있고 감동과 희열의 순간에 관한 이야기도 담겨 있다. 사회복지에 관해서는 이 후자에서 오는 카타르시스를 더 중시여기는 듯하다. 물론 모든 갈등관계를 풀고 사회복지대상자들의 변화된 모습을 이끌어내는 것은 놀라운 일이다. 기적과도 같은 기분을 느끼게 될 것이다. 그러나 이런 감정을 가지는 것을 보상처럼 여기며 그 앞의 모든 힘들 과정이나 상황에 대해서 제대로 보려 하지 않는다. 결과만을 따져서는 안되는 것이 또한 사회복지 영역 아닌가. 그런 점에서 사회복지가 현실과 이상이라는 괴리에서 ‘이상’을 추구하며 그것에 가치를 두면서 ‘현실’에 있는 사회복지사들을 외면하고 있는 듯하다. 열정페이처럼 사회복지사들의 마인드를 강요하며 이상을 추구하자는 한마디 말로 현실적인 힘겨움을 부족한 마인드와 자세 때문이라 치부하는 그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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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정희와 나 - 2017 제17회 황순원문학상 수상작품집
이기호 외 지음 / 다산책방 / 2018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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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정희와 재이라면 소나기는 없다


한정희와 나-2017 제17회 황순원문학상 수상작품집, 다산책방, 2018-01-22.


  2017 황순원문학상 수상작은 황순원 작가의 「소나기」의 소년과 소녀가 보이지 않았다. 그 애틋하고 아름다운 전원과 사람의 풍경이 으스스한 풍경으로 바뀌었다. 풍경의 으스스함이 사람의 마음에도 그림자를 드리웠는지 사람의 마음이 모여 으스스한 풍경을 만들었는지 모를 정도로 폭력이 일상의 모습이 되었다. 학교에서 군대에서 노인들에게 여성에게 가족에게 가하는 이 폭력의 이야기는 또한 낯설지 않아서 놀랍지도 않다. 이런 삶을 모두 힘겨워하면서도 어째서 혐오와 폭력은 일상의 영역이 되었는가. 그것은 이해의 문제일까.

  누군가를 이해하려는 결심을 실패로 이끄는 것은 의외로 작고 사소한 일에서다. 누군가를 이해하겠다, 진정으로 대하겠다는 마음가짐은 크나큰 다짐과 의지와 결의를 필요로 하는데 비해서 훅 무너지는 것은 사소한 말, 사소한 행동 하나다. 왜 그렇게 의지를 다져야 했는지 민망하고 무색할 정도로 쉬이 무너지는 터에 이해하려 하지 않으려던 마음의 크기가 컸음을 알고야 만다.

  권여선의 「손톱」 속 소희는 오늘도 새벽부터 먼 출근길을 떠난다. 엄마와 언니에게서 차례로 버려지며 그들의 빚을 안고 사는 20대 초반의 소희가 피멍 든 손톱으로 절규하는 목소리가 아프게 다가온다. 엄마와 언니가 없어도 살아왔기에 손톱없이 사는 것쯤이야 별 거 아니라고 독하게 외치는 소희는 월급을 받으면 최소생활비를 제하고 얼마나 빚을 갚을 수 있을지 계산하며 산다. 희망어린 기대는 월세와 보증금이 오를 거라는 생각에 이르자 공포와 절망에 휩싸인다. 희망없는 청년의 모습을 보여주는데 소희에게도 누군가 옆에 있었다면 엄마와 언니들처럼 착취하고 버리고 갈까, 아니면 함께 그 고통을 헤쳐 나갈까가 궁금해졌다.

  이기호의 「한정희와 나」에서 나의 아내는 어린 시절 집안 형편으로 다른 부부의 집에서 잠시 자란 적이 있다. 그곳에서 따쓰하고 편안하게 보냈던 아내가 그 부부가 입양한 아들의 딸, 손녀 한정희를 잠시 맡자는 제안에 그 옛날 아내를 맡아 주었던 부부처럼 되기로 한다. 기꺼이 고모부가 되어 여러 차이들을 이겨내며 적응하던 나는 한정희가 학교폭력의 가해자로 반성할 줄 모르는 자세를 보며 ‘환대’를 거둔다.


나는 어느 책을 읽다가 ‘절대적 환대’라는 구절에서 멈춰 섰는데, 머리로는 그 말이 충분히 이해되었지만, 마음 저편에선 정말 그게 가능한가, 가능한 일을 말하는가, 계속 묻고 또 묻지 않을 수가 없었다. 신원을 묻지 않고, 보답을 요구하지 않고, 복수를 생각하지 않는 환대라는 것이 정말 가능한가, 정말 죄는 미워하되 사람은 미워하지 않는 일이 가능한 것인가, 그렇다면 죄와 사람은 어떻게 분리될 수 있는가, 우리의 내면은 늘 불안과 절망과 갈등 같은 것들이 함께 모여 있는 법인데, 자기 자신조차 낯설게 다가올 때가 많은데, 어떻게 그 상태에서 타인을 이해하고 받아들일 수 있는가……나는 그게 잘 이해가 되질 않았다. 나 자신이 다 거짓말 같은데……


  김애란의 「가리는 손」에서 이혼 후 아들 재이와 사는 ‘나’는 동네 청년들이 노인을 폭행하는 동영상 속에서 인형뽑기를 하고 있던 재이를 본다. 노인이 폭행을 받는 동안 신고하지 않은 재이가 동영상이 공개된 후 목격자로서 조사받는 과정에서 받을 상처와 충격, 혐오가 만연하는 가운데 이혼가정이자 다문화가정인 재이가 앞으로 겪을지 모를 폭력에 걱정하는 ‘나’는 재이와의 대화를 시도한다. 그 과정에서 동영상속에서 아이가 입을 가리는 장면이 폭행을 목격한 충격의 몸짓이 아니라 노인을 폭행한 이들의 혐오의 말들을 들으며 ‘웃는’ 것을 가리는 모습일지 모른다는 충격을 받는다.


“너무 스트레스 받지 마. 가진 도덕이, 가져본 도덕이 그것밖에 없어서 그래.”   

오래 전 당신과 팔짱을 끼고 걸을 때, 사람들이 자꾸 쳐다보다 당신은 대수롭지 않게 말했지. 병원 어르신들을 보면 가끔 그 말이 떠올랐다. 나는 늘 당신의 그런 영민함이랄까 재치에 반했지만 한편으론 당신이 무언가 가뿐하게 요약하고 판정할 때마다 묘한 반발심을 느꼈다. 어느 땐 그게 타인을 가장 쉬운 방식으로 이해하는, 한 개인의 역사와 무게, 맥락과 분투를 생략하는 너무 예쁜 합리성처럼 보여서, 이 답답하고 지루한 소도시에서 나부터가 그 합리성에 꽤 목말라 있으면서 그랬다.


  폭력이 일상화된 데에는 가져본 도덕의 크기가 작기 때문이었을까. 누군가를 이해하는 방식은 ‘그가 가진 역사와 무게, 맥락과 분투’를 알아야 한다는 것을 모르지 않는다. 다만 이제는 한 개인을 이해하는 일을 위해 필요한 역사가 모두가 동일하다는 생각을 지울 수 없다는 것이다. 우리 사회가 갖는 이 사회적인 분위기와 구조가 개인의 특별한 상황을 따로 두고 있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실감하게 된다. 자연스럽게 형성되어 굳어져 버린 이 모습들은 정말로 우리가 가져야 도덕들을 물리쳐버린 결과가 아닐지, 우리가 추구해야 하는 것을 등한시한 결과가 아닌지 생각하게 된다.

  그러니까 오늘날 한정희와 재이, 이 둘이 만나 그려갈 풍경은 결코 소나기일 수 없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이 둘은 서로 혐오의 언어들을 쏟아 부으며 기꺼이 웃어제낄 것이다. 소년과 소녀는 도시의 무법자가 될지도 모른다. 소녀의 죽음은 실제로는 폭력에 의한 살인이 될지도 모른다. 소설 속 한정희와 재이가 타인의 고통에 대해 반응하는 저 무심함과 희화화, 반성없음을 떠나 무엇이 잘못된 것인지 모르는 태도는 앞으로도 이어질 어두운 세계를 필연적으로 떠올리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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플랑드르 화가들 - 네덜란드.벨기에 미술기행
금경숙 지음 / 뮤진트리 / 2017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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풍차와 튤립은 보이지 않는 그림

플랑드르 화가들 - 네덜란드·벨기에 미술기행, 금경숙 저, 뮤진트리, 2017.


  네덜란드에서 돌아가는 풍차라거나 피어 있는 튤립을 본 적 없다. 그럼에도 네덜란드 하면 풍차와 튤립을 떠올리는 이 자동적인 반응은 네덜란드에 대해서 최초로 ‘배운’ 것이 그것이기 때문일 것이다. 언제였는지는 모르지만 암기처럼 배운 네덜란드의 이미지는 이 책을 읽고서 조금은 바뀌게 되려나. 미술책에서 본 많은 화가들의 고향이 네덜란드라는 사실을 새롭게 각인하게 된다.

  네덜란드에서 살고 있는 저자가 직접 네덜란드와 벨기에 화가들의 자취를 쫓으며 들려주는 그들의 인생과 그림 이야기에는 풍차와 튤립은 전혀 들어 있지 않다. 네덜란드와 벨기에의 역사가 있고 드문드문 들었던 이야기의 장소라는 사실을 알게 된다. 반 고흐와 렘브란트의 고향과 『플란다스의 개』에서 네로가 그토록 보고 싶어하던 성당 속 그림이 있는 장소를 되짚는 기회가 된다.

  플랑드르는 현재의 프랑스 노르 주, 벨기에의 동플랑드르·서플랑드르 주, 네덜란드의 젤란트 주를 이른다. 현재는 세 나라가 어우러진 곳이고 미술의 역사에서 ‘플랑드르 화가들’이란  네덜란드와 벨기에에서 활동한 화가들을 가리킨다. 이 책에서는 얀 판 에이크, 히에로니무스 보스, 피터르 브뤼헐, 루벤스, 프란스 할스, 렘브란트, 페르메이르, 반 고흐, 페르낭 크노프, 제임스 엔소르, 몬드리안, 르네 마그리트 12명의 화가들의 작품과 생애와 흔적을 보여준다.

  수많은 예술가들이 영감을 찾아 방랑하기도 하고 더 배우기 위해 고향을 떠난다. 그렇다면 ‘플랑드르 학파’라 불릴 정도로 이 지역에서 화가들이 활동할 수 있었던 배경은 무엇일까. 그곳에서 태어났다는 아주 당연한 이유 이외에 그들이 어떻게 영향을 주고받으며 그림을 그렸는지 그들 그림에 나타난 특유의 분위기는 무엇인지가 플랑드르 역사와 함께 펼쳐진다.


예술가들이 대체로 환경을 거스르는 사람들이긴 해도, 고흐 이전의 플란데런 거장들은 그 시대의 중심지이자 그림으로 생존할 수 있는 사회 환경과 예술가들의 풍성한 움직임이 있던 곳에서 태어나거나 자랐음을 새삼 떠올리게 된다. 예술가를 알아보고 후원을 아끼지 않던 시대의 남다른 예술가들을 끌어들여 붙박이형으로 만들었으나, 이제 세상은 달라졌다.


  우리나라 통영에 수많은 예술가들이 머물고 활동했던 것처럼 플랑드르 역시 해안가로 많은 물류들이 드나들 수 있었고 여러 국가들이 인접해 있는 지역적 특성이었다. 또한 사람의 삶이란 주어진 환경에 영향받을 수밖에 없기에 네덜란드와 벨기에의 정치, 경제, 문화는 화가들에게 그림을 그릴 수 있는 소재와 의지를 주기도 한다.


네덜란드 역사에서 1672년은 ‘재앙의 해’로 불린다. ‘민중은 이성을 잃었고(redeloos), 정부는 가망이 없고(radeloos), 나라는 구할 길이 없다(reddeloos)'는 말이 공공연히 떠돌았다. 영국과 프랑스가 네덜란드를 침입해왔고, 예상치 못한 전쟁에 민중이 분노하여 권력자들은 하야했다. 총독 부재기간 동안 의회의 공화주의자들은 전쟁보다는 조약으로 대립을 완화하려 했으나, 평화는 이들의 의지대로 찾아와주지 않았고 영국과 해전을 치러야 했다. 네덜란드가 이겼다고는 하나 피해는 만만찮았다.


  언제나 세계는 전쟁이 끊이지 않았고 플랑드르 지역도 예외는 아니었다. 더구나 계급사회였으니 그림을 향유하는 계층은 언제나 귀족들이나 종교인들이었다. 그런 분위기에서 늘 권력에 억압받는 민중의 현실을 폭로하는 그림을 그리는 화가들이 종교권력의 위선을 폭로하는 화가들이 있었다. 그리고, 민중들의 일상의 모습을 담담히 그려내는 화가들이 있었다. 사진이 발명되지 않았던 시기에 그림은, 화가는 암울한 현실을 기록하는 역할을, 위선자들을 폭로하는 역할을, 억압당하고 피폐한 삶에도 부패한 권력에 강력히 저항하는 민중의 모습을 기록했다.


예술가들의 삶이라는 프리즘을 통해 보면 세기말 벨기에는 신비롭고 근대화된 사회였지만, 노동자들에게는 생존권과 참정권을 쟁취하려는 투쟁의 시대이기도 했다. 그러니까 엔소르가 이 그림을 그릴 때에는 기득권이라 할 가톨릭 정치세력에 맞서 사회민주주의 정치세력이 부상하던 참이었다.


  화가가 그림을 그린 곳이 어디인지를 궁금해하는 마음은 누구에게나 있는 모양이다. 네덜란드 일상 풍경을 잘 담아낸 페이메이르가 그린 두 개의 아치가 나란히 있는 문이 그려진 그림의 장소는 진짜 있는 것이지, 화가가 상상한 장소인지 많은 이들이 궁금해한다. 결국 운하세 대장까지 찾아서 그림속 장소를 찾아낸다. 저자가 찾아가는 그림속 장소는 그림에서 보던 것과는 달라졌지만 그냥 그림속 장소라는 이유로 정감어리게 여겨진다. 과거의 플랑드르와 현재의 플랑드르의 간격이 그 시대를 살며 활동한 화가들의 생애와 그림들로 인해 연결된다. 플랑드르의 역사와 함께 화가들이 자취가 가득한 플랑드르 지방으로의 여행은 렘브란트, 마그리트, 루벤스 등 널리 알려진 화가의 명성에 의해서도 보고프지만 점차 플랑드르 지방이 지니는 매력을 느끼고 싶은 기운까지 더하여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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