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흘 그리고 한 인생
피에르 르메트르 지음, 임호경 옮김 / 열린책들 / 2018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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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의 재해

사흘 그리고 한 인생, 피에르 르메트르, 열린책들, 2018-04-15.


  얼핏 창밖을 보았을 때 주차된 차량 사이에 숨은 듯 서 있는 한 소년에게 시선이 갔다. 아무리 보아도 중1은 넘지 않은 듯한 소년의 손은 간격을 두고 입을 향했다. 내가 주시한 것은 소년의 손가락 사이에 든 ‘무언가’였을 게다. 절대 새우깡으로 보이지 않는 그것. 내가 본 것이 착각이리라 생각하는 사이 소년은 사라졌고 담배를 본 게 아닐 거라고 생각하려는 내가 이상하고 우습게 느껴졌다. 새벽 여섯시 즈음 발생한 교통사고, 무면허 고교생이 운전했고 탑승자 다섯은 중고생이며 이 중 네 명 사망, 음주 여부 확인하는 중이라는 기사를 보고서도 그랬다. 

  뭐랄까. 어떤 스탠스를 취해야 할 지 몰라 생각을 정지시켜 놓은 것이 맞을 것 같다. 이 책의 주인공, 앙투안에게 딱 그랬다. 어떻게 앙투안을 바라봐야 할지 난감했다. 그의 인생을 위로하지도 격려하지도 질타하지도 못한 채 애매하게 있었다. 감정과 이성이 제각각 분리되어 서로의 의견을 내달리는데 마음이 편해지지가 않았다. 최근의 잇따른 사건들, 촉법소년들이 벌인 무수한 사건들이 겹쳤기 때문이기도 하겠지만 그것 때문만은 아니었다. 어쨌든.

  뿔난 소년의 주먹 한방에 여섯 살 아이가 죽었다. 아이는 무덤에 곱게 묻힐 기회도 없이 나무 구멍에 은폐되었다. 자신도 모르게 아이를 죽이게 된 앙투안이 제일 먼저 할 일은, 한번 더 아이를 후려치는 일이었다. 왜 죽어 버렸느냐는 울부짖음과 함께. 실종된 아이, 레미를 찾기 위해 작은 마을 보발 사람들이 수색을 벌인다. 곧 마을에는 엄청난 재해가 닥친다. 사흘이라는 시간, 운명은 누구의 편이었을까. 소설은 레미를 죽이고 시신을 은폐한 열두 살 앙투안의 불안과 공포, 혼란이 전반을 차지한다.

  

삶은 결국 승리해야 한다……. 이것은 그녀가 너무나 좋아하는 표현이었다. 이것은 삶이 있는 그대로가 아니라, 그녀가 바라는 상태로 계속 흘러가야 한다는 것을 의미했다. 현실이란 것은 각자의 의지에 달린 문제일 뿐이고, 쓸데없는 걱정들에 사로잡혀 봤자 아무 소용없으며, 그것들을 쫓아내기 위한 가장 확실한 길은 그것들을 무시해 버리는 것이었다.


  앙투안의 어머니 쿠르탱 부인은 막연한 불안감과 공포에서도 그녀만의 방식으로 타개하는 힘을 가지고 있었는데, 아들에게는 완벽하게 전수되지 않은 듯하다. 마을 사람들 모두에게 닥친 재난은 어린 레미를 찾는 일을 이차적 관심사로 내려버리고 레미의 죽음을 당연시했다. 그렇게 십이년, 앙투안은 레미의 일을 추억의 한 사건으로 인식하며 살았지만 순간순간 들이닥치는 공포와 고통, 불안으로 시달렸다. 고향을 떠나 살고 있으니 삶은 결국 승리했을지 모르나 그 일을 쉬이 ‘무시’해 버리지는 못했다. 다시 고향으로 돌아와야 하는 일이 생겼고 레미의 유골 또한 발견되었다. 용의자로 추정되는 이의 머리카락과 함께. 다시, 공포와 불안에 시달리는 ‘성인’ 앙투안의 심리가 이어진다.


동이 텄을 때, 그는 자신이 에밀리와의 그 일을 통해 스스로를 심판한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가 범한 죄에 대한 형벌은 교도소에서 세월을 보내는 게 아니라, 그가 미리부터 혐오해 마지않던 삶을, 그가 끔찍이 여기는 모든 것들로 이루어진 삶을 보내는 것이었다. 보잘것없는 사람들 곁에서, 그가 증오하는 환경 속에서 그가 좋아하는 일을 하면서 평생을 보내는 것이었다…….

이게 바로 그의 형벌이었다. 그의 삶 전체를 내놓는 대가로 완전한 자유의 몸으로 죗값을 치르는 것이었다.

아침에 앙투안은 자신의 패배를 인정했다.


  앙투안이 자신의 패배를 인정했을 때, 나도 인정했다. 애매하게 있는 내 마음에서 좀더 무게가 실리는 것이 무엇인가를.

  자신도 모르게 살인을 저지른 앙투안에 대해서는 연민하지만 앙투안이 그 죄를 은폐하기로 한 ‘의지’에 대해서는 그렇지 못했다. 어쩌면 나름 앙투안은 죗값을 치르기 위해 노력했다고 말할 수 있는 건가 생각해보기도 했다. 마을에 닥친 자연재해가 아니었다면 달라졌을까. 조금 양보해서 자연재해 탓이라고 하자. 자연재해에 따른 위약금이나 환불이 없기도 하니 사흘의 힘겨운 사투를 벌인 앙투안의 일이 덮인 건 자연재해 때문이라고 하련다. 생각하는 바는 성인 못지않으나 ‘고작 열두살’일 뿐인 앙투안이니 이해를 가지기로 하자.

  하지만 ‘성인’ 앙투안에게서는 달라진다. 앙투안은 고작 자신의 패배를 인정했을 뿐이다. 앙투안의 패배 선언에서 일순간 분노의 감정이 치솟아 레미를 죽게 했던 어린 앙투안처럼 내 마음은 순식간에 냉랭해졌다. 앙투안의 처벌이 십이년 동안 유예된 것이라 한다면 앙투안의 삶은 보다 성실하고 착한 형태였어야 한다고 나는 생각하고 있었던 모양이다. 한순간의 실수도 없이 그는 모범적인 삶을 보여줘야 했다고. 그래서 어린 레미를 때리던 순간의 감정처럼 움직인 앙투안의, 아니 ‘성인’ 앙투안의 행동의 결과에 대해 연민하지 못하는 것이구나라고. 기본적으로 앙투안이 죄인이라는 생각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기도 하고 원하지 않는 사람과 환경에서 살아가는 것이 자신이 레미를 죽임으로써 받는 형벌이라고 여기는 그 마음에 대한 반발인지도.

  어느 날엔가 또다시 레미를 죽인 범인을 파헤치는 일이 생긴다면 앙투안은 어떻게 할까. 또다른 은폐를 위해 어떤 일을 벌이지 않을까. 이 명백한 자기합리화에 나는 떨고 말았다. 그러나 나또한 앙투안처럼 하고 있다는 사실에서 오는 떨림이다. 원하지 않은 일을 억지로 해야 하는 상황이 될 때면 무언가 잘못한 일에 대한 벌이 아닐까, 그렇게 생각해왔었다. 이 깨달음의 불편함이 길게 갈 듯하다.

  소설은 흡입력 있게 읽혔다. 추리와 스릴러라기엔 애매하고 세밀한 심리묘사가 좀더 눈에 띄었다만 이 책 소개를 도스토예프스키의 죄와 벌과 비교하는 건 너무 심하게 나갔다 싶다. 다행히 책을 다 읽고나서야 그 문구를 보았기에 망정이지, 그렇지 않았다면 실망했을 것이다. 아, 그리고…모든 것은 자연재해 탓이라 했지만, 요즘 자연재해의 대부분은 결국 ‘인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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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의점 사회학
전상인 지음 / 민음사 / 2014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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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 그리고 편


편의점 사회학, 전상인 저, 민음사, 2014.


  2018년 6월 22일자 중앙일보는 [강남엔 112개, 도봉엔 1개···한국점령 스타벅스의 비밀]이란 기사를 실었다. 소위 ‘문화를 판다’는 스타벅스의 전략이 한국시장에 ‘먹히며’ 승승장구하며 영업이익 증가는 물론 신규 매장 또한 줄을 있고 있다는 것이다. 특히 서울의 스타벅스 매장수가 미국 맨해튼을 포함한 뉴욕시 5개구 전체 매장수보다 100개가 많다고 한다.

  미국 자본주의의 상징인 스타벅스가 파는 문화라는 게 ‘소비’에 초점 맞춰진 자본주의의 문화 그 이상의 특별한 게 있는가 생각되지만, 한정판 스타벅스 아이템을 사기 위해 밤새 줄짓고 스타벅스 매장만을 이용하는 사람들에게는 내가 보지 못하는 스타벅스의 ‘매력’이 있을 것이다. 생각해보면 나 또한 적지 않게 스타벅스 매장을 이용했는데 그것은 언제나 ‘눈에 잘 띄었기에’ 그랬다. 어쨌든, 이 기사는 편의점의 출발지인 미국과 최대 발흥지라는 일본을 제치고 인구 대비 편의점이 가장 많은 나라 한국을 떠올리게 한다. 완전한 스타벅스 공화국을 향해 나아가는 모습이 『편의점 사회학』에서 보는 모습과 닮았다.

  전상인 교수는 『편의점 사회학』에서 우리나라에 편의점이 성행하는 현상에 관해 설명했다. 놀랍게도 편의점은 울릉도, 백령도, 마라도, 금강산, 개성공단, 구치소에도 입점되었고 단순히 물건을 판매하는 것 이상의 영역을 확보해가고 있다. 각종 공과금 수납 서비스, 민원서류 발급 등의 공공서비스 이외에도 아동 안전 지킴이와 같은 치안 영역이나 독거 노인 보호・관리라는 사회 복지 부문에까지 진출하고 있다. 이처럼 편의점이 단순히 물건을 판매하는 것 이상의 기능을 확장하려는 이유는 뭘까. 

  저자는 일상에서 편의점을 편리하게, 부담없이, 시시때때로 이용하는 상황에 대해 의문을 갖는다. 우리는 편의점에서 무엇을 사고, 왜 사는가. 저자는 “오늘날 우리는 편의점에 의해 ‘소비하는 인간’으로 만들어지고 길들여지는 측면이 있다”고 말한다. “필요에 의해서 편의점을 찾는 것이 아니라 편의점에 의해서 필요가 생기는 논리 구조”이며 편의점은 소비는 “무언가 고상한 행위를 하고 있다”라는 문화인으로서의 자부심을 느끼도록 만드는 영업전략을 구사하고 있다는 것이다. 하지만 편의점에서는 점원과 손님의 물건 거래 이외에 인간적인 교류는 없다. 하지만 이 기계적인 무관심이 도시적 심성에 부합하는데 일명 ‘무관심의 배려’라고 표현한다. 편의점이 가지는 편리성, 깨끗함의 속성에 특별히 불편함을 느끼지 않는다.

  다양한 상품을 구비하고 있는 편의점이긴 하지만 ‘푸드몰’인듯 편리하게 이용할 수 있는 음식 판매가 증가하고 있다. 나라 전체가 ‘먹방’ 프로그램이 대세이기도 하지만 ‘편의점 푸드점화’ 현상은 사회 양극화 때문이라고 저자는 지적한다. 88만원 세대의 밥집이 편의점이라는 말이 나올 정도인데, 경제적 약자들이 편의점 이용률이 증가한 것으로 보고 있다.

  또한 편의점은 눈에 띄게 띄지 않게 ‘을’을 낳는 공간이다. 알바생의 일터로 자리잡아 열악한 임금노동의 ‘을’이 되게끔 하고, 가맹점주는 본사의 횡포를 감내하는 ‘을’의 역할을 맡아야 한다. 그렇다면 편의점을 애용하는 소비자는 ‘갑’인가. 편의점 계산기는 상품 바코드를 찍은 뒤 ‘객층키’를 누른다고 한다. 이것은 손님의 계층을 확인하는 것으로 손님이 연령과 성별에 따라 구매하는 상품에 대한 정보가 입력된다고 한다. 자신도 모르게 편의점에서는 개인 정보가 수집당하고 있는 것이다. 익히 알다시피 점유율 빅3 편의점 본사는 대기업이다. 결국 편의점을 움직이는 힘은 자본주의 세계 체제, 혹은 신자유주의다. 앞서 지적했듯 ‘소비당하고’ 있다는 사실, 다시 말해 소비가 조작되거나 유도되고 있다는 점도 생각해봐야 한다.

 

이쯤 되면 우리는 ‘편의점 사회학’의 또 다른 임무를 각성하지 않을 수 없다. 그것은 편의점 스스로 주장하는 ‘편의성’의 의미 혹은 ‘편리성’의 본질을 묻는 일이다. 편의점이 사람들 소비주의 사회에 길들이는 데 편리하고, 편의점이 사람들을 자본주의 세계 체제에 편입시키는 데 편리하며, 편의점이 신자유주의 유목화 시대에 사람들을 관리하고 통제하는 데 편리하고, 사회 양극화에도 불구하고 편의점이 사람들에게 일상의 행복을 제공하는 것처럼 느끼게 하는 데 편리하다면, 이것은 과연 누구를 위한 편의이고, 무엇을 위한 편리인가? 편의점의 ‘불편한 진실’은 이제 더 이상 모르는 척하거나 감출 수 없는 우리 시대의 첨단 화두로 인식될 필요가 있다.


  현실에서 편의점을 사용할 때면 이런 생각은 잊어먹는다. 편리함에 취할 뿐. 사건이 터진 공간으로의 편의점이 나오면 그제야 불편한 편의점을 인식한다. 스타벅스도 마찬가지다. 스타벅스에 대한 수많은 논란이 있다 한들 언제나 빛나는 스타벅스일 뿐이다. 영역을 구분하지 않고 확장되는 편의점의 ‘노력’을 편리로 수긍했지만 이 책으로 생각해보지 못한 편의점의 역기능에 대해서 생각해볼 기회였다. 편의점도 스타벅스도 이용하지만 뭔지 모르게 찜찜함을 달고 있는 것, 이것이 저자가 지적한 이유 때문이었을까. ‘편의점’이 가리키는 사회의 모습이 슬프게 흘러가는 문화가 되지 않았으면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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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솔로사회 - 2035년 인구 절반이 솔로가 된다
아라카와 가즈히사 지음, 조승미 옮김 / 마일스톤 / 2018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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솔로 마케팅

초솔로사회-2035년 인구 절반이 솔로가 된다, 아라카와 가즈히사, 2018.


  미혼율이 증가하고 전세계적으로 솔로사회가 되어가고 있다. 일본의 칼럼리스트 아라카와 가즈히사는 2035년이면 인구의 절반이 솔로가 되는 사회가 도래한다며 이에 대해 이해하고 대비할 것을 《초솔로사회》를 통해 이야기한다. 이 책의 분류가 ‘경제’로 되어 있음을 의아하게 생각했는데 후반부를 읽어가며 왜 경제에 방점을 두었는지 알았다.

  솔로 사회란 미혼, 비혼이 증가하는 사회를 생각하기 쉽다. 하지만 결혼을 했어도 솔로가 되는 사회다. 이혼이 증가하고 무자녀 가정을 선택하는 기혼자들도 증가하고 있다. 무엇보다 고령화 시대 남성과 여성의 서로 다른 평균 수명은 필연적으로 솔로가 되는 사회를 만들고 있다. 이런 이유들로 저자는 초솔로사회란 “‘혼자가 될 가능성’이 특례가 아니라 범례가 된 사회”라 칭한다.

  저자는 일본의 빠른 솔로사회화를 다양한 통계를 활용해 상세히 보여주고 있다. 통계를 통해 미혼과 비혼이 증가하는 이유와 오래도록 지배되고 있는 결혼규범이 변화하는 사회에 어떻게 작용되고 있는지를 분석했다. 결론은 일본사회는 피할 수 없는 초솔로사회가 오고 있다는 것이다. 이런 사회에 ‘솔로로 살아갈 힘’을 기르는 것이 중요하다고 강조한다.

  이에 저자는 솔로의 소비 형태에 주목했다. 솔로사회, 1인 가구는 새로운 라이프스타일, 소비형태와 가치관을 지닌다. 저자의 분석에 의하면 솔로의 소비는 ‘물건의 소유를 중시하는 소유가치에서 경험을 중시하는 체험가치를 추구’하는 쪽으로 진행되고 있다. 이른바 ‘에모이’소비라 불리는 형태로 한번 가치를 인정한 것에 돈과 시간을 아낌없이 쓰는 것이다. 그러니 솔로들을 위한 마케팅을 하려면 ‘에모이’ 소비에 중점을 두고서 이루어져야 할 것이다. 소비시장의 변화를 이끌고 있는 솔로는 변화하는 사회에서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가. 저자는 정신적인 자립인 ‘솔로로 살아갈 힘’을 키워야 한다고 얘기한다.


솔로로 살아갈 힘이란 물리적으로 혼자가 됐을 때에도 고립감을 느끼지 않고서 살아갈 수 있는 것을 말한다. 그러려면 한가지 사물이나 한 사람에게만 의존하려는 태도를 버리고 타인, 사회와 폭넓게 연결되고, 연결성을 유지하려는 마음이 필요하다. 즉 솔로로 살아갈 힘이란 기존의 직장, 가족, 지역뿐만 아니라 다양한 커뮤니티와의 관계를 구축하는 힘이기도 하다.

  

  솔로사회라고 해서 개개인의 생활만 중시하는 고립된 형태일 거라고 생각할 필요는 없다. 물론 어느 정도 지역사회간의 관계성은 약화되기도 할 테지만 또다른 형태의 커뮤니티는 증가하게 된다. 단, 자신이 그것을 어떻게 활용하는가가 중요할 것이다. 미혼이든 기혼이든 비혼이든 어느 시점에는 분명 솔로로 살아갈 수밖에 없다. 그렇다고 해서 ‘홀로’ 살아갈 필요는 없는 것이다. 새로운 시대에 맞는 관계망을 구축하며 지나치게 타인에게 의존적이지 않도록 하는 힘을 길러 초솔로사회에 대비하자는 것, 이것이 저자의 주요 메시지다.

  이러한 메시지를 만들기 위해 저자가 분석한 일본사회의 특성과 결혼규범에 관한 저자의 견해가 재미있다. 결혼하지 않은 이들을 일종의 실패에 가까운 자로 여기는 것, 결혼이 인생 최대의 성공이며 정상인 것처럼 여기며 미혼자들을 향해 간섭하는 행동들을 보고 있으면 ‘종교 강요’같다고.


결혼이란 건 어떤 의미에서 모종의 종교에 가까워졌다. 미혼자에게 “결혼하라”고 참견하는 게 종교에서 “신을 믿어라, 그러면 구원을 받을 것이다” 하는 것과 비슷하다고 느끼는 사람이 나뿐일까. 결혼을 권유하는 기혼자들은 ‘결혼교’ 선교사나 전도사라 할 수 있다.

 애초에 남이 결혼을 하든 말든 내버려두면 좋을 것을, 이런 결혼교도들은 가만히 내버려두지 못한다. 자신의 믿음만이 절대적으로 옳고 그걸 모르는 사람들은 불쌍하니 구제해줘야 한다는 마음이 작동된다. 기혼 의원이 “부모의 심정으로 결혼하라고 했다”고 하는 것을 보면 그런 속마음이 바로 느껴진다.


  초솔로사회가 되고 있는 시점에서 ‘결혼하라’ ‘아이를 낳아라’가 대비책이 되는 시대는 정말로 생각해볼 여지가 많다. 통계를 통해 저자가 분석하듯 기혼자도 필연적으로 솔로가 되는 시간이 온다는 것을 그저 결혼하지 않음에 따른 ‘문제’로 보고 있으면 어떤 대안이 나올 수 있을까. 그렇다고 발빠르게 초솔로사회의 소비 마케팅 전략을 부각하는 저자의 견해도 감탄스럽진 않다. 기업체에서 솔로활동을 하는 남성 연구 프로젝트팀에서 광고·홍보 일을 한다고 하니 저자의 견해가 기승전 왜 소비로 흘렀는지를 알 수 있었다. 어쩌면 많은 사람들이 행하고 있는 그것이 트렌드일 수 있겠지만 특정한 기업들의 마케팅 전략에 의해 ‘트렌드화 되어버린 삶’으로 살아가는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들기 때문이다. 초솔로사회에 자본주의의 마케팅에 끌려가지 않는 ‘솔로의 삶’을 위한 기술이 필요하리라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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형식은 형식을 만든다

 

 언론에서 뜨고 있는 작가라며 지인들 사이에서 작가의 이야기가 나왔을 때 받은 작가에 대한 인상은 소설을 읽어가면서 전혀 달라졌다. 일단 언론은 이 작가를 전혀 소설에 관해 교육받지 않은 노동자 작가로 소개했고 인터넷 게시판에 올린 글이 이미 온라인에서 엄청난 호응을 얻어 책으로 출판된 작가이며, 이미 써 둔 글도 300편이 넘고, 기존의 소설 형식을 파괴하는 그동안 없던 새로운 작가라고 홍보했다. 작가와 글에 대한 소개만으로는 ‘노동’쪽에 방점을 두고 있어서 노동소설의 계보 쪽으로 생각했더랬다.

  소설을 읽고 나서 왜 언론은 작가를 계속 ‘노동자’ 작가임을 강조하는지 그것이 커다란 차별점이자 특성인 듯이 소개하는 것인지 의아했다. 장정일 작가가 등장했을 때 중졸임을 강조하는 것과 같은 맥락일까. 이미 게시판에서 커다란 호응을 얻은 글이 출판되기는 쉬웠을 거라고 생각한다. 기존의 호응을 바탕으로 독자층이 구비되고 더 많은 독자로까지 확산되었을 김동식 작가의 책들을 한번에 읽었다. 그만큼 쉽게, 빠르게 읽힌다.

  강조하듯 익숙하게 보아오던 소설의 형식과는 ‘많이’ 다르다는 걸 알 수 있었다. 하지만 조금은 익숙하게 보아오던 인터넷 게시판의 글과는 유사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제일 먼저 든 생각은 우화구나, 세태에 대한 풍자가 재밌고 옹골차기에 흥이 솟았고 삶에 대한 반성과 깨달음을 지속했다. 문장이나 구성의 힘 보다는 SF, 판타지가 가미되어 전체적으로 이야기의 형태가 기묘하게 흐르는 것이 재밌는 요소라고 느꼈다. 

 최근 짧은 소설 역시 인기 있는 추세가 되었고 소설이라고 하면 생각되는 익숙한 패턴 또한 다양화되기도 했다. 김동식 작가 역시 이렇게 익숙한 소설 패턴을 벗어난 작가라고 말할 수도 있겠다. 하지만 작가의 책들을 하나하나 들여다보면 이야기 한편 한편의 틀은 같다. 그러니까 김동식 작가 자신만의 소설 형식, 틀을 구사하고 그 틀에서 이야기의 내용을 바꾸고 있다고 보는 편이 맞겠다. 흔히 한 작가의 책을 한번에 읽게 되면 작품마다에 반복되어 나타나는 문장, 이야기, 구조를 보게 된다. 그것이 김동식 작가의 작품에서는 뚜렷이 나타나, ‘새롭다’는 말이 무척이나 식상하게 느껴졌다.

  인터넷 공포 게시판에 글이 올라왔다고 하는데 대다수의 글들이 ‘공포’에 어울린다. 현실의 모습을 풍자한 글들이 한창 펼쳐지고 있었을 때에는 더더구나 엄청난 공포였으리라. 세상은 회색빛에 요괴가 가득하고 주위엔 온통 김남우가 살아가고 있는 세계에 살고 있다고 생각하면, 온 정신으로는 버틸 수 없으리라 여겨지다가도 과연 ‘온 정신’이라는 게 어떤 상태인가고 묻게 된다. 적어도 이런 세계를 잘 컨트롤 하는데 ‘김동식’이라는 작가가 어울릴 거라는 생각을 한다. 작가 자신이 개척한 익숙한 패턴의 반복이 아닌 소설이라는 형식에서 익숙한 형태로 글을 쓰면 작가의 글은 어떤 묘미를 지닐까 궁금해진다. 300편이 넘는 글을 써두었다니 4~5개월 사이에 다섯 권의 책이 출판되었다. 이미 써두었던 이 책들이 출간되고 난 이후의 글, 그 글을 기다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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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러스크로노스
윤해서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17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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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어의 어둠

코러스크로노스, 윤해서 저, 문학과지성사, 2017.2.24.


  테 포케레케레,라 말하는 아프리카 원시부족의 존재가 궁금해진다. 그 부족은 아프리카의 어디쯤에 살고 있을까. 하고많은 말 중에 ‘테 포케레케레’를 전한 것인지, 그곳의 말을 ‘얻은’ 작가는 이 말만을 각인하고 왔는지를 알아야 할 것 같다. 마치 소설의 모든 문장들이 그 부족의 언어인 것처럼 이질적이게 느껴지는 글들. 테 포케레케레, 미지의 어둠. 모든 문문장이 미지, 낯선 나라의 언어를 마주한 듯하다. 부족원들은 열심히 말하고 손짓하지만 그들의 얼굴을 쳐다보고 뜻을 유추하지만 아직은 명확히 소통하지 못할 서로의 언어. 그리하야 소설의 문장은 음률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코러스크로노스. 시간합창. 소설 속에서는 어느 골목에 위치한 건축물의 이름이지만 무한한 공간이자 상상의 공간에 가깝다. 이곳에 들어서면 시간은 잊어먹게 되지만 시간을 의식하게 된다. 현실감이 떨어지는 시간에 대한 인식만이 남아 미래의 공간이 아니라 오래 전의 시간을 여행하고 있는 듯한, 문명과 떨어져 있는 듯한 생각에 빠진다. 미래가 아닌 과거의 시공간에 머무른다 함은 완전한 미지와는 또 다르다. 그 실체를 경험해보지 못하였을 뿐 수많은 문자와 이미지로 알고 있다고 생각하는 시간과 공간이다. 하지만 그곳에 서서는 당연하고도 자연스럽게 ‘알고 있다’는 것이 허구임을 알게 된다. 익숙한 것에 기대어 의미를 읽어내고 표현한다 한들, 알 수 없는 것들이 흘러오고 흘러나오고 그리하여 내뿜을 수 있는 말들은 의미조차 지니는지 알 수 없는 음률들. 그리고 이미지. 그럼에도 그 세계에는 여지없이 폭력이, 죽음이, 독재가, 지진이, 테러가, 위기가, 존재했다. 그토록 어딘지 모를 곳을 돌고 돌고 돌고 돌아서 들어갔음에도.


    때마침 얼음의 얼굴에 어른거리는 물그림자.

    불행한 사람들이 꿈꾸는 방식.

    여행.

    죽은 붕어가 세상을 뜬다.

    말로의 말로. 죽은 붕어가 물에 뜬다.

    그래서, 그러므로, 그리고, 그러나, 그런데.

    모든 접속 부사들 속에 ‘그’

    내가 속해 있어.

    나는 말로의 말로. 문장과 문장을 연결한다. 문단과 문단을 연결한다. 부채와 부채를. 부재와 부재를. 이 도시의 말로. 나는 당신과 당신 사이에. 문장과 문장 사이에 잇닿아 있다.

    말로의 말로.


  언어의 묘미를 한껏 살려 결국 언어의 한계를 느끼게 한다. 소설이라는 장르가 가진 익숙한 언어를, 구조를 작가는 해체하고 작가가 준 몇 개의 단어에 의지해 문장을 생성하여 독자는 의미를 읽는다. 한없이 시간으로 들어가지만 시차에 부딪친 듯 어지럽고 몽롱해진다. 아직 아프리카 원시부족의 말들을 다, 헤아리지 못했다.


말이란 결국 환멸입니다. 많은 경우 환멸이죠. 그렇지만 그 환멸의 힘으로 밀고 가는 삶도 있는 겁니다. 환멸에 떠밀리는 시간도 있는 거죠. 우리가 얼마나 말도 안 되는 말을 많이 하고 삽니까. 우리가 얼마나 안 해도 될 말을 많이 하고 삽니까. 동생은 안 해도 될 말을 오래 하고 있었다. 동생은 말로, 끝없는 말로 자신이 살아 있음을 증명하고 있었다. 뱉어지자마자 사라지는 말로. 동생은 존재했다.

     

  이렇게 갈라진 언어로 이 죽음의 시간을, 공포의 시간을, 우울의 시간을 위로할 수 있을까. 뜻을 알 수 없는 노래로 의성어로 마음을 표현할 수 있을까. 동일한 언어를 사용함에도 말이 가닿지 못하는 시간들을 되돌려, 이렇게 완전히 이해하지 못하는 언어를 건네며 그 속에 표정을 담고 그저 음률을 담아 시간을 흘러가는 것도 좋으련다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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