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하철에서 책 읽는 여자
크리스틴 페레플뢰리 지음, 최정수 옮김 / 현대문학 / 2018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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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북크로싱


지하철에서 책읽는 여자, 크리스틴 페레플뢰리, 현대문학, 2018.


  책과 함께 모험을 떠나고 싶은 마음은 폭염에는 쓱, 사라지는 모양이다. 지하철이나 기차를 타고서 출발역에서 종착역까지 책 한권을 읽고 돌아오는 여정을 생각해보기도 했으나 폭염이란 움직이지 않는 게 낫다는 생각으로 가득차게 하면서 책을 읽어도 머릿속에 남겨두지 않도록 한다. 집과 직장을 오가는 생활을 하다가 출근 시간 두 정거장이나 먼저 내려 다른 곳으로 가면서 새로운 일과 맞닥뜨리게 되는 주인공 쥘리에르처럼 평소와는 다른 패턴으로 움직이면, 겪어보지 않은 새로운 일을 만날 수 있을까.

  쥘리에르가 일상적인 패턴에서 한발짝 더 나아가는, 아니 두 정거장이나 먼저 내려 평소와는 다른 출근길을 선택함으로써 맞닥뜨린 세계는 지각, 질책이라는 현실의 목소리가 들리는 곳이 아니라 ‘책 전달자’라는 새로운 역할을 부여하는 곳이다. 지하철에서 졸음 끝에 꾸는 꿈이라도 마냥 희한한 꿈이겠거니 싶은 이 몽상과도 같은 세계는 ‘무한 도서협회’다. 한가득 쌓인 책을 정리하고 있는 남자 솔리망은 사람들에게 알맞은 책을 전달시켜주는 책 전달자의 역할과 활동에 대해 이야기한다.


전달자는 책을 자연이나 기차 안에 되는대로 놓아둬서는 안 됩니다. 책들이 독자를 찾으려면 우연에 맡겨서는 안돼요. 그 사람이 책에 독자를 골라줘야 해요. 관찰하고, 더 나아가 어떤 책이 필요한지 감이 올 때까지 독자를 쫓아가야 하죠. 착각하지 마세요, 이건 진짜 일입니다. 우리는 도발하려고, 일시적 변덕 때문에, 혹은 세상을 혼란에 빠뜨리거나 선동하려는 의도로 책을 나눠 주는 게 아닙니다. 정당한 이유 없이 그러지는 않아요. 나와 함께 일하는 훌륭한 전달자들은 큰 공감 능력을 가졌습니다. 상대의 내면 가장 깊은 곳에 어떤 낙담과 원한들이 쌓여 있는지를 느낍니다.

  

  이 공간에서 편안함과 행복을 느낀 쥘리에르는 부동산 사무소로 출근하는 일을 그만둔다. 이제 사람들의 이야기를 듣고 그들이 처한 상황과 내면을 관찰하며 그들에게 필요한 위로와 조언을 해줄 책들을 전달하는 책 전달자로서의 삶이 시작된다. 책 전달자라는 역할은 쥘리에르 자신에게는 모험이지만 점점 이 역할을 통해 타인을 도우며, 책 전달자의 의미를 찾아 성장하는 쥘리에르의 여정에는 많은 사람들이 등장하고 그들에게 공감되는 책들이 등장한다. 이 소설의 묘미는 그런 책들에 대한 소개일지도 모르겠다.

  아주 단순하고 직설적으로 표현하자만 이 책은 내 인생에서 잊지 못할 책, 내 인생을 바꾼 책을 좀더 스토리를 가미해서 추천하는 서점의 도서목록이다. 조금 더 즐겁게 표현하자면 타인에게 책을 추천할 때 느끼는 쾌감, 희열이 느껴진다고 해야 할까. 무한도서협회는 독서클럽 같았고 책 전달자의 역할은 각각의 회원들 같다. 살아가면서 고민을 겪는 이들에게 공감과 위로를 전하며 건네는 책, 그것이 그들 삶에 지금 고민에 도움이 되기를 간절히 바라며 이야기할 때의 누군가도 결국 책 전달자인 것이다.


마침내 나는 두꺼운 책들 속에 모든 질병과 모든 치료제들이 감춰져 있다고 믿게 되었다고, 아니, 그렇다는 확신을 얻게 되었다고. 책에서 배신을, 고독을, 살인을, 광기를, 격분을, 다른 사람들의 존재에 대해 말하지 않고도 나에게 뭔가를 강요할 수 있고 내 존재를 망가뜨릴 수 있는 모든 것을 만난다고. 때로는 책을 읽으며 눈물을 흘리는 것이 누군가의 인생을 구원할 수 있다고. 아프리카 소설이나 한국 동화를 읽다가 영혼의 단짝을 만나는 것이 우리 인류가 똑같은 악덕들로 얼마나 고통받고 있는지, 우리가 얼마나 서로 닮았는지 그리고 우리가 조금이라도 덜 악해지기 위해 이럭저럭 노력하고 있다는 것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된다고. 그러기 위해 서로 이야기를 나누고, 서로에게 미소 짓고, 서로를 어루만지고, 무엇이 되었든 감사의 표시를 나눌 수 있다고.


  쥘리에르가 느끼는 모든 것을 체험하였기에 사람들은 책을 읽고 거기서 벗어나지 못하고 타인에게 책을 추천하고 또한 함께 모여 독서클럽을 만들어가는 것일 게다. 북크로싱book-crossing 운동을 벌이기도 하고 말이다. 북크로싱 안내서라고 할 만한 이 책은 책을 좋아하는 사람들이라면 쥘리에르에 쉬이 공감하며 읽게 될 것이다. 직장을 그만두는 쥘리에르의 과감함을 부러워하면서 말이다. 다만 생각보다 책 전달자의 여정은 폭염 중에 읽기에는 아주 단조롭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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귀환
히샴 마타르 지음, 김병순 옮김 / 돌베개 / 2018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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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의 부재에 대처하는 자


귀환, 히샴 마타르, 돌베개, 2018-03-30.


  소설이라 여기고 읽던 책이 퓰리처상 논픽션 부분 수상작이라는 것을 알았을 때 등장인물 한명 한명의 현재가 어떤지 알고 싶어졌다. 그렇게 찾은 한 명의 기사에선 익숙한 냄새가 흘러 넘쳤다.

  “독재자 카다피의 차남, 올해 리비아 대선 출마”

  

   이 책은 작가인 히샴 마타르가 실종된 아버지의 흔적을 찾는 여정이다. 그의 아버지 자발라 마타르는 어디에 있는가. 카이로, 뉴욕, 런던을 오가며 생활하고 있는 히샴이 여덟살에 떠나온 나라는 리비아는 지금도 내전으로 정권이 안정되지 않고 난민이 속출하고 있다. 이런 불안정한 나라를 만드는데 커다란 공을 세운 이는 1969년 군사 쿠데타로 리비아를 장악해 독재자로 군림한 무아마르 카다피다. 작가 히샴의 아버지 자발라는 카다피 정권에 반대하며 이집트 카이로로 망명했지만 영향력있는 자발라는 1990년 3월 12일 카이로에서 이집트 비밀경찰에게 체포되어 리비아의 아부살림 교도소에 수감된다. 히샴의 아버지뿐만 아니라 히샴의 삼촌과 사촌도 많은 이들이 카다피 정권에 반대한다는 이유로 수감되거나 목숨을 잃었다.

  1996년 6월 29일 아부살림에서 1270명의 정치범들이 학살당했고 이후 아버지의 소식은 끊어졌다. 그러나 이날 이후로도 아버지를 보았다는 증언이 있었기에 히샴은 아버지의 흔적을 찾는다. 아버지의 흔적을 찾아가는 여정은 리비아의 역사이자 독재에 반대하고 민주주의를 꿈꾸는 이들의 삶에 대한 기록이다. 히샴의 할아버지 하메드 마타르 또한 이탈리아 식민 통치에 투쟁했으니 리비아의 국민들은 오래도록 주권을 찾고 독재에 맞서는 투쟁의 역사를 지속한 민족이라고 할 수 있겠다. 그리고 마침내 40년 독재집권자인 카다피는 이들 국민들의 저항과 투쟁으로 2011년 카다피는 축출된다. 그렇게 아랍의 봄이 왔고, 수감되어 있던 히샴의 삼촌과 사촌은 석방되었지만 아버지는 끝끝내 돌아오지 않았다.

  1996년의 그 아부살림 교도소의 학살 현장에 아버지가 있었으리라는 것이 확실하고 사실 그럴 것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것은 어떤 장면처럼 히샴에게 스며들기도 했다. 아부살림 교도소의 처형이 있던 그날 히샴이 6년 동안이나 감상했던 그림 대신에 마네가 그린 <막시밀리안 황제의 처형>이라는 그림을 오래도록 보고 있었던 것은, 아버지의 운명을 느낀 어떤 힘의 작용을 믿게 한다. 무척 슬픈 장면이긴 하지만. 그럼에도 살아계시리라는 희망을 가지던 가족들은 이제 명확한 언어로 그날의 아버지의 죽음을 인정하려 한다.

  아버지의 흔적을 찾아다니는 과정에서 히샴 또한 반정부 인사들의 석방을 요구하는 투쟁에 힘썼고 그또한 독재에 저항했다. 이 요구에 협상자로 만나게 된 독재자 카다피의 차남 세이프 알 이슬람은 지연작전을 쓰며 방해하더니 그의 포지션을 아주 잘 정하여 실천했다.


세이프의 측근들은 그를 비롯해서 삼촌들과 살레에게 마침내 집으로 돌아가게 될 것이라고 석방 소식을 전했다. (…) 의례적인 인사말과 편안한 분위기 속에서 이 모든 것이 끝나자, 그들은 석방을 위해 마지막으로 해야 할 일이 하나 있다는 말을 들었다. “위대한 지도자에 대해 지금까지 반대했던 것을 공식적으로 사과한다는 서류에 서명하는 것.”


  세이프는 시위에서 정부 당국에 의해 살해된 사람들의 가족에게 어떤 사과나 위로의 말도 하지 않았다고 한다. 2011년 민주화 시위가 확산되었고 카다피는 은신처에서 시민군에게 체포되는 중 사망했다. 아랍의 봄이 없었다면 강력한 카다피의 후계자로 군림하였을 세이프는 카다피 집권 당시 대량학살 혐의 등으로 기소돼 2015년 사형 선고를 받았지만 곧 사면되었고 복역한 지 6년 만인 2017년 출소했다. 그리고는 곧 정계 복귀, 대통령 출마 선언까지의 행보를 보이고 있다. 이 익숙한 행보…리비아는 지난날의 고통을 잊었나. 대한민국이라는 나라가 선보인 그 앞날을 보지 못한 건가. 독재자 무아마르 카다피의 아들이 다시 정권을 잡는 미래는 어떻게 될까. 학살과 사치의 독재자의 아들이 반성도 없이 사과도 없이 당당히 제 존재를 과시할 수 있는 힘은 어디에서 나오는 건가. 태어날 때부터 독재자의 아들로 권력을 쥐었던 자의 ‘나라를 위해서’라는 말이 헛헛하게 들린다. 그의 무개념과 나라를 제 것으로 여기는 몸에 밴 갑질적 사고가 불쾌를 넘어 치가 떨린다.   

  세이프가 독재자의 아들이라서 반대하는 것이 아니라 세이프의 행보가 그가 제시하는 리비아의 미래를 어둡게 하기 때문이다. 그가 가진 비전과 신념은 기시감이 느껴질 정도로 대한민국의 독재자의 딸과 닮아 있다. 단지 그 딸이 독재자의 딸이어서 반대하는 것이 아니라 그 딸이 가지는 가치와 신념이 ‘독재자의 가치’를 우러르고 칭송하고 있기에 반대한 것이다. 그렇게 해서 만들어간 대한민국은 아직 드러나지 않은 일들이 널려 있다. 2대에 걸친 독재정권에 의해 아직 돌아오지 못한 이들이 있고, 가족들은 ‘죽음’을 눈으로 확인하기 전까지는 그들을 히샴처럼 찾고 있을 것이다.

  갈 곳없는 반독재 활동가들에게 숙식을 제공해주던 히샴 어머니의 말없는 희생을 기억하는 누군가처럼 수많은 이들이 독재에 맞서 투쟁했고 희생했다. 여전히 돌아오지 못한 이들, 그들은 히샴의 아버지처럼 억압의 시절들 속에서도 “어떡하든 살아남아라, 어떡하든 살아남아라”라는 메시지를 시대를 살아가는 이들에게 전하고 있다고 할 것이다. 히샴이 이미 돌아가셨음을 인지하는 아버지의 행적을 찾는 것, 그가 이 험악한 독재의 시대를 살아가기 위한 메시지를 다져가기 위한 길이었다는 생각도 든다. 히샴은 오디세우스와 텔레마코스를 그의 아버지와 자신으로 치환시켜 이런 생각을 전한다.


오랜 세월 동안 내 마음 한구석을 늘 차지했던 이 친숙한 시구가 처음으로 그 의미가 달라지고 확장되었다. 그 말들은 이제 텔레마코스에 대한 것만큼이나 오디세우스에 대한 것이 되었다. 다시 말해서 그것은 아들에 대한 이야기일 뿐 아니라 아버지에 대한 이야기였다. 그것은 자기 아버지가 여생을 고향 집에서 편안하고 위엄 있게 살 수 있도록 해드리고 싶은 아들의 바람에 대한 이야기이자, 그래서 마침내 아버지가 편안하게 집을 떠나 고개를 돌리고 정면을 바라보며 세상 속으로 걸어 들어갈 수 있게 해드리고 싶은 아들의 소망에 관한 이야기다. 오디세우스가 길을 잃고 헤매는 한 텔레마코스는 집을 떠날 수 없다. 오디세우스가 집에 없는 한, 아무도 그가 어디에 있는지 모르기 때문에, 그는 모든 곳에 있을 수밖에 없다.

   

“걱정 마라. 난 잘 있어. 난 잠시 지나가는 폭풍에 흔들리지도, 약해지지도 않는 산과 같은 사람이야.” 

  “깊은 미로 같은 동굴 안에서 길을 잃은 사람처럼 극도의 절망 속에 유폐된 느낌”을 받았던 히샴의 생각의 전환은 아버지의 여정을 찾는 과정이 있었기에 이루어질 수 있었다. 아버지와의 헤어짐이 방향감각을 잃고 길을 잃기 쉽게 한다는 그의 속내가 오랜 여정의 끝에 길을 찾음을 보게 될 때, 아버지의 부재는 부재가 아니었음을 느끼게 한다. 아니 올바른 방향을 나아가는 아버지의 부재는, 결코 부재로 남지 않는다는 것을 느끼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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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두를 위한 페미니즘
벨 훅스 지음, 이경아 옮김, 권김현영 해제 / 문학동네 / 2017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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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더를 기다리며

모두를 위한 페미니즘, 벨 훅스, 문학동네, 201.


  요즘 돌아가는 분위기를 보면 이 책 제목만큼 절실한 문장이 있을까 싶다. 최근 몇 년 사이 어떻게 페미니즘이 흘러왔는지는 옆눈으로 보았다 해도 알만큼 굵직한 사건들이 연이었다. 지금도 사건들의 줄잇기는 마찬가지지만 ‘모두를 위한’ 페미니즘 논의는 더욱 거세질 듯하다.

  페미니스트이자 사회운동가 벨 훅스 역시도 모든 페미니스트가 주장하듯이 페미니즘은 ‘남성혐오운동이 아니다’라고 말한다. 아주 오래전부터 외쳐왔듯 단지 ‘성차별주의와 그에 근거한 착취와 억압을 끝내려는 운동’이라고 거듭 외친다. 벨 훅스처럼 거의 모든 페미니즘 운동가들이 페미니즘이 ‘여성을 위한 것’이 아니고 더더욱 남성을 역차별하자는 것이 아니고 누구에, 무엇에 의해서도 억압받지 않고 행복하게 잘 살아가기 위해 함께 하자는 것이라고 부르짖는데도 어찌하여 페미니즘은 자꾸 여성만을 위한, 남성을 혐오하는 운동이란 이미지로 굳어가고 있는 걸까. 더 이상의 공감도 더 이상의 연대도 필요치 않는 페미니즘에 대한 적대감과 혐오가 자고 일어나면 쌓여만 간다.

  벨 훅스는 자신이 페미니즘에 관해 이야기하면 사람들은 늘 이렇게 이야기하곤 한다고 말한다. “당신은 남성을 혐오하고 늘 화가 나 있는 ‘진짜’ 페미니스트 같지 않다고, 당신은 다른 것 같다고.”

  수많은 페미니스트들이 벨 훅스와 같은 말을 들은 일이 적지 않음을 고백한다. 이쯤되면 페미니스트들에게 고정된 편견이 가득히 덧씌워져 있거나 그들 운동 방식의 전략적 변화가 필요하다는 생각이 든다. 지금 우리나라에서 행해지는 ‘소위’ 페미니즘 시위에 대한 우려와 반감은 어쩌면 이 시위야말로 페미니스트에 대해 가지는 고정관념과 편견에 찬 모습을 그대로 보여주는 것일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사람들은 이제야 ‘진짜 페미니스트가 나타났다’고 외칠지도 모른다. 저 멀리 떨어져서 말이다!

  페미니즘에 대한 관심으로 갑자기 페미니즘 서적 또한 우후죽순으로 쏟아져 나왔다. 거기서 거기인 이야기들을 하고 있어서 흥미를 떨어뜨렸고 분위기에 편승하려는 출판사들이 쏟아낸 책으로 인해 페미니즘이 가볍게 다뤄지고 여겨지는 것 같아 우려되기도 했다. 그래도 이만큼이나 관심도가 증가되었다면 페미니즘에 대한 근본적인 이해는 확산되었으리라 했는데 그것이 아님을, 그렇지 못함을, 오히려 지금까지 있었던 관심이 좋지 못한 쪽으로 이루어질지 모른다는 불안감이, 짜증이 생겨나기 시작했다. 기껏 먼발치서 인터넷 기사를 클릭하며 가지는 감정인데 현장에, 보다 가까이에 있는 이들의 시각은 어떨까.

  한국의 페미니즘 운동이 어디에 있는가. 나는 이에 대해 알지 못한다. 직접 운동을 이끄는 축에 있지 않고 그저 페미니즘 서적을 들척이고 좋은 의견에 동조하고 그렇지 않다고 여기는 의견에 반대할 뿐인 일반인으로서의 내 목소리는 어쩌면 페미니즘 운동사에 전혀 가닿지 않을 지도 모른다. 하지만 생각건대 페미니즘은 운동가들의 전유물이 아니고 차별과 억압받지 않고 산다는 것은 나에게도 필요한 일이기에 시선을 거둘 수는 없는 일이다.

  정말로 ‘모두를 위한 페미니즘’은 없는가. 지금처럼 이렇게 충격적인 일이 가득한 시위의 현장을 기사로 접하면 정말로 페미니즘이라는 것이 ‘특정한 이들의 전유물’이 되어 버린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이 절로 든다. 아니면 정말로 페미니즘 운동이 아니라 다른 세력인 것인가. 많은 이들에게 생존과 존재 자체로서의 삶이 걸린 페미니즘이 왜 희화화되는지, 왜 일베스러워졌는지가 의아할 뿐이다. 이런 형태로 페미니즘은 나아가는 것일까. 

  다른 책들에 비해 벨 훅스의 모두를 위한 페미니즘이 흥미로웠던 건 편하게 읽힌다는 점 이외에 그동안의 페미니즘의 논쟁, 각기 주력하여 주장하는 바가 달랐던 페미니스트들의 주장을 소개하고 비판하고 있기 때문이다. 전개되어온 페미니즘 이론과 페미니스트들의 투쟁 노선과 방법들은 직접 현장에 있지 않았다면 잘 알지 못했을 세세한 부분에서의 문제점을 벨 훅스는 잘 지적하고 있다. 다양한 페미니즘 이론의 역학 속에서 페미니즘이 변화·성장하여 오늘에 이르렀겠지만 분명 그로 인한 한계가 있었고 여전히 지속되는 한계가 있다.

  한국에서 벌어지고 있는 혜화역의 시위가 그저 페미니스트들 간의 이론과 투쟁 방법상의 차이가 있고 특정 계파의 투쟁방법이 대두되었다고 하기엔 그동안 페미니즘이 이루어낸 역사와는 확연한 차이를 보이고 있음은 분명하다. 문제는 이 방식이 과연 페미니즘인가의 의문과 함께 그렇다면 왜, 그 방식이 선택되고 이루어지고 있는가라는 점이다. 왜, 한국에서의 페미니즘 운동의 방식은 이렇게 혐오에 기반하여 달려가고 있는가.


한쪽에서는 캐럴 길리건 같은 페미니즘 사상가들이 질리지도 않고 여성이 더 다정하고 더 윤리적이라고 말했지만, 여성들이 자신보다 더 힘없는 다른 여성들에게 하는 행동을 보면 도무지 그 말에 동의할 수 없다. 여성들이 자신이 속한 정체성이라 생각하는 같은 민족이나 인종 집단에 보이는 보살핌의 윤리는, 그들이 공감할 수 없고 동질성이나 연대감을 느끼지 못하는 사람들에게는 미치지 않았다.


  최근 시위에서 자신이 속한 집단(까페)의 정체성과 다른 이들에게 가하는 행동을 보면 도무지 그 말에 동의할 수 없다! 페미니즘, 성차별 철폐의 소리는 들리지 않고 오로지 혐오만이 목소리 높다. 페미니즘이 목적이 아니라 조롱 자체가 목적이 된 듯한 생각마저도 든다. 지금의 페미니즘 운동이 흘러가는 방향은 자연스러운 것이고 많은 이들이 지향하는 바일까. 이에 대한 의문과 더불어 이렇게 흘러가는 이유가 페미니즘을 이끌어갈 운동 세력의 리더가 부재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촛불혁명을 거치며 특정 리더가 아니라 자발적인 시민의 의식이 의견을 형성하고 주장을 높이는 형태가 여성운동에서만은 제대로 이뤄지지 않는 것인가.

  페미니즘은 모두를 위한 것이라는데 모두를 위한 페미니즘 운동의 선구적인 페미니즘 이론이 운동의 방식이 이것을 이끌어갈 주체가 격하게 필요하다는 생각이 든다. 이대로 외면받고 비난받는 운동이 되기엔 차별의 역사는 너무나 길었다. 그리고 인류가 멸망하지 않는한 살아야 할 생이 아직 너무도 많다. 그러기에 벨 훅스의 주장처럼 우리나라에도 워마드가 이끌어가는 운동이, 시위가 아니라 합리적이면서 모두에게 공감을 이끌어가는 페미니즘 운동이 확산되기를 바란다. 존경받는 페미니스트의 존재가 보고프다.


성차별주의와 그에 근거한 착취와 억압을 끝장내기 위한 운동으로서의 페미니즘은 생생하게 살아 숨쉬고 있다. 비록 대중 기반의 운동 역량은 갖추지 못했지만 그러한 방향으로 운동을 새롭게 시작하는 게 우리의 첫번째 목표다. 우리 삶에서 페미니즘 운동이 계속 이어질 수 있도록 선구적인 페미니즘 이론은 우리가 살아가는 자리, 우리의 현재를 고심하게끔 끊임없이 생산되고 재생산되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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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메시스
필립 로스 지음, 정영목 옮김 / 문학동네 / 2015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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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생 멧돼지의 ‘운 또는 불운’

네메시스, 필립 로스,2015.5.29


  동굴에 갇혀 있던 태국 소년들 전원 구조 과정을 보면서 어떤 기억 속에 빠지게 된 것은 당연하다. 그 과정이 너무나 비교될 수밖에 없어 기쁨 중에도 아픔이 꽉 차올랐다. 실종된 아이들이 발견된지 일주일이 지났음을 확인하고서야 아이들이 생각보다 오래 그곳에 있었구나 싶었다. 동굴 밖으로 나갈 수 있으리란 희망을 안고서 버티는 그 시간 동안이 아이들에겐 어떤 시간이었지 짐작도 어렵지만 동굴 속 유소년 축구팀 소년들과 코치의 모습은 담담해보였다. 언론에 소개된 과정을 보면서 떠오른 기억에는 하나가 더 있었다. 자꾸 생각나는 이미지, 익숙한 느낌에 생각하고 또 생각했다. 마침내 알았을 때의 희열, 그것은 필립 로스의 소설 『네메시스』주인공 버키 캔터였다!


자신에게 맞서지 마세요. 지금 이대로도 세상에는 잔인한 일이 흘러넘쳐요. 자신을 희생양으로 만들어 상황을 더 나쁘게 만들지 말라고요.


  필립 로스는 결국 노벨문학상을 수상하지 못하고 올해 세상을 떠났다. 2012년, 소설 절필 선언에 필립 로스의 마지막 소설이 된 『네메시스』. 신화 속 복수의 여신 네메시스, 어떤 복수에 관한 서사를 이야기할 것인가 했던 이 소설은 막장드라마라 불리는 드라마에서 사용되는 복수와는 전혀 달랐다. 


그의 자신 있고 단호한 태도, 역도선수다운 힘, 매일 열성적으로 우리와 함께 시합을 하는 것-이 모든 것 때문에 그는 감독으로 처음 온 날부터 놀이터 붙박이들에게 인기가 높았지만 이탈리아인 사건 뒤로는 완전히 영웅이 되었다. 특히 친형이 전쟁에 나가고 없는 아이들에게는 그들을 보호해주는 우상화된 영웅적인 형이 되었다.


  스물다섯의 유소년 축구팀 태국 코치 또한 헌신적으로 아이들을 돌보았지만 아이들을 위험에 이르게 했다는 비난이 쏟아졌고 구조대원 한명이 사망했다. 승려였지만 할머니를 돌보기 위해 축구팀 코치로 일하고 있다는 그가 자필로 전한 사과의 메시지와 함께 동굴 속에서 어떻게 아이들을 보살피는지 알려진 지금에는 그는 영웅으로, 아이들을 돌보기 위해 신이 보내준 선물로 칭해지고 있다. 

  버키는 스물세 살의 ‘놀이터 감독’이다. 그는 조국을 위해 전쟁터에 가고 싶었지만 시력 때문에 탈락해 좌절감과 죄책감을 느끼지만 제 또래들이 전쟁터에 있는 동안 놀이터에서 아이들을 열성적으로 돌보고 있다. 하지만 폴리오 유행병이 휩쓸면서 사망하는 아이들이 발생한다. 버키 역시 “그가 스물세 살의 놀이터 감독이 아니라 그보다 훨씬 강한 어떤 존재라도 되는 것처럼 그에게 애원하고 있는 눈”을 보며 강인함, 결단력, 두려움을 극복하는 것을 가르쳤지만 확산되는 전염병과 아이들의 사망에 또다시 좌절과 분노, 죄책감과 슬픔에 싸인다.


   “왜 비극은 늘 그것을 당할 이유가 전혀 없는 사람에게 덮치는 거요?˝


  글쎄. 그것을 안다면! 설명되지 않는 무엇, 그것에 대해 끊임없이 질문하지만 명확히 주어지는 답은 없다. 그렇기에 버키는 그 모든 것에 ‘책임감과 죄책감’을 느끼며 자신을 심판한다. 단지 비극이라 부를 수는 없었다. 누군가에게는 운이 누군가에게는 불운이 따르는 우연과 하느님을 비난하며 그는 1944년 뉴어크를 휩쓸던 전염병의 그 시절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그렇게 살아온 버키의 인생이 평온했을 리 없으니 그때의 일을 극복하고 평생의 개인적인 비극으로 만들지 않은 ‘내’ 모습과 완벽히 비교되었다.

  제 생을 망칠 정도의 죄책감, 자신이 저지른 범죄로까지 생각하는 버키의 나약함과 의무감은 강도는 낮을 지라도 많은 이들이 경험한 감정이다. 특히, 아이를 잃어버린 부모라면 더욱 강하게 가질 죄책감일 것이다. 동굴에 갇힌 소년들이 전원 무사히 구조되지 않았다면 아이들의 부모들 또한 같은 감정을 느꼈을 것이다. 그러나 사회는 어쩌면 더 큰 비난을 코치에게로 쏟았을 것이다. 버키는 강한 체력을 가지고 아이들을 성심성의껏 돌보았지만 맞닥뜨린 불운에, 비극에 대항할 정신적인 힘을 타고나지 못하였기에 그는 가족에게 상처를 주며, 그의 삶은 몰락하고 말았다. 

  아이들의 죽음을 단지 비극으로 돌리기엔 힘들었던 버키는 생의 많은 일들을 자신의 탓으로 여기는 이 ‘병적인’ 죄책감, 이 극단적인 생각고 행동을 통해서 비극을 맞닥뜨린 자의 행동에 대해 다시금 생각해보게 된다.


그가 그의 삶을 시들게 해버린 고통들을 쌓아가는 것에 내가 아무리 공감한다 해도, 그것은 어리석은 오만, 의지나 욕망의 오만이 아니라 환상적이고 유치하고 종교적인 해석의 오만이라고 말할 수밖에 없다.


그런 사람은 구제할 수 없다. 그가 하는 어떤 일도 그가 안에 품은 이상에는 이를 수 없다. 그는 자신의 책임이 어디에서 끝나는지 절대 모른다. 그는 절대 자신의 한계를 믿지 않는데, 다른 사람들의 고통에 체념하는 것을 허락하지 않는 엄격한 선을 천성적으로 짊어지고 있어, 자신에게 어떤 한계가 있다는 것을 인정하면 반드시 죄책감을 느끼기 때문이다. 그런 사람은 사랑하는 사람이 불구인 남편을 얻는 것을 막는 데서 가장 큰 승리감을 맛보며, 그녀를 포기함으로써 자신의 가장 깊은 욕망을 부인하는 것은 영웅적 행동이 된다.


  어떻게 해 볼 수 없는 비극은 항상 고통을 준다. 고통에서 벗어나는 과정은 쉽지 않다. 당연 ‘정의로운 신’의 존재에 의문을 품기도 하고 불공평한 세상에 대한 울분이 차오르기도 한다. 그럼 감정들을 떨쳐내는 것이 분명 쉽지 않다. 버키를 통해 극한의 생각에 맞닥뜨리며 오히려 비극에, 불운을 맞닥뜨려 가져야 할 생각의 방향이 미로가, 도돌이표가 아니라 길이 있음을 느끼게 된다. 긴 시간 어둡고 깜깜한 동굴 속 생과 사의 갈림길에서 스물 다섯 코치가 선택한, 생각한 길은 끝없는 불운과 죄책감이 아니라 이겨낼 수 있는, 책임질 수 있는 책임감과 죄책감이었다. 상황에 대한 ‘해석’. 그것이 인간의 행동을 이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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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삭매냐 2018-07-11 14:2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절필 선언했을 때, 이미 노벨문학상에 대한
기대는 내려 놓은 게 아닐까 뭐 그런 생각
이 들었습니다.

모시빛 2018-07-12 08:20   좋아요 0 | URL
왜 굳이 절필선언을? 그냥 자연스럽게 안쓰면... 이렇게만 생각했는데
레삭매냐님 글을 보니 기대와 부담, 그런 것에서 해방되려는 선언이구나 싶기도 하네요...
 
사탄탱고 알마 인코그니타
크러스너호르커이 라슬로 지음, 조원규 옮김 / 알마 / 2018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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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단이 꾸는 꿈

사탄탱고, 크러스너호르커이 라슬로, 2018-05-09.


  “어느 시월의 아침 끝없이 내릴 가을비의 첫 방울이 마을 서쪽의 갈라지고 소금기 먹은 땅으로 떨어질 즈음 종소리에 잠에서 깨어난 후터키”와는 달리 최근 몇 주 가을 같은 날씨에 침전하고 있다. 태풍이 오기 전부터 새벽이면 비가 내렸고 여전히 비를 내릴 거라는 듯 검은 구름들이 잔뜩 대기하고 있는 하늘을 보면 여름이란 계절이 맞나 싶다. 종소리 대신  사이렌 소리만이 들려와 불안감을 극대화한다. 현실은 여전히 많은 사건사고들이 일어나고 있음을 알리지만 때로는 먹구름 가득한 소설 분위기가 현실보다 더 흥미롭다.

  소설은 망명 정부의 지폐처럼 흩날리는 낙엽과 무너진 공산주의 이미지가 얹어지며 무겁고 쌀쌀하게 가라앉은 느낌의 1980년대 헝가리를 배경으로 한다. 시작부터 끝까지, 고도를 기다리는 에스트라공과 블라디미르처럼 마을 주민들은 ‘그’를 한없이 기다린다. 죽은 사람으로 알려진 그의 귀환 소문에 사람들은 기대와 불안을 함께 안고 있다. 그런 만큼 ‘그’의 존재는 궁금증을 자아낸다. 과연 그는 불행을 안고 오는 사탄일까, 불행을 떨궈낼 존재일까.

  ‘그’, 이리미아시를 슈미트는 ‘마음만 먹으면 소똥으로 성을 지을 수도 있는 위대한 마법사’라 칭하지만 ‘그’에 대해선 마냥 칭송이라 하기엔 부족한, 아니면 더 보태야 할 말이 있다. 이리미아시에 대한 마을 사람들의 경외감은 죽었다는 사람이 살아온다는 호기심 이상이었지만 마냥 긍정적이지는 않았다. 마을 사람들은 그들의 계속된 비참과 불행을 ‘그’가 끝내줄 것이라 기대하는 모양이지만 막연한 기대만큼 불안 또한 고조된다. 작가가 우울한 기운을 계속 그려내기에 읽는 입장에서 ‘그’는 사기꾼이거나 악마가 아닐까 우려한다.


아무런 이유도 없이 왜 갑자기 우울한 기분이 드는지 스스로도 알 수 없었다. 오늘은 아무 날이 아니라 특별한 날이었다. 술집 주인의 말대로 이제 몇 시간만 지나면 이리미아시와 페트리너가 도착해 몇 년 동안 계속되어온 비참과 불행에 종지부를 찍을 것이었다. 음습한 정적과 아침에 그가 들었던 괴상한 종소리, 그로 하여금 황망히 침대에서 일어나 땀을 흘리며 창밖을 무력하게 바라보도록 만든 그 죽음의 종소리 또한 사라질 것이다.


  공산주의 사회가 그러했듯 마을은 집단농장을 이루고 살아왔지만 집단농장은 실패했다. 폐허가 된 마을의 신산한 정경과 절망적이고 비참함으로 가득찬 마을 사람들의 모습은 영혼이 빠져나간 듯이 보인다. 어쩌면 ‘그’가 구원자로서 여겨지지 않는 이유가 이 무력하고 영혼없는 마을 사람들의 모습 때문일지도 모른다. 변화가 있을 것이라 기대하며 그를 칭송하는 무력과 불안이 짙게 배인 마을 사람들의 언어이기에 ‘그’에 대한 신뢰에 대해 의아함을 가지게 되는 것이다. 또한 ‘그’에 대한 평가가 완전히 일치하지도 않는다.

  마을 사람들은 집단의 최면에라도 걸린 듯 사고하고 행동한다. 곳곳에서 묘사되는 거미줄처럼 무력감과 불안은 그들을 묶어 놓는 듯이 보인다. 천사를 만나고픈 의지를 보인 소녀 에슈티케의 결말이 자살에 가 있는 것만 봐도 마을 사람들에게 도사린 기대감과 희망은 스산하다. 이런 스산함은 술집에 모여 춤을 추는 마을 사람들의 모습에서 더욱 발산된다. 한없이 절망적인 배경에서의 군무는 마을 사람들을 마리오네트 인형처럼 보이게 한다. 색조가 빠진 광기의 느낌이랄까. 나도 모르게 웃음이 터져나왔을 땐 바람빠진 개업식 풍선인형의 흩날림이 연상되어서였을지도. 박자를 맞추지 않는 춤사위에 공허함이 느껴지기도 했지만 무한히, 그들의 모습에서 느껴지는 답답함이란.

  기다림과 무력감을 반복·교차시키던 소설은 2부에서 전환된다. 전환을 이끌어낸 것은 그, 이리미아시였다. 그는 마을 사람들의 심리를 간파하고 이용할 줄 아는 탁월한 연설가였다. 사람들은 무력감에 더해 소녀의 죽음에 대한 죄책감에도 휩싸여 있었으니 이리미아시의 연설은 사람들의 마음에 안착한다. 그가 제시하는 마을의 비전, 변화에 감화된 사람들이 죽도록 일한 품삯을 내놓으며 새롭게 일구어낼 마을을 품어본다. 이리미아시가 꿈꾸는 것과는 확연히 다른 꿈을.


한참 뒤에 이리미아시가 말했다. “좀 전에 이상한 광경을 봤다고 그럴 필요는 없어. 천국? 지옥? 피안? 다 헛소리야. 난 그런 지어낸 얘기는 다 정신을 홀려놓기 위한 거라고 믿네. 그렇게 환상에 마음을 빼앗기면 진실은 영영 알 수 없는 법이야.”


  명확히 제시되는 두 개의 기록에 의해 이야기는 새로운 인상을 남긴다. 이 두 개의 묵시록에 의해 이 소설이 가지는 의미와 이 소설의 묘미가 강하게 각인된다. 기록은 어김없이 증언과 감시의 역할을 한다. 이리미아시의 기록은 감시와 억압의 기록이다. 스스로 마술적 글쓰기라 일컫는 마을 의사의 기록은 어떤가. 무엇 하나 놓치는 것 없는 세세한 의사의 기록은 그의 표현대로 ‘마술적’이어서 하나의 소설을 이룬다. 확실히 이 기록에 마음 뺏긴 나는 진실을 영영 알 수 없으리라는 생각을 한다. 그들이 트럭을 타고서 도달한 곳이 천국인지 지옥인지 피안인지를. 이리미아시의 힘차고 열정적인 연설에 나도 감화되었는지를. 마을 사람들은 구원된 것인가와 같은 질문의 진실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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