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몬드 (반양장) - 제10회 창비 청소년문학상 수상작 창비청소년문학 78
손원평 지음 / 창비 / 2017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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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수비수가 되고 싶다


아몬드, 손원평, 창비, 2017-03-31.


  괴물에 대한 인상은 흉물스럽거나 기괴한 행동을 일삼거나 난동을 부리는 이미지로 각인된다. 괴물이라 불리는 <아몬드> 속의 괴물 윤재는 이러한 이미지와는 거리가 멀다. 오히려 약물에 취한 것처럼 힘이 없이 보인다. 과잉행동장애가 아니라 과소행동인데 이런 행동에 비해 생각은 과하게 넘쳐난다. 감정을 느끼지 못하는 소년의 한 기능이 한쪽으로 쏠린 듯이 소년은 많은 시간을 생각에 할애한다.

  하긴 ‘웃는다, 운다’ 또한 학습된 형태다. 사회적 동물로서의 인간은 감정의 예의를 오래도록 학습받아 왔으니 윤재 또한 그러한 교육을 엄마에게 받고 있는 것을 이상하게 볼 필요도 없을지도 모른다. 어떤 상황에서 대해 분노, 슬픔, 기쁨 등의 감정을 느끼고 그것을 표현하는 것은 또한 개인차가 있고 윤재가 말하듯 어떤 상황에서 ‘감정’을 느낀다는 것이 곧 정의이고 바람직한 삶을 사는 것과 동일하지도 않다. 


멀면 먼 대로 할 수 있는 게 없다며 외면하고, 가까우면 가까운 대로 공포와 두려움이 너무 크다며 아무도 나서지 않았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느껴도 행동하지 않았고 공감한다면서 쉽게 잊었다.


  의학적으로 윤재는 아몬드 모양의 편도체 이상으로 감정을 느끼지 못한다. 이러한 윤재의 상태에 엄마도, 할멈도, 나아가 세상 모두가 극도의 공포를 느낀다는 것이 참 아이러니하다. 사람들은 상대방이 같은 감정을 가져주기를 더 바라는 건가. 사실, 어떤 상황에 따른 감정을 느낀다는 것은 그 상황에 대한 판단과 결정이 지나간 후 아닐까. 그렇다면 감정보다 선행하는 것은 상황을 바르게 인식하는 ‘이성’의 영역이 더 작동되어야 하는 것 아닌가?

  최근엔 ‘감정을 느껴서’ 일어나는 사건·범죄가 많다. 감정을 느끼지 않음으로써 일어나는 사건은 많지 않다. 사이코 패스들의 연속적인 범죄와 그들이 감정을 느끼지 않는다는 일반적인 시선이 감정을 느끼지 않는 것을 혐오하고 잠재적 범재자로 인식하게끔 하는 듯하다. 하지만 결국 감정을 느끼지 않기에 범죄를 저지르는 것이 아니라 이성적 사고를 하지 않기에, 바람직한 사고를 상실하기에 범죄를 저지른다고 보는 것이 타당하지 않을까. 화가 나서, 너무 사랑해서, 너무 짜증이 나서, 너무 기분이 나빠서 등등 사람들은 감정표현이 서투른 것이 아니라 ‘바람직한’ 생각의 결여 아닐까.


몰랐던 감정들을 이해하게 되는 게 꼭 좋기만 한 일은 아니란다. 감정이란 건 참 얄궂은 거거든. 세상이 네가 알던 것과 완전히 달라 보일 거다. 너를 둘러싼 아주 작은 것들까지도 모두 날카로운 무기로 느껴질 수도 있고, 별거 아닌 표정이나 말이 가시처럼 아프게 다가오기도 하지. 길가의 돌멩이를 보렴. 아무것도 느끼지 못하는 대신 상처받을 일도 없잖니. 사람들이 자신을 차고 있다는 것도 모르니까. 하지만 자신이 하루에도 수십 번 차이고 밟히고 굴러다니고 깨진다는 걸 ‘알게 되면‘, 돌멩이의 ‘기분‘은 어떨까.


  감정불능자 괴물 윤재와 감정과잉자 괴물 곤이의 대립을 보고 있으면 탁구가 생각난다. 공격수와 수비수 간의 싸움에서 공격수가 이기리라는 예상과는 달리 수비수의 지속된 방어에 공격수의 감정이 터져버리는 탁구 경기였다. 이 경기 이야기를 한 이는 수비수인 한국 선수가 방어만 하는데도 답답하지 않고 너무나 흥미진진했다고 말했다. 결국 무너져 버린 공격수와 달리 수비수는 마지막까지 침착했는데, 딱 윤재가 그렇다. 곤이의 지속적인 괴롭힘에 늘 같은 태도로서 대응하는 윤재에게 폭발하는 건 곤이다.

  내가 엄마라면 윤재를 어떻게 대할까 가정을 해보는데 그저 가정인데도 뭐가 막혀버린다.  나이가 들어가면서는 편도체에 이상이 오는 것인지 감정을 느끼는 일에 무뎌진다. 특별히 슬프고 즐겁고 우울하고 기쁘고 분노를 느낄 것 없는 상태. 이것은 살아가는데 특별히 장애가 되지는 않는 것 같다만. 처음부터 비정상이라는 틀로 가둬지게 되는 소년이라면 아무래도 삶을 대하는 방향이 달라지게 될 것 같다는 생각을 하다가도 감정적인 동요가 되지 않는데 어려움이 있게 되나, 이런 저런 생각이 들기도 한다.

  결국 감정을 얼마만큼 느끼든 사회를 살아가는 규율을 가르쳐주는 이의 방침이 소년, 윤재를 세상에 살아갈 수 있도록 이끄는 힘이었다는 생각이 든다. 엄마는 ‘감정불능’ 아이가 ‘이성 불능’이 되지 않도록 가르친다. 그런 엄마와 할멈이라는 존재가 윤재가 세상을 살아갈 수 있는 토대와 방향을 이끌어 주었다. 물론 도라가 등장해 동년배 여학생에 대한 호감을 느낌으로 인해 변해가게 되는 윤재를 드러냄으로써 도라의 역할을 부각시키긴 하지만 윤재의 성장과 변화를 이끌 수 있는 토대는 엄마였다. 엄마의 두려움과 공포가 기우였다 생각하기도 했지만 그로 인한 엄마의 가르침이 윤재가 결핍 속에서도 세상을 보는 시선을 찾아갈 수 있는 결정적 역할을 했다. 윤재는 그 가르침에 힘입어 세상을 보는 시선을 만들어 갔다. 결국 ‘어떻게, 무엇을’ 아느냐가 세상살이에 중요한 것 아닐까 싶다. 세상이 무엇을 보여주고, 가르쳐주고 있느냐가 중요하다. 세상의 바람직함과 정의를 추구하지만 결국 제 아이에게는 이기를 쫓는 것을 보여주는 어른의 가르침만 아니라면, 수많은 이들의 아몬드에 이상이 온다 해도 두려움을 느낄 필요없는 사회가 될 텐데라는 생각을 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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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루얼티
스콧 버그스트롬 지음, 송섬별 옮김 / arte(아르테) / 2018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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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건 성장일까

크루얼티, 스콧 버그스트롬, arte(아르테), 2017.


  『크루얼티』에서 보여주듯 국가를 위한 직업군의 삶은 위험이 가득하다. 액션과 스릴이 가득한 첩보 스타일의 이야기는 무수히 반복되어 왔고 이야기의 구조도 줄거리도 결국은 유사하기 그지없는데 지속적으로 양상된다. 이번에는 열일곱 고등학생, 그웬돌린이 외교관 아버지의 납치범을 추적하는 주인공이 되어 이야기를 이끈다. 영화화되기로 했다는데 ‘영화관’이 좋아할 이야기구나 싶었다. 어떤 형태로든 CIA 비밀요원이란 흥미진진한 요소를 가지고 있음에 틀림없다. 그러나, 그웬돌린은 CIA요원이 아닌 열일곱 다른 아이들에게 왕따당하는 여학생일 뿐이다. 그 어떤 비밀훈련을 받은 적 없는 그웬돌린이 파리, 베를린, 프라하를 넘나들며 사라진 자신의 아버지를 찾아가는 여정은 수많은 범죄자들과 맞닥뜨리는 일과 같다. 그 일을 겪으며, 아니 아버지를 찾기 위해 범죄조직 속으로 파고 들어가는 그웬돌린의 여정을 따라가면서 새삼 다른 의문이 들었다.

  우와, 그웬돌린, 정말 멋져!

  이런 반응은 들지 않았다. 액션 스릴러 소설에서 여성 캐릭터의 정점을 밀레니엄의 마라가 가지고 있기에 그웬돌린의 매력이 비교되었을 수도 있고 작가의 그웬돌린의 창조 이유 때문이기도 하다. 작가는 ‘바비’와 ‘공주’로 국한되는 여성성에 반발해서 그웬돌린 캐릭터를 창조했다고 하는데 여성성의 제거가 곧 남성성의 극대화인가, 바비 공주 캐릭터도 여전사 캐릭터도 지나치게 안이하고 소비주의적이란 생각이 들었다.

  일찌감치 사라진 부모를 찾아가는 여정은 ‘엄마 찾아 삼만리’의 마르코가 보여주었다. 그 시절의 어린 소년이 엄마를 찾아가던 여정과 최근의 소녀가 아빠를 찾아가는 여정을 보면 이 사회가 얼마나 무섭게 변화되었는가를 느낄 수 있다. 온갖 위험이 도사리는 상황에서 그웬돌린은 더욱 더 무장해야 한다. 짧은 순간에 그웬돌린은 범죄와 폭력을 주요업무로 삼는 이들을 제압한다. 짧은 순간의 수련으로 오래도록 폭력을 쉬이 사용하던 남자들에게 신체적인 열세 없이 맞선다는 건, 아무리 생각해도 판타지가 아니라 오버다. 그웬돌린의 강함을 부각시키기 위해 악랄하다고 해야 할 범죄조직들, 인신매매단의 보스부터 말단 조직원의 숙련된 전문성은 사라져버린다. 

  그웬돌린의 목표는 당연 ‘아버지를 찾는 것’이다. 아버지를 찾는데 다른 이유를 붙일 필요는 없다. 하지만, 그웬돌린은 아버지가 표면적으로는 외교관이었지만 CIA 비밀요원이라는 점을 알고서 아버지를 절대 선의 위치에 놓는다. 그렇기에 아버지를 납치한 일당들은 모두 가 ‘나쁜’ 사람이 된다. 이 전제는 나쁜 사람들은 모두 ‘죽여도 된다’라는 당위성을 부여한다. 물론, 그웬돌린이 만나게 되는 일당들은 마약거래, 인신매매, 무기 밀매를 일삼는 확실히 악한 이들이긴 하다. 범죄조직의 잔혹성에 맞추어 그웬돌린 또한 점점 더 폭력적이고 잔혹해진다. 더 악한 일들을 처단하기 위해 누군가의 희생을 담보하고 더 큰 잔혹성으로 그들을 제압하는 열여덟이 된 그웬돌린의 활약상은, 통쾌하다기보다 씁쓸해진다. 이건 성장일까.

   

“생각해보면, 이 애들이 너무 어리다는 생각도 들거든. 어쩌면 저 빨간 머리는 페테르부르크에 계속 살면서 학교 선생님이나 뭐 그러게 되고 싶었을지도 모르는데 우리가 저 애를 창녀로만든 거잖아.“ 에밀은 눈살을 찌푸리며 차 앞으로 펼쳐진 길을 쳐다보았다. 생각에 잠긴 철학자 같았다. ”그래서 내가 생각을 아예 안 하는 거야.“


  5개 국어를 하는 그웬돌린 역시도 통역가가 되었을 지도 모르고 왕따로 기억되는 학교에서 만난 테렌스와 즐거운 학교생활을 할 수도 있었겠다. 세상이 그웬돌린을 잔혹한 여전사로 만들어 버리다니. 그럼에도 그 모습을 보고 열광하고 있다니. 나도, 생각을 아예 안해야 마음이 편해지려나.

  

“그럴 리가 없어요. 클라디보는 괴물이잖아요, 아빠. 클라디보는 인신매매범이에요, 여자들, 어린 소녀들을…….”

하지만 아빠도 이미 알고 있겠지, 직접 겪어보았을 테니까.

“맞아, 하지만 CIA는 상관하지 않지.”

“하지만 클라디보가 CIA 요원이라면 어째서 아빠를 인질로 잡고 있었던 거예요?”

“돈 때문이야, 그웬. 언제나 돈 때문이지. 온 세상을 움직이는 건 결국 돈이야. 클라디보의 보스였던 조릭은 거액의 계좌를 남기고 죽었어. 클라디보와 다른 CIA요원이 그 돈을 가로채려고 했는데 내가 그 사실을 알아낸 거야.”


정의란 추상적인 개념이 아니야. 오늘 밤에 네가 한 일이 바로 정의야. 정의의 얼굴은 추하고 비열하거든.


   세상은 가치와 신념보다 ‘돈’이 우선한다는 것을 살아가면서 가장 잘 경험하고 느끼게 된다. ‘온 세상을 움직이는 건 결국 돈’이라는 이 씁쓸한 말, 모든 범죄의 이유는 돈이고  CIA 요원이라면 악인이 아닐 거라는 이 믿음이 깨지는 일 또한 잔인한 일이다. 그렇다면 그렇게 믿으며 달려왔던 그웬돌린의 아버지는, 믿을 수 있는 CIA 요원인 걸까. 미심쩍어하면서도 그웬돌린에게 처음부터 믿고 의지하는 이들은 정해져 있는 듯하다. 아버지를 찾는 과정에서 수없이 많은 생각을 해야 했고 결단을 해야 했던 그웬돌린의 활약의 정점은 인신매매로 잡혀 있던 소녀들을 그대로 버려두지 않으려는 생각일 것이다. 그웬돌린의 목표는 오로지 아버지를 찾는 것이었으니, 아버지를 찾고 난 후의 새로운 목표를 설정하여 달려간 그웬돌린은 이제 이전의 그웬돌린으로 결코 되돌아 갈 수 없다. 범죄의 잔혹성을 몸소 체험하게 되면 그 세계를 잊고 살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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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전한 번역에서 완전한 언어로
정영목 지음 / 문학동네 / 2018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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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 참 불쌍타의 시절을 지나


완전한 번역에서 완전한 언어로, 정영목, 문학동네, 2018.


  그러고 보니 영미소설의 대다수, 수많은 작가의 책을 정영목 작가의 번역으로 읽었다.   저자는 27년간 200여 권을 번역했다고 하니 놀랍고도 가늠되지 않는다. 이 책은 어떤 작가보다도 기억에 남는 번역가 정영목의 번역의 방법과 번역에 대한 생각이 녹아 있다. 독자들이 말하는 ‘번역투’ 문장에 대한 생각, 번역의 역할과 번역가로서의 자세, 번역과 글쓰기 등에 관한 저자의 고민과 생각 등은 번역 작가들 덕분에 여러 나라의 저작을 편하게 읽어왔으면서도 쉽게 ‘아, 번역투’라고 하던, 책이 흥미롭지 않거나 이해되지 않으면 쉬이 ‘번역탓’으로 돌리던 것을 쑥스럽게 한다.

  레미제라블이 처음 번역되었을 때, “너 참 불쌍타”라고 번역되었다고 김영하 작가의 책에서 본 적이 있다. 이윤기 작가의 신화관련 책에서 도대체 사전에도 등재되지 않고 영어 원문을 기재하지도 않은 ‘육준강대의’의 정확한 뜻을 찾아 원서찾기 전쟁을 벌였던 일이 생각난다. 주디스 버틀러의 젠더 트러블은 가장 머리를 아프게 했던 번역서였고 배수아 작가가 독일에서 유학하고 로베르트 발저, 페르난두 페소아와 같은 작가들이 국내에 소개·번역되었다는 글을 본 기억이 난다.

  작가의 맛, 느낌을 알고 싶어 원문을 애타게 읽어보고자 했던 적도 있고 영미권이 아니라 동구권, 아랍권, 제3세계 작가들의 작품에 끌리는데 번역되어 있지 않아 읽지 못하고 있을 때의 기분은 답답함을 넘어선다. 그나마 영어로 번역된 것을 재번역하여 나온다면 환호하게 되는데 여러 면에서 우리나라 번역의 세계는 가야할 길이 멀고 고달프다는 것을 느끼게 된다. 우리나라 작가들의 좋은 작품들이 제대로 번역되지 않아 세계에 알릴 기회가 적다는 것, 또한 노벨상 후보로서의 위상을 얻는 일이 힘들다는 것, 한강 작가의 채식주의자의 오역 논란 등이 지속되었던 것을 생각하면 마냥 안타깝기 그지없다.


서류 양식의 번역이라면 모르지만 소설의 번역은 '사람의 일'이라고 생각을 해요. 배우처럼 불가분의 육체성이 번역에 붙어다니는 것은 아니지만 언어를 교환하고 이해하는 영역에서는 인간만의 고유한 영역이 개입하거든요. 아닌 척하고 싶지만, 투명한 체하고 싶지만, 번역은 사람과 사람 사이의 일이라 번역가의 무엇인가가 책 속에 남을 겁니다. 


  AI가 바둑 세계 제패에 이어 번역과 창작에까지 진출한다는 건 오래 전부터 진행되어 왔다. 저자는 기계의 번역에 대해, 특히 소설 번역은 ‘사람의 일’이라고 말한다. AI가 멋진 번역가가 되기에는 아직 부족하다는 말에 안심했던 사람으로서 번역이 사람의 일이라는 저자의 말이 와 닿는다. 계속 사람의 일이었으면 한다.


기계에게는 인간처럼 읽는다는 것, 즉 해석을 통하여 창의적으로 개입하는 것은 매우 어렵고 오히려 읽지 않는 쪽이 효율이 좋다는 것이 증명된 셈이고, 따라서 기계는 텍스트를 읽는 길로는 가지 않을 것이다. 앞으로 그 나름의 우회로를 거쳐 인간번역과 같은 수준, 혹은 더 나은 수준에 이를지는 모르겠으나, 어쨌든 그 우회로는 인간의 길과는 다를 것이다.


   저자는 번역가의 과제는 완전한 ‘번역’에 이르는 것이 아니라 완전한 ‘언어’에 이르는 것이라고 말한다. 저자의 문체를 우리말로 잘 옮기는 것을 중시하는 저자의 생각이 책 한권 한권을 번역하는 동안 번역의 원칙과 방법이 되었다. 이 책은 번역가가 되려는 이들에게 유용한 책이겠다. 번역이란 무엇인지 번역하면서 부딪치게 되는 고민들, 나만의 원칙과 방법을 찾아가기까지의 저자의 노하우와 깊은 생각들이 같은 직업을 선택하려는 이들에게 길잡이가 되어 줄 것이다.

   “사람마다 자기가 하는 일을 생각할 때는 자기 학대적인 면과 과대망상적인 면이 공존하는 듯하다”는 저자의 말이 확, 와닿는다. 그래서 일이란 언제나 힘들다. 내가 하는 일에서 원칙과 방법을 세워 나가는 일이 비록 자기학대를 부추기는 일일지라도 흔들리지 않는 확고함으로 일을 대한다면 때론 과대망상쯤은 허용될 수 있을 것도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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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자서 본 영화
정희진 지음 / 교양인 / 2018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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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를 본 지 오래됐다  


혼자서 본 영화, 정희진, 교양인, 2018-02-14.


  내 인생의 영화라고 꼽을 만한 것이 없다. 딱히 영화를 즐기지 않으니. 이 폭염 속 극장에서 음료를 마시며 시원함을 즐기는 영화에 대한 환상도 없다. 가기까지가 귀찮아진다. 그렇기에 영화를 보러 가는 일은 연례행사가 되기 일쑤다. 아니, 영화관에 가는 일이라고 해야 하나. 갑자기 ‘혼자서 보는’ 이라는 말이 낯설어진다. 영화관에서 영화를 보는 일이 과연 혼자서 하는 일인가. 같이 이야기를 나누며 보는 아는 누군가가 없이 영화를 본다는 말이다. 영화관은 사람으로 넘쳐나니까. 그럼 이건 혼자서 하는 게 맞나?! 그렇게 보면 철저하게 혼자서 하는 건 책이라는 생각이 든다. 일단 책을 읽는 시간은 철저히 ‘혼자’라는 것이 가능하다. 그렇기에 영화보다는 책이 혼자서 하기에 알맞은 취미생활이라고 생각해본다. 당연, 작가는 이런 질문을 예상했듯이 이렇게 말한다.


‘혼자서 본 영화’가 ‘나 홀로 극장에’라는 뜻은 당연히 아니다. 영화와 나만의 대면, 나만의 느낌, 나만의 해석이다. 나만의 해석. 여기에 방점이 찍힌다. 나의 세계에 영화가 들어온 것이다. 지구상 수많은 사람들 중에 같은 몸은 없다. 그러므로 자기 몸(뇌)에 자극을 준 영화에 대한 해석은 모두 다를 것이다. 한 작품을 천만 명이 본다면 그 영화는 천만 개의 영화가 ‘되어야 한다’.


  그래서 나는 혼자서 하는 것에 대한 매력이 어떤 것인지 궁금하여 이야기를 들어본다. 하지만 이 책은 혼자서 보는 행위에 대한 이야기가 아니라 그렇게 혼자서 본 ‘영화’에 대한 이야기를 한다. 인생 문제를 해결해주고 자신의 세계를 확장시켜주는 가장 중요한 도구이기에 타인이 필요치 않고, 타인의 세계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더욱 더 혼자만의 시간이 필요하다고 외로움을 원한다고 말한다. 인생문제가 대부분이라도 해결된다는 이 뻔뻔스러운 고백에 28편의 영화를 보는 저자의 시선을 따라간다. 영화에 대한 감상보다 ‘혼자서’에 더 꽂혀 그에 관한 이야기를 듣고픈 마음이 더 크지만, 영화마다 시선을 녹여내는 작가를 따라가다 나도, 여러 생각에 잠기게 된다.

  영화를 보는 내내 저자는 가족과 사회에서의 사랑과 상처, 젠더와 권력과 이데올로기에 관한 평소의 시선을 그대로 녹아 낸다. 다양한 영화들 그 에피소드들에서 저자가 생각하고 주장하는 바에 관해 더욱 세밀한 시선을 채집하며 사회에서 수동적으로 머무를 수밖에 없는 여성에 대해, 그렇게 만드는 사회의 시선에 대해 이야기한다. 정희진 작가의 책을 읽었다면 젠더에 대한 저자의 시선을 알기에 새로운 시각을 얻었다는 기분은 들지 않는다. 그래도 <강철비> <의형제> <용의자> <공조> 영화를 관통하는 시선은 재밌게 봐진다.


당대 남한 여성들의 낭만적 사랑의 욕구가 반영된 ‘남북’ 영화는 역설적으로 북한 여성이나 남한 여성이 주인공이 되는 것을 불가능하게 만들었다. 이성애 제도에서 보는 사람(관객)이 여성일 때, 대상(화된 인물)은 남성일 수밖에 없다. 한반도 영화에서 여성 캐릭터는 사라졌다. 그래서 이런 영화들을 남북 화해와 흥행의 두 마리 토끼를 잡은 영화라고 평가하는 것은 사실이 아닐뿐더러 위험하다.


  한때 북한은 ‘나쁘고 악하고 아름답지 않은‘이 총체적으로 형상화되었다. 그러던 것이 공공경비구역 JSA 즈음부터 변화의 조짐이 보이기 시작하더니 최근 잇따른 북한이 소재로 등장하는 영화에서 북한에 대한 묘사는 확연히 달라진다. 북한 남성들은 가족에 대한 책임감은 기본으로 멋진 외모까지 갖춘 남성으로 등장한다. 저자는 그런 변화에 영화의 주소비층인 젊은 여성들의 욕망, 북한 남성 판타지가 숨어 있다고 말한다. 젠더의식이든 이데올로기든 그것을 뛰어넘는 것은 늘 자본이라는 생각이 들게끔 한다. 자본주의가 강자다. 이데올로기를 전환시키는 그 탁월함.

  

우리가 본 영화는 우리의 인생과 붙어 있다. 몸으로 영화를 본다. 영화의 내용은 감독의 ‘연출 의도’가 아니라 관객의 세계관에 달려 있다. 누구나 자기의 삶만큼 보는 것이다.


  영화에서 저자가 집어내는 상처와 문제들은 대부분 젠더 문제로 귀결된다. 저자의 말처럼 영화를 보는 내내 저자가 살아온 삶이 어디에 머무는가를 보여준다. 타이타닉 영화에서 가장 기억에 장면이 화로에 끊임없이 석탄을 넣고 있는 노동자라고 말했던 운동권 선배의 시선을 떠올린다. 나는 책이든 영화든 이 사회에서 무엇을 보고 있는지를 생각하게 된다. 그때그때 달라요… 그래도 책을 읽고 생각을 주절거리는 것이 인식 확장을 위한 노력의 한방편이라 생각하며 위안을 삼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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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이 잠든 동안
커트 보니것 지음, 이원열 옮김 / 문학동네 / 2018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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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안 불완


세상이 잠든 동안, 커트 보니것, 문학동네, 2018.


  “한 가지밖에 모르는 사람들이오, 올라갈 줄만 아는 사람들.”

  <유행병> 속 인물은 당대 유행하고 있는 병의 근원적인 원인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   『세상이 잠든 동안』이라는 표제 아래 16편의 단편이 수록된 이 책에서는 이러한 인물들의 퍼레이드라고 해도 좋을 듯하다. 한가지 밖에 몰라 다른 것에 대한 면역성이 없는 이들의 삶은 복잡하지 않지만 결코 단순하진 않다. 단순성, 하나에 대한 집착만으로도 얼마나 삶이 복잡해질 수 있는지를 느끼게 한다.

  단편집인줄 몰랐다가 단편 하나가 끝날 때마다 아참, 작가가 누구였지 확인하게 되었다. 뭐라고, 커트…보니것이라고? 정말? 이런 생각한지 얼마되지 않아 또다시 작가가 누구더라,를 반복하고 있었다. 거기에는 진짜 보니것 작품이 맞아?라는 의문과 설마 내가 보니것의 문체를 모를 리가라는 당혹이 섞여 있었을지도 모르겠다. 보니것 작품은 그의 사후에 출간된 경우가 많은데 이 작품집도 마찬가지다. 따져보자면 뭘 그렇게 보니것 작품을 많이 읽었기에 읽으면 ‘나는 보니것의 작품이오’를 알아챌 거라고 그러냐 싶었지만 보니것의 작품에서 느꼈던 매혹이 덜해서, 아주 덤덤하게 책장을 넘긴듯하다. 나 또한 보니것 문체의 한가지밖에 모르는 사람이겠다 싶다. 

  어쩌면 단편집이 가지는 같은 소재와 패턴의 반복 때문에 받은 느낌일 수도 있겠다. 특정한 한가지에 집착하는 인물들 외에 이 책속에는 ‘돈’이라는 소재 또한 반복적이다. 마치 자본에 대한 신랄한 풍자를 가한 찰리 채플린의 작품이 연상된다. 유행병의 대사와 잇는다면 결국 이 이야기 속엔 돈에 집착하는 인간의 삶이 주된 주제로 다뤄지고 있다고 할 수 있다. 돈에 집착한다는 것은 곧 돈을 욕망한다는 것인데 대체로 돈에 대한 욕망의 과정도 결과도 거의 모든 작품은 긍정적으로 그리지 않는다. 하지만 보니것은 그것을 좀더 유하고 발랄하게 그리고 있다.

  자신이 만든 기계 여인에 집착하는 천재 공학자, 남성 잡지 속 여인에 빠진 남자, 모형 기차 만들기에 빠진 남자, 전통과 관습에 충실한 모범생 소년이 몰두한 그것으로 인해 외면하며 잃게 되는 것은 사랑하는 여인이다. 반면 돈에 몰두하는 이들은 아무도 믿지 못하게 되거나 유행처럼 자살로 이어지기도 한다. 물론 돈이 없다면 굶어야 하고 예술을 하는 일은 멀고 험난하지만.


 “어떤 어머니들은 자기 아들을, 자신을 제외한 모든 여자들에게 타인으로 만들려고 하죠.”

  <루스>는 아들에 집착하는 어머니와 며느리의 한판 승부가 펼쳐진다. 안타깝게도 며느리는 패배를 절감하는 순간 저 통렬한 말을 남긴다. 그렇다. 아들을 둔 어머니들과 며느리의 싸움, 왜 어머니들은 아들에 집착하며 모든 여자들을 타인으로 만들려 하는지 세월이 흘러도 알 수 없는, 궁극의 의문점이긴 하다. 하지만 아직 며느리를 두지 않은 탓인지 며느리는 그런 어머니를 이해하지 못하고 돌아서다가도, 깨달음에 힘입어 어머니에게로 간다.


자기에 비해 포크너 부인이 얼마나 이기적이었나 생각하니 기분이 더욱 들떴다. 포크너 부인이었다면 자신의 좁은 삶 속 비극 외에는 아무것도 알아차리지 못한 채 대합실에 그냥 앉아 있었을 것이다.


  물론 통쾌하지만 그것으로 머물렀어도 좋겠다고, 돌아서서 가지마라고 그냥 그런 생각을 하게 된 것을 즐기라고 말해주고 싶지만 루스는 ‘자신의 좁은 삶 속 비극’을 살게 될 어머니를 ‘구원’하기 위해 발을 돌린다. 이런.


한때 신이 당신에게 사랑하라고 주셨던 불완전한 사람을 봐줘요. 내가 정말 어떤 사람이었는지, 그리고 신이 허락하신다면, 지금 내가 어떤 사람인지를 보고 조금이라도 좋아해보도록 해요. 그리고 여보, 제발, 다시 불완전한 사람들 속에서 살아가는 불완전한 사람이 되어줘요.


  한가지 생각을 가치관, 신념, 중독 등의 이름으로 부를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지나친’쪽으로 기운다면, 물론 이미 지나치게 치우쳐 있지만, 그것은 모든 이들을 타인으로 나아가 적으로 돌리는 이유가 될 것이다. 그들이 이기적이라는 말로 내버려두고 싶은데 굳이 또, 루스처럼 그들을 어여삐 여기며 그 삶으로 들어가는 이들이 있어 세상이 이렇게 흘러가고 있는 것인가 싶다. 그들은 올곧이 불완전한 사람이기에 <제니>속 천재 공학자의 아내가 남기는 편지는 그들에게 남기는 글이 아니라, 그들과 함께 살아가야 하는 우리에게 그들을 포용하라며 남기는 메지지 같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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