들끓는 꿈의 바다
리처드 플래너건 지음, 김승욱 옮김 / 창비 / 2023년 11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

  3년 반 만에 다시 플래너건을 읽는다. 6년 전에 <먼 북으로 가는 좁은 길>을 인상깊게 읽어 골랐던 책이 <굴드의 물고기 책>이었는데, 음악 좋아하는 사람들이 “굴드”만 나오면 사족을 못 쓰는 경향이 있고 나도 별로 예외가 아니어서 제목만 보고 덥석 물었다가 별로 재미를 못 봤다. <굴드의…>는 내용이 전혀 기억나지 않는다. 플래너건이 태어난 테즈메이니아 섬을 무대로 뭔가 환경 변화에 관해 경종을 울리는 내용 아니었나 싶기도 하다. 그러나 확인하기 위해 다시 뒤져볼 정성까지는 없다.

  오스트레일리아 소설에 생각 외로 이 테즈메이니아를 무대로 한 작품이 많다. 누가 쓴 어떤 작품인지는 딱 떠오르지 않지만 주로 영국에서 추방당해 도착한 범죄자 가운데 오스트레일리아에서 다시 범죄를 또 저질러 테즈메이니아의 가혹한 감옥에 갇혀 있다가 뭐 이렇게 저렇게 출소를 하게 되고 나온 김에 어디서 정착을 하고 이런 스토리 라인이 머리 속에서 뱅뱅 돈다.


  이번에 읽은 <들끓는 꿈의 바다>는 2019년에 실제로 있었던 오스트레일리아의 초대형 산불 시기를 뇌수종으로 생을 마감하는 단계에 처한 프랜시스 여사의 죽음의 침상과 비유했다. 오스트레일리아 사람들은 자신들의 필요에 의하여 대초원지역의 많은 부분을 산림으로 만들어버렸고, 새롭게 생긴 숲이 자연이 공급할 수 있는 수분보다 더 많은 양의 습기를 소비하여 극도로 건조한 환경이 되어 버렸다. 그러지 않아도 건조한 오스트레일리아 평야에서는 주기적으로 산불이 발생했지만, 나무를 비롯한 생명체도 자연현상에 의한 자연발화를 오히려 자연의 종이 건강해지는 쪽으로 이용하는 방향으로 진화했다. 그리하여 주기적인 산불이 다양성을 확대시키는 측면이 있었지만 이제 극도로 건조해진 환경에서 크게 번져버린 산불에는 속수무책, 많은 생명 종이 멸실을 향해 달음박질을 하기 시작한다. 하다못해 인간종도 해변까지 습격해온 산불을 견디지 못하고 소방대의 경종 신호가 울리면 즉시 바닷물로 들어가야 했을 정도였다고. 시드니와 멜버른의 상공엔 산불의 불씨와 연기와 미세먼지가 하루 종일 햇빛을 가렸다. 이런 현상은 테즈메이니아의 남동쪽에 위치한 주도 호바트까지 많은 영향을 끼쳤다.

  리처드 플래너건은 인간에 의한 환경오염과 온난화, 이상기후로 인간세가 촉진되는 현상을 안타까워한다. 수많은 어류와 유대류와 조류가 멸종되었거나 멸종 직전까지 와 있는 것을 통탄한다.


  그리고 프랜시스. 애칭 프랜시. 프랜시는 호리와의 사이에서 맏딸 애나, 아래로 아들만 셋, 토미, 로니, 터조를 두었다. 아이들 다 괜찮게 성장했다. 이 가운데 둘째 아들 로니가 어려서부터 가장 재능이 있고 여러 방면으로 재능을 증명하며 부모는 물론이고 누나, 형제, 동네 사람들의 인정을 받았다. 남자 형제들은 버니에 있는 마리스트 파더스 기숙학교에 다녔는데, 이곳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 총명하고 재능 있는 로니는 집에 돌아와 차고 대들보에 줄을 걸고 목을 매달았다. 로니의 자살 이전에 장남 토미는 후에 로니의 장례미사를 집전할 학교 신부의 사랑을 견디지 못해 열두 살 생일이 지나자 말을 더듬는 증세를 갖고 집에 돌아왔다. 나중에 토미가 말하기를 문제의 신부가 토미를 사랑하다가 로니가 학교에 입학을 하자 로니한테 사랑의 화살을 돌렸단다. 어쨌거나 이제 조금 다급하거나 긴장을 하면 여지없이 말을 더듬는 토미는 자식들 가운데 유일하게 테즈메이니아 섬에 남아 중증 치매에 걸린 아버지를 돌보고, 깊은 병에 든 어머니를 부축해 진료를 받으러 다니고, 입원해서는 병실을 지키게 된다. 사회적으로는 비록 실패한 예술가의 딱지를 달았지만, 역시 성공하지 못한 봉급쟁이였던 내가 읽기에는 안분자족 할 줄 아는, 가장 덜 불행한 삶을 영위하는 인물이다. 건축가로 성공해 해외 학회에서 강의 부탁이 쇄도하는 누나 애나, 기업체의 실력 있는 냉혈 협상가 터조한테는 만만한 동생/형이자, 화풀이 상대이자, 아무 심부름이나 시킬 수 있는 하인 대우를 받을지언정.

  그런데 이 가정의 구성원에게는 뇌과학적으로 문제가 있는 것 같다. 아버지 호리 씨는 비교적 젊은 시절에 치매가 와서 결국 중증 알츠하이머로 생을 마감한다. 재능이 많은 둘째 아들 로니는 틀림없이 우울증이 깊어져 자살을 했을 터이고, 맏아들 토미는 충격에 의하여 말을 더듬는다. 토미의 아들 데이비는 조현병이 있어 주기적으로 정신병원에 입원해야 한다. 막내 터조는 소수의 성공한 사람들이 자주 보이는 급한 성격과 고집으로 결정적인 안하무인이 되어 버렸다. 맏누이 애나는 시드니에 살면서 처음엔 한 달, 이어서 두 주일, 나중엔 거의 매주 비행기를 타고 테즈메이니어의 주도 호바트의 로열 호바트 병원에 엄마를 보러 오지만, 문학작품이니까 가능하겠으나 처음엔 손가락이 없어지고, 무릎 관절이 없어지고, 눈이 하나 없어지고, 귀도 없어지는 메타포 적 변용을 겪는다. 자신만 그런 것이 아니다. 대학을 졸업했으면서도 여전히 능력있는 엄마 집에서 나가지 않고 하루 종일 컴퓨터 게임에 몰두하는 20대 후반의 아들 거스. 이 아이가 엄마의 돈을 훔치고, 보석도 훔치고, 비싼 가구도 내다 팔고, 심지어 고가의 맥 랩탑도 내다 팔아 마약을 하면서 점차 엄마와 같은 현상인 몸이 사라지기 시작한다. 거스는 도가 심해서 차츰차츰 사라지더니 결국 마우스를 쥔 채 화면에 뜬 가상의 물체에 총격을 가하는 엄지를 포함해 세 손가락만 남는다. “나한테는 애니의 날과 애니가 없는 날 밖에 없는데, 그 중에 애니의 날만 진짜 같아.” 라는 문자를 날리는 동성 연인 메그도 나중에 손이 없어지는 현상이 벌어진다. 세상에 아무도 이를 발견하지 못하고 신경쓰지도 않는다. 딱 한 명만 빼고. 노랑배도라지앵무의 멸종을 예방하기 위한 프로젝트 책임자이자 테즈메이니아 대학 동물학과 교수이며 선대 가족 거의 전부가 수용소에서 가스가 되어 하늘로 올라간 유대인 리사 샨. 그러나 그건 애나의 생각일 뿐이었다. 리사 샨은 애나를 “솔직히 좀 이상한 여자였다”고 기억할 뿐이니까.


  남매의 어머니 프랜시가 쓰러졌다. 새벽 두 시에 구급차를 타고 병원으로 가 검사를 해보았다. 치매에다가 파킨슨 의심. 날이 밝은 후에 다시 정밀검사를 해보니 다행히 치매도 아니고 파킨슨도 아니었다. 뇌수종. 뇌에 물이 고인 현상이다. 관을 삽입해 물을 빼는 시술을 한 후 정상을 회복해 3년이 흘렀다. 이번엔 서서히 진행하는 낮은 등급의 암이 찾아왔다. 비호자킨 림프종. 비교적 순한 암이라 항암치료를 받았고, 이후에 놀라운 효과를 보였지만 프랜시 자신은 스스로를 “그리스도교 세계에서 가장 건강한 노인 시체”라고 자조했다. 이후 5년이 더 흐르고 어머니는 86세가 됐다. 그동안 애나는 건축가로 명성을 떨치며 국내에서 여러 개의 건축상을, 해외에서도 세계적인 상을 받는 명사가 됐고 아름다운 여성과 새로운 커플을 이루었으며, 브리즈번에서 사는 막내 역시 세계를 누비며 각종 비즈니스 계약을 성공적이고 냉혹하게 체결하는 해결사로 이름을 드높였다.

  이제 어머니 프랜시에게 찾아온 것은 뇌출혈. 입원한 어머니는 조금 호조를 보이다 그만 낙상해 갈비뼈 두개가 부러졌으며, 의사들은 가족과 상담을 요청했다. 이제 괜찮은 줄 알았던 애나와 터조는 갑자기 일정을 취소하고 비행기를 탔고, 이들에게 의사들은 프랜시의 존엄한 죽음을 권했다. 세상에. 그렇게 정정하던 어머니한테 존엄한 죽음이라니. 대안은 없나요? 시술/수술 그리고 노인에게는 권하지 않는 신장투석 등등. 성공하지 못한 화가 토미의 의견은 전혀 고려 대상이 되지 못한다. 애나와 터조 입장에서는 어머니의 갑작스러운 죽음을 도저히 인정할 수 없어서 무조건 치료를 주장하고, 관철시킨다. 온갖 연줄을 동원해서. 그리하여 어머니 프랜시는 길고, 길고, 너무도 긴 고통의 시간을 맞게 되고, 자식들은……. 세상이 그런 것이지. 갈 때는 보내야지. 다 산 것들의 욕심일 뿐.

  어머니 프랜시의 죽음을 향하는 고통과 오스트레일리아의 생명체 멸종 상황을 작가 리차드 플래너건은 연관시키려 애쓴다. 이미 멸종해버린 오스트레일리아 유대 늑대, 유대 너구리, 이제 몇 개체 남지 않은 노랑배도라지앵무새 등등.


  다 좋다. 테즈메이니아가 고향인 작가 입장에서 그곳의 동물들이 멸종하고, 멸종해가는 현상을 고발하는 건 어쩌면 의무일 수도 있다. 멸종의 직접적 원인인 인간들의 행위에 대한 고발도, 여전히 환경파괴를 동반하는 개발을 옹호하는 세계의 정치가들을 규탄하는 것도. 그런데 내내 못마땅했던 것은, 유대 늑대와 유대 너구리 같은 종의 멸종이 그렇게 비탄스럽고, 노랑배도라지앵무의 개체수 감소에 조바심을 치는 반면, 테즈메이니아 선주민을 멸종시킨 리처드 플래너건의 동족들에 대한 규탄은 왜 없는가 하는 것 때문이었다. 너희 잉글랜드에서 온 백인종들은 테즈메이니아에서 선주민 완전 멸종의 위업을 이루었잖은가 말이지. 어차피 호모 사피엔스, 십만 년 정도 살았으면 제법 살았어. 다른 종이 나와 대체할 터이니 너무 걱정하지 않아도 될 걸? 인간세가 인간도 멸종시키겠다는데 뭐가 그리 중헌 디?


.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8)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무덤없는 주검 서문문고 104
사르트르 / 서문당 / 1997년 9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

  나는 사르트르를 좋아하지 않았다. 그의 저작을 많이 읽어본 건 아니지만 20세기를 대표하는 지식인, 심지어 “사르트르가 20세기 자체”였다는 영광스러운 명성을 누린다는 건 어디서 읽었다. 그러나 인연이 아니어서 그랬는지 도무지 친해지지 않더라는 것. 《무덤 없는 주검》도 그의 대표작 가운데 하나인 <더러운 손>과 더불어 작년에 사놓고 그저 장식처럼 책장에만 꽂혀 있었다. 어쩌나, 도무지 손이 안 가는 걸. 이번 설 명절 때 내가 다니는 도서관도 나흘 연속 휴관이라 집에 머물면서 백화수복에 명태전 안주해서 떡만둣국 먹는 것도 한 두 번이지 연휴가 하도 지루해서 엣다 모르겠다, 핑계김에 읽었다. <구토>, <말>, 지난 세기 새파랗게 젊은 시절의 <지식인을 위한 변명> 같은 것들이 와닿지 않은 건 이미 지난 일이니 굳이 기억할 필요 없을 것이다. 그리하여 이번에도 애초에 기대감은 하나 없이 마치 해야 할 숙제를 하는 기분으로 첫 장을 열었다는 걸 이야기 해야겠다.

  그런데 이게 무슨 일. 《무덤 없는 주검》이 얼마나 재미있던지. 사르트르라고 하면 지구행성의 대표 실존주의자라고 할 수 있다. 재작년에 읽은 시몬 드 보부아르의 <레 망다랭>은 내가 읽은 가장 재미있는 실존주의 작품이었다고, 우리나라 작품으로 국한하면 역시 장용학의 <원형의 전설>이 제일 인상깊은 실존주의 소설이었다고 믿고 있는데, 이제 사르트르의 <무덤 없는 주검>이 새롭게 가장 설득력 있는 실존주의 희곡이라 주장할 것 같다. “것 같다”라 하는 이유는 사르트르의 다른 극작품을 더 읽을 것이 틀림없으며, 이 과정에서 다른 실존주의적 극작품을 만날지도 모른다는 기대감 때문이다.


  <레 망다랭>, <무덤 없는 주검>, 그리고 <원형의 전설>. 이 작품들의 공통점은 인간의 실존이 가장 적나라하게 드러나는 전쟁을 겪은 세대에서 발현했다는 거 아닐까. 삶을 영위하기 위한 행위로의 실존이 가장 우선하는 환경이 전쟁일 터이니. <무덤 없는 주검>에서 사르트르는 전쟁 가운데 가장 극적인 장면이라고 할 수 있는 2차 세계대전 중 레지스탕스와 독일 협력자들의 갈등을 그렸다.

  필리프 페탱을 수반으로 하는 비시 괴뢰정부가 점령한 농촌 지역의 학교 건물. 상부 레지스탕스는 무리라는 것을 알면서 도시를 점령하라고 명령을 내렸고, 장이 이끄는 저항군은 도시를 습격했으나 어쩌면 당연하게 작전에 실패하여 열다섯 살 소년 프랑수아와 프랑수아의 누나이자 장의 연인인 뤼시, 서른 살 근방의 대원 소르비에와 앙리, 그리스 출신의 오십 대 카노리가 비시 프랑스측 수비대에게 포로로 잡혀 심문을 당하기 직전이다. 그리스인 카노리는 취조실에 이미 한 번 끌려가 지역 저항군 지도자 장의 소재지를 대라며 일차 고문을 당했다. 카노리는 얻어맞고 기구를 이용해 고문을 당하면서도 신음 한 번 내지 않고 버텼다. 이들은 모두 장의 소재를 알지 못한다. 고통을 견디다 못하면 결국 애먼 사람의 이름을 댈 수밖에 없다. 알지도 못하는 정보를 자백하라고 고통을 받는 일은 이들의 인간성을 말살시킨다. 포로들은 고문을 당하며 비명을 지르는 행위가 자신의 인간성을 휘발시키는 일이라고도 생각한다. 어린 소년 프랑수아는 고통을 받고 싶지도 않고 거의 틀림없이 고백을 하건 말건 내일 밤에 있을 총살을 당하고도 싶지 않다. 소년은 살고 싶은 나날들이 너무도 많고 하고 싶은 것도 많으니까.

  비시 수비대는 먼저 소르비에를 데려가 폭행한다. 소비에르는 당연히 비명을 질렀으며 녹초가 된 상태로 돌아온다. 조금 후 열리는 감방 문. 다들 수갑을 차고 있는 상태인데 하다못해 포승으로 묶이지 않은 장이 감방 안으로 들어온다. 그는 인근 마을에 친구가 있어서 친구의 동네에 거주하는 청년이라고 속이고 소재를 확인하는 대로 이곳에서 나갈 수 있다. 그러니 이제 갇힌 자들은 장의 소재를 알게 됐고, 고통/고문을 견딜 확실한 이유를 갖게 된 거다. 장이 들어온 후에도 앙리가 취조실에 끌려가 수비대원들과 언쟁도 하고 두드려 맞아 뼈가 상해 돌아온다. 이를 고통스럽게 인식하는 지휘자 장.

  당연히 장도 자신의 소재를 감추기 위하여 고문당하고 있는 대원들 때문에 고통스러워한다. 이들 포로들은 장과 이런 저런 것들에 관해 이야기하다가 드디어 장이 말한다.


  “좋아! 좋아! 그대로 계속해. 자네에겐 모든 권리가 있어. 나를 괴롭힐 권리마저 자네에겐 있네. 자넨 앞질러 지불했지. 자네들은 자기 자신을 믿고 있어. 마음의 안도감을 얻기 위해서는 육체의 고통을 받는 것만으로 충분하다고 생각하나? 자네는 알고 있나, 내가 자네들보다 더 불행하다는 것을?”


  나는 이 대사가 사르트르의 믿음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당장 죽고 사는 문제, 차라리 죽음이 축복 같은 고통을 초래하는 고문을 바로 앞에 둔 포로들에 비해 그들의 지도자였던 장의 양심적 고통이 얼마나 허망한 것인가를 강조하고 있다고 읽었다. 실제로 한 번 고문을 당했던 소르비에는 다시 끌려가 손톱을 뽑아버리겠다고 하니, 이제는 알고 있는 장의 소재를 자백하겠노라 하더니 잠깐 방심하던 수비대의 허를 찔러 창문에서 뛰어내려 두개골이 깨져 즉사하고 만다. 양심의 고통이 죽음의 고통보다 더 불행하다고? 웃기는 이야기다. 우리는 지금도 수시로 이 비슷한 이야기를 듣고 산다. 소위 말하는 “도의적 책임”을 지겠다는 헛소리. 그게 무슨 말이냐 하면, 자기는 책임질 의사가 전혀 없다는 뜻이다.

  이 부분이 내가 느낀 <무덤 없는 주검>에서 가장 흥미로웠다. 물론 절정은 살고 싶은 마음이 강한 프랑수아 소년이 자신은 고문을 당할 의사도 없고, 그걸 견딜 의지도 없어서 장에 대해 자백하겠다는 의사를 비치고, 이미 끌려가 고문 대신 집단으로 강간을 당해 삶의 의지가 사라진 누나 뤼시의 허락 아래 앙리가 소년의 목을 졸라 살해하는 장면이겠지만, 그럼에도 실존 문제는 이 언쟁 장면이 압권이다.

  뒤늦게 장은 아이디어를 내, 가까운 곳에 있는 세르바즈 동굴 옆에서 총을 맞아 죽은 피에르의 주머니에 자신의 신분증을 넣어 무기를 보관하는 동굴 속으로 끌어 놓을 테니 그곳에 있다고 자백하라 권한다. 진즉에 이런 아이디어를 냈더라면 소르비에도, 프랑수아 소년도 죽지 않았을 테지만 사람이란, 삶이란 그런 것이다. 좋은 생각은 절대로 적시에 떠오르지 않는 것. 그리고 정말로 짧은 시간이 지난 후 장은 풀려난다. 이제 포로들은 적당한 시기를 골라 가짜 장의 시체가 든 세르바즈 동굴의 위치만 자백하면 적어도 곱게 죽을 수 있게 된 것.


  이번엔 비시 프랑스의 수비대원을 보자. 란드뤼를 대장으로 하고 크로셰, 페르렌, 코르비에, 이렇게 구성된 요원들 모두 프랑스인이다. 프랑스인이 프랑스인을 고문하는 것이 조금도 양심의 가책을 느끼게 하지 않았을까? 정답은, 아마 그럴 걸? 느끼지 않았을 걸? 사르트르는 이 가운데 단 한 명, 정식 군인이나 레지스탕스 대원들보다 위계가 확실하지 않은 비시 수비대의 대장인 란드뤼 혼자 만일 이들이 자백을 하면 즉결처분을 하지 않고 독일군에 넘겨 소금광산, 염갱鹽坑으로 보내 강제노역을 하게 만들겠다고 주장한다. 네 명 가운데 한 명이니 25퍼센트? 아닐 걸. 원래 침략자보다 더 악랄하게 현지인을 괴롭히는 것이 현지에서 침략자들에게 부역하는 인간들이다. 이건 동서와 고금에서 무수하게 증명이 된 것. 다만 이들은 레지스탕스 대원들과 달리 전쟁 전 프랑스에 대하여 대단히 좋지 않은 감정을 가지고 있다. 가난 때문에 학교도 제대로 다니지 못했고, 적당한 벌이도 하지 못하고 부랑인처럼 떠돌거나 길거리 왈패 출신들. 이들은 의과대학을 다니다 전쟁을 만나 저항군에 들어간 앙리의 팔목 뼈를 부러뜨려 버린다. 그러나 자신들의 세월도 얼마 남지 않은 걸 본능적으로 알고 있다. 결국 자기들의 행위에 걸맞은 보복을 당할 것이라는 것도 분명하게 알고 있지만 아직 실감하지는 못한다.

  이들 네 명의 악당들은 마지막으로 살아남은 포로 세 명을 한꺼번에 불러 자백해서 생명을 건지라고 권하고, 대장 란드뤼의 맹세를 들은 포로 가운데 가장 연장자인 그리스 사람 카노리가 그르노불가의 42번째 이정표에서 오른쪽으로 꺾어 숲속으로 50미터 쯤 울창한 숲 속에 레지스탕스가 쓸 무기를 보관한 세르바즈 동굴을 알려준다.

  나는 결말 딱 하나만 이야기하지 않았다. 아직 끝나지 않았고, 사르트르는 여기에 하나를 보태고 싶었을 것이다.


  이 책 《무덤 없는 주검》은 표제작과 <존경 할만한 창부> 이렇게 두 편이 실려 있다. <존경 할만한 창부>는 미국 남부에 있는 도시의 인종차별에 관한 드라마이다. 성매매를 하는 리치에는 애초에 죄가 없는 흑인을 변호하기로 마음을 먹지만 결국을 사회 분위기와 습관에 굴복하는 이야기라는 정도만 소개한다.

  이 책은 서문문고 104번으로 1974년에 초판, 1997년에 개정판이 나왔다. 역자 최성민 전 이화여대 불문과 교수가 1920년대 중후반에서 30년대 초반에 태어나 오래 전에 작고한 양반이다. 그래서 번역체가 젊은 분들의 경우엔 읽기 어색한 부분이 간혹 눈에 띄겠지만 책값이 정가 5천원, 할인가 4천5백원, 최고의 가성비를 즐길 수 있으리라 믿는다.


.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6)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서자 거장의 클래식 1
바이셴융 지음, 김택규 옮김 / 글항아리 / 2023년 9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5별은 과하고. 4별은 아쉽다. 퀴어 소설에서 자주 볼 수 있는 장소, 사랑, 인물 등 새삼스러운 건 없다. 동양적 가족 관계, 특히 부자간 갈등이 절묘한 MSG 역할을 해 시간 내 읽어볼 만함. 제목은 원래대로 <얼孼자>가 좋았을 텐데. 미묘하게 다른 뉘앙스라서.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7)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나의 아이들 1 은행나무세계문학 에세 14
구젤 야히나 지음, 승주연 옮김 / 은행나무 / 2023년 11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볼가강변을 배경으로 한 <고요한 돈강>의 여성형 소설. 당신은 놀랍게도 소설 속 ˝영상의 미학˝을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21세기 식 옛 이야기. 7년간 탑 속에 갇힌 공주 이야기의 템포 루바토 식 변주. 세계 곳곳에서 좋은 작품은 여전히 쓰여지고 있다.

댓글(2) 먼댓글(0) 좋아요(2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stella.K 2024-04-09 10:3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쓰신 리뷰도 그렇지만 여간해서 좋은 점수를 주시지않는 팔님께서 이리 쓰시면 최고의 찬사 아닙니까? 소설 속 영상의 미학이라니! 거기에 21세기식 옛 이야기라니 똭 제 스탈 같습니다. 이 작품 기억하겠슴다.^^

Falstaff 2024-04-10 07:39   좋아요 1 | URL
이 책 정말 괜찮습니다. 후회하지 않으실 듯. ㅋㅋ 저는 도서관에서 빌려 읽었습지요.
 
라일라 은행나무세계문학 에세 16
메릴린 로빈슨 지음, 박산호 옮김 / 은행나무 / 2023년 12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

  1943년생이면 여든이 넘었다. 1980년에 <하우스키핑>으로 데뷔하고 2004년에 <길리아드>, 2008년에 <홈>을 발간했다. 이 세 권의 책이 우리나라에서 번역 출판되었을 뿐. 나는 이 세 편의 작품만 읽고 매년 전혀 가망이 없는 노벨 문학상 후보 투표하기에 매릴린 로빈슨한테 한 표를 던졌다. 살만 루슈디가 무슬림 원리주의자에게 테러를 당해 눈 하나를 잃은 해를 빼고는. 그렇게 로빈슨의 작품들은 알게 모르게 내 기억 속에 남았다. 십년의 세월이 흘러 작품의 스토리보다는 마음 속에 산산한 잔금으로 남은 유리창처럼 스산하고 쓸쓸한 광경으로. 이이가 2014년에 발표한 <라일라>가 번역해 나왔다는 걸 알자마자 희망도서 신청을 해 읽었다. 이 책 이후로 2020년에 <잭>이란 작품도 발표한 모양이다. 그것도 얼른 번역 출판했으면 좋겠다. 출판한 해로 따지면 40년 동안 장편소설 다섯 편을 발표했을 뿐인 과작의 작가. 사람의 마음 속에 든, 말하지 못할 불안을 표현하는 방면에서 탁월하다. 그리하여 겉으로는 아니지만 책을 읽는 속에서는 쨍, 유리창에 금 가는 소리가 들리는 듯하는 이야기꾼.

  당신이 매릴린 로빈슨을 처음 읽는다면 이 책을 선택하기 앞서 <길리아드>와 <홈>을 먼저 읽어 두시라고 권하겠다. 이 두 편과 <라일라>의 무대가 아이오와의 작은 농촌 마을 길리아드이다. 이스라엘 사람들의 오래된 계약인 구약에 나오는 “길르앗”의 영어식 표기가 길리아드. 지금 찾아보니 “치유의 도시”라는 의미로 쓰인다고 한다. 그러면 <길리아드>, <홈> 그리고 <라일라>를 치유 3부작이라고 봐도 무방할 것. 사실이 그렇다. 세 작품 다 길리아드에 돌아와, 도착해 지나간 아픔을 치유하는 과정을 그려내고 있다. 치유의 전제조건은? 아파야 한다. 상당한 상실을 포함해서. 매릴린 로빈슨의 작품을 읽는 일이 금간 유리창을 품는 것과 비슷한 감정을 갖게 하는 이유이리라.


  1930년대 작은 도시의 빈민 가옥. “아이는 어둠 속에서 현관 입구에 있는 계단에 앉아 추위에 떨며 자기 몸을 껴안고 있었다.” 이렇게 작품은 시작한다. 집에 부모가 있는지, 아니면 이 집에 맡겨진 아이인지 아직 모른다. 아이는 극단의 배고픔과 추위에 시달리며 잠들기 바로 직전이다. 잠에 빠지기만 하면 곧바로 편안한 죽음이 아이를 품에 안고 떠나가버릴 것이다. 주로 밤에 도착해 집의 구석 어딘가에서 대충 잠을 자는 대신 집을 청소하는 것으로 집세를 갈음하는 나이든 여인 달Doll. ‘인형’이란 뜻을 가진 doll 맞다. 역자 박산호는 이를 ‘달’이라 표기해 잦은 빈도로 나오는 달moon과 조금 헛갈리게 하지만 읽을 때 방해가 될 정도는 아니다. 얼굴에 큰 반점처럼 보이는 색이 바랜 흉터를 가지고 있는 달은 사실 아이가 세상에서 가장 증오하는 사람이었지만 이날 밤 아이를 구조하고 날이 새기 전에 아이를 숄에 둘둘 말아 품에 안고 길을 나선다. 이 집에 계속 있다가는 무관심한 방치로 인해 며칠 안에 죽을 아이였으나 달이 아이를 맡기로 결심을 한 것. 하지만 달은 집안의 누구에게도 말을 하지 않았다. 집에 부모, 또는 부모 가운데 한 명, 아니면 부모로부터 위탁을 받은 보호자한테도. 이렇게 해서 달은 아이 유괴범이 된 것이고, 얼굴에 나타나는 특징 때문에 여태까지도 그랬지만 이젠 사람들 앞에서 고개를 들지 않는 버릇이 생겼다.

  달이 처음 향한 곳은 나이든 여자 혼자 있는 집. 그곳에서 여자의 친절을 받아 빵과 우유를 먹이고 몸을 씻긴다. 이가 득실거리는 머리카락을 삭발하고 비누칠을 꼼꼼하게 한 후, 나이든 여인은 아이에게 ‘라일라’라는 이름을 지어준다. “예쁜 이름을 지으면 예쁘게 클지도 모른단다.”

  여자의 집을 나와 유랑농민, 자기 토지도 없고 소작도 얻지 못해 노새가 끄는 마차에 짐을 싣고 농장 일이 있는 곳을 향해 유랑하면서 농사일을 도와 대가를 받아 먹고사는 일행에 끼어든다. 돈과 마르셀 부부와 이들의 딸 멜리, 그리고 아서와 그의 두 아들. 달과 라일라는 이들과 함께 유랑하며 함께 일하고 먹는 생활을 시작한다. 세월이 조금 흐르고 라일라도 훌쩍 커버리자, 달은 아이를 데리고 작은 마을에 정착해 라일라를 학교에 보낸다. 글을 읽고 쓰며, 더하기 빼기와 곱하기는 할 줄 알아야 세상 사는데 편하다는 걸 알기 때문에. 그러나 언제나 얼굴을 가리고 다니는 달은, 갑자기 라일라한테 공부는 필요한 만큼 다 했으니 다시 떠나자고 말하고 그날로 즉시 다시 돈과 마르셀 부부를 찾아간다. 라일라는 이때 즈음해서 달이 스타킹 위에 날이 바짝 선 단도를 매달고 다닌다는 걸 알았다.

  돈 일행이 정확하게 말은 안 했지만, 이제 미국에는 대공황이 밀어닥쳐 일감도 없고, 벌판엔 건조한 먼지와 황진Dust Bowl 현상이 극심해 날로 살기가 어려워지기 시작했다. 그리고 달이 어느 날 사라졌다가 피투성이가 되어 돌아온다. 자신의 피도 있지만 대부분 다른 사람의 피를 뒤집어쓴 채. 스타킹에 숨겨온 단도를 휘둘렀으며, 상대한 남자가 죽었는데, 남자는 라일라의 아버지이든지, 삼촌이든지, 아니면 그들이 부탁한 사람이었다. 늙은 달은 보안관에게 체포되어 나이 덕분에 관대한 구류상태로 있다가 도망해 넓고 넓은 옥수수 밭에 들어가 행방불명된다. 옥수수밭이라고 우습게 보지 마시라. 시카고에서 세인트루이스까지 차로 운전해 여덟 시간 이상 달려도 계속 밀밭이 늘어선 곳이 미국이다. 바로 옆 아이오와의 옥수수밭은 악명이 더 높아 그 속에 들어가 길을 잃고 죽은 사람이 한 둘이 아니다. 라일라도 달을 찾기 위해 옥수수밭에 들어갔다가 구사일생, 우연의 힘으로 살아 돌아온다.

  이제 돈 일행도 궁핍의 절정을 맞아 가족 단위별로 헤어질 수밖에 없는 형편. 라일라는 이 와중에 달을 잃고 대도시 세인트루이스로 흘러든다. 한 마을의 상점 여자 주인이 준 주소와 10달러만 들고 간 곳은 세인트루이스의 윤락가였다. 그곳에서 ‘로지’라는 이름의 나이든 매춘부가 된 라일라. 길쭉하게 생기고 큰 손과 백 번도 넘게 햇볕에 탄 얼굴에 농사일로 억센 몸을 갖고 있는 라일라는 전혀 인기있는 매춘부가 될 수 없었다. 그는 그냥 그곳에서 나와 터미널에서 앉아 있는데 한 여성이 함께 타고 가지 않겠냐고, 혼자 운전해 가기엔 너무 멀리 간다고 해서 그냥 떠났고, 밤새 달려 도착한 주유소에서 내려 또다른 운전자를 만나 한 번 더 이번엔 그리 멀리 가지 않은 곳에서 내려 걸었다. 걷고 또 걷다가 그저 흘깃 본 곳에 버려진 오두막 한 채가 눈에 띄어 그곳에 자리 잡았다. 늦봄. 초가을까지는 머물 수 있을 듯. 조금 떨어진 곳에 강이 흘러 몸을 씻을 수 있고, 주변에 농가도 있고 마을도 있어 일을 해주고 돈을 받든지 음식을 얻을 수도 있을 것. 이 마을 이름이 바로 “길리아드.”

  여기까지 읽고 잠깐 정지. 책꽂이를 뒤져 이이의 전작 <길리아드>를 꺼내 들었다. 주인공 존 에임스 목사. 일흔일곱 살의 에임스 목사는 겨우 일곱 살 먹은 유일한 혈육에게 쓰는 편지. 오래 전에 아내가 딸을 낳다가 죽고 조금 후에 딸도 죽어 혼자 외롭게 살던 늙은 목사 앞에 도착한 젊은 여성. 그와 결혼하고 아들을 낳고, 아들에게 들려주어야 하는 이야기를 하지 못할 것 같아 글로 남기는 아버지. 에임스의 아버지 존 에임스 목사. 할아버지 존 에임스 할아버지. 어려서 죽은 둘째 형 존 에임스. 목사의 가장 친한 친구 보턴. <라일라>에서는 ‘바우턴’으로 표기하는. 그래서 앞에 이 책을 읽기 전에 <길리아드>를 먼저 읽어 보시라 권했던 것. <길리아드>에서 등장한 나이 차가 많이 나는 아내가 바로 라일라다. 

  라일라는 오두막에 터를 잡고 농가 일을 해주기도 하고 자비로운 그레이엄 부인의 바느질, 다림질을 해주기도 하고, 목사 사택의 정원을 가꾸기도 하며 적은 돈을 모아 언젠가는 떠나야 하는, 늦어도 겨울이 오기 전 떠날 수 있게 버스비를 모으고 있었다. 자기 정원을 솜씨 좋게 관리하면서 한쪽에다 감자와 콩을 심기도 하는 라일라에게 호감이 가는 목사. 그는 당연히 애정도 있겠지만, 늙은 목사에게 애정이란 단어가 어색하면, 끌림이 있었겠지만 이에 못지 않게 성직자의 돌봄에 이끌려 한밤중에 라일라의 오두막 근처까지 가보기도 한다. 어려서부터 야외생활에 익숙한 라일라는 오두막 근처에도 오지 않았건만 목사가 근방에 왔다가 조금 머물다 간 것까지 이미 알고 있었다.

  날이 흘러가고, 다시 오두막 근방을 찾은 목사. 이때 라일라는 강에서 큼직한 생선 한 마리 낚았고, 들고 오다가 미끄러뜨렸으며 이런 저런 이야기가 왔다 갔다 하는 도중에, 단 번에 생각도 하지 않았던 말이 라일라의 입에서 불쑥 쏟아져 나오고 만다.

  “나와 결혼해야 해요.”


  인연이 되려면 된다. 그리하여 당시엔 결혼 적령기를 넘은 여성과 일흔 고개를 앞에 둔 늙은 목사는 결혼을 하고, 임신을 하고, 아들을 낳는다. 아내는 그러나 언젠가는 길리아드를 떠나야 한다는 강박에서 쉽게 벗어나지 못하고, 남편은 어느 날 젊은 남자가 현관을 두드린 다음 즉각 라일라와 함께 집을 나서는 광경을 떠올리지 않기가 쉽지 않다. 두 명은 서로 다른 인생사를 겪으며 세상은 언제나 위험한 얇은 유리 위에, 살짝 언 얼음을 딛고 산다는 걸 잘 알고 있어서. 이들이 겪은 상처와 아픔과 아린 기억. 이것을 치유하는 곳, 거기가 길리아드였음에.


.


댓글(2) 먼댓글(0) 좋아요(28)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yamoo 2024-03-15 08:5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리뷰를 읽으면 재미없을 거 같은데 작가를 매우 상찬하시어서 매우 궁금합니다. 브라우티건 책 하나 주문하는 김에 길라아드도 주문해 보겠습니다!

Falstaff 2024-03-15 15:57   좋아요 0 | URL
옙. 재미 말고 하여간 분위기가 죽이는 작가더라고요. 즐기셨으면 좋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