잃어버린 사람
김숨 지음 / 모요사 / 2023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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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47년 9월 16일. 이날 하루 부산 이곳에서 많은 뜨내기들과 토박이들이 얽히고설킨 이야기와 그들의 지난 경험을 모은 책. 표지에 “김숨 장편소설”이라 박혀 있어 독자는 자연스럽게 언제 주인공이 출현하는지 촉각을 세우게 된다. 그리고 백 쪽에 육박할 때까지 도무지 이야기를 끌고가는 주인공을 찾을 수 없을 때쯤, 이 작품이 수많은 인물의 단상을 연결해 1947년 당시 부산의 모습을 그렸구나, 짐작할 수 있다. 즉, 많은 등장인물은 어떤 방식으로라도, 길을 지나다 옷깃도 스치지 않고 그냥 서로 지나치기도 한다. 초판이 2023년. 무대는 1947년. 76년 세월의 간극은 생각보다 크다. 당시의 거리, 물가, 의상, 언어를 그대로 되살리는 건 거의 불가능하다. 자료와 사진을 많이 궁리하고 들여다보면 훨씬 도움이 되겠지만 특히 언어는 가능하지 않다. 김숨도 현명하게 작품 속에서 부산 사투리나 각지에서 모인 사람들이 구사하는 사투리 대신 거의 현대 표준말을 사용했다. 나는 김숨이 쓴 <바느질하는 여자>를 읽었다. 그러나 준수한 작품 속에서 너무도 많은 오류를 발견하는 바람에 이번에 읽은 <잃어버린 사람>은 겉으로만 훌훌 훑었을 뿐 꼼꼼하게 읽지 않았다. <바느질…>처럼 오류투성이 명작일까봐.

  이번에도 참 유려한 문장이다. 너무 유려하고, 섬세하고, 어떤 때는 화려하다. 수식하고자 하는 대상이 아침에 죽 끓여먹고 점심과 저녁은 냉수 한 사발로 대신하는 극빈자일지언정. 작품은 이런 문장으로 시작한다.

  “검은 새 하나가 쇠사슬에 매달린 저울추처럼, 땅이라는 접시 위에 오롯이 놓인 세상과 무게를 겨누며 높아지고 낮아지기를 반복한다.”

  여기 나오는 “검은 새”는 정말로 조류, 하늘을 나는 새를 말한다. 요즘에도 이렇게 쓰는 작가가 있다. 까마귀? 까치? 정확하게 새 이름을 밝히지 않고 그냥 검은 새로 일컫는 이 조류는 책이 끝날 즈음에 한 번 더 나온다. 새 “한 마리”가 아닌 물질 “하나”가 하늘에서 올라갔다, 내려왔다 하는 광경을 이렇게 쓴 거다. 하필이면 그 하나가 “쇠사슬에 매달린 저울추”라고 쇳덩어리를 연상해 그냥 중력방향으로 꽂히고 마는 단단한 것, 그래서 자유롭게 하늘을 나는 새 대신, 이게 도대체 뭘 은유하는 것일까, 쓸데없이 고민하게 만든다. 바로 다음 페이지에서는 부두를 이렇게 묘사한다.

  “바다에 반사돼 생겨난 빛까지 더해지자, 부두는 썩은 고구마 같은 몰골로 죽어 있는 생쥐의 부패한 눈동자마저도 금은보화처럼 영롱히 반짝일 만큼 빛으로 넘쳐난다.”

  어떤 광경인지는 알겠는데, 좀 심한 거 같지 않나? 도무지 그냥 넘어가는 법이 없다. 수사법 교범을 읽는 기분이 들만큼 극한의 미문이 촘촘하게 박여 있다. 마음먹고 인용 해야겠다, 싶은 문장이 있었지만 본문만 650쪽이 넘어가는 책이라 그 문장이 어디에 있는지 도무지 찾을 수 없다. 글 좋은 건 알겠는데, 좀 심하다. 다듬고 쪼고 갈아 만든 문장도 과하면 질릴 수 있구나.


  그래도 가장 많은 빈도로 출연하는 등장인물이 애신. 어린 나이에 정신대로 끌려가 만주 일대에서 종군위안부 생활을 하다가 해방 이후 귀국해 집에서는 일본군 군복 만드는 공장에 있었다고 말했다. 집안 어른들은 속으로 믿지 않는 눈치지만 이런 거야 안 믿으면 서로 속만 썩는 거라서 그냥 믿기로 작정해주었다는 것이 표가 났다. 때마침 부산 미도리마치, 녹정綠町, 1916년 일제가 서구 충무로에 만든 우리나라 최초의 공창지역에서 윤락여성으로 있는 친구가 해운대 사진이 찍힌 엽서를 보내 자기한테 오면 취직을 시켜주겠다고, 그냥 지나가는 말로 한 번 한 것을 철썩 같이 믿고 부산에 도착한다. 언제? 1947년 9월 16일에. 부산진역에 내린 애신은 여러 사람한테 길을 물어가며 내년인 1948년엔 달을 보며 즐기는 동네 완월동으로 개명하고, 1982년엔 다시 충무동으로 이름을 바꿀 곳을 향해 걸어간다. 가는 길에 조선 남자와 결혼해 패전 후 남편을 따라 조선에 왔다가 소박맞고 돌아갈 뱃삯도 없어 거지꼴이 된 일본 여성도 만나고, 전혀 쓸모없는 금붕어 한 마리가 든 어항도 사고, 실물보다 예쁘게 보인다는 거울도 선물로 산다. 그렇게 오후가 되어서야 언덕배기의 영업장에서 머리를 노랗게 물들이고 야한 원피스를 입은 친구를 만나, 아마도 친구와 비슷한 일을 할 것 같다. 짐작이다. 그렇다는 말은 없다. 이곳의 친구는 애신과 같은 위안소에서 위안부로 있다가 귀국해 집에 가서 부모한테 자기가 무슨 일을 했는지 말할 용기가 없어 미도리마치에 정착할 수밖에 없었을 듯.

  등장인물 거의 다 이동거리가 긴 편이지만 애신이 부산진역에서 미도리마치까지 하루 종일 걷는 역할이라 걸으면서 앞에서 이야기했듯 다른 등장인물과 제일 많이 스쳐 지나가면서 인연이면 인연이랄 수 있는 만남을, 대부분 하루만 지나도 기억하지 못하겠지만, 그래도 만나 인물들끼리 얽힌 고리를 만든다. 도대체 몇 명이나 등장하는데 그러느냐고? 모르겠다. 안 세 봤다.


  일제강점기를 마감한 미군정기의 부산. 일본과 중국으로 떠난 징용/유민들이 공식적으로 입국하고, 배를 타지 못한 사람들은 소위 야매배를 타고 오는 바람에 빈손으로 도착한 조국. 그들이 전부 고향으로 돌아간 건 아니었다. 숱한 사람들이 부산에 남아 거친 노동에 종사했고, 삼팔선 이남 지역에서도 미군들의 도착지라서 일자리가 제일 많다는 소문을 들은 가난한 사람들이 일거리를 찾아 몰려들었다. 이 가운데 김숨이 주목한 것은, 일본과 중국으로 떠났다가 돌아왔으나 고향에 가지 못한 군상들.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서 반 강제 징용살이를 하다 원자폭탄에 피폭되어 얼굴과 손이 뭉그러진 사내, 도끼 같은 사람들. 간도에서 열심히 농사를 지어 종잣돈을 마련해 은붙이 장사를 하며 중국 각지를 떠돌다 상하이 귀국길에 사기를 당해 완전히 빈털터리가 된 천복. 앞에서 이야기했던 버림받은 일본인 처 가쓰코, 시나마치 거리 중국음식점 춘화원 사장 천서방의 치파오를 입은 중국인 며느리를 위해서도 한 꼭지 씩을 마련해두었다. 당연히 부산 토박이들도 대거 등장한다.

  가장 기억에 남는 두 인물은 모지포의 가장 늙은 과부 쑥국과 재작년 입춘 무렵에 풍을 맞아 얼굴이 조금 돌아가고 팔이 불편한 백발의 어부 말똥. 말똥은 돛이 하나 달린 외돛배를 타고 나가 생선을 잡는데 유난히 쇳빛나는 물고기를 많이 잡는다. 사실 여부는 다음으로 하고, 김숨은 이 쇳빛 물고기를 ‘다금바리’라고 말한다. 말똥은 어려서부터 거의 이 물고기를 먹고 자랐다고 해도 괜찮을 정도라는데, 그게 부산 근해에서 그리 많이 잡혔나? 하여간 이 날 새벽에도 다금바리를 몇 마리 건져 들고 오다가 눈이 잘 보이지 않는 쑥국 할머니 집 울타리 넘어 휙 던진다. 마당에 앉았던 쑥국 할머니는 눈이 지물지물하지만 귀는 잘 들려 무엇이 떨어지는 소리가 났고, 그게 다금바리인 것을 알고 냅다 문밖으로 달려나갔지만 그새에 골목엔 아무도 없다. 조금 지나 오중, 오정을 넘어 점심 때가 됐고, 쑥국은 다금바리를 손에 들고 동네의 끝에서 다른 끝 쪽으로 걸어간다. 그곳에 먹을 것이 다 떨어진 외로운 여자 혼자 사는 집이 있다는 걸 알아서, 먹을 것을 나누기 위하여. 이 시간에 15년 전에 집을 뛰쳐나간 아들 호식이 억새밭을 뚫고 길을 찾아 옛집으로 오고 있다는 건 쑥국이 알 턱이 없다.

  낳은 아이마다 몇날 며칠 살지 못하고 죽는 바람에 다음에 낳은 아이한테 명줄을 붙들고 있으라는 뜻으로 이름을 붙들이라 지었다. 붙들은 곡정 까치고개에서 나이 깨나 들도록 살았다. 그러다 1947년 9월 16일이 왔다. 까치고개에 움막을 짓고 들어와 사는 아낙네가 이날 아침에 아이를 낳고 삼을 갈랐다(삼을 가르다 = 탯줄을 자르다. 이 단어가 몇 번 나온다). 없는 집에서 산모가 조리는커녕 밥이나 한 끼 제대로 먹었을까 싶은 붙들이. 붙들이는 직접 겨울 바다에 나가 바위에 붙은 걸 낫으로 베어내 말린 미역과 말린 갈치를 쑴벙쑴벙 썰어 넣어 끓인 미역국을 들고 산모를 찾아간다. 땜질한 자국이 많은 양은 솥을 높이 걸고, 늙은 땔감 장수 옆에 앉은 젊은 땔감 장수한테 산 땔감으로 불을 피워 국수를 한 솥 끓여 이제 새롭게 장사를 시작한 석분은 작품이 끝날 때쯤 해서 자기 양은 솥보다 한뼘은 더 큰 양은솥을 발견하고 모른 척, 시치미 뚝 떼고 손수레에 싣고 가버린다. 조금 후 풀밭에서 오줌을 누고 나온 아낙네가 자기 양은솥이 없어진 걸 알고 땅바닥에 철퍽 주저앉아 망연히 한숨을 쉬고.


  참 없던 시절에 없이 살던 사람들의 초상. 섬세하고 유려한 문장이 다가 아니다. 오히려 그런 문장 때문에 리얼한 느낌이 감해졌다고 말하면 그게 못 배운 티를 내는 것일지 모르겠으나, 하여간 그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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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레이스 2024-04-22 08:24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과하면 질릴 수 있다는 말씀에 공감합니다!^^

Falstaff 2024-04-22 16:00   좋아요 1 | URL
그럼요, 뭐든지 마찬가지지요. ㅎㅎㅎ 저도 독후감을 너무 많이 쓴 거 같아서 말입죠. ^^;;
 
보스턴 사람들
헨리 제임스 지음, 김윤하 옮김 / 은행나무 / 2024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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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황하고 끝도 없는 단어와 문장과 문단의 연속. 유장한 언어의 큰 강어귀, 그 속에서 빠져 죽기 일보 전이다. 2백쪽도 안 왔는데 환장하네, 이거. 하긴 이렇지 않으면 헨리 제임스가 아니지. 안 읽는다, 안 읽는다 하면서도 보이면 꼭 읽게 되는 제임스. 내가 밋쵸요, 밋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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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세기 사랑 이야기 거장의 클래식 2
찬쉐 지음, 심지연 옮김 / 글항아리 / 2023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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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찬쉐의 신간이 한 번에 두 권 나왔다. 소식을 듣자마자 도서관에 희망도서 신청을 했다. 이 가운데 <격정세계>는 도서관에서 따로 구입 계획이 있다고 반려됐다. 아직 들어오지 않았다. 그래서 <신세기 사랑 이야기>만 ‘첫빠따’로 읽었다. 작가의 덧붙이는 말도 없고, 역자 해설도 없이 본문만 506쪽. 작품은 전위적이다. 무수히 상징적이고 메타포가 유성우처럼 쏟아져 내리며, 전체적으로 초현실주의적이다. 장황한 출판사 책소개에는 욕망, 온천여관, 성접대부, 추파 등을 앞부분에 나열하여 여차하면 <신세기 사랑 이야기>를, 신세기라고 했으니, 21세기 현대인의 허리하학적 연애 이야기로 오해하기 십상이지만 그런 거 믿고 책 읽기 시작하면 코피 터진다. 심지어 야한 장면이 한 컷도 등장하지 않는다. 아예 기대하지 말고 그냥 찬쉐가 풀어가는 이야기를 따라가기만 하면 될 듯하다.


  독후감 쓰기가 난감하다. 등장인물은, 주인공인 건 분명한데 딱 집어서 주인공이라 하기에는 좀 어색한 마흔여덟 살의 유부남 웨이보를 둘러싼 여자들, 그리고 이 여자들의 남자들이 중심이다. 그러나 한 줄기를 이루는 스토리가 있는 건 아니다. 나는 <마지막 연인>을 읽을 때처럼 습관적으로 메모를 하기 시작했다가 곧바로 집어치웠다. 처음엔 서른다섯 살 먹은 과부이자 계량기 공장 창고관리인으로 일하는 뉴추이란과 마흔여덟 살로 비누공장 다니는 평사원이지만 지식인인 웨이보의 만남을 묘사하면서 시작한다. 1년 전쯤 성sex 서비스를 제공하는 온천여관에 입장한 웨이보가 서비스를 받기 위해 입장하면서 추이란과 옷깃을 스쳤고, 퇴장하면서 불쑥 추이란 생각이 나 여관의 데스크를 통해 정보를 알아내 연인사이를 시작한 커플이다. 48세의 웨이보는 아이를 낳고 키우는 아들 둘을 독립시켰고, 아내 샤오위안은 중학교 교원으로 교양 있고 말도 부드럽게 돌려 하는 교양인이다. 지금은 가르치지 않고 교직원으로 학교 업무로 중국 각지에 출장다니는 일이 잦다. 이들은 서로 무심한 단계에 접어든지 이미 오래라 각자만의 비밀이 따로 있어 서로의 삶에 간섭하지 않는 성인군자 사이의 교류를 맺고 있다고 생각하면 된다. 아내 샤오위안은 밤열차 객실에서 만난 저 시골 현에서 병원 개업하고 있는 양의洋醫 닥터 류와 각별한 관계를 맺는데, 오해하지 마시라, 플라토닉이다, 플라토닉.

  웨이보는 이제 뉴추이란과 관계를 정리할 생각이다. 그래 오늘 당장 추이란의 집에서 대낮에 만나 뼈와 살을 태우려 했거늘, 그리하여 추이란은 아침부터 목욕재계하고 색조화장까지 싹 마치고 기다리고 있다가 드디어 웨이보가 오긴 왔는데, 집에 중요한 일이 있어서 바로 가봐야 해, 이 말 하러 왔어. 이러고 꽁무니를 빼버렸다. 웨이보와 한낮의 엑스터시를 만들기 위해 연차까지 낸 추이란은 혀가 쑥 빠졌다. 그러나 자신은 절대 남자한테 질척대는 여자가 아니라고 믿는 추이란. 웨이보가 괜찮은 남자이긴 하지만 남자가 밥 먹여 주는 건 절대 아니라는 것도 잘 알고 있다. 추이란은 그와 헤어질 결심을 한다. 아, 추이란은 온천여관에 피로와 스트레스를 풀기 위해 온 것이지 매춘을 하기 위한 건 아니다.

  매춘을 위해 이 집에 들락거리면서 추이란과 알고 지내는 두 여성은 룽쓰샹과 진주. 이들은 방직공장에 다니다가 공기중에 한없이 많은 입자로 나풀거리는 먼지를 더 들이마시면 북망산이 두어 걸음일 거 같아 공장을 그만두고 온천여관의 윤락녀가 된다. 이미 삼십대 중반쯤 되는 많은 나이로 업소에 자리를 잡기가 결코 쉽지 않았지만 같은 공장을 다니다가 어린 나이에 공장에서 뛰쳐나가 업소에 터를 잡은 선구자적 윤락녀 아쓰와 몇몇 남자의 후원으로 자리를 잡는다.

  아쓰는 웨이보에게 미스 쓰絲라 불리며 한때 연애도 했으나 관계가 오래 이어지지 않았다.


  등장인물은 이 정도면 됐다. 이들은 전부 어떻게라도 서로 인연이 있고, 없더라도 두어 사람만 거치면 서로 알 수 있는 사이다. 이들이 만들어가는 스토리? 글쎄 그걸 좇아가려면 책 읽기에 실패할 확률이 높다니까. 찬쉐는 달랑 <마지막 연인>과 <황니가>를 읽었을 뿐이지만, 적지 않은 독자들이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던 <마지막 연인>보다 <신세기 사랑 이야기>를 해독解讀하는데 더 어려움이 있었고, 책을 덮은 다음에 분명히 나름대로 읽어냈고 이해도 어느 수준까지는 했다고 생각하는데도 그게 어떤 것인지 설명하자니 앞뒤로 갑갑하다. 확실한 건, 이 작품이 책소개 전면에 나온 것처럼 불륜, 윤락, 자유분방, 특히 허리하학적 자유분방과 별로, 거의 관련이 없다는 것. 찬쉐가 쓴 작품이라 애초에 그런 걸 기대하지 않았으니 나는 당연하다 생각하는데, 혹시나 해서 미리 깔아두는 말 또는 정보다.

  좋다. 작품을 읽은 감상으로서 독후감 대신, 책을 읽으며 든 의문을 한 번 이야기해보자.

  제목이 ‘신세기’라고 했고 출간연도도 2013년이다. 찬쉐는 밀레니엄 이후의 21세기 식 사랑에 관해 쓴 작품인가? 그것 참 모호하다. 이 독후감을 시작할 때 “상징적” “유성우처럼 쏟아지는 메타포” “전체적으로 초현실주의”라고 했으니 모호한 것이 당연하겠지만 사실 사랑이면 사랑이지 21세기 식 사랑이란 것이 특별하게 존재할 만큼 드라마틱한 의식의 변화는 있었던 것 같지 않고, 작품 속에서도 이 시대의 특별한 사랑 방정식 같은 것도 보이지 않았으며, 주요 등장인물의 나이도 미스 쓰, 즉 아쓰만 제외하고는 30대 중반 이후의 여성과 40대 후반 이후의 남성이다. 더 이상 “조신한 여성”으로 불리기 원하지 않는 것도 이번 세기 들어 등장한 신여성상이라고 보기 어렵다. 오히려 등장인물과 작가 찬쉐는 지난 날, 저 멀리 고향이나 시골, 그러니까 “존재의 시원”의 장소나 기억을 찾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나와 나의 생각이 시원始原하는 곳. 그곳에서 근원적 나를 만들기 시작했을 때 주위에서 영향을 주었던 인물. 이런 것들이 작품에서는 등장인물이 돈과 시간과 땀을 대가로 찾아 가서 만나고, 이야기하고 다시 돌아오면서 뒤돌아보면 이미 사라진 사촌 오빠네 집, 몇 십 년 전에 묻힌 넷째 숙부가 되고, 이렇게 한 번 초현실적으로 방문한 옛 고향 동네 사촌오빠 집과 이미 죽은 넷째 숙부는 작품 속에서 계속 출몰한다. 이건 뉴추이란의 경우이고, 자아의 시원을 발견하지 못한 웨이보는 결국 스스로 감옥으로 들어가 하천에서 모래 채취작업에 투입된다. 감옥에 들어가니 참으로 다양하게 시원을 찾지 못한 사람들이 천지다. 이들은 갖은 방법을 통해, 예를 들어 총을 들고 교도소로 쳐들어왔다가 그 길로 수감되고, 이후에도 별의 별 방법을 써서 교도소에서 출소하지 않으려 노력한다. 그곳이 그들에겐 가장 편한 시원의 장소이니까. 웨이보도 마찬가지다. 교도소에 들어간 이후 웨이보는 그것으로 자취를 감춘다.


  시원의 장소는 뒤 돌아보면 벌써 사라지고 만 사촌 오빠네 집일 수도 있고 원하는 사람이 발길을 돌리면 나타나는 자유항의 거대한 슬롯머신 룸일 수도 있다. 그러나 제일 유념해 보아야 할 곳은, 가장 선한 등장인물인 닥터 류의 시원의 장소, 사람이 생기기 전에 미리 준비해 있던 ‘사람을 위한 약초’가 많은 차오산의 동굴. 서양 의술을 전공한 양의이지만 중국 전래 한방의 약초 치료에도 일가견이 있는 닥터 류는, 훗날 웨이보의 아내 샤오위안이 지리 교사로 부임하는 이상향 또는 거의 이상향인 소도시 차오현을 유토피아로 만든 사람들 가운데 한 명인데, 그의 시원의 장소인 차오산의 동굴이 작품의 뒤로 가면 아편 밀매를 하는 건달이자 아쓰의 애인이 특별 통행증을 갖고 횡행하는, 더러운 오수가 흐르는 미로 같은 지하도와 혹시 관련이 있을까? 닥터 류의 차오산 동굴은 사람을 살리기 위한 약초로 차 있는 반면, 아편 판매자의 하수구를 통해서는 사람을 환희와 중독으로 이끄는 아편이 이동하는 장소이다. ‘동굴’하면 나는 자동적으로 장용학이 쓴 <원형의 전설>에서 마담 빠타플라이 이지야李芝夜의 이복 오라버니 이장李章이 친아버지와 죽음의 담판을 벌이는 고향집 뒷산의 사적 감옥, 동시에 근친상간의 원죄의 동굴을 연상한다. 찬쉐의 동굴 또는 하수도는 분명 실존이나 원죄의 동굴은 아니고, 치유 혹은 아편(이게 무엇을 위한 메타포인지 아직도 감이 잡히지 않는다)의 동굴과 이동 통로일 터인데 그게 도대체 뭘까? 이럴 때 흔한 역자해설이라도 있으면 커닝이라도 할 텐데 그것도 없고, 거 참, 아쉽게 됐다.

  결코 만만하지 않으며, 얼핏 보면 처음엔 그런 거 같지만 육체적 사랑의 이야기도 아니다. 육체적 사랑을 기대하시면 차라리 <격정세계>를 읽으시라. 근데 신기한 것이 작품이 한 1백 페이지를 넘어가면 지금 무슨 말을 하는지 그야말로 오리무중을 헤매게 되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신기도 하지, 계속 따라 읽게 되는 현상이 벌어진다. 대개 이럴 때 책 읽기에 지극한 권태가 생겨 급기야 때려 치우게 되지만 찬쉐가 특별한 이유 가운데 하나가, 지금 어떤 이야기가 진행되는지 감을 못 잡아도 기꺼이 따라 읽게 된다는 거. 심지어 지루하지도 않다는 거. 비록 하나도 이해하지 못하지만. 그래도 이 고비만 넘어가면 된다. 확실하게 그림을 그리지는 못해도 기화한 드라이아이스 흰 연기로 일종의 형태를 만들 듯 비록 애매하지만 독자들 나름대로 한 형상을 더듬을 수 있으리라 믿는다. 상징, 메타포, 초현실주의를 기껏해야 더듬었을 뿐인데 이 정도로 마치 다 이해한 것처럼 <신세기 사랑 이야기>가 대박이다, 라고 말하지는 못하겠다. 별점으로 5별을 주지 못하는 이유로 이 정도 변명이면 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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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alstaff 2024-04-19 05:5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다음 주 삽질:
월요일. 김숨, <잃어버린 사람>
화요일. 존 웹스터, <하얀 악마>
목요일. 조지 손더스, <12월 10일>
금요일. 존 스타인벡, <달콤한 목요일>

그레이스 2024-04-19 09:0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어제 발자크의 <골짜기의 백합> 토론했는데, 발자크와 찬쉐의 엄청난 간극과 온도차때문에 어질!합니다. ㅋ

Falstaff 2024-04-19 18:43   좋아요 1 | URL
<골짜기의 백합> 재미있잖아요. ㅎㅎㅎ
찬쉐하고는 아주 거리가 멀어서 곧바로 이어 읽으면 나름대로 묘미가 있을 거 같기도 합니다. ^^
 
대단한 세상
피에르 르메트르 지음, 임호경 옮김 / 열린책들 / 2024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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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미만 가지고 따지자. 나도 마음 같으면 별 두 개 주고 싶은 식민주의적 유럽 백인종들의 난리굿이지만, I, C, 재미있어도 보통 재미있어야지. 오르부아르부터 쭉 읽은 독자들은 틀림없이 뒤통수 맞을 듯. 그러니까 걍 재미로만 따지자고, 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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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쟝쟝 2024-04-18 16:43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아… 역시… 르메트르… 지독한 페이지터너… 뒤통수라니까… 안되겟네요… 일단 이 시리즈 3권 먼저 챙겨오겠습니다… (한쪽 발로 도서관 행차 중)

Falstaff 2024-04-18 19:20   좋아요 1 | URL
맞아요, <오르부아르>부터 차근차근 읽으면 더 재미날 겁니다.
근데 지금은 느므느므 재미있어서 열광하지만 몇 달 안 가서 그런 책이 있었지... 하는 수준으로 내려 가리라는 생각을 멈출 수 없기도 합니다. <오르부아르>가 그러했듯이 말입니다.
 
곰들이 시칠리아를 습격한 유명한 사건
디노 부차티 지음, 이현경 옮김 / 현대문학 / 2022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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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위키피디아는 디노 부차티를 소설가, 단편소설작가, 화가, 시인, 밀라노의 신문 기자로 적었다. 작곡가 루치아노 카일리를 위하여 네 편의 오페라 리브레토를 썼고 희곡도 한 편 썼으며 동화책 <곰들이…>도 출간했다. 아오, 도서관에서 책 대출하면서 위키피디아로 작가 검색도 해보지 않고 상호대차 신청하는 불민한 독자가 세상에 나 하나 아니지? 위키피디아에 분명히 쓰여 있다. He wrote a children's book <La famosa invasione degli orsi in Sicilia>. 이게 동화책이랴, 동화책. 이래봬도 내가 동화책도 읽는다. 다만 삽화가 많이 들어가는 옛날 이야기 식의 초등 저학년 수준까지 내려가지는 못하고, 초등 중상 학년의 동화 정도는 즐겁게 읽는다. 

  뭐 솔직히 말해, 아무리 동화책이라도 디노 부차티가 썼다는 이유 하나로 도서관에서 대여한다는 조건이면 언젠가는 빌려 읽겠지만. 그 정도로 <타타르인의 사막>을 기가 막히게 읽었다. 아직 읽지 않은 분 계시면 <타타르인의 사막>, 꼭 읽어 보시라 권한다. 해설까지 딱 3백쪽, 분량도 적당하니 부담 갖지 마시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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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자냥 2024-04-18 10:0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ㅋㅋㅋㅋㅋㅋㅋㅋㅋ <타타르인의 사막> 영업글 ㅋㅋㅋㅋㅋㅋㅋ

Falstaff 2024-04-18 16:26   좋아요 0 | URL
빠진 한 가지는
아, 티가 났구나....

새파랑 2024-04-18 10:24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타타르인의 사막 너무 좋았습니다 ㅜㅜ 다시 읽어보고 싶네요 ~!!

Falstaff 2024-04-18 16:27   좋아요 1 | URL
˝나만의 명작˝인 줄 알았더니 많은 분들이 좋아하셔서 오히려 고마웠던 작품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