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바, 제인
개브리얼 제빈 지음, 엄일녀 옮김 / 문학동네 / 2018년 9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아! 비바, 제인

 

레이철

이 이야기에서 가장 인상 깊은 인물이 있다면 단연 레이철이다.
나는 그녀의 신랄함이 좋다.
필립 로스를 좋아하고, 교육자였고, 아비바의 엄마이고, 로즈의 친구이며 자신의 삶을 주관 있게 살아가고 있고
어떤 일에도 호들갑스럽지 않은 레이철 셔피로.

예순넷이 된다는 건 다시 고등학생이 되는 것과 비슷하다.
내가 할 말이 많다만!
나는 언제 그만해야 하는지 안다.

 

나도 그녀처럼 멋지게 나이 들어가고 싶어졌다.
아비바에게 그녀는 친구였고, 루비에게 그녀는 처음 보지만 언제나 알았던 할머니였다.
자식의 어리석음을 걱정하지만 탓하지 않았고, 그저 지켜보는 거 같았지만 성인인 딸이 제대로 선택해주기를 바라면서 표 안 나게 자신이 할 수 있는 일들을 했다.
소식한 통 없이 그녀의 인생에서 사라졌다 뜬금없이 전화해서 손녀딸을 찾아와주라는 부탁에도
잔소리 없이 쿨했던 레이철 셔피로.
아비바에게 전해졌을 그녀의 한 부분이 제2의 인생을 살게 하는 자양분이 되었을 게다.

나는 이따금 마이크와 마주친다. 그는 재혼했다. 덧붙이자면 그때 그 정부는 아니다. 그 불쌍한 여인은 기다리고 기다리다 결국 그를 딴 여자한테 장가보냈다. 나는 내 처지보다 그녀의 처지에 훨씬 더 분노했다.
.
.

레빈 얘기도 해야 할까? 그는 여전히 하원에 있다. 다른 사람들 딸 앞에서 제 성기는 그럭저럭 잘 간수하고 다니는 모양이다. 그 얼마나 훌륭한 남자인가.


아비바 스캔들로 학교에서 사임 후 그녀는 남편의 오랜 정부 최를 찾아간다.
그곳에서도 그녀는 마치 오랜 친구와 차 한 잔을 마시듯 수다를 떨었다.
화를 내고, 분노하고, 소리를 지르지 않고도 자신의 감정을 비워내며서 상대에게 되돌아볼 수 있는 시간을 주는 그녀의 방식이 내겐 신선하게 다가왔다.
비록 남자 보는 눈은 그다지 좋지 않았지만.


제인 영

 

 

제인.
우리나라 국어 교과서에 나오는 영희와 같이 흔한 이름.
아마도
특별했던 이름으로부터 숨기엔 가장 보통스러운 이름이 간절했을 것이다.
루비라는 이름의 딸과 함께 메인주 엘리슨 스프링스에 살면서 행사 기획사를 차린다.
주로 웨딩 플래너가 주 업무이기는 하지만.
똑똑하고 조숙한 딸 루비를 조수 삼아 그녀는 그렇게 자신의 커리어를 쌓아가고 있다.

당신이 내 정체에 대한 당신 생각을 떠벌려봤자 그게 나한테 무슨 영향을 주겠어? 사람들이 신경이나 쓸까? 아마 안 쓸걸? 난 일개 시민에 불과하고 누구한테 표를 받아야 할 일도 없잖아? 난 아무 때고 딴 데로 이사 가서 웨딩플래닝을 하면 그만이지.


이렇게 말했지만 상황이 그녀를 그녀의 오랜 꿈으로 몰고 간다.
그래서 시장 선거에 출마하기로 한다.
과거의 그림자를 걷어낼 마음의 준비가 이제서야 되었다.
루비.  그 한고비만 빼고.




루비

 

 

열세 살.
아빠는 일찍 돌아가셨다고 알고 있고, 엄마와 함께 메인 주에 산다.
학교생활은 그닥 재미없다. 별로 인기가 없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유치한 애들하고는 레벨이 다르니까.
친구 같은 엄마의 조수로서 엄마의 일을 돕고 있다.
엄마가 시장 선거에 출마하고 선거운동을 돕는 일도 한다.
그러다.
알게 됐다.
엄마의 과거를. 
내 출생의 비밀을.

"엄마는 왜 시장이 되려는 거야? 그렇게 많은 비밀을 가진 사람치고 너무 멍청한 짓 같아."
"나도 모르겠다, 루비. 아니, 알기야 알지, 네가 나이가 들면 알게 될 거야."
"지*한다, 아비바 그로스먼!"
엄마한테 '지*한다'고 한 건 하나도 미안하지 않아. 왜냐면 (1) 십삼 년 동안 거짓말을 한 주제에, (2) '나이가 들면'알게 될 거라니, 너무 어이가 없잖아.

 

무모하게 보이겠지만
난 아빠를 찾아 플로리다로 간다.
우리 아빠는 하원의원이 분명하다.



엠베스

 

 

그녀는 변호사이자 하원의원의 아내다.
그녀를 보자니 미국 드라마 굿 와이프의 첫 장면이 떠오른다.
기자회견장. 플래시가 불꽃처럼 터지는 그곳에서 다소곳한 알리샤는 남편의 곁을 지킨다.
성 스캔들로 위기의 시간을 맞은 그 남편 옆에서 남편의 손을 쥐여주고 웃음으로 우리는 굳건하다를 보여준.

사실 남편이 바람피운 게 그렇게까지 대수로울 건 없었다. 공개적으로 바람피운 남편을 둔 아내가 됐다는 게 힘들었다. 부당한 대우를 받은 여자라는 몸에 안 맞는 수의를 입고 있는 게 힘들었다. 남편이 사과할 때 그 옆에 온순하게 서 있는 게 힘들었다. 눈길을 어디다 둬야 할지 파악하는 게, 적절한 정장 재킷을 고르는 게 힘들었다.

그녀는 십오 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사람들이 자신을 아비바 게이트 이후에도 남편 곁을 지켰다는 사실로 평가하는지 궁금했다.

 

남편은 하원의원 자리를 굳건히 지켰다. 그녀 덕에.
아마도 그녀는 아비바를 희생양으로 내버려 둔 건지도 몰랐다.
어쩜 그 대가를 지금 받고 있는 건지도 모르고.
어쩜 내비치지 못했던 가슴 앓이가 암처럼 그녀 몸에 기생한 건지도 모른다.
어쩜 두 아들과 아들과 다름없는 남편을 지켜내는 게 그녀의 의무였는지도 모르지.

이것이 결국 그녀의 인생일지도 모르겠다. 이 남자를 위해 그녀는 거짓말을 했고, 사람들을 속였고, 오욕을 참고 견뎠고, 알고도 모른 척했다. 이 남자가 불쾌한 일을 겪지 않도록 온 힘을 다해 비호했다. 루비, 세상의 파괴자로부터 이 남자를 지켜냈다.
그녀는 그 어떤 여자보다 더 에런 레빈을 사랑했다.

 

 

그런 거다.
부인이란 직업은...


아비바(봄철, 순진무구함)

스무 살 여자아이는 사랑을 착각했을 뿐이었다.
호기심이 사랑으로 변질되기 가장 쉬운 나이.
동경을 사랑으로 오해하기 가장 쉬운 나이.
성공한 남자가 멋져 보이는 가장 어린 나이.

그는 장난감이 잔뜩 있는 어린애이고 당신은 그가 가끔 생각날 때만 갖고 노는 인형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당신은 끊임없이 그가 그립다. 심지어 그와 함께 있을 때도 그가 그립다.

그가 가고 나면 당신은 그의 쓰레기통이나 여행가방이 된 기분이다. 사랑받는 게 아니라 기능성 도구가 된 기분이다.

 

아비바가 자신을 위해 옳은 선택을 해주길 바랐다.
아마도 자신감 결여에서 온 결핍을 대단한 남자와의 사랑으로 채우고 싶었을지도 모른다.
불륜의 대가는 혹독했다. 그녀에게만.
그는 재선했다.
그리고 그의 결혼생활은 끝나지 않았다.

본질을 흐리는 것들이 그녀의 인생을 망가트렸다.
물론 그녀의 행동이 옳은 건 아니었지만
공인으로서 자기 딸 나이의 여자와 불륜 행각을 벌인 정치인은 면죄 받았다.
그 스무 살짜리 여자는 그 남자의 죄까지 걸머지고 난파되었다.
아비바 그로스먼이라는 이름으로는 어디에서도 사람대접을 받을 수 없었다.

"왜냐면 그 편이 더 나으니까. 결국 언젠가는 나오게 될 얘기였어. 난 그때 일이 부끄럽지 않아, 더이상은. 또 당시 내가 처했던 상황을 타개하기 위해 내가 했던 일들도 부끄럽지 않아. 그리고 만약 사람들이 그때 일로 나를 평가하고 싶어서 나에게 투표하지 않겠다면, 그건 그들의 선택이지."

혹독한 시련은 강건함을 키운다.
그녀는 자신의 행동에 대한 대가를 치렀다.
이 이야기에서 유일하게 대가를 치르지 않은 사람들이 있다면 남자들이다.
그들은 책임도 지지 않았지...

부당함을 느끼는 동시에 통쾌했다.
난장판을 만들 수도 있는 이야기를 이토록 깔끔하게 갈무리하다니.
울분을 토해도 모자랄 이야기를 이토록 아무렇지 않게, 게다가 유머러스하게까지 포장하다니.
명치끝이 꽉 막혀서 체증을 유발할 거 같은 이야기를 이렇게 희망스럽게 끌고 가다니.
각자의 입장에서의 여성들이 한 사건에 연루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찌질하지 않게 인생을 통제하는 방식이 감동적이다.
게다가 이 이야기에 나오는 모든 여성들은 죄다 멋스럽다.

인생을 살아가다 보면 복병 같은 암초를 만나게 된다.
그것들은 전부 내 선택의 결과이다.
옳은 선택을 하기 위해 노력하지만 그 노력이 역부족일 때도 있다.
그 결과는 나를 파괴하려 하지만, 아니 파괴하지만, 그걸 견뎌내고, 이겨내는 건
바로 나 자신이다.

아!비바는 실패하는 인생을 선택했지만.
제인은 실패한 인생을 딛고 앞으로 나아가는 인생을 선택했다.

불륜에는 책임이 따른다.
그 책임은 불륜을 저지른 두 사람이 똑같이 져야 한다.
하지만 세상은 여자보다는 남자들에게 더 많은 면죄부를 준다.
남자는 그래도 된다는 누가 정했는지 알 수 없는 불문율이 적용받는다.
그리고 그것에 대한 모든 경멸과 모욕은 여자에게 쏟아진다.
그것이 사실이 아니라 할지라도.
이런 이야기엔 국적도 선진국도 문명국도 다 포함되지 않는다.
역사가 그래왔다.
그리고 지금도 여전히 그렇다.

가정을 지키는 건 왜 여자여야만 할까?
엠베스가 알리샤 같은 실수를 저지르지 않았다면 하원의원 레빈은 없었을 것이다.
힐러리가 옆에서 미소 짓지 않았다면 대통령 클린턴도 없었을 것이다.
결국 그렇게 해서 남은 건
인생의 그늘이다.
얼룩진 고난의 행보이고.
그녀들의 시간 낭비였을 뿐이다...

모건 부인처럼 나이 들고 싶어졌다.
한때의 실수를 실수로 알아봐 주는
그래서 손 내밀어 줄 수 있는
그런 어른으로...


아~ 비바, 제인!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나를 쳐다보지 마 스토리콜렉터 67
마이클 로보텀 지음, 김지선 옮김 / 북로드 / 2018년 9월
평점 :
절판


형사보다 더 범인을 잘 잡는 심리학자. 이번엔 어떤 범인이 그를 찾아올까?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이 모든 것을 만든 기막힌 우연들 - 우주.지구.생명.인류에 관한 빅 히스토리
월터 앨버레즈 지음, 이강환.이정은 옮김 / arte(아르테) / 2018년 9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우주
지구
생명
인류

네 개의 분류로 나누어 설명되어진 책

말하자면
지금 살고 있는 이 행성에 대한 포괄적 이야기로 보면 될 거 같다

지질학자인 월터 앨버레즈의 글은 내레이션 같다.
지구 생성에 관한 다큐멘터리를 보면서 화면과 쉬운 설명을 듣는 느낌이랄까.
에세이처럼 쓰여져서 과학지식이 다채롭지 못한 나 같은 사람에게도 어렵지 않은 책이었다.


1991년에 발견한 밈브랄 노두는 6600만 년 전 특별한 바위가 떨어진 시간이 생명 역사에서 특별한 사건인 대멸종이 일어난 시점과 정확하게 일치하기 때문에 중요하다. 말 그대로, 그 충돌과 대멸종이 없었다면 십중팔구 공룡이 지구상에서 여전히 가장 큰 동물일 테고, 포유류는 여전히 작을 것이며, 인간은 등장하지도 못했을 수 있다. 이것은 우리를 현재로 이끈, 불가능해 보이는 역사적 여정의 출발이자 가장 극적인 사례이다.

이 글을 읽다 보면 아주 작은 차이로 지구에 행성이 떨어지고 그 충돌로 공룡들의 세계가 멸망했지만 그로 인해 인간 포유류가 살아갈 환경이 주어졌다는 걸 알게 된다.
그 깨달음이 얼마나 소름 끼치는 것인지...
어쩜 인간은 지구라는 행성에서 존재하지 않는 생명체가 될 수도 있었다는 말이다!
갑자기 쥬라기 공원이 생각난다.
공룡 DNA를 복제해서 공룡들을 되살려 낸 테마파크.
인간이란 어찌도 이리 오만방자한 걸까?

빅 히스토리
큰 관점에서 보는 지구의 역사
인간에게만 국한되지 않고 우주, 지구, 생명, 그리고 인류에 관한 순서로 책이 쓰인 깊은 뜻이 있는 거 같다.
빅 히스토리는 우연의 연속이라는 파노라마와 같은 관점에서 역사가와 과학자 들이 함께 전통적 역사에 우주와 우주의 과거를 연구하는 과학적 통찰력을 결합시켜 새롭게 개척한 분야이다.

지구의 근간을 알아가자니 내가, 인간이라는 존재가 아주 자그마하게 느껴진다.

우주는 영원하지 않고 수명이 유한하며 역사를 가진다는 사실을 마침내 증명한 것은 허블뿐 아니가 휴메이슨의 작품이기 때문이다.

 

허블은 망원경 때문에 알았는데 휴메이슨이 누군지는 몰랐다. 이 책을 읽기 전까지는.
그는 허블의 연구에 지대한 도움을 준 조수이자 동료였다. 하지만 학계는 허블은 인정해도 휴메이슨은 인정하지 않았다. 그는 고등학교 중퇴자였고, 노새 마부였으며 천문대 수위였으니까.
1950년이 되어서야 스웨덴의 룬드 대학에서 휴메이슨에게 명예 박사학위를 수여했다.
늦게라도 그 공로를 인정받은 것이다.

 

 

 

월터 앨버레즈는 2006년부터 버클리 대학에 ‘빅 히스토리: 우주, 지구, 생명, 인류’라는 제목의 강의를 개설하여 운영해오고 있고, 이 책은 그 강의에 기반한 것이다.  그동안 별개의 학문으로 발전해 온 천문학, 지질학, 생물학, 화학, 인류학, 고고학 등 여러 분야의 학문을 모두 포괄적으로 다룬다.


 

 

“다양한 관점으로 역사를 바라볼 수 있게 해 주는 최적의 학문"

 

빅 히스토리란 개념을 생각해낸 것만으로도 지구사에 한 획을 그었다는 생각을 해본다.
역사학자와 과학자들의 생각에는 분명 차이가 있는데 그 차이점을 다 같이 생각해봄으로써 좀 더 다르게 생각할 수 있는 기회가 생겼으니 말이다.


만약 현재 우주를 지배하는 물리법칙, 물질 종류, 또는 기본상수 들이 달랐더라면 인간이 처한 현실 중 어떤 양상도 지금과 같지 않을 것이다. 이러한 조건들 중 하나라도 현재의 값과 조금만 달랐다면 우주는 지금과 완전히 다르거나 아예 존재하지 않을 수도 있다. 다행스럽게도 이 조건들이 핵융합을 가능하게 했기 때문에 우리 태양은 생명이 진화할 수 있을 정도로 오랫동안 천천히 탔다.

인고의 오랜 시간이 지나서야 생명이 탄생할 수 있었다니 인간이 태어나는 신비와 다를 게 무엇일까?
자연과 우주란 이렇듯 오묘하다.

인간을 연구하는 역사학자가 보았을 때 산맥은 소통과 이동에 결정적 장애물이었다. 히말라야산맥과 알프스산맥은 인도와 이탈리아 문명을 보호해 주었다. 물론 침략을 받지 않은 것은 아니었고, 그중 어떤 것은 역사의 전환점이 되기도 했다. 오늘날에는 비행기와 거대한 터널을 이용하여 산맥들을 쉽게 가로지르므로 불과 한 세기 전만 해도 산맥이 역사에서 얼마나 대단한 역할을 했는지 잊게 된다.

 

산맥을 가로지르게 되면서 인류는 광범위하게 서로 연결되게 되었다.
그것이 좋은 의도인지 아닌지는 아직까지는 알 수 없다.
서로의 문명이 섞이고, 서로의 문화가 어우러지는 결과물은 아직 먼 미래의 이야기니까.

어떻게 문명이 그냥 사라질 수 있을까? 역사학자들은 청동기시대의 도시들이 사라진 원인에 대하여 가뭄, 이주, 철기시대의 도래 등을 포함한 몇 가지 가설을 제안하고 있다. 하지만 나는 두 가지 가설에 특히 흥미가 있다. 하나는 스탠퍼드 대학의 지구물리학자 아모스 누르Amos Nur가 제안한 것으로 넓은 지역에서 지진이 동시에 일어났다는 가설이다. 또 하나는 밴더빌트 대학의 역사학자 로버트 드류스Robert Drews가 제안한 것으로 후기 청동기시대 도시들이 방어 수단으로 이용하던 마차 활쏘기 부대를 이길 수 있는 방법을 찾아낸 이방인 부족들이 도시들을 차례로 점령하여 파괴했다는 가설이다.이유가 무엇이든 결과는 끔찍했다. 키프로스에서만 기원전 1200년경에 팔레오카스트로Paleokastro가 불타고 아이오스 디미트리오스Ayios Dhimitrios는 폐허가 되었으며, 신다Sinda, 키티온Kition, 엔코미Enkomi가 모두 불탔다. 중동에서 문명이 회복되는 데에는 수백 년이 걸렸다.

 

포르투갈이 일찍이 탐험을 시작했다는 사실은 우리가 잘 알고 있다. 그들이 배로 탐험을 하면서 지도를 만들고 다른 대륙과 교류가 있어서 그들만의 독특한 문화를 유지했었지만 결국 리스본에 8.5의 강진이 일어남으로 인해서 탐험에서 발견한 많은 자료들이 소실되었기에 이제는 결코 알 수 없는 것들이 되어 버렸다.

지금도 요즘 들어 부쩍 지진이 세계 곳곳에서 발생되고 있다.
그래서 저 밑줄 그은 내용을 담담하게 지나칠 수 없다.
지진과 함께 오는 쓰나미는 모든 것을 사라지게 한다.
그때도 그랬고
지금도 그러하다.

기록이라는 것이
특히나 우리가 지금 즐겨 하는 디지털 기록이라는 것이 
온전히 지켜질 수 있을까?
저런 자연재해로부터?

우리가 지구에 살고 있는 것이 아니라
지구가 우리를 살게 해주고 있는 것이다.
우리는 잠시 머물다 가는 존재이다.
멸종한 공룡이 우리에게 어떤 경이감을 주는지 모르겠지만
우리도 언젠가는 공룡 취급받는 시절이 올지 모른다.
먼 미래의 이 지구의 주인들이 우리의 화석을 발견하곤 우리를 어떻게 생각하고, 어떻게 그려낼까?
이 책을 읽는 동안 내내 생각해본 문제였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연애의 기억
줄리언 반스 지음, 정영목 옮김 / 다산책방 / 2018년 8월
평점 :
구판절판


 

 

 

 

첫사랑은 삶을 영원히 정해버린다.

 

 

오랜 세월에 걸쳐 그래도 이 정도는 발견했다. 첫사랑은 그 뒤에 오는 사랑들보다 윗자리에 있지는 않을 수 있지만, 그 존재로 늘 뒤의 사랑들에 영향을 미친다. 모범 노릇을 할 수도 있고, 반면교사 역할을 할 수도 있다. 뒤에 오는 사랑들에 어두운 그림자를 드리울 수도 있다.

 

 

 

사랑의 기억은 끄집어 내는 순간 까발려진다
그래서 오랜시간이 흐른후에야 말할 수 있는 것이다
그 기억으로인해
더이상 상처받을 사람이 없는 시간에.

책을 읽고 나서도
책을 읽는 중간에도 자꾸 확인하고 싶어졌다.

사랑인 거니?
사랑이 맞는 거니?
사랑이라는 착각은 아니었니?
사랑을 쾌락과 동일시한 거니?

사랑을 아니?
아니, 알았니?

열아홉 소년의 사랑과 스무해 너머 여인의 사랑의 간극
소년은 반백의 나이에 30여 년 전 첫사랑을 돌이켜본다.
그 사랑이 남긴 흔적들이 그의 인생 곳곳에 파편처럼 박혀있었다.


그들은 사랑의 도피를 했고
십여 년을 함께했다.

하숙집 주인과 하숙생의 관계로
어디에서도 자유로울 수 없었던 스무해의 간격

케이시 폴은 수전에게 어떤 의미였을까?
그녀가 자신을 감당하지 못했던 이유는 무엇일까.
그녀에게 폴은 어떤 존재였을까.
단순한 유희였을까.
암묵적인 행위였을까.
냉랭한 몸에 대한 반항이었을까.
도피의 도구였을까.
어째서 케이시 폴이었을까.
그건 영원히 알 수 없다....

수전은 케이시 폴에게 여자였고,
엄마와는 다른 엄마였다.

소년은 책임감에 대해서 쥐뿔도 몰랐다.
현실에 대해서도 아는 게 없었다.
조운이 깨우쳐주기 전까지는...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내가 아무것도 아닐까 봐 - 도시 생활자의 마음 공황
박상아 지음 / 파우제 / 2018년 9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나는 불안에 담겨진 박제 인간이었다.


작가의 이력을 본 것만으로도 읽고 싶은 책이 있다.
이 책은 제목 때문에도 읽고 싶었던 책이다.

나도 내가 아무것도 아닐까 봐
고민하고
겁내고
외로웠고
무수한 밤을 지새웠었다.

공황장애와 전환장애를 앓고 있는 작가

전환장애는 정신적 에너지가 신체적 증상으로 변환된 것을 의미한다. 한마디로, 신체에는 문제가 없는데 마비가 온다거나, 실명을 한다거나 하는 질환이다.


정신적 고갈 상태가 몸으로 표현되는 현상. 이라고 나름 이해해 보았다.
아마도 일에 집중해서 마음이 쉴 틈이 없었던 작가에게 억지로라도 쉬게 해보려는 마음의 투정 같은 병.

그녀의 글들에 빠져서 앉은 자리에서 다 읽어 버렸다.
며칠간 내 마음이 쉬고 싶을 때 읽으려던 마음이 그렇게 급하게 흘렀다.
아마도 십여 년 전의 내 모습이 글에서 보였기 때문에
그녀의 고통을 수반한 글들이 날카롭게 베이지 않아서
힘들어하는 글들이 무겁게 가라앉지 않아서
거침없는 표현들이 살아 무뎌진 감성을 콕콕 찍어대서
한때의 내 글을 보는 거 같아서
그렇게 글을 먹어치웠다.

어느 시절
어딘가에서
툭...
끊어져 버린 감정의 끈 한 가닥이
살아 돌아오는 느낌이 좋았다...




어렸을 적 꿈인 화가와 패션디자이너. 두 꿈의 중간쯤, 거기에 생계라는 재료를 믹서에 넣고 잘 갈아놓은 패션 광고대행사의 아트디렉터라는 삶.
두 가지 꿈 중 무엇도 선택하지 않고, 그렇다고 어느 하나 버리지 않은 어정쩡한 삶.


글도 그림도 그녀의 색채로 가득하다.
누군가의 고통을 수반한 글에 예쁘다는 감정을 드러내는 게 실례일지 모른다는 생각을 했지만
책을 읽기 전 훑어보던 시간에도
책을 읽어내려가던 시간에도
책을 덮고 음미하는 시간에도
나는 예쁘다는 생각을 놓지 못했다.


예의 있는 사람이 되는 것, 무례하지 않은 사람이 되는 것.
그것은 상대가 나를 존중해줄 때에만 하자.


그래야지.
나를 존중하지 않는 사람에게까지 예의를 차리고 무례를 범하지 않으려
많은 것을 속으로 삯히다가 앓게 되는 건 누구도 원치 않는 일이지.


우리는 어떤 관계든 나의 가치를 알아봐주는 사람과 함께여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원래 갖고 있던 생생한 자신의 매력마저 사라져버리기 때문이다.


그녀가 긴 투병생활에서도 자신을 잃지 않으려 택한 건 글쓰기이다.
그녀의 글은
투정도 아니고
복수도 아니고
원망도 아니다

살기 위해
숨쉬기 위해
생활하기 위해
끄적인 글이다.

그래서
내가 아무것도 아닐까 봐
두려웠던 시간들의 끄적임은
내가 누구인지를 알아가는 시간의 끄적임이 되었다.

그래서
그녀의 다음 이야기를 기다린다.

그녀가 아무것도 아닌 것에서
무엇인가로 거듭났을 시간들에 대한 궁금증이 생겼으므로...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