싱거운 소리니까 진지하게 읽지 말 것을 권합니다.
그러니까 이야기를 거슬러 올라가면 이렇다.
바람구두는 나도 몰랐는데 좌파란다. 게다가 이 녀석은 타고나길 어떻게 타고 났는지 웬 책들을 무지하게 읽는다고 한다. 그냥 무지하게 읽는 것만이 아니라 고전부터 시작해서 최신간, 최신형무기도해부터 손자병법, 3,000원으로 차리는 요리상은 물론 프라모델 조립에 관한 책까지 닥치는 데로 읽는 책벌레라고 한다.
취미도 잡다하지만 한 번 시작하면 나름 뽕을 뽑는 편이다. 그런데 이 인간이 잡다한 지식에 대한 관심과 달리 '잡기'에는 영 젠병이라 주변 친구들은 모두 300다마(당구)는 너끈히 넘기고, 1,000다마의 경지도 훌쩍 넘긴 다마의 천재들과 어릴 적부터 어울렸으면서도 여태 30다마 이상을 쳐 본적이 없으며, 바둑이나 장기는 물론 대한민국 궁민스포츠라 할 수 있는 화투, 일명 고스톱도 장가들어 처음 배웠다.
그러니까 지금으로부터 8년 전 한미한 집안 출신인 바람구두가 어쩌다보니 이름 높은 명문 씨족으로 장가를 들었는데 장인 어른이 딸내미를 냉큼 집어 넘겨주신 까닭이 오로지 명절 화투 판에 광 팔 사위가 하나 부족했기 때문이더라는 전설이 있다. 바람구두를 처억 보면 생긴 건 장비가 형님하겠고(고로 나는 관우아니면 유비련가?), 술은 말술은 너끈히 마시겠는데다가 온갖 잡기에 능해 마당쇠가 형님하고 인사하게 생겼겄다. 등판도 넓은 것이 와이셔츠는 물론 코트 다리미질도 너끈할 것이며, 허벅지가 두툼한 것이 동네 아줌씨들이 명절 떡살 찧어달라며 군침 좀 삼키겄다.
하여 장인 어른이 관상을 처억 보니 고놈 자식, 울 딸내미 행복하게 해줄지는 모르겄지만 밤새 화투 한 번 잘 쳐주겠다 싶어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셋째 딸을 냉큼 넘겨주셨는데... 오호라, 통재로다. 이리도 방통할 줄이야. 이놈의 사위가 허우대만 멀쩡하지 화투에 화투는 커녕 1월, 2월, 3월 짝패 맞추는 것도 못하는 '호로자식'이더라. 제 짝도 하나 제대로 맞추질 못하니 울 딸내미 긴긴 겨울밤 외롭고 쓸쓸하여 눈물로 허송세월하겠구나. 장인의 애간장이 타는데...
이놈의 막내 사위. 기껏 처가집에 가도 술 한 잔은 커녕 밥 먹고 돌아서면 책꽂이에서 뭐 읽을 만한 거 없나 찾아보고 책이나 읽어대고 있으니 분통이 터질 밖에... 사위도 변명이랍시고 한단 말이 1년에 네 번 기껏해야 장인, 장모 생신에 한 번, 설, 추석 연휴에 한 번 치니 잊을 만하면 돌아오는 것이 화투짝이요, 아무리 봐도 그놈이 그놈같고, 줄기는 줄기요, 가지는 가지인데 검은 가지, 붉은 가지는 왜 그리 비슷하게 생겼고, 아버님 싸셨다니 이 어찌 동방예의지국에서 나올 소리인가 싶어 멀리 하였고, 학교 다닐 때는 밖에 나가 놀아나지 않아 착하다 하시더니 이제와서 그것도 못 배웠냐고 야단치는 건 웬말이오~
하였스렸다.
기축년 신년을 맞아 이놈의 막내 사위 단단히 결심하여 고스톱에 쓸 놀이대금을 차곡차곡 모으니 헌돈이 수천이오, 새돈이 기만냥이더라. 다른 사위들 오기 전에 우리 빙장 어른께 효도나 하련다 싶어 처가에 도착하자마자 군용 양탄자를 펼치고 신나게 맞고를 치는데, 어허 신통한지고. 한 장 맞추고 까 뒤집으니 뒷손이 알아서 맞이 하여주시는도다. 평소 남몰래 연모하였으나 손길 한 번 주시지 않던 똥 쌍피, 비 쌍피가 설사하며 반겨주시고, 자뻑에 폭탄에 두루두루 치고 나니 장인 어른이 화투패를 털썩 내려놓으며 하시는 말씀, "여보게 사위! 요즘 캠핑 다닌다더니 그게 아니라 어디 하우스만 돌아다녔는가?"
장인 어른의 군자금을 몽창 알겨먹은 것은 전초전이오, 이제 첫째 사위, 둘째 사위, 손아랫 처남과 2라운드가 시작되었으니 어허, 이게 웬일인가. 각 가문을 대표하여 모여든 이들이 늘 제 밥으로 생각하는 바람구두가 한 번 화투패를 던지니 양 광박에 피박을 씌우고, 고,고,고를 연발하니 어느덧 시각은 인시(寅時, 새벽 4시)를 가리키더라. 셋째 사위 발치 아래엔 배춧잎으로 잔디밭처럼 펼쳐져 있고, 금광맥이 터졌는가, 은광맥이 터졌는가 백동전이 하나 가득이라. "여보게 사위! 이 돈을 무거워서 어찌 다 집에 가져가려 하나. 마침 좋은 금고도 하나 들였으니 보관하였다가 내줌세."
설 명절 끝내고 집으로 돌아오니 그거참 신기하네. 친가에서 설날 아침 새배하고 윷놀이에서도 1등을 하더니 이거 올해 운세 대박이로세. 연휴 끝내고 출근하여 담배사러 편의점에 들렀더니 로또 복권 뽑아놓고 팔고 있으니 이것 또한 인연이니 손이나 한 번 잡아보세. 하여 난생처음 복권 두 장을 거금 4천냥을 투자하였겄다. 낼모레 발표니까. 오호, 이거 한 방이면 뭘 하나 궁리하는데 울마눌이 지긋이 눈을 뜨고 묻기를 "제가 서방님과 함께 살아오는 동안 지금껏 한결같은 마음으로 대해왔던 것은 비록 가난하여도 조석으로 책을 읽고, 허황된 꿈을 꾸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제와서 로또 대박을 꿈꾸시다니 곁에서 뵙기가 매우 황망합니다."
"어허, 모르시는 말씀입니다. 견리사의라 하였소. 이익을 취하였더라도 그것이 남의 것을 탐한 것이 아니며, 설령 이익을 얻었다 하더라도 의로운 목적을 위해 사용한다면 그것이 바로 의를 행하는 것이오. 어찌 아녀자의 좁은 소견으로 장부의 길을 가로막으려 하시오."
"그러시다면 소저, 로또에 당첨된 연후에 어디에 사용하시려 하는지 여쭈어도 될런지요."
"일러 보시오."
"로또 1억이 되면 어디에 쓰시겠소?"
"그댈 주리다."
"10억이 되면 어디에 쓰시겠소?"
"집을 사리다."
"100억이 되면 어디에 쓰시겠소?"
"음, 문화재단을 차려서 50억은 재단기금으로 하고, 나머지 50억은 운영자금으로 하여 잡지를 창간하고, 가난한 이들에게 장학금을 주고, 어찌되었든 좋은 일에 쓰겠소."
울마눌... 눈을 살포시 뜨고, 날 쳐다보다가 한 마디 툭 던진다.
"으휴, 인간아! 명색이 좌파라면서 로또 맞은 돈으로 문화센터 차리고, 재단 만들었다고 하면 사람들이 뭐라 하겠니? 그게 명분 있는 짓이니. 하여간 이놈의 인간은 하는 짓마다... 에유, 내가 못살아."
"음, 부인! 생각 해보니 참 쪽 팔린 일이었구랴."
어차피 안 된 걸 뭐 어떠하오~
* 그런데 이 얘기 신문에 칼럼으로 쓰면 욕 먹을까요? 흐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