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의 방정식
아미르 D.액설 지음, 김희봉 옮김 / 지호 / 2002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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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마 신(神)은 하늘나라에 간 알버트 아인슈타인을 만났을텐데, 아인슈타인에게 뭐라고 했을까.

얼마전부터 인터넷 홈페이지를 통해 교류를 하게 된 김희봉님의 번역서다. <숨겨진 질서>를 읽고난 뒤에 과학서적 번역가로서는 아주 괜찮은 분이라고 생각해서 보증수표 받은 기분으로 <믿고> 읽기 시작했는데 믿음이 유효했다. 아인슈타인의 마당방정식(기존 용어로 얘기하면 場이론)이 만들어지기까지의 과정을 그리면서 아인슈타인의 일생과 사람됨을 같이 보여주는데, 위인전 중에서 재미있는 위인전처럼 재미있다.

마당방정식을 만들어가는 아인슈타인의 연구는 유클리드기하학(공간)에서 非유클리드기하학(공간)을 향해 나아가는 수학자들의 노력과 궤를 같이 한다. 뒷부분에는 현대 우주연구의 성과와 과제를 소개하면서 이를 마당방정식을 입증하는 과정과 맞물리게 보여주는데 결국 이 모든 과정은 <모든 것을 설명해주는 가장 아름다운 방정식> 즉 <신의 방정식>을 찾으려는 인간의 노력과도 일치한다.

'E=mc²'을 아주 흥미롭게 읽었더랬는데, 서술방식에서는 'E=mc²'과 비슷하고 재미도 비슷하다. 'E=mc²'은 아인슈타인의 특수상대성이론을, 이 책은 일반상대성이론을 설명하고 있기 때문에 자연스레 두 책을 비교하면서 읽게 됐다.

사실 이 책만큼 공간에 대한 설명을 쉽게 풀어서 해 주는 책을 찾기도 어려울 것 같다. 방석 조각같은 것을 놓고 가운데에서 조금 비껴간 부분에 핀으로 쿠션을 찍어누른 것처럼 쏙 들어간 부분을 만들어 '여기가 블랙홀입니다'하면서 뫼비우스의 띠이니 하는 것들을 들먹이면 나는 통 이해를 못 한다. 전에 읽었던 우주에 대한 책들은 대부분 그런 식이었고, 나는 그런 똑같은 그림도 여러번 봤지만 매번 내가 그 그림에 무시당하는 일이 빚어졌었다.

그런데 이 책은 잘난척 하기 위해 알아보기 힘든 그림을 집어넣는 대신에 정말로 독자들의 이해를 도와주는 그림을 넣고 있어서 기분이 좋았다. 과학에 관한 책을 읽을 때마다 느끼는 인문학도의 자괴감, 치명적인 <과학적 상상력의 부재(不在)>를 조금은 상쇄시켜 주는 도우미들이 많아 반가웠다.

수학이나 물리학에 대해서는 잘 모르지만, 지금도 후대 사람들이 뇌 조각을 잘라서 연구하고 있을 만큼 <불세출의 천재>로 각인돼 있는 아인슈타인이라는 인물에 대한 얘기들만으로도 재미가 있다. 누구나 그렇듯이 나도 어렸을 때부터 우주란 무엇이며 무한하다는 것은 어떤 것인지, 시간과 공간은 어떤 성질을 갖고 있으며 그것들이 어떻게 한 개념 안에서 통합될 수 있는지를 궁금하게 생각했었는데 똑똑한 사람들이 그 문제를 풀기 위해 어떻게 접근하는가 엿볼 수 있어서 좋았다.

수학공식은 너무 어려워서 거의 이해할 수 없었지만 그래도 기념 삼아 마당방정식을 노트에 베껴써봤다. 벌레같이 생긴 문자들로 돼 있어서 옮겨쓰기도 힘들었지만, 그 공식이 <너무나 아름답다>고 자꾸 그러니까 어쩐지 내 눈에도 예쁘게 보였다. 또 하나, 아인슈타인 자신의 말을 인용해 신의 존재와 의도에 우주(천지창조)의 원리를 빗대는 것도 재치있었다.

그런데 사족을 붙이자면, 아인슈타인이 프러시아 학술원의 회원이 된 것이 책 앞부분에는 1914년7월2일이라고 나오는데 뒤에서는 1913년7월3일로 나온다. 어느 것이 맞는지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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링크 - 21세기를 지배하는 네트워크 과학
알버트 라즐로 바라바시 지음, 강병남 외 옮김 / 동아시아 / 2002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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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미있다가 재미없다가 또 재미있다가 다시 재미없어졌다가 했는데, 과학저술로서 아주 탁월한 것은 아니지만 결론적으로는 <재미있었다>.

책은 복잡한 네트워크들이 어떤 구조를 갖는지, 취약점과 강점은 무엇인지, 그리고 네트워크 연구가 왜 중요한지를 설명한다. 네트워크를 이해하기 위한 기본개념들을 아주 쉽고 명확하게 설명하고 있는데다, 실생활에서 자주 접하는 웹과 같은 친밀한 네트워크와 종래의 각종 수학퍼즐들을 소재로 풀이하고 있어 사전 지식이 전혀 없이도 읽을 수 있다.

점(노드)들이 있고, 점들을 잇는 끈(링크)들이 있다. 점과 점들이 끈으로 연결돼 그물(네트워크)을 형성한다. 점들의 숫자는 계속 늘어나고, 동시에 그물 자체도 커진다(성장).
점들 중에는 인기있는 것들(허브)이 있는가 하면, 별볼일 없는 점들도 있다. 대다수는 이런 별볼일 없는 점들이지만 몇개의 허브는 아주 많은 연결망을 갖고 있어서 네트워크 전체에 영향을 미친다(20:80).

재미난 것은, 저자가 네트워크 연구의 역사를 설명하고 풀이해주는 방식 자체가 위에서 단순화시킨 네트워크의 특징적 구조를 그대로 차용하고 있다는 점이다. 저자는 우선 비슷비슷한 점들로 이뤄진 특색없는 그물(노드1-무작위적 네트워크)에 대해 알려준다. 노드1에 머무는 동안 독자들은 그물망을 구성하는 기본개념들과 함께, 네트워크에 주목하기까지 19세기말부터 과학자들이 어떤 노력들을 기울였는지를 맛있는 과자(에피소드들)를 먹으면서 배울 수 있다.

노드2. 네트워크의 점들은 아무렇게나 이어지는 것이 아니라, 나름대로의 기준에 따라 연결된다. 왜? 점들이 몽땅 똑같은 것이 아니기 때문에. 나는 인터넷의 바다를 매일매일 항해하지만 아무 곳이나 내 홈에 링크시키지는 않는다. 나의 취향에 따라, 내가 필요로 하는 정보가 있느냐 없느냐에 따라 즐겨찾기를 만든다. 그런데 새로 홈페이지들이 계속 만들어지고 있으니 전체 인터넷이 성장하는 것은 물론, 나의 즐겨찾기 자체도 갈수록 늘어난다.

몇개, 사실은 상당히 여러개의 허브를 가진 이 그물망이 <척도 없는 네트워크>다. scale-free를 혹자들은 <축척이 없는>이라 번역하던데 이 책에서는 <척도 없는>이라는 말을 썼다. 직역한 말 말고, 더 적당한 우리식 용어가 나왔으면 좋았을텐데. 노드2에서, 독자는 네트워크에 대한 개념이 한층 진화하고 있음을 느낀다.

이어 저자는 네트워크 상의 불균형(부익부 빈익빈) 문제(노드3), 네트워크 이론과 양자역학의 만남(노드4), 네트워크의 생존력과 취약점(노드5) 들을 차례로 풀어나간다. 네트워크라는 신기한 동물을 보자기로 가려놓은 뒤 살짝 밑단을 올려 먼저 다리를 보여주고, 그 다음 엉덩이까지 보여주고, 관객들이 '우와~'하며 감탄할라 치면 배랑 가슴을 보여주면서 '지금껏 본 것은 아무것도 아니었다'며 머리까지 보여주는 식의 서술방식. 읽는 재미가 있는 것은 이런 이야기구조 때문인 것 같다. 여러개의 노드들을 거친 독자들은 머리 속에 링크로 연결된, <네트워크의 구조>에 대한 그물같은 지식을 얻게 되는 것이다.

아쉬운 것은 책 뒤쪽 절반에서는 긴장감이 확 떨어지는 점. 네트워크 이론은 전염병에도, 인터넷에도, 경제에도, 생태계에도 모두 적용된다는 것을 동어반복식으로 써놓고 있어 지겨운 감마저 들었다. 더우기 아직 네트워크 연구는 초기단계 아닌가.

챕터의 첫머리를 종종 '전직 항공기 승무원 개탄 듀가스는 어쩌구 저쩌구'하는 식으로 시작하는 <저널리스틱한 글쓰기>도 그다지 맘에 들지는 않는다. 이런 식의 글쓰기는 프리드먼이나 <보보스>류, 그리고 그것들을 흉내낸 최근 한국의 몇몇 사람들 글에서 많이 봤다. 작은 것에서 큰 이야기를 뽑아내는 것은 때로는 능력이지만, 이걸 논리구조가 아닌 문장 스타일에서 자꾸 사용하면 침소봉대에 입맛 물리게 만드는 부작용을 낸다. 이런 몇가지 티들만 아니라면 <링크>는 아주 훌륭한 책이 될 수 있었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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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재의 유전자, 광인의 유전자
필립 R. 레일리 지음, 이종인 옮김 / 시공사 / 2002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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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의 솜씨: 글도 잘 쓰고, 다양한 에피소드와 유전학 역사상의 사건들을 버무려 구성하는 능력도 뛰어난 것 같다. 다만 지나친 낙관론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기는 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저자의 '견해'일 뿐이므로 책을 읽는 재미가 그 때문에 줄어드는 것은 아니다. 유전자로 인해 발생하는 여러가지 문제들에 대해 일반적-전문적 접근의 양갈래를 잘 오가며 이해하기 쉽게, 심지어는 흥미진진하게 풀어놓는다.

역자의 솜씨: 전문적인 지식이 전혀 없는 분야의 책을 번역하겠다고 나서는 '용기'는 대체 어디서 나오는 것인지. 영한사전에 나오는 의학용어 표기를 그대로 썼다고 해서 충실한 의학서적 번역자가 되는 것은 아니지 않은가.

게다가, 자기가 전부 번역하지 않고 대학원생들이나 다른 사람들 시켜 번역할 거라면 차라리 번역을 하지 말라. 유전자에 대해 쓴 책에서 복제양 돌리 만든 사람의 이름이 '윌무트' '헬무트'(갑자기 독일 정치에 관한 책이 됐나 해서 당황했다)를 오가면 말이 되나? 제레미 리프킨을 리프킨-리프킨드 식으로 혼용하는 것을 애교로 봐줘야 하나? 남들 시켜 번역했으면 최소한 원고를 검토해서 고유명사 표기라도 통일해줬어야 하는 것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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투바: 리처드 파인만의 마지막 여행
랄프 레이튼 지음, 안동완 옮김 / 해나무 / 2002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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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제부터인가 여행을 떠나고 싶다는 생각이 내게서 떠나가지 않는다. 오래동안 생각해오던 자금성에도 가고 싶고, 마음 깊숙한 곳에 들어있는 이집트, 이란, 이라크, 터키에도 가보고 싶고, 시원한 밤바람 맞으러 홍콩에도 가보고 싶고, 축구 보러 스페인에도 가고 싶고. 현실에서 떠나고 싶은 생각과는 좀 다르지만 어디에든 가고 싶다.

<투바-리처드 파인만의 마지막 여행>(랠프 레이튼. 해나무刊)이 가져다준 위안이 있다면, 굳이 <떠나지> 않아도 여행을 갈 수 있다는 것이다. 지리교사인 랠프 레이튼과 물리학자 리처드 파인만, 그리고 몇몇 친구들은 우연히 투바라는 곳에 가고 싶다는 생각에 이르게 된다. 냉전이 치열했던 시절, 소련의 한복판 오지(奧地)를 찾아가겠다는 발칙한 착상. 책에서는 누차 <수도 Kyzyl의 철자에 모음이 없다는 점> 때문에 투바에 흥미를 갖게 됐다고 강조하지만, 다른 저술들에서 나타난 파인만의 성향으로 봤을 때 아마도 그것은 핑계일 뿐일 것이다. 상당량의 지적 허영심과 금지된 것에 대한 도전 정신 따위가 노학자의 욕구에 불을 붙였을 것임이 틀림없다.

노벨 물리학상을 받은 미국의 저명한 물리학자, 2차 대전 때 맨해튼 계획에 참여했고 80년대에는 챌린저호 폭발사건을 조사하는 정부 위원회의 자문 역을 맡았던(그가 원했든 원치 않았든) Mr. 파인만이 소련을 방문한다--그의 반국가주의, 반골 기질, 개구쟁이 정신에 이보다 더 어울리는 아이디어가 어디 있겠는가.

<투바 아니면 죽음을(Tuva or Bust!)>이라는 모토 아래 모인 일군의 사람들은 <투사모(Friends of Tuva)>(이건 번역자의 재치다)의 멤버가 되어 투바 여행을 준비한다. 사전 여러권을 징검다리 삼아 힘겹게 투바어로 편지를 쓰고, 투바와 관련된 것이라면 위성사진이든 책이든 그림이든 긁어모으고, 투바와 관계 있는 사람들에게 연락을 하고. 수년의 시간 동안 이렇게 쌓인 정보들로 이들은 투바에 다가간다.

책을 읽던 초반부에는 참 재미있어서 <아껴 가면서 읽어야지> 하고 생각했었다. 그러다가 중반에 접어들면서 조금 재미가 식었다. <우린 이토록 왕성한 지적 호기심으로, 이런 열정을 갖고, 이렇게 힘들여 정보를 모았다>라는 뉘앙스가 괜히 거슬렸던 까닭일까.

파인만의 풍모가 제대로 드러나지 않는 것도 당초의 흥미를 반감케 했다. 책 제목에 파인만의 이름이 들어가 있고 실제 저자가 파인만에 바치는 헌사 식으로 글을 쓰기는 했지만, 80년대라면 파인만은 이미 늙어 수차례 암수술을 받았던 시기다. 때문에 이 책의 주요 줄거리를 움직이는 인물은 아니고, 배경의 큰 나무 정도로만 모습을 드러낸다.

책 읽는 과정을 나의 <재미>를 기준 삼아 그래프로 그린다면 아마도 상승-하강의 골짜기를 지나고 있었을 중반 이후의 부분(사실 별로 길지는 않은 책인데). 갑자기 다시 재미가 동했던 것은, 이 작자의 <잘난 척>이 흔한 과시욕이 아닌 장난기임을 알게되면서부터다. 투바 여행계획이 진전되는 단계들 속에 당시의 역사적 사건들을 슬쩍슬쩍 던져넣는 방식의 글쓰기에 관심이 가기 시작했다.

그리고 이들의 <여행>이 종반을 향해 달려갈 무렵, 우리의 스타 파인만은 암으로 인해 <빌려온 시간>(수술로 연장시킨 수명 만큼)을 다한채 세상을 떠난다. 담담함 속에 스며진 슬픔 같은 것을, 유머러스함 속에서 느낄 수 있다면 그거야말로 가장 큰 슬픔 아닌가. 재작년부터 계속된 파인만에 대한 내 관심도, 오늘 파인만의 죽음을 <접하면서> 슬픔과 섭섭함으로 끝을 맺었다고 하면 설명이 되려나.

정작 레이튼의 투바 구경은 책의 에필로그에만 간략히 언급됐는데, 목적지에 이르기까지 무려 11년이나 걸렸던 이들의 모험은 충분히 재미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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앰버 연대기 1 - 앰버의 아홉 왕자
로저 젤라즈니 지음, 김상훈 옮김 / 예문 / 1999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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판타지는 인류가 가져온 가장 오랜 문학 장르일 것이다. 현대적인 판타지는 알다시피 톨킨이 <반지전쟁>에서 틀을 잡아놨다. 그 틀은 결국 '선과 악의 대립'인데, 착하고 용감한 주인공이 마계에 맞서 싸우는 게 가장 일반적인 구도다.
로저 젤라즈니의 소설은 '판타지'에 해당되기는 하지만 주제가 상당히 철학적이다. <앰버 연대기>는 무지무지 재미있어서 정말 '손에 땀을 쥐고' 다음 권을 펼쳐야 하는(무려 5권!) 간만에 만난 재미난 소설이었는데, '어렵다'는 점에서는 같은 작가의 초기 소설인 <내 이름은 콘라드> 못지 않다. 그렇지만 훨씬 흥미진진하고 스릴이 있어서, 읽는 동안 날마다 잠자기전 '밤을 새울까 말까' 망설였을 정도다.

주인공인 '나'(코윈)는 어느날 미국 그린우드의 병원 침대에서 깨어나는데, 병원측이 자기 몸에 억지로 신경안정제 류를 투입하고 있다는 걸 알고 탈출을 한다. 자기를 강제 입원시켰다는 '여동생'의 주소를 알아내 찾아갔다가 놀라운 사실을 깨닫는다. 유럽에 전설의 '흑사병'이 창궐했을 무렵부터 수세기에 걸쳐 살아온 코윈은 '앰버'라는 곳의 왕자였던 것이다. 오랫동안 기억상실증에 걸려있던 코윈은 '형제자매들'을 하나둘 만나면서 기억을 되찾는다.
처음엔, 코윈의 '앰버 왕위 쟁탈전'인 줄 알았다. 실제로 초반부에는 코윈과 형제들간의 왕관 빼앗기 전쟁이 벌어지기도 한다. 그런데 앰버가 어떤 곳인가 하면, '원질(原質)에 해당되는 곳이다. 플라톤의 '이데아' 같은 걸 상상하면 된다. 앰버는 모든 것의 원형에 해당되는 본질적인 공간이고, 우리가 살고 있는 지구를 포함해 서로 다른 류(類)들이 사는 여러 세계는 앰버가 던진 '그림자'에 불과하다. 앰버의 왕자와 공주들은 그림자와 그림자 사이를 여행할 수 있으며, 타로 카드같이 생긴 트럼프를 이용해서 서로 통신과 왕래를 하기도 한다.

내용이 어찌나 복잡한지! 왕위쟁탈전에 뛰어들었다가 져서 한때 장님이 되어 지하감옥에 갇혔다 탈출한 코윈은 새로운 사실들을 조금씩 접하게 된다. 앰버는 모든 것이 원형인 동시에, 그에 대당(對當)하는 세상 또한 존재하는 것이다.
그동안 대권경쟁 내지는 '왕자들의 난'을 바라보는 관람객 입장이었던 독자들은 이 시점에서 코윈과 자기동일시를 할 수 있게 된다. 내가 '절대적인 것'이라고 알고 있던, 이 세상에 모든 '그림자'들을 남기고 그 '그림자 세상' 사이를 넘나들 수 있는 유일한 존재라고 알고 있던 앰버는, 그저 인간의 이상(혹은 이성, 심하게 말하면 자아도취)에 불과했던 것이다. 다시 말해 앰버는 '질서의 세계'이고, 그보다 더 primary한 '혼돈의 세계'가 따로 있는데 바야흐로 '질서'와 '혼돈' 사이의 일대격전이 펼쳐지는 것이다!

무지하게 현학적인 말투, 뭔 판타지 소설이 이런가 싶게 사유적 철학적인 묘사 속에서도 긴장감은 더해간다. 둥, 둥, 둥, 북소리가 울리는 가운데 이 편(앰버)에는 배신자가 나오고, 저쪽편(카오스)과의 사이에 로맨스도 생겨나고...결말은? 이런 복잡미묘한 문제에 대해 작가가 결론 보여주는 것 보았는가(그렇다고 작가가 독자들 몫이라며 갑자기 꼬리내리고 내빼는 건 아니지만).
젤라즈니가 보여주는 세계는 기묘하면서도 황홀하고, 묘사하는 방식은 사변적인 것 같으면서도 화려한 영상처럼 머리 속을 채운다. '반전' 좋아하시는 분들도 만족할만한 몇 가지 반전도 있고, 아서왕의 아발론이나 그리핀, 유럽의 역사 같은 신화 퍼즐 맞추기를 할 수도 있다.

책장 덮고 나니 허탈하다. 덕택에 한 며칠 집에 떡 숨겨놓고 온 아이처럼 빨리 읽고 싶어서 근질근질했었는데 이제 또 무슨 재미로 살아야 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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