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토벤의 생애
로맹 롤랑 지음 / 문예출판사 / 1999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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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인은 위인전 속에서 태어나지 않는다. 너무나 당연한 말이지만, 나는 종종 그 사실을 잊곤 한다. 베토벤이라는 이름 또한 어렸을 때부터 수도 없이 들어온 '위인전 속의 인물'일 뿐이었다. 피도 살도 눈물도 없는. 그 이야기 속의 주인공과 다를 바 없었던 베토벤이 나에게 인간의 모습으로 다가왔다.

그는 음악을 창조하는 천재성의 소유자였던 동시에, 진보와 도덕을 수호하고자 하는 선한 사람이었고, 주변의 사람들을 행복하게 해주고 싶어했던 따뜻한 사람이었다. 하지만 가혹한 운명은 그의 행복을 시샘하였다. 스물 여덟이라는 젊은 나이에 찾아온 병마는 늘 그를 괴롭혔다. 그는 늘 배앓이를 했고, 모두들 너무나 잘 아는 바와 같이 들리지 않는 귀 때문에 불행하였다.

그래서 타고난 기질이 선하고, 사람을 좋아했던 베토벤은 사교를 꺼릴 수밖에 없었다. 옆 사람들이 이야기하는 소리도 듣지 못하고, 오케스트라의 높은 음에서는 몸서리가 쳐지는 그가 어찌 사람들과 문제 없이 어울릴 수 있었겠는가. 그것도 음악가라는 천직을 가진 그에게 청각에 문제가 있다는 것은 너무나도 절망적이고 감추고픈 비밀이었던 것이다.

생활 또한 궁핍을 면하지 못했다. 많은 사람들이 그의 음악을 인정하고 사주었지만, 그는 그저 끼니를 굶지 않는 것으로만 만족해야 했다. 하지만 그는 끈질간 악마와 같은 운명에 굴복하지 않았다.

'이 세상에서 한껏 행복할 수 있는 한껏 행복한 나 자신을 자네들에게 보여주고 싶네. 불행한 나를 보이고 싶지는 않네. 결단코 그놈의 병에 눌려서는 안 돼! 나는 운명의 목덜미를 잡아쥐고야 말테야. 나를 아주 굴복시키지는 못하겠지. 아아, 인생을 천 배로 살 수 있다면 얼마나 아름다울까! - 평온한 생활 - 아니야, 확실히 나는 평온한 생활을 하게 마련된 사람은 아니야.'

베토벤이 그의 친구에게 보낸 편지의 일부분이다. 그는 많은 괴로움도 있고, 좌절도 있었지만, 끝내 운명을 극복하고 후세에 이름을 남겼다.

베토벤의 음악을 들으며, 이 서평을 쓴다. 이 아름다운 선율이 진실로 청각장애인에 의해 창조되었단 말인가. 인간이지만, 인간 이상이었던, 인간 이상이었지만 결국 한 인간이었던 베토벤의 위대한 영혼이 느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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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령이 출몰하는 세상
칼 세이건 지음, 이상헌 옮김 / 김영사 / 2001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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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나라야말로 체계적인 과학적 사고, 양질의 과학 교육과는 거리가 먼 나라이다. 학창 시절 과학시간에 배우는 것이라고 해봐야 교과서에 나온 것들이 전부이고 그나마 시험에 나올 만한 것들만 찍어서 마치 암기 과목처럼 공부한다. 문과에 들어간 경우 고등학교만 졸업하면 지긋지긋한 과학이란 것과 아예 담을 쌓고 그 후 평생을 살아간다.

서점에 나가보면 읽을만한 과학 교양 서적보다는 UFO니 외계인이니, 심령술이니 하는 비과학적인 것들이 마치 과학의 행세를 하고 있다. TV는 어떠한가? 입증되지 않은 것들을 마치 사실인양 몰아간다. 요즘 많이 나오는 전생탐험이니, 귀신체험이니 하는 프로그램을 보면 어떻게 저리 터무니없는 것들을 그럴듯하게 보이게 하기 위해 꾸며댈 수 있는가하는 한심한 생각이 든다. 정말이지 TV에서 만드는 오락용 프로그램 중에서 비과학에 대해 회의적인 견지를 포함한 것을 결코 본 적이 없다.

세계적인 천문학자이자, 영화 <콘택트>의 원작자 칼 세이건이 이러한 대중의 무지와 대중매체의 선동을 질타하고 나섰다. 이 책 <악령이 출몰하는 사회>에서 얘기하는 악령이란 존재가 바로 '사이비 과학'이고, '무지'이며 '미신'이다.

특히나 미국에서 유행처럼 번지고 있고, TV 외화 'X-파일'의 소재로 종종 채택되곤 하는 '외계인 납치-해부' 사건이 칼 세이건이 주로 비판하는 사이비과학의 대표이다. (사실 외계인의 납치와 해부가 미국에서 주로 이루어진다는 것 자체가 가짜일 가능성을 증명하고 있다. 왜 외계인들은 유독 미국인들만을 납치하여 실험하는가? 외계인 납치 - 해부가 다분히 문화적 사건임을 의미하는 것이 아닌가?)

세계는 점차 복잡해지고 과학 기술은 발전해 가는데 사람들은 점점 더 과학적으로 사고하는 것을 귀찮아 한다. 외계인이 있다는 사실에 고개를 갸우뚱하면, 그렇다면 외계인이 없다는 증거를 대보라고 한다. 외계인의 존재를 믿지 말라는 것이 외계인이 없다는 것을 말하는 것은 아니다. 칼 세이건은 이것에 대해 '증거의 부재가 부재의 증거가 되진 못한다'고 반론을 편다.

칼 세이건이야 말로 외계 지적 생명체의 존재가 있기를 누구보다 바라는 사람이다. <콘택트>의 주제의식도 그렇고 실제로 그는 SETI(Search for ExtraTerrestrial Intelligence이던가..) 프로젝트의 강력한 지지자이기도 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있다는 것이 증명되기 전까지 그것을 믿어선 안 된다고 말한다. 그것이 오류를 최소화하기 위해 과학이 스스로 만들어온 룰이기 때문이다.

과학적 사고가 필요한 또 다른 이유는 그것이 민주주의의 원칙과 일맥상통하기 때문. 과학은 '오류'를 인정한다. 하지만 '사이비 과학'은 오류를 인정하지 않는다. 사이비 과학이 스스로 옳다는 것을 주장할 때, 나머지 사실들은 자동적으로 그른 것이 된다.

진짜 과학은 열려 있다. 아무리 저명한 과학자가 증명한 이론이라 할 지라도 비판을 받을 수 있고 반박될 수 있다. 여기에서 권위는 아무런 힘을 쓰지 못한다. 이제 갓 대학원을 졸업한 젊은 과학자도 철옹성 같은 이론을 무너뜨릴 수 있다. 과학의 근본은 자유로운 의견의 교환이고 민주주의로 마찬가지이다. 이것이 바로 과학적 사고를 발전시킬수록 사회를 더욱 민주적으로 만들 수 있다는 근거가 된다.

상당한 두께에다 내용도 그리 수월하진 않지만, 지금 우리 사회에 꼭 필요한 책이 아닌가 생각한다. 사회가 복잡하고 어지러워질수록 미몽의 함정은 이곳저곳에 생기기 마련이다. 우리의 무지를 이용하려는 나쁜 사람들 - 예를 들어 암을 치료해주겠다며 동물의 살덩이를 암세포라고 빼내는 쇼를 하는 종교인 - 이 있고, 입만 열면 엉터리 담론으로 국민들을 기만하는 정치인들이 있다.

그렇기에 더더욱 이 책의 일독을 권한다. 온전히 내 것이 되는 흥미로운 지식과 함께, 이 사회를 조금이라도 밝게 해줄 진지한 성찰까지. 칼 세이건이 마지막으로 주는 최고의 선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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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밀밭의 파수꾼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47
J.D. 샐린저 지음, 공경희 옮김 / 민음사 / 2001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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워낙 요란한 수식이 많이 붙어 있는 책이라 이제야 이 책을 읽게 되었다는 것이 조금은 쑥스럽기도 하다. 저자인 제롬 데이비드 샐린저가 최근에 나온 영화 '파인딩 포레스터'에 나오는 포레스터의 모델이며, 존 레논의 암살범인 마크 채프먼이란 자가 이 책을 탐독하였다는 사실, 게다가 수많은 아티스트들에게 영감을 준 작품이라는 것까지. 정말이지 이 책을 둘러싼 이야기는 소설만큼이나 흥미롭다.

여하튼 뒤늦게나마 나는 이 책을 읽게 되었고, 금세 콜필드를 사랑하게 되었다. 만약 내게 그런 동생이 있다면, 그를 이해하기 위해 애썼을 것이고 많은 이야기를 나누고 싶어했을 것이다. 그의 순수한 영혼이 상처받지 않도록 지켜봐 주고 보듬어 주고픈 마음이 들었던 모양이다.

하지만 정작 소설 그 자체는 그처럼 화려한 수식과 찬사를 버거워할 것만 같다는 느낌이 들었다. '현대의 고전'이니, '최고의 문제작'이니 하는 육중하고도 가식적인 수사는 콜필드를 질식시켜 버릴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그저 여행길에 우연히 동행하게 된 한 권의 책이었다거나, 도서관의 서가 사이를 걷던 중 특이한 제목으로 인해 나의 발길을 붙잡은 책이었다면 좋았을 것을… 그래서 운명처럼 발견한 나만의 보석으로 남을 수 있었다면, 더욱 애틋했을 것이다. 물론 이 책이 처음 나온 50년 전의 뉴요커들에게 이 책은 그러한 의미로 발견되었겠지만 말이다.

만약 내가 이 책을 청소년시기에 읽었더라면 더더욱 열광했을 것이다. 어쩌면 콜필드처럼 낙제라도 받고 싶어 안달이 났거나, 짐을 싸서 가출을 했을 지도 모를 일이다. 꽉 막힌 일상과 허위로 가득찬 어른들의 세계에서 난 나름대로 예민하고 냉소적인 아이였으니까.

하지만 대학교 1,2학년 때 이 책을 읽었더라면, 부잣집 도련님의 방랑기 쯤으로 치부해버렸을 것이다. 세상은 이렇게 모순으로 가득 차 있는데, 그의 고민이란 것은 유치하기 짝이 없다. 공원의 호수가 얼어붙으면 오리들은 어디로 갈 것인가 하는 한심한 질문들…

왜 그는 세상의 모든 것들을 냉소하고 의심하면서도, 자신은 좋은 진짜 가죽 가방을 들고 다니는데, 친구는 낡은 비닐 가방을 들 수밖에 없는가에 대해서는 의문을 품지 않는 걸까? 그가 품은 좋은 생각들이란 기껏해야 싸구려 동정심에서 비롯된 것은 아닐까? 그것이 바로 부르주아의 한계를 보여주는 게 아닌가? 뭐, 이런 식의 시덥잖은 생각을 하며 스스로를 대견해 했겠지.^^;

아무튼 이십대 중반의 끝을 향하는 지금에야 난 이 책을 읽었고, 나름대로 괜찮은 시기라고 생각된다. 이 책은 일상에 찌들어 점점 '어른'이 되어가는 나에게 잊혀졌던 버릇 하나를 일깨워주었다. 세상의 모든 사물을 '순수한 것'과 '때묻은 것'의 영역으로 나누는 경직된 이분법. 한동안 난 이 이분법을 쓰는 것을 잊고 있었던 것이다.

어른이 되면서부터 난 세상의 사물 혹은 사람을 '강한 것'과 '약한 것'으로 나누었다. 어쩌다 책을 읽거나 토론을 하게 되면, 세상을 '옳은 것'과 '그른 것'으로 나누기도 했다. 하지만 정말이지 세상을 '순수'와 '때'의 영역으로 나누는 일은 어렵고도 의미 없는 일이다. 모든 것은 적당히 때묻었고, 타락하였으며, 나 또한 마찬가지이기 때문이다.

순수한 것을 찾으려는 노력을 수포로 돌아갈 것이고, 난 역시 '순수한 건 이제 남아있지 않아'라는 결론에 도달할 것이다. 콜필드처럼 호밀밭에서 뛰노는 아이들을 지키고 싶다는 상상을 펼쳐보지도 못한 채, 마지막 남은 순수한 것들을 지키기 위해 떠날 채비를 하는 용기도 부려보지 못한 채 말이다.

그래서 난 오늘, '가식'이 살아가는 능력이 되고, '위선'이 자신을 그럴듯하게 가리는 포장이 되는 세상에서 콜필드의 고집스런 이분법을 가슴에 되새긴다. 일관성을 지키겠노라는 약속은 차마 하지 못하지만, 영원히 추구해야 할 대상으로서의 '순수'를 가슴 한 켠에 품고 있겠노라고 남몰래 다짐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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버자이너 모놀로그
이브 엔슬러 지음, 류숙렬 옮김 / 북하우스 / 2001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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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을 보다가 우연히 아래분이 쓰신 서평을 읽게 되었습니다. 남성의 입장에서 이 책을 대했을 때 느꼈던 당혹감이나 의구심이 잘 드러나 있더군요. 제가 대단한 페미니스트는 아니지만, 아래분이 쓰신 <버자이너 모놀로그>에 관한 '냉소적인 평가' 혹은 '남성중심적 발언'에 대해 반론을 올리고 싶은 생각이 들었습니다.

우선 남성의 성기와 여성이 성기가 똑같이 대우받지 못해온 현실에 대해 말해야 할 것 같습니다. 누구나 똑같이 성기는 부끄러운 것으로 생각한다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은 부분도 큽니다. 태어나는 순간부터 남성의 성기는 공공연히 자랑스러운 것으로 떠받들어지지요. 어른들은 '우리 고추~'를 운운하며 남아들의 성기를 그대로 내놓은 채 키우잖아요? 여아들을 그렇게 키우진 않죠. 오죽하면 남근중심주의란 말이 있겠어요.

아이가 자라 사춘기가 되면 성교육을 시킵니다. 대표적으로는 구성애의 '아우성'을 보아도 그렇고, 남자 아이들의 성욕은 대단히 자연스러운 것으로 인정되죠. 그래서 사랑스런 아들을 위해 좋은 티슈를 사주라거나 하는 말도 서슴없이 합니다. 하지만 그에 비해 여자 아이들의 성욕은 아예 없는 것 혹은 음탕한 것으로 치부되죠. 보통 여자아이들에게는 자기 몸은 스스로 지키라거나, 순간의 유혹에 넘어가면 평생 지울 수 없는 상처를 남기게 된다고 이야기합니다.

아무튼 이와 같이 여자의 성은 수동적이거나, 은밀한 것으로 여겨집니다. 여성의 성기를 입에 올리는 것은 완전 금기시 되고, 그곳을 들여다보는 것도, 그곳을 통해 기쁨을 얻는 것도 비정상인 것처럼 몰아세우게 되죠.

하지만 더 큰 문제는 이렇게 여성의 성이 은폐되고, 죄악시되는 것과는 반대로 여성 자체는 늘 성적 대상으로밖에 존재하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우리를 둘러싼 모든 담론과 환경이 여성들에게 성적 욕망의 대상으로 존재하라고 명령합니다. 이번에 불거진 이영자씨의 다이어트 사건이나 온갖 종류의 미인 선발대회, 일상적인 성희롱, 성폭행 모두 같은 맥락이라고 할 수 있겠죠.

이 책은 이와 같이 여성이 자연스럽게 타고난 '성'은 숨기려하고, 남성의 욕망의 대상으로서의 '성'만을 부각시키는 왜곡된 사회의 통념에 당당히 반기를 드는 의미를 지닌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같은 '보지'를 이야기해도 말하는 주체에 따라 그것이 가지는 의미는 완전히 달라질 수 있습니다. 타인의 음흉한 시선에 비춰지기보다는 나의 입으로 나의 성을, 나의 성기를 직접 말하겠다는 의지이니까요. 노상 '버자이너'에 자신의 '페니스'를 꽂을 궁리만 하는 남성들 사이에서 살아가는 것은 '보지'라는 말을 백 번 듣는 것보다 훨씬 고되고 힘든 일입니다.

이 책은 무조건 '보지'를 말하기 위해 '보지'를 입에 올리진 않습니다. 그보다는 보지가 가진 욕망과 남성중심 사회를 살면서 보지가 겪어야 했던 수난에 대해 이야기합니다. 만약 보지가 그 소중함에 비해 부당한 대우를 받아왔다면 이를 바로잡아야 하고, 상처를 입어왔다면 이에 가해진 폭력으로부터 보호되어야 하겠죠. 그리고 이를 위한 첫 번째 단계로서 그것 자체에 대해 떳떳하게 이야기하는 것이 선행되어야 할 것입니다. 미흡하긴 하지만 버자이너 모놀로그는 바로 그러한 인식의 전환을 마련해주는 계기가 될 수 있었습니다.

반론이 되었는지 모르겠네요. 암튼 아래의 서평이 <버자이너 모놀로그>에 대한 구체적인 비판을 접할 수 있는 기회가 되었습니다. 또 다른 의견이 있다면 올려주시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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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annerist 2004-04-26 22:2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래 전, 텔레비젼에서 넘버3를 해 줄 때였습니다.그당시 기준으로는 최민식을 비롯한 등장인물들이 한 욕설 해대는 영화여서 그랬는지, 아니면 가족들 다 보는 주말의 명화 시간대 방영해서 그런지 교묘하게 대사 처리를 했더군요. 마동팔 검사(최민식)이 입에 달고 사는 '좆같다'는 말을 그 음절만 들어내서 '뭣같다'로 처리를 했습니다. '좆'이 들어가는 모든 대사를요. 고생도 가지가지들 한다 시니컬하게 영화를 끝까지 봤는데, 어느 한 장면에서 확 깼습니다. 영화 마지막 부분, 일본 야쿠자들과 한석규의 조직이 룸싸롱에서 단합을 다지며 멍게를 시키는 장면, 룸싸롱 조리사가 여기까지와서 멍게 시킨다고 투덜대며 말하죠 "씹새끼들" '좆'은 편집하고 '씹'은 나두는 편집기술에 비한다면, 송강호의 불사파 연기는 아주 우스운 것이더군요. -_-;

sunnyside 2004-04-27 09:4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와... 한국의 방송기술이 대단하군요. 기술이 아니라, 노가다의 문제인가요? ^^;

hanicare 2004-05-10 12:3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화가 나면 앞말이 뒷말에 걸려 넘어져버리고 정작 했어야 할 말을 못해준게 억울해 삼박 사일 속을 끓이는데,써니 싸이드님의 명쾌한 글 읽고 내 속이 다 시원해졌습니다.이거 어울릴지 모르지만...화이팅!(사족;닉네임이 자꾸 달걀후라이를 연상시킵니다^^;)

sunnyside 2004-05-10 20:5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앗, hanicare 님, 감사합니다. 그리고 반갑습니다. 저는 아주 달걀 후라이를 좋아한답니다. ^^

비로그인 2004-05-31 15:4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참 좋은 반론입니다. 제 생각에는 일종의 보호본능도 작용을 했으리라고 봅니다. 남성에 비해 상대적으로 약한것은 부정할 수 없기에 보호라는 차원에서 일어날 수 있는 일이라고도 보겠지만, 더욱 중요한것은 반대로 여성보다 강하다고 해서 성적으로 자유스럽다는것은 보호한다는 구실속에 내팽겨쳐지는 반대급부라고 볼 수 없다는 것입니다. 좀 더 정확하게 말한다면, 어떤 성적 대상이라는 전제는 남녀가 존재하는 이성 사회에서는 반반의 책임이고 반반의 몫일 따름인데 이상하게도 여성만 호기심이나 성적대상이 되고 은폐되어야 한다는 점입니다. 사실, 따지고 보면 공개적으로 말할 수 없는 은밀하고 아름다움을 간직하고 있기에 구태어 까발림이 속되어질 수 밖에 없는 것이라고 생각을하게 됩니다. 우리 나라만 그렇지 성에 있어서의 동등성은 인정이 되고 있는것들이고 다만, 남녀의 역할론에 비중을 두어야 할것 같습니다. 잠시 들렀습니다...
 
내셔널리즘과 젠더 - 비판총서 3
우에노 치즈코 지음 | 이선이 옮김 / 박종철출판사 / 1999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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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는 모처럼 약속 없는 일요일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동안 미뤄두었던 이 책을 읽었죠. 오늘 뒷부분을 마저 읽어야 하지만요.

읽으면서 한숨이 나더군요. 일본군 ‘위안부’ 문제를 그야말로 ‘올바르게’ 해결하기 위해서 피해야 할 오류와 함정이 얼마나 많은지… (이 책은 일본의 페미니스트인 우에노 치즈코가 썼는데요. 일본의 제국주의와 군 위안부 문제에 얽힌 민족주의 문제를 페미니즘의 시각에서 바라본 저술이랍니다.)

명칭부터 보세요. ‘위안부’라뇨, 누가 누구에게 ‘위안’을 준단 말입니까? 조선을 비롯한 식민지와 점령지의 여성들이 ‘위안’이라는 고상하기 짝이 없는 목적을 위해 전쟁터 이곳 저곳을 끌려다니며 성을 착취당했단 말입니까? 그게 무슨 봉사 활동이었습니까? 강간이고 폭력이었지… (그래서 시종일관 저자는 ‘위안부’라는 말에 따옴표를 붙이고 있습니다. 소위 위안부라 불렸다는 뜻이겠죠)

그렇다면 ‘정신대’란 말도 함부로 쓸 게 못되겠죠. 황국 병사들의 ‘정신건강’을 위해서 식민지 여성들이 봉사한 게 되니까요. 돈 있는 사람 돈으로, 힘 있는 사람 힘으로, 그리고 몸뚱아리 밖에 없는 여성들은 그 물화된 육체를 ‘신성한’ 제국주의 전쟁을 위해 바쳤단 그 말이 되겠죠.

저는 일본군 ‘위안부’ 문제를 일본은 가해자, 한국은 피해자라는 구도로 잘못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사실 별 생각이 없었다는 게 맞겠군요. -_-; ) 그래서 이 책을 던져주는 문제의식에 조금 혼란스럽기도 했죠. 저자는 일본군 ‘위안부’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싸워야 할 대상은 단지 일본 정부만이 아니라고 말합니다. 이 문제가 양국의 자존심을 건 싸움이나, 민족주의의 대결 양상으로 가선 안 된다는 것이죠.

문제의 핵심은 엄연히 ‘성 착취(혹은 성 노예 …)’이며, 이는 페미니즘에 입각한 보편적 인권의 잣대로 바라보아야 한다는 겁니다. 만약 한국의 가부장들이, ‘우리 처녀들의 정조를 빼앗아간 일본 놈들에게 본때를 보여주자’는 식으로 나온다면, 위안부 문제는 순간 한일 양국 가부장들의 재산권 싸움으로 전락하게 되는 것입니다. (우에노는 이 책에서 ‘정조’란 순전히 남성들의 재산권 개념이라고 말합니다.)

그러니까 ‘위안부’ 문제의 올바른 해결을 위해 싸워야 할 대상은 일본 뿐만 아니라, 한국의 가부장제이기도 한 것이죠. 그리고 이를 위해 연대해야 할 대상은 오늘도 곳곳에서 성 폭력과 착취에 시달리고 있는 세계의 여성들일 것입니다.

관심있는 분들이 꼭 읽어보셨으면 하는 책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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