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란 책
류이스 프라츠 지음, 조일아 옮김 / 문학동네 / 2021년 4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여기 "몇백 년 전에 살았던 사람들의 이름을 힘들게 외워서 뭐"하는지 도통 모르겠다며 "오백 년 전에 세상을 뜬 사람들의 인생이 나랑 무슨 상관이냐고!" 분노에 차서 외치는 소년이 있다. "갑작스럽게 많은 책들에 둘러싸"이면 "울렁증이 일기 시작"하는 레오는 역사 시험에 낙제를 하는 바람에 태어나서 처음으로 도서관에 간다. 과제물을 제출해야 하기 때문이다. 친구 리타와 아브람이 도와주겠다고 했지만 이름도 처음 들어보는 '알렉산더 대왕'에 대한 보고서를 과연 끝낼 수 있을지 미지수다. 


레오는 "책 한 권을 처음부터 끝까지 제대로 읽어본 적이 지금까지 한 번도", "단 한 번도" 없는 아이다. 책에 대한 레오의 생각이다.


우리 학교에서는 책을 읽으라고 강요하지 않아요. 우리집에서도 마찬가지고요. 게다가…… 누가 이런 걸 읽겠어요. 한눈에도 엄청 지루할 것 같은데. (…) 이건 전부 상상에 불과한 거잖아요. 현실과 거리도 멀고,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내용인데!

pp.23-24

"단 한 번도 책으로 두 손을 더럽힌 적 없"는 아이는 "책 한 권 제대로 읽지 않고서도 중학교에 입학한 스스로가" "누구도 감히 이루지  못한 전무후무한 일"을 해냈다고 생각하고 있다. 


책에 대한 레오의 생각, 너무 과장된 걸까. 독서인구가 줄어든다는 통계에도 불구하고 도서관에 갈 때마다 책을 빌려가는 아이들을 본다. 부모와 함께 바퀴 달린 가방을 가지고 와서 도서관 책을 한 가득 대출해가는 아이들은 독서 인구 통계에서 빠진 걸까. 내가 본 도서관 이용 인구 자체가 적은 걸까. 여튼저튼 레오처럼 책과 담을 쌓고 게임만 하는 아이들도 있을 거다. 이 아이들은 『반지의 제왕』도 모르고 『피터 팬』, 『끝없는 이야기』, 『모모』, 『보물섬』을 모를 것이다. 레오처럼. 


도서관에서 말썽을 부린 벌로 책정리를 하던 레오는 파란색 표지의 책을 발견한다. 도서관 인장도 안 찍혀있고 데이터베이스에서도 검색이 안되는 아주 오래된 책이다. 호기심이 발동한 레오는 책을 읽어보기로 한다. "다섯 페이지 버티면 대박"이라는 심정으로. 책 속 사건이 일어나는 날짜가 우연히도 레오가 책을 읽고 있는 날과 같다. 내용에 대한 궁금함은 더 커지고 침대 속 독서는 계속된다. 파란 책은 역사를 소재로 한다. 관심없는 주제지만 흥미로운 사건이 발생하면서 읽기를 멈출 수 없다. 레오는 잠을 참으며 책 속 이야기에 빠져든다. 


『파란 책』의 작가 류이스 프라츠는 미술과 고고학을 공부하고 역사 연구 활동과 함께 교사 생활을 한 작가답다. 책 속 역사 이야기는 기원전 6세기 페르시아의 키루스 대왕부터 알렉산드로스의 시대를 지나 4차 십자운 운동이 있었던 1204년까지 연결돼 있다. 바르셀로나 출신 십자군 기사와 수도사들이 숨겨둔 알렉산더 대왕의 보물을 찾아가는 과정은 인디애나 존스의 모험을 연상케 한다. 모험의 장소들 또한 흥미진진하다. 스페인 바르셀로나 카탈루냐 도서관에서 시작해 이탈리아, 그리스의 아토스 산의 수도원을 들러 고대 페르시아 키루스의 도시 파사르가대까지 등장한다. 보물의 비밀을 푸는 열쇠가 곳곳에 숨겨져 있고 아이들은 책 속 보물찾기 여행으로 뛰어든다. 생각만으로가 아니라 진짜 온 몸으로.


책을 안 읽던 아이는 어디갔을까. 레오는 이야기 속에 빠져 어떻게든 시간을 쪼개 책을 읽고 책 속 주인공등과 사건을 해결하려고 한다. 자신의 관심 분야를 찾은 아이들이 책을 읽을 때의 모습을 그린 듯 보인다. 잠도 안자고 학교 수업 시간 중에도 몰래 책을 읽는다. 그러다 선생님에게 책을 빼앗긴 후엔 뒷 이야기가 궁금해 못견뎌한다. 아이는 등장인물과 이야기하고 위험을 경고하고 실마리를 던진다. 독서의 가장 바람직한 과정을 레오는 단 한 권의 책으로 배워간다. 


알렉산더의 모든 보물 가운데 진짜는 무엇일까. 금은보화 더미 속에서 발견된 파피루스다.


궤짝 안에는 고대 그리스의 저술가들이 남긴 작품들이 고이 간직되어 있었다. 헤시오도스와 소포클레스, 아이스킬로스의 주옥같은 작품들과 헤로도토스의 역사서, 스트라본의 여행기가 고스란히 보관되어 있었다. 뜻밖의 발견에 폴츠는 말을 잇지 못했다.

'아! 이것 봐……" (…) "이거야말로 알렉산더대왕의 진짜 보물이야."

p.421

진짜 보물은 책이다. 이야기다. 사람을 빠져들게 하고 움직이게 하고 모험하게 하는 바로 그 책이다. 다른 금은보화는 모두 적절한 용처에 쓰이지만 책들은 바르셀로나로 고이 모셔진다.(음,,,이란에서 발견한 유물을 아무런 거리낌 없이 자국으로 운송하는 일은 아무리 소설이라도 마음이 불편했지만 소설은 소설로만 읽자.)


사실 이 책의 첫 대목에서부터 깜짝 놀랐다. 먼저 읽고 있었던 책이 『비잔티움 연대기』인데다 십자군 운동 부분이었다. 니케포루스 포카스 황제의 후원으로 963년에 성 아타나시우스가 아토스 반도에 라브라 수도원을 지었다는 대목을 읽었던 참인데 『파란 책』의 첫 장면이 4차 십자군이 콘스탄티노플을 약탈하는 장면에서 시작해 거기 있던 수도사가 보물 지도의 일부를 라브라 수도원에 숨기는 과정이 이어졌다. 『파란 책』 속의 폴츠와 로마니 교수처럼 누군가 책의 안과 밖을 오가며 나에게 말을 걸고 있는 게 아닐까 상상해봤다. 책 속으로 들어간 레오가 책 밖의 독자에게 도움을 요청할 때 마치 내가 대답해줘야 할 것같은 기분에 휩싸였다. 


낡은 표지의 『파란 책』을 읽고 난 후 레오는 말한다. "책에는 뭔가 특별한 것이 있다"고. 그 다음 말이 더 마음에 들었다. 


"역사는 환상 그 자체죠."

p.446


책과 역사에 대한 최대치의 환상이 『파란 책』안에 담겨 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방구석 시간 여행자를 위한 종횡무진 역사 가이드
카트린 파시히.알렉스 숄츠 지음, 장윤경 옮김 / 부키 / 2021년 5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시간여행자가 돼 원하는 어느 시공간이라도 가볼 수 있다면 언제 어디를 선택할 것인가. 로마제정기의 원형경기장, 인신공양이 행해지는 지첸이사, 수메르 문명시대의 우르크를 가보고 싶다고, 그리고 여기도 저기도 또 거기도 가보고 싶다고 말했을 것 같다. 영화나 소설 속에서 볼 수 있는 시간여행은 쉽고도 흥미진진했으니까. 그러나 이 책 『방구석 시간여행자를 위한 종횡무진 역사 가이드』를 보고 나서 생각을 좀 바꾸게 됐다. 상상 속의 시간여행이 아닌 실질적인 면을 고려한 시간여행은 고려할 것 투성이다. 마치 처음 떠나는 해외여행처럼, 아니 그 보다 몇 배 더.

 

책은 "시간 여행을 떠날 수 있으며, 당연히 여행 가이드도 필요한 세계"를 상정하고 있다. 빅뱅 이전의 시간부터 바로 십 여년 전까지 원하는 어느 시대든 (이론적으로는) 시간 여행이 가능하다. 그렇다면 과거의 어느 시점으로 여행을 가게될 경우 필요한 준비 사항은 무엇인가. 책에는 물적, 심적 준비물을 세심히 안내해 준다.

 

우선 어떤 테마로 여행을 떠날 것인가에 따라 필요한 준비물이 달라진다. 다양한 구경거리가 있는 만국박람회를 갈 수도 있고 느긋한 과거의 휴양지에 들를 수도 있다. 특정 과학자가 살던 시대로 가서 중요한 발견의 순간을 지켜보거나 공룡 왕국에서 스릴을 만끽할 수도 있다. 각 여행지 별로 숙지해야할 사항이 다르다. 만국박람회를 방문하기로 했다면 각 박람회에 특이할만한 전시물이 공개되는 시기를 알고 떠나야 한다. 이슬람 지배기의 아름다운 그라나다를 제대로 즐기려면 흑사병 유행기를 비껴서 가야한다. "지상 낙원"으로 착각할 만한 이 도시에서는 여성들이 "주변 그리스도교 지역들보다 현저히 많은 권리를 누"렸고 "당대의 여성들에게 어떤 영향을 미쳤는지" 살펴볼 수 있다. 18세기 후반 나폴리 여행에서는 악취에 너그러워져야 한다. 지금은 잊혀진 나라 1990년대 이전 동독에 가게될 경우엔 국가 보안부 '슈타지'의 감시에 걸리지 않도록 주의해야 한다. 공룡시대에 간다면 주변의 움직이는 생물 뿐 아니라 식물도 절대 만지면 안된다. 어떤 식물이 어떤 독성을 가지고 있고 어떤 작용을 하는지 밝혀진게 없다. 어느 시대 어느 장소를 가더라도 위험이 도사리고 있으니 주의를 게을리하면 안된다.

 

저자는 여행지의 특이한 상황들을 설명하면서 자연스레 역사이야기를 풀어낸다. 지금 시각으로 봐선 신기해 보이는 일들이 과거에는 상식이고 일상이었다. 한 사람의 여행자가 겪을 수 있는 일들을 펼쳐놓다보니 각 시대를 세밀하게 관찰하게 된다. 거시사만 봐서는 알 수 없는 미시사의 매력을 맛보게 되는 것이다. '5장 중세 , 씻지 않는 사람들을 위한 낙원'에서는 중세적 삶에 대한 진한 향취를 가늠할 수 있다. "중세에 가서 익숙해지기까지 유독 시간이 드는 분야는 위생"인데 "중세의 사람들은 대체로 씻지 않"기 때문이다. "목욕이 널리 사랑받는" "중세"는 신화에 불과하다는 말이다. 중세인들은 심지어 "청결함"이 "결혼한 여성의 정절을 망치고 귀족 가문의 딸을 유혹"한다고 생각했다. 책은 위생에 예민한 여행자라면 차라리 중세 유럽보다는 이슬람 국가를 고려해보라고 권한다. 중세 아이슬란드의 민주주의적 면은 의외이기도 했다. 이들은 여성의 토지 및 서적 소유권을 인정했고 이혼 후 지참금 반환을 청구할 수 있었으며 남편없이 경제활동을 할 수 있었다. "눈에 잘 보이는 커다란 열쇠"가 여성 여행자에게 추천되는 필수품이라는 대목은 같은 맥락에서 흥미로웠다. 여성이 자신의 경제력과 지위을 보여줄 수 있는 장식이었기 때문이다.

 

책에는 단기 여행자뿐 아니라 과거에 정착을 고려하는 사람들을 위한 지침도 들어있다. 많은 사람이 환경이 오염되기 이전 시대를 그리워한다. 건강과 관련해 과거로 가고자 하는 사람들은 그 시대의 의료기술이 발전하지 않았음을 고려해야 한다. 또 발전소가 없었던 시절에는 난방이 어려워서 심지어 베르시이유 궁의 왕족의 식탁에서도 식수가 얼 정도임을 미리 계산에 넣어야 한다. 저자는 추위를 피할 수 있는 거주지로 한국을 추천한다.

 

시대와 계절에 상관없이 언제든 따뜻하길 워한다면 한국에 정착하는 걸 고려해 보자. 이 나라에는 '온돌'이라는 바닥 난방이 대략 7000년 동안 자리한다.

p.206

 

'3부 시간 여행자를 위한 필수 여행 정보'에서는 좀더 실질적인 정보가 제공된다. 각 시대에 적절한 '예절과 태도에 대하여', 시간여행자라는 정체성이 탄로나지 않기 위해 필요한 자기 소개법, 금전관계, 의상, 이동과 숙박 등. '여러 개의 날짜와 시간'에서 각 국가 별 기준 날짜가 다른 점이 인상적이었다. 영국의 1366년 1월이 피사에서는 1367년이고 포루투갈은 1405년이었다. 이 시대 각국은 어떻게 외교적 약속을 잡았을까. 물은 아무리 깨끗해 보여도 어느 시대던 무조건 끓여 먹어야 하고 질병에 걸리거나 다쳤을 경우 정말 위급한 경우를 제외하곤 20세기 이전의 의학적 처치를 받지 말기를 권한다.

 

시간여행자 주의사항 중 최고는 "무슨 일이 닥치든 가능한 한 과거에서 죽지 않도록 노력하자"다. "활화산의 분화구로 떨어지자 않는 한, 이 잔재(현대식 신체 보철물들)들은 나중에 혼란을 일으킬 것"이기 때문이다. 이쯤되면 시간여행이 얼마나 조심스러운 일인지 깨닫게 된다. 여행 가이드 책 구경으로 만족하며 방구석의 안락함을 즐기는 것도 괜찮은 대안이라는 생각이 든다.

 

『방구석 시간여행자를 위한 종횡무진 역사 가이드』 는 시간여행을 전제로 역사의 소소하지만 흥미로운 대목들을 짚어준 책이다. 정기문 교수의 추천의 말이 이 책을 설명하기에 딱 맞춤하다.

 

주류 역사의 편견을 깨는 새로운 시각이 돋보인가. 흥미 있게 읽을 수 있는 작은 소재들을 활용해 주류 역사학이 소홀하게 여기는 주제들을 다루었다. 참신한 시각, 놀랍도록 세밀한 디테일이 돋보이는 책이다.

정기문, 군산대학교 역사 철학부 교수 추천의 말 中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레모네이드 할머니
현이랑 지음 / 황금가지 / 2021년 4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상큼한 노란색 표지에 깜찍한 일러스트, 발랄한 제목, 할머니 탐정과 꼬마 조수가 주인공이라 하여 어린이 책인 줄 알았다. 아니다. 현이랑 작가의 『레모네이드 할머니』는 추리소설이다.


“그럼 이제 할머니는 탐정 ‘레모네이드’예요. 난 조수 ‘꼬마’고요.”

p.61


탐정과 조수 콤비. 코난 도일의 셜록 홈즈와 존 왓슨?


사건이 일어나는 장소는 도란마을이다. 도란마을은 돈이 많은 노인들이 입주하는 고급 치매 요양 병원이다. 레모네이드 할머니는 두 달 전에 도란마을에 입주했다. 소문에 할머니는 도란마을 땅 소유자였고 굉장한 부동산 재벌이라고 한다. 여섯 살인 꼬마는 도란마을에서 일하는 서이수 의사의 아들이다. 서이수 의사와 함께 도란마을로 출근하는 꼬마는 레모네이드 할머니를 따라다니기로 한다. 2주 전 쓰레기 처리장에서 사건이 일어났다. 레모네이드 할머니는 요양병원 생활이 지루해지던 차에 사건에 흥미를 느끼고 조사를 한다. 꼬마는 할머니를 따라다니면서 함께 범인을 찾게 된다. 아들을 보호하려는 서이수 의사도 사건에 휘말린다.


단서를 풀어가며 범인을 찾아내는 흥미진진한 추리소설을 기대했다. 사건도 있고 단서도 있는데, 추리에 퍼즐을 맞출 때 맞는 조각을 찾아내는 것 같은 기쁨은 적다. ‘자기가 보고 싶은 걸’ 쓴다는 현이랑 작가는 추리보다 이 사회의 어두운 일면을 보여주는 것에 더 무게를 둔 것 같다.


『레모네이드 할머니』가 들려주는 이야기는 새콤달콤하고 시원한 레모네이드와는 거리가 멀다. 이 사회에 존재하지만 어린이와 청소년에게 보여주고 싶지 않은 현실을 모아서 한 통에 담은 인스턴트 통조림 같다. 부정부패와 비리 같은 사회의 어두운 일면을 보여주는 것은 의미 있지만 비판과 대안을 구하는 고민을 다루지 않은 것은 아쉽다.


부정부패와 비리를 보여주기 위해 비속어와 비하표현을 많이 써야하는가도 의문이다. 알맞은 곳에 적절하게 쓰인 욕은 통쾌한 느낌을 준다. 그러나 담고 있는 내용과 별개로 비속어와 비하표현이 난무하는 글을 읽는 것은 거북하다.


빛나고 아름다운 청춘. 잘 모르는 사이인 나이 든 사람들이 20대인 나를 만나면 늘 하는 말이다. 그 말을 들으면 늘 나는 어리둥절해지곤 한다. 누구나 사는 건 다 엿 같은데. 그런 말을 들을 때마다 사는 게 엿 같다고 느끼는 내가 이상한 놈인 것 같다.

p.130


“네 아빠가 너랑 네 엄마한테 무슨 짓을 했던 그건 네 잘못이 아니다. 넌 그것만 알고 있으면 돼.”

p.223


“아무리 돈으로 보상을 해 준다 해도 그 사람이 받은 상처는 어쩔 수 없을 테니까…….”

p.225

『레모네이드 할머니』에는 고개가 끄덕여지는 문장들이 곳곳에 있다. 그럼에도 이 말들이 식상하게 느껴지는 것은 소설의 제목과 추리와 문장이 잘 어우러지지 않기 때문일까 싶다. 덜 녹은 가루가 바닥에 가라앉고 신맛과 단맛과 물이 조화롭지 못하게 한 컵에 떠다니는 인스턴트 레모네이드 같지만 문장과 구성의 시원스러운 맛은 즐길만한 추리소설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나는 이렇게 읽었다 - 각 분야 전문가가 말하는 영역별 책읽기
이권우 외 지음 / 경희대학교출판문화원(경희대학교출판부) / 2021년 4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좋은 책은, 그리고 진정한 독서는 '정보' 제공에 그치지 않는다. 고정관념을 깨뜨리고 자극하여 생각하도록 만든다. 그렇게 단기적으로는 우리의 생각을, 장기적으로는 인생을 바꾼다.

p.8


책을 어느 정도 읽다보니 내가 잘 읽을 수 있는 영역과 잘 알고 싶지만 도무지 알수 없는 영역이 어느 정도 분간된다. 앞의 구분에 포함되는 것은 소설, 역사이고 뒤쪽 구분에 포함되는 대표적인 영역은 시와 철학이다. 잘 알고픈 마음과 달리 시는 아무리 읽어도 맥락이 포착되기 힘들고 철학의 경우는 각 분파의 주장이 읽고 나면 모두 뒤섞여버리는 증상을 보인다. 시는 과감히 읽기를 포기했지만 철학은 어떻게든 이해하고 싶은 마음이 크다. 어떤 책이든 잘 읽어야 잘 이해할 수 있지 않을까. 그런데 그 '잘'이란 걸 어떻게 하면 성취할 수 있단 말인가. 인생을 바꾸는 거창한 독서의 효과는 미래의 일로 미루고 일단 '잘' 읽는 것부터 시도해보고 싶다.


경희대학교 출판문화원에서 나온 『나는 이렇게 읽었다』 는 각 분야 전문가가 알려주는 책읽기의 방법을 담은 책이다. 책의 분야는 교양, 문학, 인문고전, 사회과학, 자연과학, 예술로 나누었다. 전문가들은 "각자의 체험에서 시작하여 특정 분야의 책을 읽어야 하는 이유, 그 영역의 책을 읽는 방법, 추천 도서 순으로" 각자의 비법을 전수하고 있다. 이권우 도서평론가가 교양 영역을 맡고 나머지 다른 영역은 경희대 후마니타스 칼리지의 교수진이 담당했다. (이권우 도서평론가도 경희대 국문과 졸업생이다.) 이권우 도서평론가의 글은 『책읽기의 달인 호모부커스』와 『각주와 이크의 책읽기』에서 읽은 적이 있다. 나름의 위트와 쉬운 글쓰기였다는 기억이 있다. 『오래된 연장통』으로 알게된 자연과학 영역을 저술한 전중환 교수의 글도 기대됐다.


분야별 읽는 법은 각 저자의 독서 경험에 대한 고백으로 시작한다. 이권우 저자는 초등학교 도서관에서 영혼의 충만함을 느꼈고, 고봉준 교수는 직업으로서의 읽기와 여가로서의 읽기를 비교한다. 인상적인 서두는 자연과학 담당인 전중환 교수의 것이었다. 전중환 교수는 대학 새내기 시절 전공 분야 책임에도 『이기적 유전자』를 이해하기 힘들었다고 적었다. 나중에 배경 지식이 많이 쌓인 후 원서로 읽었을 때 이 책이 "수정처럼 투명하게 잘 쓰인 책임을 알게" 됐다고 한다. 전중환 교수는 읽기가 쌓이는 효과에 대해 말하고 싶었는지 모르겠지만 나는 번역의 문제가 떠올랐다. 처음 읽을 때 영어 원서를 읽었어도 이해하기 어려웠을까. 나중에 읽을 때 한글 번역본으로 읽었다면 원서로 읽을 때만큼 명징하게 이해할 수 있었을까. 의문이다.


교양 도서는 "지식의 기초체력을 키우는" 책이며 "좀 더 넓은 분야를 아우르고자" 읽는 책이다. 저자는 자신의 수준에 맞는 책을 골라 읽되 속도전을 경계하라고 말한다. "책제목을 읽으면서 그 책의 전체 주제를 짐작"해본 후 서문을 읽고 번역서인 경우 번역자의 후기를 읽으라고 권한다. 목차 또한 꼼꼼히 살필 부분이다. 책 내용 요약의 결정판이기 때문이다. 모티머 애들러의 『생각을 넓혀주는 독서법』에 근거해 분석하며 본문을 읽는 방법도 소개한다.


고봉준 교수는 문학을 읽어야 이유를 "타인의 삶에 다가"가기 위해서라고 말한다.


문학은 우리를 타인의 삶으로 데려간다. (…) 문학이 우리에게 타인에 대한 완전한 이해를 가져다주는 것은 물론 아니다. 그렇지만 최소한 타인에게 가장 근접한 지점까지 데려가는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p.61


작품에서 느낀 "공감"과 "감동"은 "타인에 대한 연민이나 동정과 달리 타인의 삶과 나의 삶을 겹쳐 놓"는 일이다. 타인의 삶을 경험하면서 '나'를 성찰하는 능력을 키우는 것이 문학을 읽는 이유다. 


소설을 제대로 읽기 위한 방법은 세 가지다. '첫 문장'에 집중할 것, 작품이 겨냥하는 바를 발견할 것, 작가가 말하지 않는 것과 제목에 주목할 것. 


작가는 말하지 않는 방식으로 말한다. 이 때문에 문학작품에서는 작가가 말한 것보다 말하지 않은 것, 말할 수 있음에도 끝끝내 침묵한 것을 아는 일이 중요하다.

p.73


인문고전 읽기를 소개한 전호근 교수는 의외의 발견이었다. 서양고전 쪽으로 편독이 심한 터라 알지 못했던 저자다. 인문고전 읽기의 방법은 둘째치고 저자의 문맥 구성과 문장이 정말 좋았다. 저자는 "책을 읽을 때 상상력이 커지고 자유도가 높"아진다며 다른 매체와 비교되는 책읽기의 장점을 강조한다. "모름지기 책이란 천천히 읽어야 매일같이 읽을 수 있고 제맛을 느낄 수 있는 법"이라는 말은 깊이 새겨야 할 경구다. 


저자는 "고전의 진정한 힘"이 "역사 속에서 독자들을 만남으로써 시대마다 새롭게 태어나는 책"이기 때문이라고 쓴다. 때문에 역사적으로 참고할 만한 해설이 많고 저자의 의도를 명확히 하기위해 해설을 함께 읽으라고 권한다. 그리고 매우 적확한 사례를 제시한다.


엉뚱한 소크라테스를 만나면 악을 정당화하는 오류를 범하게 되고 《논어》를 잘못 읽으면 나라를 팔아먹는 배신을 저지를 수도 있다. 실제로 어떤 이(윤봉길)은 《논어》를 읽고 나라를 위해 목숨을 바쳤는데, 어떤 이(이완용)는 《논어》를 읽고 나라를 팔았다. 인문고전을 읽을 때 길잡이가 필요한 까닭이다.

p.104


'사전을 옆에 두고 읽어라', '반복해서 읽고 필사하고 머릿속에 기억하라', '눈으로만 읽지 말고 입으로 소리 내어 읽어라', '입을 넘어 몸으로 읽어라', '책을 덮고 탄식하거나 눈물 흘릴 줄 알아야', '나를 성찰하며 읽어라', '멋진 문장을 찾아라', '자료형 고전은 빠르게 읽어라', '비판하면서 읽어라', '읽었으면 읽은대로 실천하라', '좋은 스승을 찾아 배워라' 등이 저자가 제시한 인문고전 읽기의 방법이다. 그중 무엇보다 '좋은 벗을 찾아 함께 읽어라'라는 대목이 머리에 박혔다. "새로운 세상이 열"리는 책읽기의 방법이라니 누구나 한 번 도전해봐야 하겠다. 


좋은 벗을 얻어 함께 수행할 수 있다면 인생의 모든 것을 이룬 것이다.

-석가모니

p.117, 


이병주 교수는 독서를 "나와 우리의 삶을 읽어내는 과정이자, 삶에서 비롯된 질문의 답을 찾아가는 지난한 과정"이라고 정의했다. 사회과학도서 읽기의 방법을 실제 사회 현상의 사례를 들어 설명한다. 사회과학도서를 제대로 읽기 위해서는 '저자의 입장과 질문 파악하기', '개념 이해하기, 개념화 과정 비판적으로 이해하기', '사회를 고정된 실체가 아니라 과정으로 이해하기, 사회과학책의 내용을 구체적인 장면으로 그려보기' 과정을 거쳐야 한다. 아주 진지한 책읽기에 관한 제언이다. 사회과학 책을 읽을 때 저자의 입장을 반드시 고려해야 한다는 대목이 인상에 남았다. 사회과학은 객관성을 찾는 자연과학과 달리 인간 사이의 현상을 또 다른 인간이 연구하기 때문이다. 기억하고 적용해야할 지점이다.


전중환 교수의 '자연과학도서 읽는 법'은 가장 경쾌한 장이다. 서술태도가 무겁지 않아 앞 부분을 읽으면서 독서에 부여했던 큰 무게를 좀 덜어낼 수 있었다. 특히 과학도서를 읽는 독자를 위로하는 문장이 반가웠다.(눈물 날뻔 했다.)


평소 교양서적을 상당히 읽는 여러분이 생전 처음으로 과학교양서를 집어 들었는데 도대체 무슨 말인지 모르겠다면, 이는 여러분의 잘못이 아니다. 그건 저자나 번역자의 잘못일 확률이 높다.

p.203


심지어 "전문용어를 잔뜩 섞어가며 자기주장을 길게 늘어놓는 과학책은 집어 던지시라"며 "여러분은 하나도 잘못한 것이 없다"고 말해준다.(그래, 던지면 되는 거였다!) 


저자는 수전 와이즈 바우어의 『독서의 즐거움』에서 독서의 세 단계를 차용해 자연과학도서 읽기에 적용했다. 이해단계에서는 객관적으로 해석하는 책과 저자의 이론을 내세우는 책을 구별해 읽을 것을 권하면서 개요읽기 번역서의 경우 번역자와 한국어판 제목을 확인하고 이해가 안되더라도 끝까지 읽으라고 말한다. 평가단계에서는 핵심 주제를 한단락으로 정리해보고 저자의 요약에도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 은유의 경우, 원관념과 보조관념이 공유하는 특성에 주의해야 하며 저자의 가설을 뒷받침하는 근거가 적절한지 살펴야 한다. 의견 표현 단계에서는 같은 주제를 다룬 다른 책과 비교해 읽기를 제시한다.


'예술도서 읽는 법'을 담당한 윤민희 교수의 독서법에서 주목할 부분은 '예술도서의 맥락 읽기'다. 저자는 다섯 권의 도서를 중심으로 예술도서의 맥을 짚는 방법을 소개한다. 서양미술사와 한국미술사, 1인 예술가를 다룬 모노그래프, 유명 예술도서를 모은 책, 미술 작품 분석 방법론과 글쓰기에 대한 책의 구성과 내용을 서술한다. 


저자들은 "독서에 있어 이 책에 제시된 내용이 유일한 방식이 아니라 첫 번째 방식으로 받아들여지기를" 바라고 그 이후에는 "독자 스스로 자신만의 책 읽는 방법"을 찾기를 권한다.  각 저자가 각 장의 말미에 써놓은 주옥같은 필독서들만 다 읽어도 책읽기에 대한 목마름은 어느 정도 가실 듯하다. 그 목록은 아주, 아주 길고도 아름답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4)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코요테의 놀라운 여행 다산책방 청소년문학 13
댄 거마인하트 지음, 이나경 옮김 / 놀 / 2021년 4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기억하고 슬퍼하는 게 잊어버리는 것보다 훨씬 나은 거 같아요.

p.270


댄 거마인하트 장편소설 『코요테의 놀라운 여행』이 다산북스 ‘놀 청소년 문학’으로 2021년 4월 29일 출간되었다. 소설은 출간된 해에 아마존 올해의 어린이책으로 뽑혔으며, 2019년 미국학부모협회 권장도서 픽션 부문 금메달을 수상했다.


책은 버스를 타고 미국을 여행하는 368페이지의 로드 트립 소설이다. 북아메리카 평원에 서식하는 여우보다 크고 늑대보다 작은 개과에 속하는 포유류 코요테가 여행을 한다? 아니다. 댄 거마인하트 소설 속 코요테는 ‘대충 다섯 달쯤 더 있으면 열세 번째 생일이 되는’ 해진 청바지와 얼룩덜룩한 흰 티셔츠를 입고 청바지 벨트까지 머리를 땋은 주인공의 이름이다. 이름하여 코요테 선라이즈.


코요테 선라이즈는 학교에 가지 않는다. 학원에 가지 않는다. 숙제도 물론 없다. 로데오가 구매 후에 개조한 56인승 스쿨버스가 집이다. 로데오와 코요테 선라이즈는 스쿨버스를 타고 항상 움직인다. 목적지는 없다. 가고 싶은 곳, 먹고 싶은 음식이 생각나면 고속도로를 달린다. 매일이 자유롭고 재미있고 신나는 모험이라고?


나는 작별이 뭔지 안다. 그리고 작별이 싫다. 가장 좋은 작별은 안녕이라고 말하지 않는 것이다.

p.57


코요테 선라이즈는 친구가 없다. 놀면서 책이야기도 하고 비밀도 나누고 더 친해지면 좋을 아이를 만나도 곧 작별해야 한다. 아빠인 로데오를 아빠라고 부르면 안 된다. 이름을 코요테 선라이즈로 바꿔야했다. 로데오는 엄마와 언니와 동생 생각을 하는 것을 금지했다. 오 년 전 떠난 집으로 돌아가는 것도 금지였다. 코요테 선라이즈에게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일까?


『코요테의 놀라운 여행』은 어느 날 밤 댄 거마인하트 작가의 머리를 스친 우울한 공상에서 탄생했다고 한다. “딸과 단둘이 집에 있는데 그런 생각이 들었다. 만약 나머지 가족들의 귀갓길에 그들에게 끔찍한 일이 생긴다면 나와 이 아이는 어떻게 되는 걸까? 무너진 인생을 과연 돌릴 수 있을까?” 이 책은 그런 질문들에 대한 작가의 답이라고 한다.


어느 토요일 할머니에게 포플린 스프링스에 있는 샘프슨 파크가 없어질 거라는 이야기를 듣는 순간 코요테 선라이즈는 로데오가 금지한 일을 하기로 결심한다. 엄마와 언니와 동생을 생각하고 집으로 돌아가기로 한다. 로데오가 무엇을 원하는지만 염려하며 살아왔던 코요테 선라이즈는 몰래 간직했던 추억을 꺼내고, 외롭고 슬프고 상심한 자신의 마음을 돌보기 시작한다.


내가 원하는 것도 중요하지 않을까? 나는 스스로에게 끄덕였다.

p.122


“자기 행복은 자기가 찾아야 하는 거야,”

p.244


내가 할 일은 아빠를 돌보는 게 아니었다. 더는 아니었다.

내가 할 일은 나를 돌보는 것이었다.

p.281


코요테 선라이즈는 원하는 것을 찾아 집으로 돌아가는 여정에서 자신이 받은 상처와 연약하고 외롭고 슬픈 감정을 인정하면서 변화한다. 자신에게 일어난 일을 외면하고 달아나는 대신 추억을 마주하며 지금 여기에서 자신의 행복을 찾는다.


뭔가를 향해 달려가는 건 뭔가로부터 달려가는 것보다 낫다. 훨씬 낫다.

p.357


우리 모두 조금씩 망가졌을지도 모른다. 우리 모두 조금씩 연약할지도 모른다. 어쩌면 그래서 우리에게 서로가 그렇게 필요한 것일지도 모른다.

p.358


미국 땅을 배경으로 하는 소설의 집필을 위해 댄 거마인하트 작가는 캠핑카를 몰고 열흘간 약 6,500킬로미터를 멈추지 않고 달리는 여행을 다녀왔다고 한다. 코요테의 고향 마을과 공원을 제외하고 샌드위치 가게 등 언급되는 모든 곳들이 실제 장소를 배경으로 하고 있다고 한다.


『코요테의 놀라운 여행』이 버스를 타고 미국을 횡단하는 이야기인데 마지막장을 덮고 나서 도시나 지역이 특별히 기억에 남지 않았다. 고속도로를 달리다 주유를 하는 동안 휴게소에서 몇 번 쉬고 워싱턴 주에 있는 포플린 스프링스라는 도시에 잠시 내렸다가 다시 버스를 탄 기분이다. 코로나19로 여행을 가지 못 하는 대신 책으로 여행을 즐기려는 독자에게 『코요테의 놀라운 여행』이 만족스러울지는 모르겠다. 그러나 감동이 넘치는 이야기임에는 틀림없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