끝내주는 괴물들 - 드라큘라, 앨리스, 슈퍼맨과 그 밖의 문학 친구들
알베르토 망겔 지음, 김지현 옮김 / 현대문학 / 2021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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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력을 잃어가는 소설가의 눈이 되어 준 소년은 후에 어떤 사람이 될 수 있을까. 게다가 그 소설가가 한 세계의 문학을 대표하는 거장이라면. 책만 읽지는 않았을게다. 책에 대한 이야기를 나눴을테고 책 너머에 대한 대화도 나눴을게다. 책을 좋아하는 소년에게 그 시간은 얼마나 환상적이었을까. 열여섯 소년 알베르토 망겔은 라틴 문학의 거장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를 우연히 만나 "인생의 전환점"을 만난다.

 

소년 망겔은 자라서 글쓰는 사람이 됐다. "문학, 영화, 예술을 아우르는 비평들"과 소설, 논픽션까지, 경계없는 글쓰기에 매진했다. 개인적으론 『독서의 역사』와 『일리아스와 오디세이아』로 익숙한 저자다. 다방면의 박학다식한 지식을 종횡무진 엮어내는 저자의 책을 읽다보면 언제 이렇게 많은 책을 읽고 또 쓰는지 불가사의하게 여겨질 지경이다. 그런이 이번에 그의 또 한 가지 재능을 알게 됐다. 그림이다.

 

현대문학에서 출간된 『끝내주는 괴물들』에는 작은 글씨로 이렇게 써있다. "알베르토 망겔 쓰고 그리다" 글도 쓰고 그림도 그렸다는 말이다. 저자가 펼쳐놓는 괴물이야기도 관심이 갔지만 직접 그렸다는그림이 더 궁금했다. 책에는 한 두개의 삽화가 아니라 각 챕터의 주인공들이 저자 망겔의 머리 속에 든 이미지대로 형상화돼 있다. 각 캐릭터들은 귀엽기도 하고 유머러스한 와중에 자신의 성격을 잘 드러낸 모습니다.

 

'괴물들'이라는 호칭에 갸웃하게 되기도 한다. 보바리씨와 빨간 모자, 앨리스, 잠자는 숲 속의 공주를 괴물로 칭하자니 처음엔 어색하다. 하지만 글을 읽다보니 저자가 말하는 그들의 '괴물다움'에 동의하게 된다. 저자의 괴물들은 다름 아닌 "문학 친구들"이다. 각 챕터에는 문학에 등장하는 인물(또는 인간 비슷한 존재들) 중 일반적으로 조명받지 못한 대상들이 주인공이 되거나 잘 알려진 주인공들의 남다른 면모가 소개된다. 망겔은 괴물의 라틴어 어원(monere)을 소개하면서 그것이 "천재, 괴짜, 특이한 것, 예기치 못한 것, 거의 또는 전혀 드러나지 않은 무언가를 뜻한다"고 했다. 책에 소개된 존재들은저자의 이러한 정의에 딱 들어맞는다.

 

이런 이야기 속 괴물들의 주요한 매력 한 가지를 꼽으라면 그들의 다중적이고 다변적인 정체성이라고 할 수 있을 것 같다. 자마다 고유의 내력을 가진 허구의 인물들은 자기들이 등장하는 책이 아무리 길든 짧든 간에 그 안에만 갇혀 있지 않는다.

p.16

 

책에는 서른일곱의 '괴물들'이 등장한다. 첫 장을 연 주인공은 플로베르의 『보봐리 부인』에 등장하는 샤를 보봐리씨다. 저자는 "야망도 없고 의외의 면모라고는 찾아볼 수가 없는" 매력없는 이 인물을 '운명'을 받아들인 "용감한 자"라고 평한다. "아무리 뻔한 클리셰라 해도" "인생의 궁극적인 책임은 운명에 있다고 말하는 것"은 "용감한 자만이 받아들일 수 있는, 불변하는 문학적 진실"이기 때문이다. 부인의 이야기로 읽히고 그저 불쌍한 남편정도로 여겨지는 샤를 보봐리에 대한 남다른 해설이다.

 

『끝내주는 괴물들』을 읽는 일은 어떻게 보면 서른일곱 편의 서평을 읽는 것과 같다. 인물을 위주로 본 서평이랄까. 이름만 들어서는 어떤 책에 대한 이야기인지 추측하기 어려운 장도 있다. 여섯 번째 인물인 거트루드같은 경우는 왕관을 쓰고 새침한 표정을 한 채인 그림을 봐도 무슨 책의 등장인물인지 알 수 없었다. 그녀는 햄릿의 어머니였다. 셰익스피어의 희곡에선 대사 몇마디 없는 왕비에 대해 저자는 솔직히 그녀의 존재감 없음을 인정한다. 그러나 그녀 안에 넘쳐났을 욕망들을 상상하면서 햄릿의 성에서 "단 하나의 진정한 유령"이 거트루드라고 말한다.

 

『돈키호테』를 다루는 장은 등장인물이 아닌 다른 대상을 다룬다. 『돈키호테』의 원저자라고 세르반테스가 내세운 시데 아메테다. 그가 진짜 『돈키호테』의 작가인지 혹은 세르반테스가 작품에 심어놓은 문학적 장치인지는 알 수 없다. 저자는 그의 '배제'에 방점을 찍었다. "소설이란 오히려 애매모호함, 날것이거나 설익은 견해 그리고 암시, 직관, 감정을 토대로 꽃피는 법"이라면서 말이다. 세르반테스가 내세운 원자자의 실재가 모호하다해도, 후대의 독자들이 세데 아메테라는 작가의 존재를 무시하려했다해도 그의 존재는 결코 지워지지 않았다.

 

오늘날 『돈키호테』의 독자들에게 더 중요한 것은 따로 있다. 배제된 문화는 결코 쉽사리 침묵하지 않는다는 것, 역사 속에서 부재는 현존만큼이나 견고하다는 것, 그리고 때로 문학이란 세상 그 어떤 지혜로운 문학가보다도 더 지혜롭다는 사실을 시데 아메테의 압도적인 존재감이 우리에게 알려 주고 있다.

p.186

 

『구운몽』의 주인공인 파계승 성진이 등장하는 걸 보면서 저자의 독서의 폭이 얼마나 넓은지 짐작해봤다. 다종다양한 책에서 읽어낸 어디로 튈지 모를 사유를 통해 길어낸 문장들은 책 그 너머의 세계를 건너다 보게 했다. 책을 읽고 할 수 있는 생각의 한계없음에 아득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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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지 않기 위해 쓴다 - 분노는 유쾌하게 글은 치밀하게
바버라 에런라이크 지음, 김희정 옮김 / 부키 / 2021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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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버라 에런라이크는 온 몸으로 겪은 일상의 부조리함을 글로 쓰는 사람이다. 열심히 일하는 사람이 왜 가난함을 벗어나지 못할까, 건강 전도사들이 말하는 비법들이 정말 효과가 있을까, 무한 긍정은 현실을 실질적으로 개선시켜줄까, 저자가 답을 얻고자 했던 질문들이다. 자신의 경험에서 솟아난 의문들에 대한 답 역시 구체적이길 원했던 저자는 부조리의 현장으로 들어가는 방식을 택했다. 최저 임금으로 생활이 가능한지 확인하기 위해 노동자가 되고 유방암 투병 와중에 긍정 산업의 실체를 파헤쳤다. 무병장수와 안티에이징의 실현 가능성을 파악하기 위해 해당 프로그램을 직접 체험하기도 했다. 『노동의 배신』, 『희망의 배신』, 『긍정의 배신』, 『건강의 배신』 등 일련의 배신 시리즈는 이렇게 탄생했다.


『지지 않기 위해 쓴다』는 저자가 언론에 발표했던 글들을 모은 책이다. 1980년대부터 2018년까지 각종 언론에 발표했던 다양한 주제의 에세이들이다. 각 장에 주제별로 묶인 글들을 읽다보면 에런라이크의 생각이 흘러온 과정을 짐작하게 된다. 저자는 에세이를 쓰면서 문제 의식을 가다듬은 다음 현장을 체험하고 그 결과를 분석해 책을 써냈다. '1장 가진 자와 가지지 못한 자'에 포함된 '열심히 일하셨나요? 더 가난해지셨습니다'를 쓰기 위해 시작한 식당 웨이트리스, 호텔 객실 청소부 경험은 책 『노동의 배신』이 되었다. '높은 담이 정말로 당신을 보호해 줄까'를 포함한 빈곤 문제를 다룬 에세이는 『오! 당신들의 나라』의 밑거름이 됐고, '2장 몸과 마음을 통제할 수 있다는 착각' 중에 '암의 왕국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라는 글은 『긍정의 배신』으로 진화했다.


저자의 글쓰기 방식이 독특한 건 그 현장성 때문이다. 화학과 물리학을 전공하고 세포면역학으로 박사학위를 받은 이력 때문일까. 저자는 사변적 글쓰기보다는 경험적 글쓰기 방법을 택했다. 증명을 위한 실험에 자신을 기꺼이 투입했다. 책의 첫 장에 저자의 그러한 노력이 잘 드러나 있다.


저임금 노동자의 세계로 뛰어든 저자는 아무리 노력해도 나아질 수 없는 현실을 경험한다. "집, 커리어, 반려자, 평판, 현금 인출 카드"를 내려놓은 상태에서 시작한 생활은 몰려든 손님의 폭주에 멘붕에 빠진 상태로 끝났다. 한달 만에 재정은 적자였고 체중이 빠졌고 피로에 찌들었다. "투잡을 뛰는 데 실패했고, 일자리 하나로는 사는 데 필요한 돈을 충분히 벌지도 못했"는데 말이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면서 예전의 삶이 점점 더 낯설게 느껴지기 시작했다. 이전의 나에게 보내진 이메일 과 전화 메시지들은 나랑 전혀 상관없는 머나먼 곳에 살면서 시간이 너무 남아돌아 괜한 걱정을 하는 낯선 사람들이 보낸 것처럼 느껴졌다.

p.58


심리적 상황은 더 나빴다. 저소득층 생활 한 달만에 용감한 에런라이크가 소심한 겁쟁이가 돼가고 있었던 것이다. 매니저가 주방에서 일하는 외국인 노동자를 부당하게 대우하는 것을 보고도 입을 닫은 것이다. 저자는 스스로의 변화를 통해 "아무리 보잘것없는 노동도 도덕적으로 희열을 주고 심리적으로 사기를 높인다"는 복지 개혁의 가정이 허구라는 것을 밝혔다.


원래의 나는 대체로 용감한 편이지만, 매우 용감한 사람들마저도 포로수용소 같은 곳에 갇히면 용기를 잃는 경우가 수없이 많다. 어쩌면 미국의 저임금 노동자들이 일하는 환경, 포로수용소보다 백만 배 천만 배 더 화기애애한 환경에서도 그와 비슷한 현상이 벌어지는지도 모른다.

p.67


에런라이크의 글은 유머러스함이 매력적이다. 저자가 다루는 주제들은 즐거움과는 거리가 있는 것들이고 읽다보면 가슴이 답답해지곤 한다. 매번 고통당하고 속아넘어가는 대상이 나와 다르지 않아서다. 차라리 몰랐으면 싶은 상황도 종종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시종일관 유머를 잃지 않는 저자의 문장은 진실을 마주하는 고통을 덜어준다. 지방 섭취가 모든 생활 습관병의 근원인 것처럼 알려져서 저지방 식품이 선호되는 일에 대해 저자는 자신과 친구를 비교대상으로 삼는다. 모든 지방 제품을 섭취해온 자신과 어려서부터 지방 제한 식단을 유지해온 친구의 현재 건강 상태는 대조적이다. 큰 키에 마른 그리고 작은 키에 비만 체형, 저자 그리고 친구의 상황이다. '저지방에 대한 신봉'은 또다시 선함과 연결되고 부유층의 구별짓기로 결론지어진다. 에런라이크는 이러한 상황을 '욕구불만'과 '(음식을 대신하는) 돈'으로 설명한다.


저지방 저단백질 식단의 장기적인 부작용이 무엇일지 추측하기는 어렵지 않다. 바로 끊임없는 욕구 불만과 무시할 수 없이 계속 뭔가를 더 원하는 배고픔이다. 저지방 식단을 유지하는 수천 명에 달하는 고소득자에게 돈은 음식을 통해 섭취하지 못하는 지방의 대리물이었을 것이다.

p.180


합리적 페미니스트로서의 면모도 인상적이다. 저자는 아부그라이브 수용소 학대 행위를 예로 들어 자신이 "여성들에 대해 얼마간의 환상을 가지고 있었"다고 말한다. "여상이 남성에 비해 천부적으로 더 온화하고 덜 공격적이라는 주장을 믿지 않"았음에도 여성의 가학성에 충격받았기 때문이다. 저자 이 사건으로 인해 "여성이 남성들로부터 불공정한 대우를 받고 있을 뿐 아니라 남성보다 도덕적으로 우월하다"는 이론을 회의(懷疑)한다.


아부 그라이브에서 우리가 확실히 배운 것은 자궁이 양심을 대체할 수 없다는 사실이다. 그렇다고 성평등이 싸울 가치가 없다는 의미는 아니다. 성평등은 여전히 싸워서 쟁취할 가치가 있다. 만약 민주주의를 신봉한다면 그것은 남성이 해낼 수 있고 성취할 수 있는 모든 것을 여성도 해내고 성취할 권리가 있다고 믿는 것이다. 심지어 나쁜 일들도 말이다. 그러나 성평등 하나만으로는 정의롭고 평화로운 세상을 만들어 낼 수 없다.

p.268


『지지 않기 위해 쓴다』은 치열한 글쓰기란 어떤 것이어야 하는지를 보여준 책이다. 바버라 에런라이크의 "도덕적 분노에 불을 지피는 문제"에 관한 책이 어떻게 나올 수 있었는지, 그 책들에 어떤 주장들을 담았는지를 요약 정리해서 본 듯하다. "심화되는 사회 문제는 묻어 버린다고 해결되는 것이 아니"라는 저자의 문장이 날카롭다. "정직한 저널리즘"의 희귀함이 아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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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쓴 것
조남주 지음 / 민음사 / 2021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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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남주 작가의 공개강연을 들었었다. 『82년생 김지영』이 한참 화제가 됐을 때였고 작가는 그 작품을 쓴 과정에 대해 들려줬다. 오랫동안 시사·교양 프로그램 방송 작가를 했다는 말, 특히 PD수첩을 담당했었다는 말이 기억에 남았다. 그래서 이런 작품을 쓸 수 있었구나 싶었다. 『82년생 김지영』이 가진 독특한 현실감이 이해됐다. 작가는 철저하게 사실적인 자료에 바탕을 두고 있지만 기묘하게도 상식에 반하는 지점을 짚어내고 있었다. 너무도 보편적인 경험이 글자로 씌이고 자료로 제시되니 낯설어졌다. 이 작가는 다음에 어떤 이야기를 쓸 수 있을까. 호기심에 기다렸던 『사하맨션』은 전작과 전혀 다른 길을 가고 있었다. 핍진한 현실이 실제 경험과 유리된 듯한 것이 『82년생 김지영』이라면 『사하맨션』은 가상의 서사가 현실을 되비추는 느낌이었다. 두 개의 장편에서 작가가 이야기 할 수 있는 폭을 어느 정도 가늠해 볼 수 있었다.

 

『우리가 쓴 것』은 2012년부터 2021년까지 발표됐던 단편 중 여덟 개를 모은 책이다. 수록작은 「매화나무 아래」, 「오기」, 「가출」, 「미스 김은 알고 있다」, 「현남 오빠에게」, 「오로라의 밤」, 「여자아이는 자라서」, 「첫사랑 2020」이다. 주요 화자가 모두 여성, 손녀가 있는 할머니부터 (곧 5학년이 되는) 초등 4학년까지의 연령대의 이야기가 담겨 있다. 치매로 요양원에 있는 언니 문병을 다니기도 하고 집 나간 아버지 걱정을 하기도 하고 직장 생활에 눌리거나, 퇴직을 앞둔 인물도 있다. 서로 다른 세대가 자신만의 시간대를 살고 있지만 각각의 이야기는 다른 이야기를 떠올리게 하면서 흘러간다. 책 속에서 어떤 목소리가 메아리처럼 계속 되울리는 느낌이다. 그 목소리는 작가의 목소리이면서 이 시대 여성의 목소리인 동시에 바로 우리의 목소리로 여겨졌다. 미처 깨닫지 못했거나 소리내지 못하고 묻어둔 마음 속 목소리 말이다.

 

「매화나무 아래」는 치매 요양 병원에서 삶의 마지막 날을 보내는 언니를 문병하는 동생의 이야기다. 치매로 기억을 잃어 손자와 아들이 헷갈리고 바로 아래 동생의 죽음도 기억하지 못하면서도 언니는 생전 못 읽은 책과 종교에 대한 애정을 새로이 드러낸다. 나이 먹을 만큼 먹고 가족을 앞세운 후 "사람 죽는 일이 너무 가깝고도 태연하"게 여겨질 즈음 동생에게 언니의 위급 소식이 들린다. 동생은 "아무것도 못하고" "누워만 있는" 삶이 무슨 의미가 있을지 자문한다.

 

남편이, 아빠가, 아들이 살아 있다면 그 존재만으로 가족에게 의지가 되고 위로가 되리라 믿었다. 그때의 내 아들과 지금의 언니는 어떻게 다른가. 정말 다른가.

그럼 나는? 아무런 생산적인 일을 하지 않고 하루하루 죽을 날을 향해 걸어가고 있는 지금의 나는 의미가 있나.

p.42, 「매화나무 아래」 中

 

깜깜한 어두움 속에서 동생이 발견한 매화나무 겨울눈은 죽은 듯 보이는 나뭇가지 안에 생명이 여전히 맥동함을 드러냈다. 흩날리는 눈발이 내려앉은 매화나무는 꽃을 피우는 듯 보였다. 동생은 "꽃이 지기 전에 오라"던 언니의 말을 떠올린다. "꽃이 눈이고 눈이 꽃이"라면 "겨울이 봄이고 봄이 겨울이"라면 죽음과 다름 없어 보여도 아직 삶 속에 있으며 죽는다 해도 의미 없음은 아니다.

 

작가의 말대로 「매화나무 아래」는 「오로라 밤」과 쌍둥이다. '생각나?'라는 말이 두 소설을 이어준다. '생각나?'하는 질문에는 그리움이 있다. 대화가 꼬리를 물고 추억을 공유할 수 있는 누군가에 대한 그리움. 「매화나무 아래」에서는 죽은 작은 언니에 대한 동생의 기억에 속에 '생각나?'가 숨어있다. 「오로라 밤」에는 어릴 적 희망을 포기하지 않고 오로라를 보러 캐나다로 떠나려는 쉰일곱의 나가 있다. 그녀는 '생각나?'하며 "함께 기억을 더듬을 사람"으로 시어머니를 택한다.

 

소중하게 여겨 혼자 간직한 기억들은 종종 생활의 속도를 따라오지 못하고 책장 아래나 침대 틈새로 들어간 머리끈처럼 사라지곤 했다. 예쁘다, 신기하다, 꿈만 같다며 함께 감탄할 사람. 일상으로 돌아온 후에도 밥을 먹다가 커피를 마시다가 창 밖을 보다가 불쑥, 생각나? 하며 함께 기억을 더듬을 사람. 내게 그런 사람이 있나.

p.216, 「오로라의 밤」 中

 

이렇게 독특한 나와 시어머니의 관계는 교통사고로 일찍 죽은 남편 덕(?)이다. 시어머니는 "다른 일에는 늘 합리적"이어도 아들일에 있어서만은 "말이 통하지 않"았다. 남편과 아들의 부재는 두 여성의 관계를 변화시켰다. 둘은 서운할만큼 "아무렇지 않게 너무 잘 살"았다. 자식과 가족에 매여 하고 싶은 일을 생각도 못했던 시어머니도 남편의 어머니가 아닌 연장자로 시어머니를 대하는 나도 서로에게 부담이 없어진 것이다. 둘은 누구에게 살림의 짐을 미루지 않고 "가사 노동에 몸과 마음이 지치지 않으며, 인정과 이해를 구걸하지 않"고 살 수 있었다.

 

"그래서 요즘 좋지. 내 인생 제일 좋은 때야, 요즘이."

(…)

"저도 좋아요. 믿으실지 모르겠지만 어머니랑 둘이 사는 요즘이 제일 편해요."

"준철이가 없어서 그래. 이제 내가 준철 에미가 아니고 너도 준철이 집사람이 아니잖아."

p.233, 「오로라의 밤」 中

 

「오로라의 밤」의 시머머니는 놀랍도록 유쾌한 인물이다. 소설 속에 등장하는 노년세대 중 이렇게 삶을 긍정하는 캐릭터는 유쾌하기 그지없다. 오로라롤 보며 외친 그녀의 소원은 「매화나무 아래」의 언니가 호흡기때문에 하지 못한 말로 들렸다.

 

"오래 살게 해 주세요! 인공호흡기니 뭐니 다 달아 줘요. 죽을 때 고와 뭐해? 곱지 않더라도 오래 살 거야. 이 좋은 세상에 로래오래 숨 붙이고 있을 거야!"

p.249, 「오로라의 밤」 中

 

가부장의 부재가 가족 관계에 일으키는 변화는 「가출」에서 더 폭넓게 다뤄진다. 일흔 둘의 아버지는 정년 퇴직 후 어느 날 입은 옷 그대로 집을 나간다. "아버지의 일"이라 여긴 모든 것을 끝낸 후 "내 인생을 살고 싶다"는 쪽지를 남긴 채. 가족들은 대책을 회의를 하러 모인다. 자주 얼굴 보기 힘들었던 삼 남매는 모일 때마다 따뜻한 밥을 지어 함께 먹으며 이전과 사뭇 다른 관계가 된다. 점점 옅어지는 걱정과 반대로 "일상을 살고 싶어"졌기 때문이다. 막내딸은 가족 몰래 아버지의 카드 승인 문자를 받으며 그의 '안녕'을 확신한다. 남은 가족들은 "서로에 대해 잘 알게 되었"고 "아버지 없이도" "잘 살고 있다." 모든 것을 책임지려는 한 사람의 권위가 자신과 가족을 눌러왔던 것이다.

 

부재의 모티브는 「미스 김은 알고 있다」로 이어진다. 신입 사원인 '나'는 입사직후 회사의 모든 일들에서 발생하는 문제를 목도한다. 회의에 필요한 자료철이 없어지고 온갖 연락처가 뒤섞여 있으며 복사기까지 말썽을 일으킨다. 일이 생길 때마다 들리는 이름 '미스 김'. 이름도 없고 직책도 없는 미스 김은 중요 고객 미팅에서 허드렛 일까지 회사의 온갖 일들에 손을 대고 있었다. 그런 사람을 "미스 김은 미스 김이"기 때문에 "승진시키거나 연봉을 올려줄 수는 없"기때문에 사장이 해고한다. 함께 일했던 동료들은 침묵으로 권력에 동조했다. 미스 김은 회사 내에 미쳤던 자신의 영향력을 철저히 지웠다. 아무런 흔적도 없이. 회사 직원 모두가 힘들어졌지만 누구도 불평할 수 없었다. 그들 모두 미스 김의 '부재'에 일정의 책임이 있었으므로.

 

「미스 김은 알고 있다」의 화자 '나'는 회사에 입사하면서 살던 집을 옮긴 후 낭패감을 느낀다. 전 거주자의 전 남자친구가 스토커로 변신했기 때문이다. 그는 여자친구가 이사간 걸 모르고 공격을 계속하고 '나'는 공포에 빠진다.

 

내가 지금 무서워하고 있는 것이 그저 스토커나 강도가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보다 좀 더 근본적인 것. 특정한 사고나 사건이 아니라 나를 에워싼 상황 같은 것. 이를테면 젊은 여자가 스스로를 오롯이 책임지며 혼자 사는 일.

p.140, 「미스 김은 알고 있다」 中

 

일상에서 여성이 감당하고 있는 위협은 이렇게 분명한 형태를 띠고 있기도 하지만 알게 모르게 삶을 잠식하기도 한다. 「현남오빠에게」가 그런 경우다. 오빠는 "다 너를 위한 거야."라며 신입생 시절부터 '나'를 돌봐줬다. 오빠는 자기 유리한 대로 모든 일을 결정하고 '나'를 위한 행동인 것처럼 믿게 만들었다. 10여년이 지난 후 '나'는 사회생활을 하며 오빠와의 관계에 눈을 뜬다. "한 켠에" 미뤄뒀던 "미심쩍은 마음"이 무엇인지 생각하고 "내 인생이 내 뜻과는 무관하게 흘러왔다는 것을 알게" 된다. 「현남오빠에게」는 '가스라이팅'이라 불리는 물리적 폭력을 동원하지 않고 사람의 정신을 압도하는 수법을 전형적으로 보여준다.

 

「여자아이는 자라서」는 여성에 대한 폭력을 모른 척 하는 일이 고통이 되어 돌아오는 일에 대해 이야기 한다. 화자 '나'는 가정폭력상담소를 운영하는 엄마에게 찾아오는 피해자를 보며 자랐다. 여성이 가정의 테두리 안에서 행사된 폭력의 상처들은 '나'의 뇌리에 각인됐다. 시간이 지나고 '나'의 딸이 자라 학교에서 일어난 폭력 사건에 연루되자 덮어두려 했던 과거의 일들이 현재의 내 것이 되어 버린다.

 

내 증상과 같다. 열다섯의 나는 모르는 아줌마의 길고 선명한 흉터가 무섭고 끔찍하면서도 괜찮은 척했다. 이미 비슷한 일들을 충분히 보고 들었고 이 정도는 아무렇지 않다고 내 불안과 공포를 부정했다. 그리고 통증이 시작됐다.

p.296, 「여자아이는 자라서」 中

 

"남자애들은 생각이 없다, 이해해 줘야 한다, 몰래 사진 찍고 낄낄거리는 게 장난이다", "여자애들이 성적 떨어뜨리려고 남자애를 꼬신다"는 어떤 경우 폭력에 동의하는 말이 된다. '나'는 아무렇지 않게 무마하려는 이런 말들이 무엇을 은폐하게 되는지 깨닫는다. 그리고 딸과 조금 가까워진다.

 

「첫사랑 2020」은 2020년을 살아가는 초등학생의 세계를 그렸다. 기성 세대와 청소년 시기를 함께 다룬 「여자아이는 자라서」에서 한 단계 더 어린 세계다. 서연이는 초등학교 5학년이다. 4학년이 끝날 무렵 승민이에게 고백을 받고 사귀기 시작했다. 코로나 확진자 수 폭발은 어린 두 연인의 만남을 허락하지 않고 둘 사이엔 균열이 일기 시작한다. 서연이의 헤어지자는 말에 눈물바람을 하는 승민이를 달래는 선생님의 말이 내맘같았다. "미안해" 어른인 우리가 미안하다. 서연이와 승민이의 애틋한 첫사랑을 지켜주지 못한 어른들은 모두 미안해야할 일이다.

 

「오기」는 우리 모두의 상처와 고통이 얼마나 보편적인가 그리고 우리 하나하나는 자신의 상처를 얼마나 개인적인 것으로 느끼는가에 대한 이야기다. 작가인 '나'는 옛 선생님을 만난 후 떠오른 기억을 토대로 소설을 쓴다. 소설은 가정 내 폭력에 관한 것이었다. 그런데 소설 발표 후 선생님은 자신의 이야기를 훔쳤다며 화를 내고 '나'는 늘어나는 악플 중에 선생님의 것이 섞여있으리라 생각한다. 한편 많은 독자들은 소설과 비슷한 자신의 이야기를 들려주고 싶어했다. 누군가에게 풀어내야 할 이야기가 있지만 그 이야기가 또다른 누군가에게 처음과 같은 뜻으로 가 닿기는 얼마나 어려운 일인가.

 

그러니까 그 밤 우리 세 사람이 얼마나 많은 얘기를 나누었는지, 얼마나 서로를 깊이 이해했는지, 얼마나 서로에게 위로가 되었는지를 이렇게 아름답고 애틋하게 쓸 수 있었겠지. 그리고 내 흔적을 악착같이 따라다니며 그렇게 모욕적인 글들을 남겼고. 그 두 마음은 얼마나 다를까. 과연 다를까.

p.78, 「오기」 中

 

조남주 작가는 작가의 말에 이 단편의 "에피소드들이 모두 제 경험담은 아"니라고 적었다. 그러나 에피소드에 드러난 이야기하기의 고단함만은 작가 본인의 것이리라.

 

비교적 긴 기간 동안의 작품을 묶은 단편집을 읽고 보니 조남주 작가가 그동안 써온 길을 따라가본 기분이다. 장편과 단편에서 고르게 빛을 발하는 작가라는 사실도 알게 됐다. 『우리가 쓴 것』이라는 제목을 다시 생각해 본다. 누가 정했을까. 조남주 작가? 박혜진 편집자? 그 사람은 지금의 세계를 의미있게 하는 이런 책을 '우리'가 썼다고 불러준 것이다. 소설의 제목이 말하는 '우리' 중 하나가 될 수 있어 기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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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이너마이트 사계절 아동문고 101
김민령 외 지음, 이윤희 그림 / 사계절 / 2021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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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이너마이트』는 사계절아동문고 작품집 101권이다. 어린이 눈높이에서 바라본 세상과 그들만의 세계 그리고 고민을 다룬 시리즈가 100권이 넘었다. 1999년 1권 『차돌 깨무는 호랑이』를 시작으로 쌓인 책들은 아이들과 만나 많고 많은 생각을 피워내는 토양이 됐을 것이다. 책이 아이들에게 스미고 생각으로 화하는 걸 볼수 있다면, 하고 생각해 본다. 사계절아동문고는 분명 충만한 생각의 양분이 됐을 것이다.


이 책은 김민령, 이금이, 박효미, 김선정, 김중미, 김태호, 박하익 작가의 작품이 수록되었다. 일러스트레이터이자 만화가인 이윤희 작가가 그림을 그렸다. 어린이 책 뿐만 아이라 장편소설 『알로하 나의 엄마들』로 알려진 이금이 작가와 『괭이부리말 아이들』의 김중미 작가가 포함돼 있어 더 관심이 갔다. 책은 ‘지금, 오늘의 어린이들에게 어떤 사람, 어떤 사건, 어떤 시공간이 자신을 이전과 다른 ‘나’로 만드는 계기가 될까요?’ 라는 질문에서 출발했다. 이야기들은 어린이의 삶이 뒤바뀌는 변화의 지점에 대해 작가들이 보낸 답이다.


「고양이가 한 마리도 오지 않던 날」 김민령

“우리도 조그만 고양이 한 마리쯤은 살릴 수 있겠지.”

p.33

「고양이가 한 마리도 오지 않던 날」을 읽으며 2020년 여름에 보았던 뉴스가 생각났다. 장마와 집중호우가 50여일 계속되던 때였다. 강원도 평창군 송정교가 무너지기 직전 주민이 차량 진입을 막아 운전자를 구했다는 뉴스였다.

「고양이가 한 마리도 오지 않던 날」에서도 60일째 비가 계속 오자 엄마는 집을 떠나기로 결심한다. 불안하고 두려운 마음으로 출발한 길에서 생각지 못한 도움을 받으며 가족은 즐거운 여행을 기대하게 된다.


「구멍」 이금이

처음엔 온 가족이 함께 지내는 게 좋았다. 그런데 하루 종일 같이 있어 보니 생각만큼 좋지는 않았다. 엄마는 간섭과 잔소리가 훨씬 심해졌고, 아빠는 유치한 장난으로 귀찮게 했다. p.50


가족이라고 해도 각자의 시간이 필요한 법이니까. p.57

코로나19로 학교에 못 가고 엄마와 아빠가 재택근무를 하여 가족이 함께 지내는 시간이 길어지고 일상이 전과 달라졌다.

이사 온 집에 아파트 단지의 다른 집에 없는 수납장이 있고, 수납장 아래 칸에 구멍이 있는 것을 알게 된다. 그리고 마법이 일어나는 시간이 되면 판타지 세계로 들어가는 문이 열린다.


「나의 탄두리 치킨」 박효미

가장 크게 깨진 건, 단단하게 닫혀 있던 내 마음이었다. 호두처럼 두꺼운 껍데기가 깨지면서 내 본래 얼굴이 드러났다. 나는 잘못을 똑바로 볼 용기가 없었다. 대충 덮어 버리고 싶었다. 대강 넘어가길 바라던 이기심은 밤송이 가시가 되었다. 가시는 내가 좋아하는 사람을 찔렀고, 날 찔렀다. 시간이 꽤 흘렀지만 가시는 사라지지 않고 문득 나타나 종종 날 찌른다.

p.87

누구나 친구가 되어 놀던 어린이가 사춘기가 되고 첫사랑을 느끼고, 남자 편 여자 편을 나누는 나이가 된다.

이동완이 정영주에게 첫사랑을 고백하고 1일이 된 날 성추행 사건이 일어난다. 소문이 이상하게 퍼지고 이동완이 사건을 외면하고 회피하며 망설이는 동안 정영주는 윤민준에게 사과를 요구한다.


상병차포마 - 김선정

난 원래 학교 가기를 싫어했지만 특히 학년이 바뀌는 3월이 되면 정말 학교가 싫었어. 낯선 얼굴, 낯선 책상, 낯선 선생님, 낯선 교실 문이 너무 무섭고 힘들었거든. p.91

학교에 다니는 또 다녔던 사람이라면, 이유는 다르지만 학교 가기 싫은 날이 있었을 것이다. 그런 날, 학교 가기 싫은 마음을 어떻게 바꾸었을까? 「상병차포마」에 나오는 어린이는 장기를 통해 마음을 놓고 학교에 가게 된다.


「다이너마이트」 김중미

어른들은 남자애들이 폭력적인 말을 하거나, 친구들을 심하게 괴롭히면 남자애들은 원래 그렇다고 넘어간다. 그런데 하루 같은 여자애들이 똑같은 행동을 하면 폭력적이라고 한다. p.114


BTS 형들도 화려한 귀걸이를 많이 한다. 항상 화장도 한다. 우리 반 애들은 여자애들이나 남자애들이나 다 BTS를 좋아한다. 그러면서 나한테는 여자 같다고 놀린다. p.120


“세상은 비슷한 사람들끼리만 살아가는 데가 아니거든. 그래서 점점 나와 다른 사람들을 존중하는 법을 배우고 함께하는 법을 배우는 거야. 그렇게 노력하다 보면 서로의 차이만이 아니라 공통점을 발견하게 되고 각자를 갈라놓았던 울타리를 허물게 되지.” p.125~127

김도훈은 화장을 하고 화려한 귀걸이를 하는 것을 좋아한다. BTS 노래에 맞춰 춤을 추는 것이 좋다. 반 아이들은 김도훈을 남자답지 못하다고 놀리며 괴롭힌다. 편견과 차별, 이중 잣대를 피해 조용히 숨어 지내는 김도훈에게 가정방문을 온 김현아 선생님이 공연을 제안한다.


「멍한 하늘」 김태호

“아무리 신호를 보내도 사람들은 잘 모른대. 그래서 우리 형이 말했어. 세상 사람들이 다 볼 수 있는 아주 커다란 신호를 하늘에 남기자고.”

p.155

옥탑방에 엄마와 아이가 이사를 온다. 인호는 옥탑방에 이사 온 하늘이와 친해진다. 어느 날 하늘이가 아동 학대 피해 생존자라는 것을 알게 된 인호는 무서워져 하늘이를 모른 척 한다. 그리고 하늘이가 또 다른 폭력을 당하는 모습을 보게 된다.

아동 학대에서 구조된 아이가 다시 학대자에게 돌려보내지는 세상에 사는 지금, 「멍한 하늘」을 읽으며 아이들이 신호를 보내면 꼭 도와주러 찾아오는 사람들이 있는, 세상에 없는 그런 일이 일어나기를 바란다.


「5학년 1반 연애편지 사건」 박하익

나는 편지가 마음을 고백하는 진지한 방법이라고만 생각했다. 그것이 못된 장난이나, 다른 사람의 속마음을 엿보는 수단이 되리라고는 꿈에도 생가가하지 못했다.

p.180~181

서주영이 윤형준의 책상에 카드를 올려놓았다. 그런데 읽지 않고 가방에 넣어 둔 카드가 사라진다. 서주영을 좋아하는 윤형준은 카드의 내용을 알지 못 해 난처하다. 의심이 가는 사람들을 추적한다.


『다이너마이트』를 읽으며 막연하게 잊고 지나치던 어린이들이 사는 세상을 볼 수 있었다. 그 세상은 학교 가기 싫고, 부모보다 친구와 노는 것이 좋고, 학대로 아프고, 차별과 편견과 추행으로 힘들다. 어린이가 일상을 살아가는 세상인 가정과 학교에서 겪는 일들은 복잡하고 어렵기가 어른이 사는 세상과 다르지 않았다.

그렇지만 『다이너마이트』가 보여주는 세상은 우울하거나 처절하지만은 않다. 그 세상에 사는 어린이들은 유머와 위트를 보여주며 웃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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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구를 위한다는 착각 - 종말론적 환경주의는 어떻게 지구를 망치는가
마이클 셸런버거 지음, 노정태 옮김 / 부키 / 2021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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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pocalypse Never', '세계 종말은 결코 없다' 정도 되는 뜻의 원제목를 『지구를 위한다는 착각』으로 바꿨다. "환경 재앙과 기후 위기가 세계를 위기로 몰아간다"는 명제는 당연히 참이라고 여겨진다. 지구 환경 변화가 나쁜 이유는 그 속에 존재하는 생물들이 죽어가고 있기 때문이다. 생물들이 살 수 없는 지구에 인간이 살아남을 수 있을리 만무하다. 인류는 자신들의 생존을 위해 환경과 기후를 보존해야 한다고 외치기 시작했다. 그런데 책의 저자 마이클 셸린버거는 좀 다른 주장을 한다. 환경과 기후가 세계를 위기에 빠뜨릴 수는 있지만 지금 상황은 그리 위험하지 않다고 말이다. 그 주장의 놀라운 점은 환경과 기후에 해를 끼치는 원인에 대한 생각의 차이에 있다. 미국의 환경 운동가 마이클 셸린버거는 지구를 지키지 위해 우리가 하고 있는 일들이 오히려 환경에 좋지 않은 영향을 미칠 수 있다고 지적한다.


이 책의 소구점은 "『침묵의 봄』 이래로 가장 탁월한 업적"이라는 치사(致詞)와 목차다. 레이첼 카슨의 책은 합성살충제 사용를 보는 인식을 바꿨다. 아무 거리낌없이 사람에게까지 사용되던 고농도의 살충제가 가져올 결과를 제시함으로써 가능한 일었다. 마이클 셸린버거는 어떤 인식의 전환을 의도하고 있다는 걸까. 의문은 목차에서 확인할 수 있다.

책의 각 장 제목은 유머러스하게 일반적인 통념을 비튼다. 환경을 고민하는 사람들이 내놓는 대안의 반대말이라고나 할까. 특히 '플라스틱 탓은이제 그만하자'와 '지구를 지키는 원자력'이 가장 큰 충격이다. 빨대 사용에 대한 숱한 논란이 있고 또 후쿠시마 원전사고 이후 원전은 없어져야할 위험물로 인식되고 있지 않은가. 처음 읽을 땐 사이비 과학서적을 읽고 있는 건 아닌지 걱정됐다. 그만큼 저자의 주장이 전복적이었다. 그러나 저자의 약력으로 보나 참고 문헌의 충실함으로 보나 이 책은 진지하게 읽어볼만한 가치가 있었다.

 

세계는 멸망하지 않는다

지구의 허파는 불타고 있지 않다

플라스틱 탓은 이제 그만하자

여섯 번째 멸종은 취소되었다

저임금 노동이 자연을 구한다

석유가 고래를 춤추게 한다

고기를 먹으며 환경을 지키는 법

지구를 지키는 원자력

신재생 에너지가 자연을 파괴한다

힘있는 자들이 가장 좋은 해결책에 반대한다

목차 中

 

저자는 자신의 주장에 대해 꼼꼼한 근거를 제시한다. 환경 재앙을 주장하는 사람들이 주장의 근거로 사용하는 논문의 내용을 일일이 확인했다. 뿐만 아니라 어느 과학자가 그랬다더라 하는 말에는 해당 과학자에게 인터뷰를 요청해 발언의 내용을 확인했다.

저자에 따르면 환경 문제에 대해 암울한 결말만 예고되는 것은 아니다. 과학자들의 예측에는 긍정과 부정의 결과가 모두 포함되어 있으나 우리에겐 나쁜 쪽의 소식만 들려온다. 누구에 의해? 언론에 의해. 언론은 좋은 소식보다 나쁜 소식을 선호한다. 이런 부정적인 뉴스가 증폭돼 종말론적 환경주의가 양산된다.

 

"과학자들은 섬세하게 조율된 미래 예측 시나리오를 제시한다. 비현실적인 낙관론부터 매우 비관적인 시나리오까지 포함한다." 반면에 "언론은 가장 비관적인 시나리오만을 강조하는 경향이 있다. 그러면서 은연중에 가장 나쁜 시나리오를 우리의 미래가 될 것처럼 전달하게 된다.

p.76

 

아마존에 대한 믿음이 환상이라는 걸 알게 됐다. 충격이었다. 아마존은 '지구의 허파'가 아니었다. 아마존 자신의 허파였을 뿐이다.

 

나는 그에게 아마존이 지구 전체 산소의 주요 공급원이라는 말이 사실이냐고 물었다.

"헛소리예요," 넵스테드가 말했다. "그 말에는 과학적 근거가 없어요. 아마존이 생산하는 산소가 엄청나게 많은 건 맞지만 호흡하는 과정에서 산소를 빨아들이니까 결국 마찬가지입니다.

p.87

 

지구가 사용할 산소를 유지하겠다고 아마존 삼림지대를 개발하지 못하게 하는 것은 어불성설이었다. 저개발 국가는 삼림을 개발해 수입을 늘릴 수 있는 작물을 재배해야 한다. GDP가 높아질수록 화전에 의한 삼림파괴가 줄어든다. 유럽이 브라질의 개발을 막는 이유는 값싼 농산물 때문이었다. 자국 농산물 시장을 지키기 위해 '자연파괴'라는 명분을 들고 나선 것이다. 꿍꿍이는 다른 데 있었다. 비슷한 일은 저임금 노동 반대에서도 일어났다.

 

가난한 개발도상국의 의류 공장과 다른 여러 소비재 공장이 하는 일은 멸종저항이나 그린피스가 주장하는 것과는 정반대라고 할 수 있다. 공장은 삼람 파괴를 불러오는 주범으로 지목받고 있지만 실은 숲을 지키는 원동력이다. 지금까지 그래왔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p.192

 

'빨대'로 촉발된 플라스틱에 대한 논의도 문제의 근원을 간과하고 있다. 플라스틱은 고래 수염이나 거북등딱지, 코끼리 상아를 대체하는 물품으로 그 동물들의 구원자다. 플라스틱을 남용을 옹호하자는 게 아니라 플라스틱 때문에 멸종 위험에 처해있다고 알려진 동물들에게 근본적인 위협은 '사람'이었다. 고래 개체수의 감소는 기후 변화에 의한 것보다 남획때문이고 펭귄 역시 사람의 주거지가 확대되다 보니 서식지가 좁아진 것이다. 인공물이 문제가 아니었다.

 

플라스틱을 둘러싼 이 모든 이야기를 통해 우리가 얻을 수 있는 교훈이 있다. 환경을 지키고 싶다면 자연물을 사용하지 말아야 하고, 자연물 사용을 피하려면 인공물로 대체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는 환경주의자들이 추구하는 환경 보호 방식과는 정반대다.

p.143

 

원전에 대한 장에서 가장 의문점이 많이 생겼다. 저자는 방사능에 대한 공포가 핵전쟁의 공포로부터 전이된 것이라고 말한다. 원전은 쉽게 폭발하지 않으며 폐기물도 안전하다고 주장한다. 쉽게 폭발하지 않지만 폭발하지 않는 것은 아니고(체르노빌과 후쿠시마가 있다) 방사성 폐기물은 오랜 기간 보관하는 것 외에 달리 처리방법이 없다는 것도 사실이지 않은가.

 

방사능 폐기물은 어떻까. 통념과는 정반대다. 전력 생산 과정에서 나오는 폐기물 중 가장 안전한 최선의 폐기물이 바로 방사능 폐기물이다. 지금껏 원전에서 나온 방사능 폐기물 때문에 사람이 죽거나 다친 일은 단 한 건도 없었고 앞으로 그런 일은 벌어지지 않을 것이다.

pp.313-314

 

사용 후 핵연료의 연료봉에 담긴 방사성 물질이 강이나 지하수를 오염시킬 가능성은 현실적으로 제로에 가깝다.

p.314

 

그들은 원자력 발전에 대해 이야기하면서 의식적이건 무의식적이건 핵무기의 이미지에 사로잡혀 있는 것이다. 하지만 사용 후 핵연료의 연료봉을 폭탄으로 만드는 일은 그리 간단하지 않다.

p.315

 

후쿠시마에서 원전 사고로 인한 방사선에 가장 크게 노출된 지역 사람들조차 방사능에 건강의 영향을 받지 않았다. 사고 발생 후 3년간 거의 8000여 명의 주민을 대상으로 수행한 연구에 따르면 그렇다.

p.343

 

후쿠시마 원전 오염수 방류때문에 신경이 곤두선 지금 원전 사고에 의한 방사능 피해가 거의 없다는 그의 주장은 연구 결과가 그렇다해도 믿기 힘들었다. 원전 폭발 후 그 지역에서 발생한 방사능 관련 피해에 대한 많은 다큐멘터리들은 사기인가. 아니면 극히 적은 사례들을 침소봉대한 것일까. 의문점만 한가득이다.

신재생 에너지를 다룬 대목은 신선했다. 태양광 패널 폐기물 처리가 앞으로 큰 문제가 될 것이라는 예측을 알고 있었다. 재사용 할 수는 있지만 어떤 업체에서도 시도하려 하지 않고 수거되지 않은 중금속은 그대로 땅에 묻히고 있는 게 현실이다. 풍력 발전이 조류의 생태에 미치는 영향은 적다고 할 수 없는데 아무런 제재조항이 없는 것이 현실이다. 신재생 에너지의 효율이 그렇게나 낮은 것도 처음 알았다. 그럼에도 환경단체들이 신재생 에너지를 옹호하는 것은 탄소배출 기업의 지원 때문이었다. 홀로 운영할 수 없는 신재생 에너지 발전기관은 반드시 화석연료를 사용하는 발전소 설치를 동반해야 했다. 바이오 에너지와 바이오 제품도 마찬가지다. 에너지 효율은 떨어지고 생산과정에서 더 많은 탄소를 배출한다. 폐기 후 분해 가능성도 의문시되고 있다. '바이오'와 '재생'이라는 말에 대한 긍정적 이미지를 버려야 할 때다.

 

태양광 패널과 풍력 터빈은 또한 생산 과정에서 더 많은 자원을 소비한다. 폐기하는 과정에서 버려지는 자원 역시 더 많을 수밖에 없다. 태양광 패널을 설치할 때는 원자력 발전소에 비해 시멘트, 유리, 콘크리트, 강철 등의 자원을 16배나 많이 소비하며 300배나 많은 폐기물을 만들어 낸다.

p.380

 

저자는 책의 마지막 장에서 환경주의의 종교적 성격을 지적한다. "기성 종교색이 옅은 고학력층을 위한 신흥 종교"라고 말이다. 환경주의는 신도들에게 "새로운 인생의 목적을 제공"하고 선악의 구분 기준이 되며, 과학의 외피를 쓰고 "지적인 권위"까지 얻었다. "어떻게 감히"라며 자신의 윗세대 모두를 호통치는 어린 소녀의 눈빛에서 (용기보다는) 종교성을 읽었다면 과한 일일까.

 

이 현상을 면밀히 연구 한 한 학자의 결론에 따르면 대부분의 환경주의자들은 자신들이 유대교-기독교 신화를 반복하고 있다는 사실을 자각하지 못한다. 유대교-기독교 신화와 도덕 체계가 서구 문화에 워낙 깊숙이 뿌리박혀 있기 때문이다. 환경주의자들은 이미 무의식의 기반에 깔려 있는 유대교-기독교 신화를 의도치 않게 되풀이한다. 비록 자연과 과학이란 세속 언어의 외양을 뒤집어쓰고 있지만 말이다.

p.522

 

책을 펼치고 얼마 후부터 한스 로슬링의 『팩트풀니스』가 생각났다. 우리는 비관적인 견해에 더 끌리는 경향이 있고 공포 때문에 진짜 위험을 간과한다. 현실을 왜곡시키는 본능을 누르고 사실에 근거한 판단을 해야한다. 원전 반대자들, 환경위기론자들의 주장과 마이클 셸린버거의 주장 중 어느 쪽이 더 사실에 가까울까. 후자의 책을 읽은 지금은 그의 주장이 상당한 무게를 갖고 있다. 어느 쪽의 주장이 옳든 결론은 하나다. 지구 환경이 소중하다는 것. 인간에게 뿐 아니라 다양한 생물종들을 위해서 말이다. 그러니 우리는 어느 한 쪽의 주장에 휘둘리기보다 양쪽의 의견을 고루 듣고 더 합리적인 판단을 해야 한다. 귀를 열어야 할 때다.


#지구를위한다는착각 #지구를위한다는착각리뷰대회 #마이클셀렌버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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