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윌리엄 트레버 - 그 시절의 연인들 외 22편 현대문학 세계문학 단편선 15
윌리엄 트레버 지음, 이선혜 옮김 / 현대문학 / 2015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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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랜만에 좋은 소설을 읽었다. 윌리엄 트레버. 윌리엄 트레버. 자꾸만 그 이름을 되풀이하게 된다. 좋은 작가를 뒤늦게 알게 되었다. 현대문학 세계문학 단편선 시리즈 꽤 괜찮다. 앞으로 또 어떤 작가들 단편집이 나올지 기대된다. 지난 해 열권 세트를 사고 그 뒤에 출간된 ‘플래너리 오코너’ 단편집을 샀다. 그리고 최근에 윌리엄 트레버 단편선까지 모두 열 두 권이 책꽂이에 꽂혀있다. 그 가운데 처음부터 끝까지 완독한 책은 딱 두 권이다. 하나는 ‘대프니 듀 모리에’ 단편선, 그리고 이번에 산 ‘윌리엄 트레버’ 단편집.

다른 단편모음집은 작가별로 읽고 싶을 때 하나 둘 꺼내 읽는다. 다른 책을 보다가 읽기도 하고.... 아무튼 처음부터 쭉 읽어나가지는 않았다. 유일하게 ‘대프니 듀 모리에’ 단편선은 도저히 손에서 놓을 수가 없어서 계속 읽었다. 그녀의 작품은 굉장한 흡인력이 있기 때문이었다. 히치콕 감독이 그녀 작품에서 많은 영감을 얻어서 영화를 만들었을 법하다고 느꼈다.

윌 리엄 트레버 단편집 <그 시절의 연인들>은 대프니 듀 모리에 단편집 <지금 쳐다보지 마>이후 현대문학 단편선 시리즈 가운데서 처음부터 끝까지 쭉 읽어나간 책이다. 아일랜드출신 작가는 우리나라에는 그다지 많이 알려지지 않은 듯하다. 노벨문학상에도 꽤 자주 거론되는 작가라는데, 나도 이 단편 시리즈가 아니었다면 읽을 기회가 없었을 것 같다. ‘안톤 체호프와 제임스 조이스를 계승한 현대 단편소설의 거장.’이라고도 하고 <뉴요커>는 트레버를 “영어로 단편소설을 쓰는, 생존해 있는 가장 위대한 작가”라고 찬사를 보냈다고도 한다.

괜한 소리가 아니었다. 잘 쓴다. 정말. 게다가 그냥 기술적으로 잘 쓰는 것뿐만이 아니라 그의 단편들을 읽고 나면 앞서 말했듯이 꽤 오랫동안 여운이 남는다. 그의 대표작으로 꼽히는 ‘그 시절의 연인들’을 가장 처음 읽었는데 이 작품 하나만을 읽고 나서도 뭐랄까, 바로 ‘아, 이 작가 대단하다’ 싶어졌다. 게다가 그 작품 하나만으로도 앞으로 이 사람의 작품은 볼 수 있는 한 모조리 찾아 읽고 싶어졌다.

‘그 시절의 연인들’은 어느 면에서는 안톤 체호프의 ‘개를 데리고 다니는 부인’이 떠오른다. 불륜의 사랑을 다루고 있다는 점뿐만 아니라 애잔하면서도 쓸쓸한, 불륜임에도 왠지 그들의 사랑을 응원하게 되는 간절함 이런 것까지 닮았다. 그리고 그 사랑이 그들 삶에서 어떤 의미를 지녔을지, 앞으로도 또 어떤 의미일지 짐작할 수 있기에 작품을 다 읽은 뒤에도 그 사랑을 그들이 온전히 마음속에 간직하기를 바라게 된다.

단편집은 한꺼번에 몰아 읽으면 나중에 어떤 작품이 무슨 내용이었는지 기억이 희미해지는 게 보통이다. 그럼에도 가끔 아주 오랜 시간이 지나도 선명하게 기억에 남는 작품들이 있다. 윌리엄 트레버의 작품이 바로 그렇다. 물론 지금은 읽은 지 얼마 지나지 않았기에 그럴 수도 있지만, ‘그 시절의 연인들’은 오래도록 마음에 남을 듯하다. 이 작품 말고도 ‘산 피에트로의 안개 나무’ 이 단편도 무척 인상 깊었다. 이 단편은 읽고 난 뒤 눈물이 조금 맺혔다. 그렇게 슬프거나 사람을 울리는 내용이 아님에도 작품 분위기가 그렇게 만들었다.

‘산피에트로의 안개 나무’는 십대 소년이 화자이다. 소년은 몸이 약해 곧 죽을지 모른다는 진단을 받았고, 요양차 어머니와 정기적으로 이탈리아 산피에트로 알 마레에 있는 호텔을 찾게 된다. 그리고 그곳에서 ‘파이예’라는 이름의 한 남자를 알게 된다. 어머니와 파이예 씨는 조금씩 가까워지고 소년의 눈으로 두 사람의 관계가 그려진다. 한국 단편 ‘사랑방 손님과 어머니’에서 어린 소녀의 시선처럼, 이 작품에서는 소년이 어머니와 한 남자의 사이를 이야기한다. 그런데 그 시선은 애잔하면서도 쓸쓸하고 서정적이다. 그리고 또 어느 면에서는 아름답기도 하다.

이 두 작품이 가장 기억에 남는 이유를 곰곰이 생각해보니, 삶에서는 뜻하지 않게 불가항력적인 사건이 일어나고, 그 사건으로 사람들 인생은 자기 의지와는 다르게 변한다. 이 두 작품에서는 주로 어떤 사람을 만남으로써 그 사람을 만나기 전과 후의 삶이 조금 달라진다. 그렇지만 ‘그 어떤 사람’과의 인생이 계속 이어지지는 않는다. 그 또한 한 개인의 의지와는 상관없는 것이다. 자기의 행복을 추구하겠다고 의지를 부릴 수도 있지만 그 또는 그녀에게 주어진 상황이나 여건이 절대로 그런 행복을 허락하지 않을 수도 있고, 스스로 나약해서 포기하고 말기도 한다.

그럼에도 그들이 ‘그 어떤 한 사람’을 만나서 삶이 변화되는 그 순간에는 진정으로 행복했고, 즐거웠으며 그로 인해 살아갈 희망을 얻게 되었다. 비록 그 뒤에는 ‘그 어떤 이’와 함께 하는 삶이 쭉 이어지지 않는다 하더라도 자신의 삶에서 그렇게 아름답게 빛나던 순간이 있었음으로 그 나머지 삶을 또 그럭저럭 살아가게 된다. 인생에서 뜻대로 되는 일은 그리 흔하지 않다는 것, 그렇기에 잠시나마 그런 기적 같은 일이 일어난 순간이 얼마나 소중한지, 두 작품은 역설적으로 말해준다.

윌리엄 트레버는 단편소설을 “누군가의 삶 혹은 인간관계를 슬쩍 들여다보는 눈길”이라고 정의했다. 그가 바라보는 누군가의 삶, 혹은 인간관계는 애잔하면서도 따뜻하다. 그리고 그의 시선은 주로 가난하거나 병든 사람, 노인, 결혼하지 않은 중년 여인 혹은 독신 남자 등 고독하거나 외롭고 어딘가 슬퍼 보이는 이들의 삶에 머무른다. 그들을 연민을 잃지 않은 시선으로 바라본다. 그렇기에 작품 하나하나마다 여운이 오래 남는다. 공감이 되고, 큰 위로가 된다.

소설가 줌파 라히리는 '이 책에 실린 작품에 견줄 만한 이야기를 단 한 편이라도 쓸 수 있다면 행복하게 죽겠노라고 생각했다.' 이렇게 말했단다. 그녀 정도의 작가가 왜 그런 말을 했는지 윌리엄 트레버의 단편선을 읽어보면 알 수 있을 것이다. 장편이 아닌, 단편소설의 아름다움, 치밀함, 정교함, 깔끔함, 그러면서도 강렬하고 깊은 여운을 즐길 줄 아는 이들에게 꼭 권하고 싶은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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케이 2019-08-06 17:25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잠자냥님 덕분에 저도 ‘윌리엄 트레버‘ 단편선을 읽게 되었어요. 어떤 작품이 제일 좋았는지 딱 하나만 고르기 참 어렵지만 저는 ‘로맨스 무도장‘ 이 참 좋았어요. ‘이스파한에서‘ 도 좋았고요.
같은 아일랜드 사람이고 단편집이어서 그런지 ‘더블린 사람들‘도 좀 생각이 나더라고요. 저는 ‘이블린‘ 이라는 단편을 정말 좋아하는데 이상하게 ‘로맨스 무도장‘ 의 주인공과 이블린이 일맥상통하는 면이 있더라고요.
아마도 잠자냥님께서 ‘개를 데리고 다니는 여인‘ 을 생각하며 ‘그 시절의 연인들‘ 을 좋아하신 거랑 같은 이유로 ‘로맨스 무도장‘ 에 끌렸던 것 같아요.
정말 한편 한편 주옥같고, 여운도 길고 다른 소설도 꼭 한번 읽어보기로 다짐했답니다.
더운데 건강 유의하시고 좋은 리뷰 감사합니다!

잠자냥 2019-08-07 09:35   좋아요 1 | URL
맞아요. ‘더블린 사람들‘ 좀 생각나죠? 저도 ‘이블린‘은 좋아하는 단편이에요. ㅎㅎ
이 책도 벌써 몇 년 전에 읽은 거라, 몇몇 단편을 제외하고는 기억의 희미하네요. 하하하하.
생각난 김에 ‘로맨스무도장‘ 다시 읽어봐야겠어요.
윌리엄 트레버 참 좋죠? 다른 작품도 아마 즐겁게 읽으실 수 있을 거예요. ㅎㅎ
케이 님도 무더위에 건강 잘 챙기세요~
 
앨리스, 깨어나지 않는 영혼
수잔 손택 지음, 배정희 옮김 / 이후 / 2007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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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전 손택의 [앨리스, 깨어나지 않는 영혼(Alice in Bed)]은 매우 짧은 희곡이다. 짧은 희곡이라 금세 읽을 수 있지만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한다. 재능 있는 여자가 자신의 재능을 펼칠 수 있는 상황을 만나지 못한다면 그 재능은 축복일까 아니면 독약일까? 이 책은 그런 질문을 우리에게 던진다.

‘절망 속에 살다간 앨리스 제임스를 위하여’라는 손택의 서문에서는 셰익스피어에게 여동생이 있었다면 어땠을까? 하는 질문을 우리에게 던진다. 손택에 따르면 버지니아 울프가 이미 [자기만의 방]에서 이런 상상을 했다고 한다. 울프는 셰익스피어의 여동생에게 ‘유디트 셰익스피어’라는 이름을 붙였다고 한다. ‘그렇다면 이 상상 속의 여성은 자신의 오빠처럼 위대한 희곡을 쓸 수 있는 내면의 자율성을 가졌을까?’ 손택은 이런 질문도 한다. 그녀는 아마도 유디트의 소질은 그저 소리 없이 묻히고 말았을 것이라고 말한다. ‘유디트가 용기’를 내지 못해서가 아니라 ‘여성은 쉽게 규정지어지고 대체적으로 여성 자신이 스스로를 한계 짓는 방식 때문’이라는 것이다. ‘육체적으로 매력적이면서 아버지와 남자형제들, 남편에게 참을성 있고 나긋나긋하고 고분고분하며 예민하고 배려할 줄 아는 여성이어야 한다는 의무감은 이기심과 공격성, 자신에 대한 관심과 모순되는 것이므로 마찰을 일으키기 마련’인데  ‘바로 이런 이기심과 공격성이야말로 위대한 창조성이 피어날 수 있는 필연적인 조건’이기 때문에 재능 있는 여성들이 자신의 재능을 활짝 꽃피우기에는 많은 어려움이 따른다는 것이다.

셰익스피어에게는 여동생이 없었지만 20세기 모더니즘 소설의 서막을 알렸다는 평가를 받고 있는 ‘헨리 제임스’에게는 그러한 여동생이 있었다. 바로 이 희곡의 주인공인 ‘앨리스 제임스’가 그녀다. 헨리 제임스뿐만 아니라 앨리스 제임스의 또 다른 오빠인 ‘윌리엄 제임스’ 역시 철학자로 그 이름을 떨쳤다고 한다. 이런 집안의 막내딸로 태어나 일찍이 어려서부터 풍요로운 문화적 교육적 환경에 노출된 ‘앨리스 제임스’- 그녀의 삶은 과연 행복했을까? 

[앨리스, 깨어나지 않는 영혼(Alice in Bed)]이라는 제목에서 유추할 수 있듯, 그녀는 행복하지 않았다. 재능이 있어도 그 재능을 꽃피울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녀가 살던 19세기는 그녀의 그런 재능을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녀는 평생 우울했고, 늘 자살충동에 시달렸으며 마흔네 살로 생을 마감할 때까지 계속해서 병과 싸워야 했다. 고작 할 수 있는 것은 ‘침대 위에 누워있는 앨리스’로 존재하는 것뿐이었다.

손택의 이 희곡에서 앨리스가 누워있는 침대(정확히는 ‘매트리스’)는 여러 가지를 시사한다. 그것은 앨리스가 직면한 현실의 무게일 수도 있고, 앨리스에게 허용된 세상, 그러니까 영리하고 명민하지만 앨리스가 그 재능을 펼칠 수 있는 무대는 ‘매트리스’만큼의 작은 공간일 뿐이라는 것을 의미하기도 한다. 적어도 앨리스의 오빠(작품에서는‘해리’로 나온다)와 아버지는 그녀가 재능 있다는 것만큼은 인식은 하기 때문이다. 매트리스의 크기만큼? 그러나 그녀가 그 재능을 펼칠 수 있는 공간은 한정적이다. 사회적인 진출로는 막혀있기 때문이다. 게다가 그녀의 재능을 알고 있는 아버지는 ‘너는 너희 오빠들 다음으로 재능 있는 아이’라며 ‘남성 뒤에 서 있기를’ 은연중에 강요한다. 철저한 가부장적 사고방식이다.

이 희곡의 클라이맥스는 우리에게 잘 알려진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의 ‘이상한 차 모임’을 차용한 5장의 ‘차 모임’이 아닐까. 이 장면에서 손택은 두 명의 실존 인물과 두 명의 가상 인물을 초대해 시대와 화합하지 못하는 재능 있는 여성이 처한 현실을 효과적으로 그려내고 있다. 실존 인물 중 한 명은 19세기 미국의 페미니즘 운동가이자 평론가인 ‘마가렛 풀러’이며 또 다른 한 명은 ‘에밀리 디킨슨’으로 그녀는 살아있는 동안 1,775편의 시를 남긴 미국의 위대한 시인이지만 살아있는 동안은 고작 10편 남짓한 시만 발표했을 뿐이고 죽은 뒤에야 그녀의 가치가 빛을 발휘한 ‘시대와 화합’하지 못했던 재능 있는 여성으로 앨리스와 같은 운명에 처한 여인이라고 할 수 있다.

손택은 일평생 이 희곡을 쓰기 위해 오랫동안 준비해 왔다고 한다. ‘이 연극은 어려움에 처한 여성들의 분노에 대한 연극이며, 결론적으로 상상력에 대한 연극이다. 정신적 감옥의 현실, 상상력의 승리 말이다. 그러나 상상력의 승리만으로는 충분하지가 않다.’라는 그녀의 서문 또한 여전히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한다. 19세기에 고작 할 수 있던 것은 매트리스 위에 누워있는 것뿐이었던 재능 많은 여성 앨리스, 1991년에도 여전히 ‘충분하지 않다’고 말한 또 다른 여성 손택, 그리고 앨리스의 시대에서 2세기가 훌쩍 지난 2008년을 살아가는 재능 있는 또 다른 여성들… 그녀들은 과연 충분할까? 단지 19세기에 비해 매트리스의 크기만 조금 커진 것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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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자냥 2023-09-13 14:4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니 건수하님 이 오래된 글에 어찌? ㅋㅋㅋ
 
부자 나라, 가난한 시민 - 진정한 풍요란 무엇인가
데루오카 이츠코 지음, 홍성태 옮김 / 궁리 / 2007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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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루오카 이츠코의 [부자 나라, 가난한 시민] 이 책을 다 읽고 덮을 때쯤 생각난 영화 한 편이 있다. [카모메 식당]- 이 영화에서 핀란드인이 일본인에게 ‘우리에게는 숲이 있잖아요’라는 뜬금없는 대사를 날리는데, 이 책을 읽고 나니 왜 영화 속에 그런 대사가 삽입되었는지 조금은 이해가 간다. 일본인은 자신들을 부자 나라에 사는 매우 가난한 시민들로 생각을 한다. 나라는 경제적으로 풍요로운데, 그들 자신은 빈곤하기 그지없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그 빈곤함을 나타내는 대표적인 예로 ‘숲이나 나무’와 같은 자연 친화적인 환경을 거의 볼 수 없다는 것을 꼽는다. 저자에게 있어 그리고 이 책 속에 소개된 많은 일본인들의 증언을 따르자면 ‘진정한 풍요’의 조건으로 ‘자연’을 꼽는다. [카모메 식당]은 그런 면에서 물질적으로는 풍요롭기 그지없는 삶을 사는 일본인들이지만, 그들이 얼마나 지금 정신적으로 빈곤하게 살아가고 있는지를 보여주는 대표적인 영화로 읽힌다. 핀란드도, 핀란드 카모메 식당의 그 여유로운 풍경도 일본인들에게는 그저 ‘꿈’과 같은 현실이라는 것 또한….

이 책의 부제는 ‘진정한 풍요란 무엇인가’, 원제는 ‘풍요란 무엇인가’로 인간의 삶에서 ‘풍요’가 의미하는 것이 무엇인지 살펴본다. 경제대국 일본에서는 쓰레기장에 새로운 가전제품이 날마다 넘쳐난다. 일본인 1인당 GNP는 1988년 302만 6천 엔(23,620달러)으로 이미 1986년에 미국을 따라잡았다. 일본인의 저축합계는 약 580조로 1년치 GNP를 훨씬 넘는다. 경제 대국 일본의 면모를 일일이 설명하지 않아도, 세계에서 가장 잘 사는 ‘부자 나라’임은 틀림없다. 그러나 저자는 묻는다, 정말 일본은 그래서 ‘풍요로운 사회’인가 하고. 대부분의 일본인들은 자신들은 ‘부자 나라’의 시민임은 인정하지만 그들 스스로 ‘풍요로운 삶’을 살고 있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국토 개발로 여기저기 파헤쳐진 좁은 땅덩이에 토끼장만한 비싼 집값에 획일화 된 교육에, 야근과 휴일 출근이 당연시 되는 열악한 근무 환경에 그렇게 일하면서도 노후를 걱정해야 하는 현실. 일본인이 그렇게 저축을 많이 하는 것은 상대적으로 노후가 보장되지 않아, 불안하기 때문이라는 시각이 지배적이다.

이 책에 따르면 일본인 생각하는 진정한 풍요란 이런 것들이다.

“좋은 공기와 풍부한 자연. 가까운 곳에는 도서관과 어린이집이 있고, 주부도 안심하고 취직할 수 있다. 수험전쟁도 없고, 아이들은 자유롭게 배우고 논다. 노후는 연금으로 한가하게 생활한다. 혼자 살게 되어도 복지 서비스를 쉽게 이용할 수 있어서 안심이다.”
"햇볕이 잘 드는 집에 살며, 가족이 모두 모여 저녁을 먹고, 일요일에는 가까운 공원과 교외에서 운동을 하며 땀을 흘린다. 해마다 한번 정도는 가족끼리 휴가를 즐긴다.”
“보통 직장인도 한 시간 정도의 통근거리에 괜찮은 집을 가질 수 있다.”
“평화로운 것, 노후가 불안하지 않은 것”
“조금 불편해도 공해, 농약, 식품첨가제가 없는 생활.”
“자유로운 시간”(이 대답이 압도적으로 많음)
“장래의 생활에 대한 불안을 없애야 오늘의 생활에 여유가 생긴다.”

반면 일본의 빈곤함을 상징하는 것은 이런 것들이다.

“획일화되고 개성 없는 교육”
“적은 국민연금”
“높은 세금, 주입식 교육”
“연수입이 8백만 엔이어도 집을 살 수 없다.”
“인구당 적은 공원면적”
“순위를 매기는 식으로밖에 사물을 보지 못하는 것은 인간적으로 빈곤한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일 본인은 ‘자신만 풍요로워진다며, 자신만 건강하다면’이라는 생각이 머릿속에 박혀 있습니다. 이 생각은 기업 경제전쟁의 약육강식 사상에서 온 것 같습니다. 긴 노동시간 등은 회사 상부의 사람이 자신의 형편만 생각하는 데서 일어난 문제라고 생각하며, 자신의 생각을 하지 못하게 하는 관리 교육과 관련이 크다고 생각합니다.”
“풍요란, 일에 지쳐서 토끼장 같은 작은 집으로 돌아와서 인스턴트 식품을 먹고 자는 건 아닐 겁니다. 왜 일본인은 그렇게 일할까요? 노후가 불안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이 아닐까요?”
“일 본이 가난한 이유는 일본인이 일에만 전념해서 일본을 더 나은 사회로 만들려고 하지 않기 때문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나아가 사회가 획일화되고, 사람은 사회를 운영하는 톱니바퀴의 하나일 뿐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교과서는 통일되고, 저를 포함해서 오늘의 젊은이가 삼무(三無), 혹은 사무(四無)주의자가 되고…이것은 모두 획일화의 표현입니다. 현재의 일본을 어떻게 개혁하면 좋을지 조는 잘 모르겠습니다.” (P.71~77 발췌)

사실 ‘일본’ 혹은 ‘일본인’이라는 단어를 ‘한국’ ‘한국인’으로 바꿔도 크게 무리는 없을 것 같다. 우리는 지금도 세계에서 최장 시간의 근무시간을 자랑하고, 대표적인 토건 국가로 여기저기 난개발이 이뤄지고 있으며, 부동산 투기로 계속 해서 집값은 오르고 있다. 이러다 보니 서민들은 보통 1시간 이상의 출퇴근 시간을 자랑하며 자신들을 위한 시간은 하루에 고작 한 두 시간 정도 될까 말까한 각박한 삶을 살고 있다. 그러면서도 그런 ‘빈곤한’ 삶을 벗어나지 못하는 것은 미래, 정확히는 노후에 대한 불확실함 때문이다. 언제 사회 안전망에서 벗어나게 될지 모르니까, 젊어서 조금이라도 더 모아야 한다는 생각에 경제 동물이 되어 가고 있다. 일본과 크게 다르지 않다.

책을 읽으면, 역시나 답답해지지만, 우리 삶에 ‘진짜 풍요’란 사실 개인 시간을 많이 갖는 것, 그리고 그 시간을 자신이 좋아하는 사람들과 자신이 좋아하는 일을 하면서 보내는 것이라는 소박한 진리를 깨닫게 해주는 좋은 책이다. 혹시 자신이 회사형 인간으로 살아가면서 정말 소중한 것을 잃고 있는 것은 아닌지, 되돌아 볼 계기도 마련해 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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