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과디아 - 1920년대 한 진보적 정치인의 행적
하워드 진 지음, 박종일 옮김 / 인간사랑 / 2011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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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과디아 - 1920년대 진보적 정치가의 행적>은 하워드 진의 최초 저작으로 1959년 그의 박사 논문이기도 하다. ‘라과디아’라는 인물에 대해 딱히 크게 아는 바가 없음에도 이 책을 읽게 된 이유는 이런 이유 때문이었다. 하워드 진의 ‘최초’ 저작이면서 ‘박사 논문’이었다는 점. 석사나 박사 논문은 굳이 꼭 다 읽어보지 않더라도 어떤 주제와 소재를 선택했느냐에 따라 그 연구자의 주요 관심사를 알 수 있고 앞으로의 학문 방향까지 가늠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런 의미에서 하워드 진이 ‘피오렐로 라과디아’를 박사 논문 주제로 삼은 것은 참 ‘그 다운’ 선택이라는 생각이 든다. 라과디아는 1934년에서 1945년 동안 공화당의원으로 뉴욕시장을 세 번이나 했던 사람이지만 이탈리아계로 미국에서는 소수 인종에 속했고, 뉴욕시장을 하기 이전에 긴 세월을 하원 의원으로 보냈으며, 부자보다는 가난한 이들, 소수 인종, 노동자들을 위한 입법 정책을 활발히 했던 ‘20년대의 진보주의자’라고 불리는 사람이다.


하워드 진은 역사는 역사책에서 자주 언급되는 유명한 사람들에 의해 움직이는 게 아니라 오히려 이름 없는 무수한 사람들의 힘에 의해 변화하고 발전되어왔다며 ‘민중의 힘’을 항상 역설해 왔다. 때문에 하워드 진이 서술한 역사서를 보면 주류 역사관과는 많이 다르다. ‘민중의 힘’, 보이지 않는 작은 사람들의 변화의 힘과 가치에 더 큰 의미를 부여해온 그의 관점은 ‘피오렐로 라과디아’를 박사 논문 주제로 선택했을 때부터 예견되었다고 볼 수 있다.


라과디아가 하원 의원으로 열정적으로 활동하던 1920년대 미국은 ‘번영의 시기’라 하여 부가 넘쳐났고 사회는 흥청망청이었다. 피츠제럴드가 그의 소설에서 묘사한 ‘재즈시대’가 바로 이 시기이기도 하다. 그러나 피츠제럴드가 이때를 다룬 자신의 작품에서 넘쳐나지만 공허한 사람들을 그렸고, 실제로 자신의 주변에서 이유 없이 삶을 포기하거나 망가져 버린 사람들을 언급했듯, 화려한 1920년대의 이면에는 그렇지 못한 사람들의 삶도 있었다. 선택받은 소수를 제외하고 대부분 사람들의 삶은 크게 나아질 것이 없었다. 오히려 부가 소수로 집중하면서 화려한 성장의 뒤편에 남겨진 사람들의 삶은 더욱 궁핍하고 어려워졌다.


라과디아는 바로 그런 사람들을 위해 일했다. 하워드 진은 라과디아의 의회 활동을 꼼꼼하게 찾아내어 기록하며, 그 의미와 한계 등을 되짚는다. 라과디아는 전기와 석탄과 같은 산업이 소수 기업에게 독점되는 행태를 막고자 기간산업의 국유화를 줄기차게 주장했고, 노동자의 파업권을 보장하라고 싸웠으며, 누진세제를 통한 부의 재분배를 외쳤다. 어떻게 보면 공화당과는 전혀 반대되는 정책을 내세웠다고도 볼 수 있다(공화당에서는 소수인종에게 인기가 좋았던 라과디아가 필요했기에 그를 쉽게 내치지 못했고, 라과디아에게 있어 당은 중요하지 않았다).


하워드 진은 라과디아의 이런 입법 활동들이 ‘뉴딜’ 정책의 기반이 되었다고 평가를 한다. 누구나 다 뉴딜하면 루즈벨트를 떠올린다. 역사도 루즈벨트 = 뉴딜이라고 기록한다. 그러나 하워드 진은 뉴딜의 기반을 닦은 사람으로 ‘라과디아’를 지목한 것이다. 보이지 않는 소수의 사람, 민중의 힘에 더 주목한 하워드 진의 시선답다. 물론 라과디아를 ‘보이지 않는’, ‘민중’으로 보기엔 무리가 있지만 역사에서 자주 다루는 인물들에 비하면 ‘보이지 않는’ 사람이라고 할 수 있으리라.


<라과디아>는 하워드 진의 학문 및 정치 세계의 출발점을 엿볼 수 있다는 점에서 의미 깊기도 하지만 ‘라과디아’라는 인물과 그가 살았던 1920~30년대 미국의 또 다른 면을 살펴볼 수 있다는 점에서도 흥미롭다. 라과디아는 약자를 위해 줄기차게 싸운 사람이라는 점에서 높은 점수를 줄 ‘정치인’이다. 그러나 ‘정치인’이기에 어쩔 수 없이 한계로 느껴지는 부분도 종종 있다. 1차 대전에 참가하며 전쟁을 옹호하기도 했으며, 이탈리아계 표를 잃지 않기 위해 무솔리니에 대한 비판도 하지 못했다. 또한 때로는 선거에서 이기기 위해 맞대결하는 상대방을 저열하게 깎아 내리기도 했다.


그러나 인간이자 정치인이었던 ‘라과디아’가 이런 한계가 있었음에도 ‘대단한 사람’이었다고 평가를 내릴 수 있는 건 그가 결국 그런 자신의 오류를 수정해나갔기 때문이다. 전쟁을 옹호했던 자신도, 무솔리니를 비판하지 못했던 자신도 부끄러웠는지 훗날의 그는 변모한다. ‘진보’란 이런 게 아닐까. 서로 말과 글로 진짜 진보니, 가짜 진보니 ‘진보 싸움’에 여념이 없는 한국의 '자칭' 진보주의자들에게 ‘라과디아’를 권하고 싶다. 진짜 진보란 사회의 약자를 위해 끊임없이 싸우는 사람, 자본보다 사람이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사람, 때문에 그 자본에 맞서 싸울 줄 아는 사람, 인간이기에 오류와 한계가 있을 수 있지만 자신의 그 오류를 인정하고 고쳐나갈 수 있는 사람이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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삐에르와 장 창비세계문학 9
기 드 모파상 지음, 정혜용 옮김 / 창비 / 2012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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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날 예상치 못하게 누군가의 유산을 물려받게 된다면? 생면부지의 사람은 아니지만 유산을 받으리라고는 전혀 기대할 수 없었던 사람에게서 막대한 재산을 물려받을 상속자로 지정된다면 기분이 어떨까? 그 재산으로 인해 그는 굳이 일을 하지 않아도 되고(일은 필수가 아닌 선택 사항이 된다), 앞으로 남은 일생 동안 돈에 쪼들리지 않으면서 하고 싶은 일을 마음껏 할 수 있게 된다면, 그 유산을 남겨 준 이에게 무한한 감사를 하게 되리라. 


그런데 그 유산이 형제 중 유독 나, 혹은 내가 아닌 다른 형제 단 한 사람에게만 남겨 진 것이라면 기분이 어떨까? 받지 못한 이는 아무리 형제라 할지라도 알게 모르게 질투가 날 것이며 유산을 받은 형제의 그 ‘행운’을 몹시도 부러워하지 않을까? 인간이라면 그 누구도 선택 받지 못한 사실에 대해 질투든 괴로움이든 부러움이든 자학이든 어떤 형태로의 ‘고통’을 맛보게 될 것이다.


<삐에르와 장>의 형제 ‘삐에르’와 ‘장’이 바로 그렇다. 다섯 살 차이인 두 형제는 어릴 때부터 알게 모르게 경쟁관계에 있었다. 성인이 되어서는 의식적으로도 서로에게 지지 않으려는 생각을 하게 된다. 특히 동생 ‘장’에게 어릴 때부터 비교당해 온 첫째 ‘삐에르’는 더욱 그렇다. 그런데 하필이면 첫째인 자기를 제치고 동생 ‘장’이 아버지의 친구로부터 막대한 유산을 물려받게 된다. 설상가상으로 이 재산때문에 두 형제가 동시에 마음에 두었던 여인이 ‘장’에게 급속도로 마음을 열게 된다. 


‘대체 왜, 첫째인 나를 제치고 둘째인 ‘장’에게 유산이 물려진 것일까? 아버지의 친구였던 ‘마레샬’을 기억해보면 어릴 때 ‘삐에르’ 자기 자신을 무척이나 아꼈던 것 같은데 말이다!’ 삐에르는 점차 동생의 행운을 부러워하다, 질투, 시기의 단계를 거쳐 점점 망상 속으로 빠져들어 간다. 대체, 왜…. 내가 아닌 ‘장’인가? 이 유산 상속에는 필시 아무도 모르는 뭔가, 엄청난 비밀이 있을 것이다!


기 드 모파상의 <삐에르와 장>은 두 형제 중 한 사람에게 우연히 막대한 유산이 상속되면서 벌어지는 일을 굉장히 탄탄한 구도 속에서 갈등을 겪는 인간의 마음을 예리하게 묘사하고 있다. 돈을 갖게 된 자와 그렇지 못한 자의 심리는 물론 두 형제 사이의 갈등. 그뿐만 아니라 이들이 속한 가족과 주변 인물(그래 봤자 몇 안 되는)의 심리가 탁월하게 그려진다.


작품은 그리 길지 않지만 전체 9장으로 이루어진 분량 속에 '평온한 가정->어느날 유산이 증여 됨 -> 형제간의 미묘한 갈등 -> 형 삐에르의 내적 갈등 -> 유산이 장에게 주어진 이유가 밝혀 짐 -> 삐에르와 장의 갈등 증폭 -> 장의 갈등 -> 갈등의 타협 혹은 미진한 해소'의 구조로 빠르게 전개된다. 눈치 빠른 사람이라면 왜 동생 ‘장’에게 유산이 주어졌는지 이 글만 보고도 알 수 있으리라. 그렇다하더라도 이 두 형제 및 가족들의 심리 변화를 지켜보는 것만으로도 이 소설은 읽는 재미가 쏠쏠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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훌륭한 군인 - 가장 슬픈 이야기 문예출판사 세계문학 (문예 세계문학선) 105
포드 매덕스 포드 지음, 손영미 옮김 / 문예출판사 / 2013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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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을 들고 유심히 앞뒤를 살펴보니 이런 구절이 눈에 들어왔다. ‘대중성과 문학성을 겸비한 20세기 최고의 소설이며 영어로 쓰인 최고의 프랑스 소설이라 찬사 받는 작품’. 게다가 그 밑에 적힌 문구들을 보니 더더욱 ‘오호 그래?’ 싶어졌다. <모던 라이브러리 선정> 영어 소설 100선, <옵서버>지 선정 가장 위대한 소설 100선, 영국 <가디언>지 선정, 필독 도서 1000선, 하버드대학 필독서 100선, 랜덤하우스 선정 20세기 영문 소설 100선, 피터 박스올, 죽기 전에 읽어야 할 책 10001권의 책 등등. 잘 알려진 작품이라면 이런 문구에 혹하지는 않지만 잘 모르는 작품일 때는 이런 문구가 도움이 될 때도 있다.

<훌륭한 군인: 열정의 기록>은 ‘누가 보아도 완벽했던 두 커플의 비극적인 종말을 그중 한 사람의 입을 빌려 회상하는 형식으로 풀어내고 있다’고 책 뒤에 써 있다. 작품은 이 두 커플이 만나는 지점부터 시작된다. 화자인 ‘나’ ‘존 다우얼’은 아내 ‘플로렌스’와 온천으로 유명한 독일의 한 도시로 요양을 떠난다. 플로렌스의 심장이 좋지 않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곳에서 같은 이유로 요양을 온 부부인 ‘에드워드’와 ‘레오노라’ 부부를 만나게 된다. 그리고 그들은 처음 본 순간부터 서로에게 호감을 품고 이윽고 친구가 된다. 그렇게 9년이라는 긴 세월동안 ‘완벽하다’고 느낄만한 우정을 나눈다.

그러나 이 작품의 서두부터 그들이 느꼈던 것처럼 ‘미뉴엣’과 같은 두 부부의 우정이 사실은 무척이나 연약하기만한 끈으로 이어졌음을 알게 된다. 에드워드의 아내 레오노라의 입을 통해 알게 된 사실에 따르자면 그 기나긴 기간 동안 플로렌스와 에드워드가 내내 내연관계였으며 플로렌스의 죽음 또한 그와 관계된 것임을 존 다우얼은 알게 된다.

그들의 관계에 대한 진실뿐만 아니라 <훌륭한 군인>은 작품이 진행될수록 다우얼의 눈에는 그토록 고결하고 품위 있으며 선량하기 그지없는 ‘훌륭한 군인’이었던 ‘에드워드 애쉬버넘’이 실은 그저 끊임없이 여자 뒤꽁무니나 따라다니기 바쁘던 바람둥이에 타인의 아픔조차 제대로 인식하지 못하는 이기주의자임을 깨닫게 된다. 말하자면 ‘훌륭한 군인’이라는 말은 반어적으로 쓰인 셈이다.

더 기막힌 것은 에드워드 애쉬버넘만이 그러하지 않다는 점이다. 순수함과 고결함의 표상이었던 플로렌스또한 실상은 그와는 거리가 멀고 레오노라 역시 어딘지 겉과 속이 다른 모습이 많다. 이들 뿐만 아니라 대부분의 등장인물들이 겉으로 보이는 것과 그 진실한 면이 무척이나 다르다. 누구 하나 일관성있게 정의롭다거나 도덕적인 인물을 찾아보기 힘들다.

이 이야기를 이끌어 가는 화자인 존 다우얼 역시 믿을 수 없기는 마찬가지다. 에드워드를 동경하며 닮고 싶어 하면서 찬사를 아끼지 않다가도 어느 순간에는 그에 대한 비난을 참지 못하고 그러다가도 바로 자신이 비난한 그 면을 닮고 싶어 하는 이중적인 모습을 여러 차례 보인다. 보통의 소설 속에서는 믿을 만한 화자가 등장해 사건을 기술하는데 이 작품은 그런 상식을 깨버린 것이다.

화자는 믿을만하다고 생각하면서(설사 그렇지 않은 인물이라 하더라도 이야기가 전개되면서 ‘변화’하거나 ‘성장’하리라 기대하면서) 이 기록들을 읽다가 이 화자가 전혀 믿음직한 인물이 아니라는 사실을 깨달은 순간 <훌륭한 군인> 자체가 실은 ‘진실’의 기록과는 아주 거리가 먼 이야기가 아닐까 하고 의심하면서 책을 덮게 된다.

불륜이든 어떻든 간에 분명히 구구절절한 사랑이야기를 읽었으며, <훌륭한 군인> 작품 속에는 실제로 ‘미뉴엣’과 같은 우정의 기록도 담겨 있다. 고귀하고 훌륭한 인간에 대한 묘사나 예찬도 분명히 있다. 그런데 정말로 이상한 일은 작품을 다 읽고 난 뒤 남는 것은 공허함이라는 점이다. 보통의 문학작품이 다루는 인간 감정의 가장 숭고한 부분의 하나인 ‘사랑’을 이야기했지만 그 ‘사랑’은 전혀 숭고하지도 위대하지도 감동적이지도 않다. 그저 이기적이고 끝없는 소통불가일 뿐이다.

이 작품에 그려진 모든 인물들, 인간 군상이 겉으로 보여 지는 것과 실제로 행동함에 있어서 이율배반적인 것도 마찬가지다. 그러나 이 또한 과연 진실인지 아닌지 알 수 없다. 그러기에 이 작품의 서두에 쓰여 있던 것처럼 ‘이렇게 슬픈 이야기는 들어본 적이 없다.’ 이 작품의 원제는 ‘가장 슬픈 이야기(The Saddest Story)’라고 한다. ‘인간’이라는 존재와 그들이 하는 ‘사랑’이라는 것이 결국은 이런 모습일 수밖에 없기에 슬픈게 아닐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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짧은 이야기 긴 사연
로제 그르니에 지음, 김화영 옮김 / 문학동네 / 2013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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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제 그르니에의 <짧은 이야기 긴 사연>을 펼치면 책의 맨 앞장에 이렇게 적혀 있다. ‘나는 나 자신에 대하여 삼인칭으로 말하고 싶다. 그 편이 더 어울리니까. A.O. 바르나부트’- 그 후에 펼쳐지는 13개의 단편들은 정말로 모두 3인칭이다. 베르나르 그라몽, 올리비에 마르키, 레오 루파크, 모리스 베르비에, 레오노르 등등의 이름으로 소설은 시작된다. 


은퇴한 노인, 첼리스트, 기상학자, 왕년의 스타, 미래가 불확실한 젊은이, 서점원, 샌드위치맨, 치매환자 등등 그 직업이나 계층, 성, 연령도 참 다양하다. 그러나 로제 그르니에가 쓴 그들의 이야기를 읽고 있노라면 그들의 이야기가 곧 ‘나’의 이야기, 그러니까 한 사람의 일생에서 누구나 한두 번쯤은 겪을 만한 이야기라는 사실을 깨닫게 되기까지는 그리 오래 걸리지 않는다.

 
물론 그들이 겪은 사연들만큼 드라마틱한 사건을 실제로 경험하지 않을 수는 있다. 물론 그와 반대로 더 극적인 경험을 할 수도 있고. 그러나 이런 사건들을 통해 그들이 느꼈을 법한 온갖 감정들- 쓸쓸함, 외로움, 고독, 환희, 절망, 황망함, 유쾌함, 즐거움- 은 나 자신도 다시금 떠올리게 된다. 바로 ‘공감’말이다.

 
프랑스의 ‘체호프’라고 불리는 로제 그르니에는 단편이 그리 환영받지 못하는 프랑스 문학계에서 90세가 넘도록, 현재까지 단편으로 사람들의 사랑과 인정을 동시에 받고 있는 작가이다. 짧지만 여운도 강하고 때로는 뒤통수를 치는 반전이 있기도 하고 유머러스하기도 한 그의 단편들을 읽노라면 바로 그렇기에 지금까지도 여전히 많은 사랑을 받으면서 단편을 쓰고 있는 게 아닐까 싶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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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음을 주머니에 넣고 - 언더그라운드의 전설 찰스 부카우스키의 말년 일기
찰스 부카우스키 지음, 설준규 옮김, 로버트 크럼 그림 / 모멘토 / 2015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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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전에 공교롭게도 매우 상반되는 두 작가의 에세이를 읽었다. 하나는 찰스 부코스키 <죽음을 주머니에 넣고>이며 다른 하나는 오에 겐자부로 <말의 정의>이다. 먼저 읽기 시작한 것은 오에 겐자부로 쪽인데 더 빨리 읽어치운 것은 부코스키 에세이다. 부코스키 에세이는 그만큼 읽어가기 수월하다. 이웃집에 사는 삐딱이 노인이 사람들 사는 모습을 한심스럽게 바라보는 듯한 태도랄까. 나도 그런 사람들 가운데 속하겠지만 어쩐지 읽다 보면 속이 후련하다. 그래서 이 작가 책이 그렇게 사람들한테 많은 사랑을 받나 싶기도 하다.

 

그런데 참 아이러니이다. 사람들은 찰스 부코스키의 이른바 ‘안티 히어로’적인 모습에 열광하며 그의 작품을 읽으면서도 정작 자기 자신이 사는 모습, 삶의 태도는 그가 작품에서 말하는 바와 정반대로 부와 명예와 권력에 집착하는 완전히 속물적인 모습이 아닌가? 아, 찰스 부코스키의 작품을 사 읽는 사람이라면 그 정도는 아닐까? 글쎄 그건 잘 모르겠다. 어쩌면 자신의 삶은 그런 테두리를 벗어나지 못하기에 찰스 부코스키 같은 사람이 해주는 입담을 들으면서 대리만족이라도 느끼려는 것일까? 나 또한 그런지도 모르겠다.

 

오에 겐자부로 <말의 정의>는 참 바르다. 올곧은 소리로 가득하다. 지적 장애를 가진 아들을 키우며 살아가며 느끼는 작가의 이런 저런 생각들이 담겨 있지만 큰 기둥은 환경을 생각하는 삶, 평화를 생각하는 삶, 차별이나 소외를 극복하고 인간다움을 회복하는 삶에 있다. 오에 겐자부로는 자기 자신의 삶만을 생각하지 않는, 인간의 사회적 책임을 끊임없이 상기해 준다.

 

그와 달리 부코스키의 <죽음을 주머니에 넣고>는 작가 자신이 평생 ‘바르게’ 살려는 노력을 기울이지 않았기에 누군가에게 바르게 살자고 제안하는 게 아니라(부코스키가 타인에게 그렇게 설교하는 모습을 상상해보니 피식 웃음이 나온다) 인간다움을 잃고 오로지 돈과 명예 권력 등을 쫓으며 사는 인생에 대한 비판과 함께 개인의 인간성 회복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자유로운 인간, 제대로 생각하며 사는 인간으로서의 삶이랄까. 난 이렇게 살 테니까, 나더러 너희들처럼 속물적으로 살라고 하지마! 그리고 너희들도 머리가 있다면 좀 생각해봐, 이런 느낌이다.

 

물론 난 두 작가의 생각에 모두 공감하고 두 에세이 모두 나름 좋았다. 다만 찰스 부코스키 에세이를 읽으면서 이 작가의 매력(부코스키를 광적으로 좋아하는 사람들의 심리)을 조금은 알게 되었다고나 할까? <우체국> <여자들> <팩토텀>을 읽었을 때는 그 주인공 ‘헨리 차나스키’의 아웃사이더 기질에 공감은 하면서도 마초적인 모습은 조금 불편했다. 그래서 크게 좋아할만한 작가는 아니라고 생각했는데 이 에세이집을 읽으니 찰스 부코스키라는 작가가 참 매력적으로 느껴졌다.

 

그는 오로지 글쓰기를 좋아했고, 글쓰기로 구원받았으며 명성이 따른 뒤에도 그 명성을 좇지 않고 오히려 그것을 경계하며 거기서 멀리 떨어진 채 술, 여자, 경마, 글쓰기로 이뤄진 삶을 보냈다. 사람들과 어울리기를 싫어했으며 밤은 술과 컴퓨터(글쓰기)를 위해 비워두었다. 문단이라든지, 비평가라든지 작가라든지 이런 집단과 어울리기를 극도로 싫어하고 혐오하던 작가. 그의 그런 모습을 보면 작은 성공에 우쭐하고 문단이나 평론가 집단이 부추겨주니 진짜 자기가 뭐라도 되는 줄 알고 결국 그들과 돈 앞에 설설 기면서도 그것조차 인식하지 못한 채 문학 권력자입네 행세하면서 스스로 ‘아웃사이더’ 운운하는 한국의 치졸한 몇몇 작가들이 떠올라서 실소가 나지 않을 수 없다.

 

마루야마 겐지 <인생 따위 엿이나 먹어라>를 읽었을 때와도 조금 비슷한 느낌인데, 찰스 부코스키 에세이 쪽이 좀 더 편안하고 유연하며 자유로운 느낌이다. 마루야마 겐지, 찰스 부코스키, 오에 겐자부로 모두 그들이 에세이를 통해 하는 말들은 진실하게 느껴진다. 왜냐하면 그들이 곧 에세이에 쓴 그 삶 그대로 살고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왜 이런 작가들을 이 땅에서 찾아보기 힘든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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