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지와 증거
비그디스 요르트 지음, 유소영 옮김 / 구픽 / 2021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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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추석이 끝났다. 연휴 동안 또 얼마나 많은 집안에서 가족들끼리 다툼과 화해의 과정을 거듭했을까. 서로 날카로운 말을 내뱉어 상처를 주고, 차마 화해도 하지 못한 채 뿔뿔이 흩어진 가족들도 있을 테고, 겉으로는 아무 문제없이 화목하게 웃고 떠들다 헤어졌어도 마음속으로 서걱서걱한 감정의 골을 되새기고 있는 그런 가족도 있을 것이다. 물론, 드물기는 하겠지만 정말 아무런 문제없이 기쁘게 만나고 헤어진 가족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런 집안도 자세히 들여다보면 누군가 가족 중 한 사람은 남몰래 속앓이를 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여기, <의지와 증거>의 가족도 별반 다를 바 없다. 이 집안의 문제는 처음에는 그다지 심각해(?) 보이지는 않는다. 다섯 달 전,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가족들은 상속 문제로 다툼 중이다. 부모가 죽고 나서 형제들끼리 상속 다툼을 벌이는 일이 그리 낯선 풍경은 아니다. 그런데 이 집안은 조금 이상하다. 아버지가 돌아가시기 직전 몇 주 동안 형제자매들은 가족의 재산인 휴가용 오두막을 어떻게 나눠 가질 것인가를 놓고 격한 분쟁에 휩싸인 상태였는데, 아버지와 어머니는 이 오두막을 네 형제자매 중 셋째와 넷째 딸들, ‘아스트리드’와 ‘오사’에게만 상속하고자 한 것이다. 장남 ‘보드’도, 맏딸 ‘베르기요트’도 유산 상속에서 거의 배제된 상태이다. 이런 불평등한 결정에 반기를 들고 나선 장남과 달리 베르기요트는 유산 상속 따위에는 전혀 관심이 없다. 알고 보니 거의 20년 전부터 가족과 인연을 끊고 살아왔던 그녀. 오빠 보드는 가족과 소원하기는 하지만 아예 인연을 끊고 살았던 것은 아니었던 터라 이번 상속 문제가 충격적일 수밖에 없었고, 이에 자신과 비슷한 처지인 베르기요트에게 도움을 청하려고 오랜만에 연락을 해온 것이다.

장남과 맏딸은 어쩌다 가족과 그렇게 멀어졌을까? 형제 넷이 모두 부모와 연을 끊을 만큼 사이가 나쁘다면 부모와 자식들 사이에 깊은 골이 있으리라 짐작할 텐데, 유독 위의 두 남매만 겉도는 이유는 무엇일지, 책을 읽는 이들은 이 집안의 사정을 제 나름대로 헤아려 보게 된다. 나 또한 베르기요트의 일기와도 같은 글을 따라가면서 이 집안의 내막을 추리해 나갔는데, 한없이 이기적인 엄마와 종종 폭력적인 아빠의 모습에서 아마도 이 가족의 문제는 부모가 유독 위의 두 남매에게 큰 자식들이라는 이유로 아버지가 폭력을 행사한 건 아닐까, 아니면 혹시 아버지가 큰딸이나 장남에게 성폭력을 가한 건 아닐까, 의심하게 된다. 평범해 보이지만 어딘가 일그러진 가족 모습 때문에 이 책을 읽는 누구라도 큰딸이나 장남에게 그런 일이 있던 것은 아닐까 짐작하게 되는데, 실제로 그렇다. 아버지는 큰딸이 어렸을 때 지속적으로 성추행(폭행)을 해왔고, 그걸 알고 있을 거란 이유로 장남에게는 폭력을 행사했다. 사정이 이러니, 성인이 된 두 남매가 가족을 멀리하게 된 것은 당연한 수순일 것이다.

이 작품은 독자가 가족의 추악한 비밀을 알아내는 데 초점을 맞추고 있지는 않다. 초반부터 누구나 짐작 가능할 만큼 그 어두운 비밀이 남긴 상처와 고통의 흔적은 베르기요트의 일기 곳곳에서 찾아볼 수 있다. 자기만의 일도 있고, 착하고 품위 있는 남편도 있고 그와의 사이에서 아이 셋도 둔 그녀. 이런 평범한 외적 조건과 달리 그 내면은 위태로울 만큼 불안정하다. 그녀는 다른 사람, 그것도 유부남과 사랑에 빠졌고, 그런 자신에게 ‘난 어디가 잘못됐기에 이런 짓을 하고 있는지?’ 반문한다. 어린 시절의 상처가 깊은 트라우마가 되어서 그런지 인간관계 맺는 일에도 서투르고 겁부터 집어먹는다. 자기의 상처 때문에 남편을 의심하기도 한다. 이 사람은 왜 이렇게 불안정하고 위태로워 보이지, 책을 읽는 내내 생각하게 되는데, 유년기의 그 트라우마를 알게 되면 아, 그럴 수밖에 없겠구나 안타까운 마음이 절로 든다.


모든 것은 연결되어 있다. 이해하고자 하는 사람에게는 어떤 언어도 완전히 결백하지 않다. (98쪽)



‘모든 것은 연결되어 있다’는 말, 베르기요트의 집안에서는 정말 그렇다. 이 집안의 문제는 아버지의 폭력에만 있지는 않다. 책을 읽는 내내 베르기요트의 어머니에게도 분노가 치솟는데, 이 어머니는 딸을 폭력으로부터 보호하기는커녕 자기 삶을 즐기느라 자식을 돌보는 일에 아예 무관심했던 여성이다. ‘연약하고 맵시 좋은 여자’였던 엄마는 남편보다 열렬히 사랑하는 다른 사람이 있었다. 그녀의 모든 애정과 관심은 그를 향해 있었고, 남편은 그런 아내 대신 ‘더 젊고 매력적인 여자’ 심지어 그 아내가 ‘제 몸으로 낳은 그런 여자’(165쪽)인 딸에게 성적으로 집착한다. 아버지도 어머니도 둘 다 부모로서는 빵점, 아니 한 인간으로서도 빵점에 가까운 사람들이다.

베르기요트의 엄마는 딸에게 무슨 일이 일어났으리라 짐작하면서도 자기를 보호하고자 묵인하고, 남편 곁을 떠나지 않는다. 아니 떠나지 못한다. 경제적으로 혼자 살아갈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면서도 그 유부남에게 빠져서 남편에게 이혼을 요구할 때는, 어떤 정당한 근거를 찾아내려고 딸에게 혹시 네 아빠가 너에게 손을 대지 않았는지 묻기까지 한다. 모든 것이 자기 위주이다. 이런 부모 밑에서 자란 아이가 불안정하게 성장하는 것은 당연한 일 아닐까. 그런데다가 큰딸이 가족의 이 엄청난 비밀을 폭로하거나, 주위에서 알아차릴만한 이상 행동을 할까봐 부모 둘 다 노심초사 큰딸에게 관심을 기울이고 있을 때, 관심과 애정을 받지 못한 다른 두 여동생들은 박탈감을 느끼며 그들 나름대로 상처 받으며 자란다. 아버지의 끔찍한 비밀을 알지 못하고, 부모에게 사랑받고자 성인이 되어서도 온갖 노력을 다 하는 이 두 여동생 또한 어떤 면에서는 또 다른 피해자이다.  

그러나 이 집안에서 가장 큰 피해자는 분명 베르기요트이다. 유산 상속 문제로 가족의 위선을 다시 맞닥뜨리면서, 도저히 견딜 수 없게 된 그녀는 마침내 자신의 상처를 용기 내어 말하지만 그것은 거짓말로 치부된다. 세월이 흘러도 엄마는 여전해서 자기 자신이 피해자인 양, ‘사악한 음모에 휘말린 비극의 주인공인 양 신파극을 쓰고 있다’. 엄마 진짜 속셈은 ‘비판의 목소리를 잠재우고 싶은’(25쪽) 것이다. 베르기요트는 애초에 이상한 아이였고, 지금 하는 말들도 그 이상한 아이가 하는 믿을 수 없는 이야기일 뿐이다. 게다가 인권 운동가인, 아주 중립적이고 이성적인 동생 아스트리드는 베르기요트에게 섣불리 화해와 용서를 말한다. 이제 상처는 잊고 가족을 위해 화해와 용서를 해야 한다고. 그러나 베르기요트는 단 한 번도 자신의 이야기를, 상처를 제대로 꺼내 본 적이 없다. 이제야 드디어 용기 내어 입을 열었는데 오빠 보드를 제외하고는 그녀의 증언에 귀를 기울이지 않는다. 사실 보드도 유산 상속 문제에서 저쪽 편이었다면 베르기요트에게 지지를 보냈을까? 어쩐지 그러지는 않았을 것 같다.


화해는 갈등의 당사자 모두가 자신의 이야기를 말한 뒤에야 가능하다는 것을, 발칸 분쟁에서 일했으니 그런 이야기는 영원히 낡지 않는다는 것도 알고 있을 겁니다.(214쪽)

철학자 아르네 요한 베틀레센은 전후 진상조사와 화해 과정의 문제는 대체로 피해자에게 가해자만큼 많은 것을 요구한다는 점이며 그 자체가 내재적인 불평등이라고 했다. 나는 이 명제를 종종 숙고하다가 우리 가정의 화해 과정 역시 엄마와 아빠, 내 동기보다 내게서 더 많은 것을 요구하며, 그것은 부당하다는 결론을 내렸다. 게다가 전후 진상조사와 화해위원회가 꾸며 질 때는 일반적으로 피해자가 누구이고, 가해자가 누구인지 폭넓은 사회적 합의가 존재한다. 그 점에서조차 합의하지 못하면서 어떻게 화해할 수 있나? (254쪽)


화해는 갈등 당사자 모두가 자기 이야기를 입 밖으로 꺼내고 나서 가능하다. 그렇지 않고서 당사자가 아닌 이들이 화해와 용서를 말하는 것은 당치도 않다. 게다가 이런 일에서 사람들은 ‘피해자에게 가해자만큼 많은 것을 요구한다.’ 피해자의 상처는 화합을 위해 굳이 다시 꺼내서는 안 될, 덮어두어야 할 이야기로 치부될 때가 더 많다. 게다가 그 진실은 종종 의심받기 일쑤이다. 가해자와 피해자 사이에서는 이렇게 처음부터 합의하기 어려운 불공평이 존재한다. <의지와 증거>는 한 집안에서 벌어진 폭력 사건을 중심으로 피해자와 가해자 사이의 권력 불평등 문제를 짚는 한편, 그 사이사이 발칸반도 문제나, 전후 피해자들의 문제를 절묘하게 중첩시키면서 고통받은 사람들, 학대당한 피해자들의 문제까지 생각해보게 한다. ‘학대는 학대당한 사람을 파괴하여 자신을 해방시키는 일을 어렵게 한다. 고통은 누군가에게, 특히 피해자에게 유용한 뭔가로 변화시키려면 강한 노력이 필요하다.’(268쪽) 베르기요트는 자신의 고통스러운 학대 경험을 이제야 겨우 말할 수 있게 되었다. 그러나 아직 그녀에게 진정한 해방은 오지 않은 것처럼 보인다. 피해자에게 ‘유용한 뭔가’로 변화시키려는 노력은 이제 겨우 시작되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그녀는 자기의 말이 거짓이나 망상, 또는 연극 대본이 아님을 그 고통스러운 삶 그 자체로 증언한다. 누군가는 결코 믿으려 하지 않더라도, 동의하지 않더라도, ‘동의하는 사람들에게 당신은 혼자가 아니라는 것을 알리려고’(173쪽) 입을 열었고, 기록으로 남긴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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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락방 2021-09-24 10:55   좋아요 4 | 댓글달기 | URL
저는 엄마의 삶 전체가 그 증거라고 증언하는 딸의 편지가 정말 인상깊었어요. 그러네, 피해자의 삶이 그대로 증거이네, 라는 생각을 절로 하게 되더라고요.

잠자냥 2021-09-24 11:08   좋아요 3 | URL
맞아요, 그런 딸이 있어서 참 다행이라고 생각했어요... ㅠㅠ 베르기요트, 딸은 잘뒀구나... ㅠㅠ

공쟝쟝 2021-09-24 10:56   좋아요 4 | 댓글달기 | URL
그러니까요 왜 제2의성도 다 못읽었는 데 추석이 끝나있냔 말입니다. 근데 이 책이 이런 철학적(?)지점을 사색하길 건네는 책이었군요. 계속 읽어보려고 째리는 중인데. 네? 알았어요. 제2의성 다 읽고요.. 그리고 시작할게요.. 뭐라고요? 정신 못차리고 남의 서재 돌아다니고 있다고요? ㅋㅋㅋㅋㅋㅋㅋㅋㅋ 3분만 3분만 더 놀다갈께...

잠자냥 2021-09-24 11:10   좋아요 4 | URL
네, 이 작가 책 처음 읽어보는데, 생각이 많은~ 사색적인 작가 같습니다.

˝공쟝쟝제2의성부터다읽고생각해보자˝ ㅋㅋㅋㅋㅋㅋ

유부만두 2021-09-28 08:57   좋아요 1 | URL
ㅎㅎㅎ 알라딘 마을 날라리들 여기 있...다고 쓰려니 공쟝쟝님 성실 모범생이시잖아요.
아, 저도 일해야 하는데, 그러면서 컴에 파일 띄워두고 알라딘 책 조금만(!) 사야지 그러다가 (그런데 정작 ‘사실과 증거‘는 이미 내앞에 있지만 안 읽음) 여기 와서 이러고 있.... 하, 일해야 하는데. 그런데 날이 흐리니 일할 기분이 안 나잖아요? 왜냐?! 해가 쨍쨍해야 얼릉 빨래 돌리고 커피 뽑아서 그 시간 내에 일을 하고 막 그려려고 했거들랑요. (재택의 바쁜척하기) 그런데 현실은 딩가딩가 알라딩가.

공쟝쟝 2021-09-28 09:11   좋아요 0 | URL
얽? 저도 모르게 노래 지어서 부르게 되네요? 딩가링가링 알라딩아링가… (알라딘 접속은 제게 출근 루틴…ㅋㅋㅋㅋㅋ 여기에 일할 에너지를 다 쏟아낸다)

coolcat329 2021-09-24 12:13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오...주인공 여자가 받았을 고통이 너무 컸을듯요. 가족이 다 아버지 범죄를 모른척하는 상황에서 그 아픈 비밀을 감추고 살다가 다시 만나는 설정이 참...
저도 이 책 담아둡니다.

잠자냥 2021-09-24 12:28   좋아요 2 | URL
네, 다른 가족조차 자기를 보듬어주지 않으니 그 삶이 어떠했을지 참.... ㅠ

mini74 2021-09-24 16:25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명절의 끝는 싸움이라고 ㅠㅠ 화해와 용서가 정말 가능할까요 ㅠ 저도 담아갑니다. 책하고만 화해와 용서를 하는거 같아요 ㅎㅎ

잠자냥 2021-09-24 17:35   좋아요 2 | URL
책에는 미움도 잘 안 생기지 않나요? ㅎㅎㅎㅎ

mini74 2021-09-24 18:43   좋아요 3 | URL
우리 그만 만나자.
아니야 요번 신간은 만나봐야겠어.
좋다고할땐 언제고 네가 버려둔 저 애들을 봐 !
정신차려.
뭐 이런 식? 의 ㅎㅎㅎㅎ 썰렁해서 죄송해요 ㅠㅠ

독서괭 2021-09-24 21:51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상속다툼이라니 참 명절에 잘 어울리는(?) 작품이네요ㅎㅎ “피해자와 가해자 사이의 권력 불평등 문제”를 짚는다니 읽어보고 싶어집니다… 언제나 좋은 리뷰 감사합니다🥰

잠자냥 2021-09-24 22:53   좋아요 2 | URL
아이고 언제나 잘 읽어주셔서 제가 감사합니다!
 
사무라이
엔도 슈사쿠 지음, 송태욱 옮김 / 뮤진트리 / 2021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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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무라이>, 제목만 봤을 때는 엔도 슈사쿠와 어쩐지 어울려 보이지 않는다. 엔도 슈사쿠가 사무라이 이야기를? 고개를 갸우뚱하게 된다. 그러는 한편으로는 사무라이 이야기 속에서 종교, 그러니까 예수와 그리스도 신자 이야기를 하겠지 생각하게 된다. 그리고 이 예상은 기대를 저버리지 않는다. <사무라이>는 기리시탄(에도 시대에 그리스도 신자를 가리키는 말)이 된 ‘사무라이’의 이야기이다. 무사인 사무라이와 그리스도 신자라니 그 조합이 참으로 의아한데, 이 이야기는 실제 인물을 모델로 하고 있다.

1600년대 초, 일본 동북부 센다이의 작은 항구 쓰키노우라에서 새로 만든 웅장한 갤리언선 한 척이 출항 준비 중이다. 배에는 일본인 100여 명과 스페인 선원 40여 명이 탈 예정이다. 그들이 향하는 곳은 스페인 식민지인 멕시코. 쇼군인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에도와 가까운 곳에 새 무역항을 만들어 멕시코와 직접 무역을 바란다. 그런 쇼군의 의향을 읽은 정치인들은 사절을 보내는 데 앞장선다. 때문에 이 배에는 일본인 상인들을 비롯해 사절 임무를 맡은 사무라이들, ‘하세쿠라 로쿠에몬’, ‘니시 규스케’, ‘마쓰키 주사쿠’, ‘다나카 다로자에몬’ 이 네 사람이 탔으며 통역으로 스페인인 신부 ‘벨라스코’가 동행한다.

막중한 임무를 띤 한 나라의 사절이라고 하니 그 신분이 화려할 것 같지만 사실 이들은 영주의 명을 받은 하급 사무라이들로 자신들이 왜 나라를 대표하는 사절이 되었는지 어리둥절하기만 하다. 특히 이중 궁벽한 골짜기에서 농사꾼이나 다름없는 생활을 하며 지내던 ‘하세쿠라’는 자신이 선발된 이유가 더 의아하기만 하다. 그의 집안은 ‘메시다시슈’라고 불리는 토착 무사에 속하고 영주의 아버지 대부터 봉공을 해왔지만 특별한 일을 해왔던 것도 아니다. 게다가 그 자신은 달변가이기는커녕 남다른 재능도 없다. 묵묵하게 아버지나 숙부에 순종하면서 살아왔다는 것, 무슨 일이든 거스르지 않고 농민들처럼 인내하는 것만이 유일한 재능이다. 게다가 넓은 세상을 향한 호기심은커녕 야심도 없어서 이 골짜기를 떠나기가 꺼려지기만 한다. 그러나 숙부의 오랜 꿈(공을 세워 이 궁벽한 땅 대신 기름진 봉토를 받고자 하는)을 실현하고자 주군인 영주의 명령을 받들어 하인을 이끌고 낯선 곳으로 떠나게 된다.

통역을 자청한 신부 ‘벨라스코’는 어떤 이유로 이 배에 선뜻 올라탄 것일까? 프란치스코회 소속 신부인 그는 일본에서 열정적으로 포교 활동 중인 선교사로 자신들보다 앞서 일본에 선교하러 들어온 예수회 소속 신부들을 제치고 두드러진 공을 세워 일본에서 주교가 되기를 꿈꾸는 대단한 야심가이다. 그는 현세적 이익에 대한 감각이 아주 뛰어난 일본인의 속성을 간파하여 도쿠가와 이에야스 막부가 바라는 것-멕시코와의 무역-을 이용해 자신의 공을 세울 기회를 노린다. 포교를 위해 일본인의 탐욕을 이용하는 것이다. ‘포교도 외교처럼 술책을 부리고 흥정하고 위협하고 때로는 타협도 해야 한다.’(176쪽)는 생각을 가진 이 대단한 야심가의 멈출 줄 모르는 욕망은 저 어수룩한 사무라이들을 운명의 소용돌이 속으로 몰아간다.

힘겨운 바다 여행을 마치고 멕시코에 도착한 그들은 무사히 임무를 마치고 귀국길에 오르리라 기대하지만 정세는 급변한다. 게다가 자신의 야심을 이루고자 다른 이들을 도구로 쓰기 마다하지 않는 벨라스코 신부의 계략으로 이 사무라이들의 여행은 멕시코에서 스페인으로, 로마로 속절없이 길어지기만 한다. 그 여정을 지켜보는 독자는 이들의 임무가 결코 쉽사리 이뤄지지 않으리라는 것, 그리고 행여 그렇다한들 일본으로 돌아간 그들 앞에 화려한 앞날이 기다리고 있지는 않으리라는 것을 쉽게 예상할 수 있다.

이런 가운데 사무라이를 포함한 그의 종자 ‘요조’ 등 일본인들의 변화를 지켜보는 일은 흥미롭다. 멕시코에서 무역을 손쉽게 하려는 목적으로 기리시탄이 된 일본인 상인들은 현세적 이익 때문에 임시방편으로 기독교인이 되었다. 그러나 사무라이의 하인 요조는 조금 특이하다. 그는 이 배에 오른 이들 가운데 가장 낮은 신분 계급에 속한다. 그저 자기의 주인인 ‘하세쿠라’를 묵묵히 따를 뿐, 어떤 주장이나 의견도 내놓는 일도 거의 없다. 그런데 그런 그가 벨라스코의 설교에 감화 받아 그리스도의 삶에 관심을 갖고 마침내 기리시탄이 되는 모습은 이 책에서 가장 인상 깊은 장면 중 하나이다. 아마도 그는 예수가 가장 낮은 자들과 함께 한다는, 누구도 차별하지 않는다는 그 평등한 모습에 마음을 열었던 것은 아닐까.
 
이 책의 주인공이라고 할 수 있는 하세쿠라도 인상 깊다. 그는  임무 때문이기는 하지만 기리시탄이 되기를 누구보다 꺼린다. 우연히 손에 넣은 예수의 형상이 그려진 염주를 보면서도 의아하기만 하다. 힘없이 두 팔을 벌리고, 힘없이 고개를 숙인 그 사내를 보면 벨라스코를 비롯하여 남만인 모두가 이런 사람을 ‘주님’이라고 부르는 것을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다. 그가 주(主)라고 부르는 사람은 영주뿐이며, 영주는 이렇게 볼품없지도, 무기력하지도 않다. 그의 눈에 예수는 그저 추하고 비쩍 마른 사내, 위엄도 없고 돋보이지도 않는 초라한 사내일 뿐이다. ‘이용한 후에는 버리기 위해 존재하는 사내’(316쪽)이다. 게다가 ‘인간의 죄를 짊어지고 죽었다고 하는데, 그 때문에 우리 생활이 편해진 것 같지도’ 않다. 무엇보다 기리시탄이 되는 일은 조상과 골짜기의 삶 전체를 배신하는 일이다. 죽은 조상들이 사무라이가 기리시탄이 되는 것을 허락할 리가 없다.

넓은 세상에 대한 호기심 때문에 기리시탄이 되기를 선뜻 받아들인 젊은 사무라이 ‘니시’도 있다. 그는 사무라이 일행 중 가장 젊고 순수하기에 거리낌 없이 새로운 사상이나 문물을 받아들인다. 그러나 그 결과는 가혹하여 그는 사람을 믿을 수 없게 된다. 일찌감치 그리스도신자가 되었지만, 자기들 손에는 결코 흙을 묻히지 않는, 그저 입으로만 아름다운 소리를 늘어놓는 신부들의 태도에 질려 수도사의 길을 포기한 일본인 수도사도 인상 깊다. 그가 믿는 예수는 금전옥루 같은 교회에 있지 않고, 비참한 인디오 안에 살고 있다. 그가 말하는 예수야말로 엔도 슈사쿠가 그의 여러 작품에서 꾸준히 말해온 예수의 참모습일지도 모른다.

요조, 하세쿠라, 니시, 일본인 수도사 등은 저마다의 이유로 기리시탄이 되고, 또 저마다의 이유로 그 안에서 고뇌하고 갈등하며 상처받는다. 믿음의 깊이 또한 제각각이다. 어떤 이는 과연 기독교 신자라고 말할 수 있을까 싶을 정도로 믿음의 깊이가 얕다. 그러나 나는 이 네 사람이 벨라스코 신부보다 더 예수 가까이 다가간 이들이 아닐까 싶다. 벨라스코 신부는 이 작품에서 가장 혐오스러운 인물이다. 이 인물이 등장할 때마다 눈살이 찌푸려진다. 그는 줄곧 일본인을 폄하하면서 계도와 계몽이 절실한 존재로 본다. 세속적인 이익에 매우 약삭빠른 존재라고 그들을 향한 불편한 심정을 감추지 못한다. 그러나 이 작품에서 벨라스코 신부만큼 세속적 욕망에 들끓고, ‘현세적인 이익에 대한 감각이 지나칠 정도로 예민’한 사람이 또 있는가? 그가 다른 곳도 아닌 일본에서 포교 활동을 하는 것은 그 스스로 말하듯 일본과 일본인은 그의 ‘포교 욕망을 자극’하기 때문이며, 다루기 힘든 맹수를 길들이듯이 그런 어려움을 하나하나 ‘정복’하고 싶기 때문이다. 그는 서슴없이 주님의 가르침으로 일본을 ‘정복’하고 싶다고 여러 번 말한다. 때문에 그의 주변 여러 사람이 그에게 신부가 아니라 ‘정치가’나 ‘외교가’가 되는 게 훨씬 더 좋았을 것 같다고, 한결 잘 어울린다고 말하는 게 아닐까.


그는 끝까지 일본행을 포기하지 않는다. 누군가는 순교한 그의 삶을 보고 숙연해질지도 모르겠으나 글쎄, 나는 그가 끝까지 예수의 가르침을, 주님의 가르침을 제대로 자기 것으로 삼지 못했다고 본다. 그는 끝까지 자기가 ‘정복’하지 못한 일본 땅에서 순교하기를 선택함으로써 자기 방식대로 승리했다고 믿고 죽어간 오만하기 짝이 없는 불쌍한 인간이 아닐까. “산에 오르는 길은 하나만 있는 게 아닙니다. 동서로도 길이 있고 남북으로도 길이 있습니다. 어느 길로 오르든 정상에 도달할 수 있습니다. 하느님에게 도달하는 길도 그와 같겠지요.”(130쪽)라는 그의 말은 공허하기만 하다. 어쨌든 그의 방식으로는 결코 하느님에게 도달할 수 없을 것 같다. 그런 벨라스코보다는 ‘신은 존재라기보다는 손길이라던’ 오쓰(<깊은 강>)의 깨달음과 맞닿아 있는 그들, 하세쿠라, 요조, 그리고 일본인 수도사 그들이 더 가까이 신에게 다가간 것은 아닐까. 사무라이, 그가 그토록 헤매다 마침내 만난 진정한 왕은 아마도 예수가 아니었을까.


“나는 형식적으로만 기리시탄이 되었다고 생각해왔네. 지금도 그런 마음에는 변함이 없어. 하지만 정치가 뭔지를 알고 나서 이따금 그 사내를 생각해 왜 그 나라들에는 어느 집에나 그 사내의 가련한 상이 놓여 있는지 알 것 같은 기분도 들어. 사람의 마음 어딘가에는 평생 함께해줄 사람, 배신하지 않을 사람, 떠나지 않을 사람을-설령 그것이 병들어 쇠약한 개라도 좋아-찾고 싶은 바람이 있는 거겠지. 그 사내는 사람에게 그런 가련한 개가 되어주는 거야.” (469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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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레이스 2021-09-14 09:59   좋아요 4 | 댓글달기 | URL
잠자냥님의 리뷰 보고 읽기로 결정했습니다.^^

잠자냥 2021-09-14 10:30   좋아요 2 | URL
네 이 책은 정치와 종교가 적절히 섞여 있어서 흥미롭게 읽으실 수 있을 거예요-

그레이스 2021-09-14 10:35   좋아요 3 | URL
여러분들의 리뷰를 읽은 결과 읽는 쪽으로 기울고 있던 중이었어요^^
제가 침묵을 3번 넘게 읽고 논제 만들고 하면서 당시 역사도 조금 봤거든요
엔도 슈사쿠의 글은 왠지 변명이 될것같다는 생각때문에 읽고 싶지 않았는데,,, 리뷰보니 제 예단이었다는 생각이 드네요.^^

잠자냥 2021-09-14 10:40   좋아요 3 | URL
우아, 침묵 3번이나! 전 아직 그 작품만큼은 안 읽고 있다능 ㅎㅎㅎㅎ

새파랑 2021-09-14 10:05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이 책은 읽으신 분들의 평점이 다 좋네요. 잠자냥님까지 별 다섯~!! 이러면 안읽을 수 없죠 ^^ 저 표지는 너무 마음에 드네요~!!

잠자냥 2021-09-14 10:30   좋아요 3 | URL
네, 다들 평점이 좋을 수밖에 없는 작품이라고 생각합니다! ㅎㅎ

Falstaff 2021-09-14 10:37   좋아요 5 | 댓글달기 | URL
이번엔 안 낚입니다. ㅋㅋㅋㅋ 이제 종교 얘기는 좀 쉬고 싶어요.
게다가 엔도 슈사쿠 덕후께서 격찬을 하셨으니, 디스카운트를 좀 해야 마땅하지 않겠습니까. 크하하하하... =3=3=3=3

그레이스 2021-09-14 10:37   좋아요 3 | URL
ㅋㅋㅋ

잠자냥 2021-09-14 10:39   좋아요 3 | URL
ㅋㅋㅋㅋㅋ 두고 봐야지 ㅋㅋㅋㅋㅋㅋㅋ

그레이스 2021-09-14 12:40   좋아요 2 | URL
저는 주문했습니다
알라딘은 너무 빨라서 오늘 보내준대요.
다시 생각할 겨를도 없네요. ㅋ

수이 2021-09-14 12:37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폴스타프님이 안 낚이시겠다고 하신다니까 갑자기 급궁금해지는 이 심리란 ㅋㅋㅋㅋ 잠자냥님이 읽어봐봐 하면 저 이제 읽어보려구요. 잘 했죠? 하지만 아직 사지 않았다는...... 엔도 슈사쿠는 팬층이 정해져 있는 거 같아요. 저는 곰곰 머리를 굴려보니 한 권도 읽은 작품이 없어요. 이 책으로 시작해도 괜찮겠죠?

잠자냥 2021-09-14 14:29   좋아요 2 | URL
ㅎㅎㅎ 엔도 슈사쿠는 한 번 읽기 시작하면 계속 읽어보게 되더라고요. 아주 강렬한 매력이 있다고는 말하기 뭐한데 참 묘한 작가입니다. 처음 시작하신다면 이 책도 괜찮지만 그보다는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깊은 강>을 추천합니다!

mini74 2021-09-14 16:0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침묵에 이어 사무라이 ~ 침묵이 던지는 물음들이 무겁고 어려웠어요. 쉽게 읽히지만 쉽지 않은 ㅎㅎ 사무라이도 담아갑니다 ~~

잠자냥 2021-09-14 16:12   좋아요 1 | URL
쉽게 선뜻 답할 수 없는 질문을 툭 던지는 게 엔도 슈사쿠 작품의 매력 같습니다.
 
경계선
욘 아이비데 린드크비스트 지음, 남명성 옮김 / 문학동네 / 2021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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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을 읽다 보면 자연스레 작가가 어떤 사람일지 궁금해지는 경우가 있다. 《경계선》을 쓴 ‘욘 아이비데 린드크비스트’도 그런 사람 가운데 하나인데, 저 먼 스웨덴의 백인 남자가 나는 왜 궁금해지는 걸까? 시작은 <렛 미 인>이다. 나는 아직 책은 읽지 못했다. 오리지널 영화를 보고 이 작품에 홀딱 반했다. 다락방 님처럼 뱀파이어물을 좋아하는 사람도 많겠지만, 나는 뱀파이어도, 호러/공포물도 좋아하지 않는다. 그래서 <렛 미 인> 영화도 개봉 후 한참 지나서 봤다. 그런데 이 영화는 뱀파이어가 등장하지만 단순히 뱀파이어물로 정의 내리기엔 무리가 있다. 왕따 소년과 그에 못지않은 왕따(뱀파이어이기 때문에 인간 세계에 속할 수 없는) 소녀의 우정 또는 절절한 사랑이야기로 읽힌다. <렛 미 인>의 원작자 욘 아이비데 린드크비스트도 이 작품을 ‘자전적’이라고 말했다. 그 자신이 뱀파이어일 리는 없고(아닌가? 혹시 정말 그런가? 알라딘 작가 소개란에 있는 그의 얼굴 사진은 좀 그렇게도 보인다), ‘자전적’이라고 말한 까닭은 아마도 그 자신이 유년기에 왕따 소년 ‘오스카르’에 가까운 경험을 했기 때문이 아닐까.

‘무시무시하고 환상적인 존재가 되고 싶어 십대 때부터 거리 마술쇼를 선보였고, 마술사로 활동하며 북유럽 카드 트릭 챔피언십에서  입상’하기도 했다는 그의 이력을 보면 평범하지는 않다. 조금 유별나고 독특해서 사람들에게 이상한 녀석이라고 손가락질 받았을 가능성이 크다. <렛 미 인>도 처음에는 이야기가 너무 괴상하다고 출판사 여덟 곳에서 거절을 당했단다. 그러나 이 작품을 나처럼 영화로든 원작 소설로든 만나본 이들은 그 독특하고 매력적인 세계에 푹 빠졌을 것이다. 그러면서 이렇게 생각했을 것이다. 이 작가는 틀림없이 소외가 무엇인지, 차별이 무엇인지, 경험으로 알고 있을 것이라고.

《경계선》에서도 작가의 독특한 세계관은 여전하다. 그중 표제작인 <경계선>은 정말 놀라운 작품이다. 이 작품도 2018년에 영화로 만들어져, 2019년엔 국내에서도 개봉해 화제가 되었던 듯하다. 작품은 ‘티나는 사내가 나타나자마자 뭔가 숨기고 있음을 알았다.’라는 문장으로 시작한다. 티나는 스웨덴의 카펠셰르 항구 출입국 세관에서 일하고 있는데 밀수품을 귀신 같이 찾아내는 능력이 있다. 티나는 이 문제의 사내, 즉 ‘보레’가 나타나자마자 무언가 숨기고 있다는 것을 동물적 감각으로 알아내는데, 아무리 그의 짐을 수색해도 밀수품은 찾아낼 수가 없다. 단 하나 기묘한 게 있다면 ‘벌레 부화기 상자’라고나 할까. 그런데 이 이상한 남자는 짐 수색을 마친 뒤 출입국을 떠나면서 티나에게 ‘또 보게 될 것’이라는 의미심장한 말을 남기고, 그녀 뺨에 슬쩍 입맞춤을 하고는 유유히 떠난다. 티나는 무슨 짓이냐면서 화를 내지만 참 이상하다. 마음 한구석에 묘한 감정이 일렁인다.

티나는 그 뛰어난 능력으로 큰돈을 벌고 편하게 살 수도 있지만 그 모든 걸 마다하고 외딴 집에서 고독하게 살아가고 있다. ‘롤랜드’라는 남자 친구도 있지만 이름만 남자 친구일 뿐 그는 티나에게 기생해서 사는 존재일 뿐이다. 그 둘은 섹스도 하지 않는데 언젠가 한 번 시도했다가 티나가 너무나 고통스러워하는 바람에 그 이후로는 성관계를 전혀 하지 않는 사이로 지내고 있으며, 티나는 롤랜드에게 다른 여자랑 하고 와도 상관하지 않겠다고 말한다. 그 이후로 롤랜드는 주기적으로 다른 여성과 섹스를 하고 오고, 티나는 그런 사실을 알면서도 전혀 동요하지 않는다.   

사실 티나는 지나치게 못생긴 외모 때문에 콤플렉스에 시달리고 있다. 사람들에게 혐오감을 줄 정도로 못생긴 그녀는 학교 졸업파티에서 쿵짝이 잘 맞았던 남자애로부터 “너랑 다 똑같은데 얼굴만 다른 여자랑 사귀고 싶다.”는 엿같은 소리를 들은 경험이 있고, 그 이후로 사람들과의 정상적 교류를 거의 포기하고 살아간다. 그런데 어쩌다보니 롤랜드가 나타났고, 티나는 자신이 이용당하고 있음을 알면서도 삶이 그다지 행복하지도, 즐겁지도 않기에 거의 체념 상태로 그가 남자 친구라는 이름 아래 자기 집에 하숙하는 걸 내버려 두고 있다. 혐오스러운 외모로 사람들에게 외면 받는 것도 고통스러운데 설상가상으로 티나의 직업은 마을 사람들의 미움을 더 부채질한다. 마을 주민이 은밀히 갖고 들어오는 밀수품을 족족 잡아내고 눈 하나 까딱하지 않고 법대로 처벌하니, 티나는 그야말로 ‘세관에서 일하는 마녀’ 같은 존재이다.

그런데 그런 그녀에게 ‘보레’ 이 기묘한 남자는 아무런 거리낌 없이 입을 맞추고는 ‘또 볼 것’이라는 의미심장한 말을 남기고 사라진 것이다. 그 이후로 티나는 이 남자를 문득문득 떠올린다. ‘틀림없이 뭔가 숨기고 있는 게 있다’는, 그 숨기는 게 뭘까? 라는 궁금증도 있지만 실은 그 남자에 대한 기묘한 끌림에 더 가깝다. 그렇다고 그의 겉모습이 호감을 주는 것은 아니다. 호감은커녕 티나처럼 혐오감을 불러일으키는 외모이다. 땅딸막한 근육질 몸, 넓적하고 험상궂은 얼굴에 수염과 짙은 눈썹 등 지나치게 남자다워 보이는 과장된 남성성이 눈살을 절로 찌푸리게 한다. 그런데 티나는 그런 그에게 자기도 모르게 끌리면서, 묘하게 동질감까지 느낀다. 단순히 자기처럼 외모가 혐오스럽기 때문일까?

얼마 후 보레는 다시 항구에 나타나고, 이번에는 그의 비밀, 그가 숨기고 있는 것을 알아내겠다고 굳게 다짐한 티나는 그를 또 불러 세운다. 여전히 뭔가 수상쩍다. 아무리 짐을 샅샅이 뒤져도 지난번의 그 벌레 부화기를 제외하고는 특별한 게 눈에 띄지 않자, 티나는 남자 동료에게 그의 몸을 수색하도록 지시한다. 그런데 잠시 후 티나 앞에 나타난 남자 동료는 난처한 얼굴로 이렇게 말한다. “저 사람은 당신이 조사해야 할 거 같은데요.” 아니 이게 무슨 말인가 싶은데 이윽고 그가 또 말한다. “저 사람은 여자에요. 가슴도 나왔고… 성기가…….” 무슨 수술을 받았는지 엉덩이 바로 위 꼬리뼈 부근에는 커다란 흉터도 있다고 그는 덧붙인다. 아니 그 못생긴 남자가 사실은 여자라니, 티나는 어리둥절하기만 하다. 그렇게 남자다운 남자가 여자라고?! 몸수색을 마치고 어리둥절해하는 티나 앞에 선 보레는 조금 수줍게(?) 인사를 하고 그곳을 떠난다. 그가 여자라는 사실을 알고도 티나는 보레를 향한 기묘한 관심을 가라앉힐 수가 없다.

보레가 알고 보니 여자였다는 것이 밝혀지는 순간 나 또한 한방 먹은 듯 티나처럼 아니 뭐라고 띠용? 했다. 그런데 이 작품은 이 ‘띠용?’이 한 번에 그치는 게 아니라 그 이후 계속 이어진다. ‘띠용?’ ‘띠용?’ ‘띠용?’ ‘띠용?’의 연속이다. 그러면서 내가 갖고 있던 편견이 얼마나 많은지 깨닫게 해준다. 남성다운 외모를 하고 있다는 묘사만 읽고 자연스레 보레를 ‘남자’라고 단정한 나의 이 몹쓸 편견이여! <경계선>은 이렇게 여러 번 젠더와 인종에 관한 사람들의 편견을 무너뜨린다. 나와 다른 이질적인 존재에 대해 견고하게 쌓아올린, 머릿속의 ‘경계선’을 여지없이 허물어버린다. 이 책에 실린 거의 모든 작품들이 그렇게 우리 머릿속의 경계선을 지우는 데 일조한다. 이 작품들을 읽다 보면 이 ‘다른’ 존재들, 다르기 때문에 비정상이라 정의내리고, 공포와 혐오의 대상이 된 존재들보다, 그런 이들을 다르다는 이유만으로 혐오의 대상으로 만들어버린 인간들의 머릿속 ‘경계선’이 가장 두려워하고 경계해야 할 것이 아닌지 생각하게 된다. 그 경계선이 곧 인간 개개인의 삶을 ‘감옥’으로 만들고 ‘벽이 어디 있는지, 자유의 한계’(18쪽)를 더 또렷하게 만드는 것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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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쟝쟝 2021-09-08 13:30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렛미인! 자냥님 좋다시니 저도 영화 볼래요! 알고는 있었는데 선뜻 봐지지 않았던? 그리구 티나의 이야기 말이죠 ㅋㅋ 수상한 가방 ㅋㅋ 왜 뜬금없이 전 걔속 그 가방안에 마법으로 봉인된 신비한 동물들이 들어있을 것 같은지? ㅋㅋㅋ (영화 신비한 동물사전)ㅋㅋㅋ 그러면서 읽다가 예상치 못한 독후감 전개ㅋㅋ 머릿속이 산란한 좀 늦은 점심시간입니다! (두부제육볶음먹으면서 읽었어요!!) ㅋㅋㅋ

잠자냥 2021-09-08 14:27   좋아요 4 | URL
ㅋㅋ 신비한동물사전 ㅋㅋㅋㅋㅋㅋ 아 증말 그러면 갑자기 코미디 장르가 되고 ㅋㅋㅋㅋ
<렛미인>영화 정말 좋아요. 헐리우드 리메이크 버전 말고 오리지널(2008년 스웨덴 작품)로 보세요!!

공쟝쟝 2021-09-08 14:41   좋아요 3 | URL
스..스웨덴이요…? ㅋㅋㅋ 찾아보...볼께요…!! 그리고 제가 먹은 제육볶음은 재난지원금으로 사먹은 거예요!! (여기에다가 재난지원금을 자랑하고 싶었다…!!! 대체 왜? 🙄)

잠자냥 2021-09-08 16:08   좋아요 2 | URL
사람들이 좋다고 말하는 <렛 미 인> 영화는 스웨덴 버전입니다!!!

독서괭 2021-09-08 13:39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앗 띠용?? 잠자냥님 글 읽다가 함께 띠용하는 바람에 <경계선>에 대한 흥미가 사라졌다.. 가 아니고 그 뒤에도 계속 띠용이 나온다니 더 궁금하네요 ㅎㅎ

잠자냥 2021-09-08 14:27   좋아요 3 | URL
그 띠용은 시작에 불과합니다. 띠용! ㅋㅋㅋㅋㅋ 단편이긴 한데, 100쪽 넘어가는 분량에 띠용이 여러 번~

새파랑 2021-09-08 14:38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남성과 여성의 경계선 사이에 있어서 제목이 <경계선> 인가요? ㅎㅎ 저도 잠자냥님 글 보다가 띠용하게 되네요 😅

잠자냥 2021-09-08 16:08   좋아요 4 | URL
그럴 수도 있지만 그게 다가 아니랍니다~

다락방 2021-09-08 15:05   좋아요 4 | 댓글달기 | URL
저는 영화 <렛미인> 오만년전에 봤는데요, (근데 헐리우드 리메이크 버전도 있어요?? 그건 몰랐네요 ㅎㅎ) 그 영화를 딱히 재미있게 보지 않았고 그래서 이 책에 대해서도 넘어가려고 했는데, 저 경계선... 내용도 내용이지만 띠용띠용띠용띠용 이라니.. 대체 왜... 그런가 싶어서 읽어봐야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제가 읽으면서 몇 번 띠용하는지 체크해보도록 하겠습니다. 띠용띠용~

잠자냥 2021-09-08 16:11   좋아요 3 | URL
스웨덴 버전이 좋아서 그런지 몇 년 뒤에 헐리우드에서 리메이크 했더라고요. 아니, 뱀파이어물 좋아하시는 분이 <렛 미 인>은 딱히 재미 없으셨군요! ㅎㅎ 일단 저보다 한 번은 덜 띠용하겠군요.

다락방 2021-09-08 16:29   좋아요 3 | URL
저는 성인 뱀파이어를 …. 🙄

레삭매냐 2021-09-08 17:34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오호라 이 냥반이 <렛미인>의
작가였군요. 영활 참 재밌게 봤었는데 -
북구 스탈의 뱀퐈야 영화...

<경계선>도 영화로 있다고요.
한 번 구해봐야겠습니다.

잠자냥 2021-09-08 18:10   좋아요 1 | URL
네 이 양반이 그 양반입니다. 경계선 영화는 저도 보려고요. ㅎ

Falstaff 2021-09-08 19:2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윽! 이거 뭔데 또 별이 다섯이야!
아이고, 오늘 성묘 미리 땡겨서 하고 왔더니 온몸이 작신작신 쑤시는데 별이 닷개라니 참 나....
추운 동네 사는 인간들은 긴 겨울 동안 할 일이 읎어서 만날 책 읽고 글만 쓰나봐요!!!! ㅋㅋㅋ

잠자냥 2021-09-08 22:05   좋아요 1 | URL
근데 이건 단편 모음입니다! 참고하세요~ (참 그리고 판타지이기도 하고요!)

캐모마일 2021-09-08 21:58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렛미인 영화 여러 번 보고 소설 원작도 책장에 꽂혀 있는데,(근데 안 읽고 있네요...) 덕분에 소설집 출간을 알고 가네요. 일단 렛미인 원작부터 읽고 경계선을 읽으면서 저도 인간들의 머릿속 경계선에 대해서 고민하는 시간을 가져봐야겠습니다.

잠자냥 2021-09-08 22:06   좋아요 2 | URL
네, <경계선>에는 <렛미인> 외전도 있습니다.
 
중간착취의 지옥도 - 합법적인 착복의 세계와 떼인 돈이 흐르는 곳
남보라.박주희.전혼잎 지음 / 글항아리 / 2021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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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아침에는 회사에서 눈물을 흘리고 말았다. 요즘 회사가 좀 뒤숭숭하다. 부당해고가 분명한데 결국 내가 존경하던 상무님이 오늘 해임되었다. 마지막으로 직원들 앞에서 인사를 하시는데, 그분 말씀을 듣다가 기어이 눈물이 터지고 말았다. 울지 않으려 했지만 그럴 수가 없었다. 30년 가까이 몸담은 회사에서 쫓겨나듯이 짐을 싸는 그분을 위해 할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다. 회사에 노조가 있기는커녕, 내가 속한 직업군은 노조 자체가 없다. 부당함과 속상함, 아무것도 할 수 없는 무기력함, 안타까운 마음에 나는 이렇게 눈물을 흘릴 뿐이지만 내일 당장 출근할 곳이 사라진 그분의 심정은 어떠할까. 젊은 시절 모든 것을 쏟아 부은 회사에서 어떤 보호도 받지 못한 채 나가야만 하는 그분의 심정을 내가 어찌 헤아릴 수 있을까. 그렇게 열과 성을 다해 자기 회사처럼 일했어도 하루아침에 실업자 신세가 될 수도 있다는 것, 그것이 대한민국 대다수 노동자의 삶일 것이다. 나 또한 지금은 안타까운 마음에 눈물을 흘리는 처지이지만 언제고 폐기처분되어 내 자신 때문에 눈물을 삼키는 날이 올지도 모른다.

노동자란 어떤 존재인가, 노동자의 삶이란 무엇인가. 새삼 생각하게 된다. 대학 졸업 후 바로 입사해 이런저런 회사를 다니면서 경력을 쌓고 이 나이에 이르렀다. 몇 년씩 재충전을 핑계 삼아 백수로 지낸 나날들도 있었지만 대부분은 내내 일을 해왔다. 회사의 그분은 거의 쉼 없이 일하신 것 같다. 그런데도 회사 경영진의 눈 밖에 나면 부당하게 해고를 당해도 손쓸 방법도 없이 자신의 자리에서 내쫓기게 된다. 어쩌면 나는 운이 좋은 편인지도 모른다. 몇 번 이직을 하는 내내 단 한 번도 정규직이 아니었던 적은 없다. 비정규직이거나 파견근무를 하거나 용역 업체의 소개를 받아 어딘가 내가 ‘속해’ 있다는 느낌을 받을 수 없는 곳에서 일하며 그야말로 말도 안 되는 월급을 받으면서도 제대로 된 항변 한마디 못하다가 그것도 부족해 부당하게 폐기처분 당하는 일을 겪은 적은 없다. 그렇기에 오늘 아침 내가 흘린 노동자로서의 눈물은 계약직과 파견, 용역근무가 횡행하는 오늘날 이 땅에서 어쩌면 정말 사치스러운 눈물일 수도 있다.

그럼에도 노동자로서 참 고단하게 살아간다는 생각은 쉽게 지워지지 않는다. 그러나 <중간착취의 지옥도>를 읽노라니 지금의 내 처지에 나도 모르게 안도하게 된다. 그만큼 이 책에 그려진 346만 명의 ‘간접고용 노동자들’의 삶은 퍽퍽하기 그지없다. 퍽퍽하다는 말로는 부족하다. 그야말로 생지옥이다. 당신의 월급이 400만 원이라고 가정하자, 그런데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그 절반에 해당하는 거의 200만 원 가까이를 누군가가 중간에 가져가고 자신의 월급 통장에는 다달이 200여 만 원의 급여만 들어온다면, 이런 시스템을 이해하고 받아들일 수 있는 노동자가 얼마나 될까? 그러나 실제로 이런 일은 지금 대한민국 노동 시장에서 버젓이 일어나고 있다. 심지어 법적으로 제재할 아무런 근거가 없어서 중간착취를 일삼는 용역/파견 업체는 나날이 호황을 이룬다. 대기업 임원을 하다가 은퇴한 은퇴자들에게 가장 좋은 일거리가 되어가고 있다. 그것으로도 부족해 재벌 친인척들이 용역업체를 만들고 직접 운영하기도 한다. 대부분은 원청과 어떤 식으로든 관계있는 이들이 하청을 만들고 노동자를 착취하면서 자유롭게 배를 불리고 있는 것이다.

간접고용 노동자란 나처럼 사용자(회사)와 1대 1로 직접 계약서를 작성하고 일하는 노동자가 아닌, 용역/파견 업체를 통해 소개 받아 어떤 기업으로 파견 근무를 나가는 이들을 말한다. 이때 파견 근무자는 자신이 일하게 되는 회사(원청)와 직접 계약을 하는 것이 아니라 용역(하청) 업체와 계약을 맺는다. 원청은 노동자가 아닌 하청과 계약을 하는 것이므로 노동자에 대한 모든 법적 책임에서 자유롭다. 원청은 노동자의 통장에 직접 월급을 꽂아주는 것이 아니라 하청을 통해 임금을 지불하므로 하청은 온갖 명목으로 노동자의 월급에서 중간착취가 가능하다. 은행경비원, 파견직 사무보조원, 청소 노동자, 박물관 주차관리원, 콜센터 상담사, IT 개발자, 건설 노동자 등등 직종도 다양하다. 건설 노동자의 경우 일을 나눠주는 ‘팀장’이 월급이 들어오는 날 은행 앞에서 돈을 갈취하다시피 한다는 이야기(이른바 ‘똥떼기’)는 충격에 가까웠다. 그 금액도 상당하다. 그러나 그들은 돈을 이렇게 떼이면서도 목소리를 낼 수 없다. 쥐꼬리만 한 월급을 받을 수 있는 일자리마저 빼앗기게 되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모든 부당함을 참으면서, 자신의 직무와 상관없는 가욋일까지 하게 된다. 회사의 그분처럼 정규직으로 30년 가까이 일했어도 부당해고 앞에서는 한없이 약자일 수밖에 없는데, 364만 간접고용 노동자들의 삶은 더 말해 무엇 하랴. 게다가 착취는 더 약한 자들을 향해 흐르기에 이주민 노동자는 더 악랄하게 착취당한다. 그중에서도 아프리카 대륙 출신 노동자들은 더 많이 돈을 떼인다. 이것이 과연 인간의 얼굴을 한 노동 시장이라고 할 수 있을까?

이처럼 ‘거대한 부조리, 피해자는 선명한데, 가해자는 가물거리는 풍경, 억울한 사람은 있는데 다들 내 책임이 아니라고 손사래 치는 지옥’(17쪽)이 지금 이 땅의 노동 풍경이다. 이 책을 읽으며 처음에는 용역/파견업체에 분노했다. 정녕, 진심으로 이들의 폭주를 막을 법이 없는 것인가 의아했다. 그러나 좀 더 생각해 보니, 노동자를 대체용품보다 못하게 사용하면서 어떤 책임도 지지 않는 원청에 가장 큰 책임이 있는 게 아닐까, 그리고 이 원청들이 이토록 편리하게(유연하다는 말로 포장한) 노동자를 사용하고 해고할 수 있는 시스템을 만든 이 나라 법 제도가 정말 잘못된 것은 아닌가 싶어진다. 물론 이런 노동자들을 보호하기 위한 법이 만들어지기도 하고, 최저임금이 유례없이 인상되기도 했다. 그러나 그들을 보호하기 위해 만들어진 법은 허점투성이라 악용되기 일쑤이고, 최저임금이 아무리 상승했다 하더라도 용역업체에서는 식대나 마땅히 지급해야 할 보호 장비처럼 다른 비용에서 착취함으로써 월급은 여전히 제자리에서 맴돈다. 그리고 입법가들은 소수의 몇몇을 제외하고는 대부분 이들을 보호할 법안 만들기에 관심이 없다. 간접고용 노동자를 보호할 법안은 발의-방치-폐기 순을 밟으며 줄곧 제자리걸음 중이다. 이 책을 쓴 한국일보 기자들이 직접 국회의원들을 만나 이 법안을 발의하고자 애쓰지만, 극소수의 몇몇을 제외하고는 그 귀하신 분들을 만나기조차 어렵다. 정부도 원론적인 답변만을 할뿐이다. 대체 이 나라에서 노동자의 편은 어디 있는 것일까. 과연 있기는 있을까.

제도는 물론 중요하다. 그러나 나는 이 책에서 ‘아무리 제도를 잘 만들어놓아도 사람이 바뀌지 않으면 중간착취는 영원히 사라지지 않을 것’(137쪽)이라는 말이 가장 인상 깊게 다가온다. 제도와 법이 만들어져도 그 빈틈을 악용하는 사람들이 존재하는 한 착취의 지옥도는 사라지지 않을지 모른다. 한편으로는 과연 이렇게 사용자(원청) 중심이고 법도 제도도 정재계, 권력자 중심으로 돌아가는 나라에서 약자 중의 약자인 364만 간접고용 노동자들이 보호받을 수 있는 시스템이 만들어질 수 있을까 회의적인 생각과 함께 체념부터 하게 되기도 한다. 그럼에도 이 책에서 만난 100여 명의 노동자 중에는 지치지 않고 자기 목소리를 내고자 하는 이들이 있다. 그리고 “이런 기사들이 계속 반복된다면 언젠가는 국회의원 귀에 대통령 귀에 들어가겠지요? 그럼 좀 변하려나요?”(242쪽) 묻는 그들의 가족도 있다. 한국일보 기자들의 이 취재 덕분에 그들의 목소리에 귀 기울이는 척, 움직이는 척이라도 하는 국회의원들도 있다. 그리고 나처럼 소시민이면서도 이제껏 몰랐던 이 지옥도를 접하고 364만 간접고용 노동자의 삶을 전과 달리 관심 있게 살펴볼 이들도 있을 것이다. 연대의 마음이 싹트는 이들도 있을 것이다. 물론 영원히 달라지지 않을 사람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아주 티끌만큼이라도 이 책에, 이들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는 사람들이 많아진다면 잘못된 시스템을 바꾸는 일이 조금은 빨라질 수도 있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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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괭 2021-09-06 12:36   좋아요 6 | 댓글달기 | URL
˝지옥도˝라는 말이 진실이네요. 하청 문제 진짜 심각합니다. 하청에 하청을 거듭하다 보면 책임소재가 불분명해지는 게 가장 큰 문제 같아요.
에휴. 잠자냥님의 슬픈 마음이 전해져 오네요. 나가신 그분의 앞날이 너무 힘들지 않기를 빕니다..

잠자냥 2021-09-06 12:45   좋아요 6 | URL
네, 이 책을 읽다 보니, 하청의 하청을 주는 것도 노동자의 돈을 더 떼가려는 경우인 게 많더라고요.... ㅠㅠ
하, 인간이란 무엇인가.. 아침부터 참 싱숭생숭합니다.


Falstaff 2021-09-06 14:28   좋아요 9 | 댓글달기 | URL
오늘 해고를 당한 회사 상무, 그 분은 노동조합이 있더라도 조합에 가입하지 못하는 신분입니다. 즉, 노동자가 아닙니다. 상무이사면 노동법상 당연히 ˝회사를 위하여 일하는 사람˝입니다. 즉 ˝사측˝이란 것이지요. 부당해고라는 개념도 없어요. 대개 임원들이 직원들을 쥐어짜는 건 자신이 한 방에 훅 갈 수 있기 때문입지요. 이중에도 가끔 오늘 해고당한 상무처럼 인간적으로 괜찮은 사람이 섞여 있는 건 물론입니다만 아무리 인격이 훌륭해도 경영상 필요에 의하여 회사의 정관 규정과 합당하게 사장의 해고통지서 한 장이면 그걸로 아웃입니다.
다만 계약기간이 남았다면 잔여 기간동안의 급여는 100% 받아낼 수 있습니다. 소송을 해도 100대 0으로 이깁니다. 계약을 하지 않았다면 근로계약 미집행으로 노동관계법 위반으로도 소송할 수 있고, 정년까지 남은 기간의 급여를 모두 요구할 수 있습니다. 물론 전액 지급하는 회사는 보지 못했습니다만.
안타깝지만 30년 동안 회사 일을 하면서 익힌 노우 하우로 다른 직장을 찾거나, 스스로 사장이 되어 성공하기를 바랄 수밖에요. 아....... 직장 생활하면서...... 사람한테나 회사한테나......... 정 붙이지 마세요. 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

잠자냥 2021-09-06 12:57   좋아요 7 | URL
하, 그렇군요. 노동자이면서도 제가 노동법에 대해서 이토록 무지합니다. ㅠㅠ
사측인데도 저희를 쥐어짜지 않으셨기에 제가 좋아했던 건지도 모르겠네요.. ㅠㅠ

행복한책읽기 2021-09-06 13:48   좋아요 4 | 댓글달기 | URL
티끌 모아 태산에 일조하고 싶게 만드는 리뷰에요. 제도와 사람 두 바퀴가 같이 굴러가야하는데, 이게 참 쉽지가 않군요. 그러니 더욱 관심 끊지 않도록 더 귀를 기울여야겠어요.

잠자냥 2021-09-06 14:27   좋아요 3 | URL
네, 그리고 무엇보다 이 책을 읽으면 그나마 이와 관련한 입법 활동에 관심 있거나 의견을 들어주거나, 실제로 어떤 액션을 취한 국회의원들 사례도 실려 있는데요, 노동자이자 유권자의 한 사람으로 선거철에 무슨 인기 투표하듯이 투표하는 게 아니라, 그런 의원 ‘활동‘에 중점을 두고 한 표 행사하는 것도 중요하다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다락방 2021-09-06 13:49   좋아요 5 | 댓글달기 | URL
잠자냥 님의 이 리뷰를 읽으니 ‘켄 로치‘ 감독의 [자유로운 세계] 생각이 나네요. 혹시 보셨는지 모르겠어요. 영화속 여주인공도 간접 고용 되어 중간에 임금 착취를 당하거든요. 그러니 가난에서 벗어날 수가 없고 억울해서 자신이 용역업체를 차려서 이제 사람들을 일터에 꽂아주는 일을 해요. 그 과정에서 수수료를 자기가 가져가고요. 시간이 지나면서 그녀는 수수료를 더 떼어가고 더 떼어가고, 함께 그 일을 시작했던 친구는 ‘너 왜그러냐 그러지 말아라‘라고 하지만 여자는 돈이 필요하다고 악덕 용역업체 사장이 되면서 경제적으로 여유로워지죠.

책을 읽는동안 가슴 답답하셨겠습니다, 잠자냥 님.


잠자냥 2021-09-06 14:31   좋아요 3 | URL
켄 로치 감독 영화는 챙겨보는 편인데, 그 영화는 못 봤네요. 휴... 켄 로치의 나라도 여기랑 다를 바가 없군요. 자본주의 세계에서 노동자로 산다는 것은 무엇인지. 참....

그 영화는 나중에 챙겨보겠습니다.

Falstaff 2021-09-06 14:24   좋아요 6 | 댓글달기 | URL
오래 고민하고 있는 주제입니다.
아웃소싱 업체와 고용계약을 해서 파견 근무를 나간 노동자들의 경우, 한 단계를 거쳤으니 임금의 유통비용으로 원청업체가 지불하는 비용의 100%는 받지 못하는 것 까지는 동의합니다. 개인이었다면 원청업체에서 노동 자체를 하기 힘들었을 테니 수수료 명목으로 일정비율을 지불하는 건 그럴 듯하니까요.
원청업체는 파견업체 직원에게 자기 종업원과 같은 수준의 복리후생을 지원할 수는 없습니다. 노동강도를 비롯해 휴식환경 같은 것을 강요하면 아웃소싱 업체의 권한을 침해하는 것이 될 수도 있고요.
만일 직접 노동을 하되, 간접 고용을 해 임금과 노동환경에 불만을 품은 아웃소싱 업체의 직원들은 누구에게 불만을 호소해야 할까요? 원청업체? 자신을 고용한 아웃소싱 업체? 저는 아웃소싱 업체에 항의를 해야 마땅하다고 생각하는데 현상은 그러하지 못한가 봅니다.
원청업체가 아웃소싱 업체를 이용하는 건 임금 비용의 절감 하나를 위해서는 아닙니다. 해당 업무를 유지하기 위한 간접 지원의 피로를 피하기 위해서라고 하는 게 조금 더 진실과 가까울 겁니다. 여기서 피로는 물론 임금 경비도 포함하고요.
아마 간접 고용에 따른 임금 착취의 해법은 없을지도 모릅니다. 우리나라처럼 대통령이 공항의 임시직을 전부 정규직으로 바꿔라, 라고 강제하거나. 거대 의석을 차지하고 있는 정당이 간접고용 철폐 및 방지법을 통과시키지 않는 한에서는요.
저는 이 책을 읽어보지도 않았고, 읽을 생각도 없는데요, 아마 해결방법은 제시하지 않았을 거 같습니다. 물론 부처님 가운데 토막 같은 퇴로는 마련해놓았겠지요.

* 법으로 아웃소싱 업체는 원청 업체에서 산정한 파견직원의 임금을 85% 이상을 지불하여야 한다, 라고 제한할 수도 있겠지만 자본주의 체제에서는 바람직하지도 않고, 그렇더라도 우리나라의 ˝극도로 복잡한 임금체계˝ 안에서는 쉽지도 않습니다.

잠자냥 2021-09-06 14:37   좋아요 3 | URL
네, 이 책에서는 폴스타프 님이 말씀하신 그 문제점들이 구구절절 잘 드러나 있습니다. 용역 업체에서 수수료 명목으로 몇 %는 떼어 갈 수 있다고 저도 생각해요. 그런데 그 비율이 어마어마하더라고요. 한자릿수가 아닌 거예요! 전 정말 놀랐습니다. 게다가 이젠 앱을 통해 일자리를 제공하는 업체도 생겨서 노동자는 소비자들의 별점 평가에도 민감하게 반응해야 하는 지경에 이르렀더라고요(이 부분 읽을 땐 알라딘에 별점 주는 행위에 대해서 살짝 저도 고민을 하게 되었습니다 ㅋㅋㅋㅋㅋ).

해결방법도 뾰족하게 없고요... 그러니 결국 부처님 가운데 토막 같은 그런 말만 하게 되는 것 같기도 하네요..

mini74 2021-09-06 18:2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쉬운 고용 쉬운 해고. 그리고 중간 착취의 용역업체들 . 사람장사는 하는 게 아니죠 ㅠㅠ 그리고 이런 용역업체에 근무하시는 분들은 다 열악한 분들이고요. 중소기업에선 이런 용역업체가 주로 친인척이 합니다. 동생이 용역업체 만들고 형의 회사로 직원들 보내고.ㅠㅠ

잠자냥 2021-09-06 23:03   좋아요 2 | URL
에휴 그러게요, 미니 님 말씀이 거의 이 책에도 그대로 그려집니다.. 답답한 일입니다.

붕붕툐툐 2021-09-06 20:44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저도 늘 답답한 부분입니다. 왜 직고용은 안 되는 거죠? 학교의 청소노동자들도 중간에서 정말 많이 떼먹더군요. 대체 그 용업업체에서 하는게 뭐라고? 에효...

잠자냥 2021-09-06 23:04   좋아요 2 | URL
아마도 저 위에 폴스타프 님 말씀처럼 사람을 직접 관리하는 일의 피로함에서도 자유로워지고 싶은 탓도 크겠죠.

책읽는나무 2021-09-07 05:47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제가 읽고 있는 9번의 일이란 책은 같은 내용은 아니지만, 회사에서는 권고 사직을 요구하지만 끝까지 버티고 있는 주인공을 보면서 한숨이 절로 나오면서 지금 힘겹게 읽고 있었는데...잠자냥님의 이야기를 읽다 보니 겹쳐지면서 마음이 더 힘겹네요.
돈 벌이가 뭔지...ㅜㅜ
그래서 요즘 남편을 많이 위로하게 되더라구요.ㅜㅜ

잠자냥 2021-09-07 09:24   좋아요 2 | URL
네, 밥벌이의 고단함이라는 말이 절로 떠오릅니다. 그러나 그 밥벌이라도 있다는 걸 또 행복하게 여겨야 할 것도 같고요... ㅠㅠ

레삭매냐 2021-09-08 17:36   좋아요 4 | 댓글달기 | URL
이놈의 나라에서는 인간의 노동
에 대한 존중이 1도 없는 것 같습
니다.

하다못해 라이더들의 배달노동
이 없다면 그 맛난 음식도 입에 들
어갈 수 없을 텐데 말이죠...

국회에 레알 노동자 출신 국회
의원이 하나도 없다는 게 문제
중의 하나가 아닐까요.
법조인들만 정치인 해먹는 나라
의 문제입니다.

잠자냥 2021-09-08 22:17   좋아요 2 | URL
네, 공감합니다. 입법가들이 스스로 노동자라 생각하지도 않을 뿐더러 그런 생활을 해본 적이 없으니 다들 강 건너 불 구경하듯이 손 놓고 있네요. 물론 소수지만 그래도 애쓰는 의원들도 있습니다만. 그런 의원들의 활동은 잘 알려지지 않기도 하고 정당 이념 싸움에 파묻히기 일쑤라 국민들의 지지를 크게 얻지 못하는 현실이니 참 안타깝습니다.

캐모마일 2021-09-08 22:09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이런 기사들이 계속 반복된다면 언젠가는 국회의원 귀에 대통령 귀에 들어가겠지요? 그럼 좀 변하려나요?”(242쪽) 단순히 뉴스나 시사 방송에서 하청, 파견 노동에 대해서 다룰 때 눈여겨 보다가 자세한 실정을 알 생각은 못했는데, 이 책을 한 번쯤 읽어봐야 할 거 같습니다. 좋은 리뷰 감사합니다.

잠자냥 2021-09-08 22:13   좋아요 2 | URL
네 저도 스쳐가듯 뉴스나 기사로만 접한 현실과 이 책으로 만난 현실의 무게감은 전혀 다르더라고요. 꼭 한번 읽어보시길 추천합니다.

coolcat329 2021-09-08 22:3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참 슬픈 노동자의 삶입니다.
인종문제 다룬 소설 <니클의 소년들>에서도 비슷한 얘기가 나와요.아무리 법을 바꿔도 사람이 사람을 대하는 태도를 바꾸지 않으면 세상을 지배하는 악은 사라지지않는다는...
결국엔 사람이 제일 문제이고 또 그 열쇠를 쥐고 있는데 참 답답합니다.

이 책 저도 도서관에서 찾아봐야겠네요.

잠자냥 2021-09-09 10:50   좋아요 0 | URL
오, <니클의 소년들>에서도 이와 비슷한 이야기가 나오는군요. 전 그 책을 읽지 안았는데, 한번 읽어보겠습니다.

도서관에 들어오면 꼭 읽어보세요!

2021-09-13 11:42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1-09-13 11:42   URL
비밀 댓글입니다.
 
소년을 읽다
서현숙 지음 / 사계절 / 2021년 1월
평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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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주말에는 평소 잘 읽지 않는 분야인 국내 에세이 두 권을 읽었다. 위로가 조금 필요했는데 기대 이상으로 좋았다. 두 권의 책은 <어린이라는 세계>와 <소년을 읽다>이다. 두 권 모두 보관함에 오래 담아두기만 했는데 이제야 읽었다. <소년을 읽다>는 조금 더 남다르게 다가온다. 국어 교사인 저자가 소년원에 갇힌 아이들에게 봄, 여름, 가을, 겨울 사계절 동안 국어 수업을 하면서 책하고는 담쌓고 지내던 아이들을 책의 세계로 이끌어간 이야기이다. 아마도 내가 국어를 전공했었고, 돌이켜보면 학창시절 국어 선생님을 대부분 좋게 기억하고 있기에 이 책에 더 관심이 갔던 것 같다.

대학에서 국어국문학을 전공했어도 선생님이 될 생각은 없었다. 아이들을 좋아한다고 생각하지 않았고, 누군가를 가르친다는 그 일의 엄중함이 참 멀게만 느껴졌다. 대학생 때 과외를 해본 경험도 없다. 영어와 수학 위주로 돌아가는 과외 시장에서 국어라는 과목이 그다지 선호되는 것도 아니었고 내게 가르치는 재주가 있다고도 생각해 본 적이 없다. 그러던 어느 날, 정말 우연히 누군가를 가르치게 되었다. 열일곱 소녀였다. 그때 나는 다니던 회사가 망해서 실업자로 살면서 테니스만 치던 시절이었다. 광고 일은 다시 하기 죽어도 싫고, 뭘 해야 할지 막막하기만 해서 허구한 날 공만 쳤던 그런 시절. 건너건너 아는 분의 딸이 고2가 됐는데, 국어 과외를 한 번 해볼까 싶다는 거였다. 그 아이는 외동이라 영어, 수학, 중국어 등등 온갖 과외를 다 받고 있었는데 성적은 딱히 오르지 않고 답답하던 차에 국어라도 좀 시켜볼까 했던 것이다.

슬쩍 물어보니 내신 등급이 낮은 터라 부담이 덜했다. 그렇게 나는 일주일에 두 번, 그 애가 고3이 되어 대학교에 들어갈 때까지 국어를 가르쳤다. 대학 졸업 후 처음으로 ‘국어’ 책을 들고 공부하려니 초반에는 나도 좀 헤맸다. 그래도 문학은 자신 있었다. 고등학교 때 국어는 싫어했어도 문학은 좋아했다. 대학에서도 그랬다. 나는 아이에게 밑줄 긋고 단어가 지시하는 바는 무엇이고 이렇게 가르치기보다는 그냥 책을 읽혔다. 책과 거리가 멀었던 아이였던지라 “~~ 읽어봤니?” 물으면 거의 읽어본 것이 없었다. 그래서 매주 한국 근현대 단편을 몇 편씩 골라서 읽고 오게 했다. 때로는 외국 단편도 읽게 했다. 시(詩)도 매주 몇 편씩 읽혔다. 수업 중에 같이 낭독하기도 했다. 돌이켜보니 단편과 시를 읽는 동안 나도 행복했던 것 같다. 대학 졸업 후 한국 소설이나 시는 좀 멀리했던 터였다. 그런데 다시 읽거나 새롭게 읽는 시들 가운데 좋은 게 어쩜 그렇게도 많던지. 읽는 내내 즐거웠다. 아이하고는 주로 서로 감상을 나눴다. 처음에는 “이게 대체 뭔 소리에요?” 하던 아이가 몇 달이 지나니 “쌤, 이게 이걸 뜻하는 거죠?” 하면서 신이 나 있더라. 어쩌면 당연하게도 성적은 오르기 시작했다. 특히 국어는 더. 그 애가 자기가 태어나 이런 등급은 처음 맞아본다면서 신이 나서 뛰어온 날은 아직도 기억이 난다. 성적이 많이 올랐다고 그 애 어머님이 과외비를 올려주시기도 했다.

무엇보다도 그 애는 책을 좋아하게 되었다. 그때 내가 그 애를 가르치던 방에는 책이 많이 꽂혀 있었는데, 책에는 전혀 관심 없던 아이가 어느 날부터 책장 앞에 우두커니 서서 이것저것 골라보더니 “쌤, 이거 빌려가도 돼요?” 묻기 시작했다. 그렇게 야금야금 골라가서 읽기도 했을 테고 읽지 못하고 갖고 온 책도 있을 것이다. 그리고 여전히 그 애 손에 있을 책도……. 어느 날 그 애는 작가가 되겠다는 꿈을 밝히기도 했다. 2년은 그렇게 흘러갔고, 그 애는 대학을 진학했고, 얼마 전 졸업을 했다고 한다. 대학에 간 뒤 연락이 몇 번 왔지만 받지는 않았다. 그렇게 스쳐가는 인연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건너건너 아는 분의 딸이라 간간이 그 애 소식을 듣기는 한다. 중국으로 유학을 갔다더라, 돌아왔다더라, 이제 취업해야 할 때인데 살 때문에 큰일이다더라(아이가 덩치가 큰 편이었다). 그러더니 얼마 전에는 그 애가 결국 성형수술을 하고 지방흡입 수술을 하고 그러고도 우울증을 못 벗어난다는 소식을 듣게 되었다. 나는 그 이야기를 듣고 술을 마시다가 좀 울었다. 그 애가 대학생이 되었을 때, <페미니즘의 도전>을 선물해줄까 생각했던 적이 있다. 그 애 뿐만이 아니라 나의 가장 큰 조카가 대학생이 되었을 때도 그랬다. 그런데 나는 그 두 아이 모두에게 그 책을 선물하지 못했다. 과연 내가 선물할 수 있을지 잘 모르겠다. 요즘 20대 여자애들에게 과연 이 책이 선물이 될까 싶기도 하다. 그 애들을 더 힘들게 만드는 건 아닐까......
     
<소년을 읽다>를 읽는 내내 왠지 그 애 생각이 났다. <소년을 읽다>에 등장하는 아이들처럼 국어 수업을 통해 가까워진 비슷한 또래의 아이였기 때문일 것이다. 문학으로 책으로, 또 다른 세상을 만난 아이였기 때문일 것이다. 누군가에겐 어릴 때부터 부모가 책을 읽어주는 것이 당연한 일이지만, 열일곱, 열여덟이 될 때까지 그런 경험이 거의 없다시피 한 아이들의 이야기. 먹고살기에 급급해서 그것이 범죄인 줄 모르고 범죄에 가담했고, 끝내 자유를 잃고 감금당한 아이들. 그 소년들은 자신을 편견 없이 대해준 한 국어 선생님을 만나 이야기의 재미를, 이야기의 힘을 새삼 깨닫고 공감과 연민을 알게 된다. 물론 그 아이들은 죄를 지은 범법자이다. 누군가에게 해를 입힌 아이들이라고 생각하면 이렇게 쉽게 연민의 감정이 들어도 되는 걸까 고민이 들기도 한다. 그렇지만 그 아이들에게 일찍부터 “마음을 순하게 만드는 사람. 사납고 날 선 마음의 결을 조용히 빗질해서 얌전하게 만드는 사람. 싸우듯이 살다가도 팔다리에 긴장 풀고 몸도 마음도 평평하게 눕게 만드는 그런 사람.”(177쪽) 이런 사람, 이런 어른이 곁에 있었다면 아이들이 그토록 후회하는 일은 저지르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그 애와 2년 가까이 문학을 공부했던 그 시절은 다시 돌아올 수 없는 내 인생의 한 때였다. 그 애가 지금도 여전히 책을 열심히 읽고 있을지 어떨지는 알 수 없다. <소년을 읽다>의 아이들도 마찬가지이다. 그러나 그래도 한때 자신이 어떤 책을 읽고 이전까지 알지 못했던 기분을 느꼈음을, 책으로 누군가와 의견을 나누고 공감했던 순간이 있었음을 살아가면서 가끔은 좋았던 기억으로 꺼내 들춰 볼 것이다. 나는 나의 단 하나뿐인 제자, 그 애가 앞으로 살아갈 날이, 살아가면서 상처받을 것이 안타깝고 가엾지만 그래도 연락은 하지 않을 것 같다. <소년을 읽다>의 선생님과 아이들도 그럴 것이다. 그래도 내가 그렇듯이 이 책의 지은이도 그 아이들이 더 나은 삶을 살기를 진심으로 바랄 것이다. 나의 그 학생에게도, 그리고 이 소년들에게도 세상이 조금은 덜 차갑기를. 좋은 어른들을 만날 기회가 더 많아지기를 진심으로 기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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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괭 2021-08-31 10:38   좋아요 8 | 댓글달기 | URL
아.. 책 안 읽던 아이가 선생님과 함께 책을 읽으며 책을 좋아하게 되고 성적까지 오르는 이런 아름다운 이야기가..! 했는데... 씁쓸하네요 ㅜㅜ 그래도 잠자냥님이 알려주신 독서의 기쁨이 우울증을 이겨내는 데 도움이 되리라 믿습니다. <소년을 읽다>에서 열일곱, 열여덟이 될 때까지 누군가가 나를 위해 책을 읽어준 적이 없다는 이야기에 많이 마음이 아프더라구요. 어른의 잘못이 너무 크다는 생각에 참 미안했습니다.

잠자냥 2021-08-31 10:44   좋아요 7 | URL
그 애가 대학생 됐을 때만 하더라도 꿈도 많고 참 행복해했는데.... ㅠㅠ 세상이 참 아이들에게 여러 가지로 상처를 준다는 생각이 듭니다. 스무살이 넘었으니 아이는 아니겠지만 아직 아이 같아서요. 에효.

저도 그 부분 참 기억에 남았어요. 깜짝 놀라기도 했고요. 그 아이뿐만이 아니라 어딘가에 여전히 십대에 이르기까지 누군가가 책 읽어준 경험이 없는 아이들이 있으리라 생각하니 마음이 스산합니다.

다락방 2021-08-31 10:54   좋아요 10 | 댓글달기 | URL
책을 좋아하지 않고 책과 가까이 지내지 않는 사람들은 대부분 책을 접한 경험이 별로 없었겠죠. 이 책 속의 선생님이나 이 글 속의 잠자냥 님 처럼 누군가가 책을 읽어주고 같이 읽고 그에 대해 이야기를 나눌 수 있다면 아 책 읽는게 좋구나, 즐거운 거구나 느껴볼 수 있을텐데요. 책 뿐만이 아니어도 접하지 못해서 모르고 싫다고 생각하는 그런 지점들이 세상엔 아주 많을 것 같아요.

잠자냥 님의 하나뿐인 제자 이야기가 너무 아프네요. 성형수술, 지방흡입은 사실 대한민국에서 사는 여성이라면 어릴 때부터도 계속 생각하잖아요. 전 몇 년전에 서른 훌쩍 넘은 여성으로부터 예쁜이 수술 하고싶다는 얘기도 들었었어요. 그 때 진짜 제 멘탈이 나갈 것 같더라고요.

세상의 모든 어린이들에게 그리고 청소년들에게 좋은 어른들을 만날 기회가 좀 더 많아지기를 바랍니다. 잠자냥님의 바람과 같이요.

잠자냥 2021-08-31 11:16   좋아요 6 | URL
네, 책이 의외로 신기하게 재미난 거구나 하는 생각을 심어주는 것만으로 아이들에겐 다른 세상을 보여줄 가능성이 열리는 것 같아요.

외모에 대한 강박을 끊임없이 심어주는 이 사회가 참 원망스러우면서도 저부터도 그러지 말자 하는 생각을 늘 하게 됩니다...

얄라알라 2021-08-31 10:58   좋아요 7 | 댓글달기 | URL
이틀 연속, 잠자냠 님의 완결형 고품격 페이퍼에 감동 먹고 갑니다. 지방흡입으로 인한 우울이 잠자냥님의 제자분을 얼마나 힘들게 했을지....지인 중에 지방흡입하며 A/S(?)병원에서 무료로 약속해주었지만, 수술이 너무 고통스러워서 공짜로 지방 빼준대도 다신 안한다고 하신 말씀 기억납니다. 몸도 아프고, 사회적 시선에서 자유롭지 못하는 자신도 못 미덥고, 제자분이 괴로웠을 것 같아요

그래도 선생님과 책 읽으며 문학에 심취했던 시절의 힘....남아 있을 거고 다시 일으켜주는 데 큰 도움이 될 거라 믿습니다.

잠자냥 2021-08-31 11:19   좋아요 7 | URL
이틀 연속 북사랑 님의 칭찬 감사합니다. 수술을 하고도 또 주변의 시선에서 자유롭지 못하니까 이중으로 고통을 받는 것 같아요. 타인의 몸(삶)에 대해 함부로 평가하고 말하는 이 사회가 좀 변해야 할 텐데 그저 답답합니다.

그래도 그 아이가 이겨낼 수 있으리라, 이겨내길 믿어봅니다.

coolcat329 2021-08-31 11:34   좋아요 5 | 댓글달기 | URL
스쳐가는 인연이라고 생각해서 거리를 뒀던 과외제자의 안타까운 소식을 어느 날 듣고 술 마시다 눈물을 흘렸다는 부분은 그 마음 알것도 같습니다.

이 책 저도 읽고 싶고 아이도 읽어보라고 하고싶네요.

잠자냥 2021-08-31 11:54   좋아요 5 | URL
어른들이 읽어도 좋고(더 많은 어른들이 읽으면 좋을 것 같고요), 또래 아이들이 읽어도 또 여러 생각이 들 책인 것 같습니다.
행복한책읽기 님 따님(중2)은 이 책 읽고 독서기록장에 이곳 소년들에게 보내는 편지도 썼더라고요. ㅎㅎ

coolcat329 2021-08-31 17:28   좋아요 3 | URL
오 청소년이 읽어도 좋은 책이군요~독서기록 편지로 쓰기도 좋네요~

공쟝쟝 2021-08-31 20:47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아, 흡족해하며 끄덕이며 읽다가 아찔해지고 슬퍼지고 여운이 남고 그런 독후감이네요. ‘다시 만나지 않더라도‘ 제목도 한번더 생각해보게되구요.

잠자냥 2021-08-31 21:33   좋아요 2 | URL
슬포 말고 어여 고앵이 사진 올려줘여~~

붕붕툐툐 2021-08-31 23:10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아름답고도 슬픈 이야기네요~ 아마도 그 친구는 그 시절 책도 좋아했지만 잠자냥님을 좋아했던 거 같아요. 자기가 좋아하는 사람은 늘 따라하고 싶으니까요...
저 이런 책 너무 좋아해요~ 두 권 묶어서 다 잘 읽을게요. 감사합니다!

잠자냥 2021-09-01 08:32   좋아요 1 | URL
툐툐 님이 읽으시면 정말 좋아하실 거예요. 리뷰에 이야기도 한보따리 나올 듯!!

행복한책읽기 2021-09-01 00:24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쩝. 나두 이리 쓸것을. 난 제자 이야기 많은데. ㅋ 자냥님 리뷰는 북사랑님 말대로 고품격이라 따라하기 힘듬요^^ 암튼, 전 이 책 참 좋았어요. 이런 어른이 되고팠는데, 난 머하지, 그랬어요. 자냥님 제자 이야기 읽다 많이 뜨끔했네요. 저 아이들한테 뚱뚱하다 놀리거든요. 반성반성. 하지만 . . . 도돌이표가 되고 말 듯한. ㅡㅡ

잠자냥 2021-09-01 08:34   좋아요 2 | URL
이 책과 관련한 책읽기 님 글도 다 좋았습니다. 책 읽고 나서 다시 다 읽으니 더 좋더라고요. ㅎㅎ

초딩 2021-09-04 13:27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잠자냥님~
금주의 북플 뉴스레터 선정 축하드려요~

잠자냥 2021-09-04 13:33   좋아요 1 | URL
와 감사합니다~

thkang1001 2021-09-04 13:4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잠자냥님! 금주의 뉴스레터 선정을 진심으로 축하드립니다!

잠자냥 2021-09-04 14:36   좋아요 0 | URL
아이고 감사합니다~

바람돌이 2021-09-04 15:53   좋아요 0 | URL
궁금함요. 저는 왜 금주의 뉴스레터를 모르는걸까요? 알라딘 레터는 죄다 수신하는데 왜 저는 이게 뭔지 모르는걸까요???? ㅠㅠ 제발 제게도 알려주실분????

잠자냥 2021-09-04 17:22   좋아요 0 | URL
바람돌이 님, 알라딘에서 매주 토요일 오전에 광고성 메일로 보내는 게 있는데요, 그 주에 서재 글과 북튜브 중 몇 개 추려서 보냅니다. 이번주 메일 제목은 ‘(광고) 한 장의 그림, 한 장의 편지’였어요. 아마 광고의 성격이라 스팸메일함으로 가 있는 게 아닐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