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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당신에게만 열리는 책 - 이동진의 빨간책방 오프닝 에세이
허은실 글.사진 / 위즈덤하우스 / 2014년 12월
평점 :
출퇴근 길에 고속도로를 한참 달려야 한다.
매일 뉴스같지도 않은 뉴스를 들으며 다니는 일은 허망하기에,
들을만한 방송을 찾다가 뒤늦게서야 빨간 책방을 듣는다.
남들이 열광할 때는 모르다가 이제서야 듣게 되니 좋은 점도 많다.
이미 많은 방송들을 슬쩍 다운받아 들으면 되는 일이다.
어서 나오기를 기다려야하는 애태움도 없어도 된다.
1시간 반이 넘는 방송에서 가장 밀도있는 시간은 인트로다.
허은실 작가의 인트로는 방송을 기다리는 동안,
마음을 말랑하게 누그러뜨릴 수 있는 시간을 제공한다.
인트로를 모아놓은 책이 나왔으니 어서 보고 싶었다.
그런데,
막상 읽어 보면,
시집을 읽는 느낌이랑 너무 달라서 호흡이 달린다.
시집에서는
집중할 필요가 없는 시도 있고,
마음이 꽂히지 않는 시도 있고,
오래 여운이 남는 시도 있게 마련인데,
이 인트로는 1시간 반을 위한 1분이었으니,
그리고 계절 인사를 겸하여
애청자의 저녁 안부를 묻는 구절들이니 집중도가 높아야 한다.
기다림은 달콤한 설렘인 것 같습니다.
기다림은 서성임이고 뒤척임입니다.
기다리는 일은 완전히 절망하지 않는다는 말입니다.
당신에게도 한 번쯤
오지 않을 사람을 기다린 시기가 있었겠지요.'
기다림이란 '부재를 견디는 일'의 다른 말인지도 모릅니다.
나무들은 벌써 기다림의 자세로 서 있습니다.
마음의 문간에 등불 하나씩 켜두고 계신가요.(62)
작가의 글들은 말랑말랑하다.
그 말랑거림은 세계가 말랑해서가 아니라,
그 거칠고 딱딱하게 굳은 세계를
스스로의 혀로 말랑해질 때까지 녹여낸 결과물이다.
삶을 결코 녹록치 않다.
얼어 죽도록 추운날도 있고, 하염없이 한스럽게 비를 원망하는 날도 있다.
그런 날들을 견딤, 하루 더 살아냄,
그런 것이 모두 녹이고 불리는 일일 테다.
당신과 나, 우리는 이렇게 서로 멀리 있습니다
동시에 나와 당신, 우리는 이렇게 가까이 있습니다.
우리 사이에 책이 있기 때문이지요.
이 고독한 세계에서
책이든
무엇이든
연인이든
타인이든
우리에게 위안을 주는 것은
누군가, 무언가와 연결돼 있다는 느낌입니다.
책 冊 이라는 글자를 관통하고 있는 끈처럼.(145)
책의 소용은 위안이기도 하다.
그리고 소통이기도 하다.
죽간들을 엮어낸 인간의 의지처럼,
힘없는 유한자 인간이 책을 본다는 일은,
그 유한함의 한계를 깨닫고 무한에 도전하는 일이기도 하다.
시를 읽는 동안 우리는 어쩔 수 없이 무용한 사람이 된다.
하루 중 최소 1시간은 무용해질 수 있다.
아무런 이유가 없는데도 뭔가 존재한다면
우리는 그걸 순수한 존재라고 말할 수 있으리라.(김연수)
소용없는 일들을 하며
무용한 사람이 되오보는 것.
어쩌면 그것이 실용의 세계어서
우리가 낼 수 있는 최선의 용기입니다.(265)
한없이 실용을 추구하는 자본의 세계에 침윤되지 않아야 한다.
침윤될 수밖에 없기에 적극적으로 저항하는 일,
무용함과 느림의 용기를 가지는 일.
독서만큼 그 일에 적극적인 지원자는 없을 게다.
틀리는 것, 비판받는 것, 거절당하는 것, 이별하는 것,
이런 걸 두려워하지 않게 될 때
우린 고양이처럼 우아하게
이 삶에 착지할 수 있게 될 지도 모릅니다.(269)
어려서 버림받은 자는,
어려서 무력하게 가난했던 자는,
어려서 사랑받지 못한 자는,
두려움에 휩싸여 살아가기 쉽다.
그 두려움을 버리기 위해 읽어야 한다.
그래야 고양이처럼 우아하게
착지할 수 있는 법을 배울 수 있다.
쓸데 없는 것에 일부러 시간과 돈을 쓰는 일.
나를 위해 허락하는 사치 하나쯤은 부려보면 좋겠습니다.(273)
록산느를 사랑한 시라노의 '장식 깃털'처럼,
신이 내게서 모든 걸 가져가도 빼앗지 못할 단 하나.
그것은 자신을 위해 허영을 부리는 일일지 모른다.
음악이 되었든,
책이 되었든,
눈에만 담을 수 있는 풍경이 되었든 간에...
사소한 것으로 다투고 싶지 않은 마음을 들게 하는 책이다.
그렇지만, 삶이란 또 얼마나 사소한 것들로 다투게 되는 일인지...
그래서, 이런 착하게 하는 책을 가끔 만나도 좋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