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상학 숙제> 

문 : "객관적 세계는 상호주관성 또는 그것에 고유한 상호주관적 본질을 이미 본래적 의미에서는 초월하지 못하며, 내재적 초월성으로서 상호주관성에 갖추어져 있다는 점을 나는 인식해야 한다. [...] 이념으로서의 객관적 세계, [...] 상호주관적 경험의 이념적 상관자로서의 객관적 세계는 그 자체로 무한히 개방된 이념성 속에서 구성된 상호주관성에 본질적으로 관련되어있다."(p.172) 이 단락에 나타난 내재적 초월성의 개념을 설명하고, 객관적 세계는 왜 단지 이념으로서 상호주관성에 관련되어 있는지 설명하시오. 

답: 

  후설의 현상학은 어떤 특수한 학문과 그 특수한 학문들이 사용하는 개념, 그리고 그 개념들로 이루어진 연역적 체계를 사용하여 세계를 이해하려는 시도에 대해 심각하게 반대하고 있다. 그리고 그 반대는 각각의 개별학문들이 그러한 탐구를 수행하고 있는 것 자체에 대한 반대가 아니라, 그 개별학문들이 자신을 객관적인 진리라고 주장하는 것에 대한 반대라고 보아야 옳다. 이런 주장에 대한 반대는 각 개별학문들이 공리로 삼는 것에 대한 문제제기, 즉 각 개별학문들의 토대에 대한 근본적인 문제제기로 들어가는 지름길이다. 후설의 현상학은 이 지점을 짚어내어, 모든 개별학문들이 토대가 될 수 있는 진정한 토대에 대해서 탐구하고자 한다. 

  이 과정에서 후설은 각각의 개별학문들이 자신들이 학문의 대상으로 삼고 잇는 세계가 객관적으로 존재한다고 생각하는 근본적인 가정을 밝혀내었다. 따라서 모든 개별학문들의 토대를 세우기 위해서는 이 가정을 거부하고, 이 가정이 정당화되는 과정을 밝혀야 한다고 생각했다. 후설의 현상학에서 보이는 이러한 데카르트적 동기는 고대 그리스 철학의 단어인 판단중지(epoche), 또는 선험적-현상학적 환원이라는 말로 표현되며 후설의 철학을 대표한다. 

  선험적-현상학적 환원 이후에는 사실상 모든 분절적 인식의 가능성이 사라진다. 그러므로 인식하는 자아와 인식대상인 세계 사이의 구분도 사라진다. 이와 같은 상황에서 인식대상은 모두 인식하는 자아의 인식활동에 따라 구성되는 것으로 자리매김한다. 또한 인식대상의 입장에서는, 현상학적 환원 이후의 인식의 주체인 선험적 자아와 근본적으로 결합되어 있다. 선험적 자아는 자신의 내부에 인식대상을 가지고 있는 상태가 되는데, 사실 설험적 자아는 그 안에 아무런 경계를 갖지 않기 때문이다. 다시 말하면 인식대상은 선험적 자아 내부에서 그와 구분짓지 못하는 내적 구성물이다.  

  위와 같은 비분절적 상태로 이끌 수 있는 능력 혹은 이미 그렇게 된 상태를 내재적 초월성이라고 한다. 내재적 초월성은 신이나 어떤 외부의 전능한 존재를 상정하지 않고, 인간의 정신적 능력으로 설명된다는 점에서 '외재적'인 초월성과는 구별된다. 또한 칸트와 후설이 사용하는 '현상'이라는 단어는 인간의 인식대상의 총체라는 의미에서는 같으나, 칸트가 인식의 대상과 그 특성이 범주로서 이미 구성되어있는 대상을 현상이라고 말하는 데 비하여, 후설은 현상 자체가 만들어지는 과정, 즉 인식의 과정에 대해 연구하는 의미에서 현상이라는 단어를 사용하고 있다. 따라서 이런 연구는 현상이 만들어지는 과정 전체를 조망할 수 있는 관찰자의 시점을 요청한다. 이것이 바로 후설이 이야기하는 선험적 자아의 시점이다. 

  그런데 이 내재적 초월성의 영역에서 인격으로서의 자아는 아무런 의미를 갖지 못하는 말이 되어벌니다. 모든 분절이 사라져버린 세계이며, 어떤 구분이 이루어지는 유일한 방법은 선험적 자아가 태도를 바꾸는 것 뿐이다. 따라서 선험적 자아가 인격으로서 태도를 취하지 않는 한 어떤 대상은 필연적으로 인격으로서의 조건을 갖출 수 없게 된다. 그러므로, 한 개인의 반성적 능력에서 출발하는 내재적 초월성의 영역과 선험적 자아의 작동구조는 너와 나의 구분, 즉 자신과 타인의 구분까지 없애버린다. 선험적 자아가 인격으로서의 타인을 발견하게 되는 계기와 과정은 아주 많은 단계를 거치는 복잡한 과정이다. 

  하지만 이러한 구분의 철폐는 역설적으로 아주 새로운 주체의 모습을 만들어내는데, 이것이 상호주관성이다. 후설은 이 말로 인식주체와 인식대상, 즉 주관과 객관이 결합한 새로운 영역을 만들어내고 있다. 즉, 자아와 타인의 구별이 없어진 새계이기 때문에 오히려 모든 인간들은 자신이 설명한 것과 같은 인식의 구조를 가지고 있으며, 그러므로 자신의 이론적 구조 안에서도 객관적 인식을 만들어내는 일이 가능하다고 주장하는 것이다. 인간들은 전반성적 구조에 대한 통찰을 통해서만 자신의 인식의 토대에 대해서 확인할 수 있으며 또한 그것만을 확신할 수 있지만, 더 나아가면 그 인식의 토대가 모든 인간들에게 적용되는 인식의 구조이며 선험적 자아의 세계의 수준을 토대로 삼아 소통이 가능한 영역이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다른 많은 철학자들도 주관과 객관을 통일하려 시도해왔다. 하지만 후설은 자신의 방법론을 토대로 당시까지 시도되었던 두 가지 큰 경향을 비판한다. 하나는 관념론적(역사주의적) 통일로서, 인식주관의 본유관념을 통해 세계를 인식할 수 있으며, 그것은 본유관념을 토대로 삼은 연역체계이다. 후설은, 이런 통일은 본유관념에 대해 아무런 문제도 제기하지 않으며, 그것이 의존할 다른 존재 혹은 논증이 필요한데도 불구하고 철저하게 그에 대해 의문을 제기하지 않았다고 비판한다. 또한 다른 방향은 유물론적(과학주의적) 통일로서, 이들은 인간을 물질로 구성된 대상으로 바라보고 물질을 연구하는 것과 같은 방법으로 인간을 이해하려고 한다. 이러한 경향을 대표하는 연구분야가 심리학이다. 이에 대해서는, 인간이 다른 인간을 어떻게 인식할 수 있는지, 즉 서로가 서로를 바라볼 때 각자의 정신 속에서 그 지위가 상이하게 달라지기 때문에 인간을 연구하는 데 적합하비 않은 방법이라고 후설은 비판한다. 

  위와 같은 후설의 입장과 비판의 논지에서도 알 수 있듯이, 후설은 모든 인간이 인정할 수 있는, 혹은 적어도 어떤 인간 집단이 인정할 수 있는 객관적 세계는 분명히 존재한다고 믿었다. 그는 객관적 세계 자체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부정하지 않았으며, 오히려 그것을 정당화하고 그 토대를 마련하기 위해서 자신의 철학적 논증을 펼쳤던 인물로 보아야 옳다. 하지만 여기에서 후설이 말하는 객관적 세계란, 인식주체와 떨어져 독립적으로, 주체와 대상이 서로 아무런 관련도 없이 존재할 수 있다고 말하는 일반적 의미에서의 객관적 세계가 아니다. 후설의 선험적 자아는 이미 인식주체와 대상의 구분이 사라져버린 상태에 놓여있으므로, 이러한 존재는 있을 수 없다. 그가 말하는 객관적 세계란, 어떤 특정한 학문이나 또는 태도에서만 드러날 수 있는 존재의 양태들을 뜻한다. 

  이러한 입장에서 객관적 세계는 자신의 독립적인 존재로서의 지위를 상실한다. 객관적 세계는 선험적 자아를 떠나서도 존재할 수 없으며, 인식주체로서의 인간을 떠나서도 존재할 수 없고, 게다가 인식주체가 지니는 특별한 관점이나 학문적 입장을 떠나서도 존재할 수 없다. 사실상 객관적 세계는 객관적 존재로서의 지위를 상실하게 되며, 매우 불안정하고 유동적인 위상만을 차지할 수 있게 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것을 객관적이라고 말할 수 있는 이유는 바로 상호주관성과 연관되어 있기 때문이다. 선험적 자아는 인격으로서의 한 개인이 통찰할 수 있는 영역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자아와 타자의 구분이 없는 수많은 인격으로서의 개인들이 공유하고 있는 영역이기도 하다. 위에서 썼듯이 모든 인간은 동일한 토대에서 인식작업을 수행하고 있는데, 만약 인식의 대상이 이러한 상호주관성의 영역에 자리잡게 된다면 그 대상은 객관성을 획득하게 된다. 그 존재가 그 자체로서 어떤 모습을 하고 있거나 또는 어떤 특성을 지니거나 하는 여부와는 상관없이, 모든 인식주체의 세계에 같은 양태로서 자리잡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후설이 말하는 객관성이란 존재 또는 존재자의 객관성이 아니라 인식의 객관성이기 때문에, 현상에 드러나는 과정이 동일하다면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객관성이라는 지위를 차지할 수 있다.  

  그러므로 인간의 모든 경험은 경험 이전의 영역에서 형성되는 상호주관성을 거치지 않고서는 불가능하다. 이런 의미에서 경험은 언제나 상호주관적일 수 밖에 없다. 또한 경험과 상관하는 외부의 존재로서의 객관적 세계는 마찬가지로 상호주관성에 의존하며, 그 영역에 국한되어 전개될 수 밖에 없다. 그 실재에 있어서와 마찬가지로, 객관적이라는 의미와 상화주관적이라는 의미 또한 이와 같은 관계에 놓여있다. 

  상호주관성과 객관적 세계 가운데 인간의 의식과 경험에 있어서 더 근본적인 것은 역시 상호주관성이다. 이는 선험적 자아의 영역이라는 그 속성상 어떤 분절도 없다. 위에서 기술했듯이, 오히려 이런 속성 때문에 주관이나 자아, 혹은 객관이나 타자라는 이야기를 하지 않고 상호주관적인 객관성을 마련할 수 있는 토대가 되는 것이다. 하지만 객관적 세계는 분절 이후의 세계이다. 다시 말하면 선험적 자아가 상호주관성의 영역을 겇서 세계로서 드러난 것, 비분절적 세계를 여러 태도에 따라 분절적 세계로 구성한 것이다. 그러므로 논리적으로 선행하는 것은, 분절적 세계의 근거로서 존재하는 비분절적 세계, 선험적 자아, 상호주관성이다. 

  이와 같은 후설의 논의에서 이념으로서의 객관적 세계의 의미가 명확하게 밝혀진다. 기존의 학문들은 각자가 바라보는 세계를 모든 학문의 토대 내지는 자신들의 토대로서 객관적 세계를 상정하거나 혹은 간주한다. 또는 그 믿음을 '객관적'이라고 말한다. 하지만 후설에게 객관적이라는 말의 의미, 그리고 그 속성은 선험적 자아의 상호주관성에 토대를 두어야지만 성립할 수 있는, 이차적 개념이다. 그러므로 후설의 논의에 따르면, 학문의 토대로서 간주되는 객관적 세계의 현존이라는 생각은 포기되어야 하거나, 적어도 그것을 명확한 사실이 아니라 인식의 현상 속에서 생성되는 특수한 형태의 믿음을 간주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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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양윤리학사』(로버트 L. 애링턴 씀, 김성호 옮김, 서광사, 2003)에서 칸트 부분 요약. 윤리학의 주제와 문제들 발표문.>

문 : 우리는 결코 거짓말을 해서는 안되는가? 이에 대한 칸트의 답변과 논증을 재구성해보고, 그 타당성을 평가해보라.

답 : 

  칸트는 행위가 도덕적인 영역에 속하는지 그렇지 않은지 판단하기 위한 몇 가지 기준을 제시한다. 첫째는 어떤 행위를 할 때, 그 행위가 다른 목적이나 대상에 대한 고려가 그 행위의 동기가 아니라 그 행위를 해야겠다는 의지 자체만으로 이루어져야 한다. 이는 가언 명법과 정언 명법의 차이를 가르는 기준이다. 둘째, 그 행위의 동기를 보편화시키는 사고실험을 해보았을 때 아무런 모순도 이끌려 나와서는 안된다. 이는 그 내용이 실현되는 세계가 존재할 수 있는지 검토해볼 수 있는 기준이다. 셋째는 인간을 수단과 목적으로 동시에 대우하라는 요청이 수반되는지 검토해보아야 한다. 인간 또한 물리적인 세계 안에 위치하는 존재로서, 다른 대상들과 마찬가지로 자연법칙의 지배를 받는데, 이러한 요청만이 인간을 인간으로 만들어주기 때문이다. 

  그는 위와 같은 세 가지 기준에서 인간은 거짓말을 해서는 안된다는 결론을 내린다. 첫째, 거짓말은 정언 명법의 형식을 띄지 않고 가언 명법의 형식을 띈다. 즉, 거짓말은 구체적인 상황의 지배를 받기 때문에 거짓말을 할 수 있는 상황과 그렇지 않은 상황이 상대적으로 결정된다. 둘째, 모든 사람이 거짓말을 하는 세계는 불가능하다. 만약 어떤 세계에서는 모든 사람들이 거짓말을 한다면, 진실과 거짓말을 구별하는 기준이 없어질 것이다. 그러므로 그 세계에는 거짓말이 없는 세계일 것이다. 따라서 모든 사람이 거짓말을 하는 세계는 모순에 빠져버리며, 그러므로 불가능하다. 셋째, 거짓말은 인간을 거짓말을 하는 구체적인 상황에 따라 다른 대우를 하는 행위인 것처럼 보인다. 거짓말이 가언 명법의 형식을 띈다면, 거짓말을 하는 사람은 거짓말을 통해 성취하고자 하는 목표와 인간을 비교하여 인간의 위치를 상대화시킨다. 

  거짓말 논증에서는 큰 부분을 차지하고 있지 않는 것처럼 보인다 하더라도, 도덕성을 이루는 기초라는 점에서 이 문제에서 역시 인간 스스로의 요청과 자각이 매우 중요한 문제로 부각될 수밖에 없다. 이 요청은 실천적인 요소로서 매 순간, 모든 구체적인 상황에서 발휘되어야 한다. 그렇지 않다면 도덕적인 존재로서의 인간은 불가능하며, 이에 따라 도덕과 비도덕을 나누는 모든 기준이 무의미해진다. 그러나 이 ‘요청’ 이라는 말의 의미는, 순수하게 이론적인 차원 즉 윤리 형이상학의 차원에서 도덕의 기준을 제시한다는 매우 벗어나 있다. 즉, ‘~이다.’와 ‘~해야 한다.’ 는 형식을 오가는 다른 기준(정식)들과는 달리, 요청은 언제나 ‘~해야 한다.’는 형식을 띈다. 다시 말해 ‘요청’에는 이성의 기능인 ‘판단’이 결여되어 있으며, 따라서 인간 스스로의 이성에 대한 반성만을 통해 도출될 수 없는 것이다. 

  게다가 인간이 진정으로 그렇게 살 수 있는지 혹은 그렇게 살고 있는지는 의문스러울 수밖에 없다. 오히려 현대사회는 인간을 수단으로서만 대하라고 이념적으로 강요하고 있기 때문이다. 현실의 인간들은, 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인간들은 스스로를 동물화하는 데, 즉 수단으로서만 대하는 데 너무나도 익숙해져 있고, 그런 요청이 필요하다는 것 자체를 잊어가는 듯이 보인다. 몸색깔을 바꾸는 카멜레온에게 위장을 한다는 이유로 비도덕적이라고 비난하지 않는 것과 마찬가지로, 인간 또한 동물로서의 인간에게는 거짓말이란 무의미한 단어이다. 이는 칸트 스스로가 가장 우려하고 있는 사태인 듯 보이기도 한다. 그 때문에 이 ‘요청’을 도덕을 구성하는 가장 중요한 요소로서 지적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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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대정치사상 숙제> 

문 : 로크와 루소는 인간본성에 관한 상이한 이해를 바탕으로 자연상태를 기술하고 있다. (보다 구체적으로는 소유권의 기원, 가족의 성립, 언어의 사용, 이성과 감성의 기능, 자연법의 내용, 자유의 성격 등의 관점에서) 이 두 사람의 자연상태에 대한 기술을 바탕으로 자신이 생각하는 자연상태를 제시하시오.

답 : 

  사회계약론은 자연상태와 사회상태를 명확하게 구분한다. 계약은 자연에서 사회로 나아가는 계기가 된다. 사회계약론에서 자연상태를 이해하는 것은 매우 중요한데, 자연상태가 어떤 모습이냐에 따라서 계약의 내용이 결정되기 때문이다. 지금까지 등장했던 수많은 사회계약론자들은 각각의 개념에 대해 정의를 내리고, 계약의 내용을 설정한 뒤에 그것을 기준으로 당시 정부가 시행하는 정책의 정당함과 부당함을 평가했다. 나아가서는 정책 뿐만 아니라 정부의 구조와 형태에 대해서까지 그 부당함을 제기하며, 어떤 형태이든 간에 기본적으로 민주정의 형태를 갖추어야 한다는 점을 강력하게 주장하였다. 

  그러나 인간이 처한 이 두 상태의 구분이 명확한가 질문을 던져보면, 그 답을 내리기는 쉽지 않다. 역사 속 인간들은 언제나 연속적으로 변화한다. 그런데 그 변화의 어떤 지점을 구분의 기준으로 삼는다는 것은, 임의적이고 주관적일 수 있다는 점을 강하게 내포한다. 다시 말해, 사회계약론자들은 자신이 이상적으로 삼는 사회상태를 정당화하기 위해 자연상태를 의도적으로 기획한다. 역사적으로 그런 상태가 있었는지 없었는지는 크게 중요하지 않다. 있었다고 할지라도, 그것은 특정한 사회계약론의 체계 속에서 그 자체의 모습을 크게 상실한 형태로 드러날 수밖에 없다. 자연상태를 해석하는 과정에서, 사회계약론자들은 자신들의 특정한 선이해를 그대로 투영하며, 자연상태에서 그 이해의 지평이 그대로 드러난다. 

  따라서 자연상태에 대해 올바른 이해를 추구하는 유일한 방법은 인류학적 조사 뿐이다. 그나마도 인류학적 조사는 그 사람들의 삶의 단편 밖에 알아볼 수 없을 뿐만 아니라, 지금껏 고전적인 삶의 양식을 유지하면서 사는 몇몇 집단을 통해 유추하는 수 밖에 없다. 따라서 자연상태에 대한 완전한 지식은 불가능하다는 결론에 쉽게 이를 수 있다. 로크에 비해 루소는 이러한 점을 조금 더 명확하게 깨닫고 있었지만, 루소 역시 자신이 미리 정해놓은 결론을 정당화하기 위해 자기 관념을 투영하는 방식으로 자연상태를 조직하였다. 

  특히 루소의 이런 모습은 자연상태에서 사회상태로 넘어가는 과정 가운데 가부장적인 면모가 자연스러운 것처럼 간주된다는 것에서 단적으로 드러난다. 물론 대부분의 사회에서는 가부장적인 모습이 나타나지만, 이것은 우연적인 사례가 많을 뿐이지 그것이 필연적으로 그렇게 발전해간다는 것을 드러내지는 않는다. 게다가 루소가 가부장적인 모습이 등장한다고 간주했던 원시적인 단계에서는, 가부장적이지 않은 사회 또한 많다. 이것은 현재도 원시적인 단계를 유지하고 있는 사회에 대한 인류학적인 조사 결과에서 드러난다. 이런 요소들은 상당히 우연적이다. 우연적인 것들의 종합을 자연상태에서 사회상태로 이행하는 일반적인 진행과정이라고 말하기는 힘들다. 

  따라서 자연상태와 사회상태가 나누어진다고 이야기하는 것은 특정한 가치관을 자연적인 상태 혹은 필연적인 상태로 정당화하려는 의도와 반드시 맞물린다. 이런 잘못을 저지르지 않기 위해서는 결국 특정한 가치관에 의해 해석되지 않은 인간의 모습을 있는 그대로 기술해야 한다. 그에게 어떤 속성이 있다거나, 어떤 권리가 있다거나, 혹은 어떤 자격이 주어져있다거나 하는 말들은 현재 세워진 규범들을 과거에 소급적용하는 오류를 낳을 수 밖에 없다. 

  가치관에 의해 해석되지 않는 인간이란 결국 물리적 자연의 법칙에 지배받는 인간이다. 어쩌면 인간이라는 특정한 종으로 부르는 것조차 의심스러운 상태이다. 이 때의 인간은 원숭이들과 별다를 바가 없기 때문이다. 인간의 움직임이란 물리적 상태의 변화에 지나지 않는다. 인간은 결코 자유롭지 않고, 철저하게 반응에 따른 결과로서만 움직인다. 같은 인간이라면 하나의 물리적 변화에는 거의 같은 반응을 보이게 된다. 다소간 차이가 있다고 하더라도, 그 차이는 여러 상이한 자극의 경험에 의해서(서있는 위치가 다르다든가, 아침에 우연히 1분이라도 일찍 일어나서 햇볕을 더 많이 쬐었거나 등) 생겨난다. 각각 인간의 행동의 차이란 이 자극의 차이에서 비롯된다.

  인간이 사용하는 모든 것은 우연이 수도 없이 겹쳐서 비롯된, 일종의 경험과학이다. 유용한 무엇이 생기기 전까지는 그 이전에 수도없이 많은 실패가 반복된다. 설령 어떤 수단을 지속적으로 사용할 수 있게 되었다 할지라도, 그것은 인간이 스스로 의지를 발휘하거나 자신의 유용함에 따라 주변을 조직한 결과가 아니라 주어진 환경이 우연히 제공한 것에 반응하여 나타난다. 그것은 언제든지 잊혀질 수 있으며, 환경의 변화에 따라 더 이상 얻을 수 없다는 것을 알았을 때 잊혀지게 마련이다. 

  루소는 이같은 인간의 원시적인 모습에 ‘완전성’과 ‘자유’를 투영하였다. 그리고 그는 경험과학에 의한 우연한 발견들을 마치 인간이 스스로 성취한 결과인 것처럼 이야기한다. 또한 자유롭지 그렇지 않은지 알 수 없다면서도, 루소는 근본적으로 고대인들이 자유롭다고 간주하고 있다. 하지만 자신이 의식하지 못하는 자유를 과연 자유라고 할 수 있을까? 원시적인 인간에게 이러한 본성이 있으리라고는 생각하기 힘들다. 이 상태에서 인간의 삶을 결정해주는 것은, 다른 동물들의 삶이 모두 그러하듯이 환경이다.

  이것은 사회상태가 된다고 하더라도 크게 다르지 않은데, 원시상태의 인간에게 자연환경이 영향을 미친다고 한다면 사회상태의 인간에게는 사회환경이 영향을 끼친다. 이용할 수 있는 나무와 내게 도덕과 규범을 가르쳐주는 어른 사이에는 아무런 물리적인 위상의 차이가 없다. 단지 여러 요소들의 배열과 양에서 차이가 날 뿐이다. 이것을 인간에게만 특수한 질적인 차이라고 말하는 것은 상상이거나 신화적인 작업에 불과하다.

  이런 인간들의 관계 사이에서는 분쟁이 벌어지기도 한다. 하지만 홉스처럼 인간의 본성에 따라 분쟁이 필연적으로 일어나는 것은 아니다. 분쟁조차도 우연적이다. 정말 생존에 필요한 동일한 대상을 다른 두 인간이 바랄 수도 있기 때문이다. 또한 인간들에게는 이 분쟁이 일어날 가능성이 있다는 것을 계산할 능력이 없기 때문에, 상존하는 위협에 대항할 어떤 대책을 강구해야겠다는 생각도 하지 않는다. 그저 자신의 상태 그대로를 유지하며, 생존에 필요한 최소한의 요구를 제외하면 아무런 축적도 생기지 않는다. 서로 돕는 것도 매우 우연한 경험이 수없이 축적된 결과이다. 모든 것은 경험, 그리고 경험과학이 결정한다.

  따라서 국가와 사회가 생성되는 것은 계약에 의존하지 않는다. 분쟁은 모든 사회의 기초이다. ‘사회’라고 부를 수 있는 수준의 계급관계가 발생하려면, 수많은 우연한 분쟁의 승패가 축적되어야 한다. 그 분쟁의 승패가 상류층과 하층 계급을 결정한다. 법과 제도란 하층으로 머무르라는 이야기를 힘으로만 강요하던 것에서, 서류로 쓴 뒤에 서명하라고 힘으로 강요하는 것에 불과하다. 문자화되었다고 해서 다른 형태의 세련된 제도설립 방법이 등장한다는 생각은, 법과 제도의 힘에 대한 매우 순진한 사고이다. 그런 면에서 계약으로 사회와 제도의 설립을 설명하려는 시도는, 거의 허구에 가깝다. 로크는 이 분쟁은 일어나지 않으리라고 그저 낙관적으로만 예측하고 있으며, 루소는 아무런 폭력적 분쟁 없이 계약이 설득에 의해 맺어진다고 예상하고 있다. 

  폭력이라는 부정적인 언어로 표현했지만, 사실 이 모든 과정은 아무런 가치판단이 개입되어있지 않은 물리적인 변화과정으로 기술되어야한다. 단지 가치가 생겨나고 인간은 자유롭게 생각할 수 있다는 가치관 속에서 살아가는 현재 인간에게 주어진 언어의 한계 때문에 그것을 폭력이라는 말 이외에 다른 것으로 기술할 수 없을 뿐이다. 물리적 상태의 변화는 그 자체로 매우 중립적이며, 아무런 가치도 포함하지 않는다. 마치 물이 위에서 아래로 떨어지는 것을 보면서 나쁘다고 말하는 사람은 없는 것처럼, 인간의 물리적 상태가 변화하는 것도 사실은 어떤 가치를 포함하고 있지 않는다. 인간은 단순히 우리가 ‘사회적이다.’ 라고 부를 수 있는 수준의 물리적 성질을 갖추고 있을 뿐, 그것이 자연상태에 비해 어떤 질적인 변화를 가져온 것이라고 볼 수는 없다.

  인간에게 현재 자유가 주어져있고, 소유권이 법적으로 보장되며, 사회를 조직하고 살아간다는 것을 통해 여러 사상가들은 인간을 자연 내에서 특별한 위치에 있다고 간주하고, 이를 정당화하기 위한 여러 가지 가설을 세워왔다. 자연상태를 내세운 인간의 상태에 대한 가설들도 이런 맥락에 속한다. 인간만이 사회를 조직할 수 있으며, 사회를 조직하는 존재가 곧 인간이라는, 인간에 대한 정의를 사회를 조직하는 데 투영하는 것이다. 하지만 사회에 발을 딛고 살아가는 모든 존재들이 믿고 살아가는 신념의 체계는, 거의 전적으로 우연에 의해 형성된 것에 속한다. 그리고 그 우연은 물리적 법칙의 지배를 받는 자연에 의해 생긴 결과이며, 인간과는 무관하다. 자연상태에 대한 가설들은, 이와 같은 우연적인 결과들을 필연이라는 이름으로, 인간의 본성과 연관시켜 보편적인 것으로 만들려고 하는 시도들이다. 

  하지만 이런 능력이 본성에 의해 주어졌다는 것은, 물리계에 속해있는 인간이라는 존재의 지위에 끊임없이 충돌을 일으킨다. 인간의 본성이란, 그저 인간이 물질적으로 이루어져 있다는 것 뿐이다. 물리법칙을 벗어나는 효과를 일으키는 능력을 다시 인간의 본성으로 간주할 경우, 우리는 이론 속에서 서로 독립적인 실체를 조화시켜야 하는 이원론의 문제에 다시금 빠져들 것이다. 자연상태의 인간이란 물질로서의 인간이며, 이것은 사회상태에서도 변함없이 나타난다. 그리고 물리적 상태의 변화는 연속적이며, 분절적이지 않기에 자연상태와 사회상태의 구분도 희미하다. 이것이 인간에 대한 증명가능하고 가장 정확한 관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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쉴즈 2010-11-10 06:11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여기오면 님 과제 다 읽을 수 있구나

박효진 2010-11-16 00:56   좋아요 0 | URL
 

<『서양윤리학사』(로버트 L. 애링턴 씀, 김성호 옮김, 서광사, 2003)에서 중세의 윤리학 가운데 토마스 아퀴나스와 둔스 스코투스 부분 요약. 윤리학의 주제와 문제들 발표문.> 

문 : 신은 영원한 법칙에 위배되는 어떤 것도 의욕할 수 없다는 아퀴나스의 생각에 대해서, 둔스 스코투스는 신이 영원의 법칙에 따라서 의욕해야만 한다고 말하는 것은 신의 자유의지를 부정하는 것이기에 결코 받아들일 수 없다고 주장했다. 이들의 주장을 평가해보라. 

답 : 

  신과 영원의 법칙에 관한 아퀴나스의 생각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우선 그가 인간에게 의무를 부여하는 근거로 계시와 이성 두 가지를 제시했다는 것을 살펴보아야 한다. 계시는 인간에게 신으로부터 직접 전해져온 전언이다. 반대로 이성은 인간이 본성으로서 지니는 인간 자신의 능력이며, 그 자체로 완결성을 지닌다. 물론 이 이성은 신이 인간을 만들때 인간에게 부여한 능력이라는 점에서 ‘피조물로서 구속’받지만, 그 이외에는 신에 대해 독립적이다.

  아퀴나스에 따르면, 인간이 이 이성의 능력을 발휘해서 얻을 수 있는 법칙이 자연법이다. 물론 자연법의 기원에도 역시 신이 관여한다. 신은 자신의 마음 혹은 의지로부터 자연법을 도출하였는데, 그 내용은 ‘신을 사랑하라.’ 를 포함한 여러 가지 도덕적인 형식을 가진 기본적인 명령들이다. 인간은 창조되는 순간 이 자연법 부여받았다. 이런 의미에서 볼 때 이성은 인간이 이 자연법을 발견해낼 수 있는 가능성 혹은 능력을 뜻한다. 그러므로 인간은, 이성을 발휘하기만 하여도 충분히 스스로 자연법을 발견해낼 수 있으며, 또한 이성을 통해 발견한 자연법에 따라 자신의 삶을 꾸려나갈 수 있는 의지를 보유한다. 

  스코투스의 아퀴나스 비판은 바로 아퀴나스가 인간이 독립적으로 이성을 발휘해 자신의 삶을 도덕적으로 만들어갈 수 있다고 말한 것에 집중되어있다. 이성을 통해 발견한 자연법은 인간이 어떤 삶을 살면 좋은지에 대해 지침이 될 수 있을지는 모르지만, 그 자체로는 아무런 당위적 힘을 가지지 못한다. 오직 신만이 자연법이 포함하는 명제들을 명령으로 바꾸고, 그것을 선하다고 판정하고 인간이 그렇게 하도록 할 수 있다. 따라서 스코투스에게 도덕, 선에 있어서 중요한 존재는 인간 혹은 인간의 이성적인 능력이 아니라 신이다. 신은 자신의 의지로 도덕을 창조한다.

  두 철학자가 보여주는 이런 입장차이는 신과 도덕법칙 사이의 관계를 어떻게 정립하는가 하는 문제에 대한 서로 다른 답변으로 볼 수 있다. 아퀴나스의 입장에서는 도덕법칙이 적어도 신과 지위가 동등하거나 또는 둘을 서로 같은 존재로 볼 수도 있다고 말하는 반면에, 스코투스는 명확하게 신을 도덕법칙보다 우위에 두고 있다. 또한 이는 인간의 지위와 능력에 대한 관점과 긴밀하게 연결된다. 아퀴나스에게 인간은 도덕법칙 전부를 인식할 수 있는 가능성을 지닌 존재이지만, 스코투스가 바라보는 인간은 인식할 수 있는 도덕법칙의 범위가 제한적이다.

  그러므로 ‘완전하다’는 신의 정의와 그로부터 연역되는 신의 속성, 즉 모든 것을 알고 어떠한 것도 할 수 있고 도덕적으로 완전히 선하다는 것에는 스코투스의 견해가 더 정합적인 것으로 보인다. 아퀴나스의 경우에는 도덕법칙이 피조물로서의 지위 때문에 신에 종속되어 있으면서도 사실상 그 자체로 다른 존재에 영향을 받지 않는 독립성을 지닌다. 그러나 피조물로서의 지위 그리고 신의 속성이 언제나 도덕법칙을 향한 개입의 가능성을 열어두고 있으므로 도덕법칙의 독립성과 모순을 일으킨다. 모순을 일으키는 것은 논리적으로 불가능하다. 스코투스는 이러한 아퀴나스의 맹점을 짚어냈다. 다시 말해 도덕법칙이 실재하는지 의문시하며, 그것을 신의 의지로부터 분리시키려는 아퀴나스의 이론적 시도를 비판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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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vid Hume의 「Of the Original Contract」의 일부를 해석. 이 글은 원래 『Essays on Moral, Political and Literary』에 실려있으며, 내가 본 대본은 『Reading Political Philosophy』에 재수록된 것. 근대정치사상 발표를 위한 초벌.> 

  David Hume(1711~76)은 아마도 18세기에 가장 중요한 철학자일 것이며, 정치철학에 대한 기여도 아주 풍부하다. 1748년에 발표된 그의 논문에서 발췌한 이 글에서, 흄은 로크와 같이 계약이라는 말로 정치공동체에 대한 의무를 설명하려는 사람들을 비판한다. 흄의 비판은 적어도 역사적인 부분일 뿐 아니라, 그가 배위 에 남은 것과 국가 내의 소재를 비교하는 유명한 사고실험까지도 포함한다. 그가 제안하기에는, 그 어떤 경우에도 정당한 권력은 개인이 같은 장소에 있다는 사실로부터 연역될 수 없다.
 

  ...  우리는 모든 사람들이 얼마나 그 육체적인 힘과 정신적 힘과 능력들, 심지어 교육에 의해 얻는 것까지 평등에 가까운지 생각해볼 때, 먼저 그들의 고유한 동의가 그들이 함께 계약을 맺고 어떤 권위에든 속할 수 있게 하는 것 외에 없다는 것에 필연적으로 동의해야 한다. 사람들은, 만약 우리가 숲과 사막 속에서 정부의 첫 번째 기원으로 정부를 추적한다면, 모든 구너한과 사법권의 구성요소이며, 또한 자발적으로, 평화와 질서의 동기를 위해 그들의 자연적인 자유를 부정하고 그들의 평등과 동료로부터 법을 받아들일 것이다. 그들이 따르기를 희망하고 있었던 조건들은 이미 표현되었거나, 그 조건을 표현하는 데 불필요하다고 평가되어도 좋을 정도로 아주 명확하고 뚜렷하다. 만약 이것이, 최초의 계약(original contract)에 의해 의미가 지어진다면, 무엇보다도 먼저 모든 정부는 계약 위에 기초를 다지며, 또한 가장 고대적인 투박한 인간들의 조합도 이 원리에 의해 형성된다는 것을 부인할 수 없다. 우리가 어떤 기록에 우리의 자유들에 대한 강령이 기록되었는가 물은 것은 헛수고로 돌아갔다. 그것은 양피지나 나뭇잎, 나무껍질에도 쓰여있지 않다. 이것은 기록의 사용(the use of writing)과 모든 다른 문명화된 삶의 방식(atrs of life)에 앞선다. 그러나 우리는 분명하게 인간의 본성, 그리고 우리가 그 종들의 모든 개개인 속에서 찾을 수 있는 평등이나 또는 평등에 접근하는 어떤 것에서 추적할 수 있다. 지금 지배하고 있고 함선과 군대 위에 기초를 다진 힘은 분명하게 정치적이며, 권위 즉 설립된 정부의 효과로부터 끌려나온다. 한 사람의 자연적인 힘은 단지 그의 팔다리의 체력과 그의 용기의 확고함으로만 구성되며, 이것은 결코 다수대중(multitude)이 하나의 명령에 종속하게 하지 않는다. 그들의 고유한 동의와, 평화와 질서로부터 나오는 이점에 대한 그들의 감각 외에는 아무것도 그런 효과를 가져올 수 없다. 

  게다가 이 동의는 지속적으로 매우 불완전하며, 일반적 행정지배의 기초가 될 수도 없다. 대체로 전쟁이 지속될 동안에 자기 영향력을 얻었을 지도자는 명령보단 설득에 의해 지배할 것이다. 그리고 그가 다루기 힘든 자들과 반대자들을 제거하려 힘(군대)을 사용할 수 있을 때까지는, 그 사회는 시민사회의 상태를 이루었다고 말할 수 없다. 어떤 그럴듯한 계약이나 동의도 명백하게 일반적 복종을 형식화할 수 없다. 이 개념은 야만인들의 이해로부터 너무나 멀리 너머에 있다. 지도자에게 각각의 권위의 발휘는 특별해야만 하며, 그 경우의 현재 위기에 의해 불려나온다. 그의 중재로부터 귀결되는 이 감각가능한 유용함은 이런 발휘를 날마다 더욱 빈번하게 되게끔 만들고, 만약 그것을 불러내는 데 기뻐한다면 그 빈도는 점차 습관을 생산해내며 자발적이고, 따라서 사람들 속에서 불확실하고 묵인되는 것이다. 

  그러나 어느 당에 참여하고 있는(이것이 만약 모순이 아니라면) 철학자들은 이런 허락에 만족하지 못한다. 그들은 그 정부가 가장 일찍 초기 형태에서도 동의 심지어는 자발적 묵인에서부터 나왔을 뿐만 아니라, 게다가 가장 완숙한 단계를 달성하고 있는 지금도 다르지 않는 기초 위에 놓여있다고 주장한다. 그들은 의무나 약속에 대한 승인에 의해 묶여있지 않으며 모든 사람은 언제나 평등하게 태어나고, 의무를 다해야 할 군주나 정부가 없다고 단언한다. 그리고 그의 자연적인 자유에 선행해 어떤 동일한 가치가 없으며, 다른이의 의지에 자신을 종속시키는 사람은 없다고 생각한다. 이 약속은 항상 조건적인 것으로 이해되며, 그가 정의와 그의 주권으로부터 나온 보호와 마주치지 않는다면 강요되는 의무는 없다. 이런 주권에 대한 이점은 그의 복귀를 약속한다. 그리고 만약 그가 집행에 실패한다면, 그는 약속의 부분을 파기한 것(그의 부분을)이며, 모든 복종의 의무로부터 그의 종속을 자유롭게 한다. 이는 저 철학자들에 따르면 모든 정부에서 권위의 토대이다. 그리고 모든 종속된 자들에 의해 갖추어진 저항권의 근거이기도 하다. 

  그러나 이런 추론가들이 세계를 두루 바라보면, 그들은 결국 그들의 발상에 조응하거나 그들에게 권위를 줄 수 있는 세련되고 철학적인 어떤 체계는 없다는 것에 직면할 것이다. 반대로, 어떤 곳에서도 그들의 종속된 자를 그들의 소유물로서 주장하고, 정복이나 계승으로부터 그들의 주권의 독립된 권리를 선언하는 군주를 발견한다. 또한 우리는 어떤 곳에서도 그들의 군주 안에 잇는 이런 권리를 승인하고, 그 존경의 의무나 확실한 보호자에 대한 의무 아래 있는 것만큼 확실한 주권자에 대한 복종의 의무 아래 태어났다고 스스로 가정하는 종속된 자들을 발견한다. 이런 연관성은 항상 우리의 약속과 똑같이 독립된 것으로 이해된다. 페르시아와 중국에서, 프랑스와 스페인에서, 심지어 네덜란드와 영국 등 위에서 말한 체제(doctrines)가 조심스럽게 가르쳐지지 않는 모든 곳에서 다 그렇다. 복종이나 종속은 대부분의 사람들이 중력의 법칙이나 저항의 법칙, 또는 가장 보편적인 자연의 법칙보다 더 그 기원이나 원인에 대해 어떤 연구도 만들지 않을만큼 친숙하게 되었다. 혹은 만약 호기심이나 그들을 그들이 배운 한 즉시 움직이게 한다면, 그들 스스로 혹은 그들의 조상들이 몇 세대에 걸쳐서 혹은 기록되지 않은 시대로부터 이런 가족이나 이런 정부형태에 종속되어왔다고 여길 것이다. 그들은 그들의 종속을 향한 의무를 즉각 묵인하고 승인할 것이다. 당신은 세계의 대부분에서 이런 정치적 연결이 자발적인 약속이나 혹은 공통의 약속 위에 함께 기초한다고 전도하면, 판사는 곧 당신을 복종의 의무를 풀었다는 이유로 반란자로서 투옥할 것이다. 만약 당신의 친구가 당신을 헛소리로 여겨 그 전에 입을 닫게 하지 못한다면, 그것은 어리석음으로 나아가는 것이다. 이런 정신의 움직임이 모든 개인은 이런 형식화를 제안하고 그 뒤에 이성을 사용하게 되더라도, 반대로 아무 권리도 가질 수 없다는 점에서 이상하다. 내가 말하는 이 행동은, 그들 모두에게 알려지지 않아야 한다. 그러면, 온 지구의 표면에 어떤 흔적이나 그것의 기억은 남을 수 없다. 

  그런데, 정부가 기초된다는 이 계약은 최초의 계약이 있다고 말이 된다. 또한 따라서 아마도 현재 세대의 지식에는 떨어지는 오래된 것으로서 제안될 것이다. 만약 야만인들이 처음 그들의 힘을 연합하고 연결한 이 동의가 지금 여기에서 의미가 있으려면, 이것은 실제라고 인정되어야 한다 하지만 이것은 아주 오래되었고, 수많은 정부와 군주의 교체에 의해 무효화된 것이며, 이것을 지금 어떤 권위를 간직한다고 제안될 수 없다. 만약 우리가 이 목적에 대해서 어떤 것을 말하려면, 우리는 모든 적법하고 종속된 자에게 복종의 의무를 지우는 모든 특수한 정부는 우선 약속과 자발적 계약에 기초한다고 주장해야만 한다. 그러나 이것은 자식들을, 심지어는 거의 모든 떨어져있는 세대(공화주의자 저술가들은 절대 고려하지 않는)를 묶어놓는 아버지들의 약속을 제안하므로, 난 이것이 역사나 경험에 의해, 세계의 어떤 시대나 국가에서도 정당화되지 않는다고 말한다. 

  현재 존재하거나 역사의 어떤 기록에라도 남은 거의 모든 정부들은 강탈이나 정복 혹은 이 두 가지 모두에 기원해 기초하지, 어떤 약속의 존재나 인민들의 자발적인 종속에 기초하진 않는다. 한 기교있고 용감한 인간이 어떤 군대나 집단의 우두머리가 될 때, 자신의 지배력을 그의 추종자들보다도 수없이 많이 인민들 위에 나타내기 위해 때로는 폭력을 때로는 옳지 않은 계략을 차용함으로써 그것은 종종 쉬워진다. 그는 그의 힘의 숫자에 그의 적들이 확신을 가지고 알 수 있게 될 열린 소통을 허가하지 않는다. 그는 그를 반대할 힘이 다함께 모일 틈을 그들에게 주지 않는다. 심지어 이런 강탈의 도구인 모든 것들이 아마 그의 실패를 바라고 있을지 몰라도, 그들의 서로의 의도에 대한 무지는 그들이 두려움을 유지하게 할 것이고, 그것은 그의 안전에 유일한 원인일 것이다. 이런 종류의 기술에 의해 많은 정부가 나타나는데, 이것이 그들이 자랑거리로 삼고 있는 최초의 계약이라는 것이다. 

  지구의 표면은 작은 왕국이 큰 제국으로 증대하는 것, 큰 제국이 작은 왕국으로 소멸하는 것, 식민지의 연결, 종족의 이주 등에 의해 지속적으로 바뀌고 있다. 이 사건들 속에서 힘과 폭력 이외에 발견할 수 있는 어떤 것이 있는가? 그들이 한참을 말하는 상호간 동의와 자발적 연합은 어디에 있는가? 

  심지어 가장 부드러운 방법, 이를테면 결혼이나 희망에 의해 한 민족이 다른 지역의 지도자 자리를 받는 것도, 사람들에게 결코 명예로운 일은 아니다. 그저 지참금이나 유산처럼 즐거움에 따라 혹은 그들의 지배자들의 이익에 따라 배치될 것을 제안할 뿐이다. 

  그러나 개입하는 힘이 없고, 선거(선거인단)가 그 자리를 채운 곳이라면, 이 아주 자랑할만한 선거란 무엇인가? 이는 전체에 대해 결정하고 반대없는 동의를 희망하는 소수의 대단한 인간들의 조합일 뿐이다. 그게 아니라면 대략 그들 사이에서 거의 알려져있지 않거나 그의 진보적 모습을 단지 그 특유의 뻔뻔함이나 그의 편의 순간적인 변덕에 빚지고 있는 반역적 지도자를 따르는 다수대중의 분노일 뿐이다. 

  이런 무질서한데다가 완성되지 않으면서도 막대한 권위의 투표를 모든 정부와 복속의 하나뿐인 합법적 기초를 간주할 수 있을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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