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문/사회/과학> 파트의 주목 신간을 본 페이퍼에 먼 댓글로 달아주세요.

이번 달 주목신간 선정은 어느 때보다도 힘들었습니다. 나름의 주목신간 기준을 약간 낮추고, 알라딘에서 제공하는 신간서적 목록을 모두 뒤져보다보니 구석구석에서 숨겨진 보물같은 책들이 마구 보이더군요. 여름철에 더우니 집에서 책이나 열심히 보세요 라는 출판사들의 배려인건지... 여튼 그 많은 책들 가운데서도 고심하고 간추려서 다섯 권을 뽑아보았습니다! 애초에는, 제가 관심있는 주제들에 대한 책을 이것저것 리스트에 꼽다보니 무려 55권!이나 되었죠. 이 전체 목록은 마이리스트에 따로 추려놓았으니 혹시 다른 책을 더 구경하고 싶으시다면 7월 주목신간 리스트를 참고하시길... 

1. 사회과학의 빈곤 

  피터 윈치는 현대에 가장 유명한 과학철학자 가운데 한 사람이며, 특히 사회과학의 이론적 기초를 확립하는데 큰 공을 세운 사람입니다. 또한 비트겐슈타인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잘 알려져 있지요. 목차를 둘러보니, '사회과학이란 무엇인가'에 대한 그의 고유한 답변이 될만한 내용일 것이라 추측할 수 있습니다. 대가의 입문서란 언제나 쉬우면서도 어려운 법이지요. 쉬운 이야기를 어렵게, 어려운 이야기를 쉽게 쓰는 것이 바로 대가이니까요. 

 

 

2. 맹자사설 

  서양철학은 철학자들이나 그 사상이 시대 별로 고르게 알려져있는데 비해서, 중국철학은 제자백가 이후의 사람들은, 주자나 왕양명, 퇴계 정도를 제외하면 우리들의 머릿 속에 거의 남아있지 않죠. 공자, 맹자, 순자에 대한 주석만 열심히 달아놓느라 그 시대의 고유한 철학이 없기 때문이라고 말하는 사람들도 있겠지만, '서양철학 전체는 플라톤의 철학에 대한 주석이다.' 라는 화이트헤드의 유명한 말에 비추어볼 때 그것은 편견에 불과합니다. 공자와 맹자에 대한 자신의 주석 속에서, 그리고 다른 사람들의 주석에 대해 다시 자신의 주석을 적어나가는 과정 속에서 중국의 철학사상가들 또한 해석학적 상상력으로 자신의 철학을 펼쳐나갔습니다. 청나라 초기의 유명한 유학자인 황종희의 책이 번역되어 출판된 것은, 바로 '다른 시대의 유학'에 대해 알 수 있게 해준다는 점에서 매우 의미있는 책이라고 생각합니다.  

 

3. 자유의 법 강령 

  영국은 현재 대표적인 입헌군주제 국가이지만, 영국의 시민혁명 당시에는 왕정을 폐지하고 공화정으로 나아가자고 주장하는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그 가운데서도 재산의 평등분배를 주장하는 가장 급진적인 분파가 디거스입니다. 공산주의의 할아버지쯤 되는 이 사람들이 꿈꾸었던 세상은 어떤 모습일지, 그들은 모순적 사회를 어떻게 바꾸어나가고 싶어했는지는, 여전히 현재 우리에게도 유효한 질문이자 사유의 대상일 것입니다. 

 

 

 

4. 한 권으로 읽는 루쉰 문학 전집 

  정신승리를 구가하는 아Q에 대한 이야기를 썼던 루쉰의 문집이라 일단 주목신간에 넣어봅니다. 특히 수필과 서간문이 들어가있다는 것이 더욱 끌리는 점입니다. 이 책의 두께 만큼이나, 루쉰의 더욱 내밀한 사상의 궤적을 그려볼 수 있게 해줄거라 기대되기 때문이죠. 

 

 

 

 

5. 검은 역사 하얀 이론 

  탈식민주의는, 우리는 의식하고 있지 못하지만 우리의 주제여야만 하는 것입니다. 중진국 혹은 선진국의 위치에서 개발의 이점을 향유하며 세계적 자본주의 체제 내에서 이득을 착취하는 위치에 있다고는 하지만, 우리는 여전히 백인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이 책이 탈식민주의에 대한 좋은 길잡이가 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여러 사상가들의 이름만 통해서 단편적으로 알려진 여러 탈식민 이론들을 종합적으로 조망할 수 있게 해줄 것 같다는 기대를 하게 되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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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 문학과 예술 숙제> 

<1부>

  이 소설에서 모든 이야기의 중심에 있는 인물은 쥘리엥 소렐이다. 그는 베리에르 지방의 목수의 아들인데, 몸이 약해 아버지로부터는 사람 취급을 받지 못한다. 소렐은 우연한 기회에 예비역 군인을 만나 문자와 책을 처음 접하게 되고, 책이 전해주는 여러 세계들을 동경하며 자신의 처지를 개선할 수 있을지를 궁리한다. 그 가운데 동네 교회의 신부에게서 라틴어 성서에 대해 배우게 되는데, 그는 그것을 모조리 외울 정도로 명민하다.

  이러한 소렐에 대한 소문을 들은 지역의 귀족 드 레날 가문의 집에 라틴어 가정교사로 고용된다. 첫날 방문에 그와 마주친 드 레날 부인은 그에게 반하지만, 반면 소렐은 그에게 어떻게 다가가야할지 갈등하다가도 그저 귀족부인이 자신을 좋아한다는 사실에 우월감을 느끼기도 한다. 레날 가문은 빈민수용소를 운영하는 신흥 부르주아 발르노 가문과 경쟁관계에 있다. 소렐은 이러한 정치적 역학관계를 이용해 자신의 처지를 꾸준히 개선하며, 적어도 걷으로라도 레날 부인에게 호감을 표시한다. 그러나 그는 두 세력의 가운데에 서있는 입장에서, 구식의 귀족적 분위기에는 숨막혀하면서 돈으로만 모든 것을 해결하려하는 부르주아적 천박함이 묻어나는 발르노에 대해서도 혐오하는 이중적 감정을 품고 있는 것 같다.

  익명의 투서 때문에 드 레날 부인과 소렐의 관계는 남편에게 발각될 뻔한다. 그러나 부인은 그 투서가 소렐을 데려가고 싶어하는 발르노가 쓴 것이라고 둘러대고, 의심을 피하기 위해 소렐은 브장송의 신학교에서 사제수업을 받는다. 그는 라틴어 실력과 독실한 신앙의 태도 등으로 교장 피라르의 신임을 받는다. 또한 결정적으로 라틴어 실력을 높게 평가하는 주교와 친해지고, 동시에 퇴임하는 피라르를 후원하는 드 라 몰 후작의 비서로 추천을 받아 파리로 가게 된다. 그는 파리를 목전에 두고 마지막으로 드 레날 부인을 찾아간다.


<2부>

  파리 사회는 그 때까지 소렐이 겪었던 사회와는 전혀 다른 분위기이다. 귀족적 분위기는 정점에 달해있으며, 권력의 정점에 다가간다는 의식이 강한 소렐은 더욱 열심히 일하며 후작의 신임을 얻는다. 그러면서 후작의 딸 마틸드에게 호감을 느끼고 접근한다. 그러나 둘의 관계는 곧 감정적인 파국으로 치닫는데, 소렐은 높은 신분의 여자가 자신을 사랑하게 되었다는 성취감이 훨씬 더 강했으며, 반대로 마틸드는 자신이 매력적인 존재라는 것을 확고하게 믿는 상태에서 스릴이 넘치는 관계, 놀이로서의 연애를 원했기 때문이다. 그에게 소렐은 귀족적 권태를 이겨내기 위한 수단이었다. 하지만 소렐은 소렐대로 후작 이외의 사람을 위해서도 일을 하게 되면서, 마틸드는 자신에게 소홀해진 소렐의 태도를 보면서 서로를 다시 생각하게 된다. 그것이 사랑이었음을 알게된 마틸드는 그와 결혼하기로 마음을 먹고 아버지에게 그와 결혼하여 자진해서 하층신분이 되겠다는 편지를 쓴다.

  후작 역시 어쩔 수 없다는 듯이 두 사람의 결혼을 인정하려고 하나, 이는 무산된다. 드 레날 부인이 후작에게 편지를 보내 자신과 나누었던 사랑에 대해 폭로하기 때문이다. 이 사실을 안 소렐은 자신의 사랑에 훼방을 놓은 것이라 생각하고 레날 부인을 죽이려고 하나 실패하고, 그 자리에서 체포되어 감옥에 갇힌다. 마틸다는 레날 부인의 정체를 알게 된 뒤 매우 낙담하고, 그와 적대하던 많은 인물들은 환호한다. 소렐은 최후 변론에서 ‘신분을 뛰어넘으려 했던 것이 나의 죄’ 라고 말하며, 살 수 있는 모든 방법을 뿌리치고 죽음을 맞이하겠다고 선언하며, 자신이 저지른 일에 대한 모든 사죄를 결심한다. 마지막으로 소렐을 만난 자리에서 레날 부인은 소렐을 용서하겠다고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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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칸트와 독일관념론 발표>

  Hegel은 이미 자신의 책 『철학적 학문들의 백과사전(엔치클로패디)』에서 학문의 전체적 체계에 대해 대략적으로 밝혀놓은 바 있다. 법철학은 그 가운데 정신철학, 그 가운데서도 객관정신의 한 형태인 법의 체계와 그 속성, 그리고 그 지향점에 대해 연구하는 학문이다. 다른 학문의 분과들과 마찬가지로 법철학 역시 엄밀한 사유의 과정을 밟아나가야 하고, 그 결과가 이 세계에서 일어나는 일을 가장 잘 설명해줄 수 있어야 하는 것과 동시에 사람들이 타당하다고 납득할 수 있는 구조를 지니고 있어야 한다.

  그는 학문적인 엄밀함은 분명히 지켜야함에도 불구하고, 법과 공동체를 연구하는 데 고려해야 할 중요한 사안이 있다고 말한다. 그것은 자연철학의 근본적인 전제와 대비되어 나타난다. 인간은 자연철학을 하면서 인간의 의지가 전혀 반영될 수 없는, 그 자체로 완결된 체계와 구조를 갖추고 있는 자연에 대해 그 자체의 모습을 탐구하고 규명해야 한다. 하지만 법과 공동체, 나아가 정신에 대한 학문은 이와 근본적으로 차이가 있다. 그 학문의 대상에는 인간의 의지가 반드시 반영되어 있고, 따라서 인간의 정신과도 같이 끊임없는 변화를 겪으며 생성의 과정이 포함되어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법철학의 목표는 현재 확립되어있는 형식적인 법의 근원과 구조에 대해 연구해야 할 뿐만 아니라, 그 법의 지향점을 담고 있는 인간의 정신의 본질에 대해서까지 연구해야 한다. 더욱 궁극적인 것은 이 두 축이 어떻게 서로에게 영향을 주는지를 분석하여, 현실의 법의 모습과 그 변화가 어떤 과정으로 진행되는지를 설명하고 그 변화가 나아갈 바를 제시해주어야 한다. 법철학에 있어서 현자의 돌에 비유될 수 있는 직접적이고 전체적인 직관은 결코 주어질 수 없으며, 그것은 오로지 논리적 사유에 의해서만 가능한 일이다.

  하지만 많은 사람들은 법에 대해 연구하는 과정에서 엄밀한 사유가 동반되어야 함을 쉽게 잊어버린다. 논리를 포기한 채 직관이나 갑작스런 깨달음에 의존하여 법을 이해하려는 사람들은, 그저 자신의 내적 직관과 법이 일치하지 않으므로 형식적인 법은 거부되어야 한다는 허황된 주장을 일삼고 있다. 그들은 체제를 비판하고 전복하는 것을 자신들의 의무이자 신으로부터 내려온 사명 정도로 여기고 있다. 또한 공동체에 대한 희망을 포기하고 모든 것을 아무 것도 없는 상태에서 시도하려고 한다. 그들은 스스로를 선지자라고 평가하지만, 사실 법, 국가, 그리고 공동체에 대해 사고하는 학문을 포기한 것 이외에 아무것도 아니다.

  이들이 지니는 더욱 심각한 문제는, 법과 국가의 올바른 모습에 대한 사유를 이성에 맡기지 않고 형제애와 같은 감성적인 면, 그리고 이 감성이 상징하듯 개인적인 면으로만 설명하려 한다는 점이다. 하지만 그것은 결코 그렇게 아무렇게나 만들어진 조직체가 아니며, 그럴 수도 없다. 이들은 지금까지 인류가 만들어온 여러 종류의 공동체와 그들이 보여주는 역사적 발전의 노선을 부정하려 하고, 그것에 법칙이 숨어있다는 것도 인정하지 않으려고 든다. 또한 이런 역사적 과정의 결과로서 등장한 현재의 형식적 법의 체계 또한 함부로 무시하며, 오로지 무시하는 태도로만 임하려고 한다. 그러나 이것은 올바르지 못한 태도이며, 이 모든 법의 체계가 인간의 정신의 발전에서 기원한다는 것을 부정하고 나아가서는 진리를 향한 인간의 접근 자체를 부정하는 결과를 낳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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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칸트와 독일관념론 보고서>

1. 들어가는 말

  칸트의 실천철학, 특히 사회·정치철학은 근대의 계몽주의적 개인주의를 대표하는 이론으로 알려져 있다. 특히 그의 역사철학과 관련된 논문, 그 가운데서도 「계몽이란 무엇인가에 대한 답변」, 「세계시민적 관점에서 본 보편사의 이념」, 「추측해 본 인류 역사의 기원」, 그리고 『영구평화론』에 제기된 사회와 개인의 관계에 대한 견해는 현대 이론가들에게도 영향을 미치며 그 이론적 완결성과 현실성을 잃지 않고 있다. 물론 그가 직접 정치사상, 또는 정치철학에 대한 글을 기획하고 완결된 서술을 남긴 것은 아니지만, 오히려 그만큼 더욱더 끊임없이 그 의미가 재해석되며 오늘날에 이르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칸트에게 가장 많은 영향을 준 사회철학자는 다름 아닌 루소이다. 그의 역사철학 관련 논문 곳곳에서는 루소의 사회철학, 실천철학의 전제와 결론들이 반영되어있다. 특히 인류의 기원과 최초의 사회의 구성에 대한 견해는 루소의 『인간불평등기원론』과 비교해 볼 때 그 내용을 많이 인용하고 있다는 것을 한 눈에 알 수 있으며, 칸트 고유의 사회계약론은 루소의 『사회계약론』에 대한 수용과 비판을 통해 탄생했다. 그러므로 사회화되기 이전의 개인의 모습에 대한 묘사와 사회화 과정에 대한 두 사람의 견해는 무척이나 닮아있다.

  이와 같은 면에서 보았을 때, 칸트의 사회철학과 루소의 사회철학과 여러 가지 경로를 통해 교류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더 정확히 이야기하면, 칸트는 루소의 사회철학을 비판하면서 자신의 사회철학과 역사철학의 체계를 정립한 것이다. 따라서 루소의 사회철학의 형태와 특징을 명확하게 밝히고, 칸트의 역사철학, 실천철학과 사회철학을 비교하는 것은 칸트가 의도하고자 했던 바를 더욱 명확하게 밝히는 데 도움이 될 것이다. 나아가서 현대의 이론적 논의를 근대적으로 대표하는 두 학자의 견해를 비교함으로써 바람직한 공동체란 어떤 모습을 지녀야 하는지에 대한 풍성한 논의도 가능하리라 생각한다.


2. 칸트와 루소의 이론적 기반 – 자유와 사회 이행

  칸트는 기본적으로 인식론적, 실천적으로 계몽된 개인들이 모여 각각의 개인이 결단에 의해 승인한 가치로 구성된 공동체(사회)를 지향한다. 그의 정치사상에서 가장 특징적인 면은, 그의 비판철학의 체계 전체가 띄는 특징이 그러하듯 절차와 형식적 중요성을 매우 강조한다는 점에 있다. 이러한 형식적 중요성의 가장 중요한 근거는 각 개인에게 평등하게 주어진 자유이다. 칸트에게서 이러한 정치적 자유는 자신의 행동을 자신이 결정할 수 있는 도덕적 권리라는 측면이 강하다.

  그러나 자유와 공동체는 언제나 충돌할 수밖에 없는데, 이 둘 사이의 조정의 수단으로서 칸트는 최고의 권위체(지배자)라는 개념을 제시한다. 이 최고의 권위체는 각 개인의 자유로운 결단의 집결체이며, 그 집결은 모든 개인이 참여하는 협의를 통해서 이뤄진다. 또 그 경우에만 그 최고의 권위체는 정당하게 각 개인의 근본적 자유를 제약할 수 있다. 그 최고의 권위체 자체가 그 근거를 개인의 자유에 두고 있기 때문이다. 이에 따르는 것은 곧 자유로운 것이다.

  홉스가 『리바이어던』에서 자연상태와 사회상태를 구분한 이후로, 근대의 정치사상가들에게 자연상태의 인간 – 자연인과 사회상태의 인간 – 정치적 인간의 구분은 이론적으로 매우 중요한 문제로 떠올랐다. 인간이 정치적 존재로 변하는 근거, 그리고 그것이 정당성을 가지는 근거를 자연상태의 인간에게서 찾아야 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 이른바 자연권의 문제이다. 홉스에게 자연권은 자신이 원하는 모든 것을 할 수 있는 권리였다. 그러나 인간들은 기본적으로 거의 동일한 욕망의 구조를 지니고 있기에 바라는 것이 겹칠 수 밖에 없다. 따라서 사회계약은 개인이 자연상태에서 누렸던 자연권을 포기하고 억제한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 반대로 로크는 자연으로부터 자신이 원하는 모든 것을 취득하여 자신의 소유로 만들 수 있다는 뜻으로 자연권 개념을 사용하였다. 그러나 전제적인 정권은 자연을 독점하여 취득을 방해하고, 소유를 침해하여 자연권을 침해한다. 따라서 그런 전제정권을 거부하고 자연권을 수호하기 위해서 사회계약을 하고 계약을 통해 창출되지 않은 현실의 전제정권에 대항한다.

  그러나 루소는 이런 자연권 개념에 매우 부정적이다. 그는 홉스나 로크 같은 사회계약론자들이 제시하는 자연상태가 진정한 자연상태가 아니라는 것에서부터 논의를 시작한다. 루소가 보기에, 그들은 이미 충분히 사회상태로 이행한 사람들을 자연상태라고 상정한 뒤 자연권에 대한 논의를 전개하고 있다는 것이다. 따라서 그는 그들의 자연상태보다도 더 이전의 사람들, ‘진정한’ 자연인에 대한 밑그림을 그리기 시작한다. 이것이 루소의 『인간 불평등 기원론』의 전반부의 주요 내용을 구성하고 있다.

  루소가 자연인, 그리고 본질적으로는 인간에게 내재한다고 본 두 가지 특징은 자유에 대한 의식과 완전가능성이다. 인간은 자연이 설계한 그대로가 아니라, 의식적으로 자신이 어떤 행동을 할지 선택한다는 것을 스스로 의식하는 유일한 동물이다. 물론 이것은 자연인에게는 단지 감각에 대한 반응, 또는 자연적 성향에 대한 부정적 태도 정도에서 출발하지만, 이것은 점점 발달하여 적극적인 계획 설계와 행동 방식의 창안으로 나아간다. 또한 단순히 주어진 것을 그대로 수용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욕망을 충족시킬 수 있게끔 끊임없이 주변의 환경을 변화시킨다. 그리고 더욱더 고도로 이것을 추구한다. 완전가능성이란 이와 같은 것을 뜻한다. 그러므로 완전가능성에는 도덕적인 의미가 전혀 포함되어있지 않다. 그것은 오로지 정념, 감각적 충족을 향해서만 발휘될 뿐이다. 그러므로 이것은 악한 일을 할 수도, 선한 일을 할 수도 있는 능력이다. 자유 또한 마찬가지인데, 자신이 하고 싶은 일을 선택할 뿐 그것이 어떤 도덕적 함의가 있는지에 대해서는 전혀 고려하지 않는다. 그런 것은 자연인의 고려사항에 아예 없다. 그의 첫 작품인 『학문예술론』에서는 완전가능성이 가장 잘 발현된 학문과 예술이 인간을 선이라기보다는 악, 도덕적 고양이라기보다는 타락으로 이끌어간다는 점을 잘 보여주고 있다.

  칸트는 인간의 자연상태에 대한 루소의 분석을 받아들인다. 자연인에게는 도덕적인 면모가 전혀 없다. 물론 그러한 자질이 인간의 내부에 잠재되어있음에도 불구하고, 그것은 단순하게 직접적으로 표현되지는 않는다. 그것이 드러나기 위해서는 매우 많은 과정을 거쳐야만 한다. 태초의 인간은 감각기관의 자극에 반응하는 수준으로만 행동하지만, 자극의 축적과 지속적인 분별작업에 의해 내재된 이성이 작동을 시작한다. 또한 이 이성에 의해 자연적 경향을 거부함으로써 최초로 자유를 의식하게 된다.

  집단적 생활을 영위하게 되는 계기가 우연적이라는 점에서도 두 사람은 공통점을 보인다. 모든 인간은 혼자서도 자신의 삶을 영위할 수 있는 충분한 능력이 있다. 또한 자신의 자유를 온전히 누리기 위해서는 타인과 떨어져 사는 삶은 거의 필수적이다. 하지만 누군가가 우연히 협동의 용이성을 알고 그것을 전파하기 시작하면서 사람들은 모여서 살기 시작한다. 이 시기까지도 인간은 여전히 자기충족적이며, 단지 몇몇 일들을 협동해서 처리할 뿐이다. 그러나 교환이 시작되고, 사람들 사이의 관계가 더욱 긴밀해지면서 집단적 생활은 개체들의 병렬적 집합을 넘어 유기적 결합으로 나아가게 된다. 그러나 이것은 곧 공동체를 결성하면서 생기는 모든 문제들의 뿌리이기도 하며, 사회적으로 악이라 평가받는 사건들의 발생을 이끈다. 자신들의 자유를 잘못 사용하는 경우가 바로 그것이다.


3. 칸트와 루소의 분기점 – 공동체의 성격, 인간, 최종적 지향점

  그러나 시민사회 공동체의 최종적인 지향점이 어디인가 하는 문제에 대해서는 두 사람의 견해가 첨예하게 대립한다. 이 대립은 크게 세 가지 측면에서 나누어서 볼 수 있다. 첫째는 공동체의 성격과 정당성의 확립에 대한 부분이다. 루소는 일반의지라는 개념을 내세워서 절차적인 정당성과 도덕적 당위성을 통합시킨다. 일반의지는 개념적으로 모든 사적인 이해관계가 배제되어 있으며, 공동체 내 구성원이 모두 따라야하는 것으로 강제된다. 반면 칸트는 개인들이 정치공동체를 구성하는 과정을 묘사하면서 도덕적인 면을 아예 배제한다. 공동체의 근거인 자유는 도덕적인 평등함에 근거하여 주어지지만, 그 자유를 사용하는 과정이 도덕적이지는 않다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만약 계몽된 개인들이 공동체를 구성한다면, 그 공동체는 도덕적으로도 다른 공동체에 비해서 우월할 것이고 그것이 법률을 통해 강제될 것이라고 주장한다. 칸트에게 법의 정당성과 내용은 루소와는 다르게 통합되지 못하고 긴장을 일으키고 있는 것이다.

  둘째는 공동체 내에서 활동하는 바람직한 인간상에 대한 입장이다. 특히 이는 두 사람의 상업에 대한 생각의 차이에서 비롯된다. 루소는 기본적으로 공동체가 아닌 자신의 이익을 위해서만 봉사하는 상인들을 매우 경멸적으로 묘사하고 있다. 그들은 충분히 자신의 이익을 위해 공동체의 안녕을 해칠 준비가 되어있는 자들이며, 이것은 공동체 내에 항상 위험요소로 남는다. 이러한 의지의 동기는 대개 금전적 이익을 통해 이루어진다. 더군다나 현대사회에서는 이러한 경향이 더욱 심해지면 심해지고 있지, 덜하지 않다. 루소는 이런 점도 정확히 짚어내고 있다. 즉, 물질적으로 취할 수 있는 이득, 즉 상업적인 이득은 ‘노예들이 쓰는 말’이며, 만약 시민으로서의 자질을 갖추고 있는 사람이라면 이런 것들은 피하는 것이 옳다. 물질적인 이득을 매개로 하지 않는 시민으로서의 의식, 자질, 소양 같은 것들을 갖춘 뒤에야 비로소 인간으로 불릴 수 있으며, 이런 사람 가운데서 행정부의 구성원이 될 인물을 선출해야 한다는 것이 루소의 생각이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그러나 칸트는 이러한 사람들이 공동체 내에서 꼭 필요하다고 보는 입장이다. 오히려 그들이 개인적인 이기심을 활발하게 추구해야만 공동체는 도덕적으로 발전할 수 있다. 그것은 형이상학적인 자연이 인간의 역사를 기획하는 순간에, 그 모든 이기적인 질서들이 인간의 발전에 기여할 수 있도록 설계해놓았기 때문이다. 또한 전쟁은 상업활동에 큰 지장을 주기 때문에, 상업의 활성화는 공동체 사이의 전쟁을 예방하는데도 큰 기여를 할 수 있다.

  문명사회 이후에 시민들은 더 이상 정복이나 다른 폭력적 수단으로 자신의 욕망을 채우려 하지 않는다. 이런 것은 충동과 미몽에 의해 지배받는 수단들이다. 계몽된 이들이 자신의 욕망을 채우기 위해 이용하는 수단은 교환이며, 그 교환을 기초로 형성된 경제체제이다. 폭력은 이 경제체제의 근간을 흔들고 교환행위를 방해한다. 이것은 다름아닌 각 시민의 이익추구를 방해하는 결과로 나타난다. 이런 국가는 더 이상 시민들의 지지를 받기 힘들고, 자신의 힘을 소모시킨다. 따라서 계몽된 시민들은 이러한 사태가 더 이상 벌어지지 않게 하기 위해 세계적 수준의 구속력 있는 공동체를 결성하기에 이른다. 또한 여기에서 개인들의 이기적인 동기와 도덕적 요구는 하나가 된다.

  셋째는 궁극적인 공동체의 모습에 관한 구상이다. 루소는 공동체의 크기가 크면 클수록 좋지 않으며, 나쁜 정치체제로 바뀔 가능성이 크다고 지적한다. 구성원의 숫자에 따른 것이든 그 공동체가 영위하는 토지에 따른 것이든, 공동체의 크기가 크면 클수록 정치적인 의사결정과정에서 개인이 행사할 수 있는 지분이 그만큼 적어지며, 그에 따라 정치에 대한 관심 자체가 줄어들 것이기 때문이다. 그의 이론 체계에서 개인들이 정치적 관심이 줄어든다는 것은, 그들이 올바른 삶을 살아가는 것에 대한 관심이 줄어든다는 것과 동일한 의미이다. 이것은 곧바로 공동체의 위기와 연결된다. 따라서 그는 소규모 공동체를 가장 이상적으로 생각한다. 각 공동체가 일반의지를 중심으로 통합된 동질적 공동체가 되어야 함을 강조하고 있다.

  그러므로 그가 상정하는 이상적 공동체는 현실에서 어느 정도 실현가능한 형태로 주어지며, 루소는 실제로 그리스와 로마의 시민사회를 역사 속에 존재했던 이상적인 공동체로 간주한다. 그들에게 부족한 것은 모든 사람이 자유롭지 못한 상태였다는 것 뿐이다. 따라서 그의 이상적인 공동체는 그 지향점이 명확함과 동시에 어느 정도 복고적인 성향이 강하다고 볼 수 있다.

  반대로 칸트는 각각의 공동체들이 통일된 세계시민사회로 발전하는 것을 최종적인 목표로 삼고 있다. 각 개별 공동체가 자신의 자유를 잘못 사용할 경우, 그것은 전쟁으로 이어질 가능성이 늘 존재한다. 하지만 개인이 공동체로 나아가는 과정에서 그러했듯, 국가들 사이에서도 자신의 자유에 근거에 세계적 수준의 기구를 창설하게 된다. 개인과 시민사회의 관계와 개별 국가와 세계적 수준의 기구 사이의 관계에는 분명한 유비가 존재한다. 이는 국가 간에도 각 개별국가의 자유와 그에 따른 행위가 정당화될 수 있는 정당한 형식적 절차가 있음을 말해준다. 그것이 비록 느슨한 연맹 수준이라고 할지라도, 그 구조는 그 연맹은 각 개별 공동체에 대해 구속력을 지닐 수 있는 것이 된다. 이러한 공동체의 탄생 자체가 인류의 역사, 특히 도덕적 역사에 일대 혁명을 불러오는 사건이며, 영원한 평화라는 이정표를 세우는 것이다.

  이러한 공동체는 과연 달성할 수 있는 것인가? 칸트는 그것이 현실에 완전한 형태로 등장할 수 있다는 것에 대해서 회의적인 것으로 보인다. 이상적 공동체(또는 이상적인 도덕적 상태)의 실현은 한 개인의 내면에서는 불가능하며, 유적 존재로서 인간 전체에 걸쳐서 일어나는 변화라고 설명하고 있다. 이는 다시 말해 구체적으로 존재하는 개인이 이것을 달성하는 데는 상당한 어려움이 뒤따른다는 것이다. 또한 그것이 실제로 구현되는 것은 역사의 가장 나중에 일어나는 사건이라고 말하고 있다. 그의 어감은 현실가능성이라기보다는, 부단한 과정으로서, 그리고 그 과정을 무한히 실천하는 구체적인 개인들의 모습에 더 힘을 실어주는 듯하다. 따라서 그는 루소와는 달리 그 공동체가 미래지향적이지만 또 그만큼이나 미결정적이다. 이것은 역사적으로 이러한 공동체가 달성된 적이 없음을 의미하기도 한다.


4. 맺는 말

  칸트와 루소는 모두 똑같이 근대라는 기반을 밟고 서있었다. 루소는 자연인과 사회상태를 새로 정의했다. 이런 이론적 작업으로 말미암아 그 이전의 이론가들과는 확연히 다른 차이를 보이게 되었다. 특히 복고적 이상을 설정하는 것으로 보이는 그의 이론, 학문과 이성의 진보에 대한 그의 불신은 근대 속에서도 그것을 비판하는 선구자적인 시선이었다. 또한 그의 이러한 관점은 근대정치이론의 역사에서도 혁신적인 것이었으며, 현실 정치에 대한 함의 또한 혁명적이었다. 칸트 또한 이러한 점을 충분히 파악하고 있었다고 여겨진다. 칸트가 루소에게서 큰 영향을 받았다는 것은 너무나도 분명한데, 그 이름을 자신의 저서에서 직접 거론하며 긍정적으로 서술하고 있다는 데에서도 그것을 알 수 있다. 사회상태를 향한 인류의 역사적 변화에 대한 루소의 분석은 칸트에 의해 전폭적으로 수용되었고, 칸트의 체계 속에서 새롭게 변용되었다.

  따라서 칸트의 사회·정치철학은 루소와 공유하는 부분도 있으며, 그와 명확히 반대되는 부분도 있다. 그는 인간의 발전에 있어서 도덕적인 부분이 거의 고려되지 않고 있다는 것, 인간의 이성은 정념에 이끌려서 그 결합이 실제로 발전의 노정에 놓여있다는 것, 따라서 사회는 어떤 필연성이나 자연적 경향에 따라 결성되는 것이 아니라 매우 우연적인 사건이라는 점에 있어서는 루소와 그 맥락을 같이 한다. 이것은 둘의 이론이 우연히 일치한 것이라기보다는, 칸트가 루소를 전폭적으로 수용한 결과 나타나는 현상이다.

  그러나 칸트는 그러한 루소의 정치이론을 극복하기 위해 그와 반대의 입장을 개진하기도 한다. 루소의 일반의지는 행동의 지침, 무엇을 해야하는지 당위까지 제공해주지만 칸트가 생각하는 이상적 공동체는 도덕을 강제하지 않는다. 칸트적 공동체는 자신의 자유에 의해 승인된 한에 있어서만 그에 복종할 것을 강요하며, 그것이 도덕과 결부되지는 않는다. 물론 그러한 공동체가 도덕적 성취 또한 달성할 수 있으나, 그것은 인간들의 계획이 아니라 자연의 계획 전체가 그러하기 때문이다. 또한 당시 부각되던 상업 부르주아지들에 대한 태도도 눈에 띄게 다르다. 루소의 경우 자신의 이익을 공동체의 이익보다 우선시하는 인간으로 이들을 바라보았고, 따라서 공동체에 해가 되는 존재들이라고 판단하여 배척하였다. 그러나 칸트는 평화적 수단으로 시민들의 이익을 지켜주는 상업행위가 사회의 발달에 기여할 것이며, 나아가 상업행위 내에서 이기적으로 발현되는 시민들의 행위 자체가 인류 역사의 진보의 원동력이라고 생각했다. 마지막으로 루소는 스스로가 생각한 이상적 공동체의 형태가 과거에 특정한 형태로 존재했다고 어느 정도 인정하는 데 비해서, 칸트의 공동체는 무한하게 열린 미래에 놓인 미결정적 상태이다.

  칸트가 루소와 벌인 이론적인 대결, 더 정확히 말하자면 바람직한 공동체와 인간이란 어떤 모습인가 하는 논쟁은 여전히 진행중인 논쟁이다. 그 둘의 견해의 차이는 끊임없이 다른 형태로 부활하여 사회·정치철학의 주요한 논쟁의 주제가 되어왔다. 우선 루소의 사회이론은 근본적으로 민의에 그 뿌리를 두고 있어야 한다는 혁명적 입장에 의해, 왕정과 전제정에 대항하는 논리적 근거로서 활용되어왔다. 그러나 동시에 로베스피에르 등에 의해, 그리고 그 이후에도 끊임없이 대중독재를 정당화하는 이론적 구조로 오해(또는 이해)받아온 것 또한 사실이다. 반면 인간의 도덕적 평등으로부터 모두에게 평등한 정치적 자유를 부여해야 한다는 대원칙을 이끌어낸 칸트는 이후 자유주의라고 불리는 전통의 이론적인 자원으로 활용되었다. 칸트적인 자유주의는 계몽주의의 가장 정교하고 완성된 형태의 이론으로 간주되며, 근본적으로 어떤 일관된 가치체계를 옹호하는 것을 거부한다. 그러나 칸트가 옹호했던 상업공화국의 이상은 현재 자본주의의 폐해의 뿌리이며, 그가 예상한대로 상업이 평화를 가져다주지 않는 사태에까지 도달하였다. 단순히, 칸트가 예견한 공동체는 우리에게 오지 않는 상태로, 영원한 이상으로만 존재하는 것일까?

  특정한 공동체를 이상적으로 제시하는 이론적 경향은, 미래를 식민화하는 것이다. 결국 중요한 것은, 칸트가 강조했듯이 공동체의 철저한 기반인 개인의 자유이다. 자유는 어떤 행동을 할 것인가를 판단하는 개인의 결단이다. 공동체가 단순히 개인들의 집합이 아니라고 할지라도, 결국 공동체의 모든 성격과 지향점의 근원은 뚜렷한 목적의식을 가진 개인의 실천에서부터 출발한다. 비록 칸트 스스로는 자연적 경향에 의해 인도되는 것일 뿐 개인 자체가 도덕적인 결단을 하는 것은 아니라고 말한다고 할지라도, 칸트 그 스스로가 그러하듯 미래에 대한 낙관적인 전망은 바람직한 시민사회를 미래에 투사하고 그것을 위해 힘겨운 한걸음을 내딛는 데 가장 중요한 작업이 될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칸트의 루소 비판과 극복은 이론적으로도, 실천적으로도 현재적이며, 나아가 칸트 스스로가 미결정이며 무한한 시간 뒤에 오리라고 설명한 그 상태가 (언젠가는) 현현할 수 있게 만드는 중요한 정치적 근거이다.


* 참고문헌

강정인, 김용민, 황태연 엮음, 『서양근대정치사상사』, 책세상, 2007
레오 스트라우스·조셉 크랍시, 『서양정치철학사2』(이동수 등 옮김), 인간사랑, 2007
임마누엘 칸트, 『칸트의 역사철학』(이한구 옮김), 서광사, 2009
장 자크 루소, 『사회계약론』, 펭귄클래식코리아, 2010
장 자크 루소, 『인간 불평등 기원론』, 책세상, 20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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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철학과 해석학 보고서. 『철학적 해석학 입문』 7장 요약.>

1. 들어가는 말

  Heidegger를 전유한 Gadamer의 해석학은 인간의 주관성의 한계를 인정하면서도, 그 주관의 조건의 보편성으로부터 출발해 열려있는 해석적 지평으로 나아가려 했다. 이런 입장은 이전의 해석학과는 다른 새로운 흐름을 만들어내었다. 뿐만 아니라 그는 자신의 철학적 원리를 다양한 학문분야에 적용시키려고 시도했다. 따라서 그의 철학은 철학의 역사 그 자체에서부터 문예비평, 미학, 나아가서는 사회과학의 기초를 이루는 방법론에 이르기까지 광범위한 분야에서 논의되고 수용되었다.

  그의 철학에 대해 긍정적으로 생각하는 사람들도 있었지만, 그에 대한 비판 역시 만만치 않았다. Gadamer는 『진리와 방법』발표 이후 그 저서에 담긴 입장에 대한 날카로운 평가와 마주한다. 이 가운데 그가 각각 Betti, Habermas, 그리고 Derrida와 벌인 논쟁은 그의 해석학의 여러 면모를 더욱 명확하게 드러내주었을 뿐만 아니라 그의 사상적 여정에도 영향을 미쳤다는 점에서 중요한 논쟁으로 평가받는다. 세 비판가들은 Gadamer의 철학에서 이해의 결여(Betti), 보수주의적 함의와 이데올로기 비판의식의 부족(Habermas), 무한한 지평 속에서 이루어지는 대화의 유의미성(Derrida)을 각각 문제삼았다.

  또한 Heidegger·Gadamer의 해석학과 별개로, 프랑스의 해석학자 Ricoeur는 자신만의 독특한 철학적 해석학을 구축하였다. 그는 인간이 죄에 구속을 받고 있지만 끝내는 구원을 받을 것이라는 기독교적인 인간 이해를 토대로, 그 인간에 대한 이해를 내적으로는 현상학적 방법을 통해 밝힌다. 하지만 이런 내적인 면모가 외부로 드러나는 것은 언제나 상징의 체계를 거친다는 것을 통찰한 이후, 철학의 목표를 그 체계를 해석하는 것으로 바꾸면서 현상학에서 해석학으로 나아간다. 그의 상징해석은 인간의 조건을 설명하는 또 다른 시각을 제공해주었다.


2. Betti VS Gadamer

  Betti의 해석학은 Heidegger․Gadamer가 세운 새로운 해석학적 전통에 대항하여 방법론적 해석학을 복권시키려 시도한다. 이런 맥락에서 Betti를 Dilthey 전통에 편입시킬 수도 있다. 이에 대립되는 Heidegger와 Gadamer의 해석학은 존재론적 해석학이라고 부를 수 있는데, 그 이유는 이들이 해석학의 위치와 영역의 문제에 대해 존재론적으로 해명하려 하기 때문이다. 두 사람에게 해석학은 존재의 조건이자 양태이다. 이들에 따르면 현존재, 즉 인간은 본질적으로 해석하는 존재이면서 또한 그들의 존재는 해석을 통해 규정된다. 다시 말해, 이 세계를 해석해야만 하는 존재임과 동시에 능동적으로 해석하며 세계의 내용을 창출해가는 역설적 존재인 것이다. 따라서 이들에게 해석학은 이 양식을 기술하는 현상학적 작업이다.

  하지만 이러한 존재론적 해석학의 경향은 그 이전의 해석학, 즉 방법론적 해석학의 이념에는 어긋난다. 이 이전의 해석은 정신을 올바르게 이끌어 대상의 정확한 의미를 파악하는 것을 목표로 삼았다. 그리고 해석학은 해석에 대한 연구 그 이상이 될 수 없었다. 따라서 기존의 해석학은 해석대상의 정확한 의미보다는 해석하는 주체의 능동성을 강조하고 결국 존재에 대한 연구로 전환되는 존재론적 해석학과는 거리가 멀다. Heidegger와 Gadamer의 입장을 현상학적으로 기술하는 것에 치중한다는 점에서 기술적descriptive 해석학이라고 부를 수 있다면, 이들에 반대되는 방법론적 해석학은 대상의 의미를 올바르게 밝혀내는 것을 목표로 삼는다는 의미의 규범적 해석학이다. Betti는 이 규범적 해석학의 입장에서 Gadamer를 비판하는데, 이 둘의 입장 차이는 1960년대 초반 두 학자가 직접 벌인 논쟁으로 인해 명확하게 드러나게 되었다. 이 논쟁은 두 학자 사이의 논쟁임과 동시에, 전통적인 의미의 규범적-방법론적 해석학과 Heidegger와 Gadamer를 거치며 탄생한 기술적-존재론적 해석학의 이론적 대결이기도 하다.

  두 학자 모두 자신의 해석학적 입장을 보편적인 해석학이라고 생각하며 왜 보편적인지에 대해 말한다. 하지만 각자의 의미는 전혀 다르다. Gadamer가 해석학적 보편성을 이야기할 때, 그 뜻은 모든 현존재들이 같은 해석학적 상황에 놓여있다는 것이다. 반편 Betti가 해석학의 보편성을 이야기할 때에는, 해석학이 인간의 정신과 관련된 모든 학문에 방법적인 토대가 된다는 뜻이다. 다시 말해 해석은 정신과학의 보편적 방법이며, 해석학은 이 방법의 속성, 절차, 체계 등을 밝히는 방법에 대한 연구, 즉 방법론이 된다.

  Betti가 이렇게 주장하는 해석학적 근거는, 모든 정신과학의 대상은 ‘의미를 담지한 형식들forma rappresentativa’이라는 점이다. 이는 인간이 자신의 의도를 표현하기 위해 사용한 모든 수단을 일컫는다. 이 점에서 Betti의 해석학은 해석interpretation을 위한 연구가 아니라 이해understanding의 토대를 마련하기 위한 연구로 바뀐다. 즉, 주관의 개입보다는 외부의 형식과 그것이 품고 있는 의미를 어떻게 해야 더 정확하게 파악할 수 있는가, 혹은 파악해야 하는가가 Betti 해석학의 관건이다. 형식은 단순히 아무렇게나 모인 우연의 산물이 아니라 형식을 기획한 사람의 일관된 의도에 의해 조직된 것이다. 그러므로 이전의 해석학들이 형식이 담고 있는 의미를 투명하게 파악하는 것이 매우 힘든 일이라고 충분히 논증하였음에도 불구하고, 그 의미를 규명해내려는 작업을 포기해서는 안된다.

  우리가 인식해야 할 대상은 해석을 통해 드러나는 해석자의 내면이 아니라, 말하는 이(글쓴이)가 형식을 통해 표현하려고 했던 의미여야 한다. 이런 입장에서 보았을 때, 존재론적 해석학자들이 강조하는 선이해와 지평의 융합은 자기반복적일 수밖에 없다. 이에 따르면, 모든 해석은 자신의 의미의 체계를 자신의 내면에 투영하고 재확인하는 일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Betti는 인식은 해석이 아니라 이해이며, 이해를 통해서만 올바르게 해석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이해를 통해 그 모습을 어느 정도 드러낸 형식의 내용, 즉 의미는 해석을 자의적이지 않게 이끌어주는 표준이 된다. 이로써 형식의 의미Bedeutung와 유의미성Bedeutsamkeit은 구별된다. Gadamer의 해석학이 유의미성의 현상학이라고 한다면, Betti의 해석학은 유의미성의 현상학이 필연적으로 의미에 대해 소홀해지고 따라서 해석자에 의존하는 상대주의에 귀결될 수밖에 없다고 주장한다.

  그는 이러한 ‘올바른’ 이해의 규준으로서 네 가지를 제시한다. 첫째는 해석학적 자율성의 규준der Kanon der hermeneutischen Autonomie이다. 여기서의 자율성은 해석자의 자율성이 아닌, 형식을 구성한 사람(말하는 이, 글쓴이)의 자율성을 뜻한다. 그는 자기 의도를 가장 잘 표현하려고 노력하였기 때문에, 해석하는 사람은 그 사람의 의도 그리고 그 의도가 낳은 의미를 최대한 존중하는 상태에서 해석해야 한다. 따라서, 해석자의 내적인 의미의 체계 또는 경험은 가능한한 배제되어야 한다.

  둘째는 전체성의 규준der Kanon der Ganzheit이다. 어떤 형식의 체계에 의지해 표현된 여러 문장들은, 그 문장들이 모여서 만들어진 ‘의미를 담지한 형식’의 전체적인 의도와 항상 연관지어 해석해야 한다. 그 형식은 전체적이고 일관된 의도를 가진 존재들에 의해서 형성되었기 때문에, 그 형식은 정합적이다. 그러므로 해석에서 전체 형식은 언제나 고려되어야 한다.

  셋째는 이해의 현재성의 주관주의적 규준der Kanon der Aktualität des Verstehens이다. Betti가 의도한 것은 언제나 해석이 아닌 이해를 추구하는 것이 옳다는 입장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의미가 현재에 생생하게 살아있기 위해서 해석자의 참여가 필요하다는 것은 인정하였다. 이런 입장을 밝힌 규준이 바로 이 세 번째 규준이다. 하지만 이것은 자신의 선이해를 전부 투영하는 Gadamer적인 참여가 아니라, 그 형식을 만들어낸 말하는 이가 그것을 만들어내는 과정을 정신적으로 추적해야한다는 의미이다. 이 과정은 어쩔 수 없이 해석자의 경험을 반영할 수밖에 없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것이 살아있는 의미가 되기 위해서는 꼭 필요한 과정이기도 하다. 이것은 해석이라기보다는 번역에 가깝다.

  넷째는 해석학적 의미상응성hermeneutische Sinnentsprechung 또는 해석학적 동등성의 규준der Kanon der Sinnadäquanz des Verstehens이다. 해석은 언제나 이해에 따라 말하는 이와 해석자 사이에 그 의미가 일치된다는 전제 아래서 이루어져야 한다. 그리고 이 의미는 말하는 이의 의미와 해석자의 이해가 일치한다는 점에서 해석자에게 내면화되며, 죽은 형식에서 살아있는 의미로 다시 귀환한다.

  그러나 Betti의 이러한 시도는, 그가 강조한 만큼 의미가 그렇게 확정적일 수 있는가에서부터 큰 문제에 부딪힌다. 그가 주장하고자 하는 이 말은 그의 주장의 강도만큼이나 해석학 내에서 논쟁적인 주제이다. 존재론적 해석학자들이 선이해 개념을 끌어들여 해석학을 해석자 중심으로 정초한 것은 결국 이 의미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시도라고 볼 수 있다. Betti는 방법론으로 복귀하여 이 문제를 해결하려 시도했지만, 규준을 통해 밝혀진 의미가 정말 정확한 것인지에 대한 검증은 이루어질 수 없다. 방법은 그 방법이 내어놓을 발견의 결과를 전제하고 있을 수도 있기 때문에, 방법 자체에 대한 검증의 방법이 없는 한 해석학적으로 의미에 대한 검증은 이루어질 수 없다.

  Betti는 이후 자신의 규준이 적극적으로 작용하기보다는, 해석의 과정에서 피해야할 것을 알려주는 소극적인 표준으로만 기능한다는 것을 인정하였다. 이런 부정적 기능은, 정신과학의 토대를 만드는 것을 목표로 하는 방법론적 해석학의 이념을 상당부분 훼손시킬 수 밖에 없다. 과학이 아닌 것을 배제한다고 해서, 과학이 아닌 것이 완전히 없어지지는 않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Betti가 의미있다고 여겨지는 것은, 완전히 주관주의적이고 상대주의적으로 해석될 여지가 있는 존재론적 해석학에 대해 그 위험을 비판했다는 점이다.


3. Habermas VS Gadamer

  Habermas는 본인의 사회과학이론에 규범적이고 언어이론적인 정초를 시도했다. 그는 이러한 시도를 위해 Wittgenstein의 언어이론과 언어놀이에 대한 학설을 받아들였다. 그런데 여기서 Habermas는 모든 행위자가 자신의 언어세계에 감금되어 있다는 비트겐슈타인의 삶의 형식에 대한 논제에서 실증주의의 잔재를 진단한다. Habermas는 바로 이러한 한계를 극복하기 위해 해석학을 활용했다.

  Habermas는 1970년대에 Gadamer의 해석학적 통찰을 비판적으로 수용한 뒤 영미의 언어철학적 전통과 조우시킴으로써 사회이론을 위한 종합적인 언어이론을 설계할 수 있었다. Habermas는 1981년에 출간된 『의사소통 행위이론』에서 체계적인 표현을 갖추게 된 자신의 언어 철학에 이러한 해석학적 통찰을 통합시킨다. 여기서 그는 보편적 화용론에 바탕을 둔 의사소통 행위이론을 구축하고, 그 이론에 입각하여 비판적 사회이론의 규범적 기초를 새롭게 설정한다. 이 새로운 언어 이론의 곳곳에는 체계적이고 명시적인 것은 아니라 할지라도 여전히 Gadamer의 해석학의 통찰들이 수용되어 있고 아울러 극복되어 있다. 이런 연관에서 볼 때 Habermas의 의사소통이론은 Gadamer와의 논쟁으로부터 가장 잘 조명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인식 과정에 내재된 전통과 이성의 변증법적 관계가 이 두 철학자 사이의 논쟁의 핵심을 형성하고 있다.

  Gadamer와 Habermas의 공통적인 출발점은 의미 이해를 해석의 모델에 입각해서 해명하려는 데 있다. Gadamer는 해석자가 해석 대상에 귀속되어 있음을 해석적 반성의 결정적인 요소로 확정한다. 이로부터 이해의 역사성이 해석학의 원리로 고양되며 모든 비역사적, 방법론적 인식에 대항하는 해석적 진리의 보편성이 요구된다. 더 나아가 Gadamer는 해석적 경험의 본질을 영향사적 의식으로 규정하고 모든 이해 과정이 전통에 귀속될 것을 촉구한다.

  Habermas는 의미 이해에 있어 해석자가 전통에 참여하는 것이 불가피하다는 점, 즉 이해와 전통의 영향사적 결합을 인정하면서도 그러한 입장으로부터 Gadamer가 전통의 존재론적 우위를 끄집어내는 데에는 반대한다. Habermas는 전통의 정당성 그 자체를 문제 삼을 수 있어야 하며 일상적인 상호주관은 비판적으로 검토되어야 한다고 보았다. 그에 의하면 이해에 앞선 구조인 사회적 합의는 체계적으로 왜곡될 수 있다. 언어적 전통을 포함한 사회화과정 속에는 권위의 요소가 상존하기 때문에, 참된 합의가 가능한 만큼 지배이익에 의해 왜곡된 합의도 가능하다고 본 것이다. 따라서 그는 주어진 현실을 가치척도로 상정하는 Gadamer의 해석학은 이상적인 상황을 전제로 할 때만 성립할 수 있는 논리라 생각했다. 현실을 규정하는 모든 가치가 해석의 기준이 될 수 없으며, 현재의 시점에서 작용하고 있는 전통과 권위, 선입견은 비판적으로 검토되어야 한다. 모든 해석행위는 인간사회를 억압으로부터 해방시키기 위해 기존질서에 대한 끊임없는 비판을 시도해야 한다. 따라서 Habermas에게 해석은 곧 비판을 의미한다. 지배와 노동이 담화과정을 왜곡시킬 수 있는 것처럼 역으로 진실한 의사소통을 통해서 지배와 억압의 구조를 극복할 수 있다는 것이다.

  진리는 비폭력적인 언어 상황 속에서 이루어지는 이상적인 합의이다. 그는 다수에 의해서 견지되는 왜곡된 합의와 허위의식의 가능성을 문제 삼았고, Gadamer의 해석학이 이러한 문제를 소홀히 함으로써 사실상 현실을 정당화하는 보수적 이데올로기의 역할을 하고 있다고 지적하였다. 그는 해석자가 이해 과정의 참여자로서 해석적 출발 상황의 선이해에 결부되어 있긴 하지만, Gadamer의 존재론적 입장은 이러한 귀속성으로부터 텍스트의 존재론적인 우위를 주장하게 하며 해석자의 위치를 은연중 격하시킨다는 점을 강조했다. 따라서 Habermas는 여기서 Gadamer가 계몽주의에 대해 정면으로 거부한다고 생각했다.

  반면 Gadamer는 전통이 이해되어야할 대상인 텍스트나 텍스트의 해석자를 함께 떠받치고 있기 때문에 이해한다는 것은 불가피하게 전통 속으로 참여하는 행위를 전제한다고 말한다. Habermas는 이런 견해를 받아들이면서도 해석자는 이성을 통해 비판적·반성적으로 그 텍스트를 이해해야한다며 자신의 비판철학을 내세웠다. 이런 텍스트에 묻어있는 외부적인 요인을 긍정적으로 보느냐, 부정적으로 보느냐의 견해차이가 다음 논쟁으로까지 발전하게 된다.

  수사학 또한 Gadamer와 Habermas의 논쟁에서 중요한 주제이다. Gadamer는 반성적으로 통찰된 소통을 수사학적으로 목표된 소통에 대항하여 제시하는 것은 인위적이라고 하면서 수사학의 전통에 동조했다. 그 이유는 수사학을 통해야만 보다 확실한 의미 전달이 오가는 의사소통이 가능하다고 생각했기에, 수사학을 비판과 대립시키는 것은 이미 존재하는 사회에서 협의된 소통의 기회조차도 과소평가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반면에 Habermas는 해석학적 관점에 대한 논의에서 “외견상 ‘일상적으로’ 작동된 합의가 사이비 의사소통의 성과일 가능성은 충분하다”는 것을 입증했다. 대화를 거친 동의는 이데올로기적으로 은폐된 지배구조에서도 산출될 수 있기 때문이다. 의사소통적으로, 즉 반성적으로 통찰된 동의는 순수한 수사학적 혹은 전략적(즉 목표가 조작적으로 설정된) 합의와 구별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에 따르면 메타해석학 혹은 심층해석학의 통찰은 “의미이해에서 제한되는 모든 합의는 근본적으로 사이비 의사소통적으로 강요되었다는” 의심을 받고 있다. 이 해석학은 “이해를 이성적인 말의 원칙에 결합하는데, 그에 따라 진리는, 제한되지 않으며 지배로부터 해방된 의사소통의 이상적인 조건 아래서 달성될 수 있다는 그 합의를 통해 보증된다.”

  다시 말해, Habermas는 (Gadamer에 따르면 생각될 수 없는) 수사학으로부터 독립된 소통이 진정한 이해에 도달할 수 있다는 입장이었다. 수사학은 전통이나 권위에 의해 이해에 부정적인 영향을 끼칠 수도 있으니 반성적으로 통찰된 소통이 필요하다고 주장하는 것이다.

  Habermas는 Gadamer와의 논쟁을 통해 더욱 단호하게 비판적 사회이론의 언어이론적 기초로 파고들었다. 이것이 그를 보편화용론의 전개, 의사소통행위이론으로 인도했다. 그의 중심적인 직관은 사회 이론과 그 담화 윤리의 규범적 기초가, 의사소통과 합의를 목표로 하는 언어 사용의 화용론적 함의나 타당성 요구에서 찾을 수 있다는 것이다. Habermas의 비판 철학의 과제는 언어 사용과 관련해서 직관적으로 만들어진 전제들을 합리적으로 재구성하는 것이다. Habermas는 보편적인 합의가 원리적으로 대화 속에서 가능하다는 사실을 Gadamer의 해석학에서 발견하였고, 언어와 합의가 그 근원이 같으며 서로를 설명해주는 개념들이라고 생각한다. 합의라는 해석학의 근본 범주는 Habermas에게서 새로운 보편화의 단계를 열어주었다. 합의는 이제 모든 언어 사용의 암묵적 목적이자 공통의 토대로 간주된다. 그러한 행위는 전략적 목표를 실현하기 위해 언어가 소통을 오용하는 곳에서도, 그것의 타당성이 합의와는 무관한 목표설정으로 악용될 뿐인 합의의 이념 위에서도 기생적으로 살아간다. 합의에 대한 이렇게 포괄적으로 시도된 예견으로부터 Habermas의 담화 윤리를 합리적으로 재구성해야만 하는 윤리적 전제들이 추론될 수 있다.

  Habermas가 주장하는 해석학의 보편성 요구의 혁신에서 중요한 것은, 수사학적 이해의 이념을 언어의 목적과 동일시하는 것이 윤리적 귀결로 이어진다는 것이다. Gadamer는 Aristoteles의 상황윤리에 기대어 실천적 지혜의 실현은 역사적으로 그리고 언어적으로 끊임없이 형성되는, 좋은 삶과 소통에 대한 자신들의 표상을 실현하려고 노력하는 공동체에 의지하여 이뤄진다는 것을 밝혀냈다. 반면에 Habermas는 해석학과 보편적으로 착상된 합의의 이념 배후에 있는 Kant적인 요소를 강조한다. 대화에 참여하는 사람은 누구나 항상 보편적 합의의 원리를 반사실적으로 인정한다는 것이다.그는 Kant 철학의 전통에 입각해서 현대 철학자들의 도덕 이론을 자기 방식으로 수용하고 계몽주의 사조를 옹호한다. Habermas의 담화윤리학은 의사소통의 이론을 실천과 관련하여 이론적으로 전개해 나아가고자 한다. 담화윤리학은 의사소통적 행위이론의 일부로서 이해되어야 한다.

  진리에 관한 물음은 담화에서 제기되고 해명되어야 하기 때문에 담화윤리학의 형식주의와 합의는 관련이 깊다. 담화는 이론적 혹은 실천적 타당성 요구를 이성적 근거로써 인정하는 데 도움을 준다. 이렇게 담화윤리학의 이점은 독백적인 주관에서 벗어나 상호주관적 이해를 통한 합의를 도출하는 데 있다. 또 진리는 상호주관적으로 인정한다는 의미에서 타당성을 갖는 범주로서 이해되어야 한다. “진리의 이념은 오직 타당성 요구를 이해함과 관련해서만 발전된다.”

  Habermas에 의하면 진리는 주장 안에서 표현되는 진술의 사용의미이다. 같은 의미에서 진리는 진술의 성질이다. 예컨대 우리는 근거 지을 수 있는 진술을 참이라고 부른다. 주장 안에 내포된 진리의 의미는 경험에 기초한 타당성 요구를 담화적으로 이행하는 것이 무엇인가를 제시할 수 있을 때 충분히 해명될 수 있다. 이러한 해명을 제시하고자 하는 것이 진리에 관한 합의의 목표이다. Habermas에 의하면 합의는 담화의 형식적인 성질로써 “더 나은 논증의 본래적으로 강제 없는 강제”를 설명하고자 한다. 이와 같은 맥락에서 “담화의 출발점은 논리적 강제나 경험적 강제만을 통하여 결정될 수 없고” 더 나은 논증의 힘을 통하여 결정될 수 있어야 한다.

  하버마스의 담화윤리는 그 형식적인 성격 때문에 내용이 충실한 정의로운 사회적 관계의 모델이 될 수는 없고, 사회 문제를 정의롭게 해결하는 데 필요한 절차만을 제시하는 것처럼 보인다. 때문에 그의 담화이론이 개인 사이의 관계 영역과 사회 원리의 정립에 타당한 것인가라는 물음을 충분히 던져볼 수 있다.


4. Derrida VS Gadamer

  Derrida는 플라톤 이래의 서구 철학이 ‘신’과 같은 통일성의 원리로 작용하는 중심적 체계에 기초해 있다고 본다. 이러한 사고는 절대적 기초나 제일 원리에서 출발하기 때문에 형이상학적 사고라고 부른다. 또한 Derrida에 의하면 이러한 사고는 이항 대립이나 이분법 위에 성립한다. (예컨대 파롤/랑그, 기표/기의, 통시성/공시성, 말/글, 객체/주체, 현상/본질, 내용/형식, 육체/영혼, 공간/시간) 이항 대립의 사고는 진리와 허위 사이에 엄격한 경계를 긋고자 하며, 상호 배타적인 두 구성 요소 중 어느 하나에만 특권을 부여하고 나머지는 부정하는 배중률에 기반을 둔다. Derrida의 해체란, 이러한 이항 대립에 기초한 서구 전통적 사고, 로고스 중심주의에 대한 비평적 작업을 의미한다. 같은 맥락에서 해석학에 대한 Derrida의 비판은 형이상학적 전제를 부정하는 해체주의의 특성이 기반하고 있다. 이에 따라 해석학에서의 ‘소통’ ‘이해’라는 것이 이성-로고스주의에 입각한 형이상학적 전제에 다름 아니라고 Derrida는 말한다.

  Derrida의 해체주의가 Gadamer의 철학적 해석학과 맞서는 부분은 크게 두 가지 주제로 압축할 수 있다. 첫째, 과연 Gadamer에서 말하는 ‘이해’라는 것이 가능한가에 대한 물음이다. Gadamer 해석학은 인간적 삶에 대한 이해를 기반으로 하며, 여기에서 이해는 두 지평간의 융합 과정 즉 이해되는 존재와 이해하는 존재 간의 상호 대화에서 이루어진다. Gadamer에 따르면, 표현이란 ‘누군가를 위한 표현’이며 이해되어지기를 원한다. 이로부터 모든 해석학적 현상의 배후에는 개별성간에 서로 이해하려는 의지, 즉 선한 의지가 전제되어 있다.

  Derrida는 우선 대화를 통한 이해에서 Gadamer가 선행조건으로 내건 ‘선한 의지’라는 것이, 타자성을 형이상학적 전제로써 극복시키는 논리라고 비판한다. 즉, Gadamer는 대화에서 성취되어야 하는 이해의 필수적인 전제조건을 가정한다. 다시 말해, 대화에서 각각의 참여자는 다른 사람이 말하고자 하는 바에 대해 경청하여 이해하고자 해야 한다는 것이다. Derrida는 이러한 주장을 집중적으로 문제 삼으며, 대화의 의지가 모든 구체적인 상호작용보다 앞서감으로써 Kant적 의미에서 자명하고 무조건적인 것이 된다고 주장한다. 여기서 Derrida가 주목하는 것은 이 선한 의지의 ‘절대성’이다. 즉 이러한 ‘선한 의지’는 통일 원리로서 권위적인 형이상학의 일환이다.

  Kant는 ‘그것이 작용하는 바 그리고 달성하는 바, 또는 미리 설정된 어떤 목적의 성취에 유용하다는 사실 때문이 아니라, 오로지 그 의욕함에 있어서, 즉 그 자체로 좋은 것’ 또는 ‘아무런 제한 없이 좋다고 간주될 수 있는 것’은 오로지 선의지라고 말한 바 있다. Derrida는 이른바 이해를 전제하는 선의지를 Kant적인 의미에서 하나의 절대적인 의지로 해석하고, 바로 이 절대성에서 철학적 해석학의 근원적 형이상학성을 발견한 것이다.

  그러나 Gadamer는 Derrida가 자신의 입장을 완전히 오해했다고 말한다. 그가 말하고 있는 선의지는 Kant의 형이상학적 선의지와 무관하며, 오히려 Platon의 대화 모델에 근거한다. 즉 ‘타자의 진술이 분명하게 이해됨(Einleuchtendes; eumeneis elenchoi)’의 뜻으로 사용한 것으로서, 타자의 진술을 분명하게 이해하는 토대로서 선의지가 놓여 있다는 말이다. 이를 통해서 잘못된 일치, 오해, 잘못된 해석을 제거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둘째, 이해에 앞선 선한 의지를 부정한 Derrida는 대화 과정에서의 ‘단절’에 관심을 갖는다. 그는 대화의 성공적인 이해과정에 관심을 두지 않으며, 오히려 이해의 불가능성을 보여주려 한다. 물론 해체주의가 이를 통해 이해 자체를 부정한 것은 아니다. 다만 이해의 차이를 그 중심에 두었던 것이다. 이해의 보편성은 이해의 차이가 극복되어야 가능하다 그러나 타자를 이해하는 문제는 극복이 아닌, 언제나 과정으로서만 진행될 수밖에 없다. Derrida에 따르면, 모든 텍스트는 의미의 불확정성 그 자체를 통해 해체된다. 따라서 모든 통일적인 의미부여는 불가능하다. 나아가 텍스트를 일종의 대화로 파악한다 하더라도, 그 대화는 이해와 합의를 목표로 하지 않는다. 이러한 의미에서 “Gadamer가 말하는 완벽히 이해되는 대화에서의 인식 경험, 혹은 성공적인 확증의 경험을 우리가 실제로 할 수 있는지 확신할 수 없다”는 Derrida의 말은, 대화는 오히려 견해의 차이를 보존하며, 타인의 진술을 낯선 그대로 존중해야 한다는 그의 의도를 보여준다.

  언어적 기호와 의미의 관계를 차연에 두어 통일된 이해를 부정한 것도 이같은 태도에서다. 의미는 언어의 덧없는 놀이 외에 아무것도 아니며 정립될 수 없는 것이다. 우리는 의미 바깥으로 나갈 수 없는데 현재의 언어적 의미는 부재적 기표의 기능이기 때문에 의미 자체는 결단코 완전히 현재적일 수 없다. 즉 고정되지 않는다. 언어는 자신 밖에 있는 어떤 것을 지시하지 않으며 차연 속에서 오로지 자기 자신을 지시한다. 차연이란 그것이 어떤 것을 지시할 때 항상 의미 없이 머무는 언어 현상을 말한다. 차연에는 의미의 차이뿐만 아니라 시간적인 지연도 같이 함축되어 있다. 따라서 이해되어지는 결정된 의미는 없고 기표의 끝없는 미끄러짐만이 있다.

  “해체는 모두 ‘탈-전유’(ex-apprioriation)의 운동들이다.”라는 Derrida의 말은 단순히 해체론에 대한 정의라기보다는 해석을 거친 텍스트로서의 존재자 일반에 대한 정의일 수 있다. 해체는 개념적이거나 상징적인 고유한 정체성의 획득과 박탈을 동시에 가져오는 이중적 리듬이다. 이런 해체의 리듬은 모든 존재자 안에서 반복되고 있다. Derrida의 중요한 용어인 차연과 흔적은 그런 해체의 리듬에 붙이는 또 다른 이름이다. 그러므로 모든 존재자 안에는 그것을 있게 한 차연이 있다. 하지만 존재자를 있게 하거나 없게 하는 차연은 존재자처럼 있거나 없는 것이 아니다. 차연은 존재자처럼 현전하거나 부재하지 않는다. 현전도 부재도 아니라는 의미에서 차연은 흔적이다. 모든 현상은 흔적으로서의 차연, 차연으로서의 흔적에 의해 비로소 나타나거나 사라진다. “흔적은 나타남과 의미작용을 개방하는 차연이다.”

  여기서 언어적 기호는 그러한 흔적에 해당한다. 일정한 형태의 흔적일 수 있는 가능조건은 여전히 또 다른 흔적들에 있다. 이런 소급적 관계는 계속 이어진다. 따라서 현재 기록이 일어나고 있는 텍스트는 결코 현재화하거나 현전화할 수 없는 흔적들과 함께 엮여 있다. 흔적이란 “현재의 단순성 안으로 수렴되지 않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런 흔적들에 힘입어 비로소 일정한 형태를 얻는 기호화된 텍스트들은 결코 현전의 형식 안에 존재할 수 없다. 그런 텍스트 안에서 현전적 사태가 나타난다면, 그것은 사후적으로 구성된 결과에 불과하다. 가령 과거는 미래에 의해 사후적으로 구성되고, 그런 의미에서 과거는 미래보다 늦게 온다. 원인은 결과에 의해 소급적으로 성립되고, 그런 의미에서 원인은 결과 뒤에 발생한다. 이 사후성의 논리 안에서 원초적인 것과 파생적인 것, 현전하는 것과 부재하는 것, 과거에 있는 것과 미래에 있는 것은 서로의 가능성과 속성을 규정한다. 그러므로 사후적 시간성의 세계인 텍스트에서 순수한 현전은 불가능하며, 나아가 형이상학적 이항대립 역시 불가능하다.

  기호란 결코 확고히 파악될 수 없고 끊임없는 차연에 의하여 움직인다는 그의 주장에 대하여 해석학은 이해의 원리적인 가능성으로 응수한다. 참여 진리와 대화의 끊임없는 작용은 현전의 형이상학이 제시하는 고정된 의미의 비종료성을 말한다. 즉 해석학에서는 어떤 단어나 기호도 의미의 최종적인 현전으로 간주 될 수 없다고 굳게 믿는다. 또한 해석학 역시 단절이라는 성격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소통 혹은 대화의 단절은 해석학에서 전면적으로 배제되지 않는다. 물론 보다 면밀하게 분석해보면 대화의 공통성과 합의가 보다 근원적으로 자리잡고 있다. Gadamer는 해체주의자들이 언어를 ‘정신의 바빌론 유수’로 간주하고 있으며, 언어가 대화의 매개라는 사실을 간과하고 있다.

  이와 같이 Gadamer는 차이와 소통의 단절을 중시하는 Derrida의 목소리를 이해에 이르는 기나긴 과정 속에 거쳐야 하는 한 국면으로 소화시킨다. Gadamer는 Derrida의 차연마저도 넓은 의미에서 동일성의 논리로 본다. 불변의 타자 존재는 동일성과 관련되며, 동일성 속에서 타자존재가 타자로서 파악될 수 있다는 것이다. 말하자면 ‘동일성 속의 차이성’이며 이는 곧 ‘의미의 다의성(Mehrdeutigkeit)’이다. 뒤에 소개할 Ricoeur는 이런 현상에 대해 ‘해석의 갈등’이라고 불렀다. 그러나 이 갈등은 Derrida가 주장하는 것처럼 전혀 화해되지 않는 모순으로 나아가지는 않는다. 오히려 이는 의미의 동일성을 향하여 나아가는 해석의 과정일 뿐이며, 더 나아가 중단 없는 대화와 이해의 과정 속에서 지속적인 자기변화를 요구한다. Derrida가 주장하는 차이에 근거한 해체는 Gadamer가 제시하는 대화의 목표가 아니라 대화의 발단이 되는 것이다. 또한 그는 ‘대화 모델’에 근거한 자신의 해석학적 사유를 Derrida와의 논쟁에도 적용시키고자 한다. 차이와 불연속, 이해와 연속이라는 양자 간에 놓여 있는 엄청난 간극에도 불구하고, 두 사람이 추구하고자 했던 공통적 차원은 분명 존재한다. 해석학과 해체는 의미의 정확한 결정가능성과 반복가능성이라는 형이상학적 이념을 극복하고자 하는 데 공통의 관심사를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특히 Gadamer는 논쟁 가운데 Derrida의 비판을 ‘하나의 중대한 도전’으로 받아들였고, 자신이 구현하려 했던 대화해석학을 좀더 예리하게 다듬을 수 있었다. 이해, 대화로 나아가는 끊임없는 과정 속에서 차이, 타자성의 문제를 어떻게 받아들일 것인가에 대해 유용한 성찰의 기회를 제공했던 것이다.


5. Ricoeur의 해석학적 철학

  Ricoeur의 철학 또는 해석학은 인간의 조건에 대해 근본적으로 전제하고 있다. 이 내용은 그가 가장 처음 쓴 책인 『의지적인 것과 비의지적인 것』에서 등장한다. 의지적인 것은 주체가 자신의 뜻에 따라 결정할 수 있는 능력 즉 자유로운 상태를 뜻하며, 반대로 비의지적인 것은 결정과 상관없이 존재하는 것들을 뜻한다. 이 책은, 인간이란 장소에 이 두 측면이 절묘하게 결합되어있다고 말한다. 인간 주체는 자신이 모든 것을 아무런 전제 없이 오로지 의지적으로만 결정한다고 생각하지만, 사실 그 의지적인 것을 분석해보았을 때는 필연적으로 비의지적인 것과 연관이 되어있다. 무엇을 결정하는 행위는 그 행위에 대해 사고하는 것, 그리고 그런 행동을 하기 위해 몸을 움직이는 것, 그리고 그 행위를 할 것을 스스로에게 승낙하는 것으로 분석할 수 있다. 분석된 세 술어는 모두 대상을 갖는 술어로서, 이는 의지적인 것이 반드시 어떤 대상 - 비의지적인 것과 동시에 출현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는 매우 중요한 문제이다. 인간의 자유는 필연 혹은 외부적인 조건과 언제나 동시에 출현하며, 또한 의지적인 것과 비의지적인 것 서로가 상대방이 없이는 결코 아무런 의미도 지닐 수 없다는 것을 뜻하기 때문이다. Ricoeur의 학문적 방향은 이러한 대전제 위에서 출발한다. 그는 이러한 인간이라는 장소의 특성을 인간의 유한성의 근본적 원인으로서 파악하고, 인간이 악의 가능성을 떠안고 있다고 생각한다. 이 측면에서는, 인간의 근본적인 양식을 고찰할 수 있는 현상학적 방법이 유용하다.

  그는 현상학의 방법과 태도를 차용하기는 하지만, 현상학을 정초한 Husserl의 전제에 대해서는 매우 강하게 비판한다. Ricoeur의 입장에서 Husserl의 현상학은 절차에 따라 합리적으로  반성하고 자신의 의식을 발견할 수 있는 자아, 즉 Descartes의 전통에서 가정하는 자아를 그대로 수용하고 있다. 하지만 그 현상학의 측면을 더욱 깊이 파고들면 들어갈수록 이런 자의식은 더 이상 합리적으로 투명하게 드러날 수 없다. 이는 위에서 Ricoeur가 주장한 바와 같이, 순수하게 사유하는 자아는 언제나 순수하지 않고 외부와 교류하거나 또는 그에 의존하여 자신의 자유를 전개해 나가기 때문이다. 따라서 현상학에서 논외가 되어왔던 신체, 그리고 사유하는 자아 밖의 타자들에 대한 논의를 복권시켜야만 인간의 조건에 대해 올바르게 연구할 수 있다. 이러한 맥락에서 그는 현존재는 세계-내-존재라는 Heidegger의 입장을 수용한다. 인간이라는 장소가 갖추고 있는 조건은, Ricoeur의 철학적 탐구에서 가장 토대가 되는 전제임과 동시에 주체에 대한 현상학적 탐구의 결과이기도 하다.

  그러므로 외부의 조건에 크게 좌우될 수밖에 없는 운명에 처한 인간은 언제나 비의지적인 것에 자신의 의지 전체를 맡기며 오류에 빠질 가능성에 언제나 처해있다. 인간의 악의 가능성은 이러한 인간의 근본적 상황에 뿌리를 두고 있다. 하지만 그에게 인간의 조건을 밝혀내는 현상학적 탐구의 결과는 여기까지이다. 현상학적 방밥은 그 방법의 고유한 한계 때문에 자아 밖으로는 결코 나갈 수 없다. 따라서 실제 악이 어떤 모습으로 나타나는지는 현상학적 방법을 통해서는 알 수 없다. 악의 가능성으로부터 역사에서 구체적으로 나타나는 인간의 악한 행동들이 나오기는 하지만, 그것이 악이라는 것을 알기 위해서는 그 현실의 문제가 어떻게 악을 의미하는지를 알아내야만 한다. 따라서 현상학적 방법을 극복하기 위해, 그리고 이미 역사적으로 남겨진 기호들에 담긴 악을 분석하기 위해 해석학적 방법이 동원된다.

  따라서 그는 악과 선의 대립, 혹은 악 그 자체를 드러내는 비유가 담겨있는 여러 신화를 분석함으로써 자신의 해석학적 관점을 펼쳐나간다. 특히 그는 성경이 기록하고 있는 인간의 조건을 비중있고 고찰한다. 그 이유는 다른 신화들은 악 그 자체의 모습을 서술하거나 또는 선과 악의 대립이라는 이분법에 초점을 맞추고 있는 것에 비하여, 성경의 창조신화에 등장하는 아담은 선과 악이 서로 뒤섞여있는 존재로서 인간을 기술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는 그가 생각하고 논증하려하는 인간상에 가장 잘 부합한다. 또한 종말의 신화는 인간의 본래적인 악의 가능성과 그것이 발현되고 또 인간에게 영향을 미치는 구체적인 악이 모두 걷혀진 세계로 인간이 나아가는 것을 보여준다.

  또한 그는 정신분석학을 연구대상으로 삼고, 그것이 해석학적인 논증 구조로 이루어져있다는 것을 보여주려 한다. 그가 정신분석학을 연구의 대상으로 삼은 이유는, 어떻게 인간이 비의지적인 것에 구속당하고, 또 그것을 어떻게 다시 드러낼 수 있는지 가장 분명하게 드러내주는 학문이기 때문이다. 정신분석의 대상은 꿈인데, 꿈은 언제나 실제의 어떤 내용 - 무언가를 감추려는 여러 상징과 기호로 가득하다. 하지만 꿈은 동시에 꿈을 꾼 사람의 무의식에 어떤 내용이 들어있는지 그리고 그것이 어떻게 구조화되어있는지를 보여주기도 한다. 따라서 꿈은 감추는 동시에 보여주는 모순적 기능을 한다. 정신분석은 바로 이 꿈에서 보여진 내용을 해석하고, 감추어진 내용이 무엇인지를 드러낸다. 여러 상징이 어떤 식으로 구조화되어있는지 알기 위해 정신분석가는 꿈을 꾸는 사람이 겪었던 사건과 사고를 해부하고 동시에 그것이 지금 꿈에 어떤 영향을 미치고 있는지를 알려준다. 나아가서 그 사건과 사고들이 지금 꿈꾸는 사람의 행동을 어떤 식으로 규정하고 있는지까지 말해줄 수 있다.

  따라서 정신분석에는 무의식을 드러내주는 꿈의 해석이 반드시 필요하고, 해석된 내용들은 지금의 행동의 원인이 된다. 이러한 정신분석의 해석학적 작업을 주관의 고고학archeology of subject이라고 부른다. 주관의 고고학에서 이루어지는 해석적 작업은 주체가 결코 우리가 이성에 의해 파악할 수 있는 요소들만으로 이루어져있지 않으며, 결코 외부의 영향을 받지 않은 상태로 투명할 수는 없다는 사실을 우리에게 알려준다. Ricoeur는 자신의 인간관을 토대로 정신분석학의 연구 성과를 수용한다.

  비슷한 맥락에서, 주체의 불투명성과 비자립성을 논증한 사람은 또 있다. 바로 니체와 마르크스이다. 니체는 힘에의 의지라는 개념을 통해 Descartes의 전통에 서있는 이성의 철학자들을 비판했으며, 이성에 대한 그들의 강조는 오히려 그 의지를 감추고 은밀하게 만들기 위한 전략에 지나지 않는다고 말했다. 마르크스는 이데올로기 비판을 수행하면서 사회의 이념적 구조가 인간에게 얼마만큼 큰 영향을 줄 수 있는지, 그리고 그 계급적 구조가 어떻게 인간을 지배하는지를 보여주었다. 이런 면에서 Ricoeur는 이들의 연구성과 또한 높이 평가하며, 니체와 마르크스 그리고 프로이트 세 사람을 의심의 대가라고 지칭한다.

  하지만 그에게 주체의 문제는 이러한 고고학적 성과만으로는 해결되지 않는다. 결국 인간에게는 자유가 있고 진정한 의미를 찾을 수 있다는, 특히 종교적인 의미에서 구원에 이를 수 있다는 점을 포기할 수 없었던 것이다. 이 난점에 대한 그의 대답은 해석학에서의 변증법적 종합이다. 즉, 해석의 작용은 인간이 여러 상징을 일방적으로 수용하는 작업이 아니라, 자신을 세계에 투사하여 의미를 적극적으로 탐색해내는 작업이기도 한 것이다. 이러한 투사는 아무렇게나 집어던지는 것이 아니며, 분명한 목적성 즉 투사의 대상을 가질 수 밖에 없다. 이러한 목적성을 극단적으로 강조한 것이 Hegel의 절대적 관념론이며, 그의 표현에 따르면 주체의 고고학에 대비되는 주체의 목적론이다. 주체의 고고학과 주체의 목적론 어느 한 쪽의 견해만으로는 주체에 대해서 온전히 설명해낼 수 없으며, 주체는 이 두 과정의 변증법적 종합을 통해 상징과 언어의 온전한 의미를 이해할 수 있게 된다.

  이 맥락에서 그는 Kant의 『순수이성비판』에서 보이는 초월적transzendental 종합의 이론적 구조를 논의에 끌어들인다. 즉, 상징(특히 언어)은 이미 주체의 외부에 전개되어있다. 하지만 이 상징을 해석하여 의미를 이해하는 것은 주체의 내부에 해석학적으로 형성된 이해의 구조를 통해서만 가능하다. 그러나 Kant가 규명한 주체가 현상의 생성에서 그 논의를 그칠 수 있었던 것과는 달리, 해석학적 주체는 미완에서 그치거나 혹은 고고학과 목적론의 한 쪽에 치우치지 않고, 그 긴장을 지속적으로 유지하면서 자신의 존재의 의미를 파악해나간다. 따라서 해석학적 순환은 해석자가 자신을 끊임없이 축조해가는 과정으로서, 불가능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완성 즉 종교적 의미에서의 구원을 끊임없이 갈망하고 형성해가는 주체의 무한한 운동이다.

  Ricoeur의 주체 이론은, 그의 해석학적 철학의 뿌리인 성경의 다음과 같은 구절에 잘 나타나있다. “내 속에 곧 내 육체 속에는 선한 것이 하나도 들어 있지 않다는 것을 나는 알고 있습니다. 마음으로는 선을 행하려고 하면서도 나에게는 그것을 실천할 힘이 없습니다. 나는 내가 해야 하겠다고 생각하는 선은 행하지 않고 해서는 안 되겠다고 생각하는 악을 행하고 있습니다. 그런 일을 하면서도 그것을 해서는 안 되겠다고 생각하고 있으니 결국 그런 일을 하는 것은 내가 아니라 내 속에 들어 있는 죄입니다. 여기에서 나는 한 법칙을 발견했습니다. 곧 내가 선을 행하려 할 때에는 언제나 바로 곁에 악이 도사리고 있다는 것입니다. 나는 내 마음속으로는 하느님의 율법을 반기지만 내 몸 속에는 내 이성의 법과 대결하여 싸우고 있는 다른 법이 있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그 법은 나를 사로잡아 내 몸 속에 있는 죄의 법의 종이 되게 합니다. 나는 과연 비참한 인간입니다. 누가 이 죽음의 육체에서 나를 구해 줄 것입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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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미숙 2011-10-14 10:59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귀중한 자료 개방하심에 감사드리고 삶의 양식이 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