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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간평가단을 하겠다고 지원 댓글을 달던 게 엊그제같은데, 벌써 마지막이라니... 아쉽고 짠하고 마음이 그렇습니다. 게다가, 다달이 좋은 책들은 더 많이 나오고 있고요. 이번 달에는 주목신간 고르기가 더욱더 힘들었습니다. 가리고 가려서 뽑은 이 달의 신간, 책 읽기 좋아진 계절이라 좀 두꺼운 책 위주로 선정해보았습니다. 

 

1. 안전, 영토, 인구 

  미셸 푸코의 말년 강의 가운데 하나입니다. 프랑스든 여기든 이제야 이 강의들이 출간되는 듯 한데요. 푸코는 삶의 권력(생체권력?)과 이데올로기의 관계에 대한 문제를 가장 집요하게 파고들었던 철학자로 유명하죠. 그에게 안전(안보?), 영토, 인구라는 법적 규정들은 어떻게 받아들여졌는지, 그리고 이것을 읽는 사람들과 이 강의를 들었던 사람들은 어떻게 이 개념들을 이해할 수 있는지에 대한 좋은 참고도서가 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2. 인정투쟁 

  벤야민, 아도르노, 하버마스 등이 형성한 프랑크푸르트 학파의 대를 잇는 악셀 호네트의 대표작이 출간되었네요. 검색에 따르면 재출간인 것 같은데, 여튼 고전들은 언제나 읽혀야 하니까 이렇게 다시 나오는 건 아주 반가운 일이겠지요. 잘 알려져있듯이 인정투쟁은 헤겔의 사회철학에서 처음 등장하는 개념입니다. 고전에 대한 현대적 재해석, 호네트는 우리 사회를 비출 수 있는 거울이 될 수 있을까요? 

 

 

3. 이슬람의 눈으로 본 세계사 

  목차를 보니 이슬람 세계를 중심으로 서술된 세계사인 것 같습니다. 역사, 문화, 사회 등을 통틀어서 서술한 이슬람 입문서들도 숫자가 많지 않은데, 이렇게 한 분야에 집중한 책이 나오는 것도 무척이나 반가운 일이 아닐까 합니다. 사실 역사 쪽 책들을 보면서, 이번 달에도 유럽에 관련된 역사책들이 많이 눈에 들어왔는데, 한번쯤은 (우리도 거기에 소속되어있는) 비유럽에도 눈을 돌려야 하지 않을까요. 

 

 

4. 러시아 문화사 강의 

  이 책을 선정한 의도는 『이슬람의 눈으로 본 세계사』를 선정한 이유와 비슷합니다. 유럽같지만 유럽 아닌 유럽, 마찬가지로 아시아같지만 아시아 아닌 아시아, 하지만 일명 도선생과 톨선생이라는 전세계를 뜨겁게 달구는 대가를 배출한 그곳. 충분히 흥미가 생기는 곳에 대한 적절한 입문서가 되리라 생각합니다. 

 

 

 

5. 일본, 한국 병합을 말하다 

  진보적인 성향을 띄는 일본 사학자들이 대한제국 병탄에 대해 발표한 논문들을 모아놓은 책입니다. 한국 근대사에서 가장 중요한 사건, 어쩌면 그 주체라고 볼 수 있는 그 공동체의 일원들이 어떻게 이 역사적 사건을 바라보는지에 대해 알아보는 것은 '객관적 시선으로 우리를 보기' 위해 꼭 필요한 일일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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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이 가면 갈수록 추천도서 선정이 어려워집니다... 관심분야도 점점 넓어지는데다가, 새로나온 책 모두를 볼 수 있는 기능을 알게 되면서(...) 수많은 책의 제목과 소개를 다 살펴본 뒤에 이것저것 골라내는 건 쉬운 일이 아니네요. 하루를 꼬박 투자해서 선정하는 것인데, 가장 마지막에 고른 이 다섯 개는 어느 정도 직감에 기대는 일이 많습니다. 여튼 이번 달에도 다섯 개를 골라보았습니다. 

1. 니얼 퍼거슨의 시빌라이제이션 

  저자만 보고 무작정 골라놓고 마지막까지 빼지 않은 책(...)입니다. 보수주의적 관점이 다분한 학자이긴 하지만 그가 만든 다른 다큐멘터리인 <Ascent of Money>를 정말 인상깊게 보았기 때문이죠. 그의 다른 책도 어서 보아야겠다는 생각은 들지만... 이 책 역시 그가 제작에 참여한 다큐멘터리를 책으로 제작한 것입니다. 제가 보았던 그 다큐멘터리같은 포스를 책에서도 내뿜어주길 기대해봅니다. 그의 전공은 경제사라는 (상대적으로) 작은 분야이지만, 서양의 경제사란 자본주의 이후에 문명사 그 자체이기도 할만큼 다른 많은 분야와 밀접하게 연관이 되어있지요. 세계사를 다시 정리해볼만한 책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2. 법의 재발견 

  제게는 저자에 대한 흥미는 둘째치고, 가정을 법으로 분석해본다는 책의 내용소개 자체가 끌립니다. 가장 사적인 영역이라고 간주되는 가정의 영역에 가장 공적인 표상인 법이 개입한다는 것 자체가, 사실은 가정이 매우 논쟁적이고 정치적인 공간이라는 것을 말해줍니다. 사회학이나 철학에서 다루는 이론적인 분석과는 또 다른, 다시 말하면 아주 실용적인 접근을 이 책에서 볼 수 있으리라 기대되네요. 

 

 

3. 로드 

  부제에서 볼 수 있는 '길의 사회학'이라는 문구가 제 마음을 잡아당깁니다. 길은 가장 중요한 사회간접자본 가운데 하나입니다. 하지만 이런 경제, 건축적 의미 이외에도 사회학적으로는 더 다양한 담론화가 가능하겠지요. 여섯 가지 테마로 나누어서 설명했다고 하니 그 내용이 아주 궁금해집니다. 우리는 항상 길을 밟으면서 어딘가로 떠나는데, 이 책을 읽고 나면 그 길이 다르게 느껴질 것만 같아서요. 

 

 

4. 자기계발의 덫 

  자기계발, 이 책의 원제의 표현에 따르면 'self-help' - 일종의 자기위안처럼 보이는 이 트렌드가 어떻게 사회를 지배하는지를 분석했다고 합니다. 이것은 현재 한국의 문제이긴 하지만, 단지 한국사회만 그런 것은 아닌 모양입니다. 이 책은 미국사회에서 자기계발이 어떻게 확산되었는지 설명하였으니까요. 한국에서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던 몇몇 자기계발서들도 그 유행이 미국발이었던 적이 많은 만큼, 이 두 현상은 분명히 유사할 것이라 짐작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미국에 대한 분석은 우리를 비추는 거울이 될 수도 있겠지요. 

 

5. 그렇다면, 과학이란 무엇인가 

  이 글을 쓰면서 다시 검토해보니, 코끼리를 보면서 장님들이 서로 싸우는 표지가 아주 인상적이네요. 이제는 지나간 이슈가 되어버린 황우석 사태를 바라보면서, 인문학자들이 생각해야하는 질문은 바로 '과학이란 무엇인가?' 라는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이 질문 과학사회학의 상대주의에 경도되거나, 혹은 고등학교 과학 교과서 정도의 소개에 그치는 자연과학 개론서에 그치게 마련이죠. 이 책은 그런 단점들에서 조금 벗어나있지 않을까 하는 기대를 하게 되는데, 내용은 과학철학의 쟁점들을 다루면서 저자는 물리학을 전공한 사람이기 때문이지요. 최근의 성과들이 충분히 반영된, 과학에 대한 적절한 저서가 아닐까 생각해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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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의딸 2011-08-09 09:4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자기계발의 덫> 저도 좀 살펴보았는데요, 이 책 역시또다른 자기계발서가 아닐까 하는 의구심이 생기더라구요. 그렇지만 생각해보면 모든 책은 자기계발서이긴 하지만 말예요.

박효진 2011-08-09 16:29   좋아요 0 | URL
목차와 출판사 책 소개만 보고 선정한 것이라... 자세한 내용은 알지 못합니다. 선정되면 흥미롭게 읽어볼 수는 있을거라 생각합니다!
 

<서양미술사 숙제> 

1. 들어가는 말

  낭만주의 시기는 회화의 역사에 있어서 큰 전환점이 되는 시기이다. 이 때를 거치면서 회화는 형식과 내용, 즉 기법과 주제가 큰 폭으로 확장되었으며, 그 깊이를 더해갔다. 그 가운데서도 특히 주제의 확장은 매우 눈여겨볼만한 현상인데, 이것은 회화가 무엇을 그려야하는지에 대한 답변의 변화, 즉 회화의 대상에 관해 던지는 근본적 질문에 대한 답변의 변화이기 때문이다. 또한 이에 따라 이 바뀐 ‘무엇’을 어떻게 그려야하는지에 대한 새로운 방법론이 등장하게 되고, 그것은 곧 회화의 본질을 변화, 확장시키는 작업에 다름아니다.

  특히, 미술사적으로는 이 시기에 풍경화가 특히 대두되는 시기였다. 이전에 풍경은 그림 속에 등장하는 인물이 머무르고 있는 시간과 공간을 가리켜주는 보조적 역할을 할 뿐이었다. 회화에서 중요한 것은 인물, 그리고 그 인물을 모티프 삼고 있는 작가의 주제의식 같은 것들이었다. 그마저도 매우 한정되어 있어, 성화나 신화의 한 장면을 그림으로 옮겨놓는 고전주의적 경향은 그림 속의 세계를 그림 안에 한정시킴으로써 그림의 세계와 감상자의 세계를 철저하게 분리시켰다. 그것이 설령 원근법과 명암법을 준수하여 아무리 세밀하게 그려졌다고 하더라도, 회화에 의해 묘사된 것들은 분명히 환상적인 무엇인가였다.

  반면 풍경화의 대두는 이러한 회화의 장을 근본적으로 바꾸어놓았다. 인간의 인지 구조를 반영하여 그리는 기법 - 즉 원근법과 명암법은, 개발 당시에는 환상적인 소재들을 실제이게끔 보이게 하는데 도움을 주었다. 그러나 시간이 흐를수록 그 의미는 점점 변화하였고, 끝내는 우리가 실제로 보는 것을 실제로 보고있는 것처럼 그릴 수 있게끔 하는 국면 또한 열어주었다. 그래서 회화에 대한 여러 가지 실험 가운데, 묘사의 대상을 인물에서 다른 것으로 바꾸려는 시도 또한 행해졌다. 풍경화는 이러한 맥락에서 등장하였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이런 실험들은 오랫동안 인정받지 못하였다. 르네상스 이후부터 낭만주의 시기 이전까지도 풍경화는 그것을 연구하는 소규모 집단만이 있거나 혹은 화가로서 대우받지 못하는 화가들의 소일거리로서만 의미를 지닐 뿐이었다. 낭만주의 시기에 와서야 이런 노력들이 표출되어 풍경화가 회화의 하위 장르로서 인정받게 되었고, 점점 많은 사람들이 풍경화를 그리기 시작했다.

  그 가운데서도 영국의 풍경화는 주목할 만하다. 신고전주의적 경향이 지배적이고 그런 경향을 띄는 작품에 높은 점수를 매기던 프랑스의 아카데미 비평계와는 달리, 영국의 아카데미 비평계는 풍경화를 적극적으로 해석하기 위한 미학적 개념과 논의를 생산해냈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들의 논의에 힘입어, 또 그렇게 생산된 풍경화들이 다시 그 논의들에 영향을 미침으로써 영국은 다른 지역에 비해 매우 빠르게 풍경화를 비평적으로 인정하고 그에게 가치를 부여하게 되었다. 영국을 대표하는 풍경화가인 터너와 컨스터블은 이러한 배경 아래에서 최고의 풍경화가로서 회화의 역사에 남게 되었다.

  이렇듯 풍경화를 빠르게 수용한 것은, 풍경화의 가치에 주목하지 않거나 그것을 폄하했던 예술선진국 - 예를 들어 네덜란드나 프랑스 등 유럽의 다른 지역에 비해서 매우 특기할만한 것이다. 풍경화가 회화의 주제가 아니었던 것에서 회화의 주제로서 편입되는 낭만주의적 경향이 회화의 대상의 확장이라는 중요한 결과를 초래했다고 할 때, 영국의 풍경화를 둘러싼 환경을 알아보는 것은 회화의 본질에 대해서 사고하는 과정의 한 가지 양태를 고찰하는 일이 될 것이다. 이러한 분석은 회화라는 개념 자체가 일견 무의미해진 현대의 예술에 대해 생각하는데도 도움을 줄 수 있을 것이다.


2. 사회적 배경

  예술사적으로 낭만주의가 발흥한 시기인 18세기 후반은 두 가지의 혁명적 변화가 일어난 시기이다. 첫째는 산업혁명이다. 산업혁명이 가져다준 충격은 다른 무엇보다도 삶의 방식의 변화, 그리고 그에 따르는 인간의 주변을 둘러싼 환경의 변화였다. 사람들이 사용하는 물건들은 점점 수공업에서 공장제 수공업(manufacture)로, 그리고 다시 대공장제로 바뀌어갔다. 런던 근교, 그리고 주요 항구도시에는 하루가 다르게 대형공장들이 들어섰고, 사람들 또한 도시로 몰려들었다. 공장은 증기기관으로 가동되기 때문에 매일 많은 양의 석탄이 태워졌고, 밀집한 인구들이 배출해내는 폐기물 또한 자연이 스스로 감내할 수 있는 수준을 넘어섰다. 도시적인 환경오염은 자연스럽게 초래되었다.

  반면 대도시 이외의 지역은 아직 산업혁명의 영향이 미치지 않은 상태로 남아있었다. 그들은 여전히 목가적인 생활을 지속하고 있었으며, 중세시대와 크게 다르지 않은 생활양식을 영위하고 있었다. 농사를 짓고, 수확한 것을 먹으며, 자신들의 배경과 자연스럽게 섞여서 살아가는 어떤 전형적인 모습이 아직도 유지되고 있었던 것이다. 물론 이와 같은 이미지들은 도시에 살고 있는 사람들이 비도시의 풍경을 상상하면서 덧씌운 것이긴 했지만, 도시의 사람들에게 불어닥친 급격한 변화는 이러한 이미지들을 만들어내는데 충분한 조건이었다.

  둘째는 시민혁명이다. 프랑스처럼 순식간에 체제가 뒤바뀌는 급진적 혁명은 아니었지만, 영국 또한 긴 기간에 거쳐 많은 피를 흘린 끝에 시민혁명을 달성해냈다. 산업혁명을 이끄는 계층들도 사실상 이 시민혁명에서 가장 많은 이득을 얻은 부르주아들이었다. 이들은 새로운 예술소비계층으로 떠올랐으며, 예술가들은 이들의 취향을 잘 배려한 작품을 생산해내야 했다. 따라서 예술작품에는 이들이 생산해내는 담론이 충실하게 담겨있는 경우가 많았다.

  하지만 이런 현상보다 예술사에서 더 중요하게 생각해야 할 의미는 모든 인간들이 인식의 주체가 되었다는 점일 것이다. 고대와 중세에 철학적 보편자는 곧 정치, 사회적인 권력과 연결되어 있었다. 진리에 접근할 수 있는 사람에게는 통치의 자격이 주어지는데, 그것은 그가 옳은 것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이것은 미학적인 맥락에서도 마찬가지이다. 그러나 시민혁명은 더 이상 이와 같은 것을 허용하지 않았고, 모든 이들의 인식의 위계를 정치적으로 평등하게 바꾸어놓았다. 따라서 대상의 본질을 바라본다거나, 그것을 모든 이들이 이해할 수 있도록 뚜렷하게 재현해낸다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해졌다. 따라서, 방법은 보편의 재현에서 개별의 재현으로 점점 옮아갈 수밖에 없었다.

  영국은 이 두 측면에서 모든 유럽국가보다 앞서있었다. 산업혁명과 그에 따르는 경제, 사회적 변화가 영국에서 가장 먼저 일어났다는 사실은 널리 알려져있다. 또한 시민혁명도 오랜 전통을 가지고 있었기에, 산업혁명과 함께 두터운 부르주아지 계층이 형성되어 있기도 했다. 이러한 배경들은 풍경화의 탄생 자체에도 영향을 주었지만 풍경화의 소재와 기법, 그리고 그것이 나타내고자 하는 화가의 의식에도 큰 영향을 미칠 수밖에 없었다. 그것은 당대를 대표하는 여러 작가의 작품 속에서 확연하게 드러난다.


3. 풍경화를 위한 이론적 도구들

  3.1. 18세기 영국 경험론과 그 미학적 경향

  그렇다면 정치적으로 평등한 인식주체들은 이 세계를 어떻게 인식하는가? 여기에 대한 가장 영국적인 답변은 홉스-로크-흄으로 이어지는 경험주의 인식론이다. 인간은 언제나 경험을 통해서만 타자를 받아들인다. 다시 말해 인간에게는 경험 이외에 외부에 다가갈 수 있는 매개 또는 능력이 없다. 물리적인 인과관계를 통해 감각기관에는 어떤 것이 맺히는데, 이것이 인상(impression)이며 경험의 시작이다. 이 인상이 기억 속에 남아있는 상태를 관념(idea)라고 한다. 하지만 기억은 언제나 희미해지기 때문에 한 번 얻은 관념을 계속 간직하고 있는 것은 아니다. 이러한 관념을 다시 떠올려보는 행위는 반성(refletion)이다. 인상과 관념을 여러 가지 방식으로 결합시켜서 인간은 사고를 하게 된다.

  이러한 경험주의적 인식론에서 핵심은 바로 관념이다. 이 관념은 모든 인간들에게 보편적인 절대자 혹은 보편자, 보통 명사를 의미하지 않는다. 모든 관념은 개인에게 고유하다. 그 이유는, 어떤 관념은 그 관념을 만들어낸 인과관계를 거슬러 올라가서 만날 수 있는 외부의 대상과 아무런 질적인 관계를 맺지 않기 때문이다. 예를 들면, 내가 빨강이라는 관념을 가지고 있다고 해서 외부의 대상 안에 빨강이라는 관념이 들어있는 것이 아니다. 경험의 구조가 그 인과관계가 빨강이라는 관념을 생성하게끔 이뤄져있기 때문에 나는 빨강이라는 관념을 갖게 된다. 따라서 외부의 단일한 대상을 같은 장소와 시점에서 보더라도, 인식주체가 다를 경우 그것은 다른 관념을 형성하게 된다.

  따라서 경험주의자들에게 미학, 즉 아름다움에 대한 연구에 가장 근본적인 토대가 되는 것은 바로 관념들이다. 회화 역시 인간의 외부에 있는 대상이기 때문에, 인간은 그것을 경험을 통해서만 접하게 되고 그것을 관념으로 남길 수밖에 없다. 따라서 경험주의자들의 입장에서 실제에 가장 가까운 그림이란, 다름 아닌 직접 경험의 순간에 가장 가까운 그림, 최대한 인상에 가까운 관념을 그려낸 그림일 것이다.

  그렇다면 인간이 그림을 그리는 행위는 무엇을 그리는 행위일 수 있을까. 경험주의자들은 단연 ‘관념들을 그려내는 행위’라고 대답할 수 있을 것이다. 따라서 내가 경험하지 않은 것을 그리는 것은 끝내 내가 경험한 것에 구속을 받을 수밖에 없다. 그것은 오히려 경험을 기준으로 보았을 때 직접성이 떨어지므로, 점점 허구에 가까워진다. 이전의 회화들이 추구했던 이상성이란, 경험주의적인 시각에서 보았을 때는 허구 내지는 관념들의 연합에 따른 상상적 사고의 표현에 불과한 것이다.

  특히 미학적인 경험주의자들의 논의에서 가장 중요하게 간주되는 개념은 취미(taste, 취향)다. 취미는 미학적인 개념일 뿐만 아니라, 가치적인 모든 것을 포괄하는 개념으로서 인간이 ‘좋다/싫다’를 판별할 수 있는 근거이다. 물론 이 취미도 경험에 따라 형성된다. 특정한 경험에 반복적으로 즐거움을 느꼈다면 그 관념은 좋은 것이 되고, 그 반대라면 그 관념은 나쁜 것이 된다. 취미에 대한 위와 같은 개념화에서, 자연스럽게 취미는 상대적이라는 결론에 다다르게 된다. 낭만주의 이전에 고전주의를 추종하는 사람들이 드러내고자 하는 모든 존재들의 이상성은, 취미 판단의 상대성으로 말미암아 낭만주의적 경향에서는 그 의미를 상실하게 된다. 모든 인식주체들에게 이상적인 무엇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설령 그것이 존재한다고 할지라도, 그것은 즐거움과 기분나쁨으로 환원될 수 있거나, 또는 인간이 인식할 수 없는 무엇일 수밖에 없다.


  3.2. 자연에 대한 두 가지 시선 - 무관심성과 숭고

  그러나 경험주의 인식론에 기반한 미학적 입장만으로는 풍경화가 미학적으로 정당화될 수 있다는 것을 증명하기는 쉽지 않다. 말 그대로, 경험주의 인식론은 인간의 외부에 있는 모든 것이 경험을 통해 인식되기 때문이다. 경험을 통해 인식되는 것은 풍경만이 아니다. 인간도 인식되고, 풍경이 아닌 사소한 사물들도 경험을 통해 인식된다. 그러나 우리가 주목해야하는 것은 풍경화이다. 풍경화의 미학적 기반을 찾기 위해서는 경험주의 인식론 이외의 다른 논의가 필요하다.

  18세기 영국에서 자연에 대해서, 또는 미학적인 감흥을 일으키는 특별한 느낌에 대해서 제시되었던 대표적인 두 가지 개념이 바로 무관심성과 숭고이다. 미학적인 감흥은 인식을 통해 인간에게 느껴지는 여러 즐거움 가운데서도 매우 특별한 종류의 것인데, 무관심성과 숭고는 이같은 즐거움을 다른 감각적 즐거움과 구별하기 위한 중요한 기준으로 제시된 개념들이다. 특히 이 두 개념은 풍경에 대한 미학적 해석, 즉 자연에 대한 입장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

  무관심성이란, 대상을 바라볼 때 자신의 관심사, 즉 자신의 이익과 결부시키지 않은 상태에서 관조하는 상황을 뜻한다. 근대적 인간, 특히 영국의 경험주의 철학의 전통에서 자연 혹은 대상은 주체의 행복을 위해 주체의 세계에 편입되고 이용될 수 있는 대상이다. 이와 같은 입장은 홉스가 근본적 심리적 이기주의의 형태로 제시한 이래, 경험주의의 전통의 가장 기본적인 전제로 기능해왔다. 자신의 이익과 결부되었을 때 대상은 미학적 대상이 아닌 다른 종류의 감각적 쾌락을 줄 수 있는 대상 또는 그 매개체로서 보이게 된다. 아무리 좋은 회화 작품이라도, 그것을 감상하려 하지 않고 재산 증식의 수단으로 사용한다면 그 작품은 미학적 감흥이 아닌 다른 감각적 쾌락을 불러일으키는 대상이 될 것이다.

  따라서 무관심성은 미학적인 감흥과 여타의 감각적 쾌락을 가르는 중요한 기준이 된다. 풍경화에 등장하는 나무는 의자로 만들기 위해 존재하는 것이 아니며, 그림 속의 증기선은 인간이 타기 위해 존재하지 않는다. 풍경화를 그리는 작가는 자연을 무관심적으로 포착해내어 그것을 캔버스에 옮긴다. 따라서 그 풍경 안에 등장하는 사물들 또한 무엇인가의 수단이나 매개로서 표현되지 않으며, 그저 그 자체로 그림 속에 자신의 자리를 차지하며 존재한다.

  이와 같이 표현된 그림을 감상자는 작가의 의도와 기법에 따라 무관심적으로 읽어내고, 그 가운데서 미학적 감흥을 즐기게 된다. 이 감흥은 단순히 예쁜 색깔이 쓰였기 때문에 일어나는 것이 아니고, 그 색깔들이 전형적인 어떤 배열을 이루고 있기 때문에 일어나는 것도 아니다. 그 그림을 통해 생성되는 관념들은 그 그림의 여러 배치에 의해 특별한 방식으로 관계를 맺고, 그 관계가 순수하게 인지적인 유희의 상태이기 때문에 감상자에게 무관심한 만족감을 안겨주는 것이다.

  18세기 전반에는 무관심성에 대한 논의가 주를 이루었다면, 에드먼드 버크가 ‘숭고’를 또 다른 표준으로 제시한 뒤에는 논의의 중심이 자연의 숭고함으로 옮겨갔다. 자신의 이해관계와는 완전히 동떨어져있는 무관심성 개념과는 다르게, 숭고는 그림 앞에 압도당하며 감상자의 존재에 위협을 느끼는 감흥을 일컫는다. 즉, 자신의 존재와 그림 사이에 밀접한 연관관계가 성립하는 것이다. 이같은 숭고함은 사실 그림이 아닌 자연 그 자체에서 느껴지는 것인데, 화가는 이러한 자연의 숭고함을 캔버스에 옮겨놓고 감상자들이 이것을 느낄 수 있게 해야한다. 그것이 더 잘 느껴질수록 좋은 풍경화라고 할 수 있다.

  숭고의 핵심은 인간이 어찌할 수 없는 상황이라는 데 있다. 인간의 힘으로는 막을 수 없는 수많은 자연재해들은 그 자체로 아주 역동적인 숭고함을 담고 있다. 그것은 인간을 압도하는 자연의 힘이며, 그 앞에 인간은 자신이 사라질 것만 같은 느낌에 사로잡힌다. 또한 이것은 그림으로만 제시되는 것이 아니라, 감상자가 직접 그림 속에 들어가야만 체험할 수 있는 효과이다. 아무리 압도적인 자연재해라도 그것이 그림 속의 이야기일 뿐이라면 감상자는 안심하고 그것을 감상할 수 있기 때문이다. 윤곽을 흐릿하게 처리하거나 비정형적 구도를 만들어내는 것은 감상자에게 그 역동성이 그대로 전해지는 효과를 낳기 위한 장치로서 사용된다.

  다른 종류의 숭고함도 있는데, 그것은 아주 거대한 자연 앞에서 느끼는 것이다. 인간은 경험을 통해서 모든 대상을 인식하지만, 숭고한 자연은 언제나 그렇듯 인간의 인식에 모두 담기지 않는다. 인간의 능력은 한계에 다다르고 지속적으로 그 모습을 담으려는 시도을 좌절당한다. 인식의 실패에서 느껴지는 이같은 숭고 또한 캔버스에 표현되어야 하며, 그런 감흥을 감상자에게 일으킬 수 있다면 그것은 좋은 그림이라고 할 수 있다.

  이같이 감상자와 작품의 관계에 대해서 전혀 다른 입장을 가지고 있는 두 개념이지만, 그 시선이 자연, 인간의 외부 그대로의 모습을 향해 간다는 점에서는 공통점을 가지고 있다. 이 두 개념에 대한 논의는 인물과 시공간을 설명하는 장치에 불과했던 배경을 회화의 전면으로 이끌어냈다. 풍경, 자연은 그 자체로 충분히 미학적인 가치를 가지고 있으며, 그것을 충분히 느끼게끔 잘 조직된 그림, 즉 풍경화가 미학적인 감흥을 극적으로 불러일으키는 그림으로 평가받기 시작한 것이다.


  3.3. 픽처레스크picturesque 유행

  경험주의 인식론, 무관심성, 그리고 숭고 개념은 풍경화의 미학적 가치를 입증하기 위한 일반적인 방법론이다. 이같은 개념들은 이후 영국은 물론 프랑스와 독일의 미학 이론에까지 영향을 미치게 된다. 특히 무관심성과 숭고 개념은 칸트에게 계승되어, 칸트 미학의 핵심적인 개념으로 자리를 잡는다. 그러나 이런 일반론 이외에도, 18세기 영국 특유의 풍경화에 영향을 미친 개념은 또 있다. 이를 픽처레스크라고 하는데, ‘마치 그림을 보는 것 같은’ 이라는 뜻을 지닌 단어이다.

  이 말은 일종의 반-프랑스적인 조경 양식을 가리켰다. 당시 프랑스 궁전의 조경은 인위적이고 그것을 잘 관리할수록 좋은 조경이라는 생각이 팽배해있었다. 풀이나 꽃을 자르고 깎아 일부러 기하학적인 구성과 패턴으로 모양을 냈다. 여러 대칭과 비례들이 엄격하게 지켜졌으며, 그런 조경으로서 그 조경을 관리하는 자의 위대함, 그리고 자연을 통제하는 인간의 능력의 위대함을 드러내는 양식이기도 하다. 영국에서도 처음 조경을 알아갈 때에는 이러한 프랑스적 양식을 따라했지만, 점점 새로운 것을 찾아나가게 되었다. 그 가운데 식물들을 꺾고 관리하기보다는 그 모습 그대로 놓아두어 기하학적이지 않은 모양을 하도록 일부러 내버려두는 방법도 있었는데, 그 방법을 일컬어 픽처레스크라고 했다. 이와 같은 풍경에 ‘그림을 보는 것 같은’ 이라는 단어가 붙은 이유는, 그런 자연스러운 풍경들이 17세기 프랑스의 풍경화가 클로드 로랭의 그림에 등장하는 모양들과 유사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 단어는 그 어원에서부터 이미 풍경화를 지칭하고 있었다. 그 말이 생긴지 얼마 지나지 않아 이것은 자연스럽고 불규칙하며 곡선적인 모든 예술작품, 특히 회화작품의 특성을 뜻하는 말이 되었다. 물론 이런 뜻 또한 반-프랑스적인 조경양식의 형태에 포함되어있는 의미이기도 했다. 픽처레스크는 하나의 양식으로 굳어졌으며, 19세기 초반까지 영국의 예술계를 지배하는 가장 핵심적인 열쇠말이 되었다.

  픽처레스크의 여러 의미 가운데서도, 풍경화와 관련이 있는 것은 역시 자연에 대한 주목이다. 자연을 그려내더라도 그것을 꾸며낸다거나 수식하는 것이 없이, 있는 그대로를 그려내는 것이 이 정신에 가장 부합하는 그림이었다. 영국의 비평계에서 이것은 하나의 미학적인 또는 예술적인 표준이었고, 사람들은 이 의미에 따라서 그림의 완성도와 의미를 읽어냈다. 인간에 의해 인위적으로 짜여진 아름다움이 아닌, 자연 그대로를 드러냄으로써 감상자 스스로가 그 안에서 아름다움을 찾아낼 수 있도록 배려하는 것이다. 특히 이런 픽처레스크적인 성향은 도시의 풍경을 그려내는 것보다는 비도시의 풍경, 흔히 도시인들이 자연이라고 생각하는 그 풍경에 주목하도록 만들었다. 도시의 구조물들은 이 세계에서 가장 인위적으로 기획되었고, 그것은 곡선적이지도 않으며 아름답지도 않았다. 반면에 자연은, 마치 클로드 로랭의 그림에서처럼, 매우 아름답고 유려한 존재들의 결합체였다.

  따라서 이 유행은 단순히 감각적 쾌락을 추구하는 경향도 아니었고, 숭고가 가져다주는 위협감에 시달리면서 자연을 바라보는 경향도 아니었다. 오히려 그 둘 모두와는 다른, 어떤 제 3의 경향이라고 말할 수 있다. 나아가서 픽처레스크한 그림을 그리기 위해 화가들은 픽처레스크한 풍경을 찾아서 여행을 다녔고, 그 풍경에 대한 감식안을 높이기 위해 귀족와 부르주아의 자제들도 여행을 자주 다녔다. 이것은 단순한 지적 유행뿐만이 아닌, 일종의 사람들의 생활의 방식이기도 했다.


4. 숭고와 픽처레스크의 실제

  4.1. 터너와 숭고

J.M.W. Turner, "Snow Storm". 영국을 대표하는 화가 터너의 후기 작품 가운데 가장 유명함.

  터너의 풍경화는 후기로 갈수록 역동성이 그대로 드러난다는 것이 가장 특징적이다. 기법의 측면에 있어서, 후기 대표작들을 살펴보면 사물의 경계는 분명하지 않고, 전체적인 구도가 닫혀있지 않고 열려있다. 그는 낭만주의 시대를 살면서 그림을 그렸지만, 마치 인상파 화가들의 그림을 보는 듯 한 느낌을 받을 정도이다. 그는 영국 왕립 아카데미에 소속되어 르네상스 시기부터 발전되어 온 원근법을 강의했지만, 오히려 그 자신은 의도적으로 원근법을 무시하고 전통적인 회화의 기법으로부터 탈피했다.

  또한 주제의 측면에 있어서, 그는 조난당한 배, 알프스를 넘는 병사들에 대한 묘사 등 인간이 직접적으로 자연의 위엄에 노출되어있는 상황들을 다루는 경우가 많다. 그는 실제로 많은 곳을 여행했고, 그 여행의 중간 과정들을 수많은 스케치로 남겨두었다. 그가 자연을 있는 그대로 드러낼 수 있었던 힘은 바로 이 스케치들에 있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의 여러 작품들은 실제로 그가 다녀갔던 곳, 그가 보았던 곳들을 그림의 전체적인 주제로 삼거나 시선에 가장 잘 들어오도록 배치하고 있다. 이런 특정한 상황들은 숭고와 관련이 되어있다는 점에서, 터너는 숭고 미학에 많은 영향을 받고 그 기준에 충실했던 작가라고 생각할 수 있다.

  특히 터너의 그림에서 주목해야 할 것은, 이러한 숭고의 감정을 캔버스에 보이는대로 그려냄으로써 마치 동떨어진 세계가 아닌, 감상자가 직접 그 상황에 놓여있는 것 같은 착각을 불러일으키게 한다는 점이다. 모든 사물들의 경계가 뚜렷하게 보인다는 것은, 시각적인 인과의 결과는 그러할지 몰라도 관념의 속성은 아니다. 관념들은 언제나 모종의 혼란에 의해 뒤섞일 수도 있고, 사라질 수도 있으며, 그 형태가 뚜렷하게 기억에 남지 않을 때도 있다. 오히려 단지 스쳐갔을 뿐인 풍경들을 명확히 재현한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을 감행하는 일종의 환상이다. 환상이 아니게끔 그대로 드러내는 것이 풍경화의 임무라면 터너의 풍경화는 그것을 충실히 수행하고 있는 셈이다.

  게다가 그가 숭고를 드러내기 위해 선택하는 대상들은 단순히 자연에 국한되지 않는다. 그의 그림에는 전원적 풍경 못지않게 도시의 풍경 또한 많이 등장하는데, 그것은 그의 도시생활의 반영이라고 볼 수 있다. 그 무엇보다도, 그가 눈에 보이는 존재들을 뿌옇게 처리하여 그 경계를 불분명하게 만든 것은 도시오염의 정확한 결과물이다. 스모그는 항구를 가려버리고 자신의 눈 앞에 무엇이 존재하는지 전혀 알 수 없게 만든다. 그것은 기법이라기보다는, 대상을 불투명하게 만들어 감상자의 미학적 감흥을 자극하려는 고도의 계산이다.


  4.2. 컨스터블 - 무관심성과 픽처레스크의 경험

John Constable, "The Hay Wain". 터너와 함께 영국 낭만주의를 대표하는 컨스터블의 대표작.

  도회지의 영향이 강하게 나타나는 것으로 간주할 수 있는 터너와는 다르게, 컨스터블은 비도시의 풍경에 많은 영향을 받았다. 그는 비도시에서 성장하였으며, 어른이 된 이후에도 정기적으로 자신의 고향을 방문하였다고 알려져있다. 그는 이러한 풍경들을 그의 그림의 주된 소재로 삼았다. 실제 그림이 될 만한 곳을 찾아 여행을 다니면서 풍경을 수집하는, 어떤 면에서 전형적인 픽처레스크라고 할 수 있다. 그의 그림에서는 자신의 본성에 따라 자란 여러 자연물들이 그대로 녹아들어가있는 것을 볼 수 있다. 이것은 자신의 감정을 드러내려고 하거나 혹은 그 대상에 자신을 이입한 것이 아니라, 자신으로부터 비롯된 아무런 감정이 없는 상태에서 전원의 풍경을 있는 그대로 그려낸 것이다. 그것을 그대로 보여줌으로써 감상자에게도 그 아름다운 풍경을 바라보며 미적인 감흥을 일깨워주는 것이 그 그림이 의도한 바라고 할 수 있다.

  따라서 그의 그림은 터너의 그림에 비해서는 역동성이나 위기감은 덜하며, 대신에 정적인 분위기가 많이 흐르는 것이 특징이다. 그의 대표작들에 담긴 전원의 모습은 차분하고, 조용하며, 이전에는 그림의 주체로 등장했던 인물들마저 그림 - 그 인물의 주변을 둘러싸고 있는 전원 안으로 녹아들어가 있다. 이전의 전통적인 화법에 대한 일종의 역전인 것이다.

  이것은 당시의 사회분위기와도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그가 그려내는 전원은 비-도시의 전형들이다. 도시와 비도시의 구분이 확연히 생겨나기 시작했을 무렵, 도시의 부르주아들에게 자연은 반-도시적인 개념이 중첩되어있는 특별한 장소였다. 그곳은 쉬는 곳이고, 나를 편안히 안겨주는 곳이고, 분과 초 단위로 시간을 관리하며 하루하루 급변하는 도시적 생활에서 벗어날 수 있는 곳이다. 픽처레스크란, 도시 부르주아들의 반도시적 욕망의 표상이다. 컨스터블의 회화는 정확히 그 지점을 재현하여 보여주고 있다는 점에서 시대를 반영한다는 의미가 있다.


5. 나오는 말

  낭만주의 시기 이전까지 풍경은 회화에서 독립된 주제가 될 수 없었다. 풍경은 특별한 분위기를 연출하는 도구일 때도 있으며, 회화의 중심을 차지하고 있는 몇몇 인물들이 위치한 시간과 공간을 가르쳐주는 역할만을 수행하기도 했으며, 또는 그들이 감정을 간접적으로 드러내는 매개의 역할만 하기도 했었다. 풍경은 풍경이 아니라 배경이었고, 회화 속의 주인공은 어떤 인물이어야만 했다. 풍경화는 독립된 장르로 자리잡지 못하고, 주변부에 머무르며 회화의 중심을 차지하지 못했다.

  그러나 낭만주의 시기에 들어오면서 배경은 풍경으로서 드러나기 시작했다. 그림을 그리는 이의 심정을 대변하는 개체로서, 혹은 풍경 그 자체를 드러내어 특별한 미적 감흥을 일궈내기 위해 새로운 주제로서 도입된 것이다. 이런 경향은 서유럽 전체에서 진행된 것인데, 그 가운데서도 영국의 풍경화는 특기할만하다. 주목받는 계기와 그 시기가 다른 지역에 비해 빠르고, 미학적으로 정당화되는 과정도 매우 수월했기 때문이다.

  그 배경에는 정치, 경제적 혁명이라는 사회상과 더불어 세 가지 미학적 개념이 자리잡고 있었다. 그것은 처음에는 경험주의 인식론을 미학적으로 변용하면서부터 시작되었다. 보이는 것을 인식주체의 내부에 새겨진 그대로 그리는 것이 미학적으로 높은 가치를 부여받을 수 있게 되었다. 따라서 고전주의적인 이상적 형태, 모두가 만족할 수 있는 예술적 대상은 더 이상 캔버스에 담길 수 없게 되었다. 그 다음에는, 자연에서부터 느껴지는 다른 감각적 쾌락과 미학적인 감흥을 구별하기 위한 기준으로서 무관심성과 숭고라는 개념이 제시되었다. 자신의 이익에서부터 나오는 어떤 관심사를 적용시키지 않고서 바라보았을 때 순수한 미적인 쾌감이 느껴질 수 있다는 것이 무관심성 개념의 핵심이며, 반대로 자신의 존재에 대한 위협, 그리고 한 눈에 담을 수 없는 장엄함으로부터 느껴지는 인식적 혼란과 충격이라는 자연과의 깊은 관계맺음이 숭고의 핵심이다. 마지막으로 당대에 영국의 예술적 취향이었던 픽처레스크는 영국 특유의 풍경화 화풍을 만들어내는 데 상당히 기여하였다.

  이같은 개념들은 영국을 대표하는 풍경화 작가들에게 그대로 적용될 수 있다. 터너의 경우 숭고와 상당히 밀접한 연관을 맺고 있다. 경계를 흐릿하게 처리하고 구도를 일부러 어그러뜨리거나 열어놓는 방법을 사용하여, 그리고 자연 앞에 무력해진 인간들을 소재로 택하여 그림을 통해 숭고함을 느낄 수 있게 하는 전략을 차용하고 있다. 반대로 컨스터블은 픽처레스크의 전통을 자신의 화풍으로 승화시켜 반-도시적 이미지의 전원 풍경을 화폭에 그대로 옮겨서 재현한다. 이것은 당시의 사회상, 그리고 컨스터블 스스로가 의도한 자연에 대한 경외와 맞물려 풍경화를 미학적 가치가 있는 회화로서 발돋움하는 데 큰 역할을 하였다.

  풍경화는 낭만주의 시대의 의미 있는 발견이다. 단순한 아름다움, 이상적 형상을 표현하는 것이 아니라 풍경을 통해 아름다움 이외의 다양한 미학적 감흥을 이끌어내는 데 성공하였다. 특히 영국의 풍경화는 그것을 정당화해주는 아카데미 비평의 여러 개념들과 맞물려 스스로의 미학적 가치를 획득하는 데 성공하였다. 그 대표적인 화가인 터너와 컨스터블은 자신의 시대의 요구를 충실히 반영하여 회화의 주제와 기법을 확장시키는 데 성공하였고, 그 결과는 지금까지 우리에게 영향을 미치고 있다.  

* 참고문헌 

마순자, 『자연, 풍경, 그리고 인간 - 서양 풍경화 전통에 관한 연구』, 아카넷, 2003
미학대계간행회, 『미학의 역사』, 서울대학교출판부, 2007
미하엘 보케뮐, 『윌리엄 터너』(권영진 옮김), 마로니에북스, 2006
윌리엄 본, 『낭만주의 미술』(마순자 옮김), 시공사, 2003

김한결, 「관념으로서의 미 - 허치슨 취미론의 로크적 토대에 관한 고찰」, 『미학』 37집, 한국미학회, 20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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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효진 2011-07-17 03:4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경험주의 철학과 낭만주의 예술가들이 지녔던 '자연의 낭만성' 사이의 연결고리가 부족하다는 선생님의 평... 이 있었으나 수정, 보충 없이 그냥 제출... ㅠ.ㅠ
 

<프랑스 문화와 예술 숙제> 

  『어린 왕자』는 자신을 벗어나서 다른 사람을 알게 되는 아이의 이야기이다. 어린 왕자는 자신 외에는 어떤 것에도 관심이 없는, 그래서 자기가 이해할 수 없는 존재들은 자신의 세계 밖으로 언제나 내쫓아버리는 존재이다. 누군가는 그것을 순수하다고 말할 수도 있겠지만, 사실은 순수함으로 덧씌워진 가장 근원적인 이기심이다. 이야기의 중심인 어린왕자가 거쳐온 여러 별의 독특한 존재들을 통해 자신의 모습을 거울에 비춘 듯이 보게 되고, 그것이 결정적으로는 지구에 다다라서 완성된다.

  등장하는 존재들 사이에서 이루어지는 대화를 읽어보면, 어린 왕자를 포함해 이 책에 등장하는 모든 사람들은 누군가와 이야기하지 않는다. 오로지 자신의 이야기만 상대방에게 끊임없이 전달할 뿐이다. 글쓴이의 질문에 어린 왕자는 전혀 대답하려는 모습을 보이지 않는 것이 가장 결정적인 증거이다. 또한 지구 이전의 다른 행성을 여행하며 여러 존재들을 만나서 나눈 이야기도, 사실은 각자가 하고 싶은 이야기만 할 뿐 대화라고 보기엔 힘든 수준이다. 강조되는 것은 오로지 어린왕자의 느낌, 그리고 그 느낌에 의해 비친 그들의 모습뿐이다.

  어떤 의미에서 이것은 아이들만이 가지고 있는, 철저하게 소통이 부재된 세계의 모습이다. 대화를 배우기 전까지의 아이들은, 설령 언어를 구사할 수 있다고 할지라도 다른 사람이 하는 말을 이해하지 못한다. 타자의 말을 이해한다는 것은 그 세계를 이해하는 것과 같은데, 이것은 엄청난 노력과 시간이 필요한 일이기 때문이다. 얼마 안되는 페이지에 압축해놓았기에 그 여행이 길어보이지는 않지만, 사실 어린왕자는 정말로 먼 거리를 돌아서 온 것이다.

  따라서 어린 왕자가 ‘어른들’이라고 표현하는 많은 존재들은, 사실 어린 왕자와 구별된 세계를 살고 있는 것이 아니라 어린 왕자 자신의 거울들이다. 자기 생각, 자기 말 밖에 할 줄 아는 것이 없다는 점에서 이들은 어린 왕자와 동급이다. 그래서 자신을 표현하기 위한 여러 수단들은 왜곡되며, 어린 왕자와 꽃의 관계에서도 볼 수 있듯이 사랑조차도 그 마음을 그대로 다 표현할 수가 없다. 그들은 몸은 자랐지만 마음은 아직 어린 왕자의 수준에 머물러 있으며, 그래서 어린 왕자처럼 자신의 별에서는 자기 이외의 그 누구도 살 수 없다. 이들을 설명할 수 있는 가장 정확한 말은, 소통을 배우지 못한 왜곡된 성장들, 실제로는 어른이 되지 못한 정신적 아이들일 것이다.

  이런 맥락에서 살펴보자면, 어린 왕자가 그토록 싫어하는 숫자에 대한 집착 또한 이해할 만한 것이다. 숫자란, 다름 아닌 소통을 가능하게 해주는 유일한 표준이다. 자기 자신에 대한 집착은 두번째 별에서 보듯이 허영심으로 나타난다. 그러나 이것은 자기충족적이지 않으며, 상대적 격차에 따라서만 충족될 수 있기 때문에 화폐-숫자와 같은 공통된 표준이 필요하다. 자기 자신에 대한 집착을 충족시키기 위해 타자와의 소통이 필요하다는 것은 역설적이다.

  그러나 여기에서 이야기의 방점은 소통에 찍혀있다. 여우는 어린 왕자에게 다른 사람을 이해하는 법을 배운다. 서로 같은 것들 속에서 다른 것을 찾아내고, 그것의 의미를 마음에 새긴다. 그러기 위해서는 마음으로 타자를 바라보며, 보이지 않는 것을 포착해내야만 한다. 그것이 숫자로는 환원되지 않는 그 사람의 진정한 정체성이다. 물론 이것은 영원 - 즉 보편을 찬양하는 지리학자의 태도와는 완전히 다른 것이다. 정체성은 개별적이며 순간적인 것이기 때문이다. 그것을 오롯하게 바라볼 수 있어야만, 우리는 타자를 이해했다고 말할 수 있다.

  타자를 이해하고 그것을 나의 일부로서 받아들일 수 있는 존재가 된다면, 더 이상 예전의 아이와 같은 나는 존재할 수 없다. 온전히 자신을 보전하는 것에서, 자신을 세계로 - 타자로 확장시키며 끊임없이 변화하는 진짜 ‘자기’가 되는 것이다. 그래서, 그 성장 뒤의 어린 왕자는 더 이상 어린 왕자가 아닌 ‘그’라고 지칭된다. 어른이 되는 것이란, 어린 왕자가 어른들의 세계라면서 배척했던, 하지만 자신의 모습이기도 한 아이들의 세계를 가만히 고수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글쓴이의 표현처럼 너무나도 많은 사람들이 술주정뱅이이고 왕이며 허영심이 많은 사람이고 지리학자로 살아가는 지구라고 할지라도, 결국 어린 왕자가 그랬듯이 지구에서 어른이 되는 이유는 혼자 살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심지어 그 사막에서조차도 왕자는 글쓴이를 만나지 않았던가! 어린 왕자가 배운 것이란 바로 그 공존, 그리고 그들과 말하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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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효진 2011-07-12 23:4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순수-아이/숫자-어른의 구도로 뻔하게 읽는 법을 택하지 않기 위해 무리한 해석을 감행.

육호수 2011-08-26 05:39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감명/

박효진 2011-08-28 02:35   좋아요 0 | URL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__)
 

<프랑스 문화와 예술 숙제> 

  라메르 거리의 저택에 사는 안 데바레드 부인은 일주일에 한 번씩 아이의 피아노 교습을 위해서 선생님의 집을 방문한다. 어느 날 피아노 교습 중에 창밖에서 나는 비명소리를 듣고는 호기심에 다가가본다. 그 집 앞에 있는 카페에서는 살인사건이 벌어졌다. 어떤 남자가 여자를 죽인 사건. 남자는 여자를 끌어안고 슬퍼하고 있었다. 그런데 살인용의자는 바로 그 남자다. 데바레드는 이 사건에 의아함과 호기심을 동시에 품는다. 그 다음날에는 교습이 없는 날인데도 아이를 데리고 그 카페를 찾아온다.

  카페 주인과 이야기를 나누는 데바레드에게 어떤 남자가 접근한다. 그는 사건에 대해 무언가 알고 있는 것으로 비춰지고, 그녀는 말을 빙빙 돌리지만 이 남자가 알고 있는 것에 대해서 끈질기게 질문한디. 반대로 남자는 자기도 모르겠다는 말만 반복한다. 아무 소득 없이 날이 지나가고, 호기심을 견디지 못하는 데바레드는 교습이 없어도 매일매일 카페로 간다. 그렇게 남자를 만나서 계속 이야기를 나누며 캐묻지만 여전히 답변은 연기되고, 반대로 그 남자는 자신에 대한 이야기만 계속 한다.

  그 남자 이름은 쇼뱅이라고 했다. 그는 데바레드의 집의 구조나 그의 생활패턴에 대해서 너무나도 소상히 알고 있다. 그의 정체는 공단에서 일을 하고 그녀의 집을 자주 지나간다는 것 이외에는 흐릿하다. 데바레드는 아이와 같이 왔다는 것조차 잊고 그 남자 그리고 그 남자가 하는 이야기에 집중한다.

  일주일을 그렇게 지낸 뒤, 아이의 피아노 교습을 끝내고 카페에 찾아간 데바레드는 또 남자를 찾아가 이야기를 나눈다. 하지만 이번에는 적당히 자제하거나 자신을 감추려하지 않고 긍금함을 모두 쏟아내려 평소에 한 두 잔으로 끝내던 포도주를 한 병도 더 넘게 마신다. 그 날은 자기 집에서 사람들을 초대하는 파티가 있었으나 무시하고 쇼뱅과 술을 마신다. 그러나 이 때에도 데바레드는 자신만 열심히 드러냈을 뿐 사건에 대해서는 큰 정보를 얻지 못한다. 쇼뱅은 여자는 세계를 떠나고 싶다는 결심을 세웠을 것이며, 남자는 어느날 불현듯 이것을 깨닫고 사랑의 표시로 여자를 죽였을 것이라는 아리송한 말만 되풀이할 뿐이다.

  데바레드는 끝내 자신의 집에서 벌어진 파티에 한참 취한 채로 등장한다. 그 파티에 나온 여러 사람들이 건네는 말, 나오는 음식 모두가 무미건조하게 느껴진다. 데바레드 부인에게는 아이가 가장 중요하다는 다른 부인의 말도 듣는둥 마는둥 하고 술김에 취해 파티에서 혼자 동떨어져 있다. 어떤 혼란스러움이 데바레드를 덮친 듯 한다

  그 다음날 데바레드는 아들 없이 혼자 카페에 찾아간다. 어김없이 남자는 카페에 있었다. 그 남자와 한 자리에 앉은 데바레드는 다시 사건에 대한 이야기를 꺼내지만 남자는 확실하게 "나는 부인이 아는 것 이상으로 아는 것이 없습니다"라고 딥변한다. 그 순간 천천히 쇼뱅에게 얼굴을 들이밀던 데바레드는 그에게 키스를 한다. 쇼뱅은 그녀에게 죽었다는 말을 건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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