르몽드 디플로마티크 영문판 2012년 2월 2면

굵은 글씨는 해석이 잘 안되는 부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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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가 소말리아의 문제들을 수입한다


발상은 좋아보인다 : 체포 뒤에(after capture) 잡혀있는 곳에서 해적들을 재판에 부쳐라. 그러나 소말리아인 한 그룹에 대한 재판은 군사 투입의 결론이 정치적인 쇼였다는 점을 제기하였다.(But the trial of a group of Somails brought in at the conclusion of an army raid was a political show)


  36살 압둘라히 아흐메드 구엘레는 2011년 11월 30일 석방되었다. 그 바로 전날 자정에, 그가 몇 달 동안 갇혀있던 파리의 상테(La Sante) 교도소 교도관들은 그를 밖으로 내던졌다. 그는 내쫓겨졌으며, 그리고 내버려지는 것을 원하지 않았다. 그는 프랑스에 대해 매우 조금 알고, 심지어 소말리 해안으로부터 떨어져 "해적특별법(acts of piracy)" 에 연루되어, 3년 이상의 시간을 낭비하고 있다. 그의 석방 이후로, 구엘레는 파리 교외의 (프랑스에 사는 소말리아인들을 위해 지불된(paid))싸구려 호텔에서 지내고 있으며, 그의 좁은 방에서 쫓겨날 것을 걱정하고 있다. "그는 완전하게 상실되었어요(lost). 모든 것이, 특히 언어가, 여기에선 그에게 외국적이지요." 그의 변호사 플로랑 뢰소 드 그랑메종이 말했다. 그가 상실감을 느낀다는 것은(feels lost) 거의 놀라기 어려운 일이다 : 프랑스에 대한 그의 유일한 경험은 교도소 벽과 교도관, 그리고 다른 수감자들의 폭력이다. "그의 상황은 선례를 찾기가 힘들고(unprecedented)," 그의 변호사는 말했다. "그는 아무런 타국으로 들어가는 데 필요한 아무런 신분증이나 증명 없이, 그가 오기를 원하지도 않고 남을 수도 없는 국가에서 그 자신을 찾는다."


  "이것은 당신이 사람들을 그들의 나라로부터 잡아다가 아무런 예비조사 없이 그들을 다른 데로 데려간 다음 그들을 재판하는 것을 군대에게 허락할 때 생기는 것이다." 이 사건을 맡아 일하는 다른 변호사는 말했다. 구엘레와 다섯 소말리아인들(동일국적자-compatriots)은 2008년 9월 16일 이른 시간 소말리 해역 안에서 16미터의 작은 범선(ketch)인 카레아4(Carred'As IV)호의 안(board)에서 프랑스 군대에 의해 체포되었다. 2주 전 프랑스인 커플인 장 입스 딜라느와 베나데트 딜라느는 해적에게 피랍당할 확률이 높은 구역(a high incidence of piracy)에서(1) 인질로 잡혔을 당시 프랑스를 향해 요트를 항해하고 있었다. 한 소말리아 인이 그 공격에서 죽임을 당했다. 다른 여섯은 1주일동안 프랑스 군대에 의해 불확실한 상황 속에 잡혔고, 곧 파리로 흘러들어와졌다.(2)


  오직 그들 가운데 둘만이 카레아4호의 공격에 참여했다. 다른이들은 그들(해적들)이 선원을 바꾸고 있을 때, 그리고 아프리카 해안을 따라 늘어선 항구(stops)에서 그들에 가입했다. 구엘레는 그 기습작전 이틀 전에(the day before the commando raid)야 겨우 도착했다 : 그는 요트 습격자들(hijackers)이, 그를 배 안에서 밤을 보내라고 설득하기 전, 그에게 그들(해적들)에게 물고기를 조금 달라고 말했을 때 그 구역에서 고기를 잡고 있었다. 힘든 38개월의 재구속상태(on remand)와(3) 지난 11월 파리에서 있었던 15일 동안의 재판 뒤에, 구엘레는 석방되었다; 그의 다섯 공범자(co-accused)는 검찰(기소-the prosecution)이 요구했던 것보다 많이 적은, 4년 내지 8년을 판결받았다. 재구속 기간은 특별히 길었다. : 벨기에는 비슷한 사건을 판결하는 데 8개월을 쓰고 있으며(has brought), 네덜란드는 18개월, 스페인은 19개월이다.


  검찰은 이들이 위험한 테러리스트라는 것을 보여주었지만, 그러나 그 재판은 그들이 정체는 있지만 절대 알려질 수 없는 강력한 지역사람의 명령에 단지 따르기만 했을 뿐이라는 것을 밝혔다. 법정에서, 숙련된 선원인 딜라느는 그들의 미숙함(amatuerism)을 강조했다 : "그들은 배멀미가 있습니다." 그는 말했다. 그의 아내는 덧붙였다 : "그들은 모든 면에서 준비되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그들에게 걸맞는(on them) 어떤 것도 가지지 않았습니다.[무기에서 떨어진]" 그들은 딜라느가 화를 냈을 때 그 요트습격자들이 얼마나 무서워하는 것처럼 보였는지를 함께 묘사했다. 그는 심지어 어떻게든 엄격한 규칙들(선실에서는 금연이라거나 갑판에서는 먹지 않는다)을 강제로 하게끔 하였으며(maneged to impose), 그들에게 고기잡는 기술들을 가르쳤다. 그들이 기름(pertol)을 찾았을 때, 그는 그들이 동네 낚시꾼에게 물어볼(ask) 것을 제안하였다.


  그 재판의 끝은, 그들의 유괴자들에게 키스하고 그들이 "새롭고 행복한 삶"을 살기를 바라는 희생자들이라는 초현실적 상황이었다. 딜라느는 그의 고유한 평가(verdict)를 전달했다 : "나는 언제나 [구엘레는] 우리의 유괴아 아무 것도 한 것이 없다고 말한다." 다른 사람들은 유죄였는데, 그가 말하길, 그러나 단지 "그들의 죄과(their depth)를 벗어난 실없는 소리"였다.


  당국(the authorities)은 그와 배심원의 관대함을 인정하지 않았다. 여론 검찰(the public prosecutor)은, "그들이 국제사회, 특히 프랑스가 주목할만한 군사 자원을 이동하게끔 이끌고 있는 해적특별법의 중대함과 같지 않다"는 것을 주장하며, 판결에 대한 반대와 구엘레의 석방에 대해 의견을 드러냈다. 그들의 변호사는 이것을 허가로서 바라본다 : "이것은 더 이상 정의에 대한 것이 아니며, 이 화제를 정치적으로 관리하는 것에 대한 것인데," 드 그랑메종은 말했다. 소말리아 재판 동안 사회적 그리고 정치적 상황들은 적은 것이 말해졌다(Little was mentioned during the trial of Somalia's Social and political situations). 그러나, 그 변호사들이 말하는 것처럼, 프랑스의 간섭을 찬양하는, 대통령 사르코지의 연설이 증거로서 포함되는 때에, 어떻게 그 재판이 정치적이지 않게 할 수 있는가? 구엘레의 석방은, 만약 그 여론의 표현이 확증된다면, 정부의 태도에 대한 비난은, 파리의 소말리아 영사 가운데 한 사람을 빌어, "그들이 그들이 무엇이든 다 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영역으로 보일 것이다. - 영문번역 스테파니 어빈, 한글중역 박효진



각주-

(1) 필립 레이마리(Philippe Leymarie), "펀들랜드의 해적들(Pirates of Puntland)", 르 몽드 디플로마티크, 영문판, 2008년 12월

(2) 그 변호사들은 이것이 불법이며, 게다가 유럽인권법정(the European Court of Human Rights)에 세워져야 할 사건이라고 말한다.

(3) 그들은 얼어붙을 듯 추운 프랑스에 도착해서, 각자로부터 분리되었고, 다른 수감자들에 의해 맞았으며(beaten), 그들의 변호사로부터 격리되어 아무런 방문자도 가질 수 없었고, 그들의 가족에 대한 아주 적은 뉴스만 주어졌으며, 다른 소말리아인들과 같은 방에 넣어지고 덜한 외로움을 느끼기 위해 2년을 기다려야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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르몽드 디플로마티크 영문판 2012년 2월 1면

굵은 글씨는 해석이 잘 안되는 부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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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5년 전, 르 몽드 디플로마티크는 처음으로 금융거래에 대한 세금을 언급했다.(1) 이 때에, 이런 거래의 가치는 전세계 연간 총 생산의 15배였다. 현재, 이는 거의 70배에 이른다. 그 때로 돌아가보면(Back then), 우리는 서브프라임 대출에 대해 거의 듣지 못하였고, 또한 국가부채위기(sovereign debt crisis)가 있을 수 있다는 것을 상상한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대부분의 유럽 사회주의자들은, 토니 블레어의 영향 아래, "금융혁신(financial innovation)"에 완전히 찬성했다(were all for). 미국에서는, 빌 클린턴이 상업은행(deposit bank)들에게 자기 고객들의 돈을 투기(speculate)하도록 권장하는 일에 종사하였다(was about to encourage). 그리고 프랑스에서는, 미국식 모델에 심취한(besotted) 니콜라스 사르코지가 미국 연방준비위원회(the Federal Reserve)에 의해 설득당한 (잠재적으로 파괴적인) 정책(2)을 찬양했고, 프랑스 스타일의 서브프라임 대출을 꿈꾸었다.


  토빈세를 지지했던(backed) 권력있는 사람은 1997년까지 거의 없었다 : 모든 것은 잘 돌아가고 있었다. 당시 프랑스 재무부 장관인 도미니크 스트로스-칸은 그것이 적합하지 않다고(would not work) 생각했다. 사르코지는 심지어 한 술 더 떴다(incisive). "토빈세 시행(business)은 불합리하다 ... 만약 우리가 여기에서 부의 창출에 벌칙을 매긴다면, 우리는 다른 국가의 부의 창출에 힘을 실어주게 될 것이다."(3) 그가 대통령이 되자마자, 그는 그의 재무부 장관인 크리스틴 라가르드(현재 국제통화기금IMF의 총재(head))에게 주식교환거래(stock exchange transactions)에 매기는 세금을 철회하도록 지시했다. 그녀는 "이 조치는 파리를 금융 중심지로서 더욱 매력적으로 만들 것이다."라고 설명했으며, 그리고 그녀는 이것이 취소되지 않는다면, "거래들은 이런 종류의 세금이 오래 전부터 폐지되어왔던(taxes of this kind have long since been abolished) 다른 외국 중심지들에서 만들어질 것이다."고 경고했다.(4)


  이제는, 정책입안자들이 세금감면으로부터 성장한 대부분의 "금융혁신"을 만들 것이라 기대했던 그 때에 그들이 무책임했다는 것이 명백하다. 미국은 은행들을 구조하였고 또한 그들에게 그들 스스로를 위해서 더 많은 이익을 만들 수 있을 때에만 돈을 돌려달라고 요청했다(asked them in return only to make even fatter profits for themselves). 그러나 금융통제에 대한 아무런 결정도 내려지지 않았다; 그저 "세계를 지배하는 돈"에 대한 더욱 많은 불평만 있을 뿐이다. 미국에서는, 심지어 완전히 보수주의적인 공화당 후보조차도 지금은 "들어와서, 당신의 회사의 모든 돈을 가져서는, 그들이 수백만 달러와 함께 사라지는(go off) 동안 당신에게는 파산만 남긴"(5) "욕심쟁이(vultures)"들을 비판한다.


  그래서, 그의 대통령 임기가 끝나기 네 달 전, 사르코지가 이제 "금융정책은 그들이 가져온 상처를 복구하는 것을 돕도록 만들어져야 한다."고 말한 것은 전혀 놀랍지 않다. 아무도 금융거래에 매기는 세금의 "불합리성"이나, 거위-투기-가 그의 황금알을 다른 국가에서 낳을 수도 있다는 위험성에 대해서 말하지 않는다.


  우리는, 경제학자 제임스 토빈이 오래전에 충고한 것처럼, 여전히 "우리의 무절제하지만 영향력있는 금융시장(money markets)에 한 줌 모래를 던지는" 것에 만족 할 수도 있었다. 그러나 이런 시장은 명백하게 그 주주들이 국가를 담보로 삼을 능력을 가진 핵심적인 공공 자산이라는 의미가 있기(represent) 때문에, 우리는 더 많은 것을 해야한다. 지금부터, 우리는 은행이 사적 이익의 손 안에 들어가는 것을 멈추라고 주장해야만 한다. - 영문번역 : 바바라 윌슨(Barbara Wilson), 한글중역 : 박효진



각주-

(1) 이브라힘 와드(Ibrahim Warde)의 "투기꾼이들이 싫어하길 좋아하는 세금(The tax which speculators love to hate)"과 이냐시오 라모네(Ignacio Ramonet)의 "시장을 무장해제함(Disarming the markets)"를 각각 보시오. 르 몽드 디플로마티크, 영문판, 1997년 2월과 1997년 12월.

(2) "만약 내가 누군가를 모범으로서 삼아야 핬다면, 그것은 아마도 앨런 그린스펀일 것이다." 그는 2004년 6월 23일 파리의 르 에코(Les Echos) 지에 실린 인터뷰에서 이렇게 설명했다. "그는 항상 실용주의와 인간성과 함께 행동해왔다."

(3) 1999년 6월 2일, 프랑스2 채널

(4) 프랑스 의회에서의 토론 중의 연설, 2007년 11월 23일

(5) 뉴트 깅그리치, NBC 오늘의 쇼(Today Show), 2012년 1월 9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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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활동마감] 9기 신간평가단 마지막 도서를 발송했습니다.

신청할 때만 해도 이게 진짜 될까 하면서 조마조마했는데, 신간평가단으로 선정되고 나서 벌써 열 몇권에 달하는 책에 대해 리뷰를 썼습니다. 음, 저같은 경우 제가 선정한 책을 받아본 적은 딱 한 번 뿐이어서(^.^; 매니악한 취향) 많이 아쉽지만 어쨌든 이번 기수를 탈 없이 마무리한 것을 스스로도 자랑스럽게 생각합니다. 휴... 사실 10기에도 되길 바랐지만, 아무래도 새로 신청하는 사람들 중에서는 제 글이 눈에 띌 수 있지만 이미 '키보드 좀 잡아보신' 분들 사이에서는 제가 눈에 띄지 않는 모양입니다. 이건 제가 글 쓰는 연습을 더 많이 해야한다는 뜻이겠지요. 

- 신간평가단 활동시 가장 기억에 남았던 책과 그 이유

  <인지자본주의> 

  가장 기억에 남는 책을 꼽으라 한다면 저는 단연 이 책을 꼽겠습니다. 신간평가 대상으로 선정된 도서 가운데 유일하게 다 읽지 못하고 '나 너한테 졌음.' 하면서 항복한 책이거든요. 언젠가는 이 책을 다 읽을 것이고, 또 그런 다음에 이 책의 긍정적인 부분과 부정적인 부분을 남김없이 다 끄집어낼 수 있으리라 믿습니다. 사실 이 책을 다 읽지 못하고 항복했다는 데에 살짝 자존심도 상하고... 이래저래 저에게는 숙제만 안겨주었습니다.







- 신간평가단 도서 중 내맘대로 좋은 책 베스트 5

  1. 아렌트읽기 

  신간평가 대상중에 가장 재미있게 읽은 책이었습니다. 깊이가 있는 만큼 조금 어렵긴 했지만 그래도 소화하지 못할 수준은 아니었으니, 상당한 균형을 갖춘 책이었다고 생각합니다. 누군가 아렌트에 대해 좋은 책이 없냐고 물어본다면, 그가 직접 쓴 책을 읽어보는 것 이외에도 이 책을 망설임 없이 추천할 것입니다. 

 

 

 

  2. 사르트르와 카뮈 

  깊이와 상관없이 재미있게 읽었던 책을 꼽으라면 이게 1등이었습니다. 가장 단순하게는, 유명 인사의 사생활에 대한 여러 가지 소문과 해석을 보는 관음증적 성향에서 나오는 재미가 있는 책이고, 이론적으로는 두 사람 사이의 대립과 갈등이 진짜로 무엇이었나 알게 되는 소득을 올릴 수 있는 재미가 있는 책입니다. 

 

 

 

  3. 언어의 감옥에서 

  저는 이 책을 읽기 전에 자이니치에 대한 정보가 전혀 없었습니다. 이 책을 접하고 나서야 비로소 이런 문제가 있었구나 하는 것을 알게 되었지요. 그래서 제게는 매우 소중한 책입니다. 물론 평이하게 써진 것은 물론이거니와 깊이도 겸비하고 있었다고 생각합니다. 

 

 

 


  4. 데리다평전 

  어려운 걸로 치면 인지자본주의와 거의 동급인 책이었습니다. 대체 이것은 한글인가 번역된 영어인가 아니면 그냥 영어인가! 제 눈을 의심하게 만드는 책이었지요. 어쨌든 나름 꼼꼼하게 읽어서 많은 부분을 이해했다고는 생각합니다. 

 

 

 


  5. 인지자본주의 

  어려워도, 베스트는 베스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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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양현대철학 발표문. 리처드 로티, 『우연성, 아이러니, 연대성』의 3장 '자유주의 공동체의 우연성' 요약.> 

벌린의 자유주의와 상대주의 문제

  언어와 자아에 대한 전통적인 견해에 반대한 로티는, 그 다음으로 개인들이 모여서 구성한 공동체의 바람직한 모습에 대해서 탐구하기 시작한다. 그는 인간에게 확고한 정초를 마련할 수 있다는 생각에 회의적인데, 이것은 공동체에 대한 견해에서도 마찬가지이다. 이 장에서 그가 논하려는 내용은, 계몽주의와 합리주의에 기반한 자유주의, 즉 개인은 합리적으로 자신의 신념을 선택하는 존재이기 때문에 개인의 선택권을 최대한으로 보장해주어야 한다는 근대적 자유주의 이념이다.

  로티가 자신의 견해와 가까운 것으로 제기한 이사야 벌린의 자유주의는 근대적 자유주의 이념과는 구별된다. 그의 자유주의는 개인이 각각 선택한 신념들이 절대적-보편적-필연적 타당성을 가진다는 생각을 거부한다. 따라서 인간은 합리적인 존재라는 내용이 들어간 근대적 자유주의와는 구별된다. 물론, 인간에게는 존재와 인식의 문제에 대해 시간과 공간을 뛰어넘는 보편적 토대를 마련하고자 한다. 그러나 벌린의 생각 그리고 지금까지 로티가 전개한 논증에 따르면 개인은 근본적으로 역사에서 벗어날 수 없는 존재이기 때문에, 그의 생각을 받아들인다면 벌린이나 슘페터의 말처럼 ‘신뢰할 수 없는 상상 속의 토대’를 자신의 행위의 근거로 삼아서는 안된다.

  샌들은 벌린의 자유주의적 견해가 상대주의적이라고 비판한다. 만약 개인의 신념에 확고한 토대가 없다면, 그것은 결국 믿을만한 것이 못된다. 따라서 그 신념을 굳이 적극적으로 실천해야 할 이유가 없다. 또한 인간이 자유로운 존재라는 것과 합리적인 존재라는 것은 서로 모순인데, 만약 합리적인 것이 더욱 근본적이라면 자유는 단지 합리적으로 선택가능한 사항으로서의 가치 정도밖에 가질 수 없다. 그렇다면 인간은 합리적으로 자유를 포기할 수도 있다는 결론에 이른다. 게다가 자유가 ‘자유롭게’ 포기할 수 있는 신념에 지나지 않는다면, ‘자유’를 공동체 구성의 기본 원리로 삼는 자유주의 또한 하나의 이념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이에 대해 로티는 상대주의와 절대주의를 대립시키는 샌들의 구도 자체가 전형적인 근대인의 태도라고 주장한다. 무엇이 상대적이라고 말하기 위해서는 그것의 상대성을 판단하기 위한 명확한 기준이 있어야한다. 다시 말해, 상대성에 대해 논하기 위해서는 절대적 정초를 요청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이 문제에서 샌들은 합리성이라는 근대적 정초를 비판 없이 수용하고 있다. 하지만 로티가 보기에 인간은 오로지 역사적인 존재일 뿐이며, 역사성을 벗어나 합리적으로 신념들을 선택할 능력은 없다.

  또한 그는 데이비슨의 견해를 빌어서, 역사의 변화를 이끄는 힘은 합리적 선택이 아니라 역사를 새롭게 해석하고 다시 쓰는 행위, 즉 은유(메타포)의 변화에서 나온다고 이야기한다. 우리가 절대적-보편적인 것으로 간주하는 합리성조차도, 역사 속에서 무엇을 합리성이라고 부르며 그 의미가 무엇인지에 따라 각 시대의 합리성조차도 제각각이다. 따라서 샌들의 질문은 벌린이 제기하는 현대적인 자유주의에 대한 제대로 된 질문 또는 비판일 수 없다.

  로티가 말하는 자유주의란 변화를 불러오는 새로운 은유가 출현하지 못하게 하는 것을 거부하는 신념이다. 절대적, 보편적 정초를 요청하는 경우 그 정초와 어울리지 않는 특정한 은유들은 체계적으로 배제된다. 따라서 그러한 행위는 로티 식의 자유주의에 반하는 행위이다. 지금 우리를 규정하는 계몽주의와 합리주의, 그리고 여기에 기반을 둔 자유주의는 그들이 등장했을 당시에는 매우 세련되고 신선한 은유였다. 그 은유의 확산은 공동체를 이해하는 방법과 공동체의 모습을 변화시켰다. 하지만 현재의 자유주의는 계몽주의와 합리주의와 결합된 상태로 계속 머물러서는 안된다. 계몽주의와 합리주의가 이미 낡은 것이 되어버렸고, 그들이 공동체에 대한 또 다른 은유들을 상대로 절대성과 보편성의 잣대를 들이미는 월권행위를 하고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자유주의는 우리가 바랄 수 없는 절대적-보편적 정초에 대한 열망, 즉 계몽주의와 합리주의적 욕구와는 결별해야한다. 그 자리에 시적 요소를 강조함으로써 은유의 자유로운 창조를 가능하게 해주는 형태로 다시 쓰여야 한다. 자유주의에 철학적 기초를 놓으려고 하는 행위는, 샌들의 반박이 그렇듯 다른 것을 철학적 기초로 삼는 자유주의의 반대자들에 의해 선택가능한 이념 가운데 하나로 격하되며, 그 가치를 상실한다. 나아가서는 인간의 자유를 가장 우선시하는 자유주의의 특징 자체를 퇴색시키게 된다.

  이런 재서술을 통해서 얻을 수 있는 또 하나의 효과는 중립성의 포기이다. 역사적 인간은 결코 모든 신념에 대해 중립적인 상태가 될 수 없다. 어떤 은유에 대한 선택은 곧 어떤 신념에 대한 선택인데, 인간은 결코 어떤 은유도 선택하지 않은 상태에서 살아갈 수 없기 때문이다. 인간의 모습은 중립에서 선택으로 이행하는 것이 아니라 주어진 은유들의 배열을 바꾸어 새로운 은유를 만들어내는 것이다. 새롭게 탄생한 은유는 그 의미가 확정되지 않은 상태로 사라지거나 또는 확장되는데, 그 불투명성이야 말로 진짜 자유가 있어야 할 자리라는 것이 로티의 생각이다.


계몽주의, 합리주의와 자유주의 문제

  그렇다면 이전에 계몽주의, 합리주의와 자유주의는 어떻게 관계를 맺었으며 또 지금은 어떻게 관계를 맺고 있는가? 이것이 로티의 두 번째 질문이다. 호르크하이머와 아도르노의 『계몽의 변증법』은, 잘 알려져있듯이 이 관계에 대해 연구한 고전이다. 인간들은 계몽주의의 핵심인 비판과 반성을 통해 인간에게서 (도구적) 합리성을 끄집어내고 인간의 본성을 이념적으로 정초하는 데 성공했지만, 또한 비판과 반성에서 비롯된 ‘철저한 세속화’로 인해 자기 스스로 세운 계몽주의와 합리주의를 포함한 어떠한 신념도 신뢰할 수 없는 상태에 이르고 말았다. 그들은 자유주의의 뿌리를 계몽주의와 합리주의로 보고 있다. 따라서 철학적 기초를 잃은 자유주의 또한 공동체를 지지하는 원리로서의 지위를 잃어버릴 것이라고 주장하였다. 비판과 반성의 원리에 따라 자유주의 사회가 다른 사회에 비해서 더욱 가치있는 것이라고 말하는 행위 자체가 불가능해진 것이다.

  로티는 그 비판과 반성을 허용하는 것 자체가 자유주의적 정신에 부합하는 일이며, 자유주의가 계몽주의와 동시에 탄생했다고 해서 이 둘의 운명을 같은 것으로 보는 것은 문제가 있다고 비판한다. 호르크하이머와 아도르노가 비판하는 계몽주의와 합리주의는 그들이 그것을 비판하려고 시도한 때에 와서야 비로소 그 모습을 온전히 드러냈다. 실제로 그 두 은유를 만들어낸 사람들에게는 두 사람이 분석한 그 결과들이 등장할지 그렇지 않을지 모르는, 말 그대로 ‘자유로운’ 상태였던 것이다. 따라서 당시에 계몽주의와 합리주의는 자유주의와 긴밀한 결합을 이룰 수 있었다.

  반면에 듀이, 오크쇼트, 롤즈 등 현재에도 여전히 계몽주의와 자유주의의 연결을 중요하게 보는 사람들도 있다. 그들은 자유라는 철학적 정초와 합리성에 기초한 이념으로서의 자유주의를 포기함으로써, 오히려 자유주의적 상황을 인간의 가장 근본적인 조건으로 규정한다. 이들은 공동체가 추구하는 가치의 내용들을 인간들이 스스로 구성한다고 보는 구성주의적 관점을 제시하였다. 어떤 공동체의 가치가 정당화되는 것은 오로지 다른 공동체의 가치와 비교했을 때 뿐이다. 이들의 주장은, 그렇기 때문에 모든 가치에 대해 가능성을 열어놓는 자세를 취해야 하며, 그것이 우리의 자유주의가 갖추어야 할 진짜 모습이라는 말로 요약된다.

  이들의 입장에서는 공동체가 추구하는 가치에 대한 확고한 정초라는 말은, 거의 무의미한 말이다. 만약 그 정초를 마련할 수 있다고 말한다면, 그것은 이미 우리가 실천하고 있는 가치들을 통해서만 가능하다. 즉 보편성이나 절대성을 띌 수가 없다. 가치에 대한 이론의 구성은 다양한 규범과 덕목들이 갈등하는 가운데, 특정한 것들을 더욱 명료하게 말하기 위한 의도에서 이루어진다. 실천은 이론에 대해 우선된다. 이론은 실천의 유형화, 일반화, 체계화이며, 그 요점을 밝히는 도구로 한정된다. 오크쇼트는 이런 의미에서 바람직한 공동체의 유형을 우니버시타스universitas에서 소시에타스societas로 변화하는 것, 즉 통합적 사회에서 상호존중이라는 가장 약한 약속만으로 결합된 연대체로 변화할 것을 제안한다.

  셀라즈가 도덕성이라는 말을 ‘우리-의식’으로 바꾸자고 이야기하는 것도 이들의 주장과 같은 맥락이다. 가치는 엄밀하게 갖춰진 형식에 들어맞는 무엇이 아니라, 실제로 이미 존재했던 내용을 바탕으로 만들어지는 공동의 ‘목소리’이다. 다시 말하면 공동체는 도덕에 선행한다. 가치는 자신의 정체성을 통해 부여되며, 또한 형성된다. 자유주의에 대한 이런 견해에서 역사성을 배제하기란 매우 어려우며, 오히려 합리성이 배제된 자유주의에서는 역사성이 중심을 차지한다. 이 역사성에서 개인과 공동체 사이의 갈등을 찾는 것은 분명히 어려운 일은 아니며, 언제나 발생하는 갈등이기도 하다. 그러나 그 관계의 규정은 그 역사성에 의해 언제나 변화할 수 있다는 것이 이들이 말하고자 하는 핵심, 그리고 자유주의가 공동체를 규정하는 가장 기본적인 원리가 되어야 하는 이유이다.

  이러한 사회에서는 자유주의 아이러니스트인 시인이 그 사회의 영웅이 된다. 그는 새로운 은유를 지속적으로 창조하며, 자신의 상황을 설명할 수 있는 가장 알맞은 말을 찾아 끊임없이 모험한다. 동시에 자신의 은유의 근거가 자신이 살고 있는 그 시간과 공간의 역사라는 것을 인지하고 있으며, 새로운 은유의 근원이 그 역사 속에서 지금까지 창조되었던 은유라는 것도 알고 있다. 진리에 대한 열망과 어느 정도의 폭력으로 대변되는 근대의 영웅인 혁명가와는 대비되는 모습이다.


푸코, 하버마스와 자유주의 아이러니스트

  이러한 설명에 따라, 그가 말하는 자유주의 아이러니스트라는 개념은 자유주의 사회의 가장 이상적인 인간상이다. 이를 더욱 명확하게 설명하기 위해 로티는 (자신의 관점에서) 아이러니스트이지만 자유주의자는 아닌 푸코와, 자유주의자이지만 아이러니스트는 아닌 하버마스를 비교한다.

  로티는 자아에 대한 이해와 니체에 대한 입장에서 출발하여 그들의 견해를 비교해보도록 권하고 있다. 푸코는 니체의 계보학적 입장을 계승하고 있다. 이것은 이 책의 2장에 나오는 것처럼, 자아가 우연적인 구성물이라는 것을 밝혀내는 가장 확실한 방법이다. 더 나아가서, 근대 사회의 자유가 역설적으로 어떻게 인간을 속박하는가를 니체의 계보학적 방법으로 고찰하는 것이 푸코의 중요한 철학적 과제 가운데 하나였다.

  반면 하버마스는, 니체가 개인의 내면적 정초로부터 실천의 원칙을 이끌어내려는 시도를 포기하게 만들었다는 철학사적 의의를 인정하면서도, 그것이 자유주의적 공동체에는 도움이 될 수 없다고 주장한다. 그 이유는 그가 근대성을 비판하면서 인간에게 목적이 있다는 생각까지 포기해버렸기 때문이다. 그런데 자유주의는 인간의 더 많은 자유와 해방이라는 분명한 목적이 있기 때문에, 니체의 입장과 자유주의는 모순된다. 하버마스는 사회의 구성은 개인의 내면이 아니라 상호주관적인 영역에 토대를 두고 있다는 입장을 표명함으로써 니체의 입장을 반박하고 자유주의를 새롭게 하고자 한다.

  하지만 푸코는, 그런 상상력과 의지는 이미 개인으로서 인정받는 사회화의 과정 동안에 충분한 제한을 받고 따라서 개인은 그 사회에 알맞게 행동하는 것 이상의 어떤 행동을 취할 수 없다는 입장을 지키고 있다. 근대사회는 전근대사회와는 다른 방법으로 사람들의 주체성을 구성한다. 이 방법은 대단히 정교하고 풍부해서 탄력성이 높을 뿐만 아니라, 그 자체로 다양한 행동의 유형을 생산해내는 능력을 지니고 있다. 이를 통해 공동체 내의 주체들은 자신의 행위가 완전히 창조적이며 자신의 선택이라고 믿어버리는데, 푸코의 입장에서는 이것이야말로 진정 위험한 사회이다.

  로티는 먼저 푸코에 대해 언급한다. 그에 따르면, 푸코는 오히려 역설적으로 현대 자유주의 사회가 가장 해서는 안될 모습을 가장 정교한 형태로 적어놓은 사람이라고 주장한다. 그의 용어를 빌려 말하면, 가장 자유주의적인 태도로 지향해서는 안될 사회에 대한 혁신적인 은유를 고안해낸 것이다. 현대 자유주의의 과제는 푸코가 말한 형태의 사회를 극복할 대안을 내놓는 것이며, 그 시도는 어느 정도 성공적으로 진행되고 있다고 로티는 주장한다. 이 과제의 해결은, 로티 스스로가 정초한 자유주의 아이러니스트들이 그 사회에 얼마나 다양한 분야에 많이 포진되어있는가에 달려있다.

  게다가 푸코의 저서에 대한 비판적으로 읽어보면 그가 여전히 ‘내면적 인간’과 그의 자유에 대한 신뢰를 지니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즉, 그의 사회화 이론은 ‘내면적 인간’이 일그러지는 과정에 대한 서술이라는 것이다. 따라서 그가 바라는 것은 현재 사회의 모든 것을 빠짐없이 변화시킬 혁명 정국 내지는 총체적 변화라고 짐작할 수 있다. 이것을 거치면 이 자유가 온전히 드러나는 사회가 도래한다. 하지만 그의 사회화 이론 내에서, 그리고 그의 철학 속에서 이것은 완전히 불가능하며, 특수한 상황에서 특수한 인간들만이 가능하다.

  하지만 하버마스는 총체적 혁명에 대한 이러한 동경을 거부하고, 공공 영역에서의 편견과 지배적 구조가 없는 의사소통을 통해서 역사적 변화(와 진보)가 가능하리라고 주장한다. 그가 의사소통을 통해서 극복하고자 하는 현대사회의 문제는 크게 두 가지이다. 하나는 푸코가 지적한 것과 같은 사회의 출현과 그에 비례한 총체적 혁명에 대한 혁명가적 전문가들의 갈망이며, 다른 하나는 전문가집단의 관료화로 인한 ‘합리적’ 관료지배현상이다. 이러한 우려는 로티도 공유하고 있는 것이긴 하지만, 그는 하버마스의 경우 총체적 혁명에 대한 우려가 더 크다고 지적하고 있다.

  그러나 이를 극복하기 위해 제시된 하버마스적인 의사소통은 연속적이고 점진적인 데 비해서, 로티의 모델인 ‘시인’의 인간형은 이전의 역사적 전통에서 도약을 시도한다는 점에서 급진적이고 단절적인 태도를 취한다. 따라서 이 두 입장은 대립한다. 또한 의사소통은 서로가 이해에 수렴하는 모델이지만, 시인은 그 사회가 지금까지 말하지 못했던 방식을 지속적으로 창조해내는 발산적 모델이다. 이 부분에서 하버마스와 로티는 다시 충돌한다. 그러나 이런 차이에도 불구하고, 로티는 자신과 하버마스의 차이가 철학적인 차이일 뿐 정치적인 차이는 아니라고 말한다.

  로티의 하버마스 비판은, 그가 보편주의를 포기하는 이른바 아이러니스트들에게 호의적이지 않고, 그들의 철학적 결론에 대해서 신뢰하지 않는다는 ‘철학적 비판’에 집중되어 있다. 하버마스의 이런 견해는 로티가 폐기하고자 하는 이성과 비이성의 영역을 나누는 사고방식을 다시 떠올리게 한다. 하버마스는 공공영역의 의사소통에서 사용되는 인간의 능력이 이성이라고 분명하게 이야기하고 있기 때문이다. 또한 이 공공의 영역에 이른바 ‘아이러니스트’들이 난입하여 지배적 견해를 형성할 경우, 그것은 공적 영역의 이성을 포기하는 일이 되며 공동체에 비합리주의를 유통시키는 이론적 근거가 될 수 있다는 이유로 매우 경계하고 있다. 그러나 로티는 그들의 은유 또한 존중받을만하다고 말한다. 그에 따르면 공공영역이란 사실 사적 개인들의 합의에 의해 일시적으로 만들어졌다가 사라지는 것, 즉 상존하는 것이 아닌 우연적인 것이다. 따라서 굳이 그들이 비합리주의 또는 합리주의라는 단일한 토대를 바탕으로 단일한 견해에 집중해야 한다는 발상 자체를 이런 논리에 따라 거부하는 것이, 자유주의에 더욱 부합하는 것이라고 지적한다.

  지금까지 살펴본 내용을 토대로 로티가 결론짓는 자유주의 아이러니스트의 모습은 다음과 같다. 푸코와는 달리 ‘모든 곳에서의 자유’를 열망하는 모습도 아니면서, 하버마스와 같이 인간의 보편성에 대한 이념을 거부하면서 공공영역이라는 이름으로 다시 보편성을 귀환시키는 시도 또한 아니다. 이 둘을 절충하는 세계에 대한 이해는, 논리적인 설명이 아니라 서사적인 설명이 될 것이다. 연역적 체계가 아니면서도, 자신의 역사성과 자신의 독창성을 연결하는 분명한 고리가 있기 때문이다. 로티 스스로는 자신이 이 둘 사이에서 절충안을 제시하고 있다고 생각하며, 다음과 같은 말을 남기고 있다. “잔인성의 회피보다 더 중요한 사회적 목표가 존재한다고 생각하도록 당신을 유도할 정치적 태도에 빠져드는 것을 스스로 막기 위해서, 참됨과 순수성을 향한 니체-푸코적인 시도를 사적인 것으로 만들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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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양현대철학 발표문> 

  후설의 현상학 – 자연과학과 정신과학의 사이에서

  후설은 초기에 수학에 대한 연구로 자신의 학문적 여정을 시작하였지만, 점점 철학으로 연구 분야를 옮기면서 현상학이라는 독특한 체계를 구축하였다. 현상학의 여러 요소들과 그 태도는 이후의 많은 학자들에게 영향을 미쳤다. 현대철학에서 거장으로 평가받는 많은 사람들이 후설을 자신의 철학의 출발점으로 삼았다는 것에서 이 사실을 알 수 있다. 따라서 현상학은 현대철학에 대해 말할 때 반드시 짚고 넘어가야 할 철학사조 가운데 하나로 보아야 한다. 특히 후설의 철학은 현상학이라는 흐름의 원형을 보여준다는 점에서 매우 중요하다.

  현상학에 대한 구상은 당시 후설을 둘러싸고 있던 학문적 환경과 무관하지 않다. 그가 살았던 19세기 후반은 계몽주의의 기획과 구상, 즉 자연과학의 발전이 모든 것을 해결해주리라는 낙관적인 전망이 절정에 달했던 시기이다. 자연과학의 발전이란 ‘모든 것의 자연과학적 해석’을 의미했고, 인간 또한 자연과학적으로 해석하려는 심리학이 등장하였다. 반대로 인간의 정신성을 강조하며 철학과 인문학의 영역을 방어하려는 조류 또한 만들어졌다. 이들은 자연과학에 맞먹는 방법과 체계를 기반으로 인간의 정신을 연구대상으로 삼는 학문분과, 즉 ‘정신과학’을 만들고자 했고 그 기초를 마련하기 위한 여러 이론적 작업을 해나갔다.

  그러나 이러한 경향과는 달리, 후설은 어떤 특수한 학문과 그 특수한 학문이 사용하는 개념, 그리고 그 개념들로 이루어진 연역적 체계를 사용하여 세계를 이해하려는 시도를 비판했다. 물론 그가 각 개별학문들이 자신의 고유한 방법론을 바탕으로 탐구를 수행하는 것 자체에 반대한 것은 아니다. 후설이 비판하려 했던 것은, 개별학문이 자신의 고유한 방법을 보편적인 방법이라고 말하고, 그 방법을 사용해 드러낸 특정한 세계를 객관적인 세계라고 주장하려는 시도였다. 특정한 방법은 이미 그 안에 세계를 예비하고 있고, 따라서 특정한 세계 밖에는 드러내지 못한다. 그것은 방법에 의해 드러난 전체 세계의 특정한 모습일 뿐, 그것이 세계 자체이거나 혹은 그 세계가 인간에게 드러날 수 있는 유일한 모습이 아니라는 것이 후설의 주장이다.

  그렇다면 현상학은 각 개인에게 드러나는 그 모습이 전부라고 말하는 상대주의적 입장을 취하는가? 그렇지 않다. 그는 현상학을 통해서 세계의 가장 근원적이고 보편적인 모습을 드러낼 수 있다고 생각하였다. 그리고 이것이 모든 인간에게 공통되는 정신의 작용이기 때문에 세계는 모든 인간에게 공통된 모습으로 드러난다. 후설은 이 점을 아주 조심스럽게 주장하며, 상대주의를 대표하는 정신과학의 흐름 또한 비판한다. 정신과학을 세우려 했던 이들은 주로 인간의 정신이 활동해온 결과들의 축적이라는 점에서 역사, 문화 등을 강조하며, 또한 현세대의 인간의 정신도 이들에 비추어 고찰할 수 있다고(고찰해야 한다고) 말한다. 그러나 이것은 정신을 역사와 문화의 경계 안에 한정시키는 결과를 낳고 만다. 후설이 보기에 인간의 정신은 이 영역들을 초월할 수 있는 능력이 있으며, 보편성은 여기에서 갖추어진다.


  현상학의 목표와 대상 – 선험적 자아의 구조, 현상

  당시 주류이던 학문적 경향에 대한 위와 같은 비판은 각 개별학문들이 공리로 삼는 것에 대한 문제제기, 즉 토대에 대한 의심에서 출발한다. 이들은 각각의 세계를 담고 있으며, 그 세계는 몇몇의 가장 기초적인 근거들로부터 출발한다. 그렇다면 그 근거들은 아무런 의심 없이 받아들일 수 있을 만큼 투명한가? 그렇지 않다면, 개별학문들이 기초로 삼는 그 근거들은 또 무엇을 토대로 삼고 있는가? 후설의 현상학은 이 지점을 짚어내어, 모든 개별학문들이 토대가 될 수 있는 진정한 토대에 대해서 탐구하고자 한다. 이 점에서 그의 문제의식은 『성찰』에서 데카르트가 보여주는 의심과 매우 유사하다.

  정신과학에 대한 비판에서도 알 수 있듯이, 후설은 모든 인간이 인정할 수 있는 보편적 세계는 분명히 존재한다고 믿었다. 그는 보편적 세계 자체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부정하지 않았으며, 오히려 그것을 정당화하고 그 토대를 마련하기 위해서 자신의 철학적 논증을 펼쳤던 인물로 보아야 옳다. 그가 말하고자 하는 것은, 그것이 특정한 개별학문의 연구만으로는 드러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따라서 후설이 말하는 보편적 세계란, 자연과학에서 가정하는 것처럼 인식주체와 떨어져 독립적으로, 그리고 주체와 대상이 서로 아무런 관련도 없이 존재한다는 일반적인 의미에서의 객관적 세계가 아니다. 그에게 보편과 객관은 다른 의미이다.

  그렇다면 이 보편적인 세계는 어떤 차원에서 확보할 수 있는가? 후설은 전반성적인 영역이라고 답한다. 학문적 인식을 포함한 모든 인식은 반성의 산물이다. 반성을 통해 인간은 대상을 판단하고 규정한다. 그 형식은 수학적일 수도 있고(저것은 부피가 1ℓ이다), 실용적일 수도 있으며(저것은 내가 물을 마실 수 있게 도와준다), 미학적일 수도 있다(저것은 예쁘다). 그러나 이런 판단과 규정은 대상 자체에 대한 것이 아니고 내 의식에 의한 것이다. 따라서 어떤 대상이 유의미한 것(세계에 존재하는 것)이 되는 과정에는 근본적으로 정신이 참여한다 - ‘의식은 언제나 무엇에 대한 의식이다.’ 그가 보편적인 것으로 간주하고 주목하는 것은 그 의미들로 이루어진 세계 자체가 아니라 그 의미가 부여되기 전 가장 즉자적인 세계 – 즉 전반성적인 세계, 그리고 그 세계에 의미를 부여하는 정신의 활동이다. 이 활동을 수행하는 자아가 경험 이전의 자아, 즉 선험적 자아이다.

  이 선험적 자아가 대상과 관계를 맺으며 결합한 장소를 후설은 현상이라고 부른다. 현상이야말로 모든 인간의 인식의 근원이며, 학문의 근원이다. 그러므로 진정한 학문의 대상은 바로 현상이어야 한다. 그는 철학을 바로 이 현상에 대한 학문, 즉 현상학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하였고 그것을 자신의 체계를 표현하는 단어로서 선택하였다. 모든 개별학문들은 현상의 여러 가능성 가운데 하나를 대상으로서 끄집어낸다. 이것은 그 학문이 전제하는 일종의 정신적인 태도 때문에 가능하다. 따라서 모든 개별학문들은 객관적 대상에 대한 탐구이기보다는 특수한 정신적 태도와 절차의 산물이다. 현상학은 그 모든 가능성들을 담고 있는 현상에 대해 연구함으로서 모든 특수한 정신적 절차들을 예비하고, 그 학문들이 학문으로서 자리매김할 수 있는 토대를 닦는 학문이 된다.

  따라서, 현상학의 정신에 따르면 세계는 주체의 능동적인 구성만으로 형성되지 않는다. 마찬가지로 외부의 객관적 존재자들의 여러 특성을 지각함으로써만 형성되는 것도 아니다. 선험적 자아는 근본적으로 지향적이기 때문에 끊임없이 대상에게 다가가고, 대상은 선험적 자아에게 다가온다. 이 관계에서 주체의 특성은 ‘무엇에 대한 의식’, 즉 지향성으로 정의된다. 반면에 현상인 대상은 형상(eidos)에 근거해 반성을 통해서 판단하고 규정될 수 있다. 후설의 입장에 따르면 세계는 근본적인 수준에서 선험적 자아의 참여에 의해 이루어진다. 그러나 이 자아가 현상을 멋대로 규정하는 것은 아니며, 대상 또는 세계를 어떤 태도로 고찰하더라도 변하지 않는 그 본질을 드러내는 방식으로 세계를 구성한다. 그러므로 현상학은 본질을 추구한다는 의미에서 형상적 학문이다.


  현상학의 방법 – 판단중지, 현상학적 환원, 기술

  현상학의 연구영역인 전반성적인 세계와 마주하기 위한 첫 단계는 판단중지이다. 후설에 따르면, 각 개별학문들은 자신들이 학문의 대상으로 삼고 있는 세계가 객관적으로 존재한다고 가정한다. 하지만 이 객관적 세계는 선험적 자아의 다양한 정신활동의 산물 가운데 하나일 뿐이며, 보편적 세계는 아니다. 이 세계에 매이는 한, 그 세계를 구성해낸 방법, 즉 정신의 과정을 벗어날 수 없다. 따라서 모든 개별학문들의 토대를 세우기 위해서는 이 존재의 가정을 거부해야 하며, 그럴 때에만 정신이 그 자신의 과정을 객관적으로 바라볼 수 있는 차원으로 이동한다. 그는 이 단계를 고대 그리스 회의주의 철학의 용어를 빌려와 판단중지(epoche)라고 표현하였다.

  두 번째 단계는 선험적-현상학적 환원이다. 판단중지는 판단과 규정에 의해 대상에 부여되었던 모든 의미들을 세계에서 걷어낸다. 이를 통해 세계는 하나의 전체로서 뭉뚱그려져 드러난다. 판단을 중지한다는 것은 존재를 의심하는 것이 아니라 의미들의 보편성을 의심하는 것이기 때문에, 존재 그 자체는 사라지지 않으면서 그 전체를 다양한 방식으로 나누었던 정신의 절차가 걷어진 존재자는 온전히 그 모습을 보전한다. 이 때 모든 인식은 이 하나의 전체와 관계를 맺는다는 것을 자각하고 그 전체를 의미와의 관계 속에서 통찰할 수 있게 된다.

  선험적-현상학적 환원 이후에는 모든 분절적 인식의 가능성이 사라진다. 이 상황에서 인식대상은 모두 인식하는 자아의 인식활동에 따라 구성되는 것으로 자리매김한다. 또한 인식대상의 입장에서는, 현상학적 환원 이후의 인식의 주체인 선험적 자아와 근본적으로 결합되어 있다. 다시 말해 선험적 자아는 자신의 내부에 인식대상을 가지고 있는 상태이며, 인식대상은 선험적 자아 내부에서 그와 구분할 수 없는 내적 구성물이다.

  이 단계에서 수행할 수 있는 것이 자유로운 변환이다. 객관적 대상이 구성에 의해 생성된다는 것이 드러난 이후, 의식은 같은 대상을 다른 방식으로 구성할 수 있게 된다. 그 방식은 온전히 의식의 방향에 달려있기 때문에, 사실상 그 대상은 지금까지 보아왔던 그 대상으로서의 지위를 잃고 다른 대상으로서 무한히 열려있게 된다. 후설에 따르면, 이 자유로운 변환에서 드러나는 것은 다름 아닌 대상의 형상이다. 의식의 구성 방식에 따른 무한한 변환 속에서 변하지 않는 그 무엇이 있다는 것, 그 무엇이 인식과 판단의 기초가 되는 가장 근본적인 존재라는 것을 변환 속에서 깨닫는다.

  그러므로 전통적 의미에서의 이성은 이 차원에서 아무런 기능도 하지 못한다. 이성은 판단하고 규정하는 인간의 능력이므로, 판단 이전의 세계에 대해서는 아무런 발언도 할 수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인간은 이 전체인 세계, 가장 근본적인 차원의 세계를 이성이 아닌 직관에 의해 매개 없이 대면한다. 직관에 의한 대면은 선험적 자아가 지니고 있는 본질적인 능력이다. 직관은 인식의 기초를 이루며, 우리가 의식하지 못할 뿐 모든 판단에 작용하여 대상을 우리의 정신에 드러낸다. 직관의 능력은 정신을 형상과 마주하게 한다.

  이러한 특징들 때문에 현상학적 연구의 표현방법은 기술이 될 수밖에 없다. 기술은 전체인 세계의 모습을 드러나는 그대로 적는 것을 뜻한다. 기술의 방법에 대비되는 것은 설명의 방법이다. 설명은 세계가 왜 그렇게 변화하는가에 대해서 표현한다. 따라서 한 사태와 다른 사태 사이에 어떤 인과관계가 있는지를 표현하는 것이 가장 중요한 사안이다. 이러한 표현은, 설명이 자연과학의 설명방법인 것에서 알 수 있는 것처럼 판단과 규정, 여러 가지 개념들을 사용해야만 하며 이성이 개입하는 방식이다. 반대로 기술의 방법은 어떻게 세계가 드러나는지에 대해서 표현한다. 사건 사이의 인과관계는 중요하지 않으며, 때로는 인과관계나 논리학의 법칙을 무시하는 모순적인 표현도 허용된다. 후설에 따르면 세계는 근본적으로 정신의 능동적인 구성에 의해 이루어진다. 그렇다면 법칙에 의한 설명이라는 정신적인 틀이 오히려 세계의 진정한 구조를 그려내는 데 제한을 가할 수도 있다.


  현상학의 객관성 - 상호주관성

  위와 같은 비분절적 상태로 이끌 수 있는 능력 혹은 이미 그렇게 된 상태를 내재적 초월성이라고 한다. 내재적 초월성은 신이나 어떤 외부의 전능한 존재를 상정하지 않고, 인간의 정신적 능력으로 설명된다는 점에서 '외재적'인 초월성과는 구별된다. 그런데 이 내재적 초월성의 영역에서 인격으로서의 자아는 아무런 의미를 갖지 못한다. 모든 구분이 사라진 세계에서 어떤 구분이 이루어지는 유일한 방법은 선험적 자아가 태도를 바꾸는 것뿐인데, 선험적 자아가 인격으로서 태도를 취하지 않는 한 인격으로서의 조건을 갖출 수 없게 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한 개인의 내재적 초월성의 영역과 선험적 자아의 작동구조는 너와 나의 구분, 즉 자신과 타인의 구분까지 없애버린다.

  하지만 이러한 구분의 철폐는 역설적으로 아주 새로운 주체의 모습을 만들어내는데, 이것이 상호주관성이다. 후설은 이 말로 인식주체와 인식대상, 즉 주체와 대상이 결합한 새로운 영역을 만들어내고 있다. 인간들은 전반성적 구조에 대한 통찰을 통해서만 자신의 인식의 토대에 대해서 확인할 수 있으며 또한 그것만을 확신할 수 있지만, 더 나아가면 그 인식의 토대가 모든 인간들에게 적용되는 인식의 구조이며 선험적 자아의 세계의 수준을 토대로 삼아 소통이 가능한 영역이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후설의 철학에서 객관적 세계는 특정한 정신적 태도의 산물로서만 이해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것을 객관적이라고 말할 수 있는 이유는 바로 상호주관성과 연관되어 있기 때문이다. 선험적 자아는 인격으로서의 한 개인이 통찰할 수 있는 영역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자아와 타자의 구분이 없는 수많은 인격으로서의 개인들이 공유하고 있는 영역이기도 하다. 인간의 모든 경험은 경험 이전의 영역에서 형성되는 상호주관성을 거치지 않고서는 불가능하다. 후설이 말하는 객관성이란 존재 또는 존재자의 객관성이 아니라 인식의 객관성이기 때문에, 현상에 드러나는 과정이 동일하다면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객관성이라는 지위를 차지할 수 있다. 이런 의미에서 경험은 언제나 상호주관적이다.


  현대 사회의 위기

  이러한 상호주관성은 인간의 정신에 대한 가장 근본적인 통찰을 통해서만 획득할 수 있다. 또한 이러한 성찰을 통해 확보한 상호주관성은 인간 사이의 소통에 중요한 단초가 된다. 후설은 현상학의 구상이 자신 이외의 존재에 대해 확신할 수 없는 닫힌 철학이라는 비판에 대한 대응으로 독특한 상호주관적 영역을 개척하였다. 또한 이것을 단순히 인식론적인 의미뿐만이 아니라, 사회 전반에 대한 통찰의 이론적 도구로서 사용하기도 하였다. 그의 진단을 결론부터 이야기하자면, 당시 유럽 사회는 학문적으로나 사회적으로 ‘위기’에 봉착해 있었다.

  건전한 공동체를 성립하기 위한 소통에 필수적인 상호주관성은, 현상학적 방법에 따라 깊은 숙고를 거쳐야만 도달할 수 있는 일종의 경지처럼 느껴지지만, 누구나 직관적으로 모든 삶에 걸쳐서 바라보고 있는 이 세계의 자명한 진실을 가리키는 결론이기도 하다. 그러나 당시 사람들의 사고를 지배하고 있던 자연과학에 대한 신봉은 이와 같은 성찰을 불가능하게 만든다. 자연과학적인 사고방식, 그 방법론은 인간과 인간 사이의 관계, 그리고 인간과 대상 사이의 관계를 단절시킨다. 자연과학적 사고방식은 결국에는 사회가 파괴되는 위기를 정신적인 수준에서부터 발생시킨다.

  자연과학이 위기를 초래하는 이유는, 인간이 자신의 삶을 영위하는 데 가장 기초가 되는 세계를 도외시하게 만들기 때문이다. 그 세계는 선험적 자아가 참여하는 세계, 즉 현상의 세계이다. 하지만 자연과학적 사고방식은 이런 세계가 존재한다는 것을 부정하고, 자신이 보여주는 세계가 바로 세계의 진정한 모습인 것으로 호도한다. 이 세계가 반성 이후의 모습처럼 존재한다고 확신하고, 그것을 숫자로 표시하여 접근하려는 태도를 후설은 자연주의적 태도라고 부르면서 강하게 비판한다. 자연주의적 태도에 의해 진실로 존재하는 세계는 사람들에게서 잊혀지고, 궁극적으로 자연주의적 태도는 인간이 취할 수 있는 단 하나의 태도로서 자리를 잡으며 자신에 대한 비판을 허용하지 않는 지점까지 나아가는 것이다. 엄밀하게 자신을 비판하며 가장 자명한 토대에서 시작해야 하는 학문적 작업이, 단순한 정확함을 확보하는 일로 바뀌어버린 것이다. 그가 강조하는 정신의 위기란, 이성의 기능인 비판을 허용하지 않고 그 능력을 현재의 정신적 경향을 강조하는데만 끊임없이 사용하는 실태를 가리키는 말이다.

  따라서 후설이 보기에 현상학은, 그가 정립한 하나의 철학적 사조 또는 정신의 방법론인 것과 동시에 사회의 해악을 방지하기 위한 일련의 프로그램이기도 하다. 그의 생각에 따르면, 단순히 특정한 정치세력에 반대하거나 억압하는 방식으로는 지속적으로 도래하는 위기를 극복할 수 없다. 그 위기는 가장 심층적인 측면, 즉 정신적 측면에서 유래하는 위기이며, 따라서 그 극복 또한 같은 차원에서 이루어져야 하기 때문이다. 그가 보기에 모든 사회적, 문화적, 정치적 현상들은 철학의 표현이었다. “유럽인의 진정한 정신적 투쟁은 철학 내적인 투쟁의 형식을 띄기 때문이다.” 라는 말은 이러한 맥락에서 이해되어야 한다.

 * 참고문헌

김태길 외, 『현대사회와 철학』, 문학과지성사, 1981
Richard Kearney, 『현대 유럽철학의 흐름』(곽영아, 임찬순, 임헌규 옮김), 한울, 1997
W. Marx, 『현상학』(이길우 옮김), 서광사, 198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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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09-24 09:38   URL
비밀 댓글입니다.

박효진 2011-09-24 16:16   좋아요 0 | URL
선택한 건 아니고 선생님의 강요로 첫 발표를... 맡았습니다. 제가 좋아하는 분야는 아니고요.

음... 현상학을 한 마디로 정의하자면 현상에 대한 학문(...)이겠습니다. 후설의 저서는 『데카르트적 성찰』 하나밖에 읽어보지 못했는데, 그가 독일관념론의 전통에서 여러 개념들을 사용하고 있다는 것만은 분명하더라고요. 초월(선험)적이라는 말의 의미도 그렇고, 현상이라는 말도 그렇고요.

칸트가 그런 말을 한 건 어느 맥락인지 저는 잘 몰라서... 헤겔은 정신현상학이라는 말을 썼는데, 현상학이라는 말보다는 정신이라는 말에 강조점이 있는 것 같습니다. 인간 일반의 정신이 전개되는 과정을 밝혀내겠다는 의미인 것 같아요. 현상은 정신이 자기를 현현해서 나타나는, 일종의 부수적인 것?이겠고요.

반면에 후설에게 현상은 의식(정신?)이 지향하는 것이라, 의식과 현상은 상호의존적인 관계에 있습니다. 그래서 현상에 대한 연구는 곧 의식에 대한 연구이고, 현상학은 의식과 현상이 상호의존하는 관계 또는 상호발생하는 과정에 대한 연구가 됩니다. 그가 의식의 가장 기본적인 형식으로 주장하는 것이 지향성인 것에서 이런 면이 드러납니다.

그래서, 후설의 현상학은 처음과 끝이 있는 이론체계는 아닌 것 같고요, 말씀하신 것처럼 방법론이라고 봐야 하는 것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듭니다. 현상학의 연구를 발표하는 형식이 '기술'이라고 후설은 주장한다고 하는데, 사실 말이 좋아 기술이지 그냥 생각나는대로 막 적으라는 것과 별 다를 게 없는 이야기죠. 소설에서 흔히 말하는 의식의 흐름 기법 같은거요. 그래서 후설의 현상학을 차용하고도 하이데거, 사르트르, 메를로퐁티, 데리다 등등의 전혀 다른 학문적 경향이 나오는 것 같습니다.

그리고 인용은... 음... 저게... 저렇게 읽고 그냥 머리에서 생각나는대로 정리한거라... 상호주관성 부분은 『데카르트적 성찰』을 읽고 쓴 것입니다.

2011-09-24 18:00   URL
비밀 댓글입니다.

박효진 2011-09-25 02:28   좋아요 0 | URL
저도 모르겠어서... 잠정적으로 내린 결론은 방법론이다! 라는 것입니다. 후설만의 독특한 체계가 있다기보다는, 그냥 방법의 토대를 닦은 것이죠.

차이점이라면, 후설은 초점이 인식론적인 부분이고, 인식을 통해서 존재가 생성(자각?)된다고 보는 반면에, 하이데거는 존재론적인 문제에 집중하고 있고, 인식 이전의 존재(자)들과 그 존재(자)들의 양식과 특징에 대해서 설명하려고 한다는 점? 표현방법에 있어서 기술적이라는 점은 두 사람 모두에게 공통적이고요. 이 정도가 예전에 『데카르트적 성찰』과 『존재와 시간』을 들여다보면서 내린 결론입니다. 두 사람의 문제나 어휘가 책을 꼼꼼하게 읽지 못하게 하는 터라(ㅠ.ㅠ) 저도 힘에 부칩니다......

바오 2015-03-28 00:42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읽기 힘든, 그리고 이해하기 힘든 내용을 전후 맥락을 잘 전달해주어서 어리숙한 머리에 그래도 잘 넣을 수 있었습니다. 감사합니다. ^^

박효진 2015-03-28 18:41   좋아요 0 | URL
좋게 보아주셔서 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