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식론연습 보고서>


1. 오류가능주의

  어떤 종류의 믿음이 지식이 될 수 있는가에 관한 입장에는 크게 두 가지가 있다. 하나는 오류불가능주의(infallilbilsm)이다. 이 입장에 따르면, 어떤 믿음이 지식이 되기 위해서는 그 믿음을 거짓으로 만드는 논리적으로 가능한 반대사례가 단 하나도 존재해서는 안된다. 예를 들어, 내 친구 형진이 ‘나 어제 최종면접 합격했다’고 내게 이야기할 경우, 나는 ‘형진은 취직했다’는 믿음을 얻고, 이것을 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이 믿음은 거짓으로 만들 수 있는 반대사례가 있는 믿음이다. 예를 들어, 형진이 내게 거짓말을 했거나, 또는 서류상의 착오 때문에 면접합격통보가 잘못 전해졌을 경우, 이 믿음은 거짓이 된다. 그리고 이런 일은 일어날 수 있다. 그러므로 ‘형진은 취직했다’는 틀릴 수 있고(fallible) 따라서 이 믿음은 (오류불가능주의에 따르면) 지식이 될 수 없다.

  그러나 어떤 믿음이라도 그 믿음을 거짓으로 만들 수 있는 반대사례는 얼마든지 많이 만들어낼 수 있다. 예를 들어, 흔히 가장 엄밀한 지식이라고 불리는 수학적인 믿음만 하더라도, 어떤 경우에는 거짓이 될 수 있다. 데카르트의 널리 알려진 논증에 따르면, 아주 뛰어난 악마가 우리를 언제나 속이고 있는 것은 가능하며, 만약 실제로 이 세상이 그렇다면 우리의 수학적인 믿음은 거짓이 된다. 그러나 이런 기준을 적용할 경우, 우리가 일상적으로 ‘안다’고 생각하는 많은 믿음들이 거짓으로 전락한다. 그래서 오류불가능주의가 내세우는 지식에 관한 기준이 너무 엄격하다는 문제가 제기되었다. 따라서, 틀릴 수 있는 믿음이라고 하더라도 이러저러한 기준만 만족한다면 지식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하는 입장이 생겨났는데, 이를 오류가능주의(fallilbilism)라고 한다.

  이 입장을 간단하게 형식화하면 다음과 같다. (1) 모든 믿음은 틀릴 수 있다.(틀릴 수 없는 믿음은 없다.) 또는 (2) 모든 믿음은 틀릴 수 있게 정당화된다(fallibly justified). 오류가능주의는 모든 믿음들이 실제로 거짓이다 또는 참인지 거짓인지 알 수 없다고 말하지는 않는다는 점에서 회의주의와 구별된다. 틀릴 수 있게 정당화된다는 것은 틀릴 수 없게(conclusive) 정당화되지는 않는다는 것만 함축할 뿐이기 때문이다. 이런 의미에서 오류가능주의적인 정당화를 비결정적인(inconclusive) 정당화라고 한다. 오류가능주의는 우리가 일상적으로 ‘안다’고 말하는 많은 것들을 지식으로 인정하며, 동시에 우리에게 논리적으로 ‘합리적인 의심(rational doubt)’을 할 여지 또한 만든다는 점에서 많은 인식론자들이 받아들이는 입장이 되었다.

  그러므로 이제 오류가능주의에게 남겨진 과제는 과연 비결정적인 정당화가 어떻게 가능하며, 만약 그것이 가능하다면 정당화의 기준은 무엇인가 하는 문제였다. 만약 그 기준을 밝혀낼 수 있다면, 그 기준을 만족하는 믿음은 적절하게 정당화된(adequately justified) 믿음이 될 것이고, 그것은 바로 지식이 될 것이다. 예를 들어, 토마스 리드는 우리가 감각을 통해서 받아들이고 있는 자료들은 그 자체로 정당화가 된다고 주장하였다. 그 자료가 틀릴 수도 있다는 다른 비교가능한 사례가 제시되기 전까지, 우리는 그 믿음이 틀렸을 가능성에 관해 전혀 의심하지 않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 자료가 틀릴 수 있다는 다른 자료가 생겨날 경우 둘을 비교함으로써 어느 쪽이 옳은가 비교할 수 있기 때문에, 예전의 그 자료는 적절하게 정당화된 것이지 완전하게 정당화된 것은 아니다. 이외에도 철학의 전통에서 이러한 정당화의 방법은 연역과 귀납 등등으로 다양하게 제시되었는데, 이런 정당화 과정에서 착오를 일으키지만 않는다면 믿음은 대부분 지식이 될 수 있다는 것이 오류가능주의자들의 생각이었다.


2. 게티어 사례

  게티어는 자신의 논문 「정당화된 참된 믿음은 지식인가?」에서, 자신이 두 가지 점을 주목한다고 밝힌다. 여기에서 ‘정당화된 참된 믿음’이란 전통적인 의미에서 지식의 필요충분조건이라고 생각됐던 것, 즉 (1) 어떤 명제 p는 참이다. (2) 어떤 인식주체 S는 p를 믿는다. (3) S는 p를 믿는 것에 정당화되었다. 를 가리킨다. 게티어는 이 조건들을 모두 만족시키면서도 ‘첫째, 한 사람이 실제로는 거짓인 명제를 믿는 것이 정당화되는 것은 가능하다는 것(it is possible for a person to be justified in believing a proposition that is in fact false), 둘째, 모든 명제 p에 대해서, 만약 S가 p를 믿는 것이 정당화되고 p가 q를 수반하며 S가 p에서 q를 연역했고 그래서 이 연역의 결과로서 q를 승인한 경우, S는 q를 믿는 것이 정당화된다는 것(for any proposition p, if S is justified in believing p, and p entails q, and S deduces q from p and accepts q as a result of this deduction, then S is justified in believing q)’에 주목하고 있다.

  다음과 같은 상황을 가정해보자. 계영과 은지는 같은 회사에서 최종면접을 치르고 왔다. 그리고 계영은 안타깝게도 면접관에게 문자를 통해 은지가 합격했다는 통보를 받았고, 또한 면접장에서 은지가 그의 핸드백에서 미스트를 꺼내 얼굴에 뿌리고 다시 집어넣는 것을 보았다. 그렇다면 계영은 ‘(2-1) 은지는 취직을 할 것이다. 또한(and) 은지는 그의 핸드백 안에 미스트를 가지고 있다’고 믿는 것은 충분히 정당화된다. 계영은 (2-1)에서 ‘(2-2) 취직을 할 그 사람은 핸드백 안에 미스트를 가지고 있다’를 연역적으로 추론해낼 수 있으며, 이를 믿는 것 또한 충분히 정당화된다. 그런데 사실 합격한 것은 은지가 아니라 계영이었고, 합격통보문자는 계영을 놀래키기 위한 사장의 짓궂은 장난에 따른 지시사항이었다. 또한 계영은 몰랐지만, 면접시간에 늦을까봐 급히 들고 온 계영의 핸드백 안에는 미스트가 들어있었다. 이 경우에 계영이 (2-2)를 안다고 할 수 있을까?

  또 다른 상황을 가정해보자. 은지는 계영과 20년지기 친구이다. 은지는 계영이 20년 동안 기아자동차를 구입하고 애용하는 것을 보아왔고, 또한 방금 전 계영이 K9를 타고 가다가 잠깐 멈추어 ‘같이 타고 가자’고 제안했기 때문에 ‘(2-3) 계영은 기아자동차를 가지고 있다.’고 믿었다. 이는 은지가 20년 동안 보아온 것, 그리고 방금 계영이 K9을 타고 가는 것을 본 것에 의해서 충분히 정당화된다. 그리고 은지에겐 나윤이라는 친구가 있다. 그런데 6개월 전에 받은 마지막 엽서 이후로 소식이 끊겨서, 어디에 있는지 알 수 없다. 그래서 대강 보스턴 쯤에 있겠지 하고 생각하며, ‘(2-4) 계영은 기아자동차를 가지고 있다. 또는 나윤은 보스턴에 있다’고 마음대로 믿어버렸다. (2-3)을 전제로 (2-4)를 이끌어내는 것은 타당한 연역적 추론인데, 이 논증은 전제가 모두 참이면서 결론이 거짓일 수 없는 논증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2-4)을 믿는 것 또한 충분히 정당화된다. 그러나 사실 계영은 얼마 전 자기 소유였던 K7을 팔았고, K9은 새로 나온 기아의 차를 타보려고 계영이 빌린 것이었다. 또한 정말 우연히도, 나윤은 그 때 보스턴에 있었다. 이 경우, 은지는 (2-4)를 안다고 할 수 있을까?


3. 결론

  오류가능주의의 입장은 게티어가 주목하는 두 가지 요점 가운데 첫 번째 주장이다. 게티어 사례를 통해, 우리는 오류가능주의자의 입장에 설 경우 정당화된 참인 믿음이지만 지식이라고 볼 수 없는 무한한 사례가 가능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오류불가능주의자들에게는 거짓일 수 없게 정당화된 믿음만이 지식이기 때문에 게티어 사례와 같은 문제가 발생하지 않는다. 반면 오류가능주의자들에게는 거짓인 믿음들도 정당화될 수 있다. 하지만 이것은 지식이 아니다. 그러나 그 정당화된 거짓인 믿음들로부터 참인 믿음을 이끌어낸다면, 그것은 정당화된 것인가? 만약 이것을 정당화되었다고 한다면, 우리는 그 참인 믿음을 지식이라고 받아들여야 하는가? 이것이 게티어 사례가 보여주는 문제이다.

  위의 두 사례에서, 계영과 은지는 어떤 믿음을 지식이 되도록 정당화하기 위해서 우리가 적절하다고 간주하는 여러 방법을 사용하고 있다. 그러나 그런 방법이 우리의 믿음을 지식으로 만들어주는 데는 실패했다. 거짓인 명제 (2-1)은 참인 명제 (2-2)를 함축한다. 그러므로 (2-1)을 정당화하는 조건을 통해서 (2-2)를 정당화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2-4)도 마찬가지다. 은지는 (2-3)에 정당화되어 (2-4)를 정당화하고 참이라고 믿고 있지만, 실제로 (2-3)은 거짓이며 그 외의 명제(‘나윤은 보스턴에 있다’)가 참이기 때문에 (2-4)는 참이다.

  또한 게티어 사례가 지식에 대한 정의에 포함된 ‘정당화’라고 불리는 것의 성격이 무엇인지를 보여준다는 점에도 주목해야 한다. 이 정당화는 인식주체가 어떤 믿음들이 여러 방법에 의해 서로 이유와 결론의 관계로 묶여있다는 것을 확신하는 상태를 뜻한다. 그러므로 거짓인 믿음들에서 참인 믿음을 연역한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각 믿음들의 진리값과 상관없이 그 참인 믿음이 ‘정당화되었다’고 할 수 있다. 반대로 참인 믿음들에서 거짓인 믿음을 연역한다고 하더라도 거짓인 믿음이 ‘정당화되었다’고 말할 수 있다. 만약 정당화를 다른 것으로 설명한다면, 게티어의 문제를 피해갈 수 있을 것이다. 예를 들어 외부의 사실들로부터 직접적으로 반영되어야만 정당화된다고 말한다면, 게티어의 사례에서 이후에 연역된 참인 명제들은 직접 반영된 것이 아니므로 정당화되었다고 말할 수 없으며 따라서 지식이 되지 않을 것이다.

  만약 게티어 사례가 오류가능주의자들에 대한 적절한 반박이라면, 오류가능주의자들은 두 가지 어려움에 빠지게 되며, 여기에 각각 대처해야 하는 상황이 발생한다. 첫째, 아무리 정교하고 엄밀한 방법을 개발하고 또한 우리가 그것을 사용하는 과정에서 결코 실수를 하지 않더라도, 우리는 어떤 믿음을 안다고 말할 수 없다. 오류가능주의자들은 믿음이 지식이 되기 위해서는 정당화의 기준을 마련하면 된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게티어 사례는 믿음이 지식이 되기 위해서는 정당화 이외의 다른 기준이 필요하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 그렇다면 지식의 기준에는 정당화된 참된 믿음 이외의 조건이 더 추가되어야 한다.

  이는 더 나아가서, 어떤 믿음이 지식이 되는지 그렇지 않은지의 문제는 정당화와 무관하다는 점을 함축한다고 볼 수도 있다. 아무리 오류가능주의자들이 정당화를 정교하게 기획한다고 하더라도 그것이 인식주체가 무엇인가를 확신하는 상태를 뜻한다면, 그것은 그 믿음의 진리값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는 정당화가 될 것이다. 그렇게 정교하게 정당화된 믿음이라고 하더라도 틀릴 수 있기 때문이다.

  이는 지식에 관한 오류가능주의적인 개념이 과연 가능한지에 관해 더욱 근본적인 의문을 제기한다. 즉, 오류가능주의자들의 생각처럼 정교한 정당화과정을 통과한 거짓일 수 있는 믿음이 우리의 지식을 구성할 수도 있다면, 우리의 지식 가운데 중요한 몇몇들 또는 전체가 거짓일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이런 지식들을 우리는 과연 어디까지 신뢰할 수 있을까? 만약 정당화와 상관없이 언제나 참인 어떤 믿음들이 우리에게 주어지기만 한다면, 정당화의 방법을 설계하고 그것이 얼마나 정교한지를 역설하는 것보다 그 언제나 참인 믿음들에 우리의 정당화를 의탁하는 것이 (만약 그것이 가능하다면) 지식을 얻는 데 더욱 믿을만한 수단이지 않을까? 절대적이고 확실한 지식을 찾으려는 많은 시도들은 대부분 이러한 생각을 배경으로 펼쳐진다. 믿음의 진리값과 무관한 정당화는, 그 믿음의 참을 보증하는 것이 아니라 단지 우리에게 참인 것처럼 보인다는 것만을 지지하기 때문에 우리의 믿음의 토대로서 인정받기에는 부족해보인다.


- 참고문헌
 

김기현, 『현대인식론』, 민음사, 1998
K.레러, 『현대 지식론』(한상기 옮김), 서광사, 1996

Gettier, E. “Is Justified True Belief Knowledge?” from Analysis, Vol.23 (1963)
Hetherington, S. “Fallibilism” in Internet Encyclopedia of Philosophy, (eds) J. Fieser and B. Dowden (20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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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식론연습 발제>

1. 오류가능주의


  어떤 종류의 믿음이 지식이 될 수 있는가에 관한 입장에는 크게 두 가지가 있다. 하나는 오류불가능주의(infallilbilsm)이다. 이 입장에 따르면, 어떤 믿음이 지식이 되기 위해서는 그 믿음을 거짓으로 만드는 가능한 반대사례가 단 하나도 존재해서는 안된다. 예를 들어, 내 친구 형진이 ‘나 어제 최종면접 합격했다’고 내게 이야기할 경우, 나는 ‘형진은 취직했다’는 믿음을 얻고, 이것을 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이 믿음은 거짓으로 만들 수 있는 반대사례가 있는 믿음이다. 예를 들어, 형진이 내게 거짓말을 했거나, 또는 서류상의 착오 때문에 면접합격통보가 잘못 전해졌을 경우, 이 믿음은 거짓이 된다. 그리고 이런 일은 일어날 수 있다. 그러므로 ‘형진은 취직했다’는 틀릴 수 있고(fallible) 따라서 이 믿음은 (오류불가능주의에 따르면) 지식이 될 수 없다.

  그러나 어떤 믿음이라도 그 믿음을 거짓으로 만들 수 있는 반대사례는 얼마든지 많이 만들어낼 수 있다. 흔히 가장 엄밀한 지식이라고 불리는 수학적인 믿음만 하더라도 그 믿음은 거짓이 되기 때문이다. 데카르트의 널리 알려진 논증에 따르면, 아주 뛰어난 악마가 우리를 언제나 속이고 있는 것은 가능하며, 만약 실제로 이 세상이 그렇다면 우리의 수학적인 믿음은 거짓이 된다. 그러나 이런 기준을 적용할 경우, 우리가 일상적으로 ‘안다’고 생각하는 많은 믿음들이 거짓으로 전락한다. 그래서 오류불가능주의가 내세우는 지식에 관한 기준이 너무 엄격하다는 문제가 제기되었다. 따라서, 틀릴 수 있는 믿음이라고 하더라도 이러저러한 기준만 만족한다면 지식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하는 입장도 제기되었다. 이를 오류가능주의(fallilbilism)라고 한다.

  이 입장을 간단하게 형식화하면 다음과 같다. (1) 모든 믿음은 틀릴 수 있다.(틀릴 수 없는 믿음은 없다.) 또는 (2) 모든 믿음은 틀릴 수 있게 정당화된다(fallibly justified). 오류가능주의는 모든 믿음들이 실제로 거짓이다 또는 참인지 거짓인지 알 수 없다고 말하지는 않는다는 점에서 회의주의와 구별된다. 틀릴 수 있게 정당화된다는 것은 틀릴 수 없게(conclusive) 정당화되지는 않는다는 것만 함축할 뿐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오류가능주의의 정당화를 비결정적인(inconclusive) 정당화라고 한다. 오류가능주의는 우리가 일상적으로 ‘안다’고 말하는 많은 것들을 지식으로 인정하며, 동시에 우리에게 논리적으로 ‘합리적인 의심(rational doubt)’을 할 여지 또한 만든다는 점에서 많은 인식론자들이 받아들이는 입장이 되었다.

  그러므로 이제 오류가능주의에게 남겨진 과제는 과연 비결정적인 정당화가 어떻게 가능하며, 만약 그것이 가능하다면 정당화의 기준은 무엇인가 하는 문제였다. 만약 그 기준을 밝혀낼 수 있다면, 그 기준을 만족하는 믿음은 적절하게 정당화된(adequately justified) 믿음이 될 것이고, 그것은 바로 지식이 될 것이다. 철학의 전통에서 이러한 정당화의 방법은 연역과 귀납으로 제시되는데, 이런 정당화 과정에서 착오를 일으키지만 않는다면 믿음은 대부분 지식이 될 수 있다는 것이 오류가능주의자들의 생각이었다.


2. 게티어 사례

  게티어는 자신의 논문 「정당화된 참된 믿음은 지식인가?」에서, 자신이 두 가지 점을 주목한다고 밝힌다. 여기에서 ‘정당화된 참된 믿음’이란 전통적인 의미에서 지식의 필요충분조건이라고 생각됐던 것인데, 즉 (1) 어떤 명제 p는 참이다. (2) 어떤 인식주체 S는 p를 믿는다. (3) S는 p를 믿는 것에 정당화되었다. 를 가리킨다. 게티어는 이 조건들을 모두 만족시키면서도 ‘첫째, 한 사람이 실제로는 거짓인 명제를 믿는 것이 정당화되는 것은 가능하다는 것(it is possible for a person to be justified in believing a proposition that is in fact false), 둘째, 모든 명제 p에 대해서, 만약 S가 p를 믿는 것이 정당화되고 p가 q를 수반하며 S가 p에서 q를 연역했고 그래서 이 연역의 결과로서 q를 승인한 경우, S는 q를 믿는 것이 정당화된다는 것(for any proposition p, if S is justified in believing p, and p entails q, and S deduces q from p and accepts q as a result of this deduction, then S is justified in believing q)’에 주목하고 있다.

  다음과 같은 상황을 가정해보자. 계영과 은지는 같은 회사에서 최종면접을 치르고 왔다. 그리고 계영은 안타깝게도 문자를 통해 은지가 합격했다는 통보를 받았고, 또한 면접장에서 은지가 그의 핸드백에서 미스트를 꺼내 얼굴에 뿌리고 다시 집어넣는 것을 보았다. 그렇다면 계영은 ‘(2-1) 은지는 취직을 할 것이다. 또한(and) 은지는 그의 핸드백 안에 미스트를 가지고 있다’고 믿는 것은 충분히 정당화된다. 계영은 (2-1)에서 ‘(2-2) 취직을 할 그 사람은 핸드백 안에 미스트를 가지고 있다’를 연역적으로 추론해낼 수 있으며, 이를 믿는 것 또한 충분히 정당화된다. 그런데 사실 합격한 것은 은지가 아니라 계영이었고, 합격통보문자는 자동전송 프로그램의 실수로 인해 전달이 잘못된 것이었다. 또한 계영은 몰랐지만, 면접시간에 늦을까봐 급히 들고 온 계영의 핸드백 안에는 미스트가 들어있었다. 이 경우에 계영이 (2-2)를 안다고 할 수 있을까?

  또 다른 상황을 가정해보자. 은지는 계영과 20년지기 친구이다. 은지는 계영이 20년 동안 기아자동차를 구입하고 애용하는 것을 보아왔고, 또한 방금 전 계영이 K9를 타고 가다가 잠깐 멈추어 ‘같이 타고 가자’고 제안했기 때문에 ‘(2-3) 계영은 기아자동차를 가지고 있다.’고 믿었다. 이는 은지가 20년 동안 보아온 것, 그리고 방금 계영이 K9을 타고 가는 것을 본 것에 의해서 충분히 정당화된다. 그리고 은지에겐 나윤이라는 친구가 있다. 그런데 6개월 전에 받은 마지막 엽서 이후로 소식이 끊겨서, 어디에 있는지 알 수 없다. 그래서 대강 보스턴 쯤에 있겠지 하고 생각하며, ‘(2-4) 계영은 기아자동차를 가지고 있다. 또는 나윤은 보스턴에 있다’고 마음대로 믿어버렸다. (2-3)을 전제로 (2-4)를 이끌어내는 것은 타당한 연역적 추론인데, 이 논증은 전제가 모두 참이면서 결론이 거짓일 수 없는 논증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2-4)을 믿는 것 또한 충분히 정당화된다. 그러나 사실 계영은 얼마 전 자기 소유였던 K7을 팔았고, K9은 새로 나온 기아의 차를 타보려고 계영이 빌린 것이었다. 또한 정말 우연히도, 나윤은 그 때 보스턴에 있었다. 이 경우, 은지는 (2-4)를 안다고 할 수 있을까?


3. 결론

  게티어 사례가 오류가능주의자들의 입장에 문제를 일으키는 이유는, 충분히 정당화되었다고 해서 어떤 믿음을 안다고 말할 수 없다는 점을 지적하고 있기 때문이다. 위의 두 사례에서, 계영과 은지는 어떤 믿음을 지식이 되도록 정당화하기 위해서 우리가 적절하다고 간주하는 여러 방법을 사용하고 있다. 그러나 그런 방법이 우리의 믿음을 지식으로 만들어주는 데는 실패했다. (2-2)의 경우, 명제가 실제로 지칭하고 있는 대상은 계영이지만 계영은 은지에 관한 믿음 (2-1)을 통해서 (2-2)를 연역했으므로 (2-2)를 은지에 관한 명제로 믿고 있을 것이다. (2-4)도 마찬가지다. 은지는 (2-3)에 정당화되어 (2-4)를 정당화하고 참이라고 믿고 있지만, 실제로 (2-3)은 거짓이며 그 외의 명제(‘나윤은 보스턴에 있다’)가 참이기 때문에 (2-4)는 참이다. 

  만약 게티어 사례가 오류가능주의자들에 대한 적절한 반박이라면, 오류가능주의자들이 아무리 정교하고 엄밀한 방법을 개발하고 또한 우리가 그것을 사용하는 과정에서 결코 실수를 하지 않더라도, 우리는 어떤 믿음을 안다고 말할 수 없다. 오류가능주의자들은 믿음이 지식이 되기 위해서는 정당화의 기준을 마련하면 된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게티어 사례는 , 따라서 믿음이 지식이 되기 위해서는 다른 기준이 필요하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 이는 더 나아가서, 어떤 믿음이 지식이 되는지 그렇지 않은지의 문제는 정당화와 무관하다는 점을 함축한다고 볼 수도 있다.

- 참고문헌

김기현, 『현대인식론』, 민음사,

Gettier, E. “Is Justified True Belief Knowledge?” from Analysis, Vol.23 (1963)
Hetherington, S. “Fallibilism” in Internet Encyclopedia of Philosophy, (eds) J. Fieser and B. Dowden (20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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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용주의연구 발제. 리처드 로티, 『철학 그리고 자연의 거울』2장 요약의 요약>

  이 장에서 로티는 마음이 없는 사람들이라는 사고실험을 통해 우리가 우리의 내면, 즉 정신에 대해 생각한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고, 그것이 정말로 존재하는 것에 관한 언급인지를 살펴보려 한다. 대척행성인은 우리와 모든 행동이 똑같지만, 마음이 없는 사람들이다. 그러므로 그들에게는 마음에 관해 표현하는 언어도 없다. 우리가 흔히 마음의 상태(정신적 상태)라고 칭하는 것들을 그 사람들은 곧장 특정한 신경적 상태로 표현한다. 지구인이(우리가) 이들을 만난다면, 우리는 이들에게 마음이 있는가 없는가에 관해서 토론하게 될 것이며, 여러 입장이 상충할 것이라고 로티는 주장한다.

  그러나 마음이 있는지 없는지에 관한 여러 실험들이 이들에게는 무의미한 것이 되고 만다. 데카르트 이래로 마음 또는 정신적인 것의 특징으로 간주되는 것은 확고부동함(틀릴 수 없음, incorrigibility)이다. 마음에 떠오르는 것은 너무나도 명확하게 알려진다는 것이다. 그래서 불확실하게 알려지는 마음 바깥에 있는 것과는 다르다. 그러나 대척행성인들에게는 신경세포의 반응이 너무나도 명확하게 알려진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그러나 이 반응은 물리적인 과정에 대한 설명이지 정신적인 것에 관한 규명은 아니다. 따라서 우리 지구인은 대척행성인들에게도 마음이 있지만 그들은 그것에 관해서 알지 못한다고 간주하거나, 또는 우리 지구인과 대척행성인 모두에게 마음이 없다고 하고, 우리가 정신적인 것에 관해 표현하는 것들이 무의미한 표현이라고 생각해야 한다.

  그러나 어느 쪽으로 결론을 맺든 우리 지구인이 전통적으로 생각해온 마음 개념과는 다른 해석이 나올 수 밖에 없다는 것이 문제로 부각된다. 대척행성인에게도 마음이 있다고 가정할 경우, 그들에게 적용되는 마음의 개념은 우리 지구인에게 적용되는 마음의 개념과 다를 수 밖에 없다. 마음의 개념에 핵심적인 것은 확고부동함인데, 그들에게는 신경적 상태가 확고부동하게 알려지기 때문이다. 우리 지구인과 대척행성인 모두에게 마음이 없다고 생각한다면, 우리는 마음과 정신적 상태에 관해 사용하고 있던 수많은 표현들을 폐기해야 하는 상황에 다다르게 된다. 이 둘을 중재하기 위해 철학사 속에서 여러 시도들이 있긴 했지만, 로티는 그들이 중립적이라는 것 이외에는 아무런 특징도 없는 시도들이라고 평가한다.

  마음이 있다고 생각하는 것, 없다고 생각하는 것, 둘을 중재하기 위한 다양한 시도들, 이 모든 노력들은, 가장 명백한 것이 가장 실재적이라는 플라톤의 원리 그리고 그 명백한 실재들을 인간이 고스란히 반영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거울의 이미지에서 파생되었다고 로티는 주장한다. 여기에서부터 현대에 등장한 다양한 마음과 몸 문제에 관한 입장들을 검토해야 할 필요성이 생겨난다. 로티에게 분석의 대상이 되는 주요한 입장들은 행동주의, 회의주의, 유물론의 세 가지다.

  행동주의와 거울의 이미지는, 인간의 행동이 마음의 상태를 정확하게 반영하고 있다는 가정 때문에 관련이 있다. 그러나 행동과 마음 사이에는 수많은 대응관계가 있다는 것이 너무 명백하기 때문에, 행동주의자들은 행동과 마음 사이를 매개하는 필연적인 요소가 있다는 것을 지적해왔다. 예를 들어 그것은 우리의 언어일 수 있다. 그러나 우리가 지금 사용하는 언어는 마음에 관한 표현을 포함하고 있으므로, 마음을 거부하는 데 쓰일 수 있는 도구가 아니다. 게다가, 이런 필연성이 보장된다고 해도 행동주의는 마음을 파악하는 데 올바른 입장일 수는 없다고 로티는 주장한다. 마음과 행동 사이에 필연적인 연결이 있다고 해서, 마음이 없다고 주장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회의주의자들은 나와 정신 사이의 관계, 즉 확고부동함이 성립하는 관계가 다른 사람과 다른 사람의 정신 사이에도 성립하는지 알 수 없기 때문에 정신의 존재에 관해서 확신할 수 없다고 주장하는 부류이다. 그러나 확고부동함을 구성하는 두 가지 속성, 즉 사적인 것과 직접적인 것이 필연적으로 연결되어있다고 주장할 때에만 이런 주장이 가능하다. 비트겐슈타인은 사적 언어의 불가능성에 관한 논증을 통해 이런 확고부동함이 존재할 수 없다고 주장했다. 회의주의자들은 이런 확고부동함 때문에 정신적인 것은 있다고 주장했다. 로티는 이 두 주장을 검토하면서, 사밀함을 거부한 비트겐슈타인을 높게 평가하면서도 각각 다른 직접적 상태를 언어로 환원하여 그 사람의 상태에 대해 직접 판단할 수 있다는 비트겐슈타인의 주장에 관해서는 비판적이다.

  심신동일론에도 여러 부류가 있다. 그 가운데 몸의 상태와 마음의 상태를 구분하는 것이 의미가 없다는 ‘주제중립적’ 분석에 의거한 논증이 있는데, 이는 몸과 마음 가운데 어떤 것을 우리가 선택해야하는지에 관해서는 알려주지 못한다는 한계가 있다. 그러므로 이 논증에 의거해 유물론을 주장하는 사람들은 유물론이라는 형이상학적 가정을 이미 전제하고 있는 셈이다. 로티가 궁극적으로 지지하는 입장은 제거적 유물론인데, 이는 정신적인 상태가 있다는 생각 자체를 하지 않는 입장이다. 로티는 이것이 우리 지구인의 철학과 사상의 역사적 맥락에서 나온 특수한 문제 또는 특수한 은유법이라고 주장하고, 존재론적인 지위라는 모호한 말에 큰 관심을 가지는 과정 속에서만 나올 수 있는 문제라고 평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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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용주의연구 발제. 리처드 로티, 『철학 그리고 자연의 거울』발제>


  1. 대척행성인들(Antipodeans)

 

  로티는 ‘마음이 없는 사람’들을 가정하고, 자신들에게 ‘마음이 있다’고 간주하는 인간과 비교함으로써 지금까지의 심리철학적 입장들이 어떻게 가능한지 논하려고 한다. 그는 이 ‘마음이 없는 사람’들을 대척행성인(Antipodean)이라고 칭하고 있다. 로티에 따르면 Antipodea는 “데카르트의 이원론에 대항하는 학파 가운데 하나로서, 오스트리아와 뉴질랜드를 중심으로 형성되었지만 이제는 거의 잊혀진 철학 학파”의 이름이다. 대척행성인은 인간과 행동이 완전히 같은데, 단 한가지 차이가 있다 - 마음이 없다. 또한 우리가 흔히 마음의 상태라고 부르는 것들을 심리-물리적 상태로 설명한다는 특징이 있다. 대상을 향한 지향은 그 대상과 대응하는 여러 신경세포들의 흥분상태로 설명된다. 그래서 ““두려움을 느낀다”, 그리고 “놀라움을 느낀다” 등과 같은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그들(대척행성인들)은 이러한 것들이 “앉는다”, “감기에 걸렸다”, 그리고 “성적으로 흥분되었다” 등과는 전혀 다른 정신적인(mental) 상태 – 특별하고 분명한 종류의 상태 – 를 의미한다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따라서 아픔과 같은 정신적인 상태들은 “신경섬유 C가 자극될거야” 식의 명제로 표현된다. 또한 이들에게도 철학은 있지만, 그 내용에 마음과 관련된 단어들 – 이를테면 관념(idea), 혹은 지각(perception), 정신적인 표상(mental representation) - 이 전혀 없으며, 로크가 제기한 “관념의 베일”(주: 관념의 베일이란 경험주의적 인식론에서 발생할 수 있는 대표적인 문제이다. 경험론에 따르면, 인간은 외부의 주어진 것을 대면하면 그에 대응하는 관념을 마음에 떠올린다. 주어진 것은 물질적이고 반면에 관념은 정신적이다. 둘은 같지 않다. 그렇다면 인간이 아는 것(인식하는 것)은 관념인가 아니면 주어진 것인가? 만약에 주어진 것이라고 이야기한다면, 관념은 어떻게 주어진 것을 정확하게 반영하는지에 관한 설명이 필요하다. 하지만 이것은 설명하기 힘들다. 주어진 것과 관념은 존재론적인 차이가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인간은 관념을 인식한다고 말할 수밖에 없다. 그러나 인간의 인식의 대상이 관념이라면, 정확한 인식은 어떻게 가능한가? 나아가서, 관념에 대응한다고 하는 주어진 것이 있는지 인간은 확신할 수 있는가? 이것이 관념의 베일이 의미하는 바이다.) 문제 또한 발생하지 않는다. 또한 신화적 단계에서 실증주의적 단계로 바로 넘어간다.(주: 이는 프랑스의 실증주의 사회철학자 콩트의 사회발전 단계를 인용한 것이다. 그는 사회가 3단계로 발전한다고 주장했다. 신화적 단계에서 사람들은 세계가 신들의 힘에 의해 움직인다고 설명한다. 그 다음 형이상학적인 단계에서는 경험적 근거가 없는 논리적 장치들(예를 들어 헤겔의 ‘정신’ 개념)이 세계를 이해하는 핵심적인 매개라고 설명한다. 마지막으로 실증주의적 단계에서는 이 세계의 변화를 실증적 학문(즉 경험과학)을 통해 포착하고 그 결과들로 세계를 설명한다.)

 

  지구의 철학자들은 이들에게 마음이 있는지 없는지에 관해 토론하기 시작한다. 대척행성인들 또한 이 철학자들이 무슨 논의를 하는지 알고싶어서 그들을 이해하고자 귀를 기울여보았다. 대척행성인들의 마음과 관련한 지구의 철학자들의 의견은 둘로 나누어졌는데, 로티는 이들을 각각 온건한(tender-minded) 사람들과 강경한(tough-minded) 사람이라고 부른다. 온건한 사람들은 그들이 아직 마음의 경지로 들어가지 못한 즉자적인 상태에 있다고 간주하거나(마음의 영역으로 들어가라고 소리치는 내부성이라는 마을의 사무소 직원), 또는 철학사적으로 헤라클레이토스가 이미 성취했으나 플라톤에 의해 잊혀진 생각, 다시 말해 마음은 이미 물질과 결합되어있고 이들을 분리한다는 것은 불가능한 생각이라는 것(플라톤이 우시아(=존재)를 이데아(=관념)에 동화시킴으로써 지구 서양인들의 의식에서 사라져버렸던 폴레모스(=변화, 물질)(주: 그리스 신화에서 전쟁의 신을 뜻하는 말로, 헤라클레이토스가 만물의 근본적인 법칙을 여기에 비유한다.)와 로고스(=불변, 정신, 이성)의 결합을 대척행성인들이 파악했음을 보여준다)을 대척행성인들이 이미 깨달은 것이라고 주장했다.

 

  강경한 사람들은 그들에게 심적인 상태, 예를 들어 ‘아픔’이 과연 있을까를 물었다. 대척행성인들이 이야기하는 ‘아픔’은 언제나 심리-물리적 사실 – C-신경섬유의 자극 - 의 기술일 뿐이다. 이는 심적인 상태가 아니다. 하지만 인간은 심리-물리적 사실이 발생하면 ‘아픔’을 느낀다고 말하게 마련이다. 하지만 ‘아픔’의 상태에 있다고 말할 때 인간이 보이는 행동과 아픔상태가 발생했을 때 대척행성인이 보이는 행동은 완전히 같다. 그래서 다음과 같은 질문이 제기된다. “그들의 경험은 우리의 경험과 같은 현상적인 속성을 포함하고 있는가? 혹은 C-신경섬유의 자극은 고통스럽게만 느껴지는가? 혹은 그 자극은 똑같이 무시무시한 것이기는 하지만 어떤 다른 방식으로 느껴지는 것은 아닌가? 아니면 그 자극에는 아무런 느낌이 없는가?”

 

  또한 원느낌의 문제도 제기된다. 특정한 자극을 주면(“남색을 보여주면”) 그에 반응하는 특정한 신경적 상태(“C-692”)가 있다는 것은 분명하다. 그리고 이것은 인간과 대척행성인 모두에게 동일하다. 인간에게 남색을 보여주면, 그는 남색을 마음에 떠올리고 있다고 분명히 답할 것이다. 마음이 있는 인간에게 원느낌은 남색 하나이다. 그렇다면 대척행성인은 어떤가? 만약 그에게 마음이 있다고 한다면, 남색을 보여주었을 때 그는 남색을 표상하는가 아니면 C-692를 표상하는가? 둘 다인가 또는 어느 쪽도 아닌가? 하지만 로티에 따르면, 이런 실험들로는 그들이 마음이 있는지 없는지에 관해 의미있는 답변을 얻을 수 없었다고 말한다. 원느낌이 남색이라면, 그들이 어떻게 남색을 보고 자신이 C-692의 상태에 있다고 말할 수 있는지의 과정(무의식적 추론?)이 명확하지 않다. 만약 C-692의 상태가 원느낌이라면, 그들은 남색을 보지 않고도 C-692의 상태에 있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환각 같은 것들이 여기에 속할 것이다. 그럼에도 그들 스스로가 C-692의 상태에 있다(남색을 보고 있다)고 여긴다는 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는데, 이를 통해 그 상태에 있다는 것이 현상적 속성을 띈다는 것을 알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것은 인간이 정의하는 ‘현상적’이라는 말과는 같지 않은데, 인간에게 ‘현상적’이라는 말은 표상, 관념 등의 속성을 가리키는 말이지 신경적 상태의 속성을 가리키는 말은 아니기 때문이다.

 

  
  2. 현상적인 속성

 

  이 부분은 마음과 몸의 이원론을 옹호하는 크립키(주: 솔 크립키(1940~). 언어철학, 논리학에 큰 영향을 끼친 미국의 현대 철학자. 프린스턴대학 명예교수. 가능세계에 관한 양상논리학을 창시하고, 필연성 개념이 형이상학적이며 인식론과는 분리되어야 한다는 입장을 펴 논리학과 철학 전반에 큰 영향을 끼쳤다.(위키피디아 요약))의 글로 시작된다. 그는 감각적인 인식의 경우, 감각을 일으키는 자극과, 그 자극을 수용할 수 있는 감각이라는 두 측면으로 나누어진다고 말한다. 그러므로 자극이 없어도 감각이 작동한다면(예를 들어 꿈을 꾸거나 물에 빠져 죽을 뻔 했을 때를 회상하는 등) 감각하는 주체는 그 자극이 있다고 여기게 되고, 반대로 자극이 있더라도 감각이 작동하지 않는다면(예를 들어 얼어붙은 손을 바늘로 찌른다면) 감각하는 주체는 그 자극을 없는 것으로 여긴다. 즉, 어떤 인식적인 조건을 충족시켰을 때에, 우리는 무언가를 느끼고 그것을 인식의 증거로 삼는다. 그런데 정신적인 현상(예를 들어 아픔)의 경우, 이런 인식적인 조건이 오로지 마음 안에서만 일어나기 때문에 그 이외의 다른 조건을 충족시킬 필요가 없다. 다시 말해, 아픔이 일어나기 위한 조건이 갖추어질 경우 바로 그는 아픔을 느끼며, 아픔을 느끼지 않는다는 것은 아픔이 일어나기 위한 조건이 갖추어지지 않은 경우라는 것이다. 다시 말해, 아픔은 외부의 환경에 대해서 독립적인 심적 상태이다.

 

  만약 이 논의를 따른다면, 대척행성인들은 아픔을 느낀다고 말할 수 있는가? 우리는 C-신경섬유가 자극받을 때 아프다고 말한다. 그들은 C-신경섬유가 자극받을 때 C-신경섬유가 자극받았다고 말한다. 그렇다면 우리와 대척행성인들이 C-신경섬유를 자극받을 때, 똑같은 것을 느끼는가? 같다면 왜 같은지, 또 다르다면 왜 다른지에 관한 해명이 필요하다.

 

  만약 이 둘이 같다고 하려면, 같다는 말이 어떤 의미인지에 관한 정확한 정의가 필요하다고 로티는 주장한다. 대척행성인이 C-신경섬유에 관해서 계속 얘기하는 것이 아픔에 관한 것이 아니라는 사실과, 그렇기 때문에 대척행성인은 아픔에 관해서 이야기하지 않고 있다는 사실은 미묘한 차이가 있기 때문에 단순히 C-신경섬유가 우리가 정의하는 아픔과 다르다고 하여도 그것을 아픔이 아니라고 단순하게 말할 수는 없다. 또한, 마음의 상태에 관한 기술은 다음과 같은 것을 가정하고 있다고 로티는 주장한다. "(1) 정신적인 것이 그 담지자에 의해서 확고부동하게 알려질 수 있다는 점은 그것이 정신적인 상태이기 위한 조건이다. (2) 우리는 이렇게 확고부동하게 알려질 수 있는 상태를 가지지 못하는 존재가 비물리적인 상태들(가령 믿음)을 문자 그대로 가질 수 없다고 생각한다."

 

  이를 축약하자면, 확고부동한 것은 정신적인 것이 가지는 가장 기본적인 속성이다. 로티는 이것이 정신적인 것에 관한 데카르트식의 선입견을 그대로 이어받고 있다고 말한다. 만약 대척행성인들이 C-신경섬유의 상태를 확고부동하게 안다면, 그들에게 마음이 있다고 볼 수 있는 것일까? 정신적인 것의 기준이 확고부동함인 한, “그들의 C-신경섬유가 자극받고 있다고 여겨진다는 보고를 할 때 그들은 어떤 느낌(마치 우리가 “아프다!”고 말할 때 보고하는 것과 동일한 느낌)을 보고하고 있는 것인가, 아니면 어떤 상태에서 뉴런이 촉발하는 어떤 소음을 내고 있을 뿐인가?”라는 질문에는 아무런 대답도 할 수 없다. 이 질문은 오히려, 우리가 아픔을 표현할 때 단지 뉴런을 보고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에 관한 반대되는 질문을 제기한다. 다시 말해, 대척행성인들은 왜 우리가 느낌과 마음이라고 부르는 이상한 것들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해야 하는지 궁금해할 것이며, 또한

 

"“유물론자” 대척행성인들의 주장이 옳을 경우에 직면해야 할 대비를 해야 할 것이다. 즉 우리는 원느낌을 보고하고 있다고 생각하면서 단지 뉴런을 보고하고 있었을 뿐이다. 우리가 대용어구에 그렇게 오랫동안 매달려 있었다는 것은 우리 문화가 발전하는 과정에서 일어난 사건일 뿐이다. 이는 우리가 지상에 관련된 많은 학문분야를 완성시키는 동안 천문학에는 등한시했으며, 천상에 대한 우리의 생각에는 여전히 프톨레마이오스 이전의 요소가 남이 있었던 것과도 같다."

 

  이 지점에서 어떤 사람들은 정신적인 것의 특징은 확고부동함이 아니라 불완전함이라는 반론을 편다. 이들의 주장을 요약하자면 다음과 같다. 인과적으로 짜여져있는 신경과 감각체계는 잘못을 할 수가 없는데(즉 완전한데), 대상에 관한 인간의 표상은 언제나 불완전한 요소를 띄고 있다는 것이다. 유물론적인 입장을 따르면 이런 불완전한 표상에 대한 설명이 불가능하다. 따라서 표상은 신경과 감각체계가 아닌 다른 것, 즉 마음에 있는(정신적인) 것이다. “사물들이 단지 물질적인 체계 속에만 있는 것처럼 보이는 경우가 가능한가? 불완전한 이해라는 행위가 존재론적으로 중립적인 것으로 보일 수 있는가?” 그렇다면 우리가 마음에 속하는 것(정신적인 것)과 몸에 속하는 것을 가리는 기준은 불완전함과 완전함 뿐인가? 따라서 이는 적당하지 못하다.

 

  정신적인 것에 관해 ‘확고부동함’이라는 정의를 내렸기 때문에, 우리는 현상적인 속성의 정의 또한 ‘확고부동함’과 연관해서 내려야 한다. 그 정의는 “(P) 우리가 우리 자신의 상태에 대해서 확고부동한 보고를 할 때마다, 우리가 그러한 보고를 하게 되는 어떤 속성이 있어야 한다.”이다. 그렇다면 이것을 살펴볼 때, 우리는 정신적인 것에 관해 정말 그 ‘확고부동’함을 주장할 수 있는가? “별과 같은 것을 잘못 기술한다는 것과 아픔과 같은 것을 잘못 기술한다는 것 사이에는 정확히 어떤 차이가 있는가? 왜 전자는 분명히 가능한 것처럼 보이지만, 후자는 상상할 수조차 없는 것처럼 보이는가?” 이는 데카르트와 같은 존재론적 이원론에 기반한 우리의 직관에서 이끌어낼 수 있는 결론이다. 하지만 이는 대척행성인들에게는 아무런 쓸모가 없는 생각이며 논의이다. 마음이 꼭 있어야 할 이유가 도대체 무엇인가? 이것이 대척행성인들이 우리에게 던지는 질문의 핵심이다. 즉, 인간의 내면에 우리가 “내면”이라고 부를만한 정신적인 것의 영역은 존재하지 않는다.

 

  지구인 유물론자들의 경우에도 사정은 크게 다르지 않다. 이들의 논증을 살펴보았을 때도, 정신적인 것을 주장하는 이원론자들의 ‘확고부동함’과 마찬가지로 우리가 인과적으로 외부의 주어진 것들을 잘 반영할 수 있다는 생각에 사로잡혀있다. 그래서 그들은 불완전한 이해와 인식에 관해 논한다. 하지만 불완전한 인식이 드러나는 순간은 인과적으로 확립될 수 없다. 왜냐하면 인과적으로 그런 것은 그저 그런 것일 뿐, 불완전하다는 말을 붙일 수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불완전함의 증거는 심리-물리적인 것이 아닌 정신적인 것이 될테고, 그렇다면 다시 마음에 관해서 이야기하지 않을 수 없게 된다.

 

  이에 대해, 대척행성인들은 다음과 같이 주장할 것이라고 로티는 서술하고 있다.

 

"그들은 “이해작용”, “인지상태”, “느낌”과 같은 지구인들의 어휘 전체는 언어가 떠안은 불행한 일로 생각한다. (중략) 대척행성의 유물론자들은 “마음과 물질”이라는 우리의 개념이 언어가 잘못 발전했음을 반영한다고 생각한다. 대척행성의 부수현상론자들은 “C-신경섬유의 보고뿐만 아니라 아픔의 보고를 산출할 때, 지구인들의 언어중추에는 어떤 신경 입력이 가해지는가?”라는 질문에 당혹스러워하고 있다. 대척행성인들에게 느낌이 있다고 생각하는 지구의 철학자들은 대척행성인의 언어가 “실재에 대해서 충전적이지 않다”고 생각한다. 대척행성인들에게 느낌이 없다고 생각하는 지구의 철학자들은 언어발전 이론에 의존하고 있다. 그 이론에 따르면 첫 번째로 명명된 사물들은 “우리에게 더 잘 알려지는”- 즉 원느낌 - 것들이므로 느낌에 대한 이름이 없다는 것은 느낌이 없다는 것을 함축한다."

 

 

3. 확고부동성과 원느낌

 

  로티에 따르면, 어떤 현상을 기술하는 단어들의 의미가 확정되지 않았다고 생각이 될 때, 우리는 언어분석을 시작한다. 그러나 그 언어분석이 한계에 다다르고 더 이상 각 분석 간에 합의가 이루어지지 않는 상황에 봉착했을 때, 그 사이를 중재하는 것은 흔히 철학의 역할로 간주된다. 철학은 그 단어들이 쓰이는 맥락-체계를 재구성하여 어느 한 쪽을 제거하거나, (더 많은 사례로는) 이 둘이 어느 정도 인정할 수 있는 정도의 체계를 구축하여 각 분석 간의 분쟁을 화해하고 조정한다. 철학사 속에서 이 화해의 매개가 된 단어들은 대개 “세계”, “물자체”, “감각될 수 있는 다양한 것”, “자극” 등과 같은 것이다.

 

  그러나 이런 단어들이 실제로 어떤 대상을 지칭하고 있는가 질문을 던진다면, 답을 하기는 매우 힘들어진다. 이들은 “냉정하게 중립을 지킨다는 것 말고는 아무런 흥미로운 특징도 없는 존재자들을 명명하기 위해서 만들어진 용어이기 때문이다.” 어떤 심리철학자들은 이런 전략을 사용해서, 물질적인 것과 정신적인 것의 구분을 다른 대상의 두 측면으로 여기려고 한다. 이같은 것에 관해 로티는 다음과 같이 평가한다.

 

"때때로 우리는 이 실재가 직관된다거나(베르그송) 혹은 감각의 기초 내용과 동일하다는(러셀, 에이어) 등의 이야기를 들어왔다. 그러나 때때로 그것은 단지 인식론적 회의주의를 피하기 위한 수단으로 제안되었을 뿐이라고도 한다(제임스, 듀이). 어떤 경우에서도 “우리가 그것이 어떤 것인지를 알고 있다”거나 혹은 이성(즉 철학적 딜레마를 피해야 하는 필요성)이 그것을 요청한다는 등의 주장을 제외하고는 우리는 아무 것도 들은 바가 없다. 중립적 일원론자들은 마치 과학자들이 요소들 속에서 분자들을 그리고 분자들 속에서 원자들을…… 등을 찾아낸 것과 마찬가지로, 철학은 기반이 되는 토대들을 발견하거나 혹은 찾아내야만 한다고 즐겨 제안해왔다. 그러나 사실 정신적인 것도 아니고 물질적인 것도 아닌 “중성적인 구성성분”은 그것이 가진 고유한 힘이나 속성이 밝혀지지 않은 채, 다만 제안되고 잊혀질(혹은 똑같은 내용이 되겠지만,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정보의 역할이 부여될) 뿐이었다."

 

  이 지점에서 대척행성인들에 관한 문제를 다음과 같이 정리할 수 있다. 그 문제란, "① 원느낌이 확고부동하게 알려질 수 있다는 점은 원느낌에 대해서 본질적이다. ② 대척행성인들 스스로가 확고부동하다고 생각하는 것은 없다. 에서 ③ 대척행성인들은 원느낌을 가지지 않는다. ④ 대척행성인들은 자신들이 가진 확고부동한 지식에 대해서 알지 못한다."는 결론 둘 중에 하나가 도출된다는 사실이다. 여기에서 ③은 쉽게 거부된다. 원느낌을 가지는 우리 인간들과 원느낌에 대한 모든 상황을 공유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대척행성인들은 뭔가를 ‘모르고 있다’는 ④를 채용할 수밖에 없다.

 

  그러나 이들은 또한 자신들의 언어인 C-신경섬유의 상태를 우리의 언어인 ‘아프다’로 바꾸어 말하도록 훈련받을 수 있으므로, 만약 그럴 경우 지구인과 대척행성인 사이의 외형적인 차이는 거의 없어지게 된다. 만약 지구인이 대척행성인의 ‘아프다’가 실제로는 ‘아프다’가 아니라는 것을 지적한다면, 그것은 “특권적인 접근”을 주장하는 것이다. 대척행성인은 모른다고 하는 것을 인간은 안다고 말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 상황은 이상하다. 대척행성인은, 한편으로는 C-신경섬유가 자극을 받았기 때문에 아프다고 한 것이고, 다른 한편으로는, C-신경섬유가 자극을 받지 않는다면 ‘아픔’은 결코 생겨나지 않는다고 한 것이다. 이에 대해서 지구인이 그것은 ‘아픔’이 아니라고 주장할 근거는 어디에 있는가? 그들은 C-신경섬유가 자극을 받았을 때에만 ‘아프다’라고 말하도록 훈련받았는데, 그렇다면 ‘아픔’에 대해서 그가 말할 수 있는 것은 그것이 전부이고, 그것을 벗어나서 말할 수는 없다.

  여기에서 지구인이 말하고자 하는 바는 ‘아픔을 느끼다’와 ‘아프다’의 차이인 것으로 보인다. 앞쪽은 ‘아픔’이라는 정신적인 것을 내가 가지고 있다는 의미이며, 뒤쪽은 마치 대척행성인들처럼 내가 이러저러한 상태에 있다는 의미이다. 앞쪽은 정신적인 것의 존재를 가정해야 가능한 서술이지만, 뒤쪽은 그렇지 않다. 그리고 고전적인 철학적 전통에 따라, ‘아픔을 느끼는 것’은 인식적 주체에게 의심의 여지가 없는 사실이지만, 반대로 ‘아프다’는 것은 종종 불확실하다.

 

  하지만 우리가 ‘아픔을 느끼는’ 상태에 있는지, 또는 ‘아픈’ 상태에 있는지 구분할 수 있는 기준은, 적어도 마음의 존재를 상정하는 철학적 전통을 벗어난다면, 명확하지 않다. 로티에 다르면, 이 둘을 구분할 수 있으려면, 어떤 사람이 어떤 것에 관해 보고하는 것은 상태에 관한 기술이 아니라 인식주체와 직접 대면하는 원느낌에 관한 보고라는 생각이 전제되어야 한다. 이것은 로티가 말하는 ‘거울의 이미지’에 고스란히 반영되어있는 생각이기도 하다. 만약 우리가 이런 철학적 전통에 따라서 대척행성인에 관해 판단한다면, 우리는 그들을 마음이 있는 존재로서 생각해야 한다. 그러나 이들에게 마음이 있다고 우리가 판단하는 근거들은 그들의 행동과 보고이므로, 여기에서 우리는 우리의 마음 역시 행동주의적으로 이해할 수 밖에 없다는 역설적인 결론에 이른다. 로티는 이를 통해, 대척행성인들에게 마음이 있는지 없는지 우리가 판단할 수 없다고 생각하거나, 더 나아가서 그들에게 정신이 없다 – 그들에게 정신이 있는지 없는지 논의하는 자체가 무의미하다 – 고 주장하는 듯 하다.

 

  어쨌든 로티는 우리가 이런 거울의 이미지를 인정할 경우, 우리에게 주어지는 선택지에는 세 가지가 있다고 말한다. 첫째는 “이러저러하게 보인다는 언급을 포함하는 언어를 사용하는 모든 존재는 우리처럼 거울 같은 본질을 가지고 있다”고 말하는 행동주의자이다. 둘째는 만약 그런 언어를 사용하고 있다고 하더라도 나 이외의 다른 사람의 마음에 대해서는 모른다고 말하는 것이 솔직하다고 생각하는 “피론 식의 회의주의자”이다. 셋째는 우리가 그런 거울의 이미지 같은 것을 본질로서 가지고 있지 않다고 말하는 유물론자이다.

 

  그러나 로티가 최종적으로 선택하고자 하는 입장은 거울의 이미지 자체를 거부하는 것이다. 확고부동, 명석판명, 의심불가능 등의 형용사를 유발하는 거울의 이미지 자체가 데카르트 이래로 철학을 지배해왔던 특정한 언어놀이의 맥락으로부터 파생된 것이기 때문에, 그것이 우리의 진짜 문제 – 즉 보편적이고 일반적이며 영구적인 문제라고 생각할 이유가 전혀 없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저런 형용사들은 정신과 인식주체 사이의 관계를 나타내는 형용사가 아니라, 그 말들에 의미를 부여하는 사회적 맥락과 그 말들 사이의 관계에 의해 의미가 확정되는 형용사들이다. 이런 로티의 논의를 따라가면, 원느낌과 행위 사이의 문제와 마음과 몸 사이의 문제는 필연적인 것이 아니라 사회적 맥락에 따라 함께 제기되었다는 결론에 이른다.

 


4. 행동주의

 

  그렇다면 로티는 지금까지 제기됐던 심리철학의 대표적인 경향들이 어떻게 거울의 이미지 아래 묶여있다는 점에서 공통적이며, 또 거울의 이미지를 거부하는 자신의 입장이 그 경향들과 어떻게 차이가 나는지 설명해야 한다. 그가 자신의 입장과 비교하는 첫 경향은 행동주의이다. 그는 행동주의를 다음과 같아 정리한다.

 

  행동주의는 두 가지 동기와 의도에서 시작되었다. 첫째, 마음 개념을 거부하기 위해서. 둘째, 타인의 성향과 나의 성향이 동일하다는 것을 확증하기 위해서. “느낌에 대한 보고는 비물리적인 존재자를 지시한다고 여겨져서는 안되며, 아마도 그것은 몸부림 또는 몸부림치려는 성향 이외 그 어떠한 존재자도 지시하지 않는다고 생각해야 한다”는 것이 행동주의의 기본적인 성향이다. 그러나 이런 생각은 세 가지 전형적인 반론에 부딪힌다. 첫째, 어떤 성향을 나타내는 몸부림의 종류가 무한하다. 어떤 성향을 가진 사람이 그 무한한 것들 가운데 어떤 행동을 할지는 아무도 알 수 없다. 둘째, 그러므로 성향과 행동이 필연적으로 연결되어 있지 않다. 따라서 이를 결정할 내적 상태를 가정해야만 그 행동의 필연성이 설명된다. 셋째, 이는 마음 개념을 거부하려는 의도적인 움직임 자체에서 비롯한 것이며, 그 자체로 논증된 것이 결코 아니다.

 

  물론 행동주의는 대척행성인들의 태도를 설명할 수 있는 좋은 이론이라는 점에서 좋으며, 또한 마음과 몸의 문제가 영구적인 철학적 문제가 아닐 수도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효과적인 시도였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 그러나 로티에 따르면 현재 우리가 알고 있는 행동주의는 그 방향이 잘못되었다. 행동주의자 라일(주: 길버트 라일(1900~1976). 철학적(논리적) 행동주의를 정립한 영국의 철학자.)은 “어떤 형태의 행동이 원느낌을 귀속시키는 데 필요한 필요충분조건을 구성하며 이는 “우리의 언어”에 관한 사실”이라고 말했다. 그러나 행동과 “우리의 언어”가 관계가 있다고 할 경우, “우리의 언어”는 마음을 독립적인 실체라고 인정하는 것을 뒷받침하기 때문에 우리의 행동 역시 마음에서 비롯한 것으로 설명하는 상황에 처하게 된다는 것이다. 원느낌에 관한 언어 - ‘~인 것처럼 보인다’ - 를 우리가 사용하고 있다는 것이 원느낌의 존재를 확인시켜준다면, 그런 언어를 사용하고 있다는 것은 마음 즉 정신적인 것이 존재한다고 말하는 것과 동일하기 때문이다. 이는 대척행성인에게 마음이 있다는 결론으로도 연결된다. 그러나 이는 행동주의자들의 의도와 목표와는 모순된다.

 

  라일은 이런 귀결에 다다르는 것을 거부하기 위해 확고부동, 의심불가능한 발견이라는 것을 거부해야만 했으나, 그것은 마음의 상태가 행동으로 환원된다는 ‘확고부동한’ 믿음(“내가 나 자신에 대해서 발견할 수 있는 것들은 내가 다른 사람에 대해서도 발견할 수 있는 것과 똑같으며, 그러한 것들을 발견하는 방법 역시 완전히 동일하다”)과 모순을 일으켰다. 따라서 그는 형이상학적으로 마음과 몸을 독립적으로 보거나, 혹은 마음이 몸으로 환원된다는 두 의견 가운데 하나를 선택해야만 했다. 이런 라일의 입장을 로티는 다음과 같이 요약한다 : “행동에는 성향이 있다는 것과 내적인 상태가 있다는 것 사이에 “필연적인 연관”이 있음을 보여줄 수 있다면, 사실상 내적인 상태라는 것은 없음을 보여줄 수 있다고 믿었다.” 그러나 이것은 논리적 비약이다. 예를 들어, 내가 물을 마시려는 성향과 목마른 상태 사이에 필연적인 연관이 있다고 해서, 내가 물을 마시려고 할 때 목마른 상태 자체가 없는 것은 아니다.

 

  로티의 분석에 따르면 라일은 결국 데카르트의 이원론적인 성향을 배태한 더욱 심층적인 이미지, 즉 거울의 이미지를 그대로 물려받은 것이다. 단지 확고부동하게 인식되는 대상이 무엇인지만 다를 뿐이다. 데카르트의 경우에는 정신적인 것이며, 라일의 경우에는 행동이다. “데카르트주의자들은 정신적인 상태만이 유일하게 의식에 즉각적으로 주어지기에 자연적으로 적합한 존재자라고 생각했다. 행동주의자들은 인식론적으로 최선을 다한다고 해도 의식에 직접적으로 주어지는 유일한 종류의 존재자는 물리적 대상의 상태라고 생각했다.” 이들 양쪽은 모두 다 플라톤의 원리, “가장 잘 알려지는 것이 가장 실재적인 것이라는” 전제를 그대로 받아들이고 있는 셈이다.

 

  이런 거울의 이미지와 대척행성인의 모습을 비교해보면 다음과 같은 차이가 드러난다. 거울의 이미지에서 잘 알려지는 것이란, 특정한 성질을 가진 존재자들에 접근하는 것이다. 로티는 이것을 셀라스의 말을 인용해 “소여의 신화(myth of the given)”라고 부른다.(주: 윌프리드 셀라스(1912~1989). 20세기 중반 미국의 철학자. 소여의 신화는 다음과 같이 요약된다. “전통적인 인식론은 지식이 위계적으로 구조화되어있다고 가정했다. 여러 추론적 방법들에 의해 우리의 지식이 놓일 곳으로 만들어진 견고한 토대로서 제공되는 실재에 직접 접촉하는 어떤 인지적인 상태들이 반드시 있어야 한다고 믿어졌다. 지식에 관한 이런 토대주의적인 그림은 지식에 관해 두 가지 필수조건을 부과했다. (1) 모든 다른 인지적인 상태들에 관해 독립적인 어떤 적극적인 인식적 지위를 가진다는 의미에서 기본적인 인지적 상태가 반드시 있어야 한다. 이것은 인식적 독립성 필수조건(Epistemic Independency Requirement)이라 불린다. 적극적인 인식적 지위들 중에는 지식이 되는 것, 정당화되는 것, 또는 단지 그에 걸맞는 어떤 가정들을 가지는 것이 있다.(기본적인 인지들은 반드시 논의의 여지가 없는 인식적 보증을 소유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은 일반적이다 – 확실성, 무교정성, 또는 심지어 무오류성 – 그러나 이들은 오늘날에는 일반적으로 받아들여지지는 않는다) 인식적 관계들은 연역적인 그리고 귀납적인 함축을 포함한다. (2) 모든 기본적이지 않은 인지적인 상태는 직간접적으로 기본적인 인지적 상태들을 낳는 인식적인 관계들 때문에만 적극적인 인식적 지위를 소유할 수 있다. 따라서 그 기본적인 상태들은 인식적 유효 필수조건(Epistemic Efficacy Requirement)이라고 불리는, 우리의 지식이 놓이는 자리를 위한 궁극적인 지원을 반드시 제공해야만 한다. 이러한 기본적이고 독립적이며 유효한 인지적인 상태들은 주어진 것이 될 것이다(would be the given). 많은 철학자들은 만약 전적으로 지식이 되는 그런 것이 있다면, 이러한 주어진 것이 있어야만 한다고 믿어왔다. (중략)  이런 주어진 것은 신화라는 셀라스의 논증은 다음과 같다.  (1) 인지적인 상태는 그것이 어떤 다른 인지적인 상태로부터 추론되거나 추론될 수 있음에 대해 독립적인 인식적 지위를 소유하는 경우에 인식적으로 독립적이다. [인식적 독립의 정의]  (2) 인지적인 상태는 그러한 다른 상태들의 인식적인 지위가 그것의 인식적인 지위로부터 (형식적으로 또는 실질적으로) 타당하게 추론될 수 있는 경우 인식적으로 유효하다 - 즉 다른 인지적인 상태들을 인식적으로 지지해줄 능력이 있다 [인식적 유효의 정의]  (3) 주어진 것이라는 교설(doctrine)은 p에 관한 모든 경험적인 지식이 어떤 기본적인(다시 말해 인식적으로 독립적인) 지식(p의 측면에서 인식적으로 유효한)을 필요로 한다는 것이다. [주어진 것의 교설의 정의]  (4) 추론적 관계는 언제나 명제적인 형식을 가진 항목들 사이에 존재한다. [추론의 본성에 의하여]  (5) 그러므로, 비명제적 항목들(감각자료같은 것들)은 인식적으로 무효하며 또한 주어진 것으로서 지지될 수 없다. [2,4에서]  (6) 추론적으로 획득되지 않으면, 명제적으로 구조화된 정신적 상태는 인식적으로 독립적이다. [1에서]  (7) 비추론적으로 획득된 것에 관한 다양한 방식들의 설명, 즉 명제적으로 구조화된 인지적인 상태들은 그들의 인식적인 지위들이, 특수하고 일반적인 경험적 참들 모두를 포함하는 다른 경험적인 지식에 관해 아는 주체에 의한 소유를 가정한다는 것을 나타낸다. [감각 자료와 외양에 관한 진술들에 관한 분석과 인식적 권위에 관한 분석으로부터]  (8) 이 가정은 인식적이며 그러므로 추론적인 관계이다.  (9) 다른 경험적 지식에 관해 아는 주체에 의한 소유가 가정된 비추론적으로 획득된 경험적인 지식은 인식적으로 독립적이지 않다. [1,7,8에서]  (10) 모든 경험적, 명제적인 인지는 추론적으로 또는 비추론적 둘 중에 하나로 획득된다.  (11) 그러므로, 명제적으로 구조화된 인지는, 추론적으로 획득되었든 비추론적으로 획득되었든, 인식적으로 독립적일 수 없으며 또한 주어진 것으로서 지지할 수 없다. [6.9.10, 구성적 딜레마]  (12) 모든 인지는 명제적으로 구조화되거나 그렇지 않다.  (13) 그러므로, 경험적 지식에 관한 어떤 항목도 주어진 것에 관한 기능을 수행할 수 없다는 것을 믿는 것은 합리적이다. [5,11,12, 구성적 딜레마]” (스탠퍼드 철학백과 Wilfred Sellars 항목, http://plato.stanford.edu/)) 그러나 이런 존재자들에 접근하는 것 말고도 우리에게 잘 알려지는 것들은 많다. 그것은 사회적 맥락에 의해서 알려지는 것들이다. 이른바, “모든 대척행성인들은 자신들의 신경상태에 대해서 친숙하며 모든 지구인들은 자신들의 원느낌에 대해서 친숙하다.” 로티는, 이렇게 사회적인 맥락을 벗어나서 확고부동하게 알려지는 것(즉 친숙한 것)을 규명하려는 시도는 무의미하며, 어떤 문화에서 확고부동한 것은 다른 문화에서는 왜 그것이 그렇게 이해되는지 의아한 대상이 될 뿐일 것이라고 말한다.

 


5. 타인의 정신에 대한 회의주의

 

  거울의 이미지가 반영되어있는 심리철학의 다른 한 사조는 자신의 마음에 관해서는 답을 유보하더라도 적어도 다른 사람의 마음에 관해서는 모른다는 이른바 ‘회의주의’이다. 이들은 어떤 존재자들 사이에 존재의 서열이나 우위를 가정하지 않으므로, 정신적인 것이라고 불리는 것은 이 세계의 다른 존재자들과 다를 것이 없는 ‘그저 존재하는 것’일 뿐이다. 그것은 아직 어떤 속성인지 파악되지 않고, 후보로서만 머물고 있다. 그러나 회의주의에 ‘정확한 표상적 반영’을 핵심으로 하는 거울의 이미지가 뒤섞일 경우, 이것은 "① 우리는 우리가 아는 다른 어떤 것보다 우리의 마음을 잘 알고 있다. ② 우리가 다른 아무 것도 알지 못한다고 해도 우리 마음에 대해서는 모든 것을 알 수 있다. ③ 어떤 것이 정신을 가졌는가를 안다는 것은 그것이 마음이 알고 있는 대로 그 마음을 알고 있는가의 문제이다." 가운데서 ②와 ③을 인정하는 결과를 낳는다. 우리가 마음을 직접적으로 대면한다는 거울의 이미지는 ①을 ②로 만드는 전제가 된다. 또한 ③처럼, 우리는 다른 이가 마음을 가졌는지 알기 위해서는, 그 다른 이가 ‘내겐 마음(정신적인 것)이 있다.’ 고 말할 때 그의 마음과 그 사이의 관계에 관해 알아야 한다. 그러나 우리가 다른 이에 관해 알 수 있는 것은 행동적이거나 사회적인 것들(즉 정신적이지 않은 것들) 뿐이다. 따라서 우리가 생각할 수 있는 그림은 다른 이가 마음과 몸이 함께 있는 그림이 아니라, 우리가 다른 이에 관한 것이라고 부르는 자료들이 우리의 마음 주변을 떠돌고 있는 상황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정신적인 것, 내 마음의 주변을 떠돌고 있는 것에 관해 상상할 수 있게 된다. 이 경우, “여기에서도 인식론이 먼저 나서서 우리를 형이상학으로 들어가도록 유인한다.”

 

  그러므로 여기에서 우리의 과제는 회의주의자의 건전함을 유지하면서 동시에 거울의 이미지를 버릴 수 있는 방법을 탐색하는 것으로 바뀐다. 이를 위해 로티는 사적인 것과 직접적인 것이라는 두 가지 속성에 관한 비트겐슈타인의 논박을 검토한다. 비트겐슈타인은 두 속성 모두가 불가능하기 때문에 정신적인 것(즉 마음)은 존재할 수 없다고 생각하는 반면, 회의주의자들은 이 두 속성 모두가 가능하기 때문에 한 사람은 자신의 마음 이외에 다른 이의 마음에 접근하지 못한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이 두 가지는 구별해서 생각해야 하는 것으로서, (앞장에서 살폈듯이) 특권적인 접근(즉 아주 잘 아는 것)을 할 수 있다고 해서 그것이 꼭 정신적인 것이어야 할 필요는 없는 것이다. 로티는

 

"우리는 우리 자신의 고통에 대해서 특권적인 접근을 할 수 있다.” 와 “우리는 순전히 정신적 상태의 감각된 특별한 성질만을 통해서 우리가 어떤 상태에 있는지 안다.” 를 구분한다면, 우리는 역설을 피할 수 있으며 감각을 탁자와 같은 어떤 것으로 만들 수 있다. 전자의 주장은 단지 누군가 고통스러워하고 있는가를 알아내기 위해서는 그에게 물어보는 것 이상의 방법이 없으며, 또한 어떤 경우에도 그 자신의 진지한 보고를 기각해버릴 수 없다는 말에 지나지 않는다. 후자는 이러한 특권이 가능한 것은 그 자신의 정신적 상태가 가진 “현상학적인 속성”을 그가 내성을 통해 알아내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면서 자신의 입장과 거울의 이미지를 받아들인 입장의 차이를 요약하고 있다. 다시 말해, 무언가를 ‘사적이고 직접적으로’ 알기 위해서 꼭 그 대상이 ‘정신적인 것’이어야 할 필요는 없다는 것이다.

 

  로티가 볼 때, 비트겐슈타인은, 내가 ‘아픈’ 것과 다른 이가 ‘아픈’ 것이 각각 다른 내적 상태를 가리키고 있을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 내적 상태가 어떤지에 관한 판단은 유보한 채 언어의 동일성 - 여기에서는 ‘아픔’ - 으로 정신적인 것을 환원하고 있는 것이다. 그가 그렇게 생각한 이유는, 사람들이 다양한 내적인 상태를 가리키기 위한 도구로서 언어를 사용하고 있기 때문이라는 그의 기본적인 견해 때문이다. 마음이 없는 사람들에게 이러한 견해는 이상하게 여겨질 것이라고 로티는 말한다. 그들에게는 마음이 없기 때문에, 사적이라든가 직접적이라든가 하는 형용사들이 이해되기 어렵다. 이들의 입장에서 인간들이 범하고 있는 오류는, 내가 아픈 것에 관해 ‘나만’ 알고 있다고 하는 것이 아픔에 관해 내가 ‘가장 잘’ 안다는 것을 함축하지는 않는다는 것이다. 게다가, 대척행성인들의 견해에서는, ‘나만’ 안다는 것 자체가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이 명제가 대체 무엇을 의미하는지조차 파악하기 어렵다.

 

  마지막으로 로티는 이런 회의주의는 실생활에서 전혀 쓸모가 없으며, 유용하지도 않기 때문에 무효하게 될 것이라고 말한다. 이는 마치 “종교가 제공하는 완전함에 대한 충고가 주중에는 주의를 끌지 못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철학적(그리고 시적) 전통을 산출하는 이미지들은 학문 이외의 영역에서는 주목받지 못”하는 것과 같다.

 

6. 심신동일성이 없는 유물론

 

  흔히 유물론은 심신동일론을 지칭하는 것으로 생각된다. 이는 일종의 환원론으로서, 정신적인 상태 모두가 심리-물리적인 상태로 기술 가능하며 또한 정신적인 상태 모두가 ‘사실은’ 심리-물리적인 상태라는 것이다. 따라서 이들의 입장에 따르면 원느낌이나 감각 등도 심리-물리적인 상태이다. 지금은 사람들에게 이 상태가 완벽하게 밝혀지지 않았기에 우리가 알고 있는대로 정신적인 상태를 지칭하는 단어들을 동원해서 이를 설명한다. 그러나 만약 신경에 관한 우리의 과학적인 연구가 더 발달할 경우, 이들은 우리의 정신적인 상태 전부를 심리-물리적인 상태로 - 마치 대척행성인들의 언어처럼 - 사용할 수 있을 것이라는 입장을 취한다. 이런 입장에서 행동주의는 유물론이라는 큰 흐름 안에 있는 한 지류가 된다.

 

  암스트롱과 스마트의 주제중립적(주: 주제중립적이라는 말은 길버트 라일의 용어를 스마트가 차용한 것이다. 이는 논증이나 대화에서 말하고자 하는 주제와 상관없는 단어, 즉 다시 말해 특별한 뜻이 없다는 것을 뜻한다. 여기에는 ‘만약’, ‘또는’, ‘또한’ 등의 논리적 연결어들이 포함된다.) 분석은, 정신적 상태와 물리적 상태 간의 구분이 무의미함을 지적하고자 하는 유물론자들의 시도이다. 즉, ‘어떤 행동이나 행동 성향을 일으키는 모든 것’은 구분불가능하다는 것, 더 정확히 말해서 ‘~인 모든 것’은 주제중립적인 표현이기 때문에 특정한 의미가 있지 않다는 것이 주제중립적 분석의 결론이다. 그러나 우리의 언어와 전통은 ‘~를 일으키는 정신적 상태’와 ‘~를 일으키는 물리적 상태’가 구분된다는 직관을 포함하고 있고, 그러므로 이들의 주제중립적인 분석은 유물론과 심신평행론 사이에 어떤 것을 선택하는 것이 더 나은지에 관한 기준을 제공해주지 못한다는 단점이 있다. 나아가서 ““정신”에 대한 우리의 개념이 주제중립적인 분석이 말하는 바와 같다면 심신 문제의 존재를 설명하기가 매우 어려워진다.” 다시 말해 주제중립적 설명을 채용하는 유물론은 마음은 없고 몸만 있다고 설명하는 것을 목표로 삼으면서 동시에 마음과 몸 둘 다 무의미하다는 논증을 펴고 있는 것이다.

 

  로티는 자신이 인용하고 있는 여러 학자들의 주장 사이의 차이를 드러내기 위해 다음과 같은 이원론 논증을 제시한다.

 

"① “나는 고통에 대한 감각을 가지고 있다”는 형식의 몇몇 언명은 참이다. ② 고통의 감각은 정신적 상태이다. ③ 신경 과정은 물리적 상태이다. ④ “정신적”과 “물리적”은 양립불가능한 술어이다. ⑤ 고통의 어떤 감각도 신경적 사건이 아니다. ⑥ 몇몇 비물리적 사건이 있다.

 

라일주의자들과 몇몇 비트겐슈타인주의자들은 정신성이 특권적 접근에의 접근가능성에 있다고 생각하며, 스트로슨의 소위 “사밀성에의 적의”라는 것에 탐닉하기 때문에 ②를 부정한다. 스마트나 암스트롱같은 “환원적” 유물론자들은 정신주의적 용에 대한 “주제중립적” 분석을 제시하면서 ④에 도전한다. 파이어아벤트나 콰인 같은 “제거적” 유물론자들은 ①을 부정한다."

 

  이 가운데 로티가 지지하는 입장은 가장 마지막의 “제거적” 유물론이다. 제거적 유물론은 인간에게 정신적인 것, 즉 “감각”은 없다고 말하는 주장이다. 로티에 따르면 제거적 입장은 형이상학을 하지 않으면서도 일원론적일 수 있으며, 또한 환원적 입장을 포괄할 수 있다는 장점이 있다. 또한 “감각”은 없다고 말하지만, 사람들이 “감각이라고 부르는 것”은 있을 수 있다는 것을 옹호한다. 정신적인 것에 관한 설명은 참으로 ‘간주되는’ 것들이며, 이는 우리의 입장에서 대척행성인을 이해할 수 있게, 또한 대척행성인들이 우리를 이해할 수 있게 하는 입장이 된다. 대척행성인들에게는 우리가 정신적인 것으로 ‘간주하는’ 것들이 있을 수 있지만, 이들이 ‘실제로’ 있다고 주장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로티가 더욱 지지하고 싶어하는 입장은 ‘심신동일성 문제 자체가 특수한 맥락에서부터 도출되는 문제이다.’ 라는 것으로 보인다. 마음과 몸 문제에 관한 다양한 입장, 특히 일원론적인 입장의 여러 갈래는 사실 대척행성인을 인간중심적으로 해석하려고 드는 지구인들의 어색한 시도에 불과하다. 우리는 이 문제적 맥락을 벗어나서, “유물론자는 대척행성인들에 대한 이야기를 형이상학을 동원하여 다루어서는 안되며, 설령 그렇게 한다고 해도 “우리가 사는 동안 내내 대척행성인의 언어를 말했다고 해도 예측력, 설명력 혹은 기술력을 전혀 잃어버리지 않았을 것이다”는 식의 주장에만 국한시켜야 한다.”

 

  우리에게 있는 심신동일성의 문제가 대척행성인에게 없는 이유는, 우리가 철학적인 전통 속에서 ‘존재론적인 지위’에 관해 우리가 관심을 가지게 되었기 때문이며, 반면 대척행성인에게는 그러한 전통이 없었기 때문이다. ““존재론적인 지위”라는 개념에 많은 관심을 가진 철학자가 아니라면, 확고부동하게 보고될 수 있는 고통이 “정말로” 고통인지 아니면 자극받은 C-신경섬유인지에 대해서 관심을 기울일 필요가 없다. 이른바 정신적인 것이란 무언가에 관해 우리의 언어가 표현하는 방식이며, 대척행성인은 대척행성인의 방식이 있을 것이다. 지금까지 살펴 본 바에 따르면 정신적인 것과 관련된 문제는 우리의 언어 속에서만 특별하게 드러난다.

 

  우리의 언어에서 이러한 문제가 드러나는 궁극적인 이유, 다시 말해 심신문제가 우리의 언어에서 생겨나는 이유 혹은 우리가 각각의 방식들이 표현하는 공통적인 대상(즉 정신적인 것)이 있다고 가정하는 문제가 생겨나는 이유는, 로티가 보기에 우리가 거울의 이미지를 모든 경우에도 간직하고 있기 때문이다. 로티의 결정적인 말을 직접 인용해보면 다음과 같다.

 

"대립하고 있는 이러한 개념들(물질/정신, 과학/내면)은 지구의 17세기로부터 물려받은 한 무더기의 이미지가 없다면 전혀 이해되지 않을 것이다. 사람들이 “기계는 사실은 아픔을 느끼지 않으며 매우 끔찍하게도 단지 그렇게 보일 뿐이다.” 라고 말한다고 해도, 직업상 이러한 이미지를 진지하게 받아들여야 하는 철학자들을 제외한 누구도 화를 내거나 질색하지 않을 것이다."

 

"모든 가능한 경험적인 발견과 문화발전을 별다른 부담 없이 분류할 수 있는 영속적인 범주구조를 철학이 제공해야 한다는 생각 때문에, 우리는 “정신이 없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정신의 본성에 대해서 우리가 잘못 생각하고 있는가?”, “‘원느낌’이라고 부르는 것은 없다고 말하는 대척행성인들이 옳은가?” 등의 대답할 수 없는 질문들을 하게 된다."

 

"이러한 소위 존재론적 범주는 단지 여러 다양한 역사적인 원천에서 생긴 이질적인 개념들을 한데 묶는 방식일 뿐이다. 이는 데카르트 자신의 의도에서 볼 때 매우 용이한 방식이었을 뿐이다. 그러나 그의 의도와 우리의 의도는 다르다. 철학자들은 자신의 인공적인 복합물을 마치 이미 존재하고 있는 어떤 것들을 발견한 것이라고 - “직관적” 혹은 “개념적” 혹은 “범주적” 등이 과학과 철학의 영속적인 매개변수를 결정하기 때문에 그것을 발견이라고 - 생각해서는 안된다."

 

 

7. 인식론과 “심리철학”

 

  마음과 몸의 관계에 대해 문제를 제기하기 시작한 것은 17세기 이후이다. 우리는 철학의 역사를 통해서, 그 이전에는 이러한 문제가 아예 제기되지 않았거나 다른 방식으로 제기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또한 더 주목해야 할 것은, 마음이 독립적인 (연구) 영역으로 대두되면서, 이 마음이 담당하고 있다고 간주되는 인식의 문제 역시 제기되었다는 사실이다. 다시 말해, 이 시기의 철학자들은 마음의 인과적 작용을 잘 밝힌다면, 우리의 인식에 대해서도 잘 평가할 수 있다고 믿었다. 이들에게 마음의 인식적 작용이란, 다름아닌 ‘거울의 이미지’를 통해서 대상을(또는 관념을) 인식주체가 얼마나 잘 반영하고 알고 있느냐 하는 문제로 귀결되었다. 더욱 큰 문제는 후대의 철학자들이 이것을 당시의 철학적 맥락에서 제기된 문제가 아니라, 보편적인 그 무엇에 관한 문제로서 생각했다는 사실이다.

 

  여기에서 앞으로 해결해야 할 과제가 도출된다. 즉, 마음 또는 정신적인 것 없이도 우리는 인식론적인 입장을 세워야 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로티는 “이 책의 제2부에서는 이성에 대한 문제의 근대판 - 즉, “인식론”이라고 불리는 학문영역이 관심을 기울였던 정확한 표상의 가능성 혹은 범위에 대한 문제가 있다는 생각 - 을 해소하려고 시도할 것”이며, 또한 “인간의 지식을 자연의 거울 속에 표상된 것의 집합이 아니라고 생각하게 될 것이고, 우리의 거울 같은 본질이라는 개념 없이도 잘해나갈 수 있다는 제1부의 주장을 강화할 수 있을 것”이라고 주장한다. 또한 이런 마음의 개념은 인간의 도덕적 지위를 정당화하는 데 동원되는 개념이기도 하다. 따라서 ‘거울의 이미지’에 따르는 마음 개념을 비판하는 일은 인간의 도덕적 지위에 관한 전통적인 생각에 대한 공격이다. 이를 통해 로티는 앞으로 “개인이 어떤 존재자이며, 어떤 “객관적인 기준” - 예를 들면 거울 같은 본성을 가지고 있다는 식의 - 을 근거로 하여 도덕적 존엄성을 설명하려고 했던 매우 철학적인 기획이 과학과 윤리학을 혼동하고 있음을 밝히려고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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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ichael Stocker의 논문 'The Schizophrenia of Modern Ethical Theroies'의 번역. Roger Crisp & Michael Slote의 『Virtue Ethics』의 3장.>


  근대윤리이론들은, 아마 몇몇 존경할만한 예외와 함께, 단지 근거들, 가치들, 그리고 정당화하는 것만을 다루었다. 그들은 동기들과 윤리적인 삶의 동기를 부여하는 구조와 강제에 대해 설명하는 것을 실패했다. 그들은 단지 이것을 하는데만 실패한 것이 아니라, 그들은 이것을 하지 않는 것에 의해 윤리이론들로서도 실패했다 – 내가 이 논문 안에서 앞으로 논증할 할 것처럼. 나는 또한 두 가지 서로 연관이 있는 임무를 시도할 것이다: 동기부여가 윤리이론과 윤리적 삶을 의무지운다는 몇몇 강제들을 드러내보이는 것; 그리고 이성과 동기 사이의 관계에 대한 우리의 이해를 진척시키는 것.


  한 좋은 삶의 한 가지 특징은 한 사람의 동기와 그의 근거들, 가치들, 정당화들 사이의 조화이다. 그가 가치를 매기는 것 – 그가 좋고, 잘되었고, 옳고, 아름답고 등등이라고 믿는 것 – 에 의해 그렇게 움직이지 않았다는 것은 그 영혼의 한 질병의 징조이다. 그를 움직이게 하는 것에 가치를 매기지 않는 것 또한 그 영혼의 한 질병의 징조이다. 이런 질병, 또는 이런 질병들은, 도덕적 정신분열증이라고 적절하게 불려질 수 있다 – 질병들은 그의 동기들와 그의 근거들 사이의 갈라짐이기 때문이다.(다른 곳과 마찬가지로, ‘근거들’은 또한 ‘가치들’과 ‘정당화들’을 대표할 것이다.)


  반대로, 그가 나쁘고, 아프고, 못생기고, 깎아내릴 것이라고 믿는 것을 하며 움직여지는 존재에 의해, 이러한 정신분열증의 한 극단적인 형태가 특징지어질 것이다; 반대로, 그가 하길 원하는 것에 의해 불쾌해지고, 무서워지고, 당황하게 되는 것에 의해서. 아마도 이런 경우들은 두믈 것이다. 그러나 근거들과 동기 사이의 어떤 더욱 적절한 정신분열증은, 그 의지의 부족의 많은 사례들 안에서 보여질 수 있는 것처럼, 우유부단함, 죄책감, 부끄러움, 자기기만, 합리화 그리고 그 스스로에 대한 짜증은 아니다.


  우리는 정말 최소한은 우리의 주된 가치들에 의해 움직여져야 하며, 또한 우리는 우리의 주된 동기들이 찾는 것에 가치를 매겨야 한다. 만약 우리가 한 좋은 삶을 이끌고 있다면, 그것이 바로 ‘해야하는 것’이다. 다시 말하자면, 이런 조화는 한 좋은 삶의 한 증표다. 게다가, 그는 아마도 인간의 삶이 몇몇 이러한 조합 없이 가능한지 아닌지에 대해 놀랄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모든 경우 안에서 어떤 조화를 갖는 것이 좋다는 것을 말하는 것은 아니다. 이것은 만약 자기성찰의 권위주의자들이 그들의 도덕적 가정교육에 의해 속박당함을 느낀다면 우리에게 좋다.; 저것은, 그들이 그들의 동기들에 대해 그 이성을 채택한다면 더욱 좋다. 세계와 그의 희생자들이 그가 해야 한다고 그가 생각했던 것을 하기 원하지 않은 아이히만을 가지기 때문에 그것은 더욱 더 좋다.


  이것은 모든 노력의 영역 안에서 이런 조화가 필연적이라거나 또는 심지어 가치가 매겨진 것을 성취하는 데 도움이 된다고 말하는 것도 아니다. 많은 경우 안에서, 이것은 이렇지 않다. 예를 들어, 공기 빠진 타이어를 고치려는 것 안에서 한 사람의 동기는 대부분 그 방식을 다시 해보는 것과 거의 무관하다.(많은 이러한 경우 속에서, 한 사람은 심지어 의도된 결과에 가치를 매기는 것도 필요하지 않다.)


  이것은 심지어 모든 도덕적으로 의미있는 영역 안에서 이런 조화가 필연적이라거나 또는 가치가 매겨진 것들을 성취하는 데 특별히 도움이 된다고 말하는 것도 아니다. 많은 도덕적으로 의미있는 직업들, 환자를 간호하는 것과 같은 그런 것은, 더욱 많이 동기에 대해 고렿지 않아도 잘 동일하게 될 수 있다. 그리고, 때때로 밀에 의해 결합된, 윤리학의 아주 큰 부분을 위해 로스가 논증하는 것처럼, 가치와 동기 사이의 조와나 부조화에 대한 철학적인 질문이 간단하지는 않다: 당신은 옳고, 의무로 부과된 것이며, 당신의 동기가 그 행동을 위해서 무엇이든 간에 관계없는 당신의 의무를 할 수 있다. 만약 약속을 지키는 것이 당신의 의무라면, 당신은 당신이 의무를 위한 존중에서 벗어나서, 당신의 호평을 잃을 것에 대한 두려움, 또는 다른 어떤 것에서 약속을 지키든 그렇지 않든 상관없이 그 의무를 충족한다. 동기부여하는 것은 옳음, 의무적으로 부과됨, 의무가 고려된다는 것과는 매우 멀게 무관하다.


  옳음, 의무적으로 부과된 의무가 고려되된다 것과 매우 멀리 있는 이런 시각의 의심스러운 정확함에도 불구하고, 적어도 두 가지 문제가 남는다. 첫 번째는 심지어 여기에서 조화의 문제가 여전히 남는다는 것이다. 그들의 의무는 하지만 젅혀 혹은 거의 원하지 않는 것을 하는 사람들은 어떤 삶의 방식을 가질까? 둘째, 의무, 책임, 그리고 옳음은 단지 윤리학의 하나의 부분 – 게다가, 단지 한 작은 부분, 한 건조하고 사소한 부분 – 이다. 개인적인 또는 개인 사이의 관계와 활동의 가치들의 전혀 다른 영역이 있다; 그리고 또한 도덕적인 좋음, 잘함, 덕의 영역도. 두 경우 모두 안에서, 동기는 가치있는 것의 핵심적인 부분이다; 두 경우 모두 안에서, 동기와 이성은 반드시 현실화된 가치들을 위해 조화 속에 있어야만한다.


  이런 이유들 그리고 이런 조화가 좋은 삶의 징표라는 이유 때문에, 이런 조화를 무시하는 모든 이론은 거대한 모험을 한다. 이런 조화를 어렵게 만들고 배제하는 모든 이론은, 만약 자신의 잘못을 깨닫지 못한다면, 아주 많고 강력한 방어의 요구 속에서만 선다. 내가 논증하고자 하는 것은 이런 근대윤리이론들이 – 이런 이론들은 영국말마따나 철학적 세계 안에서만 두드러지는데 – 이런 조화를 불가능하게 만든다는 것이다.



근대윤리학들에 대한 비판


  우리의 도덕적 삶의 복잡함과 광대함에 대한 반성, 즉 가치를 가지는 것에 대한 반성은 최근 윤리이론들이 확실히 의무, 옳음, 그리고 책임에 대해 과하게 집중해왔다는 것을 보여준다. 이런 실패 – 과한 집중의 실패 – 는 동기 또는 가치를 향한 동기들의 관계를 다루지 않은 것의 실패를 위한 것 뺀 나머지에는 관대할 수 없었다.(따라서, 첫 실패는 둘째를 지지하고 또한 설명한다, 마찬가지로.) 이러한 둘째 실패 안에서, 우리는 이런 과한 집중보다 더한 근대윤리이론들의 더욱더 심각한 실패를 찾을 수 있다 : 그들은 가치의 생생하게 중요하고 널리퍼진 영역 안에서 이성과 동기 사이의 정신분열증을 필요로 하거나, 또 다르게는 그들은 우리에게 도덕적으로 허약한 삶, 즉 가치 있는 것 안에서 깊게 불만족스러운 하나의 삶에 우리를 따르게 한다. 이것은 도덕적인 사람들, 다시 말해 가치있는 것을 성취하려고 하고, 이런 윤리이론들 위에서 행동하며, 그들을 그들의 동기들에 포함시키려고 하는 사람들에게는, 가능하지 않다. 그들을 그들의 동기들에 포함시키려는 사람들은, 이러한 이유 때문에, 가치있는 것이 심각하게 부족한 한 삶을 가질 것이다.


  그러므로, 이런 이론들은, 이중적인 결함이 있다. 윤리이론들로서, 그들은 한 사람이 종합적인 방식 안에서 좋은 것을 성취하는 것을 불가능하게끔 만드는 것에 의해 실패한다. 마음, 근거들과 동기들, 그리고 인간의 삶과 활동에 대한 이론들로서, 그들은 단지 심리학적으로 불편하고, 어렵고, 또는 심지어 지킬 수 없는 위치 안으로 우리를 집어넣은 것에 의해서 뿐만이 아니라, 우리와 우리의 삶을 핵심적으로 조각조각 쪼개놓고 일관성이 없게 만드는 것에 의해서까지 실패한다.


  내가 마음 속에 가지고 있는 이러한 부조화의 방식은 쾌락주의적인 이기주의자들에 의해 유형화된 이기주의자들을 위한 문제를 고려하는 것에 의해 분명해질 수 있다. 사랑, 우정, 애착, 동류감정, 그리고 공동체는 개인의 즐거움의 중요한 원천이다. 그러나 저런 이기주의자들은 이러한 즐거움을 얻을 수 있는가? 난 그렇지 않다고 생각한다 – 그들이 자기를 위한 즐거움의 동기를 향해 집착하는 한에서는 그렇지 않다.


  이것을 위한 근거는 이기주의자들이 사랑하는 관계 속에 들어가려고, 함께 어울리고 결정하고, 이런 것처럼, 할 수 없다는 것이 아니다. 당연하게 그들은 그렇게 (저런 한 행동을 하는 것을 결정하는 것에 대한 관련성이 적은 문제들을 떠나서 생각하면) 할 수 있다. 그리고 그들은 저런 즐거움을 줄 수 있게 계산된 여러 가지 것들을 할 수 있다: 아주 매력적인 대화를 갖는 것, 사랑하는 것, 맛있는 밥들을 먹는 것, 재미있는 영화를 보는 것들, 그리고 그 밖에도 아주 많은 것들.


  더 적지 않게, 이런 한 삶에는 필수적으로 부족한 어떤 것이 있다: 사랑. 한 사람이 사랑받을 사람을 위해 돌보는 것, 한 사람이 사랑받을 사람의 목적을 위해서 행위할 준비가 되어있다는 것은 사랑의 이러한 개념에 핵심적이다. 더 강하게, 한 사람은 반드시 사랑받을 사람을위해 돌보아야만 하고, 또한 마지막 목표인 것처럼 그 사람의 목표를 위해서 행위해야만 한다; 사랑받을 사람, 또는 사랑받을 사람의 복지나 이익은 반드시 한 사람의 고려와 행위의 마지막 목표가 되어야만 한다.


  당신을 위한 나의 고려사항이 – 또는 심지어 당신을 기쁘게 만들려는 나의 시도 – 문제없는 삶, 즉 나를 위해 개인적으로 즐거운 하나의 삶을 이끌려는 나의 욕망으로부터 온다는 것의 확장에, 나는 당신의 목적을 위해서 행위하지 않는다. 짧게 말해, 나는 나 자신을 위한 행복 – 또는, 더 일반적으로, 좋은 것 – 을 얻는 것을 마지막 목표로 당신을 향해 다양한 방식들 안에서 행위한다는 것의 확장에, 나는 당신의 목적을 위해서 행위하지 않는다.


  우리가 그것에 대해 이런 방식을 생각했을 때, 우리는 아마도 이기주의가 종종 핵심적으로 고독하다는 것이 주장되는 이유에 대한 몇몇 생각을 얻을 수 있다. 그것이 핵심적으로 우리에 대한 그들의 효과들을 제외한 다른 사람들과의 외적인 관계와 함께 생각되기 때문에, 한 사람은 어떤 다른 사람들 또는 심지어는 어떤 다른 사람들에 비해서 구별된다거나, 더 중요하다거나, 가치있다거나 또는 중요하지 않다. 개인들은 이런 방식으로 중요하지 않고, 단지 우리에 대한 그들의 효과들만이 그렇다; 그들은 같은 효과를 그만큼 할 수 있는 다른 어떤 것과도 핵심적으로 교체가능하다. 그리고 내가 제안하기에, 이것은 개인적으로 허용되지 않는다다. 이런 방식으로 당신 자신에 대해 생각하는 것, 또는 이런 방식으로 당신이 사랑하는 사람이 당신에 대해 생각한다고 믿는 것은, 허용될 수 없다. 그리고 이런 개념적, 그리고 그 만큼이나 심리학적인 이유들 때문에 그것은 사랑과 부조화스럽다.


  이런 방식의 사랑을 가진다는 것은 더욱더 중요하지 않다는 것은 아마도 가정될 수 있다. 그러나 이것은 아주 심각한 실수가 된다. 이런 사랑은 단지 근대적인 낭만이나 성애적인 것이 아니다. 이것은 가족의 구성원들 사이의 사랑, 우리의 가장 가까운 친구들을 위해 우리가 가진 사랑, 그리고 또 다른 것들 또한 아니다. 대체 그들의 고유한 이익을 향한 수단인 경우를 제외하면 다른 어떤 사람을 위해서도 돌보지 않았던 사람이 가진 삶의 방식은 무엇인가? 그리고, 오직 그들이 다른 사람의 이익에 봉사하는 방식을 위해서인 경우에만 그렇고, 그들의 고유한 목적을 위해 그들을 사랑하는 사람이 아무도 없다는 것을 얻은 사람이 가지는 삶의 방식은 무엇인가?


  단지 다른 이의 목표를 위해서 무언가를 하는 것, 또는 그 사람의 목표를 위해서 그 사람을 돌보는 것에 대한 개념은 사랑에 핵심적인 것처럼, 마찬가지로 그것은 친구와 모든 애착하는 관계들에 핵심적이다. 이것 없이는, 가장 좋은 상태에서도 우리는 좋은 관계, 친근한 관계를 가질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비스하게, 이런 돌봄과 존중은 동류감정과 공동체를 위해서 중요하다.


  더 진행하기 전에, 이기주의에 대한 이 비판과 좀 더 표준적인 것을 대조해보도록 하자. 나의 비판은 다음과 같이 나아간다: 쾌락주의적 이기주의자들은 그들의 고유한 즐거움을 행위들, 활동들, 삶의 양식들의 유일한 정당화에서 취한다; 그들은 이런 사랑, 우정, 애착, 동류감정, 그리고 공동체가 가장 큰 개인적인 즐거움(의 원천) 사이에 있다는 것을 깨달아야만 한다. 그러므로, 그들은 저런 관계들에 들어갈 좋은 이유를 그들의 고유한 토대 위에서 가진다. 그러나 그들은 이런 즐거움, 이런 크게 좋은 것들을 가지려면 요청되는 방식들 안에서 행위할 수 없는데, 그들이 자기를 위한 즐거움의 그들의 동기 위에서 행동할 경우 그렇다. 그들은 의도적인 사랑받을 사람들과 친구들 등등의 목적을 위해서 행위할 수 없다; 그러므로, 그들은 사랑할수도, 친구가 되거나 가지는 등등을 할 수 없다. 이러한 큰 개인적인 좋은 것들을 성취하려면, 그들은 이런 이기주의자적인 동기를 거부해야 한다. 그들은 그들의 동기 속에서 그들의 근거를 구체적으로 표현할 수 없다. 그들의 근거들과 도기들은 그들의 도덕적 삶을 정신분열증적으로 만든다.


  이기주의자들에 대한 표준적인 비판은 그들의 단순히 이런 이기주의자적이지 않은 좋은 것들을 성취할 수 없다는 것, 행위에 대한 그들의 경로는, 그 원리의 성질 때문에, 타당한 방식 안에서 그들 스스로를 다른 사람들에게 참여시키는 것으로부터 그들을 멀어지게 한다는 것 등등이다. 이런 비판은 명백하게 옳지는 않다. 내가 보여준 것처럼, 그들이 이기주의자들이라는 것을 그들이 잊도록 허용할 정책, 즉그들이 그 사람의 고유한 목적을 위해 다른 사람을 돌보는 것처럼 이런 마지막 목적들과 동기들을 발전시키도록 허락하거나 심지어 북돋아주는 정책에 대한 이기주의자들의 수용함 속에서 부조화스러운 것은 없기 때문이다.


  몇몇 질문들이 이런 답변에 대해서 질문되어야만 한다: 이렇게 전환된 사람은 여전히 이기주의자가 되는가? 그 사람이 이기주의자로 남는다는 것은, 이기주의의 방어를 위해서, 중요한가? 또는 단지 그 사람이 이기주의자에 의해 시인될 방식 안에서 사는 것만이 중요한가? 물론, 이기주의자인 사람이 그/그녀 스스로의 의식적인 조절을 잃어버렸다는 것은 이기주의자적인 동기에서 다른 사람을 돌보는 것을 향한 그 사람의 전환에 핵심적이다. 이것은 이런 사람들이 얼마나 그들의 전환된 스스로가 이기주의자적으로 시인된 목표들을 성취하는 것을 증가시키는 가를 재고 알아볼 수 있는지 아닌지에 대한 질문을 일으킨다. 만약 그들이 충분한 개인적 즐거움 – 또는, 더 일반적으로, 충분한 좋은 것 – 을 얻을 수 없는 경우 그런 전환들을 다시 고치는 것을 그들에게 허락할, 모든 경우에서 즉시 일어나는 그들의 이기주의자적이지 않은 전환들로부터 그들을 깨울 정신적인 알람시계를 가지고 있을 것인가? 나는 이것이 불가능하지 않다고 가정한다. 그러나 이것을 하나의 이상적인, 심지어 아주 만족스러운, 삶으로 보기는 어렵다. 당신이 다른 사람들로부터 반드시 숨겨야만 하는 사적인 성격을 가지는 것은 충분히 나쁘다; 그러나 당신이 당신 자신(의 다른 부분)으로부터 반드시 숨겨야만 하는 성격을 가지는 것을 상상해보라. 여전히, 아마도 이것은 가능하다. 만약 그것이 된다면, 그것은 이기주의자들이 아마도 이런 둘째 비판에 직면할 수 있을 것으로 볼 수 있다. 그러나 이것은 나의 비판을 건드리진 못한다: 그들은 그들의 동기들 속에 그들의 근거를 구체적으로 표현할 수 없을 것이라는 것; 그들은 두 갈래로 갈라진 것, 즉 좋은 것을 성취할 때 정신분열증적인 삶을 이끌어야만 할 것이라는 것.


  이것은 아마도 이기주의로서의 이러한 윤리이론들만의 실패로 생각된다. 그러나 하나의 행위가 옳고, 의무적이고, 또는 즐거움과 고통(또는 그들에 대해 심각하게 고려된 사항)을 고려하는 것 안에서만 긍정적이라고 생각하는 모든 어떤 것이라고 주장하는 이런 공리주의들을 생각해보자. 이런 한 관점은 행위를 위한 단 하나의 좋은 근거는 즐거움과 고통의 대결이며, 그리고 그러므로 사랑, 우정, 애착, 동류감정, 그리고 공동체에 높게 가치를 매겨야 한다는 것을 가지고 있다. 이제, 당신이 이런 공리주의자들의 근거를 당신의 행위들과 어떤 한 사람을 향한 생각 속에 당신의 동기로서 구체적으로 표현한다고 가정해보자. 그 사람을 향한 당신의 관계가 무엇이든, 이것은 필연적으로 사랑이(또한 우정도, 애착도, 동류감도, 또는 공동체도) 아니다. 당신이 가정한 그런 사랑을 한 그 사람은 그/그녀 자신을 위하지 않게, 그러나 즐거움의 원천으로서 더욱 당신의 생각과 행위에 참여할 것이다.


  이 문제는 즐거움이 유일한 선한 것으로 취해진다거나, 유일한 옳음을 만들어내는 요소가 된다는 것이 간단하지 않다는 것이다. 이것을 보는 것은 무어의 형식주의적인 공리주의, 즉, 모든 좋은 것들에 대해 정의하고 있었던 주장하는 것이 없이, 우리에게 좋음을 최대화하라고 말하는 것을 고려한다. 만약, 내가 그것을 가지고 있고 또는 무어가 동의한 것처럼, 사랑 관계와 이 같은 것이 좋은 것이라면, 얼마나 여기에 어떠한 부조화도 있을수 있을까? 한 동기와 여전히 사랑인 무어의 정당화하는 이유를 구체적으로 표현하는 것은 가능하지 않을 것인가? 나는 그렇지 않다고 생각한다.


  첫째, 만약 당신이 선함의 목적을 위해서 그 관계를 계속하기를 시도한다면, 심지어 이런 활동들에도 핵심적인 수행이 없을 것인데, 참여하는 사람들이 훨씬 적다. 선함에 포함되는 것에 한해서, 당신은 스키를 타거나 또는 시를 쓰거나 또는 상큼한 식사를 하거나 하는 것 만큼이나 잘 사랑할 것이다. 아마도 그것은 그 좋음, 사랑의 좋은 것 – 그것을 이제 단지 좋다는 것이 아닌 좋은 것으로서 또는 이 좋음으로 다루는 것 – 에 대한 어떤 특별한 것이 있다고 답변받게 될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경우 안에서, 개인들이 고려되는 한에서 다시 비인격성이 있다. 이 좋음에 대해서만큼 이끌어내는 모든 다른 사람은 사랑받을 것으로서 사랑의 대상이 적절히 될 것이다. 이것을 향해 찾아질 것인 저 좋음이 있다는 것은 아마도 답변받게 될 것이다 – 인격적이고 개인적인 속성, 즉 이런 사람들을 함께 묶어주는 속성에 대한 출현과 함께. 그러나 이제 좋음의 감각이 찾아진다는 것, 또는 그 이론이 여전히 우리에게 좋음을 최대화하라고 말하고 있다는 것은 확실하지 않다. 사실, 그 이론은 우리에게 이 좋음을 제공해주지만, 이제는 그것의 좋음으로부터 좋은 것, 즉 사랑을 분리시킬 수 없다. 이것은 간단하게 무어의 공리주의가 아니다.


  단지 이기주의와 공리주의의 더 나은 방식들은 근거와 동기 사이의 정신분열증을 필요로 하기 때문에 – 그리고 단지 그들은 사랑, 우정, 애착, 동류감정, 공동체를 허락할 수 없기 때문에 – 우리는 요즘의 규칙공리주의에 이렇게 했다. 그리고 요즘의 의무론들에게도 이렇게 할 것이다.


  이런 이론들 안에서 부족하게 되는 것은 간단하게 – 또는 그렇게 간단하지는 않게 – 사람이다. 사랑, 우정, 애착, 동류감정, 그리고 공동체 모두가 다른 사람이 가치있는 것의 핵심적인 부분이 되어야 하는 것을 요구하기 때문이다. 사람 – 단지 사람의 일반적인 가치 또는 심지어 일반적인 가치의 제작자 또는 소유자로서의 사람이 아닌 - 은 가치있게 매겨져야 한다. 사랑을 고려할 때 이런 이론들의 실패는, 한 경우를 취해보면, 그들이 사랑에 가치를 매기지 않은 것(종종 그들이 그렇게 하지 않는)이 아니라, 그들이 사랑받을 것에 가치를 매기지 않기 때문이다. 게다가, 단순한 사랑, 말하자면, 일반적인 사랑과 심지어 이 사람에 의해 일반적으로 예증되는 사랑에 가치를 매기가 그것을 목표로 하는 사람은, 내가 비판하고 있는 그 이론들의 신봉자들이 그렇게 하는 만큼 당연한 의도적인 사랑받을 이를 놓친다.


  그러나, 이런 이론들과 함께인 문제는 가치있는 것으로서의 다른 사람과 함께인 것이 아니다. 이것은 간단하게 – 또는 그리 간단하지 않게 – 가치있는 것으로서의 사람들과 함께이다. 단지 그들이 다른 사람들을 마주하여 하는 것처럼, 근대윤리이론들은 우리 각각을 사랑하는 것, 돌보는 것, 또 우리 스스로에게 가치를 매기는 것으로부터 떨어뜨린다 – 사랑하는 것, 돌보는 것, 우리의 일반적인 가치 또는 우리 스스로를 일반적인 가치를 만드는 사람 또는 소유한 사람으로 가치를 매기는 것에 반대하는 것으로서. 이런 외부적으로 지배되는 이론들 속에서, 다른 사람들에 대해서 만큼이나 자아의 사라짐 또는 나타나지 않음이 있다. 본질적으로 가치가 매겨지는 것에 대한 이런 외부적으로 지배되는 우주는 유아론적이지 않다; 그들은 모든 사람들이 결여되어있다.


  이런 사람들을 다루는 것이 어렵다는 것은 자명하다. 그들의 고유한 목적을 위해 그들을 돌보는 것은 정말로 어렵다. 그것은 심리학적으로 약해지고 소진된다. 그것은 우리를 너무 개방적이고, 너무 상처입기 쉬운 위치로 밀어넣는다. 그러나 또한 반드시 보게 되어야 할 것은 그것이 우리에게 하는 것 – 개인적으로 그리고 모임들 안에서 짝들 만큼이나 작고 또한 사회만큼이나 큰 것에서 취하는 – 즉, 일반적이고 또한 특별하지 않은 가치의 단순한 수단들 또는 용기들로서, 핵심적으로 바꿀 수 있는 것으로서, 다른 사람을 외부적으로 보고 다루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이 그렇게 다뤄지거나, 또는 우리가 다뤄진다고 믿게 하는 것이 이런 방식으로 하게 된다.


  아주 적어도, 이런 방식들은 비인간화한다. 이것보다 훨씬 더 많은 것을 말하는 것은 어떻게 사랑과 우정같은 이런 개인적인 관계가 가능한지, 어떻게 그들이 인간의 삶의 더 큰 방식과 구조들과 관계를 맺는지, 그리고 어떻게 그들이 – 그리고 아마도 그들만이 – 인간의 삶을 살만한 가치가 있게 구성하는 이런 관계들의 발전을 허락하는지 보여줄 꽉찬 규모의 철학적 인간학을 요구한다: 요약하자면, 어떻게 그들이 좋은 삶의 꽉 참, 즉 에우다이모니아의 삶을 만들어내는 데 함께 일하는지를 설명해야 한다.


  이것을 말하면서, 가치 있는 한 사람에 대한 개념 속에, 한 사람의 가치를 매기는 것에 대한 개념 속에 많은 불투명성들과 어려움들이 있다는 것을 반드시 유념해야만 한다. 우리가 이것에 대해 생각할 때 – 예를 들면, 무엇에 우리가 가치를 매기는지, 그리고 왜 가치를 매기는지 – 우리는 사람을 빼먹고 또한 일반적인 가치의 제작자 또는 소유자로서의 사람 또는 인간의 일반적 가치들로 마무리하거나, 또는 그들을 빼먹고 또한 거의 특별하지 않은 자아로 마무리하는 것 둘 중에 하나로 이끌리는 것처럼 보인다.


  이 모든 것 안에서, 아마도 우리는 이기주의자로부터 배울 수 있다. 그들의 본능은, 적어도, 그들 스스로를, 각자 스스로를, 그들의 가치들 속으로 넣는 것을 허락하게 되어야만 한다. 이것 바보같음의 위험 – 적어도, 그들의 시점의 표현의 완벽한 상실의 위험 –에서 그들이 자신을 위해서 좋은 것에 대해 매력적이고 좋다는 매력을 찾는 것은 반드시, 단순히 좋은 것만이 아니라 자신을 위해서 탁월하기까지 해야만 한다.


  이런 점에 주목했을 때, 그것은 아마도 내가 하려고 시도하는 것들의 몇몇 또는 내가 하지 않아왔던 몇몇을 다시 말하는 데 도움을 준다. 처음부터 계속 나는 만약 그들이 사랑, 우정, 애착, 동류감정, 그리고 공동체의 아주 큰 좋음들을 현실화할 수 있다면 사람들이 가질 수 있는 동기의 종류들은 무엇인가에 대해 고려하고 있다. 또한 나는, 만약 우리가 이런 동기들로서, 즉 우리의 동기들이 구체적으로 표현된 것, 최근의 윤리이론들이 최고로 좋거나 또는 옳다고 주장하는 저런 다양한 것으로 받아들인다면, 우리는, 필연적으로, 저런 동기들을 가지는 것을 못할 것이다. 사랑, 우정, 애착, 동류감정, 그리고 공동체 등 이와 같은 다른 상태들과 활동들은, 핵심적으로 특정한 동기들을 구성하고 또한 핵심적으로 특정한 다른 것을 제외한다: 이런 제외된 것들 사이에서 우리는 정당화들, 목적들, 가장 최근 각광받는 이런 윤리이론들의 좋은 것들을 형성하는 동기들을 찾는다. 최근의 윤리이론의 가치들을 한 사람의 동기들 속에 구체적으로 표현하는 것은 사람들을 외면적으로 다루는 것이고 또한 사랑, 우정, 애착, 동류감정, 그리고 공동체를 – 다른 사람들과 그 스스로 둘 다에서 – 제외하는 것이다. 이런 최근의 윤리이론들을 붙잡아두고 있는 동안 이런 거대한 좋은 것들을 얻는 것은 근거와 동기 사이의 정신분열증을 필요로 한다.


  나는 만약 당신이 성공적인 사랑관계, 우정 등등등을 가진다면, 당신은 정당화들, 목적들, 이런 이론들에 의해 가정된 좋은 것들을 성취하는 것을 못하게 될 것이라고 주장하지 않아왔다. 당신은 이들을 성취할 수 있는데, 이런 이론들을 직접 살려고 시도하는 것에 의해서는 아니다. 또는, 더욱 분명하게, 당신이 이런 이론들을 직접 살려는 것의 확장은, 그런 선들을 성취하는 것에 실패할 것이라는 것의 확장이다.


  나는 오직 사랑, 우정, 애착, 동류감정, 그리고 공동체의 개인적인 감정을 향한 고려 속에서만 부조화, 갈라짐, 정신분열증의 책임을 추진해왔다는 것까지 했다. 저것들의 중요성은, 내가 생각하기에, 나날들을 지속시키는 데 충분하다는 것이다. 그러나, 한 가지 더한 영역을 보자: 이해, 지혜를 위한 탐색으로서 취해진 연구. 내가 여기에 덜 당연함에도 불구하고, 나는 또한 몇몇 것들의 많음은 적용을 충전한다고 생각한다.


  아마도 다음에 보일 것은 단지 특별한 경우이지만, 그러나 생각할만한 가치는 있게 보일 것이다. 당신은 정신병동을 바라보고 있고, 또한 자연스럽게 나갈 것을 강하게 바랄 것이다. 당신은 정신과의사에게 당신이 풀려나게 되는 것은 언제인지 물어본다: 그는 ‘조금만 이따가요.’ 라고 대답한다. 당신은, 그가 진짜 믿는 것을 환자에게 말하는 것 대신에, 그는 그들에게 그가 믿는 것이 그들이 듣기에 좋은 것을 말해준다.(또는 그들이 믿는 것이 좋다고 그가 믿는 것.) 아마도 당신은 그의 의학적 이론들과 당신에 대한 그의 믿음들을 발견하는 것에 의해 그의 코드를 깰 수 있을 것이다. 덜 하지 않게, 그와 함께 하는 당신의 더 나은 대화는 – 만약 그들이 그렇게 불려질 수 있다면 – 연구의 모형이 되기 매우 어렵다. 나는 우리가 아마도 신의 영광을 위해, 가장 큰 즐거움을 위해, 또는 심지어 가장 큰 선을 위해 그들의 고유한 목적을 위한 연구 안에 참여하는 사람들과 직면했을 때 하나의 다른 위치 안에 있게 된다는 것이 당연하지 않지 않다고 생각한다. 다시 말해, 우리는 아마도 그들의 코드들을 잘 깰 수 있을 것이다 – 예를 들면, 우리는 어떤 한 사람이 학문적인 승진을 위한 그의 가장 큰 기회는 특정한 영역 안에서 진리를 찾아내는 것이라고 믿는다는 것을 찾아낼 수 있다. 덜하지 않게. ...


  (모든 여기 제시된 것의 ‘그러나 만약 그가 늙은 교수를 향해 가장 큰 즐거움인 것이 승진을 늘려줄 것이라고 믿게 된다면; 그리고 우리는 그가 진짜로 믿는 것을 어떻게 말할 수 있는가?’는 나머지 의심인가? 그리고 그것은 ‘그러나 만약 그가 이러한 진리에 가치를 매기는 것을 제거한다면; 그리고 그가 진짜로 가치를 매기는 것을 우리는 어떻게 말할 수 있는가?’로부터 핵심적으로 다른가? 아마도 만약에, 단순한 지식이 아닌, 이해력이 목표라면, 한 차이가 있다.)


  이것은, 동기들과 그들의 평가가 명백하게 고려된 이런 영역들 안에서, 윤리이론들은 우리를 이런 부조화 또는 도덕적으로 실패한 삶과 만나게하는 것으로 이끌지는 못할 것이다. 그리고 이런 기대의 몇몇 확장을 향해 만나게 된다. 그러나 심지어 도덕적으로 잘한 일과 못한 일, 도덕적으로 칭찬받을만함과 비난받을만함, 도덕적인 덕들과 악덕들에 대한 고려 안에서도, 이 상황은 완전히 다르지 않다. 다시 말해, 외면성의 문제와 비인격성, 그리고 부조화에 접속됨이 일어난다.


  표준적인 시점은 도덕적인 선한 의도가 도덕적인 선한 행위의 핵심적인 구성요소라는 것을 가진다. 이것은 충분히 옳은 것으로 보인다. 이러한 시점 위에서, 더 나아가, 도덕적인 좋은 의도는 그의 좋음 또는 옳음의 목적을 위한 한 행위를 하려고 하는 의도이다. 그러나 지금, 긴 아픔으로부터 회복하기 위해, 당신은 병원 안에 있다고 가정해보자. 당신은 매우 지루하고 불편하고 스미스가 다시 한 번 올 때 혼란스러울 것이다. 당신은 이제 그가 아주 괜찮은 동료이고 또한 진정한 친구라는 것이 그 어느때보다도 더 확신되어야 한다 – 당신을 응원하는 데 아주 많은 시간을 쓰는, 마을을 가로지르는 모든 길을 여행하는 등등의. 당신은 당신의 칭찬과 그가 생각하는 것의 그의 의무인 것, 그가 생각하는 것이 가장 좋은 것이라고 하려고 그가 언제나 시도하려는 것에 그가 저항하는 것을 고마워하는 것들에 대해 감정이 과잉될 것이다. 당신은 가장 먼저 그가 도덕적인 짐을 줄여주는 것, 자기 반대의 친절한 형식 안에 참여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당신이 두 가지를 많이 말하면 할수록, 그것은 그가 글자 그대로의 진리를 말해주고 있었다는 것이 된다는 것이 더욱 분명해진다: 그가 당신을 보게 되었다는 것은 핵심적으로 당신 때문이 아닌데, 그것은 당신이 친구이기 때문이 아니라, 그가 그것을 그의 의무, 아마도 기독교이 또는 공산주의자 또는 어떤 무엇으로서의 의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며, 또는 단순하게 그가 더욱 응원하는 것의 필요 안에 있는 누군가 그리고 응원해서 더 좋게 될 누군가를 알지 못했기 때문일 수도 있다.


  당연하게도 여기에는 어떤 부족함이 있다 – 그리고 도덕적인 잘한 일 또는 가치의 부족함이다. 이 부족은 두 가지 관련된 점에서 책임이 지워진다: 다시 말해, 이것의 나쁜 방식은 적절한 동기가 된다고 말한다; 그리고, 적어도 이 경우 안에서, 이것의 나쁜 방식은, 다시 말해, 핵심적으로 외면적이다.



  몇몇 질문과 결론을 맺는 소견


  나는 윤리이론들의 근거들, 가치들, 정당화들은 우리의 동기들 안에서 그들을 구체적으로 표현할 수 있도록 허락하면서도 여전히 도덕적으로 행동하고 동시에 좋은 것을 성취할 수 있도록 하는 이런 것이어야 한다고 가정해왔다. 그러나 왜 이것을 가정하는가? 아마도 우리는 간접적인 수단을 북돋우는 것으로써 윤리 이론을 취해야만 한다 – 어떤 다른 것을 찾는 것에 의해서 우리가 원하는 것을 얻는 것: 예를 들면, 몇몇은 모든 이의 그것을 찾는 것에 의해서가 아니라 모든 이의 그/녀의 고유한 잘삶을 찾는 것에 의해서, 모든 것의 경제적인 잘삶이 현실화된다고 말한다. 또는 아마 우리는 좋은 것 그리고 옳은 것에 대해서 결정되는 것이 아닌, 단지 지표들을 주는 것으로서만 윤리이론들을 취해야 한다.


  간접적인 것의 이론들은 그들의 특별한 문제들을 가진다. 언제나 우리는 우리가 진짜로 원하는 것이 아닌 다른 어떤 것을 얻게 되는 큰 위험이 있다. 또한, 이러한 연관된 두 가지 문제들이 있다. 간접적인 것을 변호하는 한 이론은, 어떤 행위를 위해서 어떤 동기들이 적당하다는 것을 우리에게 말하면서, 동기부여의 다른 이론들에 의해 논증되는 것이 필수다. 이런 한 이론은 또한, 동기와 진짜 목표 사이의 연결, 간접적인 연결을 설명해야 한다.


  둘째, 사회의 경제학으로서의 이러한 큰 규모와 다양한 사람들의 요소 안에서 간접적인 것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은 아마도 크게 문제를 일으키지는 않는다. 그러나 이런 개인적인 생각의 무엇에 대한 고려 안에서, 윤리학으로서 한 사람에게 아주 닫혀있고 또 내면적인 이런 것은, 간접적인 것의 대화는 수용불가능과 좌절을 둘 다 겪는다. 우리는, 적어도 사랑, 우정, 애착, 동류감정, 그리고 공동체 안에서 적어도 그렇지 않은데, 간접적인 것에 의해 행동하는 것으로 보이지 않다는 것이다. 이런 경우들 안에서, 우리의 동기는 우리의 근거를 하는 것으로서의 사랑받는 누군가, 친구 등등등과 함께 직접적으로 하는 것을 갖는다. 사랑스런 아이 또는 부모를 위해 무언가를 하는 것 안에서, 최근의 윤리 이론들 안에서 토대가 다져지는 이유들을 나타낼, 또는 심지어 생각할 필요는 없다. 간접적인 것의 대화는 좌절하는데, 행위 그리고 이해의 실패에 대한 느낌 안에서, 우리는 그들을 정당화하는 것이 필수적인 사랑으로서의 이런 할동들을 넘어선 무언가가 있다는 것을 믿기 시작하는 한 순간 때문에, 그것은 단지 우리가 그들을 계속할 수 있게 되는 자기기만을 향한 것과 같은 종류에 의해 그렇게 된다.


  이런 윤리이론들에 대한 한 부분적인 방어는 그들이 근거와 동기 둘 다로서 봉사할 수 있는 것을 공급하는 것이 의도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들은 단지, 결정하는 것들이 아닌, 좋음과 옳음의 지표들을 공급하는 것만을 의도한다. 형식적으로, 이런 방식으로 윤리이론들을 취하는 것 안에는 아무런 문제가 없다. 왜 우리는 이런 이론들, 그에 대해 행동될 수 없는 이론들에 고려되어야만 하는가? 왜 근거와 동기 사이의 조화를 허용하는 이론을 간단하게 가질 수 없는가? 그리고 게다가, 우리는 이런 이론을 가지는 것이 필요하지 않을 것인가? 사실, 우리가 분석하기 이전에 갖는 시각은 아마도 지표 이론들 사이에서 판단하는 데 충분할 것이다; 우리는 아마 옳은 지표이론을 찍어내는 결정적인 이론을 필요로 하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왜 지표가 옳은지, 왜 그것이 작동하는지 아는 결정적인 이론을, 왜 그것이 지표화되는지에 대한 것이 좋은지를 알기 위해 필요하지 않게 될까?


  최근 이론들의 다른 부분적인 방어는, 먼저, 그들은 옳음, 부여된 것, 의무감에 고려되며, 윤리학의 전체와 고려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리고, 둘째는, 이런 제한된 영역 안에서, 그들은 부조화와 정신분열증으로부터 아픔을 느끼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런 방어의 몇몇 확장은, 특별히 그의 두 번째 점에 대해서, 이미 다루어졋다. 그러나 더 말해져야만 한다. 그것은 최근의 윤리학자들은 도덕성에 대해 크고 극단적으로 중요한 영역들을 무시해왔다는 것에 의해서 충분히 분명해진다 – 예를 들어, 개인적인 관계의 것과 잘한 일에 대한 그것. 이것을 확장하면, 이 방어의 첫 번째 점은 옳다. 그러나, 매우 분명한 것은, 이런 이론들이 단지 부분적인 이론으로서만 발전되는지 아닌지, 또는 의무 등등이 진짜로 전체, 또는 적어도 윤리학의 단지 중요한 부분이라는 것이라는 것이 그들의 제안자에 의해 믿어지는지 아닌지이다.


  우리는 아마 과거의 동기부여와 믿음을 잊을 것을 충고받고, 또한 간단하게 이런 이론들을 바라보고 또 그들이 어떻게 만들어질 수 있는 용도를 안다. 아마도 그들은 의무와 등등의 시각과 중요함에 대해서 실수를 저지른 것이다. 이것은 그들 고안된 개념들에 대해 옳을 수 있다는 것보다 덜하지 않다. 답변 속에서, 몇몇 논점들은 만들어져야 한다. 첫째, 그들은 이런 개념들, 심지어 필요 이상의 일을 하는 것과 자기고려의 개념에 대한 간략한 연구가 나타내보이는 것으로서의 그 개념들에 대해 실수했다. 둘째, 이런 이론들은 위험하게 잘못 인도하고 있다; 그들은 윤리학의 전부가 외부적으로, 법적인 모형처럼, 지표의 방식 안에서 다루어질 수 있다고 가정하는 것으로서 모두가 함께 쉽게 취해진다는 것 때문이다.(‘법적인 모형’에 대해서는, 밑을 보라.) 셋째, 부분적인 이론으로서의 이런 이론들에 대한 접근은 윤리 이론들 안에서 종합의 엄격한 어려움을 제기한다. 이런 이론들은 이런 고려하기, 예를 들면, 개인적인 관계들로부터 많이 다르다면, 어떻게 그들은 모두가 종합되는가? 물론, 이 셋째 논점은 아마도 의무의 이런 이론들에 대한 비판이 되는 게 아니라, 단지 거대한 다양성과 우리의 도덕적 삶의 복잡함에 대한 인지일 것이다.


  결론적으로, 요즘의 도덕이론들이 어떻게 곡예하는 도덕적 삶 또는 부조화, 정신분열증 가운데 하나를 요청하게 되는지 질문될 것이다. (다소간 사변적인) 답변들의 한 부분은 이런 이론들 안의 의무, 옳음, 그리고 부여된 것의 탁월함에 대해 감싼다. 이런 탁월함은 자연스럽게 개인적인 관계들을 감소시키는 기회 속에서 발전된 이론들에 딱 들어맞는다; 사람들을 함께하게 묶는 그 끈과 다양한 기획들의 마찰을 감소시키는 것이 더욱 더 적어지는 애착일 때의 기회; 상업적 관계들이 가족(또는 가족 비슷한) 관계들을 대체할 때; 개인주의를 성장시키는 것. 그것은 또한 이런 철학자들의 주된 고려와도 딱 들어맞는다: 법적인 것. 법적인 것에 대해 고려할 때, 그들은 의무, 옳음, 부여된 것에 대해 고려한다(물론, 그러면 질문은, 왜 그들은 법적인 것, 특히 이런 방식에 대해 관심이 있는가? 이것의 몇몇 작은 확장은 답변되었지만, 이것에 대해 더 말해질 수 있는 것은 없다. 이런 재판관의 관점에서부터 도덕성을 바라볼 때, 이런 법적인 것을 모형으로 취할 때, 동기부여는 아주 쉽게 부적절하게 된다. 그 재판관은 행해지거나 행해지지 않은 다양한 것들을 원한다; 왜 그들에게 그것이 해졌는지 또는 해지지 않았는지는 중요하지 않다; 한 사람은 행위에 대해 셈해보고 알 수 있지만, 동기들에 대해서는 아니다(이것은 또한 우리의 감정들과 감정적인 가능성들의 일반적인 가치절하와 함께 묶인다 – 감정들을 단지 느낌들이나 충동들로 취하는 것, 아무런 이성적이고 인지적인 내용이나 강제와 함께이지 않고; 또한 우리를 즐거움을 찾는 사람이나 고통을 피하는 사람들로 취하는 것 – 사랑, 우정, 애착, 동류감정, 그리고 덕을 향한 욕망들이 사람들에 대해 극단적으로 강하게 움직이게 하는 것이라는 것 잊게 하고 거부하게 하는 것.). 이런 것과 연결되는 것은 법적인 것 또는 간단하게 제3자의 시점, 우리에게 다른 사람들은 그들이 행복한 경우, 그들이 그들에게 즐거움을 주는 것들만 하는 경우, 그리고 그와 같은 것들을 더 잘 얻는다고 우리를 확신시키는 그런 시점이다. 그 결과는 원인을 보증한다 – 경험적인 감각 속에서(한 사람은 아마도 인식의 근거ratio cognoscendi와 존재의 근거ratio essendi에 대해 일반적인 경험주의자적인 혼란이 여기서 작동하고 있는지 아닌지에 대해 놀랄 것이다.).


  그러므로, 이런 다양한 요인들은 아마도 이것이 더욱 주목할만한 전도라고 설명하는 것을 도와준다(마르크스의 개념을 사용하여): 그 ‘결과’, 즐거움과 그와 같은 것들을, 그 ‘원인’, 좋은 활동으로 취하는 것.


  무어의 형식주의적인 공리주의와 도덕적인 좋은 행위에 대한 전통적인 시각은 함께 이런 한 전도와 같은 어떤 것으로부터 아픔을 일으킨다. 그러나, 여기에서, 이것은 인과적이지 않고, 철학적이다. 그것은 이런 철학자들이, 이런 다양한 좋은 것들이 좋다고 모두 분류될 수 있다는 것 때문에, 그들의 좋음은, 오히려 반대적인 것 보다도, 이것 안에 있다는 것이 취해진다고 가정된다. 가장 일반적인 분류화는 소외되거나 또는 그 자체로 도덕적으로 관련있는 것으로서 취해지는 것처럼 보인다.


  이런 전도는 아마도 이 논문을 괴롭히는 한 질문에 대답하는 것을 도와줄 것이다: 왜 나는 요즘의 윤리학들이, 오히려 단지 그 이론들이 좋은 것과 나쁜 것, 옳고 그름을 만드는 것의 그들의 명명 안에서 실수를 했다는 것보다는, 정신분열증, 갈라짐, 부조화로부터 아픔을 준다고 말해왔을까? 그것은, 만약 우리가 그른 목표를 목표로 삼았을 경우, 우리는 우리가 진짜로 원하느것, 우리가 좋다고 하는 것, 그리고 그와 같은 것들을 성취하는 것이 그럴듯하지 않다는 것이 충분히 명백하기 때문이다. 단순한 실수 이상을 주장하는 나의 근거는 이 실수는 아주 합리적이라는 것이다; 그것은 진리와 밀접하게 관계맺어져있고, 그것은 진리의 많은 속성들을 낳는다. 오직 두 사례들(나쁜 운과 나쁜 결과들을 제외하면)만을 취해서, 좋은 활동은 즐거움을 안겨준다; 사랑은 명백하게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이익을 안겨준다. 그러므로, 이런 이론들이 좋은 것으로서 진척시키는 것을 좋은 것으로서 취하는 것 안에는 크게 말이 되는 것이 있다. 그러나 우리가 그 이론들 위에서 행위하려 시도할 때, 우리의 동기 안에서 그들의 근거를 구체적으로 표현하려고 시도할 때 - 우리 또는 다른 사람의 삶이 그 이론들에 의해서 시인되는지 아닌지를 간단하게 살펴보는 것에 반대하는 것처럼 - 그러면 아주 미친 방식 속에서, 그것들은 그르게 진행하기 시작한다. 사랑받는 사람들의 개성들은 그들의 결과들을 뛰어넘어가고, 도덕적 행위는 자기무능과 자기실패가 될 것이다. 그리고 아마도 모든 것에 대해 가장 큰 광기는 – 그리고 그들은 타락한 상호관계 속에서 존재한다 – 첫째로, 세계는 점점 더 이런 이론들이 맞는 것이 되게끔 조장하는 이런 것들로 점점 더 만들어지고있다; 그리고, 둘째는, 우리는 이런 이론들을 옳은 것으로 취하고 그러므로 사랑, 우정, 그리고 그같은 것들을, 아주 특정하지 않은, 단지 즐거움이나 어떤 것이든의 가능한 원천으로서 보게 된다. 우리는 이런 원인 때문에 이 결과들을 실수하고, 또한 결과로서 보이는 원인이 결과로서 보이는 원인으로부터 귀결되는 것이 실패할 때, 우리는 결과로서 보이는 원인을 가치절하하고, 추방하고, 아주 좋은 경우, 수단으로서 좋은 것으로 간주하며, 그리고, 우리가 선택한 선들이 너무 좁고, 쓰며, 또한 비인간적인 이유에 놀라면서, 원인으로서 보이는 결과를 맞이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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