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르몽드 디플로마티크 영문판 2012년 2월 1면

굵은 글씨는 해석이 잘 안되는 부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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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5년 전, 르 몽드 디플로마티크는 처음으로 금융거래에 대한 세금을 언급했다.(1) 이 때에, 이런 거래의 가치는 전세계 연간 총 생산의 15배였다. 현재, 이는 거의 70배에 이른다. 그 때로 돌아가보면(Back then), 우리는 서브프라임 대출에 대해 거의 듣지 못하였고, 또한 국가부채위기(sovereign debt crisis)가 있을 수 있다는 것을 상상한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대부분의 유럽 사회주의자들은, 토니 블레어의 영향 아래, "금융혁신(financial innovation)"에 완전히 찬성했다(were all for). 미국에서는, 빌 클린턴이 상업은행(deposit bank)들에게 자기 고객들의 돈을 투기(speculate)하도록 권장하는 일에 종사하였다(was about to encourage). 그리고 프랑스에서는, 미국식 모델에 심취한(besotted) 니콜라스 사르코지가 미국 연방준비위원회(the Federal Reserve)에 의해 설득당한 (잠재적으로 파괴적인) 정책(2)을 찬양했고, 프랑스 스타일의 서브프라임 대출을 꿈꾸었다.


  토빈세를 지지했던(backed) 권력있는 사람은 1997년까지 거의 없었다 : 모든 것은 잘 돌아가고 있었다. 당시 프랑스 재무부 장관인 도미니크 스트로스-칸은 그것이 적합하지 않다고(would not work) 생각했다. 사르코지는 심지어 한 술 더 떴다(incisive). "토빈세 시행(business)은 불합리하다 ... 만약 우리가 여기에서 부의 창출에 벌칙을 매긴다면, 우리는 다른 국가의 부의 창출에 힘을 실어주게 될 것이다."(3) 그가 대통령이 되자마자, 그는 그의 재무부 장관인 크리스틴 라가르드(현재 국제통화기금IMF의 총재(head))에게 주식교환거래(stock exchange transactions)에 매기는 세금을 철회하도록 지시했다. 그녀는 "이 조치는 파리를 금융 중심지로서 더욱 매력적으로 만들 것이다."라고 설명했으며, 그리고 그녀는 이것이 취소되지 않는다면, "거래들은 이런 종류의 세금이 오래 전부터 폐지되어왔던(taxes of this kind have long since been abolished) 다른 외국 중심지들에서 만들어질 것이다."고 경고했다.(4)


  이제는, 정책입안자들이 세금감면으로부터 성장한 대부분의 "금융혁신"을 만들 것이라 기대했던 그 때에 그들이 무책임했다는 것이 명백하다. 미국은 은행들을 구조하였고 또한 그들에게 그들 스스로를 위해서 더 많은 이익을 만들 수 있을 때에만 돈을 돌려달라고 요청했다(asked them in return only to make even fatter profits for themselves). 그러나 금융통제에 대한 아무런 결정도 내려지지 않았다; 그저 "세계를 지배하는 돈"에 대한 더욱 많은 불평만 있을 뿐이다. 미국에서는, 심지어 완전히 보수주의적인 공화당 후보조차도 지금은 "들어와서, 당신의 회사의 모든 돈을 가져서는, 그들이 수백만 달러와 함께 사라지는(go off) 동안 당신에게는 파산만 남긴"(5) "욕심쟁이(vultures)"들을 비판한다.


  그래서, 그의 대통령 임기가 끝나기 네 달 전, 사르코지가 이제 "금융정책은 그들이 가져온 상처를 복구하는 것을 돕도록 만들어져야 한다."고 말한 것은 전혀 놀랍지 않다. 아무도 금융거래에 매기는 세금의 "불합리성"이나, 거위-투기-가 그의 황금알을 다른 국가에서 낳을 수도 있다는 위험성에 대해서 말하지 않는다.


  우리는, 경제학자 제임스 토빈이 오래전에 충고한 것처럼, 여전히 "우리의 무절제하지만 영향력있는 금융시장(money markets)에 한 줌 모래를 던지는" 것에 만족 할 수도 있었다. 그러나 이런 시장은 명백하게 그 주주들이 국가를 담보로 삼을 능력을 가진 핵심적인 공공 자산이라는 의미가 있기(represent) 때문에, 우리는 더 많은 것을 해야한다. 지금부터, 우리는 은행이 사적 이익의 손 안에 들어가는 것을 멈추라고 주장해야만 한다. - 영문번역 : 바바라 윌슨(Barbara Wilson), 한글중역 : 박효진



각주-

(1) 이브라힘 와드(Ibrahim Warde)의 "투기꾼이들이 싫어하길 좋아하는 세금(The tax which speculators love to hate)"과 이냐시오 라모네(Ignacio Ramonet)의 "시장을 무장해제함(Disarming the markets)"를 각각 보시오. 르 몽드 디플로마티크, 영문판, 1997년 2월과 1997년 12월.

(2) "만약 내가 누군가를 모범으로서 삼아야 핬다면, 그것은 아마도 앨런 그린스펀일 것이다." 그는 2004년 6월 23일 파리의 르 에코(Les Echos) 지에 실린 인터뷰에서 이렇게 설명했다. "그는 항상 실용주의와 인간성과 함께 행동해왔다."

(3) 1999년 6월 2일, 프랑스2 채널

(4) 프랑스 의회에서의 토론 중의 연설, 2007년 11월 23일

(5) 뉴트 깅그리치, NBC 오늘의 쇼(Today Show), 2012년 1월 9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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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vid Hume의 「Of the Original Contract」의 일부를 해석. 이 글은 원래 『Essays on Moral, Political and Literary』에 실려있으며, 내가 본 대본은 『Reading Political Philosophy』에 재수록된 것. 근대정치사상 발표를 위한 초벌.> 

  David Hume(1711~76)은 아마도 18세기에 가장 중요한 철학자일 것이며, 정치철학에 대한 기여도 아주 풍부하다. 1748년에 발표된 그의 논문에서 발췌한 이 글에서, 흄은 로크와 같이 계약이라는 말로 정치공동체에 대한 의무를 설명하려는 사람들을 비판한다. 흄의 비판은 적어도 역사적인 부분일 뿐 아니라, 그가 배위 에 남은 것과 국가 내의 소재를 비교하는 유명한 사고실험까지도 포함한다. 그가 제안하기에는, 그 어떤 경우에도 정당한 권력은 개인이 같은 장소에 있다는 사실로부터 연역될 수 없다.
 

  ...  우리는 모든 사람들이 얼마나 그 육체적인 힘과 정신적 힘과 능력들, 심지어 교육에 의해 얻는 것까지 평등에 가까운지 생각해볼 때, 먼저 그들의 고유한 동의가 그들이 함께 계약을 맺고 어떤 권위에든 속할 수 있게 하는 것 외에 없다는 것에 필연적으로 동의해야 한다. 사람들은, 만약 우리가 숲과 사막 속에서 정부의 첫 번째 기원으로 정부를 추적한다면, 모든 구너한과 사법권의 구성요소이며, 또한 자발적으로, 평화와 질서의 동기를 위해 그들의 자연적인 자유를 부정하고 그들의 평등과 동료로부터 법을 받아들일 것이다. 그들이 따르기를 희망하고 있었던 조건들은 이미 표현되었거나, 그 조건을 표현하는 데 불필요하다고 평가되어도 좋을 정도로 아주 명확하고 뚜렷하다. 만약 이것이, 최초의 계약(original contract)에 의해 의미가 지어진다면, 무엇보다도 먼저 모든 정부는 계약 위에 기초를 다지며, 또한 가장 고대적인 투박한 인간들의 조합도 이 원리에 의해 형성된다는 것을 부인할 수 없다. 우리가 어떤 기록에 우리의 자유들에 대한 강령이 기록되었는가 물은 것은 헛수고로 돌아갔다. 그것은 양피지나 나뭇잎, 나무껍질에도 쓰여있지 않다. 이것은 기록의 사용(the use of writing)과 모든 다른 문명화된 삶의 방식(atrs of life)에 앞선다. 그러나 우리는 분명하게 인간의 본성, 그리고 우리가 그 종들의 모든 개개인 속에서 찾을 수 있는 평등이나 또는 평등에 접근하는 어떤 것에서 추적할 수 있다. 지금 지배하고 있고 함선과 군대 위에 기초를 다진 힘은 분명하게 정치적이며, 권위 즉 설립된 정부의 효과로부터 끌려나온다. 한 사람의 자연적인 힘은 단지 그의 팔다리의 체력과 그의 용기의 확고함으로만 구성되며, 이것은 결코 다수대중(multitude)이 하나의 명령에 종속하게 하지 않는다. 그들의 고유한 동의와, 평화와 질서로부터 나오는 이점에 대한 그들의 감각 외에는 아무것도 그런 효과를 가져올 수 없다. 

  게다가 이 동의는 지속적으로 매우 불완전하며, 일반적 행정지배의 기초가 될 수도 없다. 대체로 전쟁이 지속될 동안에 자기 영향력을 얻었을 지도자는 명령보단 설득에 의해 지배할 것이다. 그리고 그가 다루기 힘든 자들과 반대자들을 제거하려 힘(군대)을 사용할 수 있을 때까지는, 그 사회는 시민사회의 상태를 이루었다고 말할 수 없다. 어떤 그럴듯한 계약이나 동의도 명백하게 일반적 복종을 형식화할 수 없다. 이 개념은 야만인들의 이해로부터 너무나 멀리 너머에 있다. 지도자에게 각각의 권위의 발휘는 특별해야만 하며, 그 경우의 현재 위기에 의해 불려나온다. 그의 중재로부터 귀결되는 이 감각가능한 유용함은 이런 발휘를 날마다 더욱 빈번하게 되게끔 만들고, 만약 그것을 불러내는 데 기뻐한다면 그 빈도는 점차 습관을 생산해내며 자발적이고, 따라서 사람들 속에서 불확실하고 묵인되는 것이다. 

  그러나 어느 당에 참여하고 있는(이것이 만약 모순이 아니라면) 철학자들은 이런 허락에 만족하지 못한다. 그들은 그 정부가 가장 일찍 초기 형태에서도 동의 심지어는 자발적 묵인에서부터 나왔을 뿐만 아니라, 게다가 가장 완숙한 단계를 달성하고 있는 지금도 다르지 않는 기초 위에 놓여있다고 주장한다. 그들은 의무나 약속에 대한 승인에 의해 묶여있지 않으며 모든 사람은 언제나 평등하게 태어나고, 의무를 다해야 할 군주나 정부가 없다고 단언한다. 그리고 그의 자연적인 자유에 선행해 어떤 동일한 가치가 없으며, 다른이의 의지에 자신을 종속시키는 사람은 없다고 생각한다. 이 약속은 항상 조건적인 것으로 이해되며, 그가 정의와 그의 주권으로부터 나온 보호와 마주치지 않는다면 강요되는 의무는 없다. 이런 주권에 대한 이점은 그의 복귀를 약속한다. 그리고 만약 그가 집행에 실패한다면, 그는 약속의 부분을 파기한 것(그의 부분을)이며, 모든 복종의 의무로부터 그의 종속을 자유롭게 한다. 이는 저 철학자들에 따르면 모든 정부에서 권위의 토대이다. 그리고 모든 종속된 자들에 의해 갖추어진 저항권의 근거이기도 하다. 

  그러나 이런 추론가들이 세계를 두루 바라보면, 그들은 결국 그들의 발상에 조응하거나 그들에게 권위를 줄 수 있는 세련되고 철학적인 어떤 체계는 없다는 것에 직면할 것이다. 반대로, 어떤 곳에서도 그들의 종속된 자를 그들의 소유물로서 주장하고, 정복이나 계승으로부터 그들의 주권의 독립된 권리를 선언하는 군주를 발견한다. 또한 우리는 어떤 곳에서도 그들의 군주 안에 잇는 이런 권리를 승인하고, 그 존경의 의무나 확실한 보호자에 대한 의무 아래 있는 것만큼 확실한 주권자에 대한 복종의 의무 아래 태어났다고 스스로 가정하는 종속된 자들을 발견한다. 이런 연관성은 항상 우리의 약속과 똑같이 독립된 것으로 이해된다. 페르시아와 중국에서, 프랑스와 스페인에서, 심지어 네덜란드와 영국 등 위에서 말한 체제(doctrines)가 조심스럽게 가르쳐지지 않는 모든 곳에서 다 그렇다. 복종이나 종속은 대부분의 사람들이 중력의 법칙이나 저항의 법칙, 또는 가장 보편적인 자연의 법칙보다 더 그 기원이나 원인에 대해 어떤 연구도 만들지 않을만큼 친숙하게 되었다. 혹은 만약 호기심이나 그들을 그들이 배운 한 즉시 움직이게 한다면, 그들 스스로 혹은 그들의 조상들이 몇 세대에 걸쳐서 혹은 기록되지 않은 시대로부터 이런 가족이나 이런 정부형태에 종속되어왔다고 여길 것이다. 그들은 그들의 종속을 향한 의무를 즉각 묵인하고 승인할 것이다. 당신은 세계의 대부분에서 이런 정치적 연결이 자발적인 약속이나 혹은 공통의 약속 위에 함께 기초한다고 전도하면, 판사는 곧 당신을 복종의 의무를 풀었다는 이유로 반란자로서 투옥할 것이다. 만약 당신의 친구가 당신을 헛소리로 여겨 그 전에 입을 닫게 하지 못한다면, 그것은 어리석음으로 나아가는 것이다. 이런 정신의 움직임이 모든 개인은 이런 형식화를 제안하고 그 뒤에 이성을 사용하게 되더라도, 반대로 아무 권리도 가질 수 없다는 점에서 이상하다. 내가 말하는 이 행동은, 그들 모두에게 알려지지 않아야 한다. 그러면, 온 지구의 표면에 어떤 흔적이나 그것의 기억은 남을 수 없다. 

  그런데, 정부가 기초된다는 이 계약은 최초의 계약이 있다고 말이 된다. 또한 따라서 아마도 현재 세대의 지식에는 떨어지는 오래된 것으로서 제안될 것이다. 만약 야만인들이 처음 그들의 힘을 연합하고 연결한 이 동의가 지금 여기에서 의미가 있으려면, 이것은 실제라고 인정되어야 한다 하지만 이것은 아주 오래되었고, 수많은 정부와 군주의 교체에 의해 무효화된 것이며, 이것을 지금 어떤 권위를 간직한다고 제안될 수 없다. 만약 우리가 이 목적에 대해서 어떤 것을 말하려면, 우리는 모든 적법하고 종속된 자에게 복종의 의무를 지우는 모든 특수한 정부는 우선 약속과 자발적 계약에 기초한다고 주장해야만 한다. 그러나 이것은 자식들을, 심지어는 거의 모든 떨어져있는 세대(공화주의자 저술가들은 절대 고려하지 않는)를 묶어놓는 아버지들의 약속을 제안하므로, 난 이것이 역사나 경험에 의해, 세계의 어떤 시대나 국가에서도 정당화되지 않는다고 말한다. 

  현재 존재하거나 역사의 어떤 기록에라도 남은 거의 모든 정부들은 강탈이나 정복 혹은 이 두 가지 모두에 기원해 기초하지, 어떤 약속의 존재나 인민들의 자발적인 종속에 기초하진 않는다. 한 기교있고 용감한 인간이 어떤 군대나 집단의 우두머리가 될 때, 자신의 지배력을 그의 추종자들보다도 수없이 많이 인민들 위에 나타내기 위해 때로는 폭력을 때로는 옳지 않은 계략을 차용함으로써 그것은 종종 쉬워진다. 그는 그의 힘의 숫자에 그의 적들이 확신을 가지고 알 수 있게 될 열린 소통을 허가하지 않는다. 그는 그를 반대할 힘이 다함께 모일 틈을 그들에게 주지 않는다. 심지어 이런 강탈의 도구인 모든 것들이 아마 그의 실패를 바라고 있을지 몰라도, 그들의 서로의 의도에 대한 무지는 그들이 두려움을 유지하게 할 것이고, 그것은 그의 안전에 유일한 원인일 것이다. 이런 종류의 기술에 의해 많은 정부가 나타나는데, 이것이 그들이 자랑거리로 삼고 있는 최초의 계약이라는 것이다. 

  지구의 표면은 작은 왕국이 큰 제국으로 증대하는 것, 큰 제국이 작은 왕국으로 소멸하는 것, 식민지의 연결, 종족의 이주 등에 의해 지속적으로 바뀌고 있다. 이 사건들 속에서 힘과 폭력 이외에 발견할 수 있는 어떤 것이 있는가? 그들이 한참을 말하는 상호간 동의와 자발적 연합은 어디에 있는가? 

  심지어 가장 부드러운 방법, 이를테면 결혼이나 희망에 의해 한 민족이 다른 지역의 지도자 자리를 받는 것도, 사람들에게 결코 명예로운 일은 아니다. 그저 지참금이나 유산처럼 즐거움에 따라 혹은 그들의 지배자들의 이익에 따라 배치될 것을 제안할 뿐이다. 

  그러나 개입하는 힘이 없고, 선거(선거인단)가 그 자리를 채운 곳이라면, 이 아주 자랑할만한 선거란 무엇인가? 이는 전체에 대해 결정하고 반대없는 동의를 희망하는 소수의 대단한 인간들의 조합일 뿐이다. 그게 아니라면 대략 그들 사이에서 거의 알려져있지 않거나 그의 진보적 모습을 단지 그 특유의 뻔뻔함이나 그의 편의 순간적인 변덕에 빚지고 있는 반역적 지도자를 따르는 다수대중의 분노일 뿐이다. 

  이런 무질서한데다가 완성되지 않으면서도 막대한 권위의 투표를 모든 정부와 복속의 하나뿐인 합법적 기초를 간주할 수 있을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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