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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리다 평전 - 순수함을 열망한 한 유령의 이야기
제이슨 포웰 지음, 박현정 옮김 / 인간사랑 / 2011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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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데리다

  많은 사람들에게 알려져있듯, 데리다는 이 시대에 가장 논쟁적인 철학자, 이를테면 뜨거운 감자이다. 여전히 많은 사람들에게서 해석이 이루어지고 있는데, 그를 현재 철학사의 가장 마지막 페이지를 장식하는 대가로 칭송하는 사람이 있는가하면 적절한 단어들의 무의미한 조합으로 정말 자신의 철학이 추구한 목표라는 해체를 몸소 보여주었다는 비아냥을 듣기도 한다. 그에 대한 가장 정확한 평가는 아마도 두 극단적인 평가 가운데 어느 곳에 있는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든다.

  하지만 그 모습을 어느 정도 정확하게 그려내기 위해서는, 반드시 그에 대한 치밀한 연구가 선행되어야 할 것이다. 그런 면에서, 단편적인 소개나 다른 비평의 도구나 이름의 차용으로서만 소개되는 경우가 많은 데리다에 대해 이만한 연구서가 소개되는 것은 참 기쁜 일이다. 신간평가단으로서 이 책을 고른 이유는 이 때문이었다. 다행히도 나를 제외한 다른 많은 사람들도 읽고 싶은 책으로 이 『데리다 평전』 을 골라주어, 꽤 무게와 값이 나가는 이 책을 신간평가단 명목으로 받아서 읽어볼 수 있게 되었다!

  이론으로서만 알려진 데리다에 대해, 이 책은 원제 ‘Jacques Derrida : A Biography’ 가 말해주듯 그의 삶에 대한 이야기도 간간히 끼어있어 (데리다를 다룬 다른 책에 비해선 상대적으로 조금이나마) 편하다. 당연하게도 그도 태어나자마자 천상천하 유아독존을 외치면서 철학을 시작한 것이 아니므로, 분명히 그의 철학에 영향을 미쳤을 성장의 과정을 엿보는 것도 상당히 흥미로웠다. 그래서 데리다를 다룬 책 치고는 매우 쉽네, ‘다행이다’ 라는 생각을 갖고서 책장 위를 한 발 한 발 밟아나갔다. 

  하지만 이런 일종의 ‘착각’은 몇 페이지 가지 않아 깨지고 말았다. 문학과 철학을 본격적으로 접하고 논문을 쓰기 시작한 이후의 부분은, 전기라는 제목이 무색하리만치 그의 저작에 대한 압축·요약에 숨이 가쁘다. 본격적으로 철학적 저작이 등장한 이후 그의 삶은, (이 책만 보았을 때는) 고민과 저술, 그리고 정말 피곤하리라는 생각이 들 정도로 여기저기 강연을 다니고 여러 운동들에 참여한 내용만이 간간히 언급될 뿐이다. 대개 전기라 함은 그 책에서 다루는 사람의 삶의 모습에 대해서 주로 다루게되며, 따라서 주변인물의 인터뷰나 뒷이야기 등이 더욱 흥미진진하게 다가오게 마련이다. 그런 면에서, 이 책은 전기라기보다는 데리다 입문서라고 보는 것이 더 옳을 정도로 학술적 내용에 비중이 치우쳐져 있다. 따라서 삶의 궤적을 추적하며 사상의 편린을 엿보고자 하는 의도로 이 책을 집어드는 것은 올바른 선택이 아니다.

  사실 ‘평전’이란 이름에서 기대하는 내용은, 전기적 사실들이기 때문에 본격적으로 그의 저서에 대한 이야기들이 나오기 시작하면서부터 이 책에 매우 실망한 것도 사실이다. 제목을 평전이라고 하기보다는 그야말로 ‘데리다’ 라는 이름만 붙였다면 어땠을까. 그런 제목으로는 이미 여러 책이 나왔기 때문에 메리트가 없는 것일까.


관계

  이 책의 표지에는, ‘데리다는 탁월한 문화적 사건일 뿐만 아니라 오랜 전통의 연속이다.’ 라는 말이 써있는데, 매우 인상적이다. 사실 데리다의 인상은, 철학사의 가장 마지막 언저리에서 모든 이론과 학설에 대한 해체와 파괴를 기획한 인간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역설적으로, 해체를 위해서 꼭 필요한 작업은 현재까지 세워진 여러 체계들에 대해 그 정합성을 아주 면밀하게 검토해보는 일이다. 데리다의 해체는, 사실 이런 분석의 다른 이름이다. 이 방법에 대해서, 이 책에서는 ‘그는 (분석철학의 논리적 연결 검토와는 달리) 어떤 이론에서 제기하는 세계를 그에 따라 아주 크게 그려본 뒤에, 그것이 정합적이지 않고 언제나 공백이 생길 수 밖에 없다는 점을 지적’하는 방법이라고 설명하고 있다.

  데리다의 이런 철학사적 위치를 설명하는 데 있어서 가장 중요한 키워드는, 이 책에서는 등장하지 않는 말이지만 아마도 ‘관계’가 아닐까 생각한다. 이 말은 두 가지 의미가 겹쳐있다. 하나는 데리다가 연구하고 분석했던 여러 입장들과의 관계라는 뜻이다. 이 책에서는 대표적으로, 그리고 명시적으로 후설과 하이데거, 그리고 니체를 언급하고 있다. 이 관계는 데리다가 자신의 기획을 펼치는 데 기초가 되며 따라서 그를 규정하는 어떤 것이다. 나머지 하나는 그의 또 다른 대적자이기도 했던 구조주의가 세계에 대한 과학의 대상, 세계의 본질로서 제시하는 바로 그 관계이다. 그의 대적은 위에 말한 선배 철학자들이기도 하면서, 동시에 자신과 동시대를 살아온 구조주의 학자들이기도 했다. 여기서의 관계는, 그가 해체하고 싶었던 종류의 그런 관계이다.

  이 두 관계는 서로 날실과 씨실처럼 교차하며 그의 작업을 구성해나간다. 그의 해체란 사실 후설이 추구하고자 했던 철학의 목표, 바로 아무런 영향을 받지 않고 의식 자체로부터 길어낼 수 있는 존재의 본질에 대한 탐구의 기나긴 여정의 다른 이름이다. 그래서 단순히 해체라는 파괴적 어감으로만 길어낼 수 없는 그의 철학‘함’은, 후설의 그림자가 짙게 드리워져 있다. 그것을 어떤 지점에서, 마치 아리스토텔레스가 부동의 원동자를 가정한 것처럼 후설은 현상학이라는 체계에서 완결의 지점을 상정했다면 데리다는 같은 탐구의 과정을 밟아가면서 그 상정이 없었을 뿐인 것 아닐까? 적어도 이 책은 데리다의 해체에 대해 이런 관점을 견지하고 있는 듯 하며, 설득력있는 설명이 아닐까 생각한다.

  이 책의 설명에 따르면, 니체와 하이데거는 미완의 대가들이다. 그들이 미완인 이유는, 데리다에게 와서야 완결되는 해체의 프로젝트를 아직 다 꽃이 피지 않은 형태로 철학의 역사에서 제시했기 때문이다. 니체의 입장과 해체의 연걸고리는, 사실 다른 말이 필요없을 정도로 매우 직관적이기까지 하다. 데리다가 ‘유럽적인 것’이라고 통칭하는 여러 속성들 – 이성, 남자(남근)적, 비혁명적 부르주아 민주주의, 자본주의 같은 것들은 역사적으로 완결된 것으로 보여졌다. 그것에 대해 이론적으로나 실천적으로 문제를 제기할 수 없는 분석철학과는 달리, 니체는 시적인 강론을 통해 그것이 내적 공백으로 인해 무너질 것임을 예언자적으로 선포했다. 물론 이것은 해석에 따라 그 공백의 위치가 달라질 수 있기에, (데리다조차도 여기에 해당할) 끊임없는 오독과 왜곡에 시달릴 수 밖에 없다. 그것을 유럽적인 것의 파괴라는 주제로 전유한 데리다 또한 어느 정도의 오독일지도 모른다.

  이 유럽적인 것과 관련해서, 하이데거는 후설의 적통이면서 일종의 이단이다. 인식론에서 출발해 인식의 종착점을 존재의 근원으로 삼은 후설과는 달리, 하이데거는 물구나무선 현상학을 존재론적으로 전회시킨다. 인식(론)의 근거는 결국 존재의, 존재자의 문제일 수 밖에 없으며 따라서 존재의 현상, 존재자의 현상을 규명하는 것이 현상학의 제1목표가 되어야 한다는 것이 하이데거 현상학의 첫걸음이다. 그러나 데리다에 따르면, 이 존재는 결국 밝혀질 수 없다는 것이 그의 통찰에서도 드러나는데, 그가 끝내는 기초로서의 존재론을 정초할 수 있었던 것은 그의 존재론이 은근하게 감추어진 독일 민족의 존재론이기 때문이다. 게다가 하이데거가 부활시키고 싶었던 ‘위대한 본질 연구의 전통’인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과 이것이 더해져서, 그는 그리스-로마적 철학, 즉 유럽적인 것을 대표하는 인물이 된다.


타자

  데리다를 어느 정도 규정지을 수 있는 학문적 위치라는 의미에서의 관계와는 달리, 그가 명시적으로(또는 암묵적으로) 부정하고자 했던 구조주의 학풍에서 쓰는 ‘관계’라는 말의 의미는 필연적으로 타자의 문제와 연결된다. 그들에게 타자란 중첩적 관계의 총체이다. 소쉬르에게는 각 기호들이 차이에 의해서 맺는 관계들의 총체이며, 푸코에게는 다양한 사회적 권력 관계들의 총체이다. 이 책에 따르면 데리다와 평생동안 인연이 있었다는 알튀세르는, (그가 분석한 마르크스의 교설에 따라) 최종심급의 수준에서 구조화된 경제적 관계의 총합으로서 타자를 규정한다. 그래서 그들의 관계를 논할 때는 반드시 그 관계의 목표이자 대상으로서 타자를 거론하지 않을 수 없게 된다.

  흥미로운 것은, 데리다가 타자에 대해 논할 때는 이들의 연구성과를 수용하면서도 동시에 그 성과를 부정한다는 점이다. 데리다의 존재론에서 가장 핵심적인 개념은, 널리 알려진 ‘차연’이다. 차연의 개념은 구조주의적이면서 동시에 반구조주의적이다. 구조주의자들이 부정하였으며 부정하고 싶었던 전통은, 구체적 존재자로서의 타자 그리고 그 타자의 존재(성)을 규명해내는 것을 타자 자체가 발현하는 여러 속성들에 대한 명석판명한 인식을 통해 가능하다고 믿었던 순진함이다. 타자는 관계들의 총합을 통해서만 나타날 수 있다. 그래서 알튀세르의 개념을 빌리자면, 철학은, 그것이 세계를 올바로 통찰하는 철학이라면 더 이상 철학일 수 없으며, 과학 – 구조에 대한 과학, 관계에 대한 과학이 되어야 한다. 그러나 이 책에서도 밝히고 있듯이, 구조의 과학은 세계로부터 시간을 축출해낸다. 시간이 빠진 세계는 변화하지 않고 그 모습을 영원하게 유지하고 있으며, 그렇기 때문에 정태적으로 구조분석이 가능해지는 것이다.

  데리다가 구조주의로부터 얻어낸 결론은 바로 이 지점이다 - 시간의 배제는, 관념으로 세계를 붙잡으려는 고대 그리스 특히 플라톤의 부활이다. 세계는 곧 주체에게 타자인 모든 것이다. 하지만 이 세계에는 명백하게도 시간이 있거나 변화가 있다(사실 이 둘은 동의어이다.) 존재자 자체의 변화만큼이나 구조의 변화도 너무나 뚜렷하다. 따라서 존재자 자체로부터 인식을 구하던 전통만큼이나, 구조주의의 과학도 그 실패가 필연적이다. 존재자에 의해서든 구조에 의해서든 그 존재자 자체는 명확하게 밝혀질 수 없다는, 데리다가 내세운 대표적인 학술적 개념인 ‘차연’은 여기에서 탄생한다.

  하지만 이러한 결론은 (데리다에 따르면) 이미 하이데거에 의해 어느 정도는 예언적으로 선포되었다. 하이데거가 말하고자 한 내용이란, 타자란 관계든 의식이든 1차원적이고 평면적인 속성에 의지한 분석이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그에 따르면, 존재자는 자신의 존재의 목소리로 타자에게 웅변한다. 그러나 그 방식은 이성이나 합리 같은 분석의 방식이 아니라, 시인이 자신의 작품을 공표하는 것과 같이 함축적이고 은유적이다. 따라서 그것은 데리다의 수사법에 따라, 타자에게 닿을 수도, 닿지 않을 수도 있다. 언제나 잘못 배달될 가능성이 있는 우편의 은유는 이같은 상황을 설명하는 것이다. 하이데거가 닿는 사건에 더 힘을 주어 말하고 있다면, 데리다는 필연이 아니가 우연에 달려있고 핵심은 그것이 ‘우연’이라는 점에 무게를 싣는다.

  이와 같은 서술에서 알 수 있듯, 이 책에서 누차 강조하는 것은 데리다가 그 스스로가 고유한 철학의 구축자이자 동시에 ‘충분히 급진화된’ 하이데거 또는 후설이라는 점이다. 그는 앞에서 살펴보았둣 구조주의에 의지하면서 그것을 내부로부터 붕괴시키고 있다. 이런 결론은 그가 하이데거에서 종결되는 타자에 대한 의식철학의 전통에 충분히 기대고 있다는 반증이지만, 동시에 그 전통으로부터도 이탈한다.


글쓰기

  규명할 수 없는 타자라는 존재론적 결론은 수사학으로 넘어오면서 확정될 수 없는 텍스트의 의미라는 것으로 그 위상이 변화한다. 어떤 기호는 그것이 담지하는 의미를 그 어떤 순간에도 불변적으로 드러낼 수 없다. 많은 사람들이 기호를 읽으며 떠올리는 그 의미는, 이미 내가 읽은 그 시간의 의미이며 따라 그 시간은 이미 지나가버리고 전혀 현재적이지 않은 ‘과거’이다. 하지만 많은 사람들은 기호의 해석에 있어서 이러한 점을 고려하지 않고 실수를 범한다. 즉 그 ‘과거’의 기호가 과거로서 종결되지 않고 현재에도 동일한 의미를 계속 지니고 있다고 간주하는 습관이다.

  하지만 의미가 현전하지 않았다고 그것이 무의미한 것은 결코 아니다. 존재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의미의 현전 또한 우연적이다. 그럼에도 우리가 기호를 사용하는 것은, 그리고 사용할 수 있는 이유는 그것이 끝없는 표지판으로서 의미를 향해 나아가야 할 길을 지속적으로 알려주기 때문이다. 이것을 데리다는 ‘말소 하에 두기’, 즉 특정한 의미를 지닌다고 간주되는 기호 위에 X 표시를 함으로써 드러낸다. 무의미하지 않기에 종이 위에서 말끔히 지워서 드러내버리는 것은 아니지만, 그것이 의미를 현전한다는 착각을 불러일으키지 않게 하기 위한 일종의 기술이다.

  글을 쓴다는 행위는, 그것이 문학이든 철학이든 관계없이 이런 의미론적 상태에 대한 지속적 실천이다. 다시 말하면, 현전하는 의미를 향한 무한한 접근의 실천이다. 의미론과 존재론을 넘나들면, 글쓰기는 차연의 길을 따라 현전하는 존재를 향해 무한하게 실천하는 것이다. 다른 학자들에게도 그들에게 철학을 하는 고유한 방법이 있다고 한다면, 데리다는 글쓰기라는 아주 평범하지만 복잡한 방법을 철학의 ‘방법’으로서 제시한다.

  그가 문학에 관심이 많았던 것도 글쓰기라는 테마와 무관하지 않았던 것으로 생각된다. 그는 평생동안 철학을 하는 동시에 문학에 대한 주제 또한 지속적으로 부여잡고 있었다. 그래서 본격적인 철학에 대한 글 이외에도, 문학과 그 비평에 대한 글 역시 지속적으로 생산해내었다. 그가 후설을 자신의 첫 연구대상으로 삼은 것도, 문학 – 넓은 의미에서 기호에 드러나는 의식의 문제를 해명하기 위한 방법론으로서 현상학을 택한 것이 아닐까? 이 책은 이러한 입장을 지지하고 있다는 느낌이 든다.

  미국에서 그가 주로 문학비평의 방법론으로서 인용되었다는 것이 그 반증이 아닐까. 이것은 이 책의 목차 가운데 하나이기도 하다. 실제로 그는, 철학자라기보다는 문학평론가에 가까운 폴 드 만과 친교를 유지했고, 그에 의해 미국에 소개된(?) 데리다는 철학자라기보다는 문학평론가였다. 이것은 (아마도) 현재의 경향과도 크게 다르지 않을 것이다. 이런 면이 어느 정도 한국에도 영향을 미쳤으며, 그래서 데리다의 이름을 철학서적보다는 문학서적에서 더 자주 볼 수 있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이 책이 강조하는 사실 한 가지는, 이 주제 또한 하이데거를 비켜갈 수 없다는 것이다. 하이데거의 후기의 주제는 다름아닌 시학이다. 철학의 방법이 데리다에게 있어서 글쓰기라면, 그에 비견될만한 하이데거의 방법은 시쓰기, 즉 시학인 것이다. 시는 영원히 드러날 수 없는 것에 대한 알레고리이며, 알레고리라는 특성 때문에 모든 주체들에게서 다르게 현전한다. 타자는 그 알레고리를 매개로 드러나는 바로 그것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모든 주체들이 대면하는 각각의 타자들의 총합 또는 그 이상이다. 일면 데리다적인 이 이야기는, 사실은 데리다의 이야기가 아니라 하이데거의 이야기이다.

  그만큼 이 책에서는 전반적으로 데리다와 하이데거와의 학술적 관계가 매우 강조되어 있다. 물론 20세기 전체를 뒤흔들었던 철학자이니만큼 그의 영향을 벗어날 수 있는 사람이 몇 있을까 싶은 생각도 들지만, 특히 강조되는 것은 데리다가 어떤 면에서 ‘하이데거의 적통’이라는 사실이다. 확실히 그의 연구는 데카르트-베르그송이라는 프랑스적 전통에서도 벗어나있고, 당시의 주류라고 할 레비나스에게서도 조금 비켜있는 것이 사실이다. 하이데거는, 그 스스로가 거장이면서 동시에 데리다를 예견한, ‘신화-문학적 선구자’이다.


『데리다 평전』

  이 책을 읽었으면서도, 데리다는 여전히 모호한 존재로 내게 남아있다. 그 스스로가 의미를 명확하게 규명할 수 없다고 이야기한 결과일지도 모르고, 또는 이 책이 데리다에 대해서 제대로 설명하지 않았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나는 주목하지 않았지만, 이 책에는 유령이라는 표현이 자주 나온다. 현전하지 않았지만 현전한 것처럼 느껴지는, 그러나 막상 그 실체를 파악하려고 한들 결코 파악되지 않을 존재자들의 본성에 관한 은유로서 쓰이는 듯하다. 데리다는 그 스스로가 유령이면서, 유령을 좇아 자신의 철학을 펼쳤지만 그것은 유령을 유령이라고 규정하는 방향으로 나아갔다는 것으로 이 책의 내용을 요약할 수 있을까?

  당대의 분위기와 데리다의 저술을 천천히 따라서 밟아나간 것은 이 책의 가장 큰 장점이라고 할 수 있겠다. 다소 아쉬운 것은, 어느 정도의 편향이나 내용의 누락이 보인다는 것이다. 데리다에 대한 평전이니 어느 정도 그런 면을 감안하기는 해야하겠지만, 대립점을 명확히 소개함으로써 데리다의 입장을 더욱 뚜렷하게 드러낼 수도 있었을텐데 그렇게 하지 못한(하지 않은?) 부분이 있었다. 구조주의와의 화합과 갈등 같은 국면이라든가, 후기의 대담집인 『테러 시대의 철학』을 소개하면서 하버마스부분을 건너뛴 것 같은 부분이 그렇다.

  헤겔 이후 대륙의 철학이 그렇듯 모순어법을 적극적으로 차용하고 질적 변화와 다층적 세계를 지지하는 이론의 구조는 분석철학의 방법론에서는 수용되기가 약간 힘들고, 그건 내게도 마찬가지이다. 그런데 서로의 언어로 번역되기는 힘든 것인지, 이 책은 아예 그것에 대해 포기하고 있으며 (데리다 스스로도 가지고 있었던 것으로 보이는) 분석철학에 대한 경멸적 태도를 군데군데에서 그대로 드러내고 있기도 하다. 단순히 이렇게 치부할 수 있는 것만도 아닌데, 하는 불만 또한 드문드문 들었다.

  철학을 공부하는 사람으로서 데리다는, 특히나 여러 가지 의미에서 주류의 철학 – 분석철학 – 에 더 매력을 느끼고 있는 내겐 수수께끼 같은 존재이다. 대륙의 철학의 어법에 익숙하다면, 이 책은 데리다의 일생과 그 저서에 대한 좋은 압축이 될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그렇지 않은 사람에게, 그리고 삶의 이야기를 주로 보고 싶었던 사람에게는 매우 힘든 벽으로 다가올 것이다. 그만큼 데리다의 저서가 어렵다는 것, 어려운 책을 압축해놓으니 그것이 결코 쉬울 리는 없으며 오히려 앞뒤의 맥락이 빠져있어 더 어려워진다는 것, 그리고 작업의 양이 워낙에 많으니 그것을 머리에 다 새겨넣기가 어렵다는 것이 참으로 극복하기 어려운 난점이다. 내게는 공부를 하도록 이끄는 자극이 되었지만, 다른 이에겐 어떨지 자못 궁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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쿠쿠리 2011-07-22 17:5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잘 읽었습니다. 알라딘 메인 신간 안내에 떠서 리뷰를 보는데 또 선배님의 글이. 아 저는 05 ㅈㅇㅈ이에요.

박효진 2011-07-23 20:46   좋아요 0 | URL
아 그렇구나... 알라딘이 지금 나한테 공부시키는 중... 매달 마감 다가올 때마다 죽겠다 ㅠ.ㅠ
 
[불안의 시대]를 읽고 리뷰 작성 후 본 페이퍼에 먼 댓글(트랙백)을 보내주세요.
불안의 시대 - 생존을 위한 통찰과 해법
기디언 래치먼 지음, 안세민 옮김 / 아카이브 / 2011년 5월
평점 :
절판


 

책 제목의 잘못

  이번 달에는 내가 선정한 관심도서 가운데 두 권이나 선정이 되어서 무척이나 뿌듯했다. 특히 전공분야에 도움이 될까 하는 기대에 골라보았던 『데리다 평전』 과는 달리, 내게는 새롭지만 관심이 있는 분야인 경제나 국제사회, 그리고 그 속에서 살아가는 인간들에 대한 여러 가지 분석이 곁들여져 있을 것 같은 이 책은 내 눈길을 더 끌었다. 그래서 결국에는 이 달의 신간평가단 관심도서 두 권 가운데 이 책을 먼저 집어들었다.

  제목과 책 소개에서 짐작할 수 있었던 이 책의 내용은, 자본주의 사회 아래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이 어떻게 심리적으로 안정적이지 못한지, 그리고 그런 경향은 어떻게 확산이 되었으며 그런 시대에 우리들은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지 등등의 내용들이었다. 한 마디로 말하자면, 좌파적 성향을 가진 책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었다. 그러나 책을 넘기면 넘길수록, 내 예상은 보기좋게 빗나갔다. 이 책의 제목에서 이야기하는 불안은 사람들의 불안이 아니었다. 사람들은 오히려 환호하고 있었고, 이 책의 저자는 책의 앞쪽 절반을 ‘세계는 좋아지고 있(었)다’는 내용을 설명하는 데 할애하고 있었다.

  그렇다면 대체 누가 불안한가? 이쯤에서 우리는 이 책의 영어판 제목을 다시 들여다볼 필요가 있다. Zero Sum Future : American Power in an Age of Anxiety. 이 긴 영어가 이 책의 원래 제목, 『제로 섬 미래 : 불안의 시대 속 미국의 힘』 이다. 이왕 영어 제목을 본 김에 책 표지를 좀 더 깐깐히 훑어보기로 했다. 책의 저자는 『이코노미스트』, 『파이낸셜타임즈』 의 저널리스트이다. 이쯤되면 점점 (내 입장에서의) 혐의가 짙어진다. 다름이 아니라, 이 두 잡지는 경제적인 정책에서 보수주의를 지향하는 대표적인 경제잡지이다. 또 책의 뒷면에 있는 하버드대학에서 경제사를 가르치는 니알 퍼거슨의 추천사. 이 사람은 공화당 성향의 네오콘이라고 부르기는 무엇하지만, 시장경제의 힘을 신뢰하며 그 힘을 상징하는 미국의 제국적 역할을 강조한 것으로 유명한 지식인이다.

  다시 책으로 돌아가서, 후반부가 되면 이 책이 강조하는 ‘불안’이란 누구의 불안인지가 아주 명확하게 드러난다. 그가 말하는 불안의 시대란, 국제사회의 불안인 동시에 미국의 불안이다. 더 과장해서 저자의 입장을 이야기하자면, 미국의 불안이 곧 국제사회의 불안이다. 핵심은 간단하다 - 국제질서를 주도했던 미국이 더 이상 그 역할을 자임하지 않으려 하고, 또한 그 역할을 떠맡는데 힘이 부치자 그 역할을 대신하려고 하는 여러 세력들이 등장하기 시작했다. 바야흐로 국제적 춘추전국의 시대가 도래하였다. 미국의 역할 약화가 곧 국제사회의 불안으로 연결되었다는 것이다.

누가 불안한가

  ‘아차, 내가 헛다리를 짚었구나.’ 라는 생각이 들었지만, 어쩔 수 없었다. 우선 이 ‘불안’이라는 단어를 중심으로 이 책을 뜯어보자. 이 책의 중심을 이루는 내용은, 책 저자인 래치먼이 긴 시간동안 기자로 생활하면서 보고 듣고 분석한 내용, 그리고 다른 사람들의 의견까지 종합하여 정리한 1970년대 후반부터 현재까지의 국제정세와 그에 대응하는 미국의 외교정책이다. 이들을 종합했을 때, ‘불안’은 현재 미국의 상황을 전체적으로 조망할 수 있는 압축적인 단어이다.

  이것이 왜 불안인지는 이 이전의 시대와 대비시켜서 보아야 한다. 래치먼은 불안 이전의 시대를 ‘낙관’의 시대라고 정의한다. 그의 생각에 따르면, 이 낙관의 시대의 경향은 자유민주주의, 즉 시장경제와 인민주권적 민주주의가 결합한 특정한 정치적 형태가 전 세계로 확산되는 것이었다. 냉전시대에는 자유민주주의를 지키는 이념적 성채로서 미국이 중요한 역할을 하였고, 소비에트를 비롯한 공산권 국가가 무너진 이후에는 자유민주주의를 전세계로 확장시키는 데 중요한 역할을 담당한 국가가 미국이었다. 실제로 이 이념의 확산을 위하여 걸프 전쟁에 개입하는 등 무력정책도 여러 차례 감행하였으며, 이런 활동에서 얻어낸 긍정적 결과들을 토대로 미국은 세계를 거시적으로 움직이는 국가로서의 면모를 드러내게 되었다.

  그에게 불안이란 미국이 이런 지위를 잃어가는 것이다. 하지만 단순히 미국이 지위를 잃어가는 일국패권주의의 후퇴 자체가 문제가 아니다. 오히려, 그가 염려하는 바는 미국이 상징하는 자유민주주의 이념의 쇠퇴이다. 자유민주주의는 모든 인간들이 자신의 의지에 따라 경제와 정치에 접근할 수 있게 해주는 중요한 이론적 토대이다. 이것의 쇠퇴는 곧 인간의 자유의 쇠퇴와 직결되며, 이는 곧 인간의 행복의 쇠퇴를 의미하기도 한다는 것이다. 물론 이것이 미국의 쇠퇴에 국한되는 것인지 혹은 진짜 인간의 행복의 쇠퇴를 의미하는 것인지는, 이 글에서도 그렇고 실제로도 매우 모호한 형태로 나타난다.(이렇게 이 책이 읽히는 것을 보면, 나도 래치먼이 이야기하는 반동적 ‘반세계화주의자’ 가운데 한 사람인가보다.)

  자유민주주의의 후퇴는 독재의 부흥과도 연결된다. 세계를 미국과 양분하려는 야심을 지니고 자신만만하게 성장하고 있는 중국은, 래치먼의 분류에 따르면 근본적으로 독재 국가이다. 이것은 러시아도 마찬가지이다. 문제는, 미국이 예전의 힘을 발휘하지 못하면서, 자유민주주의를 지향하는 국가들조차 반미국적인 국민들이 성향 등등을 이유로 독재 국가들에 힘을 실어준다는 것이다. 이것이 이념적 이분법이 적용되는 시기, 즉 냉전의 시대와는 다른 불안의 시대에서 볼 수 있는 가장 큰 특징이다.

  또 하나의 큰 문제는, 이런 국제정세가 형성되기 이전, 그러니까 저자가 ‘낙관’의 시대라고 부르던 시기에 이미 상당한 수준으로 세계가 경제적인 통합을 이룩했다는 사실이다. 경제의 통합은 좁게는 자유로운 무역을 뜻하지만, 넓은 의미에서는 인류가 생산과 소비에 있어서 운명공동체가 되었다는 뜻이기도 하다. 따라서 이전보다 전지구적인 차원에서 해결해야 할 문제들은 더욱 빈번하게 나타나게 되었다. 그러나 불안의 시대의 국제정세는 이런 문제를 해결하기에는 더욱 힘든 구조로 재편되어가고 있다. 이 모순을 어떻게 해결하느냐가 앞으로 미국이(또는 국제사회가) 해결해야 할 과제이며, 이것을 해결하지 못하는 매 순간이 바로 ‘불안’의 순간이 될 것이라는 게 래치먼의 경고이다.

  이러한 분석에, 미국인이 아닌 어떤 사람들은 충분히 이의를 제기할 수 있다. 여기에는 지금 이 글을 쓰고 있는 나도 포함된다. 물론 래치먼의 분석은 한국에도 어느 정도 적용이 된다. 표면적인데다가 군부정권의 연장이었다고 하더라도 1987년 한국 국민들은 직선제로 대통령을 뽑았다. 또한 1992년 우루과이 라운드를 시작으로 세계시장에 편입하였고, 모두가 즐겁게 기억하는 1990년대 초반의 황금기를 맞았다. 하지만 이것은 1998년으로 끝난다. 그 이후의 한국사회가 자유민주주의의 확장이었는가 생각한다면, 의문이 들 수 밖에 없다.

  아마 저자는 이러한 문제제기에 대해서 ‘내가 이야기하는 것은 대체적인 경향’이다 라고 대답할지 모른다. 하지만 그가 말한 이런 경향에는 빈부격차의 확대도 포함되어 있고, 그 또한 이를 시인하고 있다. 이것은 그가 말한 ‘낙관의 시대’ 동안 지속적으로 나타났던 어두운 특징이다. 미국과 유럽 또한 예외일 수 없고, 미국의 추진하는 세계화 - 즉 자유민주주의의 세례를 받은 거의 모든 국가들은 빈부격차의 확대라는 수순을 밟아나갔다. 래치먼은 전지구적인 정치적 통합, 그리고 시장의 통합이 희망적인 미래를 가져다줄 것이라는 점을 들어 이 시기를 ‘낙관’으로 정의하지만, 나는 반대로 이 필연적인 빈부격차가 사람들에게 가져다준 충격을 들어 이 시기를 ‘불안’이라고 정의하고 싶다.

세계를 진짜로 지배하는 것은 신념

  이상의 논의에서 알 수 있는 이 책의 또 다른 특징은, 그가 경제와 정치, 외교의 이야기의 저변에 깔려있는 심리상태를 드러내어 이 세계를 움직이는 원동력으로 제시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것은 저널리스트로서의 태도일 수도 있고, 동시에 그가 실제로 이 세계를 여러 사람들의 신념과 심리에 의해서 움직이고 있다고 믿기 때문일 수도 있다.

  실제로 그는 이 책의 전체적인 내용 - 혹은 그 기반이 되는 아이디어를 프랜시스 후쿠야마의 『역사의 종말』 빌려온 듯 하다. 그에 대한 언급이 상당히 자주 등장할 뿐만 아니라, 그의 생각에 동조하는 듯한 모습을 많이 보여주기 때문이다. 후쿠야마의 생각에 따르면 따르면, 이 세계의 정치와 경제, 그리고 사회의 모습을 규정하기 위해 여러 이념들이 등장해 각축을 벌였지만 최종적인 승리를 시장경제와 민주주의에 주어졌다. 그 이유는 사회를 구성하는 가장 기본적인 단위인 개인의 의지를 가장 극대화시켜줄 수 있는 정치-경제 체제이기 때문이다. 나치와 파시즘의 붕괴, 소비에트 연합의 해체는 자유민주주의의 힘을 가장 잘 보여준 사례들이다.

  이 생각의 핵심은, 이것이 실제 ‘정말 그렇더라.’ 라는 사실판단이 아닌 미래에 대한 비전을 제시해준 일종의 담론이라는 것이다. 래치먼의 말대로, 그는 정치학이나 경제학보다는 헤겔의 철학을 기반으로 ‘역사의 종말’이라는 담론을 완성시켰다. 그것은 실제로 그러하기 때문에 역사의 종말이라고 부를 수 있는 것이 아니라, 그 담론이 책과 사상의 형태를 갖추고 나온 뒤에 많은 정치가들의 지향점을 지배했기 때문에 실제로 효력을 발휘했다. 미국에 한정되는 이야기이긴 하지만, 미국은 당시에 정말로 역사의 종말을 이끌어낼 수 있을 정도의 강력한 이념적 힘을 가진 존재였기 때문이 그것이 가능하다는 믿음은 팽배할 수 밖에 없었다. 미국 스스로가 스스로에게 그러했고, 미국을 바라보는 다른 국가들의 시선도 마찬가지였다.

  이 담론이 힘을 발휘한 세계가 바로 ‘낙관’의 시대이다. 조금만 면밀히 이 책을 들여다보면, 그가 이야기하는 것이 경제에서 실제로 벌어진 일이라거나 전쟁에서의 구체적인 손익계산서가 아니라 그 상황을 이끌어간 사람들의 이야기 또는 생각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미국의 정치적인 지도자, 그리고 그 밖에 어떤 시대를 이끌어갔던 미국 외의 몇몇 국가들의 정치적 지도자나 관료들이 가지고 있던 어떤 일관된 생각들은 세계를 실제로 그런 형태로 구획해나갔다. 다양한 인종과 국가가 등장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앞에서 강조했듯이 낙관의 시대를 관통하는 키워드는 자유민주주의, 그리고 모든 국가의 자유민주주의화라는 말로 표현되는 세계화이다.

  불안의 시대를 움직이는 주체도 역시 어떤 구체적이고 물리적인 힘이 아닌, 일종의 신념들이다. 물론 그러한 신념이 어느 정도는 물질적인 기반이 있는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신념의 진폭은 경제의 진폭보다 크다. 경제위기와 실패에 가까운 경과를 보여주는 이라크 전쟁과 아프가니스탄 전쟁, 그리고 그 밖에 미국 외적인 많은 징후들은 미국의 정치인과 미국 국민들에게 미국이 더 이상 혼자서 지구를 짊어진 거인이 아니라는 사실을 일깨워주었다. 미국 국민들은 점점 그 역할을 포기하라고 정부에 종용하고 있다. 반대로 미국 외의 국가들은 자유민주주의의 승리를 바라보면서 함부로 내뱉을 수 없었던 ‘반미국-반제국’이라는 말을 경제위기 이후에는 스스럼없이 꺼낼 수 있는 자신감을 얻었다. 이런 자신감은 곧바로 국제정치 무대에서 반영되었고, 경제체제에 대한 논의와 협상에 큰 영향을 미쳤다. 높아진 신념의 진폭이 경제의 진폭의 크기를 더욱 배가시키는 셈이다.

래치먼의 관점에 대한 의문

  나는 그가 이야기하는 ‘반세계화주의자’로서 그의 관점에 의문을 제기할 수 밖에 없다. 정말로 자유민주주의는 승리를 구가했는가? 많은 사람들에게 희망을 가져다주는 전도사로서 실제로 세계의 부를 늘리는 데 기여하였는가? 설령 정말로 그렇다고 하더라도 그것을 온전히 미국의 역할로서만 파악하는 것은 과연 옳은가? 이런 질문들에 나는 반쯤은 회의적이다.

  자유민주주의는 아주 매력적인 이념이자 동시에 정치, 경제적인 체제라는 것은 틀림없는 사실이다. 그러나 이러한 자유민주주의는 이중적이다. 이 이중성이 가장 극적으로 드러난 것은 다름아닌 미국의 금융위기 때였다. 저자도 인정하듯, 여러 구조조정과 흑자정부 같은 것들을 강요하던 IMF와 세계은행 같은 기관들은 미국에게만은 예외를 허가하였다. 세계경제에 미칠 파급력이 굉장하다는 이유였다. 이 행동은 미국 스스로 자신들의 이념적 정체성을 포기하며, 지금까지 넓혀왔던 자유민주주의 이념의 정당성을 상실하는 계기를 마련해주었다. 사실 이 대목은, 비슷한 금융위기로 가장 혹독한 시절을 견뎌낸 한국의 국민인 나로서는 억울하기까지 한 대목이다.

  저자는 낙관의 시대에 미국의 중흥을 이끌었던 핵심적인 요소로 기술의 발전을 미국이 주도했다는 것을 들고 있다. 이 기술은 한 편으로는 금융공학의 발전이고, 나머지 한 편으로는 순수한 의미에서의 기술의 발전으로 드러났다. 그러나 다시 말하면, 이것의 실체는 실물생산 즉 제조업 없는 성장이다. 손에 잡히지 않는 가치가 주식시장을 통해서만 거래되고 불어났는데, 이것은 저자가 파악한대로 이 시대를 이끌어가는 주체가 어떤 물리적인 힘을 가진 존재나 계획이라기보다는 사람들의 신념이었다는 것을, 조금은 다른 방식으로 입증한다. 왜냐하면, 숫자의 장난은 심리가 만들어내는 것이지 물건이 만들어내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이것은 닷컴 버블의 붕괴, 그리고 결정적으로는 2008년 금융위기로 또 다시 증명되었다. 어쩌면 이것은 그가 외면하고 싶어하는, ‘낙관’의 시대 전체가 사실은 불안의 시대의 연장이었다는 것을 보여주는 징후 같은 것들이다.

  실물생산 없는 성장의 실물을 메꿔준 것은 결국 미국이 각국을 상대로 지고 있는 막대한 부채이다. 미국의 투자자, 미국의 거대 금융기업의 흑자는 미국 국가재정의 흑자로 연결되지는 못했으며, 미국 재정의 유지를 위해서 그리고 금융기업의 이익을 위해서 미국 이외의 국가들은 정부 재정에서 흑자를 기록해 미국의 국채를 사들였으며 주주인 대형펀드에게 배당금을 쥐어주었다. 저자가 불안의 시대의 특징이라고 강조하는 제로섬게임은 이미 낙관의 시대에서부터 이런 형태로 시작되고 있었다. 블랙홀처럼 세계의 자본을 빨아들인 미국이었지만, 결국 그 형태가 채무로서만 가능했고 다양한 기법으로 그것을 메우려는 시도는 실패로 돌아갔다.

  그래서 설령 세계의 부는 늘어났다고 하더라도, 전혀 공평하게 분배되지 않았다. 빈부격차가 늘어난 것은, 낙관의 시대에 불어닥친 여러 국면의 경제위기들이 그 위기를 맞이한 당사자들에게 부자와 빈자로 갈라설 것을 강요했기 때문이다. 물론 미국 본토에서 이런 일이 일어나지 않았기에 상징성은 적었고, 그것은 주변적인 현상에 불과하다고 말하기에 충분한 근거가 되었다. 그래서 현재의 금융위기를 촉발시킨 저금리정책의 주역인 그린스펀은, 본토에서의 위기를 여러 정책적 수단을 통해 지속적으로 지연시킨 훌륭한 학자로 둔갑한다.

  이런 생각들 때문에, 나는 기본적으로 이 책의 관점을 신뢰할 수가 없다. 그는 미국적이다, 너무나도 미국적이다. 낙관은 미국의 낙관이었을지는 모르나, 그것이 세계의 낙관이었는지는 의문이 먼저 앞선다. 당장 내가 살고 있는 이 땅에서, 그가 낙관의 시대라고 제시한 기간의 절반 동안에 결코 ‘낙관’이 지배한 적이 없었으니까. 

 덧댐. 신간평가단 분위기를 보아하니 절망적인 평가들이 오고가는 듯 합니다...만, 사실 썩 읽을만한 책이긴 합니다. 너무나도 미국적인 시각이긴 하지만 그걸 이렇게 명쾌하게 정리하는 것도 쉬운 작업은 아닌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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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지자본주의 - 현대 세계의 거대한 전환과 사회적 삶의 재구성 아우또노미아총서 27
조정환 지음 / 갈무리 / 2011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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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론적 측면

  이 글의 제목은 이 책의 내용을 환기시키기 위한 의문문이 아니다. 정말 인지자본주의가 무엇인가 물어보는 것이다. 이 책의 저자는 인지자본주의를 초기 자본주의, 테일러주의와 포드주의로 대표되는 산업자본주의에 이은 제3의 자본주의의 물결로서 정의하고 있으며, 이것으로 특징지어지는 사회에서 등장하는 여러 사회현상들을 마르크스의 『자본』을 해석하여 분석하고 있으며, 그것이 각 사회현상에 어떤 의미를 지니는지를 적용해보고 있다. 

  그가 현재의 자본주의를 인지자본주의로서 규정하는 이론적 근거는 스피노자인 것으로 보인다. 이것은 기존의 자본주의 분석의 틀과 자신을 차별화하려는 전략으로 보인다. 기존의 마르크스주의자들의 경우, 잘 알려진 틀에 따라서 토대와 상부구조를 이원적으로 분리하고 그 각각에 대한 고찰을 수행한다는 것이다. 속류 마르크스주의자들의 경우 토대를 열심히 분석하고 상부구조의 여러 요소들을 토대로 환원시키는 방식을 취한다. 반대로 서구 마르크스주의라고 불리는 독특한 흐름은 보통 상부구조가 어떻게 하부구조에 영향을 미치는지에 대해서 기술한다. 그러나 스피노자에 따르면, 인간들이 대상을 바라보는 여러 측면들은 동일한 실재의 다양한 양태들이다. 그 가운데 인간이 인지할 수 있는 것은, 실재의 속성이 사유라는 것과 그 양태가 물질이라는 것이다. 이 구조를 차용하면, 토대와 상부구조 역시 동일하게 작동하는 자본주의의 두 측면일 뿐이라는 결론에 다다른다.

  스피노자의 이런 이론적 측면은 마르크스주의에 두 가지 새로운 가능성을 열어주는 것으로 보인다. 첫째, 자본주의는 이 세계(그리고 그것을 작동시키는 개인)를 지배하면서 물질적인 생산의 측면만 지배하는 것이 아니다. 자본주의가 통제하고 지배하는 영역은 실재 그 자체인데, 그러므로 자본주의는 정신의 영역, 즉 인지의 영역까지 지배한다. 저자는 인지의 영역을 매우 넓게 잡고 있는데, 요약하자면 인간의 모든 정신적 활동이다. 그러나 스피노자의 길을 따라서, 그 정신적 활동은 역시 언제나 물질적 활동과 맞물려 있을 수밖에 없다. 이것은 흔히 심리철학에서 인지라고 부르는 그 개념이라기보다는, 차라리 헤겔이 말하는 정신의 활동에 더 가까워보인다. 이것은 일종의 통합이론으로서, 마르크스주의 안에서도 충분히 정신의 문제에 대해서 고찰할 수 있는 연합전선이다.

  둘째 가능성은, 서비스 노동에 대한 분석이다. 굳이 마르크스의 이론을 끌어들이지 않더라도 자본주의가 진전함에 따라 상품생산노동에서 용역생산노동으로 노동의 구조가 변화한다는 것은 널리 알려진 사실인데, 마르크스주의에 따르면 여전히 세계의 중심은 자연에 노동을 투여하여 새로운 상품을 만들어내는 것이다. 이 이론, 즉 노동가치설에 대한 부정은 마르크스주의 이론 전체에 대한 부정과도 같을 만큼 그것은 그 이론에서 중심을 차지하고 있는데, 이 책에서도 이야기하듯 이것은 19세기적 한계를 안고 있을 수밖에 없다. 따라서 포스트포드주의를 분석하는 이론적인 틀로서는 무언가 미묘하게 어긋나는 부분이 있는 것이다. 스피노자의 이론은 여기에 대한 교정이다. 용역생산노동이 어디에서 가치를 창출하고 있는지, 노동을 실재와 결합되어있는 일원론적 차원에서 고찰함으로써 노동가치설을 버리지 않고도 서비스노동을 분석하고 있는 것이다. 

  이런 맥락에서 노동에 있어 가장 중요한 문제는, 노동이 더 이상 사용가치와 잉여가치를 더한 고전적 판매가격에 따라 결정되지 않게 되었다는 점이다. 즉, 노동 역시 노동시장이라는 영역이 새로 산출됨으로써 순전히 교환가치로서 평가받게 되었다. 그러나 이것은 역으로 자연과 아무런 관계를 맺고 있지 않은 용역생산노동에게 임금을 지급해야하는 이유가 되기도 하는데, 그것의 수요와 공급이 분명히 창출되기 때문이다. 무엇을 생산하느냐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노동시장에서 수요가 있느냐가 그것이 노동인지 아닌지를 결정한다. 이것은 두 가지 측면을 동시에 가지고 있는데, 전술한대로 서비스노동이 임노동으로서 발돋움하게 되었다는 의미와, 동시에 노동시장 자체를 수요를 창출하는 자본(또는 자본가)이 결정하는 단계에 옴으로써 사회 전체가 자본(가)에게 더욱 충실하게 귀속될 수 밖에 없는 처지에 놓였다는 의미 또한 담고 있다.

  분명 이 책의 저자의 이러한 입장은 타당한 측면이 있다. 마르크스주의에는 분명 정신적 측면 - 이 책의 용어에 따르면 인지적 측면 - 에서 약점이 있었고, 그것을 보완하기 위해 이후의 마르크스주의자들은 여러가지 시도를 했다. 그것은 수정주의일 수도 있고, 프로이트-마르크스주의일수도 있으며, 저자의 입장과 비슷할 스피노자-마르크스주의일수도 있다. 하지만 이러한 국면을 ‘인지자본주의’라는 말로 새로 정의할 만큼 정말 무언가 새로운 것이 있는가? 그것은 조금 의문스러운 것이 사실이다.

  자본주의는 그 탄생에서부터, 아니 자본주의가 아니더라도 모든 경제체제는 언제나 그것을 뒷받침해주는 정신적 측면들을 동반해서 사람들을 지배해왔다. 자본주의 경제는 그 시작에서부터 여러가지 이데올로기적 기제들이 그 체제를 잘 작동시킬 수 있도록 사람들을 여러 형태로 움직이게 만들었다. 그것은 막스 베버의 말처럼 종교적 윤리일 수도 있으며, 아담 스미스가 말한 자유 속에 자리잡히는 질서의 원리에 대한 신뢰일 수도 있고, 또 그 밖의 다른 것일 가능성도 상존한다. 이러한 국면은 자본주의가 전개되는 곳곳에 배여있는 것이지, 현재 국면에서 그것이 유독 독특하게 드러나는 것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따라서 이 책에서 ‘인지자본주의’라고 정의하는 개념은, 사실 어떤 특정한 국면을 이야기하기보다는 자본주의 특유의 인지구조 자체에 대한 이야기라고 보는 것이 더 옳다는 생각이 든다.

  이 책을 읽다보면 드는 느낌은 무엇보다도 다음과 같은 것이다. 일종의 이론적 짜깁기. 내가 각각의 이론에 대해서 잘 모르는 탓도 있거니와, 사실 스피노자와 바렐라 사이에 어떤 접점이 있는 것인지 대체 이 책만 보아서는 잘 모르겠다. 위에서 썼듯이, 그가 해석하는 바렐라의 인지 개념은 어떤 과학적 측면에 기반을 한 것이라기보다는 상당히 철학적인 수준의 논의인 것으로 보이며, 오히려 내게는 헤겔의 내음이 더욱 많이 느껴졌다. 또한 다양한 사회학적, 철학적 분석이 인지자본주의라는 개념 아래 재배치가 되어있는데, 그 일관성을 잡아내기가 그렇게 녹록하지는 않은 작업이다. 그래서, 다시 물어보는 것이다. ‘대체 인지자본주의란 무엇입니까?’  

 

실천적 측면

  만약 자본주의적 경제체제 내에서 우리가 인지적 측면에 우리가 주목해야 한다면, 그것은 용역생산노동이라는 독특한 노동의 형식일 것이다. 인지자본주의의 측면에서, 서비스 노동은 양가성을 가지고 있다. 그것이 늘어나면 늘어날수록 사람들의 삶의 위치가 불안정해지고, 언제나 비정규직 이상의 삶을 살 수 없는 처지에 놓이게 된다. 그 이유는, 위에서도 기술했듯이, 철저하게 자본포섭적인 노동의 형식이기 때문에, 사회적 일자리 조절이 최대의 이윤을 목표로 삼는 자본에 의해 구성되기 때문이다. 하지만 반대로 더 이상 고전적인 노동개념에 얽매이지 않은, 새로운 가치창출이 가능한 영역으로서도 주목할 수 있다. 이 가치창출은 자본의 포섭을 당할 수도 있지만, 그렇지 않을 수도 있다.

  그는 이러한 노동의 조건 하에 놓인 사람들을 다중으로 개념화하고 있다. 이 다중들은 이런 조건 아래서 각각이 혁명의 가능성을 내재하고 살아가는 사람들이다. 하지만 그것은 언제나 표면화되지 않으며, 가끔은 매우 산발적인 형태로 일어난다. 그 산발적인 형태가 곳곳에서 출현할 때, 그것이 바로 그 조건이 더 이상 진전될 수 없는 형태까지 진행되었다는 징후이며 동시에 혁명의 전조이기도 하다. 그는 이 틀거리를 지금까지 있었던 여러 혁명적 시위나 운동들에 적용하여 고찰하고 있다. 그 핵심은, 사람들의 인지구조 그리고 자본주의 자체에 내재하고 있다고 간주되는 모순 그 자체가 폭발하는 것, 그리고 그 폭발을 이끌어내는 주체 개개인의 혁명적 능력에 대한 신뢰인 것 같다.

  이런 논의가 정말 옳은 해석인가 하는 문제는 둘째로 치더라도, 정말 이런 이론구조를 따라간다면 혁명은 발생하는 것일까? 나는 여기에 대해서 매우 부정적으로 생각하고 있다. 이 책의 저자의 입장을 요약하자면, 마르크스주의자들이 예견한 토대에서부터 폭발하는 모순이 상부구조에 영향을 주어 만들어지는 혁명적 정국이라는 것은, 사실 그 모순의 폭발이 상부구조라고 부르는 인지의 영역에서도 동시에 일어나는 과정이기 때문에 경제 자체의 파괴적 징후는 곧 인지구조에서의 혁명의 징후이기도 하다는 어떤 희망적 입장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단적으로, 자본주의가 그만큼이나 만만한 체제이던가, 가 내가 던지고 싶은 질문이다. 오히려, 저자의 입장은 그의 이론적 분석의 연역적 결론이라기보다는 자신의 희망을 투영한 어떤 미래상같다는 느낌을 더욱 많이 받았다. 그와 반대로 해석하자면, 물질구조를 지배하는 자본주의는 인지구조 또한 아주 강력하고 근접적으로 지배하고 있다는 결론에 다시 이를 수 있다. 또한 그 인지구조는 경제위기 자체를 자본의 순환에 따르는 단순한 국면으로 만들어버리거나, 혹은 월가와 미국의 부동산 업자들이 결탁하고 세계적으로 자본을 수집해 돈잔치를 벌인 정도에 불과한 사건으로 축소시킬 수도 있다. 또한 현재 실제로도 그렇게 진행이 되고 있기도 하다. 자본 자체의 문제는 윤리의 문제로 환원되거나 치환되거나 대체되고, 자본의 문제는 감추어진다. 사실 그것이 자본주의가 강제하는 인지구조이기도 하다.

  게다가 실제 그것이 어떤 모순을 사람들의 내부에서부터 폭발시키고 있다고 하더라도, 그 폭발은 양태의 측면 혹은 토대의 측면에서 다시 가로막혀 좌절하는 경우 또한 숱하다. 이 책의 저자는 자신의 희망사항을 최근의 등록금 시위나 서남아시아 이슬람 국가들의 민주주의 혁명 등에서 보려고 하는 듯 하지만……. 리비아는 여전히 내전중이고, 시위에 나가야할 많은 다른 학생들은 역시나 시위보다는 아르바이트를 가는 상황이 벌어지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는 다중의 힘을 믿기보다는, 혁명적 지도자나 전위세력의 힘을 더욱 신뢰하는 것이 정치적으로 더욱 큰 효과를 불러올 수 있지 않을까 하는 것이 짧은 내 생각이다. 

 

덧댐 : 자본론 분석에 대하여

사실 이 책에 등장하는 수많은 이론가들에 대하여 거의 아는 바가 없기 때문에, 이 책을 술술 읽어내려가는 일 자체가 쉽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그 내용에 대해서 이해하기도 대단히 힘들었습니다. 특히나 아직 자본론을 직접 읽어본 적은 없고 입문서 정도만 뒤적거려본 정도로서는, 자본론을 상세하게 인용하면서 지대와 이윤 사이의 관계에 대해 논하는 장에서는 숨이 턱턱 막힐 정도의 느낌만 들었고요. 

서평으로 적은 이 글은, 그래서 이 책의 내용에서 내가 알 수 있는 것, 아는 이론가들에 대해서만 서술한 것입니다. 개인적인 이론적 학습의 수준을 더욱 높인 뒤에, 다시 도전해봐야 하는 책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문득 들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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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smeral 2011-08-31 16:4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래 내용을 메일로도 보내드렸습니다. -------------------

안녕하세요,

저는 웹진 <자율평론>에서 활동하고 있는 김정연이라고 합니다.

다름이 아니라, 박효진 님이 작성하신 <인지자본주의>에 대한 서평글을 오는 9월 초 발행 예정인 <자율평론> 36호 게재할 수 있을지 문의를 드립니다.

<자율평론>은 2002년부터 지금까지 총 35호의 웹진을 발행한 계간 정치철학 웹진이며, 누구나 인터넷을 통해 자유로이 접근할 수 있는 copyleft 웹진입니다. 그간 <자율평론>에 게재되었던 모든 원고들은 아래 링크에서 확인하실 수 있습니다. http://waam.net/xe/autonomous_review

<자율평론>은 인문학 강좌 공간인 다중지성의 정원, 독립 출판 활동을 하는 갈무리 출판사, 세미나 공간 다중지성 연구정원의 마디 단위로, 위 공간들에서 이루어지는 다양한 지적 활동들의 성과들을 모아내고, 우리들의 생각을 더 많은 사람들에게 알리기 위한 작업을 하고 있습니다.

저희가 영리를 목적으로 하는 매체가 아니기 때문에 원고료를 드리기는 어렵지만, 게재를 허락해 주신다면 웹진이 발행되는 대로 PDF 파일을 보내드리겠습니다.

모쪼록 긍정적인 검토를 부탁드리며, 더 궁금하신 사항이 있으시다면 아래 연락처로 언제든지 연락을 주시기 바랍니다.
그럼 연락 기다리겠습니다.

감사합니다.


- <자율평론> 편집위원회 김정연 드림
daziwon@waam.net / 02-325-2102
 
[국가란 무엇인가]를 읽고 리뷰 작성 후 본 페이퍼에 먼 댓글(트랙백)을 보내주세요.
국가란 무엇인가
유시민 지음 / 돌베개 / 2011년 4월
평점 :
구판절판


유시민을 어떻게 볼 것인가

  유시민이라는 이름은 참 복잡하다. 내가 그의 이름을 처음 알게 되었을 무렵, 그리고 그가 유명한 논객으로서 이름을 알리기 시작했을 때 그와 동시에 거론되던 이름은 진중권, 강준만, 김규항 등이다. 그들은 여전히 지금도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정치논객들이다. 지금 생각해보면 조금 어이가 없을 정도지만, 정치적인 견해가 전혀 다른 두 사람을 무리없이 좋아할 수 있었던 시절도 있었다. 

  그 이름이 복잡해진 것에는, 결국 어쩔 수 없이 노무현이라는 이름이 끼어든다. 그는 노무현 전 대통령의 생전에 그랬듯, 그리고 죽은 뒤에도 처절하리만큼 그의 이데올로그 역할을 담당하고 있다. 자기가 전공한 경제학에 대한 지식은 이론적인 무기가 되었고, 날카로운 말과 편안한 글쓰기를 모두 겸비한 쉽지 않은 능력은 실천적인 무기가 되었다. 그는 많은 진보정치인들과 논객들에게, 좋은 상대이면서 넘기 힘든 벽이기도 하다. 

  이러한 현실적인 조건들이 『부자의 경제학, 빈민의 경제학』 이나 『경제학카페』를 읽는 느낌으로 이 책을 읽을 수만은 없는 이유를 만들어준다. 노무현을 옹호하거나(『노무현은 왜 조선일보와 싸우는가』) 자신을 변명하는(『후불제 민주주의』) 책이 아니라 어느 정도 이론적인 성격을 갖춘 책인데도 그러하다. 정치인 유시민의 견해를 빼고 일반적인 국가이론 입문서로서 읽으려 해도, 그의 인상은 여전히 지워지지 않으며 그가 왜 이런 식으로 글을 쓰게 되었을까를 지속적으로 의심하게 된다. 이를 떨쳐내기가 매우 힘들다. 그렇다고 하더라도, 글쓴이를 의심하면서 글을 읽는 것은 논리학적으로 오류다. 나쁜 사람이 말을 했다고 그 말이 나빠지는 것은 아닌 것이다. 따라서 정치에 대해 관심이 많은 어떤 누군가가 이 책을 썼다고 생각하고 책을 일단 들여다보기로 했다.

이론적인 분석의 수준 1 : 포퍼의 그림자

  마이클 샌델의 『정의란 무엇인가』 가 전례 없는 성공을 거둔 이후, 출판가에는 여러 분야의 철학·이론에 대한 입문서가 유행을 타고 있는 듯하다. 이후 샌델 자신의 책도 여러 권 발간되었고, 그에 대한 여러 측면의 반박도 출판된 것을 보면 알 수 있다. 유시민 또는 출판사가 이 책을 언제 기획했는지는 모르겠지만, 이 책이 이러한 흐름의 연장선상에 있다는 혐의를 받기에는 충분하다. 심지어 제목부터 『…란 무엇인가』 이겠는가. 

  서술상의 분류와 특징도 샌델의 책과 그다지 다르지 않다. 지금까지 역사상 등장했던 여러 이념들을, 그 원형을 지니고 있는 학자에까지 거슬러 올라가 그들의 입장을 살펴본다. 단순히 현대에 이것이 어떤 의미를 지니며, 현실정치에서 어떤 위력을 발휘하고 있는가에 집중해서 분석하기보다는, 그 원형을 살핌으로써 발전이나 왜곡의 상을 살피고 진정한 의미를 밝히겠다는 의도를 가지고 있는 서술방법이다. 

  또한 상식적으로는 플라톤이나 아리스토텔레스가 책의 가장 앞에 와야 정상인데도 불구하고 가장 뒤에 배치되어 있다는 것도 샌델과 일치한다. 이론의 역사나 발전의 단계를 추적해보려고 한다면 응당 시대순으로 배열하는 것이 마땅하기 때문이다. 유시민이 ‘국가주의 국가론’으로 가장 처음 제시한 홉스의 철학은 사실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을 극복하겠다는 명확한 의지를 천명하며 탄생한 것이다. 이러한 배치가 생겨난 이유는 아무래도 현대의 국가나 공동체 이론에 있어서 고대의 목적론적 이론이 부활하고 있기 때문이기도 하겠지만, 샌델을 통해 이같은 이론적 논쟁의 맥락이 널리 알려진 탓이 더 클 것이다. 그의 책에 드리운 샌델의 그림자는 단지 우연의 일치일까? 

  이 책이 빚지고 있는 학자는 샌델 뿐만이 아니다. 샌델이 보인다는 것은 오히려 내가 혼자 해보는 추측일 뿐이다. 오히려 그가 의지한 것이 아주 분명하고 확실한 학자는 포퍼다. 목적론적 국가관을 분석하는 작업에서 그는 포퍼의 『열린 사회와 그 적들』 이라는 책을 거의 인용하다시피 한다. 이런 국가이론들의 실제 정치에 어떻게 적용되는지를 살펴보는 과정에서는, 포퍼의 반증주의적 사회철학이 자유주의의 정수인 것처럼 소개하고 있다. 포퍼의 이야기가 책의 여러 부분을 지배하고 있다보니, 이 책에서 펼쳐지는 분석이나 견해가 그의 고유한 것인지 아니면 포퍼의 견해를 요약한 것인지가 불분명해지는 수준에까지 다다른다. 

  목차를 중심으로 포퍼의 견해가 어떻게 적용되는지 살펴보고 요약하자면, 다음과 같다. 반민주주의적인 목적론적 국가관에 가장 강력한 반대자는 포퍼이며(4장), 혁명과 개량 사이에서 고민하는 현실의 정치에서 가장 그럴듯한 지향점을 제공해주는 것이 포퍼의 점진적 개량이라는 사회공학(6장), 이것이 바로 진짜 진보정치이며(7장), 시장경제의 원리가 돌보아주지 못하는 사회적 연대가 필요한 부분을 국가가 도맡아 하기 위해서 거쳐야 하는 가장 올바른 절차를 철학적으로 제시해주는 사람 또한 포퍼이다(8장). 그래서 포퍼는 ‘진보자유주의자’이다. 

  포퍼의 견해가 잘 요약이 되어있는지는 둘째로 하더라도, 과연 그가 간추린 포퍼의 정치적 견해가 정말 그가 말한 것처럼 정치적인 변화에 이바지할 수 있을 것인지는 의문스럽다. 이것은, 현재의 상황을 변화시키고 조금 더 진보적인 방향으로 변화시키고 싶어하는 유시민에게는 더욱 중요한 문제일 것이다. 그는 이러한 이론적 기여가 가능하다고 생각했던 모양인데, 나는 이 문제에 대해 매우 부정적으로 답변을 할 수 밖에 없다. 

  포퍼 식의 점진적 진보가 가능한 이유, 그리고 그가 그러한 정치이론을 주장할 수 있었던 기반에는 ‘반증이 가능해야 과학’이라는 그만의 독특한 반증주의 과학철학이 깔려있다. 이 입장은 어떤 명제도 거짓이 확인되기 전까지는 참이라고 가정된다는 것을 말하며, 이것은 다시 어떤 명제도 완전한 참은 될 수 없다는 것을 말한다. 포퍼의 견해를 근본적으로 받아들이자면, 정치권력을 행사하는 사람들이 말하는 것도 참일 수 없지만, 동시에 그것에 저항하고자 하는 세력이 하는 말 또한 참일 수 없다. 

  진리의 힘을 쟁취할 수 없는 정치투쟁은 과연 가능할 것인가? 그가 잘 파악하고 있듯이, 현실적으로 집권하고 있는 집단에 비해서, 진보주의자들은 상대적으로 동원할 수 있는 힘이 적다. 따라서 진보주의자는 현실이 아니라 이성에 기댄다. 유시민은 진보가 이성을 사용한 점진적 진보를 통해 이루어진다고 했지만, 그 진보의 성취는 언제나 현실적 상황을 뛰어넘은 진리의 힘을 이용해서만 가능하다. 사실 그가 파악한 이성이란 바로 이런 의미의 이성, 현실이 어떻다 하더라도 진리를 추구할 수 있도록 인간을 이끄는 그 이성이다. 그래야만 이성을 통한 진보의 성취가 가능하다. 그가 논의를 많이 기대고 있는 것과는 달리, 그가 진보에 대해 열망하는 것은 오히려 칸트적 의미의 이성에 더 가까워 보인다. 보수주의의 원조인 버크나 그것이 철학적으로 가장 정치하게 표현된 흄의 실천철학에서만 보아도, 진리에 대한 회의는 언제나 보수주의의 무기이지 진보정치세력의 무기는 될 수 없다.

이론적인 분석의 수준 2 : 진보자유주의를 어떻게 할 것인가

  그렇다면 포퍼를 제외하고 난 그의 정치적 견해는 무엇일까? 이 책에서는 그것이 진보자유주의로 개념화되어있다. 이 책의 전체에서 그는 마르크스주의자들을 국가관이 없는 자들이라고 비판하며, 자신의 국가관이 진보적인 정치세력이 가져야하는 국가관이라고 주장한다. 과연 그렇다면 그것이 대체 무엇인지 되묻고 싶은데, 나는 적어도 이 책에서 소개된 내용에 국한한 이 개념에 대해서도 비판적이다. 

  포퍼를 강조하는 등 그의 태도를 살펴보았을 때, 그는 행정부를 통제할 수 있는 법을 합리적으로 바꾸는 절차를 대단히 중시한다. 이것은 그가 스스로를 자유주의자라고 말하는 것에 부합하기도 하다. 자유주의 정치철학 또는 국가관의 핵심은 그가 포퍼에 대해 말할 때 은연중에 주장하듯이 ‘완전히 올바른 가치는 없다’는 것이다. 그가 잘 설명하고 있듯이 자유주의 이론의 국가관, 즉 사회계약에 따르면, 세상엔 여러 가치들이 경쟁적으로 받아들여지길 기다리고 있으며, 공동체 내의 구성원들은 이성에 의지한 합리적 토론을 거쳐 여러 가치들을 승인하고 그것을 중심으로 공동체를 구축한다. 어떤 가치가 실제로 옳은지 그렇지 않은지 여부와는 상관없이, 사회계약에 의해 승인된 것은 무엇이든 그 사회가 주목하는 가치가 된다. 또한 개인들의 자유는 여전히 가장 존중받아야 할 대상들이기 때문에, 여전히 개인들은 그 주목하는 가치와 상관없이, 다른 사람에게 피해를 주지 않는 한에서 자신이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것을 실현하기 위해 노력할 수 있다. 

  사실 그가 주장하고자 하는 진보적 자유주의는 그 결과의 측면에서 롤즈의 사회철학과 비슷한 함의를 지니고 있는 듯하다. (이런 측면에서, 그가 국가와 공동체에 대해서 논하면서 현대의 가장 중요한 자유주의 이론가인 롤즈를 전혀 언급하거나 인용하지 않은 것을 심히 의문스럽게 생각한다.) 출발선을 같게 하는 최소한의 경제적 지원을 국가가 담당하고, 나머지를 시장경제가 담당하게 하며, 우연적인 조건에 좌우되는 측면을 최소화해야한다는 것은 이미 롤즈의 『정의론』과 『정치적 자유주의』등에서 제시된 자유주의의 새로운 측면들이다. 

  그러나 유시민은 이 진보적 자유주의가 자유주의 국가관과 목적론적 국가관이 결합한 형태의 공동체이론이라고 설명하고 있다. 어쨌든 그가 말하고 싶었던 바는 다음과 같이 요약할 수 있다. 즉, 윗 문단에서 이야기한 것처럼, 공동체가 연대를 통해 최소한의 사회적 삶을 보장해주는 것은 도덕적인 옮음에 해당하는 문제이기 때문에 목적론적 국가관의 측면이다. 그런데 이걸 합리적이고 정당한 절차를 통해서 보장하는 문제는 자유주의 국가관의 측면이다. 따라서 자유주의가 진보정치를 함축하려면 목적론적 국가관을 수용해야만 된다. 

  하지만 이러한 주장은 굳이 목적론적 국가관을 수용하지 않아도 된다. 롤즈는 칸트의 비판철학의 개인중심적 측면을 받아들여 진보적인 정치적 실천을 철학적으로 정당화하고 있다. 유시민의 입장에 선다면, 칸트의 실천철학이 목적론적 측면을 함축하고 있기 때문에 롤즈의 철학도 목적론적 측면을 담고 있다고 옹호할 수도 있겠다. 문제는 그 뿐만이 아니라는 것이다. 시장경제를 옹호하는 자유주의자라도 경제를 원활하게 운용하기 위해 진보적 정치를 해야한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경제학자인 한 인도의 아마티아 센이 대표적인 사람이라고 할 수 있다. 동물권 이론으로 세계적인 주목을 받는 진보적인 철학자인 피터 싱어 또한, 자신의 독특한 진보적 정치에 대한 이론을 구축하는 데 목적론적 국가관을 전혀 수용하지 않는다. 오히려 목적론과 철학적으로 정반대에 서있는 공리주의를 자신의 기초로 삼는다. 유시민이 말하는 진보적 자유주의란, 자유주의이거나 혹은 노직이나 하이에크 같은 자유지상주의자들과는 구분되는 ‘그냥 자유주의’이지, 무언가 특별한 자유주의는 아니다. 

  더군다나, 합리적 절차를 중요시하는 자유주의 국가관과 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가 보여준 목적론적 국가관을 결합한다고 이야기하면서도 그것이 가능한지 보여주는 어떠한 논증도 이 책에는 들어있지 않다. 이 두 국가관은, 본질적으로 옳은 가치가 있는가 없는가, 그것을 어떻게 사람들이 인정할 수 있는가, 그 가치를 이룰 수 있도록 공동체가 개인에게 간섭하는 것이 옳은가 옳지 않은가 등등 사사건건 시비가 붙는 사이이다. 첫 번째 질문에 목적론은 그렇다고 대답하며 자유주의자는 그렇지 않다고 말한다. 두 번째 질문에 그것이 목적이기 때문이라는 대답에 자유주의자는 절차 없이는 정당화 없다고 응수한다. 세 번째 질문에는 간섭해도 된다는 입장과 그것은 자유의 침해라는 입장이 첨예하게 대립한다. 그런데 유시민의 논증이란, 축약하자면 그저 ‘좋은 게 좋은 거’라는 수준이다. 이 두 국가관이 이토록 쉽게 조합될 수 있는 성격의 것이라면, 이 두 국가관(또는 넓은 의미에서 정치철학) 사이에서 벌어진 자유주의와 공동체주의의 논쟁은 모두 부질없는 것이었나보다.

이론적인 분석의 수준 3 : 홉스의 문제

  또한 이 책의 분류에 따르면, 홉스는 국가주의 국가론을 정당화하는 이론가에 들어가고 있다. 오해를 줄이기 위해서 덧붙이자면, 홉스는 국가의 힘을 대단히 강조하긴 하지만 정치철학의 전통에 있어서는 자유주의자에 편입시키는 것이 더 올바르다. 그 이유는 자유주의 정치철학의 핵심요소를 확립하고 이론적으로 전개한 사람이 바로 홉스이기 때문이다. 핵심요소란 다름아닌 보편주권론과 사회계약설이다. 보편주권론은 공동체를 구성하는 모든 사람들에게서부터 주권이 나온다는 이론이며, 사회계약설은 이 주권자들의 합리적 선택에 따른 계약에 의해 국가(공동체)와 정부가 구성된다는 입장이다.

  따라서 홉스는 국가주의자라기보다는, 계약의 내용을 바탕으로 국가의 폭력독점을 극단적으로 정당화한 자유주의 정치철학의 선조쯤 된다고 보는 것이 맞다. 로크와 밀, 그리고 수많은 자유주의자들이 그 이론적인 격차에도 불구하고 자유주의자의 범위에 포함되는 것은 바로 이 두 가지를 주장하고 있기 때문이다. 홉스가 군주제를 선호한 이유도 이러한 맥락에서 바라보아야 한다. 즉, 그에 따르면, 이미 국가가 실행하려는 것은 계약에 의해 동의받은 내용이므로 되도록 빨리 해야한다. 그런데 행정부에 소속되어 있는 사람이 많으면 많을수록 의견이 분산되어 실행이 더뎌지므로, 그 의지가 단일한 군주제가 실행속도가 가장 빠르다는 것이다. 그가 주장한 군주제란 현대의 위계적 관료제를 포함하는 넓은 의미의 군주제이다.

  그가 이렇게 이야기한다면, 그가 자유주의자로 분류하지만 귀족정을 옹호하는 루소는 어떻게 바라보아야 할까. 농담이 아니라, 실제로 그는 『사회계약론』에서 정부의 형태를 논하는 중에 귀족정이 가장 좋은 정치체제라고 주장한다. 그렇다면 그는 아리스토텔레스와 같은 정치적 입장을 취하는 것일까? 애석하게도 그렇지 않다. 그가 주장하는 귀족정이란 선출 귀족정을 이야기하며, 이것을 현대언어로 번역하자면 대의민주주의쯤 된다. 정치사상사적 맥락을 놓치면 이와 같은 실수를 범하게 되며, 그가 무엇을 기준으로 이야기하는지 그리고 그 내용이 실제로 무엇인지를 더욱 면밀하게 살펴보지 않으면 범하게 되는 실수라고 생각한다.

  국가의 폭력독점과 그 힘의 범위를 가장 넓게 설정한 이론가라는 점에서 국가를 중시한 사람으로 간주하고 싶었던 유시민의 마음은 십분 이해하고도 남음이 있으나, 정치철학의 전통 자체를 부정하는 분류방법은 쉽게 용납이 되지 않는다. 오히려 그가 생각하는 국가주의는 신분제를 옹호하는 근대 절대주의 국가라든가, 플라톤 또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정치철학에서 발견되는 공동체 우선적인 철학에 더욱 부합하는 것 같다.

‘국가란 무엇인가’를 어떻게 볼 것인가

  글을 마무리지으면서, 정치가로서의 유시민을 고려하고서 책을 다시 읽어나가기로 해보겠다. 자신과 전혀 상관없는 분야도 아닌, 정치인이 정치이론에 대해서 쓴 책이기 때문이다. 내가 생각하는 이 책의 백미는 책의 가장 끝에 있는 맺음말이다. 애초에 내가 시도했던 ‘정치인 색깔 빼고 보기’라는 의도와는 전혀 다르게, 유시민은 스스로 ‘정치인으로서 이 책을 썼다’고 주장하고 있다. 나같은 사람들은 허탈해질 수 밖에 없다. 아, 이것은 무슨 청천벽력같은 소리란 말인가. 

  사실 정치인으로서의 유시민을 고려하고 이 책을 읽어보자면, 국가이론과 상관없이 이 책은 처음부터 끝까지 자신에 대한 변명으로 점철되어 있을 뿐만 아니라, (지금은 합당하려고 열심히 기를 쓰는) 민주노동당과 진보신당에 대한 비판, 그리고 거의 절대악과 같이 묘사되는 이명박 대통령의 행정부와 한나라당에 대한 경멸로 가득하다. 포퍼의 점진적 이론에 대해 무게를 싣는 이유는, 그것을 다름아닌 자신의 정치적 입장과 동일시하기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 즉, 한나라당-민주당과 민주노동당-진보신당 사이에서, 자신이 이론적으로 옳은 길을 가고 있다는 것을 말해주고 싶은 것이다. 베른슈타인이 ‘역사에서 승리했다’는 평가는 어떤가. 독일 사민당이 현재까지 존속하는 것이 베른슈타인의 수정주의가 승리했다는 증거라고 하니 참 할 말이 없다. 

  이러한 변명의 정점은 베버의 신념윤리와 책임윤리를 들먹이며 절대악 한나라당을 몰아내야한다는 가장 마지막 장이다. 베버의 책을 직접 읽어본 적이 없어서 이것이 정확히 어떤 내용을 담고 있는 개념인지는 알 수 없으나, 유시민의 설명에 의하면 신념윤리는 자신이 설정한 이상을 향해 실천하는 동기를 가장 우선에 두는 시각이며 책임윤리는 결과에 책임을 지는 윤리관이라는 것이다. 운동과는 다르게 정치인은 책임윤리에 따라 정치를 해야한다. 이것은 민주주의라는 정치제도 자체가 최악을 피하기 위해서 설계된 제도라는 그의 입장과 결합하여, 그 정치제도의 본질을 가장 잘 구현하기 위한 수단이 연합정치라는 것이다. 또한 이는 최악을 피하는 ‘예측 가능한 결과’에 입각한 책임윤리에도 부합한다. 

  유시민이 저술한 이론서들이 그러하듯이, 이 책이 아주 쉽게 술술 읽힌다는 것은 매우 좋은 점이다. 하지만 그런 능력이 자신의 정치적 입장을 정당화하는 데 쓰이거나, 그런 입장을 반영하여 정치철학의 역사를 제멋대로 재구성하는데 쓰인다면 그것은 ‘목적론적’으로 온당하지 못한 일이 될 것이다. 이 책에서, 유시민은 ‘국가란 무엇인가’ 라는 질문에 제대로 대답하지 못했을 뿐만 아니라, 선현들이 답변도 제대로 소개하지 못하는 우를 범하고 말았다. 그렇게 변명이 급했을까.

 

덧댐 1 : 이 글의 본문의 두 번째 부분인 ‘진보자유주의에 대한 문제’의 아이디어는 아는 친구이자 이글루스 유명 블로거인 Socio의 글(http://www.facebook.com/socio1818/posts/168970979827554)에서 빌어왔음을 밝힌다.

덧댐 2 : 노무현은 생전에 이순신에 감정이입을 하더니 유시민은 유수의 이론가들에 감정이입을 한다. 물론 그 감정이입은 왜곡과 아전인수를 곁들인 것들이다. 어쩜 둘이 이렇게 비슷한지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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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1-06-27 15:45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저는 정치학도 모르고 유시민의 책도 읽어보지 않았습니다. 어쨌든 저자 자신이 스스로 밝혔듯이, 이 책은 국가론 입문서가 아니라 한 정치인이 자신의 국가관과 정치 윤리관을 밝힌 책으로 보입니다. 저자가 형식적으로 기존의 정치이론들을 끌어들였기 때문에 이런 비평을 하신 것이라 여깁니다만, 저자가 현실 정치인인 이러한 저서의 경우는 학문적 차원의 잣대보다는 저자의 개인적인 정치적 입지의 천명이라는 잣대로 바라봐야 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애초에 저자가 제시했던 제목은 '나에게 국가란 무엇인가'였는데, 출판사에서 수정을 요구했다고 어디선가 지나치며 읽은 것 같아서 몇 자 끄적여 봤습니다.

박효진 2011-06-28 00:30   좋아요 0 | URL
이 글의 끝에서 짧게 줄였습니다만, 이 책을 정치적 입장의 천명이라는 잣대로 바라볼 경우, 그와 입장이 같지 않은 저로서는 별로 할 말이 없습니다...

다만, 자신의 입장을 정당화하기 위해서 여러 학자들의 이론을 끌어들이고 싶다면 가장 우선해야 할 것은 그 학자들의 입장에 대한 분석과 연구겠지요. 그런데 제가 이 글에서 지적한대로 이론분석에서부터 삐끗하고 있으니, 정당화의 근거조차 마련하지 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사실 글에서는 격하게 표현하지 않았습니다만, 대체 포퍼의 책을 읽은 것인지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와 마르크스의 책을 읽은 것인지도 의심스럽고요. 물론 열심히 운동하던 대학교 시절에 다 뗐겠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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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무엇을 보았는가 - 버트런드 러셀의 실천적 삶, 시대의 기록
버트런드 러셀 지음, 이순희 옮김, 박병철 해설 / 비아북 / 2011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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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이 책은 지난 달 알라딘 독자 신간평가단이 선정한 인문/사회/과학분야 주목할만한 도서이다. 이 책이 선정된 이유는 일단 이 책의 지은이인 버트런드 러셀이 글을 매우 시원하고 잘 쓰는 작가일 뿐 아니라, 각각의 주제들에 대해서 아주 논리적이고 핵심만 간결하게 기록하기로 워낙 유명한 사람이기 때문일 것이다. 최근 여러 에세이집들이 번역된 데 이어서, 영어로 『Bertland Russell's Best』라는 제목이 붙어있는 이 책도 번역이 되어 나왔다. 많은 독자들, 그리고 나조차도 말 그대로 'best'일 것이라 생각했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완전히 속았다. 이 글은 best도 아니고, 그냥 아무것도 아니다. 그 이유는 단 하나이다. 아무런 고려없이 러셀의 글을 마음대로 재단질해서, 마치 잠언집을 보는마냥 형편없이 편집해놓았기 때문이다. 러셀이 이 책의 원고를 직접 보고, 수정을 봐주고, 서문을 써주었다는 것 자체가 정말 이해가 안될 지경이다. 일말의 이해를 할 수 있는 실마리가 있다면, 러셀 본인만은 각각의 단편이 어떤 의미로 쓰여진 조각글인지 다 이해할 수 있고, 그래서 이 정도만 인용해도 그 뜻이 온전히 전달될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을거라는 정도다. 이것도 아주 많이 이해한 것이다. 러셀을 접한 이래로 그에 대해 이렇게 분노한 것은 처음이다……. 

  이 책이 화가 나는 이유는, 위에서 내가 추측한 러셀이 이 책을 별 생각없이 출판할 수 있게 한 이유와 정확하게 반대이다. 러셀이 아닌 이 글을 읽는 사람들은, 여기에 등장하는 각각의 조각글이 어떤 맥락에서 어떤 의도로 쓰인 것인지 전혀 알 수 없기 때문이다. 서유럽 사람의 입장에서 쓴 아시아와 아프리카에 대한 비하가 가감없이 수록되어 있기도 하고, 지금은 폐기된지 오래인 행동주의 심리학에 기반한 사회개혁 프로그램에 대해 적극적으로 주장하는 글도 보인다. 같은 글에서 인용했다고 하는데, 전혀 연결이 되지 않는 두 단편이 나란히 이어서 쓰여있기도 하다. 대체 이것을 어떻게 바라보아야할까? 

  그의 글은 이런 식으로 뽑아내어 읽었을 때 그 정확한 의미를 전혀 파악할 수 없는 상황으로 치닫는다. 그는 기본적으로 논리학자이며, 문장과 문장, 문단과 문단 사이의 연관이 매우 높은 편이다. 그래서 처음부터 끝까지 글의 논지 전개를 따라가야만, 그가 실제로 하려는 주장이 무엇인지 그리고 그 근거가 어떻게 그 주장을 받쳐주는지 명확하게 드러난다. 그가 글에서 자주 쓰는 (그의 체험에서 비롯한 것으로 보이는) 다양한 비유들도, 글 전체와 아주 짙은 관계를 맺고 있다. 다시 말해, 그의 비유는 단순히 수사적 전략에 그치지 않고 아주 강한 논리적 연결고리를 전제하고 쓰인다. 

  그나마 그가 일관되게 논리적으로 비판하는 종교에 대한 부분은 그 뜻이 살아있는 편이다. 그것은 논리적 완결성을 결여한 종교의 교리와 도그마에 대한 철학적 비판, 그리고 그의 대표적인 에세이집 가운데 하나인 『나는 왜 기독교인이 아닌가』 에서 보여주는 종교의 여러가지 사회적인 해악에 대한 지적들이 많이 알려져있기 때문에 그나마 쉽게 이해가능한 것으로 보인다. 다른 주제에 대한 조각글들은, 특히나 결혼(성)과 윤리, 도덕에 대한 단편들의 경우 이런 난점은 더욱 두드러진다. 이미 번역되어 나오기도 한, 같은 주제에 대한 다른 에세이들은 명쾌하고 직접적으로 서술되어 있음에도 불구하고, 『나는 무엇을 보았는가』는 이러한 러셀의 글의 참맛을 제대로 살리지 못하고 있다. 

  따라서 이 책으로 러셀을 읽으려 시도하는 것은, 그 자체로 완전히 실패하는 것이다. 러셀의 노벨상 수상 소감문, 그리고 이 책이 주로 인용하지만 한국에는 아직 번역되지 않은 많은 에세이들이 차라리 편집없이 처음부터 끝까지 실려있었으면 어땠을까 하는 아쉬움이 너무 많이 남는다. 러셀의 글이 어떤지 알아보고 싶다면, 차라리 에세이집이 완전히 번역되어 나온 다른 책들, 예를 들면 『행복의 정복』, 『우리는 합리적 사고를 포기했는가』같은 책이 훨씬 낫다. 나는 주로 사회적인 주제들에 대한 에세이가 실려있는 『게으름에 대한 찬양』을 특히 좋아한다. 이런 책들은 특정한 주제에 편중되어 있어 그의 입장을 전체적으로 조망하는 것은 힘들지라도, 그의 글의 특징적인 면이나 성향을 파악하는데는 훨씬 도움이 될 것이다. 

  단 하나, 이 책의 긍정적인 면을 하나 꼽아보자면, 편집자와 해설자가 달아놓은 코멘트들이 다행히도 어느 정도는 이 책의 혼란스러운 면을 다소나마 보완해주고 있다는 점이다. 러셀을 전체적으로 조망하기 위해서는, 러셀을 연구한 사람들의 이같은 정리가 약간은 도움이 될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떤 사람의 글과 진짜 의미를 파악하기 위해서는, 역시나 다른 사람들의 코멘트나 2차문헌에 의존하기보다는 원래 저자와 직접 대면하고 책을 통해 대화하는 것이 훨씬 낫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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