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8년 서양고중세철학 숙제>

 

 

1. 초기 자연철학의 주제

 

   고대 그리스 철학 초기의 탐구주제는 인간을 포함한 이 세계 전체, 즉 자연에 대한 물음이었다. 크게는 자연에 대한 물음이라고 한 가지로 나타낼 수 있겠지만, 자세히 생각해보면 이 물음은 크게 두 가지 질문을 내포한다고 생각할 수 있다. 첫째는 어떻게 만들어졌는가?’ 라는 물음이다. 이는 자연이 어떻게, 또 무엇으로 이루어져서 지금 우리에게 보이는 것과 같은 모습을 갖추게 되었는지 묻는 질문이다. 둘째는 왜 변하는가?’ 라는 물음이다. 이는 우리가 감각으로 겪게 되는 사물의 변화의 원인과 과정에 대한 질문이라고 할 수 있다. 보였다가 사라지고, 생겼다가 없어지고, 성장하고 쇠퇴하는 것에 대한 근원적인 탐구가 바로 이 질문에 의해서 이루어진다.


   철학이 처음 시작되던 때, 밀레토스의 학자들은 첫째 문제에 집중해서 자신의 사유를 전개하였다. 이에 대해 물, 공기, 무한자 등의 다양한 답변을 들을 수 있다. 하지만, 밀레토스의 학자들은 둘째 질문에 대한 답은 아예 하지 않거나, 자신들이 내세운 근원적인 물질이 스스로 운동한다는 정도의 미약한 답변만을 내놓았을 뿐이다.


   이들의 변화의 문제를 설명하지 않았던 이유는
, 물질 자체에 생명력이 있어서 자신의 의지로 움직인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이는 아직 물질에 영혼이나 신적인 힘이 들어있다고 생각하는 원시적 견해의 연장선상에 있는 생각이다. 세계가 어떻게 만들어졌는지는 이성적인 방법으로 설명하려고 시도했던 사람들이지만, 아직 변화를 설명하는 부분에 있어서는 고대의 미신적인 방법을 벗어나지 못한 것이다.


   하지만
, 이보다 한 세대 뒤에 등장한 철학자들은 운동과 변화의 문제를 어떻게 해결해야 하는지 고민하기 시작하였다. 세계가 어떻게 이루어졌는지 설명하는 것만큼이나, 우리 눈 앞에서 벌어지는 수없이 많은 변화에 대해 설명하는 것 또한 자연에 대해 연구하는 중요한 과제이기 때문이었다.

 


2. 변화 문제의 대두

 

   2.1. 헤라클레이토스

 

   고대 그리스 철학에서, 자연의 변화에 대해 처음으로 생각하고 그에 대한 이론을 편 철학자는 헤라클레이토스이다. 그의 생애에 대해서는 정확하게 알려진 것이 없다. 많은 신화적 전기와 일화가 전해져 내려오고 있지만, 신빙성 있는 것은 많지 않다. 헤라클레이토스와 관련된 단편은 그의 로고스logos 개념과 기독교적인 로고스logos의 차이를 규명하기 위한 책에서 주로 발견할 수 있다. 디오게네스 라에르티오스에 따르면, 그는 자연에 관하여라는 책을 썼다고 한다.


   밀레토스의 학자들이 말하는 근원
arche으로서의 물질을 결정하게 된다면, 필연적으로 그것은 불변할 수밖에 없게 된다. 변화가 있다면 그것은 근원이라고 할 수 없기 때문이다. 이에 따라 헤라클레이토스는 근원으로서의 어떤 물질을 거부한다. 이 세계는 우리가 보는 그대로 존재하는 모든 것들이 그저 존재하고 있을 뿐이며, 그것은 다른 어떤 것으로 구성되거나 만들어진 것이 아닌 그 자체로 존재하는 것들이다. 더 중요한 문제는 생성과 소멸, 감각할 수 있는 양태의 변화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이다. 여기에서 밀레토스 학자들의 물질과 변화의 관계는 역전된다. 헤라클레이토스는 어떤 근원적 물질이 아닌, ‘변화를 세계의 본질로서 이해하고 그것으로 세계를 설명한다.


   사물은 끊임없이 변화한다
. 이것은 사실이다. 그렇다면, 어떤 개체가 변화한다면, 그 개체가 변화하기 전과 변화한 후는 같은 개체일까 다른 개체일까? 변화의 원리 자체만으로는 이것을 설명하지 못한다. 하지만, 변화의 원리나 문제를 크게 고려하지 않는 이상, 우리는 자연스럽게 그것을 동일한 개체라고 인정하며, 실제로 그렇다고 받아들이고 있다. 이는 변화의 이전과 이후에도 그것을 동일한 개체로서 인정하게끔 만드는 속성이 있기 때문이라고 설명한다. 이 속성이 바로 로고스logos이다.


   로고스는 변화와 자기동일성
-개체동일성을 동시에 설명하기 위한 원리이다. 이전의 철학자들에게서 변화란 의지적인 성격이 강하므로, 규정할 수 없으며 무규칙적이다. 하지만 헤라클레이토스가 설명하는 로고스는 이성적이고, 보편적이다. , 자연의 모든 개체 안에 내재하며 변화의 방향과 성격을 정해주는 원칙이라고 볼 수 있다. 또한 이를 통해 자기동일성-개체동일성을 설명할 수 있다. 로고스가 함축하고 있는 변화과정은, 변화의 원리인 것과 동시에 어떤 개체가 그것일 수 있게끔 만들어주는 원리이기도 한 것이다. 따라서, 자연의 모든 개체는 로고스를 함축하고 있고 논리적으로 만물은 (로고스를 통하여) 하나다는 결론을 이끌어낼 수 있다.


   그러므로
, 현상적인 변화와 물질적인 인식에 얽매있는 것은 옳지 못하다. 인간은 로고스를 파악해야만 자연 내의 개체에 대한 이해와 자연 전체에 대한 이해를 할 수 있다. 로고스를 이해하는 것이 인간이 가질 수 있는 최고의 지혜이다.

 

2.2 엘레아 학파의 주장과 그에 대한 대응

 

   이렇듯 근원적인 물질에서 변화로 질문의 초점이 옮겨온 가운데, 변화는 있을 수 없다는 주장을 하는 학파가 나타났다. 엘레아의 파르메니데스는, 이 세계에는 존재와 변화가 동시에 있을 수 없다고 주장하였다. 그의 말은 있는 것은 있고, 없는 것은 없다.’ 라는 말로 요약할 수 있는데, 이는 존재의 변화 불가능성을 내포하고 있다.


   파르메니데스에 따르면
, 존재가 변화한다는 것은, 첫째 존재가 비존재가 될 수도 있으며, 둘째 비존재에서부터 존재가 생겨날 수도 있다는 뜻이다. 하지만 첫째 경우, 존재가 비존재가 된다면 그것은 더 이상 존재라고 부를 수 없을뿐더러, 변화를 겪는다는 것 자체가 당시 사람들이 생각하던 존재의 속성에서 어긋난 것이다. 둘째 경우는, 비존재에서 존재가 생겨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비존재는 그야말로 무() - 아무 것도 없음이며, 따라서 존재를 위한 어떤 근거가 없기 때문이다.


   엘레아 학파의 이런 주장은
, 당시 고대 그리스의 사상계에 큰 충격을 주게 된다. 그 이유는, 사람들이 지금까지 상식적으로 받아들이던 존재 개념에서 출발하여 아주 비상식적인 결론을 이끌어내기 때문이었다. 게다가 그 과정은, 이전의 철학자들처럼 주장이나 의견, 가설 등으로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치밀하고 정교한 논리적 과정을 밟고 있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엘레아 학파 이후의 철학자들은, 엘레아 학파의 전제를 모두 인정하면서도 변화를 설명해야하는 어려운 문제를 풀어야만 했다. 엘레아 학파 등장 이후의 자연철학은 대개 이런 노력의 결과로서 나타난다.

 

   엠페도클레스는 시칠리아 섬 남부 연안의 도시에서 태어났다. 이는 그가 직간접적으로 피타고라스 학파의 영향을 받았음을 암시한다. 또한 태어나고 죽은 해가 확실하지 않다.


   엠페도클레스는
존재가 무한히 많다고 주장함으로써 엘레아 학파의 입장을 극복하려고 했다. 엠페도클레스는 자연이 네 가지 물질적 요소 - 흙과 물, 불과 공기에 의해 물질적으로 구성된다고 보았는데, 이 네 가지 물질적 요소들이 엘레아 학파의 존재의 속성을 띈다. 네 가지 물질적 요소들은 만들어지지도, 없어지지도 않는다. 또한 그 자체로서 충만하고 단일하여 요소 자체는 변화하지 않는다.


   하지만 이 요소들이 무한히 많으며
, 여기에 신적인 성질이 내재해있다는 주장을 편다. 이런 신적인 요소를 사랑과 미움이라는 말로 표현하고 있다. 이 둘은 어떤 종류의 힘이다. 사랑은 네 가지 요소가 서로를 끌어당겨 어떤 사물을 만들어내는 힘이며, 미움은 반대로 서로를 밀쳐내어 어떤 사물을 해체시키는 힘이다. 우리가 감각하는 물질은, 이 네 가지 물질이 두 가지 힘에 의해서 뭉치고 흩어진 결과물이다.

 

   아낙사고라스는 기원전 500년 경에 소아시아에서 태어나, 스무 살 때 아테네로 이주하였다고 알려져있다. 이로 미루어 볼 때, 밀레토스의 학자들에게 굉장히 많은 영향을 받았으리라고 유추해볼 수 있다. 아낙사고라스가 자신의 철학의 중심주제로 삼았던 것 역시 자연이었으며, 따라서 그도 자연철학의 계승자로 분류해볼 수 있다.


   아낙사고라스는 변화의 원인
-원리로서의 정신nous을 가정하여 엘레아 학파의 주장에 대응하려 했다. 아낙사고라스의 정신은 이성적, 합리적 원리로서 그 자체는 변화하지 않으며 원리가 되어 현상의 변화의 법칙으로서 작용한다. 이를 통해 물질-현상적인 존재와 그것의 원리로서의 정신을 설정하여 변화와 물질의 영속성 모두를 다 설명하려 했다고 볼 수 있다.


   정신의 발견은
, 무규칙한 의지가 내재했다고 생각하고 변화를 이해했던 기존의 이해방식에서 완전히 탈피한 생각이다. 변화를 서로 분리해냈을 뿐만 아니라 변화의 과정에 법칙성을 부여하였다. 이는 확실히 과학적으로 진일보한 사유라고 볼 수 있다. 아낙사고라스를 통해서 이전에는 영혼과 물질 모두를 가리켰던 자연physis, 온전하게 물질적인 자연만 가리키는 개념으로 바뀌었으며, 이는 원자론자들의 생각에 기초가 되었다고 볼 수 있다.

 


3.
고대 원자론의 자연철학

 

   레우키포스는 그의 생애에 대해서 거의 알려진 것이 없다. 그가 주창하는 원자론은 항상 데모크리토스의 원자론과 더불어 언급되고 있으며, 순수하게 레우키포스의 이름으로 전해는 단편은 오직 두 개 뿐이다. 출생지조차도 명확하지 않다.


   데모크리토스는 그리스 북부에서 태어났는데
, 출생년도는 확실하지 않다. 다만 많은 지역을 여행했고, 스스로가 굉장히 폭넓은 분야에 저술을 했다고 알려져있다. 자연철학 이외에도 사회나 윤리학, 정치적인 문제에도 관심이 많았으며, 이에 대해 저술했다는 기록이 남아있다.

   

   고대 원자론의 기획 역시 엠페도클레스, 아낙사고라스와 같다. 엘레아 학파가 제시한 존재의 조건을 만족시키면서도, 우리가 현상으로 경험하는 변화에 대해 설명해야만 하는 처지에 놓인 것이다. 이는 위에서도 서술했듯이, 비단 고대 원자론 뿐만 아니라, 당시의 사상계에 몸담고 있던 사람 모두가 풀어야만 하는 숙제이기도 했다. 이는 존재/비존재의 문제, 생성/소멸의 문제, 변화의 문제 그리고 지식의 확실성 같은 것들로 표현할 수 있다. 원자론은 이 모든 문제를 하나의 이론으로 해결하고자 고안된 이론이라고 볼 수 있다. , 현상과 실재의 괴리를 해결하기 위한 설명이다.


   고대 원자론은 여기에서 한 발 더 나아가
, 실재의 모습을 철저하게 물질적으로 그려내려는 시도를 보이고 있다. 당시에 자연철학자들은, 생각하는 방식에 있어서는 철학적인 사고방식을 보여주고 있지만 여전히 신화적인 사고방식의 흔적 또한 보여주고 있었다. 이전 철학자들이 지속적으로 주장하는 어떤 신적인 힘, 영혼 같은 개념이 그런 흔적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예라고 할 수 있다. 반면 원자론은, 세계를 영혼이나 신이 거의 배제된, 물질적인 성질을 중심으로 설명해냄으로써, 인간의 관찰과 이성으로 자연을 설명하려고 시도했던 자연철학의 목표에 한발짝 다가선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원자론이 현상과 실재, 변화의 문제를 해결하는 방식은 다음과 같다. 우선 불변하고 영원히 존재하는 실체로서 원자를 설정한다. 그렇다면 원자의 세계 즉 실재의 세계는 원자는 사라지지 않는다는 가정으로 영원하다는 조건을 충족시키고, 그 자체로 충족되어있고 불가분한 존재라는 가정으로 불변한다는 조건을 만족시킨다. 동시에 원자들의 형태와 배열을 통해 우리가 감각하는 현상세계가 구성된다고 주장하였다.


   고대 원자론의 아이디어는 어느 정도 엠페도클레스의 주장과 유사한 점이 있다
. 고대 원자론자들이 엠페도클레스의 주장에 영향을 받았는지는 확실하게 밝힐 수는 없다고 하더라도, 엘레아 학파의 존재개념을 만족시키면서도 현상의 변화를 설명하기 위해서 존재의 다수성이라는 아이디어를 채택하고 있다는 점이 비슷하다. , 실제로 존재한다고 말할 수 있는 것은 그 자체로 단일하고 충만하여 변화가 없지만, 그 존재가 무한히 많으며, 존재의 작용을 통해 우리가 감각하는 세계가 구성이 된다는 것이다.


   고대 원자론자들은 이 존재를
원자atom’라는 말로 표현하고 있다. 원자는 더 이상 나누어질 수 없는 상태atoma’라는 뜻이다. 더 이상 나누어질 수 없는 상태로 어떤 실체를 정의함으로써, 엘레아 학파의 존재 개념에 합치하는 어떤 실체를 상정하는 것이다.

 

   공간이란 아무 것도 없는 빈 곳을 의미하는데, 이것의 존재에 대한 의문을 처음으로 제기한 사람들은 엘레아 학파이다. 특히 정수비례로 표현되는, 무한히 분할가능한 공간에 대한 역설은 제논의 역설에 잘 표현되어있다. 언뜻 보면 현상적으로는 말이 안되는 것이지만, 실재의 세계에 대한 사유를 통해 공간을 부정하는 작업을 해나간 것이다. 엘레아 학파 이후에 등장한 엠페도클레스나 아낙사고라스 역시, 무한히 다수인 존재가 이 세계를 꽉 채우고 있을 뿐 공간은 있을 수 없다고 주장하였다.


   반면
, 고대 원자론에서는 공간 역시 실재하는 것으로 간주하였다. ‘공간은 실재한다는 원자론자들의 주장은 두 가지 뜻으로 해석할 수 있다. 첫째, 실체로서의 원자들은 그 수가 무한하긴 하지만, 그것이 세계를 꽉 채우고 있는 것은 아니다. 따라서, 원자가 위치한 그 밖의 어떤 곳들이 있으며, 이것이 공간kenon인 것이다. 존재는 정의에 따라서 자기 안에 공간을 함축할 수 없지만, 자기 밖에 공간이 있는지 없는지는 말해줄 수 없다. 고대 원자론자들은 이 부분에 주목한 것이라고 생각할 수 있다.


   둘째
, 공간은 다른 존재-원자들과 존재론적으로 동격인 어떤 존재가 아닌, 원자가 존재하기 위해선 논리적으로 반드시 선행되어야하는 무엇이다. 비존재를 부정하는 사람들의 논의에서는, 비존재가 존재와 똑같은 차원에서 존재하는 속성을 띄지 않기 때문에 그 존재를 부정당하고 있다. 하지만 공간으로서의 비존재는, 존재가 존재하기 위한 배경 혹은 선행조건이라고도 볼 수 있다. , 허공이 있기 때문에 그 속에서 존재가 운동하는 것이다. 존재가 하나이건 여럿이건, 세계가 그 존재들로 꽉 차있다면, 양쪽 다 운동이 불가능한 세계라는 것은 마찬가지일 것이다.

 

   원자와 허공은, 원자론에서 변화를 설명하는 데 가장 중요한 요소가 된다. 우선 원자의 졍의를 통해 엘레아 학파가 제기한 문제를 해결하였으며, 공간을 규정함으로써 운동이 가능하다는 것을 설명하였다. 이를 통해서 원자론자들은 변화의 문제를 원자와 허공의 문제로 환원시킨다. , 우리가 일상적으로 겪는 변화는 허공 속에서 무수히 많은 서로 다른 원자들이 운동한 결과인 것이다. 이를 우리는 관습적으로 표현하는 것일 뿐이다.


   변화는 세 가지 조건으로 바꾸어서 설명된다
. 형태, 배열과 위치가 바로 그 조건이다. 이는 원자의 모양, 서로 다른 원자들의 배열, 그리고 그 배열 가운데서 각각의 원자가 자리잡은 곳이라는 말이다. 그리고 이 세 가지는 허공 속에서 무수히 바뀌는데, 이 가운데서 우리는 변화를 감지하는 것이다.


   변화를 위해 설명하는 원자의
운동이라는 개념은, 변화의 설명방식과 함께 주목해보아야 할만하다. 이전의 변화와 운동에 대한 설명과는 달리, 고대 원자론자들은 운동과 변화를 무목적적이라고 설명한다. 이전의 철학자들에게 운동과 변화란, 어떤 이상적이고 목적적인 상태로 나아가는 활동이었거나, 어떤 신적인 힘 혹은 개체가 그런 상태로 향해 이끌어나가는 작용이었다. 하지만 고대 원자론자들에게 운동이란 그저’ ‘저절로일어나는 것일, 거기에 특별한 규칙이나 방향같은 것은 없다고 믿었다.


* 참고문헌

 

고대 그리스 철학프리도 릭켄 지음, 김성진 옮김, 서광사

그리스 철학의 이해강대식 지음, 민음사

서양철학사S.P.램프레히트 지음, 김태길·윤명로·최명관 옮김, 을유문화사

소크라테스에서 포스트모더니즘까지새뮤얼 이녹 스텀프·제임스 피저 지음, 이광래 옮김, 열린책들

소크라테스 이전의 그리스 철학김내균 지음, 교보문고

소크라테스 이전의 철학자들의 단편 선집김인곤 등 옮김, 아카넷

종교에서 철학으로F.M.콘퍼드 지음, 남경희 옮김, 이화여자대학교 출판부

희랍사상의 이해박종현 지음, 종로서적

희랍 철학 입문W.K.C.거스리 지음, 박종현 옮김, 서광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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댄 애리얼리, 상식 밖의 경제학요약

 

경제학에 가장 큰 영향을 미친 가설은 단연 사람들은 계산적인 합리성에 따라 이익과 손해를 따져 행동한다는 호모 에코노미쿠스 개념이다. 이것은 몇몇 상황에서는 들어맞지 않는 것처럼 보이지만, 대부분의 상황에서 우리는 그렇게 한다고 믿고 있다. 상식 밖의 경제학에서 말하고자 하는 상식이란 바로 이 개념이다. 이 책이 이러한 상식에 맞서서 보여주는 것은 두 가지 라고 요약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하나는 사람들이 합리적으로행위한다는 것이 우리가 말하는 계산적인 합리성과 얼마나 동떨어져있는지에 관한 내용이고, 나머지 하나는 계산적인 합리성에 따라 행동해야한다는 것을 포함하는 모든 규범들이 주어진 조건에 따라서 얼마나 무력해지는가에 관한 내용이다.

또한, 책의 제목에는 경제학이라는 말이 붙어있지만, 이 책의 내용은 사실상 경제학에 관련되었다기보다는 심리학적이라고 부르는 것이 훨씬 더 어울린다. 이런 점에서 이 책이 보여주는 경제학의 한 조류(행동경제학)은 경제학적 심리학이라고 부르는 것이 더욱 타당한 것으로 보인다. 단지, 실험들이 증명하고자 하는 주제와 목표들이 경제학에서 전통적으로 다루던 주제들일 뿐이다. 특히 이 실험들은 경제주체의 작은 단위인 개인의 행동, 특히 구매와 소비 행위에 집중되어있다.

적어도 이 책의 모든 실험에 참가하는 사람들은 최선의 선택을 하고 있다고 생각해야한다고 본다. 여기에서 최선의 선택이란, 자신이 가치를 부여하는 것을 소유하는 것, 그리고 그렇게 소유하고 있는 것을 지키는 행위를 선택한다는 것을 뜻한다. 이 선택은 합리성에 부합할 수도 있지만, 그렇지 않을 수도 있다. 이 책의 실험들은 우리의 최선의 선택이 여러 조건에 따라서 합리성에 부합할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다는 것을 잘 보여준다. 또한 다양한 사람들에게 많은 실험을 가함으로써, 이런 행동들이 우발적이지 않고 일정한 유형으로 반복된다는 사실 또한 확인할 수 있다.

그리고 선택과 합리성이 일치하지 않는 여러 사례들을 통해서, 인간이 조건에 따라 얼마나 다른 행동들을 하는지 또한 보여준다. 이런 내용은 주로 책의 후반부에 등장한다. 합리적으로 행위해야 한다는 규범을 포함한 여러 윤리적, 경제적 사고들은 실험대상에게 부여된 조건에 의해서 쉽게 포기되는 상황에 놓인다. 그리고 인간은 실제로 이런 포기를 너무나도 쉽게 한다. 따라서 인간에게 원하는 결과를 이끌어내고 싶을 때, 다시 말해 그의 선택과 윤리성 또는 합리성을 일치시키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그렇게 부합하는 선택을 할 수 있는 조건을 갖추는 게 가장 우선이라는 결론이 도출된다.

마지막으로 이런 결론을 도출하거나 또는 세워놓았던 여러 가설을 증명하기 위해 심리학적 실험의 방법이 쓰였다는 것이 중요하다. 이 방법을 통해 최소한 인간의 다양한 모습들 가운데서 경제학 이론의 체계를 세우는 데 필요한 것들만을 취사선택하지는 않게 만들 수 있다. 또한 특정한 조건에 따라 반응하는 인간의 유형들에 관한 연구를 통해서, 어떤 제도나 규범에 관해서 사람들이 어떻게 생각하는지에 관한 깊은 이해를 추구할 수 있다. 경제학의 여러 측면들을 교정하는데 행동경제학은 반드시 필요한 분야다.


로버트 하일브로너, 세속의 철학자들요약

 

경제학자들은 각 경제주체들 사이에서 일어나는 경제 현상들을 분석하는 사람들이라는 점에서 경제학자다. 하지만 동시에, 그 경제행위들의 규범을 보여주었다는 점에서 일종의 사회사상가 또는 정치사상가적인 성격이 있기도 하다. 실제로 20세기 전반까지만 하더라도 몇몇 경제학자들은 일종의 철학자를 겸직으로 삼는다. 하일브로너는 경제학자들의 이런 철학적인 측면에 중심을 두어 경제학사를 서술하였다. 이것이 세속의 철학자들이 단순히 위대한 경제학자들이 아닌 이유다. 그는 자신의 저술의 이런 특징을 조셉 슘페터의 비전이라는 개념에 빗대어 설명한다. 따라서 자연스럽게도 이 책은 어떤 미래가 바람직한지 그리고 그 미래를 어떻게 그려나갈지에 대한 각 경제학자의 구상들이 그의 학설과 거의 동일한 비중으로 강조된다.

그 모습이나 체계는 다르지만, 이 비전이 부정적이냐 긍정적이냐 또는 없느냐에 따라서 여기에 등장한 경제학자들을 나누어볼 수 있으리라 생각한다. 부정적인 비전을 대표하는 사람은 단연 맬서스일 것이다. 그가 제시한 비극적인 모습 인구의 폭발적 증가, 이들을 다 먹일 수 없는 만큼의 식량생산에 따른 이른바 자연적인 인구 조절’ - 은 어떤 국가들에서는 여전히 반복되고 있다. 자본주의적인 사회는 자신의 노력을 들인 사람들(노동자와 자본가)이 소외되고, 반대로 가만히 있는 사람들(지주, 유한계급)이 이득을 본다는 점에서 불공평하다고 말하는 리카도와 베블런도 경제에 대한 부정적인 비전을 가지고 있는 사람으로 볼 수 있다. 또한 제국주의와 자본주의의 관계를 체계적으로 제시한 홉슨, 적어도 자본주의 단계란 자신을 파괴하는 체계를 따라 움직이는 비극의 무대일 수밖에 없다고 말하는 마르크스 같은 이들도 비슷한 맥락에서 읽힌다.

하지만 이 책에서 더 많은 비중을 차지하는 것은 긍정적 비전이다. 경제학 자체가 아담 스미스라는 거대한 비전과 함께 시작하기 때문이다. 각 개인들이 자신에게 최선의 선택을 하는 것이 이상적인 경제현상을 가능하게 만든다는 것이 그의 논증의 핵심적인 결론이다. 이런 의미에서, 별다른 경제학적 입장이 있는 것은 아님에도 불구하고, 하일브로너는 오웬, 생시몽, 푸리에 등 유토피아 사회주의자들을 경제학사의 한 부분에 포함시킬 수 있었다. 경제사상을 포함해 사회, 정치, 철학의 여러 부분에서 낙관적인 의견을 표명했던 밀 또한 긍정적인 비전을 가진 인물로 취급할 수 있을 것이다. 케인즈는 자신의 경제이론과 경제정책을 통해 더욱 많은 사람들이 행복해질 미래를 상정했다는 점에서 이 부류에 포함시킬 수 있다.

마지막으로 이런 비전이 흐릿하거나 없는 학자들 또한 있다. 마셜 같은 인물은 경제학에 수학, 한계효용, 수확체감을 도입함으로써, 이상적인 경제적 형태를 제시하기보다는 현재 일어나는 경제현상들을 설명하는 데 더욱 치중하려고 했던 것 같다. 하지만 역설적으로 이런 설명의 정확함과 엄밀함을 향상시켰다는 의미에서 그들은 위대한 경제학자로 대우받을 수 있다. 또한 슘페터는 창조적인 기업가 정신을 자본주의의 핵심으로 보았지만, 이런 기업가는 기존의 시장을 수정하거나 파괴한다. 이런 행위를 할 수 있는 원천에 바로 이전에 보지 못하던 것을 꿰뚫어보는기업가적 비전이 자리한다. 이런 면에서 슘페터는 경제학적 입장의 엄밀함과는 별개로 경제학과 경제학자, 또는 자본주의적인 사회 속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의 본질을 통찰한다는 점에서 높게 평가받는다.

 

토드 부크홀츠, 죽은 경제학자의 살아있는 아이디어요약

 

반면 부크홀츠의 죽은 경제학자의 살아있는 아이디어는 각 경제학자들이 정식화한 입장들이 현재 우리의 경제행위를 어떻게 설명할 수 있는지에 중점을 두고 책을 풀어나가고 있다. 따라서 하일브로너와는 달리, 그 경제학자의 학설이 보편적으로 인정받을 수 있는지, 그렇지 않다면 그 이유는 무엇인지에 대해서 설명하는 것에 더욱 많은 관심을 기울인다. 그래서, 별다른 경제적 입장이 없는 유토피아 사회주의자들과 슘페터가 경제사상사에서 제외되는 대신 경제학 자체의 정식화에 성공한 마셜이 크게 부각된다. 또한 케인즈 이후에 그에 대한 반발로 등장한 대표적인 세 학파들에 대한 소개도 추가되어있다.

모든 경제학사 연구가 그렇듯이 이 책 또한 아담 스미스로부터 시작한다. 아담 스미스 이래로 경제학자들이 규명하고자 하는 것은 전체를 고려하지 않는 개인의 경제행위와 그 경제행위로 이루어진 사회가 어떻게 조화를 이루는가에 관한 문제이다. 아담 스미스는 이 문제를 경제적으로 처음 정식화했으며, 시장과 노동분업이라는 설명을 내놓았다. 이후 경제학은 주로 시장의 작동원리와 경향을 자신의 연구대상으로 삼아왔으며, 바로 이것이 경제학이라는 학문의 정체성이기도 하다.

이 책의 중심적인 대립축은, 경제학이라는 학문의 성격에 대한 논쟁이다. 여기에 등장하는 많은 경제학자들은 시장을 경제학의 대상으로 바라보고, 시장에서 벌어지는 일들을 연구한다. 그러나 그렇지 않은 사람들도 있다. 시장 자체를 보는 시선이 다른 마르크스라든가, 시장보다는 시장 속의 개인들을 지배하는 다른 요소들을 연구하는 제도학파 경제학자들(베블런, 갤브레이스), 그리고 시장의 자기회복 능력을 크게 믿지 않은 케인즈, 시장을 연구대상으로 삼지 않고 경제원칙의 지배를 받는 요소로서의 정부를 분석하는 뷰캐넌, 경제학이라기보다는 심리학에 더욱 가까운 행동경제학에 이르는 흐름들이 그렇다.

또한 다른 대립축이 만들어져있기도 한데, 그것은 시장의 조절능력 이른바 보이지 않는 손 을 얼마나 신뢰하는가, 다시 말해 경제주체로서의 개인들의 최선의 선택과 사회의 번영 사이의 연결이 과연 얼마나 자연스럽고 강한가에 관한 믿음이라는 축이다. 아담 스미스는 이 둘 사이에 관계가 깊다는 것을 밝히면서 경제학을 시작하였지만, 당시에도 그의 입장에 대해서 반대하는 여러 학자들이 있었다. 그 뒤에 등장한 마샬이나 밀, 그리고 이후의 통화주의자들이나 합리적 기대 가설을 믿는 이들은 아담 스미스의 입장에 서고, 반대로 제도학파나 케인즈와 케인즈주의자는 스미스에 반대하는 입장에 선다. 공공선택학파나 행동경제학은 이 두 가지가 거의 무관하다고 말하는 것 같기도 하다. 중요한 것은 아담 스미스를 중심으로 형성된 이 대립축이 경제학의 역사를 관통하는 중요한 주제 가운데 하나가 되었다는 점이다.

이 책은 이렇게 주요한 두 가지 문제, 그리고 그 밖에 각 경제학자들을 둘러싼 여러 역사적 상황에서 비롯한 문제들에 대한 각각의 입장을 대체로 평이하게 서술하고 있다. 그러나 종종 글쓴이의 시각이 드러나기도 한다. 이들을 미루어보았을 때 대체로 그는 아담 스미스의 입장과 경제학의 전통적인 연구주제와 방법에 대해 신뢰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대표적인 예는 케인즈 이후의 경제학의 흐름에 관한 서술이다. 책의 서술전략으로서는 케인즈 이후에는 케인즈의 입장의 여러 부분을 대상으로 반대의견을 낸 학자들을 다루는 것이 맞고 또한 유리하겠지만, 케인즈주의자들이라고 하여 꼭 케인즈의 입장을 그대로 답습만 하고 있는 것은 아니지 않을까?


요약과 감상

 

여러 경제학자들 사이의 차이는, 인간이 어떻게 행동하는 존재인지에 대한 이해에 관한 차이인 것으로 보인다. 인간은 매 순간마다 최선의 선택을 하려 노력하는 존재일수도, 단순히 최선의 선택 뿐만이 아니라 모든 정보에 대해 알고 완전히 합리적으로 계산하고 행위하는 존재일수도, 또는 주어진 조건에 따라 임시변통 삼아서 이것저것 해보는 존재일수도 있다. 그래서 시장과 시장에서의 경제주체들의 행위에 대한 연구로 시작한 경제학은 이제 심리학과 만나서 행동경제학이라는 장르를 탄생시키는 데 이르기도 했다.

그런데, 이것은 어쩌면 경제학의 기틀을 마련한 아담 스미스 스스로가 내포하고 있던 성격, 즉 그가 국부론과 동시에 도덕감정론을 썼다는 사실로부터 이끌려나오는 문제인지도 모른다. 앞쪽은 경제행위에 관한 책인데 반해서, 뒤쪽은 행위의 적절함에 대한 판단의 과정에 관한 책, 바로 인간에 대한 어떤 이해나 입장을 담고 있는 책이다. 그렇다면 만약 아담 스미스의 대표적인 두 저술이 정합적이라면, 국부론에서 나오는 경제행위를 하는 사람들은 다름 아닌 도덕감정론에서 그려진 바람직한 도덕적인 판단을 하는 사람들일 것이다. 인간에 대한 국부론의 이해는 도덕감정론의 인간상과 일치하는 것이다. 이런 측면에서 도덕감정론국부론의 일종의 논리적인 기초다.

따라서 그들의 개별적 행위가 총체적으로 어떤 결과를 맺는지는 그러한 인간의 본성에 대한 규정이 무엇인가에 따라서 상당히 달라질 수밖에 없다는 것은 당연한 논리적인 귀결인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정말 그런가? 이것은 사회가 개인들의 행위의 무대가 되고, 전체 사회의 경향이란 이런 개인들의 행위의 경향의 총체라는 것을 전제로 하는 듯이 보인다. 그러나 몇몇 경제학자들이 주장하듯이 이 연결은 더 많은 설명을 요구한다. , 개인의 최선의 선택과 사회의 번영은 어떤 경우에는 자연스럽게 연결되지만 언제든 그렇지 않게 될 수 있다는 것 또한 경제학의 통찰 가운데 하나에 속한다. 특정 계급에게 경제에 대한 지식이 거의 없을 때(맬서스), 불황일 때(케인즈), 여러 이익집단들로 인해 이해관계가 아주 복잡해질 때(뷰캐넌) 그런 일이 일어난다. 체제 자체가 모순덩어리라고 주장하는 사람(마르크스)도 있다. 그러므로, 이후 등장한 많은 반대적인 학설에도 불구하고, 개인의 행위가 사회의 번영과 연결되도록 하는 개입의 길을 상시적으로 열어놓은 케인즈의 입장은 많은 부분에서 납득할만하다.

또한 아무리 도덕적인 인간들이라고 하더라도, 특정한 조건 아래에서는 그 도덕성이 결코 발휘될 수 없는 경향이 있다는 것은 행동경제학을 포함한 몇몇 심리학적인 실험들을 통해서 알 수 있다. 사람들이 이렇게 행위하는 이유는, 결국 윤리적 덕목들을 지키지 않았을 때 자신에게 더 많은 이익이 돌아가기 때문이다. 더 나아가서, 사람들은 어떤 경제행위가 사회에 전반적으로 이익이 된다는 것을 알면서도 그렇게 하지 않을 수도 있다. 이것은 개인과 사회가 바로 연결되지 않는 또 하나의 사례이기도 하다. 이것을 조정하기 위해서는 개입이 필요하다. 그렇다면 국가 또는 법은 개인들에게 도덕성을 직접 강조해야 하는데, 근대적인 의미의 국가가 도덕률을 부과하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다. 그러므로 비도덕적인 개입, 즉 경제적인 요소들에 관한 조정을 통해 개인의 선택과 사회의 번영이 일치될만한 조건을 지속적으로 조성하는 일이 요청된다. 이는 개인의 최선의 선택에 따른 행동은 분명히 어느 정도는 규칙성을 갖고 있기 때문에, 특정한 정책이 이런 바람직한 조건을 만들 수 있을지 없을지를 (역시나 어느 정도는) 가늠해볼 수 있기에 가능하다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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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뒤늦게나마 올리는 현대윤리학연습(2012년 1학기) 발제. 알래스데어 매킨타이어, 『덕의 상실』 15장 요약>

매킨타이어의 이 글은 크게 네 부분으로 구성되어있다. 첫째, 덕에 관한 여러 다른 생각들이 있었다는 것을 역사적으로 확인할 수 있다는 것이다. 둘째,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덕들이 모두 공유하는 덕의 성질이 있다는 것이다. 이것을 그는 덕의 본성이라고 부르려고 시도한다. 셋째는 그 덕의 본성을 사회적이고 내면적인 의미의 실천과 관련하여 규정한다. 넷째는 그와 같은 덕에 관한 규정이 어떤 특성을 가지고 있으며, 더 나은 덕의 규정과 관련하여 추가되어야 할 것이 무엇인지에 대해 덧붙인다.

 

차이점

 

덕목에 대한 생각이 많은 차이를 보인다는 것은 역사적으로 증명된다. 그는 이것을 보여주기 위해 호메로스, 아리스토텔레스, 기독교, 제인 오스틴, 그리고 벤자민 프랭클린을 사례로서 들고 있다. 그는 이 다섯 경향들은 각각 아주 다른 덕목들을 가지고 있으며, 이들 사이에서 공통점을 찾는 것은 쉽지 않다고 주장한다.

이것은 단지 시간이 아주 멀리 떨어진 사람들 사이의 차이일 뿐만이 아니라, 예전에 살았던 사람들 사이에서도 존재했던 차이이기도 하다. 호메로스는 어떤 것이 뛰어난 것을 덕으로서 정의한다. 따라서 신체적인 강함(physical strength) 또한 호메로스에게는 덕목이다. 그러나 이것은 우리에게뿐만 아니라, 아리스토텔레스의 덕목과도 많은 차이를 보인다. 그는 신체적인 강함보다는 정신에 더 많은 비중을 부여했다. 반면 통이 큼(magnanimity, megalopsuchia)과 아낌없음(munificence)은 아리스토텔레스에게 매우 중요한 덕목 가운데 하나이지만, 반대로 기독교의 교리는 통이 큼과 반대되는 겸손(humility)을 칭찬한다. 또한 아리스토텔레스는 그에 관해서 알지도 않았을 믿음, 바람, 사랑같은 덕목들을 강조하기도 한다. 게다가 이 둘은 부자와 노예가 어떤 덕목들을 가지고 있고 덕이 있는지 없는지에 대한 관점도 완전히 다르다.

이들을 가까운 시대의 두 사람과 비교했을 때, 우리는 또 다른 차이점을 발견할 수 있다. 제인 오스틴은 변하지 않음(constancy)을 모든 덕목의 전제조건이라고 말한다. 또한 사람을 기분 좋게 해주는 덕에 대해서, 아리스토텔레스는 그것이 명예와 이해타산을 생각하여 행해진다고 생각했지만, 오스틴은 그것이 온화함(amiability)의 모상이라고 생각했다. 매킨타이어는 이것을 아리스토텔레스가 군인의 용기를 진정한 용기의 그림자라고 생각한 것과 유비한다. 벤자민 프랭클린은 얻으려는 욕구(the drive to acquire)를 그 자체로 덕목의 한 부분으로 생각한다. 그리고 기존의 덕목들에 격률을 정해, 그것에 복종하는 것을 덕으로 설명한다.

여기에서 주목해야 할 것은, 이들의 덕 목록이 단지 다르다는 것이 아니다. 첫째, 덕에 관한 각각의 개념은 여러 덕목들을 중심적인 것과 주변적인 것으로 나누고 질서짓는데, 그 질서가 그가 생각하는 덕 개념이 다른 덕 개념과 어떤 차이를 나타내는지 가려낼 수 있는 기준이 된다. 둘째, 덕과 사회적 질서 사이의 관계가 다른 것이 각각의 덕의 개념이 다른 것에 반영된다. 셋째, 진정한 덕과 그 덕을 따라하거나 그림자에 불과한 덕을 구별하는 것이 덕에 관한 개념마다 매우 다르다. 따라서 역사 전체를 관통하여 덕 개념에 부여할 수 있는 공통적인 특징은 없다는 결론을 쉽게 맺을 수 있는 것처럼 보인다.

이것은 구체적인 덕목에 대한 사례뿐만이 아니라, 덕이 무엇인지에 대한 이론에서도 차이를 보인다. 호메로스에게 덕은 그것을 표현하여 그의 사회적인 역할을 행할 수 있도록 하는 성질이다. 또한 그 사회적인 역할 가운데 가장 중요한 것은 전투나 경기에서 이기는 것이고, 따라서 가장 중요한 덕은 그것을 가능하게 해주는 것이다. 따라서 호메로스가 생각하는 덕을 실행하기 위해서는, 우선 호메로스가 살고 있는 사회가 각 사회적인 역할을 어떻게 규정하는지를 알아야만 한다. 이런 점에서는 제인 오스틴도 호메로스와 비슷하다. 그녀는 여러 덕목들이 사회적 역할에 중요한 것이라고 강조한다. 또한 매킨타이어는 모든 덕목들이 통합될 수 있다고 주장하는(변하지 않음constancy에 대한 주장을 가리키는 듯 하다.) 그녀의 견해가 중요하다고 언급한다.

반면 아리스토텔레스는 사회적 역할보다는 한 종류로서의 인간으로서 해야할 것을 덕이라고 보았다. 인간에게는 좋은 삶을 살아야한다는 목적(telos)이 있는데, 이 목적은 어떤 인간의 성질이 덕목들이 되는지를 결정한다. 매킨타이어에 따르면 이러한 좋은 삶과 덕목들 사이의 관계는 내면적(internal)인데, 그는 내면적이라는 말을 수단의 성격을 정하지 않고서는 목적이 충분히 규정될 수 없다는 뜻으로 사용한다. 다시 말하면, 행복한 삶을 사는 데 덕목들을 실행하는 것이 필수적이라는 것이다. 기독교에서 요구하는 덕목들 또한, 그 구체적인 목록이 아리스토텔레스와 다르다고 할지라도, 인간의 최종적인 목적을 구현하기 위해서 필수적으로 해야하는 점에서 논리적인 구조가 아리스토텔레스와 같다. 무엇이 덕인지 탐구하기 위해서는, 좋은 삶 즉 목적이 무엇인지에 대해서 먼저 파악해야하고, 그것에 대한 수단을 덕이라고 말하는 것이다.

반면 덕에 관한 벤자민 프랭클린의 정의는 공리주의적이라는 점에서 다른 덕에 관한 정의들과 차이가 난다. 덕은 성공, 즉 현세(필라델피아)와 천국에서의 번영(prosperity)을 위한 수단이다. 그래서 그는 효용성(utility), 즉 유용함(useful)을 덕의 기준으로 삼는다. 매킨타이어의 정의에 따르면 이 관계는 내면적이기보다는 외면적인데, 다시 말해 수단의 성격을 정하지 않고서도 목적이 충분히 규정될 수 있다.

 

공통점

 

따라서, 적어도 우리가 살펴본 바에 의해서, 덕에 관한 이론에은 적어도 사회적 역할, 인간으로서 행복한 삶, 성공과 관련되었다고 주장하는 세 가지 경향이 있다. 그러나 그는 이것이 단순히 덕이라는 언어를 시대를 초월해 다르게 쓰고, 따라서 그 사회적 맥락에 따라 의미가 다 다르기 때문에 모두 다 다르게 볼수는 없다고 주장한다. 그에 따르면 우리가 보았던 다섯가지 사례는 제도적인 주도권(institutional hegemony)을 요구하는 것이 공통적이다. 덕에 대한 모든 정의들은, 특정한 제도 밖에 있는 사람들에게는 덕목들이 주어질 수 없다고 주장한다는 것이다.

덕에 관한 위와 같은 이론들에서 추론해볼 수 있는 덕에 관한 이론의 공통적인 특징은, 그것을 적용하기 위해서는 이미 정의되고 설명되어 온 방식 안에서 사회적이고 또한 도덕적인 삶의 일정한 특징들에 관한 몇몇 우선적인 생각에 관한 수용을 요구한다는 점이다.(it always requires for its application the acceptance of some prior account of certain features of social and moral life in terms of which it has to be defined and explained.(p.123)) 덕은 이차적인(secondary) 개념이다. 덕에 관한 이론들의 이러한 공통점을 규명하고 덕 개념의 핵심적인 개념규정을 위해서, 그는 적어도 실천(practice), 한 인간의 삶의 서사적 질서(narrative order), 그리고 한 도덕적 전통을 구성하는 것(what constitutes a moral tradition)이라는 세 가지에 대해 설명해야한다고 적고 있다.

그가 지적하는 실천 개념의 중요한 특징은, 그것이 이미 행해져왔던 특정한 유형이나 전통들을 상정한다는 것이다. 전쟁에서 잘 싸우고, 가정을 잘 꾸리며, 조언을 잘하고, 이야기를 잘 하고, 연주를 잘하고, 기하학을 잘하는 것들이 고대의 덕목들이다. 인간이 행하는 여러 실천들은, 이런 덕들이 보여지기 위한 배경(arena)을 제공한다. 그는 실천을 탁월함을 달성하려는 인간의 힘들과, 목적들 그리고 관련된 선들의 인간의 개념규정들이 체계적으로 확장된 결과와 함께, 활동의 저 형식에 적절하고 또한 부분적으로 확정적인 탁월함의 저 표준들을 달성하려 노력하는 것의 과정 안에서 활동의 저 형식에 내적인 선들이 현실화되는 것을 통한 사회적으로 나타난 협동적인 인간의 활동의 모든 통일되고 복합적인 형식(any coherent and complex form of socially established cooperative human activity through which goods internal to that form of activity are realized in the course of trying to achieve those standards fo excellence which are appropriate to, and partially definitive of, that form of activity, with the result that human powers to achieve excellence, and human conceptions of the end and goods involved, are systematically extended. p.124)’이라는 뜻으로 사용한다.

설명이 매우 복잡하여, 그는 사례를 들어서 이것을 설명한다. 7살 아이에게 체스를 가르치려 할 경우, 우리는 사탕을 주겠다고 약속하고 아이에게 체스를 가르칠 수 있다. 이 아이는 사탕을 먹기 위해 체스를 두겠지만, 우리는 아이가 먼훗날 체스 자체에서 오는 재미를 느끼길 바란다. 이 경우 두 가지 선함이 있는데, 하나는 외면적인 선함 즉 사탕이고, 다른 하나는 내면적인 선함, 즉 체스의 재미다. 외면적인 선함은 다른 활동을 통해서도 얻을 수 있지만, 내면적인 선함은 체스를 두는 행위에서만 구할 수 있다. 또한 이 내면적인 선함은 체스라는 복합적인 배경 아래에서만 그 의미를 얻을 수 있다. 그러므로 내면적인 선함을 성취하기 위해서는, 그 내면적인 선함을 규정하는 실천에 참여하고 그 실천이 이미 규정한 내면적인 선함을 받아들이고 그것을 달성하기 위해 노력해야한다.

또한 내면적인 선함은 두 가지로 나누어진다. 그는 초상화의 역사의 사례를 들어서 이것을 설명한다. 하나는 그 실천 속에서 만들어낸 생산품의 탁월성(the excellence of the products), 즉 뛰어난 초상화이다. 둘째는 생산품의 탁월성을 추구하는 과정에서 발견할 수 있는 삶의 특정한 종류의 선(the good of a certain kind of life)이다. 각각의 실천은 이 두 가지 측면에서 그 실천의 역사를 통한 기준을 가지고 있다.(물론 이것이 비판받아서는 안된다는 것을 함축하지는 않는다.) 그러므로 이것을 염두에 두고 수용하지 않는 활동은 실천이라는 의미를 획득할 수가 없다. 실천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이 기준에 들어맞는 활동을 해야만한다. 그러므로 이런 내면적인 선함을 성취했을 경우, 이것은 단순히 나의 선함일 뿐만이 아니라 그 실천에 관계를 맺고 있는 모든 사람들 즉 공동체에 대해 선하다. 내면적인 선함을 성취한다는 것은 생산품의 탁월성을 끌어올렸다거나, 또는 탁월함의 기준을 수정하거나 혁신하는 창조적인 실천을 했다는 의미가 되는데, 따라서 모든 실천하는 사람들은 더욱 더 높아진 탁월함을 성취하기 위해 더욱 더 노력할 것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실천의 개념에 비추어 덕은 다시 정의된다. 덕은 실천에 내적인 저런 선들을 성취하는 것을 우리에게 허락하는 경향이 있는 것의 소유와 훈련 또는 어떤 이러한 선들을 성취하는 것으로부터 우리를 효과적으로 막는 결핍이라는 한 습득된 인간의 특성(A virtue is an acquired human quality the possession and exercise of which tends to enable us to achieve those goods which are internal to practices and the lack of which effectively prevents us from achieving any such goods. p.128)’이다.

 

덕과 실천

 

이와 같은 정의로부터 그가 논증하려는 것은 핵심적인 덕목들(key virtues)은 모든 실천에 내재한 선들을 성취하는 데 꼭 필요하다는 것이다. 만약 이런 핵심적인 덕목들이 존재한다면, 그들이 없다면 어떤 실천에서도 내면적인 선을 성취할 수 없어야 한다. 그는 이것을 정의, 용기, 정직함이 여기에 해당한다고 말한다. 그의 주장에 따르면, 이런 덕목들의 특징 비슷한 유형의 실천에 참여하는 사람들 사이의 관계를 규정한다는 점이다.

정직함은 그 덕목을 행하는 대상과 행하지 않는 대상 사이의 차이를 낳는다. 그 차이는 공공선을 추구한다는 서로를 향한 신의를 깨뜨린다. 여기에서 정의는 동일한 기준으로 다른 사람들을 대한다는 의미로 쓰이고 있다. 다시 말해, 정의는 통일적이고 비인격적인 기준들에 따라 잘한 일이나 결과에 관한 존중 안에서 다른 이들을 다루는 것(p.129)’이다. 이것을 어길 경우에는, 마찬가지로 그 덕목을 행하는 대상과 행하지 않는 대상 사이에 차이가 생긴다. 용기는 그 자신을 손해나 위험에 내맡기는 능력(p.129)’인데, 이것은 실천과 관계맺는 개인들의 공동체 자체와 관련된 일을 위해서, 즉 자신의 손해를 감수하고 공동체의 일을 행하기 위해서 요청되는 능력이다.

만약 이런 그의 말이 사실이라면, 모든 사회에는 정의, 용기, 정직함에 관한 규칙들이 있어야한다. 이런 덕목들은 모든 실천에 적용되기 때문이다. 또한 우리는 각각의 사회는 각각의 덕목들에 대해 다른 기준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게다가, 우리가 또 확인할 수 있는 것은 이런 덕들이 가치평가되지 않는 사회는 번성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실천은 많은 사람이 함께 참여하는 일종의 공동작업인데, 탁월성에 대한 평가는 공정해야(fairness)하고, 그 평가가 공정하기 위해선 정직함이 필요하며, 평가기준이 권위를 갖기 위해서는 공정함과 정직함이 요구되고, 또한 탁월함을 성취하기 위해서는 자신을 위험에 내맡길수도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그는 실천과 덕의 관계를 좀 더 부각시키기 위해, 실천에 대비되는 두 가지 개념으로 기술적인 숙련과 제도 두 가지를 들고 있다. 탁월함을 성취하는 데에는 기술적인 숙련이 필수적이며, 기술적인 숙련은 그 기술을 더욱 잘 발휘하는 것이라는 통일적인 목표를 가지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단지 이것만이 실천과 그 실천에 내면적인 선함인 것은 아니다. 내면적인 선함은 통일적이지 않고 시대마다 바뀌어왔으며, 기술적인 실천은 이 선함을 변형시키거나 풍부하게 하는 데 더 큰 의의가 있고, 오히려 이것이 실천에 본질적이. 그러므로 실천에 들어서는 것은 그렇게 만들어져온 역사 그리고 그 역사를 만들어온 사람들과 관계를 맺는다는 것을 뜻한다. 그러므로 실천을 위해서는 이런 역사를 배워야만 한다.

다른 하나인 제도는 외면적인 선함과 관계한다는 점에서 실천과는 다르다. 제도가 관계를 맺는 대상은 물질적인 선, 권력, 지위와 같은 것들이다. 물론 특정한 실천을 보존하려면 그것을 제도화해야한다. 하지만 제도는 내면적인 선을 성취하려는 실천을 좌절시키는 경향이 있으며, 실천이 성취하는 공공선을 방해하는 경향이 있다. 이런 제도가 실천으로서의 성격을 지속적으로 유지하기 위해서는 제도와 대비되는 의미로서의 실천이 지속적으로 요구된다. 이러한 의미의 실천은 정치적인 면에서 자유주의자들이 사용하는 실천과 많이 다르다. 자유주의에 따르면 제도는 개인에게 중립적이어야 하지만, 매킨타이어의 관점에서 제도는 실천을 유지하기 위해서 끊임없이 노력해야한다. 다시 말해, 실천(도덕적 행위를 하는 것)은 제도적으로 권장되거나 요구된다. 그 이유는 다름아니라 제도 자신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비슷한 양식의 실천이 지속적으로 이뤄져야 하기 때문이다. 이런 실천, 즉 내면적인 선에 대한 가치평가가 없는 사회는 결국 홉스가 가정하는 형태로 이행할 수 밖에 없다. 그러므로 덕은 외면적인 선함과 내면적인 선함에 대해서 각각 다른 관계를 맺는다. 덕은 내면적인 선함을 성취하는 데 필수적이다. 반면 외면적인 선함을 성취하는 데는 도움이 될 수도 있고, 그렇지 않을 수도 있다.

 

아리스토텔레스와 비교하기

 

여기까지 논의를 마치고 나서, 그는 자신이 지금까지 제시한 정의들을 아리스토텔레스와 비교하면서 차이점과 공통점을 말한다. 차이점은 두 가지다. 첫째, 덕들에 관해서는 목적론적이지만 그 기반이 목적론적 자연관 또는 형이상학은 아니라는 것. 둘째, 실천이 다양하고 그에 따라 내재적인 선함들 또한 다양하기 때문에 이들 사이에 충돌이 있을 수 있으며, 이것은 아리스토텔레스가 파악한 것과는 달리, 개인의 성격의 문제가 아니라 사회적인 문제라는 점이다.

공통점은 세 가지다. 첫째, 자발성, 지적인 덕목들과 성격의 덕목들 사이의 구별, 자연적인 능력들과 정념들 모두에 관한 관계와 실천적인 이성 사용의 구조 등 아리스토텔레스의 설명이 요구하는 구별과 개념에 관한 적절한 마무리(cogent elaboration)가 똑같이 요청된다는 점이다.

둘째, 즐거움(pleasure)과 즐김(enjoyment)에 관한 아리스토텔레스의 견해에 편의를 제공해줄 수 있다. 반면에 공리주의적이진 않다. 아리스토텔레스에 따르면, 활동의 즐김과 성취의 즐김은 행위자의 목표가 아니다. 그것들은 성공적인 활동, 즉 탁월함을 성취하는 실천 속에서, 성취된 활동과 즐긴 활동이 하나되고 같아지는 방식으로 일어난다. 그러나 활동과 무관한 선도 있을 수 있는데, 만약 그런 선들을 성취하는 활동이 있다면 그것은 덕목이라든가 실천일 수 없을 것이다. 또한 덕은 결과를 고려하는 것과 상관없이, 실천하느냐 그렇지 않느냐에 따라서 소유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독립적으로 선한 외면적인 선함은, 내재적인 선함을 성취할 수 있게 하는 덕에 의해 방해받거나 거부될 수 있다. 그러므로 이들은 불가공약적(not commensurable)이다.

셋째, 가치평가와 서술이 결합되어 나타난다. 말하자면, ‘덕을 행했다는 것은 서술일뿐만 아니라 가치평가이기도 하다. 다른 행위가 아닌 바로 그 덕을 행한 이유는 인과적으로 설명되는 대상, 즉 서술의 대상이다. 그러나 동시에 내재적인 선을 성취하려 노력한 행위라는 점에서 가치평가이기도 하다.

그러나, 만약 그 실천이 악의(evil) 실천이라면 어떻게 되는가? 악의 실천의 내재적인 선함은 무엇인가? 그는 이런 질문에는 두 가지 방식으로 답변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실천이라고 부를 수 있는 사회적이고 내재적인 선이 있는 몇몇 활동들 가운데에는 단순히 악한 것이 있을 수도 있다는 점을 인정하나, 이런 것이 있지 않다고 주장한다. 이 문제는 과연 그의 실천 개념이 이러한 악의 실천들을 악이라고 평가할만한 기준이 될 수 있는지에 대한 문제인 것으로 보인다. 그에 따르면, 덕들이 실천에 의해 정의된다는 것이 어떤 실천도 비판받을 수 없다는 것을 함축하지는 않는다. 오히려 정의, 용기와 같은 덕은 악의 실천들을 비판하는 원천이 될 수도 있다.

게다가 덕은 단순히 실천 개념과 관계해서만 설명할 수 있는 것도 아니다. 덕은 더 넓은 범위의 인간의 삶과도 관계해서 설명할 수 있다. 그에 따르면, 실천 개념은 인간의 삶의 부분이거나 또는 특정한 유형에 관한 것이며, 따라서 상대적으로 좁은 맥락을 안고 있다. 반면 아리스토텔레스의 설명방식, 즉 인간의 좋은 삶에 대한 설명은 이보다 더 큰 맥락에서 설명된다. 그의 설명은 전체로서 파악된(viewed as a whole) 삶이라는 개념을 토대로 삼는다. 덕이 없는 사람이란, 특정한 실천들에서 실패하는 사람이 아니라 전체적으로 실패한 사람을 일컫는 것이기 때문이다.

어떤 실천이 요구하는 덕과 다른 실천이 요구하는 덕은 얼마든지 모순적일 수 있다. 따라서 특정한 실천에는 뛰어난 사람이 다른 실천은 하지 못할 수도 있다. 시대를 앞선 그림을 그려 생계가 어려워진 화가라든가, 뛰어난 클래식 음악을 부르주아지의 음악이라는 이유로 거부하는 공산주의 혁명가같은 사람들이 그렇다. 또는 여러 실천들의 기준들 사이를 아무런 기준 없이 자의적으로 오고 갈수도 있다.

다른 하나는 지금까지 실천에 연관하여 분석한 덕 개념이 여전히 불완전하다는 설명의 연장선상에 있는 답변이다. 다양한 실천들은 모두가 똑같은 지위를 부여받는 것이 아니다. 실천들 사이에도 질서와 위계가 존재할 수밖에 없다. 따라서 다양한 실천들은, 좋은 삶이라는 더 큰 개념 아래서 조직되고 구조화된다. 예를 들어, 상이한 실천들에 대해 상대적으로 평가하여 정의롭게 자원을 분배할 때에는 이 점을 반드시 짚고 넘어가야한다. 그렇게 해서 받을 자격이 있는 만큼만 받아갔을 때에야 공정하다고 할 수 있기 때문이다. 다른 덕인 참을성(patience)에도 이것이 똑같이 적용된다. 우리가 기다릴 수 있거나 기다려야하는 것들은 많지만, 그 모든 기다림에 동일한 가치가 부여되는 것은 아니다.

따라서, 인간의 전체적인 삶에 대한 목적 없이는 각 실천들 사이의 분열을 막을 수 없고, 이에 따라 우리가 무엇을 행해야하는가에 관한 맥락이 구성될 수 없다. 이것은 인간의 모든 실천들과 그에 속한 덕들을 총체적으로 조망하고 행할 수 있게 만들어주는 한 가지 덕이 있을 것이라는 몇몇 사람들의 생각과 함께 강화된다. 그러나 이것은 증명된 것이 아니기에, 질문되어야 한다. , ‘각 인간의 삶에 관해 한 단일체로서 생각하는 것, 다시 말해 우리는 아마도 각각의 삶을 그것의 좋음을 가지는 것으로서 구체화하려고 시도하는지 그리고 다시 말해 다른 어떤 것보다는 오히려 단일체의 한 종류로 그 또는 그녀의 삶에 관해 만드는 것을 개인이 가능하게 하는 것 안에서 그들의 기능을 가지는 것으로서 우리가 덕들을 이해하는 것이 합리적으로 정당한가?(is it reationally justifiable to conceive of each human life as a unity, so that we may rty to sepcify each such life as having its good and so that we may understand the virtues as having their function in enabling an individual to make of his or her life one kind of unity rather than another? p.1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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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위자에 기반한 덕윤리학 - 마이클 슬롯

<뒤늦게나마 올리는 현대윤리학연습(2012년 1학기) 발제. Michael Slote, Agent-based Virtue Ethics(in Roger Crisp & Michael Slote, Virtue Ethics) 요약.>

 

행위자에 기반한 덕윤리학

 

마이클 슬롯은 이 논문에서 행위자에 관한 평가에서 덕윤리학이 새로 제시할 수 있는 방향에 관해 서술하고자 한다. 그것은 행위자에 기반함이라는 방식이다. 이것은 아리스토텔레스의 생각에서 많은 것을 차용하기는 하지만 단순히 그의 생각을 따르고 있는 것만은 아니고, 또한 그 동안에 덕윤리학에 관한 논의가 놓쳐왔던 아리스토텔레스에 관한 새로운 해석을 포함해 덕윤리학을 다른 방향에서 정초할 수 있는 가능성에 대해 살펴보려 하고 있다. 나아가 이런 윤리학적 접근방법이 실제 우리의 삶에 어떻게 적용이 가능한가를 살펴보는 것으로 이 논문은 마무리된다.

먼저 행위자에 기반을 두는 것이 어떤 것인지 살펴보자. 그것은 다음과 같이 요약될 수 있는 것 같다. 모든 사람들은 특정한 상황에서 특정한 덕있는 행위를 할 수 있다. 그러나 그들의 행위가 덕있다고 평가받는 것은 그 사람이 덕있는 사람이기 때문일 수도 있고, 그 사람의 행위가 사람들이 덕있다고 평가하는 행위와 우연히 맞아 떨어졌기 때문일 수도 있다. 또는 단순히 그렇게 교육받고 훈련받았기 때문에 그렇게 했을 수도 있다. 후자의 경우, 행위가 덕있다고 평가할 수 있는 기준은 우리가 이미 알고 있는 덕있는 행위들이다. 또한 그 사람을 덕있는 사람으로 평가하는 이유는, 그가 지금까지 해온 행위들을 종합해보고 그가 어떤 특성을 가지고 있는지에 관한 고려이다. 이 경우는 행위자 초점접근방식이다. 반면에 행위자 기반접근방식은 행위자의 내면의 상태에 더욱 주목해서, 윤리적인 행위를 하는 동기들 그리고 그 사람의 내면적인 삶의 방식과 관련하여 행위를 평가한다. 그 사람이 덕있는 사람인 이유, 또는 덕있는 행위를 한 이유는 그의 내면이 덕있는 상태이고 또 그 상태에서 나온 행위이기 때문이다. 이를테면, 플라톤적인 의미에서 영혼을 먼저 평가한다면 그것은 행위자 기반 방식인데, 반면에 영혼의 단계를 먼저 평가한다면 그것은 행위자 초점 방식이다.

행위자에 기반한다는 것의 의미가 행위자의 동기에 그 도덕성과 윤리적인 평가를 집중시킨다는 것이라는 사실을 알았다면, 동기에 기반해 윤리적 평가를 하는 이론에 관한 반대들은 행위자 기반 방식에 반대하는 것도 될 것이다. 슬롯은 사람들을 해칠 마음으로 재판관이 된 사람이라는 시즈윅의 사례를 든다. 동기에 의해서 행위의 도덕성을 평가한다면 이 사람은 나쁜 사람인가? 그렇지 않다. 오히려 이 경우, 그 재판관이 재판행위를 하는 이유가가 옳지 않다는 이유로 하지 않는다면 그것이야말로 도덕적이고 법적인 의무를 등지는 것이다. 이러한 사례를 들어 행위자에 기반함에 반박하는 것은, 이 사례에서 보자면, 재판을 하지 않을 더 강한 동기를 제공해주지 못하므로 행위에 아무런 변화를 줄 수가 없다.

이것보다 더 강한 반대들도 있을 수 있다. 만약 도덕적이고 윤리적인 평가를 내면의 상태의 유형에 따라 평가해야 한다면, 옳은 내면적인 상태를 갖추고 있는 사람은 어떤 도덕적 요청들에도 종속되지 않는다는 사실, 즉 일종의 주관주의적인 윤리이론이 될 가능성이 높다는 것이다. 하지만 행위자 기반의 접근방식에서 이런 결론이 필연적으로 이끌려나오지는 않는다는 것이 슬롯의 주장이다. 존경받을만한 내적인 상태를 소유하고 있다는 것이 그 소유자가 자기가 할 행위를 쉽게 고를 수 있다는 것을 함축하지는 않기 때문이다. 아마 그 사람은 그 내적인 상태를 잘 표현할 수 있는 방법에 관해 잘 알고 있지 않다면, 그런 내적인 상태를 외부에 표현하는데 번번히 실패할 수 밖에 없다. 예를 들어 자신의 자비로움을 표현하기 위한 행위로 아무도 도와주지 않는 것을 선택했다고 생각해보자. 그는 자신의 내적인 상태를 표현하는데도 실패할 뿐 아니라 사람들로부터도 덜 존경받게 될 것이다. 따라서 그런 내적인 상태에 있는 사람은, 아무 행위나 하지 않고, 자신의 내적인 상태를 표현할 수 있는 행위를 우선적으로 하게 된다는 것이 슬롯의 결론이다.

그리고 윤리적인 평가에 관해서 그 방향이 일방적이라는 의미, 즉 윤리적인 행위가 언제나 행위자 내부에서 세계로 나아가기만 한다는 의미에서 행위자 기반 방식이 자기폐쇄적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다. 그러나 이것 또한 필연적인 결론은 아니다. 내적인 상태를 갖추고 있다고 평가받는 사람 또는 실제로 그런 상태를 갖추고 있는 사람들은 자신이 어떤 행위를 해야하는지 또는 하는 것이 가장 좋을지를 경험적으로 아주 잘 알고 있다. 또한 반대로 이런 적절한 사실들에 관해 아는 것은 적절한 내적인 상태를 갖추게 되는 데 꼭 필요한 과정이기도 하다.

슬롯은 이런 행위자 기반 방식을 다시 차가운 방식과 따뜻한 방식으로 나눈다. 차가운 행위자 기반 방식은 내적인 강함으로서 개인의 행위의 도덕성과 윤리적 성격을 평가하는 방식이다. 내적인 강함은 덕있는 모든 행위를 위한 튼튼한 기초가 될 것이다. 그러나 그 기초로부터 덕있는 행위가 어떻게 나오는지는 더 자세한 고찰이 필요하다. 반면 동정심이나 자비로움과 같은 것들을 덕있는 행위의 기초로서 간주하는 것은 따뜻한 방식이다. 이것은 행위자 기반 방식이 고려하는 내면적인 상태로서의 도덕성이라는 목표와 더 잘 부합한다.

 

도덕성의 종류들 내적인 강함

 

도덕성을 내적인 강함으로 정의하는 대표적인 역사적 사례는 플라톤이다. 이것은 다른 어떤 근거도 요구하지 않고 그 스스로 도덕성을 위한 가장 기초적인 근거라는 사실이 직관적이다. 하지만 플라톤이 아닌 다른 사람과 다른 시대에도 이것이 모든 도덕적 행위의 기초로서 기능할 수 있는가? 슬롯에 따르면 플라톤은 이것에 관해 적절하게 설명하지 않았다고 한다. 하지만 여기서 내적인 강함을 그는 현대적인 의미의 자기신뢰라는 말로 바꾸어 쓰고, 그것이 어떻게 다른 도덕적 행위들을 이끌어내는지에 관해 서술하고 있다.

자기 신뢰는 어른들의 상태와 비슷한 무엇이다. 어른들은 자기충족적인 세계관을 어느 정도 갖추고 있고, 여러 상황들에 관해서 자기만의 고유한 세계를 가지고 있다. 그리고 그것들을 표현한다. 반면에 아이들은 이런 어른들의 내적인 상태를 질투하면서, 동시에 그들이 어떻게 행위하고 또한 어떤 상태에 있는지를 배운다. 슬롯은 이것을 기생이라고 표현한다. 자기신뢰가 없는 사람은, 가족을 벗어나 독립할 능력이 있지만 그렇게 하지 않는 상태에 비유된다. 자기신뢰라는 내적인 강함을 가지고 있는 사람은 자신의 상태를 표현하고 또한 그것으로 인해 존경받지만, 반대로 그렇지 못한 사람은 행위 때문에 비난받는 것이 아니라 그런 내적인 상태를 가지고 있다는 것 때문에 비난받는다. 내적인 강함은 어떻게 도덕적인 행위와 연결되는가? 슬롯은 그들은 스스로를 돕고, 그런 방식으로 다른 사람들 또한 도우려는 경향을 가지게 될 것이라고 주장한다.

내적인 강함과 덕있는 행위의 연결을 좀 더 자세히 살펴보자. 용기있는 사람은 불쾌한 사실들을 덤덤하게 받아들인다. 하지만 꼭 그렇게 하지 않더라도, 그것을 알게 되었을 때 예상할 수 있는 결과들이 참담하기 때문에 그 사실을 외면하는 경우도 있다. 하지만 여전히 그 사실을 직면하는 사람은 용기있는 사람이다. 그것이 덕이 되는 이유는 그것을 덕으로 만들어주는 다른 것이 있지 않고, 우리가 그런 상태를 가지기를 갈망한다는 가장 직관적인 상황들에 기초해있다. 자기기만과 반대되는 자기 신뢰는 바로 이런 의미에서 덕있는 행위의 기초가 된다. 같은 방식으로 자립하려는 노력과 그렇게 하려는 내적인 상태는 사람들에게 직관적으로 존경받는 것이 된다. 예를 들어, 성공적이지는 않더라도 자립적으로 살아가는 장애인들을 우리는 존경한다. 우리 또한 이런 자기신뢰에 의해 동기가 부여된다면, 아마도 그 장애인과 같은 태도를 취하게 될 것이다. 또한 자기신뢰는 우리의 도덕적 의무들과도 연결되어있다. 약속을 지키는 것에 관하여 생각해보자면, 약속을 지키지 않는 것은 슬롯이 보기에 약속을 지키는 사람들 사이에서 그 행위를 통해 기생하는 것이다. 또한 절제와 근면 같은 덕목들은, 자신의 환경과 처지에 만족하면서 살아가는 것을 의미할텐데 이것 또한 자기신뢰와 기생하지 않는 것과 관련이 있다.

자기신뢰와 이타적인 행위 사이의 연관은 니체에 의해서 잘 드러난다. 이타적 행위는 자기충족성을 달성하는 한 이상적인 방식이 될 수도 있다. , 과다하게 충족되었을 때는 자신의 고귀함을 위해서 다른 사람에게 이익을 주는 사람이 될 수도 있다는 것이다. 또는 자기신뢰 자체는 그다지 이기주의적이지 않다는 것도 주목할만하다. (슬롯은 이 부분까지 지면이 부족하다는 말을 두 번이나 하고 있다.) 어쨌든 내적인 강함이 관련을 맺고 있는 것으로 언급된 덕목들은 용기, 자기신뢰, 절제, 관대함 등이다. 슬롯은 여기에 마지막으로 언급되어야 할 덕목은 자신의 고유한 좋은 목적들과 의도들을 오랜 시간동안 지켜내는 것을 말하고 있다.

 

도덕성의 종류들 보편적인 자비로움

 

보편적인 자비로움으로서 도덕성을 정의한 역사적인 사례는 제임스 마티뉴이다. 그에 따르면 인간의 동기에는 질서가 있고, 도덕적 결정들은 서로 다른 두 동기 사이의 갈등 속에서 생겨난다. 만약 그 결정이 더 상위의 동기에 의해서 행해졌다면 그것은 옳고, 그 반대의 경우엔 나쁘다. 그의 동기들 가운데 동정심은 신을 위한 숭배 다음으로 고차원적인 동기이다. 시즈윅의 경우 마티뉴의 이러한 입장이 특정한 환경과 여건에 따라서는 어쩔 수 없이 낮은 동기에 의해서 행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그것이 더 좋은 경우도 있을 수 있다고 비판하였으며, 그의 이론을 보정하기 위해 가장 고차원적인 동기들로서 정의, 신중함, 보편적인 자비로움 같은 것들을 설정한다. 그렇다면 이제 행위들은 고차원적인 동기들에 따르는 행위들을 참고했을 때 그 옳고 그름이 밝혀질 것이다. 그러나 시즈윅은, 이 고차원적인 동기들이 무엇을 목표로 하고 있는지에 대해서 고민한 뒤, 단순한 공리주의에서 끝나버렸다. (그러나 이것은 행위자에 기반한 방식을 설명하기 위한 좋은 자료가 되는데, 아마도 행위의 동기의 배열들에 관해 심각하다는 점에서 그러한 것 같다.)

슬롯은 자신이 도울 수 있고 또 그 도움이 필요한 친구가 있지만, 또한 그 대신 수영을 할 수도 있고 그렇게 하면 제3자에게 도움을 줄 수 있는 한 사람의 사례를 들고 있다. 만약 수영을 하러 간다면, 나와 제3자가 얻을 수 있는 행복의 크기가 더 크다면, 공리주의자들은 수영하러 가는 것을 덕있는 행위라고 칭찬할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보편적인 자비로움에 부합하지 않는데, 그것은 단순히 결과에 대한 고려뿐만이 아니라 그 동기 또한 고려하기 때문이다. 보편적인 자비로움에 비추어 보았을 때, 내가 즐겁기 위해서 수영을 하러 가는 것은 친구를 돕는 것보다는 덜 도덕적인 행위이다.

공리주의와 자비로움을 비교하는 또 하나의 사례는, 자신의 업적을 널리 알리기 위해 병원을 지을 돈을 기부하는 사람이다. 공리주의자들과 결과주의자들은 이 행위를 선하다고 할텐데, 그것은 보편적인 자비로움이 산출할만한 결과와 동일한 일을 하려는 동기가 부여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많은 경우 우리는 이러한 동기들과 도덕적으로 진지하게 존경받을만한 동기들을 구별하고, 또한 그렇게 할 줄 안다. 그러나 결과주의는 이러한 우리들의 생각에 관해 별로 고려하지 않는다. 공리주의와 보편적인 자비로움에 기반한 도덕성은 계속해서 공통점과 차이점을 노출하는데, 보편적인 자비로움이라는 동기에서 출발한 행위들이 같거나 비슷한 결과들을 산출한다는 점에서 비슷하지만, 그 행위에서 동기들을 어떤 지위로 고려하는지에 따라서는 그 둘이 다르다.

슬롯은 행위자 기반 방식을 공리주의적인 관점을 통해 조금 교정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듯하다. 공리주의는 전체로서의 인류 또는 모든 사람들을 위해서 어떤 행위를 하는 것이 좋은 것인가에 관한 개념을 제공한다. 그리고 보편적인 자비로움으로서의 도덕성은 그들의 행위가 보편적인 자비로움에서 나올만한 행위에 충분히 가깝다면(그리고 실제로 그것에 가까운 동기로부터 나온 행위라면) 옳다. 이 둘은 서로 교차적으로 적용되는데, 어떤 사람이 실제로 그런 동기들과 그런 결과들을 의도하지 않고 행위한다고 하더라도(북아일랜드의 해방을 위해 운동하는 사람, 소비자 운동을 하는 사람), 그런 것에 헌신함으로써 자신을 희생하는 사람은 충분히 그런 동기에 의해 행위하는 것으로 이해해도 좋다.

그러나 공리주의는 인간의 웰빙에 관해 너무 좁은 개념을 가지고 있다는 점에서 한계가 있다. 또한 의무주의자들이 고려하는 몇몇 측면들에 관해 무지하다는 것도 단점이다. 이런 면에서 보편적인 자비로움으로서의 도덕성은 공리주의적 요소와 결합하여, 동기를 중요시하며 동시에 결과들을 고려함으로써 많은 비판과 기존의 이론들의 한계에 대답할 수 있는 자격을 갖추었다고 슬롯은 주장한다. 또한 보편적인 자비로움으로서의 도덕성이 주장하는 내용들이 어느 정도는 (차가운 행위자 기반 방식에 관해서 이야기할 때 언급했듯이) 직관적이라는 이점을 가지기 때문에, 우리의 생각들과 더욱 부합한다.

 

도덕성의 종류들 돌봄

 

돌봄은 보편적인 자비로움과 반대되어서 부분적이고 편파적인 또는 자기중심적인 자비로움으로 정의된다. 어떤 특정한 존재를 위한 자비로움이 덕있는 행위 전체의 근거가 된다는 생각은 아우구스티누스에게서도 보이긴 하지만, 그는 신에게 의존했으므로 우리는 이제 순수하게 세속적인 방향에서 이것을 구조화해야 할 것이다. 이런 입장에 관한 저작인 다른 목소리로에서 캐롤 길리건은 남성들이 도덕성을 권리, 정의, 자율성과 연결지어 생각하는 반면 여성들은 돌봄, 책임, 상호관계와 연결지어 생각하는 경향이 강하다고 주장했다. 넬 노딩스는 여성적으로 고유한 도덕성에 관해 이야기하면서 돌봄 개념을 언급한다.

하지만 우리가 이런 이론들을 행위자에 기반한 방식과 일관되게 만들기 위해서는 보충적인 논증이 필요한 것으로 보인다. 특히 노딩스의 윤리학을 행위자에 기반한 것으로 보기는 힘들다. 그녀는 돌봄을 표현하는 행위는 도덕적으로 좋은 것이지만, 동시에 그것은 장려되어야 하고, 또한 그것이 이 세계의 도덕적 행위들을 구성하는 가장 기초적인 명령 같은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렇다면 그것은 동기가 아니라 명령에 기반했으므로 행위자에 기반한 것으로 보기는 힘들다.

그러나 슬롯이 보기에 노딩스의 이러한 관점들은 은연중에 행위자 기반 방식을 함축한다. 만약 구호활동을 위해 어떤 사람이 사람들을 모은다고 하자(돌봄행위를 장려하는 좋은 사례인 듯 하다). 그는 그렇게 장려하는 것에 의해서 다른 사람들을 위해 그리고 일반적으로 더 좋은 것을 제시하기 위한 행위를 하고 있다. 이것은 소수의 사람들에게 직접 돌봄을 하라고 권하는 것보다도 더 배가 되는 효과를 가지고, 이것은 그 활동을 하려고 모인 사람들에게도 마찬가지이다. 이들은 자신의 내적인 상태를 가장 잘 표현하는 한 방법으로서 돌봄과 그것을 장려하는 것을 알 것이다. 또한 이것들이 도덕적인 탁월함의 한 예가 되기 때문에, 이런 행위들은 행위자 기반 방식에 의해서 조정될 수도 있을 것이다.

이러한 도덕이론의 생산은 우리와 멀리 떨어진 무관한 제3자들에 관해 좀 더 말해질 필요가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돌봄으로서의 도덕성을 주장하는 사람들은 보편적인 것을 고려하는 그 어떤 도덕이론보다도 자신들이 낫다고 이야기하며, 또한 실제로 그런 행위들이 존경받을만하고 선호할만하게 보인다고 말할 것이다. 또한 왜 보편적인 이론이 더 나은지 명확하게 말할 수도 없다고 반박할 수도 있다.

 

행위자에 기반한 관점을 적용하기

 

그러나, 행위자에 기반한 덕 윤리학에 관한 우리의 두 좋은 형식들 보편적인 자비로움으로서의 도덕성과 돌봄으로서의 도덕성 은 이제 반드시 언급해야만하는 한 더한 어려움과 마주한다. 만약 어떤 한 사람이 어찌해야할지 모를 도덕적 문제와 함께 마주되었을 때, 그것은 어쨌든 부적절해보이고 또한 심지어는 사람들과 이 세계에 관한 사실들보다는 오히려 그의 고유한 동기들을 그것을 해결하기 위해서 설명하는 것에 반대하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이것은 행위자에 기반함이 허용하고 또한 심지어 지시하는 것인가? 예를 들어, (보편적인 또는 특수주의적인) 자비로움으로서의 도덕성은 우리에게 그것이 도덕적으로 선하고 옳고, 또한 받아들일만한지 아닌지, 말하자면, 늙어서 죽어가는 부모를 살린 상태로 두려는 과감한 수단들의 사용에 반대하는 것은 이 당사자의 동기들에 달려있는지, 또한 이것이 죽어가거나 또는 고통받는 부모를 위한 과감한 수단을 옹호할지 또는 반대할지를 알지 못하는 어떤 한 사람을 위해서 전체적으로 도움이 될만한가? 동기들 안을 살펴보는 것은 아마도 저 사람의 문제를 푸는 데 도움이 되지 않을 것이며, 또한 그러므로, 우리가 대부분 도덕적인 지도가 필요한 곳에서, 그것은 행위자에 기반함이 부적절할 뿐만 아니라 한 사람의 도덕적 어려움들을 향한 한 답을 찾는 것을 불가능하게 만들 것처럼 보인다.

덕 윤리학의 몇몇 방어자들은 덕 윤리학이 행위자에 기반하든 또는 다른 것이든 실천적인 도덕적 주제들에 응용될 수 없다는 것을 승낙하길 바라고 있지만, 그러나 덜하지 않게 덕 윤리학이 도덕성에 관한 올바른 이론이나 관점을 우리에게 줄 수 있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만약 우리가 (행위자에 기반한) 덕윤리학이 응용될 수 있다면 그것은 덕 윤리학을 위해서 더 좋으며, 또한 나는 자비로움과 같은 한 내적인 상태가 이 세계에 초점을 맞추고 또한 이 세계에 관한 사실들을 모으는 것과 함께 그 자체를 고려하는 방식에 관해 앞에서 이야기된 것의 사용을 더 나아가게 만드는 것에 의해서 우리가 이것을 달성할 수 있다고 나는 믿는다. 만약 한 사람이, 말하자면 그것의 행위자의 동기들의 자비로움을 향한 참고에 의해서 행위나 결정의 한 특정한 과정을 도덕적으로 판단한다면, 한 사람은 그 스스로 이 세계 안의 사람들에 관한 사실을 참고하고 고려하는 한 내적인 요소들을 향한 관계 안에서 곧 판단을 하게 될 것이다. 한 사람의 내면적인 응시는 효과적으로 세계를 향해 되돌아가고’, 또한 마치 우리가 한 순간 안에서 더욱 자세한 것 안을 보게 되는 것처럼 이 세계에 관한 사실들을 무엇이 도덕적으로 받아들일만하거나 또는 하는 데 가장 좋은가를 결정하려는 한 사람의 시도 안인 생각 속으로 집어넣는 것을 한 사람에게 허락할 것이다. 그러나 반대로, 이런 되돌아감은 도덕적 노력에 관해 불필요하게 이중적이거나 또는 필요없는 것인데, 만약 우리가 저런 동기가 기본적으로 적어도 모든 행위의 도덕적 성격과 관련이 있다고 가정한다면 그렇다. 만약 이 세계에서 그들의 효과에 의해서 단순하게 행위들이나 우리 스스로나 다른 이들을 우리가 판단한다면, 우리는 우리가 실제로 도덕적으로 존경하고 또한 도덕적으로 좋고 칭찬받을만한 행위들로부터 우연히 또는 아이러니컬하게 유용한 행위들을(또는 바나나 껍질에 미끄러져 넘어지는) 끝내 구별할 수 없게 된다.

그러면, 그의 늙은 어머니가 병원에 갑자기 실려갔다는 것을 듣고는 어머니와 같이 있으려고 먼 도시로부터 날아온 어떤 한 사람을 고려해보자. 몇몇 또는 다른 형식 안에서 자비로움으로서의 도덕성이 주어지고 또한 그가 어머니가 살아가면서 관계맺은 유일한 사람이라면, 그는 그가 병원에 갈 때 그의 부모와 함께 또는 부모를 위해서 도덕적으로 해야하는 것이 무엇인가에 관한 주제를 어떻게 풀어야만 하는가? 예를 들면, 그는 그의 어머니를 지키기 위한 과감한 수단을 옹호해야 하는가? 물론 자비로움의 (한 또는 다른 형식) 으로서의 도덕성은 이 질문을 향한 답변을 그에게 주지는 않지만, 그러나 주목할만한 가치가 있는 것은, 우리가 가정하고 있는 것처럼 그의 무지와 그의 어머니의 특수한 조건과 전망들에 관해서는, 이 지점에서 저 질문을 향한 답을 내는 대부분의 도덕 이론들에는 이유는 없다는 것이다. 그러나 자비로움으로서의 도덕성은 그가 병원에 갈 때 그가 도덕적으로 해야하는 것이 무엇인지에 관한 질문을 향한 답을 그에게 내준다. 그것은, 미래의 고통과 무능력함을 고려하는 한 확실하게 삶의 질과 지속성을 고려하는 것, 즉 그의 어머니의 조건과 전망들에 관해 더 많이 도덕적으로 알아내야만(그렇게 하지 않으면 나쁜) 한다고 그녀에게 말한다. 그리고 그것은 그의 실제 동기들을 향한 참고에 의해서 이것을 그에게 말할 수 있는데, 이는 만약 그가 더 알아보지 않고 할 것을 결정한다거나 또는 현재의 상대적인 무지에 기초해서만 그의 어머니에 관해 옹호할 것을 결정한다면, 그는 자비로움과는 동떨어진 (그의 어머니에게) 한 냉담함을 드러낼 것이기 때문이다. 전원을 끊을 것을 결정하거나 또는 그의 어머니에 관해 더 많은 것을 아는 것 없이 과감한 수단을 사용하지 않을 것을 결정하는 것은 그에게 무심함과 냉담함을 보여주고, 또한 자비로움으로서의 도덕성이라는 이러한 기초 위에서는 그가 어떤 결정이라도 내리기 전에 더 많은 것을 찾아야만 한다는 도덕적 판단을 만들어줄 수 있다.(내적인 강함으로서의 도덕성이 비슷한 결론을 낳는 것을 보여줄 수 있다.)

그러면, 그 사실들이 일어나있으며 또한 그들이 실제로 명확하며 또한 그녀의 어머니에게 끔찍한 아픔과 쇠약해질 전망들을 가리킨다고 해보면, 그 사람의 결정은 자비로움으로서의 도덕성으로부터 다시 한 번 그럴듯하게 이끌어질만하다. 이 지점에서, 그것은 과감한 수단을 주장하는 것은 그의 냉담함이 되고 그렇게 하지 않는 것이 자비로움이 되며 또한 적절한 도덕적 결론은 그러므로 행위자에 기반한 고려들에 의해서 도달될 수 있다.

그러나 당연히, 그는 스스로 이런 방식 안에서 생각하지 않는다고 어떤 한 사람은 말할지 모른다. 그는 그의 어머니가 아픔 또는 즐거운 미래의 존재를 가지는지 아닌지에 관해 고민하고, 예를 들면, 만약 그가 어머니의 존재를 연장할 것을 알았다면 그가 스스로 냉담하게 할지 안할지에 관해서는 아니다. 이것은 납득할만한가? 그는 만약 어머니가 살아간다면 거의 겪을 미래의 고통들에 관한 단순한 참고에 의해서 또는 말하자면 더욱 복잡하고 풍부한 것에 의해서 둘 가운데 하나에 의해 과감한 수단을 허락하지 않는 그의 결정을 도덕적으로 정당화할 수 없는가: 그것은 주어진 그녀의 전망들 속에서 어머니를 산 채로 두려고 시도하는 나의 냉담함이 되는가? 물론, 도덕적인 문제풀이의 한 표현으로서의 후자에 관해서 유별난 것도, 운이 나쁜 것도 없다.

예를 들어, 역사적인 사실의 한 요소로서, 북미자유무역협정(NAFTA)을 옹호하면서 만들어진 논증들에 관해 생각해보자. 부통령 앨 고어와 하원의 야당 원내대표인 로버트 미첼은 그것이 이 세계와 아메리카의 미래에 비굴하고, 고통스럽고, 절망적인 태도를 채용하게 될 것을 거부하는 토대들 위에서 이 협정을 방어했다. 그들은 결과들에 관해 더욱 직접적으로 말할 수 있어왔지만, 그러나 그들이 이 주제를 제출하는 방식에 관해 비합리적인 것은 아무것도 없었고 또한 그래서 나는 내적인 동기들의 외적으로 보이는 성격이 주어지면, 행위자에 기반한 관점은 더 일반적인 공리주의와 결과주의와 같은 이런 실천적으로 응용할 수 있는 도덕적 이론들을 향해 저런 유효함에서 어깨를 나란히하는 도덕적 주제들에 관한 해법을 위한 재료를 가지고 있다고 결론을 맺고 싶다.

어려운 또는 그렇게 어렵지 않은 실천적인 도덕적 주제들을 향한 대답 안에서 우리의 평범한 생각은 동기들 또는 결과들 또는 둘 다에 호소할 수 있다. 그러나, 결과주의는 궁극적으로는 결과들에 그리고 단지 간접적이고 유용한 접근의 한 방법으로서만 공평한 자비로움같은 동기들에 관한 고려에 도움을 청하는 것에 의해서 이런 주제들에 답을 낸다. 자비로움으로서의 행위자에 기반한 도덕성은 궁극적으로는 동기들에, 그러나 간접적으로는 결과들을 취하는 것에 도움을 청하는 것에 의해 반대의 유형 안에서 문제에 답을 내고, 더 나아가서 그들이 이런 동기들(과 함께인 사람들)에 의해 고려되고 또한 이런 동기들을 향한 답변 안에서 탐사된다. 각각의 접근은 많은 도덕적 어려움들 또는 문제들에 관한 경우에 따른 답을 허락하고, 또한 그래서, 응용 윤리학의 전체 문제를 향한 고려와 함께, 어떤 접근법도 이로움을 가지는 것으로 보이지 않으며, 또한 실천적인 도덕적 문제들에 부적절하게 된다거나 또는 그들의 해법을 달성하기에 불가능하게 만든다는 것 때문에 행위자에 기반함을 비판할 아무런 이유도 없다.

확실히, 자비로움으로서의 도덕성이 우리의 도덕적 어려움들에 답을 낼 수 없게 되는 경우들도 있다. 예를 들어, 만약 그의 어머니에 관한 사실들이 배워지지 않았거나 또는 완전히 복잡해지게 된다면, 자비로움으로서의 도덕성은 오히려 장애물이 될 것이다. 그러나 그 이름에 가치가 있는 어떤 결과주의도 이런 한 경우들 안에서는 텅 빈 것으로 다가오며, 또한 그것은 저런 관점들의 강함이지만, 특수주의적인 또는 보편주의적인 형식이든 자비로움으로서의 행위자에 기반한 도덕성도 그에 못지 않고, 이런 관점들은 우리의 인간적인 지식 또는 합리적인 힘들을 벗어나는 경우들 안의 어려운 도덕적 질문들을 향한 답변을 알 것이라고 추정하지 않는다. 무엇을 할지와 무엇을 느낄지를 아는 것을 언제나 너무 쉽게 만드는 어떤 윤리이론도 그걸 확장해봤을 때 결함이 있거나 심지어는 쓸모없게 보이게 되는데 이것은 도덕적 현상의 배배 꼬인 복잡성에 관한 우리의 멀쩡한 감각의 부정확성 때문이다.

덕윤리학의 부활 이래로, 이 주제에 흥미로운 이들은 아리스토텔레스에 관해 또는 신아리스토텔레스주의의 생각들에 관해 주로 초점을 맞춰왔다. 나는 도덕성에서 덕으로(덕의 부활)안에서 신아리스토텔레스주의적인 생각들을 스스로 방어해왔지만, 그러나 우리는 행위자에 기반한 덕 윤리학의 특정한 형식들 또한 진정한 약속과 가능성들을 가지고 있다는 것도 보았다. 덕윤리학이 그것의 세력을 확장하는 기간 안에서, 그것은 아리스토텔레스 또는 아리스토텔레스주의가 혼자 제공할 수 있는 것보다 더 다양한 요법들을 필요로 한다.

 

 

덧댐.마이클 슬롯의 책 하나가 이미 번역이 되어있다. 제목은 『덕의 부활』이다. 행위자기반의 덕윤리학이라는 개념과, 다른 윤리학적 입장과 비교해 이 입장이 어떤 부분에서 더 나은지에 관한 설명이 주를 이루는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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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철학연구 발제. 존 롤즈, 『사회정의론』(황경식 옮김) 2장 요약>

   정의론은 두 부분으로 나눠진다
. 첫째는 선택될법한 다양한 원리들을 정식화하는 부분, 그리고 그 원리들 가운데 실제로 어떤 것이 채택될지를 논증하는 부분이다. 이 장에서 논의되는 것은 첫째 부분 가운데서 정의의 원리들에 관한 것이고, 구체적으로는 제도와 형식적 정의, 절차적 정의의 종류, 좋음(the good)에 관한 이론의 위치, 정의의 원리들이 평등주의적이라는 말의 의미 등등이다.

 


   10.
제도들과 형식적 정의

 

   사회적 정의의 주제는 사회의 기본적인 구조다. 사회의 기본적인 구조는 권리와 의무를 할당하고 이득과 부담을 적절하게 분배하는 방법을 규정하는 것이다. 또한 우리는 권리와 의무, 권한과 면책권 등을 동반하는 공직이나 위치 등을 규정하는 공적인 규칙체계로서 제도를 이해할 수 있다. 제도는 허용되거나 금지되는 행위의 목록을 포함하며, 위반했을 때 그에 관한 처벌이 뒤따른다. 사회의 기본적인 구조는 이런 제도들 사이의 조정이다. 제도는 추상적인 제도와 구체적인 제도로 나눠진다. 만약에 우리가 어떤 제도에 관해서 정의로운가 부정의한가를 이야기하려 한다면 우리는 구체적인 의미에서 현실화된 제도에 관해 이야기해야 한다. 추상적인 제도가 정의로운지 그렇지 않은지는 보통 그것이 현실화 되었을 때 어떤 모습일지를 생각해보고 그 여부를 판단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제도는 언제 존재하는 것일까
? 제도는 특정한 시간과 공간 속에서 그 제도를 구성하는 규칙의 체계에 따라야 한다는 공공적인 이해에 부합해 이행되는 상태에서 존재한다고 말해질 수 있다. , 제도는 다양한 실천들을 일일이 규정하며, 이를 일관된 계획 아래 조직한다. 또 이 제도에 동의한 특정한 사람들은 상호적으로 이것에 따라 행위해야 한다는 것을 알고 있으며 실제로 그것을 수행한다. 만약 어떤 사람이 한 제도의 영향 아래 놓여있고 그것에 동의했다면, 그는 그 제도 속에서 자신이 어떤 위치에 있으며 제도가 그에게 무엇을 요구하는지를 안다. 이는 다른 사람들에게도 마찬가지다. 나아가 서로가 제도로부터 요구받고 있는 것이 무엇인지를 서로가 알고 있으며, 그것을 알고 있다는 것도 알고 있다. 이는 실제로 시행되는 제도들에 비추어 어긋나는 부분이 없지는 않지만, 사회의 기본적 구조에 관해 논의할 때 생각할 수 있을 법한 합리적인 가정이다. 이것이 제도의 공공성(공지성)이다. 이것이 잘 구현된 사회는 잘 조직된(well-ordered) 사회다. 이런 사회에서 사람들은 서로에게 허용되고 금지되는 행위가 무엇인지 알고, 정의가 무엇인지에 관한 생각을 공유하고 있으며 따라서 정의로운 것과 부정의한 것에 관한 이해가 공적이다. 이런 공공성은 계약론자들의 이론에서 핵심적이다.


   우리는 몇 가지를 구분해야 한다
. 우선 제도를 구성하는 규칙들과, 특정한 목적을 성취하기 위해서 수행되는 전략과 격률을 나눠보자. 전략과 격률은 내가 내 관심사와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내가 무엇을 할 것인지 분석한 것을 토대로 구성된다. 이는 이미 특정한 제도와 규칙, 정의에 관한 관점을 가정한다. 반면 제도는 이런 전략과 격률이 사회적으로 용인되는 목적들을 추구하게끔 조직해야 한다. 이는 의도되거나 예측되지 않을 수도 있다. 어떤 제도 속에서 펼쳐지는 전략과 격률은 제도를 평가하는 데 좋은 지표가 될 수는 있다. 그러나 그것 자체가 제도는 아니다. , 규칙과 제도, 사회의 기본적 구조를 나눠보자. 이 셋은 관련이 있기는 하지만, 어느 한 쪽이 부정의하다고 다른 것들까지 반드시 부정의해지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부정의는 규칙들이나 제도들의 묶음으로부터 발생하는 일종의 결과다. 우리는 이런 상황이 있을 수 있다는 것을 매우 쉽게 생각할 수 있다. 우리가 사회를 이렇게 바라본다는 것은, 크고 작은 맥락에 따라 제도를 바라보기 때문이라는 사실이 반영된 것이다.


   그런데 보통 정의는 기존하는 의식에 적용되지는 않는다
. 우리들이 실제로 알고 있는 것 가운데서 명백하게 부정의를 저지르는 사례들이 많고, 그러므로 정의는 언제나 적용되는 것은 아니라는 결론이 내려진다. 그러나 우리는 사회의 기본적 구조에 관해 논의하기로 했으므로, 논의의 방향을 이런 거대한 사례연구로 돌리지 않고 계속해서 체계에 관해 이야기해보자. 실제로 정의에 관한 어떤 생각이 있고, 그와 함께 제도가 있다고 가정해보자. 이 가정에서 보이는 내용은 그 제도의 핵심적인 내용이라는 점에서 정의에 관한 이론을 함축했다고 볼 수 있다. 그런데 이런 상황에서 만약 우리가 편중되지 않고 일관되게 관리되는 제도를 가지고 있다면, 그것은 정의로운 것일까? 이런 상황을 형식적 정의라고 한다.


   우리는 일반적으로 공정함 내지는 공평함을 정의에 관해 생각할 때 항상 떠올리곤 한다
. 이 말은 법률이나 제도가 사람에 상관없이 공평하게 적용되고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여기에서 공평하고 일관되다는 것은 특수한 경우에 관해 다룰 때 고려되는 부적절한 고려사항들을 판결 또는 사회적 권위와 결부시키지 않는 상태를 뜻한다. 물론 아주 말도 안되는 제도가 공평하고 일관되게 관리될 수도 있다. 하지만 이는 제도가 임의적으로 운영되는 것보다는 낫다. 제도가 공평하고 일관되게 관리된다면, 그에서 불이익을 받는 사람들은 그 제도 속에서 자신을 어떻게 하면 보호할 수 있는지를 알고, 그에 알맞은 전술을 세울 수 있다. 반면에 제도 자체가 임의적으로 관리될 경우 그렇게 할 수 없다. 이런 원리에 따라, 형식적 정의는 결코 정의롭다고 할 수 없는 아주 중요한 어떤 것을 정의의 원리들에서 배제시킨다.


   많은 사람들이 밝히기에
, 일반적으로 편파적이고 제멋대로인 제도는 거의 모든 경우에서 부정의하다. 그런 제도의 지배를 받는 사람들은 다른 사람들의 권리와 자유를 경멸하는 것을 체득하며, 이렇게 성장한 사람들이 만든 제도가 편중되지 않고 일관될 리가 거의 없기 때문이다. 그런 제도는 양심은 잠재우고 임의성만 늘린다. 반면 편중되지 않고 일관된 제도는 그 제도 아래에서 살아가며 다른 사람들을 편중되지 않고 일관되게 대하려는 욕망과 깊은 관계를 맺고 있다. 그러므로 형식적 정의가 지켜지는 제도 속에서 본질적인 정의를 찾기가 더욱 쉬울 것이라는 주장은 지지를 받는다.

 


   11.
정의에 관한 두 원리들

 

   정의에 관한 두 원리는 잠정적인 형식으로 제시된다. 그러므로 이 단계에서 이 원리는 가설적인 것이다. 이후의 논의에서 이것이 단순히 가설적인 것이 아니라는 점이 해명될 것이고, 그 과정에서 여러 단계를 거칠 것이다. 두 원리에 관한 첫 번째 진술은 다음과 같다. 첫째, 각 사람은 다른 사람을 위한 비슷한 자유와 양립하는 가장 넓고 기본적인 자유를 향한 동등한 권리를 가진다. 둘째, 사회적이고 경제적인 불평등들은 그들(불평등들)(a) 모든 이의 이점이 되리라고 합리적으로 기대되고, 동시에 (b) 모두에게 열려있는 위치들과 공직들이 덧붙여지도록 조정된다. 이 원리는 사회의 기본적 구조에 적용되는 것이다.


   두 부분은 각각 기본적 자유가 모든 사람들에게 균등하게 나눠진다는 것을 보장하는 부분과
, 사회적이고 경제적인 불평등을 규정하는 부분으로 나뉘어 있다. 첫 번째 원리가 보장하려`는 기본적 자유란 발화와 집회의 자유, 양심의 자유와 사상의 자유, (개인적인) 사유재산을 가질 권리에 따라오는 한 사람의 자유, 그리고 법의 규칙의 개념에 의해 정의된 것으로서 임의적인 체포와 압류로부터의 자유 등과 함께인 정치적 자유(선거권과 피선거권)를 가리킨다. 두 번째 원리는 수입과 부의 배분 그리고 권위, 책임과 명령의 연쇄에서 차이를 사용하도록 하는 조직들의 고안에 적용된다. 그것은 모든 사람에게 이익이 되도록 이뤄져야 하며, 권위를 갖는 직위는 모두에게 열려있어야 한다. 이 둘 사이에는 순서가 있으며, 이를 통해 어떤 사회적, 경제적인 보상도 평등한 자유의 제도를 정당화하거나 보상할 수 없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는 정의에 관한 일반적인 생각, 즉 불평등한 분배가 모든 사람에게 이익이 되지 않는 한 평등하게 분배되어야 한다는 생각의 한 특수한 경우이기도 하다.


   사회의 기본적인 구조는 사회적으로 기본적인 좋은 것들을 분배한다
. 이들은 한 사람의 인생을 계획하는 데 사용할 수 있는 것들로서, 권리와 자유, 힘과 기회, 수입과 부 등으로 단순화된다. 우리는 이들이 공평하게 분배된 최초의 상황을 가정할 수 있는데, 이는 어떤 상황을 개선하는 데 기준이 된다. 만약 이들을 불공평하게 분배함으로써 이런 가설적인 시작점의 측면에서 나아지게끔 한다면, 이 불공평함은 정의에 관한 일반적인 생각에도 부합한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기본적 자유와 사회적이고 경제적인 수입증가를 서로 바꿀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경향도 널리 퍼져있다. 정의에 관한 일반적인 생각은 이것을 방지하지 않는다. 반면 정의에 관한 두 원리는 이런 교환을 허용하지 않는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떤 조건에서 기본적 자유가 우선한다는 두 원리의 순서를 정당화할 수 있을까? 정의에 관한 일반적인 생각에 미뤄봤을 때 이렇게 우선순위를 정한다는 것이 더 특수한 경우로 비춰질 수 있기 때문이 이는 반드시 짚고 넘어가야 할 부분이다.


   이 두 원리들을 제도에 적용하면 특정한 결과들이 나온다
. 우선 권리와 자유는 기본적인 구조의 공공적 규칙에 의해 규정된다. , 자유는 사회적인 것이다. 첫 번째 원리는 자유를 규정하는 모든 규칙들은 그 제도의 영향 아래 놓인 모든 사람에게 공평하게 적용돼서 가능한 한 가장 넓은 범위의 자유를 허용해야 한다는 점이다. 이 자유에 제한이 놓이는 경우는 오직 다른 사람의 자유와 양립할 수 없을 때 뿐이다.


   그리고 정의의 주제가 구체적인 조건들을 최대한 고려하지 않은 사회의 기본적인 구조인 것과 마찬가지로
, 우리의 논의에서 등장하는 사람들은 구체적인 조건들이 거의 고려되지 않은 대표적 사람이다. 그는 특정한 위치에 있는 사람들, 그리고 그들이 가질만한 합리적인 기대치들을 대표한다. 그러므로 두 번째 원리에서 불평등한 분배가 적용되는 대상은 대표적 사람이다. 만약 특정한 구체적인 사람에게 재화를 몰아주는 것으로 두 번째 원리를 생각할 경우, 그것은 더 이상 사회의 기본적 구조에 관한 생각이 아니게 되기 때문이다. 또한 그렇게 재화를 몰아주는 일이 좋은 효과를 거둔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옳은 것과는 별 관계가 없을 가능성이 크다. 또한 두 번째 원리가 의미하는 것은, 만약 불평등이 허용된다면 그 불평등으로부터 모든 대표적 개인들이 이익을 보고 그러므로 그런 불평등에 관해 모든 대표적 개인들이 합리적으로 동의해야만 그 불평등이 정당하다는 점이다. 공리의 원리은 특정한 위치에 있는 사람의 손해가 다른 위치에 있는 사람의 이익으로 벌충되는 것을 정당화한다. 그러나 정의에 관한 두 원리는 이런 벌충을 허용하지 않는다.

 


   12.
두 번째 원리의 해석

 

   두 번째 원리에 들어가 있는 모두에게 이익이 된다는 말과 모두에게 직위가 열려있다는 말은 애매하기 때문에, 이것이 정확히 어떤 것을 의미하는지 규명하는 일이 필요하다. 이 두 가지는 각각이 두 가지를 의미할 수 있고, 그러면 두 번째 원리는 총 네 가지 해석이 가능하다. 여기에서 정의에 관한 첫 번째 원리는 충족되고 있다고 가정한다. 또한 경제체제는 자유로운 시장 체제라는 것도 가정한다.

 

모든 이의 이점

공평하게 열려있다

효율성의 원리

차이 원리

I.재능에 열려있는 경력

자연적인 자유의 체계

자연적인 귀족지배

II.공정한 기회의 평등

자유로운 평등

민주적 평등

 

   먼저 자연적인 자유의 체계에 관해 살펴보자. 이 체계는 효율성의 원리를 충족시키는 기본적인 구조(즉 제도들 간의 조정)가 있으며 또한 직위들이 재능을 가진 자들에게 분배될 경우 정의롭다고 간주하는 체계다.


   효율성 원리는 기본적 구조에 적용할 수 있도록 정식화된
, 최적 상태에 관한 파레토 원리이다. 여기에서 최적의 상태란, 어떤 사람들을 빈곤하게 하지 않으면서 어떤 사람들을 부유하게 만들 가능성이 더 이상 없는 상태를 뜻한다. 이것을 분배의 문제에 적용해보면, 어떤 특정한 분배의 방식이 그 이외에 다른 사람들을 더 불리하게 만들면서 또 다른 사람들을 더 유리하게 만드는 방식이 없는 경우 그 방식은 최적의 분배의 방식이다. 생산의 문제에 적용해보면, 고정적인 투입을 이용해서 다른 상품을 더 적게 생산하지 않고 동시에 또 다른 상품을 더 많이 생산할 수 없다면 최적의 상태이다. 이 원리에 비춰봤을 때 생산과 분배가 비효율적이라는 것은, 어떤 이들에게 해를 끼치지 않고서 다른 사람들을 유리하게 만드는 방식이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것은 원초적 입장에 있는 사람들이 받아들일법한 원리 가운데 하나다.

효율성의 원리

 

   그림 3은 일정한 재화를 두 사람에게 분배하는 방식의 집합을 나타내는 그래프다. , 어떤 한 사람(X1)이 가져갈 재화의 양을 기준으로, 두 사람(X1X2)에게 분배될 재화의 상대적인 양을 나타낸 것이다. 곡선 AB는 파레토 최적의 상태를 만족하는 점의 집합이다. X1a만큼 가져간다면, X2는 최대 b만큼 가져갈 수 있으며, 만약 실제로 이렇게 되었다면(D) 이는 최적의 상태다. 그러므로 최적 상태를 만족하지 못하는 그림 4EF는 최적 상태가 아닌데, 이는 CD에 대해서만 그렇다. CD는 모두 최적상태이므로 비교가 불가능하고, EF 사이의 비교도 불가능하다. EF는 위로 옮겨가든 오른쪽으로 옮겨가든 개선의 여지가 있다. E의 경우 그 개선의 여지가 있는 분배의 방식의 영역이 빗금친 삼각형으로 나타난다. 이 이외의 다른 영역과는 비교가 불가능하다. 또한 D의 경우, D는 사각형 ObDa 안에 있는 모든 분배의 방식보다 우월하지만 그 밖의 다른 점(즉 분배의 방식)과는 비교가 불가능하다.


   그러나 이같은 논증은 효율성의 원리에만 의지했을 때 가능한 논증이다
. 우리는 잠정적으로 X1X2가 똑같은 재화를 가져가는 분배의 방식의 집합을 공평한 분배로서 생각해볼 수 있는데, 이것이 그림 4의 점선이다. 만약 이것을 우리가 공정한 분배라고 가정한다면, 점선과의 거리에 의해서 그 분배의 방식이 얼마나 공정한지를 판별해볼 수도 있다. 공정으로서의 정의의 원리들은 바로 이런 고려를 집어넣어 분배의 방식을 고안한다.

 

   효율성의 원리에서 최적의 분배 방식이 여러 개인 이유는 그 정의 때문이다. 한 사람이 모든 좋은 것을 가져간다고 가정하면, 그 사람에게 손해를 주지 않으면서 다른 사람에게 이익을 줄 수 있는 분배의 방식은 없기 때문이다. 이를 교환의 측면에서 다시 설명해보면, 사람들이 교환을 하려고 한다는 것은 좋은 것들을 더 좋게 나누는 방식이 있다는 것을 뜻한다. 만약 잘 분배되었다면, 교환을 해서 좋은 것들의 위치를 바꾸려들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한 사람에게 모든 좋은 것을 주는 분배의 방식은 다른 사람들이 교환을 위해 내놓을 어떤 것이 없고 그래서 교환이 이뤄지지 않기 때문에서라도 효율적인 분배 방식이다. 이를 사회의 기본적 구조와 대표적 사람들에게 적용해보면, 권리와 의무 그리고 이득과 부담을 나눌 때 어떤 대표적 사람들에게는 손해를 끼치지 않으면서 어떤 다른 대표적 개인들에게 이익을 줄 수 있는 방법이 없다면 그것이 최적의 분배 방식일 것이다. 정의의 첫 번째 원리에 의해서 기본적인 자유는 분배의 대상이 아니기 때문에, 여기에서 분배의 대상이 되는 좋은 것들은 소득이나 부, 권력이나 협동적인 활동을 규제하는 권위 등이다.


   우리에게 주어진 과제는
, 이런 수많은 효율적인 분배의 방식 가운데서 어떤 것을 정의롭다고 해야할지를 선택하고, 왜 그런지를 논증하는 일이다. 몇몇 사람들이 좋은 것을 다 가져가는 것이 효율적이라는 말은 이상하게 들리며, 그러므로 우리는 직감적으로 효율성을 정의의 원리로 삼는 것이 문제가 있음을 느낀다. 만약에 우리가 이런 효율적인 분배의 방식 가운데서 정의롭다고 할만한 것을 찾아낼 수 있다면, 우리는 정의로운 것과 효율적인 것 모두를 달성할 수 있을 것이다. 지금 단계에서 우리는, 적어도 효율성의 원리만으로는 정의로운 기본적 구조가 어떤 것인지 규명할 수 없다는 것은 알게 된다.


   그러므로 자연적인 자유의 체계는 효율성의 원리에 제한을 거는 조건을 제시한다
. , 특정한 효율적 분배는 자유로운 시장 경제 체제 안에서 가정되는 것들, 즉 최초의 소득, , 재능 등의 분배에 의해서 달성된다. 또한 자유로운 시장에서 가정되듯, 모든 사람들이 유리한 사회적 공직을 제한 없이 얻을 수 있다는 형식적인 기회의 균등이 보장된다. 이 두 가지가 자연적인 자유의 체계에서 정의로 간주될 제한 조건들이다. 그러나 최초의 분배는 시간이 갈수록 여러 요소들이 영향을 주면서 반드시 변화한다. 그리고 이런 변화 가운데 상당수는 개인의 능력에 달려있다기 보다는 일종의 도덕적 운의 영향이 훨씬 크다. 따라서 자연적인 자유의 체계는 임의적인 운이 분배를 좌우하는 것을 허용한다는 점에서 부정의하다고 간주할 만하다.


   정의에 관한 두 번째 원리에 관한 자유로운 평등이라는 해석은 이런 상황을 교정하기 위해서 공정한 기회의 평등이라는 제한 조건을 추가시켰다
. 이는 유리한 직위에 접근하는 데 있어서 형식적이지 않고 실제로 평등해야 한다는 것이 이 해석의 핵심적인 내용이다. 그러므로 비슷한 재능을 가진 사람들은 비슷한 수준으로 살아야 하는 것으로 보이며, 따라서 그 재능을 비슷한 방식으로 사용하려고 생각하는 사람들 사이에서 재능 이외의 요소가 그들의 삶의 비전을 간섭해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이렇듯 우연한 요소들의 영향을 줄이기 위해서는 자유로운 시장 체제와 그것을 지지하는 효율성의 원리에 좀 더 근본적인 제약을 가해야 한다. 이 방식은 자연적인 자유의 체계보다는 진전되긴 했지만, 우리가 통제할 수 없는 요소인 재능에 의해서 생기는 소득의 차이를 허용한다는 점에서 미진하다. 재능 역시 우연적 요소에 속하고, 그런 점에서 역사적이고 사회적인 운과 본질적으로 크게 다르지 않다. 또한 이런 재능들이 주변 환경에 의해서 잘 계발되거나 그렇지 않다는 것은 널리 알려진 사실인데, 이런 재능을 어떤 방향으로 계발할지 그리고 그런 의향을 한 개인이 가지게 되는지 그렇지 않은지도 환경에 상당히 의존한다. 따라서 재능이 비슷한 사람들에게 비슷한 삶의 비전을 보장해준다는 것은 실제로 거의 불가능한 일에 가깝다. 우리가 정의에 관한 원리를 확립하는 데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은 바로 이러한 우연적 요소, 운을 분배를 결정하는 요소에서 배제하는 데 있다.


   자연적인 귀족의 지배는 형식적인 기회의 균등 이외에 자연적인 요소를 분배의 방식에서 배제하려는 노력은 없지만
, 재능 있는 사람들이 자신의 능력을 발휘해 이익을 얻는 것은 다른 많은 사람들이 더 나은 상태가 되는지 그렇지 않은지에 의해서 제한된다. 재능있는 사람들이 다른 사람들보다 나은 상태에 있는 것은, 그들의 상태가 개선되지 않을 때 다른 사람들의 상태도 개선되지 않을 때에만 정당화된다. 그러나 이 또한 불안한 것인데, 자연적인 귀족의 지배 역시도 분배에 우연적인 요소가 개입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상호무관심한 합리적인 대표적 개인들이 모여서 사회의 기본적 구조를 결정하려고 할 때 여러 요소들의 분배에서 우연적인 요소를 배제하려고 하는 것이 분명하다면, 정의에 관한 두 번째 원리의 해석은 민주적 평등성이 최선의 선택이다.

 


   13.
민주적 평등성과 차이 원리

 

   민주적 평등성은 공정한 기회 균등과 차이 원리의 결합이다. 차이 원리를 통해서 효율성 원리가 지니는 우연적인 것에 관한 불확정성을 배제하며, 체계 내에서 가장 이점이 적은 사람들(최소수혜자)들의 기대치를 더 낫게 할 때에만 그 체계 안에서 이점을 가지는 사람들의 보다 높은 기대치가 정당화된다.

차이 원리

 

   두 사람 사이의 분배의 방식을 나타내는 그래프를 그렸을 때, 차이 원리는 두 사람의 처지가 모두 다 낫게 해주는 그런 방식이 없다면 평등한 분배의 방식이 없다는 것을 표방하는 원리다. 그렇기 때문에 효율성의 원리를 나타내는 그래프와는 달리, 차이 원리를 만족하는 점들의 집합은 45도 각도의 그래프와 수직, 수평선으로 나타난다(그림 5). 이는 한 사람의 기대치와 처지가 나아지더라도, 다른 한 사람의 기대치와 처지는 별로 나아지지 않는 것을 의미한다. 그림 6을 보자. 만약 X1을 가장 이점이 많은 대표적 사람의 기대치, X2를 가장 이점이 적은 대표적 사람의 기대치라고 했을 때 곡선OPX1의 기대치에 따른 X2의 기대치의 관계 즉 분배의 방식의 집합이다. X1의 기대치가 너무 많을 경우 X2의 기대치는 당연히 떨어질 수 밖에 없기 때문에, 위로 볼록한 곡선 형태를 취하게 된다. 이 곡선의 가장 높은 부분 a는 가장 이점이 적은 대표적 사람의 기대치를 가장 많이 충족시켜주는 방식에서 가장 이점이 많은 대표적 사람들의 기대치이다. , a 지점에서 분배의 방식이 가장 적절하다.


   그림
7은 재화가 일정할 때 가장 이점이 많은 사람과 가장 적은 사람 사이의 관계를 나타내는 그래프다. 이는 차이 원리보다 덜 평등주의적이다. 그리고 이어서 그림 8을 보자. 원점에서 출발한 그래프와 교차하는 직선들은 동일한 재화를 나누는 방식에 관한 그래프다. 이는 고전적 공리주의의 관점에서 그려진 것인데, 이들은 동일한 재화를 나누려는 경우에만 분배의 방식에 관심을 가지기 때문이다. 대개 이점이 많은 사람보다 이점이 적은 사람이 훨씬 많기 때문에, 교차하는 직선의 그래프들은 X1 축에 좀 더 가까워진다. 곡선OP는 여전히 기여도를 나타내는데, 공리주의를 기준으로 하면 재화의 양이 가장 많은 a가 최적인 반면에 차이 원리는 b를 선택한다. 하지만 ab보다 불평등하다.

 

   차이 원리를 설명하기 위해 현실적인 예를 들어보자.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사회와 같은 재산소유민주주의 사회에서는 기업가 집안에서 태어나는 것이 미숙련 노동자 집안에서 태어나는 것보다 더 많은 삶의 비전을 갖게 된다. 이것은 어떻게 정당화되는가? 차이의 원리에 따르면, 기업가의 대표적 개인의 기대치를 줄이면 미숙련 노동자의 대표적 개인의 기대치 또한 줄어들 경우에만, 그리고 이런 차이가 미숙련 노동자의 대표적 개인의 기대치를 늘릴 때에만 정당하다고 여겨진다.


   차이 원리에 관해 이뤄져야 할 몇 가지 논의가 더 있다
. 첫째, 이 원리가 적용된 두 가지 경우를 구분해야 한다. 하나는 가장 이점이 적은 사람들의 기대치가 실제로 극대화된 경우이다. 이 때는 이점이 많은 사람들의 기대치가 바뀌어도 이들의 기대치가 더 나아지지 않는다. 다른 하나는 이점이 많은 사람들의 기대치가 이점이 적은 사람들의 기대치에 공헌하고는 있지만, 최대치는 아닌 경우다. 앞쪽은 완전히 정의로운 사회라고 부를만하고, 뒤쪽은 대체로 정의롭지만 완전히 정의롭진 않다. 이점이 많은 사람들의 기대치가 과도하게 높은 경우, 이것이 감소하면 이점이 적은 사람들의 기대치가 높아질 것이고 따라서 정의롭지 못한 것이 된다. 차이의 원리에서 가장 이상적으로 생각하는 것은 이점이 적은 사람들의 기대치가 극대화되는 것이고, 이에 비추어 볼 때 이점이 많은 사람들의 기대치가 적어도 이점이 적은 사람들의 기대치에 공헌하는 것이 그렇지 않을 때보다 훨씬 더 심각하게 부정의하다. 이는 실제 그 적용에서 빈부간의 심각한 격차로 나타날 것이며, 민주적 평등의 원리마저도 무너뜨린다.


   그렇다면 민주적 평등이라는 해석에서는 효율성의 원리가 무시되고 있는가
? 효율성의 원리를 채택하고 있는 자연적인 자유의 체계와 자유로운 평등 해석에서는 효율성의 원리를 순수하게 절차적인 정의로 제한하고자 한다. 그러나 이들은 여전히 우연적인 것이 정의에 개입할 여지를 많이 남기고 있다. 반면 민주적 평등이라는 해석은 우선 이런 여지가 없다는 것을 우리는 위에서 확인하였다. 또한 효율성의 원리와 양립할 수 있다는 것도 알 수 있다. 차이 원리를 만족시킨다면, 어떤 이들이 그보다 더 손해를 보지 않고 동시에 다른 이들이 그보다 더 이익을 볼 수 있는 다른 방식이 없기 때문이다. 물론 사회의 기본적인 구조가 부정의할 경우 어떤 이들의 기대치를 감소시켜야하는 상황에 맞닥뜨릴 수도 있고 이것은 효율성의 원리와 모순을 일으키지만, 정의는 이에 우선하고 또 완전히 정의롭다면 효율성의 원리 또한 만족하기 때문에 이런 상황을 해결하는 것이 정당화된다.


   둘째
, 차이 원리를 만족시키려면 단지 가장 이점이 적은 대표적 사람들의 기대치만을 극대화하면 된다. 이런 의미에서 차이 원리가 실현되면 모든 사람은 이득을 본다. 하지만 모든 사람이 이득을 본다는 말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 이상의 의미가 있을 수도 있다. 만약 기대치의 불평등이 이어져 연결되어있다면, 즉 가장 이득이 적은 사람들의 기대치를 향상시킨다면 다른 이들의 기대치 또한 잇따라 올라간다면, 가장 이점이 적은 사람들의 기대치만을 극대화하더라도 실제로 많은 다른 대표적 사람들의 기대치도 따라서 나아진다. 또 반대로 이것을 가까운 관계라고 표현하면, 다른 많은 사람들의 기대치의 변화에 따라서 가장 이득이 적은 사람들의 기대치도 변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에 따라서 어떤 사람들은 특정한 불평등이 가져다주는 그에게 돌아오는 이익 자체에서 이득을 얻고, 가장 이점이 적은 사람들은 그 불평등이 기여하는 것에 의해 이득을 얻는다.

연쇄적 연결

 

   단순하게 3명의 대표적 사람을 가정해보자. 가장 이점이 많은 사람 X1, 가장 이점이 적은 사람 X3, 그리고 그 사이에 있는 사람 X2. 그림 9의 곡선은 X1의 기대치의 증가에 따른 X2X3의 기대치의 변화를 나타낸 곡선이다. 차이 원리는 X3이 가장 높은 위치인 a를 선택한다. 연쇄관계는 X3 곡선이 a 오른쪽에서도 올라간다면, X2 곡선 역시 마찬가지로 올라갈 것이라는 점을 의미한다. 하지만 X2가 올라간다고 하더라도 X3은 여전히 떨어질 수도 있다. 마찬가지로, X3이 올라간다고 X2가 반드시 올라가는 것 또한 아니며(그림 10), 이 경우에 연쇄적 연결은 적용되지 않는다.

 

   이런 연관관계에 관한 생각을 통해서 우리는 이점이 많은 사람들의 기여가 사회의 특정한 부분에만 국한되지 않고 전체에 두루 좋은 영향을 미칠 것이라는 점을 알 수 있다. 이렇게 이득이 넓은 범위에 분산된다는 것은 두 가지 측면에서 바람직하다. 첫째는 제도가 모든 사람에게 공통된 어떤 기본적인 이익을 위해 설립되며, 둘째로 그 모든 직책과 직위는 개방된다는 것이다. 이런 경우 정의로운 체제를 향해 나아가는 것은 모든 이의 기대치를 향상시킨다. 물론 이런 가정이 실제와 꼭 들어맞는 일은 드물지만, 적어도 정의로운 사회에 관해 이와 같은 점들이 기대되고 또 일반적으로 정의로운 사회에서 이런 면모들이 보인다는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그러나
, 만약 가장 이점이 많은 사람들의 기대치를 변화시켰을 때, 가장 이점이 적은 사람들 이외의 다른 사람들에게만 이득이 돌아가는 경우는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가? 사회의 기본적 구조를 설정할 때 이런 문제가 생긴다면, 이는 우선순위에서 뒤로 밀리게 된다. 이와 같은 논의를 통해서 정의에 관한 두 번째 원리는 다음과 같이 정리할 수 있다. 사회적이고 경제적인 불평등들은 (a) 가장 이점이 적은 이들에게 가장 큰 이득이 가도록 하고 또한 (b) 공정한 기회의 평등의 조건 아래에서 모두에게 열려있는 공직과 위치가 덧붙여지도록 조정될 것이다.


   이러한 차이 원리와 그것이 나타내는 구상은 정의에 관한 일반적인 생각과 쉽게 조화를 이룬다. 이런 일반적인 생각은 이런 원리를 모든 기본적인 가치에 적용한 결과이며, 이런 서열은 사회의 여건이 좋아질수록 일반적으로 받아들여지는 형식이다.

 



   14.
기회의 공정한 평등과 순수하게 절차적인 정의

 

 

   이 절에서 다루는 내용은 기회의 공정한 평등에 관한 자유주의적 원칙이다. 이 원칙은 두 원칙 전체에 관한 자유주의적 해석, 즉 민주적 평등과 대비되는 것으로서의 자유로운 평등이라는 해석과 구별되어야 하고, 또 여러 직무들이 재능에 따라 결정된다는 식의 능력주의적 사회의 개념도 아니다. 특히 이 원칙은 순수하게 절차적인 정의라는 관념과 깊은 관계를 맺는다.


   우선
, 직무가 평등하게 개방되어야 하는 이유는 효율성 때문이 아니다. 우리는 특정한 개인들에게 특정한 직무를 개방하지 않으면서도 그 직무에 알맞은 재능을 지닌 사람을 뽑을 수 있고, 이 직무에 권한과 이익을 할당함으로써 더 효율적인 제도를 만들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기회의 공정한 평등이라는 해석에서는 이런 일이 일어나서는 안된다고 말한다. 이런 제한은 인간적인 좋은 것의 주요한 형식 가운데 하나인, 사회적인 의무를 수행하는 것에서 오는 자아의 실현을 그 원천에서부터 박탈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렇게 특정한 직무에 권한과 이익을 할당하는 것은 사회의 기본적 구조의 역할이다. 사회의 기본적 구조에 속해있는 사람들은 그 구조가 정한 직무에 따라 행위할 것을 요구받으며, 이를 수행하면 기대치가 생겨난다. 그리고 그에 따라 보상을 받는다. 여기에서 순수하게 절차적인 정의에 관한 관념이 생겨난다. 적절한 기대치에 대한 합리적 보상이 사회의 기본적 구조가 정한 과정에 따라 결정되기 때문이다.


   이런 절차들이
정의롭다고 부를 수 있는 여러 조건에 관해 살펴보도록 하자. 하나는 완전한 절차적 정의다. 몇 사람이 모여서 케이크를 먹을 때, 가장 공평하게 먹는 것은 모두 똑같은 양을 먹는 것이다. 실제로 이렇게 되려면, 아무에게나 케이크를 자르라고 한 뒤 그는 제일 마지막에 남은 조각을 먹으라는 규칙을 만들면 된다. 그렇게 해야 케이크를 자르는 사람이 가장 많은 양을 기대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런 완전한 절차적 정의에서는 공평한 분할(분배)이 무엇인가에 관해 절차에 독립적인 기준이 있으며, 또한 그 기준에 알맞은 결과를 달성하는 절차가 만들어질 수 있다. 다른 하나는 형사 재판이다. 바람직한 재판에서는 피고가 실제로 저지른 일에 대해서, 여러 증거들을 근거로 적절한 판결이 이뤄져야 한다. 그래서 재판에 관한 법이나 이론은 바람직한 재판이 이뤄지는 방법에 관한 연구가 된다. 그러나 여러 이유들 때문에 언제나 바람직한 재판이 이뤄지지는 않는다. 이런 불완전한 절차적 정의에서는 바람직한 결과에 관한 독립적인 기준은 있지만 이것을 완전히 달성할 수 있는 절차를 발견하기가 쉽지 않다.


   마지막으로 순수하게 절차적인 정의는
, 완전한 절차적 정의와 불완전한 절차적 정의와 비교해봤을 때, 바람직한 결과에 관한 독립적인 기준은 없지만 절차의 공정성에 의해서 결과의 바람직함이 담보되는 유형이다. 가장 좋은 사례는 여러 사람이 함께 벌이는 도박이다. 도박판을 벌인 이후 누구에게 얼마만큼의 돈이 가면 좋은가에 관한 기준은 없다. 대신 그 판의 규칙이 있으며, 사람들은 자발적으로 이 판에 참여한다. 그리고 그 판이 결정한 분할의 결과가 바람직한지 또는 그렇지 않은지 여부는 규칙이 특정한 사람에게 유리하게 또는 불리하게 적용되게끔 짜였는가, 누군가가 속임수를 썼는지 등등 분할하는 과정에 속하는 사건들에 의존한다. 그리고 이런 과정이 실제로 공정하게 수행되었을 때, 그 과정을 거쳐 만들어진 분할의 결과는 그것이 어떤 형태라고 하더라도 공정하다고 말할 수 있다. 이런 순수하게 절차적인 정의라는 생각을 사회의 기본적 구조에 적용해보자. 법과 정부가 효율적으로 작용해 시장을 유지하고 자원을 충분히 활용하고 조세제도를 통해 재산과 부를 널리 분배하며 적절한 최소한의 사회적 생활을 보장한다면, 교육을 통해 보장되는 기회의 공정한 평등 그리고 그에 따라 오는 다른 동등한 자유도 보장된다면, 이런 기본적 구조에서 이뤄지는 소득분배는 차등의 원칙을 만족할 것이라고 생각해볼 수 있다.


   민주적 평등이라는 해석에서 공정한 기회의 평등 부분의 역할은 이런 해석이 순수하게 절차적인 정의라는 생각에 충족된다는 것
, 따라서 민주적 평등이 주목하는 분배의 문제에서의 공정성은 구체적인 개인들에게 실제로 얼마만큼이 할당되는가라는 결과에 의존하지 않고 분배가 어떤 과정을 거쳐 발생하는가라는 절차에 의존한다는 것이다. 이 절차, 즉 사람들이 요구하는 재화의 생산과 분배의 절차는 사회의 기본적 구조가 결정한다. 절차의 공정함은 결과의 정의로움을 보증한다. 또한 공정성을 과정과 결부시키면, 공정성을 결과와 결부시켰을 때 발생하는 고려해야 할 사항이 무한히 많다는 부담을 지지 않을 수 있다. 할당의 결과와 관련된 입장에서는, 고립된 개인의 상태에 대한 고려에서 도출되는 각각의 합(만족의 양)이 가장 큰 방식으로 분배하는 것을 목표로 삼는다. 이 상태를 고려하는 방법은 공정한 관찰자의 눈을 빌려 만족의 계산을 한 가지 방식으로 통합하는 것이다. 제도와 절차는 이런 방식에 따라 분배를 달성하는 것에 불가피한 제한을 가하기 때문에, 완전하지 못하며 정의와 거리가 멀다.


   정의의 두 원칙들 사이에는 축차적 서열이 있다고 가정된다
. 민주적 평등이라는 해석의 두 가지 요소 사이에도 축차적 서열이 있다고 가정된다. 우리의 목표는 정의에 관한 정당한 생각을 최대한 단순화된 개념을 조합해 제시하는 것이고, 이것을 분배적 정의의 문제에 적용해보려는 것이다. 이렇게 만들어낸 정의의 원칙들은 구체적으로 발생하는 다양한 사회적 문제들을 해결하기 위한 지혜의 기반이 된다.

 


   15.
기대치들의 기초로서의 일차적인 사회적 좋음들

 

   정의에 관한 두 원칙을 만족시키는 구체적인 제도들을 논의하기 위해서 먼저 고려해야 할 몇 가지 사항이 있다. 그 가운데 하나가 기대치와 그것을 평가하는 방법이다. 이와 관련한 공리주의의 입장을 살펴보고, 정의에 관한 두 원칙과 비교해보자. 만약 우리가 공리주의적인 원칙을 채택할 경우, 모든 기대치들의 합을 가장 크게 해야 한다. 그렇다면 이 원칙은 이 모든 기대치들을 정확히 측정할 수 있어야 하며, 또한 손해와 이익을 비교해 우열을 비교할 수 있도록 상호 비교의 방법도 가지고 있어야 한다. 또 이 방법은 직관이나 편견, 이기심에 의존하지 않아야 한다. 공리의 원칙은 이 문제에 만족스런 해답을 주지 못한다. 또한 우리가 실제로 개인들의 행복을 비교하는 일을 일상적으로 하고 있다고 해도, 이런 일이 실제로 그 비교가 가능하기 때문에 그렇게 할 수 있다는 것을 증명하지는 않는다. 이렇게 상호 비교의 문제에 해답이 없다는 이유로 공리의 원칙에 관한 회의주의를 주장하기도 하는데, 그것 역시 우리가 걸어가야 할 길은 아니다. 우리의 문제는 기대치들을 어떻게 측정할 것인지에 관한 문제다. 그리고 그 그렇게 평가된 기대치들의 총합이 극대화된 것이 정말 원칙이 될만한 주장인지에 관한 문제다.


   차이의 원칙은 기대치들 사이의 비교를 두 가지 방식으로 해결한다
. 첫째, 가장 이점이 적은 사람이 확인되기만 하면, 기대치의 비교에서는 항상 그들이 우선이다. 이것이 서수적(첫째, 둘째, 셋째) 판단이다. 이에 비해 우리가 앞에서 보았던 공리주의는 기수적(하나, , ) 판단을 하는데, 그렇기 때문에 어떤 기준에서 모든 사람들로부터 기대치를 도출할지가 중요한 문제로 대두되는 것이다. 반면 차이의 원칙에서는 대표적 개인들이 사회의 기본적 구조에 관해 평가해보면 대표적 개인들 사이에서 지위의 차이가 생기게 된다. 기대치에 관해 이 이외의 다른 평가의 요소는 필요하지 않다. 만약 대표적 개인의 기대치의 차이가 기본적 구조의 형태에 따라 변한다면, 기본적 구조의 형태를 바꾸어서 특정한 대표적 개인의 기대치를 개선할 수 있다.


   둘째
, 일차적이고 사회적인 좋은 것들로 상호 비교를 단순화한다. 기대치는 대표적 개인들이 기대할 법한 일차적이고 사회적인 좋은 것들에 관한 지표다. 어떤 개인에게 좋은 것들은 그 개인에게 어떤 목표를 향해 나아가는 가장 합리적인 삶의 계획이 무엇인가에 의해 결정된다. 이 계획은 다양한 관심사들을 적절하게 배치함으로써 조화시키고, 목표와 무관하거나 이에 방해가 되는 것들을 배제한다. 그리고 성공적으로 진행될 경우 행복하다. 일차적으로 사회적인 좋은 것들은 위와 같은 개인들이 삶을 계획하는 과정에서 무엇을 계획하든 간에 필요로 하는 것들, 그래서 적게 가지는 것 보다는 많이 가지길 바라는 것들을 뜻한다. 권리, 자유, 기회와 권력, 소득과 부 등이 여기에 해당하는 가장 넓은 범주들이다. 이들은 어떤 목표를 성취하려고 들더라도 필수적이다. 사회의 기본적 구조에 의해 개인들에게 할당된다. 최초의 상황에 있는 개인은 자신에게 주어질 우연적인 것에 관해서는 모른다. 그러나 일차적이고 사회적인 좋은 것들은 모든 구체적인 개인들이 활용할 수 있는 것이기 때문에 최초의 상황 아래에서도 대표적 개인이 자신의 이익을 증진시키기 위해 끌어다 쓸 수 있는 자원이 된다.


   그렇다면 지표는 어떻게 만들 수 있는가
? 이것은 정의에 관한 두 원칙이 표방하는 서열에 따라 만들어진다. 기본적인 자유는 어떤 경우에 있어서도 보장되어야 한다. 일차적이고 사회적인 좋은 것들 가운데서 분배의 대상이 되는 것은 권위와 권력, 소득과 부 등이다. 우리가 중점적으로 고려해야 할 지수는 가장 이점이 적은 이들의 지표다. 보통 이 좋은 것들을 더 많이 할당받을수록 이점이 많아지며, 따라서 이들에 관하 지표를 따로 만들어야 할 일은 없기 때문이다. 이 지표는 가장 이점이 적은 이들의 대표적 개인이 된 상황을 생각해보고, 합리적으로 숙고해봄으로써 사회의 기본적 구조가 일차적이고 사회적인 좋은 것들을 할당해주는 방식 가운데 어떤 것이 가장 이득인지를 떠올려보면 된다.


   지표를 일차적이고 사회적인 좋은 것들과 연관시켜서 정의하는 것은 적절한가
? 어떤 사람들은 계획을 통해 목표를 실현시켰을 때 만족하는 정도와 지표를 연관시켜야 한다고 주장한다. 인간의 행복은 목표를 실현시켰을 때 달성되는 것이지 달성하기 위한 수단을 많이 가지고 있다고 달성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지표는 사회의 기본적 구조와 관련한 것이고, 사회의 기본적 구조는 목표를 실현시켰을 때의 만족도에 관해 말해주는 것이 아무 것도 없기 때문에 지표는 일차적이고 사회적인 좋은 것들에 관한 것이어야 한다. 또한 지표에 관해 이 같은 방식으로 정의하는 것은 목표들 간의 우열을 가리지 않는다. 목표가 무엇인가에 상관없이, 단지 그 계획이 정의에 관한 두 원칙과 양립가능하기만 하면 된다. 이에 따라 일차적이고 사회적인 좋은 것들은 가장 이점이 적은 이들 또는 상대적으로 이점이 적은 이들의 처지를 끌어올릴 수 있을 때에만 이점이 더 많은 자들에게 더 많이 할당된다.


   일차적이고 사회적인 좋은 것들을 지표로 삼는 것은 상호 비교를 위한 객관적인 기준을 세울 때 가장 현실적인 방법인 것으로 보인다
. 목표가 어떤 것인지, 그리고 그 목표를 성취했을 때 얼마나 행복한지를 상호 비교하는 것은 이에 비해 상대적으로 어려우며 거의 불가능에 가깝다. 구체적인 경우에 요구되는 여러 가지 요소들을 이런 식으로 단순화하는 것은 정의에 관한 일종의 철학적인 설명이다. 그리고 이런 설명은 그것이 적용되는 사회의 도덕적 측면의 핵심을 반영한다.

 


   16.
적절한 사회적 위치들

 

   여기에서 정의에 관한 두 원칙을 사회의 기본적 구조에 적용하는 것에 관해 논할 때 그 대상이 되는 것은 대표적 개인이다. 이런 생각은 구체적인 개인들에 관해 고려할 때 참고할만한 적절한 일반적인 관점을 제공해준다. 그러나 모든 개인들이 대표적 개인에 걸맞는 것은 아니다. 그러므로 어떤 종류의 개인이 대표적 개인에 더 가까운지에 관해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만약 이에 관한 기준이 있다면, 특정한 종류의 개인이 사회를 바라보는 관점은 사회의 기본적 구조에 관해 더욱 적절한 관점이 될 것이다. 또한 이 기준을 떠올릴 때 우리는 정의에 관한 두 원칙이 사회의 기본적 구조에 제약을 가하는 취지, 즉 사회의 기본적 구조에 대한 자연적이거나 또는 사회적인 우연성의 영향을 가능한 한 배제하려한다는 것을 염두에 두어야 한다. 그래서 대표적 개인을 설정하는 방식도 이에 부합해야 한다.


   모든 사람은 평등한 시민이라는 위치와 소득과 부의 분배에 따라 정해진 위치 두 가지를 가진다
. 그러므로 만약 대표적 개인을 선정하려 한다면, 그 대표적 개인은 평등한 시민이면서 동시에 소득과 부의 분배에 따라 그가 누리는 생활의 수준을 대표해야 한다. 먼저 평등한 시민의 입장에 관해 살펴보자. 정의에 관한 원칙들 가운데 평등한 자유의 원칙과 기회의 공정한 평등이라는 해석에 의해서 사회 속의 모든 이들에게 기본적인 자유와 권리, 권한이 할당된다. 그러므로 평등한 시민이라는 적절한 일반적인 관점이 설정된다. 이 관점에 의해 고려될 수 있는 사회적인 정책들이 있다. 이들에게는 공통된 이익의 원칙이 적용될 수 있다. 어떤 제도를 이 관점에 의거해 평가하면, 모든 사람이 각각의 목표를 달성하는 데 필요한 조건을 공평하게 보장해주거나 모든 사람이 추구하는 목표를 좀 더 잘 달성하게 해준다면 좋은 제도가 된다. 그러므로 이 관점은 특정한 개인 또는 집단이 아닌 모든 사회의 구성원을 동등하게 고려하고 있기 때문에 적절하다.


   둘째로 소득과 부의 분배에 따라 정해진 위치를 대표하는 개인의 입장을 살펴보자
. 이는 다소 접근하기 어려운 문제다. 단순히 소득과 부의 정도에 따라 이것이 나눠지지는 않는다. 일차적이고 사회적인 좋은 것들은 권위와 권력과 관계가 있기 때문에, 일반적으로 이들을 많이 할당받는 경우 여러 가지 관점에서 상대적 우위에 있는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정의에 관한 두 원칙에서 우선적으로 고려되는 가장 이점이 적은 이들을 규정하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인데, 몇 가지 방식을 생각해볼 수 있다. 낮은 위치에 있다고 간주되는 특정한 사회적 역할을 정하고 그들의 소득과 부의 평균보다 낮은 소득과 부를 가진 사람들을 가장 이점이 적은 이들이라고 여길 수도 있고, 모든 사람들의 소득과 부를 고려해 중간값의 절반 이하(하위 25%)의 소득과 부를 가진 사람들을 그렇게 볼 수도 있다. 어느 쪽이든 가장 이점이 적은 이들의 기대치에 관한 지표를 만드는 데 기초가 될만한 자료들을 모을 수 있게끔 한다. 그러나 이것은 어느 정도는 특수한 자료들에 기초해 규정되는 것이고, 그러므로 어느 정도 한계가 있다. 그러나 원초적 상황에서는 이런 기준 자체를 만드는 일이, 이를 벗어나서 실제로 어떤 기준을 설정해야 이 제도가 유효해질 수 있을지를 고려하는 것보다 더 중요하다.


   공정으로서의 정의라는 생각은 이 두 가지 위치에 기반한 적절한 일반적인 관점을 통해 사회 체계를 평가한다
. 그러나 이 두 가지 이외에도, 변하지 않는 자연적 특성에 의해 이런 관점이 생겨나는 경우도 있다. 성별, 인종, 문화 등 변할 수 없거나 쉽게 변하지 않는 것들이 이런 특성의 사례들이다. 그러나 이런 것들이 일반적인 사회적 위치를 결정하는 데 요소가 될 경우 차이의 원칙이 거의 적용되지 않는다. 그러므로 정의로운 사회에서는 적절한 사회적 위치의 개수가 적다.


   만약 적절한 사회적 위치가 규정된다면
, 구체적인 개인들에게는 이득이 되는 것이라고 할지라도 적절한 위치에서의 관점은 이를 허락하지 않을 수도 있다. 정의에 관한 두 원칙은 적절한 사회적 위치에서 내린 판단을 우선시한다. 이런 우선성은 제멋대로 내려질 가능성이 높은 구체적인 개인들 사이의 판단과 그로 인한 분쟁을 방지하고 질서를 확립하게끔 만들어준다. 게다가 대표적인 개인들의 위치가 위와 같은 방식에 따라 배정된다면, 구체적인 모든 개인들이 언제나 이득을 볼 수는 없다. 그러나 우리는 자신이 살고 있는 사회의 이런 점들에 관해 동의했으므로, 우리는 이런 결과가 생길 수 있다는 것을 감안하고 수용해야 한다. 적절한 사회적인 지위들은 일반적인 관점을 만들고, 이를 사회의 기본적 구조에 적용시킨다. 이렇게 대표적 개인들로 단순화한 사회의 기본적 구조에 관해 탐구하면 우리는 그 사회의 모든 시민들을 적절하게 고려할 수 있게 된다. 모든 구체적인 시민들은 모두 대표적 개인에 속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런 대표적 개인을 설정하고 정의에 관한 두 원칙을 적용함으로써 우리는 실제로 다른 사람들의 복지를 증진시키게 된다.

 


   17.
평등의 경향

 

   이 절에서 설명해야 할 것은 정의에 관한 원칙이 평등주의적이라는 말의 의미, 그리고 기회의 공정한 평등이 능력주의적 경향으로 나아가지 않을 것이라는 점이다.


   첫째
, 차이의 원칙이란 부당한 불평등에 대한 배상(redress)에 중점을 두고 있다. 이 원칙의 취지에 따라 진정한 기회의 평등을 논하자면, 사회의 기본적 제도는 적은 자질과 이점이 적은 사회적 위치 아래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더욱 많은 관심을 가져야 한다. 그러나 정의에 관한 원칙에 배상만 포함되는 것은 아니며, 배상은 다른 것들과 비교된 뒤 우선성이 떨어진다고 여겨질 수도 있다. 이는 우리의 정의감에 거의 항상 포함되는 것을 표현한다는 점에서 중요하다고 볼 수는 있겠지만, 차이의 원칙이 곧 배상은 아니다. 배상은 부당한 불평등을 소득과 부의 할당과 복지로 교정하려는 것이지만, 차이의 원칙은 이런 불평등이 인간적인 삶을 파괴할 수 있다는 의식을 반영하기 때문이다. 차이의 원칙은 사회의 기본적 구조가 만들어낸 시작점 자체를 교정해 기회의 공정한 평등을 이루는 것을 목표로 삼는다. 그래서 차이의 원칙은 배상의 취지를 어느 정도는 실현시켜 준다. 또한 이런 부당한 불평등에서 생기는 이점은 오로지 개인을 위해 사용되어서는 안되며, 반드시 이점이 더 적은 이의 이익을 위해 사용되어야 한다는 것을 명시하고 있다. 이런 의미에서 차이의 원칙은 그런 이점을 우리 모두의 자산으로 간주한다. 불평등이 존재하는 것 자체가 나쁘다고 볼 필요는 없지만, 이런 식으로 처리되지 않으면 이는 아주 부정의한 결과를 낳을 것이라고 추측된다.


   위와 같이 생각해보면
, 우리는 불평등은 부정의하면서 동시에 필연적이기 때문에 제도적 측면에서 생기는 모든 불평등에 반대하는 입장을 반박할 수 있다. 이런 불평등은 정의롭다거나 부정의하다고 평가할 수 없는 자연적 사실이다. 정의는 이런 사실 자체가 아니라 그를 처리하는 방식을 평가할 때 쓸 수 있는 말이다. 그래서 부정의한 방식은 반드시 교정되어야 하고, 또 실제로 그렇게 할 수 있다. 사회의 기본적 제도는 인간 행위의 양식으로서, 바뀔 수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정의에 관한 두 원칙은 정의로운 방식으로 이들을 처리하며, 이 양식에 사람들이 합의한다는 점을 근거로 그런 행위의 양식이 실제로 더 정의롭게 바뀔 수 있다는 것을 시사한다.


   둘째
, 차이의 원칙은 상호성(reciprocality)을 표현한다. 차이의 원칙은 불평등에서 오는 이점이 언제나 이점이 적은 다른 사람의 처지를 끌어올리는 방향으로 사용되어야 한다고 말한다. 또한 이런 불평등이 있을 때보다 없을 때, 이점이 상대적으로 적은 사람들의 처지가 나아지지 않는 경우에만 이런 불평등은 허용된다. 즉 특정한 불평등에서 오는 특정한 이점은 언제나 다른 사람의 이익을 동반한다. 하지만 이점을 가지는 사람들이 더 큰 이익을 추구하는 데 제한이 걸린다는 점을 어떻게 정당화할 수 있을까? 우선은 사회의 기본적 구조가 만들어내고자 하는 협력 체계가 없이는 어떤 사람도 행복한 삶을 영위할 수 없다. 그리고 정의는 이런 협력 체계를 향한 사람들의 자발적 참여 여부를 결정하는 데 중요한 기준이 된다. 즉 더 큰 이익을 추구하는 행위를 제도적으로 보장하는 것이 사회의 협력 체계를 자발적으로 유지하는 데 걸림돌이 된다는 것을 아는 한, 이들은 협력의 체계를 유지하기 위해 더 큰 이익을 추구할 가능성을 포기할 것이다.


   이런 식으로 보상
(desert)이 다른 사람의 이익과 항상 연계되어 이뤄져야 한다는 것은 정당화할 수 있는가? 이는 보상이 언제나 불평등으로 인해 생긴 이점 자체가 아니라 그 이점에 관해 일정하게 보답해주는 협력 체계의 형식에 의지한다는 점을 고려해보면 된다. 또한 이런 보상이 능력(즉 이점)이 있는 사람에게 주어지는 것이 당연하며 그들은 그럴만한 자격이 있다는 주장도 이런 입장에 따라 반박해볼 수 있다. 그들이 가진 이점은 대개 그들 자신들에게 나오지 않고, 유복한 가정환경과 그것을 개발할 수 있었던 기회를 사회가 제공해주었다는 것에서 나온다. 따라서 이런 우연성들을 사회의 기본적 구조에서 배제시키려고 생각하는 한, 이런 종류의 불평등을 근거로 보상을 바라는 것은 원래의 의미에 어긋난다고 볼 수 있다. 이런 의미에서 정의에 관한 두 원칙은 평등주의적이며, 모든 사람들이 받아들일 것이라고 기대할 수 있다.


   셋째
, 차이의 원칙은 박애에 관한 한 해석을 보여준다. 기존에 박애는 정치적 개념이나 제도가 아닌 삶의 태도로 간주되었다. 즉 실천되지 않으면 정치적 제도들이 진정으로 목표하는 바를 성취하지 않는다는 점에서만 중요하게 취급되며, 정치에서 필요한 것이라고 생각되지는 않아왔다. 특히 이 말은 사회가 더욱 더 넓으면 넓어질수록 희미해져 가지길 기대하기 힘든 유대감이나 정념적 측면을 표현하는 말인 것처럼 느껴진다. 그러므로 현대 사회의 정치적 문제에서 이것이 중요한 기준으로 자리잡을 수 없다는 말은 그럴듯하게 들린다. 정의에 관한 두 원칙은 박애의 정신, 자신의 이익이 타인의 손해가 된다면 그것을 바라지 않는다는 것을 제도 속에서 정식화하려는 시도로서, 실제로 사람들이 박애가 실현하고자 하는 형태의 행위를 하게끔 만드는 원칙으로 작동한다. 차이의 원칙에 의해서 나의 이익이 다른 사람의 손해가 될 때 그런 이익을 바라지 않을 것이 요구되기 때문이다. 자유, 평등, 박애라는 민주주의에 관한 상식적인 세 가지 견해는 이와 같이 정의에 관한 두 원칙 속에서 구현되어 있다.


   이처럼 정의에 관한 두 원칙을 민주적 평등으로 해석하는 것은 능력주의적 사회를 지향하지 않는다
. 능력주의적 사회에서는 소득과 부의 할당 또는 보상의 기준을 재능의 소유 여부에 두며, 기회의 평등은 이런 능력들이 보여줄 합리적으로 기대할만한 발전이나 번영의 수단이 된다. 이런 제도는 사람들을 분화시키고, 그 격차를 점점 더 벌려놓는다. 따라서 능력주의적 사회에서 기회의 평등은 실제로 능력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의 현재 위치를 정당화하는 구실로만 쓰일 수 있을 뿐이다. 반면 민주적 평등이라는 해석은 모든 사람들이 일차적이고 사회적인 가치를 가지고서 각자의 사회적 역할을 할 것을 권장하며, 불평등에 따른 서열(hierachy)이 생겨나는 것을 가능한 한 제한한다.


   여기까지 다룬 정의의 문제가 같은 세대 사이에 생겨나는 공시적 불평등에 관한 것이었다면
, 이런 원칙이 통시적으로도 적용될 수 있을까? 일반적으로 타고난 자질은 어쩔 수 없는 자연적 사실이지만, 그것이 실제 능력으로 얼마나 발현되는지는 그 사회가 정의로운 정도와 관련이 있다. 또한 대체로 다른 사람의 능력을 감소시키려 드는 제도는 가장 이점이 적은 이들의 이익 또한 감소시킨다. 그래서 차이의 원칙은 이런 불평등을 받아들이는 대신 여기에서 생겨나는 이점이 사회적 자산이라는 점을 강조하는 것이다. 물론 이것은 그런 이점을 가진 본인에게도 이득이다. 따라서 지금의 사람들이 이런 타고난 자질을 최대한 보존하고 이 수준이 떨어지지 않도록 하려고 의도한다면, 그에 합당한 조치들을 취해야 한다. 그러나 이 조치들은 역시 지금 세대의 사람들이 합의할만한 내용이어야 한다. 이 과정이 계속 반복되면 우리는 모든 사람의 자질과 능력이 가장 잘 발휘되는 사회가 올 것이라고 예측할 수 있다.

 



   18.
개인들을 위한 원칙들: 공정성의 원칙

 

   정의에 관한 원칙을 탐구할 때 사회의 기본적 구조만이 고려사항에 들어가지는 않는다. 그 가운데는 개인에 관한 것도 있으며, 국제법에 관한 것도 있다. 그리고 이들이 충돌할 때 어떤 것을 먼저 고려할 것인지에 관한 우선성의 원칙도 있다. 여기에서는 개인들에 관한 원칙을 거칠고 간략하게나마 다뤄볼 것이다.


   우선성의 원칙은 도식을 통해 나타내볼 수 있다
. 이 계통은 연역관계를 뜻하는 것은 아니고, 정당성에 관한 여러 원칙들을 세부적으로 분류한 것이다. 그리고 로마 숫자는 원초적 입장에서 받아들이게 될 원칙의 순서를 표시한 것이다. 이 순서에서 개인에 대한 요구사항은 허용사항보다 우선하는데, 이는 사회의 기본적 구조가 요구사항을 규정한다는 점을 반영한 것이다. 사회 체계와 제도가 다른 것들에 비해 우선하는 것은, 무엇이 정의롭다고 이야기할 때 그렇게 말할만한 기준이 대체로 사회적인 것이라는 정의에 관한 우리의 감각을 반영하고 있다.


   정의에 관한 생각을 포함해 정당성에 관한 한 이론을 만들려 할 때
, 우리는 정당성에 관한 여러 개념들을 정의할 원칙들을 채택한다. 그리고 이 개념들은 서로 관계를 맺는다. 이런 개념들에 관한 원칙이 정당하다는 것을 보여주려면, 그 원칙들이 원초적 상황에 있는 대표적 개인들이 선택할 법 하다는 것을 증명하면 된다. 이것은 옳음(right)에 대한 의미론적, 맥락적 분석이 아니라 그것을 해석하는 관점을 바꾸는 것이다. 이 과정에서 우리는 필수적인 것만 고려하고, 가능한 한 불확정성을 피하려고 노력하는 데 중점을 둔다. 따라서 이는 일종의 해명이고, 불확실한 부분을 제거해나가는 작업이 될 것이다. 만약 공정성으로서의 정의와 정당성이라는 이론이 우리의 일반적인 정의에 관한 생각과 일치하거나 거의 일치하는 것으로 드러나면, 우리는 이제 이 이론들을 일상적인 언어로 바꿔서 일상적인 의미에서의 정의와 정당성에 관해 말할 수 있게 될 것이다.


   개인에 관한 원칙 가운데 하나는 공정성이다
. 만약 어떤 제도가 정의에 관한 두 원칙을 만족시키며 동시에 사람들이 그런 조정을 자발적으로 받아들이고 그런 제도들이 제공하는 기회를 이용하려고 한다면, 사람들은 제도가 요구하는 바를 수행해야 한다. 달리 표현하면, 어떤 사람들이 전체의 이익을 증가시키는 데 필요한 방식으로 자유를 제한당한다면, 그 사람들은 다른 모든 이들에 대해 그러한 방식을 따르라고 말할 수 있는 권리를 가진다는 것이다. 정의에 관한 원칙은 어떤 제도의 요구사항들이 정당한 직무인지를 판별하게 해주고, 사람들은 이런 것들을 수행하지 않는 한 협력의 체계로부터 생겨나는 이득을 기대할 수 없다.


   공정성의 원칙은 두 부분으로 이뤄져있다
. 첫째는 제도의 정의로움에 관련한 부분이다. 이를 충족시키지 못한 제도는 사람들에게 사회적 의무를 요구할 수 없다. 따라서 사회적 의무를 요구할 수 있으려면 제도가 어느 정도 정의로워야 한다. 그러므로 계약에 의해 생겨나는 사회적 의무라는 개념이 억압적 체제에 대한 무조건적 복종을 요구하는 개념이 될 것이라는 비판은 정의에 관한 원칙과 사회계약론에 대한 비판이 될 수 없다. 둘째는 사회적 의무의 자발성에 관련한 부분이다. 사회적 책무는 그것이 명시적이 되었든 묵시적이 되었든, 이익에 의한 것이든 자발적 연합에 의해서만 만들어진다. 또 그 내용은 언제나 제도에 의해 결정된다. 그리고 그런 내용을 이행할 의무는 그 연합을 유지하는 사람들 모두가 짊어진다.

 


   19.
개인들을 위한 원칙들: 자연적인 의무들

 

   사회적 의무와 대비되는 자연적 의무들이 있다. 이는 통일된 방식으로 정리하기가 어렵다. 분류를 하자면 넓게 보아서 적극적인 것과 소극적인 것을 나눠볼 수 있다. 그렇다면 이 둘 가운데서 무엇이 먼저 고려되어야 하는지를 정해야 하는데, 소극적인 자연적 의무들을 먼저 고려해야 한다는 결론이 나올 것으로 짐작된다.


   사회적 의무와 대비되는 자연적 의무의 특징은 두 가지이다
. 첫째, 자연적 의무는 자발적인 연합에 의해 구성되는 것이 아니며, 이들을 요구하기 위해 어떤 제도가 선행할 필요도 없다는 점이다. 따라서 사람이라면 누구나 자연적 의무를 이행할 것을 요구받는다고 보아야 옳다. 예를 들어 살인하지 않을 것을 제도적으로 요구받지 않았다는 이유로 살인행위를 변호하는 것은 어딘가 어색해 보인다. 둘째, 자연적 의무는 어떤 사람이 사회의 기본적 구조가 규정한 역할의 차이 혹은 그것이 허용한 불평등한 관계들 가운데 어디에 소속되어 있는지와 무관하게 적용된다. 즉 동등한 도덕적 인격인 인간 일반에게 해당된다.


   이런 특징을 공정으로서의 정의와 연관시켜서 생각해봤을 때
, 정의로운 제도를 지지하고 따르는 것은 모든 인간이 지니는 의무가 된다. 현재 제도가 정의롭다면 지켜야 하고, 막대한 희생이 뒤따르지 않는 한 현재의 제도를 더 정의롭게 바꿀 수 있다면 바꿔야 한다. 사람들은 이런 식으로 사회적 의무와 무관하게 제도의 구속을 받기도 하며, 그래서 자연적 의무는 사회적 의무에 대해 독립적이다. 이런 원칙은 원초적 입장에 있는 사람들도 선택할만한 것들이며, 특정한 제한이 부차적으로 가해지지 않는 한 무조건적으로 적용된다. 사회적 의무로서의 공정성의 원칙과 자연적 의무로서의 정의는 사람들이 정의로운 제도에 소속되는 두 가지 방식이다. 특히 공정성의 원칙은 차이의 원칙에 의해서 이점을 더 많이 할당받은 사람들에게 더 강하게 적용된다. 즉 제도 안에서 보다 많은 이득을 보는 사람은 그 제도가 가능한 한 정의로워야 한다는 사회적 의무를 지니게 된다.


   이제 개인에 관한 원칙 가운데서 허용사항이 남았다. 정의와 정당성에 관한 원칙을 논할 때에 이 부분은 비중이 요구사항에 비해서 덜하다. 이는 허용사항의 내용들을 우리가 행해도 되고 행하지 않아도 되는 행위들이며, 따라서 정의상 자연적이거나 사회적인 의무들을 위반하지 않는 행위들로 구성되기 때문이다. 이런 행위들의 도덕적 지위는 자연적, 사회적 의무와의 관계 속에서 규정된다. 이런 도덕적 지위가 높은 행위들 가운데는 의무 이상을 하는 행위들이 있다. 이런 행위는 좋은 일이지만, 사람들이 반드시 그것을 해야한다고 요구받지는 않는다. 그러므로 이것은 일차적인 중요성을 가지는 주제가 아니다.

 

덧댐. 위쪽에 등장하는 박스의 그래프들은 인터넷에 찾아보시면 나올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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