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리학특강 발제. 아담 스미스, 『도덕감정론』 Part 6의 Section 1,2 요약. 군데군데 틀린 해석으로 지적받은 부분이 있으나 수정하지 못했습니다>

 

 

  이 장에서는 개인들의 성격에 관해 다룬다. 처음에는 개인 자신의 행복에 영향을 미치는 측면에서, 그리고 그 다음에는 다른 사람들에게 영향을 미치는 측면에서 다룬다.

 

 

 

Section 1 자기 자신의 행복에 영향을 미치는 덕, 신중에 관해

 

 

  (1-5) 모든 사람들에게 첫째로 고려되는 신경씀(care)의 대상은 몸의 보존과 그 건강한 상태를 유지하는 것이다. 그래서 자연은 우리에게 이런 대상들을 해치는 것들로부터 멀어지는 방법을 우선적으로 가르친다. 또한 사람들은 자라나면서 몸의 보존과 건강한 상태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조심스러움(foresight)이 필수적이라는 것을 배운다. 이런 신경씀과 조심스러움을 몸에 익히면서 사람들은 조건(fortune)을 유지하고 증가시키는 기술들을 익힌다. 그리고 어떤 이들은 좋은 조건(advantage of fortune)을 가지고 있기도 한데, 명예(credit)나 지위(rank) 에 대한 존중은 이런 좋은 조건의 정도의 차이에 기반을 둔 것으로 보인다. 이런 존중의 대상이 되려는 욕망은 우리의 모든 욕망들 중에서 가장 강하다. 몸에 필요한 것이나 몸을 편리하게 해주는 것을 향한 욕망은 이런 존중의 대상이 되려는 욕망에 비하면 사소한 것으로 보인다. 지위나 명예 등은 특정한 행동이나 그 행동이 사람들의 마음에 불러일으키는 긍정적인 감정들(신뢰, 경의, 선한 의지)에 달려있다. 신중의 덕은 이러한 건강함, 조건, 지위와 명예 등에 신경쓰는 태도에 관한 표현이다.

 

  (6-10) 일반적으로 안좋다가 좋아질 때 느끼는 기쁨보다 좋다가 안좋아질 때 느끼는 슬픔이 훨씬 크다. 그러므로 신중의 덕이 추구하는 가장 주요한 상태는 현상유지(security)다. 신중한 사람은 지금 우리가 가지고 있는 행복함을 보존하고, 적어도 손해가 나지 않게끔 행동하는 특성을 가지고 있다. 진짜 지식과 기술, 근면성실함(assiduity and industry), 구두쇠(parsimony)에 가까운 절약(frugality) 등이 여기에 포함된다. 또한 신중한 사람의 행동거지는 진지하고 진심을 다해(earnestly) 공부하고, 진정성있고(genuine), 속이거나 현란하게 자신을 과시하지 않는다. 화법이 간결하고 겸손하며, 사람들의 이목을 끌고 싶어하지 않는다. 자기들의 업적을 자랑하고 다른 집단을 비난하는 사람들 사이에 들어가고 싶어하지 않고, 간혹 그들과 교류를 하더라도 그것은 그들로부터 손해를 입지 않기 위한 자기방어의 차원에서 하는 행동이다. 신중한 사람의 말은 신의성실하고(sincere), 거짓말 한 것이 들켜 불명예를 입을까봐 두려워한다. 그러나 진실을 말하는 것이 적절하지 않은 상황에서는 침묵을 지킨다. 신중한 사람은 다른 사람들과 잔잔하지만 오래 가는 우정을 맺고, 젊은 날에 맺을만한 열정적이고 즉흥적인 관계는 좋아하지 않는다. 그래서 사회성이 좋지는 않다. 재미있는 수다를 떨거나 놀기 좋아하는 모임(convivial societies)에는 가지 않는다. 이들이 그의 삶의 방식인 절제나 근면함을 방해할 수 있기 때문이다. 신중한 사람은 다른 사람의 귀에 거슬리지 않는 말을 하고, 불쾌하고 무례한 것을 싫어한다. 자신을 낮추길 좋아하고, 사회에서 통용되는 예법과 의식들을 존중한다. 이런 사람들은 탁월한 능력으로 큰 업적을 성취한 위인들보다도 다른 사람들에게 더 좋은 모범이 된다(보통 위인들을 닮으려는 사람들은 능력은 닮지 않고 나쁜 것만 배우는 경향이 있다).

 

  (11-13) 신중한 사람은 근면하고 검소하게 살면서 미래에 얻을 더 길고 지속적인 즐거움을 위해 현재의 여유와 즐거움을 희생한다. 이런 성향은 공정한 관찰자(가슴이 따뜻한 사람, the man within the breast)의 완전한 시인의 대상이다. 공정한 관찰자는(신중한 사람은) 미래를 위해 현재를 감내한다는 둥의 태도를 취하지 않고, 현재와 미래를 같은 거리를 두고 관찰한다. 아마도 사람들이 현재의 여유와 즐거움에 더 큰 가치를 부여하기 때문에 근면성실하지 못하다고 생각하는 것 같고, 실제로도 그렇다. 신중한 사람은 이렇게 살아가면서 수입이 꾸준히 늘어나고, 조금씩 근면성실의 강제 그리고 여유와 즐거움의 부족으로부터 해방된다. 그는 힘들었다가 즐거워진 것이기 때문에, 힘들지 않다가 즐거워진 (근면성실하지 않은 다른 사람들에 비해) 두 배의 만족을 느낀다. 또한 이렇게 얻은 온전한 평온(secure tranquillity)을 잃어버릴 수도 있는 새로운 일이나 모험을(enterprises and adventures) 벌이지 않고, 만약 그렇다고 하더라도 아주 주도면밀하게 진행해서 자신의 상태가 안좋아지지 않도록 한다. 또한 신중한 사람은 다른 사람들에게 부과하거나 강요하지 않는다. 그래서 모르는 분야에 관해 떠들고 다니는 사람(buster)도, 오지랖 넓은 사람(meddler)도, 상담가나 충고자도 아니다. 다른 사람들을 지배하는 영향력을 가진다고 잘난 척하지도 않고, 당파와 파벌을 싫어하고, 야망이 없다. 공적인 일에 종사하더라도 자신이나 자기 일파(country)를 위해 일하지 않는다. 그는 실제로 성취할 수 있는 위대한 업적보다도 평온함을 선호한다.

 

  (14-16) 그러나 신중함은 이렇게 자신의 상황에 관해서만 신경쓰는 경우에는 가질만하고 고귀한 것으로 여겨지지 않는다. 신중함은 덕과도 함께일 수 있다. 개인을 넘어서서 더 고귀한 목적이나 덕(용맹함, 관용, 정의의 규칙에 대한 고려와 존중, 자기절제 등)과 신중함이 함께할 때, 그 상황을 신중함이라고 부르는 것은 아주 적절하다. 이렇게 되려면 완전한 적절함에 맞춘 행동을 하는 습관과, 도덕적인 측면에 대해 세심하게 고려하는 지성이 필요하다. 반면 신중함은 악덕과 함께 할 수도 있다. 완전범죄를 저지른 악당은 이 세계에서는 죄를 면한다. 이런 일이 빈번한 모임(society)에서는 아주 끔찍한 행위들이 친숙해진다. 예를 들어, 이탈리아의 체자레 보르지아는 이웃한 나라의 왕자들을 거짓으로 초대해서 죽였고, 마키아벨리는 왕자들의 아둔함을 탓하는 글을 남겼다. 게다가 그와 비슷하게 행동하는 것이 사회에 더 큰 해악을 끼침에도 불구하고, 신중함과 결합된 악덕은 간혹 그런 일을 저지른 위인들에 의해서 이런저런 칭찬을 받는 반면, 정반대로 신중함이 동반되지 않은 이러한 행동들은 아주 비열하고 천박한 것으로 여겨지고, 보통 그 죄를 이 세계에서 치른다.

 

  그러므로, 신중함은 덕과 묶였을 때 가장 고귀하게 여겨지고, 신중하지 않음은 다른 악덕들과 묶일 때 가장 천하게 여겨진다.

 

 

 

Section 2 다른 사람의 행복에 영향을 미칠 수 있는 개인의 성격에 관해

 

 

  서론

 

 

  (1-3) 모든 개인은 다른 사람에게 해를 입히거나 이롭게 하거나 둘 중에 하나의 측면에서 영향을 미친다. 불의에 대한 적절한 resentment는 공정한 관찰자의 시각에서 우리의 이웃의 행복을 우리가 상처내고 방해하는 것을 모든 측면에서 정당화할 수 있는 유일한 동기다. 다른 동기에서 그런 행동을 했다면 그것은 정의의 규칙을 위반한 것이다. 그래서 모든 주(state)나 커먼웰스(commonwealth)의 지혜는 이런 피해로부터 자신의 권위 아래 놓여있는 사람들을 보호하기 위해 규칙들을 만드는데, 이것이 민법과 형법(civil and criminal law)이다. 물론 법 없이도 살 것 같은 사람들도 있지만, 이들 또한 종종 덕을 동반하는 행동에 실패하기도 한다. 그러므로 자연은 우리가 선행을 하도록 방향을 설정해놓고, 그것을 인간들이 활용하는 상황을 기획했다. 이런 역할을 하는 것이 질서(order)이다. 질서는 개인들 사이의 질서와 모임들(society) 사이의 질서로 설명할 수 있다.

 

 

 

Chap 1 자연에 의해서 개인들이 우리의 신경씀과 주의에 들어맞게 되는 질서에 관해

 

 

  (1-4) 모든 사람은 우선 자기 자신에게 가장 먼저 신경쓴다. 우리의 모습은 다른 사람들보다도 내 자신에 대해 가장 잘 알게끔 만들어져있다. 그래서 자신의 기쁨과 아픔에 대한 감각이 본래적이고, 다른 사람의 기쁨과 아픔에 대한 감각은 반영이거나 상상이다. 자기 자신을 제외하면 같은 집에 사는 가족들이 애정(affection)의 대상이 된다. 가족들의 행동은 나의 행복과 불행에 영향을 많이 미치기 때문에, 가족들이 행복하도록 신경쓰는 것은 나의 행복에도 도움이 된다는 점에서 이것은 매우 자연스러운 일이다. 가족들 사이의 애정 가운데서도 아이가 부모에게 느끼는 애정보다 부모가 아이에게 느끼는 애정이 더 크다. 이것은 아이의 연약함 때문에 아이의 생사와 성장이 부모에게 달려있기 때문이다. 아이는 늙은이보다 기대되는 바가 많다. 그래서 아이의 죽음은 매우 슬프지만 늙은이의 죽음은 상대적으로 덜 슬프다. 그 다음에는 어렸을 때부터 함께 지낸 형제자매 사이의 우정인데, 이들은 마음이 가장 연약한 시기에 서로 공감하는 관계로 맺어지기 때문이다. 따라서 자연스럽게 이런 가족들 사이에는 서로를 도와줘야 할 의무감이 지워지고, 이 의무감은 상호공감을 더욱 빈번하고 습관적으로 만든다.

 

  (5-7) 형제자매의 아이들은 그들의 부모인 형제자매들 사이에 머무르며 자연스럽게 교류하고 좋은 유대관계(agreement)를 맺는다. 그러나 이들의 유대관계는 그들의 부모인 형제자매들의 유대관계에 의존적이다. 그러나 이들은 한 가족의 구성원은 아니기 때문에, 서로에 대한 중요성은 형제자매들보다 훨씬 덜하다. 그래서 보다 덜 교류하는 친척은 다른 가족들에 비해 덜 중요하다. 거리가 멀면 애정도 그만큼 낮아진다. 이런 측면에서 볼 때, 애정은 습관적인 공감 이외의 다른 것이 아니다. 특정한 상황 속에서 상호공감은 자연스럽게 만들어지고, 이것이 습관화되어 애정으로 자리잡는다. 그리고 우리는 그런 특정한 상황 속에서는 애정이 만들어져야 한다고 기대한다. 그래서 아이를 보고도 무덤덤한 부모, 부모를 존경하지 않는 아이는 증오와 공포의 대상처럼 보인다.

 

  (8-11) 이런 사례들이 분명 존재하긴 하지만, 특정한 상황에서 상호공감이 만들어져야 한다는 일반원칙에 대한 존중은 그런 애정과 비슷한 감정을 만들어낸다. 부모와 자식 또는 형제자매들이 어렸을 때부터 오랫동안 떨어져 지내는 어떤 경우, 같은 집에서 사는 만큼의 애정은 만들어지지 않는다. 그러나 이 가족들은 서로에 대해 무관심하지는 않으며, 같은 집에서 같은 가족구성원으로서 같이 살아가길 바란다. 때로는 보고 싶기도 하다. 다른 사람들로부터 좋은 소식을 들으면 기분이 좋아진다. 그래서 그들이 만났을 때는 이런 애정을 강하게 표현하기도 한다. 그러나 같이 만나서 오랫동안 지내다보면, 기대에 부응하지 못하는 모습을 발견하기도 하고, 같이 살아가던 사람들과 비교했을 때 상대적으로 부족한 공감능력 때문에 실망하기도 한다. 그러므로 이들은 곧 서로에 대한 애정이 식을 것이고, 일반적으로 가족들 사이에서 생겨나는 애정에서 찾을 수 있는 행복함은 거의 즐길 수 없게 된다. 그렇다고 하더라도 이런 일반적인 규칙 자체를 존중하지 않는 것은 안되는데, 그것은 가족들 사이를 완전히 갈라놓기 때문이다.

 

  이런 측면에서 봤을 때, 아이들을 멀리 떨어져있는 학교나 대학, 수녀원이나 신부수업학교에서 가르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 이런 제도는 가족적인 도덕(domestic morals)과 가족적인 행복(domestic happiness)을 해친다. 가족들과 함께 부대끼며 살아가는 것은 아이의 공감능력을 키운다. 학교를 가야한다면 통학을 시키는 것이 좋다. 어떤 공공교육도, 그것을 통해 잃어버리는 가족적인 도덕과 행복을 같거나 비슷한 정도로 보충해줄 수는 없다. 가정적인 교육은 자연의 제도이고, 공공교육은 인간의 고안물이다. 어느 것이 더 현명한지는 두 말할 나위가 없다. 또한 이른바 ‘핏줄의 힘’이라고 불리는 것이 비극이나 소설에서 중요한 장치로 쓰이지만, 이런 것은 비극이나 소설 밖의 세계에서는 존재하지 않는다. 이들은 같은 집에서 함께 자라나지 않았는데도 신비한 힘에 이끌려 서로를 알아보는 것으로 가정되고 있다.

 

  (12-16) 시골지방(pastoral countries)과 법의 지배가 제대로 자리잡지 못한 지방(country)에서는 같은 가문(family)의 모든 후손들이 서로 이웃 관계를 맺으며 살아간다. 이들은 스스로를 공동으로 방어한다. 의견일치와 분열에 따라 유대가 강해지기도 하고, 깨지기도 한다. 또한 다른 어떤 집단의 구성원들과의 교류보다 자신들끼리의 교류가 훨씬 더 빈번하다. 반면 법의 지배가 제대로 자리잡은 것처럼 보이는 상업적인 지방(commercial countries)에서는 후손들이 모여 살아야 할 동기가 없으므로 뿔뿔이 흩어진다. 교류에 관한 기억도 곧 잊혀진다. 이런 상태는 문명화가 진행될수록 심해진다. 이런 지역에서는, 잘 배치된 사람들 사이에서 우정이 만들어진다. 이는 가족들 사이에 있는 애정과는 같지 않다. 우정의 상대는 직장동료들, 거래처들이고, 이들은 또 다른 형제들이라고 불린다. 이런 관계는 necessitudo라는 라틴어의 의미에 함축되어있다.

 

  (18) 이렇게 생겨난 어떤 우정들 가운데서는, 좋은 행동들에 관한 경의와 시인에 토대를 두고 있는 것들도 있다. 이런 우정은 자연적인 공감에서부터 우러나오는 것이다. 덕있는 사람들은 그 행동들 속에서 완전한 신뢰감이 느껴진다. 이런 의미에서 악덕은 언제나 변덕스럽고, 오직 덕만이 규칙적이고 질서가 있다. 또한 이런 덕에 대한 사랑에 기반한 애정을 가지고 있는 것도 덕있는 것이다. 이렇게 맺어진 덕있는 사람들 사이의 우정은, 둘 이상의 관계를 맺는다는 이유에서 생기는 질투나 취미, 가벼운 성격적 특성에 의해 맺어진 우정과는 다르다.

 

  (19) 우정을 통해 친절함이 베풀어진 대상은, 자연에 의해서 자신에게 자선(친절함)을 베푼 사람을 친절함의 특별한 대상으로 삼도록 만들어졌다. 따라서 그 사람은 자선을 베푼 사람에게 되갚거나 또는 고마움을 표시한다. 그들이 느끼는 고마움이 자선에 상응하지는 않지만, 공정한 관찰자의 입장에서 느끼는 고마움은 자선에 상응한다. 그런 고마움을 느끼지 못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에게 자선을 베푼 사람은 오히려 그 덕있음이 배가되어 보인다. 자선이나 친절함이 베풀어지면 그것은 언제나 여러 다시 고마움 등의 형태로 돌아오고, 그래서 ‘친절함은 친절함을 낳는다.’고 말할 수 있다.

 

  (20) 이와 같이 친절함이 확대되는 과정에서, 우리가 실제로 우정을 맺고 있지는 않지만 그 대상이 될 수 있는 사람들의 구분이 생겨난다. 이 가운데, 지위의 구분과 모임(society)의 질서는 운이 좋은 사람, 부유한 사람, 권력을 가진 사람 등에 대한 존중에 토대를 둔다. 인간의 비참함을 줄이는 것은 아주 불운한 사람, 가난한 사람, 가엾은 사람 등에 대한 동정심에 토대를 둔다. 흔히 도덕주의자들은 동정심과 자선을 강조한다. 그리고 지위나 질서에 대한 존중을 경계하라고 말한다. 하지만 이들은 옳지 않다. 자연은 지혜나 덕 같은 보이지 않는 것들보다는 태생과 조건 등 명백하게 보이는 것에 지위나 질서가 토대를 두어야 그것이 더욱 확고해질 것이라고 생각했다. 지혜나 덕 같은 것들은 아주 세심한 안목을 가진 사람들에게도 잘 보이지 않고 틀리게 보일 가능성이 있지만, 태생이나 조건, 환경 등은 그렇지 않기 때문에 더욱 확고한 토대 역할을 하기에 더욱 적합해보인다.

 

  (21) 그러므로 동등하게 덕있는 사람을 바라볼 때, 평범한 사람보다 위대한 사람을 더 우러러보게 되고 그에 관심을 더 가지게 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그 사람을 돋보이게 하는 요인이 평범한 사람에 비해서 위대한 사람이 더 많은데, 이 요인이 많으면 그 사람의 덕 또한 증가할 것이기 때문이다. 비극이나 소설에서 가장 재미있는 주제가 이런 위대한 사람들이 겪는 고난인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다.

 

  (22) 서로 다른 애정들이 다른 방식으로 나타날 때, 우리가 규칙에 의지해서 결정을 내린다는 것은 힘든 일로 보인다. 이들은 공정한 관찰자의 판단에 맡겨야 한다. 우리는 이미 정해진 규칙에 따라 판단을 내리기보다는, 우리 스스로 판단을 내려야 한다.

 

 

 

Chap 2 자연에 의해서 사회(모임)들이 우리의 자선에 들어맞게 되는(recommand) 그런 질서에 관하여

 

 

  (1-3) 개인들에게 해당하는 질서와 동일한 원리가 사회들에 해당하는 질서에도 적용이 된다. 우리가 태어나고 자라고 그의 보호를 받고 있는 주(state)나 영지(sovereign)는, 우리의 행동이 그의 행복과 불행에 많은 영향을 미친다. 또한 우리와 우리 주변의 사람들의 번영과 행복은 주나 영지의 번영과 행복에 어느 정도 의지한다. 그러므로 이들은 자연스럽게 애정의 대상이 된다. 다른 모임들과 비교했을 때 어떤 면에서 앞서고 있으면 여기에 속한 사람들은 그것을 자랑거리로 여기고, 반대로 뒤처지고 있으면 부끄럽다고 여긴다. 우리는 우리와 소속이 같은 위인들을 더욱 편파적으로 좋아한다. 이런 특성들 때문에, 애국자들은 가장 확실하게 적절한 행위를 하는 것으로 보인다. 그는 공평한 관찰자의 시각에서 허용될법한 것들에 헌신한다. 게다가 일반적으로 이런 행동을 하는 것은 쉽지 않기 때문에, 애국자들은 감탄, 찬사, 경이의 대상이 된다. 반면 적과 내통하는 반역자들은 자기 자신만을 고려하고 자신과 함께 사는 사람들에 대해 고려하지 않은 것처럼 보이기 때문에 혐오의 대상이 된다.

 

  이런 특성으로 인해 우리 종족(our own nations)을 사랑하는 것은 다른 종족의 번영과 세력확대를 질투하기도 한다. 이들 사이에는 정의가 거의 존재하지 않으며, 있다고 해도 가장될(pretend) 뿐이다. 그래서 이들이 성장하기 전에 먼저 진압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이런 생각은 우리 종족에 대한 가장 고귀한 사랑으로부터 비롯되기도 하는데, 로마의 대 카토의 연설문 마지막 문장이 좋은 예다. 이것은 다른 종족에 대한 광기를 일으키는, 강력하지만 조잡한 애국주의의 표현이다. 반면 아버지 스키피오(스키피오 나시카)의 연설문 마지막 문장은 적의 번영에 반감이 적은, 확장되고 깨어있는 생각의 자유로운 표현이다. 잉글랜드와 프랑스의 사람들도 서로 이런 관계에 놓여있다. 그러나 이들은 서로의 군사력 증강에만 신경을 쓰고, 내적인 행복과 번영, 수확, 매뉴팩처들의 개선, 상업 규모과 치안력과 항구도시와 항만시설의 증가, 모든 인문학(liberal arts)과 분과학문의 연마 등에 경쟁심을 느낄 경우 품위가 떨어진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오히려 이런 것들이 진정한 경쟁의 대상이며, 인류에 대한 사랑으로 이런 것들을 진작시켜야 한다.

 

  (4-6) 자신의 지역(country)을 사랑하는 것은 인류에 대한 사랑과 독립적이며, 조화롭지 않을 때도 있다. 만약 이 두 가지고 조화롭다면, 프랑스는 영연방에 비해 인구가 3배 정도 많으므로, 인류 전체의 측면에서는 프랑스의 번영이 더욱 높게 평가를 받아야한다. 그러나 영연방의 시민들은 그렇게 하지 않는다. 우리는 인류 전체의 측면이 아니라, 그것과 별개로 자신의 지역을 생각한다. 이것은 개인들이 어떻게 하면 인류 전체의 행복을 더 잘 진작시킬 수 있을까에 관한 자연의 계획이다. 그리고 이러한 종족적인 편견과 적대감은 바로 이웃한 종족 너머로는 거의 확장되지 않는다. 그래서 잉글랜드 사람들에게 프랑스는 자연적인(natural)으로 간주되지만, 중국이나 일본 사람들은 그렇지 않다. 그래서 일반적으로 가장 넓은 범위의 공적인 자비로움은 이런 국가들 사이의 힘의 균형이나 평화 유지를 위해 노력하고 이런 것들을 기획하는 정치가들의 자질이다. 그러나 이들은 보통 자기 편의 이익에 대한 고려만 가지고 있다. 가끔은 그 고려가 확장되기도 하는데, 유럽 전체의 평화를 염원하는 프랑스의 전권대사 아보나 프랑스에 반대해 유럽의 자유를 확장시키려 한 윌리엄 왕 같은 사람이 그렇다. 현재 앤 여왕의 의회가 이런 정신의 일부를 물려받은 것처럼 보인다.

 

  (7-10) 모든 독립적인 주는 각각 고유한 권력들(powers), 특권들(privileges), 면책권들(immunes)을 가지는 다양한 다른 집단들(orders)과 모임들(societies)로 분할된다. 모든 개인은 이들 중 하나에 자연스럽게 뿌리내린다. 개인들의 이익이나 자부심 등은 그 집단과 연결되어있으며, 따라서 개인들은 자기 집단의 권력들과 특권들을 확장하고 싶어하고 다른 집단에 의해 침해당했을 때 아주 열심히 방어한다. 헌법I(constitution)은 이러한 집단들이 나누어진 방식과 각각의 권리들(권력, 특권, 면책권)을 형성하는 방식에 의지한다. 이러한 개별적인 헌법의 유지 여부는 침해로부터 자신의 권리들을 보호하는 능력의 정도에 달려있다. 헌법은 하위 부분들의 지위와 조건의 변화에 따라 다소간 교체되기도 한다. (그러므로?) 이런 집단들과 모임들은 그들을 보호하는 주(state)에 의존적이다. 그러나 종종 주는 하위 부분들에게 권리를 포기하라고 종용하는 경우가 있다. 이런 정책을 위해서는 창조의 정신(spirit of innovation)을 발휘해야 한다. 이런 창조의 정신을 통해 주는 집단들과 모임들 사이의 균형을 유지한다. 이것은 주 전체적인 입장에서는 안정성과 영구성에 공헌한다.

 

  (11-12) 우리 지역을 사랑하는 것은 두 가지 원칙을 포함한다. 첫째는 헌법과 실제로 확립된 정부의 형태를 향한 존중과 존경이고, 둘째는 동료 시민들의 조건(condition)을 우리가 할 수 있는 한 안전하고, 안정적이고, 행복하게 만들려는 진지한 욕망이다. 첫째를 위반하면 시민이 될 수 없고, 둘째를 위반하면 좋은 시민이 될 수 없다. 평화로운 시대에는 대개 이 두 원리가 산출하는 행동들이 일치한다. 확립된 정부의 지원은 시민의 행복을 위한 가장 좋은 수단인 것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공공적인 불만과 파벌(faction)과 무질서의 시대에는, 이 두 원리는 양립불가능하게 보이는 서로 다른 행동을 산출한다. 즉 동료 시민들의 조건을 유지해주지 못하는 정부에 대해 개각이나 개혁 등의 조치를 생각하게 되는 것이다. 이런 경우 애국자들에게는 낡은 것의 권위를 다시 세우고 또는 새로운 정부를 구상하는 등 가장 뛰어난 수준의 정치적 지혜가 요구된다.

 

  (13) 외국과의 전쟁과 내전(civil faction)은 공공정신(public spirit)을 보여줄 수 있는 좋은 무대이다. 전쟁에서 열심히 봉사한 사람은 종족 전체의 바람을 만족시키며, 그래서 보편적인 고마움과 찬사의 대상이 된다. 내전(civil discord)에서 서로 대립하는 각 파당의 지도자들은 자기 파당의 사람들에게는 좋게 보이지만 다른 파당의 사람들에게는 의심스럽고 나빠보인다. 그러므로 전쟁에서 얻은 영광은 일반적으로 내전에서 얻을 수 있는 영광보다 순수하다.

 

  (14-15) 그러나 자신과 대립하는 파당의 사람들까지 설득할 수 있는 온건함을 지닌 특정한 파당의 지도자의 경우에는 전쟁에서 얻을 수 있는 성과보다 더한 공헌을 하기도 한다. 그는 헌법을 다시 수립하고, 개혁자와 입법자로서의 덕들을 자기 것으로 만들 것이며, 그의 지혜로움에 의해 만들어진 법들은 후세의 평온과 행복을 보장할 것이다. 이러한 공공정신은 동료 시민들이 겪고 있는 불편함에 대한 진정한 공감에 토대를 둔다. 체계의 정신(spirit of system)은 이러한 공공정신과 결합하는 경향이 있다. 반면 불평분자들의 파당은 지금 불편함과 걱정거리들이 있다는 것을 그럴듯하게 보여주지만 동시에 이를 통해 미래에 얻게 될 보상으로부터도 우리를 멀어지게 만드는 개혁적 입법을 주장한다. 이들은 몇 세기에 걸쳐 시민들의 평화와 치안을 유지해온 제도들의 핵심적인 부분들을 바꾸자고 제안한다. 그러나 그 근거는 우리가 경험해본 적도 없고, 그 당파의 지도자들에 의해 현란하게 꾸며진 이상적인 세계 속의 공상적인 아름다움이다. 그들은 처음에 자기 파벌의 세력 확장만을 꾀했겠지만, 이내 많은 지지자들을 확보하고 거대한 개혁을 기획한다. 그 지도자들은 자신의 지지자들을 합리적으로 생각하게끔 도와야 하는데도 그렇게 하지 않는다(못한다?). 그들에 의해서 그러한 불편함과 걱정거리들을 없앨법한 온건한 해결책들은 자취를 감춘다.

 

  (16-18) 공공정신이 발휘된 사람은 이미 확립된 권리들을 존중한다. 그 권리들이 악용된다고 봐야 하는 때라고 하더라도, 그것을 완전히 없애기보단 적절히 조정하는(moderating) 것에서 만족할 것이다. 그는 이성과 설득을 사용한다. 그것으로 극복이 안된다고 하더라도 폭력을 사용하지는 못한다. 그는 그가 할 수 있는 만큼 조정하려고 노력한다. 올바른 것이 아예 확립될 수 없는 상황에서는, 개선(ameliorate)하는 것도 진지하게 고려해본다. 가장 좋은 법이 확립될 수 없는 상황이라면, 마치 솔론처럼 사람들이 받아들일 수 있는 가장 좋은 법들의 체계를 확립하려고 노력할 것이다. 반면 체계의 인간(the man of system)은 자신에 관련된 것만 가장 잘 아는 경향이 있다. 또한 자신의 상상 속에서 완벽한 정부를 확립시키기 위해 끊임없이 노력한다. 현 상태의 유지에서 나오는 이득이나 그에게 반대할 편견들은 고려하지 않는다. 그는 마치 체스판에서 말을 만지듯이 서로 다른 구성원들을 조율할 수 있다고 생각하지만, 체스판의 말들 각각이 고유한 운동의 원칙(principle of motion)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은 고려하지 않는다. 입법자가 고려하는 방향과 사람들의 고유한 운동의 원칙이 일치한다면 그 모임은 행복하고 성공적이겠지만, 그렇지 않다면 매우 불행할 것이고 무질서에 빠지게 될 것이다. 따라서 법이나 정책의 완전함에 대한 생각은, 정치가의 관점을 바로잡는데는 필요하지만, 모든 반대를 무릅쓰고 그것을 확립시키려 한다면 심각한 오만함으로 나타날 것이다. 이는 자신을 옳고 그름에 대한 판단의 가장 높은 기준으로 세우는 것이다. 또한 커먼웰스 안에서 자신을 유일하게 지혜롭고 가치있는 인간이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동료 시민들은 그에게 들어맞아야 하지만, 자신은 그러지 않아도 된다고 말하는 것이다.

 

  이런 측면에서 영지를 가진 왕자들(sovereign princes)이 매우 위험한데, 이런 오만함에 그들이 매우 친숙하기 때문이다. 이들은 제국이나 왕국의 개혁자가 헌법에 관해 생각하면 그들을 자신들의 의지를 거스르는 반대자라고 생각하고, 그 헌법의 그른 점들을 거의 생각하지 못한다. 또한 주(state)가 자신을 위해 존재하지만, 자신이 주를 위해 존재한다는 생각은 하지 않는다. 따라서 이들의 가장 큰 목표는 반대자를 제거하고, 귀족(nobility)의 권위를 감소시키고, 지방과 도시의 특권들을 없애버리고, 그들의 명령에 반대하는 것을 불가능하게 함으로써 주(state)의 위대한 개인들과 위대한 집단들을 가장 쓸모없고 무의미하게 만드는 것이다.

 

 

 

Chap 3 보편적인 자비로움에 관하여

 

 

  (1) 우리의 선행은 우리의 조국(country)보다 더 넓은 모임(society)으로는 거의 확장될 수 없지만, 그렇다고 우리의 선한 의지에 경계가 있는 것은 아니고, 그것은 우주의 무한함을 포함하고 있다. 우리는 행복하지 않아야 하고 또한 그 불행에 반대하지 않아야 하는 죄없고 지각 있는(sensible) 존재를 생각할 수 없으며, 지각이 있으면서도 해를 끼치는(mischievous) 존재를 생각하면 자연스럽게 화가 치민다. 오히려 그런 화를 낳는 의지(ill-will)은 보편적인 자비로움의 결과, 즉 그 악의 때문에 불행해진 죄없고 지각 있는 존재의 비참함과 resentment에 우리가 공감한 결과다.

 

  (2) 보편적인 자비로움은 우주의 모든 거주자들이 자연의 운동을 방향지어주고 언제나 행복의 가장 큰 양을 변치 않는 완전함에 의해서 결정짓는 위대하고 자비롭고 전지한 존재(신)의 직접적인 돌봄과 보호 아래 있다는 것을 온전히 확신하지 않는 사람들에게는 어떤 견고한 행복의 재료도 될 수 없다. 반대로 보편적인 자비로움에 비춰봤을 때 이렇게 신이 없는 세계라는 혐의는 무한하고 불가해한 모든 영역이 비참과 불행으로 가득 찼을지도 모른다는, 모든 생각들 중에서 가장 우울한(the most meloncholy of all reflections) 것이 되어야 한다. 우리의 상상에 그림자를 드리우는 이런 무서운 생각은 결코 번성할 수 다. 또한 괴로운 역경의 모든 슬픔도 현명하고 덕있는 사람들에게서 신이 존재하는 체계(the contrary system)의 진실에 관한 습관적이고 온전한 신뢰에서 나오는 온전한 기쁨을 결코 앗아갈 수 없다.

 

  (3) 덕있는 사람은 사적인 이익을 자기가 속한 사적인 집단이나 모임의 이익에 공헌(sacrificed)되어야 한다는 것을 항상 바라고 있다. 이런 집단이나 모임의 이익은 또한 국가(state)나 주권(sovereign)의 더 큰 이익에 공헌되어야 한다는 것 또한 바란다. 하지만 그것도 단지 부분적일 뿐이다. 그래서 그는 같은 방식으로 앞의 모든 이익을 신이 직접 관리․감독하는 우주 전체, 모든 지각 있고 지적인 존재들의 모임의 더 큰 이익에 공헌해야 한다고 바라야 한다. 자비롭고 전지한 존재는 보편적인 좋음을 위해서 필요하지 않은 부분적인 악은 하나도 없는 체계를 허락할 수 있다는 것을 진지하게 믿는다면, 그리고 모든 사물들이 연결되어있고 서로 의존한다는 것을 안다면, 그는 자기 주변(본인, 친구, 모임, 조국)의 불행을 우주의 번영에 필요한 것으로서 생각해야 하고, 그래서 단지 불행을 감내함에 복종해야 할 것으로만이 아니라 스스로 그런 감내함을 진지하고 경건하게(devoutly) 소망해야 하는 것으로 생각해야 한다.

 

  (4) 이렇게 우주의 위대한 감독자의 의지를 감내하는 것은 어떤 측면에서 봐도 인간 본성의 한계를 넘어서는 것으로는 보이지 않는다. 예를 들어 좋은 병사들은 돌아오지 못할 것 같은 아주 외로이 떨어진 진지(forlorn station)으로도 진군하며, 이것을 위험 없는 곳에 나아가는 것보다 더 기꺼이 받아들인다. 앞의 상황에서 그들은 사람이 할 수 있는 가장 고귀한 노력을 하고 있다고 생각하지만, 뒤의 상황에서는 단지 일상적인 의무에서 오는 지루함만 느낀다. 앞의 상황에서 그들은 더 큰 체계를 위해 자신들을 공헌하는 것이다. 이런 행동은 순종적인 복종 뿐만 아니라, 종종 환희와 함께한다.

 

  군대의 어떤 행위자도 가장 위대한 우주의 행위자보다 더 끝없는 신뢰와, 열렬하고 열정저긴 애정을 받을만해보일 수는 없다. 개인적인 불행은 가장 큰 공익 속에서, 즉 현명한 사람은 자기 주변을 마치 우주의 외로이 떨어진 진지에 놓여지게 된 것처럼 생각해야 한다. 또한 그것이 단지 이런 분배에 복종하는 하찮은 감내함이 아니라, 열정적으로 기쁘게 껴안으려 노력해야 하는 의무라고 생각해야 한다.

 

  (5-6) 언제나 가능한 행복의 가장 큰 양을 만들어내기 위해 우주의 무한한 작동을 고안하고 행동해왔던 이러한 신의 계획(idea)은 가장 숭고한 인간적인 관조의 모든 대상이다. 다른 것은 비교적으로 수단인 것으로 나타난다. 이런 관조에 능한 사람은 존경의 대상이 된다. 또한 어떤 종교적인 관점에서 활동적이고 실용적인 다른 것들보다 우선해서 생각한다. 그러나 모든 합리적이고 지각 있는 존재들의 보편적인 행복을 돌보는 것은 신의 일이지 사람의 일은 아니다. 사람에게는 상대적으로 하찮은 부분, 자기 주변을 돌보는 일이 할당되는데 이것이 그의 능력에 더 알맞기 때문이다. 그가 더 숭고한 것을 관조하는 데 빠져있다는(occupied) 것이 주변을 돌보지 않는 것의 변명이 되진 않는다. 또한 그런 관조하는 철학자들의 가장 숭고한 생각은 주변 사람들에 대한 작은 활동적 의무에 대한 무시를 거의 보충해줄 수 없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실용주의연구 발제. 로티, 『철학과 자연의 거울』 5장 요약>

 

 

1. 심리학에 대한 의심들

 

 

  로티가 옹호하는 인식론적 행동주의는 정신적 존재자 또는 심리학적 과정과 같은 개념들을 거부하고 있다. 그러나 아직까지 정신적인 것을 대체할 다른 개념이나 존재자들은 나타나지 않았고, 정신적인 것을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에 관한 논란만 가중되고 있을 뿐이다. 그러나 여전히 초점은 근대철학의 인식론적 회의주의를 피해가면서 환원주의적인 성향 또한 극복할 수 있는 어떤 길이 있다는 것에 맞춰져 있다.

 

  심리학은 이러한 정신적 존재자나 심리학적 과정 같은 개념들이 가리키는 대상을 연구의 대상으로 삼는 학문이다. 만약 인식론적 행동주의가 맞다면, 심리학은 존재하지 않는 엉뚱한 대상을 연구하고 있는 셈이다. 심리학의 이런 특성은 “인지적 과정과 구조라는 신화”, 또는 “데카르트적 신화” 등등의 표현을 사용하는 철학적 비판과 마주한다. 이런 측면에서 두 가지 점이 놀라운데, 하나는 정신적 존재자라는 개념에 관한 철학적 포기가 심리학의 활동에 아무런 영향을 미치지 않았다는 점, 둘째는 만약 그 철학적 기원으로부터 수 세대가 지난 지금도 자립적일 수 없어야 한다는 점이다. 이런 철학적인 비판에도 불구하고 심리학이 자체적인 절차를 갖추고 있어야 한다는 것은 비판받을만한 주장으로 보인다.

 

  그러나 이런 절차에 대해 비판하는 사람들은 “정신적인 것을 가리키는 용어들의 의미는 행동에 의해 설명되어야 한다”는 것에서 “(정신적인 것을 연구하는) 심리학은 행동과 환경 사이의 경험적 관계에 대해서만 관심을 둘 수 있다”는 것으로 비약하는 조작주의적 오류(조작주의(operationism) 과학철학은 과학에서 사용하는 언어의 의미는 그것을 규명해내는 절차(operation)를 축약해서 설명한 것이라고 생각하는 경향을 말한다. 예를 들어 ‘저것의 길이는 6미터이다.’는 ‘표준적 미터법에 부합하는 길이 측정 도구를 저것 옆에 가져다 댔을 때 그 숫자가 6이다.’ 라고 말하는 식이다.), 즉 정신적 존재자를 설명하기 위해 환경을 끌어들이고 있는 오류를 범하고 있다. 이것이 잘못된 추론이라는 점은, 정신적 과정인 인지과정을 설명하기 위해서 내적인 과정을 끌어들일 수도 있다는 것을 통해 지적된다. 그러나 조작주의적 오류에 대한 이런 지적 또한, 단지 내적인 것을 옹호하기 위한 하나의 전략에 지나지 않을 뿐, 의미있는 경험적 발견을 이끌어내는 이론적 배경이 되지는 못한다.

 

  그렇다면 우리는 심리학자들이 이런 조작주의적 오류에 왜 쉽게 빠지는지, 그것에 어떤 함의가 있는지를 분석해보아야 한다. “철학자들은 왜 심리학자들이 우리의 행동을 설명하는 데 도움을 줄 수 있는 이론적 존재자나 과정들을 상상할 수 있는 권리가 있음을 인정하려고 들지 않는가?” 철학자들은 이렇게 과정에 기반해 인간을 기계적으로 설명하는 것에 대해 본능적인 공포감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특히 철학자들의 눈에 심리학자들은 이러한 기계적 설명을 더욱 강화하려는 열망을 품고 있는 것처럼 보이기 때문에 이런 공포감은 더욱 늘어난다.

 

  통합과학에 대한 열망은 이런 공포감을 부추기는 근거가 된다. 이것은 환원주의에 기반을 두는데, 양자역학에 의해서 약화되긴 했지만 여전히 사회적인 영향력은 강하다. 콰인 이전의 환원주의자들은 물리과학이 사용하는 용어로 모든 것을 환원해야한다고 주장했던 반면, 콰인 이후의 사람들은 기능을 표현하는 용어들을 구조를 표현하는 용어들로 바꿈으로써 과학으로서의 지위를 유지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정신적인 존재자에 대해서 다루는 심리학은 정신적인 것이라는 자신의 탐구대상을 여전히 유지함으로써, 그리고 그것이 신경생리학으로 대체되는 과정에 있기 때문에, 심리학은 정신적인 것에 관한 연구에서 위에 표현된 태도들과 유사한 경향을 띈다.

 

  하지만 우리는 여전히 심리학이 유령을 불러들임으로써 과학적 활동을 방해한다는 인상을 받는다. 이런 인상은 두 가지 원천에서 비롯된다. 첫째는 의식에 대한 데카르트식의 생각과 영혼이 육체에 대해 독립적이라는 고대의 생각을 뒤섞어놓은 전통이다. 둘째는 내적인 반성은 특권적인 접근을 전제하며, 이러한 접근이 가능하기 위해서는 존재론적 지위가 다른 존재자를 필요로 한다는 생각이다. 그러나 이런 내적인 반성에 입각한 인식론적 접근은 내적인 반성의 특권적인 접근은 사회적인 친숙함의 다른 이름이라는 셀라스의 논의에 의해서 무력해진다. 만약 특권적 접근을 사회적인 친숙함으로 바꾼다면, 내적인 반성은 사회적으로 친숙한 것을 발견하는 방법으로서 다시 그 인식론적 지위를 획득하게 될 것이다. 그리고 그 내적인 반성은 정신적 존재자와는 무관한, 물리적 과정으로서의 지위를 획득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므로 콰인과 셀라스의 논증은 심리학이 정신적 존재자를 붙들어매기 때문에 인간에 대한 과학적 연구를 가로막는다는 경험주의 철학자들과 물리주의 철학자들의 의심을 어느 정도는 완화시킬 수 있다.

 

  이러한 생각에 기반해, 이 장에서는 지식의 문제와 관련된 인식론과 경험적 심리학 사이의 관계에 대해 탐구하게 될 것이다. 결론적으로 이 둘은 아무런 연관이 없으며, 따라서 경험적 심리학으로 인식론적 작업을 대체하려는 시도는 실패로 끝나게 될 것이다. 그 이유는 인식론이 문제로 등장한 문화적 배경과 경험적 심리학이 인식론에 문제를 제기하는 문화적 배경이 다르기 때문이다. 이것을 논증하기 위해서는 인식론을 경험적 심리학으로 대체하거나 보충하려는 시도에서 나온 제안들을 검토해봐야 한다. 첫째는 이론과 증거 사이의 관계를 심리학으로 다룰 수 있다는 생각이다. 둘째는 인간의 육체와 정신을 컴퓨터의 하드웨어와 소프트웨어에 유비하는 사고방식이다. 이것을 제안하는 사람들은, 이런 사고방식을 통해 인간에게 있는 것으로 간주된 ‘정신적인 것’에 관해 새로운 관점을 얻을 수 있게 된다고 주장한다.

 

 

 

2. 인식론의 부자연스러움

 

 

  콰인은 「자연화된 인식론」에서 인식론적인 문제가 있다는 환상에 빠진 철학자들을 치료해야 한다는 입장을 개진하며, 그래서 인식론은 심리학-자연과학의 일부분으로 끌어내리고, 물리적 인간의 입력과 출력의 상관관계를 연구하는 학문이 되어야 한다고 설명한다. 그에 따르면, 인식론은 빈약한 입력-증거와 풍부한 출력-이론 사이의 연결, 그리고 이론이 어떻게 증거들을 초월하는가를 알아내려는 학문이다. 그러나 철학사를 비추어 보았을 때 이런 질문이 제기되고 그것이 답을 내야만 하는 중요한 질문으로 부각된 것은 17세기 이후의 일이다. 이런 경향의 시초인 데카르트는, 스콜라주의가 아주 사소하다고 간주한 것을 진지하게 탐구했기 때문에 주목을 받았다. 그렇다면 데카르트 이후로 인식론이 제일철학의 지위를 차지하게 된 이유는 무엇인가? 여기에 간단히 답하기란 쉽지 않다. 하지만 이러한 인식론적 문제제기가 되는 맥락으로부터 콰인을 떨어뜨렸을 때, 과연 그가 주장하는 이론과 증거 사이의 관련성이 인식론적 문제와 얼마만큼 연관을 가질 수 있게 될 것인가?

 

  인식론과 경험적 심리학 사이에 연관이 있다고 생각되는 이유는, 증거, 정보, 입증 등 두 영역에서 동시에 쓰이는 단어들이 각 영역에 맞게 엄밀하게 사용되지 않고 느슨하게 사용되기 때문이다. 그래서 콰인은 신경을 통해 입력되는 것들을 원초적인 정보로서 간주하고, 이것을 인식의 토대라고 주장한다. 하지만 신경에 입력된 전기적 신호들은 어디에서 정보로 바뀌는가, 그곳이 어디인지 경험적으로 발견할 수 있는가에 관한 의문을 제기한다면, 경험적 심리학은 이런 작업에 실패할 것이라는 점이 분명하게 드러난다. 그러나 콰인은 이런 장소들을 발견하는 것 그리고 그것이 경험적이라는 것을 가정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그런데 콰인은 이와 모순되는 듯한 진술을 하기도 한다. 즉 인식론이 경험적 심리학으로 대체된다면, 우리는 경험만이 존재하는 것이라고 간주할 수 있을 것이고 또 외부세계에 대해 기술하는 것은 불가능할 것이며, 그래서 우리는 우리 스스로를 인식의 주체를 외부에 대응하여 그것에 관한 정보로서의 출력을 생산하는 (기계적) 존재로 간주할 수 있다. 그러나 이렇게 생각하는 것은 인식론적 문제를 해결하는 방향으로 나아가는 것이 아니며, 또 인식론자들이 단순히 인식주체의 작동방식에만 관심을 기울인 것도 아니기 때문에, 인식론적 문제에 관한 콰인의 해법은 그렇게 적절해보이지는 않는다.

 

  여기에 대해 콰인은 신경에 입력된 전기적 신호의 결과로서의 정보는 인과적으로, 그리고 그것을 기술하는 관찰문장은 인식론적으로 말하자는 대안을 제시한다. 그러나 이것도 적절해보이지는 않는다. 콰인이 처음에 의도했던 것은 인식론을 자연화해 경험적 심리학으로 대체하자는 것이었다. 그러나 관찰문장들 간의 정당화 관계는 경험적 심리학의 대상이 아닌 사회학이나 과학사의 연구대상이다. 따라서 콰인의 제안은 그의 의도와 조화롭지 않다.

 

  인간이 관찰한다는 것을 포기하지 않는 콰인은 관찰의 과학적 객관성을 상호주관성으로 대체한다. 이렇게 되면 관찰문장은 “동일한 자극이 동시에 주어졌을 때, 언어를 사용하는 모두가 동일한 예측을 하게 되는 문장”이며 “부정적으로 표현하자면, 언어공동체 안에서 과거의 경험이 다르다는 점에 민감하게 변화하지 않는 문장”으로 정의된다. 또한 몇몇 아주 특수한 예들을 제외한 “현재의 감각자극에만 의존하며 문장을 이해하는 것 이상으로 저장된 정보에 의존하지 않는”것을 관찰문장이라고 정의한다. 그러나 이렇게 되었을 경우에는, 관찰문장에 대한 연구는 더욱 더 심리학이 아닌 사회학과 과학사의 연구대상이 된다. 상호주관적으로 동의할 수 있는 것을 분리하는 방법으로 심리학은 적당하지 않고, 그것을 문장과 그 문장을 지지하는 이론 내지는 담론 수준에서 풀어가는 사회학이나 과학사가 적당할 것이기 때문이다. 이 역시 콰인의 의도와는 어긋난다.

 

  상호주관성으로 관찰문장의 정의하는 그의 시도는 자신의 의도를 뒷받침하는 데 또 다른 난점을 안고 있다. 그가 말하는 신경입력이나 관찰문장은 기존에 없었던 것이 아니라는 사실이 그것이다. 그는 인식론적 문제를 경험심리학으로 해결하고 있다기보다는, 오히려 인식론적 문제를 묻지 않는 방식으로 문제를 우회한다. 그러나 상호주관성을 이야기하면서 그는 그가 우회하고자 했던 문제, 즉 인식론적 정당화의 문제와 다시 마주하게 되고, 그것은 경험적 심리학과 전혀 관계가 없는 인식론적인 문제의 전통을 잇는 결과를 낳는다. 이런 콰인의 논의는 과학과 철학이 연속적이라는 것에 기반을 두고 있고, 이 연속성이 철학적 골칫거리들을 해결하는 방법의 토대가 될 수 있다고 주장한다. 반면 로티는 과학과 철학이 동시에 진행된 작업이라는 것에 기반을 두고 자신의 논의를 전개하고 있다. 로티가 보기에 콰인과 같은 논의는 철학(인식론)은 존재하지 않는 영역이라고 말하는 방식이다.

 

  그렇다면 우리의 문화 속에는 어떻게 철학이라는 영역이 자리잡게 되었는가? 그리고 이것은 왜 심리학적 탐구를 통해 해소될 수 없는가? 듀이는 이런 질문에 대해 비과학적인 측면의 여러 동기들을 언급하며, 이들에 대한 입장으로서 현재까지의 철학과 미래의 철학을 나눈다. 반면 콰인은 경험론의 입장을 선호하며, 이들이 잘못된 의미론에 의해 인도되지만 않았다면, 경험적 심리학을 인간을 연구하는 방법으로서 제대로 확립시킬 수 있었을 것이라 생각한다. 그러나 콰인의 이런 입장에는 실재의 모습에 접근하는 우리의 능력이 과연 있는가에 대해 의문을 제기하는 회의주의에 대한 로크의 관심과, 회의주의는 무능력하다고 하는 콰인의 주장이 은폐되어있다. 만약 회의주의를 진지하게 고려한다면, 그 자체가 회의주의의 대상인 경험의 요소를 곧바로 지식의 요소로 간주하는 실수를 저지를 수는 없다. 그렇다면 역시 설명의 요소는 정당화의 요소가 될 수 없다.

 

 

 

3. 진정한 설명으로서의 심리학적 상태

 

 

  “이론과 증거 사이의 관계에 대한 유의미한 심리학적 이론을 얻기 위해서는, 일상적인 “공공의” 정당화를 상황이나 다른 주장을 통해서 “내부적으로” 재생산할 이론이 필요하다.” 앞의 논의와 이어서 이 장의 도입부인 이 문장을 해석하자면, 관찰문장들을 조합하고 초월하여 이론을 만들어내는 것에 관한 이론이 만들어져야만 우리는 이론과 증거의 관계에 대한 유의미한 심리학적 이론을 얻을 수 있다는 뜻이다. 흔히 이를 위해 사용되는 심리학의 가정(이자 연구대상)이 ‘정신적 존재자’이다. 이 정신적 존재자는 이론과 증거 사이를 매개하는, 정당화를 위한 개념적 수단이다.

 

  그러나 어떤 철학자들은 이런 매개들이 실제로 존재하는지에 관해 정당화를 요구하는, 이른바 무한퇴행의 문제가 ‘정신적 존재자’에 관해 발생한다고 지적한다. 이를테면, 자신의 경험과 외부가 일치한다고 알게 되는 것은, 일치가 무엇인지에 관한 이해를 반드시 먼저 품고 있어야만 가능하게 되는 것이다. 이런 무한퇴행을 끊기 위해서는, ‘어떠어떠하게 보인다’는 것을 ‘어떠어떠한 것이 있다’로 추론하는 독단적 도약이 필요하다. 이 독단적 도약은 로티가 비판하는 혼합, 즉 설명과 정당화를 혼동하는 것을 반복하고 있다.

 

  반면 이것이 독단적 도약이라기보다는, ‘항상성’을 띄는 최초의 과정으로서 보아야한다고 생각하는 견해 또한 존재한다. 설명과 정당화를 분리하면, 우리가 지각하는 대상의 동일성과 경험된 개념의 동일성은 서로 아무 상관도 없는, 독립적인 것이 되기 때문이다. 이 항상성은 다양한 감각들 속에서 어떤 유사성을 찾아내는 것이고, 그 유사성을 찾기 위해서는 그런 유사성을 찾아내 대상의 동일성과 개념의 동일성을 대응시키는 규칙이 필요하다. 이런 규칙이 있다고 가정할 경우 다시 그것을 설명할 어떤 정당화를 필요하게 되면서 무한퇴행에 빠지고, 만약 그 규칙이 없다고 가정할 경우에는 인식에 대한 어떤 유의미한 이론도 가질 수 없게 된다.

 

  이런 인식의 문제는 그러므로 역시 인식론적인 ‘개념’의 문제이거나, 심리학의 문제이거나 둘 가운데 한 쪽을 택해야 한다. 심리학은 경험의 과정을 분석한다. 반면 ‘개념’의 문제는, 그것이 어떻게 동일성을 획득하는지에 관한 배경을 설명해야 그 개념이 어떤 것을 가리키고 있는가에 관해 의미있는 설명이 가능해진다. 그리고 이런 배경으로 정신적 존재자가 가정된다. 그렇지만 정신적 존재자가 어떤 것인가에 관해 다시 묻는다면 우리는 난점에 또 다시 봉착하는 악순환을 되풀이한다.

 

  이 와중에 정신과 신체의 관계에 관한(정당화와 설명에 관한) 관계를 컴퓨터의 하드웨어-소프트웨어의 유비를 통해 풀어보려는 시도가 나타났다. 물론 소프트웨어가 과연 ‘설명의 대상’인가에 대한 의문은 제기될 수 있다. 이것은 마치 더하기로 이루어진 모든 등식들이 더하기의 법칙을 설명한다고 말하는 것과 같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만약 우리의 신경 체계가 하드웨어라고 생각하고, 그 하드웨어를 이용해서 여러 가지를 할 수 있는 알고리즘을 해명하는 것과 같은 방식으로 우리의 지식에 관해 설명하는 것이다. 알고리즘은 하드웨어에 기반하기는 하지만, 하드웨어를 이용하는 또는 지나가는 방식이기 때문에 그것은 온전히 하드웨어로 환원되지는 않는다는 것이 이들의 주장이다. 또한 이들은 하드웨어 속에서 전류가 지나가는 길을 파악한다고 해서 그 하드웨어가 ‘무슨 일’을 하는지는 알 수 없다고 주장한다.

 

  이런 유비에 대해 비판적인 견해들은, 인간의 여러 개념적 동일성들이 이른바 알고리즘 안에서만 산출될 수 있을 뿐이라고 주장하며, 그것은 하드웨어의 특성이 아니라고 주장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개념적 동일성의 알고리즘적 특성을 특화시키는 것은 이 유비를 반박하는 데 별 도움이 되지 못하는 것 같다. 그것은 인간 속의 인간, 기계 속의 기계라는 말로 설명될 수 있는, 어떤 또 다른 ‘존재’에 도움을 요청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런 모델로 인간의 지식을 설명하려는 것은, 또 다른 존재자들에 대한 또 다른 설명을 언제나 동반한다. 이것은 마치 “붉은 색의 감각인상을 다양한 환상들이 공통적으로 가지는 요소라고 말한다고 해서 “내적”이면서 붉은 색이 어떤 것의 존재를 인정하는 것”과 같다.

 

  알고리즘적 특성에 대한 강조는 다음과 같은 문제를 제기한다. 즉, 우리는 하드웨어 속에서 전류가 지나가는 경로를 파악하는 것 그 자체만으로도 그 알고리즘이 무엇을 하는지에 관해 파악할 수 있다는 것이다. 예를 들면, 특정한 입력이 신경에 주어졌을 때 그리고 그 때에만 그가 ‘붉은 색을 본다’고 대답을 한다면, 우리는 그 입력이 붉은 색에 관한 입력이라고 간주할 수 있다. 이것은 컴퓨터 유비에 대한 비판자들이 잘못되었다고 이야기하는 것을 넘어서서, 컴퓨터의 유비를 통해 인간의 알고리즘적 특성을 강조하려는 시도 또한 잘못되엇다고 이야기하는 것이다. 우리는 곱셈이 무엇인지 모른다면 두뇌를 들여다봐도 곱셈이 무엇인지 모르겠지만, 곱셈이 무엇인지 몰라도 누군가가 특정한 숫자의 곱을 생각하고 있는 뇌를 들여다본다면 그가 곱셈을 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물론 이것은 ‘곱셈’이라는 말이 아닌, 특정한 전기적 신호의 특정한 연결과 경로로 기술될 수 있을 것이다(대척행성인을 떠올리게 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물리적 대상들의 특정한 움직임으로 특정한 행동의 원인과 경로를 설명할 수 있게 된다.

 

  그러므로 무한퇴행 논변은, 설명과 정당화의 연결을 시도할 경우 생기는 문제라는 것이 밝혀진다. 이런 질문의 인식론적 버전은 이른바 ‘인식은 어떻게 가능한가?’라는 물음이고, 이것은 나쁜 물음이다. 이런 질문은 설명과 정당화를 동시에 가능하게 해준다고 생각하는 배경적 요소들을 요청하고, 그래서 인식에 정신적 존재자가 동원되고 이와 관련한 철학적 쟁점들이 생겨난다. 반면 이런 무한퇴행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컴퓨터의 유비가 동원된다고 하더라도, 문제는 전혀 나아지지 않는다. 이 유비는 무한퇴행의 문제를 전혀 해결하지 못할 뿐만 아니라, 그 자체로 인간의 지식이 하드웨어적 과정을 통해서만 설명이 가능하다는 것을 함축하고 있기 때문이다. 또한 심리학은 이것을 자신의 연구대상으로 삼을 수 있다.

 

  인간의 지식에 대한 이러한 관점은, 이른바 ‘인간 속의 인간’이라는 개념을 포기하게 하고, 지식을 만들어내는 알고리즘과 하드웨어적 배경이 인간의 본성 속에도 있으며, 경험 속에도 있다는 평이한 생각을 뒷받침하게 해준다. 또한 인간의 본성 속에 들어있는 알고리즘이 무엇인지 연구하는 것도 중요하지 않은데, 그것을 굳이 본성이라고 이름을 붙이지 않아도 실제로 그가 무엇을 하는가에 관해서만 관찰하더라도 그 알고리즘이 드러나기 때문이다. 또한 개념적 동일성과 같이 알고리즘적 특성만이 나타난다고 생각되는 개념들도, 특정한 탐구의 목적에 의지해야만이 규명 가능하다는 것 또한 드러난다.

 

  그러므로, 로티의 입장에서는 “심리학적 상태를 내적 표상으로 생각하는 데 반대하지는 않지만, (그것이) 그렇게까지 흥미롭지는 않다고 말할 수 있다. 심리학적 상태가 행동을 설명하기 위해서 가정된 상태이며, 생리학적 상태와 어떻게 동일시되는지 알지 못하는 상태라고 말하더라도 정신의 참된 본성을 발견한 것은 아니다. 즉 알려질 만한 아무런 “본성”도 없음을 다시금 강조하는 것일 뿐이다”라고 말할 수 있게 된다. 철학자들의 마음-몸 구분은 존재론적이기보다는 실용주의적이며, 이 구분이 인간에 대한 과학에 꼭 필요하다고 생각하는 것이나, 또는 마음의 존재를 가정하는 것이 인간에 대한 과학에 아주 해롭고 불필요하다고 생각하는 것이나 똑같이 철학자들의 고민에 지나지 않는다.

 

 

 

4. 표상으로서의 심리학적 상태

 

 

  정신적인 것을 구분해 내는 또 다른 구분법은 신경에 전달된 전기신호로부터 표상을 구별해내는 것이다. 이를 통해 정신적인 것을 다른 것으로부터 구별해냄으로써, 정신적인 것에 대해 규명하는 것이 이런 시도를 하는 사람들의 목표다. 그러나 여기에서 정신적인 것에 대한 언급은 기존의 전통적인 언급과는 사뭇 다르다. 이들은 이런 정신적인 것 또한 물리적인 것의 조합으로 설명하려고 노력하며, 이와 관련해서 개념적 동일성에 대한 표상 같은 것들은 자극의 불변성을 통해 설명될 수 있다. 이런 개념적 통일성을 만들어내는 특수한 기관이 있다고 상정할 때에만 즉 특수한 심리학적인 인지과정을 가정할 때에만 가능한 것이다. 그러나 이런 것에 대한 언급은 그 자체가 정당화 내지는 설명을 필요로 하지만 경험적으로 지각되지는 않는다는 문제점이 있다는 것이 이른바 ‘철학적 비판’이다.

 

  하지만 그런 것이 경험적으로 지각되지 않는다고 생각하는 것 자체가 일종의 철학적 독단이라고 하면, 그 비판은 효력을 잃어버린다. 이런 과정이 경험적으로 지각이 가능하다고 생각한다면, 그것에 대한 심리학적 기술은 지식에 대한 일반적이고 유용한 이론을 구성할 수 있다. 이것은 몸에 대한 설명과 정신에 대한 정당화를 무화시키는 또 다른 방법이다. 그는 이것을 가정된 유기체적 상태라고 설명한다. 즉, 심리학의 연구 목적에 들어맞는 유기체의 상태일 뿐, 그것이 다른 영역에까지 확장되는 것은 아니다. 그러므로 인지심리학적 주체는 평가적 개념인 인식론적, 도덕적, 윤리적 주체와 그 모습이 같지 않다. 근대의 경험론자들이 심리학과 인식론을 이으면서 했던 실수가 이런 주장에서는 나타나지 않는다.

 

  심리학에 대한 이러한 접근은 로티가 비판하고자 하는 자연의 거울 이미지와는 거리가 멀다. 심리학에서 가정된 주체는 심리학의 연구에 알맞을 뿐, 그것이 세계를 정확히 표상한다거나 하는 것과는 별로 상관이 없기 때문이다. 이 차이는 ‘물건이 밑으로 떨어진다’고 하는 상식적인 기술과 ‘물건이 중력에 의해 위치가 바뀌었다’고 말하는 물리학적 기술 모두가 참으로 인정받는 것과 비슷한 방식이다. 우리는 심리학 뿐만 아니라 다양한 종류의 어휘 묶음을 통해서 비슷한 방식으로 어떤 대상에 대해 기술할 수 있다. 표상은 이런 어휘 묶음들을 가리키는 말이다. 그것은 그저 기호일 뿐이다.

 

  그러나 근대의 인식론자들은, 이렇게 가정된 심리학적 주체를 ‘참을 생산하는 심리학적 주체’로 생각하였다. 로크 이래로 시작된 심리학과 인식론의 혼동은 여기에서 기인한다. 즉, 내적인 표상이 참된 믿음에 대한 어떤 것이라면, 내적인 표상이 생겨나는 과정 또한 참된 믿음에 대한 어떤 것이기 때문이다. 참된 믿음과 거짓된 믿음은 인지과정이 어떻게 작동했는지에 의존한다. 하지만 우리가 지금까지 논의한 ‘가정된 주체’라는 생각은 이러한 비판을 피해갈 수 있다. ‘가정된 주체’에 대해 긍정적인 사람들은 참된 믿음과 거짓된 믿음의 여부를 “그들이 대화 속에서 무슨 얘기를 하는가?”에 의존하는 것으로 생각한다. 이들은 다양한 분과가 어떤 보편적인 대상에 관한 무엇인가를 서술한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보편적인 대상이 존재한다는 생각 자체가 심리학적 인지과정을 중요하게 만들기 때문이다.

 

  생각을 달리해서, 만약 인식론의 목표가 진리의 발견이 아니라 합리성의 기준을 발견하는 것이라고 한다면, 심리학적 과정에 대한 탐구가 인식론에 보탬이 될 수 있으리라고 생각할 수도 있다. 여기에서 합리성은 목적에 따라 수단을 조정한다는 뜻이다. 그러나 내적 표상의 합리성에 관한 탐구는 ‘가정된 주체’의 관점에서 비춰봤을 때 어떤 개별적인 과정 연구 이상의 의미를 지니지 않는다. 그런 탐구란 수단이 어떤 목적에 대해 얼마나 최적화되었는가에 대한 것만을 의미할 뿐이기 때문이다. 평가적 개념이라는 측면에서 ‘합리성’은 인식론에서의 ‘진리’, 도덕철학이나 윤리학에서 긍정적으로 평가하는 여러 덕목들과 비슷한 수준에서 그 평가의 정도가 결정된다. 이런 평가적 개념들은 목적에 대하여 상대적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것이 얼마나 합리적인가는 목적이 무엇인지 설정하는 우리의 능력에 의존한다.

 

  표상의 인식적인 적절함은 그런 것들이 타고나는 것이라는 가정 아래서만 유효해진다. 이 타고나는 것이란 지금까지 우리가 논의해 온 정신적인 것, 정신적인 인지과정이며, 이것은 모든 합리성의 표준이 된다. 이렇게 타고난 것으로 간주된 개념들은 철학사에서 수없이 많이 제시되었다. 진리, 필연성, 개인, 대상, 과정, 상태, 변화, 의도, 인과, 시간, 연장, 수 등등이다. 그러나 이런 것들의 의미를 명료하게 한다는 작업은 불가능한 기획이라는 것이 콰인을 통해 드러났다. 또한 이런 견해 속에서는 위에서 나열한 단어의 의미가 우리의 경험에 의해 바뀔 수 없다라는 독단적인 전제가 감춰져있다. 그리고 ‘가정된 주체’를 주장하는 사람들이 이러한 입장에 가한 비판에 따르면, 우리는 저런 단어들의 의미가 무엇인지, 언제나 아예 잘못 생각하고 있을 수 있다는 결론에 이른다.

 

  정신적인 표상이라는 개념은 정보와 명제 사이 어딘가에 있다고 알려진 모호한 개념이다. 영국의 경험론자들은 이 두 과정을 표상이라는 한 단어를 통해 다루려고 함으로써, 설명과 정당화를 혼동하는 오류에 빠졌다. 하지만 ‘가정된 주체’를 통해서 이를 다시 해석하면, 표상은 가정된 주체에 의해 생산된 명제에 해당하기 때문에 소여의 신화에 대한 셀라스의 비판을 비켜갈 수 있다. 또한 그 가정된 주체는 특정한 과정을 거쳐 생산된 명제이기 때문에, 그 주체가 그것을 완전히 신뢰하고 표명해야 할 이유도 없다. “경험론자들의 ‘관념’과는 달리, 망막의 상에서 출발하여 다양한 처리장치가 취하는 다양한 명제적 태도를 통해서 주체의 언어중추의 출력에 이르는 인과적 과정이 주체의 견해를 정당화하는 일련의 추론과정에 대응할 필요는 없다.” 만약 사람들이 어떤 것을 어떻게 믿어야 하는가에 관해서 논쟁을 벌이는 중이라면, 그는 자신이 믿는 것이 맞다고 주장하기 위해서 자기가 어떻게 믿게 되었는지를 설명하지는 않을 것이다. 이것을 고려해볼 때, 정당화는 오로지 상호주관적 즉 공공의 영역에서 가능한 일이 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심리학자들은 인식론의 과제를 자신이 떠맡아서 한다고 착각하는 경우가 있다. 그들은 자신들이 철학적이어야 한다고, 그리고 인식론적 문제를 자기들이 해결할 수 있다고 잘못 믿었다. 그러나 심리학자들이 이런 강박을 버리면, 즉 의식의 토대 등등과 같은 것들에 대해서 자신들이 언급해야 한다는 강박 - 즉 정신의 존재를 규명해야 한다는 생각을 버린다면, 정신에 대한 기술은 아주 가볍고 무리없이 받아들여질 수 있을 것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인식론연습 발제>

 

 

  정당화된 참인 믿음은 플라톤이 그렇게 정의한 이래로 지식에 관한 가장 확고한 정의로 여겨져 왔다. 이 정의는 우리가 가지고 있는 모든 믿음 가운데서 지식을 가려내는 방법을 알려준다. 어떤 믿음이 참인 동시에 정당화되었다면 그것은 단순한 믿음이 아닌 지식이다. 만약 지식이 우리가 추구해야 할 가치가 있는 대상이라면, 우리는 이 정의를 이용해서 우리의 믿음 가운데 지식을 가려내야만 한다. 그러므로 정당화된 참인 믿음이라는 정의는, 단순히 특정한 믿음들의 상태를 가리키는 말일 뿐만 아니라, 우리가 어떤 믿음을 가져야하고 또 그 믿음의 성격이 어때야 하는지를 알려준다. 이런 규범적 측면은, 지식을 정의하는 그 두 가지 조건이 충분하지 않다는 주장 때문에 논란에 휩싸였다. 이 주장은 우리가 추구해왔던 지식, 즉 정당화된 참인 믿음이라는 대상이 사실은 그럴만한 가치가 없을 수도 있다는 사실을 함축하기 때문이다. 이후 인식론에서는 다양한 측면에서 지식을 다시 정의하려고 시도해왔다.

 

  하지만 어떤 이들은 다른 각도에서 이 문제를 해결하려고 한다. 즉 인간의 믿음을 지식과 지식 아닌 것으로 나누는 것이 과연 가능한지 묻고, 그것이 불가능하다고 대답함으로써 지식의 규범성 문제를 없애버린다. 인간에게는 고유한 인식적 구조가 있다. 또한 같은 인간 종 사이에서도 서로가 같은 것을 보고 있다고 확신할 수 없다. 그러므로 내가 대면한 세계의 모습은 나의 믿음 이상의 어떤 지위를 가질 수 없다. 만약 어떤 사람이 나의 믿음에 그보다 더 높은 지위를 부여하려면 그 사람은 내 인식적 구조의 한계를 뛰어넘는 어떤 특성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 하지만 내가, 또는 위와 같은 주장을 하는 어떤 사람은, 실제로 그런 특성을 가지고 있을 리 없거나 또는 그런 특성을 가지고 있는지 알 수 없다.

 

  이런 회의주의적 전통은 최근에 인식론적 신빙론, 자연화된 인식론으로 재해석되었다. 이들은 공통적으로 인간에게 고유한 인식적 구조를 과학적으로 연구한다. 그러므로 전통적인 인식론과 비교해봤을 때, 과학과 인식론 사이의 관계가 역전된다. 왜냐면 인식론은 과학이 학문적으로 성립할 수 있는지를 판정하기 위해 시작된 철학적 탐구이기 때문이다. 만약 전통적 인식론의 입장에서 과학이 엄밀하게 규명될 수 없는 몇몇 전제들에 의존하며 그 성과를 철학적 규범성의 측면에서 지식으로 인정하기 힘들다고 주장한다면, 자연화된 인식론은 그런 ‘철학적인 의미의 지식’을 얻을 수 없는 것이 바로 인간의 조건이며, 만약 그런 엄밀한 시험을 통과해야만 지식이라고 부를 수 있다면 우리는 믿음의 수준에서 머무를 수밖에 없다고(머무르는 것으로도 충분하다고) 반박할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규범성은 인식론적으로 중요한 물음이라는 것은 틀림없다. 자연화된 인식론의 한 흐름은 이것을 실재와 무관한 방식, 즉 상호주관성과 체계-믿음 관계를 통해서 해결하고자 한다. 만약 어떤 믿음 b가 특정한 인식적 환경 속에서 다수의 사람들에 의해 인정된다면, 그것은 그 사람들 사이에서 보증된 믿음이다. 이것 이상의 참 개념을 요구하는 순간 우리는 전통적 인식론자들이 직면해야 했던 상당한 어려움에 빠지게 된다. b가 그 사람들 이외의 다른 사람에게 보증되리라는 보장이 거의 없기 때문이다. 정당화의 경우, 한 사람의 믿음 c와 그 사람이 믿는 체계 s 속의 믿음 d,e,f,… 가 논리적으로 거의 일치하면 정당화된다. 만약 c가 더 많은 다른 믿음들과 일관될 경우, 그것은 더 강하게 정당화되었다고 말할 수 있다. 그러나 체계들을 넘어선 정당화를 요구할 경우 역시 참 개념에 관한 인식론자들의 어려움과 마찬가지로 난점에 직면한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인식론연습 발제>

 

지식에 관한 우리의 생각이 개인적인 의식의 사적인 자료들보다는 공적인 세계에서 시작된다는 것으로부터 무엇이 결과로서 일어나게 되는가?

 

 

  데카르트가 ‘명석하고 판명한’ 것을 지식이 갖춰야 할 조건으로 제시한 이후, 인식론을 연구하는 사람들에게 가장 중요한 개념 가운데 하나는 표상이다. 이들에 따르면 인간은 외부 세계가 실제로 어떤 식으로 생겼는지는 알기 힘들다. 외부 세계에 대한 정보를 제공해주는 감각이 여러 조건에 의해서 올바르지 않은 정보를 전달해주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다’ 라는, 존재 자체에 대한 진술은 정당화하기 힘들다. 그러나 마음에 떠오르는 것은 우리에게 ‘명석하고 판명하게’ 보인다. 마음은 외부 세계의 모습이 아니라 나와 언제나 함께하는 것의 특정한 형태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우리는 ‘~게 보인다’ 라는 진술은 정당화하기가 쉽고, 마음에 떠오르는 표상은 지식의 대상이 된다. 하지만 인식론의 역사 전체를 걸쳐서 드러났듯이, 표상을 지식의 대상으로 삼을 경우 우리가 지식으로 간주할 수 있는 것은 외부의 대상에 관한 명제가 아니다. 표상은 외부 대상을 그대로 반영하고 있는가? 그렇게 반영하고 있다는 것을 우리는 어떻게 알 수 있는가? 근대 인식론에 의해 생겨난 이러한 틈은 위와 같은 질문을 통해서 표현되었다.

 

  그러나 현대에 들어서 마음의 존재론적 지위를 의심하는 사람들이 생겨났다. 이들은 마음이 몸으로 환원된다고 생각하거나 마음의 존재가 부정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로티는 『철학과 자연의 거울』에서 마음과 몸 사이의 관계를 논하는 여러 입장을 검토하면서, 표상이 지식의 대상이라고 생각하는 것이 특정한 시기에 등장한 특정한 설명의 방식이라고 주장한다. 그는 이른바 ‘마음이 없는 사람들’이라는 사고실험을 통해, 마음과 관련한 표현들이 없다고 하더라도 아무런 실천적인 문제가 생기지 않는다고 논증한다. 이런 표현들이 없다고 하더라도 이론적, 실천적으로 일관된 설명의 체계를 제시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들은 단지 마음과 관련된 표현들과 관련한 또 다른 이론적인 문제(예를 들어 인식론적 틈 같은 것)에 부딪히지 않을 뿐이다.

 

  또한 그는 오히려 마음을 동원해서 우리의 지식과 실천을 설명하려 할 때 더 많은 문제가 발생한다고 생각한다. 이 경우 도대체 ‘표상’이라는 것이 무엇인가에 관해 더욱 복잡한 설명을 요구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항상 무언가를 인지하는 과정에 놓여있다. 로티는 이 과정을 설명할 수 있는 방식은 다양하고, 그 방식들은 각각이 사용하는 단어가 너무나도 다르기 때문에 이론들 자체를 상호 비교하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말한다. 그러나 우리는 그 모든 방식을 다 알 수 없을 뿐만 아니라, 일단 마음 개념을 동원해 이 과정을 설명하는 데 친숙하기 때문에 그렇게 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런 철학적인 문제가 덜 발생하는 것처럼 보이는 새로운 방식이 발견되면, 마음을 이용하는 방식 대신에 그 방식을 차용한다. 로티는 사실 마음 개념을 동원한 설명 역시 이와 마찬가지로, 데카르트가 살았던 당시에는 그의 주변을 둘러싼 다른 설명 방식에 비해 철학적인 문제가 덜 발생하는 방식이었을 것이라고 추측한다.

 

  그렇다면 마음을 둘러싸고 일어나는 여러 직관적인 현상들, 즉 마음에 떠오르는 것은 누구보다도 내가 더 잘 안다거나, 직접적으로 드러난다거나 확실하다거나 하는 현상은 어떻게 설명할 수 있는가? 로티는 이에 대해 제한된 몇 가지 방식을 자주 사용해서 생겨난 친숙함의 다른 표현이라고 답한다. 즉, 데카르트가 제시한 ‘명석-판명’한 표상을 통해 생겨난 지식이란 단지 자주 접했기 때문에 ‘명석-판명’하지 않은 다른 표상에 비해서 좀 더 자신과 가깝다고 느끼는 것에 불과하다. 그러므로 로티의 입장에서 지식을 정의하는 것은, 인식주체를 둘러싼 인식적 환경이 어떠한가가 매우 중요한 문제로 부각된다. 그 환경이 인식주체에게 어떤 것을 얼마만큼 보여주느냐에 따라서 무엇이 지식이 되는지가 달라지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 인식적 환경이 지식으로 제공해주는 것이 어떤 것일지는, 그 환경 속에서 특정한 인식주체보다 이전에 살아왔던 어떤 사람들이 무엇을 지식으로 인정했느냐에 의존적이다.

 

  그러므로 그의 논증은 ‘지식이란 무엇인가?’ 라는 질문은, 철학 특히 인식론이 답해야 할 질문이 아니라 (로티의 표현에 따르면) 지식사회학이나 과학사 연구에서 답을 찾을 수 있는 질문이라는 것으로 귀결된다. 이들 학문의 연구 대상이 바로 특정한 시공간에서 어떤 사람들이 지식으로 간주해던 것의 내용이나 특징들이기 때문이다. 또한 시공간을 넘어서 모든 시대에 보편적으로 적용될 수 있는 지식의 조건을 탐색하는 분야인 인식론의 의미도 퇴색된다. 지식사회학이나 과학사 연구의 성과들을 조망해보면, 그런 초월적 조건이 과연 있을지 의문을 일으키는 너무나도 다른 지식의 목록들이 발견되기 때문이다. 이러한 결론은 일반적으로 지식으로 간주되는 믿음들의 객관성을 떨어뜨리는 주장으로 받아들여진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인식론연습 발제>

 

 

방법론적 회의주의와 문제적 회의주의를 구별하는 것의 중요성은 무엇인가?

 

 

 

  방법론적 회의주의와 문제적 회의주의는 각각 의도하는 바가 전혀 다르다. 방법론적 회의주의는 지식을 찾기 위해 어떤 종류의 믿음을 지식이 아니라고 생각하는 과정이다. 모든 믿음은 지식이 될 가능성이 있다. 이 입장을 취하는 사람들은 가장 확실하고 의심할 수 없으며 다른 것에 의존적이지 않은 믿음 즉 절대적인 지식이 될 수 있는 믿음을 찾기 위해서, 모든 믿음들 가운데서 불확실하거나 의심해 볼 만 하거나 다른 것에 의존적인 믿음, 즉 단지 믿음에 불과하거나 상대적인 지식을 절대적인 지식의 후보들로부터 하나씩 배제해 나간다. 이 과정을 아주 철저하게 이행했음에도 불구하고 아직 배제되지 않은 믿음이 있다면, 그것은 아마도 절대적인 지식의 자격을 얻을 수 있게 될 것이다. 그러므로 방법론적 회의주의는 일반적으로 지식에 관한 회의주의자의 주장으로 알려져있는 ‘어떤 믿음도 지식이 될 수 없다.’는 것을 주장하지 않는다. 오히려 이들은 ‘어떤 믿음은 지식이 될 수 있다.’고 주장한다.

 

  이러한 방법론적 회의주의의 특징은 이를 가장 잘 보여주는 데카르트의 다음과 같은 언급에서 명백하게 찾아볼 수 있다. 그는 『성찰』의 요약에서 “전반적인 의심의 유용성은 단번에 나타나지는 않지만, 모든 선입견에서 우리를 벗어나게 하고, (중략) 우리가 마침내 참된 것으로 발견한 것에 대해서는 더 이상 의심할 수 없게 해 준다.”고 적고 있다. 실제로 그는 이 책에서 착각, 꿈, 전능한 악마의 가설을 제시하여, 왜 어떤 믿음은 지식이 되지 않을 수 있는지에 관해 설명한다. 물론 그는 실제로 회의주의자는 아니기 때문에, 착각, 꿈, 전능한 악마의 가설이 왜 가설에 불과한지, 그리고 우리가 명백하다고 생각하는 믿음은 대개 그렇게 명백하게 드러난 대로 외부에 실재하며 그러므로 그 믿음은 지식이라는 것 또한 논증한다. 이 논증이 믿을만한 것인지와는 별개로, 그의 방식은 기존의 회의주의적 논증들을 차용해 반회의주의적 결론에 이르는 방법론적 회의주의의 전형인 것은 확실하다.

 

  회의주의를 방법론적으로 이용한 것은, 사실 훨씬 이전부터 존재했지만 동 시대의 탐구 대상이자 지적인 풍토였던 문제적 회의주의의 영향이 크다. 여기서 문제적 회의주의란 어떤 종류의 믿음이 지식이 될 수 있는 이유를 찾는 과정을 뜻한다. 그러므로 어떤 종류의 믿음이 지식이 될 수 없는 이유를 탐색하는 방법론적 회의주의와는 방향이 완전히 반대다. 이 입장을 취하는 사람들은 어떤 믿음이 지식이 될 수 있다는 것은 인정하지만, 그것이 실제로 지식이 되기 전까지는 판단을 유보하고 어떻게 하면 어떤 믿음이 지식이 될 수 있는지에 관해 알아본다. 그래서 지식에 관한 어떤 이론이 어떤 믿음은 지식이 될 수 있다고 주장하고 그 조건을 제시할 때, 그 조건을 충족시키면 지식이 될 수 있는지에 관해 의문을 제기한다. 이 입장은 지식의 조건에 관해서는 언제나 유보적이고 확답을 내지 않는다. 그러므로 ‘모든 믿음은 지식이 될 수 없다.’고 주장하는 독단적 회의주의와는 다른, ‘문제를 일으키는(문제적인)’ 회의주의인 것이다.

 

  이런 태도는 섹스투스 엠피리쿠스의 『피론주의 개요』를 살펴보면 잘 알 수 있다. 이 책을 살펴보아야 하는 이유는 두 가지다. 첫째는 고대의 회의주의가 문제적 회의주의의 원형을 보여주고 있기 때문이다. 둘째, 데카르트를 전후한 시대에 유럽의 많은 지식인들이 이 책을 읽고 큰 충격을 받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데카르트가 이해한 회의주의란 바로 피론주의를 뜻한다. 이 책에 따르면 지식(진리, to alethe)을 탐구하는 사람의 태도는 세 가지로 나눠진다. 첫째는 진리가 있다고 주장하는 독단주의자(dogmatichoi), 둘째는 진리가 없다고 주장하는 독단주의자, 셋째는 주장하지 않고 탐구를 계속하는 피론주의자다. 셋째 부류의 인식론적 목표는 독단주의자들이 어떤 오류를 저지르는지 그리고 그들이 얼마나 신중하지 못하게 진리에 대해서 결론을 내리는지 보여주는 것이다. 피론주의자들은 모든 믿음이 감각기관으로부터 생겨난다는 것을, 믿음과 지식에 관한 가장 기본적인 전제로 생각한다. 그래서 이들은 ‘-게 보인다’는 현상(phainomenon, phantasia)에 관한 믿음은 확실성을 가지지만(지식인지 아닌지는 알 수 없다), 어떤 대상이 실제로 어떤가에 관한 믿음은 지식인지 아닌지 알 수 없다고 주장한다. 만약 어떤 대상이 실제로 어떤가에 관한 믿음이 생길 수 있다면, 그 믿음은 우리의 감각기관을 통해 우리에게 들어오는 여러 믿음에 의지할 것이다. 그러나 현상적 믿음은 감각주체의 조건, 감각하는 상황의 조건, 감각주체와 감각대상 사이의 관계의 조건에 의해서 아주 다양하게 만들어진다. 또한 이렇게 만들어진 믿음들은 모두 같은 정도의 설득력을 지닌다. 그러므로 우리는 어떤 믿음을 지식으로 해야할지 알 수 없게 되고, 현상에 관한 믿음들만을 지니게 되는 것이다.

 

  이 내용을 살펴보았을 때 데카르트가 대답하고자 했던 회의주의도 바로 후자에 해당한다는 것을 쉽게 알 수 있다. 그가 해결하고자 했던, 그리고 자기 스스로는 해결했다고 생각한 문제 가운데 하나가 바로 ‘만약 감각이 불확실하고 의심스럽고 상대적이라면, 감각을 통해 만들어진 어떤 믿음도 지식이 될 수 없다’는 주장이기 때문이다. 그는 『성찰』의 「제 6성찰」에서 “신체에 이로운 것에 대해 모든 감각은 거짓된 것보다는 참된 것을 지시하는 경우가 훨씬 더 많다는 것을 알게 되었고, (중략) 오류의 모든 원인을 폭로한 오성을 사용할 수 있기 때문에, (중략) 오히려 지난 며칠 동안의 온갖 과장된 의심을 우스꽝스러운 것으로 일축해 버려야 할 것이다”라고 적고 있다. 그러므로 『성찰』과 『피론주의 개요』를 비교해보면 우리는 방법론적 회의주의와 문제적 회의주의를 구분할 수 있다. 그리고 이 둘을 구분하는 것이 중요한 이유는, 어떤 믿음이 지식이 될 가능성에 관해 두 입장이 서로 완전히 다른 대답을 내놓기 때문이다. 그 대답에 따라, 그 대답을 도출하는 과정에서 제시된 회의주의적 논증의 의미는 크게 달라진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