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년 마르크스주의와 현대사회 숙제.>

 

   알튀세르는 마르크스주의 역사에서 손꼽힐만한 논쟁의 중심에 있다. 사상사적으로 여러 조류를 방법론적으로 복잡하게 원용한 것이 가장 중요한 이유겠지만, 이것을 넘어선 부분들 까지도 논쟁의 대상이 되었다. 이는 그의 사상의 대담성과 독특함보다는, 생존 당시 모호한 정치적 개입1과 개인의 비극 등 사상외적인 여러가지 요소들이 뒤엉킨 모습이다.

   하지만 현재는 여간해서는 알튀세르를 찾아보기 힘든 것 같다. 무엇보다도 마르크스주의 사상가라는 점이 가장 큰 이유일 것이다. 현실사회주의의 몰락 이후, 사람들은 더 이상 마르크스주의에 관심을 가지지 않기 때문이다. 또한 알튀세르가 차용한 여러가지 철학적 방법론과 담론 역시, 알튀세를 통해서 연구된다기 보다는, 그 자체로서 이미 충분한 연구성과를 드러내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세히 들여다보면 여전히 알튀세르와 비슷한 모습이 곳곳에 남아있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마르크스의 사상은 과학이다.’라는 알튀세르의 주장 아래, 주류 경제학과 다른 독창적인 과학으로서의 마르크스주의 경제학의 토대가 마련되었다. 다른 면에서보면, 알튀세르의 마르크스 독해방식은 데리다의 철학책 읽기 방식에 비판적으로 계승되어 현재도 큰 영향을 끼치고 있다. 알튀세르의 이데올로기에 대한 참신한 접근은 여전히 유효한 측면이 있어 보이기도 한다. 또한 마르크스의 사상을 변형하거나 창조적인 유지를 꾀하려는 사람들 역시, 알튀세르의 전략을 거의 그대로 이용하여 알튀세르에 기대고 있다.

   그렇다면, 알튀세르에 대해 한번쯤 들여다봄으로써 그의 자취를 밟아나가는 것이, 알튀세르가 죽은 지금의 시점에서도 전혀 무의미한 일은 아니다. 이 글에서는 알튀세르의 입장에 대해 요약해보고, 그에 대한 여러 입장과 비판적인 시선을 적어볼 것이다. 특히 알튀세르의 초기 저서에 속하는 『마르크스를 위하여』와 『자본론을 읽는다』를 알튀세르의 사상으로 간주하고 접근할 것이다.

   우선 알튀세르가 생존했던 당시의 프랑스의 마르크스주의에 대해 알아보는 것이 중요하다. 알튀세르의 이론적인 작업은, 그 자신이 홀로 체계를 세우는 방법보다는, 당시 정세에 대한 글을 때에 맞게 써내는 모양을 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마르크스를 위하여』는 바로 이런 글을 한데 모아 엮어놓은 책이기도 하다. 알튀세르 스스로도 서문에서 이런 점을 밝히고 있다.

   알튀세르의 설명을 직접 들어보면, 당시 프랑스의 마르크스주의는 다음과 같은 상황에 처해있었다: 프랑스는 다른 나라와 다르게, 부르주아 계급이 혁명적이라는 특징을 띈다. 그래서인지, 사회개혁적인 성향을 띈 지식인들은 프롤레타리아 계급에게 의존해 이론을 만들기보다는, 혁명적인 부르주아들을 정당화할 수 있는 체계를 만들어왔다. 그 결과, 과학적인 마르크스가 자리잡지 못하고 계몽주의적 인본주의, 프루동식 무정부주의, 노동조합주의가 자리를 잡았다. 이 가운데서 마르크스의 과학적인 공산주의는 설 자리를 잃었고, 과학을 잃은 프랑스의 혁명 사상은 무질서하고 무체계한 행동중심주의에 빠져있다.

   알튀세르는 이런 행동중심주의에 이론적으로 개입하려는 의도를 가지고 있었다. 즉, 행동중심주의를 정당화하려는 여러가지 이데올로기에 맞서서, 과학적이고 엄밀한 마르크스주의를 프랑스에 뿌리내리게 하려는 뜻을 내비친 것이다. 나아가서 프랑스 뿐만이 아니라 유럽 전체를 휩쓸고 있는 행동중심주의에 대해 비판하고, 마르크스주의의 새로운 흐름을 만들어보려고 시도했다.

   하지만 이런 면과 동시에 고려해야하는 점이 있었는데, 그것은 바로 코민테른을 중심으로 각국의공산당을 지배하고 있던 스탈린의 노선이었다. 러시아 혁명 이후 마르크스주의 지식인들은 (당혹감을 감추지 못하면서도 어쨌든) 공산주의 국가의 현실화에 환영했다. 그러나 알튀세르가 살아가던 시기에는, 감추어졌던 극심한 관료주의적 폐해와 비인간적 폭력성과 이를 뒷받침하는 이론적 결함이 서서히 드러나고 있었다. 따라서 이 입장에도 비판적인 자세를 취해야만 했던 것이다. 당시에 이는 ‘교조주의’라는 이름으로 비판받고 있었고, 알튀세르 역시 여기에 충분한 공감을 표시했다.

   하지만 이는 쉽지만은 않은 작업이다. 알튀세르가 비판하는 행동중심주의적인 마르크스주의 이론은, 사실 이런 교조주의에 대한 가장 강력한 비판이기 때문이다. 교조주의자들이 설명하는 공산주의를 향한 기계적 진행, 생산관계에 따라 결정되는 인간관, 맹목적으로 발전을 추종하는 태도 등에 대해, 행동중심주의자들은 역사를 창조하는 인간, 주체적인 속성, 윤리적인 판단을 할 수 있는 특별한 존재 등의 개념을 들어 반박하였다. 그리고 이런 믿음은 실제로 당시 사회변혁을 주도한 원동력이기도 했다.

   이 가운데서 알튀세르는, 그 모두가 마르크스의 참모습이 아니라고 비판한다. 자신의 주장을 정당화하기 위해, 알튀세르는 마르크스의 사상을 ‘과학’으로 격상시키고, 나머지 다른 조류를 ‘이데올로기’로 격하시키는 전략을 구사한다. 이런 주장을 하기 위해서는 두 가지 설명이 필요하다. 하나는 당시에 성행하던 마르크스주의의 조류들이 왜 ‘이데올로기’인지, 나머지 하나는 마르크스의 사상은 다른 이데올로기들과 어떤 면에서 다르며 왜 과학일 수 있는지. 이 두 문제는 별개의 문제가 아니다. 알튀세르에게 과학과 이데올로기는 반대개념으로서, 과학을 어떻게 정의하느냐에 따라 이데올로기 또한 정의되기 때문이다. 과학의 요소를 마르크스 안에서 찾아낸다면, ‘이데올로기적인’ 마르크스 독해는 분명한 오독이 된다. 알튀세르는 이 작업에 초점을 맞추고, 다시 마르크스가 직접 쓴 책인 『자본론』으로 돌아간다. 이 책이 바로 『자본론 강독』이다.

   알튀세르는 ‘진짜 마르크스’를 읽어내기 위한 방법으로 세 가지 도구를 제시한다 : 첫째는 문답구조problematique, 둘째는 인식론적 단절epistemological break, 셋째는 증후적인 해석symptomic
reading. 알튀세르는 『마르크스를 위하여』 서문에서 첫째 도구는 자크 마르탱에게, 둘째 도구는 가스통 바슐라르에게 빌려왔음을 명백히 밝히고 있다. 셋째 도구는 라캉의 구조주의적 정신분석학의 영향을 받았거나, 적어도 매우 유사하다고 알려져있다. 이 세 도구가 어떻게 마르크스의 과학성을 확보하는지 살펴보자.

   문답구조는 과학과 이데올로기를 가르는 가장 중요한 기준이다. 문답구조는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을 가려내주는 조건, 즉 인식을 가능하게 해주는 조건이다. 알튀세르는, 자본론이 이런 문답구조를 텍스트 안에 지니고 있고, 그 안에서 이론적인 개념의 조작을 통해 과학으로서의 지위를 갖추었다고 말한다. 이에 비해서 다른 ‘이데올로기’들은, 문제틀 없이 주체가 대상의 본질을 객관적으로 인식할 수 있다고 암암리에 가정하고 있다. 알튀세르는 이런 관점을 주체의 경험주의 내지는 본질의 관념론이라고 이름붙이고 있다. 이런 근거없는 가정은 비과학적인 것이고, 따라서 이데올로기로 격하될 수 밖에 없다.

   이 관점은 매우 중요한 점을 시사하고 있다. 즉, 인간의 인식을 결정하는 구조가 경험적 세계와는 상관없이 구성이 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며, 오히려 경험적 세계를 가정하는 것이 비과학적인 것으로 바뀌어버린다. 따라서 주체의 의지에서 발현된 행동을 사회(경험적 세계)변혁의 핵심적인 요소로 보는 사람들은 ‘주체’를 비과학적으로 가정하고 있고, 기계적으로 이행한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은 경험적 세계가 주체에 온전히 반영된다고 비과학적으로 가정하고 있다는 결론을 내릴 수 있게 된다. 중요한 점은, 알튀세르는 이것을 자신의 해석이 아니라 ‘마르크스가 이렇게 말했다.’고 이야기한다는 점이다.

   둘째는 인식론적 단절이다. 가스통 바슐라르는 인식론적 단절을, 비과학에서 과학으로 이행하는 과정에서 필연적으로 나타나는 현상으로 이해하였다. 비과학적이고 미신적인 세계에서 과학으로 이행하는 과정은, 단순히 경험적인 자료와 연구의 축적에 의해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인식의 틀(알튀세르의 ‘문답구조’)을 획기적으로 바꾸어버리는 불연속적인 과정을 거친다는 것이 이 개념의 핵심이다. 알튀세르는 이 개념을 빌려, 마르크스 역시 이런 불연속적인 과정을 거쳐 마르크스가 과학을 확립하였다고 말한다. 『마르크스를 위하여』에는 이런 단절이 나타나는 부분을 네 시기로 나누어서 서술하고 있다.

   마르크스에게서 나타나는 인식론적 단절은, 다름아닌 이데올로기에서 과학으로 이행하는 과정에서 나타나는 인식론적 단절이다. 마르크스 역시 표현할 수 있는 언어와 개념의 한계를 벗어나지 못하기 때문에, 그리고 그런 개념으로 학습해왔기 때문에 어쩔 수 없는 한계가 규정된다. 알튀세르에게 이 때 마르크스의 사상은 칸트와 피히테의 합리주의적이고 자유주의적인 인간주의, 유적 본질을 가정하는 포이에르바하의 공동체적 인간주의와 다를 것이 없다. 하지만 이런 이데올로기적인 근거없는 가정을 자신의 학문에서 배제시켜나감으로써 마르크스는 자신의 과학을 완성하게 된다.

   하지만 여전히 문제는 남는다. 바로 마르크스가 사용하는 언어와 표현의 한계에 대한 문제이다. 새로운 과학을 정립하고, 그것에 대해 기술하긴 하지만 여전히 마르크스는 당시에 자신이 학습한 철학적인 단어들을 사용해 새로운 과학을 정립하고 있다. 그래서 마르크스의 텍스트는 헤겔에 기반한 이데올로기와 마르크스의 새로운 과학이라는 두 가지의 의미를 동시에 띌 수 밖에 없다. 바로 이 단계에서 알튀세르는 헤겔에 기반한 요소를 제거하고, 과학만을 읽어내기 위한 방법으로서 증후적 해석을시도한다.

   알튀세르가 쓴 『자본론 강독』에서 이 증후적 해석은 두 단계로 나누어진다. 하나는 무결한 해석innocent reading이다. 마치 경험적 세계를 인간이 그대로 인식할 수 있다고 믿는 것과 같이, 텍스트가 의미하는 본질적인 내용이 있고 인간은 그것을 읽어내는 것이 독해라는 입장이다. 다른 하나는 무결한 해석에 반대되는 해석으로서의 불결한 해석guilty reading이다. 이는 텍스트를 기호로 파악하고, 이런 기호에 무의식적으로 반영된 심층적 구조를 파악해내는 것이다. 이를 통해 이 구조에서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을 가려내고, 직접적인 것 같지만 사실은 불투명한 이 구조를 그려내는 것을 목표로 삼는다. 증후적 해석은 이 가운데 불결한 해석에 초점을 두고, 알튀세르는 마르크스를 불결하게 읽어냄으로써 마르크스의 과학성을 청년 마르크스로부터 떨어뜨리고, 동시에 고전적인 정치경제학을 증후적으로 해석하는 독자로서의 마르크스를 제시한다.

   알튀세르의 위와 같은 마르크스읽기 시도는, 여는 글에서도 거론했듯이 많은 논란을 불러일으켰다. 논란을 일으킨 만큼, 알튀세르에 대한 평가 또한 다양하다. 그 가운데는 모순되는 평가가 있을 정도이다. 이런 여러가지 평가 가운데, 알튀세르에게 가장 강력한 비판으로 자리할 수 있는 것은 두 가지가 있다고 생각한다. 첫째는 알튀세르 스스로가 이데올로기적 개념이라고 치부한 주체 개념에 대한 문제이다. 둘째는 이런 주체에 대한 관점과 관련한 사회변혁에 대한 문제이다.

   알튀세르는 대상의 본질에 대한 인식을 수행하는 주체라는 개념을 비과학적이라는 이유를 내세워 결함이 있다고 판단한다. 또한 이런 내용을 마르크스가 직접 쓴 책을 읽어내려가는 작업을 통해 ‘마르크스가 말했다.’고 말하고 있다. 이것을 그는 이론적인 반인간주의라고 표현했다. 하지만 이는 사실상, 자신이 비판하고 있는 기계적인 체제 이행을 주장하는 사람들의 입장에서 주체가 아무런 역할을 할 수 없는 것과 똑같은 이론적인 체계를 지니고 있을 뿐이다.18 단지 예전에는 ‘경제’가 들어가있던 자리에 ‘(복잡한) 구조’가 들어갈 뿐이다. 어느 쪽을 선택하든지 간에 인간이 아무런 역할을 할 수가 없음은 자명하게 드러난다.

   또한, 현실정치에서 일어나는 모든 변혁에 관련된 사건들은 바로 알튀세르가 비판한 이론적 인간주의로부터 출발한다. 물론 그는 실천적인 의미에서의 현실적 인간주의에는 어느 정도 부드러운 자세를 취하고 있긴 하지만, 현실적 인간주의는 결국에 이론적 인간주의를 토대로 실천을 실행할 수 밖에 없는 입장에 처해있다. 이론적으로 인간을 부각시키고, 인간에게 특별한 지위를 부여해야지만 논리적으로 현실에서 비인간적인 자본주의 사회로부터 인간을 꺼내는 움직임을 시행해야한다는 당위를 이끌어낼 수 있다. 이같은 과정이 없다면 그저 사실에만 매달려 현실을 정당화하는 길로 빠져들 수 밖에 없다. 이론적인 인간주의가 표방하는 당위나 본질은, 이론 그 자체로서 실천적인 의미를 배태하고 있기 때문에 단순히 비과학적이라는 이유만으로는 물리칠 수 없는 무게가 있다.

   이것과 연관되게, 주체는 인식의 주체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정치적 행동의 주체이기도 하다. 또한 정치적인 인식과 정치적인 행동은 따로 떨어뜨려 생각할 수 없을만큼 밀접한 관련을 가질 수 밖에 없다. 인식의 주체를 이론적으로 없애버리는 작업은, 정치적 행동의 주체를 이론적으로 없애버리는 것과 대개 일치한다. 하지만 마르크스의 최종적인 목표가 자본주의 사회를 넘어선 새로운 형식으로의 이행이라고 생각한다면, 그것을 이행할 인격이 논리적으로 사라지는 것은 이론적으로 심각한 문제가 아닐 수 없다.

   알튀세르의 마르크스 독해는, 다른 철학자들의 도구를 끌어들여 사람들이 전혀 생각하지 못한 결과를 이끌어낸, 일종의 발상의 전환이었다. 알튀세르의 이런 연구를 통해 마르크스주의자들은 지금까지 볼 수 없었던 마르크스의 면모, 다른 철학자와 마르크스의 결합, 혹은 헤겔로부터 떨어진 마르크스 등 다양한 모습을 발견할 수 있었다. 또한 과학이라는 이름을 마르크스가 비판했던 기계적 유물론과 동치시켜 수많은 폐해를 불러온 공산주의의 모습을, 이론적으로나마 다시 과학의 이름으로 세우고 정당화시키는 데 큰 공헌을 했다고 볼 수 있다.

   하지만 그 과정에서 이론적 반인간주의를 택한 댓가는 역시 이론적으로 혹독했다. 인간은 정치적 변혁으로부터 거세당하였다. 그리고 세계를 능동적으로 해석할 수 있는 기회조차 잃어버렸다. 또한 그것이 과연 마르크스의 진짜 의도와 같았을까 역시 의문을 제기할 수 있는 부분이다. 정치는 그 정의상 주체성을 지닌 인간들이 모여서 하는 행위이기 때문이다. 이 부분에 대한 배려가 잘 드러나지 않는 것은, 가장 직관적이면서도 또한 가장 강력한 알튀세르에 대한 비판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참고문헌

1차 자료

Louis Althusser, 『맑스를 위하여』(이종영 옮김), 서울 ; 백의, 1997
Louis Althusser and Etienne Balibar, Reading Capital, London ; NLB, 1970

 


 

 

 

 

 

 

 

 

 

 

 


 

논문

류승무, 「구조주의 맑시즘에 대한 비판적 검토」, 《중앙승가대학 교수논문집》, 1993
양종근, 「알튀세르의 맑스주의와 주체」, 《문예미학》, 2002.10



단행본

Miriam Glucksmann, 『구조주의와 현대마르크시즘』(정수복 옮김), 서울 ; 한울, 1984
Edith Kurzweil, 『구조주의의 시대』(이광래 옮김), 서울 ; 종로서적, 1983



기타

2009년 고려대학교 대학원 총학생회 주최 윤소영 교수 『자본』 강의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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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년 대중문화시대의 문학읽기 숙제. 편혜영,맨홀」감상.>

 

   편혜영의 소설을 보며 두 가지를 생각할 수 있었다. 하나는, 과학관과 정치조직이 이성을 앞세운 폭력이라는 생각이다. 그런 면에서 맨홀, 도스토예프스키의 지하로부터의 수기에 나오는 주인공이 살아가는 지하실을 떠올리게 한다. 다른 하나는, 묘사의 폭력성과 불편함, 께름칙함 같은 것에서 박찬욱 감독의 잔혹극을 연상시켰다.(오히려 맨홀은 이런 면에서 그 표현수위가 덜한 것 같고, 이 단편이 실린 아오이가든에는 더욱 잔혹한 것들도 있었다.)


   「
맨홀이 구축한 세계에서 구원의 가능성은 없다. 맨홀 위에서 세계를 통제하는 여러 가지 도구와 제도는 결코 행복을 약속하지 않는다. 윤리적인 면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정부와 그 세계의 사람들. 아무런 의식 없이 과학의 이름으로 생물-나아가서 인간-을 가차없이 난도질하는 모습에서 인간은 과연 무엇을 찾아갈 수 있을까? 이 세계에서 인간의 존재는 어떤 지위를 지니고, 얼마만한 가치를 지닐 수 있을지 가늠하기 힘들다. 아마 없을 것이다.


   맨홀 밑 세계는
, 분명 맨홀 위 세계의 이면으로서 존재한다. 이런 면에서 맨홀은 이원적이다. 하지만 이 분리는 공간적이기만 할 뿐, 가치의 측면에서는 동일하다. 이 곳은 그야말로 야만, 문명 이전의 세계를 그대로 구현하고 있다. 그것마저도 낭만적이고 목가적인 요소는 쏙 빠진 채, 날것으로서 드러나는 비과학적 양태로서만 그려질 뿐이다


   이로써 레밍의 알레고리가 의미하는 바가 드러난다
. 레밍은, 지하에 사는 모든 맨홀생활자들의 대표이다. 맨홀 아래 생활하며, 야만 상태에서 벗어나지 않는다. 그런 세계인식은 서식지이동을 위해 맨홀 위 세계에 올라와서도 크게 달라지지 않는다. 결국 이 모든 폭압적 세계로부터 벗어날 수 있는 방법은, 자신의 모든 것을 내던져 죽음에 이르는 것 말고는 없다. 그래서 그 죽음은 고통스럽지 않으며, 모든 것을 벗어버리는 형태를 띄는 것이다.


   하지만
, 적어도, 세계 안에서 살아있는 동안은 철저하게 구조적인 폭압에 묶여있을 수 밖에 없다. 맨홀 내에서는 불안과 고통, 본능적 공포에 지배당하고, 맨홀 밖에서는 강압적 관료체계, 인간의 대상화(사물화?)에 방어 없이 노출된다. 여기에서 인간의 출구란 없다. 끝내 과학관을 빛처럼 바라보던 주인공 둘의 희망은 한낱 착각이나 환상이었음이 폭로된다. 이런 이원적인 세계관은 지하실과 지하실 밖의 세계를 나누는 지하로부터의 수기와 꼭 닮아있다.


   이를 표현하는 작가의 표현방식 또한 독특하다
. 맨홀에서는 양쪽 세계의 잔인함에 대해 그다지 감추려고 하지 않는다. 그것을 있는 그대로 기술하는 방식을 택하고 있는 것이다. 그마저도, 최대한 직접적이고 단정적이며 가장 강도가 높은 비유를 사용하여 표현한다. 그 수위가 간혹 위악적이라고 느껴질 정도이다. ‘굳이 이런 표현을 써야만했을까?’ 라며 눈살을 찌푸리고 역겨움이 생겨날만한 면모가 가득한 것이다.


   게다가
, 이를 서술하는 태도가 지극히 무미건조하다. 맨홀을 포함한 다른 단편 모두가, 아주 짧은 문장으로 이루어져있따. 참으로 인상적이다. 할 말만 하겠다, 굳이 자질구레하게 설명할 것 없다, 는 식으로 일관하는 것이다. 이 대목에서, 상상할 수 있는 모든 잔인함을 능청스럽게 화면에 담아내는 박찬욱 감독의 영화(특히 복수 3부작인 복수는 나의 것, 올드보이, 친절한 금자씨)를 떠올리게 한다.


   탈출구 없는 이 소설은 그래서 답답하기만하다
. 심지어는 스스로를 해부대상화, 박제화 시키는 아포리아는, 이런 답답함에 대한 가치판단마저도 유보해버린다. 이렇게 철저하게 답을 없애버리는 세계관은, 답을 없애는 그 과정의 고찰에 의해서 단순히 소설 맨홀, 나아가 작가 개개인의 세계관이 아니라 현실에 대한 독특한 형상화임을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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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년 대중문화시대의 문학읽기 숙제. 박민규, 그렇습니까? 기린입니다」감상.>


   박민규가 쓴 글은 언제나
근대적인 체계를 목표로 삼는다. 그리고 그 목표를 노리는 목적은, 체계를 파괴하는 것이다. 형식적으로는, 기존 산문과 다른 과감한 줄띄우기, 화자가 모호한 대화, 판타지적 요소를 표현에 직접 도입하는 시도 등을 꼽을 수 있다. 반면 내용을 봤을 때는, 근대가 완성되었을 때 나타나는 자본주의 경제체제에 대한 비판을 끈질기게 놓치지 않는다. 미국을 대표하는 가치관에 대한 반항을 상징적으로 묘사한 지구영웅전설을 비롯해, 삼미 슈퍼스타즈의 마지막 팬클럽, 그리고 카스테라에 실린 그렇습니까? 기린입니다.를 비롯한 단편 모두가 이런 경향을 반영한다고 보아도 과언은 아니다.


   「
그렇습니까? 기린입니다., 비정규직 상업고등학교 학생의 입을 빌려 자본주의 한국 사회에서 살아가는 사람을 그려낸다. 주인공을 선정하는 일부터, 지은이가 보여주려는 것을 대강 드러내준다. 한국에서 볼 수 있는 현실을 고려해보았을 때, 주인공이 처한 상황은 인문계/비인문계로 그려지는 경계선에서 주변부일 뿐만 아니라, 정규직/비정규직의 구분에서도 약자에 속한다. 이런 설정을 통해 보여줄 수 있는 모습은, 아무리 잘 꾸미더라도 결국 이 사회의 수많은 불합리 가운데 하나일 수 밖에 없는 것이다.


   이 글의 배경인 자본주의 한국 사회를 보여주는 상징은
, 그 상징 자체로서 드러나지는 않는다. 하지만, ‘다른 세계와 대비되기 때문에, 오히려 직접 보여줄 때보다 더욱 뚜렷하게 드러난다. 바로 지구라고 뭉뚱그릴 수 있는 세계가 그렇다. 이 상징은 글 전체를 통하여 지구/화성, 지구/금성, 지구/하와이 등으로 나타난다. 주인공은 항상 화성/금성/하와이의 모습을 상상하고 부러워하면서, 정작 자신은 비관하는 사람 그 자체일 뿐이다. 구체적인 불만을 뱉어내지 않는 것이다. 대신 이를 직접적인 불만이 아니라 계절에 대한 짜증, 불만족에서 나올 수 있는 동경 등으로 바꾸어 늘어놓는다.


   이 지구의 삶이 바로
산수. 인간의 산수란, 모든 가치와 사물이 화폐로 편입되는 자본주의의 정점과 별로 다를 게 없다. 아니, 그 자체다. 아버지의 산수, 주인공의 산수, 어떤 이의 산수 모두 끝내 가치가 탈바꿈한 화폐의 더하기-빼기일 뿐이다. 그래서 수학까지 가는 삶도 별로 없으며, 산수에서 벗어나는 삶도 없다. 여기에 포섭된 주인공은 노동도, 가치도, 인간도, 게다가 가족마저도 시급으로 환산하는 웃을 수 없는 독백을 날것으로 드러낸다. 푸시맨이라는 직업마저도, 산수의 세계로 나아가는 수단인 지하철 안으로 사람을 밀어넣는 존재로서 기능하며, 지붕 위에 붕 떠오른 모습은 일탈에 의한 사회적인 죽음에 다름아닌 상태다.


   이 관점을 견지했을 때
, 세계는 비관적이기만 할 뿐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그대로 산수의 세계에 주저앉을 수밖에 없는가? 어쩌면 인간은 본래 그런 산수적인 존재일까? 다소 모호하긴 하지만, 이것을 다르게 생각해볼 수 있는 또 다른 대립구도가 등장한다. 잘 살펴보면, 이런 생각이 들 때마다 어김없이 동요가 등장한다. 주인공 뿐만 아니라, 과자에 집착하는 감독 역시 마찬가지다. 자본주의의 강요를 몸이 감당할 수 없는 순간, 산수로부터 해방된 삶의 단초가 등장하는 것이다. 바로, 산수에 편입되기 전 아동의 모습, 즉 성인/유아 대립이다. 또한, 주인공이 아닌 존재에게도 이런 모습이 나타나는 것으로 미루어보았을 때, 그리고 산수하는 삶에 대한 거부가 아동의 모습으로 보이는 것을 고려한다면, 인간은 분명 산수가 아닌 다른 삶을 바란다고 볼 수 있다.


   「
그렇습니까? 기린입니다.는 한국 사회 속에서 자본주의를 체화하며 살고있지만, 근원적으로는 그 삶을 거부하려는 사람들을 대립구도를 통해 압축해서 드러내고 있다. 물론 글 속에서 다른 사회가 가능한지, 어떻게 구현해야하는지는 등장하지 않는다. 다만, 기린을 아버지로 믿는, 또는 아버지가 기린으로 바뀌는 모습을 써보이며, 그것이 아직은 판타지에 가까운 상상의 영역임을 암시할 뿐이다. 하지만, 이 글을 읽으며 산수하는 삶에 대해 한번쯤 돌아보는 것 자체가, 어쩌면 더 큰 의미일 수도 있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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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년 대중문화시대의 문학읽기 숙제. 김애란,「누가 해변에서 함부로 불꽃놀이를 하는가」감상평>

 

   김애란이 쓰는 글은, 서사나 설정 자체보다는 문장 하나하나에 담긴 번뜩이는 재치에 무게가 실려있다는 느낌을 준다. 특히, 전혀 연관이 없을 것 같은 것들 사이의 수사법으로 독자에게 독특한 느낌을 주는 데 매우 능하다. 하지만 그 사이에는 분명 직관적인 연관이 숨어있다. 다시 말해, 지은이는 문장을 완성하기 위해 브레인스토밍을 해보고, 그 중간과정을 생략한 채 처음 심상과 끝 심상만 덩그러니 제시하는 것이다(김애란의 다른 단편인 종이 물고기는 이런 기법으로 소설을 쓰는 작가 자신에 대한 자전적인 단편이라고도 볼 수 있다.) 이 연관을 찾는 과정에 독자가 능동적으로 참여하는 것이, 김애란 글 읽기의 재미라고 할 수 있겠다.


   「
누가 해변에서 함부로 불꽃놀이를 하는가, 김애란 특유의 소설 기법과, 아이들이 한번쯤 궁금해하는 탄생의 과정에 대한 호기심이라는 소재가 결합한 결과라고 볼 수 있다. 어떻게 생각하면 누구나 할 수 있는 뻔한 질문이다. 하지만 글쓴이는 대답하기에 난감한 상황과 이에 대한 (김애란식) 비유와 포장을 덧씌워 새로운 느낌, 전에 찾아보기 힘든 독특한 발상으로 소재의 일상적 식상함을 보기좋게 극복해낸다.


   성인이면 누구나 알 듯
, 아이는 성관계를 통해 의미있는 개체로서 세계에 등장한다. 성관계-그리고 좀 더 넓은 의미에서 성애 행위라고 말할 수 있는 장면은 이 소설 안에서도 충분히 묘사되고 있다. 하지만 이것이 직접 서술되지는 않으며, 폭죽과 비누방울이라는 비유를 한번 쓴 채로 그려진다. 그래서 성애행위를 그리면서도 선정적이지 않고, 더러 유아적인 느낌까지 받을 수 있는 것이다. 성기에서 발사돼 하늘에서 방사되는(그것도 그 많은 폭죽 가운데서도 방사되는 형태의) 폭죽, 키스와 함께 등장하는 비누방울, 그리고 그 두 가지 비유가 등장하는 황당한 과정들. 사실 이런 설명은 우리가 흔히 아이들에게 들려주는 손 잡고 잤더니 생겼다.’, ‘배꼽에서 나왔다.’ 같은 것과 크게 다르지 않다. 단지 그 모양이든 질감에 있어서든, 가만히 생각해볼 때 성인이 알고 있는 모습과 직관적으로 유사한 점이 있는지, 아니면 없는가의 차이일 뿐이다.


   그렇기 때문에 아버지의 해명은 거짓말인 동시에 진실이다
. 아버지에게 그마만한 문학적 감수성이 있다는 것이 약간 놀랍긴 하지만, 어쨌든 적나라한 면들은 피하면서, 훌륭하게 탄생과정에 대해 설명한 셈이 되었다. 아들 역시 그런 아버지의 설명이, 글자 그대로 받아들이기 힘든 이야기라는 걸 알면서도, 그 거대한 문학적 비유를 부드럽게 수용하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정작, 진짜 이야기가 시작되려는 순간 잠들어버리는 것이 아닐까?


   아버지가 건네는 이야기를 들으며
, 아들은 점점 자신의 근원과 의미에 대한 이해를 넓혀간다. 어쩌면, 아버지를 거부하려던 시기에 겪은 필연적인 성장통이었을지도 모를 일이다. 복어 알에 대한 비유에서 방사된 폭죽(그러니까 이를테면 정자들)으로, 그리고 다시 폭죽에서 비롯된 다른 존재들에 대한 인식과 아버지에 대한 이해로 연결되는 이 소설 전체의 뼈대는, 유아에서 성인으로 성장하는 인간의 정신적 발전과 많이 닮아있다. 역시나 이 전환의 중요한 계기는, 아버지에게서 들은 성애행위(관계)에 대한 간접적 체험일 것이다.


   이 소설에는
, 이 모든 과정이 김애란 특유의 수사를 통해 재미있고 유아적으로 묻어난다. 또한 조금은 과장되고 뜬금없지만 유쾌한 백과사전식 위트는, 크게 벗어나지 않는 수준에서 글을 더욱 읽기 좋게 만들어주는 요소가 아닐까 생각한다. 얼핏 선정적인 제목만큼이나, 성관계에 대해 이렇게 유치하게 재미있게 쓰기도, 힘들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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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년 계몽과 근대사상 숙제>

 

서론 : 라이프니츠의 과제와 연구의 토대

 

라이프니츠가 살았던 시기가 역사적으로 근대라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그것은 단순히 그의 성장배경이 되었을 뿐만 아니라, 그가 자신의 철학을 정립할 수 있는 환경을 제공해주었기 때문이다. 특히 당대에 가장 강력한 영향을 끼치고 있던 두 철학, 즉 데카르트가 정립한 본유관념을 토대로 한 이성중심주의 철학과, 로크로 대표되고 영국을 중심으로 독특한 전통을 형성하고 있던 경험중심주의 철학은 그가 극복해야 하는 가장 큰 벽이었다. 또한 데카르트 특유의 이원론으로부터 탄생하는 여러 가지 논리적 난점을 극복하려 시도한 스피노자의 철학 역시 그가 맞서야 하는 대상이었다.

이와 같은 학문들과 동시대에 살았던 것, 그리고 이들을 극복하는 것이 라이프니츠의 과제라고 한다면, 그가 확립하고자 했던 것은 각 철학의 단점과 논리적 모순점들을 뛰어넘는 새로운 철학의 체계였다. 다시 말해, 그는 데카르트가 설정한 영혼과 물질이라는 두 가지 실체 사이의 관계에 대한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방법을 제시하여야 했으며, 또한 경험의 잡다함으로부터 자연의 법칙을 파악할 수 있는 인간의 능력을 구출해야 했다. 또한 이를 뛰어넘는 것으로 제시된 스피노자의 철학이 보여주는 개별자의 침잠, 즉 그가 제시하는 신 개념에 모두 종속되는 개별자들의 지위 또한 철학적으로 정당화해야했다.

이런 작업을 하기 위해서 라이프니츠는 당시 많은 사람들에게 배척받고 있던 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을 복권시켜 형이상학적인 체계의 정립을 시도했다. 하지만 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은 당시에 발달하고 있던 자연과학이 내세우고 있던 자연기계론적인 형이상학과는 배치된다고 여겨지는 경우가 보통이었고, 그 기계론은 스콜라 철학에 대항해서 복권된 플라톤주의의 기하학주의에 의해 체계를 정립하고 있었다. 라이프니츠는 이 자연기계론을 내세우는 당대의 많은 지성들과의 서간논쟁을 통해, 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의 목적론적 성격을 끌어들여 자연기계론적인 철학을 설명하려했다.

라이프니츠의 철학은 두 가지 뿌리에서 출발한다고 볼 수 있다. 하나는 스콜라 철학과 그 토대가 되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 체계이다. 모든 실체는 자신이 지향해야 하는 목적성을 자기 안에 내재하고 있다. 그것을 발현함으로써 이 세계에 자신의 존재를 드러내며 현존하고, 이들 모두가 쌓인 세계가 바로 지금 우리가 느끼는 세계이다. 라이프니츠는 이러한 아리스토텔레스의 형이상학 체계를 대폭 수용하였다. 나아가 아리스토텔레스의 형이상학을 근대적인 모습에 알맞게 발전적으로 탈바꿈하는 데 주력하였다. 이런 면모는 라이프니츠의 형이상학 체계가 근본적으로 목적론적으로 구성되어 있음을 볼 때 쉽게 확인할 수 있다. 이런 발상은 당시에 매우 독특한 시도라고 할 수 있는데, 근대 철학자들의 세계관은 기계론적 세계관이 주류를 이루기 때문이다.

반면에 아리스토텔레스가 토대를 놓은 전통적인 논리학은 거부하였다. 그것은 당대의 다른 철학자들에게서도 나타나는 현상이었다. 하지만 다른 사람들이 귀납을 받아들이면서 전통적인 논리학을 거부했던 것에 비해, 라이프니츠는 자신만의 새로운 논리학의 기초를 닦으면서 아리스토텔레스를 거부하였다. 이 새로운 논리학은 사고를 기계적으로 분석할 수 있다는 착상에서 출발한다. 마치 다른 철학자들이 자연을 기계적으로 분석하듯이, 사고의 과정을 기계적으로 분석하는 것이 가능하다고 생각한 것이다. 또한 자신의 형이상학의 기초를 수립함에 있어서 논리학적으로 주어와 술어를 나누려는 시도를 하였고, 그에 따라 현존하는 존재의 실체는 주어 부분이며, 그 실체를 이루는 속성은 술어라는 입장을 견지하였다. 이 분석의 가장 기본적인 단위는 개념과 공리이며, 이 둘의 다양한 조합을 통해 연역적인 체계(세계)를 세우는 방향으로 나아간다.

 

형이상학

 

라이프니츠의 형이상학은 모나드에 대한 입장으로 정리된다. 모나드는 단순하다는 뜻이며, 곧 라이프니츠에게 실체이다. 또한 단순하다는 정의에 따라 자연스럽게 나눌 수 없다는 속성을 띈다. 모나드는 정신적인 실체라는 점, 인식의 주체라는 점, 합목적성을 띈다는 점, 세계 내의 구체적인 존재라는 점에서 매우 독특하다.

모나드는 정신적인 실체이다. 만약 실체가 물질적이라면, 그 실체는 연장이라는 속성을 띌 것이다. 연장은 무한히 분할이 가능하고, 그렇다면 이 실체는 무한히 작은 물질이 된다. 이 과정에서 역설이 발생한다. 무한히 작은 물질은 무한히 많다고 하더라도 세계를 구성할 수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실체는 비연장적이고, 비물질적이어야 한다.

정신적인 실체이기 때문에, 단순하다고 정의함으로써 유한해진 개체에 무한한 가능성을 담을 수 있게 된다. 이는 존재론적으로 다른 수많은 모나드들과의 관계를 맺을 수 있고, 인식론적으로 그 관계들을 자기 안에 모두 담을 수 있는 논리적인 근거로서 중요한 역할을 한다. 또한 내부에서 변화를 일으키지는 않지만, 이미 담지하고 있는 무한한 가능성에 의해 스스로 운동하는 존재로서 거듭난다.

모나드는 인식의 주체이다. 라이프니츠에게 인식이란, 한 모나드가 자기 안에 담지한 다른 모나드들과의 관계를 표상하는 작용이기 때문이다. 모나드는 단순하기 때문에, 내부가 변화하지 않는다. 따라서 모나드의 외부에 머무르는 존재나 그곳에서 일어나는 사건이 모나드의 내부에 영향을 미칠 수 없다. 따라서 인식은 외부의 무엇이 들어오는 과정이 아니라, 자신의 내부를 표상하는 과정이 되는 것이다.

또한 질적으로 같은 모나드들만이 있을 경우 우리가 표상하는 다양한 인식대상의 차이를 말 할 수 없어진다. 따라서 모나드들은 각자가 질적으로 모두 다르다. 이것은 단순히 모나드들간의 존재론적 차이뿐만이 아니라, 질적인 차이에서 수반되는 관점의 차이 또한 발생시킨다. 모든 모나드는 각자 자신의 세계를 표상한다.

모나드는 합목적성을 띈다. 그 까닭은, 모나드는 최종근거인 신의 운동으로부터만 생성되기 때문이다. 모나드는 생성되는 과정에서 신의 완전성이라는 속성을 그대로 가지고 나오게 된다. 이 과정에서 내적인 무한성, 즉 완전성을 부여받게 된다. 하지만 신으로부터 근거를 부여받았다는 점에서 불완전하다. , 자기충족적이긴 하지만 자신을 원인으로 삼지는 못한다는 말이다.

마지막으로 모나드는 세계 내의 구체적 존재이다. 모나드는 그 자체로서 영혼이나 정신, 의식을 구성한다. 정신적인 실체이고, 인식주체이기 때문이다. 또한 어떤 모나드들은 인식주체로서의 역할이 미미하기도 한데, 이런 모나드들은 영혼이나 정신으로 화한 모나드들의 통제를 받아 육체로서 그 기능을 한다. 이는 단순한 구성요소나 존재근거로서의 실체가 아닌, 그 자체가 역사무대 위에 있는 존재자라는 특징이 있다.

위와 같은 특징을 살펴볼 때, 모나드는 논리학적인 입장에서 개념, 즉 어떤 서술어의 주어에 해당하는 것을 가리키는 것 일반을 설명하는 개념이다. 개념은 인간의 사고 내에서 존재하는 것이기 때문에 물질적인 것이 아니다. 또한 가능성으로서 무한한 술어를 자기 안에 내포할 수 있으면서도, 그것은 모두 세계 내의 어떤 구체적 존재에 대한 지칭으로서 기능하기도 한다.

또한 위와 같은 실체에 대한 정의를 통해서, 정신과 물질을 하나의 실체에 통합시켜 하나의 세계로 설명하려고 한 것 역시 이전의 철학자, 특히 데카르트에 비해서 발전한 부분이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모나드는 각각이 독립적으로 운동하는 실체라는 점, 그리고 정신과 물질이 개념적으로는 하나의 실체에 통합되어 있지만 이 통합을 설명하기는 매우 어렵다는 점에서 난점에 부딪힌다. 라이프니츠는 이를 설명하기 위해 예정조화설이라는 주장을 펼치게 되는데, 이것은 실천철학 부분에 있어서 상당한 문제를 야기한다.

 

자연철학

 

하지만 실체를 정신적인 면으로 제시했다는 점에서, 현재 우리가 물질로서 바라보는 세계를 어떻게 정당화하느냐라는 과제가 남게 된다. 특히나 모나드는 각각 모나드 사이에 분절적인 구분이 없이 연속적이기 때문에 세계의 모든 존재가 한 계열에 통합되는데, 이것은 마치 스피노자의 세계처럼 세계 내의 각 존재 간에 구별을 할 수 없게 만드는 근거로서 작용할 수 있는 위험이 있었다. 이를 뛰어넘기 위해 라이프니츠가 제시하는 기준은 지각의 명료성이다. 그리고 이 지각의 명료성은 존재론적인 측면과 인식론적인 측면에서 모두 작용한다. 인식론적인 측면은 뒤에서 논의할 것이므로, 자연을 구성할 수 있게 해주는 존재론적인 측면에서 살펴보도록 하자.

각각의 모나드는 지각의 명료성의 정도에 의해서 서로의 차이를 드러낸다. 지각의 명료성이 높을수록 정신적인 측면이 강하게 나타나고, 반대로 낮을수록 물질의 측면이 강하게 나타난다. 이런 각각의 모나드들은 다른 모나드들을 자기 내부에 표상하는데, 그것이 바로 우리가 바라보는 세계가 된다. 따라서 우리가 바라보는 세계에는 다양한 모나드들의 지각의 명료성의 차이에 의해 물질과 정신이 공존할 수 있는 세계로서 나타난다.

인간과 각각의 동물들 사이의 존재론적 위상은 지각의 명료성이 얼마나 높은가에 따라 결정된다. , 모나드가 표상하는 세계 속에서 지각의 명료성이 높을수록 고등동물로서의 특성이 강하게 나타나며, 낮을수록 하등동물 내지는 물질로서 존재하는 것이다. 하지만 어떤 존재도 완전히 물질적이지는 않고, 인간이 포착할 수는 없지만 미약하게나마 정신으로서의 면모를 가지고 있다. 반대로 완전히 정신적인 존재는 반드시 있는데, 그것이 바로 신이다.

또한 라이프니츠는 모나드를 통해 목적론적인 자연관을 우리에게 보여준다. 각 모나드는 내적인 원리에 따라 운동하고, 그 내적인 원리의 방향은 신으로부터 탄생과 함께 부여받은 완전성을 향해있다. 이것은 운동이 무작위적이고 기계적인 현상이 아닌, 일관된 규범을 따라 벌어진다는 것을 뜻한다. 이러한 목적은 기계적으로 결코 파악할 수가 없다. 기계적인 분석을 통해서는 단지 운동의 과정만 파악할 수 있을 뿐이다.

라이프니츠는 그러한 분석이 가능할 수 있게끔 하는 운동의 근거로서 을 제시하였다. 이것은 데카르트 철학에 대한 비판으로서 등장한 것이다. 데카르트는 물질적 실체의 속성으로서 연장을 제시하였는데, 이것은 고대철학에서조차 그 가능성의 의문시되는 속성이었다. 제논이 제시한 여러 역설들은 바로 이런 연장의 불가능성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사례라고 할 수 있다. 라이프니츠는 이런 논의를 계승해, 무한히 분할이 가능한 연장이 실체의 속성일 경우에는 연장이 불가능한 것들의 집적이 연장이 되는 역설이 된다고 강조하였다. 따라서 연장보다 더 근원적인 속성을 내세워야만 했는데, 이것이 힘이다.

힘은 다시 근원적인 힘과 파생된 힘이라는 두 가지로 나누어진다. 근원적인 힘은 실체가 직접 행사하는 힘이다. 자신이 머무를 수 있는 고유의 물리적인 영역을 만들어낸다. 바로 이것이 세계 속에서 연장이라는 현상을 만들어내는 것이다. 파생된 힘은 이런 근원적인 힘이 행사됨에 따라서 나타나는 효과들이다. , 연장이라는 현상은 우리가 직접 지각하는 물리적인 힘으로서 각 모나드에게 다가간다. 이것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라이프니츠가 이야기하는 세계는 모나드 안에서 정신적으로 표상된 세계라는 것을 이해하는 것이 중요하다.

시간과 공간도 라이프니츠에게 있어서는 실재가 아니다. 라이프니츠에게 세계는 물리적 실재가 아니라 모나드의 표상 작용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 표상작용이 없으면 공간도 없어져버린다. 시간도 마찬가지로, 지속적인 표상의 변화가 없이는 발생하지 않는 현상이 된다. 이것은 당시에 시간과 공간을 물질세계에 선행하는 논리적인 조건으로서 내세웠던 뉴턴의 자연철학에 대한 비판이다. 만약 이 두 가지를 논리적인 선행조건으로 상정할 경우, 그것은 결국 공간이 놓일 수 있는 어떤 것을 향한 무한소급으로 빠질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또한 논리적인 선행으로서의 공간은 논리적인 선행이기만 할 뿐 그 어떤 운동의 근거도 제공하지 않기 때문에, 공간 위의 물질들이 어떻게 운동하고 변화하는지 설명할 수 없다는 이유 또한 뉴턴에 대한 중요한 비판의 지점이었다.

 

인식론

 

라이프니츠는 과학을 가능하게 하는 원리로서 선험적인 근거를 강조하였다. 소박한 경험과 귀납적인 추론은 개연성만을 확보할 수 있을 뿐, 필연성을 확보할 수는 없었다. 필연성을 확보하지 못한 것은 객관적이고 합리적일 수 없으며, 따라서 지식으로서 인정받을 수 없다. 이런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그는 선험적인 근거를 통해 경험을 배열하고 조직해야만, 경험에서 필연성을 확보할 수가 있다고 보았다. 그리하여 라이프니츠는 경험을 과학적으로 정당화하기 위해 선험적 원리를 통해 경험에 필연성을 부여하는 방향으로 나아갔다. 필연성을 확보하기 위해서는 경험에 의존하지 않는, 그래서 필연적인 원리를 요청해야만 했다. 필연적 원리는 경험과 상관없이 인간에게 내재하고 있는 것이다. 이것을 본유관념이라고 한다. 그리고 이 본유관념을 내재한 인간의 속성이 바로 이성이다.

또한 인간은 다른 모나드들에 비해 지각의 명료성이 높다. 따라서 다른 동물들처럼 개연성만 확보하는 수준을 넘어서서, 자연의 필연성과 법칙성을 알 수 있다. 라이프니츠는 이러한 인간의 인식을 다른 모나드들의 인식인 지각과 구별해 통각이라고 명명하였다. 라이프니츠가 정의한 인식의 특징상, 서로의 세계에 들어가는 것이 아니라 상대 모나드의 행위를 얼마나 잘 예측하는가에 따라 주체의 능동성과 대상의 수동성이 나눠진다. 이 구분 또한 분절적이지 않고 연속적이라, 여러 모나드들간의 관계에 따라 능동성과 수동성이 결정된다.

인간은 이런 특징 때문에 다른 동물들과는 다른 차원의 인식을 할 수 있다. 인간과 동물 모두 경험과 기억에 기대어 명석한 인식을 수행한다. 하지만 이것은 과학적 인식이 될 수 없다. 필연성을 확보하지 못했기 때문에다. 하지만 인간은 이성을 통한 판명한 인식이 가능하기 때문에 과학, 특히 자연과학을 하는 일이 가능하다. 판명한 인식이란, 논리적인 활동을 통해 사건이 일어나야만 했던 근거를 찾아내는 활동이기 때문에, 이성적인 사고를 하지 않으면 불가능한 인식이기 때문이다.

이런 이성적 사고에 의해 인간이 인식할 수 있는 지식은 두 종류로 나뉜다. 하나는 라이프니츠가 이성의 진리라고 명명한 것이다. 여기에는 모순율에 따라 그 진리값이 결정되는 명제가 해당된다. , 어떤 명제에 논리적으로 반대인 명제가 모순에 빠져버리기 때문에, 동어반복을 벗어날 경우 이것은 이성의 진리에 해당되는 지식이다.

하지만 모순율에 의거해 만들어질 수 있는 세계는 무수히 많다. 마치 기하학에 여러 가지 체계가 있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각 명제 간에 모순이 없는 세계는 논리적으로는 얼마든지 가능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것은 단지 가능할 뿐인 세계이며, 그 많은 가능세계 가운데 세계로 구현된 세계는 단 하나 뿐이다. 이것이 바로 우리가 눈 앞에서 보고 있는 실제 세계이다. 그리고 라이프니츠는 이 실제 세계에 대한 지식을 사실의 진리라고 명명한다.

가능한 많은 세계들 가운데 단 하나가 실제 세계로 나타나는 충족이유율에 따라 설명이 된다. 바로 이것이 선험적 원리를 구성하는 나머지 하나의 원리이다. 충족이유율이란, 어떤 사건이 일어났을 때에는 그 사건이 일어나야만 하는 충분한 이유가 있었기 때문에 일어났다는 것을 깨닫게 해주는 원리이다. 따라서 지금의 세계는, 단순한 개연성을 넘어서 인과적인 필연성을 얻게 된다. 세계의 모든 사건이 충분한 이유가 있었기 때문에 일어났기 때문이다.

인간은 과학을 수행할 때 이 두 가지 원리에 따르기 때문에, 과학 역시 두 가지로 나뉜다. 첫째는 모순율을 토대로 이루어지는 순수과학이다. 여기에는 논리학과 수학이 포함된다. 순수과학 안에서는 모순이 없는 모든 세계에 대해 연구하기 때문에, 가능한 모든 세계에 대해서 그려낼 수 있다. 둘째는 경험과 결부되어있는 경험과학이다. 인간은 모든 가능한 세계 가운데 단 하나의 실제 세계만 경험할 수 있다. 그렇다면 인간은 과학을 하기 위해서, 반드시 가능한 세계에서 현실 세계로, 즉 순수과학에서 경험과학으로 나아가는 과정을 설명해야한다. 이것을 설명해주는 원리가 바로 충족이유율이며, 가능한 세계 가운데 가장 조화로운 것(조화), 가장 알맞은 것(최적), 그리고 가장 단순한 것(단순)을 기준으로 삼아 실제 세계로 이행한다.

하지만 이 충족이유율에 따라 가능한 세계 가운데 하나를 실제 세계로 만드는 존재에 대한 설명이 없는 한, 이 세계에 대한 설명은 불가하다. 라이프니츠는 이 존재를 바로 신이라고 말한다. 신은 모나드들 가운데 가장 명료한 지각을 소유한 존재이며, 따라서 충족이유율에 의해 설명할 수 있는 모든 존재의 이유들을 통찰할 수 있는 존재이다. 신이 표상하는 세계가 바로 역사 전체이며, 그것은 신의 관념 속에서 이미 그 속성이 결정되어 있다. 이 속성은 바로 각 모나드들의 술어에 대한 정보들이다.

인간이 과학적인 인식을 하기 위해서는, 바로 이러한 신적인 관점이 필요하다. 또한 오로지 신적인 관점을 통해서만 과학이 가능하다. 여러 가능 세계에서 단 하나의 사실 세계를 향한 이행, 그리고 그 이행이 필연적일 수밖에 없는 이유가 바로 신의 선택에 의한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인간은 이런 신적인 관점을 신과 공유하고 있다. 그 능력이 바로 인간의 이성의 속성이자 통각의 기능이다.

따라서 인간의 과학적인 지식이란, 여러 모나드들 즉 실체에 담긴 술어들에 대한 정보를 모두 아는 것과 같다. 이 실체는 사실 세계의 실체이다. 이들은 가능 세계와는 다르게 모순율에 어긋나지 않는다. 하지만 라이프니츠는 사실상 이런 사실의 진리들도 모순율에 어긋나는 진리들로서, 이성의 진리와 같은 격으로 환원시킬 수 있다고 주장한다. , 신적인 관점에서 볼때는 모든 실체들의 속성에는 그와 같은 속성들이 이미 잠재되어 있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 속성들 가운데 하나를 거부했을 때에는 동어반복에서 벗어나므로 모순이 발생하는 것이다. 이것이 라이프니츠가 말하는 자연과학이 가능하게 되는 과정이다.

하지만 신도 자의적인 선택에 의해서 사실 세계를 표상하는 것이 아니라, 수많은 가능 세계 가운데 가장 완전한 세계를 표상한다. 따라서 라이프니츠의 체계 안에서는 신 역시 이런 완전성에 종속된 존재이다.

 

실천철학

 

위에서 살펴보았듯이, 모나드 각각은 내적인 원인에 따라 독립적으로 운동한다. 하지만 세계는 외부와 소통하지 않는 모나드들이 제각기 움직여 만들어진다고 하기에는 너무나도 질서정연하게, 일정한 패턴으로 움직인다. 라이프니츠는 이 모든 방향과 패턴, 질서가 신이 교묘하게 모나드들을 결합시켜놓은 결과라고 이야기한다. 이는 신적인 관점에서 볼 때, 모든 모나드들의 술어가 결정되어 있다는 말과 같다.

다시 말하면, 모나드들 서로는 독립적으로 움직이는 것이 맞다. 하지만 아무렇게나 독립적으로 운동하는 것이 아니라, 신이 수행하는 여러 가지 조절활동이 영향을 주는 운동을 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모나드들은 마치 서로 영향을 주고받는 것처럼 움직이고, 이것은 경험적인 인과관계로 표현되는 세계, 그리고 정신과 물질이 영향을 주고받는 세계로 보이게 한다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예정조화설이다.

그렇다면 신에 의해 예정된 세계에서 인간의 도덕은 어떻게 가능한가? 또한 도덕률은 어떻게 설정해야 하는가? 자유가 전제되지 않으면 책임을 동반한 도덕에 대해 이야기할 수 없기에, 이런 질문은 자연스럽게 제시된다. 하지만 예정된 세계, 결정된 세계에 자유는 있을 수 없다. 자유는 자유로운 존재의 열린 선택의 가능성을 의미하는데, 결정된 세계는 이 선택이 한 가지로 닫혀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예정된 세계와 도덕은 모순에 직면할 수 밖에 없다.

이에 대한 라이프니츠의 설명은 세 가지로 나누어진다. 첫째는 예정과 결정은 같지 않다는 생각이다. 신은 모나드가 할 일을 규정하는 존재가 아니다. 단지 모나드가 자발적으로 할 일을 알고 있을 뿐이다. 모나드를 창조하고, 거기에 내적으로 완전하다는 속성을 부여한 존재가 바로 신 자신이기 때문에, 완전하다는 속성에 의해서 모나드는 자발적이다. 또한 신에 의해 정의된 존재로서 유한하기 때문에, 절대적으로 무한한 신의 지성으로는 모나드의 행동을 예측할 수 있다.

둘째는 도덕법칙이 만들어지는 과정이다. 예정과 결정은 같지 않으므로, 모나드에게서 자유를 확보할 수 있기에 자연스럽게 도덕이 가능하다는 결론에 다다른다. 또한 내적인 완전성을 토대로 자율적으로 도덕을 실천할 수 있게 된다. 완전성은 신의 속성이고, 모나드 또한 내적으로 완전한 존재이다. 따라서 자기 안에 담고 있는 무한한 가능한 세계 가운데 신이 가장 원하는 세계를 선택할 수 있는 가능성이 열리고, 그것은 곧 가장 도덕적인 세계이다.

셋째는 신의 도덕적 면모에 대한 변론이다. 악의 근원으로서 불완전한 존재가 생성된 이유, 즉 형이상학적 악에 대해서는, 라이프니츠의 세계관 속에서 구체적 존재인 모나드는 불완전한 존재가 아니라, 정의상 내적으로는 완전한 존재라고 해명한다. 도덕적인 악 때문에 발생하는 죄는, 신은 가능한 도덕적인 세계를 만드는 존재라고 반박한다. 또한 완전히 결정적인 세계에서는 도덕 자체가 불가능하기 때문에, 자유를 확보해주는 세계가 더 나은 세계라고 주장한다. 마지막으로 세계에 만연하는 고통에 대해서는, 사실은 고통이 없는 중립적 상태나 행복에 다다르는 시간이 더 많기 때문에 신에 대해 책임을 물을 수 없는 사안이라고 말한다.

 

결론 : 라이프니츠 철학의 파급과 한계

 

라이프니츠의 철학에서 보이는 가장 큰 전환점은, 우리가 물리적이고 외부대상을 그대로 인식한다고 생각했던 세계를 정신적 작용의 산물로 설명하려고 했다는 점이다. 특히 정신의 현상으로서 물질세계를 바라보는 라이프니츠의 시각, 물리적 사태를 정신의 현상으로 환원시키는 그의 사상은 칸트의 현상계에 대한 논의를 예비하고 있다. 또한 논리적으로 주어와 술어를 구분한 시도는 당대의 논리학적인 고정관념을 뛰어넘은 구상으로서, 이후 20세기의 분석철학자들에게 지대한 관심을 받는 계기가 되기도 했다. 또한 멀게는 독단적 존재자로서의 라이프니츠의 인간관은 이후의 관념 중심의 철학에서 지속적으로 그 모습을 드러내며, 비연장적인 속성을 실체의 성격이라고 규정함으로써 물리적인 세계를 설명하려 하는 것은 20세기 이후 과학의 논의들에서 등장하는 에너지에 대한 관점을 예비하기도 한다.

하지만 결론적으로, 라이프니츠는 이러한 체계에 대한 체계적인 저술을 남기지 않았다는 점은 그를 바라보는 데 큰 난점으로 작용한다. 말년에 적은 변신론이 유일한 철학적 저서라고 할 수 있다. 위와 같은 그의 철학과 사상에 대한 내용은 거의 편지를 통한 논쟁에서 드러나기 때문에, 확실한 모습을 확인할 수 없다. 뿐만 아니라 논쟁을 통해 입장이 바뀌는 부분을 확인할 수 있다는 점 때문에, 그의 체계를 뚜렷하게 규정하는 것은 결코 쉽지 않은 일이다. 또한 당시의 몇몇 학자들과 마찬가지로, 신을 자신의 체계에 끌어들임으로써 종교적 공격에 시달리지 않으려 했던 시도가, 의도하든 의도하지 않았든 그의 철학 역시 스피노자와 같이 개별자들의 자유를 확보해주지 못하는 방향으로 흘러갔음은 결코 부정할 수 없을 것이다.


* 참고문헌

 

서양근대철학회 엮음, 서양근대철학, 서울 ; 창작과비평사, 2001

서양근대철학회 지음, 서양근대철학의 열 가지 쟁점, 서울 ; 창비, 2004

이정우 지음, 주름, 갈래, 울림 : 라이프니츠와 철학, 서울 ; 거름, 2001

 

Fredrick Copleston, 김성호 옮김, 합리론 : 데카르트에서 라이프니츠까지, 서울 ; 서광사, 1994

 

김국태, 라이프니츠의 모나드형이상학, 철학과 현실17, 1993년 여름, 철학문화연구소

박제철, 라이프니츠 철학의 결정론적 성격, 철학98, 2009년 봄, 한국철학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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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니 2013-10-31 16:49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요즘 철학을 공부하고 있어서 정말 많은 도움이 됩니다. 잘 읽고 갑니다. ^ ^

박효진 2015-04-08 00:07   좋아요 0 | URL
제 글을 좋게 봐주셔서 고맙습니다!

레니 2015-04-07 17:08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정말 좋은 글, 잘 읽었습니다.

박효진 2015-04-08 00:08   좋아요 0 | URL
고맙습니다! 좋은 글이라고 칭찬받으니 기분이 좋습니다 ^^/

숭사리 2016-12-29 20:23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모나드론 검색하다가 좋은글 잘 읽고 갑니다. !!!

박효진 2016-12-31 05:07   좋아요 0 | URL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