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을 쓰고 싶은 이는 많지만 실천하는 이는 적다. 글쓰기에 대한 두려움과 어려움이 있기 때문이다. 쓴다는 것, 그 행위가 어려운 게 아니라 집중이 힘들고 무엇을 어떻게 진행시켜야 할지 모르기 때문이다. 누군가는 영감이 떠오르지 않아 쓸 수 없다고 누군가는 쓰다가 막혀서 진행이 안되다고 절규할지도 모른다. 쓴다는 건 무엇이기에, 우리는 이토록 쓰고자 애쓰는 것일까.


대니 샤피로를 알지 못한다. 『계속 쓰기 : 나의 단어로』를 선택한 건 오롯이 제목 때문이다. 어떤 글쓰기 노하우를 기대하지 않았다. ‘나의 단어’를 생각하고 꼽아볼 수 있기를 바랐다. 책을 읽어가면서 대니 샤피로의 일상을 그리며 글쓰기를 갈망하는 사람의 모습을 그 위에 덧칠한다. 글이 잘 써지는 공간과 최적의 시간을 찾는 일, 『소설엔 마진이 얼마나 남을까』에서 만났던 작가들의 글이 떠오르기도 했다. 누군가 카페를 찾고, 누군가 서재에서, 일정한 작업 시간을 지키려는 노력. 대니 샤피로로 다르지 않았다. 전화, 집안일, 인터넷 검색, 잡다한 생각으로부터 벗어나 글에 집중하려고 애쓰는 모습이 역력하다.


이 책은 80개의 이야기 조각으로 엮은 책이다. 80개의 단어, 제목이 있다. 자신의 유년 시절과 성장과정에 영향을 끼진 부모, 이웃, 학교, 가족, 아이에 대한 것들과 학생들에게 글쓰기를 가르치는 일, 자신이 소설을 어떻게 썼는지 읽을 수 있다. 그렇다고 단문을 쓰고, 부사를 쓰지 말라는 조언을 강하게 주장하는 건 아니다. 한 단어, 한 문장, 소설의 중반에서 다시 엎고 몇 년 동안 인물을 묘사하는 방법은 자신이 글을 쓰면서 느끼고 경험하면서 것들을 안내하는 정도다. 그가 알고 있는 위대한 작가들의 말을 인용하기도 한다.


한편으로는 기존 작가들을 위한 글처럼 여겨 기지도 한다. 소설을 쓰고, 마감이 있고, 편집자가 있는 이들이 공감하고 수긍할 글 말이다. 그게 나쁘진 않다. 뭔가를 쓰고자 하는 이들에게 목표를 만들고 시도할 수 있는 계기가 될 수도 있으니까. 그녀의 말처럼 글쓰기를 그만두고 싶다면 그만두면 된다. 언제든 다시 시작할 수 있고 시작하면 된다고.


나는 무엇을 쓰고 싶은 걸까. 나만의 단어를 나열하다가, 나의 일기장이나 비밀글에만 적용되는 건 아닐까, 그런 생각에 주춤한다. 그러다 그래도 상관없다는 답에 이른다. 쓴다는 것, 그것으로 인해 내가 얻는 위로와 위안이 있으니까. 한 명의 독자를 염두에 두고 쓰라는 글에, 그 한 명은 누구일까 골몰하기를 그만둔다. 어떤 공간이든 비공개가 아닌 이상 독자는 존재하고 그에 따른 다양한 피드백(댓글을 통한 조언, 비평)이 따라온다는 걸 알기에.


한 권의 책에서 얻을 수 있는 무엇일까. 누군가 우연한 동기, 혹은 강렬한 계기를 얻을 수 있다. 누군가 책장에 참고도서로 남겨둘지도 모른다. 나는 이런 문장을 꼽는다. 대단하고 거창한 글쓰기가 아닌 나를 쓰는 일, 나만의 작은 목표를 설정하고 실패를 마주하는 일, 그래도 쓰는 마음은 쉬이 시들지 않기에 낫게 실패한다는 말이 주는 감동을 오래 간직하려 한다.


리는 더 낫게 실패한다. 우리는 자세를 바로잡고, 자기 자신을 추스르고, 다시 시작한다. (15쪽)

언어를 찾는 것, 우리가 바라는 건 바로 그것이다. (46쪽)

몰두는 필멸, 우울, 수치, 불운, 무기력을 불러일으키는 슬픔에 대한 대비책이다. (197쪽)


글을 쓰려는 마음은 쌓아두지 말고 실천을 해야만 자랄 수 있다. 모든 일이 그렇겠지만, 아무리 좋은 계획과 목표라 해도 실천하지 않으면 무용지물이니까. 지금 쓰지 않으면 안 된다는 생각이 필요한 게 글이구나 싶다. 삶이 계속되는 것처럼 쓰기도 계속되어야 한다. 나만의 언어를 찾을 때까지, 언어가 살아 움직일 때까지 계속 쓰고 써야 한다.


대체 무엇이 글쓰기를 숨쉬기처럼 필수적이게 할까? 우리가 노력하고, 실패하고, 앉아 있고, 생각하고, 저항하고, 꿈꾸고, 복잡하게 하고, 풀어내는, 우리를 깊이 연루시키고, 기민하고 하고, 살아 있게 하는 수많은 나날이다. 시간이 미끄러지듯 지나간다. 몸이 무관해진다. 우리는 언젠가 그렇게 될 것처럼 의식에 가까워져 있다. (129쪽)


이 책이 어떤 마음을 다잡고 정리할 수 있도록 도와준다면 대학에서 국문학과 글쓰기 강의를 하고 있는 정희모 교수의 『문장의 비결』은 실전을 위한 교과서라 할 수 있다. 중요한 점은 문장 쓰기에 집중한다는 점이다. 가장 중요하다는 첫 문장, 그 문장 쓰기에 대해 배우고 수정하다 보면 좋은 글이 완성된다고 안내한다.


쓰는 일에 급급해서 고치는 연습을 한 적이 있던가. 우선은 쓰고 보자는 마음에 수정은 나중으로 미루고 결국엔 글을 완성하다. 수정은 오타나, 맞춤법이 나닌 맥락, 문장의 오류를 발견하는 일이다. 글 쓰는 이가 모두 소설가가 되거나 작가가 되려는 건 아니다. 그러나 문장의 의미가 읽는 이(독자)에게 그대로 전달되도록 해야 좋은 글이다.


생각과 의도를 전달하게 위해 글을 쓴다. 한 문장으로 전달은 불가능하다. 문장이 연결되면서 전체 주제를 형성한다. 세부 내용들이 하나씩 모여 전체 주제가 만들어진다는 걸 명심해야 한다. 문장의 의미 연결을 위한 하나의 방법으로 문장 화제와 초점을 따라가며 글을 쓰는 것이라고 말한다. 역시 수정이 최고인가.


한 편의 글은 일관된 스토리로 지속되어 적절한 메시지를 형성해야 한다. 문장이 일관된 화제로 지속되지 못하고 단절되는 현상은 문장의 연결 흐름을 따르지 않고 필자의 생각을 앞세우기 때문이다. 문장의 흐름이 단절될 때는 문장을 수정하고 이를 고쳐야 한다. (258쪽, 「문장의 연결 1」)


좋은 문장은 무엇일까. 저자의 말처럼 죽은 문장이 아닌 생동감 넘치는 문장이다. 그런 문장을 쓰는 건 요원하다. 그러나 글을 쓸 때마다 한 문장을 쓸 때마다 기억하고 있다면 가능할지도 모른다. 수업을 받는 마음으로 집중해서 공부하고 실천하다면 나만의 살아 있는 문장을 쓸 수 있을 것이다.


한 문장이 다른 문장과 연관을 맺고 때로는 숨을 죽이다가 때로는 폭발하고, 때로는 늦게 가다가 때로는 빨리 가기도 한다. 우리가 문장을 쓸 때 앞뒤 문장과의 관계를 보고, 단락 내의 위치도 보며, 전체 주제와의 관계를 따져봐야 하는 것도 문장이 생명체처럼 작용하기 때문이다. 이 책은 문장 학습의 책이지만 엄밀히 보면 텍스트 내의 문장의 흐름, 즉 유기체처럼 움직이는 글의 흐름을 살피는 책이기도 하다. (저자의 말 중에서, 5쪽)


결국 우리가 글쓰기에 대한 글을 찾고, 책을 읽고 그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는 건 나를 쓰고자 하는 욕망 때문이다. 어떤 형태가 됐든 나를 쓰는 일은 나를 아는 방법 중 가장 멋진 일이라 생각한다. 여전히 두렵고 쓰는 건 어렵더라도 그것을 향해 나가는 일. 그것이야말로 낫게 실패하는 일이다. 실패를 반복하며 더 괜찮은 글을 마주하고 싶다. 아름다운 글, 살아 있는 글을 쓰고 싶은 마음만 커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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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넬로페 2023-05-04 20:15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글쓰기는 정말이지 왜 이리 어려운지요.
많은 책을 읽고 글을 써내시는 자목련님이 대단하시다고 매번 생각하고 있어요.
글을 쓰는게 어려우니 글을 쓰는 것에만 목적을 두는 경우가 많아요.
쓰는 일에 급급해 고치는 연습을 게을리하는 저를 때리는군요^^

자목련 2023-05-07 15:43   좋아요 2 | URL
잘 쓰고 싶은 마음이 있어서 그런 것 같아요. 그냥 쓰는것에 집중하면 될 텐데 말이에요.
이 책이 제목처럼 계속 쓰기가 정말 중요한 게 아닐까 싶어요^^

독서괭 2023-05-04 21:12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더 낫게 실패한다”라는 말이 좋네요^^ 생소하게 느껴지면서도 좋아요. 실패는 성공의 어머니라는 말보다요!

자목련 2023-05-07 15:42   좋아요 1 | URL
이 책에 좋은 말이 참 많았는데요, 가장 와 닿고 기억하고 싶은 말이 더 낫게 실패한다는 말이었어요. 실패가 얼마나 좋은 경험이고 좋은 일인가 생각해보기도 했고요!

얄라알라 2023-05-07 16:4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쓰는 일에 급급해서 고치는 연습을 한 적이 있던가.˝
저는, 종일 놀다가 밤에 자정이 가까워질 무렵 자판 두드릴 때가 자주 있는데 졸려서 일단 저장하고 보자 심정으로 마무리를 안 할 때가 많아요. (뜨끔뜨끔.... 고치는 연습을 한 적이 없습니다^^;;;;;)

자목련님 글은 잡다한 양념 걷어내고 담백한 재료 그대로의 맛을 주는 음식같다는 생각 가끔 하는데‘오늘 글의 메시지도 결국, 비슷한 것 같습니다. 도움 크게 얻고 갑니다^^ 감사드립니다.

자목련 2023-05-08 12:27   좋아요 1 | URL
오타를 발견했을 때, 정말 숨어버리고 싶은데 수정을 해야지 하면서 잊어버리곤 해요. 그냥 그게 글의 운명인가 싶고요. ㅎ 담백한 재료의 맛이 주는 음식 같다는 칭찬, 오래 기억하겠습니다. 맛난 점심 드시고요!
 

커피와 시는 제법 잘 어울리는 조합이다. 시는 어렵고, 커피는 쓰다. 둘 다 뭔가 첨가하면 달콤해진다. 시에는 무얼 첨가해야 달콤해질까. 커피에 대해 모르지만 로스팅의 단계에 따라 맛이 달라진다고 한다. 시는 어떤 단계를 거쳐야 조금 더 친근하고 조금 더 쉽게 만날 수 있을까.


알라딘 택배비 인상으로 책을 구매할 때, 그러니까 한 권의 책을 사고 싶을 때 주문을 고민하고 신중하게 생각한다. 박소란의 시집을 고르면서(고른다는 표현은 적절하지 않다) 커피 쿠폰이 있다는 게 떠올랐다. 알라딘에서 지급하는 커피 쿠폰과 영화 쿠폰. 둘 중 하나를 선택해 사용할 수 있다는걸. 코로나 이후로 영화관에 갈 용기를 내지 않으므로 커피를 주문하기로 했다. 현대문학 PIN 시리즈 시집과 드립 백 커피를 말이다.





커피는 아직 마시기 전이고 시집은 조금 읽었다. 슬픔, 그림자, 어두움, 우울이 있다. 시집의 제목인 있다는 그런 의미인 것 같다. 시의 제목마다 아는 있다를 붙여 읽었다. 어렵지만 내 마음을 더하면 시는 조금 더 친절해지지 않을까 싶다. 어제 비가 온 탓으로 이런 시를 골라본다.


움푹 팬 곳에 생긴 웅덩이,

거기 사는 누군가 나를 부르는 것 같아


그럴 리가?

믿지 못하겠다는 표정이다 사람들은

자연스럽게 벽을 만든다

벽 뒤편 얼기설기 이어진 골목으로 유유히 사라진다


벽돌 하나가 쫓아온다 어깨를 툭툭 치더니

금세 앞질러 가버린다 보란 듯 멀리 날아가버린다


이상하다 생각할 틈도 없이


풀이 말을 건다


풀과 말을 한다

요즘은 좀 어때? 물으면 그냥 그렇지 뭐, 적당히 얼버무린다


얼버무린 게 나인지 풀인지

풀은 자란다 별일 아니라는 듯


다음 날이면 벌써 바싹 시들어 있다

흙에서 나와 흙으로 돌아가는 것들, 거기 사는 누군가


문 앞에 서 있다

새까만 먼지를 뒤집어쓴 채

수건을 들고 달려갈 나를 기디라고 있다


기다리지 마

심통 부리듯 나는 괜히 동네 마트나 기웃거리고

늦게

되도록 늦게


문을 연다


눈을 감고 조용히 불 속으로 걸어 들어가는 것들

그러나 아무것도 불타지 않고

사라지지 않고


어느 날부턴가

불이 말을 건다 (「비 온 뒤」, 전문)


비 온 뒤, 당신의 아침은 어떤가 궁금하다. 봄이라고 꽃들은 지고 연두가 가득한데 날씨는 심란하다. 춥다고 쌀쌀하다고 말하는 이들.이상한 게 어디 날씨뿐일까. 그래도 봄이니 봄비가 내렸으니 뭐든 그 비를 맞고 더 쑥쑥 자라겠지. 나도 끝을 알 수 없는 곳까지 자라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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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르는 즐거움에 이어 아는 즐거움이다. 한국문학을 좋아하니, 한국소설은 언제나 반갑다. 요즘 소설에서 다루는 주제나 소재가 비슷(돌봄, 여성, 연대) 하지만 읽는 일은 즐겁다. 작가마다 선택한 주제는 닮았어도 표현이나 인물의 환경 설정은 다르니까.


곧 세계 책의 날도 다가오니 아는 즐거움에 흠뻑 빠져드는 일도 좋다. 안다고 했지만 아는 즐거움은 크지 않다. 한국 문학의 젊은 작가는 하루가 다르게 쏟아져 나오고 그 소설을 이해하는 일은 버겁다. 그래도 소설은 좋고 이런 작가는 더욱 반갑다.


우선 오랜만에 만나는 김이설의 단편집이다. 연작이 아니 『누구도 울지 않는 밤』에는 단편 10개가 수록된 작품이다. 오늘 출간 기념 북토크가 있다고 한다. 책에 대한 이야기를 음악으로 이야기하는 색다른 북토크인 듯하다. 누군가의 참석 후기를 기다린다.






올해도 『2023 제14회 젊은작가상 수상작품집 』을 곁에 두었다. 이미상, 이서수, 김멜라의 이름이 반갑고 처음 만나는 작가의 이름으로 채워진 『소설 보다 : 봄 2023』, 묘하게 끌리는 시집 『소멸하는 밤』를 읽는 밤을 기대한다. 소설과 시를 읽는 것으로 4월을 마지막을 보낼 것 같다.














4월인데, 내가 좋아하는 4월이 이렇게 흐른다. 언제부터인가 4월에는 노영심의 『4월이 울고있네』를 듣는다. 발매 당시에는 몰랐던 노래. 세월이 흘러 이제야 듣게 되는 노래. 가사를 따라 읽으면 흥얼거린다. 봄비가 내리는 4월, 청벚꽃을 바라보며 그 아래서 사진을 찍었던 봄을 생각한다. 그립기도 하고 아쉽기도 한 4월이 흐른다.



봄비가 내려오는데 꽃잎이 흩날리는데

나의 눈에는 4월이 울고 있는 것처럼 보이네

봄비가 내리는 소리 꽃잎이 떨어지는 소리

나의 귀에는 4월이 울고 있는 것처럼 들리네

창문열고 봄비 속으로 젖어드는

그대 뒷모습 바라보면은

아무리 애써 보아도 너를 잊을 순 없어라

내일을 기다려도 될까

내 사랑을 믿어도 될까

내가 딛고 가는 저 흙이 마르기 전에

내 눈물이 그칠까

창문열고 봄비 속으로 젖어드는

그대 뒷모습 바라보면은

아무리 애써 보아도 너를 잊을 순 없어라

내일을 기다려도 될까

내 사랑을 믿어도 될까

내가 딛고 가는 저 흙이 마르기 전에

내 눈물이 그칠까

내 눈물이 그칠까(내일을 기다려도 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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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수영 연보를 읽는 것으로 『디 에센셜 김수영』를 시작했다. 한 사람의 삶을 시간순으로 순차적으로 정리한 글 안에서 김수영은 태어났고 소년에서 청년으로 자랐다. 총명하고 아픈 아이로 시작한 연보는 가장 들끓던 지식인, 쓰기를 멈추지 않던 젊은 시인에게 찾아온 죽음으로 끝났다.


나와는 한 줄의 시간도 겹치지 않은 시간을 살다간 시인의 시를 언제 만나고 알게 되었던가. 만났다는 말은 우습다. 김수영의 시는 솟대같이 우뚝 서 있었고 어디서든 우리는 그의 시를 읽을 수 있었다. 가장 대표적인 「풀」은 뭐랄까. 어떤 상징으로 이해했고 잘 모르면서도 중얼거렸다. 아마도 학창 시절이었을 것이다. 그저 암기의 수순으로 기억한 시구절. 『디 에센셜 김수영』에서 천천히 다시 읽은 그의 시는 슬프면서도 아름다웠고 사실적이면서도 풍부한 은유로 가득했다.


우리의 음악은 어디로 흐르는 것일까. 음악이 상징하는 것은 무엇일까. 처음 시를 배우던 시절로 돌아가 하나하나 그것을 파헤치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을까 싶다가도 ‘음악은 흐르는 대로 내버려 두자’나 ‘나의 음악이여 지금 다시 저기로 흘러라’ 같은 구절에서 뭔가 울컥하고 올라오는 건 무엇일까. 시로 말하고 외치고자 했던 건 무엇일까. 혼자 이런저런 생각을 하게 된다.




음악은 흐르는 대로 내버려 두자

저무는 해와 같이

나의 앞에는 회색이 뭉치고

응결되고

또 주먹을 쥐어도 모자라는

이날에 또 어느 날에

나는 춤을 추고 있었나 보다

불이 생기어도

어젯날의 환희에는 이기지 못할 것

누구에게 할 말이 꼭 있어야 하여도

움직이는 마음에

형벌은 없어져라

음악은 아주 험하게

흐르는구나

가슴과 가슴이 부딪치어도

소리는 나지 않을 것이다

단단한 가슴에 음악이 흐른다

다리도 없이

집도 없이

가느다란 곳에는 가시가 있고

살찐 곳에는 물이 고이는 것이다

나의 음악이여

지금 다시 저기로 흘러라

몸은 언제나 하나이었다

물은 나의 얼굴을 비추어 주었다

누구의 음악이 처참스러운지 모르지만

나의 설움만이 입체를 갖고

떨어져 나간다

음악이여 ( 「음악」, 전문)


애타도록 마음에 서둘지 말자

강물 위에 떨어진 불빛처럼

혁혁한 입적을 바라지 말라

개가 울고 종이 들리고 달이 떠도

너는 조금도 당황하지 말라

술에서 깨어난 무거운 몸이여

오오 봄이여 ( 「봄밤」, 일부)


오랜 시간 손에 잡고 있었지만 이상하게도 속도가 나지 않는 책이었다. 어쩌면 집중하지 못했을지도 모른다. 특히 산문에서 김수영이 느꼈을 시에 대한 고민과 그가 살았던 시대에 학인의 역할로 고뇌하는 그 심경에 대해 알 수 없었다. 어찌 알겠냐만 그래도 솔직하게 건네는 산문으로 그가 글 쓰는 일을 어떻게 여겼는지 미세한 떨림의 깊이 정도는 가늠하고 싶었다. 그의 내면을 흔들고 부서졌다가 채우기를 반복하는 그 마음의 조각, 혁명의 시대에 폭발하듯 써 내려간 시와 그 안에 담고자 했던 자유를 말이다. 읽기의 한계는 언제나 빨리 도착한다. 산문에서 한 번씩 멈추고 말았다. 포로수용소의 기록, 닭을 키우던 일, 박인환의 마리서사, 번역에 대한 생각들을 읽으면서 자꾸만 나는 알 수 없는 그 시대와 현재를 생각하는 것이다. 우리에게 지금 김수영이란 시인이 있다면 어땠을까 하는 부질없는 생각들.


수동적으로 불안을 받아들이느니 보다는 불안 속에 뛰어 들어가 불안과 운명을 같이하는 것이 괴로움이 적은 일이요 떳떳한 일같이 생각이 들었다. (산문 「내가 겪은 포로 생활」중에서)


유명이 유명을 먹고, 더 유명한 것이 덜 유명한 것을 먹고, 덜 유명한 것이 더 유명한 것을 잡아 누르려고 기를 쓴다. 이쯤 되면 지옥이다. 그리하여 모든 사회의 대제도(大制度)는 지옥이다. 이 지옥 속의 레슬러들이 속물이다. 너나 할 것 없이 모두 다 속물이다. (산문 「이 거룩한 속물들」중에서)


젊은 층의 전면적인 불신임을 받아야 할 것은 정치계에만 한한 일이 아니라 문학계도 마찬가지이고, 이러한 각성의 시기는 빨리 오면 빨리 올수록 좋은 것이기 때문이다. (산문 「독자의 불신임」중에서)


읽는 것도 어렵고 이해하기란 더욱 어렵겠지만 이런 따뜻하고 좋은 시 앞에서는 멈추고 다시 처음으로 돌아가 다시 읽기를 반복한다. 그 파밭의 푸른색이 눈앞에 펼쳐진 것 같다. 붉고 푸른 이미지가 전하는 게 반복되는 사랑과 상실이라고, 우리네 삶이라고 믿고 싶다.


삶은 계란의 껍질이

벗겨지듯

묵은 사랑이

벗겨질 때

붉은 파밭의 푸른 새싹을 보아라

얻는다는 것은 곧 잃는 것이다


먼지 앉은 석경 너머로

너의 그림자가

움직이듯

묵은 사랑이

움직일 때

붉은 파밭의 푸른 새싹을 보아라

얻는다는 것은 곧 잃는다는 것이다


새벽에 조로의 물이

대낮이 지나도록 마르지 않고

젖어 있듯이

묵은 사랑이

뉘우치는 마음의 한복판에

젖어 있을 때

붉은 파밭의 푸른 새싹을 보아라

얻는다는 것은 곧 잃는 것이다 ( 「파밭 가에서」, 전문)


김수영을 읽는 일은 그의 생애를 알고 그의 문학세계에 조금이나마 가까이 다가서기 위함일 것이다. 그러나 그의 시, 산문, 일기, 미완성의 소설을 읽는 읽은 우리가 보지 못한 지난 시대를 읽는 일이고 현재의 삶을 돌아보는 일인지도 모른다. 같은 듯 다른 시대가 풀어야 할 과제는 여전히 같다. 그것이 정치든 문학이든 말이다. 반복되는 시행착오, 고뇌하는 이들, 영혼을 탐구하고 균형과 조화가 아름다운 시대를 바라고 소망하는 마음은 한결같아서다.


풀이 눕는다

비를 몰아오는 동풍에 나부껴

풀은 눕고

드디어 울었다

날이 흐려서 더 울다가

다시 누웠다


풀이 눕는다

바람보다도 더 빨리 눕는다

바람보다도 더 빨리 울고

바람보다 먼저 일어난다


날이 흐리고 풀이 눕는다

발목까지

발밑까지 눕는다

바람보다 늦게 누워도

바람보다 먼저 일어나고

바람보다 늦게 울어도

바람보다 먼저 웃는다

날이 흐리고 풀뿌리가 눕는다 (「풀」, 전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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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쟝쟝 2023-04-21 10:4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삶은 계란 먹고 싶.. 따끈한 거 호호 불어서 ㅋㅋ 이제는 넷플릭스에서보는 지구 반대편 이야기가 김수영의 시절보다 익숙하고 친근하게 느껴지는 시대가 되었네요. 디 에센셜 좋은 기획같아요! 😀

자목련 2023-04-21 12:24   좋아요 0 | URL
바글바글 냄비에 계란 삶아 공쟝쟝 님께 보내고 싶네요. 어렵지만 디 에센셜, 저도 좋은 기획 같아요. 맞아요, 화면에서 처음 보는 사람도 반갑게 느껴지는데 정작 현실의 사람들은 왜 이리 멀까 싶고요. 코로나 19로 멀어진 마음과 관계가 회복되기는 꽤 많은 시간이 필요한 것 같아요. 맛난 점심 드시고 계시죠?
 

겨울 이불을 정리하는 일을 자꾸만 미룬다. 변덕스러운 날씨 탓을 하다가 게으른 내 탓이지 싶다. 하지만 날카로운 봄바람은 어쩔 수 없다. 속절없이 비를 간절히 기다리던 시간에는 흔들림 없이 아랑곳하지 않던 하늘이 비와 더불어 바람까지 보내고 황사까지. 알 수 없는 봄바람이 마음의 옷깃도 여미게 만든다.


코로나 이전에는 봄이면 꽃을 보러 나가기도 했다. 가까운 곳에 꽃터널이 많다. 해마다 나무는 성장하니 웅장한 아름다움도 함께 성장한다. 지난주 부활절 예배를 드리고 오면서 가로수로 심은 벚꽃이 활짝 핀 모습을 보고 놀랐는데 어제는 그 꽃들이 있었나 싶을 정도 연두가 가득했다. 한시도 멈추지 않고 흐르는 시간, 그 안에서 저마다 성장하는 모든 것들. 나는 왜 성장하지 못하고 있는가.


4월의 절반이 지나고 세월호 참사 9주기가 지났다. 시간이 흘러도 슬픔은 흐르거나 지나지 않고 우리 곁을 지킨다. 그래서 4월은 여러 의미로 잔인하다. 잔인한 시간을 달래려 책을 샀다. 모르는 즐거움을 위해서다. 내가 아는 작가가 아닌 모르는 작가, 처음 만나는 작가를 기대하는 새로운 즐거움이라고 할까.





이렌 네미롭스키의 『뜨거운 피』, 버나드 멜러머드의 『점원』, 비타 색빌웨스트의 『모든 열정이 다하고』. 아무런 정보가 없을 때 기대할 수 있다. 뭔가 알게 되면 그 기대는 순수하지 않은 불순함이 포함된다. 이 세 권의 소설에 대한 내 마음이 그렇다. 이 소설을 읽고 난 후 나의 기대는 달라질 것이다. 실망하거나 기대하거나.


아무런 절망 없이 무언가를 기대하는 일, 새로운 책을 만나는 기쁨이다. 모르는 즐거움, 모르는 기쁨이 있다는 건 얼마나 신이 나는 일인가. 남은 4월은 이렇게 신이 나면 좋겠다. 신이 나기 위해 모르는 작가의 책을 더 들여야 할까. 그럴지도 모른다. 4월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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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삭매냐 2023-04-17 11:1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점원 읽다 말고 다른 책들에
그만 정신이 팔렸네요 그것 참.

자목련 2023-04-18 08:49   좋아요 0 | URL
<점원>은 레삭매냐 님의 글에서 처음 본 소설이에요. 언제 읽을지는 저도 모르겠어요 ㅎ

은오 2023-04-17 20:24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모르는 즐거움!! 😆💕 역시 독서는 좋은 취미입니다. 평생 읽어도 안읽은 책 안읽은 작가가 수두룩할거라는게 얼마나 위안이 되는지 ㅋㅋㅋㅋ

자목련 2023-04-18 08:51   좋아요 2 | URL
봄 비처럼 반가운 은오 님! 잘 지내고 있나요? 맞아요, 수많은 책들이 있어 다행이에요 ㅎ

은오 2023-04-19 00:01   좋아요 0 | URL
아아아아ㅏ 봄비처럼 반갑다고 해주시다니 자목련님 다정함에 녹아버려.......ㅠㅠ 저 그만 꼬시세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