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아 보여서 다행 마음산책 짧은 소설
이주란 지음, 임수연 그림 / 마음산책 / 2024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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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 이별하며 산다. 시간과 이별하고 어제의 나와 이별한다. 이별은 다음을 위한 수순이다. 어제의 다음인 오늘, 새로운 나와의 만남을 기대한다. 시간이 흘러 지우고 싶었던 어제, 그때의 나와 재회할 때가 있다. 안쓰러운 나, 그러나 조금은 후련한 나. 그것은 나를 둘러싼 관계와도 마찬가지다. 좋았던 관계, 돌이킬 수 없는 관계, 제대로 정리를 하지 못한 관계. 아무렇지 않게 웃으며 손 내밀 수 있는 과거의 인연은 몇이나 될까. 이주란의 짧은 소설 『좋아 보여서 다행』 은 그런 관계를 돌아보게 한다.


13편의 짧은 이야기엔 만남과 헤어짐이 있다. 우연한 만남, 일부러 작정한 만남, 예고된 이별, 갑작스러운 이별, 영원한 이별까지. 어찌 보면 우리 삶에서 마주할 수 있는 흔하디흔한 관계들. 그 관계와 인연에는 저마다 설명할 수 없는 사정이 있다. 어떤 인연은 이유도 모른 채 끊어지고 어떤 인연은 나중에야 이유를 알게 된다.


「1년 후」의 ‘나’는 헤어진 연인 ‘인우’의 부탁으로 3주 동안 반려견 ‘버트’를 돌봐달라는 부탁을 받는다. 이게 가능할까. 가능하지 않을 일도 아니다. 인우를 만나는 게 아니라 반려견 버트를 만나는 것이니까. 자신만 빠져나왔을 뿐 1년 전과 똑같다. 버트를 산책시키고 장을 보며 지낸다. 3주가 지난 후 인우와의 관계가 명확하게 느껴진다. 이주란의 이번에도 이별의 원인에 대해 선명함을 배제한다. 흐릿하고 불투명하게 그려낸다. 생각해 보면 우리의 관계도 그런 관계가 많다.


그럼에도 분명하게 이유를 찾고 싶은 이별이 있기 마련이다. 원만하게 잘 지냈다고 여기기에 답답한 마음이 크다. 「아주 긴 변명」속 ‘나’는 너와 함께 갔던 카페에서 너를 생각한다. 헤어짐의 발단이 된 하나의 사건을 돌아본다. 2년 전 나에게 했던 왜 그렇게 말했는지. 완전히 어긋나 돌이킬 수 없는 관계를 나는 회복하고 싶은 걸까. 아주 긴 변명이란 제목이 나의 것인지, 내가 듣고 싶은 너의 것인지 모르겠다.


꼭 하나만 물을 수 있다면 그래서 너는 어땠는지 묻고 싶어. 그날 왜 그랬는지가 아니라 그 후로 어땠는지를. 사실 네가 하고 싶은 말은 늘 그렇듯 이후의 일들일 테니까. 나는 그걸 들을 준비를 하고 여기 돌아왔어. 지금의 나는 그때 네 진심을 외면하면서까지 꽉 붙잡고 잃지 않으려던 것들을 결국 잃은 사람이 되어 있거든. (「아주 긴 변명」, 118쪽)





어떤 미련이나 후회를 안고 살아가는 이별이 있는가 하면 「봄의 신호」 속 ‘영수’처럼 영원한 이별을 겪는 이도 있다. 그리고 그를 걱정하고 위로하는 이들이 있다. ‘미소’도 그렇다. 아프고 아린 관계가 아니라 앞으로 단단해지고 어제가 아닌 내일을 같이 할 관계. 영수가 보여준 말 앞에서 찍은 사진을 보고 다 함께 웃을 수 있는 것처럼.


다행히 지금도, 미소의 생각보다 눈앞의 영수는 좋아 보여서 다행이라고 생각하고 있을 때, 좋아 보여서 다행이죠? 영수가 물었고 미소는 정말 이 사람은 최고다! 정말 멋있어! 속으로 생각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이 짧은 순간, 이렇게 많은 느낌표를 쓴 적이 있던가 하면서. (「봄의 신호」, 157쪽)


13편의 이야기 가운데 가장 좋았던 건 마지막 두 편 「산책로 끝에 가면」과 「숲」이었다. 「산책로 끝에 가면」 속 영실과 명자는 초등학교 동창이다. 지난겨울 우연히 둘은 만났다. 영실의 집 근처에 명자의 아들 가족이 산다. 명자가 아들 집에 들를 때마다 영실의 집에도 들른다. 영실과 명자 사이에 특별한 일은 없다. 영자의 청소 일이 끝나면 둘은 마트에 들러 집을 간다. 영실에 어떻게 살아왔는지 명자는 묻지 않는다. 영실이 산책 끝에 명자나무 꽃을 본 이야기를 하며 명자에게 휴대폰 속 명자나무 사진을 보여준다. 명자는 영실 나무를 검색하고 영실 나무가 없지만 찔레나무 열매가 영실이라는 걸 알려준다. 명자와 영실의 관계는 과거가 아닌 현재의 관계의 소중함을 깨닫게 한다고 할까.




「숲」의 ‘현경’과 ‘나’도 다르지 않다. 자주 만나는 사이는 아니다. 그저 1년에 한 두 번 만나는 게 전부다. 그러나 현경에게는 뭐든 말할 수 있다. 그러니까 비밀이나 속사정 같은 거 말이다. 아무렇지 않게 가끔 문자를 보낼 수 있는 관계, 호기심을 갖고 재촉하며 묻지 않고 기다려 줄 수 있는 사이. 나와 현경의 관계는 그 자체로 이미 충분한 것이다.


조용히 우느라고 한참 답을 하지 못했더니 괜찮으냐고 묻기에 괜찮다고 했더니 다행이라는 대답이 돌아왔을 때. 그때 나는 내가 괜찮다고 말할 수 있다는 게 좋았다. 괜찮지 않은 마음도 있었지만 그게 다는 아니었으니까. 그게 내가 사람을 사랑하는 방식이라고 생각한 건 그때가 처음이었던 것 같고 그 뒤로 나는 안심하고 현경의 그림자와 함께 걸었다. (「숲」, 193쪽)





아무것도 묻지 않고 좋아 보여서 다행이야라고 말할 수 있는 관계는 건강한 관계다. 그런 관계는 안 좋아 보이는 데 괜찮아라고도 물을 수 있기 때문이다. 오랜만에 안부를 묻는 문자가 반갑고 바로 답장을 보낼 수 있는 일, 그런 관계가 아닐까 싶다. 답을 보내지 않더라도 전화를 거는 대신 기다려줄 거라는 확신이 있는 관계. 이주란이 궁극적으로 보여주고 싶은 다정한 사이다. 친절하고 상냥하지 않아도 쌀쌀하지 않은 그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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움직임 소설, 향
조경란 지음 / 작가정신 / 2024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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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족 간의 대화는 원활하지 않다. 대화 자체가 사라졌다. 함께 식사를 하는 일도 손에 꼽을 정도다. 각자의 생활 방식에 따라 움직인다. 꼭 해야 할 말은 말이 아닌 문자로 전달된다. 먹고 사느라 바쁘니까, 가족 사이에 무슨 대화가 필요하냐는 농담은 진심이 된다. 개정판으로 다시 만난 조경란의 『움직임』 속 가족도 다르지 않다.


나에게 새 가족이 생겼다.(13쪽)란 문장으로 시작하는 소설의 화자 ‘나’(신이경)는 스무 살이다. 엄마의 죽음으로 외할아버지, 이모, 삼촌이 사는 목욕탕 집 1층 셋 방에 살게 된다. 아무도 이경을 환영하지 않는다. 할아버지와 삼촌은 무허가로 벽돌을 찍어내 팔고 있다. 농협에 다니는 이모는 퇴근 후에는 영어 공부를 한다.‘나’는 시키지 않았지만 가족의 식사를 챙기고 빨래를 하고 매일 할아버지와 삼촌에게 점심 도시락을 챙긴다. 자신이 할 수 있는 최선이라 여겼기 때문이다. 그리고 화단을 가꾼다. 목욕탕집 누구도 신경 쓰지 않는 화단. 담배꽁초와 쓰레기가 널려있던 화단에 꽃씨를 뿌리고 물을 준다. 나’는 철저하게 혼자다.


아무도 필요할 때 곁에 있어 주지 않는다. 누구의 뱃속도 빌리지 않고 세상에 혼자 태어난 사람처럼 나는 여전히 혼자다. (38쪽)


목욕탕을 오가는 사람들, 1층에 세는 다른 이들도 ‘나’에게 관심이 없다. 오직 한 사람, 김치나 반찬을 들고 삼촌을 찾아오는 여자만 ‘나’에게 말을 건다. 이경이 궁금한 사람은 앞방 남자다. 높은 건물의 유리창을 닦는 남자, 남자의 열쇠 하나를 훔쳐 몰래 남자의 방에 들어가 남자가 누웠던 자리에 눕기도 한다. 심지어 이모의 지갑에 꺼낸 돈을 모아 남자의 밀린 방세를 내주기도 한다.


‘나’의 바깥 움직임은 할아버지와 삼촌에게 도시락을 가져다주는 게 전부다. 다리 위에서 샛강을 바라보는 일, 괜히 기차역을 서성이다 셋방을 돌아온다. 그런 ‘나’에게 이모가 밖에서 점심으로 냉면을 사주며 ‘이경’이라 불러준다. 한 번도 다정하게 불러준 적 없기에 이상할 정도다. 그리고 이모는 집을 나갔다. 앞집 남자와 함께. 이모에 대한 소문이 돌았지만 할아버지와 삼촌은 아무 말도 하지 않는다. 처음부터 이모가 없었던 것처럼. 삼촌은 다락방에서 생활하고 술에 취해 집에 오던 할아버지의 외박이 늘어날 뿐이다. 그러니 삼촌이 다락방을 내려오다 부러진 사다리에 다쳐 입원을 한 사실을 나중에 안 건 당연한지도 모른다.


처음 이 소설을 읽었을 때 ‘나’에게만 집중했던 시선이 이번에는 이상하게 할아버지, 삼촌, 이모를 향했다. 조카에게 검정고시 교재를 사 준 이모, 엄마를 잃은 손녀에게 한 마디 위로를 건네지 않는 할아버지, 아버지를 도와 벽돌을 찍는 삼촌. 그들에게 가족은 보듬어야 할 존재가 아닌 벗어나고 싶은 굴레였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다. 일상적인 대화는 찾을 수 없다. 반복된 동선, 움직임은 그게 전부다. 동선을 벗어난 움직임은 사고가 된다. 이모의 가출, 삼촌의 입원, 그리고 할아버지의 죽음.


넷이었던 새 가족은 둘이 되었다. 아니다, 삼촌의 여자와 여자의 뱃속 아이가 있으니 다시 넷이다. 아무리 쌓아 올려도 무너지는 모래성 같았던 가족 대신 새로운 가족을 기대하게 만든다. 조경란은 절망이나 불행으로 채워진 회복 불가능한 가족을 그리는 듯했으나 궁극적으로 서로를 이어주는 가족을 말한다. 작지만 따뜻하고 환한 변화를 심어준다. 조심스럽지만 다양한 동선이 생기고 움직임은 확장될 거라는 희망을 제시한다.


아무려나 삼촌은 곧 아버지가 되고 나는 사촌을 얻게 된다. 꽃씨를 뿌를 때쯤 아기는 태어난다. (10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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yamoo 2024-05-14 15:3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조경란 작가 작품이군요! 조경란 작가 책을 마지막으로 읽은 게 언제인지 기억도 없어요. 그래도 아직까지 꾸준히 작품을 내고 있나봅니다. 근데, 전 조경란 작가나 서하진 작가는 재미가 없더라구요. 아무래도 제가 여자가 아니라서 그런지도 모릅니다.

리뷰 잘 읽었어요^^

자목련 2024-05-15 14:52   좋아요 0 | URL
저도 예전에는 조경란 작가의 소설을 꽤 읽었는데 신간은 읽지 못했어요. 이 소설도 개정판이고요.
야무 님의 말씀처럼 동성이 아니면 공감하기 어려운 부분도 있겠지 싶어요^^
 
마담 흑조는 곤란한 이야기를 청한다 - 1928, 부산
무경 지음 / 나비클럽 / 2024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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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상한 소문을 흘려듣는 이가 있고 진위를 가리려는 이가 있다. 후자의 경우 호기심을 뛰어넘은 그 무언가가 있다. 이야기의 앞뒤를 살피고 그로 인해 피해를 보는 이가 없기를 바라는 마음 같은 것이라고 할까. 무경의 『마담 흑조는 곤란한 이야기를 청한다 : 1928, 부산』 속 ‘천연주’도 그런 마음이었을 것이다. 궁금증을 불러오는 제목의 탐정소설이자 추리소설이다.


1928, 부산에서 알 수 있듯 일제강점기의 부산을 배경으로 들려주는 세 개의 이야기다. 그러니 세 개의 사건과 세 명의 범인이 있다. 현재가 아닌 100여 년 전에 일을 법한 사건을 추리하는 재미가 있다. 물론 이번에도 예외 없이 나의 추리는 완벽하게 실패했다. 그러나 그 시대의 삶을 즐겁게 상상할 수 있다. 소설의 중심인물인 ‘천연주’는 일제강점기 조선 최고 갑부의 무남독녀다. 일본 이름은 센다 아카네로 죽을 고비를 넘긴 후 작은 다방 ‘흑조’를 운영한다. 비서 야나 씨와 경호를 맡는 강 선생이 항상 그녀 곁을 지킨다.


천연주의 취미는 다른 사람의 이야기를 듣는 것이었다. 세상의 흔하디흔한 이야기에는 관심이 없었다. 그녀가 좋아하는 것은 이상하고 진상을 쉽게 알 수 없는 수수께끼 같은 이야기였다. 그래서 자신이 본정本町에서 경영하는 작은 다방 ‘흑조’에 앉아, 종종 찾아오는 손님들이 가져오는 온갖 기이한 이야기를 즐겨 들었다. (4쪽)


이 소설이 흥미로운 건 다른 추리소설이나 탐정 소설과 다르게 사건을 파헤치는 과정이 아니라 천연주란 인물에 대한 궁금증이다. 천연주가 화자로 등장하지 않는다. 첫 번째 이야기는 부산으로 요양을 떠나는 천연주 일행과 같은 기차를 탄 손 선생, 두 번째는 같은 여관에 묵게 된 일본에서 조선으로 여행을 온 부부 중 남편, 세 번째는 연주의 고보 선배인 상미의 시선으로 진행된다. 천연주의 이동에 따라 구포 야시고개, 동래온천, 장수통으로 장소가 변경된다. 아마도 부산이 고향이거나 부산에 거주하는 이에게는 더욱 남다른 이야기가 될 것이다. 시대 소설을 좋아하는 이들에게도 마찬가지다.


과수원과 양계장을 소유한 일본인 개를 여우가 죽였다는 첫 번째 사건은 구전설화를 떠올리기에 충분하다. 동래 온천 여행을 온 일본인 아내가 귤을 먹고 죽은 두 번째 사건이야말로 범인을 추리하는 재미가 남다르다. 같은 시간 같은 공간에 있던 이들이 모두 용의선상에 오른다. 천연주도 예외는 아니다. 살해 동기가 없는 인물을 하나씩 지우고 마침내 밝혀지는 범인. 쓰러질 듯 가냘픈 외모와 창백한 얼굴의 천연주는 사건에 직접 개입하지 않고 슬그머니 실마리를 던질 뿐이다.


정말로 탐정이란 마음을 들여다보는 요괴 같은 존재인지도 모른다. 속마음을 꼭꼭 숨기고 살아야만 하는 이런 세상에서는 정말 달갑지 않은 존재였다. (179쪽)


마지막 세 번째는 연주의 고보 선배인 상미와 그의 남자친구 경석을 쫓는 회색 모자의 정체를 알아내는 이야기다. 상미와 경석이 일본으로 가려는 이유에 대한 구제적인 설명도 없기에 가장 미스터리하다. 그러나 눈치가 빠른 독자라면 1928년과 일제강점기를 생각한다면 그 둘의 계획을 예상할 수 있다. 회색 모자를 잡기 위해 함정을 파고 추리하는 과정은 드라마의 한 장면 같다. 그와는 별개로 상미와 연주의 대화로 그들의 학창 시절과 연주가 어떤 학생이었는지 궁금증은 커진다.


『마담 흑조는 곤란한 이야기를 청한다 : 1928, 부산』 은 재미있는 소설이다. 천연주를 비롯한 야나 씨와 강 선생이란 캐릭터가 앞으로 어떤 사건을 해결할지 기대하게 만든다. 이 소설에서 내가 찍은 방점은 천연주가 중요하게 언급한 이런 문장이다. ‘이상한 것은 이상해야 할 이유가 있기에 이상해 보이는 것이다.’ 이상한 것을 이상하게 보는 시선, 현재의 우리에게 가장 필요한 태도는 아닐는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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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리학자는 두뇌를 믿지 않는다 - 운, 재능, 그리고 한 가지 더 필요한 삶의 태도에 관한 이야기
브라이언 키팅 지음, 마크 에드워즈 그림, 이한음 옮김 / 다산초당 / 2024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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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리학자이자 과학 커뮤니케이터 짐 알칼릴리의 『어떻게 물리학을 사랑하지 않을 수 있을까?』를 인상 깊게 읽었다. 어려운 주제였지만 물리학에 대한 애정이 커졌다. 그 책을 읽었기에 브라이언 키팅의 『물리학자는 두뇌를 믿지 않는다』가 궁금했다. ‘물리학자는 두뇌를 믿지 않는다’란 제목과 ‘운, 재능, 그리고 한 가지 더 필요한 삶의 태도에 관한 이야기’란 부제는 살피지 않고 말이다. 누군가 대중에게 과학을 재미있게 설명하는 유튜버 궤도를 떠올릴 수도 있다. 미리 언급하자면 이 책에 윤하의 노래로 잘 알려진 ‘사건의 지평선' 이 등장한다.


고백하자면 노벨문학상 수상자의 이름은 알고 있지만 노벨물리학상을 받는 물리학자의 이름은 알지 못한다. 그런 의미에서 이 책에 등장하는 9명의 물리학자는 내게 특별한 이름이 될 것이다. 물론 외우지는 못할 것이다. 이 책은 우주론자이자 과학자인 브라이언 키팅이 노벨물리학상 수상자 9명과 만나 나눈 대화 인터뷰다. 물리학자의 삶과 연구자의 태도에 관해 중점적으로 들려준다. 저자의 설명처럼 여자 물리학자의 목소리는 들을 수 없다는 점이 안타깝다.


연구자의 삶이란 어떠할까. 수식과 실험이 전부일 것 같다. 성과를 내야 하고 남보다 빠르게 어떤 이론을 발표하는 일 그게 목표가 아닐까. 이런 나의 생각은 무지한 것이었다. 놀랍게도 물리학자들은 거의 비슷한 느낌을 안겨주었는데 동료를 경쟁자로 여기지 않는다는 것, 실패는 당연한 일이며 성과는 혼자 이룰 수 없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어느 분야든 협력이 중요하며 실패로 인해 좌절하는 대신 실패를 받아들이고 나가야 한다는 것이다. 9명이 연구하는 분야는 다르지만 말이다.


모든 연구는 사실 어느 한 개인이 홀로 내놓는 게 아니라 전반적으로 인정받으면서 종합되는 겁니다. 새로운 뭔가가 출연할 때, 그게 맥락에 놓이기까지는 시간이 좀 걸려요. (물리학자 덩컨 홀데인, 162~163쪽)


그들은 연구자이면서 과거에는 제자였고 현재는 누군가의 스승이었다. 생각해 보면 물리학에서 하나의 이론이나 우주적 현상을 밝히는 일은 혼자만 할 수 있는 게 아니다. 하나의 주제를 몇 십 년 이상 파고들어 연구를 해야만 결과를 얻을 수 있다. 그 결괏값이 반드시 성공이라는 보장도 없다는 건 우리도 안다. 하루 종일 연구에 매달려도 당장은 결과를 보여줄 수 없는 일.


우리 물리학자들이 하는 연구의 상당수는 사실 쓸모가 없지요. 지금까지 이뤄진 놀라운 발견 대부분이 우리 삶에 아무런 직접적인 영향도 미치지 않을 거예요. 매일 세계를 조금 더 이해해 간다는 기쁨을 제외하면 말이죠. (물리학자 셀던 글래쇼, 101쪽)






전자기약이론으로 노벨물리학상을 받은 셀던 글래쇼는 학생을 가르치는 기쁨을 말한다. 누군가 그의 강의 덕분에 물리학의 세계를 만나고 연구자의 길을 걸으며 물리학은 발전한다. 그가 연구에만 집중했다면 가능한 일이었을까? 시를 좋아한다는 물리학 교수 프랭크 윌첵의 말도 인상적이다.


세상은 여러 층위로 기술할 수 있는데, 시도 중요한 역할을 해요. 제 말은 이쪽 아니면 저쪽을 택해야 하는 게 아니란 겁니다. 양쪽 다일 수도 있어요. 같은 대상이나 현상을 다른 식으로 기술할 수 있고, 각 기술 방식은 나름대로 타당해요. (물리학자 프랭크 윌첵, 183쪽)


우주배경복사 연구로 노벨물리학상을 수상한 존 메데의 솔직함은 감동적이다. 연구자뿐만 아니라 어떤 일이 일어날지 모르는 우리의 삶도 다르지 않기 때문이다. 삶이 대해 확신을 갖는 이가 얼마나 될까. 그럼에도 꾸준하게 성실하게 자신의 자리를 지키며 살아가는 일, 누구나 같다.


매일 아침 일어나서 난 아직 이해할 수 없는 뭔가를 연구하지요. 따라서 매일 난 학자인데 아무것도 모르는 사기꾼이 되는 거예요. (물리학자 존 메더, 219쪽)


과학자를 꿈꾸는 이들에게는 그 어떤 것보다 확실한 동기부여가 될 책이다. 물리학에 관심이 있는 이들에게도 충분히 흥미롭고 인상적인 책이다. 물론 실패로 인한 기억으로 도전을 주저하는 이들에게 일어설 힘을 안겨준다. 그러니 이 책은 ‘운, 재능, 그리고 한 가지 더 필요한 삶의 태도에 관한 이야기’란 부제에 우리의 삶을 대입하기에 충분하다. 살아가면서 마주하는 어려움과 실패를 저자의 바람처럼 물리학자처럼 해결할 수 있는 지혜를 충분히 얻을 수 있다. 삶이란 책의 원제(Into the Impossible)처럼 불가능 속으로 전진하는 일이니까.


우리는 어차피 실패한다. 그렇다면 우리에게 더 절박한 질문은 어떻게 실패할지 않을 것인가 하는 문제가 아니라 어떻게 실패를 다룰 것인가, 혹은 실패 끝에서 무엇을 할 것인가가 하는 문제다. (6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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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철 행복 - 가장 알맞은 시절에 건네는 스물네 번의 다정한 안부
김신지 지음 / 인플루엔셜(주) / 2024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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벚꽃에 취한 게 엊그제 같은데 초록에 반하는 날들이다. 나는 혼자 멈춰 있고 계절은 사부작사부작 제 길을 걷는다. 곧 모내기가 시작될 테니 여름인 것이다. 시골에서 나고 자란 탓에 계절의 움직임을 조금 안다. 그건 참 좋은 일이다. 이맘때의 절기를 찾아보는 것, 계절을 사는 일이다. 경계가 불분명해하지만 계절의 문턱을 지나 다음 계절이 온다는 건 얼마나 감사하고 다행인지. 김신지의 『체절 행복』 그런 일상의 감사를 들려준다. 제목 그대로 체절의 행복을 느끼며 사는 일 말이다. 입춘부터 대한까지 24절기를 소개한다. 절기마다 어떻게 재밌고 즐겁게 지내는지 집중하게 만든다.


누군가 사느라 바빠서 절기 따위는 챙길 여력이 없다고 말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가만 생각해 보면 추운 겨울 지나 꽃이 피면 꽃이 반갑고 그 소식을 전한 기억이 따라올지도 모른다. 계절이 오고 가는지 체감도 못하게 지내다가 어느 날 문득 한 계절이 지났다는 사실이 안타까웠던 적도 말이다. 엊그제 24절기 중 일곱 번째, 여름의 입구인 입하(立夏)였다. 벌써 올여름의 더위를 걱정한다. 제철이었던 주꾸미도 먹지 못하고 냉동실에 얼려 둔 머위 쌈도 먹지 못했다. 이런 생각이 드는 건 나뿐일까. 『체절 행복』을 읽으면서 우리 조상들이 얼마나 지혜로운 삶을 살았는지 감탄한다.


그때는 지금과 달라서 자연의 흐름에 맞춰 살아야 했지만 여름 더위를 피하고 겨울 추위를 피해 다른 나라에 갈 수도 있는 세상이니 제철 절기를 알고 챙기는 게 의미가 없다고 생각할지도 모른다. 충분히 그럴 수 있다. 하지만 이 책을 만난다면 나만의 제철 절기를 즐기는 기쁨을 쌓고 싶을 것이다. 봄마다 조팝과 이팝나무를 구분하지 못하고 헷갈렸던 나는 이제 확실히 안다. 키가 큰 게 이팝나무라는 걸 말이다. 계절에 맞게 사는 일, 그건 일상의 소소한 즐거움을 누리는 삶이다.


새하얀 눈꽃 치즈를 수북이 뿌려둔 것 같은 이팝나무는 이맘때 어딜 가도 시선을 사로잡는다. 저 꽃 좀 봐, 하고 멈춰 서는 순간에 우리 삶은 조금 느리게 흐른다. 한 사람의 삶에서 그렇게 말한 순간들만 모아 편집해둔다면 그건 얼마나 아름다운 영상이 될까. (110쪽)


시골에서 나고 자란 탓에 계절마다 심어야 할 작물이 무엇이고 수확해야 할 게 무엇인지 안다고 생각했다. 한데 책을 읽으면서 나는 잊고 지낸 게 많았다. 요즘 마늘종 뽑을 때인데, 어렸을 적에는 그게 정말 싫었다. 바쁜 농사철에는 시험공부를 핑계로 학교로 도망 치곤했는데, 부모님께 정말 죄송하다. 그때가 아니면 할 수 없는 일이 있다는 것, 그때가 아니면 볼 수 없는 풍경이 있다는 것, 제철 절기를 기억해야 할 충분한 이유가 된다.


계절마다 좋아하는 것에 마음을 쏟으며 사는 일이 좋다. 기쁘게 몰두하는 일을 어쩌면 ‘마음을 쏟다’라고 표현하게 된 것일까. 여기까지 무사히 잘 담아온 마음을 한 군데다 와르르 쏟아붓는 시간 같다. 그렇다면 내게 초여름은 ‘바깥’에 마음을 쏟고 지내는 계절. 좋아하는 계절은 어떻게든 시간을 내어 즐기고 그게 곧 잘 사는 이이라고 믿으며 지낸다. (141~142쪽)


바깥에서 친구들과 맥주를 마시려고 오며 가며 카페나 식당을 봐 둔다는 저자의 마음이 괜히 설렌다. 나도 더위가 몰려오기 전에, 장마가 시작되기 전에 맘껏 바깥을 즐기는 일상을 계획하고 싶다. 우선은 지금 한창인 작약을 보는 일에 몰두할 생각에 설렌다. 바깥은 아니더라도 집안에서 볼 수 있는 작약, 지금의 제철 행복이다.


다가오는 절기를 헤아려본다. 절기를 안다는 게 참 좋다. 계획을 하지 않아도 자연이 알아서 계획을 알려준다고 할까. 물론 나이가 들고 계절의 흐름이 더 놀라고 신기하고 감사함을 느낀다. 주변의 것들을 둘러보는 마음, 같은 자리에서 좋은 이들과 작년의 이맘때를 기억하고 떠올리는 일, 이 역시 감사하다. 그럼에도 어린 시절과 다르게 춥고 날카롭던 겨울에 점점 무뎌지고 한여름의 땡볕 더위를 즐기지 못하는 건 아쉽고도 안타깝다. 이 땅에 살면서 온몸으로 만끽할 수 있는 절기의 즐거움이 어느 순간 기록에만 존재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면 아찔하다.


자연스럽게 산다는 건 결국 계절의 흐름을 알고, 계절이 무엇을 어떻게 바꾸어놓는지도 알고, ‘제때’ 해야 할 일을 찾아서 했던 옛사람들과 동식물처럼 사는 것.(333쪽)


다시 돌아오는 계절이 있어 우리 삶을 새로고침 해준다는 건 얼마나 다행한 일인지. 봄이 오는 한 우리는 매번 기회를 얻는다. 동시에 이번 봄은 다음 봄이 아니기에 유일한 기회이기도 하다. (334쪽)


눈이 부신 이 계절, 지금 이 순간을 즐겨야겠다는 생각이 앞선다. 제철의 행복을 만끽하고 누리고 싶다. 내가 맞이하는 여름은 작년과 같지만 다를 것이다. 내가 맞이할 가을과 겨울도 그러할 것이다. 그러니 이때를 놓치지 말길 바란다. 먹어야 할 것을 먹고 봐야 할 것을 보고 만나야 할 사람을 만나고 감사해야 할 것에 감사하자. 계절이 보내는 기척을 놓치지 말고 그것을 반갑게 맞이하며 살아가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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망고 2024-05-07 16:2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요즘 작약철이죠 저희집에도 작약이 조금 폈어요 활짝은 아니고^^ 며칠 지나면 또 장미철이고요 꽃 피는거 보고 있으면 제철행복이 느껴집니다 자목련님이 들이신 작약 보면서 5월 행복하게 보내셔요😄

자목련 2024-05-09 10:49   좋아요 0 | URL
작약에 반갑고, 장미에 설레고!
제가 들인 작약은 활짝으로 가고 있어요^^

서니데이 2024-05-11 17:5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이 책 장바구니에 담아둔 것 같은데, 샀는지 찾아봐야겠어요.
자목련님, 비오는 주말입니다. 따뜻하고 좋은 시간 되세요.^^

자목련 2024-05-13 15:09   좋아요 1 | URL
지금은 이 책을 곁에 두셨을 것 같아요.
비 오고 깨끗하고 맑은 월요일이에요. 서니데이 님 좋은 오후 이어가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