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식물 산책 - 식물세밀화가가 식물을 보는 방법
이소영 지음 / 글항아리 / 2018년 4월
평점 :
이웃서재님의 댓글 한 줄에 이 책을 읽게 되었다. 고맙게 생각한다.
어느 정도 나이가 들어서야 겨우 식물에 눈을 뜬 나같은 입장에서 보면 이 책을 쓴 저자는 대학을 진학할 때 이미 이쪽 분야의 전망을 내다보는 안목이 있었던 것 같다. 안목 이전에 식물에 대한 애정이 먼저였을지도 모른다. 분명한 건 자신이 좋아하는 일을 즐겁게 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한없이 부러운 일을 하고 있는 사람이다.
식물과 함께 하는 저자의 글이라 그런가, 글이 식물을 닮았다. 뿌린 대로 거둔 듯한 정직함과 진솔함이 묻어나는 글이다. 새로운 분야를 개척한 사람의 사명감도 언뜻언뜻 행간에 드러나기도 한다. 몸을 써서 일한 사람의 부지런함도 배어있다. 더디지만 꾸준히 성장하는 나무를 연상시킨다.
읽다보면 그동안 피상적으로만 알고 있었던 어떤 사실들에 수정이 필요하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옮겨본다.
세밀細密이란 단어는 식물학 그림에 어울리지 않는다. 내가 그리는 식물 그림은 식물의 보편적이고 일반적인 특징은 확대하고 강조하되, 식물 개체의 환경 변이와 같이 종의 특징이 아닌 면은 축소하는 해부도로, 세밀화란 용어를 들었을 때 연상되는 극사실주의적 그림이 아니다. 영어의 botanical art, botanical illustration 은 직역하면 '식물학 미술'내지 '식물학 그림'이라고 할 수 있다. 우리와 같은 한자 문화권이면서, 오래전부터 식물 문화가 발달했던 일본과 중국에서조차 '세밀'이란 단어를 쓰지 않는다. 보통 도해도, 도해화, 해부화, 식물화 등으로 불린다. 식물세밀화도 메디컬일러스트 등 다른 과학 일러스트처럼 보태니컬일러스트 혹은 식물학 그림이라고 불러야 한다.
..사람들은 허브가 주로 이국 식물들인 줄 알지만, 허브의 정확한 정의는 "향으로 이용하거나 약효가 있는 식물"이며, 우리가 매일 먹는 파, 마늘, 양파, 부추와 같은 채소도 모두 아우른다.
우리나라에는 원예식물의 식물세밀화 기록이 거의 없다시피 하다. 하지만 분명한 건 사진이 이상적인 식물 기록은 아니라는 점이다. 사진으로는 식물의 종 특징을 정확히 표현해낼 수 없다. 있는 그대로의 모습이 담기는 사진에는 식물 개체 각각의 변이가 모두 드러나기 때문이다. 반면 식물세밀화에서는 그 종의 보편적이고 대표적인 특징은 드러내되, 개체의 환경 변이 등은 축소해 표현한다. 덕분에 식물을 더 쉽게 식별할 수 있고, 특징을 잡아내기도 용이하다. 식물 연구가 발달한 미국과 영국, 일본에서 여전히 새로운 식물을 소개할 때 사진이 아닌 그림으로 발표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얼마전 도서관 갤러리에서 보았던 세밀화를 떠올리니 피식 웃음이 나왔다. 하나같이 멋진 세밀화여서 관람 내내 입을 다물지 못했었는데, 이 책을 읽고서야 식물세물화를 그렇게 멋지게 그릴 필요가 없다는 걸 알게 되었다. 본질에 충실하면 된다는 것. 그렇다면 겁 먹지 않고 시도해볼 수 있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일제는 한국의 식물을 연구하면서 이 땅의 오래된 나무를 모조리 베었다. 특히 한국을 상징하는 국화 무궁화나무의 경우, 일제강점기 이전에 식재된 개체은 거의 남아 있지 않을 정도로 몰살됐다. 우리나라에 남아 있는 오래된 나무들의 수종이 대개 소나무, 느티나무, 은행나무 등으로 한정적인 것도 바로 이 때문이다. 나는 신주쿠공원에 있는 이 오래되고 거대한 나무를 올려다보며 왠지 억울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련던 큐가든에서 구입한 티 타월(Tea Towel).
아참, 제일 멋진 말을 빠뜨렸다.
좋은 걸 많이 봐야 좋은 일을 할 수 있다. p. 174
"좋은 걸 많이 봐라."
좋은 걸 많이 봐야 좋은 걸 만들 수 있고 그릴 수 있다. 선생님이 늘 하던 말씀이다. 그러면서 선생님은 항상 런던의 큐왕립식물원 이야기를 했다. 세계에서 가장 식물 문화가 발달한 나라 영국, 그리고 그곳의 대표 식물원인 큐가든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