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탈리아 로마의 콜로세움(Colosseum)
 
콜로세움



  콜로세움
로마의 상징이라 할 수 있는 콜로세움은 고대 로마의 유적지중 규모가 가장 큰 것으로 이탈리아어로는 콜로세오(Colosseo)라고 한다. 정식 명칭은 플라비우스 원형극장이다.

콜로세움이란 이름에는 두가지 설이 있다. 그 하나는 '거대하다'라는 뜻을 가진 콜로사레(Colossale)에서, 또 하나는 경기장 옆에 네로 황제가 세운 높이 30m의 거대한 금도금 상 콜로소가 있었기 때문이라는 설이 바로 그것인데 전자의 설이 유력하다.

콜로세움은 기원후 72년 로마의 베스파시아누스 황제가 네로 시대의 이완된 국가 질서를 회복한 후, 네로의 황금궁전의 일부인 인공호수을 만들었던 자리에 착공하여 그의 아들 티투스 황제(80년) 때 완공하였다. 완성 축하를 위해 100일 동안 경기가 열렸으며, 그 때 5,000마리의 맹수가 도살되었다고 한다.


장대한 타원형 플랜이 있는 투기장은 아치와 볼트를 구사한 로마 건축기술의 결정이라고도 할 수 있는 건조물로서 거대한 바위 축대위에 축조되었으며, 이 축대는 점토질의 인공호수위에 설치되어 지진이나 기타 천재로 인한 흔들림을 흡수하 도록 설계되었다.
약 5만 명에 가까운 관객을 수용할 수 있는 로마제국 최대의 투기장이었다.

콜로세움은 최대 지름188 m, 최소 지름 156 m, 둘레 527 m, 높이 57 m의 4층으로 된 타원형 건물인데, 1층은 토스카나 식, 2층은 이오니아 식, 3층은 코린트 식의 둥근기둥으로 각각의 아치가 장식되어 있다.


또한 4층을 제외하고 원기둥과 원기둥 사이에는 아치가 있고, 2층과 3층에는 조상(彫像)이 놓여 있다.
내부는 긴지름 86m, 짧은지름 54m의 아레나(투기장)를 중심으로 카베아(관객석)가 방사상으로 배치되어 있고,
칸칸마다 나누어진 맹수들의 우리 위에 나무로 바닥을 만들어 지상과 지하를 분리시켰는데 지하의 방에는 맹수뿐만 아니라 검투사, 사형수들이 갇혀 있었다. 이 경기장은 지하의 대기실 및 천막 지붕이 설치되었던 것으로 알려진다.

이 곳에서는 검투사의 경기, 맹수와의 싸움이 즐겨 행해졌으며, 심지어는 장내에 물을 채워 전투를 하는 모의 해전 등도 벌였다. 제정 초기 크리스트교 박해 시대에는 많은 신도가 이 콜롯세움에서 야수에 의해 순교의 피를 흘리기도 했다.


콜로세움은 완공된 이래 300여년 동안 피비린내 나는 사투가 계속 벌어지다가 405년 오노리우스 황제가 격투기를 폐지함에 따라 마침내 처참한 역사도 종지부를 찍게 되었다.

그 후 콜로세움은 지진으로 인한 피해를 입기도 하고, 중세 교회를 짓는데 재료로 쓰이기도 해 외벽의 절반이 없어지는 수난을 겪었다.
그러다가 18세기 경 교황의 명에 따라 기독교 수난의 현장으로 복구되어 현재의 모습을 유지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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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마트라의 보물 니아스(NIAS)

 


   
시적인 바다, 울창한 열대림, 적적하리만치 조용한 해변, 아주 가끔 씩 해변의 울창한 야자수 사이로 손을 잡고 걷는 연인들,  망중한을 즐기려는 듯 하얗게 부서지는 파도만을 응시한 채 모닥불 옆에 앉아있는 이방인, 그리고 그 뒤로 높은 파도 위를 미끄러지며 환호하는 써퍼들의 구릿빛 얼굴과 하얗게 드러난 이...
일상의 모든 것을 뒤로 하고 아무런 생각 없이 그저 한가로운 여유와 원시적인 낭만을 갖고 싶은 여행자들에게 더 없이 완벽한 조건을 지닌 곳.  그런가 하면 매년 여름 세계 최고수준의 파도타기 대회가 열려 세계각국의 선수들이 이곳의 원시적인 바다와 자연적인 환경에 매료되어 방문을 거듭하는 곳.
니아스는 인도네시아의 가장 서쪽에 자리잡고 있는 수마트라의 북서쪽에 위치한 제주도 크기의 2.7배에 해당하는 조그만 섬으로서, 수마트라 주변의 섬들 중 가장 사랑 받는 이곳은 이미 발전 할대로 발전해버려 그 순수성을 잃어버린 발리섬이나 다른 알려진 많은 곳과는 달리, 아직까지도 원시에 가까울 정도로 개발되지 않은 자연 그대로의 형태가 많이 남아있다.
 
이곳은 과거에 농경사회로 안착한 타 지역과 달리 전통적으로 사냥과 부족간의 전쟁, 그리고 외국과의 무역에 의해 유지, 발전되어왔으며 철저한 계급사회로서 각 마을은 원칙적으로 원로회의에 의해 다스려져 왔다. 계급은 일반적으로 귀족과 평민계급, 그리고 노예계급으로 나뉘어지며 때로는 전쟁에 패한 부족을 노예로 삼기도 하고 이들을 타 부족이나 외국으로까지 상품으로서 매매하기도 했는데, 그래서 한때는 이곳이 노예매매의 중심지로서 인기가 높아 17세기 중엽에는 포르투갈로 추정되는 유럽의 노예 구매기지가 설치되었고 화란 인들도 노예를 사기 위해 이곳에 빈번히 왕래하였던 기록도 아직 남아있다. 이들은 원래 매우 호전(好戰)적이라 남에게 지기를 싫어하며 한번 싸움에 접어들면 후퇴라는 것을 몰랐다.과거에는 전통적으로 마을과 마을단위, 또는 마을의 연합단위별로 수시로 전쟁을 벌여, 인간의 머리 사냥과 복수, 노예의 확보를 위한 끝없는 갈등을 빚으며 살아왔는데 당시 죽은 적들의 머리는 건물을 신축할 때 하나의 부적으로서 사용하기도 하고, 마을의 지도자를 사후(死後) 매장할 때 부장품으로서, 또한 처녀가 시집 갈 때 일종의 지참물로서 필수품처럼 사용되었던 웃지 못할 관습을 지니고 있었다. 이러한 무시무시한 관습은 19세기 초 네덜란드인 선교사에 의해 기독교가 전해지기 시작하면서 차츰 사라져 오늘날에는 완전히 자취를 감추었으나, 지금도 이들 마을에서는
그 당시 전쟁 때 사용했던 철로된 투구와 칼, 창과 방패 등이 방문자의 눈길을 끄는데 특히 칼은 그 생김새가 인간의 머리를 사냥하기에 알맞도록,  목을 자르기에 적합하도록 고안이 되어있어 느낌이 섬뜩할 정도다.
이에 맞서 목이 잘리는 것을 막기 위해서는 야자나무로 만든 굵은 목걸이를 착용하고 싸웠는데 이 목걸이의 생김새는 그저 둥글고 굵은 커다란 링처럼 생겼다. 야자나무는 원체 질기고 돌멩이처럼 단단한 나무라서, 아무리 예리한 칼로 내리쳐도 칼이 나무에 박힐망정 목에 상처는 내지 못한다고 한다. 지금도 일반적인 인도네시아 사람들에 비해 이곳 니아스인들은 선입견 때문인지는 몰라도 다소 사납게 생긴 것이 사실이다. 이들의 종교는 원래 돌, 나무, 동물 등을 신봉하는 애니미즘과 조상숭배가 전통적으로 이어져 왔었으나, 이후 인도로부터 유입된 힌두교와 이슬람교가 이들의 전통을 서서히 무너뜨리기 시작하였고, 19세기에 들어서 유럽 선교사들에 의해 강력하게 전해진 기독교 때문에 원주민의 생활양식이 일대 변혁이 일기 시작하였다.  오늘날, 이들은 자신들의 전통은 어느 정도 유지하면서, 북쪽 일부지역을 제외한 대부분의 지역이 기독교를 믿으며 순화되고 있으나, 본래 성격이 과격하고 급한 탓에 금방 열을 올리는가 하면, 다음순간 서로 화해하는 것이 마치 한국사람(?)인 우리자신을 보는 것 같은 느낌이 들기도 한다.


니아스에서는 원주민들의 전통부락의 가옥형태가 대단히 특이하고 흥미로우며 과거에 있었던 부족간의 전투와 전통무용, 그리고 지도자의 담력과 능력을 가늠하거나 용맹스러운 전사를 선발하기 위해 시험대로 사용하였던 돌담 뛰어넘기 등의 관습이 방문객의 요청에 의해 실연되기도 하는데 반드시 볼 만하다.
 특히 돌담 뛰어 넘기는 높이가 2미터나 되고 위 부분의 너비가 50-60센티미터나 되는 돌담을 40미터 전방에서 달려오며 디딤돌을 한번 굴러 몸을 비틀면서 단 한번에 뛰어넘는데  이 멋진 장면은 인도네시아의 1000 루피아 짜리 지폐에도 나와있을 정도로 유명하다. 이러한 관습을 지닌 전통마을들은 주로 중부와 남부의 여러 곳에 위치하고 있으며, 이중 바오마탈루오, 헬리메타등 몇 개의 부락은 예전의 모습대로 비교적 잘 보존 되어있다.


니아스섬에서 가장 아름다운 해변은 써핑으로 유명한 라군드리(Lagundri)와 소라케(Sorake)비치로서 섬의 가장 남쪽에 위치하며 울창한 야자 수림과 깨끗한 바닷물,조그만 카누를 타고 고기를 잡는 어부들과 천진한 원주민 아이들의 노는 모습, 그리고 한적한 해변을 석양을 담뿍 안으며 연인과 함께 걷는 여행자의 모습이 마음을 사로잡는다.
세계최고수준의 써핑 장소 중 하나로서 매년 6월 국제 써핑 대회가 열릴 정도로 풍부한 파도를 자랑하는 라군드리 비치에서는 대회가 끝나면 니아스의 전통적인 축제가 뒤를 잇는다. 많은 사람들이 세계 각 국으로부터 여기에 참여하려고 몰려들지만 이때를 제외하고는 항상 싱그러운 파도소리만이 진정으로 때묻지 않은 곳을 경험하려는 이방인들을 조용히 반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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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차르트의 향기에 취하는 도시 짤즈부르크


 
즈부르크 하면 사람들은 무엇을 떠올릴까. 아마 대부분 영화 '사운드 오브 뮤직' 아니면 음악가 모차르트를 떠올릴 것이다. 이토록 낭만과 음악의 도시로서 음악을 사랑하는 모든 이의 동경의 대상이 되고 있는 이 도시는 과연 어떤 곳일까.
알프스의 맨 북쪽 끝자락, 오목한 고원지대에 위치하고 있는 짤즈부르크를 처음 방문하는 사람들은 우선 만년설 산을 배경으로 다소곳이 앉아있는 자그마한 이 도시의 아름다운 도시미에 반하게 된다. 도심에서 개울처럼 자그마한 짤자흐 강을 건너 구 시가지의 남쪽 언덕 위에 우뚝 솟아있는 호엔짤즈부르크성은 중세의 향기를 풍기고 있고, 성당을 끼고 있는 광장의 노천 카페에서는 피아노와 바이올린의 이중주가 생음악으로 연주되며 분수 옆에 앉아 사랑의 대화를 나누는 연인들의 가슴을 아이스크림처럼 녹여준다. 여행자들이 바쁘디 바쁜 도시에서의 일정을 마치고 편히 쉬고 싶은 마음으로 이곳을 휴양지로 생각하는 이유는 이 도시의 차분하고 고전적이며, 음악적인 향취 때문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곳이 중부유럽에서는 그 유래를 찾기 힘들 정도로 도도하고 고집 세며 자존심 강한 도시였다는 것을 아는 사람은 그리 흔치 않은 것 같다. 지금도 '짤즈부르크 사람' 하면 비엔나를 비롯한 나머지 오스트리아 사람들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든다고 한다. 심지어는 오스트리아의 합스부르크 가문이 신성로마제국의 황제로서 전 유럽을 지배할 때도 이곳만은 마음대로 손을 대지 못할 정도였다. 이곳을 다스리던 대주교는 당시, 군주대주교라고도 불리였을 정도로 종교상의 권위자일뿐만 아니라, 한 지역의 정치상의 군주이기도 했다. 대주교는 문자그대로 이곳의 수장으로서, 교회만 관여한 것이 아니라 이곳의 모든 정치와 경제, 그리고 문화를 다스려왔다. 수도인 비엔나와는 사뭇 다른 분위기가 물씬 풍기는 짤즈부르크. 오죽하면 한 때 오스트리아로부터 분리독립을 하려고 까지 했을까.


짤즈부르크는 직역하면 '소금의 성'이라는 뜻이다. 알프스는 수 천 만년 전 바다 밑바닥이 융기작용에 의해 위로 솟구쳐서 형성된 산악지대. 솟구칠 때 바닷물이 같이 따라 올라와 고인 것이 오랜 세월이 지나 굳어져 암염이 되었다. 짤즈부르크의 북쪽에는 거대한 암염이 존재하고 있었다. 짤즈부르크의 기원은 아이러니 하게도 소금을 채취해서 짤자흐 강을 따라 오는 배들을 해적 질 하던 사람들이 마을을 이룸으로서 형성되었다. 그 후 중세의 봉건시대에 들어 이웃 지방뿐 아니라 다른 나라와의 소금거래가 활발해지면서 상인들이 많이 드나들게 되었고 이곳의 영주이자 대주교는 소금을 채취하여 나가는 상인들에게 염세(鹽稅)를 부과해 많은 부가 축적됨으로서  높은 곳에 요새처럼 성을 만들고는 귀족들과 함께 이곳에 거주하며 이곳을 다스려 도시로 발전시켜 나갔다.
이곳 사람들은 그래서 지금도 바위소금을 먹는다. 맛은 바다 소금과 같지만 성분이 달라 몸에는 그다지 좋지 않다. 그래서 별도로 진짜소금을 따로 섭취한다고 한다. 또한 해발 500미터의 높은 고도에 위치한 도시라서 기압이 낮기 때문에 혈압이 높은 사람이 살기에는 좋다고 한다. 고도로 인해 자주 현기증이 발생하므로 이곳 사람들은 커피를 진하게 마시고 음식을 짜게 먹는다.
이 성은 호엔짤즈부르크라고 부르며 1070년경에 처음 건설되었고 그 후 1500년 초와 1700년대 후반의 두 번으로 나뉘어 개축, 확장되어, 중부 유럽에서는 가장 큰 성으로서 오늘날까지 비교적 잘 보존되어있다. 당시에는 주교보다 높은 곳에 살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이 성내의 옛날 집들에는 아직까지도 오리지널 짤즈부르크인 들이 실제 생활하고 있으며, 중세에 사용되었던 고문실과 고문도구, 그리고 무기들이 전시되어 있기도 하다. 성의 가운데의 조그만 광장에는 커다란 보리수가 두 그루 있고 그 앞에 우물이 하나있는데, 후에 슈베르트는 이곳을 방문한 다음 비엔나로 돌아가 슈베르트의 '보리수'를 작곡했다.
"...성문 앞 우물 곁에 서있는 보리수 나는 그 그늘아래 단꿈을 보았네..."
이 성은 밑에서 보기보다 꽤나 높은 곳에 자리잡고 있어, 위에 올라가면 짤즈부르크의 시내 전경이 한눈에 들어옴은 물론 뒤로는 알프스의 지붕들이 가슴에 몽땅 안길 듯이 다가온다. 짤자흐 강 건너 신시가지의 뒤에는 숲으로 우거진 높은 언덕이 있고 그곳에 조그만 성당과 마을이 눈에 잡힌다. 이곳은 현재 성지로 보존되었는데, 중세 때 화재로 인해 마을의  모든 것이 한줌의 재로 변해버렸으나, 마을 한 쪽에 세웠던 성모 마리아상만은 불에 그을리지도 않은 채 온전하게 남아있었다고 한다. 후에 이곳에 성당을 세우고 성지로 보존하게 되었는데, 이 성당은 모차르트의 대관식 미사곡이 처음으로 연주되었고, 나중에 모차르트가 세례를 받게 된 곳이기도 하다. 현재 짤즈부르크는 유네스코에 의해 유럽의 민속촌으로 지정되어 보호를 받고 있다.


볼프강 아마데우스 모차르트는 바로 대주교의 위세가 등등하던 시기, 1756년 1월 27일 아버지 레오폴트와 어머니 안나 마리아의 사이에서 여섯 번째 중 막내로 태어났다. 원래 '볼프강 아마데 모차르트'라고 자기 스스로 불리길 좋아했던 그의 두 번째 이름을 오늘날 우리는
'아마데우스'라고 부르고 있는데 그것은 그 쪽이 리듬이 좋고 '볼프강'과 잘 어울리기 때문이라고 한다. '아마데우스'라는 말은 '신의 은총을 입어'라는 뜻인데, 과연 신은 그에게 은총과 천직을 내려주셨다. 아버지 레오폴트 역시 어릴 때부터 음악적 자질이 돋보여 수도원의 성가대원이 되었고, 바이올린과 클라비어, 그리고 파이프오르간을 배웠다.  
모차르트의 집은 요즈음 '간판의 거리'라는 별명을 지닌 가장 번화한 거리 '게트라이데' 가 9번지 건물의 4층에 있었다. 이곳은 지금과 마찬가지로 당시에도 사람들의 왕래가 많았던 곳이다. 레오폴트는 이곳에서 날마다 대성당의 소년들에게 바이올린을 교습하였다. 이것 역시 궁정의 악단으로서 하루의 일과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아들과 딸을 열심히 가르쳤다.
아버지는 아들에게 체력의 한계를 생각하지 않고 열심히 가르쳤다. 어릴 때부터 천재적인 자질의 두 아이(아마데우스와 누나인 마리아 안나)를 데리고 나가면 조그만 도시인 이곳에서는 대단한 평판을 받지 않을 수 없었지만 아버지는 이것으로 만족할 수 없었다. 자신의 꿈을 아들을 통해 이루고자 했던 그 마음은 레오폴트에게는 여느 아버지와 마찬가지로 당연한 일이었는지도 모른다. 볼프강은 어릴 때부터 아버지를 따라 독일 프랑스 영국 이탈리아 등 각지로 연주여행을 다녔고 1781년 비엔나에 정착하여 정신적으로 아버지로부터 독립하기까지 19년 가운데 9년이라는 기간을 여행에 소비한다. 그것은 끊임없이 내몰리고, 기대와 환멸을 번갈아 가며 맛보는 고난의 연속이었다. 하지만 그 동안에 넓은 세계의 예술을 익히고 다양한 사람들의 사고와 접하게 되었다. 그 동안 볼프강은 음악에 관계된 일일뿐 아니라 사람과의 만남에 대해서도 아버지의 지시를 받았다. 두 사람의 관계는 아들의 마음속에 우상으로 자리잡았다. 아버지는 하느님다음으로 훌륭한 사람이라는 생각이 아마데우스의 소년시절의 생각이었으며 레오폴트는 아마데우스의 생애를 지배하는 주인공이었다. 그는 여행 안내원, 흥행주 그리고 공연자와 매니저의 역할을 혼자서 담당했다. 항상 가까이 에서 아들의 발전을 지켜보며 오직 하나의 목적과 사명에만 전념했다.

볼프강은  다섯 살 때 짤즈부르크에서 가장 가까운 바이에른의 도시 뮌헨을 필두로 비엔나와 체코의 프라하, 파리와 이탈리아 등지로의 많은 연주여행을 시작한다. 그의 천재성은 영화 아마데우스에 등장하는 궁정악장 '안토니오 살리에리'의 고뇌에서 나타나듯 전무후무한 것이었다. 열 살 때 이미 피아노 작곡을 시작했으며 열 세살 때 첫 오페라를 썼을 정도였다. 그는 당시의 음악장르를 거의 다 섭렵하다시피 했으며 생애의 모든 시기에 걸쳐 오페라와 같은 극음악의 창작에 몰두했다. 나이가 들어갈수록 세련되며 깊은 맛을 내는 그의 오페라는 중량감과 형식적 완성감이 더해져 간다. 그는 쉴 새없이 대본을 쓰고 곡을 붙여갔다. 피가로의 결혼에서는 지금까지 지나치게 형식에만 치우쳐 살았던 인물들에 극적인 독자성을 부여했으며 로렌초 다 폰테가 쓴 대본으로는 '코지 판 투테'와 '돈 지오반니'를 원작의 의도 이상으로 완성시킨다. 원래 '돈 지오반니'의 주제는 모든 한계를 무시하고 신비한 사랑을 파괴하는 방탕아의 잡스런 쾌락으로서, 기존의 '돈 환(돈 지오반니)'이 색마와 범죄자로 그려진 반면 모차르트는 그를 한 남자의 사랑을 구도의 절대성으로까지 상승시킨다. 이 '돈 지오반니'는 프라하에서 초연되어 프라하시민의 열광적인 환호를 받게 된다.
모차르트는 또한 9살 때 이미 교향곡을 작곡하기 시작했다. 생전에 그는 무려 53개의 완전한 교향곡과 11개의 단편을 남겼다. 이외에도 많은 교회음악과 미사곡, 그리고 장송곡을 남겼고, 주옥같은 피아노협주곡, 클라리넷 협주곡은 셀 수 없을 정도였다. 이러한 모차르트에게 시련은 끝없이 찾아왔다. 자신을 아껴주고 음악에 특별히 관심을 가지고 있던 대주교 지기스문트 대주교가 서거한 후 후임으로 짤즈부르크를 다스리게 된 히에로니무스 콜로레도 대주교는 전혀 다른 사람으로서, 인색하고 고집스러우며 형식적인 사람이었다. 후에 결국 모차르트와 대주교는 결별하게 된다. 1782년 모차르트는 아버지의 반대를 무릅쓰고 베버가의 둘째 딸 코스탄체와 결혼한다. 그러나 사실은 모차르트는 콘스탄체의 언니인 알로이지아를 사랑했었고 그녀와 결혼하고 싶어했지만 뜻을 이루지는 못했다.
아버지의 바램이기도 했던, 부자로 한평생 살고 싶어했던 뜻마저 이루지 못한 채 모차르트는 1791년 12월 5일 새벽 비엔나에서 쓸쓸히 숨을 거두고 만다. 향년 35세였다. 임종을 지킨 사람은 아내인 콘스탄체와 친구 3, 4명이 고작이었다. 12월 6일 오후, 그의 주검은 콘스탄체가 참석하지 않은 가운데 발인하여 콘스탄체와 혼례를 거행했던 성 슈테판 대성당에서 최후의 성수를 맞은 뒤 공동묘지로 향했다. 모진 비바람이 부는 가운데 묘지까지 운구마차를 따라간 것은 개 한 마리뿐이었다고 한다. 불운한 천재 모차르트는 결국 천민들이 한꺼번에 묻히는 공동묘지에서 최후의 안식처를 찾았다. 오히려, 남의 나라인 체코의 프라하 시민들이 모차르트의 죽음을 더 슬퍼하여 12월 8일 3천명이나 되는 많은 인파가 프라하 시내의 성 니콜라스 성당에 모여 그의 죽음을 애도하고 장례미사를 거행한 것은 그나마 다행한 일이었다. 어쨌든 콘스탄체는 그로부터 7년 후 동거했던 남자의 도움을 받아 처음으로 망부의 묘에 참배하려고 했지만 묻힌 장소를 찾을 수 없었다. 오늘날에도 그 장소는 확인되지 않고 있다.


게트라이데의 좁은 골목은 저녁때만 되면 사람들로 넘쳐 난다. 골목은 한 개가 아니라 여러 개의 골목이 중첩되어 중간 중간에 성문처럼 통로가 연결되어있다. 복잡하게 얽혀있는 것이 오히려 생동감 넘치고 구 시가의 분위기를 지니고 있다. 게트라이데 거리는 호엔짤즈부르크 성으로 이어지며 성채가 있는 언덕 바로 밑에 카피텔 광장이 있고 한쪽에 대성당이 놓여있다. 광장 주위에는 많은 노천카페와 레스토랑이 있는데, 어떤 카페는 모차르트를 비롯한 음악가들의 음악을 연주하며 분위기를 아련한 추억의 그 날로 되돌린다. 그 옆에는 움직이는 대리석 조각이 하나 서있었다. 이것은 사실은 석상이 움직이는 것이 아니라 머리부터 발끝까지 온 몸에 하얀 분칠을 하고 마치 조각처럼 꿈쩍 않고 서 있다가 앞에 놓은 동전바구니에 동전 몇 닢을 떨어뜨리면 그 답례로 포즈를 다르게 바꾸는 사람이었다. 사람들이 흥미롭게 쳐다보며 즐거워한다. 광장의 가운데는 모차르트의 동상이 다소 우울한 표정으로 서있는데 아마도 건너편의 카페에서 연주하는 자신의 음악이 반음 높은 것이 못마땅해서 그런 것 같았다.

짤즈부르크의 메인 콘서트홀인 '축제극장'에서는 매년 7,8월이 되면 음악제가 열리며 하루도 빠짐없이 크고 작은 음악회와 오페라 등 공연이 펼쳐진다. 그곳에서 슈타츠라는 다리를 건너 신시가지로 들어 서게 되면 미라벨 정원이 나타난다. 영화'사운드 오브 뮤직'의 주 무대이기도 했던 이 정원에는 현재의 주교가 살고 있는 건물과 기하학적으로 가꾸어놓은 아름다운 정원, 그리고 이곳에서 바라보면 호엔짤즈부르크성의 모습이 정원과 잘 조화된다. 오늘 저녁도 카피텔 광장의 카페에서는 어김없이 스트라우스의 '푸른 다뉴브강'과 모차르트의 '아이네 클라이네 나하트 무지크'가 연주될 것이다. 짤즈부르크는 비운의 천재음악가 모차르트의 빛나는 음악으로 인해 다시 태어난, 영원한 음악의 고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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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렌초의시종 2004-06-29 19:4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정말이지 꼭 가고 싶은 곳입니다...... 미라벨 궁, 사운드 오브 뮤직......

꼬마요정 2004-06-29 19:4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렇죠...
가고 싶은 곳이 너무 많아 고민이에요~^^
 

바그너의 오페라가 숨쉬는 아름다운 성-노이슈반타 

 

 


    
주의 고장 뮌헨에서 남쪽으로 자동차로 두 시간 거리. 유럽의 지붕 알프스의 거대한 산맥 북쪽 언저리 퓌센이라는 마을의 나지막한 산 중턱 위에는 세계에서 가장 아름답고 애달픈 사연을 간직한 성이 하나 놓여있는데 이름하여 노이슈반슈타인, 일명 '신(新)백조의 성'이라 불리는 성이다. 오늘도 전 세계로부터 방문객들의 발걸음이 끊임없이 이어지는 아름다운 이 성은 외벽이 흰 색과 베이지 색의 대리석을 사용하여 날씬하며 우아한 자태로 건축된, 중세의 중후한 멋을 풍기면서도 무겁게 가라앉지 않고 밝은 색조를 띄며, 지붕 위에는 비대칭적인 여러 개의 푸른 원추들이 예술성을 더하고 유럽풍의 바탕에다 아랍의 특이한 문양을 가미한 듯한, 그야말로 동화 속에서나 꿈꿀 수 있을 법한 신비한 모습의 성이 멀찌감치 보이기 시작할 때부터 방문객의 마음은 설레기 시작한다.

이 성을 지은 사람은 루드비히 2세. 그는 당시 독일 남부의 바이에른 왕으로서, 1845년 8월 25일에 아버지 막시밀리안 2세와 어머니 마리의 사이에서 장남으로 태어났다. 어릴 때부터 감수성이 유별나게 예민하고 특히 성장하면서부터는 시와 음악, 그리고 미술과 같은 예술분야에 심취하기 일쑤였고 일찍이 건축을 공부하기 시작했는데 이것이 나중에 이 성을 자신이 직접 설계하게 된 계기가 된다.

1861년 2월 2일 그가 16세 되던 해 바그너의 오페라 '로엔그린'을 관람한 뒤부터 바그너의 열성적인 팬이 되기 시작했고 그것이 그의 나머지 인생과 바그너의 인생에 커다란 변화를 가져오게 된다. 1864년 타계한 아버지의 뒤를 이어 약관 18세에 왕위에 오르게 되었으나, 이제는 과거와 같은 절대군주 시대는 막을 내리고 자유화와 자본주의 시대가 왕의 권위에 도전하는 새로운 시대가 도래하기 시작하여 상황이 예전 같지 않게 되었다. 더군다나 체질적으로 워낙에 정치에는 소질이 없었고 음악과 시와 미술과 같은 예술세계속으로 빠져들기 좋아하는 심약하고 감성적인 성격의 소유자였으므로 궁전이 있는 뮌헨을 가급적 피하려 들었고 오히려 궁전을 떠나 남부지방의 알프스 부근의 전원에 있을 때 더욱 행복감을 느끼게 되었다.

1870년 초가 되자 유럽의 정치적인 상황이 현안으로 떠오르면서 러시아와 프랑스간의 긴장이 고조되는 가운데 충돌에 휘말리게 된다. 특히 프로이센과의 전쟁에서 패한 이후로는 더욱 더 성을 짓는 일에 몰두하고 정치에는 흥미와 자신감을 잃게 되었다. 선천적으로 예술가로 태어나 평생 성만 짓다가 죽었다고나 할까. 루드비히 2세는 41세의 젊은 나이에 의문의 죽음을 당하고 만다. 침실에서 자던 어느 날 새벽 왕은 정적에게 납치 당하여 슈탄베르크 호수의 요양소에 강제로 연금을 당하게 된다. 왕은 요양소에 갇힌지 사흘만에 자신의 주치의인 구텐박사와 함께 물에 빠진 채 변사체로 발견되었다. 1886년 6월 13일의 일이다. 이 죽음은 아직까지도 미스테리로 남아있는데, 그 이유는 우선 루드비히 2세는 1미터 90정도의 큰 키의 소유자인데다 어릴 때부터 선수에 버금 가는 수영실력을 지니고 있었기 때문이다. 왕의 죽음은 두 가지로 추정되고 있는데 첫째는 왕의 무능을 보다 못한 정적에 의해 살해되었을 가능성과 두 번째로는 강제 연금된 자신을 비관해 자살을 시도하였는데, 이때 그를 말리던 구텐박사는 실수 또는 고의로 물에 빠졌을 것이라고 추측하는 것이 바로 그것이다.


살아 생전 성을 세 곳에 지었지만 그나마 완성된 곳은 신 백조의 성 하나뿐. 그러나 이 성 역시 1869년부터 짓기 시작하여 17년 동안 지었음에도 3분의 2밖에는 완성하지 못했다. 그 이유는 루드비히가 왕의 신분임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개인 재산을 모두 털어 지었으며 때로는 은행으로부터 융자를 받거나, 조금씩 돈이 생길 때마다 지었기 때문이었다. 루드비히가 죽을 무렵에는 축성에 따른 빛이 눈덩이처럼 불어나 무려 1천4백만 마르크에 이르게 되었다. 그렇게 정성을 다했음에도 불구하고 정작 루드비히 2세가 이 성에 살았던 것은 겨우 6개월 정도밖에 안되었다는 것 또한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왕은 매우 성격이 여성스러우며 동물들, 특히 오페라 '로엔그린'에 등장하는 백조를 너무나도 좋아하여 성 안의 문고리는 모두가 백조의 모양을 하고 있고 벽화와 커튼의 장식에도 역시 많은 백조가 그려져 있다. 이토록 왕이 백조를 좋아하자 사촌누이이자 오스트리아의 공주인 소피 샤를로트는 루드비히 2세에게 백조모양의 커다란 화병을 선물했다. 흰색의 백조모양을 한 이 화병은 백조의 발을 잡아당기면 밑으로 물이 빠짐으로서 물을 갈아주는데 편리하도록 설계된, 왕을 위해 특별히 주문한 것이었다. 소피는 나중에 이 왕과 약혼을 하기에 이르지만 결혼식 직전에 파혼하게 된다.


이 성은 산 중턱의 명당자리에 자리잡고 있다. 예로부터 규모가 큰 건축물은 예로부터 호숫가나 강가에 짓는 것을 당연시했는데, 마치 사람처럼 그 모습을 물에 비쳐본다는 그러한 의미이다. 이곳이 명당이라고 하는 이유는 노이슈반슈타인 성의 3면이 각각 '반발트씨에' '알펜지' 그리고 '호프남제' 등 세 개의 호수를 가까이에 두고 있어 성의 모습을 세 곳에서 비쳐볼 수가 있기 때문이라고 한다.
이런 대 규모의 성의 설계는 건축가가 하는 것이 보통이었지만 놀랍게도 이 성은 루드비히 2세와 뮌헨의 국립극장의 무대작가가 설계하였다. 그러나 그렇기 때문에 당시까지 널리 사용되었던 보편적인 건축양식을 떠나 전혀 새로운 양식으로 아름답게 디자인될 수 있었는지 모른다. 성 내부의 모든 그림은 뮌헨 미술대의 교수와 학생들에 의해 그려졌다. 성의 건너편 계곡 너머에는 아버지 막시밀리안 2세가 생전에 지은 노란 색의 구 백조의 성이 저만치 발 아래에 자리잡고 있다.
루드비히 2세는 평생을 독신으로 살다가 죽었다. 그가 결혼을 하지 않았던 이유도 분분한데, 첫째는 그가 바그너와 동성연애를 한다는 소문이 그것이다. 하지만 바그너는 당시 유명한 음악가이자 시인이었던 리스트의 딸과 결혼하기 전이나 그 후에도 여러 여자를 섭렵하는, 여자를 너무 밝히는 사람이었으므로 동성연애자라는 것은 당치않다고 주장하는 사람도 만만치 않다.
그러나 동성연애자도 두 종류가 있다고 하는데 한가지는 남자만 좋아하는 동성연애자가 있는 반면, 남자도 좋아하고 여자도 좋아하는 동성연애자도 있다고 함으로서 왕이 총각으로 살다가 죽은 이유는 그가 죽음을 당한 이유만큼이나 베일에 쌓여있다.
성 내부에는 그가 죽기 전 까지 지냈던 여러 공간들이 아름답게 장식되어 있는, 오리지날한 형태의 모든 방과 집기들을 볼 수가 있다. 접견실에 옥좌가 없는 것으로 보아 옥좌를 놓을 접견실이 완성되기 전에 왕이 사망했다는 것을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사실 왕이 죽은 후 성 안의 미완성된 부분은 더 이상 공사를 진행하지 않았다. 죽은 다음에 완성시키는 것이 의미가 없기 때문이었다.


키가 1미터 90센티였을 정도로 큰 왕이었으므로 침대의 길이는 2미터 10센티가 되었고, 문마다 손잡이는 보통 사람의 가슴에 닿을 정도로 높이 달려있다. 콘서트 홀, 또는 가수의 방이라는 커다란 방에는 바그너의 오페라 가운데 '영웅전'의 배경 그림으로 장식하였으며 1909년 처음으로 이곳에서 연주회를 가지게 된다. 이 성에는 왕의 초상이 어디에도 없는데, 이유는 왕이 자신의 초상이 남는 것을 매우 싫어했다고 한다. 이 콘서트 홀에만 그나마 초상대신 왕가의 문장만 남아있을 정도이다. 이곳에는 또한 성모마리아의 그림과 조각이 있는 아름다운 예배당이 있어, 그가 생전에 독실한 카톨릭 신자였음을 보여준다. 생전에 바그너의 오페라를 너무나도 사랑한 나머지 성안의 거의 모든 벽화는 바그너의 오페라의 등장인물과 배경으로 장식되었다. 마치 바그너를 위한, 아니, 바그너만을 위하여 지어진 성이라는 느낌이 오히려 강하게 들 정도이다. 거실에는 오페라 '파르치팔'과 '로엔그린'의 배경과 등장인물들이 아름다운 회화로 그려져 둘러싸여 있고 창 쪽의 코너에는 사촌누이로부터 선물 받은 백조 모양의 화병이 놓여 있다. 거실에서 외부로 이어지는 통로는 오페라 '탄호이저'에 나오는 동굴을 인공으로 만들어 놓았을 정도이며, 나머지 방들에도 '트리스탄과 이졸데' '니벨룽겐의 반지'를 비롯한 바그너의 주요 오페라의 회화들로 가득 차있다. 아이러니하게도, 생전에 바그너는 이 노이슈반슈타인 성에는 단 한 차례도 와보지 않았다. 루드비히를 만났던 곳은 이 성 건너편의 호숫가에 있는
호엔슈방가우 성으로서, 루드비히의 아버지 막시말리안 2세에 의해 세워진 노란색의 여름 별궁이다. 이 호수에는 많은 백조가 있어서 루드비히가 백조를 특히 좋아하게 되었다는 이야기도 전해진다.

루드비히 2세가 이토록 바그너를 열광적으로 사랑했던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바그너(빌헬름 리하르트 바그너)는 1813년 5월 22일 라이프치히에서 태어났다. 경찰서의 서기이며 아마추어 배우이기도 한 아버지와 빵집의 딸이었던 어머니 사이에서 일곱 번째로 태어나게 된다. 당시는 프랑스의 나폴레옹과의 전쟁이 한창이었으며 아버지는 그 와중에 병으로 사망했다. 어머니는 가이어라는 유태계 남자와 재혼하였는데 그는 배우이자 극작가였으며 화가이자 가수이기도 한 예능분야에 다재 다능한 인물로서 어린 바그너에게 지대한 영향을 미치게 된다.
바그너는 극도의 예민한 감수성과 상상력을 타고났으며 이러한 요소들이 본능적으로 계부의 예술적 성향으로 인해 영향을 받게 되었다. 모차르트와 같이 아버지로부터 집중적인 훈련을 받지는 못했지만 어서 출세를 해야만 한다는 야심을 가지고 있었고, 베토벤, 베버 등 당시의 기라성 같은 음악가와 그들의 오페라에 심취하였고 급기야는 자신이 직접 오페라의 극본을 쓰기 시작했다. 21세 때 유랑극단의 악단장이 되었던 바그너는 먹고 살기 위해 이곳 저곳을 떠돌아다니며 연주활동과 소규모의 오페라를 공연하였지만 벌이는 그다지 신통치 못하여, 끊임없이 친구와 친척들에게 비굴할 정도로 구걸하다시피 돈을 빌려쓰게 되고 그 빚은 나날이 늘어만 가게 되었다. 1832년 첫 오페라 '결혼'을 필두로 1842년 10월 드레스덴에서 공연한 '리엔치, 최후의 호민관'이 성공을 거두면서 바그너는 마침내 무대의 전면에 등장하게 되었고, 당대 가장 유명한 음악가들과 교제하게 되었지만 형편은 썩 좋아지지 않았다.  끊임없는 노력과 시도에도 불구하고 당시의 정치적인 상황과 음악적 이해에 대한 편견으로 자꾸만 궁지로 몰리게 된 바그너는 그가 가장 사랑했던 대표작 '탄호이저'가 흥행에 실패하면서 많은 부채에 시달리게 된다.
그는 많은 부채와 약속어음을 어긴 것 때문에 여기저기 끊임없이 도망 다니며 살게 되었다. 그러던 어느 날 1864년 5월 3일 슈투트가르트에서 바이에른 국왕의 명을 받은 왕실 자문관이 찾아온 뒤 그 해 3월 10일 18세의 나이로 왕위에 오른 바이에른의 국왕 루드비히 2세를 만나게 됨으로서 바그너의 인생은 이제와는 전혀 다른 길을 걷게 되었다.
국왕은 그야말로 기적처럼 나타난 구세주였으며, 바그너에 대한 열정에 가득 찬 군주로서 문자그대로 천사와도 같이 바그너의 앞에 바람처럼 나타났다. 자신의 재산으로 바그너의 부채를 모두 탕감 해주었는데, 이것은 바그너로 하여금 더 이상 도망 다니지 않고 자신이 꿈꾸던 음악활동에 몰두하여 작품들을 완성할 수 있는 계기가 되었다. 왕이 열렬한 지지자이자 팬인 것처럼 바그너도 그에 대한 감사를 잊지 않았다. 그가 루드비히 2세에게 1864년 5월 3일자 편지를 보면,
'오, 은혜로 충만하신 왕이시여! 천상의 감동에서 솟아난 눈물을 당신께 바침으로써, 그리도 비천하고 애정에 굶주려왔던 제 가련한 인생이 품고 있던 시적 경이감이 드디어 지고한 현실이 되었음을 당신께 알려드리고자 합니다. 이제 이 인생의 마지막 한 단어까지. 마지막 한 음계까지. 저의 인생은 당신께 속해있습니다.'라고 쓰여있다.
왕의 바그너에 대한 열정은 시간이 갈수록 더해져 성의 대부분 벽화를 바그너의 작품들로 장식하게 된다. 바그너는 이후에 왕과 더욱 친해져 왕의 친구가 되었으며,  때로는 왕의 신임을 남용한다는 비난을 받게 된다. 시인음악가에 대한 젊은 왕의 심취에는 처음부터 어린아이다운 면이 있었다. 그는 바그너를 조언자이자 친구로 대우했으며 이에 대해 바그너는 마치 부성에 넘치는 애정을 베풀었다. 그러나 바그너가 왕에게 미치는 영향이 점점 커지면서 마침내 루트비히 2세와 함께 공동으로 왕국을 다스리는 왕처럼 되어버렸다. 바그너는 특유의 격렬한 어조와 강렬한 시로 젊은 루드비히 2세를 매료했다.

루드비히 2세는 음악가가 아니었다.
그를 매혹시킨 것은 시인 바그너였다. 바그너는 격정적인 언어로 수많은 전설을 뒤섞어 놓았고 루드비히 2세는 이 전설들을 항상 믿을 준비가 되어있을 정도로 그에게 매료되었다. 그들이 주고받은 서신들 역시 언제나 바그너의 시와 음악처럼 격렬한 언어로 쓰여있었다. 바그너를 첫 대면한 직후 루트비히 2세는 자신의 사촌누이이자 오스트리아 여제(女帝)의 동생인 약혼녀 소피 샤를로트에게 '나와 바그너가 때때로 입장과 역할이 서로 바뀌어 버린 듯 한 인상을 받는다'고 털어놓았다. 아마도 그가 지닌 극도의 여성스러움이 격정적이고 호탕한 성격의 바그너에게 깊이 빠지게 되는 원인이 된 것이 아니었을까. 원래 결혼날짜는 1867년 10월 12일로 정해놓고 황금마차와 기념주화까지 준비를 해놓았지만 결혼식을 이틀 앞둔 10월 10일 갑자기 파혼이 선언되게 되었는데, 그 이유는 확인되지 않았으나 바그너와의 너무나도 밀접한 관계가 이 결혼에 영향을 미쳤을 것이라고 추측하는 사람도 있다.


바그너는 오늘날 가장 주목해야 할 음악 중의 한 사람으로 기억되고 있으며, 그가 생전에 만들었던 주옥같은 오페라들은 끊임없이 전세계의 크고 작은 무대 위에 올려지고 있다. 하지만 그를 열렬하게 후원하고 사랑했던 루드비히 2세가 존재하지 않았었다면 아마도 바그너라는 이름은 한낮 가난하고 불쌍한 무명의 음악가로서 기억의 저편으로 오래 전에 사라졌을지도 모르는 일이다. 루드비히 2세는 비록 비운의 왕이었지만 자신의 예술에 대한 헌신과 열정으로 후세에 기억될 아름다운 건축물과 이야깃거리를 남겼다. 오늘도 이 성을 보기 위해, 그리고 루드비히 2세와 바그너의 열정과 그들의 숨결을 만져보기 위해 전 세계의 많은 사람들이, 많은 음악과와 예술가들이 경건하고 호기심 어린 발길을 재촉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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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로틱한 불가사의, 카주라호의 사원들


  
주라호의 새벽은 구름 한점없는 하늘 저편을 뜨겁게 달구며 떠오르는 붉은 태양과 함께 열리고 있었다. 멀지 않은 숲으로부터 스며 나오는 원숭이의 기지개 소리와 이따금 씩 들리는 새소리를 제외하면 너무나도 조용한 시골 마을의 아침 풍경을 연상시킨다. 거의 말라 버린 호숫가에는 인근 마을에서 걸어 온 일단의 식구들이 선잠을 깨고는 촛불을 켜고 신에게 경건히 기도를 드리고 있었고, 도로 변의 약간 후미진 곳에서는 웅크리고 앉아 새로운 아침을 맞이하는 신성한 배설의식(?)을 거행하는 이곳 사람들의 의심 어린 시선이 여행자의 호기심을 자극한다.

붉은 빛을 머금은 아침 햇살이 비칠 때가 사원의 조각들을 관찰하기에 가장 좋은 시간이라 아침식사도 거른 채 서쪽 사원군(群)으로 발걸음을 재촉했다. 서쪽은 12개의 사원이 밀집되어있는데, 그중 한 곳은 현지인들이 실제로 사용하는 사원이고 나머지는 박물관처럼 보존되어 관람객만을 유료로 입장시키고 있었다.

이곳의 사원들은 대부분 황갈색이나 분홍빛을 띤 사암으로 지어져 있다. 사암은 카주라호에서 20여 km 떨어진 켄강 부근에서 캐 온 것이라고 한다. 찬델라 왕조의 전성기에는 80여개의 사원들이 있었지만, 후에 무굴 제국의 아우랑제브에 의해 대부분 파괴되고 현재는 동서남군을 통틀어 20여개만이 남아있을 뿐이다. 카주라호 사원은 1986년 유네스코에 의해 세계 문화유산으로 지정되어 있다.
사암은 대리석처럼 정교한 조각이 가능하므로 원하는 형태의 모습으로 사원을 짓는데 용이했을 것이다. 사원들은 하나같이 시바나 비슈누 등 힌두신들을 숭배하기 위해 지어졌으며, 당시 이곳의 장인들 조각솜씨를 모두 동원하여 지어진 듯 거대하면서도 섬세하고 장중하면서도 여성스러운 멋이 곳곳에 깃들어져 있었다. 사원의 외벽은 하나같이 시바와 비슈누신, 요정들과 아름다운 여인들 그리고 동물들의 모습이 섬세하게 조각되어있어 사원이라기 보다 하나의 거대한 조각작품을 연상시켰다.
12개의 사원 중 특히 시선을 끄는 곳은 락슈마나 사원과 칸다리야 마야데브 사원으로서, 이 건축물들의 외벽에는 900여개가 넘는 조각이 있다고 하는데 그중 압권은 미투나상으로서, 여인들의 풍만한 곡선미는 물론 남녀의 곡예사와 같은 성행위 모습이 너무나도 자세하고 적나라하게 그리고 정교하게 조각되어있어 처음 보는 사람들로 하여금 충격을 금치 못하게 하고 있다.
풍만하고 둥근 가슴은 마치 살짝 건드리기만 해도 터질 것만 같은 토마토를 연상케 한다. 입술만 갖다 대도 발 등까지 그냥 흘러내릴 것만 같은 어깨와 허리, 그리고 다리의 유연하면서도 매끈한 곡선미, 그리고 용수철처럼 탄력감이 넘치는 엉덩이부분은 농염하다 못해 도발적이기까지 하다. 마치 르네상스 시대 이태리의 조각가 도나텔로의 조각을 연상케 한다. 얇은 옷을 막 벗을 자세로 서있는 요정의 시선은 망설임과 흥분으로 가늘게 떨고 있고, 줄무늬가 있는 속옷을 걸친 육감적인 여인의 조각은 수줍은 듯 요염하게 돌아서 있다. 곡예사와 같은 성행위의 자세들 또한 너무나도 사실적이고 강렬하게 묘사되어 있어, 보면 볼수록 호기심이 점점 증폭될 뿐이었다.

재미있는 것은 이 두 사원에 있는 조각들의 차이점이다. 락슈마나 사원은 925년에서 950년 사이에 건축되었고 칸다리야 마하데브 사원은 이보다 100년 쯤 뒤에 지어진 것인데, 두 사원의 조각에서 뚜렷한 세대차이를 느낄 수 있다는 점이다.
락슈마나 사원의 에로틱한 조각들 중 여인들의 모습은 매우 과장되고 풍만하게 조각되어 있는데 반해 마하데브 사원의 조각들은 매우 날씬하고 보다 세련된 모습과 자세를 묘사하고 있었다. 카주라호의 사원에는 모두 80여가지의 남녀교합상이 조각되어 있다고 하는데, 이것은 4세기 경 밧샤야에 의해 쓰여진 인도의 성교지침서인 카마수트라에 묘사된 성행위의 자세를 조각한 것이라고 주장하는 이도 있으나, 실은 보다 심오한 힌두이즘의 종교적 철학에 기인한다는 점과, 당시 북인도에서 강하게 영향력을 지니고 있던 불교에 대항하여 힌두교도들을 사원으로 불러들이기 위해 사원에 감각적인 조각들을 해 놓았다는 나이든 이곳 주민들이 이야기가 오히려 설득력을 지니고 있다.

사암의 또다른 특징은 물기를 쉽게 흡수한다는 점인데, 다시말하면 비가 억수처럼 내려도 부딪히는 대신 물기를 흡수함으로서 마찰을 피하게 되는 것이다. 천년이라는 장구한 세월을 비바람에 시달려 왔는데도 원래의 모습이 비교적 원형대로 유지될 수 있었다는 점은 사암의 커다란 장점이었다.
아무튼 천년 전에 이 신성한 사원에 이토록 에로틱하고 관능적인 조각들이 무슨 이유로 조각되었던 것일까. 당시의 사회적 분위기와 종교적 분위기는 어떠하였을까. 이토록 파격적인 발상은 누구로부터 나온 것이며, 하필이면 이곳에 사원들을 조성한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그리고 그토록 정교한 조각기술을 지닌 장인들은 어디서 나타나게 되었을까. 꼬리에 꼬리를 무는 질문들이 한꺼번에 뇌리를 스쳐 지나간다.


카주라호의 사원과 조각은 인도 예술만의 독창성과 신성을 지니고 있다. 유연하고 풍만한 젊은 육체를 매끈하고 부드러운 사암과 대리석에 정확히 재현해놓은 것은 전형적인 인도의 조형예술이 지니고 있는 가장 중요한 장점이기도 하다. 동적이면서 영감이 넘치는 인도의 조형예술에는 또한 아름다운 육체의 재현이라는 힌두교 신앙이 반영되어 있다. 성행위의 묘사는 '둘이 곧 하나'인 감각적인 행복과 함께 정신적인 행복의 최고형태를 상징하고 있다. 진정한 힌두교도 들에게 있어 세속(世俗)은 신성한 것이며, 소멸(消滅)역시 불멸의 구원에 이르는 열쇠가 된다. 요컨대 '사랑이 곧 신'이다. 그리고 항상 추구하기는 하지만, 상상이 불가능한 신과 인간의 결합이라는 추상적인 개념은 오직 '꿈도 꾸지 않는 깊은 수면'이나, 성교를 나누며 서로 절
정에 도달했을 때의 모든 '소멸'의 순간에서만 경험할 수 있다. 그것은 가장 아름답고, 가장 만족스러우며, 가장 완벽하고, 가장 해탈에 가까운 것이다. 이와같이 힌두교에서 세속적인 인간의 쾌락을 묘사한 예술은 힌두교 사원의 정신성을 능가한다.

브라만 들에게는 카주라호가 하나의 정신적 시험무대로서의 역할을 한다고 주장한다. 이러한 조각상을 보고 흥분하거나 주의가 산만해지지 않는 사람이라면, 그는 진실로 헌신적인 힌두 교도라고 할 수 있다는 것이다. 카르마 요가란 이러한 자극적인 장면 앞에서 침착을 유지하는 방법을 수행자들에게 가르쳐주는 요가이다. 마하트마 간디도 만년의 나이에 카르마 요가를 행한 적이 있다. 이처럼 힌두교는 모든 극단을 포용하고 있다. 카주라호 사원의 에로틱하고 관능적이며, 성적인 호소력이 짙게 배인 젊은 남녀들이 현실감 넘치게 묘사되어있는 조각들이 유치한 포르노그라피가 아닌 순수예술로 느껴지는 것은 인도 예술만이 가지고 있는 특유의 신성함에 있는 것이 아닐까.

카주라호의 사원들은 인도의 중세기인 950년부터 1050년 사이에 달의 신 찬드라의 자손이 세웠다는 찬델라 왕조의 초기 수도로 정착되면서 집중적으로 건축되었다. 대부분이 힌두 사원인데 반해 동쪽에 자이나 사원을 건립한 이유는 당시의 재무 장관 격을 맡았던 사람이 권력을 가진 자이나 교도였을 가능성이 크다고 해석하는 주장이 많다. 그때나 지금이나 무소유와 아힘사를 궁극적인 목표로 살아가는 자이나 교도들이 금전과 재물 관리에 능했던가 보다. 이곳에는 파르스바나트, 산티나트, 아디나트 등 3개의 자이나교 사원이 있는데, 그 중 가장 볼 만한 곳은 파르스바나트 사원이다. 외관상으로는 서군의 힌두 사원들과 크게 다를 바가 없으나 조각의 많은 부분에서 차이점을 볼 수 있다. 특히 이곳의 몽골리안 얼굴의 여인상은 묘한 느낌을 갖게 한다. 사원의 전경을 촬영하기 위해 단 위로 올라서자 비쩍 마
른 개 두 마리가 자기네 보금자리를 빼앗기는 줄 알고 화를 낸다. 이곳에서 다시 남쪽으로 1 km 정도를 내려가면 마지막으로 조성된 두라데오 사원이 모습을 드러낸다. 이 사원은 동 틀 무렵 특히 신비스럽게 보인다고 한다.

아무튼, 많은 사람들이 카주라호의 에로틱한 조각들이 집중적으로 조성된 시기를 미적 타락과 감각에 호소하는 매춘적 요소를 도덕적 타락으로 물들게 했던 시기라고 하지만 이곳의 조각들은 바로 그 에로틱한 주제를 예술로 승화시킨 뛰어난 작품임에는 틀림없다.

어느덧 해는 기울고 사원들의 어깨가 노을에 물들어가기 시작했다. 카주라호 사원의 조각상들을 모두 감상하기엔 하루 해로는 너무 부족했다. 카주라호의 어둠은 절정의 환희 후에 다가오는 소멸감과 고요함처럼 긴 한숨을 내쉬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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