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캉 하룻밤의 지식여행 15
다리안 리더 외 지음, 이수명 옮김 / 김영사 / 2002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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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라캉이 귀환하고 있다(그가 언제 억압되었던가?). 한때 근거없는(텍스트 없는!) 라캉 유행을 경계하면서 그의 대책없는 난해성과 현학에 대한 비판이 떠돌기도 했지만, 라캉의 한국 상륙, 혹은 라캉의 한국화는 더이상 저지할 수 없는 대세인 듯하다. 이미 그는 두툼한 책으로 <재탄생>되었고, 사위이자 유산 상속자인 알랭 밀레르 계열(지젝과 핑크 등)의 저작들도 연이어 번역되고 있다.(밀레르의 가장 큰 기여는 라캉 이론의 발전과정을 '역사적'으로 이해해야 한다고 강조한 점에 있다.) 그의 주저인 <에크리>와 세미나들도 곧 한국어본을 얻을 예정이라고 하니 아마도 푸코와 들뢰즈를 잇는 새로운 열풍이 불어닥칠지도 모르겠다(믿기지 않는 얘기지만).

다리안 리더의 <라캉>은 그런 열풍을 슬쩍 예감하게 하는 미풍처럼 다가온다. 그 바람은 가볍고 경쾌하지만, 라캉의 매력과 라캉 읽기의 곤경 또한 집약적으로 전해준다. 라캉 자신이 '프로이트로의 귀환'을 이야기하고, 혹자는 프로이트를 읽지 않고 라캉을 읽는 일의 어리석음을 이야기하지만, 아무래도 그 읽기의 순서는 라캉부터이어야 할 듯싶다. 우리가 아무리 프로이트를 읽어도 거기서 라캉이 도출되는 건 아니기 때문이다. 프로이트는 이미 '라캉 이후의 프로이트'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정작 더 중요한 문제는 따로 있다. 프로이트의 무의식 이후에 사람들이 나라는 의식 너머에 있는 (나 자신이면서 동시에) 타자인 무의식에 대해 근심했다면, 라캉 이후의 '나'의 경우도 사정은 마찬가지이지 않을까? 정신분석학은 여느 책처럼 읽어'치울 수 있는 것'이 아니니까. 우리의 망각과 억압 속에서도 그것은 귀환한다! 라캉에 대한 거부와 몰이해에도 불구하고, 그는 이미 우리의 (무)의식 속에서 작동한다. 우리의 모든 신경증과 편집증과 분열증이 그의 수수께기 같은 언어들과 도식 속에서 되살아난다. '나'는 거기에 있었던 것이다!

어디에선가 라캉은 모든 정신분석(학)은 저항을 동반한다고 했다. 그것은 라캉을 읽는 일에도 똑같이 적용된다. 하지만, 그 '저항'이 바로 그에 대한 우리의 이해의 형식이다. 우리의 앎은 모든 것을 알 수는 없는 방식으로(not-all) 이루어지니까. 거기엔 항상 어떤 잔여가 남는다. 어떤 불충분성이 항상 떠도는 것이다. 다리어 리더의 '만화'도 마찬가지이다. 저자는 라캉의 모든 것을 요약해서 전해주지만, 우리는 아무것도 읽지 않았다는 느낌을 받는다. 우리는 이해의 막다른 길(impasse)에서 그대로 통과(pass)된다. 사실 그것이 이 책의 의의이기도 하다. 그것은 단지 징후이고 예감이며 미풍일 따름. 아직은 전부가 아닌(not-all) 것이다. 그러니 아직은 라캉을 두려워하기에 너무 이른 계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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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라마의 해부학
마아틴 에슬린 / 한양대학교출판부 / 1992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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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저자 마틴 에슬린은 저명한 연극학자이자 오랜동안 BBC의 드라마제작 책임자로서 활동한 분이다(한국에도 다녀갔다). 그런 경력에 걸맞게 그는 '드라마'의 영역을 소위 '연극'에만 국한하지 않고 상당히 폭넓게 잡는다. 그것은 '드라마'에 대한 기존의 정의를 비평하고 있는 1장에서부터 잘 드러난다.(이러한 점은 그의 다른 저작 <극마당>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그가 보기에 무대 드라마로서의 연극은 '20세기 후반기의 오늘날에는, 드라마적 표현양식들 가운데의 단 한 가지 그것도 매우 작은 한 가지이며, 영화, 텔레비젼, 라디오 등 대중매체에 의하여 기계적으로 재생된 드라마도... 본질적으로는 드라마'(15쪽)이다. 이 드라마의 성격은 그것이 인간 행위(action)의 의태적 모방이라는 데 있으며, 그런 점에서 드라마는 제의적 전통을 잇는 놀이이며 인간의 기본적인 기질(make-up)이다. 또한 드라마는 한 사회가 그 구성원들에게 행동규범을 전달하는 가장 주요한 도구의 하나이다. 따라서 모든 드라마는 하나의 정치적 사건이기도 하다(37쪽).

저자는 이러한 기본적인 전제 하에서 드라마의 요소들을 해부한다. 그 요소에 해당하는 것들은 문체와 인물, 구조, 비평용어, 장르(비극, 희극, 희비극), 그리고 무대와 미디어 등이다. 그런 해부 이후에 그가 결론에서 얘기하고 있는 것은 '드라마의 진실'인데, 특별히 강조하는 것은 드라마가 가진 열린 해석의 가능성과 다가성이다.

'드라마는 그것이 반영하는 실세계만큼이나 그 이미지가 다면적이며 그 의미가 다가적이다. 그것이 바로 드라마의 중요한 강점이며 표현양식으로서의 특징이며 그리고 그 위대성이다.'(156쪽)

책은 일급 연극학자의 드라마 입문서로서 일독할 만한 가치가 있다. 하지만, 얇은 분량 때문에, 아무래도 그의 대표적인 저서인 <부조리극>(왜 아직 번역되지 않는지 궁금하다) 만큼의 부피감을 맛보기는 힘들다. 말 그대로 입문서일 따름이다. 사실 드라마를 해부한다고 해서 살아있는 연극을 경험할 수 있는 건 아니지 않는가!

우리말 번역은 몇 가지 아쉬움을 남긴다. 고유명사의 표기가 부정확하고, 작품명에 아무런 표시가 돼 있지 않으며, 오타도 너무 많다. 프랑스의 마임 예술가인 '마르셀 마르소'가 '마르셀 프루스트'로 엉뚱하게 옮겨져 있기도 하다(11쪽). 개정판이 나오길 기대한다. 더 바람직한 건, 우리 드라마를 인용한 드라마 입문서가 나오는 것이겠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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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것은 미술이 아니다 - 미술에 대한 오래된 편견과 신화 뒤집기 Beliving is seeing
메리 앤 스타니스제프스키 지음, 박이소 옮김 / 현실문화 / 2006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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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래전에 사둔 책을 불쑥 끄집어 내어 뒤적거린다, <이것은 미술이 아니다>. 원제는 <믿는 것이 보는 것이다>인데, 이것은 아사 버거의 <보는 것이 믿는 것이다>를 뒤집은 것이다. 믿는 것(believing)이란 우리가 가진 고정관념과 선입견이고, 그걸 가능하게 하는 인식틀이자 제도이며, 이데올로기이다. 저자 스타니젭스키는 우리가 보기(seeing) 전에 이미 작용하고 있는 믿음(beleing)들에 대해서 폭로하고자 한다.

사실 번역서의 제목인 <이것은 미술이 아니다> 또한 이런 문제의식을 담고 있다. 르네 마그리트의 <이것은 파이프가 아니다>와 같은 제목의 푸코의 마그리트론을 패러디한 것인데, 마그리트/푸코가 문제삼은 것 또한 이미지와 재현 사이의 불일치이기 때문이다. 그것들 사이의 자연스러운 일치를 가정하는 것이 바로 우리의 선입견이자 이데올로기가 아닌가!

지면의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는 상당수의 도판을 통해서(도판이 흑백이란 것이 좀 아쉽다) 저자가 입증하고자 하는 것은 비교적 간명하다: '우리가 아는 미술은 상대저으로 최근에 나타난 현상으로, 미술관에 전시되고, 박물관에 보존되며, 수집가들이 구매하고, 대중매체 내에서 복제되는 그 무엇이다. 미술가가 미술작품을 창조한다 하더라도 그 자체로서는 아무런 소용이나 가치가 없다. 그러나 이 미술작품들은 미술의 여러 제도들 내로 순환하면서 비로소... 깊은 의미와 중요성을 획득하고 그 가치가 증폭된다.'(38쪽)

이러한 주장을 저자는 논증한다기보다는 많은 사례들을 동원해 암시하고 있는데, 가령 마르셀 뒤샹이 화장실 변기를 미술 전시회의 좌대 위에 올려놓고 <샘>이라고 명명함으로써 변기를 미술로 바꾼 것은 미술사가들이 25,000년 전의 인물상을 박물관에 전시하여 <비너스>라 명명한 것(빌렌도르프의 비너스)과 마찬가지라고 지적하는 대목들이 그렇다(41쪽). 그런 점에서 이 책은 보다 본격적인 본론을 아직 남겨놓고 있다. 좀더 빽빽하고 무게 있는 책이 기다려진다.

존 버거의 <이미지>(원제는 <보는 방법>)과 함께(버거의 책도 아쉽지만 흑백 도판이다) 미술에 대한 유용한 입문서인 이 책에서 저자가 도달하는 결론. '미술은 근대-지난 200년간-의 발명품이다'(38쪽) 여기서 미술을 '인간'으로 바꾸면, <말과 사물>에서 푸코가 도달하고 있는 결론과 동일하다. 즉, 거꾸로 말하면 이 책은 일종의 미술(개념)의 고고학인 것이다. 하여간에 그런 저자의 도발적인 문구, 혹은 곰브리치의 '미술이란 존재하지 않고, 다만 미술가만이 있을 뿐이다.'란 문구로 우리의 미술 교과서가 시작된다면 얼마나 멋질 것인가! 존재하지 않는 미술을 배우며, 또 미술의 얼굴이 바닷물에 씻겨져 가는 걸 보며 싱긋이 미소지을 수 있을 텐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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테렌티우스 2006-12-10 12:5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 '미술 개념의 고고학'을 다룬 간결한 책은 그야말로 푸코 에피스테메 이론의 미술 개념에 대한 적용이더군요. 저도 흥미롭게 읽었습니다.

저자의 핵심적 주장은 결국 '근대미술'이란 '미술'이라는 개념이 근대적 에피스테메 안에서 탄생하고 또 기능하는 '근대적' 개념, 발명품이니만치 '동어반복'에 불과하다는 주장이었습니다.

이는 '이른바 모든 보편명사는 사실상 고유명사에 불과하다'는 푸코나 여타 인근 사상가들의 주장을 미술이라는 개념에 충실히 적용한 것으로 간결하지만 흥미로운 적용/분석이었습니다.

여기에 우리에게는 '미술(美術)'이라는 이 19세기에 일본의 지식인들에 의해 조합된, 혹은 보다 정확히는 발명된, 일본말이 자신만의 개념적 지형과 정치학을 갖는 역시 또 하나의 '고유명사'라는 점이 추가되어야 할 듯 싶습니다...

다만 책 자체에 대해서 말해보자면, 원서는 어떤지 알 수 없지만, 이 우리말본은 책의 내용에 비해 장정이나 디자인이 좀 허술하고, 그리 미학적이지 못한 공백이 많은데다, 그에 따라 책값이 부피나 분량에 비해 좀 '쎄진' 것이 좀 아쉬웠습니다...
 
기호학 하룻밤의 지식여행 13
폴 코블리 지음, 조성택 외 옮김 / 김영사 / 2002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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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은 기호학 입문서가 아니라 기호학사 입문서이다. 즉 기호학의 ABC가 아닌 기호학사의 ABC가 주로 다루어지는 내용이다(그런데, 움베르토 에코에 의하면, '기호학은 곧 모든 것을 포괄하는 역사 그 자체이다'). 그 ABC에 해당하는 인물들이 스위스 출신의 20세기 언어학자 페르낭드 드 소쉬르와 미국의 철학자(논리학자) 찰스 샌더스 퍼스이다. 저자는 이들로부터 파생되는 20세기 기호학이라는 방대한 지적 모험을 매우 간명하면서도 요령있게 정리하고 있다. 그래서 좀 감질나기는 하지만, 기호학이라는 고급 풀코스 요리의 맛보기로는 제격인 듯싶다.

모든 모험이 그렇듯이 기호학적 모험에도 몇몇 뛰어난 영웅들이 있다. 소쉬르에서 바르트, 방브니스트, 그레마스, 데리다(물론 그의 그라마톨로지는 기호학에 비판적이다)에 이르는 계보, 그리고 퍼스에서 모리스, 시벅, 에코로 이어지는 계보, 거기에 야콥슨과 러시아 형식주의와 체코 구조주의(프라하학파), 소련의 문화기호학으로 이어지는 계보 등. 기호학을 공부하는 이들에게 가장 애를 먹이는 것은 이들 계보들의 기호학적 구상과 사용하는 개념들이 각기 다르다는 것인데(가령 소쉬르의 '기호=기표+기호'의 2원적 모델인데 반해서 퍼스의 '기호=표상체+대상+해석체'의 3원적 모델로 되어 있다.), 저자의 쉬운 설명을 따라가다 보면 제법 이해할 수도 있겠구나 하는 생각을 하게 된다.

물론 이 책은 기호학에 대한 어수선한 지식을 정리하는데 도움을 줄 수 있는 좋은 입문서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좀더 적극적인 관심을 가진 독자라면, 저자가 제시한 '더 읽기'를 참조하여 앞으로 한참 더 읽어야 하는 여정을 감수해야 할 것이다. 그 풀코스의, 세미오시스를 통한 기호계(세미오스피어)로의 여정 또한 '읽기의 모험'으로서 손색이 없지 않을까?..

사족으로 한두 가지 오역을 지적하고자 한다. 러시아 형식주의자 '보리스 엑센바움'(135쪽)은 '보리스 에이헨바움'이라고 표기해야 하고, 프라하학파의 '얀 무카로프스키'(146쪽)는 '얀 무카르좁스키'가 맞는 표기이다. 무카르좁스키의 제자 '펠릭스 보딕카'(157쪽)도 (내가 알기엔) '펠릭스 보디치카'로 해야 한다. 그리고, 138쪽의 '1822년 짜르주의에 대항한 10월혁명주의자'는 '1825년 짜르주의에 대항한 12월혁명주의자'의 오역이다(원서가 잘못된 것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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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레드릭 제임슨 - 맑스주의.해석학.포스트모더니즘, 문예과학이론신서 28
숀 호머 지음, 이택광 옮김 / 문화과학사 / 2002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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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내에 많이 소개돼 있으면서도 정작 제대로 읽히지 않는 이론가 중 대표적인 사람이 프레드릭 제임슨이다. 미국을 대표하는 맑스주의자이자 포스트모더니즘 논쟁에서 빠지지 않고 인용되는 저자임에도 불구하고, <포스트모더니즘 혹은 후기 자본주의의 문화논리>는 물론이고, 아직 주저인 <정치적 무의식>조차 번역되고 있지 않는 것은 의아한 일이다. 그런데, 이 제임슨의 저작들을 총체적으로 개괄적이면서도 예리하게 비평하고 있는 숀 호머의 번역서를 보면 왜 사정이 그럴 수밖에 없는가를 짐작하게 한다. 요점은 두 가지다. 그의 이론의 난해성, 그리고 연구자들의 무성의.

저자의 한국어판 서문까지 달고 있는 번역서가('문장의 미묘한 뜻에 대해 자세하게 답변해준 이 책의 저자 숀 허머에게도 고마움을...') 이토록 무책임하고 무성의하게 번역될 수 있는지는 놀라울 정도이다. 비록 오역의 향락이라 할 만한 지젝의 <향락의 전이>에는 다소 못미치지만, 이 책은 손가락으로 꼽을 만한 오역의 전범이다. 제임슨이나 호머의 문장이 다소 난삽한 것은 사실이지만, 단어나 구의 누락에서 인명 바꿔치기, 문맥 거꾸로 이해하기 등 오역의 모든 구색을 갖춘 번역문을 읽는 일은 고역이다(덕분에 원서를 읽게 됐지만).

어쩌다 발견하는 오역은 즐거움을 주지만, 간혹 정확한 번역문장을 발견하는 일은 짜증스럽다. 믿을 만한 출판사에서 제대로 된 교열/교정을 보지 않았다는 것도 실망스럽다. 게다가 '물론 이 책이 개론서라고 해서 만만한 독서를 허락하는 것은 아니다'(20쪽) 토를 달고 있는 역자의 서문을 다시 읽자니 개탄스럽다. 만만하지 않은 책은 번역하지 않으면 되지 않은가!

이 책에서 오역은 두루 산재해 있지만, 특히 <정치적 무의식>을 다룬 2장, 3장에 집중돼 있다(사실 뒷부분은 자세히 읽을 엄두가 나질 않는다). 비근한 예를 들어보자.

'맑스주의는 실천으로부터 제공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현재의 정치적 투쟁과 미래에 대한 대안적 전망을 투사할 필요성으로부터 생명을 얻는 것이다.'(159쪽)

뭔가 이상하지 않은가? 맑스주의는 무엇보다 실천의 철학이 아닌가?(역자도 이상하게 생각해야 했다.) 원문은 'Marxism cannot be severed from practice...'이다. '맑스주의는 실천으로부터 분리될 수 없다'인데, 역자는 (아마도) severed를 served로 본 것이다. 그런데, 이 정도는 애교이다. excess(과잉)을 난데없이 '중층결정'으로 번역하고, 시니피앙(기표)/시니피에(기의)는 서로 바꿔 번역했다. 만프레드 프랑크의 말을 제임슨의 말로 옮기고, 하버마스의 '미완의 기획(프로젝트)'는 '미완의 기억'으로 탈바꿈시켰다. 긴 문장을 인용할 수 없어 아쉬울 따름인데, 압권 중의 하나를 보자.

'생산양식에 대한 맑스주의 개념은... 환형적 제곱의 사고를 촉발한다.'(80쪽) 환형적 제곱의 사고라니? 'a squaring of the circle'를 그렇게 번역한 것인데, 그것은 말 그대로, 원을 정방형으로 만들다, 즉 불가능한 일을 가리킨다. 문맥상 그것은 맑스주의의 생산양식 개념이 제임슨의 '구조적 역사주의'(역설적이지 않은가!)를 어떻게 설명 가능하게 하는지에 대한 것이다.

들뢰즈/가타리의 <안티 오이디푸스>에 대한 제임슨의 전유를 다루는 부분에서도 역자의 몰이해는 여전한데, 그가 '들뢰즈의 극장'에서 무얼 보았는지 의심하지 않을 수 없다. '한국 문화의 음란한 환타지'라고? 물론 거기엔 오역의 음란한 환타지도 당연히 포함돼 있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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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로그인 2006-05-02 21:3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로쟈님 좋은 글 감사 덕분에 돈 굳었습니다.하하

자꾸때리다 2011-01-01 00:2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택광이 이런 사람이었나요? ㅎㄷㄷ

clsv2948 2014-07-26 17:5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휴~~구입할 뻔 하다가 <로쟈>님의 날카로운 지적을 읽고 안사기로 했습니다.
휴~~~쓸데없이 돈 날라갈 뻔 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