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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간이 윌슨 ㅣ 창비세계문학 31
마크 트웨인 지음, 김명환 옮김 / 창비 / 2014년 4월
평점 :
마크 트웨인은 동화작가로 알고 있었던 시절이 있었다. 요즘은 당연히 풍자와 해학이 넘치는 작가로 알려져 있지만 그래도 여전히 마크 트웨인은 톰 소여와 허클베리 핀을 가장 먼저 떠올리게 한다. 물론 많은 사람들이 읽었을 것 같지는 않지만 개인적으로 재미있게 읽은 '아서 왕 궁전의 코네티컷 양키'라는 책도 떠올려볼 수 있다. 부끄럽게도 오래전에 한 번 읽었을뿐이라 내용들이 기억나지는 않지만 마크 트웨인의 풍자가 얼마나 시대를 앞서가는, 얼마나 날카롭게 현실을 반영하고 있는지에 대한 느낌은 강하게 남아 있다.
"나는 13세기 후의 미국이 떠올랐다. 남부의 '가난한 백인들'은 노예주들에게 늘 무시를 당했으며 수시로 모욕을 당했다. 자신들의 열악한 환경이 근본적으로는 노예제도 때문이라는 사실을 알면서도 그들은 노예제를 지지하고 영속시키자는 모든 정치적인 운동에서 항상 무기력하게 노예주 편을 들었으며, 결국에는 자신들을 타락시키는 그 제도의 붕괴를 막기 위해 목숨을 바쳐가며 어깨에 총을 메기까지 했다. 그러나 이 애처로운 역사와 관련해 위로가 될 만한 사실이 한가지 있다. 그것은 바로, 이 '가난한 백인들'이 마음속 깊은 곳에서는 노예 소유주들을 증오했으며 스스로를 수치스러워했다는 사실이다. 비록 그런 감정이 겉으로 드러나지는 않았지만, 분명히 존재하고 있었고 적절한 상황만 주어진다면 언제든 표출될 가능성이 있었다는 점은 분명 의미가 있다. 아니, 사실 그것만으로도 충분했다. 왜냐하면 비록 겉으로 보이지 않는다 하더라도 인간은 근본적으로는 결국 인간이라는 사실을 보여주기 때문이다."(아서 왕궁전의 코네티컷 양키, 354)
사실 얼간이 윌슨을 읽기 전에 이미 이런 이야기를 하고 있는 마크 트웨인을 느꼈기 때문에 어쩌면 얼간이 윌슨을 조금 더 깊이있게 느끼게 된 것인지도 모르겠다.
얼간이 윌슨에서의 주인공은 제목에 나와있는 윌슨이 아니라 톰과 록시일것이다. 그리고 그 중에서도 이야기를 이끌어가는데 더 큰 역할을 하는 것은 록시겠지. 책의 내용을 간략히 이야기하자면 노예 하녀인 유모 록시가 겉모습으로는 주인집의 아기와 구별하기 힘들다는 것을 눈치채고 아무도 모르게 두 아기의 운명을 뒤바꿔버리고 그 이후에 벌어지는 일들을 보여주고 있는 이야기이다.
이 책의 시대적 배경은 미국의 노예제가 시행되고 있던 때이다. 이미 다른 책을 통해서도 알고 있겠지만 재산으로 여겨지는 '깜둥이'들은 태어나면서부터 누군가의 소유가 되어 있었고 그것은 그 사람의 성품과 행위, 심지어 외모와도 전혀 상관없이 노예로 태어나 노예로 살아가게 될 뿐이다.
백인과의 사이에서 혼혈로 태어난 깜둥이가 대를 거치면서 겉모습으로는 깜둥이가 아닌 백인과 구별이 힘들 정도로 피부가 하얀 법적인 깜둥이의 이야기는 노예제의 실상이 무엇인지에 대해 더 모순되는 것들을 찾아보게 하고 있다. 이것은 물론 살인죄로 감옥에 들어가 종신형을 선고받지만 단지 노예라는 이유만으로 재산권을 행사하기 위해 감옥에 가두지 않는 이야기에서도 느낄 수 있는 것들이다.
주인집의 아기와 노예하녀의 아기가 비슷하게 자라나고 있을 때 두 아기의 옷만 바꿔버린다면 겉모습으로는 뒤바뀐 아이의 운명을 찾아낼 수 없다는 것에서부터 '노예'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인지 생각해보게 한다. 물론 이 이야기가 처음부터 끝까지 그렇게 의미심장한 이야기들을 곳곳에 늘어놓으면서 독자들에게 무엇인가를 주려고 하는 것은 아니다. 얼간이 윌슨을 읽기 시작하면서부터 끝을 낼때까지는 솔직히 그런 느낌없이 이야기자체에 빠져들었을 뿐이니까.
뒤바뀐 아이의 운명은 어떻게 될지, 엄청난 일을 저지르고 명문가의 자제로 유복하게 살아가고 있는 자신의 아이를 협박하며 살아갈 궁리를 하는 록시의 삶은 어떻게 될지, '얼간이'로 조롱받는 윌슨의 지혜는 그 모든 것을 밝혀낼 수 있을지... 이야기의 결말이 어떻게 될지 궁금하지 않을 수 없었기 때문이다.
너무 정직하게 복선처럼 깔려있는 것이 이 책을 탐정소설처럼 읽기에는 좀 무리가 있고, 이미 마크 트웨인의 결정적인 반전을 보여주는 이야기 형식에는 익숙해져 있기 때문에 어떤 장면이 연출될지를 미리 예상할 수 있었음에도 결말에 이르를수록 이야기는 더 재미있어졌다.
그리고 책을 다 읽고 난 후 내용들을 다시 곱씹어 보면, 마크 트웨인이 인용하고 있는 '얼간이 윌슨의 책력'에 담겨있는 글들이 더욱 심오하게 느껴지게 된다. 물론 '당신이 굶주린 개를 구해서 잘 살게 해준다면, 그 개는 당신을 물지 않을 것이다. 이것이 인간과 개 사이의 중요한 차이점이다'같은 글처럼 읽는 즉시 동감하며 웃게 되는 그런 글도 있지만 말이다. 그런데 심지어 이런 글조차도 한번 더 읽어보면 '인간'에 대해 다시 생각해보게 되지 않는가.
극적인 반전을 기대하기에는 이미 너무 오래전에 씌여진 글이라 정말 재미있는 추리소설, 시대문학처럼 읽기에는 무리가 있을 것이다. 하지만 변하지 않는 것, '인간은 근본적으로 인간'이라는 것을 이야기하고 있다는 점에서 지금의 시대에 이 책을 읽는 의미를 느낄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