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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의 가면 1 : 원시 신화 까치글방 160
조셉 캠벨 지음, 이진구 옮김 / 까치 / 2003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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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의 충만성은 각자가 지니고 있는 신화의 깊이와 폭에 직접 비례하는 것으로 보인다"

"여러 문화의 신화들은 ...중략... 삶의 동기와 방향을 제공하는 강력한 동인으로 분명히 작용하고 있다"

"신화 속 상징들은 가장 깊은 동기 부여를 가져온다"

"신화가 자신의 특질을 무의식으로 부터 꺼낼 때 삶은 그 속으로 흘러들어 간다"

"신화는 -따라서 문명은- 시적 초일상적 이미지이다. 모든 시가 그러한 것처럼, 신화는 깊은 차원에서 상상된 것이지만 다양한 수준에서 해석될 수 있다. 아주 피상적인 정신의 소유자는 신화에서 국지적인 배경을 보지만, 가장 심오한 정신의 소유자는 거기서 무의 세계로 통하는 입구를 본다." 

"신화는 삶의 의미를 연출하는 이미지 체계이다. 그리고 그 의미는 두가지 방식으로 파악할 수 있다. 첫째는 사유의 방식이고 둘째는 경험의 방식이다. 사유로서의 신화는 과학에 접근하거나 과학으로 향하는 원시적인 서곡이다. 경험으로서의 신화는 예술 자체이다. 더구나 신화적 이미지와 신화적 공식은 의례 속에서 현재화 된다."




이 리뷰의 마지막장을 너무 오래 미뤄뒀는데 이제 마무리를 지어야 할 것 같다. 가능하면 짧게 끝내려 한다. 


애초에 『신의 가면』은 제목 마따나 신화에 대한 저작이다. 그러니 이 저작에 대한 리뷰를 작성하며 예수님의 생과 가르침으로 접근한 것은 가장 적절한 양식이 아니었나 싶다.


'삶을 충만하게' 만들고 '삶의 동기와 방향을 제공'하며 '삶이 흘러들어 간다'는 신화... '무(無)의 세계로 통하는 입구를 보게 한다'는 신화는, '삶의 의미를 연출하는 이미지 체계'라고 조지프 캠벨은 말하고 있다.


이는 비단 기독교인이 아니라도 자신의 종교를 통해 삶이 의미를 찾은듯하고 충만한 사랑과 은혜를 경험해 보았다는 이들이라면 공감할 정의가 아닌가 싶다. 물론 이것은 종교의 긍정적 영향만을 두고 이르는 것이지만 말이다. 


조지프 캠벨은 『신의 가면』의 첫번째 권인 《원시신화》에서 많은 이야기를 하지만 가장 주목하게 되었던 것은 마르가와 가면의식, 기괴한 사고(accident), 은폐하는 우화(Screening Allegory) 그리고 이 모두를 인간의 의지로 구현하여 새로운 시대의 새로운 통합적 새신화를 유도할 수 있다는 논리를 가져올 수도 있을 생득적 방출기제(Innate Release Mechanism)에 대한 서술이다.


조지프 캠벨은 '인간에게 주어진 능력 가운데 최고의 선물은 미성숙함 자체'라며 '인간은 미성숙한 존재이기 때문에 본래적으로 놀이 능력을 지니고 있다' 고 말한다. '정신의 고귀함은 천상에서든 지상에서든 놀이를 할 수 있는 능력' 이라고 말이다. 그러면서 예를 든 것이 중세 유럽의 기사도 양식과 비슷한 일본어 화법인 '아소바세-코도바' (놀이 언어)이다. "자네 아버지께서는 언제 죽음을 연기하셨는가?" "제 아버지께서는 삼일 전 죽음을 연기하셨습니다" 부친이 언제 돌아가셨는지에 대한 대화이지만 이 일본어 화법 속에서 부친은 하나의 연기를 펼치고 있는 것이다. 


한국어에서는 돌아가셨다라는 죽음에 대한 표현양식과 다른듯 하면서도 유사하다. 한반도에서의 선조들은 죽음이라는 과정으로 오셨던 곳으로 되돌아가고 계신 것이고 일본에서 일본인들의 선조들은 한편의 연극으로서 죽음을 연기하고 연출하는 것이다. '일본인의 삶의 이상에서 나타나는 비상할 정도의 열정과 엄숙함은 하나의 허구에 의해 가려져 있다. 그것은 인생만사가 놀이일뿐이라는 멋진 허구이다.' 


조지프 캠벨은 인간이 만들어낸 문화 속에서는 삶도 죽음도 한편의 놀이일 수 있다고 말한다. 하지만 이것을 액면 그대로 받아들이기엔 그가 말하는 놀이가 너무도 처연하게만 다가온다.


원시적 의식 속에서 샤먼은 '신의 가면을 쓰고 의례를 행한다. 의례 속에서 그는 신과 동일시된다. 그는 단지 신을 표상만 하는 것이 아니라 그 신 자체이다.' 이 의례 속에서는 (as if~), (make~believe) "마치 ~인체 하는" 즉 "마치 ~인 것 처럼" 이라는 논리가 지배한다고 한다. 이것은 자신이 신이 되었다는 믿음이 바탕하며 진행되는 하나의 게임이며 이 "'믿음의 게임'을 묵묵히 받아들이면서 '축제의 놀이'영역으로 들어가게 된다"고 조지프 캠벨은 이야기 한다. 믿음을 통해 '일상적 세속적 논리가 연극과 놀이의 논리로 전환된다'는 것이다. 


- 이 믿음은 그저 하나의 가정이기만 한 것이 아니다. 단지 "무엇인 척" 하는 것으로 또는 "동일시"하는 것으로 저자나 서양학자들이 받아들이는 것과는 다르게 진리의 인식인 것이다. 그것도 하나의 진리의 인식이 아니라 근원적으로 단하나인 진리 그 자체인 것이다. 인도의 수행철학체계의 근간이 담긴 '소흠' 또는 '소함'으로 음역되는 만트라는 그 반대의 '함사' 만트라와 함께 수행하도록 하는 체계이다. '소'를 '그것(It)'으로 번역하던데 이는 영어권 수행자의 직역이기 때문일 것이다. 한국어권에서는 '그것' 보다는 '그' 또는 '그녀' 로 해석하는 것이 더 나을지 모른다. 그로 해석하던 그녀로 해석하던 서양인들 처럼 그것이라 하던 모두 유일한 한분의 절대자를 말하는 것이다. '흠'은 '나'를 뜻한다. 들숨에서 '소' 또는 '사' 음이 날숨에서 '흠' 또는 '함'음이 동반된다는 것을 자각하고 나면 이 만트라는 "그는 나이다" "나는 그이다"가 거듭 반복되는 것이 우리의 호흡이며 살아 숨쉬는 동안 한결같이 지속되는 존재의 가르침임을 일깨우고 있는 것이다. 하나님과 나는 둘이 아니다. 그와 나를 둘로 보게 하는 존재의 차원 전체가 하나의 꿈이며 기만일 뿐이라는 것이 인도 베단타 요가철학 체계 가르침의 핵심이며 축이다. -


- 축제의 놀이영역에 대한 조지프 캠벨의 말을 좀더 인용하자면, "그 놀이 영역에서는 재미와 기쁨 그리고 황홀감이 단계적으로 힘을 발휘한다. 거기에서는 시공간 속에 존재하는 삶의 법칙들, 즉 경제학과 정치학 그리고 도덕법칙이 사라진다. 그 다음에는 타락 이전(선과 악, 옳고 그름, 참과 거짓, 믿음과 불신에 대한 지식이 생겨나기 이전)의 낙원으로 귀환하여 새롭게 거듭나게 되고, 그 결과 놀이의 인간(호모루덴스)의 정신과 관점을 삶 속에서 다시 회복하게 된다. 아이들의 놀이에서 처럼, 그러한 상황에서는 진부한 삶이 현실에 기가 꺾이지 않은 채, 순수한 놀이의 기쁨을 위하여 다른 어떤 것과 스스로를 동일시 하는 자발적인 정신의 충동이 이 세상을 성스럽게 변화시킨다." -


조지프 캠벨은 '놀이의 경우 처음 순간 강조되는 것은 "사로잡힘(seizure)"의 황홀이 아니라 놀이의 즐거움(fun)' 이라고 말한다. 그러면서 '믿음(belief) 혹은 믿음의 놀이는 "사로잡힘"의 상태로 나아가는 첫걸음' 이라고 한다. 그러니 결국 사로잡힘의 상태로 나아간다는 말인 것이고  '...그들이 "사로잡힘"의 경험을 하기전에 겪은 "기나긴 시련"' 에 대해 논하기에 이른다.


원시전통 속의 샤먼은 기나긴 시련, 가혹한 시련으로 일컬어지는 고통의 시간들을 견뎌내야 한다. '고통을 통해서만이 지혜에 이를 수 있다' 면서 말이다.


- 이것은 기독교 성자들 또한 다르지 않았다고 한다. 바로 위의 문장에서 마지막 따옴표 안의 '그들이' 로 시작하는 문장을 인용하며 임의로 '성자전에는' 이라는 주어를 생략했다. 결국 샤먼에 대한 내용이면서 동시에 카톨릭 사제에 대한 이야기인 것이다. -


기나긴 시련, 가혹한 시련이라는 고통의 길 '마르가' 는 인도철학의 용어 '우파디(upadhi)' 로 설명될 수도 있다고 한다. 이 용어는 '깨달음의 특성' 을 설명하면서 동시에 '존재의 기만적 속성' 들을 이르기도 하는 말이다. '고통' 은 실체가 아닌 속임수이며 그 고통 안에 존재하는 '환희' 라는 깨달음의 특성만이 실재할 뿐이다. 이것이 우주적 진실이기에 '깨달음의 특성'인 것이며 '존재의 기만적 속성'이라는 것이다. 조지프 캠벨은 '비극적 고통이라는 것은 존재의 기만적 속성이며 이것을 통해 근원적 비밀'에 이른다는 것이 원시신화와 인도철학 용어가 합일점을 찾은 관점이라는 듯 주장을 한다. 그렇기에 '죽음은 기만인 것이고 부활이라는 진실을 위해 존재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그것을 '환희' 라고만 하기엔 샤먼은 '기나긴' 그러면서도 '가혹한' '시련' 속에서 '위대한' 이라던가 '엄청난' 이라는 미사어구가 더해진 '고독'을 감당해야만 한다. 그가 겪어야 하는 시련과 고독은 길고 긴 시간 가혹하고 엄청난 규모로 덮쳐오고 지속되는 것이다. '엄청난 고독'이라는 것을 통해 "다른 사람들에게 숨겨져 있던 모든 것이 한사람의 정신세계 속에서 나타나게 된다" 고는 하지만 이 과정은 '영적 정화'니 '자아 비우기'니 그럴싸한 말로 포장해 보았자 "궁핍(privation)과 자아가 발가벗겨지는(stripping of the self)" 과정이 동반된 고통만이 주도적인 길이다. 


'하나님께서 구하시는 제사는 상한 심령이라...[시편 51:17]' '나는 가난하고 궁핍하여 중심이 상함이니이다...[시편 109:22]' 에 해당하는 상태로 내몰리기 위한 바로 그 길이라는 말이다. 이 고통이 환희로 바뀌어야 할 '비극'은 '마음의 초점을 바꿈' 으로써 비극이 끝나고 희극이 시작된다고 한다. 즉, '비극의 양식이 끝나고 신화가 시작된다' 는 것이다. 샤먼은 '신화의 시적 변형' 인 이 '비극' 이라는 '심리적 위기'를 통해서야 '자기만의 고유한 힘'을 획득하는 것이라 한다. (레법이냐ㅡㅡ^ 2C)  


- 이 길에서 그는 사랑 마저도 허락되지 않는다. 이 메마르고 불사르는 지옥 불구덩이만도 못할 지구에서, 목타오르는 갈망 속에서도 단하나의 사랑 조차 허락되지 않은 삶이라는 말이다. 조지프 캠벨은 말한다. "낮은 차원의 대상에 대하여 느끼는 사랑과 애착은 실은 높은 차원의 대상 안에 자신을 잠재적으로 확립하는 작용이다. 그러나 만약 정신이 본연의 목적에 도달하려면 낮은 차원의 대상에 대한 사랑을 희생해야만 한다."


결국 한사람에 대한 간절한 사랑을 통해 하나님께로 향하여야 하고 한사람을 통해 간절한 사랑을 깨닫고 나면 그 단 한사람을 향한 사랑은 좌절 당해야 한다는 말이다. 그럼으로써 하나님 밖에는 못보는 외곽으로의 시야는 가려진 채 달리는 경주마 같은 신세가 되어 오아시스의 한모금도 그저 한줌의 물도 허락 되지 않은 삶이나 살아야 하는 것이 샤먼과 사제의 삶이라는 말인 거다. (엿 같다! 절대 '요깟다'가 아니라!) -


이 과정에서 동반되는 것이 있다. 그건 '원시의례에서는 "사고(accident)"로 간주되는 것이 우주체계의 중심에 놓여있다'고 저자가 말한 바로 그것이다. 다시 한번 강조하자면 동반되는 것이라기 보다 '우주 체계의 중심에 놓여있는 것'으로 저자가 언급했듯 이 의례의 축을 이루는 것이기도 하다. 그 축이라는 것은 바로 "갑작스럽고 기괴한 죽음" 을 이른다. '이러한 "사고"는 우주의 질서가 지닌 잔인성의 계시로 간주된다' 는 것이 저자의 관점이다. '이렇게 계시된 것은 단지 이 세상이 지닌 일상성의 기괴함이 아니라 우리의 둔감한 능력으로 느끼는 것보다 훨씬 고차원적인 실재성을 지닌 일상성'이라 한다. 이런 '신적 의지를 지닌 기괴함'을 내용으로 하는 계시가 '그러한 기괴함의 형태를 지니는 것은 신이 모든 활동에서 그 자신을 현실화하기 때문'이라 것이 저자의 성찰이다. 그래서 저자는 '신화는 이 세상의 기괴성과 경이감의 표출' 이라 정의하고 있다. 앞서 "갑작스럽고 기괴한 죽음"이라는 표현을 사용했으나 "일상성"이라는 어휘의 사용이 반복되었듯 갑작스럽다 하여도 경이라 하여도 기괴하다 하여도 그것은 '갑작스러우면서도 경이롭고 기괴한 "일상"의 문제인 것이다' 세계와 우리 자신의 날들에서 일어나는 현실 말이다. 그렇기에 저자는 '신화를 통하여 우리는 세계와 우리 자신을 깊은 차원에서 경험할 수 있는 것이다'라고 '기괴한 사고'에 대해 결론 짓고 있다.


여기까지 이야기한 조지프 캠벨의 주장을 예수 그리스도의 생애에 대응 해보자. 신의 가면을 쓰고 신과 자신을 동일시하는 원시의례는 자신을 하나님의 아들이라던 예수님의 말씀에 수긍하던 기독교인들을 통해 더욱 온전히 완벽한 연극으로 완성되었다. 예수님 사후 요한복음서를 통해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 라며 예수님을 하나님과 완벽한 일체를 이루는 존재로까지 온전히 빈틈없는 하나의 극으로 완성되지 않았나? 게다가 '만물이 그로 하여 지은 바 되었으니 지은 것이 하나도 그가 없이 된 것이 없느니라' 라는 구절로 인하여 바늘구멍 하나만한 빈틈도 없을 완벽함을 갖추게 된 것이다.


사실 '하나님과 함께 계시다' 하여 어찌 하나님이겠나? 비유하자면 자신의 아버지 곁에 있는 이가 모두 아버지라는 논리는 성립될 수없는 논리일뿐이다. 말씀은 하나님의 창조 내지는 부분적 분할(할애)을 통해 존재케 되신 것이고 하나님께서는 말씀을 사용하셔서 말씀을 근간으로 존재의 차원을 창조하신 것이라는 것이 요한복음의 말씀일 것이다. 하나님과 함께 계시니 하나님이시다는 논리를 담은 구절은 예수님 생존시 허락을 구하고나서 요한복음서가 쓰여졌다면 예수님께서 허락하셨을리 없을 논리적 오류 자체인 구절이다. 그리고 말씀을 현대 과학으로 보자면 말씀이라 할 때는 정보를 담은 소리를 말하는 것일테고 이는 현대물리학에서 아마도 파동이라 이르는 것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이 파동은 시각영역을 자극하는 대상이 될 때는 빛, 색깔, 형상을 띠게 되며 청각영역을 자극하는 대상으로는 소리가 될 것이며, 촉감으로는 냉감 열감 등등의 느낌으로 접수 될 것이다. 이 파동의 주파수 대역으로 아마도 초끈이론에서 끈의 파장이 달라지며 물질의 최소구성인자의 종류가 결정되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말씀이란 애초에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모든 차원들 중 우리가 거주하는 물질 우주를 구성하고 운영하는 원리 자체를 상징적으로 말하는 것이지 인격체를 상징하는 것일 수 없다. 그럼에도 요한복음은 창조자와 구성원리를 인격체와 동일시 하고 있는 것이다. 그렇게 창조자와 창조자가 창조한 구성원리 그리고 한명의 인격체를 동일시함으로써 원시부족의 가면의례와도 같이 하나의 신화가 온전함을 갖추게 된 것이다. 


자신을 하나님이 아들이라 하고 그를 신앙하는 이들은 그를 하나님과 동일시함으로써 as if~, make beleive~ 라는 의례이면서 동시에 놀이인 논리가 완성된 것이다. 이렇게 신인 체하고 신이 되었다고 믿는(가정하는) 의례의 필요성과 그 기능에 대해 조지프 캠벨은 인도의 간다르바 탄트라를 들어 설명한다. 


"스스로 신이 되지 못한 사람은 제대로 예배할 수 없다. 신이 된 사람만이 신에게 자신을 제물로 바칠 수 있다." -  간다르바 탄트라(Gandharva Tantra)


신에게 제대로 예배한다는 것, 신에게 자신을 제물로 받칠 수 있다는 것은 모두 스스로가 신이 되는 것이 전제가 된 이후의 결과이다. 즉, 신이 되는 것은 의례를 완성하는 전제 조건이며 이러한 전제는 바로 신의 제물이 되고 신에게 예배하는 다시 말해 신에게 귀속되고 환원되는 과정 그 자체를 이르는 것이라는 말이다. 이러한 관점은 신이 되어야 신의 것으로 되돌아 가는 것이란 논리적 귀결에 이르도록 한다.


따지고 보면 기독교적으로 인간이란 하나님의 형상을 본따 즉 하나님의 구조대로 만들어져, 하나님의 부분을 담으면서야 창조가 완성된 존재이기에 처음 부터 하나님과 그 피조물인 우주와 인간 이 셋이 모두 완전히 독립되기만하고 단절되어 있는 존재라고만 우기는 것은 애초에 막무가내식 억지일뿐이었다. 그렇다고 독립적인 존재가 결코 아니기만 하다는 것이 아니라 독자적이기만 하거나 단절되어 있지만은 않다는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이다. 


이후 다시한번 언급하겠지만 조지프 캠벨이 말하는 '자아의 상실과 자아의 고양이 동일하게 느껴지는 순수한 황홀의 경험'에 주목해야 할 것이다. '자아의 상실'과 자아의 고양'이 어떻게 같으냐? 무슨 말 장난인 것이냐? 고 의문을 갖는 사람은 여기까지 이르는 포스팅들을 건성으로 스킵해가며 하얀 행간만 읽은 것일 거다. 자아의 상실은 자신의 자아 곧 내가 사라지며 자신이 사랑(신앙)하는 대상만이 자신을 충만히 채우는 상태를 말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런 자아의 상실과 동일하게 느껴지는 자아의 고양이라 한다면 결국 자신의 근원이자 자아 상실 상태의 자기를 압도하며 충만히 채운 대상(근원적 일자)만이 온전히 자신과 모든 차원의 우주에 가득해진 상태를 이를 것이다.  


그래서 조지프 캠벨은 말하는 것이다. "어떤 의미에서는 아이의 미분화 경험이 성인의 개별화 경험 보다 더 깊은 타당성을 지니고 있다. 생물학적으로 보면, 개개의 유기체는 결코 자연에서 독립해 있지 않다." "모든 신비주의가 추구하는 가장 큰 목표는 자아라는 이슬방울을 전체라는 대양 속에 소멸시키는 것, 즉 자아를 비우고 신의 얼굴을 보는 것이다."라고 말이다.


다시 말해 이미 예로 들었던 '소함'과 '함사'의 의미인 "나는 그이다." "그는 나이다."가 영혼 깊숙히에서 의미 그 자체로서 아니 존재적 차원 그 자체로서 충만히 온전히 진실임을 깨닫게 하고자. 스스로가 또는 우리의 대표라 할 상징적 존재가 이 세상에서 자신을 드러내는 것이라는 말이다. 기독교인들에게 그런 상징적 존재의 대표적 인물은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 이어서 계속됩니다

삶의 충만성은 회복과 귀환의 길을 깨닫는데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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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의 가면 1 : 원시 신화 까치글방 160
조셉 캠벨 지음, 이진구 옮김 / 까치 / 2003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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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께서 보이신 이탈자적 면모는 여기서 그치지 않는다. 유교사회에서였더라면 용납되기 어려웠을 자신의 어머니와 형제들을 부정하는 발언도 서슴지 않으셨던 분이다. “누가 내 어머니이고 누가 내 동생들이냐?” 동양에서 태어나셨더라면 사회적 배척을 감당하셨다 해도 당연했을 발언 수위이다. 게다가 자신의 교인들에게 마저 “아비나 어미를 아들이나 딸을 나보다 더 사랑하는 자는 내게 합당치 않다” 고 말씀하시기도 했다. “사람이 그 아비와 딸이 어미와 며느리가 시어미와 불화하게 하려 함이니 사람의 원수가 자기 집안 식구니라”고도 하셨다.

 

- 물론 모두, 갈등을 극대화해 문제를 인식하고 갈등을 중재하는 과정을 통해 발전을 이루라는 뜻이실 거라 생각한다. 또 가족이라 해도 자기 자신이 아닌 다른 이의 의도와 통제에 휘둘리는 삶이 아니라 자기 스스로 자신의 삶을 살아가라는 말씀이기도 할 것이다. 그 과정을 통해 서로 이해하기도 하고 그릇된 길에서 벗어나게 하려 최대한 노력할 수도 있고 말이다. 그런데 그럼에도 “절대 아니다” 싶을 때는 (예수님께서 누군가 잘못한 형제는 어찌해야 하는지 물었을 때 용서하라던) 예수님 말씀 마따나 7번씩 7번은 용서하다가 정 아니라는 판단이 선다면 벗어날 일이다. -

 

게다가 기존의 거의 모든 문화권에서 성스러운 인물들은 대개 자신의 헌신이나 사역의 과정에서 개인적 만족과 여유 또는 보상을 거절하지 않았나?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그러한 사례들과 달리 의례와 같은 거절을 배격하셨다. 이전 포스팅들에서 거듭 언급했듯 예수님의 발을 향유로 씻고 자신의 머릿결로 닦아주던 여인이 있었다. 예수님의 제자들이 그걸 팔아 많은 이들을 보살필 수 있다는 식의 발언을 한 것으로 보아 상당한 고가였을 것이다. 예수님께선 자신이 스스로에게 허용하는 만큼의 여유는 헌신하는 이들도 누려야 한다는 모범을 보여주고자 하셨던 듯하다. 더욱이 가장 논란이 될지도 모를 해석을 하자면 예수님께서 과연 자신의 여정에서 그러니까 자신이 연기를 펼치신 무대에서 온전히 연출에 동참하여 연기를 펼치셨는지 의문이라는 것이다.

 

바로 이어 “제 뜻대로 마시고 아버지 뜻대로 하소서”라는 기도를 이어 가시긴 했다지만 분명 “이 잔이 제게 너무 무거우니 거두어 달라”는 기도를 하셨지 않았나? 게다가 “엘리 엘리 라마사박다니” 라는 기도는 무언가? “하나님, 하나님 저를 버리시나이까?” 라는 뜻이라던데... 자신의 죽음과 부활까지 모두 아시는 듯 그 자신의 사역 과정 중에서 늘 죽음을 연상할 발언들을 하셔 놓고는 자신이 감당해야할 여정을 거부하려던 기도도 하신데 이어 하나님께 왜 자신을 버리느냐며 원망하고 있지 않은가? 아무래도 십자가에 매달리시자마자 “다 이루었다”는 기도를 하신 것과는 너무도 대조적이며 모순되는 장면이 아닌가?

 

“다 이루었다”는 말씀은 자신에게는 이루어야 할 목표가 있었고 그 목표를 완수했다는 게 분명할 것이다. 그런데 자신의 계획과 연출로 목표를 완수했다는 이가 돌연 ‘도대체 왜 나를 버리는 거냐?’며 절규하고 있는 것이다. 개그콘서트에서 박성호씨가 연기하던 ‘다중이’ 캐릭터도 아니고 ‘킬미 힐미’나 ‘하이드 지킬, 나’에 주인공 역할을 노리고 오디션 보고 계셨던 것도 아닐 텐데 수긍도 납득도 쉽지 않은 모순된 연출을 하고 계시지 않은가?

 

이 모순되는 두 장면은 캐논과 아포크리파에서의 가르침들이 관점에 현격한 차이를 보이신 것과 같은 경우라고 생각된다. 한국에서 도마복음이라고 부르는 아포크리파에서 예수님께서는 분명 이분법을 넘어서라 가르침 하신다. 그래야 왕국에 들어설 것이라고 말이다.

 

- 여기서의 왕국은 우리가 이 땅에 구현해야 하는 천국 즉 천년왕국을 말씀하신 것일 수 있다. 그리고 그 왕국은 우리 자신의 밖에 있는 것이기도 하겠으나 우리 자신이기도 할 것이다. 나와 너(감각이 인식하고 사유의 대상이 될 수 있을 모든 것)를 초월하면서야 진정 온전히 이르러야 할 목적지에 다다를 수 있다는 것을 말씀하신 것일 것이다. 애초에 찾아 나설 필요가 없던 파랑새를 찾는 여정처럼 그 자리로 다시 돌아오게 될 그 여정을 위한 말씀을 하신 것이다. 그리고 그 왕국이 우리 자신이기도 하겠으나 우리들 낱낱의 ‘나’ 라는 왕국이 변화하면 나의 밖에 함께 만들어가고 살아가야 할 세상이란 왕국도 변화하는 것이다. 허나 우리들 낱낱의 나가 변화하면 세상이 변한다는 관점 자체도 이분법적인 것이다. 낱낱의 나를 변화시키는데 제도적인 도움도 필요한 것이다. 자라나는 아이들에게 너가 변하면 세상이 변한다면서 개인의 성찰과 노력만을 강조해선 안될 일이다. 세상이란 변화는 그런 개인의 변화 이후라고 합리화하며 방치하기만 한다면 진정한 변화는 더딜 수밖에 없다. 교육을 통해 가치관의 변화를 가져 오는 안배가 없이 낱낱의 아이들에게 너희 스스로 바른 가치관을 지니고 세상의 패러다임을 바꾸어야 한다는 건 무리한 요구라는 말이다. 개인의 변화와 세상의 변화는 상호 호혜적이어야 하는 것이다. 제도의 변화는 변화를 주도할 개인이 가져 올 수 있을 것이나 또 낱낱의 사람을 변화시키는 것은 제도가 주도적 역할을 할 수 있어야 한다. 나와 너를 가르지 않는 변화는 나와 너가 동시에 서로를 향하며 가져와야 하는 것이다. -

 

반면에 정경에서는 부자들에게 적대적이셨고 부 자체에 대해 개인적인 편견이 있으셨던 것으로 보인다. 세리를 외식하는 자들과 엮어서 비판하시기도 했다. 물론 그 시대의 세리(세금징수원)들이 과도한 세금 정책과 세수를 통해 개인적 이익을 취하는 등 비판의 여지는 분명히 있었다. 그러나 예수님의 비판은 변화를 가져오기 보다는 그저 물의를 일으키는데 머무는 비판이셨다. 무엇보다 성전에서의 환전상과 비둘기 판매상에게 행하신 테러행위(개인이나 집단이 의도를 가지고 개인이나 집단에게 폭력을 행사하여 사회 불안을 조장하는 경우가 테러이다. 그러니 예수님의 행위는 명백한 테러행위셨던 거다.)는 반박의 여지가 없는 폭력행위였었지 않은가?

 

- 이 시대의 어느 목사님이나 신부님이 술은 강간과 음주운전사고와 집단이나 개인 간의 폭력을 났는 악의 근원이라며 호프나 소주방이나 바나 주점 등을 급습해서 손님들이 술 마시고 있는 테이블을 엎고 소리치고 의자 집어던지면 바로 영업방해죄와 (흔히 기물파손죄라고 말하는) 손괴죄로 구속될 것이다. 이 과정에서 테이블의 잔이나 접시에 손님이나 직원들이 살짝이라도 부딪친다면 특수폭행죄도 추가된다. 명백한 범죄행위인 것이다. -

 

예수님의 가르침들을 보면 거의 대다수가 '사랑하라.(하나님께서 나를 사랑하시듯 나도 너희를 사랑하니 너희 서로 사랑하라) 불쌍히 여기라.(긍휼히 여는 자는 긍휼히 여김을 받을 것이요) 입고 먹고 마실 것을 걱정하지 마라.(공중의 새를 보라...천부께서 기르시나니... 들의 백합화가 어떻게 자라는가 생각하여 보라... 솔로몬의 모든 영광으로도 입은 것이 이 꽃 하나만 같지 않느니라.) 재산을 지상에 쌓는데 연연하지 말고 천국에 쌓아라. 일곱 번씩 일곱 번 거듭 용서하라.(너희가 사람의 과실을 용서하면 천부께서도 너희 과실을 용서하시리라. 너희 원수를 사랑하며 너희를 핍박하는 자를 위해 기도하라.) 하나를 달라면 거의 모든 것을 다 주어라.(...속옷을 가지고자하는 자에게 겉옷까지 주며 ...오리를 가게 하거든 십리를 동행하고 네게 구하는 자에게 주며 네게 꾸고자 하는 자에게 거절하지 말라.) 그리고 욕망을 충족시키는 삶이 아니라 진리에 목말라 하라.(사람이 떡으로만 살 것이 아니오... 나는 생명의 떡이니... 나는 세상의 빛이니 나를 따르는 자는... 생명의 빛을 얻으리라. ...너희는 빛의 아들이 되리라)' 는 말씀이다.

 

사랑과 용서, 무소유를 실천하라. 진리를 향해라. 아마도 이것이 신약에서는 가장 중요한 가르침들이 아닌가 싶다.

 

그런데 이러한 언급을 한 것은 예수님의 상이 정경(캐논)과 외경(아포크리파)에서 상당히 대비가 되며 정경 내에서도 그런 대비가 있고 외경에서도 각 아포크리파들을 대조하면 그런 대비가 드러난다는 것이다. 정경의 주요 가르침이 사랑과 용서, 무소유, 진리의 중요성임에도 예수님의 삶은 그런 자신의 가르침과는 외견상 부분적으론 달랐다. 원수를 사랑하고 핍박하는 자를 위해 기도하라던 분이 시대 비판과 특정 계층을 비판하기만 하신 것도 아니라 위에서 언급했듯 실제적 테러도 서슴지 않으셨다. 게다가 어머니와 동생을 부정하신 것을 이미 언급했었다. 그에 더해 가족을 나보다 더 사랑하는 이는 내게 합당치 않다는 말씀도 하셨다.(이런 양가적으로만 보이는 말씀이 과연 전혀 맥락 없이 하신 것일까? 과연 분열된 자아상을 보여주기 위해 연출하신 것이기만 한 걸까?)

 

- 솔직히 예수님께서는 그의 삶으로 양가적이며 분열적인 모습을 보이신 분이다. 살인자이면서(아포크리파 중 예수님 어린시절 토마스복음을 보면 어린 예수님이 어린이를 살해하고 피해유가족과 그 이웃의 눈까지 영원히 멀게 한 사례가 등장한다) 구원자셨으니 말이다. 그러나 가르침은 보고 또 보면 일관성 있는 가르침을 다양한 각도랄까 구도랄까로 펼치신 것이다. 그런데 아포크리파와 요한복음은 상충된다고 오해를 받고 있다. 부처님께서도 이렇듯 다각도로 가르침을 펼치셨다. 그래서 재가신도 중에서는 부처님의 가르침을 오해하는 경우도 있었다. 중생들에게 거듭 자신의 전생들에 대해 말씀하시자 한 재가신도가 변하지 않는 내가 거듭 윤회하며 다시 태어나는 것이라 말씀하셨다며 ''나' 란 것은 영원불멸하는 것이라 가르치시지 않았냐?'고 부처님의 가르침을 곡해했던 적이 있다. -

 

‘가족을 나(빛이신 예수님 또 빛의 아들이어야 할 신앙인 자신) 보다 더 사랑하는 이는 내게 합당치 않다’

 

이 말씀은 심리학적으로도 중요한 가르침이다. 타인의 관점과 의도에 휘둘리며 살지 말고 자존감을 키우고 스스로의 의지로(나 자신의 인식과 관점과 판단으로) 살아야 한다는 말씀인 것이다. ‘가족보다 다시 말해 가족이 주는 안도감이나 가족이 '나'라는 한사람의 인식과 판단에 주는 영향력에 휘둘리지 말아라. 그들 보다 더 사랑해야하는 대상은 바로 나 자신이다.’ 는 관점에서 보자.

 

그럼 예수님께서 말씀 하신 ‘나’를 화자인 예수님 자신과 청자인 ‘신앙인’ 둘 다를 포함하는 경우로 볼 때 예수님께서 하신 “나는 세상의 빛이다.” “너희는 빛의 아들이 되리라” 로 근거해 보자면 나라는 존재는 근본적으로 빛이어야 한다. 또 빛으로 번역되는 헬라어 오르는 지식의 빛을 의미한다고 한다. 빛이 지식이고 그것이 알아야만 할 진리라 할 때 기독교인이 추구해야하는 진리는 하나님을 아는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자신을 세상의 빛이라 하셨고 자신을 믿고 따르는 이는 빛의 아들이 될 것이라 하셨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자신을 보내신 이유는 만민에게 영생을 주려함이라 하셨다. “영생은 곧 하나님과 그가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다” 그러니까 결국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영생은 육체가 영원하기를 바라라는 것이 아니다. 이미 “자기 목숨을 얻는 자는 잃을 것이요...” “자기 생명을 사랑하는 자는 잃을 것이요...” 라고 하셨지 않은가?

 

“하나님은 사랑이시라”는 요한일서의 정의로 본다면, 하나님과 그가 보내신 자를 아는 것이라는 ‘영생’은 결국 ‘사랑 속에 살아라. 사랑을 실천하면서 살아라.’ 는 말씀이신 것이다. 그러게 "너희 안에 천국이 있다" 는 말씀이 성립할 수 있는 것이다.

 

흙으로 상징된 물질원소로 사람의 육체를 만드시고 하나님 자신의 숨을 불어넣어 살아있는 존재로 창조하신 것이지 않은가? (개역개정판 성경에서 생기라고 번역한 네샤마 -아리예 카플란의 해설로는 하나님의 영향력<영혼>에 분류 중 하나이다- 는 숨을 뜻하는 네쉬마에서 비롯되었다고 한다. 하나님의 네샤마인 생기, 다시 말해 하나님의 숨이 불어넣어져 생령 즉, 살아있는 영혼이 되었다는 것이 사람이다. 생령은 네페쉬가 번역된 말로써 네페쉬는 휴식을 뜻하는 나파쉬에서 온 말이라고 한다. 어원대로라면 하나님의 영혼의 다양한 영향력을 분류한 계통 중 하나인 '네샤마'는 '하나님의 혼이자 숨'인 것이며 그런 하나님의 혼과 숨이 내면에서 '네페쉬' 하고 있는 존재 즉 '휴식'하고 있는 존재가 사람인 것이다.

 

그러니 예수님께서 가족을 나보다 사랑하는 자는 내게 합당치 않다는 말씀은 결국 가족이라 하더라도 나 자신이 아닌 다른 이의 관점과 판단 더 나아가 통제에 휘둘려서는 안되는 존재가 자기 자신이라는 말씀일 것이다.

 

이런 관점에서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 는 말씀을 보면 깊이가 달라진다. 나 자신의 안에 천국이 있으며 나 자신의 안에 하나님의 부분이 휴식하고 있는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사랑이신 까닭에 사랑은 늘 내 안에 잠자고(쉬고) 있었던 것이다. 잠자는 하나님을 깨울 수 있다면, 빛이며 또한 천국을 간직한 이들인 서로가 내 안의 하나님을 통해 이 땅에서 함께 천국을 만들 수 있을 것이다.


【 여기서 예수님께서 말씀 하신 "나"를 화자인 예수님만이 아닌 청자인 사람들로 즉 누구나인 자기 자신으로 해석 하는데 문제를 제기 하는 사람들이 있을까 봐 좀더 언급해야 할 것 같다. 예수님께서는 분명히 "너희 안에 천국이 있다" 고 하셨다. 그러시면서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에게로 올 이가 없다" 고 하셨다. 


천국이 너희 안에 있다고 하신 후 말씀하시는 길과 진리와 생명이 "나" 라고 하시는 말씀을 어찌 받아들여야 하겠나? 분명 '너는 나고 나는 너다' 는  블락비의 ZICO가 사랑하는 이에게서 느낀 감상과 같은 관점에서 하신 말씀일 것이라는 말이다. 


"내가 나를 증거하여도 참되고 나는 내가 어디서 오며 어디로 가는지 알지만 너희는 내가 어디서 오며 어디로 가는지 알지 못한다"에서 말씀하시는 '나'도 사람인 누구나의 자기 자신으로 이해하면 해석이 달라진다. 


"내가 가리니 너희가 나를 찾다가 너희 죄 가운데서 죽겠고 나의 가는 곳에 너희가 오지 못하리라" 


이 말씀은 예수님만 찾으며 자기 자신을 찾는 데 즉, 내면의 잠자는 하나님을 일깨우는 데 소홀히 한다면 죄 가운데서 죽게 될 것이라는 무서운 경고이실 것이다. 그러니 진정한 자기 자신이 가야할 곳을 소홀히 하며 외부에서 경배할 이만을 찾아헤매인다면, 사람들이 회복해야 할 인간상을 대표하는 예수님께서 가는 곳에 대다수의 사람들이 이르지 못할 것이라는 의미일 것이다. 


"너희는 아래서 났고(왔고) 나는 위에서 났으며(왔으며) 너희는 이 세상에 속하고 나는 이 세상에 속하지 아니하였느니라" 


여기서 났다를 써서 낳다는 뜻인가 오해의 여지도 있을 듯하다. (내가 그리 오해해서 네이버 국어사전 검색을 했다.) 하지만 태어났다는 것을 의미하신 발언이었고 헬라어로 기록되며 그런 의미를 살려서 쓰였다면 아마도 한국의 성경편찬자들도 그런 뜻을 살려 번역했을 것이다. 그 보다는 발생했다는 하나의 현상적인 상징으로서 말씀하셨기 때문에 그런 발생했다는 의미를 살려 번역해 옮긴 헬라어 기록이 다시 한국어로 번역되며 '났다'가 발생을 뜻하는 어휘로 쓰인 게 아닌가 싶다. 즉, 여기서 '너희는 '아래'서 났고'란 말은 지상에서의 삶을 경험하며 지니게 된 관념들로 "구속과 한계에 갇힌 인간상"을 갖추게 된 사람들을 상징하는 것이리라. 그리고 발생의 기원이 '위'인 '나'는 하나님께서 자신의 형상(구조)대로 지으시고 자신의 부분을 담아 완성하신 (실락과 그에 이르는 과정을 거치기 전의) 최초에 창조된 그대로의 "온전한 인간상"을 상징하는 것이리라. 즉 구속과 한계에 갇힌 인간은 지상에 한정되지만 진정한 사람의 실상인 온전한 인간은 결코 지상의 중력으로 구속할 수 없는 존재라는 말씀을 하신 것이리라.


"이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말하기를 너희가 너희 죄 가운데서 죽으리라 하였노라 너희가 만일 내가 그인 줄 믿지 아니하면 너희 죄 가운데서 죽으리라" 


사람이 구속과 한계에 갇힌 인간상만을 자신이라 여기고서 그 구속[늙고 병들고 죽는 생명체로써의 구속 또 자연의 힘들에 제한을 받는 물질 존재로써의 구속, 한정된 힘을 수긍하며 살아가야 하는 속박된 존재(피조물)로써의 구속]과 한계(관념과 관행, 제도 등)에 휘둘리는 삶만을 지속한다면 결국 죄가운데서 죽는 것과 같은 결말만 맞이할 뿐이다. 구속과 한계에 갇힌 인간상, 그에 한정되는 자체가 죄인 것이다. 자신의 진정한 근원과 합일하고 온전한 인간인 스스로를 회복할 때에야 진정으로 구속과 한계가 끝나는 것이다. 


"내가 그인 줄을 믿지 아니하면..." 이라는 대목은 '자신이 하나님을 닮은 구조로 지어져 하나님의 부분을 담고 있는 존재라는 것을 깨닫고 내면의 하나님을 잠에서 깨우지 못하면'이라는 말씀인 것이다. 그러면 결국 구속과 한계 속에서 죽게될 뿐이라는 말씀을 하시는 것이다. 


구속과 한계란 게 도대체 뭐냐고 할 이들이 있을 듯하다. 생각해 보면 의문을 갖을 것도 없이 하나님께서 직접 저주와도 같이 선포하신 사람의 죽음이 첫번째일테고 늙고 병드는 것도 생물로써의 구속이다. 중력과 전자기력, 자외선, 물리력 등 으로 대표되는 자연계(물질계)의 힘들로 부터 물질존재로써의 구속을 받고 있다. 그리고 바로 그런 한계들 속에서 속박된 존재(피조물)로써의 구속을 겪고 살아가야 한다. 엘리사 엘리야 예수님까지 레벨차가 있게 보여주신 바와 같이 온전한 인간상을 회복하면 행할 수 있는 것들을 하지 못하는 자체가 구속과 한계 속에 있기 때문이다.


여기까지 보았듯 예수님과 사람들을 창조주의 독생자와 신앙인의 관계로 이분법적으로 대비시킬 것이 아니라 닮아가야하고 따라가야 하며 결국에 완성해야 할 목표가 예수님이라는 관점에서 예수님의 말씀을 받아들이면 그 가르침들이 결코 분해되어 맞추기 어려운 퍼즐 조각이기만 한 것이 아니다. 


하지만 샤카무니 붓다의 가르침은 긴 세월을 거쳐 단계적으로 고난이도로 점진적 진도를 거칠 수 있었다. 그것을 고려한다면 예수님의 짧은 공생활 기간 즉 그의 짧은 생애 만큼 더 짧을 수 밖에 없었던 사역의 기간으로는 대중 모두에게 점진적인 이해력과 지식의 수준을 확장시키며 고수준의 가르침을 모두에게 폭넓게 전하지는 못하셨을 것이다. 제자들과 신도들의 지성과 감성 사교성 등 개성의 차에 따라 각기 다른 수준의 가르침을 펼치셨을 것이 당연하다는 것이다. 붓다께서도 36세인가 부터 80세가 넘으셨나(?)까지 가르침을 펼치면서도 성문 연각 보살이라는 삼승의 가르침을 펼치지 않으셨나? 게다가 밀교와 선불교에 종파도 폭넓은데다 가르침을 담은 경전들의 분류만으로도 가르침이 다각도로 철학적이기도 기복신앙적이기도 했다. 또 명상수행체계이기도 하고 인간 심리에 대해서 가르침하시기도 했다. 짧은 기간의 사역만을 계획하셨던 예수님께서는 단계적으로 제자들의 이해력을 신장시키며 가르침의 난이도를 상승시켜 나갈 수는 없으셨을 것이다. 부처님 보다 더더욱 다각도의 가르침을 각 제자들의 개성(이해력과 논리력, 형이상학적 관념들을 받아들이는 수준 등)에 맞게 다른 가르침의 수준으로 전해 줄 필요가 절실하셨을 것이다. 


그러니 정경과 아포크리파에서 모두 일관된 맥락을 찾으려고 하는 것도 무리인지는 모르겠다. 요한복음은 어쩌면 기복신앙적인 관점을 가지라고 설파한 경전이며 예수님은 보통사람이 절대 결코 이르를 수 없는 이인지도 모른다. 완성할 수 있는 목표가 되기에는 너무도 거룩한 분으로 그저 기도하고 신앙만 해야 하는 분으로 받아들이라고 요한복음을 가르침하셨던 건지도 모를 일이라는 말이다. 다소 비꼬는 투이기도 하고 그런 경향도 아주 약간은 없지 않다. 하지만 실제로 믿고 의지할 대상이 필요한 이들에게 경배의 대상도 있어야만 할 일이다. 


어떠한 형이상학적인 숭고한 가르침을 이해하기 보다는 바쁘고 힘겨운 하루 하루 속에서 무미건조하거나 아픈 마음으로 살아가야 하는 이들도 분명있을 테니까... 그런 시절 그런 상황에 있는 사람들에겐 정말 신앙하며 의지하고 경배할 대상이 필요하니까 말이다. 힘이 되고 위안이 되고 경배와 헌신의 대상이 되어 스스로의 신앙심으로 인해 카타르시스를 느낄 수 있게 해 주는 대상, 생각만 해도 심혼에 감동을 불러일으키는 존재는 아주 길고 긴 세월 마다 한번씩은 존재해줘야 하는 것이 맞을 것이다.


근데 그럴 수도 있지만 예수님이시라면 그렇게 한측으로 치중해 해석될 수 있을 가르침을 펼치시는 상황에서도 해석의 다양성을 안배하셔서 깊이있는 해석이 가능하도록 수준 높은 방식으로 가르침을 펼치셨으리라 여겨진다. 그래서 가르침을 받아들이는 사람에 따라 다른 깨우침을 얻도록 하셨으리라 기대된다. 예수님이라면 그런 기대 해도 될 분이지 않나 싶다.】 

 

 

위에 설명한 바와는 달리 예수님께서 하신 어떤 말씀들은 곧이곧대로만 받아들인다면 “내가 세상에 화평을 주러 왔는지 아느냐 화평이 아니요 나는 검을 쥐어 주러 왔노라 내가 온 것은 사람이... (중략, 이 대목에서는 아주 짧게 가족관계를 나열하신다. 하지만 넓게 보면 ‘사람들 간에’ 라는 말씀이시다)... 불화하게 하려 함이니” 처럼 사회 전복을 노리는 테러리스트의 말로 받아들여질 수 있을 말씀도 있다.

 

이러니 그 시대 유대사회의 주류계층은 가뜩이나 예수님께서 예수님 자신의 가족도 부정하는데다 원수를 사랑하고 핍박하는 자들을 위해 기도하라면서도 당시의 종교와 (유대문화의 종교와 경제를 거의 대등하게 여기는 문화적 특성까지 비난한 것과 같은 관점의) 사회 비판에 맹렬한데다 실제 테러로 이행하기 까지 하는 예수님이 위선적이고 위험한 인물이라 우려되고 심각한 수위의 불안을 갖게 되었을 것이다. 예수님을 따르던 신앙인들이 증가하며 교세가 확장되는 것이 실감되면 될수록 그런 그들의 불안과 우려는 심각한 경계를 넘어서고 있었을 것이다.

 

가까이 깊이 보지 않는 사람들에게는 극단적으로 양가적인 인물로 보이도록 연출하고 계셨던 것이다.

 




→ 이어서 계속됩니다

폭두인가? 현자인가? 살인자인가? 구원자인가? 운명이란 무대에서 휩쓸린 광인인가? 각본까지 써내려간 연출가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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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의 가면 1 : 원시 신화 까치글방 160
조셉 캠벨 지음, 이진구 옮김 / 까치 / 2003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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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는 인류의 보수적 성향, 역사적 요인이면서 동시에 지역적 요인이랄 수 있는 것을 종족적 관념이라 정의했다. 또 인류 전체의 그 보다 더 광대하고 온전한 보편적 공유의식을 근본적 관념이라 정의했다.

 

이런 보편적 공유 의식인 근본적 관념은 역사적 요인과 지역적 요인이랄 수 있을 종족적 관념을 통해서야 구체화 된다고 한다. 저자는 ‘신화는 독립적 이미지들의 연속이 아니라 의미 있는 전체이며 그 안에 현실 세계의 특정한 면이 반영되어 있다’ 고 말한다.

 

이 말은 아마도 ‘근본적 관념은 종족적 관념 속에 반영되고 그를 통해서야 비로소 드러난다’ 는 설명일 수 있다. 각 문명권의 특색 또 각 국, 각 향토만의 관습, 윤리, 예절 등의 전통과 놀이, 예술, 제도 등 문화 전반을 통해서야 근본적 관념이 자신을 변용하며 스스로를 드러낸다는 말일 것이다.

 

그러면서도 저자는 근본적 관념은 종족적 관념을 통해 구체화된다고 말하면서도 인류 공통의 의식인 근본적 관념이라는 것은 한 시대나 특정 지역에 한정된 인류 즉 특정인종이나 특정국가 국민이거나 특정 민족의 독자적인 성향을 초월한다고 주장한다.

 

‘사회로 부터의 “이탈(disengagement)" 을 위해서 봉사’ 하는 상징, ‘지역 전통의 이미지가 전통의 범위를 넘어선 곳에서 분출되는 어떤 충격적 경험을 전달하기 위한 하나의 도구에 불과하다’, ‘무한한 반복의 길을-종종 경멸의 태도를 가지고- 던져버린다’

 

이런 말들은 기존의 사회가 ‘정상적인 삶’ ‘정상적인 태도’ 로 한정한 규정화된 제도와 윤리, 상식 등을 깨는 여정이 샤먼이 걷는 길이라 주장하는 것이다.

 

저자는 초월적 존재에 순종하고 경외하면서 동시에 사회 동화적인 다시 말해 기존 사회의 제도와 윤리를 지지하는 보수적인 존재가 사제(성직자)라는 식의 논리를 펼쳤다. 반면 저자가 또 한층 줄곧 이야기하는 바는 샤먼은 ‘진보적 이탈자’ 라는 것이다. 그로 인하여 기존 사회에서 누구나 관행적으로 맹목적으로 따르던 가치들이 과연 문제없던 것일까 하는 의혹과 시험의 무대가 되는 것이라 한다.

 

 

전세계 누구라도 모를 이가 없을 역사상 가장 대중적인 인지도를 자랑하는 샤먼이라면 예수 그리스도가 있을 것이다. 그의 삶은 사제(성직자)적인 면모도 있었으나 그 누구 보다 샤먼 다웠다.

 

- 샤먼의 정의는 초월적 존재(각 문화권에 속한, 그 문화권에서의 유일신이나 계보를 지닌 신들)와 소통하며 병을 치료하거나 정신적 문제를 해결하고 위안하고 개인적 사회적 대안을 제시하며 이적을 보이고 과거와 미래를 알 수 있거나 그 시간들에 연결되는 이를 말한다. 여기서 예언은 그리 큰 가치를 지닌 그 또는 그녀의 속성도 아니다. 죽음마저도 초월하는 존재이니 말이다. 이러한 샤먼에 대한 정의에 모두 해당하기 때문에 예수 그리스도를 샤먼이라 하는 것이다. -

 

예수님이 보인 이적과 부활은 샤먼의 정의에 완벽히 일치한다. 하지만 그보다 더 주목해야할 측면은 그가 보인 진보적 이탈자 정신이다.

 

예수님은 유대문화에서 태어나 유대사회에서 사역을 하시면서도 유대의 종교와 사회를 정면반박하며 이의 제기를 하던 분이다. 외식하는 자들이라며 유대교 신앙인들을 비판하며 유대인들의 신앙생활 자체에 문제제기를 하셨다. 게다가 유대사회는 분명 성경에도 공정한 되와 공정한 저울이 등장하리만치 또 사후에 천국으로 향하는 심판에서 “너는 얼마나 사업을 공정하게 했느냐?” 라는 질문부터 받는다고 하는 경제를 중시하는 국가였다. 종교만큼이나 경제의 중요성을 높게 여기는 문화권에서 예수님은 “부자가 천국에 가는 것은 낙타가 바늘구멍을 통과하는 것보다 어렵다” 며 부자는 천국에 갈 수 없다고 확언하다시피 하신 분이다. 더더군다나 성전 앞에서 환전하는 환전상의 상을 엎으며 실제적 테러까지 서슴지 않으셨다.

 

이러한 사회 물의를 일으키는 행동들과 예수님을 믿는 교세의 확장이 더해지니, 유대 사회와 유대교 사제들 및 유대교 신앙인들에게 불안을 키웠던 것 같다. 물론 그렇기에 예수님의 죽음이 있을 수 있었던 것이다. 본디오 빌라도가 유대교 사제들과 신앙인 등 유대사회 대다수의 탄원으로 예수님을 죽여야 할 수밖에 없을 때 예수님을 죽이고 싶지 않았던 본디오 빌라도는 유대인 민중에게 둘 중 하나는 살려주겠다며 “밧세바라는 도둑과 예수 중 누굴 풀어주랴?” 고 물었었다. 그런 제안에도 유대인 민중 대다수는 밧세바를 선택했다. 밧세바가 의적이었는지 어떤지는 알지 못한다. 하지만 도둑에게도 밀릴 정도였다면 예수님은 유대민족의 주류에게도 서민층 대다수에게도 받아들여지지는 못하셨던 게 확실한 것이다. 그래서 사망했던 것이다. 그래서 부활할 수 있었던 것이다. 하나님께서 “정녕 죽으리라”고 실락의 날에 아담에게 하셨던 저주가 깨어지라고 있는 저주라는 것을, 사망은 초월할 수 있다는 것을 몸소 증명할 수 있으셨던 것이다. 그리고 그렇게 "다 이루었다" 는 사역 완수의 기회는 외면받고 배신당하고 핍박과 고문을 거쳐 살해 당함으로써 갖을 수 있었던 것이다.

 

기존의 종교집단과 사회의 일상과 상식을 정면 반박하는 과정이, 동시에 하나의 신적 의지와 목적을 완수하는 여정이 되었던 것이다.



 → 이어서 계속됩니다

"정녕 죽으리라" 로 시작되어 "다 이루었다" 에 이르는 고독과 고통의 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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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의 가면 1 : 원시 신화 까치글방 160
조셉 캠벨 지음, 이진구 옮김 / 까치 / 2003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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죠셉 켐벨은 그의 저서 《신의 가면1 원시신화》에서 신화가 주는 의의의 공시적 측면과 통시적 측면 둘 다를 깊이가 남다르게 전하고 있다.

 

한 시대를 살아가는 낱낱의 사람들에게 신화가 어떤 의미인지를 전하고 있으면서 동시에 그것이 인류사적인 측면에서 변화의 양상을 띠며 다가오는 순간마다 획기적인 국면 전환의 요소였음을 일깨우고 있다.

 

그러한 관점을 전하기 위해 수렵부족과 농경민족, 사냥꾼과 농경인, 남성심리와 여성심리, 완고한 마음과 부드러운 마음, 정직한 사냥꾼과 샤먼 등으로 상징들을 대비시켜 이해를 돕고 있다.

 

수렵부족은 남성심리로 완고한 마음을 지니는 정직한 사냥꾼이라 상징화하고 있다. 그 근본적 주제는 성취와 달성에 있다고 한다. 이는 농경민족으로 대변되며 여성심리로써 부드러운 마음이 상징하는 샤먼의 대칭인 것이다. 이들의 주제는 기도 즉 주술을 행하는 것이다.

 

사냥의 세계에서는 남성적 심리가 지배적이라 여성적 원리는 비교적 침묵을 지키며 남성적 덕목과 함께 어떤 유치한 순수성이 우세하게 드러난다고 한다. 농경의 세계에서는 여성의 경험이 지닌 전적인 신비가 드러나며 이것은 처녀의 신비 속에서 비극적이면서도 희극적인 방식으로 구체화된다고 한다.

 

-아마도 ‘처녀의 신비’ 라는 표현은 ‘처녀’ 라는 어휘가 지닌 순결과 순수를 상징하기 위해 쓰인 것은 아닐 것이다. 그 보다는 ‘처녀작’, 처녀비행‘ 의 표현들처럼 신비(일상에서의 경이)를 체험하는 이들에게 첫걸음과도 같을 신선함으로 다가갈 것이기에 더해진 표현이 아닌가 싶다.-

 

저자는 이분법적으로 나눈 이 속성이랄까 역할이 상호작용해야 한다고 말하고 있다.

 

완고한 마음의 소유자는 자기가 속한 지역적 세속적 조건에 애착을 보인다. 그러나 부드러운 마음의 소유자는 시간을 초월한 보편적인 것을 지향한다. 여기서 신화의 변형을 초래하는 자극은 남성과 여성의 상호 작용 및 상호 간의 영적 풍요에서 찾을 수 있다고 한다. 상징은 두 극에 의해서 경험되고 해석되지만 동시에 두 극 사이의 적대적 협력(antagonistic cooperation)을 이루어 낸다고 저자는 말한다.

 

그러나 저자는 이러한 대칭의 중재나 통합만이 신화의 경험과 해석일 수 없다고 주장하는 듯하다. 그런 투의 전개가 이 저작 전체를 꿰뚫으며 거듭 반복되니 말이다.

 

샤먼이 걷는 ‘고통의 길’ 은 ‘마르가’라고 하며 ‘심리학적 변형의 길’ 이라고 한다. 샤먼은 이 여정을 통해 ‘영적인 죽음과 부활’ 을 거치며 ‘개인적 경험의 지평이 확장되고 깨달음의 깊이가 심화’ 된다.

 

샤먼은 정신 그 자체의 신비와 접촉하여 영혼과 그 세계에 관한 지혜를 얻는다고 한다. 그리고 샤먼이 가는 ‘고통의 길’과 ‘그 길을 통해 얻는 지혜’가 ‘과거에 안주하여 창조성을 상실한 사회를 새로운 깨달음의 영역과 깊이로 인도한다’는 것이다.

 

부드러운 마음을 소유한 자들의 ‘영적 위기와 깨달음’ 속에서는 ‘비역사적 요인이 지배적 역할’ 을 한다고 한다. 그들에게는 ‘지역 전통의 이미지’가 그 전통의 범위를 넘어선 곳에서 분출되는 ‘어떤 충격적 경험을 전달하기 위한 하나의 도구’ 에 불과하단다.

 

다시 말하면 관습이나 관행, 윤리나 제도, 상식 등 사회 구조를 이루는 견고함에 균열을 일게 할 수 있다는 것이다.

 

게다가 이러한 샤먼은 성직자들과 같이 ‘사회의 보수적 측면을 대변’ 하며 초월적 존재에 대한 ‘순종과 경외의 태도’ 를 보이지 않는다. ‘자기 충족적이며 비타협적인 태도’를 지닌다고 한다. ‘신의 분노에도 개의치 않는 바벨탑의 건설자’ 라 저자는 정의하고 있다.

 

‘바벨탑의 건설자’ 라는 것은 신에게 저항하고 아니 저항하는데 그치는 것만이 아닐 것이다. 그것을 너머 신에게 의존함으로써 자기 존재의 가치를 찾는 것이 아니라 나의 가치는 나 스스로 쌓아올리고 스스로 검증하겠다는 것이 아닐까? 신은 그에게 굴종의 대상이 아니라 타협과 협상, 회유의 대상 정도일 것이다.

 

저자가 샤먼의 이런 독립성, 독자성, 일탈성 즉 진보적 이탈 성향만을 두둔하고 지지하느냐면 또 그건 아니다. 그와 동시에 집단의식이랄까 보수성향이랄까가 하는 제 역할의 중요성을 상당 부분 인정하고 있다.



→ 이어서 계속됩니다

사냥꾼들의 세상에서 `마르가`를 거치며 드러나는 `처녀의 신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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