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나 - 내 인생의 셀프 심리학
캐럴 피어슨 지음, 류시화 옮김 / 연금술사 / 2020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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류시화님이 옮긴 [나는 나]라는 저작의 원제는 [The Hero Within]으로 저자 캐럴 피어슨님은 칼융의 원형 이론 연구에 평생을 바친 분이라고 한다. 심층심리학자이자 상담가이기도 한 캐럴 피어슨님은 처음엔 대학에서 영문학을 전공했었다고 하는데 그래서 그런지 [나는 나] 안에는 많은 문학들이 예로 제시되고 있다.




위의 사진에 제시된 6가지 원형을 주축으로 원형들의 영향력과 또 그로 인한 장애까지도 아우르고 있다. 우리들이 정체되고 있다거나 삶에 버거워 하고 있을 때 하나의 원형의 영향력에 압도되고 있을 수 있으며 그로 인한 장애들이 나타날 수 있다고 한다. 그것을 자각할 때가 우리가 영웅 여행의 여정을 시작할 수 있을 때라고 저자는 말하고 있다. 자기실현이라는 표현은 이 책에서는 등장하고 있지 않지만 칼 융이 말하는 자기 실현의 과정과 영향력에 대해 주목하고 있는 서이다. 


저자가 말하는 영웅은 우리 개개인을 말하는 것으로 우리 모두가 영웅 여행의 여정 속에 놓여 있다는 것이 저자가 하고자 하는 말이다. 그 여정 중에 [나는 나]라고 하는 본서는 하나의 지도 역할을 해주는 저작이라고 할 수 있다. 저자는 우리가 자각하던 자각하지 못하던 모두가 영웅 여정에 들어서 있으며 그것을 자각하기 전에는 우리는 예전과 비슷한 환경 비슷한 문제 비슷한 장애들에 거듭 노출될 수 있다고 말하고 있다. 


이 여정을 순조롭게 마치기 위해서는 우리를 압도하고 있는 원형이 무엇인지를 자각하고 그 장악되고 있는 상황을 다른 원형을 활성화시키며 벗어나야 한다고 일러주고 있다. 그러는 과정 중 우리는 다른 이들이 걷듯 영웅 여정을 걷지만 다른 이와는 다른 독자적인 영웅이 된다고 말한다. 그래서 이 책의 한국어 제목이 [나는 나]인 것이 아닐까 싶다. 다른 이들과 함께 영웅이 되지만 다른 이와는 차별되는 나만의 나로서 자기를 실현하게 되니까 말이다. 


영웅 여정은 한 순간에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평생을 거치며 완성되어 가는 것이라고 한다. 그 과정에 우리가 마법적인 영향력을 획득하게 되면 자연스레 세계에 사회에 도움을 펼치게 되는데 그것을 결코 혼자만의 성취로서가 아니라 서로가 완성시켜 나아가야 하는 과정이라고 말하고 있다. 


칼 융의 저작들은 많이 접해 보았으나 그 깊이 만큼이나 헤아리기 어려운 칼 융의 분석심리학의 정수를 캐럴 피어슨님은 여섯가지의 원형을 상징적으로 들어 이해하기 쉽게 풀어내고 있다. 여섯가지의 상징적 원형이기 때문에 누구라도 자신의 현재를 지배하고 있는 원형과 과거 자신이 어떠한 원형에 장악되어 살아온 것인지 쉽게 자각할 수 있다. 그리고 그 난관을 어떻게 풀어내며 영웅 여행을 시작하거나 풀어가야 할지를 짐작할 수 있다. 


영웅 여행이라고 하여 독보적인 인물의 생을 살아가야 함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라 누구나가 자신의 삶에서 영웅의 길을 걸어가고 있는 것임을 수긍하기 쉽게 이해하기 쉽게 풀어내 주는 저자의 필력이 예사롭지 않다. 저자는 대중들이 손쉽게 이해할 수 있을 문학의 예들을 들어 영웅 여정을 설명하고 있기도 하다. 그래서 분명 쉽지 않은 분석심리학을 소설을 읽듯 쉽게 이해하도록 돕고 있다. 


자신의 삶이 장애에 막혀있다거나 삶의 기로에 있다고 여기는 많은 이들에게 이 책은 하나의 지도를 선사하는 역할을 할 수 있을 듯하다. 소설처럼 쉽게 넘기면서 풀어내기 쉽지 않을 자신의 이야기들에 길이 보이기 시작함을 다른 분들도 느낄 수 있을 것이다. 허나 분명 지도는 주어졌으나 걸어가야 하는 건 자신의 다리로 자신이 해나가야 함도 잊어선 안될 일이라고 생각한다. 책을 읽고 추천한다는 말은 몇해에 한번 할까 말까 한데 이번도 그 예외일 수 있을 것 같다. 자신의 삶의 길 위에서 방황하고 있는 모두에게 망설이고 있는 모두에게 이 책을 강력히 추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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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유럽 신화 - 바이킹의 신들 현대지성 클래식 5
케빈 크로슬리-홀런드 지음, 서미석 옮김 / 현대지성 / 2016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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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중반부까지의 내용과 일관성 있게 단지 싫어서 기분 나빠서 서로서로 죽이는 내용들이 이어진다. 노래나 비가 등의 제목이 이어지는 내용은 상식과 훈계이지만 그걸 제외한 대부분의 내용이 살인과 파괴, 사기, 저주인 내용들이 중후반부의 내용이다.


기대했던 라그나로크는 모든 신들과 인간들과 죽은 자들 마저 일어나 싸우는 개념잡기 힘든 전쟁이다. 얘네는 전쟁의 이유도 없다. (신들과 거인들 중에는 예언능력이 있는 이들이 있어 최후의 전쟁이 라그나로크라는 것을 다들 알고 있고 누가 누구에게 어떻게 죽는지 까지도 알고 있다. 피치 못해 일어나는 전쟁이 아니라 예언을 완수하는 전쟁이 라그나로크인 것이다.) 라그나로크니까 그냥 전쟁하고 있는 것이다. 전쟁에 참여했던 대부분이 죽고 오딘 토르 로키할 것 없이 다 죽는다. 이후 살아남은 극소수의 존재들과 다시 살아나는 자 몇몇이 남고 세계는 바다에서 땅이 일어나며 한번도 개간된 적 없는 땅에 농작물과 자연이 살아난다는 내용이다.


세계는 다시 궁전들이 솟아나고 저택들이 솟아나 새로운 시작이 일어난다지만... 32장 라그나로크를 읽은 감상은 이 정도의 살육과 파괴라면 핵전쟁 규모의 종말이라고 할 수 밖에 없다고 생각되었다. 신들의 세계와 인간세계, 거인들의 세계와 난쟁이의 세계와 꼬마요정들의 세계, 죽음의 세계들도 모두 붕괴되었다가 다시 솟아난다는 것이 핵전쟁 이후에 다시 재건하게 되는 세계상을 그려주는 것만 같았다.


인도 신화에서는 우주적 차원의 겨울에 비슈누신의 10번째 아바타 칼키가 현현하여 인류를 지켜준다고 한다. 이 대목에서 주목하게 되는 건 칼키라는 이 10번째 화신은 이제까지의 비슈누신의 아바타들과는 다르게 한명이 아니라 다수로 현현한다는 것이다. 결국 종말론적인 세상이라하더라도 다수가 이해와 의지를 함께 하고 행동한다면 변화시킬 수 있다는 은유 같았다. 이런 긍정적인 감상을 갖게할 해석을 갖고 싶어서 종말을 그린다는 라그나로크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그런데, 북유럽 신화 속 라그나로크는 너무도 단순하게 모든 것이 종말을 맞이하여도 운좋게 살아남은 이들이 새로운 시대를 살아가겠지 하며 약올리는 투라 이 신화를 어찌 받아들여야 할지 모르겠다.


하지만 종말이라도 그것은 새로운 시작을 맞이하기 위한 하나의 흐름이고 살아남은 존재들은 다시금 봄을 맞이하리라는 신화였다고 받아들여야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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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01-14 00:25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9-01-14 09:41   URL
비밀 댓글입니다.
 
북유럽 신화 - 바이킹의 신들 현대지성 클래식 5
케빈 크로슬리-홀런드 지음, 서미석 옮김 / 현대지성 / 2016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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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화는 시와 더불어 좋아라 하는 장르다 보니 관심어린 저작이었습니다.

신화 속 세계와 인물과 성스러운 무기 및 도구와 사건들... 각 상징체계가 그리려하는 것들에 흥미를 느끼다 보니 한차례의 서평으로 끝내지 못할듯 합니다. 연재서평이 될 것 같군요. 앞으로 적어도 한번은 더 리뷰를 남길듯 합니다.


본서의 저자는 이 저작을 완성하려 여러 전승의 신화집을 참고하며 각 에피소드들의 지명과 인물 묘사와 각 인물들의 대사에 완성도를 높였다고 자부하고 있습니다. 그러다 보니 신화의 이야기 자체가 아마도 전승되어오던 옛신화집들 보다 구성에서 나름 치밀하게 전개하지 않았을까 싶습니다. 물론 기존 전승되어온 신화집 원전을 읽어보진 못한터라 단정지을 수는 없겠지요. 그래도 저자가 나름 이야기꾼인듯 합니다. 제법 술술 읽히는데다가 신화가 원래 재밌다는걸 고려한다해도 몰입도가 나름 상당한 저작물입니다.


신화는 전체 32 에피소드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게다가 마지막엔 용어집이 있어서 신화를 읽다가 신명, 인명, 무기와 도구, 지명까지 참고 가능합니다. 무엇보다 북유럽 신화의 32 에피소드를 시작하기 전 '서론'이라며 '북유럽의 세계, 우주론, 신들, 출전, 신화의 문학적 구조, 신화에 대한 접근' 까지 6분류로 북유럽 신화에 다가서기 쉽게 설명해 주고 있습니다. 북유럽 신화의 세계관, 신화 속 신들의 속성, 그러한 신화를 구조화한 유럽인들의 인간관, 세계관, 우주관을 엿볼 수 있습니다. 


북유럽 신화를 읽으며 가장 주목되던 것은 유럽인들의 기질적 잔인성이었습니다. 1~10장까지의 단지 10개의 에피소드만을 읽고나서 느낀 것도 내면 깊숙히 이런 속성을 드러내는 인간들이 전세계적으로 영향력을 행사하던 시대를 맞이해야 했기에 인류가 그토록 암흑어린 시절을 보낸 것이구나 싶었습니다. 두차례의 세계대전과 홀로코스트가 예견된 것이었구나 하고 말입니다.


저자도 서론에서 이미 언급했듯이, 북유럽 신화에서 이야기 전개의 동인은 증오입니다. 무슨 분노바이러스라도 감염된 신들인건지 오딘 삼형제 신들이 세계를 창조하게 된 동인 또한 증오입니다. 단지 최초의 존재인 거인 이미르와 그의 후손들인 서리 거인들 인구가 많아지는 것을 싫어하던 마음이 증오로 확장되어 오딘 삼형제 신들이 최초 거인 이미르를 죽이고 해체하여 세계를 완성합니다.


더구나 에시르 신들의 거주처 아스가르드에 마녀 굴베이그가 찾아왔을 때 오딘을 비롯한 에시르 신들이 그녀를 난자하고 불 속에 던져넣은 이유는 기가 막힙니다. 그저 그녀가 황금을 좋아하며 탐욕스러운게 혐오스러웠다는 이유 하나 때문입니다. 물론 그들의 편협하고 잔혹한 면이 있었기에 굴베이그가 재생이랄까 회복이랄까의 이적을 보일 기회를 얻는 것이고 에시르 신들과 바니르 신들 간의 최초의 전쟁이 발발하는 원인이 되는 것입니다. 이야기가 전개되기에는 필수적인 요소였던지 모릅니다. 하지만 이런 깊은 증오를 보여주는 인물들, 분노를 통제 못하는 것이 신화로 까지 전승되리만치 내적 동인으로 인식되는 내면을 가진 인간들이 백인들입니다. 백인문화가 역사적으로 세계를 선도하는 상황은 오래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세계대전과 홀로코스트가 거듭될 것만 같으니까요.


서론에서 저자가 밝혔듯 북유럽인들의 원류인 바이킹은 덴마크, 노르웨이, 스웨덴에서만 정착했던 것이 아닙니다. 스칸디나비아 반도를 가득 채우자 영국과 프랑스, 이탈리아, 발트해 연안, 키예프, 흑해, 카스피해 까지 급격히 확장했으며 유적 발굴로는 서기 1000 년 즈음에는 현재의 뉴펀들랜드 지역 까지 확장했다고 합니다. 현지에서 그들의 흔적이 발굴되었다고 하는군요. 저자의 말로는 이건 콜럼버스가 아메리카 신대륙을 발견하기 500년 전이라고 하네요. 그럼, 명나라 정화 원정대가 미대륙을 발견하기 보다도 한 420 여 년 정도 앞선 모양입니다. 


이렇게 유럽 전체를 넘어선 확장세를 보이던 바이킹들의 속성을 유럽인들이 보이지 않을 수 없겠지요. 그들에게 바이킹의 유전자가 두루 남아있을테니 말입니다. 위에서도 언급한 신들의 세계 창조도 신들의 최초 전쟁도 증오 때문에 생겨났습니다. 게다가 최초 전쟁 후 평화협정 처럼 에시르 신족과 바니르 신족은 서로 지도자를 교환했다고 합니다. 그런데 바니르 신족은 자신들은 탁월한 지도자를 보냈음에도 에시르 신들 측이 보낸 지도자 중 허우대 멀쩡한 신 호니르가 함께 온 현자 신 미미르가 없을 때는 발언을 얼버무리기만 한다고 자신들이 손해본 것 같다며 분노에 차서 그 허우대 멀쩡한 신 호니르도 아니라 현자 신 미미르를 죽입니다. 그리고는 머리를 잘라서 에시르 신들의 지도자 오딘에게 보내지요. 분노조절장애에 극단적 폭력주의의 기원이 북유럽 신들이었습니다. 분노조절장애, 극단적 폭력주의를 신들 마저 속성 마냥 지니고 있다는 문화입니다.


또 그리스 신화의 넥타 처럼 신주神酒라는 신들의 음료가 만들어진 경로는 섬찟하기 이를데 없습니다. 지적인 인간 '크바시르'(신인지 인간인지 모르겠더군요. ep.2 신들간의 전쟁 이야기에서는 바니르 신족이 에시르 신족에게로 보낸 지도자 신들 중 현자로 등장하는 이름입니다)가 지혜롭다는 평판에 시기심을 느낀 난쟁이들이 그를 속여서 초대하고는 죽여서 그의 피로 술을 담근 것이 한번만 마셔도 시인이자 현인이 된다는 신주라는 음료입니다. 게다가 이 신주를 오딘이 마시게 되기까지의 과도기상에서 주퉁이라는 거인을 거치게 되는데 주퉁에게 오게 된 과정도 잔인하기 이를데 없습니다. 현자 '크바시르'로 술을 담갔다는 그 난쟁이들이 거인 길링 부부를 초대해 대접하다가 말다툼을 하게 되었다고 합니다. 근데 앙심을 품고 증오가 가득차자 길링에게 바다로 가서 바람이나 쐬자면서 배로 유인하여 바다에 빠트려 죽입니다. 그리고는 부인에게는 남편이 사고로 바다에 빠져 죽었다며 거짓말을 하고는 보복방지 차원에서 맷돌을 그녀의 머리 위로 떨어뜨려 죽입니다. 이 길링 부부가 주퉁의 부모인데 복수하러 온 주퉁에게 신주를 건네주는 것으로 복수를 퉁친 것입니다. 


그리고 ep.3 아스가르드 성벽 재건에 대해 전개되며 이들의 증오와 잔혹함이 또한번 빛을 발합니다. ep.2의 신족 간 최초전쟁으로 붕괴된 성벽을, 재건해 주겠다며 찾아온 한 이방인이 있었습니다. 단기간 내에 성벽 재건을 해 주겠다고 장담하자 에시르 신들의 지도자 오딘은 그가 목적하는 바가 무언지 묻습니다. 그 이방인은 물적 인적 지원 하나 없이 성벽을 재건하는 조건으로 아름다운 여신 프레이야를 요구합니다. 하지만 신들은 그의 요구를 과하다고 여깁니다. 그래서 거절하려 하는데 얍쌉한 신 로키가 묘안을 내놓습니다. 그가 제시한 기간 보다도 훨씬 더 짧은 기간 내에 성벽을 모두 재건하면 프레이야를 주겠다고 하라는 거였습니다. 도저히 누구도 가능하지 않은 기간을 제안하는데도 그가 받아들이면 그는 결국 프레이야를 향한 욕심으로 힘들게 성벽을 재건하려 노동만하게 될 것이라고 말입니다. 성벽을 완전히 재건 하지 못하고 시일은 지날 것이고 그래서 그에게 프레이야를 주지 않으면서 성벽은 절반이라도 재건하게 될 거라고 말입니다. 그의 말대로 그 이방인은 신들이 제시하는 단기간을 받아들였습니다. 단지 자신의 말 '스바딜파리'만 이용하게 해달라는 조건으로 말입니다. 여기서 이 힘 좋은 명마가 암석을 옮겨주어 성벽이 약속기한에 맞춰 다 재건되어 갈 듯하자 신들은 그 이방인의 명마 스바딜파리를 꾀어 내려 묘안을 씁니다만 이건 본서에서 확인하세요^^*


이 에시르 신들의 농간으로 자신의 말이 암석을 나르지 못해서 기한 내에 성벽 재건을 완료하지 못할 것을 알게 된 그 이방인이 격분하여 본래 자신의 모습을 드러냈을 때를 주목하라 하고 싶었습니다. 그 이방인은 격분하여 변신이 풀렸는데 알고 보니 바위거인이었습니다. 그가 본모습을 드러내자 그저 사랑에 빠져 어떻게든 사랑하는 여신과 함께이고 싶었을뿐인 이 가련한 거인은 토르의 망치 묠니르에 무참히 짖이겨져서 살해 당하고 맙니다. 단지 거인이라는 이유 때문에 죽여 버리는 것입니다. 애초에도 세계를 창조한 것이 "난 거인들이 싫어!" 이러다가 증오로 변해 죽이고 난도질하고 토막을 쳐서 세계를 창조했다지 않았습니까? 얘네들 전부 인종차별주의자들인 겁니다. 이런 문화니까 우생학이니 하면서 홀로코스트가 등장하고 고작 십여년 전까지도 인종청소니 하는 말이 기사화 되었던 거 아닙니까?


신화가 기승전증오 기승전잔인 입니다. 분노조절장애 , 극단적 폭력주의, 인종차별, 계층화해서 차별하기, 집단 이기주의, 사기, 기만 등이 이들 문화의 근간입니다.


그러게 대외적으로 신사로 알려진 영국인들의 진면목이 드러나는 것이 축구 때문에 폭력집단으로 변모해 버리는 훌리건 사태 아닌가요? 페르조나는 젠틀맨인데 실상은 훌리건인 것이 영국 남자니까요.


그리고 간략히 제게 인상 깊었던 상징들을 몇가지 전하자면...


ep.4 오딘이 지혜를 (여기서는 마법이라고 하지만) 얻으려 자신의 한쪽 눈을 희생하고 거꾸로 매달려 아흐레를 보내야 했다는 것은 지적인 성취던 무엇이던 어떠한 의미있는 성취에는 반드시 댓가가 따른다는 걸 상징하려 한듯합니다. 물론 다른이의 탁월한 재능을 인정해 주는 내적 자원으로는 나쁠 것 없겠지만 이 이야기는 세상은 다 타고나는대로 사는 거란 걸 간과하고 있습니다. 애초에 북유럽 신화 속 그들은 날 때 부터 신이라는 자체를 간과하고 있지 않습니까?


물론 ep.4에서 오딘이 노래하는 첫번째 마법이 "도움으로 슬픔에 위안을 주고 고통을 덜어 주고 아픈 상처를 치유해 주는 것이다"라는 주문은 깊은 의미가 있는 듯 합니다. 유럽인도 인류 누구도 공감 받고 싶다는 바램과 공감해 주는 것이 누군가를 도우려면 가장 먼저 전제되어야 한다는 깊은 이해가 있었던 것이니까요. 열여덟번째, "너 자신과 너만이 알고 있는 진실이 항상 제일 강한 것이지"라는 마지막 주문은 신화에 깊이를 더해 주는 듯 했습니다. 자신을 깨닫고 회복하고 완성하고 그러한 삶 속에서 자신이 찾는 의미가 바로 오딘이 노래한 '너만이 알고 있는 진실'이 아닌가 싶습니다. 

열여섯번째와 열일곱번째 마법이 '내가 원하는 어떤 여성이던 나에게 매료되게 할 수 있다'는 것과 '나를 좋아하던 여성이 언제든 내가 원할 때 나에게서 떠나게 할 수 있다'는 것은 나름 위트가 느껴졌습니다. 부모님 여행가셨다며 여친이 자취방에 찾아와 돌아가지 않는 감사한 날들에도 " 제발 공성전 할 때 만큼은 돌아가 주면 안되겠니?" 하는 심정을 겪어본 적 있는 남자들이라면 다들 공감할 마법일테지요. -참고로 저는 그런 날들에도 게임을 멈추지 않았습니다. 다만, 게임이 초능력자 게임으로 변할 뿐이었죠. "지진을 부르는 자!" "홍수를 부르는 자!" "블랙아웃을 부르는 자!" 걍 웃자고 한 이야기니 진지흡입하지 마세요-


그외에는 ep.1에서 태초에 남쪽 무스펠은 불꽃의 세계이며 그곳은 '주르트'(Surt, Black)만이 견딜 수 있는 지역이라고 합니다. 북쪽 니플하임은 얼음으로 가득찬 광활한 눈더미로 덮힌 지역이고요. 여기서 우선 주목 되던 것은  방위의 상징이 나름 동양의 방위와 오행의 상징과 유사하다는 것이었습니다. 동양 방위와 오행으로 南火 北水 (그외 東木 西金 中土) 로 남쪽인 무스펠은 불꽃으로 타오르는 곳인 것이나 북쪽인 니플하임은 얼음과 눈으로 가득하고 흐베르젤미르 라는 샘이 열한개의 지류로 흘러갑니다. 동양의 방위 상징과 일맥상통하지 않나요? 

게다가 성경과도 통합니다. [...흑암이 깊음 위에 있고 하나님의 신이 수면에 운행하시니라 창 1:2] 북유럽 신화에서 물론 남쪽은 불꽃의 세계지만 그곳에 거주자는 '주르트'란 이름으로 검정(Black)을 상징한다는군요. 흑암 즉, 어두움을 상징하는 색이 검정색이죠. 이렇듯 창세기의 상징 흑암과 물이 북유럽 신화에서 등장하지 않는게 아닙니다. 이미 북유럽의 신들이 세계를 창조한 이야기는 언급했었습니다. 그러니 인간을 창조한 상징을 보자면 북유럽 신화에서는 인간이 죽은 나무에서 시작되었다는군요. 오딘 삼형제가 죽은 나무를 보고 들어올려 물푸레나무로는 남자인 아스크(Ask)를, 느릅나무로는 여자인 엠블라(Embla)를 창조했다고 합니다. 여기서 조금 더 나가보자면 물푸레나무가 북유럽 신화에서 상징하는 것을 보면 세계 여러신화에서 상징하는 세계의 축인 세계수世界樹 ... 영원을 상징한다는 나무인 이그드라실이 물푸레 나무라는 것입니다. 북유럽 신화의 모든 세계를 지탱하는 나무이며 최후의 전쟁 라그나로크에서도 살아남을 나무라고 하는 그 나무가 물푸레 나무입니다. 그렇다면 사람은 그 자신이며 동시에 세계를 즉, 존재적 차원 전체를 지탱하면서, 찰나를 살다가지만 영원 속에 남을 존재임을 상징하려 사람이 물푸레 나무로 만들어졌다고 한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리고 그 물푸레 나무가 애초에 죽은 나무였다는 것은 또한번의 상징적 비아냥인 것이겠지요. 느릅 나무의 상징은 나 몰라라하며 스킵~


ep.6에서 등장하는 크바시르는 아홉세계의 모든 일과 불가사의를 꿰뚫는 통찰력을 지녔다고 하는 현자입니다. 헌데 그의 근원을 보면 최초의 신들의 전쟁 후 에시르 신들과 바니르 신들이 평화협정을 체결하며 단지에 침을 뱉어 우호관계의 증거를 삼았다고 하는데 그 단지의 침으로 에시르 신들이 만든 사람이 바로 '크바시르'라는군요. 이건 북유럽 신화 속 위트 같습니다. 인간의 지성이라는 것, 지혜라는 것은 그리고 지성인이라는 것은 그저 뱉어논 침과 다를 바 없다는 풍자가 아닌가 합니다. 그럼에도 그 침으로 만든 현자 크바시르를 모두들 부러워하고 난쟁이들은 시기하여 그를 죽여서 그의 피로 신주神酒를 만들죠. 그 음료는 누구든 한모금만 마셔도 시인이 되고 현자가 된다고 합니다. 

-시인은 주퉁의 형제이면서 신주를 지키던 바우기의 입을 빌려 언급되었듯 북유럽인들이 제일 고상한 직업이라고 생각하던 직종입니다-

신주의 효험을 알게된 이들은 다 탐을 냈습니다. 게다가 오딘은 미남계를 이용해 주퉁의 딸 군로드와 다정히 보낸 후 그녀를 기만해 신주를 마실 기회를 얻자 단한모금도 남기지 않고 다 마셨을 만큼 신주는 욕망의 대상이었습니다. 아마도 오딘이 한모금도 안남긴 이유는 다른 이도 그것을 마시고 먼저 마신 자신만큼 총명해질 것이 두려워서였을 것입니다. 하긴 뭐, 그것도 나름 술이니까 처음 술을 마시던 것은 오딘이었다해도 마시다 보니 술이 오딘을 마신건지도 모르겠군요.


ep.8에서 여신 이둔이 그녀의 황금사과... 신들의 청춘을 지탱하는 황금사과와 함께 납치되자 아스가르드의 모든 신들이 늙어 갔습니다. 그때 아스가르드에 있는 여신이기는 하지만 신들의 최초 전쟁 후 평화를 협정하며 공존의 증거로 지도자를 교환할 때 아스가르드로 온 바니르 신족인 프레이야도 늙어갔습니다. 아스가르드 최고의 미모를 자랑하는 프레이야 니까 에시르 신족에서도 그녀만한 미모가 없다는 거 아닙니까? 에시르 신족과 바니르 신족 통합 최고 미녀 여신인 그녀도 늙어가자 로키가 그녀를 조롱하기까지 합니다. 아마도 신화집 원전에서도 늙어가는 신들을 무력하고 허탈하게 묘사한 모양입니다. 그것이 북유럽 신화가 하나하나 만들어져 가던 시기, 북유럽인들이 가진 늙는다는 것에 대한 선입견이었던 모양입니다.


ep.9에서 풍요의 바다 신 뇨르드와 스키의 여신 스카디의 결혼 생활은 남녀란 너무 다를 수 있다고 말해 주는듯 했습니다. 이 다름을 받아들이고 자기만의 시간을 갖는 여유가, 다르다는건 극복해야 할 대상이라면서 반드시 해결하겠다고 바둥거리는 것 보다는 나은 혜안이라는 북유럽식 부부 상담 닮은 에피소드였습니다.


그리스 신화도 그렇고 북유럽 신화도 그렇고 유럽신들은 대체로 다혈질에 감정몰입이 뛰어난 배우들 같은 느낌입니다. 무엇보다 수퍼히어로 영화 「토르」에서의 안소니 홉킨스 님이 연기한 오딘과 북유럽 신화 속 오딘은 너무도 다른 이미지 입니다. 연륜과 덕망을 갖춘 지혜로운 전사이자 왕의 이미지가 안소니 홉킨스님이 연기한 오딘이었다면, 북유럽 신화 속 오딘은 한국영화 속 조폭의 보스만도 못한 이미지입니다. 그냥 넘버3 정도 지위의 행동대장 느낌이나 드는데 북유럽에서는 신들의 지도자더군요. '액션러닝'이란 게 있던데 그것도 그렇고 유럽식은 우선 행동하면서 생각하며 답을 찾는 지도자상이 이상적이라 여기는 듯 합니다. 도덕적으로나 실리 차원으로나 빈틈없는 완벽주의자인 이상 속에서나 가능한 지도자만을 꿈꾸는 한국인들이 바램하는 지도자상 보다 훨씬 더 현실성 있는듯 합니다. 하긴 구약성경에서의 하나님상도 질투하고 분노하고 처벌하고 시험하고 환난과 재앙을 주시는 존재가 아닙니까? 물론 자신을 믿고 따르는 이에게는 관대하시며 죄를 면하게 해주시기도 하고 축복하시고 자신이 선택한 이는 아무리 못났어도 함께하는 분이시기는 합니다. 다만 앞서 이야기했듯 시험과 환난과 재앙이 도를 지나치게 넘어설 때가 있는 분이라는게 함정입니다. 무자비하고 잔인하기 이를데 없을 때가 있는 분이니까 말입니다. 기독교인이라면 [하나님은 사랑이시다]는 요한일서 말씀 만큼이나 하나님께서 보이신 역사에서도 양가적인 면을 본적이 있을 것입니다. 이런 면을 고려한다면 '사람에게서 양가적인 모습이 보인다고 그를 쉽게 부정적으로만 단정지어서는 안될 일이구나' 정도의 삶과 사람에 대한 해석의 폭은 지니고 살아가야 할 일입니다.


북유럽 신화 속 신들을 보며 이 시대를 대응하는 방식을 알게 해 줄 해석의 깊이를 가져보고 싶었습니다. 그런데 여기까지는 처세와 이해의 폭 정도 넓힐 수 있었을 뿐입니다. '그냥 이 순간에 잘 대처하면 된다' 정도로는 시대에 대한 대응으로 부족할듯 싶으니까 더더욱 라그나로크에서의 신들의 대응이 기대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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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yrus 2017-10-23 19:3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서양 판타지에 흥미를 느끼고 싶으면 북유럽 신화를 먼저 읽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

이하라 2017-10-23 19:44   좋아요 0 | URL
네, 그리스로마신화랑은 다른 단순미가 있더군요^^
 
융의 분석심리학과 신화
Steven F. Walker 지음, 장미경 외 옮김 / 시그마프레스 / 2012년 10월
평점 :
절판


"나는 공산주의에 대해 전혀 두렵지 않다. 나는 무의식과 현대과학이 두렵다" - 칼 융


조목조목 신화를 대조하며 분석심리학적 툴로 해석하는 방식을 가르침하는 자상한 책을 기대했다. 신화의 구조와 유형에 대한 관심으로 분석심리학과 융 그리고 신화가 동시에 언급된 도서들에 목말라했었는데 코냑을 기대하다가 맥주 한 캔에 퉁친 샘이 되었다. 그렇다고 이 책이 악평을 유발하는 정도의 저작물은 아니다. 분석심리학의 기본툴들을 아우르고는 있다. 다만 상세한 신화와 그 원형상들과의 관계와 해석이 간소하다는 것뿐이다.


이 책에 실망했다기엔 오히려 융 학파의 신화 해석에서의 갈등 내지는 충돌 사이에서 어떻게 분석심리학이 발전해 왔는지를 짚어주기도 하며 칼 융 박사가 남성으로서 한계를 느꼈을 여성이 보는 아니무스에 대해 융 학파의 여성학자들이 선전한 내용들이나. 학계의 다양한 업적이 발전해온 과정들을 간략히 소개하고 있기도 하다. 


다만 나의 독서 목적이 분석심리학적 툴로 신화를 해석하는 방식을 좀 더 깊이 있고 폭넓게 아우르는 가르침을 얻고 싶어서였다는 게 함정이었던 것 같다. 어쨌건 신화 관련 다음 도서는 이창재님의 『신화와 정신분석』을 읽으려 하는데 이건 목차를 보니 기대를 배반하지 않을 저작이라는 확신이 드는 키워드들이다. 


그래도 이 책을 읽으며 든 짧은 생각 하나는 세상이 위기와 불안으로 가득 찰 때 그에 대한 보상의 차원에서 신화적 원형상들이 드러난다고 본서에서는 이야기하는데 현재의 세계가 점점 위기와 불안이 팽배해지고 있는 국면이다 보니 《진격의 거인》 《2012》 《월드 워 Z》 《나는 전설이다》 《부산행》 《판도라》 같은 유형의 영화들과 수퍼히어로물 영화들이 이 시대의 위기와 불안에 공명하는 집단무의식이 드러낸 신화적 원형상들을 닮아 있는 것만 같고... 사람들의 위기감과 불안심리를 통해 분석심리학을 역이용하고 있는 통합적 세력이 있는 것은 아닌지 하는 의구심마저 드는 지경이다. 사실 의구심이 아니라 확신에 차있긴하지만... 공산주의니 자본주의니 하는 체제가 두려움의 근원일 수 없고 이런 체제들을 강력하게 이용할 수 있는 사람 이런 체제의 첨단 위에서 세상을 조망하고 운영할 수 있는 사람 그런 사람들의 무의식이 두렵고 현대과학이 그 두려움을 공포로 가져다줄 수도 있는 시대다. 그렇다 보니 무력감을 못이길 때가 더러 있는 게 아닌가 싶다. 그래도 그건 풀어나가라고 있는 문제들일 텐데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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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의 가면 1 : 원시 신화 까치글방 160
조셉 캠벨 지음, 이진구 옮김 / 까치 / 2003년 1월
평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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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까지 예수님의 사역과 수난과 죽음과 부활을 조지프 캠벨님의 저작 《신의 가면 1 원시신화》로 돌아 보았다. 

그의 주장으로는 샤먼은 온화한 마음이 속성이라지만 세계와 우주의 변화를 가져오는 자이며 진정한 자신을 깨닫기 위해 자아가 발가벗겨지는 상황에 긴 시간 놓인다고 한다. 길고 긴 시련의 길을 걸어야 하며 그 속에서 자발적이면서도 강제적으로 엄청난 고독을 감당해내야 하는 존재다. 비극이 고통에서 환희로 바뀌는데는 마음의 초점을 바꾸는 과정이 필요하다고 한다.


게다가 기괴한 사고라는 갑작스럽고 기묘한 죽음이 죄와 벌을 스스로 불러오게 한단다. 이것이 일상성의 기괴함, 신적인 기괴함을 돌아보게 하는 매개적 역할을 한다고 한다.


샤먼에게 나타나는 위기는 적절하게 육성하면 탁월한 지성, 세련된 태도, 훨씬 강한 육체적 에너지와 정신적 활력을 가져온단다. 이제껏 테러리스트 성자에서 말했듯 예수님께서는 기존의 유대사회의 대부분을 적나라하게 지적하고 저항하셨다. 심지어는 그 과정에서 물리적 테러도 서슴지 않으셨다. 온화한 샤먼의 이미지만이 아니라 사냥꾼 같은 자기과시적 폭력도 있었던 것이다. 이것은 신화적 놀이를 위한 미성숙함이라는 전제이기에 미성숙함 자체가 축복이라고 조지프 캠벨님은 주장했다. 


그러나 미성숙함과 성숙함이 어우러진 삶이었다고 여겨진다. 스스로 정치범으로 죽임을 당하기에 합당한 상황으로 다시 한번 강조하지만 자발적으로 몰고 가지 않았던가? 그의 모든 사역과 기록된 만큼의 발자취만 보더라도 그는 미성숙한가 싶으면 하나의 연출을 완벽히 이뤄낸 성숙한 영혼이셨다.


유대사회 속에서 유대문화의 한부분인 경제인들에게 낙타와 바늘구멍의 예를 들어 비난하셨고 유대교인들을 신랄히 비판하셨다. 그러는 과정에 성전 앞 환전상들과 비둘기 판매상을 테러하셨고 말이다. 아비와 아들이 어머니와 딸이 며느리와 시어머니가(맞나?) 서로 대립하라는 말씀도 하셨고 예수님 자신의 어머니와 형제가 찾아왔을 때 마저 신도들 앞에서 실제 외면해 버리셨다. (요리하다 지친 언니가 자기 여동생도 주방으로 보내 달라는 부탁에도 다 자신의 역할이 있다는 말씀을 하시기도 했다. 여동생이 미녀라는데 큐티 라이프 성경 책 한권을 건다.)


유대사회 지도층들이 예수님의 교세가 확장되는 만큼 예수님을 위험한 인물로 생각하도록 딱 그렇게 행동하셨다. 왜 그러셨을까는 누구라도 대답할 수 있을 것이다. 하나님과 예수님의 공동연출로 완성된 수난과 십자가형과 죽음과 부활은 예수님의 그런 미성숙해 보이는 행동들이 성숙하게 안배되어 일어난 것이라고 말이다.


그런 상황이 다 지나고서야 그는 십자가에 매달리며 "다 갚았다"고 말씀하신 것이다. (며칠전까지 있던 정신과의 약품 때문에 안그래도 무안한 대뇌가 더 잘 돌아가지 않고 있지만 어쨋듯 마치려던 글을 끝맺으려 한다) 정신과에서 기독교 방송만 듣고 있던 707호 동기 어르신 때문에 (그 어르신이 직접 가르쳐 주신 것이 아니라 그 같은 707호 동기인 어르신 때문에 "다 갚았다"란 표현을 사용하는 목사님 설교 기독교 방송을 보았고 방 호실 마다 찾아다니며 히브리어와 헬라어도 아시는 분을 찾아서 물어본 것이다) "다 이루었다"란 말씀에 "다 갚았다"는 뜻도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예수님은 앞서 누차 말해왔듯 그의 탄생은 이스라엘의 한도시인지 그 근방 전체까지인지의 신생아들이 모두 죽는 저주 같은 현실을 가져왔다. 또 유년시절의 예수님의 살인과 저주에 대해 외경의 내용을 언급했듯 자라는 과정에서도 그는 섬찟할 정도로 순수한 의식을 지니고 계셨다. 자신이 할 수 있는 능력이 있으니 살해도 저주도 꺼리낌이 없으셨던 분이시다.


그러고 자라는 과정 중에 어떤 계기일지 몰라도 광야에서의 단식과 유혹 보다 더 먼저인 어떠한 계기가 분명히 선행했을 것이다. 어떤 계기가 선행했을지는 모르지만 사랑의 전도사이시던 예수님에게 이미 자신이 행한 타인들에 대한 살해와 저주가 이후 "다 갚았다"는 말씀을 하시도록 만들 정도 였다면 분명 목숨만큼 소중한 누군가를 잃으셨던 것이 아닌가 싶다. 그런 상황이 플라톤이 <티마이오스>에서 말했던 "태어날 때 흐트러진 머리 속의 회전"을 바로 잡은 것이리라. 하지만 이것은 억측에 가까우니 살펴서 생각하시길 바란다.


조지프 캠벨님이 이야기하던 '기괴한 사고(사건)'이 성장해 가는 샤먼에게서 자주 살해의 형태로 일어난다던데 이 살해가 죄와 처벌의 형식을 띠는지 어떤지는 몰라도 죄의식과 함께 전국면의 국면 전환의 성격을 가지려면 샤먼 스스로가 소중한 무언가를 잃어야 하는 것이 아닐까 생각된다.


어찌된 것인지는 나도 모르지만 어떤 계기가 있은 이후 광야에서의 단식과 시험이 있었고 그의 공생활이 시작 되었다. 그리고 그 모든 것을 원시신화의 관점으로 바라보면 길고 긴 시련과 고난 또한 엄청난 고통 위대한 고통에 해당하는 놀이가 완성되는 것이었다는 말이다. 하지만 이것이 놀이 일수 있는 건 서양영화에 등장하는 크리스마스이브에 행해지는 마굿간에서 태어나는 예수님과 동방박사의 조우를 유치부 아동 연극으로 펼치는데서나 또 성찬식에서나 찾아야 하는 것이 아닐까? 


그것이 아니라면 예수님의 전생애를 놀이라고 보아야 할 텐데 그토록 슬픈 연극을 누구에게 강요한다는 말인가? 하나님이 미워지는 전제가 아닌가 말이다. 그 슬픈 연극 속에서 그분은 용서와 사랑의 화신으로 거듭 누구라도 마지막 한사람까지 용서하셨다. 자신을 죽이는 자들까지 용서하고 가셨다는 말이다.


그의 생은 용서와 사랑의 구현으로 많은 이들을 사랑으로 가득찬 이들로 변모 시키려 일어났던 것이다. 또한 우리가 사랑 속에서 진정한 자신을 회복하면 죽음 마저도 계산하는 것이 아니라 극복할 수 있는 것이란 걸 증명하시기 위한 것이기도 했을 것이다. 그 속에서도 준비 안된 이들과 흥을 깨는 이들에게는 깊은 의미를 숨겨주는 우화(우언)가 되었어야 할 아포크리파들이 기독교 내의 통합을 위해 졸지에 외경(아포크리파)이란 이름으로 대중의 눈 밖에 난 것은 과연 다행인 것인지 애석해 해야 할 일인지 모르겠다. 


예수님의 함자에 히브리어 발음은 "예수아"라고 한다. 이것은 히브리어 여호수아의 축약형 발음이라고 하던데 '여호'라는 하나님 함자를 표기할 때 사용되는 접두사와 '수아'라는 "구원하다" "인도해내다"란 뜻을 가진 히브리어 동사에 야샤가 결합된 어휘라고 한다. '야샤'에 대해 '히브리어 종합사전'은 '존재의 기원을 밝히다'라는 의미도 있다고 들었다. 


"예수아"라는 이름은 결국 "인류를 구원하고 존재의 기원을 밝히실 분"이라는 의미가 담겨있다는 말이다.


사랑의 전도사 예수 그리스도는 어떤한 종류일지 감히 마음대로 단정짓기 어려운 어떠한 계기로 인해 인류를 사랑하게 되었으며 죄인들의 죄를 사하여 주면서도 자신은 '기괴한 사고'에 대한 죄의식을 수난과 십자가형에 처해서야 용서 하신 것이다. 예수님은 사랑과 용서를 외치던 분이시다. 그러면서도 자신을 용서하는데는 그토록이나 버거워 하신 것이다.


나는 예수님을 보면 레니게이드가 떠오른다. 이 시대에 그분께서 다시 오신다면 엘리트가 아니라 날건달로 오실 것 같다. 아니다. 오히려 선입견을 깨고 엘리트로 오실지도 모르지만 날건달 성향을 버리긴 어려울 것이다. 예수님이 재림하신다면 그분의 친구들인 크리스찬들이 쉽게 알아보긴 할지 모르겠다. 


끝맺음이 불완전해 보이긴 하는데 여기서 마치려 한다. "어쩌다 어른"이란 방송을 보니 사람에겐 패턴완성을 하는 특성있다니까 미흡한 부분은 자신들의 지식으로 메우리라 생각하며 이만 접겠다.


-음! 잊고 나도 모르게 넘어간 주제가 있었다. 그건 조지프켐벨님이 생득적방출기제(모르시면 검색바람^^*)를 통해서라도 새시대의 새로운 통합신화가 완성 되기를 못내 기다렸음이 책 속에 은근슬쩍 비춰지더라는 것이다. 사람이 원인과 조건만 갖춰지면 누구라도 신화의 한부분을 시작할 수 있다고 저자는 꿈꿨던 것 같다. 그래도 호돈 단편 중 '큰바위 얼굴' 같은 긍정적 변화만이 있을 수는 없을 것이다. 


신지학회의 블라바츠키 여사 등이 크리슈나 무르티의 남다름을 알아보고 예수님과 같은 인물로 키워내려 하였으나 크리슈나무르티는 자유로운 연설가가 되고 싶어했을 뿐이지 않나? (뭐! 나도 자세히는 모르지만, 오쇼라즈니쉬의 책들 중에 하나에서 읽었던 이야기다) 


작위적으로 모조나비를 더 그럴듯 포장해 암나비들이 다 모여들게 만든다해도 그런 상황에서는 다음세대가 태어날 수 없다. 난 더이상 기독교인이 아니지만 그래도 진짜 예수님의 재림을 바란다. 이 시대의 문제들에서 해답같은 사람을 기대할 대중들을 농락하는 그런 가짜 보다 가짜 빛에 더 반짝이는 사람보다는 기다리던 진짜가 진실로 오시리라고 기대하고 있다. 


하지만 몇몇 사람들은 과거의 예언을 이 시대에 현실화 시키며 해결안 같은 가짜들을 제시하려고도 한다. 물론 조지프켐벨님이 바란 것은 조건을 갖추어 실제 메시아가 등장하는 현실이 보고 싶었던가 본데... 불완전한 인간의 의도와 노력으로 진실한 기적을 불러오기는 쉽지 않은 일이다. 그래서 이 시대를 예언대로 조작한다고 해도 가짜메시아 마저 조작하려는 노력은 그쳤으면 좋겠다. 어딘가에서 시대의 해결안을 하나하나 준비하며 자신의 현신을 대기하고 있을 진짜 메시아가 있을 것이라 믿어보자.-

미흡한 글 사람들의 패턴 완성 특성을 기대하며 접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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