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시지 구약 역사서 영한대역 - 일상의 언어로 쓰여진 성경 옆의 성경 The Message 시리즈
유진 피터슨 지음, 김순현 외 옮김, 김회권 감수 / 복있는사람 / 2012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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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전 모세오경에서 간략히 언급했던 왜 조선 시대에는 천주교를 넓게는 기독교를 받아들이지 않았는가를 다시 한번 짚고 이어서 조금 이야기하려 한다. 하긴 더 이야기한다고는 해도 모세오경에서 언급한 이야기의 연장선상의 이야기일 뿐이지만 말이다.

 

조선 시대 유학자들은 인의와 도덕을 중시했으며 그건 인간의 이해와 지성이 수용하는 방향에 따라서였다. 무속 신앙적인 맹신을 조선 시대 선조들께서는 즐기시지 않았다. 그런 방향에서 보면 왜 조선 시대 유학자들이 사람들(신앙인들)을 죽이면서까지 기독교를 멀리했는지를 알 수 있다.

 

삼강오륜이나 인의와 도덕, 덕의 다스림과, 신구약에 기록된 유대인들과 기독교인들의 역사는 너무나도 동떨어져 있기 때문이다. 모세오경과 역사서만을 보더라도 하나님을 군주로 보던 창조자이니 아버지로 정의하던 하나님과 아담과 하와 이 셋 사이에는 임금과 신하의 벼리도 아버지와 자식의 벼리도 지아비와 지어미의 벼리도 없다. 하나의 금기만을 주고는 그것을 깨었다고 신하이자 자식을 저주하고 버렸으며, 아담과 하와 또한 자식이자 신하라고 보아도 그들에게도 신의와 도덕율이 없었다. 아담과 하와 사이에도 남편과 아내가 지켜야 할 기준이 없었다. 그들이 낳은 자식들도 서로 죽고 죽이는 관계였다. 아브라함의 둘째이자 유대인들의 선조인 이삭은 자신의 아비를 속여서 상속받았으며 룻의 딸들은 소돔과 고모라 이후 자신의 친부를 돌아가며 강간해서 대를 이었다. 심지어는 시아버지를 속여 잠자리를 가져 대를 잇는 이야기도 실려 있는 것이 구약이다. 그들의 신은 아비에게 그 가장 사랑하는 자식을 죽이기를 요구하는 신이기도 했다. 물론 심장을 찌르기 직전에 중단시키기는 했지만 말이다.

 

그리고 룻의 경우도 그렇고 그 이후에도 그렇지만 신 혹은 신의 사자라고 판단하거나 죄 없는 객이라고 판단하는 경우 일부 사람들이 그 신 또는 사자, 죄 없는 객을 동성 강간하려 하면 자신의 남자 경험 없는 딸을 내어줄 테니 이들에게 무례하지 말라는 말도 안 되는 딜을 하기도 하는 작자들이다.

 

무엇보다 거룩한 진멸은 어쩔 것인가? 타국을 공격할 때 하나님의 선택을 받았다고 주장하는 유대인들은 현재의 급진 이슬람 무장단체와 다름없이 성 노예로 삼을 성 경험 없는 어린 여성 몇몇만 살려두고 애, 어른, 남녀를 구분 안 하고 모조리 죽였다. 사람만이 아니라 가축까지 살아있는 모든 생물을 죽였다. ‘호생지덕도 인간으로서의 인지상정도 더더욱 이라는 것도 찾아볼 수 없는 종자들이었다. 타국은 적이라고 규정되면 모조리 죽여 없애며 자신들의 혈통만을 확장한 것이다. 물론 이들의 지상의 규범은 생육하고 번성하는 것이기는 하다. 무조건 확산하고 보는 게 이들이 신으로부터 받은 지령이니 말이다. 하지만 규범도 원칙도 십계명이라는 단조로운 몇 가지만으로 번식하고 영토만 확장해 간다는 건 매트릭스의 스미스 요원과 [우리 문명의 마지막 시간들]에서 톰하트 만이 이미 정의했듯 암과 바이러스와 다를 바 없다. 구약만 보자면 이 종교는 인간이 따라서는 안되는 암이고 바이러스인 것이다.

 

구약에서는 어떠한 지성이나 합의에 의해 도출된 도리가 아닌 신탁을 통한 역사가 이어진다, 그들의 신은 생육하고 번성하면 한마디로 번식하고 확산만 하면 거룩한 진멸이라는 이름의 살육을 장려하고, 성 노예를 권장하며, 딸들이 지아비를 며느리가 시아비를 강간하거나 속이고 자고는 애를 낳아야 하고, 늙은 아비를 속여 재산을 탐해도 되고, 신의 명령이면 인지상정도 무시하고 자식도 죽이려 해야 사랑을 주는 신이다.

 

이는 신약에서 이르는 하나님은 사랑이시다는 그들의 계명이 허울뿐임을 말해주는 것이다. 아무리 예수가 등장해 하나님이란 존재를 한껏 포장한다고 해도 하나님이란 존재가 사랑이었던 적은 없었다는 말이다. 그들 유대인의 하나님일 수는 있겠지만 우주 만물을 창조한 신이라면서 구약에서 보여주던 그런 잔혹함과 악랄함을 인간에게 보일 수는 없을 것이다. 기독교인들은 하나님께서 유대인을 선택했기 때문이라 할 테지만, 인간을 게임 속 캐릭터나 전투용 게임의 소형 로봇으로 보는 것이 아니라면 거룩한 진멸이라는 지시는 가당치도 않다. 하나님이라는 존재가 인간으로 게임을 하는 것이라면 인간을 소모품으로 여길 뿐이라면 인간은 왜 그에게 굴종해야 하는가?

 

사실 깊이 들여다보면 성경을 읽고도 하나님을 신앙하는 자는 불균등한 무력차, 압도적인 힘이 하나님에게 있다고 여기기에, 굴종하면서라도 살아남고 그가 주는 단맛을 빨아 보고 싶은 게 다일 것이다. 무의식 깊이에서 이런 신에게 정서적으로 감동해서 섬기는 자가 어디있겠나? 압도적인 무력차가 아니라면 스스로가 전지와 전능과 편재와 불멸할 수 있다면 누가 그따위 신에게 굴종하겠는가? 그리고 전지할 수 없고 전능할 수 없고 편재할 수 없고 불멸할 수 없다고 해서 그런 신이라는 존재에게 굴종해야 할 이유도 없을 거다.

 

예수는 자신들의 신이 사랑이라며 빛의 자녀가 되라고 했지만, 그 사랑과 빛이라는 것의 실체는 무엇인가? 그건 결국 순교라는 이름의 자발적인 죽음과 종교전쟁과 마녀사냥의 시대를 거쳐 홀로코스트에 이르렀다. 홀로코스트가 왜 기독교의 탓이냐 하겠지만 당시 유럽 인구는 절대다수가 종교인이었고 그 종교란 다름 아닌 예수 그리스도를 신앙하는 종교였다. 크리스천이 유대교인들을 박멸하던 게 홀로코스트이기도 한 것이다. 알곡과 나락을 구분하는 기독교의 가르침은 유전적 우성인자와 유전적 열성인자를 가르는 우생학과 다름없고 더 거슬러 자신들만이 선택받았다는 유대인들의 선민사상이 발전을 거친 것과 다름없는 것이다.

 

더 나아가 근래에는 예수의 존재 자체를 부정하는 저작들도 있기는 하지만 그의 존재를 인정한다고 해도 예수라는 사람은 행동과 말이 달랐고 그의 말에서도 일관성이 없었던 자이다. 유교에서는 공자의 오도일이관지라는 말을 깊이 여기며 가르침이 하나로 통하는 것 즉 일관되는 맥락을 중요하게 여기는 것으로 알고 있다. 그들은 예수의 행적이 표리부동한 인간의 분열적인 정신과 사상을 보여주는 것으로 판단했을 것이다. 사랑을 이야기하며 겉옷을 벗어달라면 속옷까지 벗어 주고 잠시 같이 가자면 한참을 같이 가라던 이가 자기 어머니를 곁에 두고도 누가 내 어머니이고 누가 내 형제들이란 말이냐라는 선긋기를 시작할 때, 유학자들에게는 예수가 인간 말종으로 보였을 것이다. 어느 선비가 자신의 어머니를 부정하는 자를 성현으로 여기겠는가?

 

그리고 예수는 사랑을 말하다가 돌연 나는 너희에게 칼을 주러 왔다 불을 던지러 왔다며 아비와 아들이 서로 대적하고 며느리와 시어머니가 대적하게 하려 왔다는 말을 한다. 아마도 이 지점에서 예수를 따르던 이들은 그가 사회를 변혁시키려 하는구나’ ‘이 초능력자는 메시아인가 보다라고 생각했던 모양이다. 특히나 유다가 그리 믿었기에 내가 떡을 찍어주는 자가 그이니 니가 할 일을 속히 행하라는 말에 바로 일어나서 로마군에게 예수가 어디있는지 고발한 것으로 보인다. 유다 복음이 사실이라면 말이다. 아마도 유다의 말은 사실일 것이다.

 

예수 사후에도 오랜 후 종교회의를 통해 삼위일체설만을 정설로 받들기 전까지 예수를 신격화해서는 안 된다는 종단들이 존재했었다. 하지만 예수를 신앙하는 대다수의 종단들은 대부분 예수를 메시아라고는 믿었다고 한다. 예수는 무력하게 죄수가 되어 형벌을 감당하다 죽었는데도 메시아로 추대되고 있다. 그렇다면 그가 생존해 있던 시기에 그에 대한 그의 추종자들의 시각은 어떠했겠는가? 이미 홀린 사람들에게는 분명 그가 사회를 변혁시키러 온 자로 보였을 것이고 그런 분위기에 휩쓸려 유다 역시 예수가 사회를 변혁시키려는 과정으로 유다 자신이 어떠한 역할을 해주면 죄수로 끌려가기 전에 폭동을 일으키던가, 예수의 초능력으로 폭동의 효시를 일으키리라 믿었을 것이다. 그렇지 않았다면 유다 복음에서 말하듯 예수가 부추긴다고 해서 배신자가 되어 자살할 이유는 없었을 테니 말이다.

 

하지만 예수는 어떠한 혁명의 시도도 하지 않았고 그저 십자가에 매달리자 마자 다 이루었다를 외치고는 십자가에 오래 매달려 있게 되니 엘리엘리 라마사박다니라며 신이여 신이여 나를 버리시나이까를 외친 후 비탄에 빠지다 죽었을 뿐이다.

 

그는 사랑을 외치면서 (당시 십일조 하려면 당연히 환전해야 할 필요가 있는데도 불구하고) 환전상에게 테러를 했으며 불을 던지러 왔다. 칼을 주러 왔다면서 마치 사회 변혁을 이루려는 것처럼 바람을 잡아놓고는 무력하게 죽었다. 도무지 일관성이 없고 표리부동하지 않은가?

 

조선 시대 유학자들이 신구약을 두루 읽어 봤다면, 주님이라며 신에게 가축을 죽여 제를 올리고 그 주님의 뜻에 따라 사람들을 살육하고 가족 간에 죽이고 강간하며 그저 암이나 바이러스처럼 확산만 하면 된다는 종교 그리고 어느 시점 포장을 하고 사랑을 외치지만 알고 보면 순교라는 이름의 자발적인 죽음을 장려하고 서양사까지 보면 십자군 전쟁과 마녀사냥 등으로 피비린내 진동을 하게 하는 이 종교를 도대체 어떻게 정상적인 종교라고 판단했겠는가? 천주교 박해는 비단 조선뿐만이 아니라 어느 나라에서든 정당성이 너무나도 깊고 크게 있는 행동이었다고 생각된다.

 

그리고 이 시대에도 사이비 종파만이 아닌, 이단으로 분류되지 않는 천주교와 기독교 대부분의 종파들의 해악은 그들 스스로가 너무나도 잘 알고 있을 것이다. 이 종교 자체가 이 세계에 뿌려진 악성 바이러스인지도 모르겠다. 이 바이러스를 치료할 치료제 같은 존재가 등장한다면 그가 바로 메시아이고 마이트레야인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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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시지 구약 모세오경 영한대역 The Message 시리즈
유진 피터슨 지음, 김순현 외 옮김, 김회권 감수 / 복있는사람 / 2022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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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신교, 로만 카톨릭 그외에도 영국 국교회, 그리스 정교회 등 알고 보면 예수 그리스도를 신앙하는 종교가 전체 종교인의 과반수일 것이다. 물론 그들 다수는 성경을 완독하는 경우들이 없다는 것도 상식적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현대인들의 정신 저변에 기독교적 원형은 탄탄하게 자리잡고 있지 않을까 싶다.


휴거라던가 아마겟돈, 666, 짐승의 인, 적그리스도, 요한계시록, 종말론 등은 어미만 꺼내도 완성시키는 비신앙인들이 더 많을 것이다. 현대인의 의식에 저변을 이해하는데 성경을 빼놓는다는 것은 말도 되지 않는 일이 아닐까 싶다. 그리고 그들이 갖는 세계상과 시대상의 문제점을 이해하는 것도 성경이 한 측면은 차지할 것이다. 


그런 까닭에 비신자라도 성경을 읽어보아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었고 자리에 누운 상황이 되어 차분히 정독해 보고 있다. [모세오경]을 완독하고 현재는 역사서의 [열왕기 상]까지를 읽었다. 여기까지 읽는 동안 기독교적 도그마 중 몇몇을 알게 되고 또 자잘한 의문도 갖게 되었다.


창세기에서의 문제들은 접어두고라도 출애굽기의 낮에는 구름과 밤에는 불기둥으로 인도했다는 대목은 UFO와 외계인의 영향이라고 여겨진다. 언약궤(증거궤)를 이동시키는 중 언약궤가 흔들리자 손을 대다 죽는 경우와  장막에 들어서다 언약궤 앞에서 죽는 장면 등은 과거 오파츠 관련 과학 책에서 보았던 해석처럼 외계 인류의 기술력인 에너지 집적기이자 방출기를 이집트에서 훔쳐와 자신들의 언약궤라며 호도한 경우라고 생각된다.


또한 당시 여성의 처지를 알 수 있는 대목들(천사나 방랑객의 등장시 그들에게 동성애 강간을 하려는 이들을 진정시키려고 자신의 남자 경험이 없는 딸들을 내어주겠다며 진정시키는 대목, 제사장의 딸이 매춘을 하는 경우 화형시키라는 조목을 만드는 대목) 남성의 처지를 알 수 있는 대목(이전 세대의 적대 행위에 후손인 남성들을 추려내 목졸라 죽여버리는 대목)등을 통해 고대에 인권이란 것은 없었구나 하는 걸 느꼈다. 


무엇보다 거룩한 진멸이라며 유대인들이 정복하는 지역마다 성노예로 삼을 성경험 없는 여자 몇몇을 남기고는 아이 어른 남녀 할 것 없이 모두 죽이고 또 그 지역에 사는 가축까지 모조리 생명있는 대상은 말 그대로 모조리 죽이는 것을 보며 이딴 짓을 하고도 그걸 역사라며 기록하는 것들이나 그 기록을 보고도 거룩한 종교라며 신앙하는 것들이나 다 그 나물에 그 밥들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면서도 급진 이슬람 무장단체 욕은 그렇게 할 것이다. "니들 종교도 다를 바 없단다."


룻의 딸들은 소돔과 고모라 이후 룻을 강간해 아이들을 출산한다. 룻의 딸들이라고 했으니 그녀들이 강간한 룻이 그녀들에게 누구인지를 생각해 보라.


이쯤에서 조선시대에 왜 그토록 유학자들인 조선 관리들이 천주교인들을 몰살하다시피 하고 천주교가 조선에 자리잡는 것을 싫어했는지 알 수 있다. 여호와가 창조주라면 아버지일테고 주라면 군주로서 보아야 할텐데 아담과 하와와 여호와에 관계에서는 조선 유학자들의 관점으로는 천주교는 삼강도 오륜도 없는 종교이다. 그들의 눈에는 철학도 윤리도 없는 것이 성경이었을 것이다. 다윗이 자신의 부하 장수의 아내를 취하려 부하 장수를 전쟁터에서 죽도록 유도하고 아내를 빼앗은 것이나 소돔과 고모라의 내용이나 거룩한 진멸 등을 보아도 인의도 도덕도 없는 것이 성경이다. 신약의 예수 같은 경우도 성전의 환전상들에게 보인 행패나 내가 평안을 주려온줄 아느냐 나는 칼을 던지러 왔다는 그의 발언은 이전 설교들과 달랐다. 언행이 불일치 하는 인물이고 말 바꾸기가 자유롭던 인물이다. 자기 성질을 조절할 줄 몰랐고 자신의 어머니와 형제들을 버젓이 옆에 세워두고도 누가 내 어머니이고 누가 내 형제들이란 말이냐고 하던 이이다. 예수는 수신도 제가도 못하는 인간 전형으로 보였을 테니 유학자들 눈에는 용납될 수 없는 졸렬한 사기꾼이었을 것이다.


성경을 읽으면서야 왜 천주교 박해가 있었는지 선조들은 마녀사냥이나 십자군 전쟁 이야기를 들어보지도 못했을 텐데 어떻게 금방 이 종교가 폐단이고 사이비이며 적폐가 될 줄을 미리 아셨는지 충분히 알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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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이 쉼표를 넣은 곳에 마침표를 찍지 말라 - 인도 우화집
류시화 지음 / 더숲 / 2019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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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을 집에 들인지 1년쯤 되고 있는데 어제부터야 조금씩 가까이 하고 있다.

<100가지 인생 처방 우화 모음집>이라는 카피가 너무도 와닿는다.

인생에 이만한 처방이라면 진실한 사랑이나 

의미 있는 타인을 경험하는 것외에는 찾을 수 없을 듯 하다.


지금까지 읽은 우화들이 모두 마음을 움직이는 듯했지만 무엇보다

<꽃이 피면 알게 될 것이다>라는 장의 우화가 너무 감명 깊었다.


한 스승이 제자들을 하산시킬 때가 되자 마지막으로 제자들에게

가르침을 주려고 한 지역에 있는 한 배나무를 각자 다른 계절에 가서

보고 오라는 명을 했다고 한다.


한 제자는 겨울에 그 배나무를 보고 와 생명력이 없고 가지 깊숙이까지 

메말라 전혀 쓸모없는 나무였다고 스승에게 고했다.


다른 제자는 봄에 나무를 보고 와 첫번째 제자의 의견에 동의할 수 없다고 

가지마다 새 움이 파릇파릇 돋아나고 뿌리는 생명수를 길어올리고 있는 

나무였다고 다만 아무 열매도 없어 관상용으로나 적합한 나무였다고 

주장했다.


세번째 제자는 초여름에 나무를 보러 갔다고 한다. 

나무는 온통 흰 꽃으로 덮여 있고 뿌리는 단단히 땅을 움켜쥐고 있으며 

만개한 꽃들은 벌과 새등 숲의 다양한 생명들을 모아들였다고 제자는 말했다.

다만 달린 열매가 너무 써서 먹을 수 없으니 인간에게 쓸모없는 나무라고 설명했다.


마지막으로 간 네번째 제자는 가지마다 휘어질 만큼 열린 황금빛 열매를 목격했다.

제자는 열매를 가져와 스승에게 풍요와 결실을 이뤄낸 나무의 연금술에 감동했다고 말했다.

누구나 과즙 풍부한 열매를 맛볼 수 있게 되었다고 말이다. 


이들에게 스승은 마지막 가르침을 남겼다. 


자신과 타인에게 성급한 판단을 하지 않아야 함을 배우게 하고 싶었노라고...

나무든 사람이든 한 계절의 모습으로, 단 한 번의 만남으로 전체를 판단해서는 안된다고. 

그것은 공정하지도 지혜롭지도 않은 일이라고 말이다.


나무와 사람은 모든 계절을 겪은 후에야 결실을 맺을 수 있다. 

마찬가지로 가장 힘든 계절만으로 자신의 인생을 판단해서는 안된다.

한 계절의 고통 때문에 나머지 계절들이 가져다줄 기쁨을 잃어서는 안 된다고 말이다.


<삶은 공평한가>라는 이야기도 내게는 의미 깊게 와닿았다.


한 농부가 길을 가다가 커다란 뱀... 구렁이라고 하자면 

구렁이가 바위에 깔려 있는 것을 발견했다. 구렁이가 살려달라고 애원하자

농부는 뱀은 싫었지만 생명을 살리는 일이라 외면하지 않고 바위를 치워 주었다.

구렁이는 살려줘서 감사하다면서도 지금 배가 고프다며 농부의 목을

말아쥐고는 농부를 잡아먹겠다고 했다.

농부는 나는 너를 살려줬는데 이것은 너무도 불공평하다고 말했다.

구렁이는 인생은 원래 공평하지 않은 것이라며 농부를 잡아먹으려다가

그래도 자신을 살려줬으니 세번의 기회를 주기로 했다.

농부의 목에 말아쥔 채 앞으로 세 동물을 만나 단 한 마리라도 

삶이 공평하다고 이야기하는 동물이 있으면 농부를 살려주기로 했다.

농부와 농부의 목을 말아 쥔 뱀은 첫 번째로 암소를 찾아갔다. 

암소에게 농부는 삶이 공평하냐고 물었다.

암소는 인간들이 자신에게 맛있는 풀을 주지만 자신의 우유를 가져가지 않냐 

하지만 자신이 늙어 더이상 우유가 나오지 않으면 자신을 잡아먹지 않겠냐며

삶을 공평하지 않다고 말했다.

그리고 다시 닭을 찾아간 둘은 닭에게도 같은 질문을 했고

닭은 인간이 자신에게 닭장을 만들어주고 보호해주지만 그대신 

매일 달걀을 가져가지 않느냐 하지만 파티라도 하게 되면 자신의 목을 

맨 먼저 비틀 것이다 삶은 공평하지 않다고 말했다고 한다.

마지막으로 당나귀를 찾아가 농부는 삶은 공평한 거냐고 물었다.

그러자 당나귀는 삶이 공평한지 어떤지는 모르겠지만 우리 엄마는 내게 이렇게 말했다.

삶이 공평하든 공평하지 않든 우리는 춤을 출 수 있다고. 이렇게 말하고

당나귀는 엉거주춤하더니 우스운 모양으로 춤을 추기 시작했고 

따라온 암소와 닭도 춤을 추었다. 농부도 구렁이도 춤을 추기 시작했고

구렁이가 춤을 추며 느슨하게 또아리를 풀자 농부는 슬며시 

목에서 구렁이를 풀어내리고 도망을 가며 당나귀에게 말했다고 한다. 

<그래, 니 말이 맞아. 인생이 공평하든 공평하지 않든 우리는 춤을 출 수 있는 거야>라고


위의 두 이야기가 영혼 깊이 울림을 주었다. 

이 이야기들을 알기 전과 알게 된 이후의 삶이 다를 것 같다. 


[신이 쉼표를 넣은 곳에 마침표를 찍지 말라]는 제목 부터 의미 심장한 이 우화집을 

앞으로 매일매일 하루 몇 가지 이야기씩만 읽어나갈 것이다. 

팍팍한 인생에 단비 같은 이야기들이 아닌가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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별 이야기 - 인류가 매혹된 별자리
앤서니 애브니 지음, 이영아 옮김 / 현암사 / 2020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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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많은 별 이야기들이 맥락을 갖추고 이어집니다. 각장 마다 하나의 별자리에 얽힌 다양한 신화들이 이어지고요. 천문지식이 있는 분들이라면 연상 작용을 통해 신비롭고 흥미로운 이야기들이 연속적으로 뇌리에 새겨질 겁니다. 천문지식이 부족한 제게도 몇몇 내용들은 기억에 남더라구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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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담형 인간 - 꾸밈없이 행동하고 대담하게 나아가다! 캐릭터 탐구로 동서양 민담 새로 읽기
신동흔 지음 / 한겨레출판 / 2020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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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담 속의 캐릭터를 소설형 인간과 민담형 인간으로 구분짓고 민담형 인간에 대해 풀어주는 책이다. 저자처럼 영웅 서사와 민담형인간을 뚜렷이 구분하는데는 동의할 수 없었다. 민담 속에서도 분명히 영웅 서사가 있기 때문이다. 또 민담 속 등장  인물들이 모두 트릭스터와 같이 창조적이거나 파괴적인 양의적 인간형이기만 한 것은 아니고 소설형 인간이라고 저자가 정의한 행동을 뒤로 미루고 생각이 많은 햄릿형 인간이 민담 속에서는 등장하지 않는 것도 아니기 때문이다. 


하지만 저자가 서술하는 과거를 돌아보지 않고 지금 이 순간에 충실하며 당장 눈 앞에 닥친 현실에 적극 대처해 나가는 민담형 인간의 이야기에 심리치료를 받는 듯한 느낌도 들었다. 현실세계에서는 이토록 뒤를 돌아보지 않고 주변을 의식하지도 않으며 자신에게만 충실하게 살아가는 것이 쉬운 일은 아닐 거란 건 안다. 그렇다해도 이야기 속 그들의 거침없음이 움츠린 마음을 펼쳐지게 하는 듯도 했다. 


미루고 회피하는 성향의 사람들에게 또 사람에게 부대껴 아픈 사람들에게 이야기 치료가 되어줄 것만 같은 책이다. 그리고 민담집이던 동화던 자주 읽는 것이 정신 건강에 좋으리라는 생각이 들게 해주는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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