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인과 바다 원전으로 읽는 움라우트 세계문학
어니스트 헤밍웨이 지음, 이정서 옮김 / 새움 / 2022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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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인과 바다 역시 중딩 때 권장도서라서 읽었었다. 하지만 딱히 어떤 감상이었는지 기억도 나지 않는다. 그저 막연히 인간의 내면 이야기를 상징하는 것이구나 싶기는 했던 듯하다. 성인이 되어 다시 읽으니 그 깊음에 조금은 젖어든 것도 같다. 

 

이번에 [노인과 바다]를 다시 읽으며 어린시절에는 보이지 않았던 상징들이 보이기 시작했고 어린시절엔 그저 막연하기만 했던 내적 심연으로의 여행 이야기가 조금은 귓가에 다가오는 것만 같았다. 

 

어부이나 80 여일을 물고기를 잡지 못하는 노인에게서 의미와 항로를 잃은 듯한 느낌을 받는 성인으로서의 내가 오버랩 되는 듯했다. 아마도 노인과 같은 심정을 겪어본 많은 성인들이 있을 것이다. '없는 투망'과 '없는 노란 쌀밥', '없는 생선'에 대한 노인과 소년의 '놀이' 같은 대화는 요한 하위징아의 [호모루덴스]와 조지프 캠벨의 [신의 가면]시리즈 1권인 [원시 신화] 속의 개념과 이야기들이 떠올랐다. [노인과 바다]라는 이 이야기가 하나의 의식이자 의례를 상징하고 있다는 것을 이 '놀이'와 같은 대화를 통해 내비치고 있는 것이구나 싶었다. [원시 신화]에서 조지프 캠벨은 인간 사회와 신화 속에서의 '신성한 놀이', 하나의 '의례'는 중세 기사도나 일본의 무사도에서도 엿보이며 현대의 일본인들이 죽음을 대하는 은유적인 대화에서도 찾을 수 있다고 한다. "당신의 부친께서 돌아가셨다고 들었습니다" 라는 표현을 현대의 일본인들은 "당신의 부친께서 죽음을 연출하셨다고 들었습니다"라고 표현한다고 하니 말이다. 조지프 캠벨은 '정신의 고귀함은 천상에서든 지상에서든 놀이를 할 수 있는 기품이나 능력이다'라고 말하고 있기도 하다. 

 

노인이 투망을 잃은 것을 묘사한 짧은 대목은 투망이 없으니 노인이 사냥을 나가 낚시와 작살만으로 사냥감과의 일대 격전을 벌일 것을 예고하는 것이기도 하다. 오랫동안 물고기를 잡지 못해 소년이 다른 배를 타게되어 홀로 사냥을 나가는 노인의 장면은 진정한 심연의 여행은 홀로 감당해야 하는 것임을 상징한 것이라 보였다. 대어를 만난 노인이 미끼를 문 물고기로 인해 북서쪽으로 하염없이 끌려가는 것에서는 왜 하필 북서로 끌려가는 것인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다 [햄릿]이 자신은 "북북서로 미쳤다"고 하는 대사가 기억났고 그를 오마쥬한 제목의 알프레드 히치콕 감독의 [북북서로 진로를 돌려라]라는 영화 제목이 떠올랐다. '왜 하필 북북서인가?' 이런 의문이 들어 구글어스에서 덴마크(햄릿이 덴마크의 왕자이니 덴마크에서 북북서 방향을 찾아보려) 지도를 검색했다. 덴마크의 북북서로는 북해를 거쳐 노르웨이해를 거쳐 그린란드해를 너머 그린란드가 있었다. 셰익스피어는 그 망망한 대양과 미개척의 대륙으로 인간의 심연을 상징하려 한 것으로 짐작된다. 헤밍웨이 역시 북서라는 비슷한 방향을 오마쥬해 노인의 여정이 인간의 심연을 향한 여정이라는 것을 상징했을 것이다.

 

작품 속에서 노인이 '사자의 꿈'을 꾸는 장면이 몇 번이나 등장한다. 조지프 캠벨의 말로는 용은 권위와 도덕성, 윤리, 원칙 등을 상징하지만 '사자는 자기 발견을 상징한다'고 한다. 이것으로도 노인과 바다라는 서사가 자기발견과 내적 통합을 상징한다는 것을 엿볼 수 있다.

 

분석심리학 전반에서는 자기실현의 길을 이원성을 통합하는 여정으로 본다. 노인과 물고기는 의식 속의 이원성을 상징하는 것이 맞을 테고 물고기는 노인 내면의 야성과 함께 인간 본성의 다른 한측을 상징하는 것이리라. 바다... 대양이라는 그 드넓은 심연에서 노인은 점점 침잠해 들어가며 또 다른 자신과 조우하고 결국 그를 통합하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고 물고기가 꼭 그의 그림자만을 상징하는 것으로는 보이지 않는다. 노인이 보이는 그 사냥감에 대한 존경과 사랑 그리고 그를 죽인데 대한 죄의식이 스쳐가는 것으로 보아 물고기는 그의 그림자만이 아닌 아니마까지도 아우르는 그의 대칭적 극성을 상징하는 것이리라. 물고기를 죽인데 대한 죄의식을 보이며 그는 '물고기가 물고기로 존재하는 것처럼 자신도 어부로 존재하는 것이라' 자성한다. 그리고 '그를 사랑하기에 그를 죽인 것은 죄가 아니다'라며 자신의 내적 통합을 긍정하고 있다. 

 

노인이 물고기를 사냥하고 나면 '노예의 일이 남아있다'고 말하는 것은 우리가 우리 심연 속 합일을 이룬 이후에도 우리가 감당해야 하는 여정이 있다는 것을 비치는 말이 아닌가 한다. 물고기를 사냥했으나 그는 다시 한번 상어들의 공격으로 물고기를 잃을 위기에 처한다. 이는 우리의 내면을 통합하는 과정에서 우리가 겪어야 할 시련들을 상징한다고 보인다. 융 저작집 시리즈 중 연금술의 비의를 서술한 대목을 보면 왕과 여왕이 합일하는 과정에서 흑화하는 과정, 우리 내면의 모든 부정성이 모조리 드러나는 과정을 거쳐야 한다고 칼 융은 가르침하고 있다. 

 

노인이 겪는 여정과 '시련'은 통합의 여정이며 (조지프 캠벨의 표현을 빌리자면) '새로운 영적 상태로 변형되기 위한 과정'인 것이다. 그 과정에서 우리는 노예처럼 일할 수도 있고 상어 떼의 공격을 받을 수도 있는 것이다. 바다 위에서의 고독한 그의 사투는 하나의 '종교의식'이자 성인으로서 다시 한번 겪는 '또한번의 성인식'이 아닌가 싶다. 노인과 물고기는 헤밍웨이의 표현처럼 '함께 묶여 항해하여' 끝내는 노인의 보금자리로 가닿는다. 그리고 그 험하고 깊은 여정 이후 그에게 기다리는 것은 별다를 것 없으면서도 다를 일상적이면서 비일상일 그의 일상이다. 우리는 우리의 통합을 이룬 이후에도 결국에는 우리의 일상으로 돌아가야 한다. 혁신이나 변혁이 있더라도 그것은 우리 자신에게 하루가 같은 하루가 아니게 여겨지는 그런 색다름이지 돌아와 맞이 하는 것은 다시 일상일 것이기 때문이다. [오즈의 마법사]에서 도로시에게 다시 돌아온 캔자스가 도로시가 받아들이기에 결코 이전의 캔자스는 아니겠지만 또한 일상이라는 면으로 보자면 같은 캔자스일 것이듯 말이다. 

 

신화 속 젊은 영웅에게 연륜있는 노현자가 가르침을 주는 것과는 대칭으로, [노인과 바다] 속 노인에게 소년은 그에게 결여된 젊음이라는 가치와 보살핌, 협조, 위안 등을 상징한 것이리라. 그리고 먼 미래에는 노인이 항해한 그 심연의 사투를 그 젊은 소년 역시 이겨내야 할 것이다. 우리 모두가 노인이고 우리 모두가 소년이 아닌가 싶다. 이 세상이라는 바다 가운데에서는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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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파랑 2022-04-12 23:03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노인과 바다 좋아하는데 ‘북서‘의 의미가 그런거였군요 ㅋ 사자와 물고기의 상징도 그렇고 전 잘 몰랐던 사실인데 신기하네요~! 역시 책은 아는만큼 더 깊게 다가오는거 같아요 ^^

이하라 2022-04-12 23:14   좋아요 1 | URL
융 님의 저작 몇권과 조지프 캠벨 님의 신의 가면 시리즈를 인상 깊게 읽었었기에 그저 대입만 해봤습니다.^^; 분석심리학을 아시는 분들께는 시시한 리뷰일텐데 칭찬해 주셔서 부끄럽네요.^^;;
 
[eBook] 1984 (한글+영문) 더클래식 세계문학 57
조지 오웰 지음, 정영수 옮김 / 더클래식 / 2013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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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4에 대한 리뷰는 이미 남겼다. 하지만 머리로 생각한 바는 일부 전한 것 같지만 이 소설에서 받은 깊은 인상이 자꾸만 아릿하게 남아 사라지지 않으니 다시 한번 리뷰를 남기면서 잊으려 한다. 

 

"전쟁은 평화, 자유는 구속, 무지는 힘" 이런 역설적인 구호를 일상으로 맞이한 시대가 이 소설의 시대적 배경이다. 저자 조지오웰이 1984년의 전체주의 세계를 가상하여 그린 이 시대 상황은 우리 세계와 다른 듯 또 닮아있는 듯한 착각을 주기도 한다. 보이는 것은 다르나 소설을 끝까지 읽고 보면 이 시대의 한면을 엿본듯 하기도 하기 때문이다.

 

세계는 오세아니아, 유라시아, 동아시아 세 개의 구획으로 나뉘어 한창 전쟁중이다. 주인공 윈스턴이 살고 있는 영국은 오세아니아에 속한 지역이다. 이 시대는 평화부가 전쟁을 관할하고, 풍부부가 배급량을 제한해 식량배급을 감소시키고, 진리부는 정보를 통제하여 대중심리통제를 하는 것만으로도 역설적인 시대라는 것을 충분히 증거하고 있다. 심지어 애정부라는 부서는 심문하고 고문하는 곳의 명칭이니 말이다.

 

윈스턴은 진리부의 공무원으로 보도 직전이나 출간 직전의 자료를 받아 교정한달까 통제한달까 하는 인물이다. 신조어를 만들어 보급시키는대에도 뛰어난 재능을 발휘하는 인물로 신조어를 만드는 자체로 그의 반골기질을 묘사하려 한 것이 아닌가 싶다. 그는 체제에 순응하고 있는 듯하지만 다른 한편으로 반발의 여지를 품고 있다. 

 

빅브라더가 지켜보는 세상에서 그는 혁명을 꿈꾸고 있다. 혁명이 일어나길 바라고 그 혁명에서 작은 역할이라도 하고 싶어하는 인물이다. 그는 혁명단체 형제단이 존재한다는 소문을 듣고서 자신 역시 형제단의 일원이 되고자 꿈꾸고 있다. 그와 동시에 일상의 모든 바를 통제하는 통제사회인 그곳에서 무미건조한 결혼생활을 해봤던 그는 한 여자에 대한 흑심을 품기도 한다. 그녀를 강간하고 죽이려 공상하기도 하는데 어떤 까닭인지 그저 작가의 권능 때문인지, 줄리아라는 그녀는 그와의 관계를 계획하며 그에게 접근한다.

 

그 둘은 남녀의 연애마저도 통제하는 그 사회에서 언제 검거될지 모르는 상황 속의 짜릿한 밀회를 즐기기 시작한다. 그 과정에서 그는 오브라이언이라는 권력자가 정부에 반감을 지닌 은밀한 반역자라는 오해를 하고 그와 접촉하게 된다. 그는 오브라이언을 형제단원으로 착각해 반역의 의지를 드러낸다. 그리고 줄리아와의 밀회를 넘어 사랑을 느끼기 시작하던 그와 줄리아는 정권에 검거된다. 

 

이후부터 그가 애정부에 잡혀가 오브라이언으로부터 고문 받으며 그에게 세뇌랄까 사상교육이랄까를 받는 장면이 이 소설의 백미이다. 이에 대해서는 이전 리뷰와 카뮈의 [이방인] 리뷰에서 짧게 언급하고 있으니 본 리뷰에서 생략한다. 실존 자체를 위협 받으며 인격과 사고 마저도 제어 당하게 되는 그 과정은 너무도 이 소설을 인상 깊게 만드는 서술들이다. 자신의 감각과 정서, 사고 자체가 모조리 통제될 수 있음을 윈스턴은 알수 없었을 것이다.

 

2 더하기 2가 3도 되고 4도 되고 5도 될 수 있는 기만의 세계에서 그는 인지부조화를 겪다가 끝내 죽음의 순간에는 수긍하고야 말게 된다. 빅브라더를 깊이 사랑한다고까지 수긍하고서야 그는 죽고만다. 그가 절정에 위기의 순간 줄리아를 자기 대신 고문하라고 처절히도 비명지르는 그 인격 자체가 말살되는 부조리가 납득이 가지 않았는데, 삶에 대한 집착이 빅브라더에 대한 애정으로 치환되고마는 그 순간만큼은 수긍하게 되었다. 이 세계의 많은 이들이 삶에 대한 애정을 자신이 호응하는 정치가나 정치조직, 특정단체, 매체들에 대한 호감으로 치환하는 까닭을 알게 된 것만 같기도 했다.

 

윈스턴이란 인물은 존재 자체를 부정당하기만 한 것이 아니라 그 스스로 존재 방식과 존재 자체를 재정의하게 되었다. 그가 원하지 않고 그가 수긍할 수 없는 존재가 되는 것을 그 스스로 수긍하고 원하게 되고야 말게 된 것이다. 이런 정도의 극한의 부정을 그 누군들 감당하고 싶을까 싶었다. 빅토르 위고의 [웃는 남자]에서 그윈플레인은 자신의 출신을 알고나서 남루하게라도 받아지녔던 그 자신의 모든 것과... 그 남루함 속에서도 빛나던 사랑마저 잃고야 만다. 데아라는 그의 빛과 같은 소녀는 장님이었지만 그의 안에서 빛나는 진가를 알아주던 이였다. 데아도 죽고 그윈플레인도 죽었지만 그들의 사랑은 죽음으로나마 완성될 수 있는 것이었는지도 모른다. 그윈플레인을 보고 다시 윈스턴을 보니 1984에서의 윈스턴이 더 안스러웠다. 모든 것이 통제 당하는 사회에서 모든 것을 부정 당하고 사랑마저 혐오로서 끝나버렸으니 말이다.

 

카뮈의 [이방인]에서 뫼르소는 오해 받는 남자이다. 누구도 이해 받지 못할 곳이 세계라고 확장할 수는 없을 지 몰라도 분명 이렇게 이해가 아닌 오해로 점철되는 순간이 사람이 생이 있다는 것을 알고 있다. 하지만 윈스턴처럼 부정 당하는 존재, 산산히 분해되고나서 완벽히 다른 무엇으로 프린팅 되는 존재가 되고 싶은 이가 있을까? 뫼르소에게서는 공감의 여지가 있지만 윈스턴에게서는 공감만큼이나 나는 결코 저렇게 되고 싶지 않다는 불안과 두려움이 앞섰다. 그러면서도 이 삶 속에서 과연 윈스턴과 같은 심문과 고문을 당하는 이가 없기만 할까 하는 의문이 들었다. 그게 나는 결코 아니기를 바라는 마음과 함께 말이다.

 

그리고 그들의 세계에 빅브라더는 실존하는 존재였을까? 형제단은 실체가 있는 단체였을까? 인지부조화 이후 윈스턴은 다시는 그런 생각 조차 하지 못했다. 없는 것도 있는 것이고 있는 것도 없는 것이다. "나는 왜 이런 부조리한 세계에 던져졌을까?" 윈스턴이 잠시 내게 빙의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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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방인 원전으로 읽는 움라우트 세계문학
알베르 카뮈 지음, 이정서 옮김 / 새움 / 2022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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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딩 1, 2 때 이 책을 처음 읽었다. 물론 다른 역자의 책이었지만. 지금까지 본서의 역자가 이야기하는 그런 번역상의 오류들이 있다는 것은 인식도 못했다. [이방인]은 내겐 그저 짧은 잔상 같은 이미지 몇 개로만 남아있었기 때문이다. 

 

어머니의 죽음. 장례. 태양. 그날 이후 언젠가의 총격 살인. 오해 받는 재판정. 사형 판결 ... 이 몇가지 이미지가 내겐 [이방인]에 대한 인상의 전부였다. 딱히 그에 따른 감상이랄 것도 없었다. 단지 막연히 부조리한 판결이고 한 인간에 대한 깊이 없는 판단이었다는 해석이 당시의 내 감상의 전부였을 뿐이다. 막연히 뫼르소의 정서가 메말라 있었다고 느끼던 것과는 이번 독서로 다른 감상을 갖게 되었다.

 

청소년기의 감상과는 다르게 자칭 청년인 중년이 된 지금의 독서로는 뫼르소는 메마른 인간이었다 거나 뭔가 정서적으로 불안정했었기에 태양 때문에 살인을 저질렀다는 것과는 다른 감상이 일었다. 

 

[이방인]을 통해 사형을 판결 받은 것은 뫼르소만이 아니고 나 자신까지 였다. 세상의 많은 '나'가 이 소설을 읽으며 사형을 판결 받을 것이라는 생각도 들었다. 이방인은 결코 뫼르소만이 아니라 이 시대에 많은 '나'들일 것이다.

 

우리는 항상 모르는 것에 대해서는 과장된 생각을 품게 된다.

나는 반대로 모든 것이 단순하다는 것을 인정해야만 했다.

 

우리가 사형받는 이유는 '나'가 결국 타자에게 있어 미지의 대상이기 때문일 것이다. 예수는 그 당시 유대인들에게 있어 이방인이었다. 병자를 치료하며 사랑을 말하고 겉옷을 원하면 속옷까지 벗어주라며 동행하라던 그가, 칼을 주러왔다 불을 던지러 왔다고 말하며 폭력을 행사하기도 마다하지 않던 바로 그였다. 그는 대중에게 단정지을 수 없는, 정형화할 수 없는 대상이었을 것이다. 천국을 말하다가 종말의 시기를 말하면서 너희 세대 안에 그날이 닥칠 거라던 것도 그다. 어느 모로 보나 그 시대 사람들과 지도층들이 불안해 하기에는 충분했다. 가난하고 소외 받는 사람들과 어울리던 그였지만 정작 대중들마저 그에게서 등을 돌렸다. 너희는 바라바와 예수 중 누구를 살리겠느냐는 빌라도의 물음에 대중은 망설이지 않고 도둑인 바라바를 선택했다. 예수의 모든 말과 행동은 그에 대한 판단을 내리기에는 혼란스럽고 불안정한 것들이었다. 그는 미지의 대상일 수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대중은 나름 신중한 판단을 했을 것이다. 저자는 우리에게 있어 이방인이라고 말이다.

 

그리고 그런 이방인들이 우리 시대에는 무수히 흩어져 있지 않나 싶다. 대중은 또 손쉽게 사형을 판결할 것이다.

 

어떻게 나는 사형 집행보다 더 중요한 게 아무것도 없다는 걸, 

요컨대 그것만이 한 인간이 정말로 관심을 가져야 할 유일한 것이었다는 걸

깨닫지 못했던 걸까!

 

어쩌면 우리는 사형 판결을 받기 위해 이 땅에 태어난 것인지도 모른다. 우리보다 늦게 그런 판결을 받는 사람들을 뫼르소가 느꼈듯, 특권을 지닌 것으로 느끼게 될지도 모르지만 그런 이들은 심각한 고문 휴유증에 시달릴 것이다.

 

"... ... 그런데 우리의 명령은 '너희들은 이러이러하다.'이네.

우리가 이곳에 끌고 온 사람 가운데 우리에게 끝까지 맞선 자는 아무도 없었네.

모두 깨끗이 치료되었네. ... ...

난 그들이 점점 약해져서 흐느끼며 바닥을 기고 눈물을 흘리는 모습을 보았네.

그것은 고통이나 공포로 인해 흘린 게 아니라 진정으로 참회하며 흘린 눈물이었네.

심문이 끝났을 때 그들은 단지 인간의 껍데기에 지나지 않았지"

 

[1984] 중 오브라이언이 윈스턴을 고문하며 한 이 말처럼 대중의 대다수는 끝내 깊은 고문 속에서 인간의 껍데기가 되어 살아남는 것이다. 그리고 그렇게 살아남지 못하는 이들은 결국에 사형 판결을 일찍이 받을 수밖에는 없다. 사형 판결을 받는 이들 역시 결코 적은 숫자가 아닐 것이다. 

 

하지만 예수도 뫼르소도 진정 그들을 이해한 이들로 부터 사형을 당하는 것이 아니다. 그들에게 사형을 판결하고 교화시키려는 어느 누구도 그들을 오해하지 않는 자가 없었다. 무엇보다 판결을 하고 교화를 하려는 어느 누구도 사실을 알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렇습니다. 이 소송의 모습이 이렇습니다. 

전부 사실이면서 사실인 것은 아무것도 없는 것입니다.!"

-뫼르소의 변호인에 변론 중에서

 

사람들은 사실을 본다고 생각하지만 그들의 눈에 담기는 것은 오해 이상인 것이 없다. 2+2가 5가 되는 현실에 익숙해져 버린 이들에게는 2+2는 5뿐만이 아니라 1도 2도 3도 될 수 있는 것이다. 그들은 더이상 사실을 판별할 의지를 잃어간다. 그러니 자연히 자유는 구속도 억압도 되고마는 것이다. 서로가 이렇다는 것을 분별하고나면 누구나가 서로에게 이방인이 되고 서로에게 사형을 판결하고야 말게 되는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악순환은 영원히 지속될수도 있다. [1984]에서 오브라이언이 윈스턴에게 했던 말처럼 말이다. 개인에게서도 사회에게서도 영원히...

 

"여기에서 자네한테 무슨 일이 일어났든지 간에 앞으로 영원히 계속될 걸세"

 

나는 재판정에서 사형 판결을 받고 싶지도 않고 어느 사제에게 교화의 대상이 되고 싶지도 않다. 그렇다고 오해 아닌 이해를 받고자 애원하고 싶지도 않다. 나는 당당히 이방인이 될 것이다. 그런채 떠날 것이다. 세상에 머물더라도 세상을 떠나있고 싶다. 그러게 이방인임을 떳떳히 밝힐 것이다. 

 

뫼르소에게서 '나'를 찾은이들은 결국엔 자신이 이방인이었음을 언제나 자각하던 이들일 거다. 어쩌면 지금 이 순간 깨닫게 된 이일지도 모르고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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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4 더클래식 세계문학 컬렉션 (한글판) 19
조지 오웰 지음, 정영수 옮김 / 더클래식 / 2020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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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은 평화 

자유는 구속

무지는 힘

 

디스토피아... 이 소설은 반 유토피아를 그리고 있는 앞서간 시대의 창조적 소설이다. 소설이 출간된 시대가 1949년이기에 조지 오웰이 바라본 미래 1984년은 우리에게는 이미 과거이다. 하지만 그가 전망한 시대가 과연 소설가의 공상에서 그치지만은 않다는 걸 느낄 수도 있는 소설이다. 

 

조지 오웰은 몇 차례의 전쟁들을 거치며 전체주의에 대한 반감을 갖게 되었다고 한다. 그의 생몰연대(1903.6.25.~ 1950.1.21)를 보면 그가 어떤 전쟁들을 거쳤을지 짐작 가능하다. 그가 목도한 시대를 이 시대에는 소설이나 영화로 즐기는 대상으로 삼을 수 있을지 몰라도 조지 오웰 자신에게는 겪어내지 않고는 지나칠 수도 부정할 수도 없는 굴레였을 것이다.

 

그러한 시대를 겪으면서 조지 오웰은 개인의 자유와 사상의 힘에 주목하게 되었다고 한다. 전체주의는 인간에게 부여된 천성을 제한하고 국가나 공동체의 부속물로 인간을 폄훼하는 제도로 인식했던 듯하다.

 

이 글 맨 위의 슬로건은 그가 그리고 있는 1984 속 오세아니아라는 국가의 대중적 구호로서 모든 것이 전도되어 있고 대중을 심리통제의 대상으로 여기는 소설 속 정부와 지배층의 속살을 도입부부터 엿보게 하는 매개이다. 이런 얼토당토 않은 구호로 사람의 이성을 마비시키고 통제할 수 있을까 싶었지만 소설 종반에 이르러서는 이것은 가능하고 남는 체제이구나 하는 갑갑함이 일고 만다. 

 

1984의 시대는 오세아니아, 유라시아, 동아시아 3개의 대륙 국가로 나뉘어 전쟁이 끊이지 않는 시대이다. 주인공 윈스턴은 오세아니아에 속한 정부 공무원으로 출판되거나 보도되는 모든 문장들을 검열하는 부서에서 일하고 있다. 그 시대에는 신어라고 해서 신조어들을 계속 만들어내고 기존의 어휘들을 대대적으로 폐기하고 있는 때이기도 하다. 윈스턴은 신조어들도 다수 만들어내 그 시대의 창의성과 자기주도성을 완전히 억압받는 기조에서 나름의 자유를 영유하고 있는 지식인이기도 하다.

 

소설 중후반에서 그의 동료가 구속된 상황에서도 자신의 딸이 잠든 자신이 반국가적 잠꼬대를 한 것을 고발해서 구속되었다며 자신의 딸을 자랑스러워 할 정도로 개개인들의 깊은 세뇌가 일상이기도 한 시대이다. 조지 오웰은 이렇게 전쟁과 구속과 세뇌와 함께 언제 폭격받을지 모르는 황폐한 시절을 그리고 있다.

 

그 상황에 윈스턴은 지식인다운 것인지 국가에 반하는 의식을 지닌 채 살아가다가 형제단이라는 혁명단체에 끌리기 시작한다. 그와 함께 결혼과 출산까지 강제하는 국가에서 원치도 않던 결혼을 하여 형식적인 결혼 생활을 했던 그는 아내와 사별 후인지 이혼 후인지 명확히 기억나지는 않지만 혼자가 되어있다. 그는 줄리아라는 아름다운 여성을 보고 강간을 하고 죽일 마음을 먹었는데 어찌 줄리아는 그에게 반해 그와 내연의 사이가 된다. 국가는 결혼과 출산 뿐만이 아니라 섹스와 사랑까지도 통제하고 있기에 그들의 관계는 다만 몰래 하는 간통으로 간주되고 비밀리에 이어진다. 

 

반국가 단체 형제단에 매료되어 있던 윈스턴은 정부요인 오브라이언을 권력에서 밀려나 형제단에 가입한 사람으로 착각하고 그에게 접근하지만 그와의 대화를 받아주던 오브라이언은 알고 보니 언제나 정부의 핵심인물이었을 뿐이다. 

 

몰래 일탈이되던 줄리아와의 만남 중 윈스턴과 줄리아는 결국 구속되어 끌려간다. 여기까지가 시대 상황과 윈스턴의 내면을 탁월하게도 묘사한 장면들이다. 이후 구속되어 심문 받는 윈스턴과 취조한달까 사상교육이라는 세뇌를 한달까 하는 오브라이언과의 장면들이 이 소설의 백미이자 진미라고 해야 할 것 같다.

 

"그들이 할 수 없는 게 하나 있어요.

그들은 당신이 무엇이든 말하게 할 수 있어요. 뭐든지요.

하지만 믿게 할 수는 없어요. 당신의 마음속에까지 들어갈 수는 없으니까요"

 

윈스턴과 줄리아의 밀회 장면에서 혹시라도 당에 발각되면 어떡하나 두려워 하는 윈스턴에게 줄리아가 하는 말이다. 그녀의 말이 일리가 있어 보이기는 한다. 하지만 과연 그럴까? 소설의 대미에서 윈스턴의 말로末路는 너무도 설득력있으면서도 치밀하고 완숙한 소설가 조지 오웰의 이 소설에 깊은 침묵이 일게 할 정도다. 결국 오브라이언의 말대로 그는 '치료'된 것이다. '온전한 정신을 지닌 사람'으로 말이다. 끝내 '인간의 껍데기'가 되고 만 것이다. 

 

올더스 헉슬리의 '멋진 신세계'(출간 1932년)와 조지 오웰의 '1984'는 자주 비교되며 지금의 시대는 1984와 유사하다 또는 멋진 신세계와 더 가깝다는 평들을 흔히 들을 수 있다. 내가 보기에 그 둘 사이를 오가는 것이 현시대가 아닌가 한다.

 

빅브라더와 텔레스크린이 겉으로 드러나 보이지 않는다고 하기에는 세계 도처가 감시역량이 완연하고 우리의 손이나 호주머니에서는 언제든 우리의 개인정보가 노출될 수 있는 아이폰이나 스마트폰이 우리를 옭죄고 있다. 간단한 해킹만으로도 우리의 일상은 발가벗겨질 수 있는 시대다. 더더군다나 아직은 미미한 저항이 있다고는 하지만 AI나 빅데이터를 통한 맞춤광고가 일반화된다면 우리의 기호마저도 노출될 수도 유도될 수도 있는 시대이다.

 

태어나면서 부터 세뇌되어 아무런 저항없이 정형화되어 살아가는 '멋진 신세계'적인 세계상도 우리 사회에서 일상적이고, 감시되고 제어되며 강제 세뇌 당하는 '1984'적인 세계상도 우리의 일상 중 하나이다.

 

현시대의 교육제도는 각 가정의 개성있는 양육 환경을 단일한 교육으로 무력화 한 후 보편적인 사고를 하는 인간 군상들을 대량 양산해내고 있으니 '멋진 신세계'적이랄 수 있다. 또 한편으로는 정치성향이나 사회생활에서의 정보들을 각기의 색깔을 지닌 해석으로 정제된 언론 매체를 통해 전달 받기에 '1984'적이랄 수 있다. '1984'적인데 자신이 흔쾌히 맞추어 따라가기에 '멋진 신세계'적이랄까. 

 

"니 편 내 편으로 분열적인 사회상이 그렇게 전체주의적인 것은 아니잖아!" 라고 보는 이에게는 해줄 말이 없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세계는 단지 백신 의무화 하나만으로도 이 세계가 얼마나 전체주의적인지를 말해 주고 있다.

 

인간을 부속물로 보는 것이 아니라면 접종 이후 반드시 몇 %는 부작용을 앓고 몇 %는 반드시 죽는 백신을 강제 접종하겠다는 판단을 할 수는 없는 것이다. 그것도 국민의 80% 이상이 접종하고도 거듭 확진자들이 나오고 사망자들이 즐비한 상황에서 효용이 의심스러운 그것을 강제접종하겠다는 것은 일부가 죽거나 불구가 되더라도 공동체를 위해서라면 그 정도 희생은 감수해야 한다는 전체주의적인 사고가 아니라면 불가능한 것이다. 

 

전체주의는 나치즘이나 파시즘, 공산주의의 전유물이 아니다. 이 시대 상황이 말해주고 있다. 너희는 전체주의 세상에서 달콤하게 세뇌되어 쌉쌀하게 통제받으며 살아가다가 불맛을 보며 죽어갈 것이라고 말이다. 

 

이번 20대 대선의 결과는 윤석열 당선인의 당선으로 완만하게 결정났지만 그 과정에서 민주당의 부정선거 증거들이 속속 등장했다. 그래서 500 명이 넘는 사람들이 이의를 제기하고 소송을 걸고 유투브를 올리고 sns에 기록을 남기고 리트윗을 했다. 결과는 400명하고도 몇 십명의 사람들이 기소된 것이다. 기소 이후의 뉴스는 보지 못했으나 기소가 취하된다고 하더라도 증거들 마저 있는 사안들에 국민의 눈과 귀를 가리려 드는 현상황은 1984가 그리고 있는 시대 상황 보다 나은 것인가 싶기도 하다. 박근혜 대통령 때 이미 당시 여당의 부정선거가 논란이 되었었다. 정권이 교체 되고는 총선을 부정선거로 물들였고 대선에서도 시도 하다가 탄로나자 국민을 난동자와 범죄자로 둔갑시키고 있다. 여야가 모두 돌아가며 부정선거 전적이 있기에 부정선거 사범은 사형인 한국법의 준엄함 앞에서 결코 여야 정치인 중 그 누구도 부정선거를 문제 삼지 않고 있는 것이 현상황이 아닌가 한다. 

 

그런데 대중은 모두가 그러려니 하고 있다. 설마 설마 하고 있다. 부정선거로 우리의 권리가 침해 당하고 있고 이번에도 침해 당할 뻔 했다. 그런데도 설마 설마 한다. 전세계가 백신 의무화를 강제하기 시작하고 있고 한국도 그러자는 후보가 단일화를 하더니 인수위에 앉아 있는데 이 역시 그러려니 설마 설마다. 모든 것이 온전히 세뇌 받아온 현실이었기에 가능한 것이리라. 그래 아직은 백신 의무화나 미접종자에 대한 규제가 드러나지 않으니 그럴 수 있다고 본다. 헌데 백신 의무화 이후에도 대중이 아무런 움직임이 없다면 이 나라 대중들에게는 답이 없는게 아닌가 한다. 아직은 깨어날 수 있을 여유가 있을 때다. 이 시기에 깨어나지 못한다면 다음이 있으리라고 어찌 장담할 수 있을까?

 

나는 달콤하고 쌉쌀한 게 싫다. 그리고 끝까지 불맛을 보지는 않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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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토리텔링 바이블 - 작가라면 알아야 할 이야기 창작 완벽 가이드
대니얼 조슈아 루빈 지음, 이한이 옮김 / 블랙피쉬 / 2020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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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서를 작법에 대한 기초라던가 소설쓰기 기법의 기본을 배우고 싶어서 선택한다면 다시 한번 생각해 보시라 말려야 하나 싶다. 단지 배경 항목만 읽고 쓰는 감상이라 적확한 지적은 아닐 수도 있다. 하지만 나와 같은 의도로 읽는 분들이라면 다소의 실망감이 일수도 있는 저작이라고 생각되었다.

 

나로서는 문학에 대한 정보는 그다지 없는 상태로 웹소설을 쓰면서 한계가 느껴지기에 본서와 같은 작법서도 필요하다고 생각하고 고른 책이었다. 그런데 본서의 '배경'이란 항목을 펼쳐보고는 기대와는 다른 책이란 걸 뒤늦게 깨달았다. 

 

내가 기대한 '배경' 항목의 내용은 묘사와 서술의 기본기였는데 본서는 심층적인 면에서의 묘사가 독자에게 주는 영향을 논하고 있었다. 장기적으로 볼 때는 필요한 접근이겠으나 글쓰기가 처음인 초보에게는 그보다 우선하는 정보가 따로 있다고 생각된다. 

 

[소설쓰기의 모든 것]이라는 시리즈를 우선 읽고 본서는 천천히 읽어도 될 저작이 아닌가 한다. 주제나 심의가 담긴 작품을 쓰는데 필요한 저작이지 글쓰기의 발걸음을 이제 막 내딛는 이들에게는 우선순위에서 조금 뒤로 미뤄둬도 될 책이라고 판단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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