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떻게 이슬람은 서구의 적이 되었는가
타마라 손 지음, 김문주 옮김 / 시그마북스 / 2017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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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슬람 관련 저작들을 연이어 읽게 되었는데 이 책을 마지막으로 중동 관련 저작들은 좀 쉬려고 한다. 비슷한 주제를 다양한 시각으로 접하며 오는 재미와 유익도 크기는 했지만 좀 물리는 감이 있어서다. 중동 관련서들을 이 책까지 4권째 읽었는데 독서 순서를 나름 잘 정해서 읽었다는 생각도 들었다. 간추린 중동사로 시작해, 중동의 정체성에 대한 관점을 접하고, 그 정체성을 지속하는데 정치성이 연계되어 있으며, 최종적으로 이슬람과 서구가 서로를 적으로 인식하게 된 까닭으로 정리되니, 연이은 독서가 제법 체계적으로 정리되는 것 같았기 때문이다.

 

본서는 6개의 장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나로서는 크게 세 가지 의미로 정리되었다. 이슬람이 서구를 적으로 인식하게 된 까닭은 무엇인가, 테러리즘에 대한 이슬람 주류의 인식은 어떤가, 이슬람과 그 반대 진영의 공존 가능성은 있는가 하는 세 가지 관점에서 독서가 의미를 갖게 되었다.

 

이슬람이 서구를 적으로 인식하게 된 배경은 세계대전들 이후 이슬람 각국의 국경선이 다시 구획 지어지면서부터 시작된다. 물론 그 이상의 페르시아나 오스만 제국 이전까지도 거슬러 올라갈 수 있을지 모르지만, 현대의 서구와의 갈등과 충돌이나 이슬람 내부에 갈등의 시작점은 서구가 이슬람 각국의 국경선을 자신들의 의도와 이점에 맞게 나뉘도록 모의한 것에 있다. 이로 인해 이슬람은 민족 갈등에 놓이게 되었고 서구의 삼중 협약으로 인해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 문제도 야기되게 된 것이다. 그 이후로도 서구와 미국은 자신들의 이익에 따라 이슬람 각국에서 반정부적인 무장 단체들을 지원하거나 육성하기도 하고, 각국 정부를 지원하거나 타국가를 침략하기 위해 이용하기를 반복해왔다. 아프가니스탄과 이란과 이라크에 대해서는 우리나라 사람들이 상식적으로도 그 대략을 알고 있기도 하다.

 

서구와 미국의 역사적인 이런 사례는 너무도 많기에 그 중 대표적인 한 국가의 사례만 예를 들자면 이란을 견제하고 침략하기 위해 이라크를 이용한 경우를 예를 들어야 할 것 같다. 이란을 견제하려 이라크를 지원한 미국은 이란-이라크전을 유도했으며 전쟁 이후에는 팽창하는 이라크를 제압하기 위해 제재를 가했고 이 제재로 인해 이라크의 어린이만 50만 명이 기아로 사망했다. 이에 대해 인터뷰에서 질의를 받은 당시 미 국무부장관 올브라이트는 마땅히 치러야 할 댓가라고 생각한다는 답변을 했다가 전 세계적인 지탄과 이슬람 전체의 공분을 샀다. 어린이만 50만 명이 굶어 죽은 상황을 보고 마땅히 치러야 할 댓가라니 신중하지 못한 대꾸였을 뿐만 아니라 인간으로서 할 생각 자체가 아니었다고 생각된다. 타국의 제삼자인 나로서도 이런데 이슬람 사람들이 어찌 공분하지 않을 수 있었겠나? 그리고 모두가 알다시피 이라크의 말로는 미국 정보계의 이라크에 대량살상무기가 있다는 보고로 인한 이라크 정권의 궤멸과 사담 후세인의 처형이다. 아시다시피 대량살상무기가 있다는 첩보는 착오였거나 모략이었다. 착오였을 가능성보다는 이라크 정권 궤멸을 위한 미국의 모략이었다고 해석하는 것이 미국인을 제외한 대다수 사람들의 상식일 것이다.

 

상징적인 단 한 나라를 사례로 들었지만 이슬람이 서구와 미국에 분노하는 이유를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무장 집단을 지원해 이슬람 각국을 견제하거나 정권을 바꾸는 것도 일상인 미국이었고 이란의 역사적 흐름을 바꾸지는 못했으나 이란 혁명 당시에도 혁명의 반대 극부인 팔라비 왕조를 지원한 것이 미국이다. 이쯤이면 이슬람이 미국과 서구에 저항하는 이유는 충분히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반면 미국과 서구측은 자신들의 이익에 반하는 이슬람의 정권들이나 자신들에게 무력으로 저항하는 무장단체들을 통해 자신들의 안정에 위협이 가해진다는 다소의 불안을 느낀다는 것이다. 그것도 911 테러나 프랑스 테러처럼 일상에서 어느 순간 마주칠지 모르는 돌발적이고 강렬한 타격으로 다가오는 불안이고 말이다. 서로의 시민들은 상대 국가나 상대의 무장 단체들이 불안하고 심각하게 거슬리고 해결되어야 할 문제로 다가올 것이다. 더구나 서구와 미국에게 있어서는 자신들의 이익 추구와 대전략에 있어 이슬람 원리주의는 동요와 위협으로 받아들여질 것이다. 그러나 그들 서구와 미국은 이슬람이 저항할 수밖에 없는 외세인 것이다.

 

그렇다면 이 두 문명에게는 공존 가능성이 없을까? 그에 대한 답을 하기 전에 일반 무슬림들의 테러리즘에 대한 상식부터 언급해야 할 것 같다. 미국법상 테러리즘은 민간인을 위협하거나 정책이나 정부의 행위에 영향을 주려는 의도로 행하는 무력행위를 포함한다. 이슬람 율법상 테러리즘은 불특정 피해자에 대한 폭력을 포함하며 이들이 테러리즘을 이야기하는 히라바는 불특정 피해자를 대상으로 한 폭력을 이야기한다. 이슬람의 인사인 앗살람 알라이쿰이라는 말은 그대에게 평화가 깃들기를이라는 뜻인데 여기서 평화는 전쟁의 부재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안전함과 행복함을 느끼는 상태로서의 평화를 의미한다. 저자는 그렇기에 히라바는 이슬람의 대척점이 된다고 말하고 있다.

 

이슬람 종교지도자들은 테러리스트들이 신과 이슬람이 중시하는 모든 것에 역행한다며 비판하기도 한다. 하지만 저자의 주장과는 다르게 사실 그들의 비판 중 누구든 살해나 부패 이외의 죄를 벌하기 위해 인간을 살해하는 자는 인류 전체를 살해한 것이다. 그리고 누군가의 생명을 구한 자는 인류 전체의 생명을 구한 것이다라는 (코란 532)을 인용한 조항은 부패한 자는 죽여도 된다고 해석되기에 테러의 피해대상을 부패한 자와 부패한 집단으로 지목한다면 그들의 테러 행위를 정당화할 수 있는 조항이기도 하다.

 

죄를 짓지 않은 자는 다른 이의 죄를 대신할 수 없다(코란 1715)의 조항도 피해 대상이 죄인이라고 정의해 버리면 그 효용성이 없어져 버리기에 테러 행위근절에는 무용지물인 조항이기도 하다. 그저 예수가 인류의 죄를 대속할 수 없다는 반기독교적 해석을 주는 용도로나 쓰일 법한 조항이 아닌가 싶다.

 

다만 그럼에도 저자가 해주는 일반적인 이슬람 시민들의 관점과, 이슬람 원리주의자가 아닌 이슬람 지도층들의 테러에 대한 견해와 종교적 관점은, 작지만 공존의 가능성이 아예 없지는 않겠구나 하는 생각도 들게 한다. 그러나 현재의 이스라엘-팔레스타인 상황이나 확전 양상으로 중동전쟁으로 나아가는 현실을 보며 이상을 현실화하기란 쉽게 내뱉는 말만큼 쉽지는 않겠구나 싶기만 하다.

 

그럼에도 본서는 이슬람과 서구의 관계와 테러집단의 영향력, 그에 대한 서구와 이슬람의 대응과 반응, 서로가 공존할 수 있을지 가능성 등을 돌아보게 만드는 양서이다. 중동의 역사만이 아니라 이슬람과 서구의 대립을 이슬람의 입장이자 이슬람학 전공자인 미국인의 입장에서 들어볼 기회가 되어주는 책이기도 하다. 이 세계사적 대립 상황에 대하여 서구의 입장에서도 또 제삼자의 입장에서도 들어보았다면 피해자이자 가해자인 그들의 입장에서도 들어보아야 하지 않을까 싶다. 그런 까닭에 적은 분량이지만 양서라고 느껴지는 책이다. 중동 관련 저작을 읽어보신다면 이 한 권도 눈여겨보셔야 하리라 말씀드려도 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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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슬람 전사의 탄생 - 분쟁으로 보는 중동 현대사
정의길 지음 / 한겨레출판 / 2015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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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재의 중동 문제로 중동에 대해 간략히라도 알고 싶은 마음에 몇 권을 읽게 되었다. 몇몇 저서를 읽으며 한 가지 사안에 대해서도 다양한 관점과 시야의 책을 두루 보는 것이 사안을 이해하고 다각도로 사유하기에 유익하구나 생각됐다.

 

[IS 지하디스트 그리고 이슬람]이란 책을 통해서는 간략히 요약된 중동사를 접할 수 있었고 이슬람이란 어휘의 의미에 대입해 이슬람 원리주의를 이해할 수 있었다. [중동은 왜 싸우는가]는 중동에서의 서구 세력의 영향력에 대한 이슬람 사람들의 저항이 자신들의 정체성을 공고히 하기 위한 의식있는 저항으로 드러났다는 감상을 갖게 되었다면. 본서 [이슬람 전사의 탄생]을 통해서는 서구의 이슬람 침탈과 전략의 의도를 좀 더 다채롭게 알 수 있었고 그에 대해 저항하며 일어난 이슬람의 저항이 비단 신에게 복종하며 자신들의 정체성을 찾기 위한 운동만이 아니라 다분히 정치적인 움직임이기도 했다는 감상을 갖게 되었다.

 

[중동은 왜 싸우는가]21개의 장으로 중동의 역사를 나름 상세히 조망하는 기회였다면, 본서는 각 단락별로 중동 각국의 역사를 다루기 보다는, 중동의 정세와 전세를 통해 이슬람 원리주의가 확산하고 기세가 확장되며 일어난 정치적 분쟁과 결탁의 면면을 보여주고 있다.

 

이슬람 원리주의라며 무장단체들이 일어서지만, 그들이 이슬람 민중을 다 대변하는 것도 아니며 각국의 정부에 저항하는 이유도 각국 정부가 타락해서가 아니라, 자신들 스스로를 신의 권위를 대변하는 대리인으로 정하고서 자신들에게 저항하는 측을 신에 대해 대항하는 세력으로 단정하며 정치적 영향력을 확장하고 있다는 걸 본서를 읽으며 느끼게 됐다. 오사마 빈라덴의 알카에다 같은 경우도 사우디의 원조를 받으며 성장하고 유지하면서 각국의 정권 교체 등 정치적 영향력 확대에 전념했었음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아프가니스탄 전쟁으로도 확연히 보이는 건 사분오열되어 보이는 이들 이슬람의 정권과 무장단체들은 외세에 저항만 하는 게 아니라 정치적인 의도하에 그들과 결탁하고 서로서로 반목하거나 공조하며 세력 확장에 주력하고 있었다는 것이다. 그들 스스로가 아무리 알라의 뜻이라며 내세우는 원칙이나 명분들도 그들 스스로에 위세를 확장하고 성장시키는 이상의 의미는 찾을 수 없었다.

 

본서는 제목부터가 [이슬람 전사의 탄생]이듯 이슬람 원리주의와 무장세력의 형성과 확산, 영향력 확대의 과정을 보여주고 있으며 인상적인 대목은 알카에다의 911테러와 그에 대해 응전한 미국 정부의 전략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911 테러 직후 부시 정부는 전 세계 테러에 대한 전쟁이라는 취지로 대응했는데 오바마 정부 때는 알카에다와 그들 테러에 대한 전쟁으로 포커스를 조율했다고 한다. 그리고 911 테러 훨씬 이전부터도 이슬람 각국에서의 전쟁 수행시에도 확전의 우려를 보고할 때 미 정부인사들의 입장은 세계대전으로 확전된다고 해서 나쁠 건 무어냐는 식의 대응이었다고 한다.

 

러시아나 미국, 유럽의 정략적 이슬람 각국에 대한 외교와 전략은 솔직히 이슬람 원리주의 무장단체들의 그것보다 나아 보이는 면이 없었다. 외세의 침탈에 저항할 방법이 테러라는 한 수 밖에 남지 않은 이슬람의 입장이 되려 이해될 지경이다. 이슬람이 극단적인 역사 퇴행적인 태도로 영향력을 개인들에게 미치고 있기에 미국과 서구의 악의적인 정책들이 희석되어 그렇지 이슬람이 받은 침탈을 이슬람 정도의 문화 수준에서 한국이 받았다면 그들과 크게 다르지 않은 행동을 취하지 않았을까 싶기도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기합리화뿐인 이슬람의 폭력적 행태는 정당성이 그들에게는 없어 보이기도 한다. 이슬람과 서구세계의 충돌은 아마도 현재진행 중이고 미래에도 그치지 않을 듯한데 그들의 경전에 가르침을 넘어서는 새로운 서술을 가져올 누군가가 그들에게 나타나 주는 것이 인류적 차원의 유익이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든다. ‘이성은 개들에게나 던져주라는 그들이기에 이성과 대화와 타협을 통한 화해나 화합은 요원해 보이기 때문이다. 그러기 전에는 현재까지와 다름없는 제도의 결과만으로는 결코 이제까지와 다른 결론을 가져올 수 없어 보인다.

 

그래도 중동을 알아가려는 노력은 현재를 알고 겪는 것과 모른 채 감당하는 차이이기에 현격히 다른 삶의 태도와 대응이 아닌가 싶다. 알아야 덜 당황스러운 것은 사실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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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동은 왜 싸우는가? - 정체성의 투쟁, 중동사 21장면
박정욱 지음 / 지식프레임 / 2018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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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재 중동에서의 충돌이 본격적으로 확장될 우려가 큰 가운데 모호하게만 두었던 중동에 대한 상식을 확장하기 위해 중동 관련 저작들에 손이 갔다. 도서관의 유용성을 다시 한번 되새기며 중동 관련서들을 몇몇 읽는 중인데 이 책이 그 두 번째 책이다.

 

부제가 [정체성의 투쟁, 중동사 21장면]이듯 중동사 전반을 아우르며 중동사에 주목할 대목들을 21개의 장으로 나누어 설명해주는 책이다. 무함마드가 신의 계시를 받은 날부터 예언자를 누가 계승하는가가 문제가 된 수니파와 시아파의 분열, 오스만 제국, 이란이 시아파가 된 이야기, 사우드 가문과 와하비즘, 사우디아라비아와 요르단, 이라크가 자리잡은 배경, 터키 공화국의 성립, 이스라엘 건국, 1~4차 중동전쟁, 이슬람 원리주의의 성장, 레바논, 이란의 혁명, 이란-이라크 전쟁, 팔레스타인의 인티파다, 쿠르드족의 투쟁, 알카에다와 911 테러, 시리아 내전까지 중동사의 의미 깊은 대목들을 소개하는 책이다.

 

물론 중동의 역사 중 주목해야 할 대목이라던가 저자가 주목한 국가와 분쟁들에서 배제된 지역들의 역사는 언제든 역사적 중요성이 재정의되며 어디는 다시 줌인 되고 어디는 줌아웃 될지도 모를 일이기는 하다. 하지만 지금까지 대부분의 우리나라 대중들에게 낯선 이야기인 중동사를, 넓으면서도 맥락 깊게 설명해주는 저작이라는 감상이 들게 한다.

 

부제 마따나 이 책의 서술 전체가 중동에 정체성이 부여되고 그 정체성을 뚜렷이 하기 위해 투쟁하는 역사가 담긴 내용으로 이슬람 원리주의가 왜 그리 배타적이며 저항적인지 알 수 있기도 한 것이 오스만 제국을 패퇴시키고 중동의 지도를 재정립하려는 서구세력이 중동에서 행한 유럽 간의, 또 영국과 이슬람 간의, 또 유대인들을 향해서 한 삼중 조약이 문제가 되었고, 서구가 인도를 지키기 위해 이란과 이라크, 아프가니스탄 등을 향했던 적대적 책략, 현대에 이르기까지 산유국들을 향한 책략들 그 외에도 이슬람 각국을 향했던 이익 추구의 행위들은 서구세력의 입장에서는 당연한 외교 정책이었을지 모르겠으나 침탈당하는 입장에서는 뼛속 깊이 아로새겨지는 일이 아니라고 할 수 없을 것이다.

 

서구세력들의 이런 양상은 이슬람의 의식있는 인물들이 정체성을 되찾고 공고히 하고자 하는 태도를 불러올 수밖에 없었다. 와하비즘이 자정을 위해서였다면 이슬람 원리주의는 저항을 배태하지 않을 수 없었다고 느껴졌다. 무슬림 형제단도, PLO(팔레스타인해방기구), 쿠르드 노동자당도 외부와 자신을 선 그으며 자신들의 정체성을 확고히 하고자 하는 의지가 표출된 것이다. 그들은 저항함으로써 자신을 정의하고 있는 것이다. 그들이 저항하는 타자는 그들의 반경에서 멀던 가깝던 외부인 것이다. 자신들이 선 그은 이것이 무슬림이고 이것이 이슬람이라는 그 선보다도 우리를 불안하게 하는 것은 그들의 저항 방식에 있다. 그들은 적극적으로 저돌적이라는 것이다.

 

어쩌면 심정적인 한 부분으로는 우리는 이슬람이 저항하는 자세의 어느 치까지는 이해할 수 있을지 모른다. 일제강점기하의 이토 히로부미에 대한 저격도 다 한발만이었는지, 도시락 폭탄도 단 한 명에게만 피해가 가도록 세밀히 조율되었는지, 독립운동단체들이 상대국 민간인들에게는 절대 인명 피해가 가지 않도록 배려했는지 우리로서는 알 수 없으니 말이다. 나라를 잃거나 자주적인 권리를 잃은 이들이 불균등한 무력차 앞에 놓였을 때 선택할 수 있는 하나는 테러일 수 있음을 우리는 안다. 상대국의 지식인이 나는 안다. 테러리스트의 슬픈 마음을”(코코아 한 잔 - 이시카와 다쿠보쿠)이라고 노래한다고 해서 그가 나라 잃고 자주적 권리 잃은 사람의 마음을 알 수 있으리라고 기대할 수는 없다. 하지만 우리는 알아야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평화의 시대에 평화에 젖어버린 우리로서는 기억을 다시 떠올리기 어렵다.

 

그저 그들이 처한 현실을 이해하지만 과격하기에 문제는 커진다라던가 정치적인 인물들로 인해 사태가 확장되고 있다고 단정 지을 수밖에 없지 않은가? 우리는 이제 평화와 안락에 젖어 테러리스트의 심정이 우리 심정이던 날을 잊은 세대다. 그들의 심정과 그들의 견해는 우리에겐 이제 낯설다. 모순적이게도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그들과의 공존을 모색해야 한다. 시절이 시대가 그런 아이러니에 우리를 몰아넣었다.

 

그들과 공존하는 법은 쉽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그들에게 잃어버린 자주적 권리를 되찾아 준다 해도 그들의 이슬람 원리주의는 그들 내부에서 곪아터지기 쉬운 상태 같다. 복종을 뜻하는 이슬람이라는 용어대로 복종하는 가운데 남는 여분으로의 여성 인권과 자유에 겨우 만족하는 그들이지만 언제까지 그런 상태로 머물지는 못할 것이다. (그들의 신본주의만큼이나 대다수 국가의 인본주의도 분명 문제는 있다. 하지만 그 문제를 수긍할 때 인본주의에서는 개선의 여지가 있다고 해도 신본주의에서는 문제를 수긍하는 자체가 불가능하다)

 

지금의 문명의 충돌을 거치고 잦아들 때 그들 내부의 격돌이 시작될 것이고 그런 내부의 격돌을 무마하기 위해 그들은 다시 외부의 적으로 눈을 돌리게 만들 것이다. 우리는 돌고 도는 도돌이표 같은 문제에 직면해 있다. 이스라엘이 승리를 거듭한다고 기독교도들이 찾는 예수 재림으로 오는 천년왕국은 오지 않을 것이다. 그런 천년왕국이 온다면 그건 온 민중이 자신의 뇌를 BCI 기술의 역설적인 작용으로 완벽히 기계에 통제당하는 시대가 도래했음을 말해 주는 것 그 이상은 아닐 것이다.

 

너무 많이 나간 것 같은데 정리하자면, 이 시절을 알기 위해서는 이 시대의 격렬한 맥락들도 이해해야 한다고 생각한다는 것이다. 그런 맥락 중 중동의 역사와 분쟁의 쟁점을 이해하는 것은 중요하지 않을 수 없다. 그 이해의 한 뼘을 위해 이 책이 그리고 저자가 해주는 이야기를 들어보는 것이 나쁘지는 않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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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후 종말론 - 인류사 최대 사기극을 폭로한다
박석순.데이비드 크레이그 지음 / 어문학사 / 2023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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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은 현재의 기후위기설을 넘은 기후 종말론을 체계적이고 근거를 명확히 하며 조목조목 반박하고 있는 저서이다. 대부분에 사람들이 기후위기설이 사회의 일반상식으로 자리매김해 가고 있는 현실에 그에 대한 반대 주장은 음모론으로 치부하고 있을 것이다. 하지만 본서의 부제가 왜 [인류사 최대 사기극을 폭로한다]인지를 본서를 완독한 후에는 명백히 알게 될 것이다.

 

본서는 환경공학자인 박석순 님과 데이비드 크레이그 님의 저작으로 일반상식이 되어버린 기후위기설이 어떻게 문제라며 지적되기 시작했는지, 기후위기설을 주장하는 이들의 주장이 얼마나 오류투성이이고 어떻게 조작되었는지, 그들이 환경에 대한 대응이라며 대처하고 있는 방식들이 얼마나 조잡한 일들인지를 조목조목 나열하며 반박하고 있다.

 

1. 기후위기설의 시작

우선 지금의 기후위기설을 직시하기 이전, 저자들은 1920/1930년대의 지구온난화 주장 시기와 1960/1970년대의 지구냉각화 주장 시기를 돌아보며 서술하기 시작한다. 1920년대와 1930년대는 전 지구적인 기온상승이 폭발적인 시기였다는 게 당시 기사와 각국 기상 관련 부처의 기록으로도 명확히 알 수 있다. 유럽 몇 개 나라와 미국 등에서만 수천 명에 폭염으로의 사망이 지속되던 시기이기도 한데 당시 세계인구가 25억 명 정도였다고 하니 당시 사망자를 현재 인구로 환산하면 해마다 몇만 명씩 유럽의 몇 개 국과 미국에서만 사망한 것으로 볼 수 있다. 당시 폭염 시기 프랑스 온도는 섭씨 50(화씨 177)였다고 한다. 언론과 각국 정부와 사회단체들과 과학자들은 지구 환경을 걱정하며 인류의 과학발전이 환경을 파괴해 인류의 위기를 불러왔다고 주장하기 시작했다.

 

그러다 1960년에서 1970년대에 이르는 동안 지구가 냉각 되는 시절이 왔고 이때는 작물재배가 원활하지 못하고 동사하는 사람들이 많아지자 당시 매체들과 각국 정부들과 사회단체들은 다시 한번 인류의 위기를 외쳤다. 이들이 주장한 건 아이러니하게도 현재 기후위기설 추종자들이 주장하는 바와 같이 산업의 발전으로 인류가 배출하는 탄소와 미세물질들이 환경에 영향을 주어 인류와 지구 내 생명체들을 위기로 몰아넣었다는 것이다. 지구가 냉각화되어가니 탄소배출을 축소하고 산업발전에 제재를 가해 지구를 되살려야 한다는 것이었다. 극 지방의 빙하에 검은 칠을 해 태양 빛을 흡수하게 해서 빙하를 녹이자는 주장까지 나왔다고 하는데 이건 현재 바다에 흡수되는 태양열을 반사하기 위해 바다에 인공염료를 방류하고 있는 실정과도 같다. 당시 과학자라는 사람들은 지구에 빙하기가 닥쳐 인류가 존속할 수 있는 기한은 고작 10년뿐이니 하는 극단적인 발언을 서슴없이 한 게 기사로도 남았지만 그들에게는 불행스럽게도 1980년대에 이르며 다시 지구가 따뜻해지는 시기로 들어섰다. 그러자 당시 지구냉각화로 인류가 멸망할 것이라던 과학자는 지구온난화가 주장되자마자 지구온난화가 인류를 끝짱낼 것이라고 주장하며 환경부처 요직을 차지했다고 한다.

 

사실 지구 과학자들, 환경공학자들의 연구로는 현재는 간빙기로서 다시 소빙하기로 들어서기 고작 200~300년 전인 상황이라고 한다. 간빙기로서 지구가 따뜻했다가 차가워졌다가 다시 따뜻해지고를 반복하는 게 전혀 이상하지 않다는 것이다. 고대와 중세의 기록들과 지층을 분석해도 과거부터 온난화와 냉각화는 주기를 가지고 반복해왔다는 걸 어느 나라의 기록을 통해서나 다 확인할 수 있다.

 

2. 기후위기설과 데이터 조작

기후위기설을 주장하는 이들의 주장은 수치의 보정을 거쳐서 이루어진다는 건 각국 환경부처 관계자 출신들이 커밍아웃하는 식으로 고발해온 전적들이 있다. 본서에서는 짧게 언급되고 있지만, 미국의 NTD 뉴스 등을 통해 보면 환경부처나 정부간 기후 협의체(IPCC)에 데이터를 제공해오던 과학자들이 자신들이 제공한 데이터가 조작을 거쳐 공개되는 것을 보고 환멸을 느껴 그 직위에서 물러나서 학계로 돌아가려 하면, 공권력 차원에서 그들이 어느 대학이나 연구기관에도 접근할 수 없도록 차단하는 실정이라고 한다. (그들이 명망있는 위치를 다시 확보하면 그들이 기후위기설을 반대하는 것이 기후위기론자들에게 위협이 되지 않겠는가?) 이건 기후위기설이 과학적 과정과 결과가 아닌 정치적인 과정과 결과로 주장되는 것임을 증거하는 사례들이기도 하다.

 

[지구를 구한다는 거짓말]의 저자 스티브 E. 쿠닌 님도 두 번의 정권 동안 미국 정부의 환경부처에서 관료를 지낸 인물인데 IPCC 등이 제시하는 기후위기설 맥락의 데이터들이 거의 모두 보정이라는 조작을 거쳐 대중에게 공개되는 것을 보고 환멸을 느껴 반기후위기론자로 돌아선 분이다. 그 책보다 본서는 훨씬 더 스토리텔링적이며 대중친화적인 서술을 하고 있어 이해와 수긍이 쉬운 책이기도 하다.

 

앞서 언급한 1920/1930대의 지구온난화 시기와 1960/1970년대의 지구냉각화는 기후위기설을 주장하는 선동가들에 의해 언급에서 배제되거나 더 주장되거나 한다. 그런데 대부분 기후위기설 주장 데이터를 공개 할때는 1960년부터 시작되는 데이터를 주장하는 것은 왜 그런지 수긍할만 할 것이다. IPCC 등이 100년 단위의 데이터를 제공하는 경우에는 1920/1930년대의 기온수치는 최대한 낮추고 1960/1970년대 수치는 적정선으로 올려 기후가 완만히 상승해오다가 2000년대 이후로 급격히 상승하고 있는 그래프로 보정해서 대중에게 공개한다. 본서와 [지구를 구한다는 거짓말]을 읽어보면 얼마나 광범위한 자료가 조작되고 있는지 가늠될 것이다.

 

이산화탄소 등 인간의 개입으로 기후에 문제가 생겼다는 주장이 지속되고는 있지만, 실제적으로는 이산화탄소가 저조하던 시절 기온이 급격히 상승했던 데이터와 이산화탄소량이 상당히 증가했는데 기온이 급격히 하강한 사례가 유의미한 데이터로 남아있다. 기온은 이산화탄소보다는 태양의 흑점활동과 지구궤도 이심률 변화, 지축이동, 대기수중기 분포 변화 등에 더 큰 영향을 받지만, 기후 선동가들은 대기에 최저 상태로 포함되어있을 뿐인 이산화탄소, 메탄, 아산화질소 등을 문제 삼는다. 하지만 이들은 자연계에 극미량 포함되어있을 뿐이기에 이들의 영향력을 극대화해 고려한다 해도 이 세 가지 물질로 지구 기후가 위협적인 섭씨 2~3도 상승하려면 수천 년에서 수백 년의 시간이 걸린다는 게 환경공학자인 저자의 결론이기도 하다.

 

결론 대목에서는 이런 잘못된 데이터, 오류투성이이고 조작된 데이터를 근거로 한 환경 대응의 문제들을 지적하고 있기도 하다. 다만 이것이 오류투성이의 대응인 것은 맞겠지만 그건 대중의 입장에서이고 변화를 주도하는 입장인 그들에게는 모두 철저히 숙고하고 나서 구체화한 계획의 실현이라고 본다.

 

3. 기후위기설의 이유

박영숙 님의 [기후재난과의 전쟁]이라는 저서를 보면 기후위기설을 주장함으로써 창출되는 경제 효과는 실로 어마어마하다. 대부분 새로이 창조되고 인프라도 재설비되어야 하기에 일반인으로서는 기존의 것들을 유지하는 게 낫지 재설비 등은 비용 등의 문제에서도 번거롭지 않을까 유추할 수 있다. 하지만 이로 인해 새로이 창조되는 부의 경우 현재보다 막대한 부를 창조해낼 것이 명백하다. 독일 등 전력회사가 공영과 사영이 융합된 형태의 기업이며 환경친화적인 동력원을 사용하고 있는데 자국 시민 1인당 그들이 벌어들이는 수익은 타국가의 4배 이른다. 게다가 이들이 이런 환경친화적 설비를 할 때 비용 역시 자신들의 자본만으로 감당하는 것이 아니다. 대부분 정부 지원금인 국민들 세금으로 충당하는 것이다. 미국이 자동차 연비 기준을 기존 자동차 연구개발로 따라가지 못할 정도로 올린 이유도 자동차 연비 기준이 정부 제시 기준을 충족하지 못할 때 부과되는 벌금 등이 감당이 안 되고 번거로울 때 대부분의 시민들은 전기차를 선택하게 될 것이 자명하기 때문이다. 지원금만이 아니라 법적 지원까지도 얼마든지 지속되며 부자 여러분과 더 부자 여러분이 막대한 부를 창출할 기회를 열어주고 있는 것이다


기후위기를 대응한다며 조성되고 있는 거대 시장 중 전기차라는 한 가지 예만 하더라도 테슬라만이 아니라 대부분의 전기차 회사에 대해 지원금과 투자자들이 연계되어 있다. 소재인 2차전지, 배터리 뿐만이 아니라 자율주행을 위한 반도체 센서까지 다양한 방면으로 이 투자자라는 금융재벌들을 위시한 초재벌들의 부의 확장에 유리한 것이다.

 

이런 커넥션이 없고는 기후위기설은 금세 반박되고 사라져버렸을 것이다. 전 세계 97.5 퍼센트의 전문가들이 기후위기설을 옹호한다는 발언이 오바마 대통령 시절부터 주장되어왔다. 그러나 실제 논문 수 대비 기후위기설 옹호나 긍정 논문 수는 30% 정도일 뿐이라고 하며 최초 97.5 퍼센트 발언이 시작되었을 때는 전체 논문 중 단 3%도 안 되었다고 한다. 저자는 민주당 지지자가 90명이고 공화당 지지자가 10명인데 중도층이 900명인 상황에 중도층을 배제하고서 전체 90%가 민주당을 지지하고 있다는 발언을 하는 것을 비유했는데, 비유 속의 실제 민주당 지지자가 9%일 때 공화당 지지자가 1%인 것과는 다르게 반기후위기설을 주장하는 전문가들은 천 명을 넘어서고 있다. 기후위기설 주장을 옹호하는 논문 수는 300개(30%)를 조금 넘는 숫자이다.

 

이제는 대중도 일반상식이라며 건성으로 넘기는 현실로 남겨두지 말고 진실을 직시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된다. 이 사기의 궁극적 목적은 그저 주머니만 털어가는 게 아니라 우리의 자유를 앗아가는 것이기 때문이다. 노벨물리학상 수상자가 기후위기설과 기후위기에 대한 대응을 코미디로 치부하고 이산화탄소는 오히려 인류에게 유익하다는 발언을 한 후 미국은 발빠르게 해당 영상 조회를 차단했고 기후위기설에 반대하는 영상과 포스팅들에 대한 접근을 원천 차단하도록 했다. 정치적인 의도로 반대 주장에 대한 접근을 차단하는 것이 바른 행동인지 과연 자유를 억압하지 않는 건지 묻고 싶다.

 

이제는 매체를 믿지 말고 자신의 지성을 믿고 어느 것이 진실인지를 분별할 수 있는 판단력이 요구되는 세상이다. 그렇기에 본서는 더 빛을 발하는 저작이 아닌가 싶다. 본서는 무엇보다 수치와 그래프를 어마하게 다수 제시한 저작이다. 본 리뷰에서는 수치와 그래프를 배제하고 스토리텔링 방식으로 리뷰하였지만 본서를 읽어보시면 보다 명확한 데이터를 직관하실 수 있을 것이다. 본서는 이 시대에 꼭 읽어볼 필요가 있는 저작이다. 이런 저작이자 자료를 간과하시지 않았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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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차 세계대전은 이미 시작되었다
에마뉘엘 토드 지음, 김종완.김화영 옮김 / 피플사이언스 / 2022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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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시아가 마지막 남은 카드는 이제 핵 밖에 없다는 경고를 하고 있는 시점에 이 전쟁의 이유가 대전략적 차원에서 무엇인지 해당 국가들의 선택은 어떻게 될지 짐작해 볼 필요가 있지 않나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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