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팔천 - 나도 사람이 되고 싶다
이상각 지음 / 서해문집 / 2011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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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예란 근본적으로 인격이 부인되고 타인에게 소유되어 개인의 권리와 자유를 박탈당한 인간을 말한다. -p5

 

 한국 역사 속에 노예제도가 오랜 세월 지속되어 왔다.현대사회에는 노예제도라는 명칭은 없지만 그와 유사한 것들이 있지 않을까.즉 사람을 부리면서 임금을 주지 않고,인간 이하의 대우를 하고 있다면 노예취급과 별반 다를 것이 뭐가 있을까.사적으로 사람을 다루며 인간답게 살아갈 권리를 빼앗고 착취하는 입장에 있는 자들이 현대판 노예주는 아닐까.한국사 속에선 《고려사》와 《조선왕조실록》에 민초들의 간난신고(艱難辛苦)가 있을진대 그것이 바로 양천제도 가운데 천(賤)에 해당하는 노예제도임과 동시에 천한 직업으로 불리웠던 것으로 보인다.조선시대의 최하층 계급으로 수탈과 차별에 저항할 능력을 상실했던 천민들의 삶이 『조선팔천』에 잘 나타나 있다.노예 신분에서 벗어나는 길을 도주가 유일했다.도주에서 성공하면 자유인이 되지만 실패하면 목숨을 부지할 수가 없는 신세였다.

 

 조선시대는 양천제도와 반상(班常)제도가 있었다.양반과 천민으로 불리던 신분제도가 조선 후기로 들어서면서 양반과 상민으로 바뀌었던 셈이다.양반을 제외한 천민과 상민은 사회적으로 출세할 길이 없었다고 보면 된다.특히 서자 출신인 서얼(庶孼)은 아버지는 같되 어머니의 배가 다르다는 이유만으로 사회적 신분이 막혔던 것이다.그 입장에 있었던 사람들은 얼마나 억울하고 원통했을까.16세기경 조선 인구의 30퍼센트에 해당하는 150만여 명이 노비였다고 하니 신분차별이 매우 심했던 동방노예지국이면서 한편으론 (아이러니하게도)동방예의지국이라는 딱지가 붙기도 한다.천민으로 불리던 조선의 노비들은 겉으론 출산 휴가,조상 제사까지 지낼 수 있어 하층민으로 분류하는 학자들도 있지만 이것은 민족적 자존심이 개입된 억지 논리에 불과할 뿐이다.노예라는 신분이 1894년 갑오개혁을 통해 해방이 되었지만,아직도 갑의 입장에 있는 일부 몰지각하고 비이성적인 부류들이 을의 입장에 있는 사람들을 노예 이상으로 착취지배하고 있다는 점에서 이에 대한 통절한 반성과 사회적 모순을 고치려는 노력이 병행되어야 한다.

 

 조선시대는 노비(奴婢)라는 관점에서 하층민을 대하고 있다.노는 남자 종을 일컫고 비는 여자 종을 일컫는다.노비라는 천민을 8가지로 분류하고 있는데,내가 모르고 있었던 신분들이 많아서 어안이 벙벙했다.익히 알고 있었던 노비을 비롯하여 기생,백정(白丁),광대,공장(工匠),무당,승려,상여꾼이 조선팔천에 해당한다.노비 제도는 고조선 시대로 회귀한다.《한서》지리지 고조선의 팔조법금 가운데 노예제도의 기원이 상징적으로 잘 나타나 있다.그것은 범죄자에 대한 징벌이었고,일정 벌금을 내면 노예 신분에서 풀려날 수도 있었다.

 

 남의 물건을 훔친 자는 노비로 사목,자속(自贖)하려는 자는 1인당 50만 전을 내야 한다. -p10

 

 천인에 대한 차별은 양인에 견줄 바가 아니었다.양천제를 바탕으로 부모 가운데 어느 한쪽이라도 천인이 있으면 천인으로 삼는다는 일천즉천(一賤卽賤)규정을 강력 시행했다.노비는 8대까지 천류(賤流)에 관계되지 않아야 관직에 나갈 수 있었다.형벌 조항도 강화되어서 노비가 주인을 배반하고 도망치거나 반항,모욕,모함하는 죄를 저지르면 사형에 처해졌고,아무리 부당한 일을 당해도 주인을 고발할 수 없었다.예외가 있다면 역모와 그에 해당하는 범죄를 고변할 때뿐이었다.반대로 노비가 공적인 죄를 지었을 때 주인은 아무런 책임도 지지 않았다.다만 고려의 노비 가운데 공노비는 60세가 되면 신역에서 벗어날 수 있었고 사노비는 국가의 허가를 받으면 면천이 가능했다.

 

 고려의 정치체제를 일정 부분 이어받은 조선의 신분제는 양천제를 고수해 나간다.조선의 지배계급은 피지배계급의 노동력을 바탕으로 문명생활을 누렸다.시간이 흘러 조선의 신분제도가 지배계급인 양반과 중인,피지배계급인 양인과 천인으로 고정되어 갔다.네 갈로 바뀐 계급의 특징은 다음과 같다.

 

 첫째,양반은 조선 사회의 최상위층에 있던 현직 관료와 전직 관료 그리고 선대의 관료 경력이 4대를 넘지 않는 자손을 총칭한다.둘째,중인은 하위직인 기술관을 비롯하여 서얼(庶孼),중앙의 녹사와 서리,지방의 서리인 호장,육방과 향리 계층을 통칭한다.셋째,양인은 평민으로서 상인도 포함되지만 거의 모두 농민이었다.양인은 공명첩을 사들이거나 뇌물을 바쳐 양반이 된 양인도 있었지만 대부분 허울에 불과했다.넷째,천민은 다양한 직업에 종사했지만 주로 공.사노비가 가장 많았다.《경국대전》이 완성된 성종 이후 신분제도가 가오하되면서 다양한 계층의 천민이 양산되었다.즉 사노비.승려.백정.무당.광대.상여꾼.기생.공장 등이 대표적이다.자유인이 되고 싶어 공명첩,납속책이 발행하여 팔자를 고치려 했던 천민과 '얼어 죽어도 곁불은 안 쬔다'던 양반에 대한 조소(嘲笑)은 극과 극을 달렸다.

 

 조선팔천이라는 천민 계층 가운데는 흥미를 돋구는 부분도 많다.팔천 가운데 최상위 계급인 공노비와 짐승보다 못한 사노비의 운명은 극대조를 보인다.몸을 팔던 유녀에서 노비의 아내가 되고,노래와 춤을 배워 기생이 되었던 장녹수는 연산군의 사랑을 받아 정3품 소용(昭容)의 지위에 오르고 왕자를 셋이나 낳은 인물이다.조선 사회의 최하층 계급으로 신분을 바꾸는 첩경은 역모에 참여하는 길이었던 백정들은 배타적인 생활을 꾸렸다.유랑 및 별도의 부락을 형성하면서 일반민과는 통혼하지 않았다.백정들은 자신보다 나이가 어린 사람에게도 반말을 들어야 할 정도로 인권 사각지대에 놓여 있었다.연산군대 화극으로 잘 알려진 광대 공길(孔吉)은 연산군 앞에서 입바른 소리를 하다 매질과 유배형에 처하기도 했다.『한복 입은 남자』로 알려진 장영실은 본래 공장(工匠)이다.그는 천민에서 당하관의 지위에 오른 입지전적 인물이지만,세종 재위시 어가(御駕)를 부실하게 만들어 탄핵을 받고 죄인의 몸이 되었다.곤장과 함께 그의 이름은 역사에서 사라지고 만다.신과 교접하여 병든 이를 고치고 액사를 막아주던 무당들은 현대인들의 생로병사와 재수(財數)를 관장한다.고려 말의 개혁 정책에서 불교가 1순위 개혁 대상이었다.이어 조선은 숭유억불 정책으로 사찰의 승려들에 대한 괄시와 천대를 일삼게 되었다.왕조와 사안에 따라 불교를 숭불하기도 했고,억불하기도 했다.그리고 끝으로 초상이 나면 사자의 시신은 화려한 꽃상여를 타고 애절한 상엿소리와 요령(搖鈴) 소리와 함께 이승을 떠나게 되는데,산 자의 집에서 죽은 자의 무덤까지 상여를 운반하는 천대받는 신분이 상여꾼이었다.1886년 신분세습제 폐지와 1894년 신분제 폐지로 인해 이 땅에 천민이 해방되었다.시대와 직업의 귀천의식은 바뀌었다고는 하지만 과연 현대판 노예제도가 어딘가에는 있지 않을까 의구심을 떨칠 수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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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문화유산답사기 8 - 강물은 그렇게 흘러가는데, 남한강편 나의 문화유산답사기 8
유홍준 지음 / 창비 / 2015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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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남한강변의 문화유산과 풍광을 따라

 

 온달산성

 

 유구한 역사 속에 남겨진 문화유산은 어떻게 보존하느냐에 따라 후대를 살아가는 후예(後裔)들에게 올바른 정체성과 자긍심을 안겨 준다.또한 탈산업화 시대를 맞이하여 국가의 경쟁력은 굴뚝,쇠망치와 같은 경성질의 산업이 아닌 유.무형문화재와 같은 연성질의 문화산업이 아닐까 한다.그래서 연성질의 문화산업이 발달한 나라들을 보면 자국의 역사,문화에 대한 애착과 자긍심이 매우 탁월하다는 것을 느끼게 된다.대표적인 나라들이 유럽 각국과 일본과 같은 서구 선진국이다.유장한 역사 속에 민초와 위정자들의 흔적과 숨결이 고이 담겨진 문화유산은 몇 세대의 시공간을 훌쩍 넘어 선인들과 무언으로 소통을 하면서 당시의 개인 및 사회.국가의 명암을 들춰낼 수가 있다.일종의 과거사와의 소통법이라고 생각한다.

 

 청령포

 

 유홍준 저자의 『나의 문화유산답사기』 시리즈는 접하면 접할수록 마음 든든해진다.좁디 좁은 한반도(22만㎢) 면적에 혼자 보기 아까울 정도의 멋진 풍광과 예스럽고 투박한 문화유산들이 산하에 산재되어 있다.산공에서 보면 어린이 장난감 내지 성냥개비보다 더 작은 것들이 가까이 다가서 보면 압도적인 육중함을 선사한다.게다가 사계에 따른 풍광의 다채로움과 유산들을 제작하던 당시 제작자,위정자들의 이심전심의 합심 단결이 잘 녹아져 있다는 것을 마음으로 느끼게 한다.그렇다고 꼭 좋은 일만 있는 것은 아니다.정치 권력의 역학 관계에서 밀려난 이들의 삶의 종착점은 애잔하고 스산하기만 하다.권력의 무상함을 안겨 준다.나아가 이런 저런 사유로 인해 없어져 버린 폐사지(廢寺址)는 깊은 애상에 젖게 한다.풍광과 문화유산이 잘 조화된 곳은 내내 발길을 묶어 놓기라도 하듯 떠나기가 싫어진다.

 

 영월 서강의 한반도 지형

 

 강원도 영월 주천강(酒泉江)에서 시작하여 남양주 양수리 두물머리까지를 남한강이라고 한다.이번 문화유산답사기가 강원도 영월을 시작하여 단양.제천.충주.원주.여주로 이어지는 여정이다.당일치기도 가능하지만 좀 더 구체적으로 완상하려면 2박3일 내지 4박 5일도 좋을 것이다.이것은 어디까지나 개인의 여건에 따른 것이다.영월 동강과 서강이 만나는 남한강은 법흥사,요선정(邀僊亭)이 답사처로 관객을 부른다.한반도 지형을 빼닮은 서강은 조망대에서 바라보면 절경에 압도되어 찬탄이 절로 나올 것이다.그리고 남한강의 핵심을 제천과 단양으로 삼고 있는데,단양8경과 문인들이 남긴 발자취는 이번 도서의 핵심이고 백미이다.남한강 주변의 행정구역도 시대,인구 증감에 따라 변천이 있었다고 한다.남한강의 사군(四郡)으로 불렸던 제천.청풍.단양.영춘 등지가 충추호(또는 청풍호)댐이 생기면서 크게 영월,제천,단양,충주로 나뉘고 있다.

 

내륙의 바다 청풍호 

 

 예스24에서 개최한 충청도 문화답사기에 단양을 구경한 적이 있다.유람선을 타고 빼어난 경관을 자랑하는 옥순봉,구담을 먼발치에서 바라보았다.멋진 시복이었다.유홍준 저자는 남한강편에서 꽤 많은 사진과 도화를 삽입하여 독자들에게 현장감을 살리고 있다.조선시대 김홍도 화원이 그린 병진년 화첩에 그린 옥순봉도는 절경 중의 절경이고 한적한 평화스러움이 잔뜩 묻어 난다.충주호가 생기면서 구단양은 거의 없어지고 신단양으로 헤쳐 모여식이 되어 버렸다.수력발전소를 세워 용수부족을 채우려는 목적은 좋으나 문화유산에 대한 배려가 많이 부족하지 않았나 싶다.나말여초에 세워졌던 각종 사찰들의 모습은 고색창연함을 더해 주는데,외침에 대한 수호신의 존재였고 방패막이었다.

 

 망향탑과 금표비

 

 단종의 원귀가 금방이라도 출현할 듯한 육지 속의 섬인 청령포의 상쾌한 풍경과 그 이면의 애잔함(단종이 쌓은 망향탑)은 정치권력의 무상함을 일깨운다.방랑시인 김삿갓의 묘와 조각물도 영월에 있다.영월을 벗어나 충주호로 몸을 돌리면 마음은 담대하게 되고 묵은 심상들이 모두 씻겨져 갈 듯하다.그것은 내륙의 바다 청풍호가 자랑하는 호반과 뭍의 천변만화하는 자태가 아닐까.청풍에서 유숙했든 스쳐 지나갔든 옛 문인들의 발자취가 한시와 함께 서정성을 자아낸다.이황,유성룡,윤선도,정약용 등 학식.문장.경륜이 탁월한 분들이다.정자.누각과 관련하여 일본인 민예학자 야나기 무네요시 한.중.일 3국의 미술적 특성을 비교하면서 '중국 미술은 형태미가 강하고,일본 미술은 색채감각이 뛰어나며,한국 미술은 선이 아름답다'고 했다.도자기의 특성도 빼놓지 않고 있다.중국 것은 권위적이고,일본 것은 명랑하고,한국 것은 친숙감이 감돈다고 했다.그 친숙감이 정자 또는 누각에도 느껴져 손으로 스킨십이라도 해 보고 싶었던 모양이다.

 

단양팔경 일부

 

 풍광은 단양8경이 최고이다.나는 8경을 모두 관람하지 않아 내내 아쉽기만 하지만 기회를 엿보아 가족과 함께 단양8경 여행을 떠나려 한다.구담,옥순봉,도담,석문,사인암.상선암,중선암,하선암이 8경이다.상.중.하선암은 대홍수에 육중한 돌들이 씻겨 내려가 바위 글씨들이 많이 손상되었다고 한다.충주,단양에는 삼국시대 대외관계를 나타내는 비석들이 남아 있다.중원(충주) 고구려비와 단양 신라 적성비가 바로 그것이다.건설 산업으로 인해 살풍경을 보여 주었던 충주호(청풍호) 부근의 모습과는 대조적으로 옛길의 잔편이 남아 있는 곳이 영춘(충주지역)가도이다.호젓한 외딴집들이 이방인을 무심하게 대하고 있다.책표지에 소개된 온달산성은 영춘지역에 있는데,성벽이 산비탈을 타고 포물선을 그리고 있는 점이 특색이다.나아가 이 지역 출신 신경림 시인과 청주문학의 선구자인 신동문 시인을 소개하고 있다. 

 

영춘가도와 남한강

 

 거돈사터

 

 나아가 제천의 의림지,장락사 칠층모전석탑,정미운동(1907년) 당시 일본군에 의해 초토화된 제천의 모습이 역사물로 소개되고 있다.또한 천주교 박해를 피해 동굴로 은신했던 황사영 배론성지 동굴,박달재 등에 얽힌 구전도 흥미진진하기만 하다.고려와 조선시대에는 조세미(租稅米)를 뱃길을 이용하여 운송했다.조창에 집결된 조세미는 뱃길을 이용해 고려시대엔 개성으로 유입되고,조선시대에는 용산의 경창(京倉)으로 옮겨졌다.그 흔적이 목계나무 강 건너 가흥창터에 남아 있다.뱃길은 팔당댐(1973년),충주댐(1980년)이 생기면서 사라지고 말았다.인근 충주에는 우륵의 탄금과 신립(申砬)장군이 순절한 탄금대가 세월의 무상함만 더해 준다.그외 남한강 주변에는 폐사지가 여기 저기 산재해 있다.폐사지를 보고 있으면 호젓한 기분과 유려한 (불교)건축미와 풍광과의 조화에 감탄이 절로 나온다.  

 

배론성지 황사영 토굴

 

 신륵사 앞 강변 정경

 

 여주 신륵사를 마지막 여정으로 이번 남한강편 문화유산답사기는 막을 내린다.문화유산과 풍광이 자연스럽게 어우러져 여행객들의 시선과 발길을 사로잡는 곳도 있지만 산업개발로 인해 살풍경이 되어 버린 곳들도 제법 눈에 띈다.문화라는 것은 있는 것을 잘 보존해 나가는 것이 우선일진대 그럴듯하게 조잡하게 만들어 놓은 것들은 가슴에 크게 와닿지 않는다.일종의 누군가에게 보여 주기 위한 수단장치로써 전시효과에 지나지 않는 것이다.영월,충주,제천,단양 등지의 남한강을 따라 문화유적과 풍광을 한 눈에 조망할 수 있었다는 점이 무엇보다 의미가 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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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조와 사도 - 위대한 군주와 잔혹한 아버지 사이, 탕평의 역설을 말한다
김수지 지음 / 인문서원 / 2015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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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통상적으로 정치권력은 부자(父子) 사이에도 나누지 않는,넘겨 주지 않는 법인가 보다.그만큼 권력이라는 속성이 매우 편협한 울타리와 같은 장치일 것이다.권력을 장악은 자신의 존재감을 부각시킴과 동시에 확고한 영역 유지를 기도(企圖)하는 것이다.또한 정치 권력은 갖은 술수와 음모가 난무하는 가운데 누가 힘의 역학에서 밀리지 않고 오래도록 버텨 나가느냐도 관건이다.나는 정치 권력에 있는 사람들의 생존방식은 여러가지가 있지만 일종의 '도박(睹博)'과 같이 요행수를 노리는 사람들이 많다고 생각한다.특히 정치 권력이 사회를 주름잡고 있는 세태 속에서는 정치 권력을 쥐기 위해 건곤일척을 하는 정치생들이 꽤 많다.

 

 부자간에도 나누지 않는다는 정치 권력의 속성을 단적으로 잘 보여 주는 예는 영조와 사도세자의 관계임은 부정할 수가 없다.일반인들의 상식을 뛰어 넘는 비정하기 그지 없는 부 영조와 아들 사도는 살얼음판을 걷는 형국이나 다름 없었다.그것은 영조의 태생 과정과 당대 사회적 배경(당파 싸움 등),이복 형이면서 선대왕인 경종의 죽음의 배후는 영조가 즉위하면서 심리적으로 평탄하지 않았을리라.영조는 보기 드물게 83세라는 장수(長壽)에 52년간 한 시대를 풍미(風靡)했던 왕이었다.영조는 탕평책이라는 포용 정책을 기치로 내걸었지만 결과적으로는 자신의 권력 유지를 위한 위장전술이었다는 생각도 많이 든다.그는 기본적으로 노론(老論)의 지지를 등에 업고 소론(少論) 포용 탕평책까지 수용하면서 다양한 정책을 실현해 갔다.

 

 무수리 출신 숙빈 최씨와 숙종 사이에서 태어난 것으로 알려진 영조는 항설에는 친부가 다른 사람이고 선대왕이며 이복형인 경종을 독살한 것으로 의심을 받고 있다.경종의 짧은 치세,죽음을 맞이하고 노론의 두터운 지지에 의해 임금이 된 영조는 맏아들 효장세자를 재위 4년(효장세자 10세)만에 잃고 빈자리를 영조가 이어받은 셈이다.(연잉군으로) 숙종부터 영조,정조에 이르는 사회적 당파 싸움과 관련한 일련의 주요 사건(환국,처분,독대,옥사,난(亂),옥사,화변)은 조선 사회를 이끌어 가던 위정자들의 일대 도박과도 같은 암투가 끊이지를 않았다.특히 척신(戚臣)들에 의한 정치 연출은 예나 지금이나 해소해야 할 중대 사안이 아닐 수가 없다.

 

 사도세자는 15세에 영조의 대리청정 임무를 받고 국정의 전면에 나서게 된다.정치적 역량이 없는 사도세자는 내외적으로 바람 잘 날이 없었던 정치 환경에 놓여 있었다.특히 사도에 대한 중상모략과 깎아 내리기 등은 그에겐 커다란 시련이고 굴욕이었다.부왕 영조는 무신난,균역법 등의 각종 정치 실패에 따라 탕평(湯平)을 내걸었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반대파인 소론(少論)을 의식한 정치적 꼼수에 지나지 않았다.사도세자는 정치적 실험대에 놓여 있었던 유약한 존재였다.영조의 눈과 귀에는 그를 모함하고 허위 고자질이 끊이지를 않았다.나주 벽서 사건,처가인 홍씨 집안의 권력잡기,나경언의 고변 등으로 영조는 사도세자를 차기 왕으로 옹립하는데 만족을 하지 못했다.문제는 영조의 뇌신경계에 있었다.일종의 정신분열증에 의한 왕세자 죽이기였다.

 

 영조는 사도세자를 뒤주에 집어 넣어 죽이고자 했다.절박한 심정으로 살고 싶고,살려 달라는 세손(정조)의 울부짖음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죽여야 속이 풀였던 것 같다.권력의 틈바구니 속에서 영조가 택한 세자의 죽음은 억울하기만 하다.가혹한 영조,끈질긴 신하,무력한 세자로 이어지면서 세자는 불여귀가 되었다.세손 정조는 친부를 죽인 세력들에겐 복수로 응하지 않고 스스로 자백을 얻어내면서 정치 권력을 유지하려고 했다.영조의 잘못된 판단에 의해 희생양이 되어 버린 사도세자의 진혼곡을 듣는다.권불십년처럼 정치 권력은 비정하고 무상하기 짝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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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국의 역사학, 어디까지 왔나
이덕일 지음 / 만권당 / 2015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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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만일 한반도에서 전쟁이 일어난다면 나라를 위해 총칼을 들고 의용군으로 나설 사람은 얼마나 되겠는가.1950년 한국전쟁과는 비교가 되지 않을 정도이지만 국가 방위에 대한 의식과 의지가 강렬할까.한국인은 어떠한 중대한 사건.사안이 발생하면 우∼하고 관심과 열기를 표명하지만 쉽게 사그라들고 만다.그래서 간혹 '냄비 근성'이라고 하지 않나 싶다.나라가 위기에 처해 있을 때 물론 국토방위를 위해 살신성인으로 나아가려는 사람이 없지는 않지만 위기시에 단결로 똘똘 뭉칠지에 대해서는 고개가 가로로 젖는다.반면 일본이라면 어떨까.중대한 사건.사고를 목전에 두고 자신이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에 초점을 맞추기보다는 국민이 강고한 단결과 일산분란한 태도로 중대한 위기를 헤쳐 나가려 한다는 칼럼에서 한.일 양국은 너무도 대비가 된다.

 

 현재 한반도를 둘러싼 동북아의 역학 관계가 수상하기만 하다.정치,경제,군사 모든 면에서 중국과 일본의 눈치를 보지 않고서는 생존이 어려운 입장에 놓인 한국은 샌드 위치(딜레마) 형국에 있다.그 가운데 과거사,영토 문제 등에 관련하여 오랜 세월 소모전을 벌이고 있는 한.중.일 3국은 반드시 짚고 넘어가되 청산(淸算)되어야 할 과제이다.이 과제는 누가 풀어야 하는가.삼척동자도 알다시피 국가를 이끄는 위정자의 몫이라고 본다.실무야 산하(傘下) 및 유관 단쳬에서 연구하고 분석하여 상부에 보고하여 외교 라인 및 해당 국가와 끈질지게 파고 들어 줄 것은 주고 받을 것은 악착같이 받아내려는 의지가 깊게 깔려 있어야 한다.동북아 3국이 안고 있는 과거사,영토 문제는 겉으로는 평온하지만 속은 완전 난장판이다.중국은 고구려,고조선 역사를 한반도에 귀속시키고,일본은 일본서기를 통해 밝힌 임나일본부가 가야를 실질적으로 다스렸다는 허무맹랑함을 완전 현실화 시키고 있다.'코에 걸면 코걸이,귀에 걸면 귀걸이'(이어령 비어령)식이다.

 

 이 문제에 대해 한국측 반응은 어떠할까.대한민국의 이름으로 과연 고구려,고조선 및 가야 역사에 대해 외교 라인을 풀가동했던 적이 있는가.현대판 사대주의가 판을 치고 있을 줄이야 예전엔 몰랐다.사학자이며 한가람역사문화연구소 소장인 이덕일 저자는 지식과 양심의 힘으로 과거사,영토 문제를 풀고자 한다면 얼마든지 풀 수가 있으련만 국고(國庫)를 하버드대(10억 원)에 상납한 '한국 고대사 프로젝트 사건'이 학문의 노예 근성을 여실히 보여 주고 있다.친중,친러,친일,친미에서 다시 친중으로 넘어가는 듯한 한국의 사대주의는 학문의 외피(外皮)로 치장한 것이 식민사학에 다름 아니다.현재 한국 과거사,영토 문제(독도 등)를 연구하고 있는 이들은 역사물에 근거하지 않고 중국의 하상주 동북공정 및 일본 식민사관을 그대로 수용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게다가 이덕일 저자는 식민사관을 비판했다는 이유로 경찰서,검찰,법원을 드나들기를 수도 없이 하면서 들었던 생각이 과연 대한민국은 1945년 광복되었는가,대한민국은 독립국가인가,대한민국에 가연 정부는 존재하는가이다.최대한 중립과 이성에 입각해서 읽어 내려가려 해도 마음이 동요가 된다.이병도,이기백,이기동 등 고대사학자들이 주축이 되어 한국 역사학계를 이끌어 가고 있다.

 

 『고구려 연구재단』 『동북아 역사재단』에서 근무한다는 사람들은 과연 자국의 역사를 바로 잡아야 할 권한과 의무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아직 다가오지 않은 미래사까지 매국하려는 기도차지 않은 소신을 펼치고 있다.이들이 국민의 혈세인 국고 47여 억원을 연구비로 받아 먹고 다시 30여 억원을 청구하려다 국회특위 청문을 통해 주춤해지 상태이다.한사군이 한반도 한강 이북에 존재했다는 설,독도는 아무 이야기 없다 갑자기 우리 땅이라고 주장한지 고작 100여 년 정도 되지 않았다는 주장,백제와 신라의 역사적 등장과 최초의 임금 오류 등을 전하고 있다.국민의 세금으로 먹고 사는 재단 관계자들은 어처구니없게 갑(甲)의 입장이 되어 버렸고,잘못된 역사,역사관을 잡아 보고자 노력하는 저자와 같은 사람들은 을(乙)의 입장이 되어 버렸다.이러한 문제와 관련하여 들어가는 비용은 사비(私費)로 충당해야 한다는 것이다.참 안타깝기만 할 뿐이다.조선 총독부가 그려 놓은 한국 고대사 및 후진타오 중국 공산당 정권하에서 자행된 동북공정은 북한의 유사시 중국 동북3성이 동북4성으로 전락할 우려까지 있다.특히 한국 사학계에 만연한 도제식 수업 방식,스승.선배의 학설에 이의를 제기할 수 없는 비학문적 풍토,식민사학을 비판하면 학계에서 배제가 된다는 것이 통탄할 문제이다.'똥 묻은 개가 겨 묻은 개'나무라는 격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나라의 힘이 약하면 약한대로 힘의 역학 논리에 따라 대비해 나가면 되지만 자국의 역사를 바로 잡아야 할 책임과 의무가 있는 역사 재단 관계자들은 한국인이기를 거부하는 것과 무엇이 다르겠는가.한국의 역사를 바르게 잡아야 할 책임자들이 저 모양으로 놀아나고 있으니 가슴 한 켠에선 한국인이라는 존재가 오늘따라 무척 왜소하게 다가온다.사학계에 만연한 구태적,비학문적 풍토는 지금 당장이라도 척결해 주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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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중국 일본, 그들의 교과서가 가르치지 않는 역사
김종성 지음 / 역사의아침(위즈덤하우스) / 2015년 7월
평점 :
절판


 

 우리는 살아 가면서 근본,뿌리를 제대로 알아야 한다고 직.간접적으로 교육을 받고 있다.소위 가문과 나라의 역사를 막론하고 제대로 알아야 근본이 바로 서면서 개인과 국가의 질서,체계가 바로 잡힌다고도 한다.과연 그럴까.조상의 면면을 제대로 알아 후손들에게 부끄럽지 않은 조상으로 남기 위한 수단과 명예의 상징인 가문과 자신이 태어나 성장하고 뼈를 묻게 되는 자국의 역사를 바로 알아야 하는 이유는 국가의 일원으로서 소속감과 정체성을 바로 잡는데에 있다고 생각을 한다.

 

 그렇다면 개인이 속한 자국의 역사는 바르게 엮어져서 제대로 교육이 이루어지고 있을까.세상 물정을 몰랐던 시절에는 보고 듣는 것이 전부였기에 거의 맹목적으로 수용하고 머리에 저장했다.그런데 한국사 관련 역사물에 대한 출판물이 속출하면서 학창 시절 가르쳐 주지 않았던 것들,비록 가르쳐 주긴 했지만 한국사 교과서를 쓴 자들의 역사 인식의 결여 및 그릇된 사관 나아가 이번 도서와 같이 역사 자료 및 증거물은 충분하되 아전인수격으로 과거사를 왜곡하고 때로는 자기 폄하식역사 인식하에 쓰여진 한국사가 수두룩하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국체와 국격이라는 자존감을 살리고 치부를 감추려 하는 것은 어느 나라든 있을 수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되지만,역사 자료,증거물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를 제대로 알리지 못하는 역사 학자들의 역사관은 과연 무엇에 기인하는 것일까.

 

 한.중.일 3국은 고래로부터 뗄레야 뗄 수 없는 관계에 있다.한국을 중심으로 중국,일본은 호혜평등 관계보다는 힘의 논리에 따라 사대교린이 오랜 세월 지속되었고,조공과 무역 정책에서 영토 확장을 위한 침략과 병탄이라는 통탄의 역사를 안고 있다.특히 역사 왜곡,영토 팽창정책을 일삼는 주변 국가들 속에서 한국은 지난 역사를 바로 세우고 후학들에게 가르쳐 주어야 할 부분은 다시 수정하여 가르쳐야 마땅하다.이러한 맥락에서 한.중.일 3국은 지난 역사에 대해 객관적인 입장보다는 자국의 실리와 자존감을 바탕으로 역사 교과서가 쓰여지고,일선 학교에서 학생 및 일반인들에게 과거사를 주입시키지 않았을까.일제 강점기 조선 편수사가 편찬한 한국의 과거사는 고조선 역사를 비롯하여 특정 사안을 일부러 삭제하여 중국,일본에게 한국의 과거사를 제대로 주장도 못하는 꼴을 보이고 있어 안타깝기 그지없다.

 

 한.중.일 역사에 대해 잘못된 점을 바로 세워 나가야 한다는 관점에서 이 글은 매우 시사적이면서 유익하기만 하다.한국,중국,일본 3국은 지리적,물리적으론 가깝지만 심정적으로는 저울질을 할 수밖에 없는 특별한 상황에 처해 있다.

 

 한국 교과서의 경우를 들여다 보자.상국과 신하국으로 불리워지면서 중국과는 사대교린이 오래 지속되었다.물물교환 방식의 '조공(朝貢)'은 일종의 무역 행위로써 반대로 거둬 들이는 회사(回賜)도 있었다.우리가 흔히 알고 있는 사대교린의 조공은 반드시 주기만 했던 것이 아닌 주고 받기식이었다는 것이다.황제의 다른 표현으로 태왕(太王)이 고구려에 존재했고 백제가 점령한 요서 지역,한반도 일부를 점령했던 탐라(제주)국,세속오계를 이끌었던 신선교(神仙敎),조선인들이 일본인 흉내를 내면서 해적 활동을 했던 사례,고조선 역사 사료의 소실로 인한 그릇된 고조선사 주입 등은 한국사를 수정해야 할 대목이다.

 

 중국 교과서의 경우를 들여다 보자.중화사상에 젖어 있는 중국 및 중국인은 자국의 역사를 부풀리고 지우기를 반복하고 있다.청조 건륭제에 한족이 중국을 실질적으로 리드하고 현재의 중국 영토와 같은 꼴을 보이고 있는데,중국 역사 속에서 한족이 차지했던 비율을 과대 포장하고 있다.소수민족으로 불리우고 있는 몽골과 티베트 역사는 중국 역사의 일부로 기술하고 있고,확실치 않은 수나라 멸망의 이유,조공을 받은 것은 기억하고 조공을 한 것은 애써 외면하려는 중국인의 불쾌감의 발로,동남아로부터 전래받은 문명에 대해 함구하는 중국인의 인식 등을 엿볼 수가 있다.나아가 일본 교과서의 경우를 들여다 보면,우선 일본은 한반도에서 문명을 전수받은 것이 틀림없다.일본 아키히토 천왕은 그들의 조상이 백제 왕의 후손에서 비롯되었다고 인정한 바가 있다.일본의 국명은 본래 왜국(倭國)이었는데 해뜨는 곳과 가까워 671년 일본(日本)이라 변경했다.명과 무역 관계가 왕성했던 일본은 1551년 국교가 단절되면서 조선과 오키나와와 상대하고 임진왜란을 통해 도공들이 대거 일본에 강제로 끌려가 도자기 시장 점유율을 높이는데 지대한 공헌을 했다.풍랑으로 표류했던 포르투갈 상인에게 받은 조총은 일본 군화기를 발전시키는데 일조를 했다.19세기 중.후반 정한론을 외치면서 강제적 강화도 조약 체결,조선병탄,대동아 전쟁을 일으켰다.일본은 독일과 마찬가지로 2차 세계대전을 일으킨 나라이지만 '쿨'하게 실질적인 사과가 이루어지지 않고 있다.이유는 뒤에서 일본을 든든하게 후광 역할을 하는 미국이 있기 때문일까.

 

 우리는 중국,일본 정부가 갖고 있는 잘못된 역사 인식 및 왜곡 프로젝트에 대해 당당하게 항의하고 시정해 줄 것을 요구해야 한다.끈질기게 외교 채널을 풀 가동하여서라도.또한 아직 한국인에게 알려지지 않은 한국 역사의 주요 부분을 바르게 수정하고,주변국들의 역사 왜곡을 기록과 증거물을 통해 규명해 나가야 한다.이것은 정치 권력을 쥐고 있는 위정자들의 실질적인 움직임이 수반되어야 한다.지난 역사를 바르게 인식하는 동시에 다가올 미래에 대해서 슬기롭게 대처할 수 있는 모티브가 될 것으로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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