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은 누구나 다중인격 - 내 안의 숨겨진 가능성을 발견하는 새로운 자아 관리법
다사카 히로시 지음, 김윤희 옮김 / 인플루엔셜(주) / 2016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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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어린 시절에는 사람과의 관계에서 비교적 무난한 시기를 보냈다. 그러다가 사람과의 관계에서 커다란 좌절을 맛 본 시기가 군대에서였다. 많은 동기들끼리 논산훈려소에서부터 함께 지내다가 상급부대를 거쳐 하급부대까지 내려갔을 때 남은 동기는 한 명밖에 없었다. 결국 우리 둘은 훈련소에서부터 2년이 넘는 군생활을 함께 했다. 그런데 이 친구가 나와는 성격이 영 반대인 것이다. 유들유들해야 하다고나 해야 할까. 이 고참, 저 고참 비위를 참 잘 맞추었다. 이 친구 입에서는 보통 이런 말들이 자주 나왔다. "김병장님! 어떻게 이렇게 일을 잘하시지 말입니다!" 후임병들을 다루는데에도 능숙했다. 후임병들에게 하는 말은 "내가 너희들때는 말야..." 주로 이런 말이었다. 한 마디로 말해 군대생활에 특화된 인격을 가진 친구였다. 반면에 나는... 이 부분은 글로 쓰면서도 참 미적거리는 부분이다. 고지식하다는 평가를 받는 나는 고참들에게는 버릇없는 후임병이었고, 후임병들에게는 만만한 고참이었다. 그래서 군대있는 동안 내 자신의 인격에 대해 많은 고민을 했다. 다행히 시간에 여유가 있는 업무를 했기에 많은 책들을 읽을 수가 있었다. 그 때 처음 프로이드와 융의 책들을 접하게 되었다. 그리고 인격과 무의식 대한 고민들을 하게 되었다.


이런 심리학 책들을 통해 인격과 무의식에 대한 많은 성찰을 하게 되었다. 그러나 이런 학문적인 개념들을 내 자신에게 그대로 적용시키는 것에는 무리가 있었다. 일본인 저자인 다사카 히로시가 쓴 [사람은 누구나 다중인격]이란 책을 읽으며 다시금 내 자신의 인격에 대해 고민하게 되었다. 이 책은 '다중인격'이라는 개념을 인터뷰 형식으로 읽기 쉽게 풀어가고 있다. 특이한 것은 저자가 이야기 하는 '다중인격'이 그동안 우리가 알던 상식과는 다른 방향이라는 것이다. 우리는 흔히 다중인격, 한 사람 안에 여러 가지 인격이 있는 사람들을 건강하지 못한사람으로 생각한다. 더 심하게는 정신병자로 생각하기도 한다. 그러나 저자는 누구에게나 여러 가지 인격이 있고, 오히려 이런 여러 가지 인격을 가진 사람이 건강한 사람이라고 말한다. 더 나아가 그는 이렇게 여러 가지 인격을 가진 사람이 사회에서 성공을 하고, 큰 인물이 된다고까지 말한다.


저자가 이렇게 말하는 이유는 우리는 여러 가지 상황에 따라 여러 가지 인격을 유용하게 변화해야 그 상황에 대처할 수 있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회사에서 상사로서 너그럽게 부하 직원을 대해야 할 때가 있는가 하면, 때로는 강하게 이끌어야 할 때도 있다는 것이다.


"말씀하신 그런 인상을 부정할 수는 없어요. 다른 말로 하면 '그릇이 큰 리더'가 별로 없다고도 할 수 있겠지요. 그릇이란 말의 진짜 의미는 '자기 안에 몇 개의 자신, 몇 가지의 인격을 가질 수 있는가'라는 뜻입니다. 따라서 예전부터 그런 능력을 갖춘 이들을 '그릇이 큰 정치인', '그릇이 큰 경영자'로 불러 온 것입니다."


반면에 하나의 인격만을 가지고, 자연스러운 인격전환이 일어나지 않는 사람은 변화하는 상황에 적응하지 못하게 된다. 또한 하나의 강한 인격에 의해 다른 인격들이 억압되어 있는 사람은 건강하지 못한 인격을 가지게 된다는 것이다.


"한 가지 입장이나 상황에서 쓰는 가면이 특히 너무 단단하면 다른 상황에서는 여러 가지 문제가 발생하거든요. 페르소나가 단단하다는 의미는 어떤 하나의 입장이나 상황에서 쓰고 잇는 페르소나를 변화에 맞추어 다른 페르소나로 유연하게 전환할 수 없다는 뜻이예요. 입장 혹은 상황이 다랄짐에 따라 하나의 인격을 다른 인격으로 유연하게 교체할 수 없다는 의미인 것이죠. 반대로 페르소나가 단단하지 않은 사람, 즉 인격이 유연한 사람이라면 그 사람은 하나의 인격에서 다른 인격으로 자연스럽게 옮겨갈 수 있습니다."

물론 이런 다중인격은 심리학에서 이야기 하는 정신적인 해리성장애(한 인격이 다른 인격의 행동을 기억하지 못하는 증상)과는 다른 것이다. 저자는 한 인격 안에서 다른 여러 가지 인격이 통합을 이루며, 자연스럽게 전환되는 것을 건강한 인격으로 본다. 그러기 위해서 저자는 우리의 숨겨진 인격을 개발해야 한다고 말한다.


우리는 흔히 자신의 적성에 맞는 일을 택한다. 내 인격과 성격에 맞는 일을 고르고, 그렇지 않은 일은 적성에 맞지 않는다고 거부를 한다. 그러나 저자는 이런 행동이 다양한 인격개발을 막고, 자신의 인격을 억압하는 행동이라고 말한다. 오히려 자신의 성격에 맞지 않는 일이라고 그 일을 해가며 그 일에 맞는 인격을 개발해야 한다고 말한다. 그리고 이 책에는 이런 인격을 개발하는 법에 대한 쉽고 자세한 설명들이 이어진다.



개인적으로는 그동안 하나의 인격을 가진 사람을 정직한 사람으로 보고, 다양한 인격을 가진 사람들을 이중인격자나 기회주의자라고 비난을 했다. 그러기에 어떤 상황에서나 한 가지 변함없는 인격의 모습을 보여주려고 노력을 했었다. 그러나 이 책을 읽으면서 때로는 다양한 인격으로 상황과 사람을 대처하는 것이 오히려 건강한 삶이 아닌지를 생각해 보게 된다. 물론 뭐든지 과하면 좋지 않다고 생각하다. 너무나 쉽게 다양한 인격을 상황에 맞게 전환시키는 것은 자신이나 타인에게 정직하지 못한 행동이라고 생각한다. 다만 하나의 인격 안에 여러 가지 인격이 통합되며, 부드러운 전환이 있을 때 그것이 건강한 인격이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이런 인격은 저자의 말처럼 자신을 훈련하고 단련할 때 가능하다고 생각한다.


흔히 철학에서 칸트의 인식론을 '코페르니쿠스적 전회'라고 부른다. 칸트의 철학이 태양을 비롯한 하늘이 돈다는 천동설의 기존개념을 깨고, 지구가 돈다는 지동설을 주장한 코페르니쿠스의 사상처럼 획기적이기 때문이다. 다중인격을 긍정하고, 이를 개발할 것을 조언하는 저자의 주장은 심리학적인 코페르니쿠스적 전회라는 생각이 든다. 저자는 이 책을 통해 기존의 우리가 거부하던 다양한 인격에 대한 개념을 새로운 시각에서 긍정적으로 바라보게 해 주고 있다.



그 후에도 계속해서 심리학 서적들에 대해 관심을 가지다가 다중인격에 관련된 이 책을 읽게 되었다. 이 책은 그동안 내가 가지고 있던 인격의 개념을 완전히 뒤바꾸고 있는 책이다. 철학에서 칸트의 인식론을 '코페르니쿠스적 전회'라고 부른다면, 이 책은 '심리학적 전회'라고 부를만큼 기존의 상식을 뒤업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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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열도는 왜 후진하는가 - 반 글로벌 사회 정치 문화
이만희 지음 / 인간사랑 / 2016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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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대학을 다닐 때는 한참 일본 문화 배우기가 열풍이었다. '국화와 칼'이라는 책, 전여옥의 일본에 관한 책, 그리고 이규형 작가의 일본 사무라이 문화에 관한 책들이 있기였다. 당시는 어떻게든 일본을 배우고, 일본을 따라잡는 것이 국가적인 과제가 되는 시기였다. 그리고 이제는 일본의 잃어버린 10년을 이야기 한다. 이제 일본의 위기를 보면서 우리에게 닥칠 위기를 대비하자는 이야기가 나온다.


이 책은 오랜 시간 일본에서 교수로 제직한 저자가 일본의 정치, 경제, 문화 속으로 깊숙히 들어가 왜 일본이 몰락하고 있는지에 대해 분석하고 있는 책이다. 이 책은 단순히 현재 일본의 모습만을 이야기 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일본의 시작과 주변국과의 관계에서 왜 일본이 이런 몰락의 길을 선택할 수밖에 없었는지를 이야기 한다.


먼저 저자는 일본의 경제적으로 성공한 이유를 '글로벌화'라고 제시한다. 일본이 국가적인 체계를 갖춘 것은 우리나라 삼국시대에 야마토 정권이 세워지면서 부터이다. 당시 야마토 정권은 국가로 부르기에는 너무나 작은, 일본의 한 지역을 다스리는 세력이었다. 그런 야마토 정권이 백제를 비롯한 당시 선진국의 문물과 불교를 받아들이면서 급속이 발전한다. 이 과정에서 불교세력과 토착종교세력, 즉 글로벌화를 지지하는 세력과 수구세력간에 세력다툼이 벌어진다. 결국 글로벌화를 지지하는 세력이 승리하면서 야마토 정권은 국가적인 체계를 갖추기 시작한다.


그 후 일본의 역사는 이런 글로벌화를 받아들이는 세력과 이를 거부하는 세력과의 다툼이 계속해서 이어졌다. 그리고 전자가 승리를 잡을 때 일본이라는 나라가 비약적으로 발전했다. 그 대표적인 사건이 메이지유신이다. 메이지 유신은 일본의 개방 이후 밀려오는 서구세력에 대처하기 위해 일본 스스로가 체제개혁을 단행한 것이다. 물론 과거처럼 이 과정에도 글로벌화 세력과 보수세력간의 다툼이 있었지만, 결국 글로벌화 세력이 승리를 햇다. 그리고 일본이 서구문물을 받아들이며 급격히 세계강국으로 부상하게 된다.


전후에도 마찬가지였다. 일본의 패전 이후 일본의 발전방향을 수출중심의 국제주의에서 찾자는 세력과 국내 자원개발을 우선순위로 두는 개발주의의 대립이 있었다. 그러나 전후 첫 수상인 요시다 수상의 국제주의가 승리하면서 일본은 글로벌화를 통해 세계 경제 강국이 되었다.


이런 과거를 가지고 있던 일본이 고도의 경제성장 이후 성공에 안주하면서 점차 반글로벌화의 모습을 가지게 되었다. 이 과정을 저자는 다음과 같이 이야기 한다.


왜 일본은 이렇게 추락했는가? 그것은 한 마디로 5-80년대의 고도 성장에 도취한 나머지 사회, 정치, 문화가 외형적으로는 글로벌화의 길을 걷고 있지만, 실제로는 반 글로벌화의 길을 걷고 있기 때문이다. '토끼와 거북이'의 경주에 비교해 보자. 당시는 3위와의 격차가 컸기 때문에 거북이처럼 느릿느릿 걸어도 2위 자리를 유지할 수 있었다. 그러나 앞으로 전진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에 안주하여 '제 자리 걸음'을 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 사이에 정보화의 물결을 타고 달려드는 토끼에게 추월당하는 형국이 되어 버렸다. (P65-6)


저자는 자신이 직접 일본에 살면서 느꼈던 일본의 반글로벌 문화에 대해 이야기 한다. 가장 많이 언급하는 것이 일본의 조직문화이다. 일본은 철저하게 위계질서적 관료문화가 강한 나라이다. 따라서 개인이 어떠한 상황을 결정한 권한이 없고, 개인 역시도 그 결정에 따른 책임을 지기를 싫어한다는 것이다. 따라서 어떠한 문제가 발생했을 때 윗선에서 그 결정이 내려올 때까지 계속해서 기다려야 하며, 이로인해 일처리의 속도가 매우 늦다. 이것은 일본 사회 전반적인 '매너리즘'을 낳게 하고, 일본 사회를 정체하고 후퇴하게 만드는 원인이라고 분석한다.


저자는 대표적인 사건으로 '동일본 대지진과 원전사태'를 이야기 한다. 일본에 쓰나미가 닥치고, 원전이 가동이 중단되는 사태가 발생될 때도 일본의 관료들을 이것을 직접적으로 해결하지를 못했다는 것이다. 계속해서 윗선의 지시를 기다리고, 계속되는 서류작업과 절차작업에 매달리며 시간을 허송했다는 것이다. 심지어는 이재민들의 숙소를 짖는데도 거이 5-6개월이 걸렸다는 것이다.


이런 문화의 결과 일본의 경제가 침체하면서 더 반글로벌화적인 아베정권이 들어서게 되었다. 저자는 아베 노믹스의 성과가 외부에서 보는 것만큼의 효과가 없다고 말한다. 저자가 보기에 아베 노믹스는 인기영합 정책이며, 아베노믹스의 핵심이 금리인하와 엔화풀기는 순기능보다 역기능이 더 강하다고 말한다.


그 이후 자리잡은 것이 고객 만족형 모델이다. 기업의 성장으로 전략적 자원 배분은 없어졌으나, 정부가 계속 기업의 행동에 간섭하는 형태이다. 경기가 활성화되면 정부로서는 굳이 특정 고객이나 산업을 만족시킬 필요가 없다. 장기 침체로 국가 경영 능력이 의문시되자 정부는 특정 고객을 만족시키는 모델로 전환하고 있는 것이다. 즉 지지 기반을 유지하려는 정치적 계산이다. 이 모델은 정경유착, 그리고 취약한 부문(농법과 같은)등의 특정 고객을 배려하는 국가 경영을 낳는다. 어떤 의미에는 인기영합우의에 가깝다.

아베 정궈느이 '아베 노믹스'는 고객 만족형 국가 경영의 단면을 보여 준다. 대기업과 유착하면서 그들의 법인세 감면, 지방의 공공사업 발주 요구, 농업 부분의 구조 개혁 요구를 받아들이고 있다. 국가 경영 능력이 취약한 정권으로서 고객을 만족시키려면 어쩔 수 없느 ㄴ선택이다. 이것이 일본이 재정 악화를 부채질하고 있는 것이다. 2014년 현재 일본의 공공부채는 GDP의 235%에 달하고 있다. 그 반면에 한국의 공공 부채는 2014년 현재 GDP의 64.5%정도에 달하고 있다. (P82-3)


전 경제 산업성 고위 관료는 아베 노믹스가 아베를 중심으로 한 매파 폭주조이 주도하는 잘못된 국가 경제의 표출이라고 비판하고 있다. 그것은 국민적 관심을 불러 모으려는 정치화된 수단에 불과하다고 본다. 아베 수상은 매력적인 비전을 보얏으나, 전혀 소용없는 정책들을 남발하고 있따. 예컨대 국민의 높은 기대를 유지하기 위하여 제시한 지방 경제의 부활이 그것이다. 불경기는 개선되지 못함에도 불구하고, 그는 항상 도교 중심의 주가 상승을 업적으로 제시한다. 그 관료는 아베 수상이 아벡 노믹스를 통하여 국민을 마약 중독자로 내몰고 있다고 비판했다. 나아가 분명히 아베 노믹스는 잘못된 정책으로 실패할 것이고 시장졍제를 왜곡시킬 것이라고 우려했다.

다른 경제학자는 아베 노믹스를 사기극이라고 비판하고 있다. 비정동적인 양적 완화는 자기 파괴적 효과를 낳을 것이라고 주장하면서 아베 노믹스를 마약과 같은 것이라고 조롱했따. 역설적으로 양적 완화 이후 수출은 감소하고 불황은 더욱 심각해졌다는 것이 그의 판단이다. 사실 그렇다. 또 다른 학자는 아베 수상이 아베 노믹스를 통하여 국가 경제를 고위험 도박에 빠뜨리고 있다고 비판한다. (P194)

 

저자는 아베 정권이 계속해서 정권을 잡고 있는 한 일본에는 미래가 없다고 말한다. 일본의 성장과정과 침체 과정, 그리고 이를 극복하기 위한 과정들을 보면서 이 모든 과정이 너무나 우리와 닮아있음을 느끼게 된다. 경제성장 이후 일본사회가 빠져 있던 위계질서적인 관료사회, 그리고 이로 인해 오는 매너리즘의 전반적인 분위기가 지금 우리의 분위기이다. 이런 일본사태의 위기가 동일본지진과 원전사태로 나타났다면, 우리 사회의 위기는 세월호 사건과 메르스 사건에서 나타났을 것이다. 아베 정권이 이렇게 나타난 사회적 문제를 직접적으로 해결하기 위해하기 보다는 금리인하나 엔화풀기 등 기업이나 지지세력의 이익에 맞춘 인기영합정책을 쓰는 과정 역시 우리와 닮아 있다. 마지막으로 아베 노믹스의 금리인화를 통한 내수진작과 같은 정책의 부작용이 우리나라에도 나타나고 있다. 과거에 우리가 일본의 성공을 배웠으면, 이제 일본의 위기를 보고 대처할 때라는 생각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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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지와 표상으로서의 세계 외
아르투어 쇼펜하우어 지음 / 집문당 / 2003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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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에서 쇼펜하우어처럼 오해받고 있는 철학자도 드물 것이다. 가장 흔한 오해가 염세주의자이며, 자살을 미화한 철학자라는 오해이다. 더불어 여성혐오주의자라는 비난도 받고 있다. 가끔 대화를 하다보면(특히 남자들이 심하다) 자신이 조금 아는 단편전인 지식으로 그 사람의 사상이나 인생을 다 아는 것처럼 말하는 사람들을 본다. 그로 인해 많은 사상가들이 오해와 비난을 받고 있는 것이 안타깝다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쇼펜하우어도 그 중 한 사람일 것이다. 그러나 쇼펜하우어처럼 삶을 치열하게 살고, 인생에 대해서 진진하게 고민한 철학자는 드물 것이다. 그의 글 속에는 인생이란 비관하고, 자살로 끝낼 정도로 하찮은 것이 아니라, 무언가 목적을 발견하기 위해 치열하게 살아가야 하는 그 무엇이었다.  


안타까운 사실이 하나 더 있다. 비교적 이름이 많이 알려진 철학자이지만, 우리나라에 쇼펜하우어의 책들은 거이 번역이 되어 있지 않다는 것이다. 이 책만 해도 내가 구입한지가 20년이 넘은 책이다. 요사이 니체에 관한 책을 읽으면서 쇼펜하우어와의 관련성이 궁금해 책장 속 구석에서 찾아낸 책이다. 다행히 인터넷 서점에서 검색을 해 보니 아직까지도 출간되고 있는 책이다.


이 책은 한 권의 책이라기보다는 쇼펜하우어의 여러 글들을 묶어 놓은 책이다. 그의 저서나 논문의 글들을 주제적으로 발췌했기에 일관된 한 권의 책을 읽는 느낌은 가질 수 없다. 그러나 그의 사상의 흐름을 주제별로 잘 묶어 놓아서, 그의 사상을 이해하기에는 매우 좋은 책이다. 번역자가 이렇게 편집한 것인지, 아니면 이렇게 편집된 또 다른 원서를 번역한 것인지는 알지 못하겠다.


우선 이 책은 쇼펜하우어의 대표적인 세계관인 '의지와 표상으로서의 세계'에 대한 글들이 등장한다. 쇼펜하우어는 세상을 표상으로서의 세계와 의지로서의 세계로 나누었다. 이것은 플라톤으로부터 칸트까지 이어져 오는 세계관을 계승한 것이다. 플라톤은 눈에 보이는 '현실 세계'와 눈에 보이지 않지만 이성으로 볼 수 있는 '이데아의 세계'를 주장했다. 이런 플라톤의 사상은 서양철학에서 계속 발전되어 오다가 칸트에 이르러 '현상계'와 '물자체(Ding an sich)'로 이어진다. 특이한 것은 칸트는 현상계를 인식할 수 있는 도구로 선천적 인식능력인 시간과 공간, 그리고 인과율 같은 것을 제시한다. 이것은 시간과 공간이 실제로 존재하기 보다는 인간의 타고난 인식능력이고, 이 시간과 공간으로 세상을 세상을 인식한다는 것이다.(이것을 인식의 전환이라고 해서 코페르니쿠스적 전회라고 부른다.) 그리고 그 시간과 공간 밖에 존재하는 것을 '물자체'라고 부른다. 따라서 물자체는 인간의 감각으로는 인식할 수 없는 대상이다.


쇼펜하우어는 칸트가 시간과 공간으로 인식될 수 있는 현상계와 물자체의 개념을 그대로 가지고 왔다. 그러나 현상계를 표상의 세계라고 부르고, 물자체를 의지의 세계라고 부른다. 표상의 세계란 시간과 공간으로 인식될 수 있는 세계이며, 의지의 세계는 물자체와 마찬가지로 시간과 공간 밖에 있어서 인간의 감각으로는 인식할 수 없는 세계이다. 그러나 이데아나 물자체가 현상계의 원인인 것처럼 의지의 세계가 표상의 세계의 원인이다. 따라서 인간 역시 표상의 세계의 일부분이며, 의지의 세계가 구현된 하나의 객체이다.


쇼편하우어가 말하는 인생의 고뇌와 고통은 바로 여기서부터 시작된다. 그는 인생이 표상으로서의 세계에 갇혀있기에 그 세계에서 욕망과 권태에 사로잡혀 있다고 생각했다. 인간의 눈에 보이는 표상의 세계 속에만 갇혀 있어 자신이 보는 것이 전부라고 생각하고 오직 자신의 생존 욕구에만 메달려 있다는 것이다. 그로 인해 생존과 그와 관련된 욕망에 고통 당하다가도 생존이 보장되면 다시금 권태에 고통당하게 된다. 결국 쇼펜하우어는 아무리 발버둥 쳐도 인간이 고통에서 벗어날 수 없다고 보았다.


인간이 인식할 수 있는 모든 단계에 있어서 의지는 개인으로서 나타난다. 무한한 공간과 시간 속에서 인간은 유한한 존재에 불과하며, 따라서 자기가 투입된 저 어머어마하게 거대한 것과 대립되는 존재이다.

이 거대한 것은 끝이 없다. 인간은 단지 상대적인 존재라 그 존재가 언제부터 있으며 또 어디에 있는지 절대로 분명히 빌힐 수 없다. 왜냐하면 인간이 차지하고 있는 장소나 존속되는 시간은 무한한 것의 한 부분에 지나지 않기 때문이다. (P51)


인간은 욕구가 구체화된 존재이며 몇 천을 헤아리는 욕망덩어리다. 이런 욕망을 걸머진 인간은 지상에 살면서 자기 욕망과 고통을 제외하면 모든 것이 확실성이 없다. 그리하여 날마다 봉착하는 어려운 일들을 걸머지고 그럭저럭 자기를 꾸려 나가기 위해 걱정에 싸여 있는 것이 대체로 인간의 생활내용이다. (P53)


살아 있는 모든 인간들이 힘쓰며, 그들을 움직이는 원동력은 생존의 추구이다. 일단 생존이 확보되면 그들은 자기의 생존을 어떻게 다루어 나가야 할지 갈피를 잡지 못한다. 그리하여 그들을 움직이는 제2의 것은 생존에의 쾌락에서 탈출하자, 여기에 무감각하게 되자, 시간을 죽이자, 즉 권태에서 벗어나려고 노력한다. (P55)


쇼펜하우어는 아무리 큰 고통을 당하는 사람도, 아무리 큰 기쁨을 당하는 사람도, 모든 사람은 인생에서 일정한 양의 고통과 기쁨을 당할 뿐이라고 말한다. 개인의 노력으로 자신이 당하는 고통을 줄일 수도 없고, 자신이 당하는 기쁨을 증가시킬 수도 없다고 말한다. 처음에는 고통스러운 것도 나중에는 그 고통이 무뎌지고, 처음에는 기쁜 것도 나중이 되면 그 기쁨이 사라진다고 말한다. 결국 상황이 다르더라도 누리는 고통과 기쁨의 양은 비슷하다는 것이다.


여기서 쇼펜하우어가 염세주의자이며, 자살을 방관한다는 오해를 받는다. 삶을 이렇게 비관하고, 이런 삶의 굴레에서 벗어나기 위해 자살을 이야기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쇼펜하우어는 이렇게 표상으로 세계에 갇혀 있는 인간이 그 세계 속에 순응하며 살거나, 좌절하는 삶을 바람직한 것으로 보지 않았다. 그리고 그 표상 세계의 근원이 되는 의지의 세계에 발견하고 표상의 세계를 뛰어넘기를 원했다.


사실 이 부분부터가 개인적으로 이해되지 않는 부분이었다. 그는 의지의 세계로 가기 위해 표상을 뛰어넘는 예술의 세계와 개인의 생존의지를 뛰어넘는 도덕과 종교를 제시한다. 마치 초반의 화끈한 블랙버스터 영화가 후반에서는 너무 뻔한 결말을 내는 양상이다. 과연 쇼펜하우어가 말하는 의지의 세계란 무엇인지, 그리고 그 의지의 세계에 도달하기 위해 개인의 의지를 부정한다는 것이 무엇인지, 이 책만으로는 아직 이해를 하지 못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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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시사회 - 내일을 팔아 오늘을 사는 충동인류의 미래
폴 로버츠 지음, 김선영 옮김 / 민음사 / 2016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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많은 사람들이 휴일도 없이 매일 쉬지 않고 일을 한다. 그렇게 한달이 지나면 쉬지 않고 번 돈으로 주거비와 공과금등을 지불하고, 기타 소비를 한다. 그리고 다시 한 달을 쉬지 않고 일을 한다. 그렇게 또 한 달이 지나면... 가끔은 어쩌다가 현대문화가 이렇게 인간을 챗바퀴 돌리듯이 돌리게 되었을까 하는 생각을 하게 된다. 그리고 왜 우리는 이런 문화 속에서 쉴틈없이 달려가고 있을까 생각을 한다. 달리는 것을 멈추면 안될까? 아니, 멈추지 않더라도 잠시라도 앉아서 내가 어디로 가고 있는지 생각이라고 하면 안될까?


그럼에도 사회는 점점 더 극단으로 향해가고 있다. 흔히 이야기하는 보수층들은 이런 경쟁 사회가 자유주의의 이상이라며 찬미한다. 그들은 몇 가지 단점들에도 불구하고 이 사회가 최고의 이상적인 사회라고 생각하고, 혹여나 이런 사회에 대해 비판하는 사람들은 다른 색깔?을 가진 사람으로 생각하고 배척한다. 그럴수록 진보층들은 더욱 더 이 사회의 운영방식에 불만을 품고, 그 불만을 극단적으로 표출하게 된다. 그럼에도 그들 역시 극단적인 개인주의에 사로잡혀 정치적 운동이나 사회 운동으로 이런 사회의 모순을 바꾸려 하지 않는다. 결국 사회에는 내부적인 불만과 극단적인 대립만이 넘치게 된다. 어느 사회든 내부에서 이런 불만들과 극단적인 대립이 쌓이면 파국으로 가게 된다는 것이 역사적인 진실이지만, 지금은 누구도 이런 진실을 바라보려 하지 않는다. 그것은 당장 하루를 먹고 살기 위해 달려야 하는 우리 사회의 모든 구성원들의 현실이다. 결국 우리는 모두 근시안적인 눈을 가지고 있는 근시사회 속에서 살고 있다.



우리 사회가 당면하고 있는 이런 근시안적인 모습은 단순히 우리만의 문제가 아닌다. 폴 로버츠가 쓴 [근시사회]라는 책에서는 현재 미국의 근시안적인 사회 모습을 여실히 보여주고 있다.


먼저 이 책은 어떻게 미국사회가 이렇게 근시안적인 소비사회가 되게 되었는지를 언급한다. 저자는 미국사회가 근시안적인 소비사회가 되게 된 것을 '헨리 포드'와 '앨프리드 슬론'의 영향으로 본다. 헨리 포드는 포드자동차를 통해 처음으로 생산성 혁명을 일으켰다. 그는 기존의 수작업으로 생산하던 자동차를 벨트식 공정을 통해 더 많은 양을 떠 빨리 생산하게 되었다. 그렇게 되자 자동차 단가가 낮아지고, 사람들은 더 많은 자동차를 구입하게 되었다. 그로 인해 다시 생산라인이 확장되고, 또 가격이 낮아지게 된다. 결국 소비의 확대와 생산력의 증가는 계속 순환구조를 가지게 되었다.


그런데 이렇게 자동차가 무한대로 생산되자, 어느 시점에 이르러서는 더 이상 소비할 여력이 없어지게 되었다. 이미 자동차를 구입할 여력이 있는 사람들은 다 구입하게 되었기에 생산력이 확대될 수가 없었다. 이런 상황을 극복한 사람이 제너럴모터스의 사장 '앨프리드 슬론'이다. 그는 소비자들에게 낮은 금리로 돈을 빌릴 수 있게 해서 구입할 여력이 없는 사람들까지 자동차를 구입하게 만들었다. 또한 자동차의 겉모습을 화려하게 만들어 자동차를 단순히 운송수단이 아닌, 계급을 나타내는 상징으로 만들었다. 이로 인해 사람들은 매 번 자동차 모델을 바꾸어 가며 자신의 욕구를 충족하게 되었다. 이로 인해 미국의 소비사회는 단순한 필요에 의해 물건을 구입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욕구를 충족하기 위해 물건을 구입하게 되었다. 그리고 기업들은 이런 소비자의 욕구를 교묘히 조정하며 자신들을 성장시켰다.


연구자들이 알아낸 바에 따르면 우리는 단지 새로움이나 지위 향상 때문만이 아니라 상처 받은 자존심을 달래기 위해서도 물건을 산다. 평범한 결혼 생활에 대한 실망감을 누그러뜨리기 위해, 사무실 업무에 대한 불만을 해소하기 위해, 지겹고 숨 막히는 순응적인 교외 생활에서 벗어나기 위해, 나이 들고 병약해서 받은 모욕감을 잊기 위해 우리는 무언가를 구입했다. 컬럼비아 대학교의 사회학 교수이자 소비자 문화 초창기 비평가인 로버트 린드는 현재 소비재가 시장에 나와 소비되는 형태가 마치 약물치료와 유사하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소비재가 약물처럼 온갖 종유의 정서적 문제와 사회적 문제를 '조절'하도록 돕기 때문이다.(P42)


그럼에도 미국사회는 여전히 중산층들에 의한 소비형태로 성장을 계속하게 되었다. 그러나 1970년대에 들어서자 이런 중상층들까지 무너지며 사회가 양 극단으로 향하게 되었다. 1970년대부터 미국 기업들은 주주중심의 경영과 디지털 경영이라는 새로운 경영형태를 띄게 되었다. 기존의 기업들은 기업에 이익이 나면 그것을 생산력 확대를 위해 노동력을 위해 사용하게 되었다. 그러나 기업이 주가로 이익을 평가하게 되면서, 기업들은 이익이 날수록 더욱더 효율성을 극대화 하며 주가를 올리는 것에 초점을 두게 되었다. 그리고 기업의 효율성을 위한 최고의 방법은 디지털 경영과 노동자 해고를 통해 지출을 줄이는 것이었다. 결국 미국에서는 고용없는 성장들이 이어지고, 중산층들이 붕괴하게 되었다. 그리고 이렇게 붕괴된 중산층들은 다시 중산층의 자리로 돌아올 수 없게 되었다. 점점 계층간의 사다리가 무너지게 된 것이다.


그렇지만 무엇보다 억압적인 것은 다수를 이루는 하위 50퍼센트의 경제적 조건일 것이다. 코웬은 현재 상위 15퍼센트가 지금보다 훨씬 더 부우해지면, 나머지 대다수는 훨씬 더 가난해진다고 주장했다. 우리가 현재 아는 의미에서의 중산층이 사라지는 것이다. 즉 중간 소득은 지금보다 훨씬 더 낮아지고, 다수의 빈곤층은 기본적인 공공서비스에도 접근하기 힘들어 지는 것으로, 그 부분적 이유는 부유층이 세금 인상에 저항할 것이기 때문이다. 코웬은 이렇게 말했다. "우리의 예산에 맞춰 세금을 인상하거나 혜택을 중리기보다, 다수 노동자들의 실질 임금을 떨어뜨려서 새로운 하위계급을 양산하게 될 것입니다."(P221)


저자는 이런 암울한 미국사회의 디스토피아적 전망에도 불구하고 미국 정치인들과 유권자들이 움직이지 않는 이유를 제시한다. 미국 사회가 점점 개인중심적, 자아중심적이 되면서 이런 사회 문제에 자신의 열정을 소비하려 하지 않는다. 특히 미국 사회가 보수와 진보의 양극단으로 나뉘면서 이런 문제들이 정치적 대립으로 비화되게 되었다. 그리고 결국 극단적인 정치싸움을 통해 아무런 문제도 해결하지 못하게 되었다고 말한다. 결국 현재 미국사회에는 당장 자기 이익에 눈이 멀어 사회 전체가 무너져가는 것을 외면하고 있다고 말한다.


저자는 단지 현대문화의 자기중심적 성향이나 정치적 양극단의 문제 뿐만 아니라, 인간의 유전적 특성을 제시한다. 인간 뇌에는 먼 미래를 내다보는 영역과 근시안적인 것만을 바라보는 뇌의 부분이 있다는 것이다. 그런데  현대소비사회와 디지털문화는 점점 이 뇌의 근시안적인 영역만을 자극하게 되고, 사람들은 점점 근시안적인 시각만을 가지게 된다는 것이다.



저자는 이에 대한 대안으로 보수와 진보의 정치 세력이 자신의 당파의 이익만을 대변하지 말고, 공공 이익을 위해서 함께 타협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또한 공동체성의 회복을 통해 개인중심의 문화를 바꾸고, 공동체의 이익을 함께 고민하는 문화를 만들어야 한다고 말한다.



오래 전에 내가 대학을 다닐 때 처음으로 '세계화'라는 단어를 접했다. 그 당시 많은 사람들이 세계화와 글로벌스탠다드를 이야기 하며, 이것이 우리의 장미빛 미래인 것처럼 이야기를 했다. 그 후 효율성만이 진리인 것처럼 이 사회가 움직이게 되고, 효율성에 벗어나는 모든 사람들은 도태되게 되었다. 그리고 지금 저자가 이야기하고 있는 미국의 문제를 우리가 그대로 따라가고 있다.


과연 어떤 것이 옳은 것일까? 무엇이 해결책일까? 해결책을 제시하기에 앞서 이런 문제들에 대해서 서로 공감하며 이야기만이라도 할 수 있다면 희망이 있지 않을까? 그러나 아무도 미래에 대해서 고민하거나 계획을 세우려 하지 않는다. 이 책의 표지어처럼 '내일을 팔아 오늘을 사는 총동 인류'의 모습만을 보일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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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로그인 2016-02-22 01:1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근시사회`, 오랜만에 보는 좋은 책이네요.

가을벚꽃 2016-02-22 11:12   좋아요 0 | URL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하는 책인데 리뷰로 그 생각과 느낌을 담기는 부족하네요. 리뷰를 쓰면서 글쓰는 한계를 느끼게 하는 책입니다.
 
오래된 생각과의 대화 - 내 영혼에 조용한 기쁨을 선사해준
이하준 지음 / 책읽는수요일 / 2016년 1월
평점 :
품절


 

이하준 교수의 [오래된 생각과의 대화]라는 책을 읽는 내내 한 편의 영화가 떠올랐다. 오래 전에 보았던 '키아누 리브스'가 주연한 [매트리스]라는 영화이다. 영화에서 주인공 레오는 [매트리스]라는 세계 속에 갇혀 있으며, 자신이 보는 세계가 '실재'라고 믿는다. 그러나 어느 순간부터 레오는 자신이 '실재'라고 믿는 세계를 의심하기 시작한다. 결국 그는 가상의 매트리스에서 빠져 나와 진정한 실재의 세계에서 눈을 뜬다. 영화의 화면이 화려한 도시의 세계에서 갑자기 어둡고 음침한 인체 공장같은 곳으로 전환되며, 그 곳에서 눈을 뜨는 레오를 보여 주었을 때의 충격을 지금도 잊지 못하고 있다.


어쩌면 우리도 모두 '매트리스' 속에 살고 있는지 모른다. 존재론적으로 실제 존재하지 않는 가상의 세계 속에 살고 있다는 의미가 아니다. 그냥 눈에 보이는 세상이 전부라고 생각하고, 사람들이 말해주는 것이 전부 진리라고 생각하며 살고 있다는 것이다. 세상이 '성공'과 '부'를 이야기 하니, 나도 그 '성공'과 '부'를 향해 쫓아간다. 그러다가 가끔 삶에서 의문점이 생기면 유명한 인터넷 포털 사이트의 지식검색란에서 질문을 해 본다. 현실의 답만을 제시할 뿐, 우리가 진정 알아야 할 깊이 있는 답은 찾을 수 없다. 그리고 점점 그런 것들이 진리라고 생각한다. 그렇게 우리는 현대문명이 만든 매트리스 속에서 자신을 잃어가고 있는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이 책은 저자가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읽었던 고전들을 소개하는 책이다. 이렇게 말하면 요즘 유행하는 인문학에 관련된 많은 책 중의 하나라고 생각할 수 있다. 혹은 고전에 대한 지식을 얻기 위해서나 시험을 준비할 때 인문학에 대한 얄팍한 지식을 얻기 좋은 책이라고 생각할 수가 있다. 그러나 이 책은 단순히 고전을 소개하는 책이 아니다. 저자가 고전을 읽으며 그 고전 속에서 치열하게 인생의 답을 찾기 위해 고민했던 과정들을 담은 책이다.


저자는 책의 첫 부분에서 '나'를 찾기 위해 고전들과 씨름했던 과정들을 담고 있다. 우리가 진정한 '나'를 찾으려면 세상과 사람들이 말해 주는 '나'의 모습이 아니라, 내 자신 스스로가 나의 모습을 볼 수가 있어야 한다. 저자는 데카르트의 [방법서설]이란 고전을 소개한다. 이 책은 근대철학의 시작과 같은 '코키도 에르그 숨(나는 생각한다. 그러므로 나는 존재한다!)'라는 명제를 담고 있는 책이기도 하다. 이 책에서 데카르트는 모든 것을 의심하기 시작한다. 심지어 악마가 존재하고, 자신이 그 악마가 만든 허상을 보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마치 매트리스 영화와 같은 상황) 그렇다면 아무 것도 존재하지 않고, 아무 것도 믿을 수가 없게 된다. 이 과정에서 데카르트는 절대 의심할 수 없는 한 가지, 생각하는 내가 존재한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데카르트는 그냥 눈에 보이는 것이나 타인이 말하는 것을 무비판적으로 믿은 것이 아니라, 의심을 통해 의심할 수 없는 것을 진리로 믿었다. 저자는 진정한 '나'라는 존재를 발견하기 위해서는 이 과정을 거쳐야 한다고 말한다.


이와 비슷한 고전으로 니체의 [짜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라는 책을 언급한다. 이 책에서 니체는 인간의 정신의 단계를 낙타-사자-어린아이의 세 단계로 제시한다. 낙타는 세상을 무비판적으로 수용하는 단계이고, 사자는 세상에 대항하는 단계이고, 마지막 어린 아이는 자신만의 놀이를 만드는 단계이다. 그리고 이 과정을 통해 진정한 '초인(위버맨쉬)'이 탄생한다고 주장한다.


저자는 세상이나 타인이 가르침을 무비판적으로 수용하기 보다는 자신 스스로가 자신을 만들어 가라고 말을 한다. 그러기 위해서 나는 사람과의 관계에서도 주체적인 존재가 되어야 한다고 말한다. 우리는 흔히 '나'라는 존재를 타인과의 관계에서 규정한다. 그러기에 타인의 시선에 예민하고, 타인이 나를 바라보는 관점으로 나를 바라보게 된다. 다른 사람들이 나를 실패자라고 부르면, 나 역시 나를 실패자로 인식하는 것이다.


나는 누구인가? 이 질문은 '자기 정체성'에 대한 물음이다. 바쁘고 고단한 세상살이에 그 대답을 미룰 수는 있어도, 살아 있는한 결코 도망칠 수 없는 가장 근본적인 물음이다. 이 질문은 '자기 자신에 대한 관심'의 시작, 즉 자기 관찰과 자기 탐구의 시작이기 때문이다. 이 준엄한 질문에 대답하려면 내면에서 우리를 자신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여야 한다. 내면의 여행이라는 과정을 통해 본래적인 자신이 누구인지를 탐구해야 하는 것이다. (P89)



책의 중반부는 '사랑'과 '관계'에 대한 고전들을 언급한다. 우리는 사랑을 하게 되면 그 사람에게 나를 내주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 사람의 일부가 되는 것이다. 특히 많은 사람들이 가정을 이루면서 나를 없애고 가정의 일부가 되야한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저자는 고전들을 인용하며 진정한 사랑은 서로 독립된 인격체로 존재하는 것이고, 가정을 이룬다는 것은 그런 독립된 인격체로서 계약을 맺는 것이며, 자녀를 생산하는 것은 이런 독립된 인격체를 생산하는 것이다라고 말한다. 저자는 헤겔의 [법철학]이란 책을 통해 가정은 정신적 통일을 통해 '인륜성'을 드러내는 것이라고 말한다. 그리고 그 '인륜성'이란 자유가 실현되는 것을 말한다. 즉 가족이란 세계정신이 가지고 있는 자유로운 정신을 드러내는 과정이다.


그렇다면 헤겔이 말하는 인륜성이란 무엇일까? 인륜성은 가기 자신을 실현하는 과정으로서, 정신이 타자와의 관계성 속에서 자신을 드러내는 것을 말하며, 자유가 실현되는 장소를 의미한다. 인륭성은 관계를 전제로 하는 개념이기 때문에, 주관적 정신이 아니라 개관적 정신의 형식으로서 가족, 사회, 국가에서 드러난다.(P120)


저자는 영화 [카미유 클로텔]을 예로 들며 자유적인 존재가 종속적인 사랑으로 인해 어떻게 무너지는가를 언급한다. 결국 상대를 사랑한다면서 그 상대를 자유로운 인격체가 아닌 종속적인 인격체로 만들 때 그것은 상대를 파괴하는 것이다. 저자는 한국의 가정에 이런 부분이 많으며, 특히 자녀 양육에서도 이런 점이 많다고 지적한다.




책의 마지막 부분에서는 '삶'에 대한 고전들을 언급한다. 저자는 헤겔과 칸트가 언급한 '이성의 간계(cunning of reason)를 통해 인생이 우리를 속인다고 말한다. 이 말은 자신의 인생이 자신이 계획한대로 흘러가지 않는다는 말이다. 인생은 노력한 부분에서는 실패를 하게 되고, 노력하지 않는 부분에서는 엉뚱하게 성공을 하게 된다. 그러나 그것도 어느 순간 뒤바뀌게 된다. 그리고 이런 이성의 간계에 흔들리지 않기 위하여 묵묵히 자신의 길을 갈 것을 제시한다.


우리 삶의 도처에도 루소의 경우와 같이 이해할 수 없는 삶의 미묘함, 삶의 역리가 숨어 있따. '행운 없음'에 대한 체념적 태도가 당신을 우울하게 한다면, 그 체염은 가벼운 피해망상으로 번질 수 있다. 그런 비생산적이고 수동적인 태도를 버려야 한다. 설령 당신이 모든 에너지를 쏟아 부은 일에 대한 결과가 없을 때에도, 절망해서는 안된다. 분노와 절망의 시간은 짧을 수록 좋다. 그리고 부당한 방법과 기술에 눈을 돌리지 말고 당신이 왔던 길을 묵묵히 걸어가야 한다. 적어도 당신을 당신답게 했던 가치를 부정하지는 말아야 한다. 영혼을 파는 행위를 함으로써, 그리고 당신의 영혼을 위탁함으로써 당신의 영혼은 죽어간다. (P242)



요즘들어 뉴스와 신문을 보다보면 도대체 무엇인 사실이고, 무엇인 거짓인지 헛갈릴 때가 너무 많다. 매스컴에 등장하는 사람들은 모두들 자신의 주장을 절대진리처럼 이야기 하고, 사람들은 그곳에 맹신하며 따라간다. 그러다가 다음날이면 그 주장이 허위임이 드러나고, 그러면 사람들은 또 반대쪽으로 몰려 간다. 그럼에도 사람들이 불안해하지 않는 이유는 그렇게 몰려 다니는 사람들 중에 속해 있다는 것이다. 자신의 삶에 대해 고민하며 삶을 치열하게 살기를 거부하고, 많은 사람들이 흘러가는 쪽으로 쉽게 몸을 맡기며 사는 것이다.


이 책을 읽으며 먼저는 저자가 읽은 방대한 고전의 양에 감탄을 했고, 다음은 어려운 고전을 영화 등을 예로 들며 쉽게 이야기하는 부분에 감탄했다. 그러나 개인적으로 이 책의 가장 뛰어난 부분은 고전을 통해 남이 말하는 진리가 아닌, 자신이 발견하는 진리를 찾기 위해 치열하게 몸부림치는 저자의 글들이었다. 그렇게 치열하게 발견하는 진리만이 진정한 자신의 진리가 되는 것일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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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을벚꽃 2016-02-10 23:3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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