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이 살아온 나날

 


  한 사람이 책을 씁니다. 한 사람은 처음부터 책 한 권을 쓰지 않습니다. 책 한 권을 쓰는 한 사람이 되기까지 짧지 않은 나날 수많은 사람을 만나고 수많은 일을 치릅니다. 한 사람은 제법 기나긴 나날 숱한 고비와 갈림길에 서고, 웃음과 눈물을 피워내면서 사랑과 꿈을 키웁니다. 글 한 줄을 쓰기까지 열 해가 걸리고, 책 한 권을 쓰기까지 서른 해가 걸리며, 이야기 한 자락 마무리짓는 데에 쉰 해가 걸립니다.


  한 사람이 쓴 책 한 권을 읽는 사람은 책값을 치르려고 일을 해서 돈을 법니다. 즐겁게 일해서 즐겁게 번 돈을 들고 책방마실 즐겁게 합니다. 책방지기는 즐거움 감도는 돈을 받아 즐거운 빛 깃든 책을 즐겁게 웃는 책손한테 살가이 건넵니다.


  한 사람이 책을 읽습니다. 한 사람은 처음부터 책 한 권 읽어내지 못합니다. 책 한 권을 읽는 한 사람이 되기까지 짧지 않은 나날 수많은 사람을 만나고 수많은 일을 겪습니다. 한 사람은 무척 기나긴 나날 갖은 고비와 갈림길에 서고, 웃음과 눈물을 길어올리면서 사랑과 꿈을 보살핍니다. 글 한 줄을 읽기까지 열 해가 걸리며, 책 한 권을 읽기까지 서른 해가 걸리고, 이야기 한 자락 가슴으로 삭히는 데에 쉰 해가 걸립니다.


  책 한 권 태어나고서 서른 해를 살아갑니다. 이 책 한 권을 서른 해 앞서 장만하여 읽은 누군가는 어느덧 흙으로 돌아갔을 수 있습니다. 이 책 한 권 서른 해 앞서 장만하여 읽은 누군가는 허옇게 센 머리에 주름진 살결로 늙은 할매나 할배일 수 있습니다.


  사람은 죽어 흙으로 돌아가더라도, 책을 쓴 사람 넋은 책마다 고이 숨쉽니다. 사람은 죽어 흙으로 묻히더라도, 책을 읽은 사람 손길은 책마다 살포시 흐릅니다. 책은 앞으로 백 해나 이백 해를 더 살아갑니다. 책은 앞으로 오백 해나 천 해를 더 살아낼 수 있습니다. 4346.9.25.물.ㅎㄲㅅㄱ

 

(최종규 . 2013 - 헌책방 언저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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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ppletreeje 2013-09-25 12:51   좋아요 0 | URL
그러니까 책이 살아온 나날은
사람이 살아온 나날이군요.
오늘도 좋은 글 주셔서 감사합니다~*^^*

숲노래 2013-09-26 05:12   좋아요 0 | URL
언제나 아름다운 나날
즐겁게 누리셔요.

그 날이 모여 예쁜 삶이 되는구나 하고
늘 새롭게 느껴요.
 

아이와 함께 서는 헌책방

 


  아이와 함께 헌책방에 선다. 아이가 있기에 아이와 함께 헌책방마실을 한다. 아이가 없던 지난날에는 혼자 헌책방에 섰다. 혼자 두 시간 세 시간 네 시간 다섯 시간, 그예 시간 가는 줄 잊고 헌책방에서 책에 파묻혀 지냈다. 오늘 이 헌책방에서 만나는 이 책들은 다음에 이곳에 다시 찾아올 적에 다른 책손이 장만해서 못 보기 마련이라 느끼기에, 내 앞에 나타나는 책들을 살피고 읽느라 해가 꼴딱 넘어가도록 책바다에서 수많은 사람들 삶을 마주했다.


  아이는 헌책방에서 책을 만지작거리기도 하지만, 천장까지 닿는 책꽂이마다 빼곡하게 들어찬 책 사잇길을 마음껏 걷는다. 춤을 추기도 하고 노래를 부르기도 한다. 혼자서 숨바꼭질을 하고, 동생하고 술래잡기를 한다. 큰아이는 저 혼자 아버지하고 헌책방마실 하던 날에는 무엇을 생각했을까. 큰아이는 제 동생이 제법 자라 저랑 둘이서 헌책방 골마루를 달리며 놀 수 있는 요즈음 어떤 생각을 할까.


  아이는 머잖아 한글을 깨치겠지. 한글을 깨치면서 이 책 저 책 들추겠지. 한글을 깨칠 뿐 아니라, 글을 익히고 난 뒤에는 이 사람 저 사람 들려주는 오랜 삶빛을 책에서 만나겠지.


  아직 한글을 다 모르니, 이동안에는 나무를 읽고 풀을 읽으며 꽃을 읽으렴. 아직 글을 제대로 모르니, 이동안에는 하늘을 읽고 해를 읽으며 별을 읽으렴. 바람과 흙을 읽고, 비와 내를 읽으렴. 구름과 숲을 읽고, 풀벌레와 제비를 읽으렴.


  우리가 읽을 이야기는 늘 우리 둘레에 있단다. 우리가 아로새길 이야기는 언제나 우리 곁에 있단다. 책에서도 얼마든지 길을 찾고, 책 아닌 우리 삶에서 스스로 길을 찾는다. 길은 어디에나 있는데, 볼 눈이 있을 때에 보고, 볼 눈이 없을 때에 못 본단다. 코앞에 내가 바라는 책이 꽂힌 줄 모르는 채 지나칠 수 있고, 저 먼 책시렁 어딘가에 내가 바라는 책이 있다고 마음으로 느껴 두근두근 설레는 가슴으로 그 책시렁으로 다가서기도 한다.


  마음을 열면 마음으로 이야기가 스며들지. 생각을 열면 머리와 온몸으로 노래가 샘솟지. 사랑을 열면 넋과 얼은 고운 빛으로 가득하지. 내 마음속에 빛샘이 있어 책을 읽을 수 있다. 내 마음속에 사랑밭이 있어 책에서 만난 아름다운 이야기를 즐겁게 씨앗으로 심을 수 있다. 4346.9.23.달.ㅎㄲㅅㄱ

 

(최종규 . 2013 - 헌책방 언저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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헌책방에서 만나다

 


  도서관에서 ‘세계여행’을 한다고 말씀하는 분이 있습니다. 중학생 적에 이런 말을 듣고는 인천시에 있는 시립도서관과 구립도서관을 모두 찾아다니며 어떤 책이 있는가를 찬찬히 살폈습니다. 내 동무들은 도서관에 ‘시험공부’를 하러 갔지만, 나는 도서관에 ‘책을 읽으러’ 갔습니다.

 

  1980년대 끝무렵과 1990년대 첫무렵 인천시 도서관은 ‘세계여행’을 시켜 줄 만한 책이 얼마 없었습니다. ‘국내여행’조차 제대로 시켜 주지 못했습니다. 도서관보다는 여느 새책방이 ‘여행’을 시켜 준다고 느꼈습니다.


  고등학교 2학년이던 1992년에 인천 배다리 헌책방거리에서 책에 눈을 떴습니다. 헌책방 한 곳 크기는 새책방 크기하고 견주면 퍽 작기도 하고 책꽂이도 조그맣다 할 수 있어요. 도서관 커다란 건물하고 대면 헌책방은 그야말로 콩알만 하구나 느끼기도 합니다. 그런데, 헌책방에는 도서관에 없고 새책방에 없는 책이 그득했어요. 도서관에서 갖추지 않는 책들이 있고, 새책방에서 사라진 책들이 있어요.


  헌책방에서 ‘세월 넘나드는 여행’을 합니다, 헌책방에서 ‘이 나라와 저 나라 가로지르는 여행’을 합니다. 다른 나라에서 나온 온갖 책을 헌책방에서 만납니다. 예전 사람들이 땀흘려 일군 알뜰한 책을 헌책방에서 만납니다.


  왜 도서관에는 다른 나라 책이 거의 없을까요. 왜 도서관에는 예전 책을 찾아보기 이토록 어려울까요. 도서관에는 어떤 책을 놓아야 어울릴까요. 새책방에는 어떤 책을 갖추어야 아름다울까요. 사람들은 도서관에서 어떤 책을 빌려 읽어야 즐거울까요. 사람들은 새책방에서 어떤 책을 사서 읽을 적에 흐뭇할까요.


  중국조선족이 엮은 책을 헌책방에서 만나며 생각합니다. 한국에 있는 헌책방에서 이 책을 만났기에, 나로서는 비행기삯을 들이지 않아도 되고, 중국 연변에 있는 신화서점이나 헌책방을 샅샅이 찾아다니지 않아도 됩니다. 돈 몇 푼으로 중국 연변 나들이를 다녀온 셈입니다.


  먼 나라 이웃 숨결을 느낍니다. 먼 나라 이웃 손길이 깃든 책을 넘기면서 내 마음으로 스며드는 넋을 곱씹습니다. 책을 만나면서 삶을 만납니다. 책을 읽으면서 생각을 읽습니다. 책을 사귀면서 고운 꿈을 키웁니다. 4346.9.19.나무.ㅎㄲㅅㄱ

 

(최종규 . 2013 - 헌책방 언저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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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을 보는 곳

 


  책방이 크면 책을 많이 갖다 놓을 수 있습니다. 책방이 작으면 책을 알뜰히 갖다 놓습니다. 책방이 클 적에는 온갖 갈래 온갖 책을 골고루 갖출 수 있습니다. 책방이 작을 적에는 꼭 이곳에 두어야겠다고 생각하는 책을 살뜰히 추려서 갖춥니다. 자리를 넓게 쓸 수 있는 도서관에서는 온누리 수많은 책을 잔뜩 그러모을 수 있습니다. 마을에 조그맣게 여는 도서관에서는 마을사람한테 꼭 읽히거나 보여주고픈 책을 촘촘히 골라서 그러모읍니다.


  내 주머니에 살림돈 백만 원 있을 적에는 백만 원어치 책을 살 수 있습니다. 내 주머니에 살림돈 십만 원 있을 적에는 십만 원어치 책을 살 수 있습니다. 내 주머니에 살림돈 만 원 있을 적에는 만 원어치 책을 사기에도 빠듯하지만, 살 수 없는 책은 눈으로만 살피고 꼭 사야겠다고 여기는 책만 주머니를 헤아려 한두 권 뽑습니다.


  아이들 보살피는 어버이라면, 어버이인 내가 읽을 책에 앞서 아이들한테 읽히고픈 책을 먼저 고릅니다. 어버이인 내가 읽고픈 책하고 아이한테 읽히고픈 책이 함께 보일 적에는, 주머니에 따라 으레 아이 책을 먼저 집어듭니다. 주머니가 넉넉하다면 두 가지 책을 넉넉히 고르겠지요.


  오늘 내 주머니에 따라 장만하는 책과 장만하지 못하는 책은 어느 쪽이 더 좋거나 낫다고 하는 책이 아닙니다. 오늘 내 삶에 맞춘 책일 뿐입니다. 더할 나위 없이 아름답구나 하고 느끼는 책이라 하더라도 주머니가 가벼워 침만 흘리는 책이 있어요. 참으로 갖고 싶은 책이라 하더라도 주머니를 떠올리며 마음속으로만 담는 책이 있어요. 주머니는 넉넉하더라도 집이 작으면 모든 책을 다 장만해서 집에 두지 못해요. 책에 앞서 집부터 넉넉히 다스려야 합니다.


  책방마실을 합니다. 커다란 책방으로도 마실을 하고, 조그마한 책방으로도 마실을 합니다. 어느 책방으로든 아름다운 책을 만나고 싶다는 꿈을 꾸며 마실을 합니다. 크기가 작은 책방에서는 책시렁 한켠 책탑 뒷자락까지 빠짐없이 살핍니다. 크기가 넓은 책방에서는 널따란 골마루와 책시렁을 차근차근 두루 살핍니다.


  열 가지 책을 읽으며 열 가지 눈길을 건사할 수 있습니다. 한 가지 책을 열 번 읽으며 열 가지 눈썰미를 건사할 수 있습니다. 책을 읽으면서 눈길을 틉니다. 책을 읽는 동안 눈썰미를 키웁니다. 책을 읽으면서 눈빛을 밝힙니다. 책을 읽는 동안 눈결이 거듭납니다. 책을 보는 곳은 내가 살아가는 곳입니다. 4346.9.16.달.ㅎㄲㅅㄱ

 

(최종규 . 2013 - 헌책방 언저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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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이를 먹는 책

 


  처음 태어났을 적에는 반짝반짝 빛났을 책 한 권은 열 해, 스무 해, 서른 해, 마흔 해를 지나면서 차츰 낡거나 닳는다. 쉰 해, 예순 해, 일흔 해를 지난 책은 섣불리 만지기 어렵기도 하고, 자칫 책종이가 바스라지거나 뜯어질까 걱정스럽기도 하다.


  사람들이 나이를 먹으면서 늙은 몸 되듯, 책도 나이를 먹어 늙은 책이 되는 셈일까. 그렇지만, 책은 쉰 해나 오백 해 나이를 먹더라도 처음 모습에서 달라지지 않는다. 처음 아로새긴 이야기가 언제까지나 곧게 이어진다. 책에 이야기를 아로새긴 사람들이 오래오래 이어갈 이야기를 아로새겼으면, 책은 언제나 새롭다. 책에 이야기를 아로새긴 사람들이 한두 해 반짝 많이 팔아치워 돈을 벌 생각만 했으면, 책은 이내 고개를 꺾는다.


  한국 도서관에서는 대출실적 적은 책을 버린다. 대출실적 적은 책을 버려야 대출실적 올릴 만한 새책을 장만해서 꽂을 자리가 난다. 헌책방에서는 도서관에서 버린 대출실적 적은 책을 고맙게 건사하곤 한다. 도서관에서는 빌려서 읽기 어렵지만, 집안에 모셔서 두고두고 되읽고 되살필 만한 책이 어김없이 있기 때문이다.


  책을 빚는 사람은 책 한 권이 쉰 해 뒤에 어떤 삶 맞이할는지를 생각할 겨를이 있을까. 책을 읽는 사람은 책 한 권을 쉰 해 뒤에도 즐겁게 건사하면서 살림집 한쪽에 곱게 꽂아 놓겠다고 생각할 틈이 있을까. 오늘 만들어 오늘 읽히기만 하면 될 책인가. 오늘 만든 이 책을 오늘을 비롯해서 앞으로도 꾸준히 즐기면서 아름다운 삶 빛내는 길동무가 될 책인가. 4346.9.10.불.ㅎㄲㅅㄱ

 

(최종규 . 2013 - 헌책방 언저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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