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고른 책을 넘겨주기



  새책방에서는 책 하나를 두고 다투거나 실랑이를 벌일 까닭이 없다. 새책방에서는 같은 책을 여러 권 장만할 수 있으니까. 헌책방에서는 책 하나를 두고 다투거나 실랑이를 벌일 수 있다. 왜냐하면, 헌책방에 들어오는 헌책은 꼭 하나뿐이기 일쑤이니까.


  《사진으로 보는 소설 70년사》라는 조그마한 사진책이 있다. 나는 사진비평을 하기 때문에 이 책을 헌책방에서 찾으려고 꽤 여러 해 바지런히 다리품을 팔았다. 그러고서 드디어 이 책을 만난다. 아 반갑구나, 이제 비로소 네 이야기를 쓸 수 있구나 하고 생각한다. 그런데, 함께 헌책방 나들이를 한 분이 자꾸 이 책을 바라본다. 이 책을 보고 싶다고 넌지시 마음을 내보인다.


  딱한 일이다. 책은 하나인데, 이 책을 건사하고 싶은 사람은 둘이로구나. 어떻게 해야 하는가. 모르는 척해야 할까. ‘나도 이 책으로 사진비평을 써야 한다구요.’ 하고 말해야 하는가.


  빙그레 웃으면서 책벗한테 책을 넘긴다. “저는 전국 여러 헌책방을 두루 돌아다니니, 다음에 다시 만날 일이 있으리라 생각해요.” 책벗이 이 책을 즐겁게 읽고 알뜰히 아낄 수 있기를 빈다. 아무렴, 알뜰살뜰 건사하며 보듬어 줄 테지.


  그나저나 앞으로 몇 해를 더 살펴야 다시 이 책을 만날 수 있을까. 나는 앞으로 몇 해쯤 뒤에나 이 책을 놓고 사진비평을 쓸 수 있을까. 4347.4.19.흙.ㅎㄲㅅㄱ


(최종규 . 2014 - 헌책방 언저리)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버린다고 사라진다면

 


  서강대학교에서 ‘폐기’ 도장을 찍어서 버린 책을 서울 신촌에 있는 헌책방에서 만난다. 대학교 도서관에서 어느 책 하나를 버리려 한다면 버릴 만한 까닭이 있으리라. 우리들이 이 까닭을 알아내든 알 수 없든 틀림없이 까닭이 있다. 그런데, 이 책이 참말 아주 사라져서 종이쓰레기가 되든 되살림종이가 되면 어떻게 될까. 도서관에서는 ‘버리려는 뜻’에 걸맞게 가슴을 쓸어내릴는지 모르지만, 책이 걸어온 발걸음과 발자취로 돌아보자면 여러모로 아쉽다. 생각해 보라. 일제강점기가 끝날 무렵, 일본 군인이 이녁한테 나쁘게 쓰일 만한 자료와 문서를 엄청나게 불태워 없앴다고 하지 않는가. 정권이 바뀔 적에도 자료 없애기나 문서 없애기는 늘 일어나지 않으랴 싶기도 하다. 우리 역사를 돌아본다면, 1960∼70년대를 흐르는 동안 유신독재와 종신독재를 하고자 여러 가지 공공문서와 공공도서를 나라에서 앞장서며 불태워 없애기도 했다.


  여러 달 앞서 헌책방에서 만난 《한국문인협회 엮음-새 국민 문고, 민족 중흥》(어문각,1969)이라는 책을 따올린다. 1969년에 처음 나온 이 ‘유신독재 부스러기’가 언제부터 대학교 도서관 한쪽에 꽂혔는지 알 길은 없다. 어쩌면 1969년에 정부에서 신나게 찍어 전국 초·중·고등학교와 대학교 도서관에 한 권씩 꽂았을는지 모른다. 나중에 수없이 찍어서 꾸준하게 널리 퍼뜨렸을 수 있겠지. 이 책이 오늘날 몇 권이 남았는지 어느 곳에 남았는지 알 길은 없다.


  그러면, 이 책을 대학교 도서관뿐 아니라 국립중앙도서관에서까지 없앤다면? 그때에 이 책은 어떤 책이 될까? 없는 책이 될까? 잊혀지는 책이 될까? 태어난 적이 없는 책으로 사람들 마음에 남을까? 아니, 이런 책이 태어난 줄 모르는 사람이 더 많을 테니, 쥐도 새도 모르게 조용히 지나갈 수 있을까?


  버린다고 사라진다면 역사란 없으리라. 버린다고 사라진다면 역사란 모두 거짓말이 되리라. 버린다고 사라지지 않기에 역사가 있고, 버린다고 사라질 수 없기에 역사를 참된 말로 적을 수 있으리라. 이 나라에서 헌책방이 맡은 몫은 참 대단하다. 4347.4.6.해.ㅎㄲㅅㄱ

 

(최종규 . 2014 - 헌책방 언저리)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책을 한 권 알아보는 눈길

 

 

  모든 책은 돈으로만 살 수 없다. 돈을 들인대서 모든 책을 사들일 수 없다. 새로 나온 책이라면 새책방에 주문을 넣으면 집에서 택배로 얼마든지 받는다. 그러나 판이 끊겨 사라진 책은 헌책방마실을 하면서 다리품을 팔아야 한다. 판이 끊겨 사라진 책을 사고 싶다면, 이 책을 건사한 누군가 헌책방에 즐겁게 내놓는 날까지 기다려야 한다. 아무도 헌책방에 책을 내놓지 않으면, 판이 끊어진 책은 두 번 다시 만날 수 없다.

 

  책방지기는 책손한테 책을 판다. 새책방에서는 새책을 파고 헌책방에서는 헌책을 판다. 어느 책방에서는 책을 판다. 새책방에서는 늘 똑같은 책을 팔고, 헌책방에서는 늘 다른 책을 판다. 왜냐하면, 새책방에 놓는 갓 나온 책은 모두 똑같은 책이다. 아직 누구 손길도 타지 않은 새책은 모두 똑같다. 책손 손길을 탈 적에 비로소 다른 책이 되고, 다 다른 책손이 다 다른 넋으로 읽고 삭히는 동안, 다 똑같던 책에 다 다른 숨결이 깃들면서 다 다른 이야기로 피어난다. 그래서 헌책방에서 다루는 헌책은 똑같은 책이 한 가지조차 없다. 다 다른 사람들이 다 다른 삶에 따라 다 다른 즐거움을 누리며 읽은 책이니까.

 

  책을 한 권 알아본다. 책을 한 권 알아본 사람은 책을 한 권 장만한다. 책을 장만한 날 곧바로 끝쪽까지 다 읽을 수 있다. 바쁜 일이 있어 이레쯤 묵힌 뒤 읽을 수 있다. 사 놓고 깜빡 잊은 나머지 한 해가 지나서 읽을 수 있다. 장만하고서 곧바로 읽으려고 손에 쥐었다가 도무지 무슨 소리인지 못 알아듣겠구나 싶어 덮은 뒤, 열 해나 스무 해 지나서야 펼치니 비로소 머릿속에 쏙쏙 들어올 수 있다.

 

  책은 읽힐 적에 새책이다. 책은 누군가한테 읽히면서 비로소 새책이 된다. 열 해를 묵든 백 해를 묵든, 알아보는 눈길이 없으면 모든 책은 그저 묵은 책일 뿐이다. 먼지가 쌓이고 더께가 앉으면서 헌책이 되면, 책은 책으로서 제 빛을 드러내지 못한다. 이러다가 누군가 이 책 한 권을 알아보고는 살며시 집어서 가만히 넘기면, 모든 헌책은 새책이 된다. 새롭게 빛나고 새삼스레 눈부시다.

 

  모든 책은 태어나면서 헌책이 되지만, 모든 책은 읽히면서 새책이 된다. 모든 책은 책꽂이에 꽂으면 헌책이 되나, 모든 책은 손에 쥐어 읽으면 새책이 된다. 4347.4.2.물.ㅎㄲㅅㄱ

 

 (최종규 . 2014 - 헌책방 언저리)

 


댓글(0) 먼댓글(0) 좋아요(6)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손때

 


  책을 읽으면 손때가 탄다. 새책도 헌책도 모두 손때가 탄다. 손때가 타지 않도록 책을 읽으려면 장갑을 끼면 된다. 장갑을 끼고 책을 읽으면 손때가 타지 않는다. 다만, 장갑을 낀 채 책을 읽으면, 책장이 하나씩 넘어가면서 책이 살짝 부푼다. 아무도 넘기지 않은 책은 부풀지 않고 납작하다. 책을 읽는 사람은 갓 만든 책마다 가볍게 붙은 책장을 톡톡 떼는 셈이다.


  새책방에 놓인 새책도 사람들이 살짝살짝 들추거나 살피려고 건드리면 손때가 탄다. 스스로 장만할 생각이 아니라면 새책방에 놓인 새책을 섣불리 건드리지 말 노릇이다. 왜냐하면, 내가 건드려서 손때를 남긴 책을 다른 책손이 장만하고픈 마음이 안 들 수 있으니까.


  헌책방에는 손때가 탄 책이 들어온다. 손때가 들어온 책을 읽거나 살필 적에는 여러모로 홀가분하다. 새책방처럼 내 손때가 더 탈 걱정을 안 해도 된다. 외려 헌책방에서는 손때가 탄 책이 읽기에 좋다. 한 차례나 두 차례 손때가 탄 책은 종이가 잘 넘어간다. 손때가 탄 책은 손끝을 베지 않는다. 손때가 안 탄 책은 잘못 넘기다가 손끝이 베어 핏물이 책에 뚝뚝 떨어지기도 하지만, 손때가 잘 탄 책은 잘못 넘기더라도 바스락 소리가 날 뿐 손끝을 베지 않고 종이도 구겨지지 않는다. 4347.3.25.불.ㅎㄲㅅㄱ

 

(최종규 . 2014 - 헌책방 언저리)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책 하나 깃드는 헌책방

 


  헌책방이 나이를 먹는다. 헌책방을 다니는 나도 나이를 먹는다. 헌책방지기도 나이를 먹어, 처음에는 젊은이였던 분이 아저씨 되고, 처음에 아저씨로 만난 헌책방지기가 할아버지가 된다. 처음에 푸름이로 헌책방을 찾아가던 사람은 스무 살 앳된 젊은이였다가 마흔 살 넘어서는 아저씨가 된다. 헌책방마실 스무 해가 넘고 나이 마흔을 넘긴 이라면, 이제 이녁 아이 손을 잡고 헌책방마실을 한다. 앞으로 열 해가 지나고 스무 해가 더 지나면, 이녁 아이가 무럭무럭 커서 새로운 아이와 함께 헌책방마실을 할 수 있겠지.


  빛 한 줄기 흐른다. 마흔 살 먹은 책에 빛 한 줄기 흐른다. 내가 태어나던 무렵에 함께 태어난 책이 여러 사람 손길을 거치고 돌다가 헌책방 책꽂이에 살풋 놓인다. 긴긴 나들이 끝에 이곳에서 쉬는 셈일까? 이 작은 책은 내 품에 안길 수 있고, 다른 책손 품에 안길 수 있다. 이 책을 품에 안은 누군가는 한동안 즐겁게 책빛을 누리리라. 그러고는 다시 이 책을 넌지시 헌책방에 내놓아, 앞으로 스무 해 뒤쯤 누군가 이 책을 만날 수 있도록 다리를 놓겠지.


  새로 나오는 아름다운 빛이 새책방마다 감돈다. 새로 나와 읽힌 책이 스무 해를 흘러 헌책방 책꽂이로 자리를 옮긴다. 다시 스무 해가 더 흘러 다른 헌책방 책꽂이로 깃든다. 그리고 또 스무 해가 흐르면, 헌책방지기는 조용히 눈을 감을는지 모르고, 처음 이 책을 만지작거리며 아끼던 이도 늙은 헌책방지기와 함께 조용히 눈을 감을는지 모른다.


  어떤 사람이 이 책을 아끼면서 삶을 지었을까. 어떤 사람들이 그동안 이 책을 만나면서 웃고 울며 노래하고 춤추었을까. 이제 앞으로 어떤 사람들이 이 책을 새롭게 만나면서 마음밭에 씨앗 한 톨 심을까. 4347.3.20.나무.ㅎㄲㅅㄱ

 

(최종규 . 2014 - 헌책방 언저리)

 

 


댓글(2)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그렇게혜윰 2014-03-20 11:15   좋아요 0 | URL
맞네요 헌책만 나이를 먹는 게 아닌 거네요^^

숲노래 2014-03-21 09:00   좋아요 0 | URL
그럼요.
모두들 나이를 예쁘게 먹으면서
아름답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