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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문이 살아남는 방법 움베르토 에코 마니아 컬렉션 19
움베르토 에코 지음, 김운찬 옮김 / 열린책들 / 2009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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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코의 제자들이 찾아낸 기성품 문장

움베르토 에코가 쓴 사회비평서 『신문이 살아남는 방법』(움베르토 에코 마니아 컬렉션 No. 19)에는 이탈리아 신문 기사에 대한 흥미로운 내용이 언급된다. 에코의 제자들이 신문기사에서 찾아낸 상투적이면서도 자극적인 문장들을 확인할 수 있기 때문이다.  

  <퀴리날레는 전쟁 준비가 되어 있다> <정부가 길을 열어야 할 것이다>
  <신이여, 친구들에게서 나를 구하소서.> <최악의 파트너 선택>  

이 문장 이외에도 에코의 책에서 열거된 이탈리아 어 문장들은 은유적이라서 우리나라의 신문기사 내용과 좀 다른 느낌을 받을 수 있겠다. 한편으로는 얼핏 사설에서 볼 수 있는 문장들 같다. 사설은 하나의 사건에 대해서 글을 쓰는 사람이 주관적인 생각과 의견을 적는 것이다. 그러나 사설은 기사문과 다르다. 기사문은 사실을 보고 들은 그래도 기록되는 것이다. 신문 독자들에게 한 쪽 입장에 치우치지 않는 공정성과 객관성이 요구된다. 에코는 이런 문장들을 ‘기성품 문장’이라고 비꼬면서 이런 문장들의 50%는 신문기자들이 만들었고, 나머지 50%는 관련기사 속 인물들의 인터뷰에서 발췌한 것이라고 말하였다.    

 

우리나라 신문 헤드라인에서 찾은 기성품 문장 

우리나라 신문들도 보게 되면 에코가 말한 기성품 문장들을 찾아볼 수 있다. 이탈리아처럼 기사문 내용 안에서는 많이 발견되지 않지만 독자들의 이목을 단시간에 끌 수 있는 헤드라인에서는 많이 볼 수 있다. 그래서 필자도 에코의 제자와 같은 마음으로(?) 우리나라 신문 헤드라인 속의 기성품 문장들을 찾아보았다.

  #1 [짐승이라니… 격조 있게 한번 울어봐라]
  #2 [與 계파초월 ‘밥상 정치’] 
  

#1 헤드라인은 헤드라인 자체만 봐서는 기사 내용을 가늠할 수가 없다. 처음 헤드라인 문장을 접하게 된 신문독자로 하여금 기사 속 내용이 궁금하게 만든다. ‘짐승’ 이라는 단어에서 나오는 단어의 강한 인상, 그리고 ‘격조’ 라는 명사와 ‘울다’ 라는 동사라는 낯선 조화는 독자들의 호기심을 유발하게 한다. #1은 2010년 8월 24일에 천안함 사고 유족 자들에게 ‘짐승’ 비하 발언을 하여 물의를 빚은 조현오 경찰청장 후보자가 천안함 묘역에 찾아가 참배했다는 단순한 기사의 내용이다. 기사가 게재된 당시, 조현오 경찰청장 후보자는 ‘짐승’ 발언 이후로 천안함 유족 자들로부터 비난을 받고 있는 분위기였다. 헤드라인의 문장은 조현오 경찰청장이 참배하고 있는 모습을 보고 있던 천안함 유족 자 중의 한 사람이 항의하면서 나온 말이다. 기자가 이런 자극적인 헤드라인을 정하게 된 의중은 알 수는 없다. 그러나 기사 속 인물의 말을 빌려 헤드라인으로 사용하면서 독자들로 하여금 비극적 사고로 자식을 잃은 유족 자의 울분과 슬픔을 감정이입하게 만들고 있다. 반면에 공인으로서 해서는 안 될 발언을 하게 된 조현오 경찰청장 후보자는 ‘나쁜 놈’이라는 인식을 하게 만든다. 조현오 후보자의 발언은 당연히 비난받아야 할 일이지만 #1의 기사는 자극적인 헤드라인을 통해서 조현오 후보자의 비행을 은연중에 강조시키고 있다.  

 

#2 헤드라인의 기사는 28일, 박근혜 전 한나라당 대표와 친이계 진영의 이재오 특임장관이 오찬을 통해 만나는 내용이다. 18대 총선 공천 파문 때문에 형성된 대립 구도를 탈피하여 화해 모드 전환 및 여당의 화합된 분위기를 도모하기 위해 친박계와 친이계 의원들이 모여 식사를 하는 것이다. 그런데 기사 속 내용에는 이들의 만남을 ‘식사 정치’라고 언급하면서도 헤드라인만은 ‘밥상 정치’라고 표현하고 있다. 싸우다가 다시 친해지고, 또 싸우는 친박계와 친이계의 모습이 기자는 비꼬려는 의도일까? 헤드라인에도 격조 있게 ‘식사 정치’라고 해도 될 텐데 말이다. 헤드라인 속 문장 하나 때문에 계파의 갈등을 넘은 화합의 장이 주는 긍정적인 이미지를 격하시키고 있다.  

  

그리고 오늘 열린 김황식 총리 후보자의 국회청문회에 대한 기사에서는 특정 인물의 행동과 말 위주로 보도되는 ‘가차 저널리즘(Gotcha journalism)'을 볼 수 있다. 부동시로 인한 병역면제 때문에 여당으로부터 썩 좋지 않은 이미지를 받고 있는 김 후보자인 만큼 이런 기사들은 보는 신문독자들은 김 후보자에 대한 병역면제 의혹을 더욱 증폭하게 된다.   

 

  #3 [김황식 "안경점에서 '짝눈' 이렇게 심하냐고 놀라더라"] 
 #4 [안경 고쳐 쓰는 김황식 총리 후보자..`부동시라서···`]  

 

#3의 헤드라인은 부동시에 대한 김 후보자의 해명을 오히려 의혹에 대해 변명하는 식으로 만들고 있다. #4는 인터넷 뉴스 속의 포토뉴스 헤드라인이다. 이 기사에는 안경을 고쳐 쓰는 김 후보자가 찍힌 사진과 달랑 두 줄만의 문장만 있을 뿐이다. 김 후보자의 안경을 고쳐 쓰는 행동을 가지고 부동시 때문이라고 보기에는 어렵다. 가차 저널리즘의 형태는 사안의 맥락과 관계없이 흥미 위주로 보도된다. 그래서 #4 기사의 경우, 부동시와 병역면제 때문에 국회에서 곤혹을 치르고 있는 김 후보자를 겨냥한 가차 저널리즘의 기사인 것이다. 
 

 

 

우리나라 신문이 살아남는 방법

이탈리아 신문의 현실에 대한 에코의 따끔한 비판은 기성품 문장의 과도한 사용에서만 끝나지 않는다. 텔레비전의 등장하기 전에는 신문이 1차적 정보 전달의 근원지였지만 지금은 텔레비전의 보급으로 인해서 경쟁에서 밀려났으며 상황이 이렇다보니 텔레비전과 같은 흥미 위주의 정보 전달에 급급하여 신문 정보의 질이 떨어졌다고 주장한다. 이제 이탈리아 신문은 텔레비전의 시녀라고 말하기도 한다.  

 

에코가 지적한 이탈리아 신문의 현실은 우리나라에서 나오는 신문에서도 볼 수 있다. 사실 모 일간지를 구독하고 있는데 매일 일간지 사이에 끼워져 나오는 얇은 부록 특집기사들을 보면 신문에 부록 전달에만 할애하고 있다는 느낌을 지울 수가 없다. 물론 구독자에게 생활에 유용한 다양한 정보를 전달해주는 것은 좋다. 그리고 시대가 변함에 따라 구독자들의 취향도 달라지기 때문에 실용 정보에 관심 있는 요즘 구독자의 취향에 발맞춰야 하는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과도한 부록 특집기사는 사건에 대한 사실이나 해설을 널리 신속하게 전달하기 위해서 만든 신문으로서의 목적을 상실하게 된다. 배보다 배꼽이 커버리게 되는 것이다.

요즘 신문사에서는 자체로 시사 관련 방송 채널을 만들어 TV에서도 신문기사들을 전달하기도 한다. 최근에는 많은 부수기록을 자랑하는 모 경제 일간지 회사가 운영하는 경제시사 방송 채널에서는 다음날 신문기사 내용들을 전날 밤에 미리 확인할 수 있는 방송 프로그램을 기획하기도 했다. 따끈따끈한 경제의 동향을 미리 알 수 있어서 기획의 취지는 좋지만, 신문으로서의 정보 전달의 주도권이 이미 TV 쪽으로 넘겨줘버린 꼴이다. TV만 신문을 위협하는 것이 아니다. 스마트폰의 빠른 보급도 신문을 죽이고 있다. 관심 있는 사건을 알고 싶으면 굳이 신문을 구독할 필요도 없이 간단히 스마트폰의 인터넷으로 검색만 하면 된다.   

 

정보 통신의 발달로 종이 책만 위기가 오는 것이 아니다. 어쩌면 종이 신문도 사라질 수도 있다. 저널리즘에 대해서 깊이 있는 지식이 없어서 무조건 이렇게 해야 한다고 단정할 수 없지만, 필자의 생각에는 우리나라 신문이 살아나는 방법으로는 종이 언론의 영향력이 떨어지는 현실을 방관하지 말고, 구독자들과 소통을 할 수 있는 차별화된 기사의 콘텐츠를 구축해야한다고 생각한다. 구독 수의 많고 적음에 연연하지 말고 독자들도 기자가 되어 저널리즘의 영역으로 참여할 수 있는 프로그램을 확대하면 신문 기사의 양도 늘리는 것과 동시에 기사 정보의 질도 향상될 수 있을 것이다. 획일적인 색채의 정보로 치우친 옐로 저널리즘(Yellow journalism)에서 벗어나 다양한 색채의 정보들로 가득 찬 퍼블릭 저널리즘(Public journalism)로 전환하는 길만이 우리나라 신문의 미래가 한층 더 밝아질 수 있는 청사진이다.  

 

 

 

* 헤드라인 관련 기사 출처 링크 

 

  #1「조선일보」2010년 8월 25일   

  http://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10/08/24/2010082401185.html

 #2「동아일보」2010년 9월 29일  

http://news.donga.com/Politics_List/3/00/20100929/31466084/1

 #3「조선일보」2010년 9월 29일  

 http://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10/09/29/2010092901052.html

 #4「이데일리」2010년 9월 29일
http://www.edaily.co.kr/news/NewsRead.edy?SCD=DA32&newsid=02361606593105040&DCD=A01503&OutLnkChk=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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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종주의 비타 악티바 : 개념사 9
박경태 지음 / 책세상 / 2009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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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헤미안들의 수난

요즘 프랑스가 유럽 국가들로부터 비난을 받고 있다. 프랑스에 정착하고 있던 집시(Gipsy)들을 강제 추방하는 정책이 화근이었다. 집시는 일정한 거주지 없이 항상 이동하면서 생활하는 소수 유랑 민족이다. 미신적이고 음악에 뛰어난 재능을 가져 이들이 가지는 직업이 대부분 점쟁이나 가수, 춤꾼이 많다. 그래서 이들을 가리키는 호칭이 많은데 일반적으로 그들을 보헤미안(Bohemian)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지금은 속세의 관습이나 규율 따위를 무시하고 방랑하면서 자유분방한 삶을 사는 예술가나 그런 사람들을 지칭하기도 한다. 어원의 유래는 15세기경 프랑스 사람들이 체코의 보헤미아 지방에 사는 집시들을 가리켜 ‘보헤미안’이라고 부르기 시작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런데, 전 세계적으로 보헤미안이라는 단어를 알려지게 만든 프랑스가 왜 집시들을 추방하려는 것일까? 
 

사르코지 프랑스 대통령은 국가 내 치안 안정 및 범죄를 줄이기 위한 조치로써 집시들을 강제 추방하기로 결정했음을 밝혔다. 정부는 프랑스에 거주하고 있는 집시들이 루마니아와 불가리아에서 이주해왔었으며, 주로 빈민가에서 불법 행위를 저지른다고 주장하고 있다.그러자, 프랑스 내 인권단체 측에서는 사르코지의 정책이 인종차별적이라고 반발하며 나섰다. 사르코지의 집시 추방은 유럽 국가 간의 외교 문제로 비화되었다. 졸지에 집시를 프랑스로 이주하는 것을 방조(傍助)한 국가가 되어버린 루마니아, 불가리아는 사르코지의 발언에 언짢아하였으며, 유럽 연합(EU)과 교황 베네딕토 16세도 프랑스의 정책에 비난의 목소리를 냈다. 심지어 비비안 레딩 EU 사법·기본권 담당 집행위원은 프랑스의 집시 추방은 과거 독일 나치의 유대인 추방을 상기시킨다는 발언까지 함으로써 사르코지의 심기를 불편하게 만들었다. 프랑스 내 집시 추방 정책은 계속 되고 있으며 올해 들어 추방된 집시들의 수는 7천 명 이상으로 집계되고 있다.  

 

지금도 집시 추방 정책으로 인해서 프랑스에서 만개했던 관용(Tolerance)의 꽃들은 점점 시들고 있으며, 수백 명의 집시들은 떠돌이 민족이라는 서러움의 눈물을 흘리면서 프랑스 국경을 넘고 있다.   

  

 

  

인종주의의 진화, 신 인종주의 
 

앞에서 언급했던 집시 추방에 대한 글 중에서 프랑스 인권 단체가 사르코지 정부를 비난하는 근거를 유심히 보아야 할 대목이다. 인권 단체가 표현하고 있는 ‘인종차별적’이라는 단어에는 ‘인종주의(Racism)’라는 이념을 내포하고 있다. 인종주의는 인종의 생물학적 차이에 따라 불평등을 합리화하는 사고방식이다. ‘흑인은 머리가 나쁘니, 머리가 좋은 백인들에게 지배를 받는 것은 합당하다’라는 식의 주장이 구시대적 인종주의다. 최근에는 생물학적 차이에서 기인하는 인종주의가 과학적이지 않다는 연구 결과가 나옴으로써 인종주의는 사실상 폐기되었다. 그런데, 사르코지 대통령은 집시들이 머리가 나쁘다는 이유만으로 쫓아낸 것이 아닌데 인권 단체와 다른 유럽 국가들이 ‘인종차별적’이라고 말하는 것일까? 
 

구시대적 인종주의는 사라졌다 한들, 자유주의 사상에 입각하여 새로운 차원의 인종주의로 진화하였다. 구시대적 인종주의의 뜻과 차이를 두기 위해서 ‘신 인종주의’라고 불리고 있다. 신 인종주의자들은 구시대적 인종주의에 대해 확실히 선을 그으면서, 생물학적 차이를 강조하는 구시대적 인종주의와 다르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 이들은 인종의 ‘문화’에 차이를 두고 있으며 자신들의 문화가 우월하며, 철저히 자문화의 가치와 습관으로 타 민족의 문화를 바라보고 평가한다. 그래서 자민족 중심주의의 영향으로 신 인종주의가 발전하게 된 것이다.  

 

집시라는 민족의 문화는 방랑과 미신이라는 단어가 먼저 떠오른다. 진보적인 문화를 영위하는 선진국 사람들은 집시 문화를 근본 없고 미천한 문화라고 생각한다. (집시 족의 인류학적 뿌리에 대해서 현재로서는 자세히 밝혀진 것이 없다) 그래서 집시들을 온갖 나라를 떠돌아다니면서 범죄만 일으키는 민폐 끼치는 민족이라고 자연스럽게 결부하게 된다.   

 

 

 

신 인종주의가 죽지 않고, 살아남는 이유

인종주의가 한 단계 진화된 신 인종주의가 하나의 사회 집단에 자리 잡게 된 이유에 대해서 여러 가지 이론이 있다. 타 민족에 대한 편견이 만든 성급한 일반화의 오류가 인종주의를 낳게 한 뿌리이다. 신 인종주의론자들은 ‘집시는 범죄를 일으키는 나쁜 민족이니깐, 집시가 싫다’라는 식의 잘못된 논리를 가지고 있다.

무엇보다도 집시가 ‘나쁜 민족’이라는 관념을 형성하게 만드는 것이 대중매체이다. 사르코지 대통령이 집시가 범죄 행위를 일으킬 수 있다는 추측성 언급을 하게 되면 대중매체는 이를 부풀려 왜곡되게 한다. 한순간에 집시가 범죄인 민족 집단이 되어버린 것이다. 이런 대중매체의 왜곡된 정보를 대중들은 무비판적으로 쉽게 받아들이게 된다. 대중매체와 신 인종주의, 이들의 잘못된 만남의 대표적인 사례로는 요즘 미국 내 정세에서 확인할 수 있다. 2001년, 9.11 테러 발생 이후 미국의 언론매체는 쌍둥이 빌딩과 펜타곤을 습격한 테러리스트를 이슬람 국가로 규정하였으며 이를 반 인륜적인 행위라고 비난하였다. 전 세계 곳곳에 전파하는 이런 언론매체의 소식은 미국 내 여론뿐만 아니라 전 세계 여론은 이슬람 국가에 대한 편견을 형성 하는데 일조했다. 최근에 9.11 테러 기념일에 맞춰 광신적 기독교 목사가 이슬람의 경전인 코란을 불태우겠다는 엄포의 해프닝을 일으켰던 것과 아직까지도 논란 중인 모스크 사원 건립 반대는 신 인종주의 앞에 눈이 먼 미국의 얼굴을 볼 수 있다.

왜곡된 대중매체의 정보와 오류가 가득한 신 인종주의는 사회화된다. 사회화는 사회 집단에 속하는 인원이 상호작용을 하면서 그 사회 고유의 문화를 습득하는 것이다. 하나의 사회 집단에 내려져오는 인종주의적 논리는 자연스럽게 습득하여 계승하게 된다. 인종에 대한 잘못된 편견, 대중매체, 그리고 두 개념이 잘 버무려져 사회화되어 탄생된 신 인종주의는 사회 내의 악습관으로 쉽게 자리 잡게 되지만 그 과정이 순환 되다보니 신 인종주의가 죽지 않는 것이다.   

  

   

우리나라가 성숙된 다문화사회로 발전하기 위해서는 
 

아시아 개발도상국에서 온 외국인들은 안정된 생활을 위해서 ‘코리안 드림’을 꿈꾸며 우리나라도 건너고 있다. 그러나 현실은 비참하다. 회사 지배인은 가난한 나라에서 왔으니 열심히 해야 한다는 명분으로 하루 동안 일반인들도 하기 힘든 중노동 일을 부여한다. 하루 동안 고된 중노동 작업 끝에 손에 쥐어지는 것은 쥐꼬리만 한 월급. 이들이 원하는 안정된 생활은 언제 올지 앞날은 어둡기만 하다. 친정 가족들이 굶지 않기 위해서 어쩔 수 없이 먼 낯선 땅, 한국으로 건너 와 한국 남자와 결혼한 베트남 처녀는 ‘외국인’이라는 주위 한국인의 시선이 따갑기만 하다. 타국의 생활을 적응하기 위해서 고생해서 배워 서툴지만 한국말을 어느 정도 할 수 있지만, 한국 사람들은 그녀를 단지 외국인으로만 보고 있다. 자신의 뱃속에서 태어난 혼혈 자녀들에게도 이방인에 대한 시선을 피할 수 없다. 학교 친구들은 ‘깜둥이’, ‘왕눈이’ 등 피부색과 신체를 이유로 놀림감을 당하기 일쑤이다. 어느 베트남 신부는 속궁합도 제대로 맞춰 보지 못한 채 한국인 신랑을 만난 지 8일 만에 살해되었다. 살인죄로 구속된 신랑은 정신병 증세가 있는 걸로 판명되었다. 그러나 국내 여론은 억울한 베트남 신부의 죽음을 크게 비중 있게 다루지 않았다. 단지, 이전에 시행하지 않았던 정부의 국제결혼에 대한 법적 규정 개정에만 중점적으로 다뤘다. 그나마 부산에서 베트남 신부의 죽음을 추모하고, 베트남 국민들에게 사죄하는 작은 행사가 열렸을 뿐이다.

우리나라도 프랑스와 미국의 사례를 수수방관(袖手傍觀)해서는 안 된다. 현재 우리나라의 사회는 다문화주의로 향하고 있으며, 외국인과의 결혼으로 이루어진 다문화가정도 늘어나고 있다. 다문화사회의 발전을 거스를 수 없게 되었다. 하지만 일제 강점기 때 수용한 서구의 인종주의의 뿌리가 완전히 제거되지 못한 상태에서 국내에 유입된 세계화가 거름이 되어 자란 신 인종주의라는 나무 그늘 때문에 이제 막 움튼 다문화 사회의 새싹이 더 이상 자라지 못하고 있다. 다문화 사회의 발전을 위해서는 자민족 중심주의를 탈피하고 타 문화의 차이를 인식하려는 관용적인 태도가 필요하다. 그리고 국내에 거주하고 있는 소수 타 민족들의 생활을 보장할 수 있는 법적 장치 마련이 절실하다. 

 

최근에는 밝은 다문화가정 사회에 대한 메시지가 담겨져 있는 모 기업의 광고가 대중들의 흥미를 끌고 있다. 다문화가정의 자녀가 열심히 노력하여 장원급제하는 내용, 피부색이 각기 다른 나라의 아이들이 서로 손을 잡아 강강술래를 하는 장면은 기업 이미지 자체를 떠나서 보는 이로 하여금 훈훈함이 느껴진다. 단순히 광고 속 내용 자체가 참신하다고 여기지만 말아야 할 것이다. 곧 다가올 다문화사회가 된 우리나라의 모습이다. 다문화사회로 향하고 있는 우리나라의 청사진에 대해서 한 번쯤은 재고해봐야할 것이다. 

  

 

 

* 관련 기사 인용 및 링크

[프랑스, 집시 추방 논란] 경향신문, 2010년 7월 30일자
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id=201007301802385&code=970205

[佛 집시 추방에 교황도 '한 마디'] 연합뉴스, 2010년 8월 23일자 입력
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2&oid=001&aid=0004617866

["집시 추방을 나치의 유대인 추방에 비유?" 佛 사르코지, EU 정상회담서 발끈]  

조선일보, 2010년 9월 18일자
http://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10/09/18/2010091800106.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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혁명을 팝니다 - "체 게바라는 왜 스타벅스 속으로 들어갔을까?"
조지프 히스.앤드류 포터 지음, 윤미경 옮김 / 마티 / 2006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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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원문: http://blog.naver.com/sobin94?Redirect=Log&logNo=30083716327 
   

 

오규원의 시『프란츠 카프카』를 필자가 한 번 패러디해본 것이다. 원작은 일상생활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메뉴판에 서구의 유명한 문학가, 철학가 등을 이용하여 문학이나 인간의 정신을 상품화되어 있는 현실을 비판하고 있다. 그러나 지금은 시인이 제시한 문학과 사상, 철학뿐만 아니라 반문화(counterculture)를 상징하고 있는 아이콘들마저도 모든 제품에 가격을 붙여 상품화시킬 수 있는 자본주의의 손아귀에 들어가고 말았다. 조지프 히스와 앤드류 포터가 공동으로 펴낸 책『혁명을 팝니다』의 앞표지에 있는 스타벅스 컵 속에 그려져 있는 체 게바라처럼 반문화는 이미 그들이 거부했던 기성 문화처럼 변환되고 있다. 반문화는 사회의 지배적인 문화에 정면으로 반대하고 도전하는 하위문화이다. 전통적인 기성문화에 도전했던 사회적 사례로는 1960년대 미국의 히피족이나 과격한 페미니스트들, 급진적인 종교 운동가, 사랑의 자유를 외친 동성애자들이 있다.  

 

그러나 시대가 변한 지금, 어느새 하위문화는 기성 문화로 변하게 되었다. 히피족 스타일은 하나의 비주얼적인 문화로 자리 잡게 되었으며 종종 거리에 오토바이를 타고 다니는 것을 좋아하는 모터사이클 족들 사이에서 볼 수 있는 복장 방식이다. 과거에는 기성 사회와 문화로부터 금기시하였고 배격 받았던 동성애는 이제는 드라마나 영화에까지 볼 수 있는 보편적인 사랑 방식이 되어버렸다. 기존의 쿠바 정치 체제를 뒤엎으려고 했던 혁명아 체 게바라는 지금은 전 세계 사람들이 입고 있는 값 싼 티셔츠의 상징이 되고 말았다. 
 

 

열린 대중문화의 삼적(三敵): 프로이트, 마르크스, 히틀러  
 
  
두 저자는 록 음악에서부터 영화까지 대중문화들로 상징되는 개념들을 총동원하여 아이러니한 모습을 보여주고 있는 반문화의 실태를 분석하고 있다. 독특하게도 두 저자는 반문화를 형성하게 한 사람을 프로이트, 마르크스, 히틀러라고 규정하고 있다. 마르크스는 19세기 말 산업화가 한창 진행 중이었던 유럽의 자본주의 사회를 비판하였다. 그리고 노동자 계급은 자본주의 사회의 희생양이라고 주장하였다. 그러나 아이러니하게도 마르크스가 옹호하려던 노동자 계급은 마르크스의 급진적 이론을 외면하였다. 그것보다는 자신들의 이익을 신장시킬 수 있는 보다 실현성 있는 정책을 환영하였다. 그러다가 20세기에 이르게 되면서 프로이트가 등장함으로써 자본주의에 묻혀 있었던 마르크스의 사상이 다시 한 번 빛을 보게 된다. 프로이트는 인간의 본능이 억압되는 과정을 통해서 문명이 발달된다고 주장한다. 전혀 통하는 게 없을 거 같은 사회 사상가와 심리학자, 두 사람의 기이한 만남은 대중 사회 속에서 ‘키메라(chimera)’ 문화를 낳게 만든다. 인간의 자유로운 정신을 구현하기 위해서는 자본주의로 상징되는 사회와 그 문명을 거부해야 한다는 반문화의 기본적인 사상이 형성되는 것이다. 엉뚱하게도 반문화는 마르크스와 프로이트가 말하고자 했던 것과 다르게 대중들이 제멋대로 해석하여 탄생하게 된다.    

 

 

거기에다가 본의 아니게 반문화라는 현상을 견고히 해준 것이 히틀러와 독일 나치스였다. 히틀러 시대의 독일 대중들은 광적으로 자신들의 지배자인 히틀러와 나치스를 추종하였다. 독일 대중들이 비이성적으로 독재 권력에 빠질 수 있었던 것은 대중매체였다. 나치즘이 버무려진 대중매체를 통해 대중은 히틀러의 선동에 세뇌당한 것이다. 제2차 세계대전으로 히틀러와 나치스가 몰락한 이후 독일을 포함한 전 세계 사람들은 하나의 사회를 지배하고 있는 대중문화의 무시무시한 힘을 각인시켰다. 히틀러가 남긴 트라우마를 지우지 못했던 대중들은 언젠가는 제 2의 히틀러가 등장하여 자신들을 지배할지도 모른다는 망상에 사로잡히게 된다. 그래서 기성 문화에 대해서 거부감을 느끼고 저항하는 반문화라는 후유증이 생기게 된 것이다.  

자신들이 원했던 바가 아니었지만 역사적 인물 세 사람이 만들게 한 반문화는 지금은 사회 전체에 악영향을 주고 있는 손 쓸 수 없을 정도로 커져버린 종양이 되고 말았다. 반문화 사상을 주장하고 있다는 편견에 사로잡힌 좌파는 우파 진영의 공격을 받아야만 했으며 우파와의 대립은 피할 수 없게 되었다. 모든 인류의 개인의 자유가 인정되며 서로 공존할 수 있는 ‘열린 대중문화’가 되기 위해서는 두 진영 간의 화합이 필요하다. 사회적 갈등만 조장시키는 반문화를 만들게 한 세 사람은 열린 대중문화의 적인 것이다.   

 

 

그러나 두 저자는 반문화를 단지 대중문화에서 없어져야 할 주적이라고 단정 짓지는 않는다. 오히려 반문화 형성이 있었기에 지금의 자본주의적인 얼굴의 대중문화가 이어지고 있음을 역설하고 있다. 체 게바라가 대량 생산되고 있는 티셔츠 속에 들어 있는 것과 반문화를 추구해했던 커트 코베인이 자살한 지 수십 년이 지난 지금도 그가 속했던 록 그룹 너바나의 앨범이 아직도 팔려가고 있는 현상이 그 예이다. 반문화 존재 자체가 성립되어 있지 않다고 주장하기 보다는 대중들이 왜곡되어 포장되고 있었던 반문화의 신화에 사로잡혀 있는 망상에서 벗어나기를 경고하고 있다.  

  

 

  

자멸하고 있는 반문화 
 

최근에 러시아의 스킨헤드(Skinhead)들이 록 페스티벌이 열리는 행사장에 난입하여 관객들에게 폭행을 가하는 사건이 일어났다. ‘스킨헤드’는 직역 그대로 하면 머리카락이 너무 짧을 정도로 바싹 깎은 머리이다. 원래는 1960년대 후반 영국 노동자 계급의 하부문화를 가리키는 말로 쓰이기 시작했다. 지금은 폭력적인 인종차별주의자들을 가리킬 때 사용하고 있다.    

  

 록도 어떻게 보면 반문화 성향이 짙은 음악 장르이다. 스킨헤드 역시 초기에 반문화를 지향했던 점이 있는 것을 감안하면 두 반문화 집단 간의 충돌은 아이러니하기만 하다. 결국에는 반문화가 열린 대중사회에 해를 끼치는 것뿐만 아니라 자기 자신을 자해하는 꼴을 보여주고 있다. 책의 서론에서 두 저저가 말했던 것처럼 반문화의 반란이 사회 발전에 도움이 안 되는 비생산적인 행위라는 사실을 입증하고 있다. 만약에 몽둥이를 손에 들고 행사장에 습격한 러시아의 젊은 스킨헤드 일원들 중에서 미국산 나이키 신발을 신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그리고 자신의 지인 중 한 사람이라도 동성애라고 하면 혐오를 느끼면서도『왕의 남자』에 열광했으며 한창 TV에 방영되고 있는『인생은 아름다워』를 빠지지 않고 시청하고 있는 것이 지금 문화의 현실이다. 이런 반문화의 모습들은 웃지 못할 난센스이다. 반문화의 망상에 사로잡혀 있는 대중문화 사회의 심각성을 여실히 보여주고 있다. 저자들의 주장이 약간 거칠고 크게 와 닿지 않을 수도 있지만 이미 반문화가 자본주의 사회에 잠식되어 있는 현실은 대중들은 자각하고 있어야 할 것이다. 


 

관련 기사 인용 및 출처 링크 


[러 스킨헤드, 록 페스티벌 습격] 중앙일보 8월 31일자
http://news.joins.com/article/aid/2010/08/31/3982088.html?cloc=olink|article|defaul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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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의 좌표 - 돈이 지배하는 사회에서 생각의 주인으로 사는 법
홍세화 지음 / 한겨레출판 / 2009년 11월
평점 :
구판절판



 누구를 위하여 시험을 치르는 것인가 
 

요즘 우리나라 교육계는 바람 질 날이 없다. 일제고사, 무상급식, 체벌 금지 논란으로  

교육계에서 벌어진 갈등의 폭이 좁혀지지 않는다. 초중고 학생 시절을 이미 지내본 젊은  

세대들이나 아직 학생을 둔 부모가 되지 않은 사람들에게는 교육계 논란은 관심 밖일  

것이다. 하긴 나와 관련된 것 아니니깐. 사실 나도 군 입대 전, 그러니깐 대학생 시절에는  

초중고 생활은 추억일 뿐이었다. 그리고 교육계 관련 뉴스는 관심 있게 보지 않았다.  

학생들이 치기 싫어하는 일제고사를 내가 또 치는 것도 아니며 전국 학교가 체벌을 하든지 

말든지 나와는 분명 상관이 없는 일이다. 하지만 미래에 부모가 된다면 상황은 달라진다. 

학교생활 잘 하고 공부를 잘 하는 자식을 두기를 바라는 우리나라 부모들이 아니던가.
모든 대한민국 부모들에게는 금지옥엽(金枝玉葉) 같은 자식이다. 자기 자식이 좋은 교육  

환경에서 낙오된다거나 불이익을 받게 되면 가만히 있을 부모가 아니다. 그러니 결혼을 

하고 좋은 가정을 꾸리기를 원하는 젊은 세대들에게는 교육계 관련 문제는 평소에 눈  

여겨 봐야 한다. 우리나라 교육이 어떻게 변화하고 돌아가는지 알아야 나중에 당신  

자식들을 어떻게 키워야하는지에 대해서 준비할 수가 있다.

나는 교육계 3대 문제 중에서 제일 관심이 많이 가는 부분은 일제고사이다. 일제고사  

파행 논란은 이미 학생 신분을 지난 사람으로서는 약간의 충격을 받기도 했다. 내가  

학생이었을 때는 성적에 들어가든 안 들어가든 치러지는 각종 학교 시험을 수동적으로  

참여했다. 당시 나와 같은 동년배 학생들은 야간 자율 학습을 빠지는 방법과 같은 조금은  

철이 없는 고민을 했을 뿐이지 시험, 그것도 전국의 학생들이 동시에 치는 학력평가를  

거부한다는 생각은 꿈도 꾸지 못할 일이었다. 그리고 요즘 학생들은 우리보다 좀 더 

개방적인 사고를 하고 있음을 알 수 있었다. 

 

일제고사의 정식 명칭은 국가수준 학업성취도평가이다. 시험 실시의 목적은 우리나라  

모든 학생들의 학업 성적의 수준을 측정하기 위한 시험이다. 일제고사 시험 반대 입장에  

표명하는 전교조와 일부 부모들은 학생들 간의 경쟁교육을 부추길 것이며 오히려  

사교육이 기승을 부릴 것이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서울시교육청에서는 일제고사를  

반대하는 전교조 교사들에게 중징계를 내리기도 했다. 징계 사유는 일제고사를 거부하는 

학생들에게 체험 현장학습을 허락해줬다는 것이었다. 찬반이 엇갈리고 있는 논란 속에  

지난 달 13일에 전국적으로 실시한 일제고사는 일부 학생들이 시험을 거부하였다.  

그러자 몇 몇 학교에서는 시험을 거부한 학생에게 불이익을 주는 조치를 취하기도
하였다. 일제고사 파행에 대한 불이익은 교사뿐만 아니라 학생들에게도 내려졌다.  

한 학생이 일제고사 거부 체험 현장학습 허락 증명서를 제출했음에도 불구하고 학교  

측은 그 학생을 무단결석으로 처리했다. 그리고 어느 학교에서는 시험 당일 답안지를  

백지로 제출하는 사태가 벌어지자 당황한 교감은 직접 시험을 치러지는 교실에 찾아와  

일제고사 시험은 성적부에 기록되니 무조건 시험 칠 것을 학생들에게 종용하기도 했다.  

전국 학업성취도평가의 원래 취지는 분명히 전국 학생들의 성적 수준을 보는 것이  

아니었던가? 만약에 일제고사가 성적에 반영한다는 사실이 맞으면 시험이 치르는 전에  

미리 이와 관련된 공문이 내려져 와야 한다. 학생들이 볼 수 있게 학교 각 교실마다  

일제고사 관련 공문서를 게시하고 교사들은 학생들이 공문 내용을 이해할 수 있도록  

설명해줬어야 했다. 그런데 교감이 시험 당일 교실에 와서 그런 말을 한다는 자체가 문제가 

있으며 교감이 한 말이 미심쩍게 느껴진다. 교감이 시험 당일에 그런 갑작스런 공문을 보낸 

이유가 있다. 모든 학생들의 일제고사 성적이 곧 학교 자체의 성적으로 결부되기 때문이다.
학교 학생들 절반이 일제고사를 거부하게 되면 학교 자체를 평가하기 위한 측정이  

불가능하다. 학교 측은 학생들의 의사를 존중한다고 말하면서도 학생들의 일제고사  

거부를 달갑게 여기지 않는다. 단순히 학생들의 성적 수준을 평가한다고 말하지만 사실  

말 못하는 시험의 목적이 있다. 성적 결과에 따라 학교 수준이 정해지고 결국에는 그것으로 

학교 수준이 서열화 된다. 학생들이 시험을 치고 난 후 성적으로 등수가 정해지는 것처럼  

말이다. 그리고 학교 수준에 따른 책임은 교장, 교감으로 돌아가게 된다. 즉, 교장, 교감의 

활동 평가에도 포함되는 것이다. 그러니 교장, 교감에게는 일제고사를 통해 자기들의
교육 활동 수준이 드러나기 때문에 수능 시험 치는 수험생 마냥 일제고사 날이 다가오면  

거부하는 학생들에 대한 긴장을 놓지 않을 수가 없게 되었다. 결국, 지금의 일제고사는  

학생들의 수준을 측정하는 것인지 아니면 학교 수준을 측정하는 것인지 알 수 없게  

되어버렸다. 그리고 그런 상태에서 내년에도 일제고사는 치러지게 되면 학생과 학교 간의 

갈등은 되풀이되고 만다. 


 모든 학생들을 위한 교육 만들기

홍세화 씨가 지적한 대로 한국의 교육은 수준 높은 교육 환경 제공과 학생들의  

의사 존중을 표방하면서도 실제로는 학생들에게 그런 기회를 주지 않고 있다.  

수준 높은 교육 환경을 자랑하는 선진국의 경우를 보면 수업은 독서와 토론 위주의  

교육으로 이루어져 있다. 그들은 무조건 외우고 정해져 있는 답을 찾지 않는다.
수업 주제에 대해서 학생 스스로 생각해보고 이해할 수 있도록 하며 정답이 없는 토론을  

통해서 사회 문제를 다양한 각도로 보는 시선과 논리적인 사고를 자연스럽게 터득하게  

된다. 방과 후, 집에 돌아오면 우리나라 학생들처럼 성적 향상을 위한 학원을 다니는  

것이 아니라 자기가 흥미 있고 하고 싶어 하는 취미 활동을 한다거나 가족들과의 시간을  

많이 보낸다고 한다. 놀라운 것은 가족들 간의 대화에서도 사회 문제에 대한 주제로  

이야기를 한다는 것이다. 학생들은 나중에 어른이 되어서도 사회 문제에 대해서 관심을  

가지고 그것에 대해서 자신들의 생각을 표현할 수 있는 것이다. 반면 우리나라  

학생들에게는 적극적인 학습 태도는 찾아 볼 수가 없다. 우리나라 학생들이 생각하는  

공부는 좋은 대학교에 가기 위해서, 조금 더 넓게 말하자면 좋은 직장에 다니기  

위해서이다. ‘명문대=좋은 직업’이라는 인식 때문에 학생들은 공부가 싫더라도 잠과  

식사를 거르면서 학교 수업을 마치고도 학원으로 향한다. 자신들이 원하는 명문대 진학  

목표를 위해서 3년을 뼈 빠지게 고생해도 노력의 결실은 수능 시험 단 한 번으로
가려지게 된다.  

독서, 열린 자세의 토론, 성찰, 직접 경험하는 견문. 세계 선진국의 교육 환경에서  

공통적으로 볼 수 있는 요소이면서도 홍세화 씨가 이상적으로 생각하는 교육제도의  

모습이다. 물론 우리나라 학교가 다 입시 위주 교육이라고 말할 수는 없다. 현 교육 제도의 

문제점을 탈피하려는 시도가 보여지고 있다. 몇 몇 학교에는 외국 학교처럼 독서와 토론  

위주의 수업을 하기도 한다. 하지만 이런 수업을 하는 학교가 그렇게 많지 않다는 것이다. 

마이스터 고(高)와 같은 전문적인 학교에서만 일부 시험적으로 시행하고 있으며 나머지  

일반 학교에는 방과 후나 특별 활동 시간에서 시행하고 있다. 그만큼 선진국 형 교육  

방식이 자리 잡기 위해서는 아직 갈 길이 멀다. 하지만 이런 교육환경을 조성하기
위해서 거시안적으로 바라보고 이에 대한 투자를 일반 학교에서도 시험적으로 시행하게  

된다면 우리나라 교육 제도에 변화가 있을 것이다. 독서와 토론은 특별 활동 시간에 할  

특별한 교육이 아니다. 우리가 살아가는데 유익하고 필요한 학습의 방식이다.

무상급식 반대를 주장하는 어느 대학 교수는 무상급식에 대한 지원 비용을 차라리 교사  

채용에 투자하라고 말한다. 학생들에게 수준 높은 교육을 가르치기 위해서는 그만큼  

훌륭한 교사들도 채용되는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교사 채용보다는 학생 교육 환경  

개선에 사용했으면 어떨까 생각한다. 물론 무상급식도 학생들을 위한 제도의 일환임을  

분명하나 소득계층이 낮은 집안의 학생들을 고려하는 제도이다. 모든 학생들을 위한,   

모든 학생들의 교육 수준을 높이기 위해서는 독서와 토론 위주의 수업 방식의 정착이  

필요하다고 본다.

 생각의 좌표를 구축하자

우리나라 교육이 입시 위주이다 보니, 학생들은 영어 단어와 역사를 암기하고 문제를 

많이 푸는 것이 일상적인 학교생활이 되었다. 그래서 학교 밖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지, 그리고 우리나라 교육 제도가 자신들에게 어떤 영향을 주고 있는지 관심을 가질  

틈이 없다. 몇 몇 사람들은 일제고사를 거부하는 학생들을 보면 눈살을 찌푸릴 수도 있을  

것이다. 일제고사 거부 분위기를 이용하여 일부 몇 몇 문제아라고 하는 학생들이 시험을  

당연하다는 듯이 거부하려는 문제도 낳을 수도 있다. 정작 일제고사가 어떤 것이지  

모르면서 무조건 분위기 휩쓸릴 위험한 사고를 범할 수 있게 된다. 

그래서 학생들이 사회 문제에 대해서 스스로 생각하는 능력을 기르는 것이 중요하다.  

우리나라가 좋은 교육 환경을 만들기 위해서는 제도 개선과 투자라고 앞에서 언급했지만, 

학생들이 이런 것에 관심을 가지지 않고 적극적인 모습을 보이지 않으면 이전 시행했던  

교육 제도와 다를 바가 없을 것이다. 결국에는 학생들은 새로운 교육 제도에 아무 생각  

없이 수동적으로 받아들이게 된다. 그리고 몇 년이 지나서 과거의 교육 제도가 잘못되었다 

고 뒤늦어서야 후회한다. 이런 일이 없기 위해서는 스스로 자신만의 학습이 필요하다.  

즉, 독서와 토론, 거기에다가 스스로 생각하고 사유하려는 자세가 필요하다. 비록 수능에  

매달리는 학생들에게는 버거울 수도 있겠지만 조금이라도 사회 문제에 대해서 관심을  

갖고 생각하는 것은 필요한 자세이다. 학생 때부터 이런 습관을 길들이지 않으면  

사회생활을 해야 할 어른이 되어서도 사회 문제에 무관심해지는 버릇을 고치지 못하게  

된다. 결국에는 신문에는 손길을 가지 않고 뉴스에는 눈길을 주지 않는다.

수학에는 비례(比例) 좌표가 두 가지가 있다. 정비례, 반비례. 함께 변화하는 두 양  

또는 수에 있어서, 한쪽이 2배, 3배…로 되면, 다른 한쪽도 2배, 3배…로 변하는 것이  

정비례이며 반대로 대응하는 다른 쪽 양이 1/2배,1/3배,…로 되는 것이 반비례이다.  

방식이 다른 만큼 좌표에 그려지는 그래프도 다르다. 정비례는 x값이 높아질수록  

상승하는 그래프이지만 반비례는 오히려 하락하는 그래프로 그려진다.  

 



 

 

 

 

 

 

 

 

 

 

x좌표는 사람의 일생, y좌표는 생각하는 양이라고 치자. 즉, 생각의 좌표인 것이다.
그리고 좌표값 (x,y)으로 가리키는 좌표점은 ‘생각의 좌표점이다. 사람이 나이를  

먹을수록 스스로 생각하려는 능력을 가지지 않으면 생각의 좌표점은 점점 떨어지게  

된다. 그리고 좌표점의 방향은 밑도 끝도 없이 바닥으로 향한다. 즉, 수준이 떨어진다는  

것이다. 결국에는 스스로 생각하는 능력을 가지지 않으면 겉만 어엿한 사회생활을 하는  

어른으로만 보이는 성숙하지 못한 사회인이 된다. 성숙한 사회인이 되기 위해서는 평소에  

사회 문제에 관심을 갖고 그것에 대해서 스스로 생각할 수 있는 생각의 좌표를  

구축함으로써 자신의 삶을 어떤 방향으로 나아갈지 정할 수 있는 생각의 좌표점을  

가져야 한다.




 

관련 인용기사 출처 및 링크

[“시험 안 본 너 때문에 전체가 손해”...일제고사 곳곳서 파행]
http://www.newscham.net/news/view.php?board=news&nid=57667  

 

["무상급식 2조원이면 교사 8만 명 더 써” vs “포퓰리즘 아닌 사회적 합의”]  

중앙일보 8월 7일자 입력
http://news.joins.com/article/aid/2010/08/07/3947101.html?cloc=olink|article|defaul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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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인의 고통 이후 오퍼스 10
수잔 손택 지음, 이재원 옮김 / 이후 / 2004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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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낯 뜨거운 전시회 홍보

예술의 전당에서 개최하는 ‘퓰리처 상 사진전’에 대한 인기의 열기가 대단하다.
이번 달 15일부터 매주 목요일 관람 시간을 두 시간 연장하기로 하게 된다.
일반적으로 전시회 폐장 시간이 오후 8시이므로 목요일에는 오후 10시까지 관람할 수  

있다. 외국에 나가야 볼 수 있는 서양 예술 작품이나 역사적 희귀 유물들이  

전시되는 대형 기획 전시회가 우리나라 관람객들의 눈을 사로잡았던 이전의 현상과  

교하면 사진 전시회가 인기몰이를 하고 있는 것은 이례적이다.  

‘퓰리처 상 사진전’을 개최 및 책임을 맡고 있는 예술의 전당은 ‘영국 근대 회화전’도  

개최하고 있다. 예술에 관심이 있는 사람에게는 이름만 들어도 아는
터너, 컨스터블, 고갱 등 근대 유럽 인상주의 화가들의 작품을 전시하고 있다.
‘영국 근대 회화전’도 ‘퓰리처 상 사진전’과 더불어서 예술의 전당에서 전시하고 있다. 
그러나 이전에 많은 관람객의 수를 기록하고 매스컴의 홍보가 많았던 ‘피사로와  

그의 가족, 친구들’ 이나 ‘르누아르 전’과 비교하면 홍보가 미미하고, 전시회 관람객 수에  

대한 소식도 찾아볼 수가 없다. 같은 곳에서 같은 기간에 전시하고 있는 ‘퓰리처 상  

사진전’의 인기 때문에 가려져 있는 거 같다.  

 

‘퓰리처 상 사진전’의 연장 관람 시간에 관한  신문 기사를 보게 되었는데  

줄을 길게 늘어선 관람객들을 찍은 사진이 옆에 있었다. 재미있는 것은 기사 내용에는  

사진 속 관람객들을 ‘젊은이’라고 표현하였다. 그리고 전시회 입장을 기다리고 있는 

젊은이들의 표정이 밝기만 하다고 쓰고 있었다. 기사문을 읽어갈수록 기자의  

감정  이입이 담긴 문장에 낯뜨겁기만 하였다. 인생 선배격인 어른들이 한 마디 하시면  

두 귀를 닫고 대화를 회피하려고만 하는 단절된 세대이며, 지나간 과거나 역사를 자신과  

관련 없는 ‘옛 이야기’라고 생각하는 것이 현재 젊은 세대들의 모습이다.  

기사문 중간 내용에서 전시회를 ‘역사와 인권 교과서’라고 추켜세우는
문장과 절묘하게 어울려져 ‘젊은 세대들도 공감하는 역사와 인권 전시회’임을 강조하는
뉘앙스를 지울 수가 없었다. 사진 속 줄 서 있는 관람객들을 보면 젊은 사람들도 눈에 띈다.
지금도 방학 기간을 맞아 많은 학생들도 부모님의 손을 잡고 전시회에 찾을 것이다.
하지만 이들이 줄을 서면서까지 전시회 관람을 하려는 이유가 무엇일까?
사진전에는 전 세계 사람들의 시선을 사로잡은 유명한 수상작들이 전시되고 있다.
죽음의 그림자가 서서히 다가오는 빼빼 마른 아프리카의 아이의 사진,
냉정하게 총의 방아쇠를 당기려는 군인과 자신의 머리에 겨누어진 총구 단 한 방으로  

결정짓게 될 죽음의 공포에 떨고 있는 베트콩의 사진 등..... 대부분 수상작들은 참혹한  

전쟁의 참상과 병과 굶주림에 시달리는 빈곤 국가의 사람들의 사진들이 있다.  

권위 있는 수상작품이라고는 하지만 차마 눈으로 볼 수 없는 참혹한 광경을 찍은  

사진들도 있다. 왜 굳이 아름다운 인상주의 예술 작품 전시회를 마다하고 인간의  

추악한 면을 적나라하게 드러난 사진 작품을 보려고 오는 것일까? 
 

 

 

 고통 받는 육체의 역사

예술의 역사를 살펴보면 벌거벗은 아름다운 여자의 육체가 그려진 그림보다는
고통 받고 있는 육체가 그려진 그림이 많이 그려졌다. 특히 유럽 사회는 기독교가  

지배하고 있었던 시절이었다. 그래서 성경 속의 유명한 순교의 장면을 그린 종교화가 

유행하였다. 십자가에 못 박혀 양 손과 몸에 상처를 입은 예수의 모습이나 화살이  

온 몸에 박힌 채 죽음을 맞이하고 있는 성 세바스티아누스의 그림은 인간이 저지른  

원죄의 벌을 대신 받고 있는 위대한 성자(聖子)로 비춰지게 하였다. 르네상스 시대에도  

성경 속 순교의 장면을 모티브로 한 그림이 많이 그려지게 되었고 그림 속의 순교자들은  

이전보다 많은 상처를 입고 있었으며 고통을 인내하면서 괴로워하고 있는 인간의  

모습을 보여주었다.

     
 

 

 

 

 

 

 

 

 

  

 

 

 

   

 

  그뤼네발트 <십자가책형>,  

  그림을 자세히 보면 못이 박힌 예수의 두 손과 두 발에서 줄줄이 흘러나오는 피와 

  예수 온 몸 전체가 생긴 상처들을 확인할 수가 있다. 사실적인 표현은 보는 이로 하여금  

  예수의 고통을 공감하게 하는 효과를 불러온다. 내가 언급한 그림의 표현을  

  더 자세하게  보고 싶다면 진중권의 <춤추는 죽음 1>을 참고하면 된다. 

 
근대에 와서는 그림의 주제가 대담해진다. 인간이 저지른 전쟁과 살육 현장을 화폭에  

담아내어 마음속에 내재하고 있는 폭력성과 잔혹성을 표현하였다. 하지만 이들의  

작품은 화가의 의도와 상관없이 관람객들에게 인간의 추악한 면을 알리기 위한  

충격 요법과 동시에 잔인한 장면이지만 더욱 더 보고 싶게 되는 무의식적인   

사디즘(Sadism)을 불러일으키게 한다. 독일의 극작가 프리드리히 실러는
‘끔찍하고 무서운 것들은 우리에게 거부할 수 없는 유혹으로 다가온다는 것은
우리 본성의 일반적 현상’이며, 인간은 고통스럽고 공포스러운 광경에 혐오를  

느끼면서도 동시에 매혹된다고 말하면서 인간의 이중성을 설명하고 있다. 
 

     
 

 

 

 

 

 

 

 

 

  

 고야 <마드리드, 1808년 5월 3일>    들라크루아 <사루다나팔루스의 죽음>

 

20세기에 이르러서는 카메라가 발달됨으로써 사진기술이 발달된다.
사진 기술이 도입이 되어서도 ‘고통 받는 육체’에 대한 주제는 작가들의 창작 욕구를  

불러일으키게 하였다. 특히 전 세계를 전쟁의 구렁텅이로 빠뜨리게 된 두 차례의  

세계대전에는 ‘종군기자’의 활약이 두드러지게 된다. TV가 없었던 시절에는  

전쟁터의 모습을 세계 사람들에게 생생하게 전달하기 위해서 사진의 역할이 중요하였다. 

그들은 죽음에 대한 두려움을 무릅쓰고 사진의 셔터를 눌러댔다. 총탄에 맞아 이제 막  

숨을 거두려는 병사와 포탄에 맞아 온 몸이 갈기갈기 찢겨진 병사의 시체가 찍힌
사진들은 전쟁의 참혹함을 알려주는 동시에 전 세계 시민들에게 반전(反戰) 사상을  

불러일으키게 하였다. 전쟁이 끝난 뒤에도 사진의 활약은 끝나지 않았다.  

냉전 시대의 사회주의 국가 사회에서 은밀히 자행되고 있는 살육 장면이 담긴 사진들은  

사회주의의 문제점을 고발하였다. 전쟁의 문제점뿐만 아니라 세계 곳곳에 일어나고  

있는 비인권적인 사회 문제와 현상들을 알리기 위해 사진작가들은 셔터 누르기를  

멈추지 않았다. 굶주리고 있는 아프리카의 어린이들을 찍은 사진은 빈곤국가에 대한
세계의 관심을 촉발시켰고, 미군의 공습에 의해서 상처를 입은 이라크 어린이를 찍은  

사진은 미국이 시작한 명분 없는 전쟁에 대한 비판을 불러일으켰다.  현대의 사진 작품은  

예술성을 넘어서 작가 자신이 생각하고 있던 사회의식을 관람객들에게 알리는 동시에  

그들에게도 사회 현상에 대해서 공감하게 만들고 있다. 그리고 사회 문제에 대한 현상을  

다루는 사진작가들은 아무도 알고 싶지도 않은 사회의 불편한 진실들을 사진으로  

촬영함으로써 사회를 직설적으로 고발하는 일종의 사회 운동가로 추앙받기도 한다. 
 

  

 

 사진, 관람객 그리고 TV : 불편한 삼각 관계  


그러나 <타인의 고통>을 펴낸 저자 수잔 손탁은 오늘날의 사진 사업을 비난하고 있다.
선혈이 낭자하고 신체 일부는 절단된 사진들은 보는 이들에게는 충격을 주게 만든다.
저자는 이 점을 문제 삼아 사진 사업은 충격을 이용해 소비를 자극하고 있다고  

꼬집었다. 물론, 전쟁의 참상을 보여주는 사진은 전쟁을 향한 비난을 북돋는 데 쓰일 수  

있으며, 전쟁을 경험하지 못한 사람들에게도 전쟁의 현실을 전달해주는 사회적인 공감  

형성은 저자는 인정하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자는 사람들이 사진 속에  

나타나는 고통의 아우라에 공감하려는 개입 능력을 잃어가고 있는지에 대해서  

문제를 제기한다.

수잔 손탁이 제기한 사회적인 문제는 사진 작품과 관람객, 그리고 TV의 관점에서  

설명하고 있다. 우리가 유명하다고 알려져 있는 사진작품들은 자연스러운 장면이기보다는 

작가와 사진 속 대상의 의도적인 설정으로 만들어진 장면이다. 스티븐 스필버그 제작,  

클린트 이스트우드가 감독으로 참여한 영화로 유명한 원작 소설 <아버지의 깃발>의  

표지 속의 장면은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이오지마 섬의  수리바치 산 정상에 성조기를  

세우는 미군 병사들의 모습을 담은 조 로젠탈의 1945년 퓰리처 상 수상작에서  

따온 것이다.   

 

   
 

 

 

 

 

 

 

 

 

 

                                       조 로젠탈 <성조기, 수리바치 산에 게양되다>

 이 사진으로 인해서 치열한 전장 속에서 끝내 승리한 미국을 상징하게 된 대표적인  

이미지로 자리를 잡게 된다. 하지만 최근에 이 역사적 사진이 의도된 작품이었음을  

드러나게 되었다. 이 사진이 진실임을 여겨지고 있었던 사람들에게는 사진이  

의도되었다고 해도 잘 믿으려 하지 않는다. 그리고 의도된 작품이라고 알려져 있어도  

대다수 사람들은 사진 속 장면들이 실제이며 우연성이 전혀 들어가 있지 않을 것이라고  

믿기도 한다. 결국, 오늘날의 사진 작품들은 생생하게 전달되는 현실성과 작가의  

의도에 의해서 생기는 허구성이 결합되는 키메라(Chimera)적 특성이 나타나게  

된다. 기묘한 결합으로 탄생한 사진 작품들은 관람객에게 여러 가지 해석들을  

불러일으키게 된다. 관람객은 사진을 보면서 이런 참혹한 일이 계속 되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하면서도, 또 한편으로는 사진 속 타인의 고통을 보면서 잔혹함의 아름다움에  

감탄하게 된다.

더구나 문제가 있는 점은 관객들은 사진이 전달하고자 하는 충격을 인식하지  

못하게 되고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관객들이 자신이 보고 있는 사진 작품이 의도적인 

구성에 의한 것임을 알게 되면 사진이 정작 알려주고 했던 의도는 퇴색이 되고, 관객들은 

그 때 알게 된 사진의 허구성을 머릿속에 각인시키게 된다. 그렇게 되면 해외 토픽에  

등장하는 아프리카 기아의 모습을 보면서 그들에 대한 연민과 심각성을 느끼지 못하게  

된다. 
 

그러나 수잔 손탁은 관람객들의 잘못된 인식을 하게 만든 또 하나의 원인으로  

TV에게도 공범죄임을 증명하는 화살을 날리고 있다. 20세기 후반에는 TV의  

등장으로 사진과 신문을 넘어서 가장 지배적인 보도 체제로 확립하게 되었다.  

우리는 TV를 보면서도 타인이 고통 받는 모습을 안방에서도 볼 수가 있게 되었다.  

그리고 시청자들도 텔레비전 안의 세상 보면서 동점심이나 격분을 느끼게 된다.
그러나 우리가 듣고 보고 있는 텔레비전 안의 세상도 의도적으로 구성한 세상이다.
방송으로 전파되기 전에 많은 보도 장면들 중에서 중요한 가치들을 선별한다.  

결국에는 우리가 텔레비전에서 비춰지는 전쟁이나 빈곤 국가의 비참한 현실을 보게  

됨으로써 그들의 고통을 의식한다고 한들 그것은 ‘억지 의식’일 뿐이라고 저자는  

말하고 있다.  그리고 TV 속 이미지는 시시각각 시청들에게 비춰진다.  

그래서 시청자들은 TV 속에서 범람하고 있는 이미지에 의해서 무감각해지게 된다.  

사람들이 무감각해지는 원인에는 의도적인 면도 더러 있다. 이미지가 주는 고통을  

인식하여 두려움을 느끼게 되어 스스로 외면하기 위해서 무감각해질 수가 있다.
하지만 대부분 사람들이 자신이 안전한 곳에 있으며 자신과는 별개의 일이라고 느끼게  

되는 한, 쉽게 타인의 고통과의 합일이 되지 않으며 이에 대한 공감과 연민이 자연스럽게  

이루어지지 않게 되고 만다. 
  

 

  

 다 같이 슬퍼하자, 그러나 다 같이 바보가 되지 말자

수잔 손탁은 타인의 고통에 무감각해지는 능력만 지적한 것은 아니다.  

단순히 사진을 보고 연민만 느끼는 것은 타인의 고통을 제대로 받아들이는 것이  

아니라고 말한다. 사진을 보고 고통의 연민만을 느끼는 것은 또 다른 현실을 인식하지  

못하고 있었던 무능력뿐만 아니라 우리가 이런 현실을 방관적으로 받아들인  

인식이 낳은 무고함을 스스로 증명하게 된다. 저자는 심하게 손상된 시신이 담겨진  

사진들은 대부분 아프리카나 아시아에서 찍혔던 점을 예를 들어서
그런 사진 작품들은 과거 식민지주의의 오래된 특성을 보여주고 있다고 말한다.
유럽 국가들, 자신들이 저지른 폭력의 희생자를 전시해서는 안 된다는 생각을 망각한 채,
이국인들을 잔혹하게 대하는 장면을 사진으로 찍어 전시한다는 것은 자신들은 죄가  

없다는 식으로 주장하는 꼴이 된다. 

수잔 손탁은 9.11 테러에 관한 칼럼에서 ‘다 같이 슬퍼하자, 그러나 다 같이 바보가  

되지 말자’라는 의미심장한 구절을 남겼다. 불의의 테러 사고로 인해 희생당한  

사람들에 대해서 연민과 추모의 마음을 표시하는 것은 좋지만, 전 세계 사람들이 테러  

사고의 희생자들을 추모하게끔 하는 범인은 무역 센터를 폭파하게 한 테러리스트뿐만  

아니라 중동 국가와의 대립을 조장하는 미국도 공범이라는 것이다. 세계의 패권자임을  

자처하면서 세계 평화를 주장하지만 속마음은 국가의 이익을 위해서 
평화를 저해하고 있는 이중적인 미국 권력의 잣대에 휘둘리는 바보가 되지 말 것을  

촉구하고 있다. 그리고 오류의 의식을 극복하기 위해서는 저자는 단순히 타인에게  

연민만 베풀지 말고, 고통을 받는 그들과 우리는 연결되어 있을지 모른다는  

사실을 숙고하라고 말하고 있다. 어떻게 보면 저자의 해결 방안이 추상적이라서  

독자들에게는 깊게 와 닿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타인의 고통을 개입할 능력마저 잃어가고 있는 현대인들의 모습을 생각하면
최선의 대안에는 이 방법 밖에 없는 거 같다. 
 

 

 

 인간의 고통을 자극하게 하는 전시회 
 

퓰리처 사진전에 관한 홍보성 짙은 기사문은 다음 날에도 이어졌다.
이번에는 정운찬 국무총리가 사진전을 관람했다는 기사문이었다.  

사진작품을 관람하고 있는 정 총리의 모습이 찍힌 사진이 기사문과 함께 배치되었다.  

그런데 이 기사문에는 사진전을 보고 난 후의 정 총리의 소감이 짤막하게 인용하고  

있었는데, 그의 소감을 보고 나니 씁쓸하게만 느껴졌다. 정 총리는 사진전은  

‘역사적 호기심과 지적 호기심을 자극하는 전시회’라고 평했다.  

이어서 우리가 교훈으로 삼아야 할 살아있는 역사라고 비유하였다.
퓰리처 상 사진 작품들이 전시하는 목적은 단순히 그림을 보는 전시회와 차원이 다르다.  

사진 작품에는 우리 인간들이 저지른 비인간적인 역사의 현장과 우리가 살고 있는 세계의 

또 다른 어두운 면을 알려주는 역사와 인권의 이력서이기도 하다.
그래서 사진전을 역사와 인권을 동시에 배울 수 있는 전시회임을 표현한 정 총리의 말은  

공감이 가기도 한다. 하지만 정 총리의 말을 거꾸로 비유하자면 퓰리처 상 사진전은
‘인간의 고통을 자극하게 하는 전시회’라고 말하고 싶다.
이런 전시회임에도 불구하고 정 총리는 정작 중요한 것을 놓치고 말았다.
타인의 고통에 대해서 자극받지 못했으며 결국에는 공감대를 형성하지 못했다는  

점이다. 우리는 그런 역사적 사진 작품들을 보면서 사진에 뿜어내고 있는 고통에 대해  

자극을 느껴보고, 역사의 과오들에 대해서 스스로 성찰해야 한다. 그러나  

잘못된 역사에 대해서 성찰하는 행위와 잘못된 역사에 대해서 공부하는 지적  

행위은 엄연히 차원이 다르다. 성찰하는 행위는 수잔 손탁이 주장한 것처럼
타인의 고통을 몸소 느껴보고, 사진 속 타인들을 고통스럽게 만든 요인들을  

공감하고 이해를 하는 것이다. 반면 역사를 공부한다는 것은 정 총리의 말 그대로  

역사에 대해 알고 싶어하는 호기심으로 역사의 지식들을 습득하는 것이다.  

단순히 사진을 보고 지적 호기심을 느끼고 그 욕구를 해소하기 위해 역사적 사실만  

훑어보고 가는 것은 제대로 된 퓰리처 상 사진전 감상이 아니다.

이런 태도는 정 총리의 인식에만 문제가 있는 것이 아니다.  

퓰리처 사진전을 관람한 대부분의 사람들도 가지고 있다. 평소에 역사에 관심이  

없었다가 퓰리처 상 사진전의 인기에 혹하여 전시회를 찾는 젊은이들,  

그리고 교육을 위해서 방학 기간을 틈타 자식들 손 꼭 잡고 전시회를 찾는 부모님들.
그들도 사진 속의 타인의 고통을 제대로 공감하기 위해서 전시회를 찾기 보다는
단순히 전시회의 홍보, 아니면 타인의 역사를 알기 위해서 전시회를 찾게 되는 것이다.

정 총리가 베이브 루스의 은퇴식을 찍은 ‘그의 등번호, No. 3' 이라는 작품 앞에서  

사진 한 장 찍어달라는 요청을 했다는 마지막 기사 문장을 보고나니 인간이  

타인의 고통에 대해 개입하려는 공감의 능력을 가진다는 것이 쉬운 일이 아니라는 점을  

새삼 느끼게 된다. 솔직히 고백하자면 나도 퓰리처 상 사진전의 광고를 보고 난 뒤에,  

이번 사진전이 우리나라에 두 번 다시 열리지 않을 거 같은 역사적인 전시회라는  

것을 느끼게 되어 한 번은 꼭 전시회에 가고 싶은 마음이 들었다.  

하지만 수전 손탁의 <타인의 고통>을 읽게 되면서
내가 그릇된 생각을 가지고 있었음을 깨닫게 되었다. 그리고 이 책을 읽고 난 뒤
사진전을 제대로 관람하는 방법을 터득하게 되었다. 이제 사진 전시회에 직접 찾아가서
진지하게 관람하는 일만 남았다. 전시회를 보기 위해서 서울로 가는 날이 얼마 남지  

않았다. 전시회 관람을 계기로 나도 타인의 고통을 개입할 수 있는 능력이 있을는지  

확인할 수 있게 되어서 그런지 괜히 마음이 두근거려진다. 
 

 

인용 관련기사 출처 및 링크  

   

[‘퓰리처상 사진전’ 끝없는 인파 … 15일부터 관람 시간 연장] 중앙일보 7월 5일자

http://article.joins.com/article/article.asp?Total_ID=4289726 

 

[정운찬 총리 “퓰리처상 사진전, 역사적·지적 호기심 자극”] 중앙일보 7월 15일자
http://news.joins.com/article/aid/2010/07/15/3912183.html?cloc=olink|article|defaul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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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이조부 2010-11-06 13:2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소설 쓰는 김연수 도 이 책을 추천하더군요~ 읽어야지 읽어야지 하는데

마음만 먹은지 1년이 넘었네요 --

cyrus 2010-11-06 16:04   좋아요 0 | URL
김연수 씨가 이 책을 추천했었군요.
간혹 이 책 중간중간에 잔인한 사진들 몇 점 있지만,,
전쟁과 국제 분쟁이 사라지지 않은 지금 이 시대에
수잔 손택이 남긴 메시지를 읽게 되면
세계평화의 중요성을 알 수 있을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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