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운동이 정치투쟁 혹은 군사투쟁으로까지 고조되면 문학의 소리는 곧 들을 수 없게 된다. 그 운동이 불행히도 좌절이나 실패에 부닥친다면 다양한 방식의 문학활동이 또 생겨난다. 만일 혁명이 성공한다면 문학은 적어도 한동안은 쇠약해진다.


- [1926년] 장개석에 대해서는, 내가 남쪽으로 오기 전 적어도 지부회의에서는 불만이나 비판의 소리를 들어본 적이 없었다.

: 당시는 공산당이 자체적인 의혹에도 불구하고 코민테른의 지침에 따라 국민당에 입당한 시기였다.


- 이곳의 국민당은 좌파와 우파로 분열하고 있었다. 특히, 우파의 역량이 컸으면 그들은 군사적인 실권을 장악하고 있었다. 서산회의파는 결코 몇몇의 완고한 늙은이들이 아니었고, 장개석도 원래는 이들과 같은 길을 갔다. 당시 광주에서 세력을 떨치던 손문주의학회는 대계도를 정신적인 지주로 삼았는데, 이것은 곧 장개석의 국민당 내 전투조직이었다. 이른바 국민당 좌파는 기실 ‘외부공작’을 하는 공산당원과 장개석과 반목하는 몇몇 상층 인물들에 불과했다.

: 국공합작 이후의 국민당 내 상황을 잘 보여준다. 공산당은 국민당 내 좌파의 역할을 했다.


- 우리 청년학생들은 아무도 국민당을 신뢰하지 않았다. (중략) 그런데도, 우리 모두는 국민당에 가입되었다. 심지어 국민당원으로 행세하라는 명을 받기도 했다.


- [1927년] 이렇게 우리는 완전히 못한 사상을 고무시켰고, 간명한 목표(반제반군벌)에 대해 부담 없는 낙관적인 태도로 날로 광기를 더해가는 반동적 공포 통치 아래에서 행동 또 행동했다. 하지만, 4월에 이대조 동지가 붙잡혀 살해되고 나서야 우리의 행동 양상, 특히 해동할 때의 심리상태는 완전히 바뀌었다. (중략) 장작림은 한때 이들을 관외로 호송하여 장기간 감금하려고 했다고 한다. 그러나 이때 남방 혁명군의 총사령관인 장개석이 비밀리에 연락을 취해 이들을 죽이라고 재촉하였고 마침내 장작림은 결단을 내리게 되었던 것이다. (중략) 북방의 공산당원을 더 경악하게 하고 불안과 곤혹감에 빠뜨렸던 것은 남방으로부터 전해오는 ‘청당’ 의 소식이었다. 우리는 사상적으로나 감정적으로 너무 준비되어 있지 않았기 때문에, ‘혁명군의 지도자’가 노동자를 도살한다는 사실을 받아들일 수가 없었다.

: 27년 장개석의 쿠데타와 공산당원들의 혼란을 묘사


- 들리는 바로는 풍옥상이 “남경과 무한의 충돌을 조정”하려 한다고 했다. (중략) 풍옥상의 혁명적인 태도는 단지 소련의 무기를 갈취하기 위한 가장일 뿐이라는 것을 분명히 깨달았다. 자신의 입장이 공고해지면 그는 곧바로 반동 군벌의 진면목을 드러낼 것이다. (중략) 왕정위 등은 공공연히 호남 호북 농민운동의 과격성을 비난했고 공산당원에게 무한 노동자들의 혁명행동을 제한할 것을 요구했다.

: 우한정부와 남경정부가 분리된 이후에, 장개석의 쿠데타와 더불어 우한정부 내에서도 국민당 좌파들이 반공적인 태도를 드러내고 있었다.


- 일부 사람들을 뽑아 소련으로 학습을 보내는 것은 이 문제를 해결하는 방법 가운데 하나였다. 들은 바로는 이것이 모스크바의 생각이라고 했다.


- 당초 그곳에 이미 선하고 아름답기만 한 지상천국이 실현되어 있다고 순진하게 생각했던 것은 아니지만 우리의 상상은 그리 명확하지 않았고 실제의 상황과도 커다란 거리가 있었다.

: 당시 중국의 공산당원들이 가진 사회주의에 대한 환상을 드러냄


- 소련에서 관리는 꼭 러시아인만 하는 것은 아니구나! 이곳에서는 협애한 민족의 벽이 사실상 허물어져 있었다. 우리는 책이 아닌 현실 정치 가운데서 국제주의를 보았다.


- 그의 말에 따르면 오늘 아침 반대파가 ‘반대 시위’를 했는데, 그들이 ‘레닌의 유촉을 실행할 것을 요구한다’는 표어를 들고 대열 가운데 끼어서 붉은광장을 통과할 때, 표어는 사람들에 의해 찢겨졌고 양측의 충돌이 발생했으며 어떤 사람은 트로츠키의 자동차를 향해 총을 쏘았다고 한다.

: 1927년 러시아 당내반대파의 반대시위를 묘사


- [1928년] 중국혁명은 1927년 여름과 가을 사이에 이미 확실히 실패했다. 실패의 주요 원인은 스탈린-부하린의 기회주의정책이다. 이제 중국 공산주의자들은 이러한 새로운 정세를 인식하며서 지난간 일을 분석해 앞으로의 일을 확고히 다져야 한다. (중략) 트로츠키는 다음과 같은 말로 당시의 정세와 우리의 임무를 총괄했다. “중국은 현재 퇴조기에 처해있다. 따라서 현재는 당 안에서 철저히 이론을 연구하고 자기비판과 교육을 행할 시기이다. 이 시기에 우리는 노동운동의 각 방면에 거점을 수립, 이를 공고히 하고 농촌 지부를 건립하며 노동자, 빈농을 지도, 통일하여 각지에서 분산적인, 처음에는 방어적이고 나중에는 나서서 싸우는 투쟁을 전개해야 한다.” 또한 다가올 혁명적 사회의 내용에 관해서 그는 “앞으로 시작되는 시기가 닥치면 도시와 농촌 부르주아의 재산을 몰수하며, 아직 해결되지 않은 민주의 임무는 프롤레타리아독재로 완성될 것” 이라고 지적했다.


- 1928년 봄부터 모스크바의 중국 공산주의자들이 떼지어 반대파로 향했던 주요 원인은, 중국과 소련의 정세에서 놀라운 속도로 반대파의 주장이 실증되었기 때문이다. (중략) 1928년에 비교적 유명한 반대파의 지도자들이 계속해서 잘못을 뉘우치고 스탈린에게 투항했지만, 일반 다원, 특히 젊은 세대의 노동자 당원들은 오히려 지하로 숨어들고 있던 반대파 조직의 주변으로 우르르 몰려들었다.

: 소련 내 반대파의 대세


- 플리아코프가 공장에서 파업을 주도하다가 체포되었고 자신도 이제 대학으로 돌아갈 수 없다고 말했다.

: 스탈린주의에 대한 반대투쟁


- 진독수와 그와 친했던 일군의 동지들이 트로츠키파로 옮겨갔던 일이 중앙 내부에 비교적 커다란 파문을 부러일으켰기 때문에 실권파인 중앙 지도자는 트로츠키파에 대해 매우 심각하고 비타협적인 입장을 취했다고 말할 수 있다. 그렇다고는 해도 중공의 노간부들이 가졌던 트로츠키-진독수 반대파에 대한 적의는 소련의 스탈린파가 트로츠키파에게 품었던 것과는 시종 같지 않았다. 이는 한편으로 중국의 트로츠키파가 끝내 그들에게 대항할 세력으로 발전할 수 없었기 대문이지만, 한편으로 더 중요한 이유는 노간부들의 진정한 적대자는 미프-왕명파라는 데 있었다. 왕명파는 그야말로 증국에서 스탈린의 직접적인 대리인이었다.

: 소련 외 국가에 반드시 존재했던 출신논쟁


- 나 자신이 동의하지 않는 방침을 위해 이렇게 유쾌하게 노력할 수 있었던 이유는 첫째, 공작 속에서 반대파 노선이 옳다는 것이 착착 증명되었고 둘째, 몇몇 진정한 혁명가들은 공작하면서 고민하고, 경험 속에서 6전대회 방침의 착오를 점차 인식하고 있다는 것을 발견했으며 셋째, 이 기회에 실제적인 공작의 처리 방법을 어느정도 배웠다는 데 있다.


- 나이 든 중공 활동가들은 모스크바에서 돌아온 유학생들을 매우 깔보았다.


- [1929년] 현 정세에서 국민회의는 유일하게 정확한 구호이며, 이를 통해 궤멸된 노동자계급을 다시 뭉치게 하고 농민과 도시 중소자산계급의 투쟁을 통일함으로써 공산당을 다시 정치 무대에 내세워 새로운 혁명의 도래를 촉진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중략) 국민회의 구호에 관한 견해는 그후 중국 반대파가 여러 해를 지내며서 가장 많이 논쟁해온 문제가 되었다.


- 당시 파벌 사이의 투쟁 상황을 회고하면 단지 난장판 같은 혼란이 느껴질 뿐이다. 그러나 곰곰이 생각해보면 이것도 어떤 정치사상이든지 운동의 최기에 나타나는 공통적인 현상이다. 개인적 야심과 파벌 간의 편견은 진정한 혁명사상과 뒤엉켜 종종 매우 괴상한 양상을 보이기도 한다.


- 앞 단계에서 주로 논쟁한 것은 내 기억에 의하면 국민회의 구호 문제, 홍군 문제, 장래 혁명의 성격, 그리고 이른바 과거 혁명 실패의 교훈에 관한 것이다.


- [1930년] 1903년 9월 홍군의 두 차례에 걸친 장사 공략이 실패로 돌아가자 이 노선은 이미 파산했음이 모든 동지들 앞에 사실로 드러났다. 이에 같은 달에 소집된 6기 3중전회에서 구추백을 중심으로 한 일부 중공의 지도인물들이 들고일어나 이른바 이립삼노선 시기를 마감했다.


- [1931년] 그 힘은 바로 스탈린으로 대표되는 소련과 코민테른의 성망, 그리고 그가 지배하는 물질적인 역량, 특히 중국공산당에 지급하는 매월 수만 원의 돈이었다! 바로 이런 정신적 물질적 역량이 이립삼과 구추백으로 하여금 잘못을 뉘우치고 물러나게 하고, 주은래로 하여금 자아비판하고 손을 들어 진계와 합작하게 했으며 진소우 조무래기들을 제위에 올려놓았던 것이다. (중략) 바꾸어 말하면 우리는 진소우의 정변을 중국공산당의 어떤 사람들이 어떤 시기에 범한 착오로 간주해서는 결코 안 되며, 소련과 코민테른의 몰락이 세계공산당에 저지른 죄악의 영향이라고 이해해야 한다.

: 1930년대초부터 전세계의 공산당에서 진소우와 같은 인물들이 집권하게 되는 계기를 설명


- 진소우는 본격적인 공격에 나섰다. 원래 가지고 있던 코민테른이라는 배경에 새롭게 얻은 당내의 권세를 덧붙여서 대단히 맹렬한 반우파 공격을 발동했다. 모든 우세는 진소우 등의 손에 쥐어져 있었다. 그러나 ‘우파’는 오히려 완강한 기세를 보이면서 굴복하려 하지 않았다.


- 그 시기에 반대파분자들이 생활 때문에 직접 번역해 낸 사회과학서적들은 중국 사회주의사상의 보급과 심화에 확실히 적지 않은 공헌을 했다.


- 흥정에 성공한 사람들은 예외 없이 당의 권력층에 친한 친구가 있어서 당에서 거금을 내어준 경우였다.


- [1934년] 국민당정부는 계속 ‘먼저 국내를 안정시키고 나중에 외적을 물리친다’는 정책을 시행했다. 그들은 일본제국주의에 양보를 거듭하면서도 전력을 강서의 공산군을 공격하는 데 집중했다. 1934년 말에 국민당은 결정적인 승리를 획득했고, 공산군은 간신히 포위를 뚫고 장정에 올랐다. 그리고 1935년 1월 귀주성 준의에서 열린 중공중앙회의에서 모택동은 진소우를 대신해 당의 최고 지도자가 되었다. 이것은 이른바 중국 토착 공산당의 스탈린의 직계에 대한 승리를 의미한다.  같은 해 8월 1일 중공은 모스크바의 새로운 노선에 근거해, 내전의 중지, 국민당과의 연합항일, 계급투쟁의 포기, 항일강령의 기초 등을 주장하는 선언을 발표했다.


- 심지어 국민당을 인정하는 합작을 하기 위해서 계급투쟁을 포기하고, 홍군의 편제를 취소하며, 삼민주의로 개종하는 것 조차 서슴지 않았다.


- [1937년] 독소협정은 독수의 사상을 크게 바꾸는 계기가 되었는데, 이는 그에게 있어서 마지막 사상적 전변이다. 이 전변은 이미 있는 표현을 빌려 간단하게 말하자면, 볼셰비키주의에서 카우츠키주의로 물러선 것이다.


- 군사적인 기회주의에 반대한 나머지 모든 성질의 군사활동을 두려워하고 완전히 포기함으로써 자신을 항일전선 주류의 바깥에 위치시켰던 것이 적어도 지금은 커다란 잘못이었음을 인정해야 한다.


- 폭넓고 진실하게 일어나는 반국민당적 대중운동을 스탈린다이 이용하게 나둬서는 안 된다는 것이었다. (중략) 그러나 이군중을 쟁취하기 위해서는 먼저 그들이 이른바 민주당파들에게 가질지도 모르는 환상을 깨놓아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들의 환상을 깨뜨리려면, 우리는 그들과 동맹을 체결해서는 안 되며 반드시 독자적인 입장을 지켜야 했다. 구체적인 문제에서는 그들과 공동 보조를 취할 수는 있지만, 사상과 정치에서는 그들에 대해 비판을 전개해야 했다. 따라서, 나는 따로 신문을 내자는 의견을 다시 제기했다.


- 나는 본래, 적대시하는 태도를 타파하는 가장 좋은 방법은, 스스로 따라서 적대시하지 않고, ‘새로움과 낡음’ 또는 다른 추상적이고 낙후한 표준으로 울타리를 삼지 않으며, 자신의 주의를 정치사상으로 끌어올리고, 눈길을 더 멀리 있는 이익 위에 놓는 것이라 여겼다.


- [1939년] 이런 진독수의 태도는 당시 제4인터내셔널에 제기된 소련 문제에서 반대파와 본질적으로 일치하는 것이다.


- [1941년] 중국 트로츠키파의 분열은 1941년 태평양전쟁 뒤에 다시 발생했다.


- 장개석의 변화는 1941년 4월에 일소협정이 조인되고 일미전쟁이 더욱 임박함에 따라, 게다가 같은해 6월 독소전쟁이 발발하면서 더욱 더 분명해졌다.


- 진독수는 중국의 혁명사상사에서 적어도 플레하노프에 견줄 수 있다.


- 혁명가와 정치가는 서로 다른 품격을 가진 존재이다. 혁명적인 정치가도 있고, 혁명적이지 않은 정치가도 있다. 정치가의 품격을 겸한 혁명가가 있고 전혀 그렇지 못한 혁명가도 있다. 일반적으로 어렵고 힘든 창업 시기에 필요하고 따라서 유행하는 것은 혁명가이다. 하지만 일단 혁명이 완성되면 권력을 장악하고 전열에 나서는 것은 정치가이다. 진정으로 위대한 정치가는 필경 혁명가이지만, 위대한 혁명가 중에는 결코 정치가가 아닌 사람도 많다. 반대로 정치가의 단편적인 조건만을 갖춘 사람들은, 설령 시세를 좋아 혁명가의 대오에 휩쓸린다 해도 사태가 발전하는 가운데 대부분 실패하면 가장 먼저 변절하며 승리하면 가장 먼저 관료로 부패한다.


- [1945년] 전쟁이 바로 혁명의 어머니이다.


- 혁명을 준비해야 할 뿐 아니라, 나아가 혁명의 도래를 위해 준비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렇지만, 일단 혁명이 앞에 닥쳐왔을 때, 우리는 여전히 준비가 되어 있지 못하다고 느꼈다. 조직적으로 확실히 그랬고, 심지어 사상적으로도 어느 정도 그랬다. 대중은 발효되었지만, 그들을 구워 과자로 만들거나 술을 담글 만한 강력한 조직과 정확한 사상을 갖춘 혁명당은 없었다. (중략) 그때 중국 트로츠키파가 수천의 기간조직을 가지고 있었다면 가장 좋았겠지만, 만약 수백 명이라도 있었다면, 능히 이 공백을 메울 수 있었을 것이라고 나는 믿는다.


- 국민당정권은 전쟁 속에서 빠져나온 뒤 이전보다 훨씬 부패했다. 그 상황은 본래 누구나 다 아는 것이다. 당시 국민당을 둘러싸고 있던 통치계급은 이미 투기꾼, 밀수꾼, 기생충 그리고 약탈자들의 거대한 집단으로 변모해 있었다.


- 타인의 승리를 인정하는 것은 투항이 아니며, 자신의 실패를 확인하는 것은 낙담이 아니다.


- 1946년에서 1949년까지 국공양당이 내전을 진행하던 시기에 우리는 비록 충심으로 중공측을 지지하고 그들이 승리를 쟁취하도록 힘을 다했지만, 동시에 늘 소자산계급정당이 이끄는 농민군대는 승리할 수 없으며 설령 승리한다고 해도 반드시 막다른 골목에 빠지고 말 것이라고 생각했다.


- 동시에 혁명노선의 일관성이나 지도자가 노동자계급 및 전체노동자에 대해 취하는 태도로 본다면, 중공은 결코 러시아의 볼셰비키당과 같은 무산계급정당이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중략) 이 새로운 계급을 초린은 국가자산계급이라고 칭했고, 나는 집산주의적 관료계급이라고 이름지었다. 우리의 견해에 따르면, 이러한 계급들이 출현하게 된 것은 바로 연이은 세계혁명의 실패와 자본주의 제도의 과도한 성숙의 결과였다. 따라서, 그들은 반동적이지만 강대했다.


- 그의 유일한 관심은, 분명한 모순 속에서 올바른 해결을 모색하는 것이 아니라, 이 모순들 속에서 온 힘을 다해 자신의 일관된 정확성을 지키려는 데 있었다.


- 한 정당의 계급성을 어떻게 결정할 것인가 하는 문제에 관해서 레닌은 다음과 같이 말했다. “그 당원 중의 노동자 성분 뿐만 아니라 그 정당을 지도하는 사람이 누구인가와 행동 및 정책의 내용이 어떤 것인가를 함께 보아야 합니다.”


- 스탈린당은 어떤 시간과 조건 속에서도 혁명을 파괴할 뿐, 그것을 성공시키거나 승리로 이끌 수 없으며 심지어 그것을 바라지도 않는다고 여겼다. 이런 선입견을 품고 중공의 승리를 대면했으니, 자연 당혹감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 우리는 결코 앞에서 서술한 두 측면을 헷갈려서는 안 된다. 스탈린당이 아직 자본주의를 반대할 수 있으며 어떤 특정한 조건에서 혁명을 만들어낼 수 있다는 사실과, 그들이 어떻게 자본주의에 반대하고 어떻게 혁명을 달성하며 또 어떤 혁명과 제도를 만들어낼 것인가는 전혀 별개의 문제이다. 후자는 전자에 비해 결코 중요성이 떨어지지 않는다. 오히려 새로운 국가가 더욱 많아지면서 후자가 전자보다 더 중요해진다. (중략) 그렇다면 극도로 전횡하는 관료통치하에서는 어떠한 사회제도를 건설할 수 있는가? 이전에 나는 그 아래에서 관료집산주의적인 사회를 만들어낼 수는 있지만 결코 사회주의에 도달할 수는 없다고 생각했다. 지금도 여전히 그렇나 관료통치는 사회주의에 도달할 수 없다고 생각하지만, 그 대신 생겨나는 것이 관료집산주의 제도라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나는 국유재산 제도 위에 서 있는 관료통치는 끊임없이 전쟁과 혁며을 일으킬 수 있다고 믿는다.


- 모든 공산당 파벌과 공산국가를 어떤 시기와 상황을 막론하고 모두 한통속으로 간주하여 똑같은 태도로 공격하고 배척하게 되면, 사실 우리 스스로 고립에 빠질 것이며 객관적으로도 진짜 스탈린주의자와 관료제도를 돕는 결과가 될 것이다.


- 모택동이 스탈린의 적계에 속하지 않는다 하더라도 결코 그 자신은 완고한 스탈린주의자가 아니라고 말할 수 없다. 중공은 충분히 스탈린주의화된 정당이다. (중략) 창광하는 개인숭배, 엄격한 등급특권, 특무에 의한 사상통제, 무고를 통한 반대파의 제거, 당내의 파벌 금지, 당 외의 당 금지. 이 모든 것들을, 모택동과 중공은 설사 본래보다 심각하게 받아들이지는 않았더라도, 결국 그대로 본떠서 실행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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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표[린뱌오] : 1926년 황푸[黃埔]군관학교를 졸업하고, 중국공산당에 입당하였다. 1927년 국공분열 후 난창[南昌]폭동에 참가하였다가 실패하고, 주더[朱德]·마오쩌둥[毛澤東]과 함께 게릴라활동을 전개하였다. 1929년 공농홍군(工農紅軍) 제4군장이 되고 1934∼1935년 장정(長征)에 참가하였다. 1936년 항일군정대학 교장, 1937년 팔로군(八路軍) 115사단장(師團長)이 되었다. 1947년 중국공산당 제7기 중앙위원, 8월 만주(滿洲)에서 소련군으로부터 일본군의 무기를 접수하고, 둥베이[東北]인민해방군을 조직하였으며, 사령원, 당중앙둥베이국 서기 등으로 만주를 장악하였다. 1949년 제4야전군 사령원, 당중앙 화중국[華中局] 서기, 10월 중국공산당 정권 수립 후 중앙인민정부 위원, 중앙인민혁명군사위원회 위원, 중국인민정치협상회의(정협) 전국위원회 상무위원, 1950년 중난군[中南軍] 군정위원회 주석 겸 중난군구 사령원이 되었다. 1954년 국무원 부총리, 국방위원회 부주석, 1956년 당중앙정치국 위원, 1958년 당중앙위원회 부주석, 정치국 상임위원, 1959년 국무원 부총리, 국방위원회 부주석을 연임하고 국방부장이 되었다. 1959년부터 군 내부에 마오쩌둥사상 학습운동을 전개하였으며, 1965년 〈인민전쟁 승리 만세〉 논문을 발표하고, 마오쩌둥의 ‘농촌으로 도시포위’ 전략을 세계전략으로 확대하였다. 1967년 문화대혁명 속에서 마오쩌둥·장칭[江靑]과 결합, 군의 힘을 동원해 권력을 탈취하고, 1969년 중국공산당 제9기 전국대표대회에서 마오쩌둥의 후계자임을 당규약으로 명기하였다. 1971년 9월 실각하였으며, 반(反)마오쩌둥 쿠데타를 음모하다가 사전에 발각되어 실패로 돌아가자, 가족과 함께 비행기로 탈출하여 소련으로 망명하던 중 몽골 지방에서 비행기가 추락하여 사망한 것으로 알려졌다.


진소우[천사오위] (왕명) : 별명 왕밍[王明]. 우창[武昌] 중화(中華)대학을 거쳐 1925년 모스크바 중산(中山)대학을 졸업하였다. 1930년 귀국한 후에는 상하이[上海]에서 공산당활동에 종사하였다. 1931년 당 중앙위원, 정치국 상임위원 겸 장쑤성[江蘇省] 위원회 서기, 그해 중국공산당 총서기인 샹중파[向忠發]가 체포되자 그의 뒤를 이어 당 중앙 총서기로 선출되었다. 그 후 중국공산당 코민테른 주재대표단 수석대표로 파견, 1935년 코민테른 제7차 대회 집행위원, 주석단위원, 서기처 후보서기가 되었다. 1942년 정풍운동(整風運動) 때 마오쩌둥[毛澤東]으로부터 신투항주의 ·교조주의로 몰려 비판을 받았다. 1956년 당 제8기 중앙위원이 되었으나, 그 해 건강악화로 모스크바에 가서 요양하면서 그 곳에 계속 머물렀다. 문화대혁명 때 비판을 받게 되자 1969년 마오쩌둥을 비난하는 글을 캐나다의 공산당 기관지에 발표하였다. 1974년 모스크바에서 병사하였다. 저서에 《왕명최근논문선》 《왕명항전언론집(王明抗戰言論集)》 등이 있다.


주은래[저우언라이] : 지주·학자의 집안에서 태어나 1913년 톈진[天津]의 난카이[南開]중학에 입학하였으며 졸업한 뒤에도 계속 공부하기 위하여 1917년 일본으로 건너가 와세다대학[早稻田大學] 등에서 청강하기도 하였다. 톈진의 난카이대학 재학 중 5·4운동에 참가하여 투옥, 퇴학당하였고 1920년 프랑스로 건너가 파리대학에서 정치학을 공부하였다. 1922년 중국공산당 파리지부(支部)를 창설하였고, 런던 ·베를린 ·모스크바를 거쳐 귀국하였다. 1924년 황푸[黃織]군관학교 정치부 대리에 발탁되었고, 1927년 북벌군에 호응하는 상하이[上海] 봉기를 지도하였다. 그 후 장제스[蔣介石]의 반공 쿠데타를 피하여 우한[武漢]으로 가서 노동자의 무장규찰대(武裝糾察隊)를 조직, 난창[南昌]폭동을 지도하고, 광저우[廣州] 코뮌을 조직하였다. 1931년 말 광시성[廣西省]의 소비에트구(區)에 들어가 군사부장·제1방면군 정치위원으로서 정보공작과 국민당군의 포위에 대한 전략을 지도하였다. 1936년 혁명군사위원회 부주석으로서 장정(長征)에 참가하였고, 시안[西安] 사건 때에는 국공(國共)내전의 정지와 항일연합전선의 결성에 힘썼다. 항일전이 발발한 후에는 우한·충칭[重慶]에서 공산당의 대표로서 국민정부의 국방위원회·군사위원회 위원 등 요직에 있으면서 국공관계의 처리를 맡아 탁월한 정치적·외교적 수완을 발휘하였다. 1949년 4월 공산정권 수립 후 문화대혁명을 거쳐 최후까지 공산당에서 지도적 위치를 유지하면서 27년간 총리(1958년까지 외교부장 겸임)로서 국내외의 중요한 여러 문제를 해결하였다.


유인정 : 모스크바에서 중국으로 돌아오면서 독자적으로 활동을 전개한 인물


구추백[취추바이] : 독학으로 러시아어 ·프랑스어 ·영어를 익히고, 러시아 유명작가들의 알려지지 않은 작품을 많이 번역하였다. 1920년에는 《베이징천바오[北京晨報]》의 모스크바 주재 기자로 있었다. 1922년 중국공산당에 입당하여 소련에서 개최된 극동민족대표대회 및 코민테른 제4차 세계대회에 참석하였다. 1923년 중국공산당 제3기 중앙위원 겸 선전부 부부장, 1924년 국공(國共)합작으로 중국국민당 후보 중앙집행위원, 1925년 중국공산당 제4기 중앙위원, 1926년 중국공산당 제5기 중앙위원 및 정치국 위원 등을 지냈다. 1927년 국공합작 결렬 후에는 코민테른의 지시로 중국공산당 중앙 8 ·7긴급회의를 개최하여 천두슈[陳獨秀]의 ‘우경 기회주의’를 비판하고 중국공산당 총서기로 취임하였다. 그러나 1928년 모스크바에서 개최된 중국공산당 제6차 전국대표대회에서 ‘좌경 모험주의자’라는 비판을 받아 중앙총서기직을 박탈당하고 모스크바로 소환되었다. 1930년에 중국으로 돌아와 중국공산당 코민테른 주재 대표, 코민테른 집행위원 등 당 지도부에서 활동하였으나, 1931년 ‘조화주의자(調和主義者)’라는 비판을 받고 당의 핵심기구인 정치국에서 물러났다. 그 후 1935년 2월 상하이[上海]로 도주(逃走)하다 국민당의 군대에 체포되어 그 해 6월에 처형되었다. 저서에 《아향기정(餓鄕紀程)》(1921) 《적도심사(赤都心史)》(1924) 《다여적화(多餘的話)》 등이 있다.


당생지[탕성즈] : 1915년 바오딩군관학교[保定軍官學校]를 졸업한 뒤, 후난 군벌의 자오헝티[趙恒?]의 부하로서 사장(師長)까지 진급하였다. 1926년 국민혁명군으로 전향하여 제8군장 ·후난성 주석으로서 우한 정부[武漢政府]의 무력적 배경을 만들었다. 우한 ·난징[南京] 정부가 합친 뒤인 1927년의 가을 장제스[蔣介石]의 배척으로 일본에 망명하였다가 곧 귀국하여, 1929년 반장전(反蔣戰)에 실패하여 홍콩으로 도망쳤으며, 1931년 광둥[廣東] 국민정부에 참가하였다. 광둥 ·난징 정부 통합 후 군사참의원장 ·훈련총감을 거쳐, 1937년 난징 위수사령관이 되었으나 일본군에 패하였다. 그 후 군사위원회 위원을 거쳐, 1948년 총통부 전략고문위원회 위원이 되었으나, 1949년 8월 중공군에 항복하였다. 그 뒤 후난성 부성장 ·전국인민대표대회 대표 ·중국국민당 혁명위원회 상무위원 등의 요직을 역임하였다.


무한정부 : 1926년 7월 국민당은 장제스[蔣介石]를 국민혁명군 총사령관으로 하여 북벌(北伐)을 개시하였으며, 불과 수개월 만에 양쯔강[揚子江] 연안까지 진출하였다. 이때 북벌 진행상 보다 효율적인 수행을 위하여 정부 소재지를 광저우[廣州]에서 이전할 필요가 생겼다. 국민당좌파와 공산당은 난창[南昌]을 주장한 장제스에게 반대하여, 1927년 2월 우한 천도를 강행하여 혁명 주도권을 잡으려 하였다. 이러한 정세에 대항하여 장제스는 상하이[上海]에서 4월 12일 반공 쿠데타를 일으켜 공산당을 축출하고, 4월 18일 난징[南京]에 국민정부를 수립하여 우한정부와 대립하였다. 우한정부의 국민당좌파는 국민당의 경제 압박과 외국 제국주의 세력의 압력 밑에서 동요가 심하였다. 특히, 토지개혁문제를 둘러싼 공산당과의 대립이 심각한 우한정부는 6월 소련인 고문을 해임하였다. 7월 정부 수반(首班)인 왕자오밍[汪兆銘]이 공산당과의 관계를 단절하여 반공 입장을 분명히 하였다. 9월 난징·우한·시산[西山]파가 국민당 임시중앙위원회를 개최하여, 양정부의 합류 및 난징을 국민정부의 소재지로 한다는 것 등을 결정함으로써, 결국 우한정부는 소멸하였다.


국민정부 : 중국 본토에서 1925~1949년까지, 본토가 공산화된 이후에는 타이완[臺灣]에서 현재까지 국민당이 장악하고 있는 정부. 국부(國府)라고도 한다. 중국국민당 제1기 전국대표대회 결의에 따라 1925년 7월 1일 광둥[廣東]에서 조직되었다. 쑨원[孫文]의 삼민주의(三民主義)를 건국이념으로 삼고 국민혁명을 군정(軍政)·훈정(訓政)·헌정(憲政)이라는 3단계 시기를 거쳐서 성숙시키려는 방침과 함께 연소연공정책(聯蘇聯共政策)을 취하여 중국공산당과의 합작을 실현하였다. 이와 같은 국공합작 아래에서 국민혁명군을 조직하여 1926년 7월 북벌전쟁을 개시하였다. 1927년 2월 정부를 우한으로 옮겼는데, 국민당 내의 좌우 양파가 항쟁함으로써 정부는 우한[武漢]·난징[南京]의 2개 정부로 분열되었다. 1927년 4월 국민혁명군 총사령관 장제스[蔣介石]에 의한 상하이[上海]쿠데타사건이 발생하자 이를 계기로 국공합작은 와해되었다. 이 사건 후 정부는 국민당 일당독재 아래 장제스가 정치·군사상의 실제적 독재자가 되었고 우한·난징 정부도 난징으로 합체되었다. 1937년 7월 발발한 중·일전쟁 중에는 정부를 충칭[重慶]으로 옮겼고 전쟁 중에 제2차 국공합작이 이루어졌다. 일본이 항복한 후 정부는 다시 난징으로 돌아왔으나 국공관계는 다시 결렬되어 중국 전토는 내전상태로 들어갔다. 4년간의 내전을 통하여 국민정부군은 괴멸상태에 빠졌고 장제스는 미군의 원조로 본토를 탈출, 타이완으로 건너가서 국민정부를 재조직하여 중국 본토에 대한 지배권을 주장하였다. 한편, 중국 본토에서는 1949년 10월 1일 중공정부가 탄생하여 중화인민공화국이라 하고 베이징[北京]을 수도로 정하였다. 중공정부는 타이완의 국민정부를 인정하는 국가와는 일체의 외교관계를 체결하지 않겠다고 선언하였다. 1950년 이후 국제연합 총회 및 국제조직·기관들은 타이완·베이징 중에서 어느 쪽을 중국의 합법적 정권으로 인정하느냐 하는 문제로 논란이 거듭되었는데 1971년 국제연합 총회에서 중공이 승인되었다.


모택동[마오쩌둥] : 1911년 10월 신해혁명이 일어나자 혁명군에 입대하였다가 1912년 제대한 뒤 제1중학에 입학하였으며, 다시 제1사범학교에 입학하였다. 대학이나 외국유학을 하지 못한 그는 이 학교에서, 영국에 유학하고 돌아와 중국의 봉건사상 비판에 힘썼던 교사 양창지[楊昌濟]로부터 많은 영향을 받았다. 재학 중인 1917년, 거의가 제1사범학교 학생들로 구성되고 후난성 혁명 지식인들의 본영이 된 신민학회(新民學會)를 조직하였다. 1918년 학교를 졸업한 뒤 베이징[北京]으로 가서 후난 청년들의 외국유학을 도왔다. 그해 10월 마오쩌둥은 소년중국학회에 가입하였고, 양창지의 소개로 베이징대학 도서관 주임인 리다자오[李大釗]의 조교로 일하면서 방청하였으며 철학회와 신문학연구회(新文學硏究會)의 활동에 적극 참여하였다. 또 양창지에게 유물론적 철학과 윤리학 강의를 받았고 비밀학생단체들과 접촉하면서 무정부주의에 관한 책을 많이 읽어 그의 사상은 마르크스주의로 기울게 되었다. 1919년 5·4운동 발발 후 후난학생연합회를 설립하고 《샹장평론[湘江評論]》을 펴냈으나 곧 폐쇄당하고 베이징으로 도망쳤으며, 러시아혁명에 관한 책을 많이 읽었다. 1920년 상하이[上海]에서 천두슈[陳獨秀]를 만났으며 다시 창사로 돌아와 1924년까지 창사 제1사범학교의 부속소학교 교장 겸 사범부의 어문(語文) 교사가 되었다. 1922년 양창지의 딸 양룬후이[楊閏慧]와 결혼하였고, 그해 7월 상하이의 중국공산당 창립대회에 참가하였으며, 후난성 대표로서 중국공산당 제1차 전국대표대회에 출석하였다. 1924년 국공합작(國共合作)이 되자 공산당 중앙위원, 국민당 제1기 후보, 중앙집행위원, 선전부장 대리, 중앙농민운동 강습소장, 정치주보 사장 등을 겸임하였다. 1926년 장제스[蔣介石]의 숙청으로 상하이에 갔다가 1927년 우한[武漢]으로 가서 중국공산당 중앙농민부장이 되었고 국공분열(國共分裂) 뒤 농홍군(農紅軍) 3,000명을 조직하여 징강산[井岡山]에 들어가 근거지로 삼고 주더[朱德]의 군대와 합류하였다. 이듬해 공농홍군(工農紅軍) 정치위원이 되었고, 1930년 홍군 제1방면군 군사위원, 중국 공농혁명위원회 주석에 올랐다. 1931년 장시성[江西省] 루이진[瑞金]의 중화 소비에트정부 중앙집행위원회 주석이 되었고, 그 인민위원회 주석으로 뽑혔다. 1934년 10월 루이진에서 산시성[陜西省] 옌안[延安]까지의 1만 2,500km에 이르는 대서천(大西遷)을 시작하였으며, 도중에 구이저우성[貴州省] 쭌이[遵義]회의에서 당 지도권을 장악하였다. 시안사건[西安事件]을 거쳐 국공합작에 성공하자 항일(抗日)민족통일전선을 수립하고, 홍군을 국민혁명 제8로군으로 개편하여 일본군에 대항하였다. 그리고 《지구전론(持久戰論)》(1938) 《신단계론(新段階論)》(1938) 《신민주주의론》(1940)을 발표하였는데, 마지막 것은 중국공산당 강령으로 채택되었다. 1945년 4월 중앙 제7차 전국대표대회에서 정치보고로 연합정부론을 발표하였고, 중앙위원회 주석이 되었다. 전쟁이 끝난 뒤인 1945년 8월 충칭[重慶]에서 장제스와 회담하여 화평건국의 제원칙에 합의하였으나 실행이 불가능하게 되자, 1946~1948년 내전을 벌여 승리하였고, 1949년 10월 1일 중화인민공화국 정부를 베이징에 세우고 국가주석 및 혁명군사위원회 주석으로 뽑혔다. 1949년 12월 소련을 방문하여 1950년 2월 중소우호동맹호조조약과 기타 협정을 맺었다. 1957년 반우파(反右派) 투쟁과정에서 《인민 내부의 모순을 바로잡는 문제에 대하여》를 발표하였고, 1958년 제2차 5개년계획의 개시와 더불어 ‘총노선’ ‘대약진’ ‘인민공사’ 등 이른바 3면홍기(三面紅旗)운동을 폈다. 1959년 4월 국가주석을 사임하고 죽을 때까지 당주석으로만 있었다. 1964년 4월 《마오쩌둥어록[毛澤東語錄]》을 간행시켰고, 1965년 10월 이후에는 당내에서 완전 고립되어 연금상태에 있었으나 문화대혁명을 지휘하였으며, 1960년 이후의 중소논쟁과 문화대혁명 기간을 통하여 ‘마오쩌둥사상’을 높이 내걸었다. 1968년 10월, 1959년부터 국가주석으로 있던 류샤오치[劉少奇]를 실각시켰다. 1969년 마오쩌둥-린뱌오[林彪]체제가 확립되는 듯하였으나, 1971년 9월 린뱌오는 반(反)마오쩌둥운동에 실패하여 죽었다. 1970년 헌법수정초안을 채택하여 1인체제를 확립하고 중국 최고지도자로 군림하였다. 그러나 그가 사망하기 직전인 1976년 4월 대중반란이라고도 할 천안문사건(天安門事件)이 일어나 위대한 영웅 ·독재자 마오쩌둥은 완전히 고립된 채 죽음을 맞이하였다. 그의 전생애를 살펴볼 때, 중국의 독립과 주권을 회복하고, 중국을 통일하여 외세에 의해 국토를 유린당한 중국민들의 굴욕감을 씻어주며, 관료제도를 견제하고 대중의 정치참여를 유지하여, 중국의 자립을 강조한 그의 목표는 칭송할 만한 것이었으나, 2가지 개혁정책인 대약진운동과 문화대혁명은 잘못된 것이었다.


진독수[천두슈] : 부유한 집안에서 태어나 일본 및 프랑스에 유학하고, 1916년 상하이[上海]에서 《신청년》 잡지를 발간, 문학혁명을 주창하여 ‘5·4운동’의 사상적 근거를 마련하였다. 1917년 베이징[北京]대학 문과대학장으로 후스[胡適]와 함께 백화문(白話文)을 제창하는 한편, 《신청년》을 통하여 유교사상을 비판하는 글을 발표하였다. 1921년 7월 코민테른(제3인터내셔널)에서 파견한 마린의 지도하에 중국공산당 제1차 전국대표대회를 개최, 중국공산당의 창당을 선포하고 중앙서기(中央書記)에 피선되었다. 1922년 당 제2차 전국대표대회에서 중국국민당과의 연합전선 수립과 코민테른 가입 등을 결의하고, 당 기관지 《향도주보(嚮導週報)》를 발간하였다. 그 해 11~12월 모스크바에서 열린 제4차 코민테른대회에 참석한 후 중국국민당과 합작하라는 코민테른의 지시를 마지못해 따랐다. 1925년 중국국민당 내부에 분열이 생기자 국민당에서 집단탈당하려고 하였으나 코민테른에 의하여 거부되었고, 당 제5차 전국대표대회까지 당 중앙총서기직을 연임하였다. 1927년 국공합작이 깨지자 코민테른은 합작실패의 책임을 물어 그를 총서기직에서 축출하였다. 1929년 당적을 박탈당하자 ‘전당 동지에게 고하는 글[告全黨同志書]’을 발표, 코민테른의 중국혁명 지도상에서의 오류와 당시 당 중앙의 오류를 규탄하여 트로츠키파(派)로 지탄받았다. 1933년 상하이에서 당 조직을 획책하다가 체포 ·구금되어 1939년 출옥하였다. 만년에는 사상적인 전환을 가져와 영 ·미식 민주주의를 찬성하고 공산주의를 반대하였다. 1942년 병사하였다.


향충발[샹중파] : 5·4운동의 영향으로 노동운동에 참가하였고, 뒤에 한예핑[漢冶萍] 청(淸)나라말기 중국 최대의 제철회사의 노동조합 간부가 되었다. 1921년 중국공산당이 결성되자 이에 가입하고 주로 후베이 ·후난성[湖南省]에서 당과 노동조합 조직에 종사하였다. 1925년 소련에 유학하고 1927년 귀국 후에는 후베이성 전성(全省)노동조합 주석이 되고, 1928년 중국공산당 제6차 대회에서는 취추보[瞿秋白]의 뒤를 이어 당의 서기장으로 선출되었다.

국민혁명 [國民革命] (북벌) : 1924~1928년에 걸쳐 중국국민당에 의하여 전개된 민족통일운동. 1920년대에 들어와서 쑨원[孫文]이 이끄는 중국국민당은 삼민주의(민족주의 ·민권주의 ·민생주의)에 반제국주의 ·반봉건군벌의 내용을 확실히 담고, 연소(聯蘇) ·용공(容共) ·노농원조(勞農援助) 등의 3대 정책을 함께 표방하여 1924년 제일차 국공합작을 성립시켰다. 이후 중국에서는 민족통일운동이 활발하게 전개되었다. 1925년 3월 쑨원이 죽은 후에도 민족통일운동은 계속 추진되어, 5월의 5 ·30운동, 12월의 동정(東征), 즉 장제스[蔣介石]의 광둥성[廣東省] 통일을 거쳐 1926년 7월 장제스를 총사령관으로 하고, 중국공산당의 적극적 지원과 협력을 얻어 북방군벌의 타도를 위한 북벌전쟁을 개시, 국민혁명군을 북진시켰다. 민중의 전폭적인 지지를 받고 북벌군은 연내에 후난[湖南] ·후베이[湖北] ·푸젠[福建] ·저장[浙江] ·장시[江西] ·안후이[安徽]의 6성을 석권하고, 우페이푸[吳佩孚] ·쑨추안팡[孫傳芳] 등의 군벌을 격파하여 북방의 군벌 장쭤린[張作霖]과 대치하였다. 그러나 1926년 3월 장제스에 의하여 공산당원이었던 중산함장(中山艦長) 이지룡(李之龍)을 비롯한 국민혁명군 내의 공산당원 60여 명이 체포된 중산함사건으로 국민정부 내부의 좌우 대립은 심각한 단계에 이르렀다. 1927년 3월 상하이[上海]의 노동자들이 무장봉기하여 장제스의 북벌군을 맞아들였지만, 노동자들의 세력이 커지는 것을 두려워한 금융매판자본, 즉 저장재벌은 장제스에게 중국공산당과 관계를 끊을 것을 강권하고, 또한 제국주의 열강도 장제스에게 공산세력을 물리치고 혁명운동을 반대하도록 강요하였다. 이러한 가운데 1927년 4월 12일 상하이 ·난징 등지에서 중국공산당 탄압을 위한 쿠데타가 일어나, 제1차 국공합작은 분열하였다. 그 후 장제스의 중국국민당이 중심이 되어 1928년 7월 북벌을 완성함으로써 중국 통일에 성공하였다. 그러나 이 단계의 과업이 외부와 군벌의 제휴와 타협으로 이루어졌으므로, 국민혁명의 앞날에 많은 문제를 남기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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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주의란 무엇인가> 존 몰리뉴


# "하지만 인간 본성은 바뀌지 않는 법…"


인간의 본성은 정해져있지 않다. 자본주의 사회가 자본주의적 본성을 만들어내는 것 뿐이다.

오늘의 결과가 본성에 따라 정해져있다는 것은, 지배를 정당화시키려는 지배계급의 거짓 기만일 뿐이다.

때로, 우리가 너무나 자연스럽게 받아들이는 상식도 다른 사회적 조건에서는 그렇지 않은 경우가 있다. 인간의 사회적 동물이다. 사회가 변화하면 인간도 변화하기 마련이다.


# 경영인은 꼭 있어야 하나?


직접 생산에 종사하는 노동자들이 공정을 더 잘 이해할 수 있다.

관리자들이 행하는 노무관리는, 봉건시대의 결투와 마찬가지로, 새로운 사회와 함께 사라질 것이다.


# 혁명은 폭력을 뜻하는가?


자본주의가 가하는 폭력이 더 큰 폭력이다. 우리는 이 폭력을 종식시키기 위한 폭력을 기꺼이 옹호한다.

자본주의의 폭력이 소수의 다수에 대한 폭력이라면, 혁명에서의 폭력은 다수의 소수에 대한 폭력이다. 실제, 러시아 10월혁명도 다수의 동의 하에 이루어졌기 때문에 큰 물리적 충돌 없이 일어날 수 있었다.


# "사회주의는 사람들을 다 똑같이 만들어 버릴 거야…"


자본주의의 개성이란 가진 자들의 개성일 뿐이다. 착취받는 이들은 획일적인 노동과 여가에 좌우된다.

노동에의 속박으로부터 벗어남으로 인해서, 자신의 능력과 여가를 대폭 확대할 수 있을 것이다.


# 우리는 왜 월요일을 싫어할까?


소외된 노동


# 착취란 무엇인가?


자본주의 사회에서 노동자들의 노동은 하나의 상품으로서 취급된다. 노동력을 재상산하는데 드는 비용이 바로 ‘노동력’ 이라는 상품의 가격인 임금이다. 하지만, 노동이란 여타의 재화와는 다른 창조적인 성격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단지 재생산에 따르는 비용만을 지급하는 것 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노동자들은 임금으로 지급받는 것 이상으로 노동력을 제공하고 있으며, 지급받지 못하는 부분이 바로 자본가들의 이윤이 된다.


# '자본'이란 무엇인가?


자본이란 그저 사물 이상의 의미를 가진다. 그것은 일종의 사회관계를 나타내는 것이다.

자본은 (1) 임금노동과 (2) 경쟁체제 이 두가지를 바탕으로 할 때에만 성립한다.


# 자본주의는 어떻게 경제 불황을 낳는가?


(1) 호황과 불황의 주기적인 반복 (2) 이윤율의 감소경향 : 이윤은 임금노동으로부터 발생하는데, 자본가들은 생산을 효율화하기 위해서 임금노동의 비율보다는 기계설비에 더 많은 투자를 하는 경향이 있기 때문에, 이윤율은 계속 감소할 수 밖에 없다.


# 역사는 어디로 가고 있는가?


생산력과 생산관계의 모순


# 사회주의냐 야만이냐?


자본주의의 위기를 사회주의가 대체하지 못하면 파시즘이 대두하게 된다.

파시즘은 (1) 집단적 광기 (2) 국민성 (3) 카리스마적 지도자 에 의해서 출연하는 것이 아니라, 자본주의의 위기로부터 비롯된 쁘띠부르주아지의 도발이다.

실제, 파시즘의 대두시기에는 언제나 자본주의 경제위기와 대중시위가 있었는데, 1919년 이탈리아의 붉은 2년이 무솔리니를, 1928년 독일 혁명의 실패가 히틀러를, 1931년 스페인 혁명의 실패가 프랑코의 집권을 가져왔다.


# 무엇이 사회주의 혁명을 재촉하는가?


호황과 불황시기의 노동자들. 호황의 시기에는 개량적인 조치들로 대대적인 투쟁이 가로막히지만 대체로 자신감을 얻게되고, 불황의 시기에는 투쟁의 객관적 조건이 갖추어진다.


# 노동자 권력이란 무엇인가?


1905년 러시아 소비에트, 1918년 독일 노동자평의회, 1936년 스페인 노동자평의회, 1926년 영국의 행동위원회, 1980년 폴란드 공장연대위원회, 등 노동자 권력의 기반은 대규모적인 투쟁시기 자연스럽게 형성된다. 이들은 직접 민주주의로 절대다수의 이해를 대변한다.

그러나, 이러한 노동자 권력은 기존의 권력과 이중권력의 형태를 띄게되고, 여기서의 승패가 곧 사회주의냐 야만이냐를 가르게 된다.


# "하지만 혁명적 사회주의자들은 한줌밖에 안 되잖아"


관념이 사회를 결정하는 것이 아니라, 사회의 상태가 관념을 만들어낸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대부분의 의식이 자본주의적인 것은 당연한 것이다.

노동자들의 일상적인 투쟁과 사회주의의 의식적인 선전선동이 상호 결합되어야 한다.


# 변증법적 유물론이란 무엇인가?


(1) 변화와 발전의 법칙을 밝히는 철학

(2) 변화의 힘은 내부로부터 나온다 : 계급투쟁의 사상

(3) 양질 전환의 법칙


# 저들의 진리와 우리의 진리


진리는 구체적이다. 모든 것에 적용되는 진리는 존재하지 않는다.

따라서, 노동계급의 독자적 이익을 충실하는 것은, 절대다수의 이익을 방어하는 것과 같다.


# 하지만 중요한 점은 세계를 변화시키는 것이다


이론이 없는 실천은 결코 성공할 수 없고, 실천이 없는 이론도 발전할 수 없다. 이론과 실천은 결합되어야 한다.


# 사회주의가 되면 민주주의는 없어지는 것이 아닐까?


민주주의란 부르주아들이 가장 세련된 착취에 불과하다. 의회 민주주의에 대한 환상을 버려야 한다. 의회 민주주의는 지배계급의 이익을 침해하지 않는 선에서 유지될 뿐이다. 73년 칠레의 경험은 지배계급들이 어떻게 의회 민주주의를 파괴하는지 여실히 보여주고 있다.


# 국가는 아무 편도 아닌가?


공안과 객관성을 떠드는, 경찰, 군대, 법안, 대통령은 두가지 편견, (1) 국가는 사회 전체의 이익을 대변한다 (2) 국가가 없으면 무질서하게 될 것이다.

기존 국가기구를 파괴하지 않고는 노동자 국가를 건설할 수 없다.


# 누구를 위한 법과 질서인가?


지배계급은 전체 국민의 1%에 불과하다.


# 지배계급은 어떻게 지배를 유지하는가?


이들은 초기에 대중매체와 교육제도를 이용하지만, 이것만으로 부족하다고 느낄 경우에는 노조관료와 개량주의 정당을 적극 이용한다.


# 흩어지면 죽는다


소수의 지배계급이 다수를 지배할 수 있는 것은, 다수를 분열시키기 때문이다.


# '인구 과잉'


인구가 과잉해서 빈곤한 것이 아니다. 초국적 기업의 횡포를 정당화하기 위한 이데올로기에 불과하다.


# 종교


아무리 좌익적인 종교일지라도 노동계급의 해방을 이룩하는데에는 장애물이다. 하지만, 종교가 노동자계급 투쟁에 도움이 되는 한 이것을 배타적으로 대해서는 안되며, 비판적으로 지지해야 한다.


# 전쟁


자본주의는 전쟁을 막을 수 없을 것이다. 하지만, 평화주의는 전쟁의 원인을 제대로 짚어내지 못했으며, 이것은 자본주의에서 전쟁을 막을 수 있다는 환상을 유포하며, 실제로도 전쟁을 막을 수 없다.


# 테러


의회주의와 다를바 없는 대리주의적 성격과 체제 자체에서 원인을 찾지 않는다는 점에서 테러주의를 반대하지만, 제국주의의 폭력에 저항하기 위한 테러리즘을 비판적으로 지지해야 한다.


# 계급


계급이란 그저 직업이나 소득분포를 통해서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 사회적 관계에 의해서 결정되는 것이다. 중간계층이 많아지고 있지만, 이들도 결국 노동계급의 일부임에 틀림없다.


# 범죄


자본주의는 끊임없이 범죄를 만들어낸다. 범죄는 지배계급의 통치를 정당화해주는 수단이기 때문에, 지배계급의 지배를 위협하지 않는 범죄는 지배계급에게 환영을 받는다. 범죄를 없애기 위해서는, 범죄와의 전쟁이 아니라 자본주의와의 전쟁을 벌여야 한다.


# 가정


가정이란 지극히 보수적인 제도이다. 사회적 편견을 통한 억압, 여성들에 대한 억압, 투쟁에 나선 노동자들을 발목잡는 역할을 한다. 우리는 가족제도에 반대하지만, 이것을 순간적으로 폐지하는 방식이 아니라 대체해나가는 방식을 선택해야 한다.


# 국익을 지켜야 하지 않는가?


부르주아에게 민족주의가 있다면, 노동자계급에게는 국제주의가 있다.

국제주의의 토대는 자본주의의 다국적기업들이 제공하는 것으로, 공문구가 아니다.


# 이주에 대해서


마르크스주의자들은 인종차별을 반대하며, 모든 이주권을 옹호한다.


# 그렇다면 사회주의자는 민족해방 운동에 반대하는가?


강요된 것이 아닌 자발적인 민족해방운동을 비판적으로 지지한다.


# '무조건적 그러나 비판적' 지지란 무엇인가?


운동과 투쟁은 특정 행동이나 전술이 아닌, 세력관계를 보고 판단해야 한다.


# 러시아에서 어떤 일이 일어났나?


러시아 혁명의 교훈은 혁명은 곧 패배한다는 사실이 아니라, 혁명은 국제적으로 확산되어야 한다는 사실이다.


# 중국은 좀 다른가?


중국에는 노동자 혁명이 없었으며 농촌 게릴라에 의한 도시전복이 일어났을 뿐이다. 이들은 미국 제국주의와 공공연한 동맹을 맺었고, 베트남과 전쟁을 벌였으며, 캄보디아의 살인마 폴 포트 정권을 지지했다. 중국은 폐쇄적인 일국경제를 유지하다가, 국제경제의 압력에 의해 시장을 개방한 것 뿐이다.


# 하지만 세계 동시 혁명은 불가능하지 않은가?


세계에서 동시에 혁명이 일어나기는 불가능하겠지만, 일국의 혁명이 세계 혁명으로 이어지리라는 전망이 가능하다. 왜냐하면, 혁명의 물질적 조건이란 자본주의 경제위기인데, 오늘날의 자본주의는 세계적으로 연결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한 나라에서의 투쟁 승리는 다른 나라의 귀감이 될 것이며, 동시에 지도적인 역할을 수행할 수 있기 때문이다.


# "하지만 이미 대중적 노동자 정당이 있는데…"


노동당은 강령이나 조직력, 정책, 실천, 조직형태에 있어서 전혀 대중적인 정당이 아니다.


# 노동당은 바뀔 수 있는가?


노동당이 바뀌기 보다는, 노동당이 이들을 바꿔왔다.


# 조직은 필요하긴 한 거야?


조직의 필요성에서 마르크스주의와 견해를 달리하는 것이 아나키즘인데, 아나키즘의 부분적 타협이 아나코-생디칼리즘이다. 아나키즘은 마르크스주의와 사회주의적 전망을 같이 하되, 실제적인 방법에 대해서는 분석하지 않고 있다.


# 노동조합은 어떤 구실을 하긴 하는가?


초기 사회주의자들은 쁘띠부르주아 출신이었기 때문에, 노동자들의 대중조직인 노동조합에 대해서 과소평가하면서 이것의 중요성을 간과했다.


# 국유화가 시장보다 낫긴 하잖아?


마르크스주의에서 생산수단의 사적소유 철폐는 부차적인 문제이다. 핵심 이념은 계급의 철폐일 뿐이다. 자본주의에서 국유화를 한들, 그것은 사적 소유와 크게 다를 바가 없다. 우리의 목표는 자본주의에 의한 국유화가 아니라 노동자의 통제가 기능하는 국유화이다.


# 혁명적 지도란 무엇인가?


혁명의 가장 큰 특징은 대중이 직접 역사적 과정에 개입하는 것이다. 하지만, 자생적 운동 만으로는 자본주의를 철폐할 수 없으며, 혁명적인 지도란 자생적 운동과의 결합을 통해서만 기능할 수 있다. 혁명정당은 혁명을 승리로 이끄는 것이지, 혁명을 인위적으로 만드는 것이 아니다.


# 운동은 많아도 전쟁은 하나뿐


마르크스주의는 여러 사회문제의 근본적인 원인을 동일하게 바라본다.


# 왜 혁명정당이 필요한가?


혁명정당이 없다면, 다수 대중들은 기존의 엉터리 지도자를 선택할 것이다.


# 옮긴이 후기


토론을 시작하기 위해서는, 맨바닥에서 시작하는 것이 아니라, 기존의 주장이 존재해야 더욱 수월하게 이루어진다. 이 책은 좋은 토론거리를 제공하는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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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혁명정당 건설의 시기적 구분


(1) [1880~1890] 마르크스주의 학습써클 : 나로드니키운동, 나로드니키운동의 분열, 노동해방단 결성


- 당시의 급진적 젋은이들은 나로디즘과 마르크스주의 사이의 분리선을 명확하게 긋지 못하고 있었다.


- 플레하노프의 저작이 없었다면 아무도 사회민주주의 입장에 도달하지 못했을 것이다.


- 나로드니키는 마르크스의 원시적 자본축적과 영국 산업혁명의 잔학성에 대한 설명, 잉여가치론, 자본주의적 노동 분업과 소외에 대한 비판, 형식적인 부르주아 의회 민주주의에 대한 비판이 러시아에서 모든 노력을 기울여 자본주의 발전을 막아야 함을 입증하는 것이라고 해석했다.

- 나로드니키 운동은 1860년대 테러주의의 양상을 띄다가, 1870년대에는 지식인들의 농촌투신으로 이어졌다. 하지만, 농민들이 사회주의 사상을 받아들이지 않자, 혁명가의 대리주의 양상으로 되돌아갔다.


- 1879년, 대중선동을 중시하는 체르니 페레텔(흑토 재분배당)과 제믈랴 이 볼랴(인민의 의지)로 분리되고, 체르니 페레텔은 노동해방단의 전신이 된다. 플레하노프, 악셀로드, 자술리치, 도이치, 등이 참여

- 이들은 노동현장으로 뛰어들지만, 농촌의 생활과 정서에 가장 직접 속박되어있는 노동자들과 접촉했다.


- 나아가 V.V의 주장과는 반대로, 국내 시장은 자본주의 발전에 선행하는 전제조건이 아니라, 자본주의 발전 그 자체 때문에 창출된다는 점을 입증해 보였다. 부르주아지가 시장을 만들어냈지, 이미 만들어져 있는 시장을 발견한게 아니다.


- 1880년대는 대체로 아주 작은 마르크스주의 선전 써클들이 노동자들 속에서 활동하던 시기였다. 일반으로 이 시기는 암흑의 시대로 기억된다.


- 당시 짜르는 나로드니키를 주된 적으로 보았기 때문에, 그들을 격파하도록 부추기기 위해 1890년대 중반까지 합법 마르크스주의를 허용했다.


- 나로디즘과 결별한 것, 스트루베의 자유주의에 대한 독창적 태도, 그리고 그의 변증법적인 태도, 즉 나로디즘이 혁명적 민주주의 운동인 한 그것에 비판적 지지를 보냈던 것, 이 모든 것은 장차 레닌이 자신의 사상을 발전시키는 과정에서 취했던 근본 태도들이었다.


(2) [1890~] 선전주의에서 노동자 운동으로의 개입시기 : 플레하노프의 <선동론>, 노동계급해방투쟁동맹을 결성, 수정주의 논쟁


- 노동자들은 자신들의 절망적인 사회적 처지를 벗어날 수 있는 길을 교양과 계몽에서 찾았다. 그래서 그들은 학습 써클이 제공해주는 기회를 열심히 이용하려 했다.


- 선전가가 많은 사상을 하나 또는 소수의 사람들에게 전달하는 반면, 선동가는 오직 하나 또는 몇가지 사상을 다수의 사람들에게 전달한다.


- 대다수 대중은 지적 사고가 아니라 객관적인 상황 전개를 통해 투쟁으로 이끌린다.


- 노동자들이 어떠한 폐해에 가장 쉽게 흥분하는지를 이해하고, 선동을 시작하기에 가장 알맞은 시기를 고를 필요가 있으며 해당 시간과 장소에서 어떤 투쟁 박식이 가장 효과가 있는가를 아는 것이 필요하다. 그러한 것들을 알려면, 선동가는 노동 대중과 끊임없이 접촉해야하며, 각각의 공장에서 일어나는 사태 전개의 추이를 항상 관찰해야 한다. 각각의 공장에는 셀 수도 없이 많은 폐해들이 있다. 노동자들은 아주 사소한 세부 문제들에도 관심이 있을 수 있다. 어떤 요구를 정확히 언제 제출해야 하는지 명확히 아는 것, 싸움이 일어날 수 있는 시기를 미리 아는 것, 바로 그것이 선동가의 임무다. 대주의 생활조건을 알고 대중의 정서를 알면, 선동가는 자연스럽게 노동자들의 지도자가 될 것이다.


(3) [1900~] 혁명정당으로서의 정체성 확립시기 : 경제주의 논쟁, 직업적 혁명가 사상, 전투조직 결성과 무장봉기에 대한 태도, 전국신문의 발간과 소그룹의 연합, 노동조합주의에 맞선 투쟁, 멘셰비키와의 분열


- 마르크스주의자들을 전국 정당으로 결속시키면 운동의 분업을 발전시키고 효율성을 높일 수 있을 것이라고 주장했다.


- 투쟁하는 다수의 무지는 소수적 전지전능함의 뒤집어진 반영이었다.


- 약 4~5년 동안 러시아 마르크스주의자들은 노동계급 속에서 공장 차원의 투쟁에 대한 열망을 불러일으키려 했다. 그러나 이제는 대중 가운데 정치적으로 의식화된 부문 속에서 정치 행동을 향한 열망을 불러일으키는 것이 필요했다.


- 전도 유망한 노동자 선동가를 공장에서 하루에 11시간씩 일하도록 방치해서는 안된다. 우리는 당이 그의 생계를 책임지도록 조처해야 한다.

- 공장 생활을 통해 규율이 몸에 밴 노동자들과는 달리, 지식인들은 당을 통해 철의 규율을 익혀야 한다.


- 배포자망은 명백히 우리에게 필요한 종류의 조직 골격을 형성할 것이다.

- 신문의 배포자망이 장차 제정에 맞선느 무장 봉기를 조직하는 토대가 되어야 한다고 설명했다.

-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배포자들로 이루어진 군사 조직이다.


- 운동에 대한 사상 실천 지도와 프롤레타리아의 혁명투쟁과 관련햇는 될 수 있는 대로 가장 강력한 중앙집권화가 필요한 반면, 당 중앙이 운동의 상황을 아는 것과 관련해서, 그리고 당에 대한 책임과 관련해서는 될 수 있는 대로 가장 광범한 분권화가 필요합니다.


- 의회 만능주의가 고개를 쳐들기 위해서는 적어도 준의회라도 필요했다. 1903년 러시아 사회주의 운동에서 개량주의의 깃발을 공공연히치켜든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4) [1905~] 1905년의 자생적 봉기와 반동기 : 1905년 자생적 봉기에 대응하지 못함, 봉기의 전망(노-농 독재)에 대한 태도, 소비에트에 대한 종파적 태도, 당의 개방과 당원의 팽창, 극심한 반동기, 두마선거에 대한 태도, 멘셰비키와의 半통합, 소환파 최후통첩주의와의 투쟁, 완전한 분열.


- 참말이지 거대한 파업 운동이 진행되고 있었고, 어떤 미지의 어마어마한 물결이 일고 있었지만, 볼셰비키 위원회는 이것을 거들떠보지도 않았다. 볼셰비키 위원회는 가퐁 운동에 대해 주바토프 운동일 뿐이라는 평가를 내렸기 때문이다.


- 자유주의자들은 대지주 재산 몰수에 반대했다. 자유주의자들의 정당인 입헌민주당(카데츠)은 왕실과 수도원의 토지를 농민들에게 나누어 주는 것은 지지했지만, 지주 토지의 강제 몰수와 관련해서는 지주들에게 공정한 가격을 지불하는 경우에만 지주 토지의 강제몰수에 동의한다고 밝혔다.

- 혁명이 수백만의 노동자와 농민을 정치 사회 투쟁으로 끌어들이면서 전진함에 따라 자유주의자들의 혁명 열정은 식어 갔다.

- 노동자들의 제정 반대 요구들과, 사용자들의 이익에 어긋나는 노동자들의 생활조건 개선 투쟁을 분리시킬 수 없음이 이내 명백해졌다.


- 페테르부르그 경찰조합의 명칭은 ‘러시아 공장 작업장 노동자회의’ 였다.


- 러시아 혁명의 경험은 깊은 정치위기의 객관적 조건들이 존재하는 경우에 혁명의 진정한 산실과 별로 관계가 없는 듯한 가장 작은 출돌이 대중의 감정을 활활 타오르게 하는 불꽃 역할을 할 수 있음을 의심할 여지없이 입증하고 있다.

- 사회민주주의자들의 영향으로 일련의 정치적 요구들이 포함됐다. : 8시간 노동, 노동자 집회의 자유, 농민에 대한 토지 분배, 언론의 자유, 교회와 국가의 분리, 러일전쟁 조식과 제헌의회 소집.

- 죽은 사람이 1000명을 넘었고, 부상한 사람이 무려 2000명이었다.


- 성장하는 노동조합 운동에 대한 사회민주주의자의 태도를 둘러싸고 레닌은 협소한 종파주의 관점을 갖고 있는 자신의 지지자들과 싸워야 했다.

- 정치투쟁을 지도하기 위해서는 소비에트와 당 둘 다 똑같이 절대로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 노동자 대표 소비에트를 임시혁명정부의 맹아로 여겨야 한다고 생각한다.

- 소비에트는 무장 봉기라는 급박한 행동을 하는 데 아주 중요한 동질성이 없기 때문이다. 소비에트는 봉기에 합법성을 부여하기 위해 필요한 것이다.


- 그는 중앙집권적 당 기구를 물신화하지도 않았고 목적 그 자체로 보지도 않았으며, 노동계급 전위 부문의 행동과 의식과 조직화를 증대시키는 수단으로 보았다.

- 당과 노동계급 대중 사이의 관계를 강화하기 위해 모든 노력을 다해야 한다.

- 저는 우리 위원회에 지식인 두 사람당 노동자 여덟 사람이 있어야 한다고 강력히 주장합니다.

- 조직은 정치에 종속된다. 그는 필요하다고 생각되면 당 기구의 보수주의를 극복하기 위해 대중의 힘에 호소했다.


- 우리는 기술 발전을 활용하고, 노동자 분견대에 폭탄을 대량으로 제조하는 방법을 가르치고, 그들과 우리의 전투부대가 폭탄, 신관, 자동소총으로 무장하는 것을 도와줄 수 있고 도와주어야 한다.

- 사실, 모든 진정한 대중 운동에서 군대의 동요는 반드시 필요하다. 군대가 동요하면 혁명투쟁이 첨예해질 대마다 군대를 획득하기 위한 투쟁이 벌어지기 때문이다. 봉기 시기에 군대를 획득하기 위한 물리적 투쟁도 있어야 한다는 것을 잊는다면, 우리는 비참한 공론가라고 판명날 것이다.

- 혁명의 정치적 측면에서 혁명의 기술적 측면을 분리하는 것은 순전히 헛 짓거리다.


- 러시아 혁명의 전망에 관한 레닌의 입장에는, 혁명의 과제는 부르주아의 과제인 데 반해 혁명의 지도력은 프롤레타리아가 장악해야 한다는 모순이 있었다. 첫째 요소는 볼셰비즘과 멘셰비즘 사이에 차이가 없는 것이지만, 둘째 요소는 근본으로 차이가 있는 것이다.


- 토지 국유화는 부르주아 혁명의 마지막 결론일 뿐 아니라 사회주의로 가는 조치이기도 하다.


- 경기 회복만이 프롤레타리아의 대열을 정비하게 하고, 프롤레타리아의 혈관에 신선한 피를 공급하고, 플롤레타리아의 자신감을 회복시키고, 프롤레타리아가 더욱 거센 투쟁을 할 수 있게 된다.


- 볼셰비키는 혁명을 떠들어 대기 좋아하는 자들, 그러니까 후퇴해야 한다는 것과 후퇴하는 법을 알아야 함을 이해하려 들지 않는 자들을 가차없이 폭로하고 당에서 쫓아냈기 때문에 일서정연하게 후퇴할 수 있었다.


- 우리가 두마를 보이코트했다는 사실이 반드시 우리가 두마에서 우리 당의 그룹을 만들어서는 안 된다는 것을 뜻하는가? 그렇게 생각하는 보이코트 지지자들은 실수하는 것이다. 정말 그렇다. 우리는 노력을 했는데도 두마가 소집됐기 때문에 우리는 두마를 활용한다는 임무를 회피할 수 없다.


- 저주받을 반혁명이 우리를 이런 지긋지긋한 돼지우리로 몰아넣었기 때문에, 우리는 푸념도 늘어놓지 말고 큰소리 탕탕 치지도 말고 혁명을 위해서 돼재우리에서 활동해야 할 것이다.


- 강령이 없으면 당은 시대가 어떤 방향으로 바뀌든지 자신의 노선을 일관되게 추구할 수 있는 통합된 정치 유기체일 수 없다.


- 우리 사회민주주의자들은 짜르와 그의 사냥개들한테 들키지 않으려고 비밀 활동에 의존하는 한편, 사람들이 우리 당과 당에 존재하는 다양한 견해 그리고 당의 강령과 정책에 관해 남김없이 알게 하고, 당대회에 참여한 이런저런 대표가 대회에서 말한 것 조차 알게 하려고 애쓴다.


- 레닌은 멘셰비키 노동자들의 중도주의와 지도자들 다수의 치유할 수 없는 직업적 중도주의를 구별했다.


- 혁명가들이 노동계급 내에서 전혀 실질적인 지지를 받지 못하고 고립돼 있을 때가 바로 과도좌익주의가 무르익을 조건이 된다.


- 자금징발 문제


(5) [1914~] 대중정당으로의 도약


# 레닌으로부터


- 출판자료들을 분석하는데 게으르지 않았다.

- 레닌은 대중과 긴밀히 접촉하는 것, 대중과 친해지는 것, 대중의 열망을 표현하는 것에만 관심이 있었다.

- 항상 그는 그때그때의 과제를 아주 명확하게 밝히고 난 뒤, 오로지 한가지 목적에만 몰두한 채 가장 명백하고도 가장 맹렬하게 집중타를 퍼부어 대면서 필요한 것을 거듭 강조했다. (만약 어떠한 전술 조직문제에 관해 레닌을 인용하고자 한다면, 당시 운동이 직면하고 있던 구체적인 문제를 극도로 명확히 밝히지 않으면 안된다.)

- 그는 조직이란 정치에 종속되어야 한다고 확신했다.

- 그는 <불꽃>의 편집국 회의에서 플레하노프의 관료적 태도에 부딪친 후 감정적인 면을 훈련하는 법을 배웠다.

- 레닌의 생활방식은 규율과 꼼꼼함과 묵묵한 자기 절제의 표본이었다.

- 하루 24시간 내내 혁명에 흥미를 느끼고, 혁명에 대해서만 생각하고, 잠잘 때조차 혁명에 관한 꿈만 꾸는 인간은 그 사람뿐이기 때문이지요.

- 일리치의 특징들 가운데 하나는 그가 원칙에 관한 논쟁과 개인적 싸움을 구별할 수 있고 대의의 이익을 모든 것보다 앞세울 수 있는 능력이 있다는 점이었다. 반대파가 그를 공격할 때면, 일리치는 흥분해서 반격에 나섰고 자기 관점을 강하게 주장했다. 그러나 새로운 과제들이 떠오르고 반대파와 협력할 수 있을 때는, 어제의 반대파에게 동지로서 다가갈 수 있었다.

- 혁명가는 객관적 사실들이 의심의 여지를 남겨 놓지 않기 전까지는 혁명의 패배를 인정할 수 없다. 혁명가들은 전장을 결코 떠나지 않는다.

- 그는 자신의 연구가 결국 정치에서 어떻게 쓰이는지를 알려고 언제나 애썼다. 그러나 실제로 연구에 몰두하는 동안에는 그는 망설이지 않고 한 번에 몇 달식 실천 정치와 거리를 두고 대여악물관이나 프랑스 국립도서관에 파묻혀 지냈다.

- 가장 중요한 시기에 그는 부차적인 요소들을 모두 제쳐두고 가장 중요한 요소를 파악할 수 있었다.


# 전략과 전술에 대해서


- 1905년 혁명이 일어나자 레닌은 서둘러서 칼 폰 클라우제비츠의 군사 저술들을 연구했다.

- 전술 개념은 계급투쟁에서 하나의 과제나 하나의 부문에 해당하는 조치들에 적용된다.

- 복잡한 상황에서는 언제나 살아 있는 현실이 어떤 이론적 개념이나 진단보다 더 풍부한 법이다.

- 자신의 정체성을 잃지 않고 새로운 상황에 적용하려면 이론과 실천의 통일이 필요하다.

- 하나의 전략 계획이나 전술의 올바름을 확인하는 유일한 방법은 실천을 통한 검증, 즉 현실의 계급투쟁 발전 경험에 비추어 그것을 확인하는 것이다.

- 전쟁에서는, 그리고 혁명 시기의 계급 전쟁에서는 적의 진영뿐 아니라 아군 진영에도 미지수들이 너무 많기 때문에 냉철한 분석을 대체로 직관, 즉 적극적이고 창조적인 상상력에 기초하는 대담한 임기응변과 결합시켜야 한다.

- 가장 중요한 시기에 혁명지도부의 기예 가운데 10분의 9는 대중의 감정을 포착하는 법을 아는 것이다.

- 혁명의 삶에서는 정확하게 때를 맞추는 문제가 중요하다.

- 가장 불리한 가정에 기초한 과감한 계획을 세우는 것은 레닌의 특징이었다.

- 머뭇거림은 혁명 시기에 나타날 수 있는 최악의 조건이다.

- 전쟁에 대한 추상 개념과 현실의 구체적 전쟁 사이에는 근본 차이가 있다고 주장한다. 우연이 커다란 역할을 한다. 심리적 요인들은 사람들이 내리는 결저에 중요한 영향을 미치는 결정 요인들이다. 마찰을 고려함으로써만 실제 전쟁과 추상적 전쟁의 관계를, 경험과 이론의 관계를 알 수 있다.

- 전술은 전략에 종속돼야 한다. 그러나 성공을 거둔 일련의 전술 조치들은 전략의 변화를 야기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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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문

 

이런 투쟁들이 개인에게든 집단에게든 거듭거듭 제기한 문제는, 체제에 대항하는 거대하고 고무적인 반란을 진정한 승리로 이끌 수 있는 방법이 무엇인가 하는 것이었다.


당시(1970년대)에는 혁명정당을 지향하고 혁명정당을 자처한 세력들이 흔했다. 오히려 이론과 실천의 핵심 문제는 당과 노동계급의 관계는 무엇인가 하는 문제였다.


1973년 9월 칠레에서의 패배, 1974년~1975년 프로투갈 혁명의 중단, 미국 중간 계급 흑인 지도부의 주류 사회 편입, 이탈리아 스페인 영국 노동운동 지도자들이 각각 자국 정부와 체결한 역사적 타협, 몬클로아 협약, 사회협약은 세계 경제침체나 대량실업의 시작과 결합돼 새로운 시기를 알리는 전환점이자 요인들이었음을 확인할 수 있다.


1960년대에 급진화한 많은 사람들이 이제는 포스트-구조주의, 포스트 모더니즘, 기타 형태의 이론적 순응을 통해 자본주의 체제와 화해했다.


1990년대의 투쟁들은, (중략), 남아공에서 아파르트헤이트가 종식됐으며, 아프리카 대륙ㅈ 역에서 노동자들이 부패한 독재 정권들에 대항하는 전투에 참가해 많은 경우 승리했다. 라틴 아메리카에서는 칠레의 독재정권이 끝내 무너졌고, 멕시코의 사파티스타가 반란을 일으켰으며, 브라질 좌파는 노동자당의 형태로 장족의 진보를 이룩했다. 1995년에 프랑스 노동자들은 쥐페의 복지감축 계획에 맞서 대규모 반란을 일으켰다. 아시아에서는 한국 노동자들이 전투적이고 고무적인 투쟁들을 여러차례 벌였으며, 인도네시아의 대중 반란은 수하르토 독재 정권을 타도했다.


근본 문제는 기존 상황에 대한 노동대중의 분노와 사회주의적 미래에 대한 확신 사이에 여전히 커다란 격차가 있었다는 점이다.


개량이냐 혁명이냐 하는 오래된 문제는 반자본주의 운동과 반전 운동 안에서 벌어지는 논쟁들을 통해 다시 등장했다. 이런 논쟁들 중 가장 중요한 것 하나가 조직 형태와 정당의 구실에 관한 것이다. 피렌페 유럽사회포럼에서는 이 주제로 열린 포럼에 수천명이 참가했다.


반자본주의 운동 안에서는 영향력 있는 많은 사람들, 예컨대 나오미 클라인, 마이클 하트, 더 오른쪽에는 금융거래과세시민연합의 베르나르 카상 같은 사람들이 정당에 거의 반대하는 태도를 취하고 있다.


대중투쟁과 심지어 대중혁명조차도 자생적으로 또는 비공식적 지역 네트워크들을 통해 분출할 수는 있지만, 그런 형태로는 자본주의를 정말로 패배시킬 수 없다. 이런 과제를 위해서는 혁명적 노동자 정당이라는 지도부가 필수적이다.

 

- 마르크스



마르크스

 

 

기본적인 원칙들을 정립 : 유물론에 대한 강조, 투쟁에서 배우는 것에 대한 강조, 당은 계급적 기초를 바탕으로 한다. 당은 소수의 음모적 집단이 아니다.(음모가적인 자코뱅 전통, 쁘띠부르주아적 공상적 사회주의의 배격)

 

경험으로부터 당의 독자성 사상 구축 : 부르주아 운동이나 정당들에 뒤섞여 있어서는 안된다.

 

독일 사회민주주의당에 개입하면서, 기회주의와의 싸움을 강조

1인터는 여러 경향들의 자유로운 연합체(각 지부는 각자의 이론적 강령들을 수립할 수 있었다.)였지만, 마르크스는 유연한 방식으로 대처. 바쿠닌이 이를 이용하여 ‘권위주의‘에 반대하는 비주류파를 결집.

 

경제결정론과 낙관적 진화론 : 노동자 계급의 정치적 개량주의가 때가 되면 간단히 혁명적 행동으로 변하는 것이 아니라 반대로 혁명의 주요한 장애물이 된다.

 

전위당의 필요성 깨닫지 못함

 

당과 대중의 관계에 대해서 선명하게 정리하지 않았으며, 즉 압도 다수의 프롤레타리아를 포용할 때까지 더 많은 프롤레타리아를 조직하면서 끊임없이 순조롭게 팽창하는 광범한 당이라는 개념.


마르크스의 한계는 시대적 한계를 반영한다. 그의 당 이론은 당의 형태가 존재하지 않을 때 성립.


- 레닌과 공산주의 인터내셔널


레닌

경제결정론과 결별

 

전위당 개념의 성립

 

개인적 테러리즘에 대한 반대

 

소비에트에서 다수파가 될 때 까지는 권력장악을 반대

 

직업혁명가 개념 정립

 

자생성-의식성 테제 : 의식적 요소를 돕고자생성을 극복하기 위해 일하는 것이 혁명가의 의무이다. 경제주의자들의 추수주의에 반대해 지도력을 주장하고 있다.

외부로부터의 사회주의

 

사회민주주의와의 연계

공산주의

인터내셔널

엘리트적인 분위기 극복

 

당을 재조직 : 노동자 구성원 확충, 젊은층, 민주집중제

 

당의 개방적 팽창 : 명백히 사회민주주의적이 아닌 것을 제외하고는 모든 서클이 당에 직접 가입하도록 하거나 당과 제휴하도록 하라.

 

후퇴기의 투쟁 : 당의 후퇴에 대해서, 비합활동에 대해서, 기회주의와의 투쟁에 대해서(청산파, 소환파, 화해주의에 맞선 투쟁)

 

사회민주주의와의 단절

 

기회주의에 대한 정식화(<제국주의론>)

 

노동자국가(<국가와 혁명>) : 합법 비합법 기수의 수립, 전투 분대 조직, 군대 내 당 그룹 건설

 

인터내셔널 : 엄격하게 집중됨. 단일한 공산당의 지부로 명명, 4차 대회 이전까지는 각국에서 사회민주주의 유형에 따라 활동하는 지부들을 재조직하기 위해 ‘공산당의 조직과 구성’에 관한 테제를 채택함.

 


볼셰비즘의 이미지는 레닌에 의해서 ‘발명‘된 것이 아니다.

 

역사는 노동자들이 자생적으로 노동조합주의와 노동조합주의적 정치 활동보다 훨씬 높은 곳까지 이른 수많은 사례를 보여준다. 영국의 차티스트 운동, 프랑스의 1848년 혁명, 파리코뮌, 1905년과 1917년 2월의 러시아 노동자들, 1956년 헝가리 혁명, 등이 그것이다.

 

실제로 레닌은 이때까지는(1904년) 자신이 정통 사회민주주의의 기본 노선에서 벗어났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그는 멘셰비키를 베른슈타인파의 수정주의와 동일시하고, 자신은 독일사민당의 주류인 베벨 카우츠키 노선과 동일하다고 생각했다. 1903~1904년 당시 레닌의 당 이론과 1919년 공산주의 인터내셔널 창립 당시의 그것과는 엄청난 차이가 있다.

 

[레닌] 살아서 성장하는 당이라면 모두 그 안에는 언제나 불안과 동요와 혼란의 요소가 있기 마련임을 잊지 말라.

 

[레닌] 이론은 회색이요, 푸른 것은 저 영원한 생명의 나무다.

 

[레닌] 우리에게 진부한 것이라고 해서 계급, 대중에게도 진부한 것이라고 간주해서는 안된다.


<무엇을 할 것인가> : 경제주의와의 투쟁, 직업혁명가 사상, 전러시아 신문에 기초한 전국적 혁명조직에 관한 주장

<일보전진 이보후퇴> : 대중추수주의에 대한 비판

<유럽 전쟁에서 혁명적 사회민주주의자의 임무> : 국제 사회민주주의 지도자들을 사회주의의 배신자로 비난하고 인터내셔널은 이데올로기적 정치적으로 파산했다고 기술.

<공산주의 좌익 소아병> : 혁명정당의 필요성을 인정하면서 타협, 책략, 그리고 부르주아 의회나 반동적 노동조합에 참가하기를 완전히 부정하는, 순수한 정책을 추구하기를 바라던 사람들의 주장이었다. 독일공산주의노동자당, 이탈리아의 보르디가, 네덜란드의 호르터와 판네쾨크, 영국의 갤러허와 팽크허스트 등의 노선

 

- 로자


로자

혁명정당의 필요성과 권위, 지도의 필요성에 공감하였으나, 대중의 자발성에 초점을 맞추어 서술

1918년 독일혁명을 지도하지 못함

 

당의 전위성에 대해서, 기회주의와의 투쟁에 대해서 과소평가 : 그는 선진적 혁명적 노동자들을 따로 독자적으로 조직해 노동자 계급 전체에 대한 그들의 영향력을 증대시키고 그들로 하여금 계급에 대한 기회주의와 개량주의의 영향력에 대항해 투쟁하도록 무장시킬 필요성을 간파하지 못했다.


 

로자와 레닌의 차이점은 활동배경을 염두해두어야 한다. 독일은 이미 대중정당이 건설되어 있는 상황이었으며, 관료제가 확실히 자리잡고 있었다는 점을 고려할 때, 독일 노동운동이 결여하고 있던 것은 바로 자발성과 투쟁이었다.

 

사실상 총파업은 그것의 규모, 강력함, 그리고 전투성이 어떠하든 간에 단지 권력의 문제를 제기할 뿐이지 그것을 해결하지도 해결할 수도 없다. 봉기를 통한 낡은 국가권력의 타파만이 그것을 이룰 수 있다. 그리고 봉기는 그 본질상 조직돼야만 하는 것이다. 미리 봉기를 비밀리에 준비하고, 일정한 날짜를 잡고, 프롤레타리아의 결정적 부문들이 동시에 통일되게 행동해야만 한다. 따라서, 그것을 실행하려면 계급 전체에 영향을 미치고 권위를 갖고 있는 잘 조직된 명령 체계가 있어야만 한다. 다시 말해서 무장봉기는 오직 당만이 성공적으로 조직할 수 있으며 그 당은 단지 어떤 종류의 당이든 상관없는 것이 아니라 한결같이 움직일 수 있는, 엄격한 규율을 갖춘 전투정당이어야만 한다.


- 트로츠키


트로츠키

당내 민주주의의 사수 : 비판의 자유, 당의 계급적 구성, 분파의 자유, 일국 사회주의론 비판, 일당 독재 반대

당의 발전속도를 관념적으로 설정


당은 처음에 소비에트 테두리 내에서 정치투쟁의 자유를 계속 유지하기를 원하고 희망했다. 그런데 내전 때문에 차질이 생겼다. 반대 정당은 모두 금지됐던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명백히 소비에트 민주주의의 정신에 위배하는 조치이므로, 볼셰비키 지도자들을 이 조치가 원칙에 입각한 것이라고는 결코 생각하지 않았고 다만 방위를 위한 일시적인 고육지책을 뿐이라고 생각했다.


대단히 어려운 상황에 처해 있었기 때문에, 트로츠키의 운동은 세 가지 특징을 지니게 되었다. 첫째, 그것은 대단히 작은 규모였고, 둘째로 사회 구성 면에서는 쁘띠부르주아가 압도적으로 많았다. 셋째, 적어도 그 간부들을 보면 일종의 망명 조직이었다.


전쟁 준비 덕분에 자본주의는 침체의 늪에서 벗어나기 시작했으며, 트로츠키가 자본주의 체제의 마지막 위기를 기대했음에도 전쟁이 끝나자 자본주의 체제는 오히려 가장 지속적이고 장대한 호황을 누리게 된다.


이후 트로츠키주의자들의 그릇된 행보는 (1) 극도로 교조적인 자파 중심주의 (2) 쁘띠부르주아적 기회주의로 귀결했다.

 

- 그람시


그람시

숙명론, 예견, 경제결정론에 대한 비판

 

순수한 자생성에 대한 부정

 

러시아와는 다른 서구 사회의 시민사회적 특성의 발견 : 진지전, 헤게모니의 집중, 동맹, 교육, 유기적 지식인의 중요성 강조

 

파괴적 측면보다 창조적 측면을 강조 : 혁명에서 국가기구의 접수 뿐만 아니라 생산력의 해방이 이루어져야 한다

실천적 지도경험 없음


[그람시] 우리는 실제로 우리가 활동하는 범위까지만, 그리고 임의의 노력을 가하는 데까지만 예견할 수 있다. 따라서, 우리는 예견된 결과를 구체적으로 창출해 내는 데 기여할 뿐이다.


그람시는 노동 운동 내에서 경제주의 도는 생디칼리즘이라는 조류를 마르크스주의에서 나온 것이라기 보다는 자유방임적 자유주의에서 나온 것으로 봤다. 그 반면 마르스크주의는 정치를 통해 경제적 힘을 인간의 의지에 종속시키려고 하는 사상이라는 것이다.


[그람시] 혁명은 그것이 이제까지 자본가 계급이 지배해 왔던 사회에서 발전하고 있었던 힘, 즉 프롤레타리아 공산주의 생산력을 해방시켜야만 프롤레타리아 혁명 공산주의 혁명이 된다.


[그람시] 집단 의지가 구체적인 형태를 띠기 시작하는 유기적인 조직체, 사회의 한복합적인 요소일 수 밖에 없다. 그것이 바로 정당이다.


[그람시] 러시아에서는 국가가 전부였으며 시민사회는 원시적이고도 유동적인 것이었다. 그러나 서구에서는 국가와 시민사회 사이에 적절한 관계가 존재했으며 그래서 국가가 위기에 처했을 때 시민사회의 강력한 구조가 즉시 드러났다.


[그람시] 순수한 자생성이라는 것은 역사에 존재하지 않는다는 점부터 강조해야 한다. 순수한 자생성이란 곧 순수한 기계적 자동성과 같다고 할 수 있다.


[그람시] 관료화의 위험은 물론 경계해야 한다. 그렇지만, 연속성이 깨지고 당의 노선과 본질이 변질될 위험이 더 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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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부분 본문을 그대로 옮겼으나, 일부 자의적으로 변경하여 정리한 부분 있습니다. 본문과 전적으로 일치하지 않음을 밝힙니다. - sb

 

트로츠키주의를 표방하는 국제사회주의 경향과 제4인터내셔널 경향의 주도적 인물들이 1990년~1992년까지, 국제사회주의 경향의 계간 이론지의 지면을 통해 벌였던 논쟁.

토니 클리프, 만델의 논문이 소개되어있고, 논쟁의 대략적인 흐름을 잡을 수 있다.


「트로츠키에서 국가자본주의로」(크리스 하먼) : 소련에 대한 트로츠키의 태도의 변화, 그리고 중국 동유럽을 비롯해 소련 스탈린주의 관료들에 대한, 트로츠키의 입장을 계승하고자 했던 두 세력들의 상이한 견해. 그중 타락한 노동자국가론을 대표하는 만델의 입장은 곳곳에서 혼동이 발견되며, (1) 스탈린주의 관료들과 서구 자본가계급 중 전자를 더 진보적으로 보는 오류 (2) 28년 이후의 소련경제가 소비재보다 중공업분야에서 축적해온 것에 대해서 규명하지 못하는 오류를 범할 수 있다. 클리프는, 제국주의 시대의 자본주의에서 자본과 국가가 융합하고 이것이 전쟁과 군비경쟁으로 치닫게되는 원리에서 소련 중공업분야의 축적을 도출했으며, 이후 소련의 개방은 자본의 세계화와 맥을 같이 하며 소련이 세계 자본주의체제의 일부였다고 주장한다.


- 트로츠키는 초기 분석에서, 관료 문제는 노동자계급에 의해 평화적으로 해결될 수 있을 것이라 전망했지만, 이후 자신의 입장을 수정했으며, 정치혁명이 필요하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그는 관료는 여전히 계급이 아니라고 주장했다.


- 트로츠키는 40년에 이르러, 소련의 내부 모순이 지속된다면 부르주아 반혁명이 일어날 것이라고 전망했지만, 실제 스탈린 관료주의는 전쟁 이후 훨씬 더 강해졌다.


- 4인터내셔널 국제서기국의 주류경향은 러시아 블록을 역사적으로 진보적인 동력으로 보는 경향이 있고, 그 중 일부, 이를테면 아이작 도이처의 경우는 53년 베를린 봉기와 56년 헝가리 봉기에 대해서 부정적인 시각을 견지하고 있다.


- 관료화는 무엇보다도 대규모의 축적률을 낳았다. 그리고, 이러한 축적은 관료들이 소비한 “재화와 용역”의 축적이 아니라, 무엇보다도 철강, 시멘트, 전력, 석탄, 석유 등과 같은 중공업의 축적이었다. 소련의 경제학자인 바실리 셀류닌에 의하면, “소련 경제는 인간을 위해서라기보다는, 더욱더 경제 자신을 위해 움직이고 있다.“


- 자본주의에서 가치법칙은 관료적 전제와 필연적으로 대립하지 않는다. 관료적 전제와 가치법칙 사이의 모순은 사회가 가치법칙의 규정을 받기 때문에 일어난다.


- 1928년 이후, 급격한 변화드이 일거에 발생했다. (1) 노동조합의 독립성 폐지 (2) 실질임금의 30% 까지의 감소 (3) GPU(비밀경찰) (4) 관료와 노동자 사이의 임금격차 격심 (5) 토지집단화 (6) 노동수용소 규모 확대 (7) 생산재 생산을 위한 계획 목표는 기준을 상회하여 달성되었지만, 소비재 생산을 위한 목표는 간단히 무시되었다. 생산수단을 축적하기 위한 드라이브가 나머지 모든 것들을 규정하는 것.


- 제국주의 시대에, 공업들의 수뇌부들은 국가 관료들과 점차 밀접한 관계를 가지게 된다. 말하자면, 공업과 국가가 하나로 융합되는 현상이 나타나는 것이다. 이 융합 현상은 전면적인 제국주의 전쟁기에 가장 완전하게 발전된 모습을 나타낸다. 클리프는 전시경제가 자본주의의 한 종류로 존속되고 있다고 주장한다. 이러한 경쟁형태는 다름아닌, 서로 다른 국가들에 소속된 경쟁적 국가자본주의 지배계급들 사이의 군사적 경쟁이다. 군사적 패배의 위협은 거대한 국가자본주의 지배계급으로 하여금, 자국의 기업들에게 가치법칙을 부과하지 않을 수 없게 만든다.


- 클리프의 해석은, 1960년대 들어 세계 경제의 국제화 현상과 소련의 폐쇄된 경제가 서로 모순했다는 것을 설명해준다. 공업들은 이제 새로운 국제적 노동분업의 일부로 개편되어야만 생존할 수 있게 되었다. 소련은 세계체제의 일부이고, 따라서 축적 방법을 바꾸지 않으면 안되기 때문이다.


「사실의 검증을 이겨내지 못한 이론」(에르네스트 만델) : (1) 사적소유에 기반하지 않은 자본주의가 자본주의인가. 소련은 가치법칙의 지배가 아니라 세계 시장의 매개를 통해 간접적인 영향을 받았을 뿐이다. (2) 관료가 지배계급인가. 관료는 부르주아지도 수탈했다. 잉여를 통제해도 그것이 곧 지배계급을 뜻하지는 않는다. (3) 소련 사회의 이행기적 성격과 소련의 공업화에 대해서 진정으로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 (4) SWP가 국가자본주의로 규정하는 국가의 노동자투쟁을 방관하거나 기권하지 말아야 한다.


- 적어도 마르크스가 분석하고 정의한 의미에서 자본주의적 생산은 일반화된 상품생산인데, 소련은 그러하지않았다. 화폐 없이는 자본 축적도 있을 수 없다. 소련은 자본주의가 아니었으며, 공황도 자본주의의 공황 일반과 달랐다. 직접생산자로부터 잉여노동이 추출되는 것을 지적하는 것 만으로는, 소련에서의 자본주의 운동법칙의 존재를 입증할 수 없다. 마르크스에 따르면, 각 사회의 성격은 잉여노동에 있는 것이 아니다, 잉여노동이 추출되는 특수한 형태에 의해 규정된다.


- 소련에서 중요한 투자는 가치법칙을 통해 결정되지 않는다. 그것은 대부분 국가 수준에서 관료에 의해 결정된다.


- 소비에트 경제의 기능은, 가치법칙에 의해 지배되지 않는다 할지라도, 가치법칙의 영향으로부터 스스로를 완전히 벗어나게 할 수는 없다. 그것은 시장의 요소를 가지고 있는 탈자본주의적 경제이다.


- 오늘날 소비에트 경제가 고통을 받고 있는 것은 다름아닌 한편으로는 민주적 중앙계획의 결여, 다른 한편으로는 시장의 결여 때문이다.


- 군비경쟁을 다루면서, 마르크스주의의 경제학적 의미에서의 자본주의 국가들과의 경쟁에 대해 이야기할 수는 없는 것이다.


- 1927년 이후에 가속화된 소련의 공업화에 대한 SWP 동지들의 맹렬한 공격은 비합리적이며 심지어 무책임하기까지 하다.


- 어떤 사회일지라도, 지배계급이나 지배집단의 동기를 유발하는 것, 다시 말해 그들 자신의 소비를 증대시키려는 욕망만을 가지고 그 경제 전체의 동력이 모두 설명될 수는 없다.


- 동유럽에서도 상황은 마찬가지였다. 관료는 단지 노동자계급만을 초과착취한 것이 아니라, 부르주아지도 수탈했다. 역사적으로 관료는 자율적인 역할을 연출했다.


- 완전고용과 사적소유의 폐지라는 성과를 지켜야한다. 파시즘에 반대하는 독일 사회민주당을 방어하는 것은 생각할 수 있으면서도, 어째서 제국주의에 반대하는 소련을 방어하는 것은 생각조차 할 수 없다는 것인가.


- 제3제국 말기에, 나치의 군관료는 사회적으로 생산된 것의 분배를 사실상 통제했다. 그러나, 그들은 어떤 의미에서도 지배계급은 아니었는데, 왜냐하면 사회적 잉여의 대부분은 여전히 자본가계급이 전유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 관료가 지배계급이라면, 이들이 반혁명 없이 살금살금 퇴장할 수 있는가.


- 어느 지도적 인물들도 노동자들의 봉기에 반대하여 관료의 편에 선 예는 단 한번도 없었다. 우리는 소련의 성격에 관한 논쟁에 참여하기 시작한 이래 정치혁명을 지지해 왔고, 그 입장은 지금도 변함없다.


- 국가자본주의 이론은 이러한 모든 갈등(소련, 동유럽, 중국, 쿠바, 니카라과)과 관련하여 어떠한 종류의 지침도 가지고 있지 않다. 이러한 모든 갈등에서 그 나라들의 노동자들은 물론, 인민 대중들은 중립적 입장에 서있지 않았다. 그들은 스탈린과 그 후계자들에 대한 자신들의 증오심에도 불구하고 제국주의에 반대하는 편에 섰다.


「논리의 검증을 이기지 못하는 이론」(크리스 하먼) : (1) 동구권 경제는 규칙적으로 성장하지 않았다. (2) 과소생산에 의한 공황과 과잉생산에 의한 공황은 궁극적으로 다르지 않다. (3) 동구권 경제들은 평균성장률의 하락이라는 장기적 추세 때문에 수십년간 고통을 받아왔다. (4) 낭비가 소비에트 경제의 수준을 낮춘 주된 원인은 아니었으며, 낭비 그 자체는 무리한 축적의 부산물이다. (5) 실업이 존재했다. (6) 관료들은 사적자본주의 이후에도 여전히 존재했다. (7) 사유화라는 형식보다는 내용이 중요하다.


- 동구의 위기와 서구의 위기 사이의 상호작용을 나타내고 있는, 세계체제에 대한 분석을 제공하는 것이다. 불행이도 에르네스트 만델은 이 점에서 실패한다.


- 제국주의시대에 가치법칙은 거대 기업 내부 또는 국가의 군사적 부문 등에서는 작용하지 못하고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법칙은 대외적으로 볼 때는 그들에게 매우 중요한 규정력으로 작용하고 있다.


- 국가와 자본의 융합 현상은 1930년대와 1970년대 사이의 세계 자본주의 체제 전반에 걸친 추세였다.


- 파괴수단에 대한 소비수단의 예속, 과소생산의 위기 및 경제 부문들간의 불비례 현상, 원자재의 부족 등등, 영구군비경제의 모순을 낳는 과정을 서구 자본주의 국가들과 세계의 3분의 1을 차지하고 있는 ‘사회주의적’ 국가들에 동등하게 적용될 수 있다고 볼 수 있다.


- 국제적 투자의 시대가 개막되었고, 아르헨티나, 브라질, 스페인, 아일랜드, 남한, 이집트 등 개별 국가자본주의들의 세계 시장이 개막되었다. 그리고 기존의 서구 자본주의들의 국내 경제는 세계 노동분업의 변화에 따라 점차 재구조화되기 시작했다. 이러한 변화들 때문에 국가가 공황의 징후들을 억제하고 자본의 과잉축적을 중지시킬 수 있는 능력을 상실하기 시작하여, 과잉생산 공황이 유발되고, 급기야 1970년대 중반과 1980년대 초반에 일반화된 불황이 도래했고, 서구와 제3세계의 수많은 국가들은 낡은 케인즈주의 방식이나 또는 수입대체 발전 전략이 더 이상 유효할 수 없다는 사실에 갑작스럽게 직면하게 되었다.


- 헝가리와 폴란드에서는 공업의 최소한 80%가 국가가 지정한 자들의 수중에 있으며, 사유화된 나머지 20%의 대부분 역시 노멘클라투라의 배경을 가진 자들의 소유로 이전되고 있다. 군대, 경찰, 언론 매체 등에서 통제 위계는 예전의 그 인물들의 수중에 대부분 그대로 남아 있다.


- 사유화는 핵심이 아니다.


- 사회주의자들에게 가장 잘못된 대안은 낡은 방법을 고수하도록 희생할 것을 노동자들에게 요구하는 것이다. 진정한 사회주의자들이라면 관료 분파들 모두에 반대한다는 확고한 입장을 가지면서, 그 분파들 모두는 그들 자신의 위기를 극복하기 위해 노동자들의 희생을 요구할 뿐이라고 주장해야만 한다.


<중간결산>


1. 만델의 타락한 노동자국가론

(장) 소련을 이행기체제로 규정

(단) 관료들에 대해 애매모호한 태도를 취하거나, 아래로부터의 운동에 잘못된 태도를 취했던 것. 그러나, 이것이 4인터 국제서기국의 이론상의 취약점이나 전반적인 태도는 아니었다. 중국 북한 쿠바에 대해서도 기형적인 노동자 국가라는 시각을 견지하는 것.


2. 토니 클리프의 국가자본주의론

(장) 소련경제가 세계자본주의와 어떤 공통점이 있는지 규명했고, 동시에 국가자본주의가 자본주의의 세계화 시점에 어떻게 사적자본주의로 변모했는지 규명. 형식 보다는 내용이 중요하다는 측면.

(단) 반혁명이 10월혁명의 물질적 기반을 어떻게 파괴했는지에 대해서는 설명하지 않고, 그저 반혁명 이후에 소련경제가 세계자본주의와 어떤 공통점이 있는지만 밝혔다. 그렇다면, 세계혁명이 동시에 일어나지 않고서는 자본주의 가치법칙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는 방법은 없는가.


「가치법칙과 소련」(데렉 하울) : 1928년을 기점으로 스탈린의 반혁명이 성공하였고, 그 이후의 노동생산성의 증가는 사회주의를 위한 투쟁이라기 보다는 국가적 경쟁의 표현이었다. 축적은 축적을 위한 축적이었고, 당시의 생산은 노동자계급의 의지와는 무관했다. (1) 관료들은 경쟁을 통해 정치적 결정을 내린다. (2) 무기경쟁이 존재했다. (3) 임금이 존재했다. (4) 직장 이전의 자유가 있었다. (5) 국가자본주의적 축적 내부에는 축적률의 장기적인 저하 경향이 존재했다. (6) 이윤의 매커니즘이 소련에도 작동했다.

* 제국주의시대에 경쟁은 국민국가 사이에서 격렬해지는가.


- 60년 동안 이러한 시장 매커니즘은 소련 안에서 작동하지 않았다. 가치법칙이 소련에서는 발전되지 않는다는 결론을 내릴 수밖에 없다.


- 우리의 전통은 언제나 세계 경제를 국민 경제들의 단순한 총합이 아니라 하나의 독자적인 실체라고 강조해 왔다. 자본주의의 주된 동학은 경쟁적 축적이 자본 단위들에게 외적 강제법칙으로 강요된다는 것이다. 축적 경향은 심리적인 것이 아니라 자본주의의 중심적 과정의 표현이다.


- 제국주의시대에 가격은 이제 객관적으로 결정되는 양(量)이기를 멈추고, 의지와 의식을 가지고 가격을 정하는 사람들의 계산에 맡겨지는 문제가 되어 버린다. 가치법칙의 작용은 자본의 집적과 집중 때문에 변형될 뿐이다. 계획과 경쟁은 서로 반대되는 경향이 아니다.


- 경쟁은 ‘국민’경제의 영역 내에서는 최소한으로 줄어들지만 국민국가 사이에서는 무척 격렬해진다. (부하린)


- 토니 클리프는 만약 우리가 소련을 따로 떼어 내서 하나의 자본주의 모델과 비교한다면 국가자본주의론은 성립할 수 없다고 주장하였다.


- 우리가 소련에서 관료적 국가자본주의가 확립된 시기를 1928년으로 잡는 것은 그때부터 국제적 경쟁이 소련의 국내적 과정의 주요한 결정 요소가 되었기 때문이다. 1925년에 스탈린은 일국사회주의 문제를 둘러싼 투쟁에서 승리를 거두었다.


- 노동생산성을 증가시키는 것은 사회주의를 위한 투쟁의 측면이라기 보다는 국가적 경쟁의 표현이 되었다. 축적이 외부에서 강제된다는 특징이 축적의 형태를 결정했다. 이것은 축적을 위한 축적이었다. 노동자계급은 축적과정의 희생자였다. 이 시기의 러시아를 어떤 의미에서는 ‘노동자 국가’라고 묘사하는 것은 말이 안된다. 소련의 경제적 동학은 국내적으로나 국제적으로나 노동자계급의 필요에 따라 결정되지 않았기 때문이.


- 소련에서 가치법칙의 작용을 “소련에는 상품생산이 있는가?“ 하는 형태의 질문으로 제기하는 거은 인위적이며 정태적인 문제제기이다. 일단, 분석 수준을 국제적 경쟁의 수준으로 끌어올리면 소련의 재화들은 상품의 사회적 역할을 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 국가자본주의에서는 관료가 인격화된 자본이다. 관료의 정치적 결정들은 비록 시장경쟁이라는 제한된 의미의 경제적 경쟁은 아니라 할지라도 경쟁에 의해 결정된다.


- 소련에 가해진 외적인 무기경쟁 압력이 노동자 국가에게도 마찬가지로 작용한다는 주장은 스탈린의 반혁명을 무시하는 것이다.


- 노동의 국제적 분업체계로부터의 일정한 괴리는 더욱 고립된 경제들에게는 비용의 증대를 가져온다. 그들은 서방에 문호를 개방하는 것 이외에는 선택의 여지가 없다고 마음을 굳혔다.


「궁지에 몰린 도식적 교조주의」(에르네스트 만델) : (1) 소련의 해체는 부르주아 계급에 대한 해체이다. (2) 제국주의시대의 특징은 국가독점주의적 트러스트가 아니라 다국적기업의 지배를 받는다는 것이다. (3) 관료들은 가치법칙에 따른 동기부여가 아니라 관료로서의 동기부여를 받았을 뿐이다. (4) 평균이윤율의 저하 경향은 자본의 과잉공급 때문이 아니라, 자본의 유기적 구성이 고도화되는 결과 때문이다. (5) 관료에 대한 기대, 노동자국가주의 등은 중상모략에 불과하다. (6) 사유화 반대 투쟁은 형식을 중요하게 생각해서가 아니라 대중의 생활수준 하락을 막아야 한다는 점에서 중요하다. (7) 전쟁에 대한 태도 - 2차 세계대전은 다른 특성의 전쟁들이 한데 섞여 있었으며, 우리가 방어해야 하는 인민의 봉기들이 존재했다. 이것을 방관하는 것은 옳지 못한 태도이다. (8) 제3세계 국가에 대한 태도 - 국가의 계급적 내용을 그 정치적 지도의 성격과 혼동해서는 안된다. (9) 국가자본주의론에 대한 입장차이를 확대시키지 말아야 한다.

* <제국주의론> 제국주의시대의 특징으로 묘사된 내용 참고 / 동유럽의 변화들 참고 / <미국의 세계제패전략>


- 만일 자본주의의 부활이라는 결과가 나타난다면, 그것은 세계 제국주의의 중대한 승리를 의미하게 되리라는 것이다.


- 기형화된 그리고 타락한 노동자 국가들의 관료는 자본주의의 부활에 저항할 능력이 없다. 실제로 관료의 모든 분파들은 자본가로서나 또는 재구성된 자본주의 체제의 국가기구에서 자신들의 새로운 자리를 차지할 채비에 나서고 있다.


- 우리의 입장은 이 국가들에서 노동자계급과 소규모 소수파 사회주의자들이 이중의 투쟁을 수행해야만 한다는 것이다. 구 스탈린주의 정당과 신 스탈린주의 정당의 분파들을 설득하여 아군으로 끌어들이는 것이 가능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문제에 대한 진실한 정치적 처방일 수 없다. 대규모의 독립적인 노동조합들과 새로운 노동자 정당들을 건설해야만 한다.


- 동독의 서독으로의 통합은 결국 이러한 획득물들에 격렬한 공격을 가하는 것으로 결말지어졌다. - 약, 40%에 달하는 실업률, 무료 탁아소의 폐지, 강제로 가정에 돌려보내진 여성들, 치솟는 지대와 물가


- 하먼의 전반적인 논거는 구소련의 위기를 자본주의적 공황의 일종으로 볼 수 있다는 것이다. 이 논거에는 현대 자본주의의 특징, 그리고 특히 자본과 국가의 통합에 관한 매우 매혹적인 일련의 명제들이 포함되어 있다. 어느 누구도 제국주의의 기능을 세권의 <자본론>에서 정초된 자본주의 생산양식의 일반법칙들로부터 분리해 말할 수는 없을 것이다.


- 하먼은 부하린의 정식이 제2차세계대전이 끝난 이후의, 즉 지난 반세기 동안의 자본주의의 현실과는 전혀 들어맞지 않는다는 점에 유념하지 못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오늘날 자본의 주된 조직 형태는 국가독점주의적 트러스트가 아니라, 모든 국가들로부터 더욱더 독립적인 다국적 기업이다. 오늘날 국제자본주의의 네가지 주된 특징, 즉 다국적기업, 제3세계의 끊이지 않는 과잉착취, 제3의 기술혁명 동안 배가된 기술 혁신 속도, 그리고 영구적 인플레이션 등은 국가자본주의론으로는 설명할 수 없는 것들이다.


- 우리는 텅 빈 상점은 판매되지 않은 재화로 가득 찬 상점의 변종으로 결코 설명될 수 없으며, 사용가치의 과소생산을 상품의 과잉생산의 변종으로 설명할 수 없다는 말로 우리의 주장을 요약한 바 있었다.


- 소비에트 관료들이 자본가들과는 다르게 행동하고 다르게 동기부여받으며 다른 제도적 틀 속에서 움직인다는 것, 그리고 바로 이 때문에 지난 60여년 동안 구소련에서 산출이 수요에 적응하지 못했다는 것은 사실이 아니던가? 기본적 배분은 미리 결정된 우선순위에 따라 국가, 즉 최고위층 관료가 사전적으로 배분하는 형태를 띠고 있었다. 이러한 우선순위는 이윤이라는 동기에서가 아니라, 자신들의 권력과 특권을 유지하고 강화하려는 관료의 욕구에 따라 결정된다. 어째서 그들은 일본이나 서독, 프랑스, 이탈리아는 물론이고, 브라질이나 남한에서조차도 부분적으로 이루었던 ‘내포적 공업화’에 성공할 수 없었는가? 자본가들과는 대조적으로 소비에트 관료들은 효율적인 산출이나 성공적인 경쟁에 어떤 관심도 없었다는 것이 올바른 해답은 아닐까? 개별 관료들은 생산수단의 사적 소유자가 아니기 때문에, 그들은 무엇보다도 자신의 관료로서의 지위의 안정성 여부에 연연해 한다.


- 사회주의적 계획과는 대조적으로, 관료적 계획은 시장이나 가치법칙으로 교정되지 못하는, 불투명성이라는 요소를 간직한 채 수립된다. 관료들은 자우너의 사전적 배분 경제에 기반하여 움직인다.


- 구소련과 동유럽 여러 나라들의 사회적 정치적 투쟁에서 핵심 사안인 사유화 문제는 이런저런 시위에 참여할 것인가 말 것인가 하는 문제보다 정치적 정향을 판단하는 데 몇 천 배 더 결정적인 문제이다.


- 우리는 그들의 이데올로기가 무엇이든 간에, 또 일부 관료가 그들을 지지하는지 여부에 상관없이, 사유화에 반대하는 노동자들 편에 무조건적으로 선다.


- 동유럽에서 관료적 독재의 붕괴, 그리고 구소련에서 체제적 위기의 심화 등은 동유럽에서의 거대한 대중 동원 및 구소련에서의 대중 동원이 상승되는 직접적 여파로 발생할 것이었다. 그러한 여타로부터 정치적 변화의 동학, 즉 혁명 직전의 동학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이러한 동학은 다음과 같은 서로 다른 세 가지 결과를 낳을 수 있다. 노동자계급의 패배를 의미하게 될 관료적 독재의 재확립, 노동자계급의 훨씬 중대한 패배를 의미하게 될 자본주의의 부활, 노동자계급의 승리를 의미하게 될 정치혁명의 승리.


- 자본주의의 부활은 노동자 계급의 저항을 분쇄해야만 가능할 것이라고 말했을 뿐이었다. 그 부활이 어떤 형태를 취하게 될지는 노동자계급의 저항 수준과 정치적 의식에 전적으로 의존할 것이다.


- 자신들을 노예화하려는 일본 제국주의에 대항하여 중국 인민들이 수행했던 전쟁은 제국주의간의 전쟁이 아니었다. 그 전쟁은 모든 사회주의자들이 지지해야만 했던 정의의 전쟁이었다. 나치 독일의 노예화와 대량학살에 대항하여 소비에트 인민들이 수행했던 전쟁에 대해서도, 우리는 제국주의간의 전쟁이 아니었다고 말해야 한다.


- (레닌) 순수한 사회혁명을 기다리는 어느 누구도 살아생전에는 그것을 구경하지 못할 것이다. 그들은 진실한 혁명이 무엇인지 전혀 이해하지 못하는, 단지 말뿐인 혁명가들인 것이다.


- 캘리니코스는 국가의 계급적 내용을 그 정치적 지도의 성격과 혼동했다.


「파산한 이론을 은폐할 수 없는 수사학」(알렉스 캘리니코스) : (1) 소련에서 35년 넘게 거대한 생산력의 발전을 이루었던 것은 가치법칙의 작용 외에는 설명할 방법이 없으며, 이것은 제국주의시대의 군비경제에 대한 설명을 밑바탕으로 한다. (2) 만델은 그의 표현과는 달리 사유화의 형식 자체에 의존하고 있으며, 사회주의는 노동자계급 자신의 해방이라는 과제로부터 벗어나고 있다.


- 20세기 벽두에 레닌, 룰셈부르크, 힐퍼딩, 부하린 등이 이룩한 마르크스주의 경제 이론의 결정적인 반전은 마르크스가 탐구한 주요 경향들 중의 하나인 자본의 집적과 집중의 효과들 - 자본의 규모 증대, 은행자본과 산업자본의 융합 경향, 사적 자본과 국가의 통합 - 을 고려하기 위해 마르크스의 분석을 정교화하는 것을 자신의 목적으로 했다.


- 스탈린주의 사회를 자본주의도 사회주의도 아닌 ‘관료적 집산주의’의 형태로 보는 샤흐트만주의적 분석의 지지자 로버트 브레너가 전개한 바 있다. 그러나 소련은 전자본주의 사회들에 특징적인 기술과 산출의 상대적으로 완만한 성장이 아니라, 만델이 과장할 정도로 강조하듯이, 35년 넘게 생산력의 거대한 발전을 경험했다. 이것을 주로 탐욕이 동기가 된 노멘클라투라의 자의적인 우선순위 결정으로 설명하는 것은 아무런 설명을 하지 않는 것과 거의 마찬가지다.


- 국가자본주의 이론은 우리들로 하여금 1930, 40년대 부르주아 세계의 일반적 국가화를 군사화된 국가자본주의의 출현을 중심으로 하는 더욱 장기적인 과정의 정점으로 이해할 수 있게 한다.


- 1930년대의 대공황은 높은 자본의 유기적 구성과 낮은 이윤율의 결과였다. 그러나 대공황은 세계 시장의 붕괴를 재촉했고, 그럼으로써 국가자본주의로 향한 경향을 강화했는데, 그 극단적인 경우가 처음 두 5개년계획 기간(1928~1937) 동안의 스탈린주의 체제의 성립이다. 그것은 서구에서는 전시에만 완전하게 실현된 양상들이 반세기 이상 지속되는 과정이었다. 1980년대에 이러한 형태의 자본주의는 자본의 점증하는 국제화 때문에 시대에 뒤떨어진 것이 되어버렸다.


- 제3세계 혁명들의 성격은 만델이 사용하고 있는 스콜라적 논리보다는 그 혁명들 속에 작동하고 있는 실제 사회적 과정에 의존할 것이기 때문이다.


- 그것은 어떻게 하여 자본주의보다 질적으로 우수하다고 상정된 사회가 그들의 서구 경쟁국들의 성취와 비굑하여 생산력을 발전시키는 데 형편없이 실패했으며, 이들 사회가 그들의 이익을 위해 조직되었다고 상정되는 노동자계급 자신들로부터 결정적으로 거부되었는지 설명할 수 없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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