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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장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 ㅣ 문학과지성 소설 명작선 5
조세희 지음 / 문학과지성사 / 1999년 11월
평점 :
절판
원제 보다는 '난쏘공' 이라는 줄임말로 더 익숙한 책. 70년대를 대표하는 노동문학으로서, 당시 대학가에서는 신입생들의 필독서로, 이제는 수능 필독서가 되었다는 그 책.
조세희씨의 <난장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 무척이나 늦게 만났습니다.
" 나는 어머니에게 내가 하는 일을 설명하지 않았다. 나는 승용차 시트 뒤에 달려 있는 트렁크에 구멍을 뚫었다. 드릴로 구멍을 뚫은 다음 십자나사못을 틀어넣는 것이 나의 일이었다. 나는 권총 모양의 두가지 공구를 사용했다. 하나로는 구멍을 뚫고 다른 하나로는 나사못과 고무 바킹을 넣었다. 선참 공원들은 나를 <쌍권총의 사나이>라고 불렀다.
일을 하면서 처음으로 기계에 의한 속박을 받았다. 난장이의 아들에게 이것은 아주 놀라운 체험이었다. 콘베어를 이용한 연속 작업이 나를 몰아붙였다. 기계가 작업 속도를 결정했다. 나는 트렁크 안에 상체를 밀어놓고 두 가지 작업을 동시에 해야 했다. 트렁크의 철판에 드릴을 대면, 나의 작은 공구는 팡팡 소리를 내며 튀었다. 구멍을 하나 뚫을 때 마다 나의 상체가 파르르 떨었다. 나는 나사못과 고무 바킹을 한입 가득 물고 있했다. 구멍을 뚫기가 무섭게 일에 문 부품을 꺼내 박았다.
날마다 점심 시간을 알리는 버저 소리가 나를 구해 주고는 했다. 오전 작업이 조금만 더 계속되었다면 나는 쓰러졌을 것이다. <쌍권총의 사나이>는 점심 식사를 제대로 할 수 없었다. 혓바늘이 빨갛게 돋고, 입에서는 고무 냄새와 쇠 냄새가 났다. "
인용한 단락은, 극중 주인공격인 난장이의 첫째 아들 영수의 독백입니다.
<난쏘공>을 이미 일독하신 분들, 그리고 혹 제가 인용한 단락을 통해 <난쏘공>을 처음 접하신 분들께 한가지 물어볼께요.
" 영수의 심정을 가장 극적으로 표현해주는 문장은 무엇이라고 생각하세요? "
물론, 모범답안 같은건 애초에 없습니다. 그저 제 생각과 여러분의 생각을 좀 더 깊이 살펴보고싶을 따름이니까요.
전 많은 분들이 '오전 작업이 조금만 더 계속되었다면 나는 쓰러졌을 것이다.' 를 지목하셨으리라 미루어 짐작해봅니다. 저는 '일을 하면서 처음으로 기계에 의한 속박을 받았다.' 를 지목했습니다.
...
엄밀히 말해, 무자르듯 나눌 수는 없지만,
전자(前者)를 선택하신 분들은 '분배' 라는 관점, 후자(後者)를 선택하신 분들은 '소외' 라는 관점이라고 할 수 있을 것 같아요.
'분배'는, 삶의 물질적 조건에 대한 구체적인 표현입니다.
영수라는 노동자가 곧 쓰러질 것 같은 몸을 이끌고 있는 곳은, 휴일도 없이 잔업이니 철야니 하는 장시간의 고된 노동과 볼품없는 저임금, 먼지와 기름때로 알려진 열악하고 더러운 작업장이죠.
'소외'는, 삶의 정신적 황폐입니다.
잔업 철야로 24시간 쉬지않고 돌아가는 기계, 하루가 멀다하고 새로 들어오는 개량된 기계. 일의 수고를 덜기 위해 만든 기계일진데, 되려 노동자들은 기계에 매달려가는 듯한 느낌과 왠지 모를 불안함을 느끼는거죠.
앞서, '대부분이 전자를 선택하셨을 것이다' 라고 감히 추측한 것은,
많은 분들이 '부의 분배' 가 노동문제의 전부인 양 생각하는 경향이 있기 때문입니다.
사실, 후자인 '소외' 의 문제 역시 굉장히 중요하거든요. 오히려, '소외' 를 빼고는, 과거든 현재든, 자본주의 사회의 임금노동문제를 온전히 이해하기 힘듭니다. 심지어, 자칫 오해를 낳을 수도 있구요.
오늘날은, 한층을 둘로 나눈 닭장과 같은 공장도 없고, 잠 안오는 약을 먹어가는 소녀노동자도 없고, 철야를 하는 노동자들의 잠을 깨우기 위해 옷핀을 들고다니는 작업장관리자도 없다는 항변이죠.
<난쏘공>이 고발하는 70년대 노동현실이, 30년이 지난 오늘, "그땐 그랬지" 라는 하나의 굳어진 과거로 치부되어, 스테디셀러로, 수능필독서로 박제화되는 겁니다.
하지만, '소외' 라는 관점으로 바라볼 때,
난장이는 오늘도 작은 공을 쏘아올려야 합니다.
오늘날, 울산이며, 광주, 아산에 있는 세계 유수 기업의 자동차 생산라인에서 일을 하는 난장이 첫째아들 영수는, '시래기와 꽁치를 넣어 끓인 국에 보리가 더 많은 푸석한 밥, 허연 김치 몇 조각의 점심' 을 먹지는 않았더라도, '오전 작업이 조금만 더 계속되었다면 나는 쓰러졌을 것이다.' 라고 말하지는 않을지라도,
여전히 기계에 속박받고 있으니까요.
여전히 돌아가는 라인에 몸을 맡겨야하고, 여전히 신기술 도입에 일자리 걱정을 해야하는 영수입니다. 그에게 일이란, 무언가를 만드는 것이 아닌, 먹고 살기위해 라인에 매달리는 것이죠. 여전히 기계가 그의 일과, 삶을 결정합니다.
많은 사람들이 절대척도로 생각하는 '분배' 란, 즉 물질적 조건이란, 기실 '소외' 의 일부분일 따름입니다. 결국, 정당하지 못한 분배란, 소외의 '결과'라는거죠.
기계를 소유하지 못한 영수, 기계를 통제하지 못하고 기계에 매달려가는 영수, 소외된 난장이 첫째아들 영수의 몫이야,
응당 기계의 다음이 아니겠습니까.
'분배' 라는 척도는,
<노동의 종말> 이 예견하듯 점점 정도를 더해가는 소외 속에서, 점점 더 척도로서의 자격을 잃어가고 있는 것은 아닌지.
<난쏘공>에서 그저 70년대 분배의 문제를 회상하는 것으로 그치는건 참 아쉽고, 무기력한 일일겁니다.